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이후 사이언스 클래식 14
스티븐 J. 굴드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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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자연 선택 이론

1. 생물들은 서로 다르고(vary), 이러한 변이(variation)는(적어도 그 일부는) 자손들에게로 유전된다.

2. 생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자손을 낳는다.

3. 평균적으로 환경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가장 강하게 변화한 자손이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린다. 따라서 자연선택은 환경이 선호하는 변이를 각 개체군(population)에 축적한다.

4. 변이는 임의적이며, 적어도 적응에 대한 지향성이 없다. 즉, 사전에 어느 한 방향으로 설정된 목표란 없다.

5. 변이는 새로운 종(種)의 기초를 세우는 데 필요한 진화적 변화보다 규모가 작아야 한다. 변이를 겪은 새로운 종이 일시에 출현하지는 않는다.


1부 다윈주의


"진화론은 이미 19세기 전반에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이단이었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과 다른 일체의 진화론에 관한 주장들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타협을 모르는 철학적 유물론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다른 진화론자들은 생명력, 진화의 방향성, 유기체의 노력, 그리고 정신의 본질적인 불가분성 등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이 창조가 아닌 진화를 통해서 역사하셨다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기독교와 타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다윈은 오로지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만을 거론했다. 다윈은 자신의 노트에서, 그가 명명했던 이른바 '요새 그 자체(the citadel itself)'─인간 정신─을 비롯한 모든 생명 현상에 자신의 유물론적 진화론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만약 정신이 인간 두뇌의 산물 그 이상이 아니라면, 하느님이란 두뇌의 환상이 빚어 낸 또 하나의 환상 이외에 도대체 무엇일 수 있겠는가?"(27)


"다윈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진화라는 용어를 피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그 시기에는 진화라는 용어가 생물학에서 이미 발생학적으로 전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744년 스위스의 생물학자 알브레히트 폰 할러는, 난자 또는 정자 안에 담긴 채로 미리 형태를 갖추고 있는 이른바 전성(前成)의 축소형 개체로부터 배(embryo)가 자라난다는 이론을 설명하는 데 진화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둘째, 당시 일상어로서의 진화는 진보 개념과 확고하게 묶여 있었다." "다윈은 중력과 같은 물리 법칙의 불변성과─〈이 지구는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회전을 계속하는 동안 지극히 단순한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형태로 끝없이 진화해 왔으며,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생물 발달의 변이성을 대비시켰다. 여기서 다윈은 우리가 지금 진화라고 부르는 것과 진보의 관념을 등식화하려는 일반적인 견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42-4)


"나는 다윈이 자연 선택과 동물 육종을 비유한 것이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인위 선택에서는 한 육종가의 바람이 어느 생물 집단의 '환경 변화'를 의미한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는 일정한 형질들이 선천적으로 우월하다. 자연에서의 다윈적 진화도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생물의 반응을 뜻한다." "내가 알고 있는 비다윈적 이론들에는 예외 없이 자연 선택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 선택은 그 이론들 속에서 부적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인 또는 망나니로서의 부정적인 배역을 맡고 있다(반면에 그들은 획득 형질의 유전이나 환경에 의한 유리한 변이의 직접적 유도 등 비다윈적인 메커니즘에 의해서 적자가 출현한다고 주장한다). 다윈주의의 본질은 자연 선택이 적자를 창조한다는 주장에 담겨 있다. 변이는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그 방향은 임의적이다. 그것은 소재를 공급해 줄 뿐이다. 자연 선택은 진화라는 변화의 방향을 지시한다. 그것은 선호되는 변이 종들을 보전하고 점진적으로 적응도를 쌓아 올린다."(54-7)


"다윈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진화가 실제로 일어났음을 과학계에 확신시켰고, 그 메커니즘으로 자연 선택 이론을 제시했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진화를 진보와 동일시했으므로 다윈의 첫 번째 주장이 동시대인들이 구미에 훨씬 잘 맞았다는 사실을 나는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다윈은 자신의 생전에 두 번째 주장을 인정받는 데에는 실패했다. 자연 선택 이론은 1940년대에 와서야 승리를 거뒀다. 내가 보기에 그 이론이 빅토리아 시대에 인기를 얻지 못했던 이유는 진화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 전반적인 진보가 내재되어 있다는 관점을 부정했던 데에 있다. 자연 선택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지적 적응(local adaptation) 이론이다. 거기에는 완성의 원리가 없으며, 전반적인 개선의 보장도 없다. 요컨대 자연에 내재하는 진보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정치 풍토에서 그의 이론은 전반적인 찬성을 얻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58)


2부 인류의 진화


"어떤 두 동물 종이 형태학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지만 자연 상태에서 각기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그들 사이에 교배의 가능성이 없을 때 진화 생물학자들은 그들을 '자매 종(sibling species)'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자매 종들은, 분명한 형태학적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속(屬)에 속하는 두 종, 즉 동속 종(congeneric species)들보다는 유전적인 차이가 훨씬 적다. 그런데 침팬지와 인간은 자매 종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또 종래의 분류학적인 관행을 따르자면 인간과 침팬지는 동속 종도 아니다. 하지만 킹과 윌슨은 인간과 침팬지 사이에서 나타나는 전반적인 유전적 차이가 자매 종들 간의 평균적인 차이보다 작고 또 지금까지 연구된 어떤 동속 종들 간의 차이보다도 훨씬 더 작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전반적인 유전자 차이가 그렇게도 작다면 형태와 행동에 있어서 그처럼 큰 차이가 나는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69-70)


"여기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유전자들은 다른 유전자들보다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단 하나의 형질이 아니라 생물 전체에 두루 영향을 준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간 세포와 뇌 세포는 모두 동일한 염색체와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다. 그것들 사이의 현격한 구조적 기능적 차이는 유전자 구성의 차이가 아닌 발생 과정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면서도 각각의 세포가 서로 다른 형질을 나타낼 수 있으려면 세포 분화 과정에서 여러 다른 유전자들이 제각기 다른 시간에 발현되고 또 정지되어야 한다." "유전 시스템의 상당 부분은, 어떤 특정한 형질을 결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형질이 제때에 발현되도록 하는 프로그램의 조정과 통제를 담당하고 있다. 지금 여기서는 발생 과정에서의 시간 조절을 담당하는 유전자들을 조절 시스템이라 부르고 있다. 조절 유전자 단 하나의 변화라도 생물체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은 분명하다."(70-1)


"종 분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것은 진화론에서 끊임없이 다루어지는 뜨거운 논쟁거리로, 대다수 생물학자들은 '이소성 이론(allopatric theory)'에 기우는 경향이 있다. '이소(異所)'는 '다른 장소'라는 뜻이다. 에른스트 마이어가 대중화한 이소성 이론에 따르면, 새로운 종은 그들의 모집단으로부터 격리되어 조상 영역의 주변에 위치하는 지극히 작은 개체군에서 나타난다. 그처럼 소규모 고립 개체군에서의 종 분화는 진화의 기준에 따르면 아주 빨리 진행된다. 지질학적으로 100만분의 1초라고 할 수 있을 몇백 년 또는 몇천 년의 기간이 소요될 뿐이다. 중대한 진화는 그처럼 작고 고립된 개체군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유리한 유전적 변이는 재빨리 그들 속으로 퍼져 들어갈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중앙에 자리잡은 대규모 개체군에서는 유리한 변이가 아주 느리게 퍼져 나가고 대부분의 변화는 잘 적응하고 있는 개체군으로부터 집요한 저항을 받는다."(83)


"진화가 거의 매번, 중앙에 있는 대규모 개체군에서 일어나는 느린 변화보다 오히려 주변부의 고립된 작은 개체군에서 일어나는 급속한 종 분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화석 기록은 어떤 형태를 보여 주어야 할까? 화석 기록에서 종 분화 현상 그 자체를 탐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것은 주류 조상들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극히 작고 고립된 집단에서 나타나며 그것도 순간적으로 진행된다. 그렇게 탄생한 새로운 생물 종은 기존 조상들의 영역을 다시 침범해서 독자적으로 중앙의 대규모 개체군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와 만나게 된다. 그것들이 화석 기록으로 남겨지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화석 기록으로는 단지 새로운 종으로서 성공을 거둔 중앙 집단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종 자체는 화석 기록에서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하고 거의 아무런 특별한 변화가 없는 상태를 유지하다가 이후 똑같이 빠른 속도로 멸종된다."(84)


3부 생명의 진화


"다윈의 자연 선택은, 진화적인 변화는 적응적이라는 데에 전제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런 변화는 생물에게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반다윈주의자들이 동물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는 진화 사례에 해당하는 화석 기록을 찾아 나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향 진화론은 즉각 반다윈주의 고생물학자들을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진화는 자연 선택이 규제하지 못하는 어느 한 방향으로만 진행된다. 어떤 경향이든 일단 시작되면 설사 멸종에 이른다 할지라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향 진화론의 유명한 사례로 단연 독보적인 경우가 바로 아일랜드엘크였다. 아일랜드엘크는 몸집이 그보다 작고 뿔도 훨씬 더 작은 동물로부터 진화했다." "그들은 두개골에서 자라나는 외부 돌출물의 무게에 눌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마침내 나무에 걸리거나 웅덩이에 빠져서 목숨을 잃었다."(114-5)


"19세기의 다윈주의자들은 자연계를 무자비한 곳으로 간주했다. 진화적 성공은 전장에서의 승리와 그로써 멸망시킨 적군의 숫자로 가늠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뿔이 포식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다른 수컷과 경쟁하는 데에 쓰이는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했다." "뿔이 무기라면 정향 진화의 논리가 호소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만일 뿔의 일차적인 기능이 무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현대에 들어서 학자들은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여 진화 생물학에 대단히 중요하고 흥미로운 개념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전에는 실질적인 무기라든가 암컷에 대한 과시 장치로 판단되었던 많은 구조물들이 수컷끼리의 의식적인 싸움(ritualized combat)에 사용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한 구조물들은 수컷들이 쉽게 알아차리고 복종하도록 만드는 지배의 위계질서를 확립해서 실제적인 싸움(그에 따르는 부상과 생명의 손실)을 예방하는 기능을 한다."(119-20)


"그 뿔이 적응에 유리했다고 한다면 아일랜드엘크가 (적어도 아일랜드에서는) 멸종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일랜드 엘크는 약 1,000년간 지속된 알레뢰드 아간빙기에 풀이 많고 나무가 적은 개활지에는 잘 적응했지만, 그 다음으로 찾아왔던 혹한기의 아북극성 툰드라(subarctic tundra)와 마지막 빙하가 물러간 이후 나타났던 울창한 삼림에는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다. 멸종이란 거의 모든 생물 종들이 맞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체로 그 원인은 그들이 변화하는 기후 조건이나 경쟁의 조건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 어떤 동물도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구조를 발달시키지는 않지만, 어느 한 시점에는 유용했던 구조가 이후의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항상 유용할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고 선언한다. 아일랜드엘크 역시 앞서 이룩했던 성공의 희생자였을 것이다. 무릇 세상의 모든 영광이 그러하듯이(Sic transit gloria mundi)."(121-2)


"인간은 하느님을 자기 형상에 따라 창조했다. 이후로 특수 창조설(the doctrine of special creation)은 우리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한 그 어떤 적응이라도 그것을 설명해 내는 데 실패한 적이 없다." "만약 모든 생물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도록 그렇게 명백하고도 탁월한 기법으로 설계되었다면 자연 선택론은 결코 특수 창조설을 대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찰스 다윈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완벽한 지혜로 만들어진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형태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로 남아 있다. 진화에 의한 적응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예들은 인간의 직관으로는 특이하거나 기괴해 보인다. 과학은 '조직화된 상식(organized common sense)'이 아니다. 과학이 우리를 열광하게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직관이라고 부르는 오랜 역사를 지닌 인간 중심적 편견에 대항하여 막강한 이론들을 적용함으로써 우리의 세계관을 재구성한다는 점이다."(123-4)


"예를 들어, 처녀 생식을 하는 애벌레형 혹파리는 전형적인 r환경에 살고 있다. 버섯은 수가 적고 제각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그마한 파리로서는 일단 찾아내기만 하면 먹이는 넘치도록 풍부해진다. 그러므로 혹파리들이 새로 발견한 버섯을 이용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개체군을 번식시킨다면 선택적인 이점을 갖게 된다. 번식 개시 연령을 10퍼센트 앞당기면 출산력은 100퍼센트 증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혹파리들은 조기 번식과 지극히 짧은 수명이라는 놀라운 적응성을 가지도록 진화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혹파리들은 먹이 자원이 일시적으로 과잉되는 전형적인 r환경 속에서 최고의 r전략가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애벌레 상태에서 번식을 시작하고, 부화하자마자 그들의 몸 안에서 다음 세대를 키워 내기 시작한다. 그러한 예로 버섯혹파리의 처녀 생식형 r전략가들은 단 한번의 탈피로 완전한 애벌레가 되어 번식을 하며, 단 5일 동안에 많게는 38세대를 거친다."(128-9)


# 두 가지 생존 전략

1 r선택 : 식량 공급원이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생물 종이 모든 힘을 번식에 투입하도록 진화한 방식

2 K선택 : 비교적 안정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 종이 정밀하게 조율된 소수의 자손을 낳아서 기르는 방식


"대체로 자연의 역사는 생물들이 다른 생물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각기 다르게 적응해 가는 이야기가 큰 줄거리를 이룬다. 어떤 개체들은 숨기를 잘하게, 어떤 종들은 맛이 없게, 또 어떤 종들은 바늘이 있거나 두꺼운 껍질을 둘러쓰고 있도록, 심지어 어떤 종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근친 종과 눈에 띄게 비슷한 모양이 되도록 진화하기도 한다. 그 목록을 만들자면 끝이 없으므로 우리는 자연의 다양성에 놀라워하며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15년 또는 20년 주기로 집단 개화하는) 대나무 씨앗과 (땅속에서 애벌레로 지내다 13년 혹은 17년을 주기로 동시에 출현하는) 매미들 역시 그런 비상한 전략을 구사한다. 그들은 두드러지게 드러나서 쉽게 잡아먹힐 수 있지만, 너무 띄엄띄엄, 또 일시에 엄청난 수가 나타나기 때문에 포식자는 그들을 한꺼번에 먹어 치울 수가 없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이런 방어 수법을 가리켜 '포식자 포만(predator satiation)'이라고 이름 붙였다."(138-9)


"우리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구조와 행동을 진화의 관점에서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혹파리를 인용했다. 그렇지만 그런 예와는 전혀 궤를 달리 해서 '지극히 완전한 기관들'은 그 고유한 가치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어떻게 해서 그것이 발달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려울 지경이다. 다윈의 이론에 의하면 복잡한 적응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 선택은, 보다 적응력이 뛰어난 생물이 갑자기 나타날 때마다 부적자를 제거하는 순전히 파괴적인 작업만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 선택은 다윈의 이론 체계 안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자연 선택은 최종 산물의 한 부분으로서만 의미를 지니는 요소들을 연속적으로 결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 중간 단계들이 점진적으로 축적됨으로써 적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련의 합리적인 중간 형태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일까?"(144-5)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대 진화학자들은 '전(前)적응(preadaptation)'이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가령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어떻게 해서 땅 위를 걷는 사지로 진화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물고기들이 가지고 있던 지느러미는 가느다란 가시들이 나란히 배열해 있는 구조여서 땅 위에서는 동물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바닥에 살았던 민물고기의 특별한 한 무리─인간의 먼 조상들─가 강력한 중심축에 방사상 돌기 몇 개가 부착된 지느러미를 진화시켰다. 놀랍게도 그것은 땅 위의 발이 될 수 있도록 전적응되어 있었지만 당시에는 오로지 물속의 목적에 적합하도록 진화된 기관에 불과했다. 아마 그것은 지느러미의 중심축을 민첩하게 회전시켜 물밑을 기어다니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간단히 다시 정리하자면 전적응의 원리는 어떤 구조물이 형태를 크게 바꾸지 않으면서 그 기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150-1)


4부 생명의 역사


"식물 아니면 동물. 생물의 다양성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본적인 시각은 이 이분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땅 위에 사는 큰 동물로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낳은 편견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이제 생물의 가장 근본적인 구분은 '고등' 식물과 '고등' 동물 사이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구분의 커다란 획은 단세포 생물들 사이에 그어진다는 것이다." "박테리아와 남조류(blue-green algae)에는 고등 세포의 내부 구조물, 즉 '세포 기관(organelle)'이 없다. 그들은 세포핵, 염색체, 엽록체, 미토콘드리아(고등 세포의 '에너지 공장') 등을 갖지 않는다. 그러한 단순한 세포들을 원핵생물(prokaryotes, '알맹이' 또는 '중핵'이라는 뜻의 그리스 어 'karyon'에서 비롯된 단어로 대략 '핵 이전before nuclei'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이라 부른다. 세포 기관들이 있는 세포는 '진핵생물(eukaryotes, 진실로 핵이 있는)'이라고 한다."(158-60)


"본질적으로 단세포 생물인 원핵 세포와 단세포 생물이지만 핵을 갖는 진핵 세포를 갈라놓기 위해서는 가장 윗단계의 분류학적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단세포 생물들 사이에 2개의 생물계가 확립되었다. 우리는 이제 원핵생물(박테리아와 남조류)을 모네라(Monera)라고 하고, 진핵생물들을 원생생물(Protista)이라고 해서 두 생물군을 구분한다." "휘태커가 주장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다세포 생물을 구성하는 3개 생물계는 형태학적인 분류로서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분류로서도 합당하다. 이러한 분류는 지구상에서 행해지는 생존의 세 가지 주요한 방식을 식물(생산), 균류(환원), 동물(소비)로써 잘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 인간의 약점인 자만심의 관(棺)에 또 하나의 못을 박아 두고자 하는데, 주요한 생명 순환은 생산과 환원으로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는 점을 서둘러 밝히는 바이다. 이 세상은 소비자들 없이도 얼마든지 잘 유지될 수있다."(162-3)


# 5개의 생물계

1 단세포 생물 : 원핵생물 - 진핵생물

2 다세포 생물 : 식물 - 균류 - 동물


5부 지구의 역사


"18세기 초의 지질학은 격변론자들(catastrophists)─지질학적 기록을 성서 연대기의 엄격한 틀 속에 압축해 놓으려 했던 신학적 변증론자들─의 독점적 무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의 변화 양식 사이에는 심각한 불일치가 있다고 상상했다. 그들은 현대의 역사는 마치 물결이나 강물의 작용과 마찬가지로 느리고도 점진적으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그와는 달리 과거의 사건들은 돌발적이고 대규모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고서야 어떻게 그 수많은 사건들이 불과 몇 천 년 속에 포함될 수 있겠는가? 하룻밤 사이에 산맥이 솟아올랐고 일시에 깊은 계곡들이 입을 벌렸다." "1830년 자신의 혁명적인 저서 『지질학 원론』을 출간한 라이엘은, 시간에는 경계가 없다고 대담하게 선언했다. 이 근본적인 제약을 내버림으로써 그는 (자연법칙은 변하지 않는다는) '균일론(uniformitarianism)'─지질학을 과학으로 가다듬은 학설─의 철학을 옹호했다."(210-1)


"라이엘은 자신이 타도해야 하는 대상으로 가공의 허수아비를 내세웠다. 1830년에 이르자 과학계의 진지한 격변론자들 중 어느 누구도 지구의 대격변이 초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라거나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관념을 옹호하는 비전문인들은 많았고 과학을 흉내 내던 일부 신학자들 역시 변호하고 나섰다. 과학으로서의 지질학이 그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상황에서 라이엘의 허수아비는 누가 타도의 대상인지를 분명히 해주었다." "지구의 나이가 6,000년에 불과하다면 지질학적인 기록을 그처럼 짧은 기간에 압축해 넣기 위해서 격변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 반대가 반드시 진실인 것도 아니다. 격변설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지구의 나이를 6,000년으로 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는 나이가 45억 년 또는 1,000억 년이라 해도 여전히 급격한 속도로 산맥을 형성하고 평야를 만들 수 있다."(212-3)


"사실 격변론자들은 경험주의적 사고에 있어서는 라이엘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지질학적 기록들은 대격변의 흔적을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암석들은 일순간에 파열되고 일그러졌으며 모든 동물상이 일시에 멸종되기도 했다. 이처럼 뚜렷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라이엘은 상상력을 동원했다. 그는 지질학적 기록들은 지극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는 잇으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논리를 삽입하여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격변론자들은 맹목적인 신학적 변증론자들이 아니라 그 시대의 콧대 센 경험주의자들이었다." "대다수의 지질학자들은 자신들이 전공하는 과학에서 라이엘의 균일론이 비과학적인 격변론을 꺾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노라고 말하고 싶어 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 지질학은 사실상 2개 학파─라이엘의 독창적이고 엄격한 균일론과 퀴비에 및 아가시의 과학적 대격변론─의 균등한 혼합체라고 할 수 있다."(213-6)


6부 자연에 대한 오만과 편견


"모양은 그대로인 채로 단순히 커지기만 한다면 어떤 물체든 상대적으로 표면적이 계속 줄어들게 된다. 부피는 길이의 세제곱(길이X길이X길이)으로 늘어나는 반면에 표면적은 제곱(길이X길이)으로만 증가하기 때문에 이런 감소 현상이 일어난다. 바꿔 말하면 부피는 면적보다 더 빨리 늘어난다. 이런 점이 동물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에 따라 결정되는 많은 기능들이 몸 전체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줄어드는 표면적을 해결하는 한 가지 방안이 크고 복잡한 생물의 점진적인 진화에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바로 내부 기관의 발달이다. 근본적으로 허파는 기체 교환을 위하여 표면적이 무척 복잡하게 만들어진 주머니이며, 순환계는 대형 동물의 경우 체표면에서의 직접적인 확산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내부 공간에 물질을 전달하기 위한 기관이다. 인간의 소장에 있는 융모(villus)는 음식물을 흡수하는 표면적을 넓히기 위한 것이다(작은 포유류는 융모가 없고 또 필요하지도 않다)."(244-5)


"작은 동물들은 그들의 작은 몸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제약을 받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크기 감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작은 동물들에게는 세상이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인식하기 어렵다. 몸체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표면적이 아주 작기 때문에 우리는 몸무게에 작용하는 중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부피에 대한 표면적의 비율이 아주 높은 소형 동물들은 중력의 영향을 사실상 무시한다. 그들은 표면력(surface force)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경험과는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 그들의 환경이 주는 쾌감과 위험을 판단한다. 곤충이 자유자재로 벽을 기어오르거나 연못 위를 걸어다니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그들을 아래로 끌어당기는 미약한 중력의 힘은 표면 접착력에 의해 쉽사리 상쇄된다. 벌레 한 마리를 지붕에서 내던지면 표면에 작용하는 마찰력이 중력을 충분히 능가하기 때문에 두둥실 떠서 사뿐히 내려앉는다."(246)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큰 극소수의 동물에게만 관심을 집중해 왔기 때문에 인간의 크기에 대해 왜곡된 관념을 갖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는 그다지 크지 않은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들 중 하나이며 지상에 사는 99퍼센트 이상의 동물 종이 인간보다 작다. 인간이 소속되어 있는 영장목에는 190종의 동물이 있는데 인간보다 몸집이 큰 종은 고릴라밖에 없다. 지구의 지배자로 자처하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고귀한 지위에 도달할 수 있게 한 특징들을 목록으로 작성하는 일에 커다란 관심을 보여 왔다. 나는 사람들이 인간의 두뇌, 직립 자세, 언어 발달과 집단 수렵을 곧잘 그 예로 들면서도 진화의 지배 요인으로 인간의 큰 몸집을 거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에 늘 충격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인간의 큰 몸집은 (수십억 개의 뉴런이 들어있는 두뇌에서) 자기의식이 가능한 지능을 발달시킬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253-5)


"인간의 기술과 행동은 자신의 크기에 꼭 맞게 조율되어 있다. 인간의 키가 지금의 2배로 커진다면 공중에서 떨어질 때의 운동 에너지는 16배 내지 32배로 증가하고 원래의 다리로는 늘어난 몸무게(8배나 된다)를 도저히 지탱할 수 없게 된다. 2미터를 훨씬 넘는 키였던 거인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에 죽거나 관절과 골격 이상으로 일찍 불구가 되었다. 인간의 키가 지금의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몽둥이를 휘둘러 큰 짐승을 잡을 만한 힘을 낼 수가 없다(운동 에너지는 16배 내지 32배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과 화살에 그것을 움직일 만큼의 운동량을 가할 수 없고 원시적인 도구로 나무를 베거나 쪼갤 수도 없으며 곡괭이와 끌을 사용해서 광물을 캐낼 수도 없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가 그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인간의 크기가 인간의 활동을 제한했고 크게 보아서 인간의 진화를 규정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256)


7부 사회 속의 과학


"우리는 과학의 진보가 미신과 편견을 몰아낸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1890년에 브린튼은 흑인들이 유아기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열등하다고 말했다. 브린튼은 자신의 인종 차별주의를 반복설과 관련지었다. 반복설이란 개체가 태아기와 유아기의 성장 과정에서 조상들의 성인 단계를 되풀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각 개체는 발달 과정에서 그 계통수(family tree)를 소급해 올라간다는 신념을 가리킨다(반복설의 지지자들은 인간 태아에게서 나타나는 새열(gill slit, 한 줄로 배열된 작은 구멍들로 아가미가 형성되기 전(前) 단계의 구조물)이 인류의 먼 조상이 되는 물고기의 성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종 차별주의적인 해석에 의하면 백인 어린이들은 '하등' 인종들의 성인에 해당하는 지적 단계를 통과해서 그 이상의 단계로 나아간다). 반복설은 19세기 말엽 인종 차별주의의 무기고 속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두세 가지 '과학적' 논리들 중 하나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302)


"다윈의 이론을 대중화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헤켈은 진화론이 사회적인 무기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진화(evolution)와 진보(progress)는 같은 편에 속하며 그것들은 과학의 찬란한 깃발 아래 도열해 있다. 그와는 달리 계급 제도의 검은 깃발 아래에는 영적인 예속과 허위, 이성의 결핍과 야만성, 미신과 퇴화가 모여 있다······. 진화론은 진리를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포병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치 대포의 연속 사격 앞에서 그러하듯이, 모든 등급의 이원론적인 궤변은 모조리 다······ 그 앞에서 쓰러지고 만다.〉 반복설은 헤켈이 크게 애용한 논리였다(그는 이 논리에 '생물 발생 법칙(biogenetic law)'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라는 명제를 새로이 만들어 냈다). 그는 이 명제로 특별한 신분을 주장하는 귀족을 공격하고 영혼 불멸을 비웃곤 했다. 그러나 헤켈과 동료들은 북유럽 백인들의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에도 역시 반복설을 끌어들였다."(305-6)


"반세기 동안 반복설 주장자들은 인종 차별의 '증거들'을 꾸준히 수집했다. 그 모든 증거들이 '하등(lower)' 인종의 성인은 백인의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는 논리를 지지했다. 그런데 반복설이 일거에 무너지자 인간 유형 성숙설 지지자들이 똑같은 자료를 들고 나왔다. 그들이 객관적으로 자료를 재해석했다면 '하등' 인종들이 우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유형 성숙설의 초창기 지지자였던 해블록 엘리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인류의 진보는 청춘의 진보였다.〉 이 새로운 기준은 실제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어린아이에 보다 가까운 민족이 우월성의 휘장을 달게 되었다. 그때까지 쓰였던 오래된 증거들은 완전히 폐기되었으며 볼크는 백인 어른이 흑인의 어린아이와 유사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반대 증거들을 찾아다녔다.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그런 증거들을 발견했다(무엇이든지 기를 쓰고 찾으면 나오게 마련이다)."(308-9)


# 유형 성숙(幼形成熟, neoteny) :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진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론


"생물학적 범죄 이론은 별로 새롭다고 할 것이 없지만 이탈리아 법의학자 체사레 롬브로소(1835~1909)는 그 논리에 허구의 진화론적 조작을 추가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선천성 범죄자들은 단순히 미쳤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전의 진화 단계로 퇴보한 존재이다. 우리의 조상인 원시 유인원들의 유전적 형질들은 오늘날 우리의 유전자 목록에 그대로 남아 있다. 불운한 사람들은 이러한 조상의 형질들을 이례적으로 많이 지니고 태어난다. 그들의 행동은 과거의 미개 사회에서라면 적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범죄라고 낙인찍는다. 범죄자 자신들도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르는 까닭에 우리는 선천성 범죄자들을 동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용인할 수는 없다(롬브로소는 범죄자의 약 40퍼센트가 이 선천성 생물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탐욕, 시기, 극단적인 분노 등으로 비행을 저질렀으므로 우발적인 범죄자들이다)."(315)


"롬브로소 학파가 사회에 던진 또 다른 충격 하나를 소개해야겠다. 선천성 범죄자들과 같이 야만인들이 유인원의 형질을 보유하고 있다면, 원시 부족들─'무법적인 하등 종족들'─은 본질적으로 범죄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범죄 인류학은 유럽의 식민지 확장 절정기에 인종 차별주의와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리를 제공했다." "롬브로소와 그의 동료들이 열성 나치의 원형(原形)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의도적인 책략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과학을 악용하는 이데올로기의 광신자들을 경계하자는 호소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범죄 인류학의 대표들은 '계몽적' 사회주의자이자 사회 민주주의자들로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회를 향한 선봉이라고 생각했다." "되돌아보면 이들의 시도는 범죄자의 유전성에 모든 책임을 돌림으로써 사회 개혁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319-21)


8부 인간 본성의 과학


"분류학(taxonomy)은 종의 분류(classification)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리는 다른 생물들을 나눌 때에는 분류학의 규칙을 제대로 적용하지만,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어야 할 종에 이르면 특별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종(race)으로 구분한다. 분류학의 규칙에 따라 종을 정식으로 다시 구분하면 이것은 예외 없이 아종(subspecies)으로 불러야 한다. 즉 인종은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들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극히 분화된 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피부색의 차이가 이 변이성의 가장 두드러진 외적 징표라는 관찰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변이가 사실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종을 명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계통 분류학과 종의 기원』에서 에른스트 마이어는 아종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아종 또는 지리적 품종은 종을 지리적으로 나누어서 분류한 것이며 그렇게 분류된 아종들은 저마다 유전자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327-9)


"간단히 요약하자면 통속적 행태학(pop ethology)의 주류파들은 플라이스토세에 사람과(科)의 두 계통이 아프리카에서 생존했다고 주장한다. 그중 하나는 몸집이 작고 텃세를 부리는 육식 동물들로서 나중에 인간으로 진화했다. 다른 하나는 그보다 몸집이 크고 유순한 초식 동물들로 추정되며 후에 멸종되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카인과 아벨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빗대서 우리 조상들에게 동족 살해(fratricide)의 죄명을 씌우기도 한다. 사냥을 선호하게 된 포식적 성향(predatory transition)이 선천적 폭력성의 틀을 확립하고 인간의 텃세 성향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이 다시 유행하면서 전쟁과 폭력의 책임을 이른바 우리의 육식성 조상들에게 떠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속 편한 일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회가 모든 인간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데에 철저하게 실패한 책임을 우리 사회의 경제 체제나 정부에 물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된다."(339)


"일반인들에게 '유전적'이란 '고정된 것', '어찌할 수 없는 것' 또는 '불변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전학자에게 '유전적'이란 공통적인 유전자를 바탕으로 친족 관계에 있는 개체들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환경의 영향이 해결할 수 없는 필연성이나 불변성을 가리키는 의미는 포함되지 않는다. 안경은 시력상의 다양한 유전적 문제를 개선한다. 인슐린은 당뇨병을 억제할 수 있다." "어떤 형질이 나타나는 것은 유전과 환경 사이의 복잡한 상호 작용의 결과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중대한 정치적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다음과 같이 반대파의 표어가 됨 직한 글을 남겼다.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런 사회적 도덕적 효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행해지는 몇 가지 천박한 방법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천박한 짓은 개개인의 행위와 성격의 다양성을 선천적이고 자연적인 차이에 돌려 버리고자 하는 일이다.〉"(348-51)


"칼 폰 린네는 크기와 형태, 손가락과 발가락의 숫자 등 실제 특징들에 따라 인간의 근친 동물들을 정의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에 대해서만은 소크라테스의 경구 〈너 자신을 알라(nosce to ipsum)〉 한마디로 서술을 끝마쳤다." "불행히도 그가 그처럼 고도의 분별력을 발휘하여 제시했던 해결 방안은 심각한 파벌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훗날 대다수 해설자들에 의해서 극도로 왜곡되어 버렸다. 특별한 존재인지 특별한 존재가 아닌지에 관한 논의는 결국 생물적인지 비생물적인지, 또는 양육(nurture)인지 천성(nature)인지에 관한 논쟁으로 변질되었다." "인간은 결국 동물이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인간의 생물학적 잠재력의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인간이 동물이라고 해서 우리의 특수한 행동 패턴과 사회 구성 양식이 전적으로 우리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잠재성(potentiality)과 결정론(determination)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355-6)


"나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계속해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현상 유지로 인해 가장 커다란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편견을 호도할 목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고자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비슷한 동시에 다른 점이 있다.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이런 기본적인 진실의 어느 한쪽 편 또는 그 반대쪽 편을 번갈아 가면서 강조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유용하다. 다윈의 시대에는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나타나 수세기에 걸쳐 해독을 끼쳤던 미신을 타파했다. 이제는, 방대한 잠재적 행동 가능 영역을 보유하는 유일한 동물로서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구분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 사회 개혁을 가로막는 것은 아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본질이 없음을 본질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366-8)


맺음말


"사회 생물학자들은 보편적인 적응성에 대해서 더할 수 없이 확신을 가지고 궁극적으로는 원자론(atomism)을 지지하고 있다. 다윈의 이론에서 본다면 외형상 분할이 불가능한 개체 수준 이하로 환원시키고자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회 생물학자들은 개체란 유전자들이 그들과 똑같은 유전자들을 더 많이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유전자들이 서로 독립되어 있고 분할 가능한 입자들이며 자신들의 개별적인 유전을 목적으로 생물체를 이루고 있는 형질들을 이용한다는, 그런 그릇된 생각에 곤란을 겪었다. 생물 개체는 유전 암호의 독립된 조각으로 분해될 수 없다. 이 조각들은 개체라는 환경 밖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몸체의 어느 한 부분을 구획 짓거나 어느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를 직접 암호화하지는 않는다. 외형과 행동은 서로 투쟁하는 유전자들에 의해 엄격하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들은 모든 경우에 적응력을 지니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382-3)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가장 중대한 논쟁은 황금률(aurea mediocritas), 다시 말하면 중용의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연은 경이롭도록 복잡하고 다양하여 가능한 거의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일어난다." "생물의 문제에 대해 깔끔하고 결정적이며 보편적인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연이 아닌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사실 나는, 정직한 연구라면 어느 곳에서나 그러한 해답을 찾아낼 것이라는 말이 오히려 더 의심스럽다. 우리는 작은 문제에 한해서라면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다(나는 이 세상에는 왜 길이 25피트(약 7.62미터)의 개미가 존재할 수 없는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중간 정도의 문제라면 웬만큼은 다룰 수 있다(나는 라마르크설이 설득력 있는 진화 이론으로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참으로 큰 문제들은 풍요로운 자연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변화는 일방향적이거나 무방향적이며 점진적인가 하면 돌발적이고 선택적인가 하면 중립적인 것이다."(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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