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2 - 유형원과 조선 후기
제임스 버나드 팔레 지음, 김범 옮김 / 산처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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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관제개혁


"국왕의 정통성을 의심치 않았음에도 유교적 경세학자로서 유형원은 국왕의 전제주의와 독재의 가능성을 막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많은 방안을 고안했다. 이런 쟁점과 관련해서 유형원은 주로 세 가지 분야를 다뤘다. 첫째는 국왕이 자신과 종친과 총신에게 쓰는 지출과 궁극적으로는 국가 재정, 특히 호조와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내수사의 지출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혼례·장례·연회를 치르고 정치적 충성의 포상을 받을 만한 공신을 임명하는 등의 국왕 자신과 관련된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결정권도 포함됐다." "두 번째 영역은 일정한 유교적 가치를 존중하도록 설득하는 상징적 방법으로 국왕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 관심은 관료체제를 운영하고 매일의 국무를 처리하는 권한의 분배와 관련된 문제였다. 후자는 매일의 국무를 처리하는 데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상정된 국왕과 그의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신하 사이에 적절한 권력의 분배와 관련되어 있었다."(11-2)


"유형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의식 중 하나는 국왕이 적전籍田을 의례적으로 경작하는 고대의 전통이었는데, 그것은 중국과 유학에서 중농주의적 전통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굶주림에 직면하면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통은 부정과 이단적인 신앙을 불러왔다.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이 토지에 정착해서 농업에 시간을 투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이 발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농업을 버리는 이유는 번잡한 농법의 변화와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 그리고 세리·서리·채권자들의 약탈로 고통받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황제가 농업 생산을 증가시키는 데 관심을 쏟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통치자의 의례적인 경작은 농민들에 대한 관심과 양육을 통해 농업 생산을 유지하고 관원들의 불법을 근절하는 데 헌신하겠다는 것을 상징화하려는 의도였다."(24-5)


"유형원은 중앙 각사의 이서와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제안 중 하나는 모든 이서에게 녹봉을 줌으로써 조선의 관료제도에 고착된 부패의 주요한 원인 하나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제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이서의 조직을 두 등급으로 나누고 시험을 거쳐 서리가 녹사로 승진할 수 있도록 했다. 역설적이지만, 관료제도가 시행된 조선시대보다 귀족제도가 우세했던 고려시대에 이서는 정규 관원으로 좀더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었고, 16세기 초반까지도 녹사는 대신의 자제 및 급제자와 동등한 지위로 간주됐으며, 6품까지 오른 뒤에는 과거를 치르거나 정규 관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직능의 숙련도와 교육 수준에 따라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쪽에 가까웠다. 그는 정규 관원과 이서의 근본적인 구분을 받아들였지만 이서에게만 해당되는 취재시험을 개선하고 그들 자체의 승진체계를 만들려고 했다."(88-9)


"유형원은 중국의 역사와 최근 조선 사대부들의 조언에서 도덕의 교육과 실천은 등용의 기준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관원의 행동에서 항상 시험되고 관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과거로는 개인의 충실한 덕행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선발과 승진은 모두 관찰과 천거로 전환되어야 했다. 유형원은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관료제도에 모든 사람이 서로 알고 어떤 사람이 믿을 만한지 보장할 수 있는 향촌공동체의 특징(즉 주대 봉건제도의 기초)을 접목시킴으로써 그런 목표를 이루려고 했다. 그는 모든 관원에게 천거제도를 확대하고 후보자에게 어떤 결함이 발견되면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그 제도를 강화하자는 송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천거는 이조와 병조의 업무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더라도, 보충했다. 그 제도의 정점은 정호가 구상한 연영원筵英院이었는데, 그것은 촉망되는 후보자를 수도에 모아 조언을 듣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일종의 두뇌집단이었다."(127)


"관원을 장기 근속시키면 빠르고 잦은 이직으로 야기된 부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유형원은 16세기 후반 관원을 다른 관직으로 옮기기 전에 현재의 직책에서 충분히 근무케 해야 한다면서 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 매우 공감했다." "16세기 후반 이이는 국왕에게 (칭병稱病을 핑계로 전보를 신청하는) 관행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형원은 유능한 관원을 다른 관직에서 필요로 할 때 이동시키는 당시 조선의 방식은 용인했지만, 현재의 임기를 마친 뒤에만 허용했다." "이이는 이런 상황이 모두 일반 관원의 잘못은 아니며, 그들이 공무는 물론 사적으로도 고대 성인의 높은 도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나친 요구를 제기한 삼사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관원이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이 불법행위라는 탄핵을 쏟아냈는데, 그 결과 많은 관원들은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자리를 비우거나 그밖의 구실을 만들어 방어할 수밖에 없게 됐다."(113-5)


"지방 행정의 네 가지 문제와 관련해서 유형원은 면적과 인구에 따라 각 행정 단위와 진관의 서열을 좀더 일정하게 재배열함으로써 면적과 조세 분배의 불일치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관찰사를 가족과 함께 비교적 오래 재직케 해서 지방의 사무에 익숙해져 통제력을 얻을 수 있게 함으로써 좀더 강력한 지방 행정을 구축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관찰사와 병사·수사의 이서를 감축해 비용을 줄이려고 했다. 그는 녹봉을 받지 못하는 이서와 조예의 만연한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국가에서 기본적 녹봉을 지급하고, 공비公婢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서 국역을 면제함으로써 관청의 착취는 물론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시도했다. 가장 복잡한 문제는 중앙의 관원 및 그 부하와 향촌 사회 사이의 권력의 분배였다." "유형원은 (세금과 요역 징발, 구휼과 환자 등을) 수령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데서 폐단이 발생했다고 결론짓고 권력을 수령에서 향촌 사회로 옮긴 중국의 제도를 선호했다."(166)


"샤오콩취엔蕭公權은 청에서 향약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열거했는데, 그 대부분은 조선의 상황에도 들어맞았다. 전반적으로 생산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이타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무식한 농민은 유교의 교훈보다 비유교적 종교운동과 도적활동의 호소에 훨씬 더 호응했으며, 향정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권력을 휘둘렀고 향약은 보갑과 단련團練의 임무를 맡으면서 지역의 경찰 및 민병과 동일하게 됐다. 조선에서 향약은 표면적으로는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렸기 때문에 시행이 중단됐지만, 훨씬 중요한 이유는 처벌의 권한을 수령에게서 향촌으로 이관하면서, 특히 유학 교육을 받은 양반의 이상인 위계적 사회 구조를 방어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엄격한 통제와 규율을 시행하는 데 불신이 컸기 때문이다." "향약의 옹호자들은 구속받지 않는 개인 생활의 가능성을 거의 모두 제거하고 통제된 사회조직제도를 채택함으로써 사회적 조화와 정의를 이루려고 했다."(205-6)


6부 재정개혁과 경제


"유형원은 정규 세입으로 지불해야 하는 정규 지출에 논의를 국한하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대동법이 지출을 계산해서 세입을 확정한다고 비판했는데, 세입에 따라 지출을 제한하는 고전적 방식을 사용하면 당시 정부 재정의 더욱 심각한 문제인 추가적이고 자의적이며 잡다한 세금을 제한 없이 부과하는 관행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그는 균형 잡힌 예산에 대해서 논의했던 것이다. 그는 국가의 부채가 발생할 가능성을 막고 재정의 부족을 개인 단체에서 충당하는 데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산 부족을 막기 위해서 미리 지출을 계산해 예상된 세입에 맞추어 그것을 줄이려고 했으며, 긴급 상황이나 예측하지 못한 변화, 또는 계산 착오로 생긴 부족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낮게 잡은 예상 세입에 따른 재정 부족을 국가 부채를 야기시키지 않고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추가 과세를 그때그때 허용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유형원이 극복하려고 노력한 관행이었다."(315)


"유형원은 (공물의) 시장 구매와 관련해서 판매자와 무비주인貿備主人이 서로 협상해 가격을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정부가 당시의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책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유형원은 상인들이 대동법을 반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정부에 물건을 판매해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수도로 상품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고 암시했다." "대동법이 시장의 발전에 주요한 자극이 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유형원은 생산자들이 경쟁을 통해 비용이나 가격을 낮추거나 비효율적인 생산자를 도태시키는 자유시장의 이점을 옹호하는 경제 이론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유형원의 경제이론은 객관적인 경제적 영향력을 가치 평가를 배제한 채 분석하기보다는 도덕적 기준에 바탕했기 때문에, 상인과 생산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해서 정부 관원들의 이익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웠다."(324-5)


"유형원은 동전은 주의 정전제와 합치된다고 언급했는데, 그것은 동전이 가장 중요한 농업 생산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농민은 생계를 벌 수 있는 수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상인은 사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받음으로써 "사민은 각각 자기에게 합당한 위치를 얻었다[四民各得其所]." 동전은 상품의 가격을 측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으며, 상인은 동전을 유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상인은 동전이 유통되는 데 충분한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활발히 활동해야 했기 때문에 일반 경제의 번영에 필수적이었으며, 동전의 유통은 가뭄과 물자가 부족할 때 백성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데 필요했다. 유형원은 위기 상황이 닥치면 국가에서는 요역을 동원해 동전을 좀더 주조하면 됐고 동전의 공급은 기후조건에 의존하는 곡물처럼 변동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전은 미곡이나 면포보다 유용한 교환수단이라고 지적했다."(396)


"시장거래의 확대는 동전의 수요를 자극했으며, 국가는 시장에 동전을 공급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유형원이 세상을 떠난 5년 뒤인) 1678년(숙종 4) 숙종이 동전을 주조하기로 결정하자 동전 공급을 통제하는 문제가 대두했다. 숙종은 수도에서만 주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지방으로 동전을 운반하는 비용이 많이 들 것을 감안해 지방에서도 주전하도록 허락했는데, 그 결과 동전 공급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약화됐다. 지방 관원들은 자신들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동전을 주조하려고 했으며, 동전 주조세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 품질이 떨어지는 주화를 주조했다. 이런 변질된 동전은 백성들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그 가치를 하락시킬 뿐이었다." "숙종은 동전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서 동전의 공급을 늘리려고 했지만, 동전의 가치가 저하된 결과 동전 공급을 줄이고 주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정책에서 심각한 모순이었다."(456-7)


"자연적이며 농업적인 경제의 단순성을 선호하는 견고한 보수주의자들은 동전의 도입을 언제나 반대했지만, 이제는 가격·교환 가치·이율의 변동에 반대하는 새로운 보수적인 견해가 나타났다. 보수적인 비판자들은 정부의 미숙한 행정으로 가격을 충분히 보고하고 조사하지 못했으며, 국가가 보유한 동전의 분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지역적으로 동전을 고르게 배급하지 못한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그들은 통화관리의 문제를 동전 자체가 해악을 초래한다는 단순하고 도덕적인 개념으로 축소시켰다. 그러므로 1720년대에 나타난 동전에 대한 부정론은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었으며, 단순히 유교적 근본주의자의 몽매한 생각이라기보다는 '근대적' 경향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러나 1720년대 후반 동전 사용의 증가와 시장의 점진적인 확대는 동전의 부족과 일용품 가격의 하락을 가져왔는데, 관원들은 그런 변화를 동전이 도입된 이후 사실상 뒤집을 수 없는 흐름으로 보기 시작했다."(469-70)


"1731년 영조는 마침내 동전의 유통과 추가적인 주전을 승인했지만, 이는 왕조의 후반을 휩쓴 잦은 가뭄과 국가의 재정 위기 때문이었으며 설득력 있는 주장의 가치에 동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울러 1726년에 시작된 논쟁에서 많은 신하들은 고액전과 지폐, 유형원의 단순한 '소액전'에 대한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에서 이율의 제한에 관련된 진지한 주장을 제기했지만, 영조는 동전 문제에서 새롭고 진보적인 해결책을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 지폐나 어음, 또는 은행을 도입하는 발전은 더이상 없었다. 1867년(고종 4)까지는 고액전은 시도되지 않았으며, 그것은 가치가 금방 떨어지고 상품 가격의 팽창을 야기했기 때문에 즉시 퇴출됐다. 그러나 그 까닭은 대원군이 주로 세입을 올리는 데 치중하고 동전 공급을 제한할 필요성에 무지했기 때문이었다."(509-11)


"18세기 말엽 국가는 급격한 경제발전을 향한 길을 주도하려고 나아가지 않으면서 공인된 독점과 사상 사이에서 심판의 기능에 만족했다." "사상과 도고, 공장은 조선 전기의 공인된 생산과 상업의 좁은 구조를 느슨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자본가계층은 매우 제한된 규모였고, 대부분의 생산이 소규모의 수공업에 국한됐기 때문에 산업적 무산계급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는 경제의 확대를 주도할 능력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국가는 동전을 좀더 주조하는 데 동의했지만 소액전에만 국한됐고, 채광 활동을 제한하고 국내 교통을 개선하지 않았으며, 주로 이전의 공물을 구입하려는 목적에서 일정한 독점을 유지했으며, 중국과 조공관계로 좁게 국한되고 일본과 매우 제한된 대외무역을 유지했다. 외국의 무역상과 선교사들이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조선의 해안에 나타났을 때 조선 관원들은 그들이 국가를 멸망시키는 전조라고 간주했다."(563-4)


맺음말


"조선 후기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그 사회의 근본적인 양상의 일부를 잘못 이해했는데, 조선이 스스로 변화와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다는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학문의 노력은 비농업적 상업 분야의 성장, 노비제도의 축소, 조세제도의 전환 같은 일부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입증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진보를 입증하려는 열망은 농업의 지배와 양반 권력의 유지, 지식계층의 사고에 준 유교적 경세론의 영향에서는 관심을 거두었다. 이 책이 밝혔듯이 유교적 경세사상은 정책에 직접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도덕성을 강조한 그 논리는 국가가 인간의 약점, 부패, 부도덕으로 약화됐을 때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상업경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상인과 장인은 여전히 소수였으며, 교육과 고위 관직을 지배하고 부와 토지, 농업 생산의 주요한 원천을 장악한 양반가문의 지배에 도전하기에 그들은 너무 약했다."(5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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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1 - 유형원과 조선 후기
제임스 버나드 팔레 지음, 김범 옮김 / 산처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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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유형원의 작업은 유교적 학자와 관원들이 신성시한 중국 고대의 전통을 바탕으로 제도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근본적 원리를 수립하는 것이었다."(14)


1부 조선 전기 : 1392년(태조 1)~1650년(효종 1)


"조선 전기 제도들의 기본 구조는 15세기 전반에 형성됐지만 격동하는 왕조 교체기의 급진적인 성리학자들의 생각과 완전히 부합되지는 않았다. 불교계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고려의 일부 양반과 향리들의 정치적·경제적 자치를 약화시키며, 군사적·경제적으로 왕권과 국가 관료제를 강화하고 관리 등용의 주요 수단으로 과거를 시행하며, 성리학의 경전들을 교육과 과거의 기본 과목으로 확립하려는 성리학자들의 열망은 이루어졌다. 국가에서 공인한 장인들만 수공업에 종사케 함으로써 산업 대신 농업 생산에 집중하려는 구상을 달성했다. 국가가 공인한 시전을 도성에 설치하고 지방에서는 정기적인 시장과 보부상만 허용한 결과 상업도 계속 규제됐다. 여러 국왕들은 동전과 지폐를 도입해 지나치게 보수적인 통화체제를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정책은 궁극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수적 성리학자들은 그런 최종적 결과를 환영했다."(87-8)


2부 사회개혁 : 양반과 노비


"『반계수록』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조선왕조의 본질적 구조에서 흘러나왔다. 그 본질적 구조는 일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관료 정부조직과 세습적 신분의 강인한 전통이 혼합된 것이었고, 특수하게는 상층의 반半귀족적 지배 신분과 하층의 세습적 노비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도가 시행되고 다른 한편에는 세습적 귀족과 노비가 존재하는 사회·정치조직의 원리는 근본적으로 달랐으며 자주 충돌했다. 세습 귀족들은 가족관계, 개인적 인맥, 세습된 특권과 신분을 중시했지만, 관료 국가는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넓히고 객관적으로 인재를 선발·평가하며, 양반 관원들을 제외하고는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유형원은 고대의 모범을 숭배했지만 그것을 재건하려는 희망은 품지 않았으며, 돌이킬 수 없이 고정된 당시 조선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에 그 원칙들을 적용하는 데 만족했다."(169-70)


"17세기의 양반은 당唐의 귀족과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양반은 권력과 부를 계산할 때 관직과 토지 소유뿐만 아니라 노비 소유까지 합산했다는 점이었다. 17세기뿐만 아니라 여러 세기 전에도(아마 10세기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한국은 전체 인구의 30퍼센트 이상과 수도 인구의 3분의 2 정도가 노비였던 전형적인 노비제 사회였으며, 그 대부분은 양반 주인의 지배를 받았다. 당 사회에도 노비의 보증인과 하층신분의 서열이 있었지만, 노비제 사회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10세기 세습적 노비제도의 출현과 노비 인구의 팽창은 고려가 끝날 때까지 불교나 유교에 의해 저지되지 않았으며, 15세기에 성리학이 도입되어 불교를 압도했을 때도, 노비제도나 노비제 사회에 대해서는 어떤 심각한 비판도 제기되지 않았다." "정부에서 노비 해방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던 유일한 시기는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사이에 군사로 징발할 인력의 수요가 급증한 기간이었다."(174)


"조선의 지배세력과 관련된 유형원의 주된 관심은 세습적 양반이 정치와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런 문제를 푸는 열쇠는 삼대(하·은·주)의 국왕들이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형원은 고대의 교육제도가 올바른 도덕수행에 필수적인 교재로 짜인 교과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윤리 개념들을 포괄했다고 확신했다. 고전에 대한 지식은 덕德·행行·예藝라는 3개의 주요한 범주로 나뉘었다. 『주례』는 지혜로움智·어짊仁·성스러움聖·의로움義·충성됨忠·화목함和을 '여섯 가지 덕목六德'으로 규정했으며, 『예기』의 주석에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일곱 가지 가르침七敎'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도덕에 대한 이런 지식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으며, 도덕교훈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예의바른 행동을 가르쳐야 했다. 『주례』는 효성孝·우애友·가정의 화목睦·원만한 혼인관계姻·책임감任·구휼恤을 '여섯 가지 행동六行'으로 규정했다."(182-4)


"유학은 생각과 행동, 또는 지식과 실천을 도덕수양에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강조했는데, 이것은 후보자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동료나 선배가 그를 직접 평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는 의미였다. 고대의 학교제도는 관직에 임용되기 전에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평가 기간이 길었다. 그러나 학교는 개인을 평가하는 데 유일하지도 가장 중요하지도 않은 무대였다. 고전적 선례에서 행정·군사·학교의 기본적 위계질서였던 향촌은 다른 어느 집단보다 개인의 행동을 더욱 친밀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최초의 평가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됐다. 행동에 대한 평가를 천거의 주요한 방법으로 삼은 제도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풀뿌리 참여가 필요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주대의 학교와 천거제도를 이해하는 데 모호함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선례는 공로를 포상하는 제도에 주대 봉건질서의 세습적 특권이 개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명백하지 않거나 모순적이었다."(187-8)


"유형원이 연구한 중국 학자들은 거의 모두 과거제도의 이점보다는 결점에 주목했는데, 그것이 중정제만큼이나 고대 중국에서 시행된 교육과 등용의 이상과 동떨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주요한 비판의 하나는 성인의 도덕적 진리를 공정하게 전달해야 할 도구인 문학이 오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교육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렸다. 도덕주의자들은 언어가 형식주의적으로 사용되고 산문의 형식이나 세련되고 심미적 즐거움을 주는 시문의 창작을 너무 존중한 결과 도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고 계속 개탄했다." "가장 자주 거론된 비판은 과거가 어떤 원리를 이해하기보다는 사실을 암기하는 데 치중했다는 것이었다." "당의 자사刺史 조광은 과거제도가 나쁜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중립적 방안이 아니라 탐욕과 야심을 자극하고 고위 관원에게 구걸하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료 학생들을 허위로 중상하게 만드는 제도라고 생각했다."(204-5)


# 9품 중정제 : 남북조 시대에 행해진 관리 등용법의 하나로서, 중정관이라는 관리가 지방의 인재를 9등급(향품)으로 나누어 추천하면 국가에서 이 등급에 맞는 관직을 주는 추천제로, 9품 관인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원래 지방에 숨어 있는 인재를 등용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중정 관직을 지방 유력 호족들이 자신들의 일족을 추천함으로써 호족 세력이 관직을 독점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특정 가문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하였다.


"중앙집권화된 관료적 왕정체제에서 학교의 역할에 대한 유형원의 태도는 양면적인 것이었다. 국가의 교육제도, 특히 공립학교와 낙후된 조건을 개탄했기 때문에 그는 중앙 정부가 후원하는 학교제도를 창출하려고 계획했지만, 자신의 새로운 학교는 학자와 도덕적인 군자들이 운영하는 반半자치적 제도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들을 교육하고 도덕적으로 교화시키는 중요한 업무는 정부가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나 국왕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유교교육을 후원하는 데 국가를 이용하고 싶어했다. 반면 그는 당시 양반들이 사적으로 교육을 통제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공립학교제도가 세습적 지배계층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를 열망했다." "교육에 대한 통제는 궁극적으로 중앙 정부와 양반이 상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17세기 무렵 양반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공립학교제도가 위축되고 제도화된 교육이 서원과 서당으로 이관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234-5)


"유형원이 좀더 계몽적이고 개방적으로 비친 주요한 까닭은 당시는 기술지식과 기술관을 무시했는데 그는 기술을 제한적으로 존중했다는 측면이 대비됐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에 기술 학생들을 뽑는 데 무관심하고 그들에게 녹봉을 주지 않으며 기술직을 선택하는 젊은이들을 특별히 보상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들이 바랄 수 있는 보상은 기껏해야 얼마 되지 않는 체아직遞兒職뿐이었다. 당시 기술 관직을 선택하는 유일한 동기는 국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지방에서 강제로 기술 훈련생을 모집해야 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기술학교의 정원을 줄이고 정규 녹봉을 주며, 입학시험의 선발 인원을 감축하고 졸업자들을 모두 고용할 수 있는 충분한 정규 관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키지 않는 응시자들을 강제로 고용하고 정원을 멋대로 할당하는 당시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조치들이었다."(268)


"유형원은 특히 노비제도가 사회 전체에 미친 비인간적 효과에 주목했다. 그는 노비 소유주들은 자신의 노비를 매질로 다룰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노비제도는 노비뿐만 아니라 노비 소유주까지 잔인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학대를 받은 노비들은 교화되기는커녕 무리를 지어 유망에 나섰다." "그는 더 나아가 이전의 문헌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인간의 평등에 대한 원칙을 분명하게 밝혔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노비를 재산으로 여긴다. 사람은 모두 동일한데, 어찌 사람이 사람을 재산으로 여길 수 있는가." 그가 보기에 노비를 재산으로 보는 관습은 고대 (중국) 사회에는 없었으며, 그러므로 당시 조선 사회에 그런 풍조가 있다는 사실은 조선이 과거의 영광스러운 규범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불행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핵심적인 문제점은 사람들이 눈앞의 사사로운 이익에 빠져 노비제도는 철폐하기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338)


"그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신이 받아들인 방법(종부법과 종모법 모두 결함이 있다)이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비도덕적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수긍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를 '실학'적 전통을 따르는 진정한 학자로 부각시킨 명쾌한 발언 중 하나였다." "그는 노비제도의 폐지에 원칙적으로 찬성했지만, 지배계층은 주대처럼 국왕의 후원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노비제도를 갑작스럽게 폐지하면 당시의 양반뿐만 아니라 학식과 도덕을 갖춘 새로운 지배계층도 아무런 대비 없이 방치되어 생활할 수 없게 만들어 너무 갑작스럽게 풍습이 바뀔 것이므로 그런 변화는 노비를 고용노동이나 임금노동으로 단계적으로 대체하면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개혁이 이루어지면 지배계층은 노비보다는 고공雇工을 사용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전환해가는 첫 번째 단계는 당시의 노비를 세밀하게 등록해서 다음 세대까지만 노비신분을 세습시키도록 최종기한을 정하는 것이었다."(341)


"현재의 일부 학자들은 유형원과 그밖의 이른바 실학자들이 17~18세기에 일어난 긍정적 변화를 돕고 지원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며, 세습적 노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유형원의 이론은 1730년 종모법을 최종적으로 채택한 결정이나 1801년 공노비의 혁파를 단행하는 데 일정한 영향력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 노비인구가 급감한 원인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은 이론적인 주장이나 경영형 부농의 발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비 자신들의 움직임이었는데, 그들은 정치가 부패해 도망간 노비를 추쇄할 의지를 잃어버린 틈을 이용해 대규모로 유망함으로써 '저항했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듯이 일부 외거노비가 아무리 기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이었다고 해도 속신의 대가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부류는 거의 없었다." "(개혁을 구상한 이들도) 모두 누대의 양반이었으며, 권력의 구조는 1910년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사실상 바뀌지 않았다."(391-2)


3부 전제개혁


"전통적 유교사상은 농업 생산을 증진할 필요를 강조했지만, 재생산과 국가에 10분의 1세를 바쳐야 하는 분량보다 많은 잉여생산을 촉진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 목적은 양인 농민의 생존과 지배계층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세를 공급하는 데 있었다. 아울러 유교의 이상적인 개혁에는 토지의 재분배나 그것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수반됐다. 그러므로 유교적 경세학자들은, 급진적인 개편이 아니라면, 토지의 재분배가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유형원이 일정한 종류의 전제개혁은 왕조를 중흥시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특히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과 지도력을 제공할 수 있는 양반 지배계층의 이해와 전제개혁안이 상충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추상적으로 개혁을 논의하는 것과 토지 재산을 부자에서 빈자로 옮기는 급진적인 계획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반작용을 숙고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396)


"유형원은 토지가 부당하게 분배된 주요 원인은 사유재산제도라고 명쾌하게 결론 내렸다. 그가 당시 조선의 상황을 독자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그는 이전에 중국에서 나온 사유재산에 관련된 비판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대부분 전개했다. 유형원이 아무 이의 없이 받아들인 그 자료의 핵심적 주장은 완벽한 토지소유제도는 모든 농가들이 최소의 세금을 내면서 공평한 경작지를 보장받았던 주대의 정전제라는 것이었다. 그 세금은 국왕의 토지를 공동으로 경작해서 납부했다. 주의 봉건제도에서는 사유권이 없었기 때문에 농가들은 자신들의 구역을 사용하거나 경작할 권리만을 가졌다." "또한 유형원은 사유재산제도가 소작농에게 과도한 지대를 부과할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조세 부담을 줄이려던 한대 황제들의 좋은 의도를 뒤엎었다는 후한대 순열荀悅의 주장을 인용했다."(399-401)


# 주요 토지 개혁 방안

1. 한전제 : 토지 소유를 제한

2. 균전제 :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들에게 재분배


"유형원은 자신의 전체적인 계획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평하게 분배해서 함께 경작한다는 정전제의 모범적 원리에 기초한 공전제도와 양인 농민보다 지배계층에게 더 많은 토지 소유를 허용하는 한전제라는 두 가지 모범을 절충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의 한전제처럼 유형원도 품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토지를 분급했다. 그러나 그는 차등적으로 토지를 분급하는 자신의 방안을 토지의 사유제도와 타협하거나 공유에 기반한 균전제를 성취하는 과정으로 제안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사유지를 즉각 국유화하고 농민과 사대부에게 재분배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자신의 한전제에서, 농민과는 반대로, 사대부는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고 반납해야 하는 토지를 좀더 많이 할당받으며, 사대부의 지위를 법률로 공인받은 경우에만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으며, 품계에 따라 상속할 수 있는 세대의 범위가 엄격히 정해져 있다고 규정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의 타협이 아니라) 지배신분과의 타협이었다."(482-3)


"토지를 공적으로 소유하는 공전제도는 유형원에게 두 가지 목적이 달성된 사회를 창출하는 수단으로 대단히 중요했다. 첫째는 농민들이 비교적 평등한 수입을 올리고 거기에 공정하게 과세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국가가 경제를 통제함으로써 시장경제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자의적으로 관원을 등용치 못하게 함으로써 사대부 가문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사유지가 개인적 이익에 집착한 양반들의 경제적 기반이듯이, 공유지는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도덕적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이 될 것이었다." "사대부에게 토지를 분급하는 유형원의 계획은 적어도 2세대 동안 그들을 후원하는 것이었지 관직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 한정된 세습적 특권은 왕족에게까지 확대됐으며, 공신과 대신의 후손에게는 문음을 통해서 확대됐다. 세습적 차별은 서얼과 노비에게 적용됐다. 신분에 대한 당시 조선의 관습적 차별은 새로운 사회로 대부분 이월됐다."(498-9)


17세기 후반부터 축적된 "조선의 경험(이앙법 보급, 관개시설 급증, 이모작 실시, 고추, 호박 같은 새로운 작물 도입 등)과 비슷한 사례는 송대의 '녹색 혁명'일 것인데, 당시는 토지의 개간, 관개와 급수, 다모작, 상업적 농업, 지역적 특성화, 비단과 차 산업이 발달하면서 생산이 증가했다. 18세기 청대에는 중국 중부와 남서부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생산이 증가했지만, 그 뒤 "인구 증가는 농업 생산을 따라잡아" 농촌은 궁핍해졌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의 주요한 차이점의 하나는 송과 청에서는 농업 생산이 증가하고 상업경제가 발달한 뒤에는 인구가 급증했지만 조선의 인구는 1693년(숙종 19) 이후 1천만에서 1,250만 명 사이에서 정체됐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도쿠가와시대 후반 3,500만 명에서 멈춘 일본의 상황과 상당히 비슷했다." "그런 잉여생산은, 18~19세기에 인구를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급격한 경제 발전을 위해 이륙하는 데 충분한 자본을 창출할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519-20)


"토지 소유에 대한 유형원의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토지와 부의 불공평한 분배라는 문제를 그 논쟁에 관련된 다양한 집단의 상충하는 요구를 균형을 맞춤으로써 해결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양인 농민은 토지를, 노비는 면천을, 지배계층은 양인보다 높은 수입과 자신들에게 봉사할 노동력을, 그리고 국가는 안정된 재정과 충분한 세입을 요구했다. 그는 정전제와 한전제라는 고전적이며 역사적인 선례의 요소를 조합해 당시의 조선에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새로운 지배계층은 세습적 특권과 문과 급제라는 두 요소의 조합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양반이 아니라 덕행에 따라 구성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몰수·국유·재분배라는 급진적이며 평등적인 방안은 지배계층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마련하려는 그 자신의 생각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세습적 노비제도를 폐지하자고 용감하게 주장했지만, 그것을 온건하게 절충하고 수용하면서 직면한 미래를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543-4)


4부 군제개혁


"유형원보다 당시 군역제도의 결함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군적은 쓸모없는 종이 조각이었고 대부분의 군사들은 훈련되지 못했으며, 군역제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정병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군포를 납부하는 독립된 조세제도로 변질됐다." "이이는 정병에게 군포를 내도록 전환한 조처는 병력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양정과 그 가호의 조세 부담을 증가시킴으로써 군사제도를 약화시킨 근본적인 원인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양인들은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서 양반신분을 얻을 필요는 없었으며, 관원들은 진보의 군사를 충원하는 것보다는 군적에 기재된 숫자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농민들은 군역 대신 군포를 마련하기 위해 기꺼이 고리로 빚을 얻었다. 거주지에서 먼 진관에 배치되면 그들은 그곳의 서리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진장에게 바칠 물건들을 많이 가져가야 했다. 군역을 피해 도망가면 그 부담은 그들의 친척과 이웃에게 돌아갔다."(563-6)


유형원이 보기에 주대의 정전제는 "민정 분야뿐만 아니라 군사 부분에도 적용됐다. 농민 가호는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일시적으로 분급받은 동시에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전시에는 군사로 참전해야 했는데, 이것은 농민이 군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민병제도였다. 모범적인 민병제도는 평화시에는 복무하는 기간을 최소화해 농민에게 절대 부담을 주지 않았다. 군사훈련은 농한기에만 실시해서 농민의 생산과 생존을 방해하지 않도록 했다. 모든 양정은 직접 복무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상비적인 직업 군인이나 그런 부대를 후원하기 위한 조세제도도 필요치 않았는데, 그것들은 모두 주대의 이상적 제도가 무너진 뒤 널리 나타난 특징이었다." "민병은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에 녹봉으로 지출되는 비용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해산했기 때문에 부대에 주둔할 필요도 없었으며, 지휘관이 그들을 동원해 권력을 잡을 정치적인 위협도 없었다."(570-2)


"번상 정병과 보인제도에 기초해 모든 군사 부대를 개편하려고 시도한 유형원은 훈련도감처럼 영속적으로 녹봉을 받음으로써 재정에 부담을 지우는 군사들을 혁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훈련도감의 핵심 병력인 포수, 진보된 무기와 조직은 국방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복무와 재정을 번상 정병과 보인으로 전환해 국가의 지출을 줄이면서 그것을 보존하려고 했다." 이러한 유형원의 가정은 소박하고 비현실적이었는데 "6~7천 명에 이르는 훈련도감의 직업군인을 대체하려면 9만 명의 번상 정병과 보인이 필요했지만 한정은 말할 것도 없고 양정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무렵 유망은 너무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되어 제한된 소수만이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에게서 예상되는 하나의 권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유형원이 매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 문제─보인을 더 많이 등록시키는 것─는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650-1)


# 번상정병(番上正兵) : 조선 초기에, 지방에서 올라와 중앙의 군대 조직인 오위(五衛)에 근무하던 정병


"유형원과 현직 관원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유형원은 현재의 정병과 보인제도를 유지하려 했던 반면, 이사명 같은 일부 개혁적 신하들은 그런 제도를 넘어서 다른 과세 방안을 도입하는 데 좀더 유연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가호에 일정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이사명은 군사를 후원할 수 있는 충분한 세원을 확보하고 (모든 가호에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겠지만) 현재보다 훨씬 공평하게 과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군역이나 군포가 자신의 신분과 위엄을 훼손하는 저급한 의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온 양반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반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이사명 같은 현실적인 신하들은 양반과 그밖의 피역자에게는 단지 보인의 의무만 부과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는데, 그 주요한 까닭은 양반이 지주로서 전세를 납부하는 데는 아무런 오명도 붙지 않기 때문이었다."(691-2)


"유형원은 진관이 여러 군현을 관할해 이중의 방진으로 적군을 방어하는 유성룡의 방안을 도입해 지방의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는 핵심적 전략 요지에 서열에 따른 부대를 배치한 척계광의 속오군과 비슷한 제도에 기초해 육군과 수군을 재편하고, 행정구역과 군사조직을 결합해 수령이 진장의 지휘를 받도록 했으며, 이미 존재하던 속오군을 노비로만 편성해 거주지에서 훈련을 받는 일종의 민병조직으로 유지시키려고 했다." 진관이 통제하는 유성룡의 방안은 "전국을 군사조직으로 연결한 것처럼 보였지만, 적군이 병력을 집중해 침략할 경우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그 제도의 주요한 결함은 기동성보다는 고정된 위치에서 방어하는 데 치중했다는 데 있었다." "유형원은 당시 수령들은 전면적인 교육 개편을 통해서 문무에 모두 능통한 고전적 개념의 보편적 지식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성리학과 문관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그리 쉬운 목표가 아니었다."(737)


"1750년의 균역법은 양인의 세율을 절반으로 줄인 결과 그들에게 즉각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1754년(영조 30) 무렵 여러 지역에서 다시 부정이 시작됐다. 1764년 영의정 홍봉한은 지난 10년 동안 재정 상황은 계속 나빠졌으며 1780년대에 접어들면서 어염선세魚鹽船稅가 과중해져 해안 주민들을 파산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선박·어전·염전을 조사해 세금을 재산정하도록 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할당량은 변하지 않았으며, 17세기부터 1850년대까지 백성들의 계속적인 부담이 됐다. 균역볍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가세들은 새로운 부정의 원천이 됐다." "정조의 치세인 1770년대 후반에는 향교나 서원에 학생이나 교관으로 등록하거나 학문적 능력을 검증받지도 않은 채 유학으로 등록해 피역하는 사례가 만연했다.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과세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면 낮은 세율의 양역을 이행했으며 금전을 기부해 향안에 이름을 올려 피역한 부류도 나타났다."(780-1)


"군역과 군포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결과는 1862년의 임술민란으로 폭발했으며, 그 영향으로 1870년 대원군은 모든 양반 가호에게 그들이 소유한 노비의 이름으로 호포를 내도록 명령했다. 19세기 중반 군역은 양역보다는 조세로 전환됐으며, 그런 변화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전함이 조선의 해안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들을 막기에는 국방력이 너무 약했던 불행한 결과로 이어졌다. 일정한 개혁이 시도됐지만 도망이나 면제의 방법으로 납포하지 않는 데 성공한 부류는 국가의 이익을 희생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킬 수 있었다. 양반과 그 이익을 대변한 집단은 국왕과 개혁자들에 맞서 흔들리지 않는 장벽을 구축했지만, 계속 늘어나는 면세자들은 세습적 양반 귀족의 좁은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김용섭이 1792년(정조 16) 경상도 영천에서 15퍼센트의 가호만이 양역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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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2 - 역사평설 병자호란 2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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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 8월, 홍타이지가 보내온 국서의 내용은 이전의 그것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인조에게 '권세가 강한 신료들을 조심하라'며 훈수까지 했다. 그러면서 '형의 나라'로서 '아우의 나라' 조선을 걱정하여 충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2월에도 홍타이지는 마부대를 통해 국서를 보내왔다. 국서에 담긴 내용의 핵심은 대략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이 후금을 대하는 정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음을 힐책하는 것, 다른 하나는 명에 이미 망조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명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특히 '후금이 명과 싸워 계속 이기는 것은 명의 국운이 다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영 떨떠름한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 1635년 후반 무렵 홍타이지는 몹시 고무되어 있었다. 그것은 홍타이지가 차하르 몽골을 멸망시킴으로써 사실상 몽골족들을 휘하에 복속시켰던 것에서 비롯되었다."(29-30)


"1636년 3월 1일, 인조는 팔도의 백성들에게 유시문을 내렸다. '정묘호란 때는 부득이하여 임시로 화친을 허락했다. 하지만 오랑캐의 욕구는 날로 커져 이제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협박하고 있다. 이에 강약과 존망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니 모든 사서士庶들이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 나가자'는 호소가 담겨 있었다. 대의명분을 위해 국가의 존망까지도 걸 수 있다는 의지는 결연했다. 하지만 3월 7일,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빚어졌다. '참월僭越한 오랑캐와 단교할 것'이라는 사실과 오랑캐가 침략해 올지도 모르니 방어 태세를 확고히 하라는 인조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평안감영으로 가던 금군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용골대는 전령을 붙잡아 그가 소지했던 인조의 유시문을 압수했다. 후금으로서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조선의 '속마음'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45-6)


"6월 17일 (인조는) 홍타이지의 국서에 답하는 글을 의주로 보냈다. 격문 형식이었다. 정묘년에 맺은 맹약이 깨지게 된 것은 조선 탓이 아니라 청나라 탓임을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귀국은 군사강국이지만 우리는 궁벽진 곳에 위치한 농업국가일 뿐이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귀국을 능멸하고 스스로 맹약을 깨겠는가?'라는 반문으로 시작되는 국서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먼저 조선이 명을 섬겨 배신하지 않기로 한 것은 정묘 당시 합의된 약속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조선이 한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문제 삼는 청의 태도는 수긍할 수 없다고 했다. 뒤이어 변방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청 영내로 몰래 들어가 산삼을 캔 것에 대해서는 사과했다. 마지막으로 차하르 몽골의 버일러들은 이미 망한 나라의 포로들이니 청 사신과 똑같이 예우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명나라의 동번東藩'으로서 강약强弱과 성패成敗 때문에 신하의 절개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62-3)


"조선은 청군의 철기와 야전에 정면으로 맞설 경우,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대신 청군이 돌격해오는 대로에 위치한 진을 버리고 군민들을 주변의 산성으로 집결시킨 뒤 화포와 조총 등으로 저항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말하자면 청야견벽淸野堅壁 전략이었다." "구상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청군은 조선의 의표를 찔렀다. 그들은 조선군이 수비하고 있는 산성들을 공격하여 시간을 허비하려 들지 않았다. 곧바로 서울로 돌격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시도했다." "12월 6일부터 봉화가 올랐으나 당시 황주의 정방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청군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 "9일 적군이 이미 순안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고 있던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서울로 장계를 올렸다. 무사안일과 무책임의 극치였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는커녕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조차 제대로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부터 음울했다."(85-6)


# 1636년 12월 9일, 병자호란 발생


"남한산성을 공략하려는 청군 지휘부의 계책은 치밀했다. 그들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이미 1631년 홍타이지가 명의 대릉하성을 공략할 때 사용했던 전술이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그야말로 고사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홍이포를 발사하여 돈대와 성첩城堞을 파괴하면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게 된다. 군량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보충할 방도도 없고, 학수고대하는 외부 구원병은 오는 족족 청군 복병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명장 조대수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던 그 전술이 남한산성에서 재연될 판이었다." "(12월 16일 청군 진영을 다녀온) 윤휘는 다른 신료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화이론의 입장에서 청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청군은) 대오도 정제되어 있고, 조선 피란민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요컨대 당시 조선 신료들은 청군의 전력이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못했다."(105-7)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꿈도 꾸지 말라는 청군 지휘부의 요구가 있은 직후 성안의 분위기는 복잡했다. 여전히 화친을 시도해야 한다는 부류와 화친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부류로 나뉘었다. 결단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조선 편이 아니었다. 포위가 길어지면서 남한산성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고단해졌다. 성을 에워싼 청군의 압박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여러 가지 물자들이 고갈되고 있던 점이었다. 화친이든, 결전이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갈팡질팡할 경우 얼어 죽거나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113-4)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조선군은 성 밖으로 나가 기습작전을 벌이는 등 소소한 전투를 계속 치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미 12월 19일 오후, 청군의 좌익 주력군 2만 4천 명이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성안의 조선 조정은 이 같은 바깥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118-9)


"김자점은 토산에서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약 5천 명의 병력을 잃은)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모두 합치면 1만 7천 명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 모여 있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보겠다는 의지가 없거나 미약한 점이었다." "김자점, 심기원, 조정호 등 남한산성을 구원해야 할 조선의 최고위 지휘관들은 병자호란이 끝나는 날까지 그저 '헤매는 들판'(미원)에 머물면서 상황을 관망했을 따름이었다."(128-30)


"청과의 화친 교섭은 점차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신속臣屬을 요구했다. '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는 '현실'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신속'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를 배척한 척화파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를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청군 진영에서는 홍타이지의 '노여움'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칭찬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의 척화파들로부터는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자', '대의명분을 저버린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171-2)


"1월 20일, (하루종일 큰 눈이 내린) 남한산성 주변의 날씨는 음산했다. 칭신을 다짐하는 국서를 들고 청군 진영에 갔던 사신들은 날씨만큼이나 음산한 내용의 답서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인조가 성에서 나와야만 항복을 받아줄 수 있다는 것, 나오기 전에 청과의 관계를 파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척화신 두세명을 먼저 묶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목을 베어 '대국에 반항한 죄'를 다스리겠다고 공언했다. 이쯤 되면 '무조건 항복'이 아니었다."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을 비롯한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178-80)


"인조가 출성을 끝까지 회피하려 했던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또 하나는 지존至尊으로서의 위신을 잃어 이후 왕 노릇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그것이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신하들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은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181)


1월 22일, 강화도 함락 소식에 남한산성은 충격에 빠졌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홍서봉, 김류, 이홍주, 최명길 등은 모두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 '신하된 자로서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머뭇거리면 더욱 기고만장해진 저들에게 화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인조는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왕실의 가족들까지 모두 인질로 잡혀버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무기력함의 표현이었다. 이 무렵 구원군이 끊어진 것은 물론, 들려오는 것은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었다. (충청도 일원까지 남하한 청군은) 공주의 공산성을 비롯하여 목천, 청주 등지까지 출몰하여 겁략을 자행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사방이 온통 캄캄할 뿐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은 절망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최명길 등은 국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남한산성도 무너지고 있었다."(214)


1월 27일 최명길 등이 '굴복 선언'을 담은 국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국서는 인조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달라는 요청에 초점이 맞춰졌다. 인조가 출성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을 매고, 이조참판 정온은 칼로 배를 찔렀다. 두 사람 모두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산성에는 처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1월 28일 용골대가 가지고 온 홍타이지의 조유문은 '그대는 짐이 식언할까 의심하지 말라. 지난날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특기할 것은 포로들과 관련된 조건이었다. 홍타이지는 '아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너 청 영토로 들어온 뒤, 조선으로 도망쳐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청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포로를 '우리 군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얻은 성과'라고 규정한 뒤 포로들을 데려오고 싶으면 정당한 가격을 치르라고 강요했다."(216-8)


# 청에 끌려간 척화신 삼학사三學士 : 홍익한, 오달제, 윤집


이윽고 1월 30일이 밝았다. "홍타이지는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진영에서 나와 군기를 앞세우고 주악을 울리며 삼전도를 향해 한강을 건넜다. 삼전도에는 아홉 단으로 높다랗게 쌓은 수항단과 크고 작은 황색 장막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조가 50여 명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산성 밖 5리쯤까지 왔을 때 용골대 등이 영접을 나왔다. 용골대 일행이 앞장서고 인조는 삼정승과 판서, 승지와 사관만을 거느리고 삼전도를 향해 걸어서 나아갔다. 군사를 도열시켜 놓고 장막에서 기다리던 홍타이지는 인조 일행이 도착하자, 그와 함께 배천拜天 의식을 행했다. 청의 입장에서 '조선이 한 집안이 되었다'고 하늘에 고하는 의식이었다. 배천 의식을 마치고 홍타이지가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222-3)


"책봉을 통해 권력을 유지시켜 주었지만, 인조에 대한 청의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청은 인조를 길들이려고 시도했다. 청은 먼저 자신들이 큰 은혜를 베풀었다고 강조했다. 항복을 받아준 것 자체가 '이미 죽은 임금[旣亡之君]'인 인조를 다시 살려준 '재조지은'이라고 자찬했다. 그러면서 '재조지은'을 계속 환기시켰다. 1637년 7월, '조선이 가도에서 패한 명 장수들을 받아들이고 명과 통교한다'는 풍문이 돌자 용골대 등은 '기망지군'을 다시 세워주었음에도 '명과 교통하지 않겠다'는 맹약을 어겼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청은 또한 입조론入朝論을 중요한 '카드'로 활용했다. 입조란 인조를 심양으로 불러들여 청 황제를 직접 알현토록 하는 것이다. 청은 조선이 자신들의 요구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때마다 입조론을 흘리며 인조를 압박했다." "1639년 6월 입국한 마부대는 (도망쳐온 피로인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서) '인조가 심양에 가서 직접 황제를 뵙고 사죄해야 한다'고 압박했다."(258-9)


"인조는 청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세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1639년 김응조 등이 "대의大義를 밝히라"며 상소하자 아예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또 월왕 구천이 자강을 위해 20년이나 오吳를 섬겼던 고사를 들이대며 "나라가 망할 처지에 있는데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상소문에다 청의 연호를 쓰지 않는 신료들은 파직시켰다. 1640년(인조 18) 1월, 청이 원손元孫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을 때에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라일이 형편없는 지경이니 청인들의 요구에 순응하여 의심과 노여움을 풀어주는 수밖에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인조는 친청적인 행보를 보이며 주화파 신료들을 중용했다. 그중에서도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 조정의 대소사를 주도했던 인물은 단연 최명길이었다. 환도 직후 우의정으로 승진한 그는 시종일과 주화론을 견지했던 데다, 전란 초 적진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담판을 벌여 인조에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공로가 있었다."(268)


"1645년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는 것이 입관식에 참여했던 종실의 증언 내용이었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라 훈신들의 입김에 밀려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실제로 1629년 7월, 인조는 "조정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며 자조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확 달라졌다. 친청파로 '변신'한 이후에도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 지위의 박탈, 강빈의 사사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충성 경쟁'을 부추겼던 청의 획책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역설적이지만, 인조가 '추대된 임금'이라는 정치적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27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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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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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명 조정은 '인조반정'의 발생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정보의 원천은 모문룡이었다. 보고를 받은 명 조정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가장 중요한 번국藩國에서 정권이 바뀐 이유, 새 정권의 향후 향배 등은 초미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는 후금으로부터 도전받고 있었던 터라 조선의 협조가 절실한 때였다." "인조반정의 처리 방향을 놓고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했던 명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은 호부시랑 필자엄이었다. 그는 <조선정형소朝鮮情形疏>라는 글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인조 등이 광해군을 쫓아낸 것은 '난신적자의 행위'이므로 치죄해야 하지만,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의 지원이 절실한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자엄은 결론적으로 '인조를 바로 책봉하지 말고, 정변의 정당성 여부를 충분히 따져보고 조선이 후금을 토벌한 공적이 드러난 뒤에 책봉하자'고 주장했다."(46-7)


# 재조지은에 봉전지은(封典之恩, 제후국의 임금으로 책봉해준 은혜) 추가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인조 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의 난맥상 때문에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한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이괄의 반란으로 인조 정권이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은 흐트러지고 말았다. 당장 반란을 진압하느라 군사적 역량이 크게 소모되었다. 반정 성공 직후 내세웠던 '후금을 정벌하여 명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던 호기는 거품이 되었다. 인조가 서울을 떠난 직후 난민들이 궁궐과 관청에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공사의 기물들을 약탈했다. 각종 서류와 문서, 양곡 등이 약탈되거나 불에 타버렸다. 각 관청에 보관된 무기류도 대거 약탈되었다. 이원익의 증언에 따르면 "변란을 겪은 이후 군기가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백성들이 훔쳐 간 조총의 수량이 워낙 많아 그것들을 쌀을 주고 도로 사들여야 할 형편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후금 정벌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땅에 떨어진 인조와 조정의 권위를 회복하고 질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77-8)


# 이괄의 난(1624) : 반정 성공 후 벌어진 논공행상에서 반정 거사 당일 미적대던 대장 김류는 1등공신에 임명됐는데 이괄은 2등공신으로 밀려나고 변방으로 발령까지 났다. 여기에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금부도사가 자신을 체포하려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괄은 마침내 반란의 불길을 올린다.


"대동법, 군적 정리, 호패법 등이 모두 별다른 성과 없이 중간에 무위로 끝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조 정권의 재정 확보와 국방 강화를 위한 방책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이 같은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기 위해 백성들을 밀어붙이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반정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을 겪은 것이 자충수였다. 실제로 대동청, 재성청 등에 보관된 문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을 겪으면서 민심은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의 어마어마한 은 징색, 가도 모문룡 진영의 항상적인 양곡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토적'을 위한 군사력 증강 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97)


"가도와 청북 지역을 횡행했던 모병들이 보였던 행태는 1637년, 병자호란으로 가도가 청군에게 함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오랑캐 지역 정탐' 등을 명분으로 수시로 조선에 들어왔고 때로는 압록강을 건너 후금의 점령 지역까지 출몰했다. 더욱이 청북의 곳곳에는 모병과 요민들이 설치한 둔전들이 널려 있었다. 살 길을 찾아 후금을 탈출하는 요민들이 청북 지역으로 계속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 조정은 가도에 사신을 보내 불필요한 요민들을 명 내지로 송환하라고 요청했지만 모문룡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자신의 휘하에 주민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어야 명 조정으로부터 군량을 많이 받아낼 수 있었기에 모문룡은 조선의 요청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모문룡 때문에 본래 요동에 머물던 요민들이 동요하자 후금은 격앙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은 후금의 보복과 침략을 우려했지만 '은인' 모문룡을 뜯어말릴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다."(108-9)


"1626년 즉위 이후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향한 서진西進을 잠시 멈추고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다. 동시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조선은 일찍이 1621년(광해군 13) 무렵부터 누르하치 이후 후금의 후계 구도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정충신 등의 사절을 허투알라로 들여보내 후금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충신은 광해군에게 "귀영가貴盈哥(조선이 다이샨을 부르던 별칭)는 보잘것없는 용부庸夫지만 홍타이지는 똑똑하고 용감하고 시기심이 많은데다 부왕의 편애를 믿고 형을 죽이려 한다"는 상당히 구체적인 내부 정보까지 보고했다. 조선은 정탐을 통해 누르하치의 아들들 가운데 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해 강경파이고 다이샨이 온건파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반면 인조 정권은 집권 이후 이괄의 난 등이 남긴 여파를 수습하고 모문룡을 접제接濟하는 데 골몰하느라 후금의 내부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150-1)


#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이유

1. 명목상 칸에 올랐지만 형들과 권력을 분점하고 연정을 펴야 하는 상황을 타개하고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2. 만주 지역에 심각한 기근이 닥쳤는데 명나라와 교역선이 끊긴 상황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구할 곳은 조선뿐이었다.

3. 가도에 웅크리고 앉아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였던 모문룡을 제거하여 뒤를 돌아봐야 하는 여지를 없애고자 했다.


"후금군의 침략 소식이 서울의 조정으로 날아든 것은 1627년 1월 17일이었다. 인조는 급히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인조는 신료들을 보자마자 "이들이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 '모문룡 문제'를 빼놓으면 후금과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집권 이후 '친명배금'을 표방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배금' 행위를 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인조는 갑작스런 후금의 침략 소식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신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인조의 마음은 이미 강화도로 들어가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 방어를 위해 삼남 지방에서 1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수사水使들을 시켜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여타 지역에 대한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162-4)


"초반의 전황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형국이었지만 후금군은 의외로 신중했다. 그들은 의주성을 함락시킨 직후 총사령관 아민의 명의로 평안감사 윤훤에게 서신을 보내 강화 협상을 제의했다. 윤훤은 조정에 보고한 뒤 회답을 주겠다고 했고, 1월 18일 조정은 윤훤의 장계를 통해 후금이 화의를 제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시점에 후금군은 왜 갑자기 화의를 제의했을까? 우선 당시 후금군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사실을 들 수 있다. 후금은 약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아민은 그 숫자로는 서울까지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또 영원성에 있던 원숭환의 위협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후금군이 조선 내륙으로 남하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점은 명군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발생 소식을 접한 명의 병부는, 후금군이 조선으로 깊숙이 들어간 틈을 이용하여 후금 지역을 공격하자고 건의한 바 있다."(166-7)


"2월 2일, 호차(胡差, 오랑캐 사신)가 갑곶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그가 소지한 국서에는 '명과의 관계를 끊되,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식으로 화약을 맺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신료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명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이 재확인되었다. 인조는 그러면서 형제의 명칭은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은 후금 측이 조선과 명 사이의 기존 관계를 용인해준다면 화친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척화파斥和派들이 들고 일어났다." "척화파들은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169) "오랑캐는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만도 못한 존재라고 여기는 화이론華夷論을 지니고 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후금과 화약을 맺은 현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176)


# 3월 8일, 형제 관계를 맹약하고 화약 성립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키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운 것은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문룡은 후금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가도에서 다른 섬으로 도피하여 용케 목숨을 보전했다. 그는 이후 전쟁 기간 동안 평안도 연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관망했다. 조선 조정은 그가 배후에서 후금군을 공격하거나 견제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모문룡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조선의) 주문사 일행에게 명 조정으로 가져가는 보고서의 내용을 뜯어 고치라고 강요했다. '조선이 후금군의 침략을 받아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모문룡의 활약 덕분에 적을 크게 물리쳐 쫓아냈다'는 내용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면 북경으로 가는 해로를 열어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주문사 일행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 결국 그의 요구대로 따랐다." "1627년 5월 천계제는 모문룡의 '군공'을 치하하고 그에게 미곡 5만 석과 양곡 구입 자금으로 은 10만 냥을 주도록 재가했다."(185-7)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인조 정권은 어디서부터 국정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반란을 겨우 진압했던 직후인 1624~1626년 무렵에는 백성들을 다독거려 정권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같은 처지에서 후금을 정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정벌은커녕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무엇보다 궁핍한 재정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아침부터 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안에 빚쟁이가 가득하다!' 호조판서 김신국이 묘사한 조정의 재정 형편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당장 후금에 보내기로 한 세폐歲幣 비용까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백성들의 부담이 더 커지면서 민원民怨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역모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던 것은 그와 관련이 있었다. 민생을 안정시켜 민심을 수습하고 후금의 재침에 대비하는 것이 절박했지만 국정은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다."(199-201)


"재정 문제가 심각해지자 1626년 이후 신료들은 궁가, 내수사 등이 육지와 바다의 이권을 독점하는 것을 혁파하라고 촉구했다. 또 내수사 노비들에게 면역, 면세의 혜택을 주는 것도 철회하라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마이동풍이었다. 말로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민폐를 제거하라'고 강조했지만 궁가 이야기만 나오면 귀를 닫았다. 1628년에는, 반정 직후 국가로 반환되었던 이현궁과 수진궁 소속의 어전들을 다시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인조는 "선 왕조의 관례였다"는 명분을 들이댔다. 역주행이었다. 공신들도 마찬가지였다. 1629년 1월, 최명길은 '공신들이 적몰籍沒을 사칭하며 남의 전답과 집을 빼앗는 폐단을 금지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시행되지 못했다. 당시 역모 사건이 빈발하면서, 고변 등을 통해 공신이 되는 자들의 수가 대폭 늘어나고 있었다." "반정을 통해 집권한 데다 이어지는 역모와 고변 때문에 인조 정권은 공신들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었다."(206-7)


명에서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한 한족 출신 신료들을 이신貳臣이라 칭하는데 원숭환을 제거한 반간계를 기획한 범문정范文程 역시 이신 출신이다. "1629년 홍타이지의 황성 기습전에 수행했던 범문정은 원숭환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반간계를 구상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문정은 순치順治 연간에도 시정의 계책과 방향을 제시하여 청이 중원을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을 '제어하는'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다. 포로로 잡힌 환관들의 옆방에 머물며 반간계의 미끼를 던졌던 고홍중과 포승선도 이신 출신이었다." 이신들이 명을 버리고 청으로 귀순한 이유는 다양했지만 이들은 "모두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신들의 후금으로의 귀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명의 목줄을 겨누게 된다."(253)


"조선 조정이 위기감 속에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골몰하고 있던 1631년 7월, 후금은 다시 명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이번 원정의 공격 목표는 대릉하성大凌河城과 금주 등지였다. 모두 영원성과 산해관을 공략하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명군의 전초 기지였다. 홍타이지는 원정 시작에 앞서 소규모 정예 병력을 수시로 대릉하 주변으로 보냈다. 명의 장졸들이나 민간인들을 붙잡아 납치하려는 목적이었다. 《청실록》에서는 이것을 착생捉生이라고 적었다. 단순히 '포로 사냥'이 아니라 명군 관련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정찰의 일환이었다." "대릉하 원정에 앞서 조선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고 배를 빌려달라고 한 것은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를 통해 조선의 반응과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정西征하는 동안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해 올 우려가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군대를 움직였다. 1631년(인조 9) 8월 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303-4)


"대릉하성의 명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 후금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의 위력이었다. 1626년 영원성을 공격했다가 명군의 홍이포 공격 때문에 누르하치가 끝내 패퇴했던 '아픔'을 겪었던 후금은 이후 명군의 화기를 획득하기 위해 부심했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노획한 명군의 화기를 활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후금은 마침내 1631년 1월과 3월, 대장군포와 홍이포를 각각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한다. 대장군포는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에 전해준 불랑기포 가운데 제원이 큰 것을 가리킨다. 홍이포는 17세기 초반 역시 마카오를 통해 명에 전해진 최신 화포였다. 포신이 길어 사정거리가 길 뿐 아니라 탄환이 날아가는 속도와 파괴력이 당시 그 어느 화포보다도 발군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후금에서 홍이포를 제작하고 그것을 전장에서 활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역이 대개 명과 관련이 있거나 명에서 귀순한 한족들이었다는 점이다."(309)


"사령관 조대수의 투항은 조대수 개인의 비극일 뿐 아니라 명 전체의 비극이기도 했다. 조대수는 일찍이 자신의 상관이자 누구보다도 열렬한 애국자였던 원숭환이 숭정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원숭환이 처형된 직후 북경의 분위기에 실망한 그는 산해관을 떠나 금주성에 틀어박혔었다. 조대수도 인간인 이상 간신과 소인배들의 참소 앞에서 대국을 볼 줄 모르는 숭정제와 조정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조대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대릉하성을 수축하자고 건의했다." "(갑론을박 끝에) 대릉하성을 쌓으라는 재가는 떨어졌지만 공사 기간은 충분치 않았다. 치첩이 완공되기 전에 후금군은 들이닥쳤고 조대수는 고립된 성에서 3개월 이상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미 망조亡兆가 완연한 명의 분위기에서 조대수의 분투는 그나마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이제 거칠 것이 없던 홍타이지는 대릉하 원정에서 돌아온 직후인 1632년 4월, 대군을 이끌고 차하르 몽골 정벌 길에 올랐다."(316-7)


"점증하는 후금의 협박과 '가도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정치적 갈등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 핵심은 인조의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追崇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높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명분과 종통宗統의 의리를 강조하던 신료들은 인조의 그 같은 시도에 격렬히 반발했다."(324)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시도는 무리한 것이었다. 반정으로 집권했던 직후, 과거 광해군이 생모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하고 무덤을 성릉成陵이라 했던 것을 비판하고 성릉의 석물 가운데 참월한 것을 없애라고 지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정원군의 추숭에 반대하는 신료들을 '시정잡배'로, 성균관 유생들을 '괴물'이라고 매도하면서까지 추숭을 강행하려 했다."(328)


# 1632년(인조 10) 2월, 추숭도감追崇都監이라는 임시 기구를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관철


1633년, 185척의 선박과 수만의 병력을 대동하고 후금에게 귀순한 공경 일행을 먹일 식량을 요구받은 조선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조선은, 공경을 추격해온 주문욱 일행으로부터 급량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후금까지 식량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조선은 주문욱 일행에게는 이미 3천 석의 양곡을 공급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임경업 등을 보내, 공경 일행과 합세한 후금군과 전투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조선이 이미 확실하게 명 측으로 기우는 태도를 보인 터라 후금의 식량 요구까지 거부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용골대 일행의 급량 요구를 거절하여 내심 찜찜해하고 있던 5월 6일, 명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어머니 구씨를 왕비로 각각 추봉追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인조는 고무되었고, '명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후금에 대한 찜찜한 마음은 여지없이 사라졌다."(353-4)


"공유덕과 경중명 등의 귀순은 다른 측면에서도 조선에 악영향을 남겼다. 우선 조선이, 공경을 추격하던 명군에게 군량과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병력을 압록강 부근으로 파견하면서 떠안아야 했던 사회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공경 일당과 그를 저지하려는 조·명연합군, 그리고 후금군이 맞닥뜨렸던 지역에서 가까운 의주, 용천, 철산 등지의 피해는 극심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전란의 와중에 농작을 전폐하다시피 했고, '상황'이 종료된 뒤에는 굶어 죽기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피해는 더 심각했다. 후금이 전함을 확보하게 된 것도 문제였지만, 조선군이 공경 요격에 가담하여 후금군과 교전을 벌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명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는 조선의 '본심'을 노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후금 내부에서는 당연히 '조선을 손봐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양국 관계의 파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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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장 광해군 평가의 극과 극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반정'이라는 단어 속에 원초적으로 담겨 있다. '반정(反正)'은 중국의 고전인 『춘추』나 『사기』 등에 보이는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이란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반정은 문자 그대로 '올바른 상태로의 복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정 이전의 광해군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일 수밖에 없다. 인조반정이 성공했던 직후, 쿠데타를 주도한 서인이나 그에 동조했던 남인들은 반정이 성공한 것을 가리켜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再造之慶)'라고 극찬했다. 나아가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윤리가 다시 맑아졌다"고 평가했다. 결국 '반정'이니 '재조지경'이니 하는 용어들이 사용되는 분위기 아래에서는─설사 광해군에게 평가받을 만한 치적과 장점이 있었고, 그의 시대에 무엇인가 배울 만한 요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광해군이나 그의 시대를 다시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었던 셈이다."(19)


"(반대로 만선사관학자 이나바가) 거의 망해가고 있었으며 부패가 극에 이르렀던 명이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행위를 불가피한 것이라고 칭찬한 것은 광해군의 대외정책의 '탁월성'을 한국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와 한 묶음인 만주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나바가 광해군을 '띄웠던' 것은 한국사의 자주성을 부인하는 만선사관의 틀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극단적이다. 부정적인 평가의 경우, 인조반정을 성공시켜 광해군을 쫓아냈던 서인들의 집권이 이어진 상황에서 광해군에 대한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죽이기'를 계속함으로써 그의 본 모습을 가리는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재평가는 식민사관이 노린 정치적 노림수에 말려들 위험성이 적지 않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양쪽 입장 모두 지극히 정치적이다."(31)


# 만선사관滿鮮史觀 : 조선의 역사는 만주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관.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독자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일본의 만주침략을 정당화한다.


2장 어린 시절


임진왜란 초기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피난 보따리를 싸고 있던 어수선한 상황에서 우부승지 신잡은 선조에게 종묘사직의 장래와 민심 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하라고 건의했다." "대신들의 입장에서는 열세 명이나 되는 왕자들 가운데서 다음의 주군이 될 인물을 함부로 천거하는 것은 엄청난 도박일 수밖에 없었다. 선조가 누구를 의중에 두고 있는지도 모를 뿐더러 당시 선조는 한창 장년의 나이인 마흔할 살에 불과했다." 침묵 속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선조는 광해군을 칭찬했고 신하들은 얼떨결에 선조의 말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선조 자신이 오랫동안 광해군을 의중에 두어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신잡의 건의를 즉석에서 받아들여 그를 왕세자로 결정한 것은 그야말로 '전격적'인 것이었다. 불과 1년 전, (후계자 논의를 거론한) 정철을 쫓아낼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의 상황이 선조에게는 그만큼 절박하게 인식되었다는 것의 반증이었다."(46-7)


3장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광해군이 분조分朝를 이끌고 처음 출발했던 것은 1592년 6월 14일이었다. 그는 이후 12월 말까지 영변, 운산, 희천, 덕천, 맹산, 곡산, 이천(伊川), 성천, 은산, 숙천, 안주, 용강, 강서 등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의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면서 흩어진 민십을 수습하는 한편 의병의 모집과 전투의 독려, 군량과 말먹이의 수집 운반 등 전란 수행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광해군의 활동은 왜란 초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유린되었던 조선 조정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항전을 독려하고 전쟁 수행에 나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백성들은 조정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분조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분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을 수행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분조를 이끄는 동안 광해군이 겪었던 고초는 대단히 컸다. 특히 산악지역에서의 노숙은 후유증이 커서 1593년의 봄과 여름 동안 광해군은 해주에 머물면서 계속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52-3)


"1593년 10월, 선조와 광해군은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강화논의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남해안 일대로 물러나 장기주둔 태세에 돌입했다." "명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 명나라 조정은 '광해군 카드'를 빼어 들었다. 광해군을 전라도,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보내 선조를 대신하여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토록 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선조 대신 광해군을 삼남지방으로 내려보내 명군을 지원토록 할 요량이었다. 1593년 윤달 11월 19일, 광해군은 다시 서울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분조가 아니라 '무군사(撫軍司)'라는 것을 이끌었는데 사실상 두 번째의 분조 활동이었다." "분조와 무군사 활동을 통해 왕세자 광해군은 조선 팔도의 남과 북을 거의 주유한 셈이 되었다." "그는 그 경험을 통해 전쟁이 백성들에게 남긴 상처를 직접 보았고, 왜란 중의 밑바닥 민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67-9)


"왜란이 끝날 무렵부터는 명 조정이 광해군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왜란 시기부터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해달라고 명 조정에 계속 요청했지만 명은 번번이 거부했다. 이유는 광해군이 맏아들이 아닌 둘째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결정한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책봉 주청서를 북경에 보냈지만 명은 그때마다 거절했다." 명이 조선의 요청을 집요하게 거부한 이유는 "명의 신종이 당시까지 황태자를 결정하지 않았던 것과 관계가 있다. 명 조정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아직 황태자를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번국의 황태자 책봉을 먼저 승인할 수는 없었다. 둘째이자 '첩의 자식'을 세운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되었다."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하고, 책봉하는 과정에서 명이 보였던 미온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는 광해군이 '반명감정'을 품는 데 충분한 소지를 제공했다고 여겨진다."(71-4)


4장 정인홍, 이이첨과의 인연


"선조의 죽음은 광해군에게 역설적으로 '복음'이었지만 귀양길에 올랐던 정인홍과 이이첨에게도 화려한 부활의 서곡이었다. 이제 그들은 선조에게 불충했던 '죄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광해군의 즉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공신'으로서 복귀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광해군에게 둘도 없는 협력자이자 은인이었지만 궁극에는 광해군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기도 하다. 왕세자로서 광해군의 위치가 흔들릴 때 정인홍은 목숨을 걸고 그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 즉위 이후 이이첨이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폐모논의를 제기하는 등 정치적 무리수를 둠으로써 반대파였던 남인과 서인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에는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특히 이이첨이 '왕권 강화'를 빙자하여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것은 자신뿐 아니라 정인홍과 광해군도 파멸의 길로 몰아갔다. 인목대비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광해군과 맺은 '악연'의 끈도 참으로 질겼다."(83-4)


"광해군이 벼슬을 내려도 받아들이지 않고 향리에 머물려고 했던 정인홍의 행태는 독특한 것이었다. 한말의 지사 황현(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정인홍의 그 같은 행태를 언급하면서 그를 조선시대 산림의 원조로서 지목했다." "그는 먼저 임진왜란 당시 일선에서 싸웠던 의병장 출신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정인홍은 고향인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와 곽재우의 의병활동 덕분에 경상우도는 보전될 수 있었다."(87-8) "정인홍이 보기에 남인 유성룡이나 서인 성혼 등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유성룡은 적과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혼은 피난길에 오른 임금이 지척에서 지나가고 있음에도 나와 보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정인홍은 성혼을 일러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자'라고 매도했다. 정인홍의 이 같은 태도는 유성룡과 성혼 등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제자들과 두고두고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90)


"조식의 학문과 훈도 방식은 이황의 그것과는 사뭇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황은 조식에 비해 제자들을 키우는 데 열심이었고, 전수했던 학문 역시 이론적인 측면을 중시했다. 그에 비해 조식의 그것은 확연히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칼이 상징하는 이미지처럼 결단을 강조했다. 정인홍은 조식에게 훈도를 받으면서 입신을 도모하는 학자보다는 활달한 실천가가 될 기질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실천가로서의 기질은 선조 초반 조정에 초빙되어 나아갔을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인홍은 1573년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것을 인정받아 처음으로 조정에 초빙되었다. 1577년에는 정5품 직인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곧이어 정4품 직인 장령으로 뛰어올랐다. 척신정치가 남긴 잔재가 채 가시지 않았고, 동인과 서인이 분열되어 있던 당시 정치판에서 정인홍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백관을 규찰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직무였던 사헌부 장령의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던 것이다."(93)


"이이첨 또한 광해군대 정치판에서 나름대로 '큰소리'를 칠 수 있을 정도의 역량과 정치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정인홍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중에 피난하지 않고 의병활동을 벌임으로써 의롭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었다. 또한 이이첨은 일본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임진왜란 초 광릉참봉(光陵參奉)이란 미관말직에 있으면서,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릴 위기에 처했던 세조의 영정을 보전하는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을 맞아 거의 모든 역대 국왕들의 영정이 불에 타거나 없어졌다. 겨우 보전된 것이 태조와 세조의 영정이었다. 그런데 태조의 영정은 조정 차원에서 보전에 힘을 기울였고 여러 고을에서 그것을 옮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세조의 영정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이첨의 활약 덕분이었다. 어쨌든 태조와 세조의 영정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국왕으로서 체면을 구겼던 선조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경사였기 때문이었다."(95-7)


5장 전란의 상처를 다독이다


"'당파를 불문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나가자.' 즉위 직후 광해군이 내놓았던 인사 정책의 화두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실천된다. 광해군은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남인 이원익을 임명했다. '오리 정승'으로 불렸던 그는 정치적 색채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지만 선조대 이래 원로 대신으로서 쌓은 명망과 경륜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높았다. 광해군은 그가 원만하게 붕당 사이의 대립을 추스려 조정을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광해군은 이항복과 이덕형도 중용하여 즉위 초반에는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정승직을 주고 받았다. 특히 이항복과 이덕형은 각각 국방과 외교와 관련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항복은 선조대 이래 여러 차례 병조판서를 지내 군사업무에 밝았다. 이덕형은 왜란 초 대동강에서 일본군 장소 겐소(玄蘇)와 담판을 벌인 적도 있는 당대 최고의 '일본 전문가'였다."(105)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기 위해 고심하던 광해군은 "즉위 직후인 1608년 5월, 경기도 지역에서 대동법을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공물을 현물로 걷는 대신 봄과 가을로 쌀 16말만을 내도록 하고 여타의 비용은 완전히 없앴다. 경기도 백성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것은 한마디로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반발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방납으로 먹고살던 모리배들, 지방의 향리들, 각 관청의 하인들, 땅이 많은 양반들은 아우성을 쳤다. 대동법을 아예 원수처럼 여겼다. 그들은 틈만 나면 대동법을 비방했다. 그들은 대동법을 관할하는 선혜청의 관리들에게 정치적으로 압력을 넣기도 하고 "대동법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고 운운하며 퇴진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대동법은 하층민들에 대한 정권 차원의 '양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백성들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당시 민생의 피폐가 심각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111-2)


6장 왕권강화의 의지와 집착


"정인홍은 스승 조식의 권위를 높이고 그를 대북파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그를 모시는 서원을 건립하는 한편 이황처럼 문묘에 모시기 위해 상소 운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이이첨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훈구파의 후예인데다 변변한 학연조차 없는 자신을 어떻게든 조식과 연결시키고 싶어서였다. 한마디로 이이첨은 '조식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이황과 이이의 문하생이라는 학연으로 뭉친 남인과 서인계의 재야사림들이 보여준 '단체행동'의 위력을 절감한 탓이기도 했다." "비록 정권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이첨 등은 사림들의 여론을 움직이고 그들의 심복을 얻어내는 것이 권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결국 광해군과 더욱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왕권을 등에 업고 '왕권강화'를 외치면서 그를 빌미로 자신들이 권력을 확대해 가는 방식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비극은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124-5)


# 회퇴변척晦退辨斥 : 오현 문묘 종사에 분노한 정인홍이 척신정치기인 명종대에 벼슬을 한 사실을 들어 이언적과 이황을 '변변치 못한 인물들'이라면서 비난한 상소 사건


"1613년 5월 23일, 대북파 이위경은 "인목대비는 저주사건을 일으키고 역모에 연결되었으니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끊어졌다. 전하는 비록 대비와 모자 관계이지만 인목대비에게 현저한 죄악이 있으니 종사(宗社)를 생각할 때 신하의 입장에서는 국모로서 대우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서인, 남인들 대부분이 '역모' 가담자로 몰려 제거됨으로써 조정 내에서의 폐모논의에 대한 반대는 비교적 잠잠했지만 문제는 재야 사림들의 반발이었다. 팔도의 유생들은 서로 통문을 돌려 폐모논의를 '금수(禽獸)의 행동'이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대북파를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것은 충이 먼저냐, 아니면 효가 먼저냐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주자성리학이 체제를 유지하는 정학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당시 사림사회의 분위기에서 우선 덕목은 역시 효였다. '효' 중심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에 대해 '폐모' 운운하는 대북파의 주장은 용인될 수 없었다."(132-3)


# 계축옥사(1613) : 문경 새재에서 은상銀商 살해사건을 벌인 양반 명문가의 서얼들(칠서七庶)이 역모 혐의에 휘말린 사건. 이들은 국문 중에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실토했고, 이 진술은 이후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폐비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은상살해사건'이 역모로 비화되고 다시 영창군 살해와 폐모논의가 불거지면서 정치적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정치적 긴장상태의 지속은 '토역 담당자'로서 대북파, 그 중에서도 이이첨의 정치적 기반을 굳혀주었다." "폐모논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이이첨 등이 몰아갔던 상황은 일종의 '공안정국'이었다. '광해군 왕권의 보위'라는 절대적 명제를 앞세워 모든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호역(護逆)'이라는 낙인을 찍어 정치적으로 제거해버렸다. 이이첨 등에게 강상윤리로는 '충'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효' 등 다른 덕목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는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려 했다." "거듭되는 역모사건을 거치며 신경이 더욱 예민해지고 불안했던 광해군이 그를 방임하게 되면서 '토역담당자'로서 이이첨의 권력은 비대해져갔다. 나중에는 광해군의 왕권까지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요컨대 이이첨은 사림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권간이 되었던 것이다."(136-8)


7장 '절대군주'를 꿈꾸다


"왜란 당시 경복궁과 창덕궁 등 주요 궁궐들이 불에 타버려 국왕들이 거처할 마땅한 궁궐이 없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광해군이 궁궐 건설에 열심이었다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창덕궁을 중건하여 거처할 궁궐을 확보한 이후에도 경덕궁, 인경궁 등 새로운 궁궐들을 대규모로 건설하는 공사를 벌였던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석연치 않은 것은 또 있었다. 광해군은 새 궁궐을 지으려 했으면서도 왜란 당시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당대인들에게 왜란이라는 대전쟁이 남긴 충격은 대단했다. 전쟁을 통해 죽고, 다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굶어죽고, 돌림병에 걸려 죽고,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고, 강간당하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인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느꼈던 사람들은 자연히 운수에 병적으로 집착하는가 하면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것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140-1)


"왜란 이후 선조는 신하들과의 경연 자리에서 다른 경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죽을 때까지 오로지 『주역』만을 강독했다. 그만큼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는 이야기다. 운수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광해군 역시 술사들을 몹시 가까이했다. 1612년(광해군 4) 9월 불거져 나왔던 "교하(交河)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이 같은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산군과 연산군이 쫓겨났던 장소인 창덕궁을 꺼림칙하게 여기던 광해군은 (술사) 이의신의 (천도) 주장에 계속 흔들렸고, 그것이 신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실현되기 어려워지자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1615년(광해군 7) 5월 23일, 머물고 있던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을 떠나 창경궁이나 정릉동 행궁을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두 궁궐을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시쳇말로 '대조전은 어둡고 칙칙해서 기분 나쁘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창경궁 등을 수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 궁궐을 짓는 수순으로 연결되었다."(142-4)


궁궐 건설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모든 토지에 공사비용으로 포목을 부과하면서 백성들이 아우성이 들려왔다. 왜란의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의 부가세는 엄청난 고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는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해왔다. 원병을 보내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파병 문제의 본질 역시 따지고 보면 돈 문제, 재정 문제였다."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금이나 은을 바치는 하층민들에게 공명첩을 나눠주고 실직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하는가 하면 죄수들에게도 속죄은(贖罪銀)의 명목으로 은을 거둬들였다." "은을 바치고 당상에 올라 이른바 납은당상(納銀堂上)이 된 백성들 가운데는 폐모논의가 벌어질 때 인목대비를 처벌하라는 정치적 의사표시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나 광해군과 대북파를 가뜩이나 '흘겨보고' 있던 남인계나 서인계 사대부들이 보기에 그것은 분명 '말세'였다."(150-1)


8장 대륙에서 부는 바람


조선에 주둔하던 명군은 턱없이 부족한 상점 수와 면포와 쌀을 이용한 상거래 관행으로 곤란을 겪었다. "명군 지휘부가 생각해낸 대책은 명나라 상인들을 조선으로 불러들여 장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과 거리가 가까운 요동의 상인들이 주목되었다. 명군 지휘부는 상인들에게 노인(路引)을 발급했다. 일종의 통행증명서였다. 그것을 소지한 상인들에게 조선으로 들어와 상행위를 하도록 권장했다." "일단 그들이 노린 것은 명군의 봉급으로 뿌려지는 은이었다. 명군 지휘관들은 상인들을 아예 각 부대별로 배속시켰다. 병력이 이동하면 상인들도 따라서 이동했다." "수천리 길을 마다않고 조선까지 들어온 상인들이 명군과의 거래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들이 조선에 널려 있는 은광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뒤를 봐주는 명군 지휘관들을 통해 조선 조정에게 은광을 개발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159-60)


"명군에 보기에 은을 이용하여 거래할 줄도 모르고, 그것을 채굴하는 데도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조선 신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161) "본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서울에 올 경우, 그들에게 모시나 부채, 화문석과 같은 토산물을 예물로 주었다. 하지만 왜란을 거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왜란 중의 경험을 통해 조선에서도 은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데다, 은이 부족해지고 은가가 치솟고 있던 명 내부의 사정이 맞물리면서 명사들은 은만을 요구했다. 명나라 사신들의 은 징색은 광해군대에 들어와 절정에 이르렀다. 그 액수는 거의 10만 냥에 육박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임해군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사실을 조사하고 광해군의 국왕 자격을 심사하겠다고 왔던 엄일괴와 만애민이 수만 냥의 은을 챙겨갔다고 이야기했거니와 이후 조선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봉'이 되었다. 명나라 환관들 사이에서는 "조선에 가서 한밑천 잡자"는 풍조가 생겨났다."(167-8)


9장 외교 전문가! 광해군


광해군 외교전술의 기본 방침인 '기미책'은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오랑캐를 다독거려 '온다고 하면 막지 않고, 간다고 하면 잡지 않는' 소극적인 현상유지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개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의리와 명분을 얘기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이므로 잘 구슬려 평화를 유지하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침략 근성을 버리지 않는데 언제까지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한편으론 기미책을 써서 다독거리면서 다른 한편에선 힘을 길러 침략에 대비하려고 했다. '자강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제 광해군은 누르하치가 쳐들어올 경우를 상정하고 방어대책을 마련하는 데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방어대책을 세우려면 적을 알아야 했다. 광해군이 명청교체기에 취한 외교적 대응책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정보 수집 노력이었다."(187-8)


"방어대책을 마련하는 데 노심초사했던 광해군의 혜안은 일본에 대한 정책과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후금을 막는 데 필요한 무기 확보에 열성이었던 그는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다. 왜란 중의 경험을 통해 일본산 장검과 조총의 우수성을 인식한 터라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그를 구입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비밀리에 타진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여 년밖에 안되어 일본을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원수'로 여기는 풍조가 퍼져 있던 상황에서 그 같은 탄력적인 태도는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1609년(광해군 2)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던 것도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켜 점증하고 있던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는 데 전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서북방의 후금과 동북방의 일본,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로부터 협공당하는 시대적, 지정학적 현실을 인식했던 그가 조정 내외의 비판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택한 것은 고민 끝에 선택한 고육책이었다."(194)


10장 명청교체의 길목에서


"광해군이 이미 쫓겨난 뒤인 1627년 (심하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던) 강홍립은 후금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온다. 정묘호란 당시 그는 향도로서 차출되었던 것이다. 그는 강화도로 피난했던 인조를 알현했다. 강화협상을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인조 주변의 신료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인조는 의외로 그를 감싸주었다." 강화가 성립한 후 조선군 지휘관 정충신은 철군하는 강홍립에게 편지를 보내 후금군을 단속하여 살육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정이 강화로 피난 간 와중에 한강 이북의 조선 백성들은 '도마 위의 고기'였다. 강홍립은 정충신의 부탁대로 후금군의 살육을 막기 위해 노력했거니와 강화협상을 주선하여 후금군을 철수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뒷날 강홍립은 '매국노'로 매도되는가 하면 철저히 잊혀졌다. 요컨대 '심하 전투'는 강홍립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211-2)


11장 광해군, 명을 주무르다


"절강 출신인 모문룡은 1621년 7월, 요동 전체가 후금에게 점령되었던 직후 압록강변의 진강으로 잠입하여 그곳을 점령했다." "1621년 요동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이후 후금의 목표는 고정되었다. 이제는 북경을 향하여, 그 북경으로 건너가는 관문인 산해관을 향하여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오로지 서진(西進), 또 서진만을 염두에 두었던 후금에게 갑자기 나타난 모문룡은 한마디로 '목에 걸린 가시'였다. 하지만 모문룡이 진강에 어렵사리 마련한 거점은 오래갈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우선 그가 거느린 병력이 너무 미약했던데다 그의 진영이 명 본토로부터 고립되어 증원군을 끌어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금의 대병력이 압박해오자) 모문룡은 1621년 7월,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곶에 상륙했다. 평안감사가 올린 긴급 장계를 통해 그가 미곶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바짝 긴장했다."(224-5)


# 요민遼民 : 요동에 살던 명나라 주민들이 후금군을 피해 조선으로 대거 몰려들면서 발생한 난민들


조선은 세 가지의 난제에 직면했다. "우선 '천조(天朝)의 장수'인 그를 접대하는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모문룡뿐 아니라 당시 조선에 들어왔던 명군 장수들 가운데는 처자식을 동반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에게 식량과 거처의 제공을 요청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게 되면서 조선은 후금과의 접촉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1621년 정탐을 위해 정충신을 후금 진영에 파견하면서도 모문룡이 알까 봐 그것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실제 당시 명의 신료들 가운데는 모문룡에게 조선을 견제하여 후금측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감시자' 역할을 주문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조선은 무엇보다 모문룡 때문에 후금을 자극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모문룡이 "조선과 연결하여 후금의 배후를 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 영토에서 장기간 주둔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데다 그가 들어온 뒤로는 조선으로 드나드는 명 장졸들과 요민들의 수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다."(226-7)


"모문룡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던 광해군의 선견지명은 1629년에 입증되었다. 그해 모문룡이 영원순무(寧遠巡撫) 원숭환(袁崇煥)에 의해 처형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은 열렬한 중화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모문룡이 해마다 수십만 석의 군량을 챙기면서도 후금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결국 그는 요동을 수복하려면 모문룡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모문룡의 행태를 관찰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원숭환은 그를 쌍도(雙島)라는 섬으로 유인하여 처형하면서 12가지의 '죄악'을 들이댔다." "배부른 모문룡은 요동 수복을 꾀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다만 가끔씩 조선으로 가는 사신이 섬에 들를 때 후금을 치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지천으로 널린 재물을 밑천 삼아 뇌물로써 환관 위충현을 비롯한 부패한 조정 요인들을 구워 삶았다. 자신에 대한 감시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627년경부터는 아예 후금과 내통하고 있었다."(230-1)


"광해군은 '심하 전투' 이후 그야말로 '뻔질나게' 명 조정으로 사신을 보냈다. 명 조정에 감돌고 있던 조선에 대한 불온한 분위기를 탐지하고, 명의 재징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포석이었다. 1619년 11월, 광해군은 측근 윤휘를 보내 요동경략(遼東經略)에게 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만주의 진강과 관전에 명군을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 올 경우 명군이 달려와 구원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깜냥이었다. 이제 명과 후금의 대립 구도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명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궁극에는 명이 조선에 대해 더 이상 재징병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고도의 전술이었다. 한마디로 명에 대한 '외교적 역공'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심하 전투' 이후 광해군의 대외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때 신료들의 주장은 거의 무시해버렸다. 신료들과 격렬한 찬반 논의를 벌인 끝에 보냈던 원병이 대패했기 때문이었다."(240-1)


# 광해군이 명의 징병 요구를 거부한 이유

1. 임진왜란 당시 겪은 전쟁의 참혹함과 후금의 강성한 위세

2. 왕권 강화 사업(특히, 토목공사)과 병행 불가

3. 즉위 이후 수시로 자신을 괴롭힌 명에 대한 ‘반명감정’


# 심하 전투가 국내에 미친 영향

1. 전투병 1만 명 징집, 군량 마련, 방한복 준비 등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다.

2. 그 와중에 전라도와 충청도에 심각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배가되다. 화적떼가 늘어나다.

3. 병사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억류되어 노동력 및 군사력이 훼손되고, 유족들의 슬픔이 끊이지 않다.


"병력을 징발하고 세금을 더 거두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던 전라도와 충청도, 도성 주변에서는 화적까지 날뛰었다. 후금에 대한 두려움에 방어대책 마련 과정에서 부과되었던 경제적 부담에 대한 반감이 더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대부들은 강홍립의 항복과 그 이후 광해군이 취했던 대외정책을 '강상 윤리를 무너뜨린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강홍립이 후금군에게 항복했던 것이 화이론자인 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이미 영창군이 죽고 폐모논의가 제기된 이후 조정에서 마음이 떠난 그들이었다.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하려 들더니 이제는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도와달라는 명의 요청마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려 했다. 그들이 보기에 조정에서 하는 일이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사대부들은 사대부들대로, 하층민들은 또 그들대로 조정에 대한 반감과 불만이 커져가면서 사회 전반이 동요하고 있었다."(249-51)


12장 반정인가 찬탈인가


"반정의 핵심 주체인 김류, 이귀, 김자점, 구굉 등은 대개 서인계열의 사대부들이거나 인조와 연결된 외척들이었다. 특히 사대부들 가운데는 이이, 성혼, 김장생의 문하들이 많았다. 이처럼 반정 주체들은 대북파에 비해 사제 관계로 연결된 학연적 기반이 확실하고, 성리학을 배운 '학인(學人)'으로서 자의식이 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첨 등 대북파의 견제에 밀리거나 계축옥사 등을 계기로 대북파의 '토역 대상'이 되어 조정에서 쫓겨남으로써 광해군과 대북파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과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광해군 정권이 계속될 경우 주변부를 빙빙 돌다가 일생을 마쳐야 했을 것이고, 아니면 또 무슨 명목의 역모죄에 걸려 비명횡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광해군대 반정 주체들은 몇 사람을 빼고는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설사 벼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광해군 정권 하에서 입신할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 '주변인'들이 대부분이었다."(263-6)


# 반정공신들의 밀약 :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처럼) 왕과 국혼國婚관계를 맺고, (정인홍처럼) 위세 있는 산림을 중용한다.


"'난신적자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명 조정의 강경한 분위기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군신(君臣)' 사이의 명분이나 종주국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려면 조선의 반정 주체들을 토벌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명의 현실은 조선과의 관계에서 명분만 따지기에는 너무 급박했다. 어떻게 해서든 조선을 후금과의 대립 구도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이제이'를 하려면 조선을 다독거려야 했다. 신료들 가운데는 인조를 잠정적으로 승인하되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명을 도와 후금을 치는가를 살펴본 뒤에 최종 결정을 내리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명이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이었다." "1625년(인조 3) 1월 희종황제는 모문룡에게 칙서를 내려 마침내 인조를 조선국왕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 그 사실을 조선에 전달할 것과 조선과 힘을 합쳐 후금을 정벌하라고 지시했다."(275-6)


13장 권력 16년, 춘몽 16년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괄이 평안병사로 부임한 직후 문회, 이우 두 사람이 이괄을 밀고했다. 이괄과 한명련, 기자헌 등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624년 1월 17일 인조가 이괄을 잡아오라고 보낸 금부도사가 이괄의 병영으로 들이닥쳤다. 이괄은 그들을 베어 죽이고 남하했다. 이윽고 정부군의 주력인 장만 휘하의 병력을 깨뜨리자 임진강을 지키던 이귀는 도망쳐서 인조에게 파천하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결국 파천했고 이괄은 서울을 점령했다. 이괄은 서울 점령 직후 흥안군(興安君)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선조의 열번째 아들로 인조에게는 숙부뻘이었다. 한번 배반한 인물은 계속 배반한다고 했던가? 인조가 경기 방어사로 임명한 이홍립은 이괄에게 투항했다. 인조반정이 있었던 당일 훈련대장으로서 반정군에게 투항했던 바로 그 이홍립이었다."(282)


"이괄에게 혼쭐이 난 반정공신들이 반란 진압 이후 내놓은 대책은 표피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기찰(譏察)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공작정치'의 냄새가 짙었다. '반(反)혁명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전방위적으로 사찰을 강화했다." "기찰로 불리는 공작정치가 강화되면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불신 풍조를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감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들의 훈련이었다. 기찰이 강화되면서 지방의 무관들은 습진(習陣, 병사들을 모아 진을 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을 기피했다. 혹시라도 역모를 꾀하기 위한 병력 동원훈련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훈련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후유증은 후금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대로 나타났다." "반정공신들은 직무 유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사욕(私慾)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83-4)


"(강화도로 유배된) 광해군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들과 연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태안으로 옮겨졌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뒤부터 인조나 반정공신들이 보기에 광해군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쉽사리 그를 '처리'해버릴 수는 없었다. 광해군이 영창군을 죽였다는 것을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그들로서는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광해군은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 이듬해인 1637년에는 다시 제주도로 옮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바로 그해였다. 후금과 사단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던 광해군인만큼 인조나 서인들의 입장에서는 그가 자신들과 가까이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폐위된 이후에도 19년을 더 살았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세월보다 더 길었던 셈이다. 그는 1641년(인조 19) 7월 1일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눈을 감았다."(2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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