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안병직 옮김 / 이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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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제4차위안단


1942년 5월초부터 헌병이나 경찰이 아닌 위안소업자들이 주축이 되어 모집한 "제4차위안단의 위안부로 동원된 사람들은 위안부 경험이 있는 약간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위안소업자들이 위안부들을 동원하는 방법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포로심문보고』에서는 위안부의 동원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비스'의 성격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병원에 있는 부상병을 위문하고 붕대를 감는 일이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장병을 즐겁게 해주는 것에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들 의뢰인들이 사용한 미끼는 다액의 수입, 가족의 부채를 변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 고되지 않은 노동과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신생활에 대한 전망이었다. 이와 같은 허위 설명을 믿고 많은 여성이 해외근무에 응모하고, 2~3백 엔의 전차금(前借金)을 받았다.〉" 23)


"제4차위안단은 일본군부에 의하여 조직되었기 때문에 위안소업자들과 위안부들은 군속적(軍屬的) 대우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외국으로 출국하면서도 여권을 가지고 출국했던 것이 아니라 군이 발행하는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출국했다. 그리고 그들은 출국할 때 여객선이 아니라 군용선을 이용하였으며, 이동할 때에는 주로 군용 교통수단을 이용했기 때문에 요금은 무료였다. 위안부 동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전차금이 어디에서 지출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전차금을 스스로 부담했다는 몇몇 위안소 경영자의 증언이 있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1938년 1월 상해 파견군사령부가 오오우치에게 일본에서의 위안부 모집을 의뢰했는데, 그때의 모집조건은 〈작부는 16세로부터 30세까지, 전차금은 500엔으로부터 1000엔까지, 가업년한은 2개년, 소개수수료는 전차금의 1할을 군부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26-7)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군위안소의 유형으로서는 군직영위안소, 군전용위안소 및 일반위안소 중 군도 이용하는 위안소의 세 가지가 있었다고 이해되어왔는데, 요시미 교수는 위안소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위안소는 경영 형태로 보면, 세 가지 타입이 있었다. 첫째는 군직영의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 둘째는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 셋째는 군이 지정한 위안소로, 일반인도 이용하나, 군이 특별한 편의를 요구하는 위안소이다.〉 군위안소 중에서는 군전용 위안소가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데, 많은 경우 이 유형을 민간이 경영하는 위안소로 이해하고 있으나, 요시미 교수는 그 유형을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로 규정했다. 일기에는 위안소의 유형을 가리키는 낱말이 네 가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항공대 소속 위안소', '병참 관리 위안소', 군전용 위안소' 및 '지방인 위안소'이다."(32)


"군위안소의 경영은 경영자(夫婦), 쵸우바 1명, 나카이 1명, 심부름꾼 1~2명 및 위안부 20명 전후로써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쵸우바의 기본업무는 위안소를 방문하는 장병들을 맞이하여 그들을 원하는 위안부에게 안내하고 회계장부를 정리하는 일일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일기의 필자는, 시장에서 위안소의 식자재를 구입하고, 위안소의 대외업무도 담당했다. 위안부들에 관련되는 일로서는 취업 및 폐업의 허가 신청, 성병검사에의 안내, 저금 및 송금 업무와 귀국절차의 업무 등이 있었으며, 소속기관과의 관련업무로서는 연대사령부, 병참사령부 혹은 경무부에 대한 영업일보, 영업월보 및 월별 수지계산서의 제출 등의 업무가 있었다. 위안소가 소속기관에 내는 각종 보고서들을 보면, 위안소 경영의 독립성이 매우 취약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본래 위안부의 모집부터 경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군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본질에 있었을 것이다."(34-5)


"위안부와 업자들의 화폐수입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서는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 아주 많다. 첫째는 일본군 점령지에서의 전시하이퍼인플레를 어떻게 감안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문옥주의 예금통장에 대한 고바야시 히데오 교수의 시산(試算) 결과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옥주의 통장에 기입된 예금을 가지고 인플레를 감안하여 일본의 엔 기준으로 그녀의 실질수입을 계산하면, 1941년 12월의 일본물가를 100으로 하고 버마에서의 월 인플레율을 11~14%로 보았을 때, 1943년 4~9월의 2150엔은 264~405엔, 1943년 10월~44년 3월의 2641엔은 148~266엔, 1944년 4~9월의 900엔은 23~48엔, 1945년 4~9월의 20860엔은 110~321엔으로서 합계 527~1040엔으로 계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폐수입도 송금하는 데 엄청난제약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송금이 허락되었다 하더라도 조선에서 그것을 현금으로 인출하는 데 있어서도 큰 제약이 있었다."(39-40)


"위안부들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의 성격도 모른 채 전차금과 높은 수입이라는 미끼에 끌려들어 '유괴나 다름없는' 인신매매나 사기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위안부의 동원 방법을 '광의의 강제동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취업허가는 위안부가 위안부로서 종사할 수 있는 장애요인이 없는 한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폐업허가에 있었다. 폐업허가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위안부로 동원될 때의 계약조건이었는데, 그것은 주로 전차금의 문제였을 것이다. 문제는 전차금을 변제했을 경우에도 폐업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폐업이 어려웠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위안소가 군편제의 말단조직으로 편입되어 군부대와 같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들은 항상 추업부(醜業婦)로 천시되었다. 군위안부들이 놓인 위와 같은 처지를 '성적 노예상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41-2)


1부 번역문


1943년 1월 1일 금요일. 맑음

대동아성전 2주년인 1943년 신춘을 맞이하여 1억 민초는 엎드려 삼가 폐하의 만수무강하심과 황실의 더욱 번영하심을 봉축하는 바이다. 나는 멀리 고향을 떠나 버마 아캬브 시 위안소 칸파치 클럽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궁성을 향하여 절을 하고 고향의 부모, 형제 및 처자를 생각하고 행복을 빌었다. 동쪽 하늘의 햇빛도 유심한 듯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와 국가의 융창(隆昌)을 축복하여 준다. 오직 금년 한 해도 무사히 행운 속에서 보내게 하여주옵소서. 처남과 O환(O桓) 군은 위안부를 데리고 연대 본부와 기타 서너 곳에 신년 인사차 갔다 왔다. 일선 진중에서 맞은 새해 첫날도 다 가고 밤이 되어 금년의 행운을 꿈꾸며 여러 날 잠을 못 자서 괴롭던 차에 깊이 잠들었다. p.46


1월 13일 수요일. 맑음

버마 아캬브 시 위안소 칸파치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다. 연대 본부 의무실에 가서 위생 콘돔 1000개를 가져 왔다. 밤 1시 반경에 자다. 어젯밤에는 적기(敵機) 소리가 나지 않았다. p.48


3월 10일 수요일. 맑음

버마 페구 시의 카나가와 씨 댁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다. 랑군의 카나자와 군이 만달레에 갔다 오는 길에 페구에 들러 내가 있는 줄 알고 찾아왔더라. 종일 놀다가 저녁을 먹고 자다. 카나가와 씨의 위안소를 55사단에서 만달레 근처의 이에우(Ye-U)라는 곳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이 있어 오늘 모처 부대장이 와서 가자 하는데, 위안부 일동은 절대 반대하며 못 가겠다더라. p.61


4월 5일 월요일. 맑음

버마 페구 시 사쿠라 클럽의 카나가와 씨 처소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사쿠라 클럽의 위안부 후미코는 복부가 크게 아파 오후에 해부 수술을 한다더라. 후미코는 작년에 만달레에 있을 때에도 맹복염(盲腹炎)으로 수술하였는데, 이번에 또 수술하는 불행한 몸의 주인공이다 저녁을 먹고 분라쿠관에 놀러 가니 랑군에서 오오하라 씨가 와 있기에 같이 밤 12시 남짓까지 놀다가 사쿠라 클럽으로 돌아와서 잤다. p.67


7월 18일 일요일. 맑고 조금 흐림

인센의 숙사에서 일어나 무라야마 씨 댁에서 아침을 먹고 종일 놀다. 아캬브에서 온 아사하라 씨는 이번에 부대가 이동하여 온 타운기에 갔다 왔는데, 선발대장 치바 대위의 편지를 전하더라. 열어보니, 위안소를 타운기에서 경영하도록 아캬브에서 여자들이 오거든 같이 오라는 것이더라. 오늘 밤부터 무라야마 씨 위안소 내의 일실에서 호이 군과 같이 자기로 하였다. p.94


7월 29일 목요일. 흐리고 비

인센 요마 거리의 무라야마 씨 댁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아라이 씨와 병참에 가서 콘돔을 배급받았다. 위안부 진료소에 가서 등록되지 않은 2,3인의 위안부에게도 진찰을 받게 했다. 이전에 무라야마 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 생활하려 나간 하루요와 히로코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김천관에 있게 되었다더라. 중국인 거리에 들러 저녁에 인센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밤 1시경에 자다. p.97


1944년 2월 22일 화요일. 흐리고 조금 비 오고 맑음

싱가포르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니시하라 군과 고리짝 짐을 싸고 있는데, 위안부들이 돌연 취객이 검을 빼 폭행한다기에 니시하라 군이 곧 달려가서 취객을 붙들어 진정시키느라 짐을 완전히 싸지 못하였다. 밤 1시경에 잤다. p.157


2월 29일 화요일. 흐림

싱가포르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요코하마 정금은행에서 저금 1000엔을 찾아 200엔은 전신환으로 고향의 동생에게 부쳤다. 손가방 1개를 사고, 악어지갑 1개를 주문하였다. 물가가 높이 솟아 지갑 한 개에 75엔이다. 이렇게 물가가 폭등하면 장차 어찌 될까. 금년이 윤년이라 2월이 하루 더 있어 29일이 되다. p.159


4월 25일 화요일.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보이를 데리고 시장에 갔다 왔다. 아침을 먹고 클럽 전원이 13시 15분 야스쿠니 신사의 임시대제(臨時大祭)에 즈음하여 엄숙히 요배식을 거행하였다. 카나가와 광옥과 시마다 한옥 2명을 데리고 검역하러 갔더니, 오후에는 휴무라 검역을 못 하고 돌아왔다. 밤 1시경에 잤다. 피마자를 심었다. pp.172-3


4월 29일 토요일. 맑음

전쟁 중의 제3회 천장절이다. 천황 폐하께서는 제44회의 탄신을 맞이하셨다. 우리들 민초는 오직 성수의 무궁하심을 봉축하옵나이다. 특별시청 앞 광장에서 배하식(拜賀式)을 거행하였다. 오늘은 천장절의 경축일이라 군인의 외출이 많아 클럽의 수입이 2450여 엔으로 개업 이래 최고 기록이었다. 밤 1시 남짓에 쵸우바 일을 마치고 잤다. p.173


4월 30일 일요일. 맑고 조금 흐리고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보이를 데리고 자동차로 비치로드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아 왔다. 오늘도 군인의 외출이 많아 어제의 최고 수입을 훨씬 초과하여 2590여 엔의 최신 기록이다. 밤 2시경까지 쵸우바 일을 보다가 잤다. p.174


6월 9일 금요일.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보이를 데리고 오챠로드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아 왔다. 오늘 검미 결과는 입원 중인 2명은 퇴원하고 2명만 입원일 뿐, 집에 있는 여자는 전부 합격되었다. 이 달부터는 여자는 담배 배급이 없는데, 클럽의 가업부에 대해서는 접대용으로서 특별히 매일 10개비의 배급이 있다. p.184


10월 28일 토요일.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고 싱가포르 종합물자배급조합에 가서 손수건과 양말 특별 배급을 받아 왔다. 저녁을 먹고 밤 1시경까지 쵸우바 사무를 보다가 잤다. 필리핀 동방 해상과 레이테(Leyte) 만에서 적함선 70여 척을 격침하고 파괴한 대전과가 있다. 클럽 종업원의 신체검사를 하였다.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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