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와 문명 - 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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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1세기부터 15세기 말까지 유럽 기술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보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갈수록 수가 늘어나던 수공업자들이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응용역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응용역학을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실용적 용도로 쓰기 위해서 연구했다. 기계는 생산과정에서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방앗간mill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적절한 사례이다. 물레방아는 기원전 1세기에 소아시아에 알려졌고 수직 형태의 풍차는 서기 7세기 페르시아에 알려져 있었지만, 방앗간 건설이 진정으로 크게 유행한 곳은 중세 유럽이었다. 무명의 수공업자들은 일련의 기발한 기계장치를 고안해 물이나 바람에서 나온 회전력을 망치, 압축기, 드릴, 맷돌 등 잘 분화된 여러 운동 장치로 전환했다. 유럽은 곧 놀랄 만큼 많은 방앗간으로 뒤덮이게 되었다."(30-1)


"실리주의적 풍조는 중세 도시 문명에서 탄생했고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촉진했으며 베이컨 철학에 의해 범위가 좁혀지고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 풍조는 새로운 기계에 대한 커져가는 열광과 그러한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대한 열렬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다른 한편으로, 역학, 화학, 현미경 관찰, 정성定性 천문학은 이제 막 태동했고 새로운 탐구 분야로의 진입 장벽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시계공, 렌즈 제작자, 정밀 도구 제작자 같은 고도로 숙련된 수공업자와 과학자가 발상과 제안을 주고받은 사례는 많다." "아울러 유럽에는 학자와 수공업자 이외에도 학자나 수공업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은 아마추어 과학자 집단이 대규모로 존재했고 그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 초기 과학의 진보에서 이 명인virtuosi들이 했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확실히 숙련공들이 수행한 역할보다 훨씬 컸다."(48-9)


1장 유럽, 시계를 만들다


"종은 중세 도시 생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종은 공동체의 삶을 지배했고 종소리는 〈만물을 질서와 평온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모두가 종소리의 의미를 알았고 종소리는 언제나 메시지를 전달했다. 종소리는 시각을 알려주고, 불이 났거나 적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군대나 평화로운 모임에 소집하며, 잠자리에 들 때, 일어날 때, 일터에 나갈 때, 기도할 때와 싸울 때를 알려주고 장을 열 때와 닫을 때를 알리고, 교황의 선출과 국왕의 즉위, 승전을 축하했다. 널리 퍼진 믿음에 따르면 종소리는 폭풍과 전염병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도시와 교회, 수도원이 아름다운 종이나 소리가 맑은 종을 갖는 것은 그곳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효율적으로 종을 치는 장치도 개발되었다. 톱니바퀴와 왕복 지렛대로 구성된 이러한 장치들이 기계식 시계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다."(54-5)


"도시는 급성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도시 문화가 전례 없이 활발하게 꽃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종 제도와 전통, 기득권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될 경직성에 아직은 발목이 잡히지 않았을 때였다. 13세기는 대학과 고딕 성당의 확산, 조토 디 본도네와 조반니 치마부에가 가져온 미적 혁명,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찾고자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려는 유럽인 최초의 시도를 목격한 시기였다. 그 세기 후반에는 최초로 대포가 제작되었다. 기계식 시계와 대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이 전적으로 우연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수적으로 또 질적으로, 금속 직공의 괄목할 만한 성장의 소산이었으며 뒤에 가서 보겠지만 초창기 시계 제작자 다수가 또한 대포 제작자였다. 대포와 기계식 시계의 동시 출현은 유럽식 발전의 특징을 증언하는 것이면서 또한 앞으로 전개될 양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56)


"시계, 특히 커다란 공공 시계는 당시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시계를 설치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은 대개 지역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는 특별히 임명된 〈관리장〉의 정기적인 임금까지 포함되었다. 시계를 설치할지 말지의 문제는 종종 길고 열띤 논쟁 끝에 결정되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의 공공 시계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본질적으로 유용한 물건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58-9) "아무도 시계가 없거나 극소수만이 시계를 휴대하고 있던 시대에 시각을 알리는 공공 시계의 유용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실용성만이 언제나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다. 일보 도시들은 15세기 한 프랑스 문헌이 표현한 대로, 〈도시를 빛낼 크고 훌륭한〉 기계를 갖고 있다는 명성을 두고 다른 도시와 경쟁했다." "따라서 도시의 자부심, 실용성, 기계에 대한 관심이 결합하여 비교적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시계의 확산이 촉진되었다."(64)


공공 시계가 보급되면서 점차 가내용 시계가 확산되는 길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추가 유일한 원동력인 한 가내용 시계는 쉽게 옮길 수 없었다. 그것들은 받침대로 받쳐야 하거나 벽에 단단히 고정시켜야 했다. 쉽게 옮길 수 있는 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원동력을 고안해야 했다. 동시대의 누군가에 따르면, 위대한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태엽 장치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1410년이 되자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태엽〉으로 돌아가는 시계를 제작하고 있었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증거로 보았을 때 시계에서 태엽을 사용하게 된 시기는 적어도 15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태엽 발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태엽의 발명으로 쉽게 운반 가능한 시계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 가서는 손목시계와 회중시계 같은 휴대용 시계의 제작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76-7)


"대부분의 시계가 쇠나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공공 시계였으므로 시계 제작자들이 대장장이나 자물쇠공, 총포 대장장이, 일반적인 금속 노동자인 것은 이해할 만한다. 하지만 가내용 시계와 회중시계가 점차 흔해진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변했다. 더 작은 시계들은 값비싼 장치였고 부유층이 소유했다. 시계는 사치품이라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를 특징짓는 장식 과잉 열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새로운 유행을 만족시켜야 하는 수공업자들은 이제 대장장이나 자물쇠공보다 보석 세공인의 기술이 필요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커다란 공공 시계 제작자〉와 〈작은 시계 및 회중시계 제작자〉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직 일반화된 현상은 아니었지만) 시계 제조업이 두드러진 산업으로 발전한 제네바 같은 중심지는 시계공들이 눈에 띄는 사회적 지위도 획득했다."(83-4)


"18세기가 밝아오자 런던과 제네바는 유럽 시계 제조업의 최대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두 중심지의 부상과 더불어 시계 제작 및 상업에서 새로운 원原산업적, 원原자본주의적 작업 방식이 출현했다. 특히 17세기 전반기 이후 시계 제작이 발달한 지역의 수공업자들은 특정 부품 생산을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태엽 제조공이 최초로 출현한 전문 직공으로 보이며 다른 전문가들도 곧 뒤를 따랐다. 18세기 초에 런던 클라컨웰 지구의 여러 거리들은 탈진기 제조공, 선반공, 원뿔형 도르래 절단공, 비밀 태엽 제조공, 마감공 같은 직공들이 차지했다. 이미 1701년에 회중시계 제작은 분업의 이점을 증명하는 실례로 꼽혔다. 제네바에서는 두 전문 직공 집단이 시계공 길드와 구분된, 자신들만의 길드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따라 조립공들은 1698년에, 조각공들은 1701년에 길드를 조직했다. 이러한 발전은 자연히 다른 직종에도 영향을 미쳤다."(106-7)


2장 중국, 시계와 조우하다


"대포를 탑재한 원양 범선으로 유럽인들은 대해의 주인이 되어 이슬람의 해운과 교역 대부분을 파괴하고 아시아 내 무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세계 무역은 본질적으로 아메리카에서 동쪽의 유럽으로, 그곳에서 다시 동쪽의 아시아로 다량의 은이 유출되고 그 반대 방향으로는 다량의 상품이 이동하는 것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서양인들에게 서양 상품에 대한 동양의 낮은 수요는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아시아의 제품들이 주요 경제 부문에 걸쳐 유럽 시장에서 유럽의 상품과 성공적으로 경쟁한다는 사실이었다. 브리스톨의 상인이었던 존 캐리가 표현한 대로 〈동인도 무역은 우리에게 매우 해로운데 우리의 정금을 수출할 뿐 우리의 상품이나 제품은 거의 수출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제조된 상품을 수입해와 우리 제품의 소비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으니 기계식 시계가 그중 하나였다."(118-22)


"시계는 예수회원들이 베이징의 궁성 문을 열 때도 활약했다. 소문에 따르면 예수회원들은 예를 갖춰 조정에 나가 황제에게 시계 두 점과 다른 공물을 몇 점 바치고 싶다고 간청했다. 시계 가운데 하나는 쇠로 만들어졌고, 도금된 용과 독수리 및 기타 형상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형 시계였다. 나머지 하나는 도금을 한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태엽으로 돌아가는 작은 시계였다. 둘 다 종을 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었다."(125) "〈스스로 울리는 종〉에 대한 천자들의 애착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17세기와 18세기 내내 시계와 자동 창치, 그리고 그와 비슷한 아름답고 신기한 장치들이 끊임없이 베이징의 황궁으로 흘러들어갔다. 강희제(1662~1722년 재위)는 황궁에 크고 작은 시계를 만드는 제작소를 차리기까지 했고 특유의 유연성을 보인 예수회원들은 예수회에서 전문 시계공을 선발해 중국 선교단에 포함시켰다."(129)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의 중국인들은 서양 시계와 천문학의 관련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서양 시계를 장난감으로, 오직 장난감으로만 보았다." "16세기 말에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중국인들이 유럽의 어떤 물건에도 관심이 없지만 〈온갖 종류의 렌즈만은, 특히 형형색색의 렌즈만은 구입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유럽인들이 렌즈를 가지고 현미경과 망원경, 안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동안 중국인들은 렌즈를 멋진 장난감으로 사용했다.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렌즈와 시계, 여타 기기들은 유럽 사회가 느끼던 특정한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발되었고 그 필요는 다시 유럽이 자신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기계 장치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중국인들은 그것을 그저 재미나고 특이한 물건으로 대했다."(131-2)


"중국의 관료 정치 및 관료제적 구조가 중국 수공업자들의 잠재력이 꽃필 기회를 방해했다고 볼 근거가 있다." "꼭 금전적으로 표현된 유효수요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다른 보람 있는 자극들이 수공업자들을 독려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수공업자를 대하는 당시 관리들의 태도를 두고 권력 남용의 무수한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쉽게 일축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명대 중국의 지배적인 사회문화적 가치 체계는 실제로 수공업자와 기술을 천대했다. 올바르게 지적된 대로, 〈예술가artist와 수공업자artisan는 서로 다른 인종이나 마찬가지였다.〉 〈교양 있는 중국인은 수공업자의 작품을 감상할 때 마치 비버의 영리한 작품을 살펴볼 때처럼 놀랍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명대 중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 체계는 수공업자를 억압하고 응용과학과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방해했다."(147-8)


"사실 아래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모호하고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왜 중국은 시계와 대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왜 중국은 산업화로 나가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암암리에 비중국적인 조건에서 중국을 평가한다. 그러나 로빈 G. 콜링우드가 썼듯이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가 한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왜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중국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라는 묻는 것은 다소 예의 없을 뿐 아니라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150-1)


에필로그


"시계가 등장한 직후부터 사람들은 활동 시기를 서로 맞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시간에 무척 민감해졌고 궁극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일은 필요이자, 미덕, 집착이 되었다. 따라서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계를 갖게 될수록 다른 사람들도 그와 유사한 장치를 가져야만 했고 기계는 자신이 확산되는 조건을 창출했다. 그와 동시에 시계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바꾸고 있었다. 유럽의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불가항력으로 진행되었다. 균등한 시간 체계가 계절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불균등한 시간 체계 그리고 그 밖의 시간 구분 방식들을 대체했다. 〈첫 미사 시간〉이나 〈저녁 기도 시간〉 같은 표현들이 완전히 폐기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동일한 길이의 〈시계의of the clock〉 시간(정각o'clock)이란 더 추상적인 표현이 점차 자리를 잡았고 마침내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156-7)


"기계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나 〈중립적인〉 도구는 아니다. 우리는 기계를 사용하면서 기계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생텍쥐페리는 〈기계는 조금씩 인간성의 일부가 될 것〉이며 〈모든 기계는 자신의 기능 속에서 원래의 정체성을 잃고 점차 [인간의] 녹이 끼게 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기계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우리 역사 점차 녹이 껴가고 있고 인간사를 다루는 데 언제나 유용하거나 이롭지많은 않은 기계적 세계관에 조금씩 물들어간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다는 대로 〈기계가 끼치는 해악은 인간 자신도 기계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만이 기계를 그렇게 덮어놓고 비난할 것이다. 우리는 갈수록 더 많은 기계와 더 좋은 기계가 절실하다. 경제와 기술의 발전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계를 좋고 훌륭한 용도로 쓸 수 있도록, 철학의 발전과 인간사를 다루는 능력의 발전도 간절히 필요로 한다."(1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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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의 등장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4
아론 구레비치 지음, 이현주 옮김 / 새물결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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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개인은 파악하기 힘들다


"바이넘은 (12세기의 개인화 과정 연구에서) '내적 인간(Homo interior)'에 대한 관심이 계발될 수 있었던 성직자와 수도원 공동체에 대한 분석만으로 논의를 국한시킨다. 그녀의 의견에 따르면, 이 시대의 남녀는 자신 안에서 인간 본성, 즉 '자아'(그 자신[seipsum], 육체적 존재[anima], 개인[ego])를 발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신의 이미지[imago Dei])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개인은 현대적인 의미의 개인이 아니라 중세 말에 발견되고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개인이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 풍경'(자아의 발견)에 대한 관심과 '개인의 발견'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벨라르와 그 밖의 다른 12세기 저자들은 윤리 문제를 논할 때는 진지한 의도를 갖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들은 개인을 유형이나 '모범'에 따라 나누었다."(28)


"이 시대 사람들은 '모범'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이미 존재하는 형태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찾고 또 발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 집단의 수가 증가하고 일종의 경쟁(구 수도회와 신 수도회)이 심해짐에 따라 사회적 역할의 다양성에 대한 자각이 핵심적인 쟁점이 되었고,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바이넘은 각자 고유한 내적 동기와 감정을 가진 독립적인 개인을 12세기 종교 생활의 중심에 놓는 것은 잘못이며, 모든 개인은 독특하며 따라서 개인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만을 부각시키는 것 또한 잘못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에 들어와서 생긴 것이지 중세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내적 동기에 대한 탐구는 특정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함께 등장했으므로 이 시대에는 개인적 삶의 방식과 같은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과 집단은 다음 세기가 되어서야 분리되기 시작했다."(29-30)


2장 개인과 서사시 전통


"'영웅적'이라는 말은 스칸디나비아인의 의식에서 발견되는 기본 범주 가운데 하나다. 이 개념은 인간적 삶을 뛰어넘는 형식 속에서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가진 인간이지만 완전한 개인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영웅적이라는 범주는 이 시대의 시간관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영웅의 영광이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래에서였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고대의 시의 저자와 청중은 모두 영웅의 죽음에 주목했다. 영웅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짧은 생애 동안 영웅은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위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영웅의 태도는 미래를 바라보는 태도에 의해 형상화되며, 죽음은 영원불멸한 영광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세 가지 범주(영웅주의, 죽음, 시간)는 중세 내내 북유럽 사람들의 삶을 이끈 윤리적 규범의 핵심적인 측면이었다."(50-2)


"이 세 가지 요소 외에 운명(Fate)이라는 범주를 추가할 필요가 있는데, 운명은 세 가지 범주를 포용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영웅은 업적을 성취하고 마지막 죽음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그가 걸어나갈 길은 모두 '예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족 고유의 사상 체계에서 운명은 이 세계의 위나 저편에 있는 얼굴 없는 '운명(fatum)'도 아니며 눈 먼 운명의 여신(Fortuna)의 수레바퀴도 아니다. 운명(destiny)은 '프로그램'처럼 영웅 안에 '입력되었지만', 이 운명은 삶에 대한 개인적 태도의 일부분으로 지각되기도 했다. 영웅은 운명이 지시한 대로 따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운명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운명을 '창조한다'. 이처럼 영웅의 운명은 영웅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며 영웅은 운명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이고 영웅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이 놀랄지라도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이 운명을 알린다. 영웅의 운명은 그의 존재의 일부분인 것이다."(52-3)


"스칸디나비아의 서사체 산문(narrative prose)인 사가는 문학 장르로 중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역사 자료다." "사가의 등장인물은 대체로 실존 인물들이다. 사가는 소설이 아니다. 사가의 청중뿐 아니라 저자도 사가에 서술되는 이야기는 실제의 삶에 충실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중세인이 이해하는 현실은 오늘날 우리가 현실이라고 이해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중세의 현실은 환상과 기적의 영역과 결합되어 있다. 사가에는 현실의 사람 외에 온갖 종류의 초자연적 창조물, 늑대인간(werewolves), '살아 있는 죽은 자(living dead)'가 등장한다. 마법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행동과 주술이 그랬던 것처럼, 예언과 꿈은 반드시 실현되며 사건의 진행을 결정짓는 요인들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가는 이 모든 환상적 요소들을 마치 일반인들의 행동이나 대화를 다루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또 그와 비슷한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있다."(81-3)


"무엇보다 사가 저자의 주된 관심인 결투는 각자의 이익과 열정에서 비롯된 인간들 사이의 투쟁이었고, 이 결투는 이와 관련된 인물과 그들의 자질이 드러나는 '인간적' 사건이었다. 결투를 통해 사가 영웅의 우수함이 측정되며 인간적 가치와 등장인물의 본질이 시험받는다. 결투는 인간의 모습을 한 인물들에 의해 수행된다. 그리고 그러한 결투의 기저에 깔린 동기가 엄밀한 의미에서 늘 인간적이거나 개인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더라도 그러한 이유는 사회의 눈으로 볼 때 개인이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의 개인은 집단 안에서 아직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았고 집단 원리가 이끄는 행동과 사상이 여전히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예와 공적, 좋은 평판, 가족, 친척, 친구의 명예에 대한 관심이 다른 사람들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였다." "사가의 저자는 영웅의 용기, 영웅의 강함과 전쟁 기술을 정성 들여 묘사한다."(88-9)


"사가에서 퍼스낼러티는 매우 애매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흐릿한 윤곽만으로 제시된다. 우리와 근접해 있고 좀더 이해하기 쉬운 문화에서 퍼스낼러티를 '원소'로 해석한다면, 이 시대의 개인의 퍼스낼러티는 그렇게 자기 충족적인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과 분리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개인은 가족적 연대, 소유나 우정으로 연결되지 않은 이방인이나 '외지인'과는 명백하게 구별된다.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개인은 신중한 입장을 취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언제라도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다." "주인공의 '자신과 같은 종류'의 동아리 안에서는 개인과 퍼스낼러티를 나누는 경계선이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이 동아리 안에서는 복수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즉 사가의 등장인물은 '자신과 같은 종류'와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다. 도리어 그는 자신의 집단에 융해되는 듯하다. 개인은 그저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고리일 뿐이다."(99-100)


3장 페르소나: 개인을 찾아서


"인간의 의식 속에는 모든 사회적 행동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세계상이 존재한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고 실제로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기독교는 개인의 제도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신앙일 뿐 아니라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르침과 의지에 따라 세워진 사회 공동체이다. '자연적' 인간 또는 '육체적' 인간과 세례를 받고 '기독교적' 인간으로 변모한 사람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 간극은 '기선성' 행위를 통해서만 건널 수 있다. 세례 행위는 다름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일인 동시에 '자연적 인간'이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식이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인간은 구원의 기회를 얻는다. 기독교 공동체의 '문화적 코드', 원리, 규범을 흡수한 인간(human being)은 한 사람(person)이 된다. 1234년에 나온 한 텍스트는 〈그리스도 교회의 세례를 통해 인간은 한 사람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161-2)


# 기선성(initiation) : 신학 용어로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고 인간의 모든 일을 미리 예정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성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를 통해 기독교는 개인의 '내적 공간'을 탐구하고 개인을 좀더 심오하게 이해하는 데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인간의 에고는 재해석되었고 추론과 오감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각, 의지, 인성을 가진 실체의 조합으로 파악되었다.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한 인간적 책임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주었던' 고전 시대의 전형적인 운명관을 받아들이는 대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운명도 아니요, 숙명도 아니요, 악마도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세계의 중심은 창조자를 대면하는 에고(ego)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극적인 감정으로 자신이 살아온 길에서 겪은 경험들에 반응했는데, 그는 젊었을 때는 죄가 넘치는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진정한 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기에 대한 앎은 신에 대한 앎, 즉 신에게 가는 길로 제시되었다." "개인의 자기 표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한 작품은 이 히포의 주교가 쓴 『고백록』이다."(164-5)


"그렇다면 중세 철학에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세 철학의 본질인 신학에서 개인은 어떻게 해석되었을까? 신학자는 개인이 아니라 '페르소나'를 다루고 있으므로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는 중세 내내 고도로 추상적이었다. 보에티우스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이성적이고 나눌 수 없는 본질(혹은 '이성적 본질의 개인적 실체')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전 자연에서 가장 완벽한 것, 즉 이성적 본질 속에 구현된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창조'보다는 '창조자'에게 사고를 집중하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또는 거의 유일하게 신, 즉 신성한 페르소나에 대해서만 말한다. 신성한 인성[예수]의 '페르소나들[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에 대한 탐구는 신의 삼위일체와, 신이며 인간인 그리스도의 이중적 본질에 대한 논의의 본질적 요소였다."(171-2)


"이 시대의 신학만이 개인의 인류학적 측면을 상세하고 고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유럽 언어의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돌려보면 퍼스낼러티, 개인성, 인간적 특성을 의미하는 모든 단어들이 얼마나 느리고 얼마나 힘겹게 일상적 언어에 편입되는지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심리와 관련된 개념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정착되어 일상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자아에 대한 개인의 태도나 자아의 자각을 의미하는 접두어 'self'와 관련된 단어들은 종교개혁 후에야 증가하였다. 개인적인 목표나 감정적 상태를 가리키는 일군의 단어들이 폭넓게 사용된 것 역시 종교개혁 이후였다. 개인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이해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개인의 영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독립적 존재로 간주되던 인간의 감정은 점차 개인의 감정적 성질, 즉 사람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해석되었다."(175)


4장 전기문학과 죽음


"세속적인 근심과 목적 추구에 얼마나 매몰되어 있었는지 몰라도 중세인들의 행동적이고 감정적인 삶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두려움은 갑작스러운 죽음, 말하자면 기도나 '선한 행동'으로 준비되지 않고, 고백할 시간이나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용서받을 시간도 갖지 못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 시대에는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사제들은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죄의 참회와 속죄를 미루어서는 안 되며 적절한 시기의 참회는 신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끊임없이 설교했다.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에 그려진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는 무시무시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춤추는 사람(이들은 다양한 사회적 지위와 계층을 대표하고 있다)들 중 누구도 누가 이 춤을 이끄는지 그리고 언제 이 춤이 끝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179-80)


"중세 사람들은 동시에 두 세계에 초점을 두면서 세계를 성찰했고, 두 세계 사이에 지속적이고 활기찬 쌍방향 소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 중세인들의 신념에 따르면 삶의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실 더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개인에 대한 진실한 평가는 생전의 행동을 근거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었다(기독교 이전 시대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누군가의 영광스런 업적은 그가 죽은 후에도 남아 있는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왜냐하면 모든 영혼에 판결을 내릴 '최고의 재판관(Supreme Judge)'이 존재하며 죽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죄인인지 정의로운 사람인지)는 판결이 내려지는 마지막 순간에야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피상적이고 무의미하다. 세속적 관심은 '영원'에 비하면 무의미하고 영원의 바로 그 문전에서만 영혼의 진실한 '가치'가 드러난다."(184-6)


5장 자서전: 고백록인가 변명서인가?


"학자들은 13세기 초에 고해성사가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는 사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의 주의를 끄는 것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공포된 결의문, 즉 모든 기독교인은 1년에 한 번 사제에게 고해해야 한다는 결의문이다. 규칙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고해는 신앙인들의 자기 분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고해는 자신의 행동이 죄가 되는지 정당한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해는 때때로 신앙인의 의식과 거의 관련이 없었고 고해성사의 신성모독으로 이내 타락하였다. 즉 수많은 신앙인들은 이런 종류의 자기 분석을 할 능력도 없었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고해성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도울 수도 없었으므로 고해는 피상적 의식으로 격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의 원리는 세워졌고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자각의 발전 과정에서 이것은 중요한 단계였다."(201)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가 보기에 개인의 행동의 옳고 그름 또는 죄에서 자유로운지 여부는 개인의 행동과 이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내적 동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아벨라르는 주로 죄의식에 기초해 구원의 문제에 접근하려는 당시의 보편적인 방법에 반대하여, 신앙을 내면화하려는 경향을 철학적으로 실체화하였다. 이러한 원리는 전 시대에 본질적이었던 전통과 근본적인 단절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 이전 세대의 사람들은 행동의 의도나 감정적 상태를 완전히 무시당한 채 행동 그 자체로만 비난받았다. 이들은 관련된 사람의 정신을 무시하고 객관적으로 조명된 행동 그 자체만을 고려했다." "아벨라르의 분석의 핵심은 한 개인의 의사(意思, wish)에 있었다. 개인이 죄의 길을 걷게 될지 아니면 포기할지는 이미 내려진 도덕적 선택에 의거한다. 복음서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 말하자면 그 안에 담겨진 도덕법을 잘 알지 못한 사람은 죄가 없다고 아벨라르는 생각했다."(224-5)


"따라서 고백과 참회는 의식이나 의무적 과정으로서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지만 저지른 죄를 자각한 결과 생기는 진지한 감정적 불안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는 중요하다. 개인은 자신을 최후의 심판을 받을 존재로 인식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개인의 의식에 필연적으로 매우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구원은 개인의 정신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외적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구원은 내적으로 죄를 정화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 신과 의식적으로 '연합'한 후 진실로 그 구원을 얻으려 희망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미 오래 전에 상징이 된 인물들에 대해 말할 때에도 이 철학가의 시야에서 개인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벨라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을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제시하는 대신, 비극적 상황에 사로잡힌 실제적 개인으로 제시한다. 아벨라르는 삼손이라는 성서적 인물 안에서 고통받는 인간을 바라본 최초의 작가였다."(225-6)


"아벨라르의 『나의 불행 이야기』를 자서전이라 부를 수는 결코 없다. 자서전과 유사한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충분히 진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치유할 수 없는 자만심의 정신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고백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 책은 오히려 변명서(apologia)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 참회 형식을 빌려 자기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 게다가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이용하여 자신을 고양시키려 하였다. 우리가 그의 신산한 삶의 사건들과 위기의 순간에 겪은 감정적 경험에 대해 많이 알게 된 후에도 개인으로서의 그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퍼스낼러티는 가면 뒤에 숨겨져 있다. 더욱이 가면은 여러 개다. 왜냐하면 그는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대로 이 가면, 저 가면을 갈아 썼기 때문이다." "이론상 고백록은 솔직한 진술들을 담고 있어야 하지만 아벨라르의 고백은 표현할 수 없거나 표현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숨긴다."(248-9)


"그러나 아벨라르 안에서 비로소 새로운 유형의 개인, 즉 자발적 개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자발적 개인은 자신의 내적 세계를 보호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끊임없이 불편한 관계를 맺으면서,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도록 부추기는 갈등에 사로잡힌 개인이다. 수도원, 학교, 철학자들 사이 그리고 교회 세계 등 모든 곳에서 음모의 덫이 항상 자기 주변에 만들어지고 있다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즉 그의 퍼스낼러티의 특징 때문에 그리고 그가 획득하고자 했던 새로운 사회적 지위 때문에 그는 어떤 집단과도 동화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따라서 끊임없는 갈등이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느낌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역으로 기존의 틀을 전혀 못 견뎌하는 개인에 대해 사회가 왜 그토록 유보적이고 종종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는가를 설명해준다."(251-2)


"야콥 부르크하르트, 칼 람프레히트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유럽 문화에서 인간 개인성에 대한 관심이 처음 등장한 것은 르네상스 시기라고 주장한다. 그 이전에는 관심의 초점이 늘 '전형적인 것'에 쏠려 있었고 개인성은 경멸되었다는 것이다. 12세기와 13세기에서 '개인이 발견된다'고 말하는 현대의 학자들은 비록 매개 변수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로 이런 전제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10세기와 11세기로 좀더 거슬러 올라가도 등장인물의 개인적 특성과 개인의 모습에 대한 관심이 문학에서 발견되며, 이런 관심은 연대기를 비롯한 여타 역사물뿐 아니라 몇몇 성부전에서도 발견된다고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왔다." "에티엔느 질송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분석하면서 이들을 일반적 법칙에 대한 예외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결코 예외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인간적 현상이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진다."(266)


6장 다섯 달란트 우화


"중세의 개인 탐구와 관련하여 독특한 흥미를 제공하는 베르톨트의 설교는 『다섯 달란트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베르톨트는 신성로마제국의 공위 기간(제왕의 서거나 폐위 등으로 왕좌가 비었던 기간) 동안 설교자로 활동했다. 중앙 권력의 약화, 강해진 선제후의 영향력, 내전의 증가, 강도 기사(robber knight)의 증가, 시민권의 침식, 지배자들의 변덕스러운 신민 통제, 소작농 탄압, 불안정한 도시 상황, 이 모든 것이 약 1250년과 1275년 사이의 기간, 정확히 말해 베르톨트가 설교한(그는 1272년에 죽었다) 시기의 독일의 상황이었다." "이처럼 혼란이 만연한 중요한 순간에 사람들은 특별히 인간성의 핵심, 본질, 운명에 대한 영원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정확히 이 시기에 독일에서 오직 정신의 탐구에만 전념하던 것이 예술적이고 지적인 활동의 흥미로운 만개를 가져온 것 역시 우연은 아니다."(273-4)


# 다섯 달란트 : 페르소나(자기자신), 소명(직분), 지상에서 보낼 시간, 재산, 타인과의 관계(이웃 사랑)


"베르톨트는 얼굴 없는 대중에게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청중은 개개인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베르톨트는 주인이 하인에게 맡긴 달란트에 관한 신약의 우화를 설교 주제로 선택했다(「마태복음」 25:14~30). 베르톨트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이 우화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달란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르톨트는 하인 한 사람에게 일 달란트를 맡긴 부분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그는세례받지 않은 아이들과 관련해서 이 우화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례받은 아이들을 의미하는 다른 하인에게 맡긴 두 달란트와 관련되는 부분 역시 한편으로 제쳐 두었다. 베르톨트는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세번째 하인에게 다섯 달란트를 준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베르톨트는 이 사람에게서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완전히 책임질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인간을 읽는다. 베르톨트는 개인의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278-80)


"신이 인간에게 준 첫 선물은 자유의지를 지닌 '페르소나'였고 두번째 선물은 개인의 사회적 기능 즉 지위와 직업의 소명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희망에 따라 직무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신의 의도를 따라 직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직업을 바꾸거나 한 사회 범주에서 다른 사회 범주로 이동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레겐스베르그의 베르톨트가 이해하는 '페르소나'는 사회적으로 결정된 개인이다. 개인의 특성은 계급, 지위, 사회 집단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베르톨트가 말하는 '페르소나'에는 법률 서적의 '추상적 개인'은 없었고 지주, 지배자, 기사, 농부, 장인, 상인 같은 다양한 사회 유형만이 존재했다. 상인의 퍼스낼러티를 구성하는 요소는 기사의 그것과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수도승의 퍼스낼러티의 구성 요소는 농부의 그것과 다르다. 베르톨트의 사상은 다양한 지위와 조합으로 이루어진 위계질서 속에 살던 중세 개인의 자각이 가진 특수한 속성을 분명히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287)


"따라서 '페르소나', 직무나 일, 시간과 재산은 분리될 수 없는 전체로 설교된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동시에 전체로서 사회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런 이익은 신의 의지가 준행되었다는 익숙한 종교적 형태로 제시된다. 달란트는 원래 신의 소유이지만 신은 선하게 사용되기를 바라며 인간에게 달란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신학 형태 이면에 설교자 자신도 인식 못한 새로운 세속적 내용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즉 친숙한 신학적 세계관과 상인 계급의 사회적 의식 안으로 슬며시 들어온 세계관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상인들의 의식의 중심에는 (최소한 비공식적이나마) 인간과 그들의 세속적 욕망이 들어서 있었다. 이들의 새로운 세계상은 창조자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았고 이런 의미에서 신학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미 새로운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다."(297-8)


7장 기사와 상인


"기사는 단독으로 전투에 임했으므로 무엇보다 자신의 힘과 용기에 의지해야 했다. 그를 보호하는 것은 잘 짜여진 전투대형이 아니라 사슬 갑옷, 무기, 대응 속도와 기마술이었다. 말을 탄 기사는 자족적인 이동 요새와 유사했다." "기사의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은 엄격한 법칙과 고도의 의식(儀式)에 종속되어 있었다. 기사 계급에 들어가기 위한 의식, 전장의 싸움이나 마상창시합 참가, 서정시와 유행, 언행에 대한 예절들은 모두 상징주의와 보편적 규약이 함께 녹아 있는 규범의 지배를 받았다.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그는 사회의 '중앙 무대', 특히 다른 기사들 사이에서 중앙 무대에 있을 때에만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생각했고 그렇게 느꼈다. 기사에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고귀한 사회 계층의 대표자로 제시해야 함을 의미했다. 기사는 마상창시합에 참가한 동료 기사와 아름다운 여성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306-7)


"기사들이 자기 자신을 특별한 사회적 기능을 가진 계급(ordo)으로 자각하기 시작한 역사적 시기는 13세기였는데, 이 시대는 기사들이 자신을 개인으로 보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롤랑, 프로방스의 서정시, 독일의 음유시처럼 기사도적 용기와 특별한 영웅을 찬양하는 서시시가 등장한 이 시기는 기사 문화의 상승기였다. 기사도 윤리는 새로운 가치를 낳았다. 우선 개인의 열정을 전례가 없는 높이까지 고양시킨 궁정식 예절과 궁정식 사랑이 그러했다. 그리고 생과 같은 우연한 속성이 아니라, 개인을 특징짓는 도덕적 자질의 모든 영역에서 확인되어야 할 기사의 명예와 고귀함 등 새로운 가치가 탄생하였다. 프랑스의 서정시인과 독일의 음유시인들이 예찬한 숙녀들은, 여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개별화된 이상(ideals)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면 세계를 좀 더 깊이 통찰하고 사랑의 감정적 경험에 주의를 집중하려고 노력한 기사도 시인들이 이루어낸 결실이었다."(308)


"알레고리와 기억을 활용한 『장미 이야기』 같은 로망스의 영웅은 방황하는 기사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대면하거나 진실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도 있는 탐험과 모험을 소망한다. 명민함, 다재다능, 교묘함, 심지어 다른 사람을 속이는 능력(engin, ingenium)이 기사에게 요구된다. 기사는 오직 자기만을 의지하고 자신의 정신·육체적 힘과 기술에 의지해야 한다. 한편 그는 일상적인 사회 세계와 분리되어 있으므로 이 세계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대때로 이 소외감은 광기와 거친 상태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런 극한 상황 즉 '경계선' 상태를 통과해야 로망스 영웅들은 내적 평화, 연인 또는 신과의 평화를 얻는다. 트리스탄과 퍼시벌, 그리고 궁정식 로망스의 다른 등장인물들에서 우리는 맹렬하게 자신의 내적 에고를 찾는 개인의 모습을 대면한다." "이처럼 기사의 사회·심리적 지위가 개인화로 향하는 특별한 경향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이런 경향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통제되고 있었다."(312-5)


"(상인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개인은 시간을 중시했다. 도시 거주자들은 시간의 흐름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사람들은 좀더 규칙적으로 시간을 계산했고 이와 동시에 도시의 명성을 높일 수 있게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의 도시의 탑에 기계 시계가 장착되었다. 시간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보물이라는 찬사를 더욱 빈번하게 듣게 되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의 인본주의자, 베르나르디노 다 시에나 같은 설교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상인들은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는다. 상인들의 일은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상인들은, 신은 자신의 일을 적절하게 조직하기 위해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을 돕는다고 믿었다. 지상 세계와 지고의 세계 사이에는 상호 이해와 상호 작용이 있었다. 이 시대의 많은 상업 문서에는 사업이 번영하도록 도와달라고 창조자, 성모 마리아 및 성인들을 부르며 호소하는 말들이 들어 있다!"(331)


"개인의 세속적 성공이 구원을 위한 신의 선택을 받은 징조라고 믿는 사상(프로테스탄트 윤리)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는 종교개혁은, 로마 문화권에서는 실패했지만 게르만 문화권에서는 성공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은밀한 심처(心處)' 속에 운명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회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행운'에 대한 고대 게르만 개념이 중세 말에 다시 한번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출신의 한 상인은 자신의 선조가 '자비, 행운, 이익'으로 신의 보답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세 개의 두운으로 이루어진 이 상투적 문구는 신의 은총과 상업적 수입 사이에 운명이 딸린 행운이 있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부는 한편으로 창조자가 높은 곳에서 내려준 성공과 기업가의 부단한 노력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 국가에서도 자본주의적 관계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보면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탄생에서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된다."(332-4)


8장 수사 살림베네와 다른 사람들


"살림베네가 글을 쓸 당시는 천년왕국설이 요아킴주의의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요아킴 델 피오레는 성령의 시대가 1260년에 시작될 것이라 예언했는데, 정확하게 바로 이 때에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호엔스타우펜의 힘이 붕괴되자 신성 로마 제국이 종식되고 있다는 전망이 대두되었다. 세계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 실현되고 있는 듯했다. 새로운 불안이 이탈리아에 출현하였으며, '형제단(Apostle Brethren)'으로 알려진 운동이 시작된 것도 1260년이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옹호했고, 재산, 노동, 부역을 거부했다. 이와 동시에 편타(鞭打) 고행자들의 행렬이 이탈리아의 도시와 마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쉽게 감격하고 심지어 신경을 다 소모할 정도로 뭔가에 매달리는 불건전한 신경병적 성향이 만연한 역사의 바로 이러한 순간에 사람들이 개인을 예민하고 날카롭게 관찰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345)


"우울함, 두려움, 비관주의, 피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전망, 이런 것들은 후대에 증언을 남긴 특별한 개인과 대중을 사로잡은 감정들이었다. 개인들은 이제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으며 어떤 조언이나 충고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없으며, 자신은 분리되고 고립되었다고 느꼈다. 사회 구조가 좀더 복잡해지고, 개인은 공통점이 전혀 없는 서로 다른 원리에 근거를 둔 수많은 집단에 소속되고, 안정적인 심리적 총체를 제공하던 전통적 소사회가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 상황이 출현한 것이 바로 이 시대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고 지적 '박탈'의 결과로 개인은 새로운 자각을 얻었는데, 이러한 자각은 주로 극단적 이기주의와 도덕적 허무주의로 표현되었다." "이 같은 경향은 살림베네에게서도 많이 발견된다. 그는 가족적 유대감이 부족했고, 부모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자신처럼 서원을 한 형제에게 거의 무관심했다."(345-6)


9장 '이 광기 속에서 방법을 찾아라'


"〈자전적 도표〉(1336)라는 드로잉에서 오피키누스의 가슴에 위치한, 지중해를 의인화한 지도는 '내 동기의 계시'라는 문구로 완성된다. 유죄에 대한 자각과 고양된 죄의식은 당시 서유럽 사회의 각계 각층 사람들의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고, 설교자들은 이 의식을 적극적으로 증폭시켰다. 이런 자각과 의식은 인간 오피키누스 안에 집중되었고, 이와 동시에 전체 세계에 투영되었다. 우주는 죄로 가득 찼으며, 이 죄는 주로 이 개인의 영혼에 집중되었다.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도 오피키누스였고 이 세계를 자신 속으로 통합하는 것도 오피키누스 바로 그였다. 그의 정신 상태의 발산은 전세계에 퍼진다. 세계를 그리면서 오피키누스는 자신의 에고, 구원에 대한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결코 떠나지 않는 죄의식과 영혼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누그러지지 않는 두려움을 가지고 세계를 성찰했다."(374)


"우리는 중세에서 개인의 자기 자각의 성취는 심각한 장애물에 직면했으며, 때로는 정신적 질병과 관련된 현상을 수반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종교는 겸양, 참회, 죄의 속죄를 강조했고 개인의 독창성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이 독창성을 용납할 수 없는 자만심의 근원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비난으로 인해 에고는 자기 부정과 자기 비하를 통해서 또는 세계 전체를 포용할 정도로 자신을 확장시킴으로써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다. 오피키누스의 정신적 혼돈에 관하여 논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나는 그의 고양된 자기 자각과 심오한 죄의식 사이의 놀랄 만한 모순에서 그 혼돈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이처럼 갈등적인 상황에서 개인이 자기를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개인이 종교성의 무게와 여기서 유래하는 죄의식에 의해 분쇄되지 않았다면, 그의 퍼스낼러티는 정신적 질병의 징후처럼 보이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382)


10장 단테와 페트라르카


"단테의 글에서 직접적인 자기 찬양이나 자기 비하를 찾아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페르소나'에 대한 흥미가 부족해서가 결코 아니다.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름 아니라 중세에는 그런 류의 발언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단테는 자기 자랑이나 자기 검열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 이유도 설명했다. 그러나 분명히 단테는 자기가 뛰어난 개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각은 어떤 예외도 없이 저승세계 전체를 횡단하고 탐구하는 단테의 능력 안에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세계를 일련의 분산된 '장소'로 또 동시에 일관되고 조화롭게 조직된 체제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에도 반영되어 있다. 또한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자로 다름 아닌 위대한 베르길리우스를 선택한 것에도 이러한 자각이 반영되어 있다."(389-91)


"페트라르카는 그의 메시지 『후손에게』에서 진실로 겸양한 기독교인과 자신의 가치를 자각한 시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듯 보인다. 첫번째 인물인 '불쌍한 유한자(the poor mortal)'는 신의 면전에서 겸손함, 연약함,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이 모두는 중세 시대에는 일상적이었다). 전통에 따라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전 생애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킨 '개종', 즉 최고 진실의 발견에 대해 말한다. 죄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모든 생각을 '신성한 지식'을 향한 방향으로 돌렸던 것이다. 반면 두번째 인물은 월계수관을 쓰고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시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을 숨기지 않는다. 페트라르카는 위대한 시인에게 따르는 무한한 명예들을 열거한 후에 이 시인들은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분명히 인정한다. 그가 자신을 놀랄 만한 재능을 지닌 작가로 간주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91-3)


11장 개인을 찾아나선 역사가


"개인성의 자발적 발산은 기독교 중세 문화의 영역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주변, 즉 자기 제어나 겸양의 요구 같은 윤리적 통제가 도덕적 의무로서 아직 확고하게 뿌리 내리지 않았거나(스칸디나비아의 문학 작품에서 살펴봤듯이 집단에 통합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가치와 일정한 분리감을 자각하는 개인 같은 완전히 기독교화되지 않은 환경) 개인 자신의 이상 심리의 결과로 뿌리가 잠식된 장소에서 나타났다."(413) "개인과 개인성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이것은 산발적이었고 때로는 후퇴도 했으며, 때로는 매우 현격했다. 중세의 개인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인으로의 진화 과정은 일직선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두 개인은 전혀 다른 유형의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개인은 우리의 선조이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와 다른(생소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자신들만의 독특한 성질을 지닌 사람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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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발견 : 서구적 사유의 그리스적 기원 까치글방 91
브루노 스넬 지음, 김재홍 옮김 / 까치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서론


"유럽적 사고를 이끌어가는 과정을 초기 그리스 정신 가운데에서 추적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인에게서의 사유의 '발단'을 근본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스 인들은 미리 앞서서 그들에게 주어져 있던 사고의 도움을 받아서 새로운 대상(과학과 철학 따위)을 획득하고 또 (논리적 절차와 같은) 오래된 방법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사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처음으로 창출했다. 그리스 인은 보다 활동적이고, 추구하고, 탐구하는 정신으로서의 인간의 정신을 발견─다른 어떤 종류의 형식으로 존재하다가 이 시기에 비로소 정신'으로' 규정된─했다. 그 토대에는 인간의 새로운 자기 이해가 놓여 있다. 정신의 발견이라고 하는 이 과정은 호메로스부터 시작된 그리스 문학과 철학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들인 서사문학, 서정문학, 극문학(희곡) 등은 이 여로 위에 있는 단계들인 것이다."(7-8)


1장 호메로스의 인간 이해


"서구의 먼 장래의 발전을 결정한 인간과 그 깨어 있는 명석한 사고에 대한 관념(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관념)은 그리스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기원전 5세기에 성취했던 것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메로스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단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는 그의 언어가 예시해준다. 이미 관찰된 바이지만, 비교적 원시 언어에서는 추상어가 발전되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구체적-감각적 의미를 지닌 언어 중에는 보다 발전된 언어에서는 기이하게 생각될 수 있는 풍부한 구체적 표현법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일례를 들면, 호메로스는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들을 대단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즉 horan, idein, leussein, athrein, theasthai, skeptesthai, opsesthai, dendillein, derkesthai, paptainein 등이 그 예들이다. 이에 반하여, 호메로스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동사들은 blepein과 theorein이라는 두 말밖에 없다."(18)


"derkesthai라는 말은 특정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뱀(drakon)은 derkesthai로부터 파생된 명사인데, 뱀이 이렇게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자신의 눈에 섬뜩한 '눈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리한 눈초리로 응시하는 것'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뱀이 특별히 잘 볼 수 있다거나 뱀의 시력이 아주 우수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의 눈초리를 그렇게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메로스의 경우에 derkesthai라는 말은 눈의 기능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에 의하여 지각되는 눈빛을 말한다. 즉 어떤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은 감정을 표출하는 제스처인 것이다." "theasthai라는 말은 무엇을 본다는 것은 같지만, 그것은 동시에 입을 쩍 벌리고 본다는 의미이다. 즉 horan, idein, opsesthai라는 동사들은 결코 '봄' 그 자체의 기능을 표현하는 하나의 통일된 동사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때그때마다 '보다'라는 특정한 방식을 표현하는 몇몇의 동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18-22)


"초기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언어 및 조형예술에서 신체를 통일체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보다'라는 동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다'라는 초기 동사들은 본다는 행위를 그 구상적 양태에 의하여, 즉 그 행위와 결부된 태도 혹은 감정에 의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나, 후기의 언어는 이 행위 자체의 본래 기능을 어의의 중심으로 보다 강하게 밀어내고 있다. 언어가 점차적으로 사상(事象) 그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 사상이라는 것은 구상적인 것도 아니고, 그것 자체로 특정의 명백한 정서와도 결부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기능이다. 그러나 이 기능이라는 것이 일단 인식되고 명명되자마자, 그것은 존재하게 되며, 그것이 존재한다는 의식은 갑자기 공동의 소유물이 된다. 즉, 신체의 경우처럼 그 숨겨진 통일성이 벗겨지거나 발견되자마자, 그것은 더이상 '사지(四肢)의 총체'가 아니라 '신체 자체'로 인식 가능하게 된다."(26-7)


"이러한 사정은 정신과 영혼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과 신체, 육체와 영혼은 상호 대립 개념이어서, 이들 개념 각각은 그 대립 개념에 의하여 규정되기 마련이다. 육체에 대한 표상이 없는 곳에는 영혼에 대한 어떠한 표상도 있을 수 없다. 역도 그러하다. 호메로스 역시 '영혼' 혹은 '정신'을 특징짓는 고유한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후기 그리스 어에서 영혼을 의미하는 psyche라는 말도 원래는 사고하고 감각하는 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호메로스에게서 psyche는 그것이 인간에게 '생기를 주고 있는' 한에서, 다시 말하여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한에서 혼일 뿐이다. 혼의 영역을 표현하는 또다른 말인 thymos는 정동(情動, 흥분)을 일으키는 것이며, noos는 여러 가지의 표상(관념, 이미지)을 초래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호메로스의 언어 가운데 하나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간격은 '신체'를 표현하는 언어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다른 말들에 의하여 채워진다."(28-30)


"영혼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맨 처음 피력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살아 있는 인간의 영혼을 psyche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혼은 신체 및 신체적 기관의 성질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성질을 부여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성질은 호메로스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영혼에 부여하고 있는 속성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호메로스 자신에게는 언어상의 모든 전제가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상의 모든 전제라는 것은 호메로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사이의 시대에, 다시 말하여 서정시의 시대에서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단편」 4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모든 길을 걸어간다고 해도 영혼의 끝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영혼의 의미는 깊다〉." "그가 영혼을 무한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까닭은 신체적인 것과의 구분을 명확하게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44-5)


2장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신앙


"신앙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항시 불신앙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신앙(credo)'이라는 것은, 이것과 아주 대조되는 허위 신앙, 즉 이단 신앙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신앙은 사람들이 그 옹호를 위해서든 혹은 그것에 저항해서든 싸워야 하는 도그마와 결부된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에게는 교의(敎義)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신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민족이 다른 신앙을 혹은 다른 신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을 수조차 없었다. 아메리카에 상륙했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인디언의 신들이 마땅히 우상이요, 악마로 여겨졌으며, 유대 인들에게도 그들의 이웃 사람들의 신들은 야훼의 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해서 거기서 그 지방의 토속적인 신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자신은 거기에도 아폴론, 디오니소스, 아르테미스라는 신이 마땅히 있는 것으로 알았다."(54)


"아낙사고라스와 디아고라스가 국외로 추방되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처해진 일 따위의,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거의 모든 불신앙에 대한 법률상의 박해는 기원전 431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에서 기원전 5세기 말까지의 단기간인 약 30년 동안에 발생했다. 더구나 이 기간은 올림포스 신들이 본래적인 생명이 이미 다한 때이다. 이들 재판은 활력이 넘치고 자부심을 지닌 종교심의 치기 어린 불관용이 아니라, 상실된 위치를 회복하려는 경우에 생겨나는 신경과민 현상이었다." "'신을 경외하라'는 법률은 우선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즉 종교에 대한 모독을 하지 않아야 하며, 그 다음에는 제의에 대한 공적인 행사에 참여해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가 항시 관례적인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에서 종교 생활의 초기 단계에 적용된 이러한 규정들은 신념, 신조, 교의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56-8)


"credo quia absurdum(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소위 터툴리아누스적인 말은 그리스적인 것이 아니다. 고전-그리스적 관념에 따르면, 신들 자신이 우주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 호메로스에게서 신들은 항시 지극히 자연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심지어 헤라가 태양신인 헬리오스를 대양에 잠기도록 강요하는 것조차도 어디까지나 '자연적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것을 달성하려는 마법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의 신성은 무로부터 무엇인가(有)를 창조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 인들에게는 천지창조의 역사라는 것은 없다. 그리스 신성은 단지 사물을 고안하든지 혹은 변형하는 행위만을 할 수 있다. 호메로스에게서도 초자연적인 일은 확고한 질서에 따라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들이 (새로운 국면 전환을 일으키기 위해) 세속적인 일에 꼭 개입해야만 할 때에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올바른 법칙이 있다."(60-1)


"「일리아스」의 첫머리에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에 불화가 생겼을 적에,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브리세이스의 인도를 요구하면서 아킬레우스의 격노를 촉발시킨다. 이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그의 검에 손을 얹고 아가멤논을 향하여 검을 뽑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한다. 바로 그 순간에 아테나가 나타난다(명백하게 말해지고 있는 바처럼 그녀는 단지 아킬레우스에게만 나타난다). 그 여신은 그를 제지하면서 지금은 그가 물러서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분노를 잠재우도록 경고한다. 즉시 아킬레우스는 여신의 권고에 따라 그의 검을 칼집에 꽂았다." "호메로스에게서 인간은 아직 그 스스로 결단의 발기자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자각은 비극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호메로스의 경우에, 인간이 숙고한 후에 어떤 결단을 내렸을 때 그는 그 결단이 신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63)


"호메로스의 신들은 우리와 너무도 친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 신들이 얼마나 대담하게 창출되었는가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 올림포스 신들만이 유일한 지배자는 아니었고, 특히 본토에서는 지하적, 신비적, 황홀적 신성이 버티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새롭게 침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 시, 높은 차원의 정신적 관심사는 결국 호메로스적 종교에 의하여 규정되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형성된 직후에 그리스의 조형미술은 신들을 위대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신들을 위해서 건축된 신전들은 어떠한 숭배 의식이나 혹은 비교 행위(秘敎行爲)에 사용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단지 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한 아름다운 집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도 건축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의 예술은 이 신들을 보다 아름답고, 보다 경탄할 만한 형태로 만들고자 무려 300년 간에 걸쳐서 노력했다."(71)


"이 신앙은 계몽주의 시대의 낙관주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염세주의에 가까웠던 그들은 인간을 가을의 나뭇잎처럼 비참하게 사라져가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인생에 대하여 깊은 비탄에 빠져 이야기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 인들은 신들이 하늘에서 편안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봄으로써 이 지상 세계의 비참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후기 그리스 인들은 별들이 고착된 궤도에 따라 운행하는 모습을 스스로 관찰하고 경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에 의해서 그들의 지상 생활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적, '관조적' 삶을 실제적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지상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할 때에도 이 '이론'에는 호메로스적 경탄(thaumazein)으로부터 유래하는 종교적 감정의 여러 흔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철학적 사유로의 전진은 이들 신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73-4)


3장 헤시오도스에게서의 신의 세계


"헤시오도스는 칼리오페(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목소리)의 이름에 〈이 뮤즈는 모든 뮤즈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명성을 알린다거나,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키는 기쁨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헤시오도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칼리오페는 왕들이 판결을 내릴 때 그들의 곁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훌륭한 재판관의 '유쾌한' 언변이 어떻게 평화를 초래하는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헤시오도스는 칼리오페의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말할 경우에 비단 기분 좋은 울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말 또한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서 칼리오페는 뮤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는 헤시오도스가 칼리오페를─더군다나 아홉 자매 가운데 오직 그녀만을─시의 내용 및 일반적으로 인간의 언변의 의미와 관련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81)


"헤시오도스의 경우에, 신성의 현현이 우리들에게 정말로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은, 헤시오도스 자신이 시인으로서의 서품을 부여받는 것을 묘사하고 뮤즈들과의 만남을 서술할 때뿐이다. 호메로스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이다. 호메로스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에서도 신들의 간섭을 받고 있다." "헤시오도스에게서는 정말 신화적인 것조차, 다시 말하여 신들이 특수한 작용을 하는 인격체로서 표현되는 이야기까지도 끌어들이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적인 것에 대한 조망을 주려고 시도하는데, 말하자면 그는 신들을 인간이 그것들을 신들로서 경험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으로부터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신들을, 마치 그것들이 식물 혹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원래부터 우리에게 대상적으로 주어져 있는 자연에 속하는 것인 양 취급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이 신들을 일종의 린넨 체계 및 계보도로 압축하고 있다."(86-7)


"가장 미천한 신성에게도 확고한 장소를 할당하는 이 계보도는 신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무엇을 말하고 있다. 신들의 계보에 대한 사색이 이미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한 어떤 인간이 무엇인가의 기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경우에, 그 사람은 어떤 일 혹은 어떤 식물, 어떤 동물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아주 오래된 확신이다. 이와 같은 신들의 계보에 대한 사색이 기원과 본질에 관한 질문과 오래전에 마주쳤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원시적인 관념들로부터 헤시오도스를 떼어내는 어떤 합리적인 경향이 시사되고 있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개개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원리와 체계이다. 따라서 그는 철학뿐 아니라,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신론(一神論)의 선구자이며,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만물이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결국 이 신들은 신적인 것의 하나의 통일체로 묶이고 만다."(89)


"헤시오도스의 계보도는 상호간에 결합되지 않은 두 개의 다른 계통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 단지 밝은 신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누크, 즉 '밤'은 부친 없이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태어난 자손을 가지고 있다. 누크이 자손들은 예를 들면 질투, 기만, 노년, 싸움, 노고, 기아, 고통, 살해 등이다. 이것들은 단지 생명에 대하여 악의와 적의의 모습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다른 신들에 대하여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후에 아낙시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등의 철학자들이─물론 이들 각자의 이론은 상이한 형식이기는 하지만─세계를 설명할 때 대립의 이론을 내놓도록 했다." "그런데 이 밤의 악마적인 힘을 가진 자손들은 우리들의 세계 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계속적으로 작용을 미치고 있으므로, 제우스가 지배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90-1)


4장 초기 그리스 서정시에서의 개성의 자각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의 시구는 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호메로스와 아주 유사하다는 면에서, 이들 시구로부터 근본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오디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이 그 모습을 나타내어, 마치 아프로디테가 사포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부드럽게 위로할 때에야 비로소 완전하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경우에 그 회상이라는 것은 현재의 사태에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예전의 체험에만 미치고 있을 뿐이다. 오디세우스는 인생의 변화무쌍한 흥망성쇠와 인간을 지배하는 리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오디세우스가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에 말을 걸기 시작했을 때, 혹은 그의 가슴속에 thymos가 격분했을 때, 이것은 아르킬로코스가 그의 thymos에 말을 걸기 시작한 경우와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호메로스의 thymos라는 것은─유사하게 마음도─원칙적으로는 신체적 기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정신의 활동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126-7)


"그런데 서정시인들이 심적인 것(das Seelische)을 또 다른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영혼과 정신이라는 말에 따라 확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지닌 단편적인 자료만으로 충분한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정시인들의 이 새로운 사상은 당시에 아직 그 정도로까지 명확한 형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심적인 것을 표시하는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못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정시인들이 이 영혼을 신체적 기관과는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몇몇의 어휘를 통해서 확신을 가지고 추정해볼 수 있겠다. 아르킬로코스가 자신의 thymos를 〈고뇌로 교란되어〉라고 말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대장에 대하여 그는 〈용기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가 아직 알지 못했던 심적인 것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표시하는 표현법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27)


"서정시인들이 드러내는 개인적 감정 가운데에는 영혼의 분열과 정신적인 것에서의 공유에 대한 의식이 발견되고 있다. 물론 아르킬로코스, 사포, 아나크레온은 정신의 자발성을 비교적 좁은 감각의 영역 안에서 겨우 찾아내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강력한 감정의 움직임은 그들에게는 여전히 신성의 개입이며, 단지 영혼의 곤경만이 자기 고유의 것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의식적인 개인적 행위의 영역은 아직 열려져 있지 않았다. 이 영역은 비극에 들어 처음으로 성취되었다. 서정시인들이 발견한 것은 조형 예술가, 사상가, 정치가들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위대한 개인의 성과는 점차 확산되어가는 크나큰 역사의 흐름으로 운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행위와 운명의 실로 짜여 있기에, 그 직물은 한편에서 보면 단지 씨줄로만 짜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단지 날실로만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145)


5장 핀다로스의 제우스 찬가


"헤시오도스는 서사시 시대로부터 서정시 시대로의 과도기에 서 있었다. 혹독한 농경 생활과 목자(牧者)의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그가 음송 시인으로서 노래해온 영웅 전설의 세계가 그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그 세계보다도 한층 현실적인 주위 세계로 눈을 돌렸다. 그는 신적인 것을, 왕과 영웅의 행위에 제멋대로 간섭하는 올림포스 산의 귀족적 사회 안에서 찾으려 하는 일을 그만두고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서의 이 신적인 것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엄밀히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서사시의 전통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핀다로스의 경우에도 뮤즈들은 질서 있는 세계가 어떻게 점차적으로 생겨났을까 하는 이 서사시적인 사건을 노래한다. 그러나 뮤즈들의 본래의 임무(기능)는 서사시가 아니고, 오히려 제우스의 업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존재의 깊은 의미를 폭로하는 서정시를 노래하는 것이었다."(167-8)


"헤시오도스와 핀다로스 사이의 알카익 기의 서정시에는 심적인 것의 긴장, 정신적인 것의 복잡한 상호 관계, 가치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 등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핀다로스는 알카익 기의 대부분의 서정시인들과 달리 그의 개인적 감정과 그와 다른 사람들과의 정신적 결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 그는 자신이 어떤 가치를 거부할 것인가를 논의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 세계에서 찬미해야 할 것, 자신이 신적인 것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한계 있는 것은 어떻게 보편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에 관여하며, 인간적인 것은 어떻게 초인간적인 것에 관여하는가를 단지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이다. 따라서 이전 세대의 시인들과 직접적인 교섭 관계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핀다로스는 초기의 '개인적' 서정시에서 발견된 것을─이것이 본질적으로는 그의 공적인데─제의가에서 성장한 축제시로 결실을 맺도록 하고 있다."(168)


"핀다로스가 테베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 아티카에서는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갔다. 비극은 이 세계에 정의가 행해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요구를 내세운다. 따라서 비극은 인간에 대하여, 더욱이 신들에 대하여 사회적인 훌륭한 행위를 넘어서라는 다양한 요구를 내놓는다. 거기에는 찬양의 목소리가 그쳐버린다. 핀다로스는 이와 같은 사상에서 의식적으로 멀찍히 물러서고, 이와 같은 사상을 불손한 것으로 간주한다. 때때로 그는 전승하는 전설의 어느 한 구절이 신적인 것의 찬란함을 흐릿하게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꺼이 그것을 고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상적인 것이 그에게 얼마나 미약하고 무력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의 질서와 미에 대해서는 결코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는 또한 현존하는 것을 변화시키려고 의도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고귀한 침착성을 유지한 채 세계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169-70)


6장 그리스 비극에서의 신화와 현실


"〈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보고하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음직한 일을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유명한 명제(「시학」 제9장 2절 1451a)는 역사 기술과 시작(詩作)이─기원전 5세기에 실제로 그랬던 바처럼─서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작은 역사 기술보다도 〈더 철학적이다.〉 시작은 보편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의식은 기원전 5세기에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그리스 비극은 합창대의 노래에서 발생했다. 초기의 합창대 노래는 신화적 사건을 직접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노래했기 때문에, 이미 드라마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바대로이다. 그 결과로 신화와 현실, 시작과 진실이 서로 관련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것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호메로스적인 노래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다."(171-2)


"합창 서정시와 드라마의 시원에는 제의적 품이 있었고, 이 춤에서 신적 세계는 현재의 지상적 현실과 합치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서사시에서 보고하는 사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 경우에 현실이란 일찍이 있었던 일로, 그것은 참으로서─혹은 허위로서─'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화적 사태가 실제로 연기됨에 따라서 재현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연기는 연기자와 구경꾼에게서 신화적 사건(die Mythische Begebenheit))으로 '실재하고 있다(ist).'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이 지금 아무개에 의하여 연기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대적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신화적 현실은 '의의'를 지닌 사태여서, 그 의의는 몇번이라도 현재화시킬 수 있는 것이며, 그 사태는─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비단 개별적인 것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80)


"비극은 신화의 사건들을 엄격하게 반영하지도 않으며, 서사시에서 제재로서 사용하고 있는 사건을 역사적 진실로서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극은 인간의 행동 중에서 사태의 동기를 추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은 필요하다면 사실을 버리는 일조차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를 심적 과정의 결말로서 파악한 맨 처음의 사람은 아이스킬로스이다. 그는 첨예화된(인위적인) 상황 가운데에서 인간 행동의 핵심이 되는 것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표현하려고 한다. 일상적인 현실의 행위 가운데 수많은 동기가 뒤섞여 흐르고 있어서 참된 행위의 근본 형식, 즉 자유로운 결단은 단지 희미한 반성의 형태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은 거의 같은 정도로 중요한 두 개의 요구 사이에 인간을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정의와 운명에 대해서 정통한 바탕 위에서 고귀한 죽음을 선택하도록 행동의 저 근본적 형식을 순수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190-1)


"아이스킬로스가 그려낸 인물들이 처하게 되는 부자연스럽고 첨예화된 여러 상황은 정상적이고 악의 없는(순진한) 인간에게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일을 행할 때에 인간은 항시 자유롭다고 자각하는 곳에서, 이들 인물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모델을 그리고 그들의 행위 가운데서 가장 고유하고 내면적인 이상적 상황을 찾아낸다." "호메로스 세계의 인간은 아직 흔들림 없는 세게에 보호되고 있으며, 그 세계는 분명하게 인간에게 말을 걸고, 인간 편에서도 분명하게 답변을 한다. 신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보다 위대한 것인 한에서, 물론 초월적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통찰력과는 독립적으로 확실하고 또 항상적으로 거기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스킬로스에게서 이 신들의 세계는 한층 모호하게 된다." "이제 인간은 신적인 것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근거로 하는 만큼 더욱더 독자적으로 되어간다."(192-3)


"이미 아이스킬로스는 존재자의 관념을 정의의 관념과 연결시켰다. 즉 가상은 hybris(오만함)에 속한다." "에우리피데스 시대에 이르러 이 대립은 이미 여러 면에서 인식 비판, 신화 비판, 도덕 비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대립은 에우리피데스의 전체 사고를 꿰뚫고 있으며, 우리가 극히 피상적인 의미로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가 파악하고 있는 그 태도에 미치기까지 이것이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색채가 풍부하고 화려한) 사치스러운 단장이 아이스킬로스의 특색이었다고 한다면, 특정한 인물들의 누더기 옷이 에우리피데스의 특색이다. 경험적 관조에 나란히 사회적 관념들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사회적 관념들이 보여주는 바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신적인 것이 주어진 현상 세계의 빛 가운데 나타난다는 신앙이 퇴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의 행동이라는 문제가 적법한 것에 대한 사변을 더욱 강하게 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94-5)


"알카익 기의 서정시의 신화는 승리, 혼례, 제의적 축제에 따라 시공간적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비극의 신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가능한 상황들을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그 관심은 철학적인 색조마저 띠고 있다. 비극이 목표로 하고 있는 인간 행위에 대한 문제성이 인식의 문제가 되며, 소크라테스가 이 문제를 선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해결하기를 주장하는 데 이르기까지는 그리 먼 장래의 일이 아니었다. 그 경우 현실적인 것은 목적론적 개념으로서 완전히 추상적으로 파악된다. 이제 의미를 주는 층(신적 세계)과 의미를 수용하는 층(인간 세계)은 보편과 특수라는 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에우리피데스는 이러한 경지와는 아직 떨어져 있었다. 그는 시인이지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을 생명 있는 인물들에게서 보았던 것이지, 개념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197)


7장 아리스토파네스와 미학


"시인의 목적과 의의가 인간의 개선에 있다는 사상으로의 전환을 처음으로 제시한 자는 아리스토파네스이다. 즉 시인들은 교사였다. 오르페우스는 신성과 제의의 교사였고, 무사이오스는 의술과 신탁의, 헤시오도스는 농경의, 신에 필적하는 호메로스는 영광과 명예의 교사였다. 이 시인들과 성인들의 관계는 교장(교사)과 어린이들의 관계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을 예술 및 더 나아가 모든 문화의 참된 요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오늘날에도 또 하나의 예로 삼고 있다. 이 도덕상의 요구를 물려받은 것은 플라톤이지만, 다만 그는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소크라테스를 심판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견해와 크게 다르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이러한 철학상의 요청에 반해서, 비극은 단지 감각적 쾌락에만 호소할 뿐이라는 경험적 발견을 끄집어내놓고 있다."(203)


"아리스토파네스는 에우리피데스를 비단 부도덕하다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궤변을 늘어놓는 소피스트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빈틈 없는 교활함과 약삭빠름을 비난한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야말로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진 비합리적인 힘들을 제시한 최초의 극작가이다. 메데이아와 파이드라가 바로 그녀들의 격정 때문에 위대한 여성이었기에, 에우리피데스는 편협한 이성의 옹호자나 계몽가일 수는 없다." "에우리피데스는 신들이 박탈된 의미를 잃은 세계 안에서 홀로 비틀거리며, 현실에 눈을 고정시키며 서 있는 이 두 사람─「아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의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형제─의 호메로스적 영웅들의 정체를 혹독할 정도로 단호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기대야 할 곳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의 결과이다. 즉 인간은 허무 위에 서 있으며, 인생의 우연사에 절망적으로 내맡겨지고 있다는 것이다."9220-1)


8장 인간의 지식과 신의 지식


"음유시인(Rhapsode) 크세노파네스는 본질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을 질료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신적인 것에서 규정하려고 함으로써, 그는 탈레스의 전통에서 이탈하여 헤시오도스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그는 eis theos, 즉 〈신은 오직 하나이다〉(「단편」23)라는 극히 중요한 발견에 도달한다. 크세노파네스는 여러 다양한 의인적 신들을 폐기하려고 한다. 그에게서 최초로 신적인 것이 포괄적인 통일체(umfassende Einheit)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가 파악한 신은 역시 분명하게 그 자신과 닮았고, 그가 얻으려고 노력한 것(이상)과 비슷하다. 다시 말하여, 그가 생각하는 신적인 것은 음유시인으로서 그가 파악한 인간적인 것에 대한 보족이며, 그가 생각하는 지혜는 인간에게 갖추어진 최고의 것인 까닭에 그것은 신성에게도 갖추어진 최고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만을 가질 수밖에 없으나, 신은 더욱더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233)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적인 것을 정신보다도 더욱 순수한 것으로 파악하는 한편, 또 달리 인간의 지식에서도 바로 그 일자(一者)로 향하는 경향을 크세노파네스 이상으로 강하게 지적함으로써 이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광범위한 지식 대신에 집중적인 지식을 요구한다. 즉 〈모든 것을 꿰뚫어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통찰력을 이해하는 지혜는 오직 하나이다.〉(「단편」41)" "또 그는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해서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단편」55)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눈과 귀는 나쁜 증인이다. 만일 그것들이 오랑캐적인 영혼(barbarous psychas)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단편」107)" "설령 경험이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경험이 로고스, 즉 의미의 철저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가치하다. 로고스는 모든 말의 근저에 놓여 있으며, 모든 적절한 말의 그 객관적 존재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237-8)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인간은 알크마이온의 경우처럼 감각 지각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인식으로 올라가 일자인 존재의 사고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어떤 종류의 은총에 의해서 지식에 도달한다." "신성은 파르메니데스를 '순수한' 사고로 이끈다. 그는 이 사고에 의해서 순수한 존재를 파악한다. 알크마이온이 감각 지각 및 인간의 지식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는─귀납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반면에, 파르메니데스의 경우에 여신은 감각적 지각과 그것에 의해서 파악되는 생성을 미망으로서 배제하도록 가르친다. 여신은 인간적 지식에서 신의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지 않고, 존재에 대한 유일한 큰 (직관적) 인식으로부터, 사고와 존재, 존재와 비존재 등에 대한 진리를, 즉 그 길의 목표를 연역한다. 그래서 예지계는 그 독립된 실재로서 발견된다."(242-4)


"크세노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어떤 필연성에 따라 천계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문제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회상록」 1, 1, 11행 이하).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일에 몰두하는 대신에, 인간은 최우선적으로 인간적인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신적인 일은 인간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탐구자는 각기 신적인 일에 대해서 각양각색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인간은 바람이나 비 그리고 사계절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에 반해서 인간사(人間事)에서, 이를테면 경건, 미, 정의 등의 경우에는 그 덕을 획득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호메로스로부터 출발해서 고찰해왔던 전통과 단절해서, 키케로의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면 '철학을 천상으로부터 지상으로' 끌어내렸던 것이다."(245-6)


9장 덕의 권유─그리스 윤리 사상에 대한 소고


"행복과 유용한 것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초기 그리스에서 행복한 인간은 'olbios'이다. 즉 그러한 인간은 충만한 상태에 있으며,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는 호사와 화려함의 빛에 잠겨 있다. 그는 'eudaimon'하다. 즉 그는 만사를 훌륭하게 성취시켜 주는 선한 다이몬(Daimon, 靈)을 자기 편으로 하고 있다. 헤시오도스가 그의 형제 페르세스에게 덕을 권하고 그 보답으로 그에게 행복한 생활을 약속하는 경우에, 그는 부와 번영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덕이란 이득이라든지 유용이라는 것과 거의 같다. 그러나 그후 알카익 기에 이르게 되면, 영광의 순간에 인간적인 것을 넘어 신의 영역에 접하고 신과 같이 되는 인간이 eudaimon하고 olbios이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 광채와 인간 존재의 확대를 알고자 노력한다. 행복으로의 권고를 할 필요는 없어진다. 누구라도 그것을 성취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255)


"arete(덕)와 agathos(선)라는 말은 애초에는 아직 유용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초기에는 전혀 도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호메로스가 어떤 한 인간은 'agathos'하다고 말할 때, 그는 인간이 도덕상으로 비난할 만한 여지가 없다든가, 혹은 마음이 선량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훌륭한 군인과 우수한 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처럼 유용하고, 소용 있고, 수완(능력) 있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arete라는 말도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품위, 공적, 성공, 신망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행복'이나 '유용'처럼, 단지 그 자신의 이익에 기여하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더 일반적인 타당성을 요구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도덕 현상으로의 경향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arete는 '훌륭하고', '유능한' 남자, 다시 말하여 agathos한 사람에게서 기대되는 '능력'과 '공적'이다."(255-6)


"정의(법)는 도덕에서 기대되는 것을 실현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도덕에 관한 사색을 깊게 하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타인에게 손해를 주면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 '이웃의 불행을 대가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타인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명망과 권력을 얻지 않는다'고 하는 이 도덕상의 원칙들은 법률의 토대가 되며, 폴리스의 성문법을 통해서 인간에게 의식되게 된다." "이러한 격언들은 일체의 공리주의적 고려들을 넘어서고 있다. 자신의 행동을 타인의 행동과는 다른 척도로 추정하지 말라는 요구는 그리스 인들에게는 벌써부터 법(정의)의 관념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dike는 개개인이 받아야 할 몫이다. 실정법적 준칙으로는 'suum cuique(각자에게 그 몫을 주시오)'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dikaiosune는 자신의 동료와의 관계에서 각자가 자신의 몫을 지키고, 타인의 세력 범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노력이다."(270)


"솔론은 인간이 걷는 길이 아무리 불확실하다고 할지라도, 이 한 가지 일은 절대로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부정의는 설령 그 사람의 손자 대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처벌되어야만 한다." "아르킬로코스는 위대한 것(영화로운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말했지만, 솔론은 부정의에 의해서 영화롭게 되는 것은 사라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정의는 영속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 최고의 덕이다. 솔론이 왜 이와 같이 정의를 옹호하고 있는가 하는 그 근거라는 것이, 이미 정의에 대해서 헤시오도스나 혹은 아르킬로코스가 이야기했던 바를 훨씬 넘어선 곳으로 그를 이끌어간다. 다시 말하여, 그는 자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어도, 또한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정의에 대한 분노에 의해서도 아니라, 부정의에 대해서 과감하게 맞서고 있다.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이해 관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질서와 공평성을 수호하는 것이다."(277)


"소크라테스는 알카익 기-고전기의 도덕 사상에서 후기 고전기-헬레니즘 기의 도덕 사상으로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소크라테스가 선을 성찰할 때 완전한 공정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행위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 그것과 대결해야 하는 순간을 고찰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박식하고 지혜로운 교사인 양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 자신이 사용하는 노골적인 비유를 통해서 산파술(Hebammenkunst)을 행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즉 그는 누군가가 자력으로(자기 자신으로부터, aus sich) 획득해야만 하는 지식을 다 드러낼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을 뿐이다. 아티카 비극이야말로 처음으로 인간의 행동을 심적 결단이라는 계기에서 해석했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행위라는 의식을 개화시켰다. 소크라테스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제 힘으로 행위해야만 한다. 그리고 선을 발견하도록 스스로 노력하라."(282-3)


10장 비유, 비교, 은유, 유추─신화적 사유에서 로고스적 사유에로의 길


"신화적 사유와 논리적 사유의 대립은 이것을 자연의 인과적 설명에 적용하는 경우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연에 대한 인과적 설명의 영역에서도 신화적 사고에서 논리적 사고로의 변화가 행해지고 있음은 곧 명백해진다. 즉 원래에는 신들, 영들, 영웅들의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 후에 이르러 그 충분한 근거가 합리적으로 추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경우 신화의 인과적 설명은 자연과학적 인과성이 파악할 수 있는 자연의 사건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물(物)의 기원과 생명에 관심을 기울임에 따라 그 원인이 정밀하게 규정될 수 없는 현상으로 향해지는 것이다. 더욱이 그 이상으로 신화의 인과적 설명은 자연 영역을 멀찍이 넘어선 곳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이는 사상, 감정, 소망, 결의 등의 기원도 역시 신들의 개입으로 환원되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 존재의 이해에도 기여하기 때문이다."(336)


"신화적 사고는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의 형태로 한 사고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사고의 형태는 심리학적으로는 논리적 사유로부터 구별되는데,그 까닭은 논리적 사유가 탐구를 그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해서, 신화와 비유의 이미지는 상상력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적인 차이를 초래한다. 즉 논리적 사유에서의 진리는 추구되고, 탐구되거나 혹은 인출되어야만 하는 무엇으로, 그것은 모순율의 엄격한 고려를 통해서 방법적으로 정확하게 해결되어야만 하는 과제의 미지수 X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만인이 승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신화적 여러 형태는 의미 깊은 것으로서(als sinnvol und bedeutend) 직접적으로 나타나며, 비유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직접 이해될 수 있는 살아 있는 언어를 말하고 있다. 즉 그것들의 이미지는 뮤즈의 선물로서 (시인이나 청자의) 마음 속에 직관적으로 선명하게 떠오른다."(337)


"활동하는 인간 정신이 발견한 알카익 기는 극도로 경험에 굶주린 시대였다. 엠페도클레스의 말처럼, 이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피로하지 않은 눈'을 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보고 있다. 처음에는 여전히 새로운 경험이 풍성하고 번창하고 있는 신화와 자주 혼합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에 가서 신화가 시에, 경험은 막 싹트려고 하는 과학에 소재를 제공하는 분리가 확립될 때까지 행해진다. 그러나 아티카의 비극에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에 대한 기쁨이 정신적-심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 앞에서 움츠려들게 되면서 풍부한 경험을 즐긴다는 것도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고전기의 철학자들에게 점점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은 사고를 통해서 통제될 수 있고, 반복 가능성, 인식에 의한 두 대상간의 동일성의 확증 그리고 모순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등에 따르는 엄밀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경험적 사실들만이다. 여기서 많은 것이 제거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생생하게 생명적인 것이었다."(338)


11장 그리스 어에서의 자연과학적 개념의 형성


"과학적 개념 형성을 위한 언어상의─이것은 동시에 정신적이라는 의미도 포함하는데─모든 전제는 그리스에서 이미 매우 오래된 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만일 그리스 어에 정관사가 없었다면 그리스에서 어떻게 해서 자연과학과 철학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학적 사고라는 것이 '물이라는 것(물, to hundor)', '차가운 것(차가움, to psuchron)', '생각하는 것(사고, to noein)' 등과 같은 어법이 없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정관사가 이른바, 이와 같은 '추상 개념'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보편을 특수로 상정하거나, 형용사적인 것 혹은 동사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확정할 수 있었겠는가?" "사실상 키케로도 (그리스어에서 간결하고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아주 단순한 철학 개념을 라틴 어로 재현하는 데 노심초사했다. 그것은 단지 관사가 그에게(라틴 어에) 있지 않았다는 그 이유 때문이었다."(342)


"고유명사와 사물명사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세게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원래 언어 속에 있는 두 개의 형식이다. 실체사는 구체적인 것을 표시하는(지시하는) 이상의 기능을 가진다. '사고', '보편자'와 같은 추상명사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추상명사의 복수형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명사가 설령 실체사의 독립적인 형태로서 사물명사 및 고유명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더라도, 추상명사는 그것들과 동일한 근원적 형태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추상명사는 발전된 사고의 단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일반 정관사의 출현과 더불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언어에서도 사물명사 및 고유명사와 명확하게 대조되는 추상명사의 전형태가 보이고 있다. 후기에 이르러 추상명사로서 파악되는 많은 말들은 원래는 (신화적인) 고유명사였다. 가령 호메로스의 경우에 공포는 Daimon(초자연력)으로서, 즉 위협하는 자 Phobos로서 나타난다."(345)


"자연과학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는 그 본질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물'과 관련을 맺고 있다. 만물의 기원과 본질은 '물'이라고 탈레스는 말했다. 그는 이 경우에 오케아노스는 신들의 원천(genesis, 아버지)이라고 말한 호메로스의 말(「일리아스」 제14가 201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신화적 고유명사 대신에 사물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미 헤시오도스는 모든 신들과 정령들을 계보학적 체계로 정리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다양한 현상에 대한 체계적 전망을 세우려고 시도한 바 있다. 이때 헤시오도스는 사물명사가 아니라 신화상의 고유명사를 사용한다. 탈레스는 만물 가운데 있는 공통의 물질을 상정함으로써 개물(個物)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물질에 대한 이와 같은 표시법은 흙, 물, 공기, 불을 '원소'로 규정하게 됨으로써, 그리스 초기 철학 더욱이 자연철학적 사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354)


12장 인간성의 발견과 그리스 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고전 예술에서 다양한 우연적인 모습을 동반하는 임의의 인간을 묘사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를,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이데아'를 묘사했다고 종종 이야기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비그리스적이며, 비플라톤적이다. 어떤 그리스 인들도 결코 인간의 이데아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플라톤이 단 한번 불과 물의 이데아와 결부시켜 인간의 이데아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농담거리로 말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머리카락의 이데아, 먼지의 이데아, 오물의 이데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파르메니데스」 130C). 기원전 5세기의 조상(彫像)을 그 시대의 말을 빌려 묘사하고자 한다면, 그 조상은 아름다운 혹은 완전한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거나, 또 달리 고대의 서정시에서 인간을 찬미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말을 이용한다면, '신과 같은'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366)


"플라톤과 동시대인이었던 이소크라테스는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을 설명하는 대목(15, 253=3, 5)에서 이와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도시, 법률, 기술, 기예 등, 요컨대 전문화(全文化, die ganze Kultur)는 ('교육(교양, paideia)'에 의해서 숙달될 수 있는) 연설과 설득 능력에 따라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키케로는 인간적인 것, 말하는 능력과 교양(교육), 즉 키케로 자신이 생각하는 이 휴머니티의 중요한 요소들을 이소크라테스로부터 직접 물려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페트라르카에게 넘겨주고 있다. 이소크라테스의 경우 인간임(Mensch-Sein)에 대한 그의 긍지는 그리스 인이며, 아테나이 사람인 국민적 자부심과 결부되어 있는데, 페트라르카에게도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 인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인간'인 셈이다. 이들 두 사람은 그들 자신을 가장 잘 교육받은(교양 있는) 민족의 구성원, 다시 말하여 가장 잘 연설하는 민족의 구성원으로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366-7)


"신들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은, 그리스 인들에게는 세계는 Kosmos(질서, 질서 있는 세계)이고, 엄격한 질서가 만물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인들은 이 '자연'의 존재를 비단 믿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을 파악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자연을 명확히 파악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이 신들의 배후에는 생(生)에 풍부한 내용과 의미 그리고 근거를 주는 한층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더욱더 명확히 이해했다. 유럽의 문화는 이 질서를 인식하는 자에게는 법칙성으로서, 감각하는 자에게는 아름다움으로서, 행위하는 자에게는 정의로서 나타난다고 하는 그리스 인들의 발견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비록 그것들이 이 세계에 숨겨진 채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에 진리, 미, 정의가 존재한다는 신앙이야말로 그리스 인의 잃어버릴 수 없는 유산이다. 이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힘을 유지하고 있다."(381-2)


"그러나 그리스 인이 우리의 모델이라는 복고주의적(혹은 의고주의적[擬古主義的]) 신앙은 본질적인 점에서 한정되어야만 한다. 고대 고전주의는 더 이상 고대의 조형예술, 문학, 철학의 여러 작품들 및 정치적 제도들이 정말로 완전해서 그것들이 시간을 초월한 타당성이 있고, 우리의 창조 활동을 위한 도전받을 수 없는 모범이 된다는 의미에서 서구적 사고, 시작(詩作), 조형의 모범이 되지는 않는다. 이 신앙은 지난 1세기 반에 걸친 역사적 연구에서 파괴되어버렸다. 고고학 자체가 대개는 그리스 및 로마 문화의 역사적 제약성을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즉 고대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지는 만큼 바로 이 고대의 완전무결한 성과는 우리와 대단히 이질적인 여러 정신적 전제들에서 생겼다는 것이 더욱더 분명하게 되었다. 어떤 성과가 더 위대하고 더 의미가 충만하면 충만한 만큼 그 성과는 '시대의 정신'이라는 특성을 더욱 강렬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382)


13장 칼리마코스에게서의 유희에 대하여


14장 아르카디아 : 어느 정신적 풍토의 발견


# 아르카디아 : (베르길리우스가 창안한) 목자(牧者)들의 나라, 사랑과 시의 나라


"초기 그리스 인들은 신화를 역사로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 이르면 신화와 역사라는 두 영역은 비극과 역사 기술이라는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다. 이제 무엇보다도 다음의 두 경향이 전승에서 해방된 신화를 발전시키게 된다. 그 한 가지는 옛날 시대의 영웅들과 사건들이 한결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결과 그것들이 점차 현실적인 삶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는 경향이다. 예를 들면 전설상의 인물들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 경향의 일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신화를 상연하는 경우에 형편을 낫게 하는 새로운 극적 상황이 고안되는 경향이다. 헬레니즘 시기의 문학은 신화적인 인물들의 심리학적인 해석을 한층 밀고 나아가 그들을 이전보다도 더 자연주의적인 환경으로 옮겨놓았다. 이와 반대되는 다른 쪽의 헬레니즘 시기의 문학은 항상 (이렇듯 현대풍으로 각색된) 신화의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강조한다."(413)


"일찍이 그리스 인에게서도 정치적으로 비참한 시대에는, 정치는 이론과 실천으로 분열했었다. 플라톤은 참된 정치적 관심에서 출발했으며, 그의 사회적 입장과 그 자신의 성향은 자신을 정치가로서 활동하도록 방향지웠다. 그런데 그는 아테네의 민주 정치에서 자신이 활동할 여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기존의 국가 제도에는 지나칠 정도로 부정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체념하고 정의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현존하는 국가 제도에서는 몸둘 장소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플라톤은 모든 정치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당면했다. 완전한 국가의 성립을 방해하는 반정신적 요소, 요컨대 부정의, 격정, 권력욕 등이 항시 되풀이해서 그의 사고를 움직이게 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에 심사숙고해서, 그는 끝까지 객관적으로 정의는 무엇인가, 선은 무엇인가, 이것들에 대한 지식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424)


"베르길리우스는 이 가혹하고 악의에 찬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그 현실을 배후로 돌려놓고 있다. 그가 아르카디아로 떠나갈 때, 이 혼란한 시대를 개탄하는 그의 마음에는 이 시대를 다소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도, 나아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원망(願望)조차 없었다. 보다 나은 나라를 추구하는 것은 그의 사고나 의욕이 아니라, 그의 감정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정의가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모든 것이 친하고 화목하게 함께 생활하는 목가적인 평화이며, 사자와 어린 양이 사이좋게 지내고, 모든 대립을 풀어 하나로 화합하고, 모두가 큰 사랑 가운데 화합하는 황금 시대였다. 이러한 일은 기적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훗날 그가 「농경가」를 지었을 때, 그는 아우구스투수의 업적에서 이 기적을 보았다. 즉 아우구스투스는 (아르카디아의 꿈을 실현한 것처럼) 이탈리아에 다시 안녕과 평화와 질서를 되찾아주었다."(425)


"그리스 문학에서 알레고리와 상징은 서로 화해하고 있어서 문제될 만한 것은 없다. 예를 들면 한 그리스 시인이 헤파이스토스에 대하여 서술하는 경우, 그것은 불을 의미한다. 이 표현 형식의 발달 경로를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헤파이스토스는 어느 도시를 파괴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신이 불의 모습으로 되어 맹위를 떨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몽 사조는 이렇게 가르쳤다. 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헤파이스토스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지 '불'만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시학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시인은 반드시 생생하게 묘사해야만 한다. 따라서 불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헤파이스토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아름답고, 시적인 것이라고. 신들의 이름의 이와 같은 '환유적(metonyumischen)' 사용의 배후에는 한편으로는 합리주의가, 다른 한편으로는 시론과 시적인 수식 욕구가 숨어 있다."(439)


15장 이론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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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화의 제국 -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
스벤 베커트 지음, 김지혜 옮김, 주경철 감수 / 휴머니스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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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론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는 글로벌화한 대량생산 형태의 자본주의는 1780년경 산업혁명과 함께 출현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전쟁자본주의war capitalism는 16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기계와 공장보다 먼저 등장했다. 그리고 전쟁자본주의는 공장이 아니라 들판에서 번성했으며, 기계화가 아니라 토지에 집중되고 노동집약적이었으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토지와 노동의 폭력적인 약탈에 의존했다. 이런 약탈행위로 일군 엄청난 부와 새로운 지식으로 유럽의 제도와 국가가 강화되었으며, 이 모두는 19세기까지, 그리고 이후 유럽이 이룬 놀라운 경제발전의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많은 역사가가 이 시대를 '상인'자본주의 또는 '상업'자본주의의 시대라고 일컬었지만, 유럽 제국의 팽창과 자본주의의 긴밀한 관계는 물론, 그 민낯과 폭력성을 더 잘 표현하는 것은 '전쟁자본주의'라는 용어다."(24)


"자본주의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임금노동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자유노동이 아니라 노예노동에 기반했다. 산업자본주의라고 하면 우리는 계약과 시장을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거의 폭력과 신체적 구속에 의지했다. 근대의 자본주의는 재산권을 우선시하지만, 초기 자본주의의 특징은 확고한 소유권과 대규모 약탈이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국가를 등에 업은 강력한 제도와 법의 지배에 의지한다. 전 세계로 뻗은 제국을 창조하기 위한 최종 단계에서는 국가의 힘이 필요했을지 몰라도, 초기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노예주의 노예 지배나 변방 자본가의 원주민 지배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자의적 행동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자본주의가 지극히 공격적인 방식으로 해외에 진출해 축적한 결과물 덕분에, 유럽인은 여러 세기를 이어온 면화의 세계들을 장악할 수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글로벌 경제를 고안해낼 수 있었다."(24-5)


"그렇다면 면화의 제국을 뒷받침하는 주장들이 왜 다른 상품들에는 적용되지 않을까? 다른 상품들과 달리 면화는 경작지와 공장이라는 두 단계의 노동집약적 생산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탕수수와 담배는 유럽에서 대규모 산업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담배는 새로운 거대 제조기업의 등장을 초래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인디고를 재배하고 가공하는 과정은 유럽의 제조업자들에게 거대한 새 시장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아메리카에서 쌀 경작은 노예제와 임금노동의 폭발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그 결과 면산업은 다른 어떤 산업과도 다르게 세계 전역에 널리 분포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여러 대륙을 연결한 면화는 근대 세계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근대 세계의 특징인 심각한 불평등과 글로벌화의 오랜 역사,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정치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도 함께 제공한다."(26-7)


1장 전 지구적 상품의 등장


"식물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면화는 〈형태적 유연성〉 덕분에 다양한 환경에서 자란다." "면화를 재배한 사람들 다수가 수천 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다른 이들도 자신들과 같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대략 남반구 위도 32~35도에서, 북반구 위도 37도 사이의 지역에 살았다. 이 지역들은 면화 재배에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열대 식물인 면화는 생육기간에 온도가 섭씨 1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통상 섭씨 16도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또 널리 알려진 대로 200일 이상 서리가 내리지 않고 연 강수량이 500~630mm이며 생육기간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지역에서 잘 자란다. 이는 세계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기후로, 면화가 여러 대륙에 풍부하게 분포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면직물 생산은 1,000년 전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업이었다."(39)


"세계의 그 많은 지역에서 그 많은 사람이 실을 잣고 그 실로 옷감을 짰던 면화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제조산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세기까지 면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여전히 가정 내 소비를 위한 가내생산이었다. 하지만 1780년대 산업혁명에 앞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도 면제품은 대개 노동집약적인 생산물이었기에 중요한 가치저장수단이자 교환수단이 되었다. 어느 지역이든 지배자들은 한결같이 면직물을 공물이나 세금으로 요구했고 사실상 면화는 정치경제의 탄생과 함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면직물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메소아메리카 전역에서 이상적인 교환수단이었다. 면화와 달리 면직물은 장거리를 쉽게 운송할 수도 있고 썩지 않아서 가치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근대 이전 세계 거의 어디에서나 면직물로 식량과 제품, 심지어 보호수단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었다."(55-6)


"수요가 늘자 면직물은 가정에서 벗어나 첫걸음을 뗐다. 인도에서는 직업 방직공이 출현했다. 그들은 원거리 무역 물품을 공급하며, 국내는 물론 지배자들과 부유한 상인들에게 면직물을 제공하는 데 집중했다." "작업장이 일반화되면서 새로운 유형의 방직공도 일반화되었다. 남성 위주의 개인들로, 특별히 시장 판매용 제품을 생산하는 방직공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장이 생겨났어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전문화된 생산은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작업장이 아닌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형적이었다. 이들 농촌의 시장 생산자들과 자급을 위해 생산하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글로벌 통상에서 신흥 세력, 곧 상업자본가들이 장악한 선대제先貸制 네트워크에 의존하는지 그 여하에 있었다. 19세기 상업화된 면직물 생산의 토대를 형성했던 이런 네트워크에서 방적·방직공은 도시 상인을 위해 실을 잣고 면직물을 제조했으며, 상인은 그들의 생산품을 취합해 먼 곳의 시장에 내다 팔았다."(58-60)


2장 전쟁자본주의의 구축


"유럽의 자본가와 지배자들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변화시켰다. 무력을 동원한 교역을 통해 유럽을 중심으로 복잡한 해양 무역망을 창출할 수 있었고, 재정-군사 국가fiscal-military state의 구축으로 세계 구석구석 외딴 곳까지 세력을 떨칠 수 있었다. 해상보험에서 선하증권船荷證券에 이르기까지 각종 금융상품이 마련되어 자본과 상품의 장거리 운송이 가능해졌으며, 법률체계의 발달로 글로벌 투자에 어느 정도 안정성이 보장되었다. 또 원격지의 자본가와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어 현지 방직공과 면화 재배인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고 아프리카인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플랜테이션 농장도 번성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런 변화는 산업혁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면화 세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면화의 제국에 통합되었다."(74-5)


# 재정-군사 국가 : 조세와 재정의 혁신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군사 활동과 전쟁을 지속했던 국가들


"모든 유럽 동인도회사들의 공통점은 인도산 면직물을 구매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향신료와 교환하기 위해, 또 국내 소비를 위해 유럽으로 가져갈 면화를 구매했다. 또 이제 막 신세계에 자리잡기 시작한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할 노예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운송할 면화를 구매했다. 이렇듯 당시 면직물은 세 대륙을 망라하는 무역 체제와 얽혀 있었다. 이런 무역 체제는 콜럼버스와 다 가마의 기념비적인 원정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킨 결과였다." "그 결과 유럽이 아시아로 팽창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면직물은 핵심 품목이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1621년에 이미 5,000여 필의 면직물을 영국으로 수입했는데, 40년 뒤에는 수입량이 다섯 배로 증가했다. 실제로 면직물은 동인도회사의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이 되었고, 1766년에는 면직물이 동인도회사의 전체 수출품 가운데 75% 이상을 차지했다."(78)


"전쟁자본주의는 세계를 '내부'와 '외부'로 가를 수 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유럽인들의 역량에 의지했다. '내부'는 모국의 법과 제도와 관습을 포괄했고, 국가가 부과한 질서의 지배를 받았다. 반대로 '외부'를 특징지은 것은 제국의 지배, 방대한 지역의 수탈, 원주민 학살, 자원 약탈, 노예화,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국가의 효율적인 감시를 벗어난 민간 자본가들의 방대한 토지 지배였다. 이런 제국의 보호령들에는 내부의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소유주들이 국가를 능가했고, 폭력이 법에 도전했으며, 사적 행위자들이 대담한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해 시장을 개조했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것처럼, 그런 지역들이 〈다른 어떤 인간 사회보다 더 신속하게 부와 강대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사회적 백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자본주의 '내부'에 의지하는 전혀 다른 사회와 국가들이 등장하는 데 그 기반을 제공한 것이 바로 그런 사회적 백지 상태였다."(85-6)


3장 전쟁자본주의가 치른 대가


"영국 면산업의 눈부신 발전 덕분에 영국 정부와 영국 자본가들은 전쟁자본주의로 얻은 결실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생산조직, 대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들은 사상 초유의 생산성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생산비용이 낮아져 영국의 제조업자들은 기대했던 새로운 시장에 진출했다. 면제품의 가격이 저렴해지자 내수시장이 확대되었고, 면직물의 디자인이 중간 계급 소비자들의 자기표현에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어감에 따라 면직물은 더 폭넓게 유행했다." "영국 면산업의 진정한 호황은 바로 수출 호황이었다. 1800년에 이르러 영국에서 제조된 면직물이 세계 시장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자, 그와 동시에 수백 곳의 공장 소유주, 상인, 선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농촌지역에서 새로 지은 공장에서 일하는 방적·방직공 수천 명이 새로이 해외 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영국산 면제품은 이제 세계 시장에서 인도산 면제품을 재빠르게 대체해나갔다."(133-5)


"예전에 인도의 방적·방직공이 장악했던 여러 수출 시장을 이제는 영국산 면직물이 차지했지만, 애초에 영국 제조업자들은 전쟁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지역에서의 판매에만 집중했다. 산업혁명의 황금기이던 18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영국산 면제품 수출의 3분의 2 이상이 그런 지역들로 향했다. 나중에 면직물 수출은 영국이 200년 동안 막대한 부를 쌓은 대서양 경제의 통로들로 흘러들었다.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주인에게서 보급받은 의복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의 생산자들과 달리 자신들의 의복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독 수익성 있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로 노예를 취급했던 아프리카 무역에서도 영국산 면직물의 수요가 높았는데(아메리카에서 면화 재배가 호황을 이룬 결과, 심지어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상인들이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인도산 직물과 동일한 영국산 직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덕분이었다."(136)


"면산업은 제국의 팽창으로 얻은 여러 전리품 가운데 하나로 시작해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솜털이 난 흰색 꼬투리에서 새로운 글로벌 체제인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된 셈이다. 물론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발명과 혁신은 있었다. 하지만 오직 면산업만이 지구 전체에 영향력을 미쳤고, 강제노동과 강력하게 연결되었으며, 국가로부터 유독 최고 수준의 지원을 받으며 세계 전역의 필수적인 시장들을 장악했다. 나중에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지만, 산업자본주의는 발생 직후에 여러 다른 곳에서 전쟁자본주의가 확대, 강화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영국이 자국의 공장에 더 저렴한 면화를 안정적으로 공급한 자국 상인들이 역량에 기대어 일방적으로 앞장서서 산업자본주의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의 면제조업자들은 엄청난 양의 면화를 새롭게 요구한 반면, 산업자본주의의 제도적 구조는 여전히 미숙하고 고루해서 수요을 모두 충족시킬 만큼 면화를 충분히 생산할 노동력과 영토를 창출할 수 없었다."(144)


4장 노동력의 포획, 토지의 정복


"1791년까지도 제조업에 사용할 목적으로 생산된 면화 대부분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영세농들이 재배한 것이었고, 주로 현지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면산업의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면화는 무력을 동원하여 토지와 노동력을 약탈하는 것이 특징인, 전 지구적이고 역동적이며 폭력적인 형태의 새로운 자본주의와 마침내 결정적 연결고리를 마련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기계화된 제조업의 절박한 요구와 전근대적 농업의 생산으력 사이에 생겨난 커다란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노예제가 있었다. 공장들이 급속히 팽창하며 면화를 너무 빠르게 소비한 탓에 전쟁자본주의의 전략만이 필요한 토지와 노동의 재분배를 보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토착민과 토지를 빼앗은 정착민, 노예와 플랜테이션 농장주, 현지 장인과 공장 소유주들은 일방적이지만 지속적인 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운 새로운 한 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150-1)


"카리브해 지역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오스만 제국과 인도의 농부들과 달리 토지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거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토착민이 소멸되고 서아프리카에서 거의 매일 노예가 도착하면서 새롭게 성장하는 시장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카리브해 지역 플랜테이션 농장주들과 다른 면화 재배인들을 구별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과 인도의 강력한 영주들도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그들의 면화 농장에서 노동을 시켰지만, 그곳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예제 같은 제도가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더욱이 카리브해 지역에서 자원의 신속한 재편을 가능하게 했던 자본 유입이 다른 곳에서는 방해를 받았는데,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없었던 데다 오스만 제국 및 인도 통치자들의 정치권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카리브해 지역에서만이 사실상 아무런 제약도 없이 새로 확보한 토지와 노동력이 투입되면서 면화 재배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160)


"그렇게 해서 서인도 남아메리카의 면화가 리버풀, 런던, 르아브르, 바르셀로나의 시장에 쏟아져 들어왔고 결국 기계화된 방적이 급속히 팽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팽창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인도 제도에는 면화 재배지로서 적합한 땅이 적어서 면화 생산에 제약이 있었으며,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사탕수수보다 면화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토지가 풍부한 브라질에서뿐 아니라 서인도 제도에서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들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들과 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1790년부터 서인도 제도의 면화 수출은 크게 감소해 영국 시장 점유율이 10%까지 축소되었다. 1819년 이후 영국인이 재배한 면화에 부여된 관세 혜택조차 그런 추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서인도 제도의 시장 점유율은 하염없이 하락했는데, 이는 〈흑인들의 해방으로 더욱 가속되었다.〉"(166)


"1791년 가장 중요한 면화 생산지인 생도맹그에 혁명이 일어나 그 지역을 뒤흔드는 바람에 면화를 포함해 세계 시장을 겨냥한 상품의 생산이 거의 중단될 뻔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노예 반란으로 생도맹그의 예속된 주민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프랑스 식민 지배 체제를 물리쳤으며, 아이티라는 국가의 탄생과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냈다. 전쟁자본주의는 가장 힘없어 보이는 행위자인 수십만 명에 이르는 생도맹그 노예들의 수중에서 최초의 중요한 전기를 맞았다. 당시 생도맹그 면화 생산은 영국에 수입되는 전체 면화의 24%를 차지했지만, 4년 뒤인 1795년에는 그 비중이 4.5%에 불과했다." "확실히 전통적인 면화 생산 기법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인근에는 수급에 충분한 면화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 있었다. 바로 신생국 미국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노예제에 기반을 둔 면화 생산이 기록적인 수준까지 치솟았다."(166-8)


5장 노예제가 지배하다


"미국 면화의 대영 수출은 1791~1800년에 93배 증가했고, 1820년까지 다시 일곱 배가 증가했다. 1802년에 이미 영국 시장에서 미국은 단일 면화 공급처로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고, 1857년에는 중국만큼 많은 면화를 생산하게 되었다. 휘트니의 조면기 덕분에 생산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미국산 육지면은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요구에 꼭 맞아떨어졌다. 미국산 면화는 조면기를 사용해 섬유의 손상이 컸지만, 유럽과 다른 지역의 하층 계급 사이에 수요가 높았던 저렴하고 조악한 품질의 면사와 직물을 제조하기에는 알맞은 원료였다. 만약 미국에서 면화를 공급하지 못했더라면 오랜 면화 시장의 현실을 볼 때 면사와 면직물의 대량생산이라는 기적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고, 새로운 소비자들도 이런 값싼 상품을 구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떠들썩하게 이야기되는 직물 부문에서의 소비자 혁명은 플랜테이션 노예제 구조에 나타난 극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180)


"여기에는 면화, 주민을 축출하고 공지로 만든 토지, 노예제, 이 세 가지가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리버풀 크로니클》과 《유러피언 타임스》는 면화 재배에 노예노동이 더없이 중요해서 노예가 해방된다면 면직물 가격이 두세 배 올라갈 것이고, 영국에 참혹한 결과를 안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악몽 같은 무자비한 강압이 수백만 노예들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이러한 폭력이 종식될 가능성이 있다면 면화의 제국에서 풍성한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미국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폭력의 종식이라는 악몽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을 세계의 주도적인 면화 재배인으로 만들어준 세 번째 이점을 이용했다. 그것은 바로 정치권력이었다. 남부의 노예 소유주들은 '5분의 3 타협안'으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헌법에 새겨넣었다. 노예를 소유한 대통령, 대법원 판사, 의회 양원의 강력한 대표들은 노예제도에 거의 무한한 정치적 지원을 보장했다."(188-9)


# 5분의 3 타협안 : 흑인 인구의 5분의 3에 해당하는 투표권을 백인 노예주에게 인정해주자는 내용의 타협안으로,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남부 주와 북부 주 사이에 합의되었다.


"면화가 미국 경제를 지배하면서 면화 생산 통계치는 〈미국 경제를 평가하는 데 차츰 더 중요한 단위가 되었다.〉 서양 세계에서 미국산 면화의 중요성이 너무 커진 탓에 독일의 한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북부나 서부가 사라진다고 해도 미국의 남부가 사라지는 것과 비교한다면, 세계에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세계경제에서 자신들의 중심적 역할을 확신하고 기쁨에 차서 자신들이 〈근대 문명의 운명을 좌우할 운전대〉를 쥐었다고 선언했다. 《아메리칸 코튼 플랜터》는 1853년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국의 노예노동은 인류에게 지금까지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축복을 가져다주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이런 축복이 지속되려면 노예노동도 지속되어야 한다. 세계에 공급할 면화를 자유노동으로 생산하는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자발적 노동으로 면화를 재배해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200-1)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서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대영제국에서 멀어지기 시작해, 대서양을 가로지른 연결이 정치·군사적 행동에 의해 단절될 수 있음이 드러나자 영국의 산업이 미국산 면화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미국산 면화에 대한 높은 의존도에 대한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우려는 세 가지 문제에 집중되었다. 첫째, 그들은 1810년대 미국에 눈에 띄게 많아지기 시작한 공장들이 점점 더 많은 양의 면화를 소비해 유럽 소비자들이 사용할 면화의 양이 감소할까 염려했다. 둘째, 특히 영국 제조업자들은 유럽 대륙의 생산자들이 세계의 면화 수요를 더 늘릴 경우 미국에서 공급되는 면화를 두고 그들과 경쟁하게 될까 걱정했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문제는 〈노예제의 지속성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피로 얼룩진 생산물〉에 의지하는 것은 〈미국의 노예제라는 범죄〉에 〈의지하는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였다."(202-3)


"역설적이지만 면화를 갈구하는 제조업자들에게 예기치 않은 곳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이유로 구제책이 나타났다. 경쟁관계인 아시아 면산업의 공정이 서서히 지속적으로 붕괴하면서 면화 수급 문제가 완화된 것이다." "아시아 지역과 지방의 무역 네트워크는 지속되기는 했어도 결코 다시 번성하지는 못했다. 관습, 편의성, 이윤으로 특징지어졌던 이들 소규모 무역 네트워크는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특성을 지닌 유럽의 자본과 국가 권력 때문에 와해되었다. 사실 미국에서 노예제 덕분에 가능했던 면화의 저렴한 가격이 다른 모든 곳의 현지 제조업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텐치 콕스가 예리하게 통찰했던 것처럼, 영국 제품을 인도로 수출한 일은 인도인들에게 〈팔지도 못할 제품을 만드느니 면화를 재배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했을 것이다." "이처럼 면화가 유통되는 대체 경로들이 파괴되면서 세계 곳곳의 농촌지역의 더 많은 영토와 더 많은 노동력이 글로벌 경제에 잠식당했다."(220-2)


6장 산업자본주의, 날개를 펴다


"전쟁자본주의 경제모델은 산업화에 필요한 원료, 특히 원면과 여러 중요한 제도적 유산을 제공했지만, 영국의 사례는 다음 단계인 면직물 대량생산에 전쟁자본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또한 영국의 사례는 산업화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수 있는 국가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법적으로, 관료주의적으로, 기반시설로, 군사적으로 자국 영토에 파고들 수 있는 강력한 국가가 없었다면 산업화는 결단코 불가능했다. 시장을 조성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세수를 늘릴 도구를 마련하고, 국경을 순찰하고, 임금노동자의 동원을 감안하여 변화를 촉진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실제로 자국 면산업을 육성하는 국가의 능력이 산업화된 곳과 산업화되지 않은 곳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근대 국가들을 표시한 지도는 일찍이 면공업의 산업화가 목격되었던 지역을 표시한 지도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251-2)


"그 결과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인 산업자본주의는 특정 경로로만 움직였다. 영국의 선례를 따를 수 있었던 자본가들은 보통, 자국의 제조업 성장이 국력을 강화할 방법이라고 여기며 산업화 기획을 포용한 국가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경제활동과 국가의 영토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런 국가들에서 통치자, 관료, 자본가는 장기적 자본 투자, 노동력 동원, 확장되는 국내 시장과 해외 시장, 지구 경제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 법과 관료주의, 군사력과 기반시설을 통해 영토의 경계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신생 국민국가의 정치인들에게는 영국식 모델을 기반으로 산업사회를 건설하지를 고려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산업은 부의 원천이자 탁월한 전쟁 도구이기도 했다." "결국 산업자본주의는 1860년대에 크나큰 위기[미국 남북전쟁]를 겪으면서 전쟁자본주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262-3)


"사실 노예노동 자체가 제조업에 전혀 부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면직물공장에 노예가 채용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예제가 지배하는 사회는 면공업의 산업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초기의 산업화는 전 지구적으로 전쟁자본주의에 의지했으나, 지구상에서 전쟁자본주의가 가장 난폭한 형태를 취했던 지역들은 결코 산업화를 달성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쿠바는 대규모의 노예화된 노동자들에게 의지했지만, 19세기 내내 단 한 곳의 방적공장도 갖지 못했다. 전쟁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사적 파벌들 사이의 전쟁 상태는 산업자본주의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면공업의 확산을 설명해주는 것은 국가의 역량만이 아니다. 국가 내부의 권력 분포 역시 그 설명에 도움을 준다. 노예제 국가들은 자국 산업가들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지지하는 문제에서 더디고 취약하기로 악명이 높았다."(271-2)


# 가령, 브라질에서는 사탕수수나 커피를 생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압력 때문에 여타 국가들에서 산업화를 가능하게 해준 보호주의─높은 관세 같은─가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이 국면이 중요한 이유는 그 형태의 다양성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토지와 노동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특유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율되지도 않고 억제되지도 않은 자본가의 진취성이 특징적인 전쟁자본주의와, 기반시설에서는 물론이고 행정적·법적·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가 개인의 진취성을 이끌었던 산업자본주의의 공존에 의지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정지된 것이 아니었다. 전쟁자본주의 덕분에 가능했던 산업자본주의는 강력한 새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냈다." "1860년 이후로 영토와 사람들을 식민화한 주체는 수탈과 사적인 신체적 구속으로 지탱되는 노예주들이 아니라 국가권력으로 지탱되는 자본이었다." "가장 위대한 제도적 혁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초법적extralegal 강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임금노동은 노동자와 노동을 이전과 전혀 다른 법적·제도적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275-7)


7장 산업노동력의 동원


"분명 산업혁명은 주로 노동력 절감 기술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방적 부문에서 생산성이 수백 배나 향상된 것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이런 기계들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역시 노동력이 필요했다." "계몽주의는 경제적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했고, 그 결과 유럽에서 노예제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아프리카 노예들을 맨체스터, 바르셀로나, 뮐루즈로 데려오는 일은 논외의 문제가 되었다. 지역주민을 노예로 만들 수도 없었다. 더욱이 노예노동에는 경제적으로 크게 불리한 측면이 있었는데, 예속적인 조건 아래에서는 작업에 동기를 부여하기가 어려웠고 감독 비용이 컸다. 더욱이 노예노동의 경우에는 일 년 내내, 때로는 노동자의 일생 동안 비용이 발생했고, 호경기와 불경기를 거듭하는 산업자본주의의 까다로운 주기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성과 남성, 소녀와 소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바뀌었다."(288-9)


"제조업자들이 많은 사람을 공장으로 끌어들여 일을 시키는 데에 따르는 문제를 모면하기 위해 선택한 한 가지 방법은 먼저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 즉 저항할 수단이 거의 없던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 안에서 오랫동안 확고히 유지되어온 권력관계, 특히 가장인 남성이 적합하다고 여기는 대로 아내와 자녀의 노동력을 배치할 수 있었던 가부장제의 오랜 전통에 의지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은 사실 이런 오래된 사회적 위계질서와 권력관계를 바탕에 두고 있었으며, 이런 것들을 수단으로 삼아 좀 더 폭넓게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고용주들은 생계를 보장하는 비자본주의적인 방식이 존속해야만 자신들이 사용하는 노동력의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또한 인도 등지의 면화를 재배하는 농촌지역이 세계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298-9)


"초기 면제조업자들이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했다. 유럽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들의 여성들 역시 직물을 생산했지만, 아프리카나 아시아와 달리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여성들은 가정을 벗어나 공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는 직물의 산업화에 결정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유산과 농촌지역의 변화는 거의 언제나 더 노골적인 형태의 강요로 보완되었다. '직기 주인'의 강요와 '채찍 주인'의 강요가 크게 달랐다고는 하지만,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공장 내에서 노동자들을 징계하기 위해, 공장에 채용된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나지 못하게 막기 위해 완력을 사용하는 일이 횡행했다. 문제의 공장들에 투자한 제조업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물리적 폭력까지도 사용했는데, 이런 일이 사적으로 저질러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국가의 용인을 받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304-5)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규율을 시행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노동조건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끔찍했던지, 세계 곳곳의 노예 소유주들이 산업노동자들의 조건에 비하면 노예노동의 조건이 더 낫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독일 면산업에서는 주 6일 하루 14~16시간씩 노동하는 것이 하나의 규범이었다. 1841년 푸에블라에서는 하루 노동시간이 점심 휴식시간 1시간을 포함해 평군 14.8시간이었다. 프랑스 제2제정 시기 하루 노동시간은 평균 12시간이었으나, 고용주들이 원할 경우 노동자들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다. 1873년까지 바르셀로나 섬유공장의 노동시간 역시 매우 길었다. 어디서나 생산 작업은 위험했고, 기계는 귀가 멀 정도의 소음을 동반했다. 이런 조건들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1850년대 작센 정부가 징병을 시도했을 때, 군복무를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노동자는 전체 방적공의 16%, 방직공은 18%에 불과했다."(307)


8장 전 지구적 면화 만들기


"면화의 매매에 관한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리버풀의 상인들은 면화의 재배와 제조, 판매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다루는 조련사가 되었다." "리버풀의 면화 시세는 수십만 방적공장 노동자들의 고용 여부를 결정했다. 전 세계가 리버풀의 면화 시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사실은 그 도시의 상인들이 지구상의 드넓은 지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반영한다. 리버풀의 면화 가격이 오르면 루이지애나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면화 농경지 구입을 새로 결정할 것이고, 노예무역업자들은 수천 명의 젊은 노예를 이 새로운 영토로 들여와 이윤을 얻었을 것이다. 리버풀에서 날아온 소식이 어느 날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내는 데 일조했고, 어느 날엔 인도의 철도 건설에 투자할 것을 독려했으며, 또 어떤 날엔 스위스나 구자라트 또는 멕시코 마초아칸의 가정에서 이루어지던 방적과 직조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었다."(320)


"상인들은 편지를 쓰고, 공급자와 소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을 하고, 계산을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상인들이 창조한 면화의 제국이 몹시 방대했기에, 그들은 곧 특정 부문만 전문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일부 상인들은 면화를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항구로 옮기는 데 주력했고, 다른 이들은 대양을 횡단하는 교역에 주력했으며, 일부는 면화를 제조업자들에게 파는 데 주력했다. 반면 다른 상인들은 면제품 수출을 전담했고, 또 다른 상인들은 특정 국가나 지역에 수입된 면제품을 배급했다. 일반적으로 상인들은 특정 지역에서 자신들의 무역에 집중했고, 세계의 특정 지역을 서로 연결시키는 전문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사업은 놀랍도록 제각기 달라 보였다. 사실 글로벌 체제는 중앙의 제국주의적 명령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 인맥을 갖추고 때로는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한 수많은 행위자들에 의해 구축되었다."(327)


"유럽의 자본, 그리고 뉴욕과 보스턴의 점점 더 많은 자본이 미국의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면화상인들을 이어주는 중간상인, 곧 도매상 집단을 거쳐 면화 농업의 팽창에 투입되었다. 도매상은 공장과 플랜테이션 농장 사이에 이어지는 상인들의 연쇄사슬을 완성하는 연결고리였다. 재배인과 연결된 도매상과 면화 수출상 사이의 상호 작용을 지렛대 삼아 유럽의 자본은 기계의 생산 리듬에 맞춰 면화를 제공하도록 미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몰아 세웠다." "도매상에게는 8%를 웃도는 대출 이자가 또 다른 수입원이 되었다. 도매상은 유럽 상인들에게서 자본을 끌어왔고, 그렇게 해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도매상을 통해 세계의 상품시장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자금시장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도매상은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자영농에게서 수집한 면화를 수출업자에게 판매해 면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수적으로도 가장 많았다."(345-6)


"이런 여신與信 체제는 전 지구적 범위였기 때문에 쉽게 붕괴할 수 있었다. 그 체제의 각 부분은 모두 다른 모든 부분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제국의 어느 한 부분에서 누군가 실패하면 그 위기가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랭커셔의 제조업자들은 해외 시장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상인들이 해외 시장에서 제품 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국내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귀하가 우리의 상품을 구입한지 11개월이 경과했고 우리의 부채가 심각해서 올봄에는 분명 상황이 급박해질 터라 현금으로든 제품으로든 조속한 송금을 요청하니 양해 바랍니다.〉 뉴욕 상인 햄린 판 페흐텐은 근심에 차서 이렇게 간청했다. 간혹 그래왔듯이, 면화 가격이 크게 떨어지면 상인들은 그들이 지급한 선급금보다 적은 가치의 면화를 받게 되므로 채무를 상환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 결과는 1825년, 1837년, 1857년에 들이닥친 전 세계적 대공황이었다."(350-1)


"경제질서가 이처럼 믿을 만한 정보와 신뢰, 신용에 의지한 탓에 상인들은 시장 밖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들에 의지하게 되었다. 임금노동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글로벌 무역을 만들어내는 일은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의 사회적 관계에 달려 있었다. 상인들이 남달랐던 것은 자본을 축적하고 분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정보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만이 아니었다. 확대가족의 결속, 지리적 인접성, 동일종교, 동일민족, 출신지를 기반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 네트워크에 의지하는 능력 엿기 상인들을 남다르게 한 요인이었다. 무역이 위태롭고 회사의 생존이 오직 거래처 한 곳의 신뢰도에 좌우되던 세계에서는 신뢰성이 필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신뢰 강화 방법을 모색하며 역사가들이 '관계형 자본주의relational capitalism'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자, 더 쉽게 신뢰성이 생겨났다. 이처럼 면화 시장을 더 크게 좌우한 것은 시장 밖의 사회 관계였다."(360)


9장 세계를 뒤흔든 전쟁


"유럽의 제조업자들과 상인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기고 수십만 명의 공장노동자에게는 가혹한 노동 환경을 안긴 면산업은, 미국을 세계경제의 중심무대로 밀어 올리며 〈지금껏 미국에서 계획되거나 실현되었던 것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농산업〉을 구축했다. 면화 수출만으로도 세계의 경제지도 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남북전쟁 직전에 면화는 미국이 해외로 내보낸 상품의 전체 가치의 61%를 차지했다."(378) "그러나 미국 남북전쟁의 발발은 1780년대 이래 전 세계적 면화 생산망과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탱해오던 관계를 단박에 날려버렸다. 영국의 외교적 승인을 강제로 받아내기 위해 남부연합 정부는 면화 수출의 전면 금지를 단행했다. 남부연합이 이 정책의 수명이 다했음을 깨달았을 무렵에는 북부의 봉쇄로 면화 대부분이 남부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산 면화의 유럽 수출은 1860년에 380만 꾸러미로 감소했고 1862년에는 사실상 전무했다."(382-3)


"제조업자들이 공장을 폐쇄하고 방적·방직공들이 고통을 겪는 동안에도 면화무역상들은 한동안 황금기를 누렸다." "가격변동성이 커지고 투기가 확산되자 투기적인 시장 거래, 특히 판매와 관련된 투기 거래를 제도화하려는 상인들의 움직임도 확산되었다." "제조업자들은 면섬유의 새로운 공급처를 강력히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조업자들의 압박을 받고 면산업 노동자들의 고충과 집단행동을 염려한 정부 관료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면은 그들 국가경제의 중심이었고 사회의 궁극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였다." "자국 산업에 필수적인 원료를 저렴한 가격에 확보하는 문제에 이처럼 지대한 공적 관심이 쏟아진 것은 과거와 분명하게 결별했음을 의미했다. 1780년대 이래 상인들이 면화 시장을 확고히 지배해왔지만, 이제 면화는 수십 년 동안 상인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며 강력해진 국가의 문제가 되었다."(385-8)


"면화 기근에 직면한 제조업자들과 식민지 관료들은 갈수록 시장의 기능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비롯된 면화기근은 식민지(인도)의 원료 생산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놓았다." "면화 가격의 급격한 상승 덕분에 정부 개입의 효율성이 커지고 순조롭지 않던 세계 시장을 향한 생산으로의 이행이 원활해졌다. 남북전쟁 발발 후 두 해 동안 인도 면화의 가치는 네 배 이상 상승했다. 그 결과 인도의 농사꾼은 새로 개간한 토지뿐 아니라 식량작물의 재배에 전용되던 토지에서도 면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캘커다 주재 미국 영사에 따르면, 인도의 면화 재배농들이 이처럼 예전에 없던 농산물 수출에 주력하자 〈예상치 못한 대량 공급〉이 초래되었다. 이런 예기치 않은 면화의 대량 공급은 미국의 전쟁 기간 동안 큰 수익을 안겼을 뿐 아니라 공장 운영을 지속하려는 유럽의 면제조업자들이 필요한 원료를 얼마간 확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392-4)


"1865년 4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총성이 멈췄을 때, 유럽이 지배한 85년의 면화 역사에서 가장 큰 혼란이 마무리되었다. 쿨리부터 소작인, 임금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노동력 동원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세계 곳곳에서 시험되었고 면화 생산이 남북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지는 미지수였지만, '자유노동' 면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거의 보편적이 되었다. 미국 전역의 해방노예들이 그들의 자유를 축하하고 있을 때 제조업자들과 노동자들은 새롭게 풍부해진 면화 공급을 동력 삼아 공장들이 수용 능력 이상으로 가동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상인들에게는 축하할 일이 거의 없었다. 리버풀의 베어링 브라더스사는 1865년 2월 런던에 있는 그들의 동업자에게 〈종전에 관한 소문이 거의 공포를 유발했다〉라고 알렸다." "보스턴의 얼음 상인 캘빈 W. 스미스는 봄베이에서 이렇게 전했다. 〈이곳에서 영국인과 파시교도들이 짓는 침울한 표정은 내가 지금껏 어떤 치명적인 상황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이다.〉"(416-7)


10장 전 지구적 재건


"노예 덕분에 면화의 제국이 혁명적으로 바뀌었듯이, 노예해방은 면화 자본가들을 그들 나름의 혁명으로 향하게 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면화 재배 노동력을 조직할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에 골몰했다. 미국의 면화 재배를 도맡았던 노예의 해방과 어느 때보다 커진 면화 수요를 조화시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값싼 면화를 찾는 면제조업자들의 불안정한 수요 탓에 〈면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면화의 수입량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산업화된 유럽 국가들의 무역에서 면화는 여전히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품목이었고, 면제품 수출은 유럽에서 해외 시장에 내놓은 상품목록에서 최상위를 차지했다. 수십만 노동자가 직물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으므로 이런 수요와 판로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회의 사회적 안정을 보장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너무나 중요한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면화의 제국을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재편해야만 했다."(422-3)


"면화의 제국을 그 핵심부터 재건하려면 면산업가, 상인, 지주, 국가 관료가 나서서 가정 중심의 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재배농민들의 선택을 분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국민국가를 강화하며, 농촌 지역의 농부들을 생산자이자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기 위해 합법적이고 때로는 불법적인 강제력을 용인하는 권력자들에 의지해야 했다. 그들은 신용, 토지의 사적 소유, 계약법을 포함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확산시켜 농촌 마을을 혁명적으로 바꾸려 했다. 그들은 프랑스 식민 관료들이 매우 적절하게 〈새로운 착취 양식〉이라고 불렀던 것을 찾아냈다."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과 폭력과 수탈이 포함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세계의 면화 재배지역으로 더 넓게 퍼져나갔다. 이제 지배력은 주인의 권위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공정하지도 않은 시장과 법, 국가 같은 사회적 기제에서 비롯되었다."(427-8)


"역설적으로, 지주들은 지역에서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한 바로 그 시기에 국가경제 안에서는, 역사가 스티븐 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권력의 쇠퇴〉를 경험했다. 면화 가격이 하락할 조짐을 보이고 그들이 소비하는 물품은 보호 관세에 직면한데다가 자본이 부족해지면서 자본의 조달 비용이 높아지자, 지주들은 남북전쟁 기간에 등장한 국내 산업화의 정치경제에서 부차적인 존재로 밀려났다. 전 지구적으로 이 면화 재배인 집단이 상인들만큼 강력했던 적은 없었지만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는 지역 정치를 장악했고 중앙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제 권력은 그들과 같은 원료 공급자들에게서 결정적으로 멀어졌다. 당시 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남북전쟁은 세계에서 면화 재배인으로는 마지막으로 강력한 정치집단을 형성했던 이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갔다. 면제조업자에게 나타난 이런 중대한 변화로 면화 제국은 안정되어갔다."(439-40)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이집트산, 브라질산, 인도산 면화는 세계 시장에 새롭게 등장한 중요한 존재들이 되었다." "면화의 생산은 이렇게 여러 대륙으로 확대되었는데 그런 현상이 노예제 없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더 주목할 만했다." "(노예가 아닌 농사꾼들이 면화를 생산하도록) 지구 전역의 농촌지역을 재편하려는 이 모든 투쟁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이제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때는 노예노동에 더없이 중요했던 노예주의 뻔뻔스러운 물리적 폭력이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으로, 국가가 나서서 제도화하고 시행한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으로 대체되었다. 그렇다고 물리적 폭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계약과 법, 세금에서 오는 압력에 비해 물리적 폭력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국가는 영토 안에서 새로운 주권을 발전시키면서 노동에 대한 그 주권도 확대했고 제도라는 산업자본주의의의 새로운 힘을 증명했다."(446-7)


11장 파괴


"소수의 면화거래소들이 차츰 글로벌 면화무역을 지배하게 되자 면화의 제국 안에서 예전 방식으로 일하던 수입업자, 중개인, 도매상의 중요성은 훨씬 더 줄어들었다. 그런 거래소에서의 거래는 종교, 친족, 출신지의 유대관계로 조성된 신뢰의 네트워크에 좌우되지 않았다. 대신에 면화거래소 같은 이런 기구들은 비인격적인 시장이었다." "이제 거래는 실제의 물리적 면화를 뛰어넘어 대단히 추상화되고 표준화되었다. 자연의 엄청난 다양성은 관행과 계약을 통해 몇 개의 범주로 묶였는데, 그 범주들은 자본의 요구에 따라 면화를 동일한 표준으로 측정할 수 있게 하는 추상화에 합치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면화 자체의 표준화였다. 너무 편차가 커서 선물 거래의 목적에 맞춰 다루기 어려웠던 면화의 자연적 특성은 〈육지면 중품〉이라는 가상의 품질로 단일화되었고, 계약은 이 품질의 구체적인 제조 단위에 맞추어 표준화되었다."(483-4)


"글로벌 면화 시장이 이렇게 재건된 결과, 사업이 급성장했다. 뉴욕면화거래소는 1871년에서 1872년 사이에 500만 꾸러미(실제 수확량보다 약간 많은 양)의 선물거래 계약을 주고받는 한편, 10년 뒤에는 3,200만 꾸러미의 계약을 주고받았다. 이는 실제 면화 수확량의 7.5배에 이르는 양이다. 글로벌 면화무역은 이제 실제로 면화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미래 가격 추이를 예측하는 일이 되었다. 면화 재배와 면공업의 모든 중심지에서 주간에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면화 가격, 곧 면화의 '국제 가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래소들의 능력에 따라 그런 예측이 가능해졌다. 이제 면화무역은 면화의 제국 전역에 위치한 항구 도시들의 거리를 누비던 수입업자들과 도매상과 중개인들의 한가로운 속도에 맞춰서 진행되지 않았다. 이제는 산업자본과 금융의 리듬이 면화무역을 지배했다. 상인들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특히 그들의 핵심 기능 가운데 많은 부분을 국가가 차지해버렸다."(485)


"면화 시장의 세계화는 사회구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임금노동자, 차지농, 소작농의 공통점은 생계농업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기본적인 생산과 소비가 세계 시장에 달려 있었다. 면화는 [한때] 〈부차적인 작물〉이었고 〈소작인은 면화 가격이 아무리 높아도 주저 없이 면화 대신 곡식을 재배했다. 곡식을 재배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와서는 수백만의 농사꾼은 주로 면화에 생활을 의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세계 시장의 통합이 사회적 차별화와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곡식을 손에 넣지 못해 주기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무산 차지농과 농업 노동자 집단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났다. 아프리카의 한 필자는 〈면화와 식량불안이 나란히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멕시코의 라라구나에서는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아동의 비율이 기록적인 수준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소규모 농장의 삶은 늘 궁핍했다."(501-2)


12장 새로운 면화제국주의


"19세기 해방을 향한 위대한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의 면화 소비국들, 미국, 일본은 결정적으로 면화 재배가 가능한 영토를 장악하고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반도,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서 식민지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력이 확대되고 국가의 힘이 커지면서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면화의 제국도 그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른바 '면화 열풍'은 세기 전환기에 새로 등장한 제국주의 세력들이 과거 남북전쟁 기간 동안 식민 당국들이 했던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뛰어들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1870년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을 세계 시장을 위한 면화 재배로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면화 자본가들이 세계 각지의 농촌지역에 어느 정도 압력을 가하는 한편, 19세기 후반 들어 면제조업자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안전하고 값싼 면화를 공급하고자 하는 오랜 관심이 더욱 깊어졌기때문이다."(514-6)


"1898~1913년 사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면화 가격이 121%까지 인상되자 유럽과 일본의 제조업자들은 미국이 국내 재배지에서 수확한 면화를 국내 공장에서 소비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져서 면화가 부족해지고, 면화 가격이 인상될까봐 염려했다. 일부 투기꾼이 시장을 '매점하고서' 새로 세운 면화거래소에서 선물거래와 현물거래를 조작해 가격을 더 높게 책정하는 시도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그러한 염려는 더욱 증폭되었다. 이런 매점매석이 수그러들자 '면화 포퓰리즘'의 물결이 미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휩쓸었다. 1892년에는 미국의 면화 농장에 병충해의 일종인 목화다래바구미가 번져 면화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의 신흥 지역에 방적공장들이 확산되면서 면화수요로 인한 압력이 가중되었다." "이와 동시에 '원자재 자급'이라는 보편적 개념이 유럽과 일본의 정책 입안자들과 자본가들에게 차츰 중요한 정치적 목표가 되었다."(516-7)


"하지만 면화의 추가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큰 성과는 미국 면화 단지의 확장이었다. 미국의 이런 면화 재배 확대는 어떤 면에서 러시아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는데, 러시아는 국가의 대리자들과 군대가 지속적으로 영토를 쟁탈하고 그 영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반시설의 건설을 지원했다. 러시아에서처럼 미국은 나중에 황무지에 배수시설을 만들고 물길을 내고 관개시설을 건설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추쿠로바에서 그랬듯이) 중앙아시아의 농사꾼들을 이주시키고 유목민들을 강제로 정착시켜 면화를 재배하게 한 반면에, 미국은 역사가 존 위버의 표현을 따르자면 〈도전적인 개인들의 주도〉와 〈질서정연한, 국가가 보장하는 사유재산권의 확실성〉을 결합시켜, 원주민 대다수를 면화경작지대에서 내몰고 동부에 살던 시민들이 이주해 오도록 장려했다." "이렇게 늘어난 면화 경작지는 포르투갈의 전체 면적보다도 더 넓은 면적이었다."(525-6)


13장 남반구의 귀환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집단행동을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했을 뿐 아니라 새롭게 강화된 국민국가에 압력을 넣어 복지 향상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독일은 노동친화적인 여러 법률을 제정했다. 1871년 이후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12세 이하 아동의 공장 노동이 금지되었고, 14세 미만 아동의 유효 노동시간은 제한되었다. 1910년에 제정된 법률에 따르면, 여성은 주중 10시간 이상, 토요일에는 8시간 이상 노동할 수 없으며, 13세 이하 아동의 노동은 일절 금지되었다. 매사추세츠주는 1836년에 최초의 노동법을 통과시켰고, 1877년에는 공장 안전 법규를 통과시켰으며, 1898년에는 여성과 미성년자의 야간노동을 금지시켰다. 그러다 결국 야간에는 공장 문을 닫게 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노동법에 따라 노동비용이 인상되었고, 여성의 야간노동과 14세 미만 아동의 노동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578)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가는 점차 민주적 정당성을 추구해나갔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자본가들에게는 한때 그들의 가장 중요한 권력의 원천이었던 강력한 국가에 의지하는 것이 이제 가장 크고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 그러한 국가 덕분에 결국 노동 계급이 작업현장과 정치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자본가들에게는 국가는 양면적인 존재였다. 국가는 지구 전역의 농촌지역에서 노동력을 동원한 일을 포함해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지만 자본가들에게는 '덫'이 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건과 임금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가정책에 접근해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때 전 지구적 사회 갈등(생도맹그에서 노예를 동원한 일이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끼쳤을 때)이나, 지역적 사회 갈등(인디언 농민들이 영국인 소유의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동하기를 거부했을 때)은 이제 차츰 국가 차원의 갈등으로 변해갔다."(579)


"제조업자들은 자국의 해당 산업을 글로벌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더욱 강력해진 정부에 접근해 정책을 활용함으로써 경쟁의 압력에 대처했다. 독일의 면산업은 특정 산업 부문의 구체적인 필요에 최적화된 독일 관세 체제에 의지했다. 제조업자들이 집단행동에 나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원하도록 국가에 압력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과 뉴잉글랜드의 면제조업자들은 전 지구적인 면화의 제국 안에서 자신들이 누리던 높은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노동비용이 치솟는 바람에 그들의 노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노동과 자본의 국가 통제에 따른 기회와 제약으로 인해 유럽의 노동 비용이 상승하자 세계의 다른 지역, 즉 노동력이 더 저렴하고 국가의 규제로 인한 제약이 덜한 지역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결과적으로 남반구는 20세기 세계 면산업이 애초의 진원지로 복귀하는 것을 환영했으며, 한 세기에 걸친 발전을 되돌려놓았다."(580-2)


"(이집트와 중국, 그리고 인도 같은) 탈식민사회에서 달라진 점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사회적 힘의 균형만이 아니었다. 국가와 사회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달라졌다. 면공업의 산업화에 뒤늦게 뛰어든 후발주자들은 잉글랜드, 유럽 대륙, 북아메리카의 첫 세대 산업가들이 직면했던 것과 다른 세계를 맞닥뜨렸기 때문에, 노동, 영토, 시장, 원료의 동원을 포함해 산업자본주의로 더 신속히 이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산업자본주의가 국가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탈식민주의 세계에서 그런 '대약진'은 종종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 탈식민주의 체제, 심지어 탈자본주의 체제가 이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영토, 자원, 특히 노동의 식민지적 통합이라는 수단을 채용했다. 산업자본주의가 국가 자체의 생존에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는 산업자본주의에서 산업에 방점을 찍었다. 사실 때때로 자본주의가 산업화의 도정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626)


14장 에필로그: 씨실과 날실


"1963년, 면화의 제국에 대한 유럽의 지배는 끝났다. 1960년대 말이면 글로벌 면직물 수출에서 영국의 비중은 고작 2.8%에 불과했다. 150년 전만 해도 영국은 그 시장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한때 영국의 면직물공장에서 6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했지만, 이제 남은 노동자는 고작 3만 명 남짓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뮬방적기와 직기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실직상태에 놓이자 면화 도시들도 파국을 맞았다. 대륙의 몰락을 상징하는 증거는 1958년에 등장했는데, 오랫동안 자유무역의 견고한 투사였던 맨체스터상공회의소가 노선을 바꾸어, 영국 면직물산업에 보호가 필요하다고 선언했을 때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명백한 패배 선언이었다. 그런데 놀랍도록 생산적이고 무서우리만치 난폭한 이 생산 체제에서 유럽이 밀려나고 미국 역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지만, 면화의 제국 자체는 존속했다. 오늘날의 세계는 전보다 더 많은 면화를 생산하고 소비한다."(632)


"지형부터 노동 체제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재편되어 온 면화의 제국을 통과하는 여행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근대 세계를 사유할 때 그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세계의 농촌지역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은 대체로 도시, 공장, 산업노동자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의 많은 것이 농촌지역에서 등장했으며, 농촌 주민들이 다른 곳에서 사요외는 상품의 제조자이자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소비자로 변했을 때 등장했다. 농촌을 강조하면 자본주의 역사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소였던 강압과 폭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폭력의 여러 형식들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 식민주의, 강제노동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핵심에 놓여 있었다.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일할 것을 강요하는 일은 면화의 제국 전 역사를 통틀어 변함없이 등장하는 요소였다."(6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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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 역사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어떻게 탄생했나
도널드 케이건 지음, 박재욱 옮김, 한정숙 감수 / 휴머니스트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서론


"〈아마도 내 설명에는 신기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재미가 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사는 똑같지 않더라도 비슷하게 전개되기 마련이므로 미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과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찾는 사람이 이 책을 유용하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이 책은 한 번 듣기에 좋은 경연용 글이 아니라 영원한 유산이 되도록 저술되었다.〉(1.22.4)" "이 문단은 투퀴디데스가 자기 역사책에서 사실을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왜 그토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실이 반드시 정확해야만 투퀴디데스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즉, 그는 미래에 지혜로운 사람이 이 자료를 활용하여 특히 전쟁 같은 긴장된 상황에서 인간 행동의 일정한 정형들을 연구하고 교훈을 얻어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를 기대했다. 만약 그의 서술 내용에서 사실이 잘못되었다면 해석 역시 잘못된 것일 테고, 그렇다면 정치적 지혜를 이끌어낼 수도 없게 된다."(34-5)


1장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


"(수정주의자 본능을 지녔던) 투퀴디데스는 특정한 사람을 지목해 논변을 펼치지도 않고, 심지어 누군가의 견해를 반박할 때에도 자기 관점을 '대안적 설명'이라 이름 붙여 제시하지 않았다. 오직 신중한 조사와 숙고 끝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실과 거기에서 추출되는 결론만을 독자에게 제시했다. 투퀴디데스가 택한 방법은 크게 성공했다. 무려 2,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바라보는 데 있어 투퀴디데스와 다른 관점이 존재했음을 알아챈 독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책과 여러 고대 자료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투퀴디데스가 살던 시대에 그와 다른 견해가 존재했고, 그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이러한 다른 견해에 반대하는 강력하고 성공적인 논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잊히고 가려진 동시대 견해를 복원해 투퀴디데스가 제시한 해석과 비교하면 투퀴디데스의 정신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의미를 흥미롭게 다시 조명할 수 있다."(42)


# 수정주의자 :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기존 방식을 날카롭고 철저하게 재검토하여 새롭고 통합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중대하게 바꾸려는 저자


"그렇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기원전 431년 봄부터 기원전 404년 봄까지 벌어진 사건을 따로 떼어내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벌인 단일한 전쟁으로 정의한 사람은 투퀴디데스가 처음이다." 그 기간에 벌어진 몇몇 분쟁을 독립적인 전쟁으로 다룬 당대 혹은 직후의 저술가들과 달리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합된 하나의 긴 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변을 펼쳤다. 〈사건이 발생한 순서대로 여름과 겨울을 나누어서 스파르타인과 동맹국들이 아테나이 제국을 끝장내고 장벽과 페이라이에우스 항을 점거하던 때까지 이야기이다. 전쟁은 27년간 이어졌다. 누군가 조약으로 전투가 중단된 시기는 전쟁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틀렸다. 10년 전쟁과 그에 뒤이은 의심스러운 휴전 기간, 이후에 벌어진 전쟁을 여름과 겨울 단위로 합산하면 전쟁은 이미 내가 말한 기간(27년)과 똑같은 햇수만큼 지속되었고, 단지 며칠만 차이가 난다.〉(5.26.1-3)"(54-6)


2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 케르퀴라 위기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타인이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동맹국들이 제기한 논변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아테나이가 보유한 힘이 날로 커지고 헬라스 대부분이 이미 아테나이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1.88)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상 투퀴디데스가 자신이 내린 상황 판단을 마치 스파르타인의 판단처럼 제시한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당시 아테나이가 얼마나 강력해졌으며 스파르타인이 이에 대해 얼마나 경계심을 품었는지를 보여주는 보충 설명을 길게 덧붙여 자기주장을 뒷받침한다.(1.89-118) 이로써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원을 에피담노스 문제보다 훨씬 이전에서 찾아야 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울러 투퀴디데스는 이 보충 설명의 끝 부분에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결정한 행위는 페르시아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지속적인 과정에서 단지 마지막 단계였을 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66-7)


"스파르타와 아테나이는 (아테나이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이 성장하여 성공과 부, 권력을 차지하고 서서히 아테나이 제국으로 탈바꿈한 페르시아 전쟁 직후의 시기부터 경쟁을 시작했다. 스파르타에는 처음부터 아테나이가 강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수상쩍게 여기고 못마땅해 하는 분파가 존재했다. 그들은 페르시아군이 도주한 뒤 아테나이가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아테나이인이 이러한 반대 의견을 확연한 태도로 거부하자 이들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은밀히 이를 갈았다.〉(1.92.1) 기원전 475년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게루시아(스파르타 원로원)'에서는 아테나이와 전쟁을 벌여 새로 결성된 동맹을 분쇄하고 해상을 제패하자는 제안이 등장했다. 스파르타인은 얼마간 논쟁을 벌인 끝에 이 안을 거부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반反아테나이파가 늘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8-9)


"대개 아테나이 민회에서는 거의 모든 논쟁이 하루 안에 끝났다. 그러나 케르퀴라 동맹 문제는 하루를 더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궁극적으로 거대한 전쟁을 초래할 정책을 결정했는데, 아테나이는 케르퀴라와 방어동맹만 맺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조약은 헬라스 역사에서 이때 처음 등장했다. 투퀴디데스는 케르퀴라와 코린토스 사절의 연설을 서술할 때에는 그들의 말 자체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표현하도록 그대로 전달했다. 그런데 아테나이인의 연설은 하나도 전하지 않았다. 다만 아테나이인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라고 '자신이 믿는 바'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고 만다. 투퀴디데스는 최종 결정을 이끌어낸 동의안을 누가 제안했고 또 누가 옹호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플루타르코스에 의존해야 한다. 〈사람들을 설득하여 코린토스와 싸우고 있는 케르퀴라를 돕게 하고 해군력을 갖춘 활기찬 나라와 연합하게 만든 이는〉 바로 페리클레스였다."(87)


# 케르퀴라 동맹 문제 : 케르퀴라가 코린토스와의 분쟁에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테나이에게 동맹을 요청한 사안. 아테나이가 중립을 취한 결과로 코린토스가 케르퀴라 함대를 장악하게 되면 아테나이의 제해권이 위협받고, 이를 막기 위해 케르퀴라와 동맹을 맺으면 코린토스는 물론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둘째 날 회의에서 다수가 방어동맹을 지지하도록 설득한 데에는 분명히 페리클레스의 연설 필요했다. 여기에서 투퀴디데스는 문제에 부딪혔다. 페리클레스는 분명 특유의 방식으로 인상적인 연설을 했을 테고 늘 그렇듯이 회의를 주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설득하여 케르퀴라인을 돕게 만든〉 이가 바로 페리클레스이며, 앞으로 엄청난 고난을 안기고 참혹하게 종결된 전쟁이 바로 그가 추진한 정책 때문에 벌어졌다는 인상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당대의 아테나이에서는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초래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투퀴디데스는 바로 이 견해를 반박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 아테나이인의 결정을 특정 개인과 무관하게 취급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민회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모든 아테나이인이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인 것처럼, 그리고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89)


3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2 ─ 케르퀴라 위기에서 메가라 봉쇄령까지


"아테나이는 아테나이 제국에 속한 모든 항구와 아테나이의 시장 겸 중심지인 아고라에 메가라인이 출입하지 못하게 막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전쟁보다 낮은 강제 수단인 경제 봉쇄는 현대 세계에서는 외교적 무기로 자주 활용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전시가 아닌 평시에 봉쇄 조치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 또한 분명 페리클레스가 고안한 혁신적인 조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후 벌어진 전쟁이 이 봉쇄령 때문이었고 또 페리클레스가 이 봉쇄령을 동원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메가라 봉쇄령은 코린토스와 동맹을 맺은 폴리스들로 전쟁이 확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외교적인 압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이해해야 한다.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인을, 그리고 누구보다도 스파르타를 싸움에 끌어들여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인은 메가라를 징벌하여 다른 폴리스가 추가로 코린토스를 돕지 못하게 억제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99-100)


"마침내 기원전 432년 7월 에포로스들은 스파르타 민회를 소집하고 동맹국 중 아테나이에 불만을 가진 폴리스는 모두 스파르타로 오도록 초청했다." "(전쟁을 선동하는 코린토스인의 연설) 다음 발언자는 아테나이 사절 중 한 사람이었다. 투퀴디데스는 그가 〈다른 일 때문에 스파르타에 왔다가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다.〉(1.72.1)고 말한다. 그 '다른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이는 아테나이인에게도 해명할 기회를 주려고 만든 핑곗거리였음이 분명하다.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 입장에서는 스파르타 동맹국들의 불만 사항에 대해 해명은 해야겠지만 스파르타 민회에 공식 대변인을 보내지는 않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공식적인 사절을 보낸다면, 평화조약에 따라 불화를 중재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가 아테나이의 행위를 심판할 권리를 가졌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런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아테나이인은 스파르타 민회의 논의에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102-3)


"스파르타가 메가라 봉쇄 사안을 (30년 평화조약에 명시한 대로) 중재에 회부했다면 페리클레스는 중재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고 또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테이다이아와 아이기나가 대표를 파견해 기원전 432년 스파르타 민회에서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해서, 스파르타가 포테이다이아와 아이기나 건으로 아테나이 제국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또 메가라 봉쇄령처럼 아테나이가 추진하는 상업 정책과 제국 정책에 개입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에서 양보를 한다면 에게 해에서 아테나이가 장악한 헤게모니와 아테나이 제국에 대한 지배권이 스파르타의 용인 여부에 달려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었다. 아테나이가 지금 협박이 무서워 뒤로 물러선다면 이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동등하다고 주장해온 입장을 스스로 저버리는 행위이며, 또 장차 더 많은 협박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민회 연설에서 외부 압력 때문에 유화책을 써서는 안 된다고 자세히 설명했다."(112)


4장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아테나이인이 수비에 치중하고 함대를 보존하며 전시에 제국을 확대하려 시도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2.65.7)" "(투퀴디데스도 이에 동의했지만) 동시대 아테나이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 첫해에 앗티케를 침공한 스파르타군이 아테나이 서북부 모퉁이만 휩쓸었다면 사람들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페리클레스가 내린 명령에 따라 기꺼이 성벽 뒤에 머물며 교전을 회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테나이인은 스파르타군이 도시에서 고작 60스타디온 떨어진 아카르나이 인근에 이르자 더 이상 참아서는 안 될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자기 땅이 약탈당하는 모습은 끔찍한 일이었다.〉(2.21.2)" "페리클레스가 추진하던 정책을 향해 매우 거센 분노와 비판이 쏟아졌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민회가 자신이 수립한 전략을 거부하고 지상전을 강행하지 않을까 두려웠다."(119-21)


# 페리클레스 전략의 실패 요인

1.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스파르타에서도 평화파가 득세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쟁 피해를 겪은 양측의 감정은 격해지고 전쟁을 지속하려는 결심이 한층 굳어져갔다.

2. 기원전 430~427년에 역병이 발생하여 도시 거주민의 3분이 1이 사망하면서 페리클레스의 권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심지어 펠로폰네소스에는 역병이 번지지 않았다.)

3.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가 축적한 전비(동맹에서 걷는 수익까지 포함한)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전쟁 개시 후 3~4년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반대파들의 비난과 소송에 맞서 기원전 430년에 행해진 연설에서) 페리클레스는 자기 정책의 결과로 빚어진 현재의 끔찍한 상황을 이해해달라거나 용서해달라고 호소하기는커녕 대담하게도 자신이 폴리스의 효율적인 지도자가 될 가장 탁월한 자질을 갖췄다고 주장한다. '아프라그모네스(고요함을 사랑하는 자들)'는 불행과 공포로 인해 바보, 겁쟁이에 자기밖에 모르는 자가 되어버렸다. 이에 비해 전쟁을 지속하기를 지지하고 '아프라그모네스'를 반대하는 논변을 펼치는 이는 용감하고 연륜을 쌓았으며, 현명하고 거기에 더해 진정한 지도자로서 탁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적어도 페리클레스 본인은 이 강력한 연설에서 스스로를 이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고, 투퀴디데스도 페리클레스를 그렇게 그렇게 묘사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오직 페리클레스만이 발언을 허락받았고, 그의 강력한 언어는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철저한 옹호 덕분에 더욱 증폭되었다."(147-9)


5장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투퀴디데스가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이었으나 사실 점점 제1시민이 통치하는 정체가 되었다〉(2.65.10)고 말한 것은 자기 기준에서 볼 때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가 민주정이라 부르기에 부족했다는 뜻이다."(153-4) "그러나 (많은 희곡작가와 정적들이) 페리클레스와 내연녀를 인신공격하고 정치를 빈정대며 풍자하는 일은 사실상의 군주제나 독재정에서는 생각도 하기 힘들다. 어떤 이들은 페리클레스의 권력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프린키파투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은 전혀 적절하지 않다. 로마의 초대 황제가 제아무리 군주정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프린켑스라는 호칭 뒤에 숨기려 했어도,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행해진 것과 같은 정치 지도자에 대한 공공연한 악담과 공격을 받았다면 아무 처벌도 하지 않고 넘겼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페리클레스에 대한 비방과 풍자는 놀라우리만치 자유로운 민주정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어떤 다른 곳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160)


"오늘날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나이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달리 고대의 비평가들은 이 체제가 '실제로' 민주정이라는 점을 확신했고, 바로 민주정이기 때문에 본성상 나쁘다고 믿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말의 타락한 민주정을 기원전 5세기 중반 위대한 아테나이를 이룩한 민주정과 같은 반열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투퀴디데스는 정치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희귀할 정도로 탁월한 지혜가 필요하며, 그러한 지혜를 가진 자는 소수라고 확신했다. 그런 정치적인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재능 있는 희귀한 개인의 의견보다 우위에 두는 민주정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 재능 없는 시민들이 정치 천재에게 지도권을 내어준 다음에야 나라가 성공할 길이 열렸다.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를 민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야말로 당시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견해를 수정하려는 특히 대담한 시도였다."(172-4)


6장 클레온은 운이 좋아 승리했는가


"투퀴디데스는 자기 역사책에서 기원전 427년에야 처음 클레온을 소개한다. 그리고 클레온이 〈시민 중 가장 난폭했고, 당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3.36.6)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대부분 니키아스와 클레온이 서로 매우 다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니키아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을 따르는 자로서 평화를 옹호했고, 신중하고 고결한 인품을 가진 신사였다고 한다. 반면 클레온은 페리클레스를 반대하는 자였고, 전쟁을 옹호했고, 선동정치가였으며 속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보통 묘사되듯이 그렇게 다른 인물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니키아스와 클레온은 모두 귀족 가문이 아니라 '신인' 계층 출신이었다." "니키아스와 클레온은 둘 다 자기 가문에서 무엇으로라도 크게 이름을 떨친 첫 인물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아마 둘 다 부자였겠지만 폴리스에서 유난히 특출한 사람은 아니었다."(177-9)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이루어낸 놀라운 승리는 비할 데 없이 중요했다. 〈헬라스인이 보기에 이 일은 전쟁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스파르타군을 항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40.1)" "아테나이인은 투퀴디데스와 그가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부른 이들과 의견이 달랐다. 아테나이인에게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은 기적에 가까운 일을 이룩한 위대한 영웅이었다. 아테나이인은 당시 최고의 영웅이었던 클레온에게 감사를 표했다." "클레온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테나이 재정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수준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클레온은 당당하게 포로를 압송한 지 두 달가량 지난 뒤인 8월 둘째 주 정도에 튀딥포스라는 자를 파견해 아테나이 동맹국에게 새롭고 더 높은 금액의 조공을 부과한다는 명령을 전달하고 이를 실행할 준비를 갖추었다."(206-8)


# 클레온의 승리(기원전 425년) : 평화협상을 지지하는 니키아스파와 맞서던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스팍테리아 섬에 있는 스파르타 중장보병들을 공격하여, 그 중 스파르타 완전시민(120여 명)을 생포한 승리. 이 패배로 함대를 억류당하고 포로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스파르타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졌다.


"투퀴디데스가 튀딥포스 법령을 언급했다면 클레온의 공격적 제국주의와 아테나이 속국들에 대한 그의 가혹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할 수 있겠지만, 이는 동시에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페리클레스의 원래 전략에서 벗어난 작전으로 거둔 승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결과가 된다. 이 승리로 아테나이는 제국의 수입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었고, 장기전을 치를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는 페리클레스 전략의 최대 약점을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튀딥포스를 언급한다면 페리클레스 전략의 단점이 강조되고, 페리클레스의 원래 전략을 충실히 따랐더라면 분명히 승리했을 것이라는 투퀴디데스의 칭송은 벽에 부딪힌다. 그렇게 되면 독자는 페리클레스가 실수했으며, 클레온이 무분별하고 운만 좋은 미친 남자가 아니라 대담하고 명민한 지도자였다고 결론짓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진실은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210)


7장 암피폴리스의 투퀴디데스와 클레온


"우리에게는 투퀴디데스가 암피폴리스에서 한 행동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보다 투퀴디데스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투퀴디데스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마음먹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려 했다면, 자기 변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약한 부분인 운명의 날에 왜 에이온에 있지 않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이 일에 대해서 분명 투퀴디데스는 제대로 변명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투퀴디데스는 (자신과 반대측의 변론을 언급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겉으로는 자신을 변호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가장 냉정한 태도로 객관적인 이야기만 전했다. 그리고 핵심 질문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이로써 이천 년이 넘도록 독자들은 대부분 투퀴디데스는 잘못이 없고 페리클레스 사후 민주정이 분노하고 이성을 잃은 탓에 투퀴디데스가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결론을 내렸다."(224)


# 암피폴리스 함락(기원전 424년) : 투퀴디데스는 스팍테리아 사건 이듬해에 장군으로 선출되어 제국의 트라케 지역(핵심 근거지가 암피폴리스) 방어 임무를 맡았는데,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가 이 도시를 기습 공격해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투퀴디데스는 반역죄를 선고받고 남은 전쟁 기간 동안 국외로 추방되었다.


"아테나이인은 암피폴리스를 비롯해 빼앗긴 여러 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전함 30척에 중장보병 1,200명, 기병 300기, 렘노스와 임브로스 출신의 뛰어난 대규모 경보병 특수 부대를 보냈다. 클레온이 장군으로 이 군대를 이끌었다." "투퀴디데스는 이번 작전의 동료 장군을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전쟁을 통틀어 트라케 지역에서 벌어진 작전을 모두 검토해도 장군 한 사람이 혼자서 군대를 이끈 경우는 없었다." "아테나이인이 예외적으로 대규모 군대를 오직 장군 한 명에게, 그것도 다수의 동료 시민에게 경험이 부족하다고 의심받는 장군에게 맡겼을 리는 없다. 투퀴디데스가 클레온과 동행한 장군 혹은 장군들을 언급하지 않은 일 역시 결코 우연한 누락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작전은 재앙으로 끝났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이 실패한 작전의 책임은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관계자가 모두 뒤집어썼다. 이것은 의도치 않은 일일 리가 없다."(228-9)


# 브라시다스의 기습 : 암피폴리스 포위 작전에 앞서 정찰을 마치고 트라케 문을 지나 철수하던 아테나이 군이 브라시다스의 기습을 받아 600명 가량 전사(스파르타군은 7명 전사)한 사건. 클레온과 브라시다스도 함께 전사했다.


"클레온은 브라시다스와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정책이 자기 폴리스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진심으로 확신하고 추구했다. 물론 클레온의 저급한 태도가 아테나이 정치 생활의 품격을 낮추기는 했다. 반란을 일으킨 동맹국에게도 지나치게 가혹했는데, 이를 잘했다고 칭찬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클레온이 아테나이 대외 정책을 형성하고 수행하면서 광범위한 여론을 대변했고 늘 열정과 용기로써 자기 생각을 행동에 옮긴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동시대인 다수가 거의 항상 클레온 편에 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만 투퀴디데스가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죽음으로써 평화로 나아갈 길이 열렸다고 한 말은 옳았다. 당분간 아테나이에는 니키아스가 강력하게 이끄는 평화 정책에 반대할 만한 위상을 갖춘 인물이 없었다. 이 평화는 거짓으로 드러나고 아테나이인에게 재앙과 최종적인 패배를 안겨주겠지만 이는 클레온과 아무 상관 없는 결과였다."(241-2)


8장 시켈리아 원정은 어떻게 결정되었나


"투퀴디데스가 시켈리아 원정을 설명하는 내내 그려낸 모습에 따르면 이 작전은 시켈리아 섬 전체를 정복하고 착취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아테나이 군중은 이 작전이 얼마나 거대한 모험이며 얼마나 어려울지, 또 얼마나 위험할지도 알지 못한 채 권력과 탐욕에 찌들어 이 일의 실행을 요구했다. 투퀴디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다수는 이 섬이 얼마나 큰지도 몰랐고 헬라스인과 비헬라스인을 포함해서 섬 주민이 얼마나 많은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펠로폰네소스인과 벌이는 전쟁에 비해 결코 작지 않은 대규모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6.1.1)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인이 시켈리아로 1차 벙력을 보내기로 결정한 일을 설명한 뒤 니키아스의 입을 통해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아테나이인은 시시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핑계를 댔지만 실은 시켈리아를 정복할 의도였고 이는 거대한 사업〉(6.8.4)이었다."(252)


# 시켈리아 원정 : 시켈리아 서부에 있던 에게스타와 셀리누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고, 열세에 몰린 에게스타가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한다. 주전파(알키비아데스)와 평화파(니키아스)가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아테나이는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지만, 적절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원정에 임했다가 결국 코린토스와 스파르타의 원조를 받은 쉬라쿠사이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인이 시켈리아의 지리와 인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큰 사업인지도 알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시켈리아를 향한 대규모 원정이 시작되기 적어도 9년 전인 기원전 424년에 아테나이 삼단노선 60척이 시켈리아에서 장기 주둔을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투퀴디데스는 에게스타와 레온티노이의 요청에 아테나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서술했는데 이 내용 역시 아테나이인이 무지했거나 무모했다는 주장에 타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민회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지 않고 대신 에게스타로 사절단을 보내 〈에게스타인이 말한 대로 국과 신전에 돈이 넉넉한지 살피고 동시에 셀리누스인과 벌이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조사하도록〉(6.6.3) 결정했다." "에게스타인은 아테나이에 은괴를 60탈란톤─전함 60척을 한 달 동안 부양할 수 있는─이나 제공해 더욱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253-4)


"투퀴디데스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아테나이인은 '엘피스(희망)'에 가득 차서 출발했다. 이 대목에서 투퀴디데스를 읽는 독자는 아테나이인이 1년 전에 불운한 멜로스인에게 경멸조로 했던 말을 틀림없이 떠올리게 된다. 이 이야기는 시켈리아 원정 직전에 서술되었다. 〈그래요. 희망은 험악한 시절에 위안을 줍니다. ····· 그러나 희망의 대가는 엄청나게 비싸기에, 단 한 번의 시도에 전부를 거는 이들은 그 시도가 실패했을 때에야 대가를 알게 됩니다.〉(5.103) 아테나이인의 냉정한 논평은 사실로 증명되었고, 스파르타가 도우리라는 희망에 운명을 걸었던 멜로스인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독자는 아테나이의 위대한 무적함대가 맞이할 끔찍한 운명을 이미 알기에 여기에 담긴 반어법을 놓칠 리 없다. 투퀴디데스는 이 모두를 통해 이번 원정대는 무지하고 탐욕스런 군중이 결정하고 응원한 행사이며,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되는 일이었다고 암시한다."(279)


9장 시켈리아의 재앙은 누구의 책임인가


"니키아스는 전략가로서 원정 실패의 핵심 원인이 된 실수를 저질렀다. 쉬라쿠사이를 점령하려면 기병이 꼭 필요했다. 아테나이군이 처음부터 기병을 보유했다면 쉬라쿠사이는 항복할 도리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어떤 도움을 얻더라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니키아스 본인이 원정대 출발 전에 기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테나이군이 기병 부대를 원정대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은 특히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착오는 판단을 잘못 내린 탓이 아니라 목적을 잘못 설정한 탓이었을 것이다. 니키아스는 시켈리아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억지로 이 작전에 참가한 뒤에도 최소한의 행동만 하고 제대로 된 교전은 피하려 했다. 니키아스는 아마 쉬라쿠사이를 직접 공격하는 심각한 상황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으리라. 그러다가 그는 전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작전에 필요한 병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89-90)


"(전황이 점차 불리해졌고, 본인도 본래 후퇴하는 편을 선호했지만) 니키아스는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심하면 더 좋지 않은 결과도 맞이해야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내내 아테나이인은 기대를 저버린 장군들에게 가차없는 모습을 보였다. 위대한 페리클레스조차 정책과 전략의 결과물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하자 모욕당하고 처벌받았다. 니키아스는 분명히 귀환하자마자 심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니키아스는 자신의 명성과 안위를 염려해 (부정직한 보고서를 올리면서) 아테나이인에게 자기 뜻대로 철수하거나 아니면 1차와 같은 규모로 추가 원정대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니키아스는 애초에 아테나이인이 원정에 나서지 못하게 막으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실패한 경험에서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한 듯하다. 아테나이인은 이번에도 니키아스의 바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추가 함대와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니키아스를 해임하지도 않았다."(304-7)


"역사가들은 대부분 투퀴디데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러한 조치들이 아테나이 직접 민주정의 탐욕과 무지,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아테나이인은 아테나이 민주정을 비난하는 주된 이유인 변덕과 우유부단함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좌절과 실망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시작한 일을 끝마치려는 일관성과 결단력을 드러냈다. 아테나이인이 저지른 실수는 사실 정치 체제와 무관하게, 약하고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강력한 나라라면 다들 겪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당한 강대국은 대개 그대로 군사를 되돌리면 위신에 타격을 입는다고 생각한다. 철군 자체도 불미스럽지만 주변 국가들이 이 나라의 국력과 결단력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안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모험을 할 때에는 대개 승리할 전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지원을 멈추지 않는다."(307-8)


"투퀴디데스가 니키아스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자기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를 덧붙이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니키아스의 동시대인들과 같이 시켈리아에서 벌어진 재앙의 가장 큰 원인은 니키아스가 정치가로서 또 장군으로서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투퀴디데스는 니키아스의 무능이 시켈리아에서 벌어진 재앙의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투퀴디데스가 보기에 니키아스의 무능만으로는 시켈리아 원정의 실패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며, 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도 아니었다. 투퀴디데스는 재앙이 벌어진 주된 이유는 페리클레스 사후 민주정이 현명하고 절제력을 지닌 강력하고 총명한 지도자에게 견제를 받지 않았고, 생각 없고 야심 가득한 선동정치가에게 현혹되었으며, 그리하여 스스로를 무지와 탐욕과 미신과 공포에 내맡겼기 때문이라는 점을 독자가 이해하기 바랐다."(325)


결론


"우리가 본 대로 투퀴디데스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서술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매우 다양한 장치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들이 속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고, 진실을 강조하고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해 자료를 선택했다." "투퀴디데스가 특이한 곳에 강조점을 둔 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해석을 위해서였다.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가 투퀴디데스의 해석을 반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증거를 거의 대부분 투퀴디데스 본인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투퀴디데스 스스로 투퀴디데스식 해석의 목적을 알려주고 있다. 투퀴디데스가 목적한 바는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진실이 꼭 우리의 진실일 필요는 없다.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을 유익하게 사용하려면 그가 제시하는 증거와 그가 덧입힌 해석을 구분해야만 한다. 오직 그 후에야 투퀴디데스가 바란 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원한 유산〉으로 사용할 수 있다."(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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