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계몽주의의 종말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알마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머리말


"1780년대 프랑스인들은 메스머주의mesmerism가 자연에 대해, 자연의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에 대해,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사회와 정치를 지배하는 힘들에 대해 진지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메스머주의에 너무나 심취했다. 덕분에 오늘날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빚어낼 수 있도록 그들이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사고방식 중에서 메스머주의는 중요한 한 항목이 되었다. 이런 유산 속에서 메스머주의의 위치가 결코 인정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세계관의 원천이 된 것들 가운데 불순하고 유사과학적인 것들에 대해 한층 더 까다로웠던 이후 세대들이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메스머가 누린 인상적인 지위를 애써 잊어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 계몽사상의 원칙들이 어떻게 혁명적 선동으로 다시 채용되고 이후 19세기 신조들의 기본 요소로 변형되었는지 보여주는 것도 메스머를 (정당한) 원래 위치로 되돌려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20-1)


1 메스머주의와 대중 과학


"1778년 2월 파리에 도착한 프란츠 안톤 메스머는 포착하기 어려운 어떤 유체流體를 발견했으며 그것이 모든 물체에 침투할 뿐 아니라 물체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고 주장했다. 메스머가 실제로 유체를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진공상태에서는 행성들이 서로를 잡아당길 수 없으므로 그 유체가 중력의 매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메스머는 이 원초적인 〈자연의 작인(作因, agent)〉으로 우주 전체를 목욕시키는 한편, 그 유체를 지상으로 끌어내려 파리 시민들에게 열, 빛, 전기, 자기력을 제공하고자 했다. 특히 그 유체를 치료에 적극 활용할 것을 권장했다. 그는 신체가 자석과 비슷하며 질병은 몸속에서 유체의 흐름을 방해하는 〈장애물〉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몸 안의 〈자극磁極〉들을 메스머 유체로 처치하거나 마사지함으로써, 흔히 경련 상태로 나타나는 〈위기〉를 유도하고, 건강 또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회복하는 방식으로 유체의 작용을 통제하거나 강화할 수 있었다."(28-9)


"오늘날에는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메스머주의야말로 1780년대 글을 아는 프랑스인들의 관심에 완벽히 부합했다. 과학은 메스머의 동시대인들에게 그들이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보여주며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 힘들은 볼테르를 통해 알려진 뉴턴의 중력, 피뢰침에 대한 열광과 파리의 최첨단 학회와 박물관들에서 시연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프랭클린의 전기電氣, 1783년 처음으로 사람을 들어 올려 전 유럽을 놀라게 한 샤를의 열기구와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에 사용된 기적의 기체였다. 메스머의 보이지 않는 유체가 특별히 더 기적적으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가 우주에서 제거하려던 플로지스톤보다, 혹은 그가 플로지스톤을 대체하려 했던 칼로릭보다 메스머의 유체가 더 비현실적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인들은 《백과전서》의 '불'이나 '전기' 항목에서 메스머의 것과 같은 유체에 대한 설명을 읽을 수 있었다."(33-7)


"이론의 포화는 자연스럽게 일반 독자들에게 혼란을 안겼다. 그러나 실망을 안기지는 않았다. 이 보이지 않는 힘들이 때로 기적을 행했기 때문이다. 1783년 10월 15일, 그런 기체 가운데 하나가 필라트르 드 로지에를 메츠의 공중으로 실어 날랐다. 사람의 첫 비행에 관한 그 소식은 과학에 대한 열광의 물결 속에서 프랑스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여성들은 〈열기구 모자〉를 썼고 아이들은 〈열기구 과자〉를 먹었다. 시인들은 열기구 비행에 관한 무수한 송시들을 지었다." "과학자들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었다. 자연을 제어하는 과학자들의 능력은 프랑스인들에게 경외감을, 거의 종교적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곧 그 시대의 독자층은 과학의 힘에 도취되었고 과학자들이 우주에 이식한 실제의 힘과 가상의 힘에 놀랐다. 대중은 실재와 상상을 구별할 수 없었기에 자연의 경이를 설명한다고 약속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유체든, 과학적인 것처럼 들리는 어떤 가설이든 거기에 집착했다."(48-53)


2 메스머주의 운동


"메스머주의가 그 지지자들의 내적인 삶을 어떻게 지배했는지는 세르방의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르방은 법철학자이자 루소주의자이며 볼테르, 달랑베르, 엘베시우스, 뷔퐁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세르방은 맹목적으로 신비주의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관찰 가능한 사실에 집착했고 로크와 콩디악이 형이상학자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의 근거를 강력히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과학적 진보에 대한 그의 열광은 경험의 경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메스머주의의 폭넓은 유행과 그 주창자들이 보여준 설득력 때문에 사람들은 메스머주의의 과학적이고 종교적인 원칙들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콩도르세는 계몽사상의 수많은 태도들을 대표하던 인물로서 메스머주의를 거부했지만, 자신의 거부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그 이유를 글로 쓰기도 했다. 이렇듯 메스머주의는 지나가는 유행 이상의 어떤 것을 표상했다."(99-101)


"메스머주의는 동시대인들의 태도의 핵심을 파고들어 과학과 종교가 만나는 모호하고 사변적인 영역에서 권위가 필요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1784년 봄, 《주르날 드 브뤼셀》이 〈조만간 메스머주의가 유일한 의학이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자, 정부는 그것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음을─특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메스머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이비 과학 담론 속에 급진 정치사상을 섞어 넣고 있다는 파리 경찰의 비밀 보고서가 제출되었기 때문에─걱정하기 시작했다. 《비밀 회고록》은 1784년 4월 24일자에서 메스머주의를 조사하기 위한─메스머와 그의 추종자들이 믿었던 대로 프랑스의 가장 특권적이고 편견에 찬 과학자들이 메스머주의에 일격을 가하고 이를 분쇄하기 위한─왕립위원회의 임명을 보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메다르의 묘지도 메스머주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했으며 그보다 더 이상한 것들을 만들지도 않았다. 메스머주의는 마침내 정부의 시선을 끌었다.〉"(101-3)


"생마르탱은 마르티네 드 파스칼리로부터 영들에 관해 배웠다. 마르티네는 마르티니즘 창설자로 카발라 사상과 탈무드 전통, 그리고 가톨릭의 신비주의를 혼합해 설교했다. 물질세계는 원시인들이 한때 지배했었고 근대인들이 〈재통합〉할 필요가 있는 좀더 실재적인 영의 세계에 복속되었다. 윌레르모의 비밀 메시지들은 재통합을 이끌 원시종교를 드러내겠다고 약속했다. 퓌세귀르의 몽유증은 영의 세계와 직접 접촉할 기회를 제공했다. 바르브랭의 메스머 치료법은 어떤 물질적인 종류의 유체도 제거함으로써 구식 〈유체론자〉들의 기반을 와해시켰다. 이리하여 생마르탱은 후대의 여러 메스머주의자들을 신비주의 마르티니즘을 통합해 엮어냈고, 그 결고 몽유를 향한 열렬한 지지의 물결이 계속되었으며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메스머주의의 사유에 전형적인 것이 되었다. 메스머의 사상은 메스머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관계없다고 믿었던 초자연적 영역으로 거침없이 번져나갔다."(110-1)


3 메스머주의의 급진적 경향


"메스머주의자들이 발행한 팸플릿에서 메스머는 줄곧 인류의 고통을 종식시킬 발견을 품에 안고 파리에 도착한, 헌신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과학아카데미, 왕립의학회, 의사회, 마지막으로 기성 학계의 축소판인 왕립위원회가 차례로 그를 타박하고 모욕하고 박해했다. 공개 진료를 통해 자신의 치료법을 입증해 보이고 전통적인 의사들과 경쟁하겠다는 메스머의 제안은 박해자들의 간계에 휘말렸다. 그의 체계는 전문가 집단을 위협했고 그들은 인간의 고통이라는 대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위협을 무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존의 다른 이익집단들과 결탁했다. 그리하여 메스머는 학계의 관료주의에 등을 돌렸고 비전문가들에게 호소했다." "일부 메스머주의 관련 저술들이 짙은 정치색을 띠게 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부의 후원을 받는 특권적인 기구들이 다수의 민중을 개량하기 위한 운동을 억압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28)


"메스머주의자들과 고등법원은 최적의 관계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참사관들이 메스머주의에 동조적이었는지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라 아르프는 고등법원 절반이 메스머주의를 지지했다고 말했고 이는 상당히 믿을 만한 추정이었을 것이다. 라 아르프 자신이 메스머주의의 여러 집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법원이 혁명 기구는 아니었으며, 고등법원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서 메스머주의가 급진적 명분으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메스머주의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반정부세력은 고등법원에서 나왔다. 그리고 1785년에 이르러 많은 메스머주의자들에게 정부는 악의 화신으로 각인되었다. 그들이 당대 가장 인도적인 운동이라 믿었던 것을 정부가 박해했기 때문이다. 3년 뒤 고등법원이 칼론과 브리엔 내각의 프로그램에 반대하며 전국신분회 소집을 요구했을 때 코른만 집단은 이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며 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고등법원이 베푼 은혜에 보답했다."(132-3)


"베르가스는 처음 메스머주의 팸플릿 《동물 자기에 관한 또다른 공상》에 쓴 주석에서 반反귀족적 관념들을 발전시켰다. 그는 귀족과 연결된 모든 것─그 문장紋章, 허세, 조상을 이유로 내세우는 특권의 주장, 기사도의 미신─에 대한 비난을 쌓아갔다." "베르가스는 모든 고위직을 제3신분에게 개방할 것을 요구했고 〈같은 목적에 두 목소리를 내는〉 두 특권 계급 사이의 충돌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는 민중에게 〈모든 시민을 고귀하게 만들고 모든 귀족을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왕과 결속할 것을 주장했고, 1789년의 팸플릿에서 끝없이 되풀이되었던 큰 질문을 제기했다. 〈어떻게 오래된 귀족에게서 그 영향력을 박탈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가? 그들의 케케묵은 권력보다 더 수지맞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신에게는 오직 법과 백성과 왕만 있을 것이다.〉 이런 호소는 1789년 제3신분의 요구에 관한 시에예스 신부의 고전적 설명 못지않게 극단적인 것이었다."(150-1)


4 급진적 정치 이론으로서의 메스머주의


"카라와 베르가스는 메스머주의의 우주론적인 측면을 다루면서,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지만 모호하고 거만한 메스머의 말에서 정치 이론을 끌어냈다." "혁명 기간 동안 카라는 자신의 글 《새로운 물리학 법칙》에서 자신의 공화주의적 정치관을 하나의 예언으로까지 밀고 나갔다. 곧 〈인류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일들을 지배하는 우주의 가장 위대한 물리적 체계가 그 자체로 하나의 진정한 공화국이기 때문에〉 프랑스는 공화국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나아갔다. 1787년에 이르러서 그는 주저 없이 미덕과 악덕을 〈우주의 메커니즘〉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그는 정치와 의학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물리적 질환과 사회적 병리가 모두 냉수마찰, 머리 감기, 식이요법, 철학서들로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대의 예언자와 마법사들이 원시적 메스머주의를 실천했으며 델피 신탁의 예언과 리쿠르고스의 입법을 지지한 것은 정치적 메스머주의의 한 형식이었다고 주장했다."(157-9)


"카라와 마찬가지로 베르가스는 특히 왕립위원회 보고서 이후 수많은 메스머주의 저술들에서 하나의 중심 주제였던 호혜적인 도덕적·물리적 인과관계에 관한 동시대의 대중적 이론 위에 메스머주의 체계를 확립했다." "베르가스는 자연이 도덕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모두 지배한다는 데 동의했다. 메스머 유체─자연의 보존 작용─가 물리적이며 도덕적인 동인으로서 작용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물리적인 동시에 규범적인 질서로서 자연법칙에 관한 동시대의 개념들에 의지해 이런 관념을 발전시켰다. 그의 문서에 남은 두 강연 기록에서 그는 자연이 〈하나의 꾸준하고 지속적인 조화〉를, 즉 무생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유체의 자연적 상태를 유지할 목적으로 그 법칙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부조화, 혹은 질병에는 물리적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원인도 있었다. 양심은 〈우주의 모든 지점으로 향하는 수많은 가느다란 가닥들로 연결된〉 하나의 물리적 유기체였다."(163-6)


"루소의 글들을 읽고 그에게 찬사를 보냈던 베르가스는 심지어 자신을 메스머주의의 루소로 여겼다. 《신 엘로이즈》나 《고백록》을 읽고 난 후 장자크와 자신들을 동일시했던 다른 프랑스인들과 달리, 베르가스는 루소의 여러 관념들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했고 그렇게 해서 스승(루소)의 도덕적 열의는 유지하는 한편 사회의 계약적 기원 같은 그의 미숙한 원리들 가운데 일부는 폐기했다. 베르가스는 인류가 타고난 사회적 피조물이며 진정으로 자연적이며 원시적인 사회는 인간과 함께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최초의 우주와 마찬가지로 원시 사회는 완전한 조화가 지배하는 신의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프랑스가 되돌아가야 할 하나의 규범적 질서였다. 〈사회라는 말은 현재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 그것은 존재해야 할 사회, 곧 자연적인 사회, 우리 자신의 자연이 질서정연할 때 만들어야 하는 관계에서 비롯된 사회다. ··· 사회를 인도하는 규칙은 조화다.〉"(170-1)


5 메스머에서 위고까지


"19세기에 1780년대식 순수한 메스머주의자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혁명 이후 메스머주의자들은 전반적으로 영성주의의 특성을 보이는 그들 나름의 관념들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자연의 물리 법칙과 도덕 법칙의 상호작용을 강조했고 전형적으로 윤리와 정치의 〈뉴턴적〉 이론을 옹호했다. 그들은 빛, 전기, 다른 요인들에 관한 유사과학적 분석을 내놓았다. 또 원시 언어의 편린들에 의해 알려진 원시의 자연사회를 믿었고 그에 상응하는 범신론, 신정정치, 배성교拜星敎, 점성술, 천년왕국설, 윤회설의 요소들 그리고 신령들의 위계질서가 인간과 신을 연결짓는다는 믿음의 요소들을 담고 있는 원시 신앙에 대한 믿음을 견지했다. 메스머주의자들은 이런 관념들─많은 영성주의자들의 상투 수단─에 그들 특유의 의학 이론, 유체, 몸이 수면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 내면의 인간이 공간과 시간을 자유롭게 떠돌며 내부의 감각들이 영의 세계와 접촉하는 것이라고 흔히 설명되는 몽유의 실행을 덧붙였다."(183-5)


"메스머주의는 정치 이론가들─신비주의 보수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까지─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었다. 혁명 이후 리옹의 주도적 신비주의자였던 피에르 발랑슈는 메스머주의를 포함해 일루미니즘 교리들을 대부분 다루었다. 그리고 파브르와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보수적이고 신정적인 사상들과 같은 선상에 섰다. 그는 또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반대자인 신비주의자 샤를 푸리에를 놀라게 했다. 발랑슈의 《뷜탱 드 리옹》에서 푸리에는 자신의 철학을 이끄는 원칙인 우주적 조화를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베르가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물리 법칙과 도덕 법칙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체계를 확립한 푸리에에게 우주적 조화는 임박한 종말에 뒤따를 미래의 유토피아 국가를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모든 정치·도덕·경제 이론들을 불 속으로 집어던지고 가장 놀라운 사건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우주적 조화로 갑작스럽게 이행하기 위해서.〉"(202-3)


"발자크의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하고 추모사를 낭독했던 빅토르 위고는 초자연적인 것을 향해 가는 발자크의 마지막 여행에서 더할 수 없이 적합한 수행원, 혹은 더할 수 없는 메스머주의자 호위병이었다." "메스머주의의 가장 강한 물결이 윤회하는 영혼, 보이지 않는 영혼의 위계, 원시 종교, 그리고 영성주의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위고의 시들을 관통해 흘렀다. 《레미제라블》에 부친 위고의 〈철학적 서문〉에서 메스머주의는 《인간 희극》에 부친 발자크의 서문에서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했다." "메스머주의는 태양과 달과 별들이 유체의 바다에서 조용히 회전하고 있는 〈우주적 조화〉에 대한 전망으로 위고를 안내했다. 위고는 그것을 〈생명의 유체〉라고 칭했다." "18세기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딸을 잃은) 위고의 고통을 담아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위고는 종교로 향했지만 계몽사상과 함께 죽은 정통 그리스도교로 향하지는 않았다. 그는 과학, 혹은 〈고등과학〉의 도움으로 천상을 추구했다."(219-21)


6 결론


"상류사회를 겨냥했던 메스머주의의 특성은 1780년대 동안 상류층들 사이의 삶의 풍조, 18세기 프랑스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풍속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메스머주의의 급진적인 성격이 바뤼엘 신부가 상상했던 것과 같은 혁명 분파들의 비밀연계망에 의해 앙시앵 레짐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글을 아는 상류층 사이에 믿음이 결여된 탓에 체제의 기반이 얼마나 침식되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작용한다. 라파예트, 브리소, 베르가스, 카라는 체제에 맞선 그들의 공격을 조정할 다른 기회를 찾았을 것이다. 그들이 체제의 악을 확신하는 데 반드시 메스머주의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메스머의 입에서 나오는 뜻 모를 게르만어에서 혁명적 메시지를 읽어냈을 때, 프랑스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기 위한 토론의 장으로서 메스머의 통을 선택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질서에 대해 느끼는 불만의 깊이를 깨달았을 것이다."(229)


"급진주의자들에게 메스머주의는 그들의 발전을 가로막았거나 가로막는 것으로 보였던 기성 학계에 맞설 무기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급진주의자들에게 〈과학적〉 정치 이론을 제공했다. 브리소 같은 젊은 혁명가에게 메스머주의는 혁명에 앞서 10년 동안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최첨단 과학의 유행이라는 쟁점에 관여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내면의 감정들, 프랑스의 과학과 문학계의 정상에 오르겠다는 야심과 정상에 있는 이들에 대한 증오를 일깨웠다. 정상은 본래 협소한 것이지만, 브리소, 카라, 마라는 기성 학계의 협소함을 정치적 견지에서 해석했다. 그들에게 학자들은 낮은 신분의 출중한 천재들을 탄압하는 철학의 〈독재자〉와 〈귀족〉으로 여겨졌다. 혁명이 발생하자 탄압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은 철학에서 정치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런 증오심은 불의 성질이나 열기구의 방향을 통제하는 최선의 방식에 관한 쇠락한 담론들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의 불꽃이었다."(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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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항해 - 감정 이론, 감정사史, 프랑스혁명
월리엄 M. 레디 지음, 김학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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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


"감정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질문은 여전히 곤혹스러우며, 감정이라는 개념은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감정 연구에는 하나의 혁명이 아니라, 세 개의 혁명이, 그것도 서로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인지cognition 연구를 위해 고안된 실험실 연구기법을 감정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하나의 혁명을 촉발시켰다. 민족지학자들은 감정의 문화적 차원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현장연구 기법과 새로운 이론 장치를 고안했고, 그로써 두번째 혁명을 촉발시켰다. 마지막으로 역사가들과 문예비평가들은 감정이 역사를 갖는다는 것(그 역사가 어떤 역사인지는 아직 모호하다)을 발견했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감상주의〉 혹은 〈감수성 숭배〉로 불리는 감정 혁명의 성쇠를 추적하고 있다. 감상주의는 느슨하게 조직된 일련의 충돌들로서 감리교, 노예제 철폐 운동, 소설의 대두, 프랑스혁명, 낭만주의 등의 다양한 문화적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5-7)


제1부 감정이란 무엇인가


1장 인지 심리학의 답변


"의식적 혹은 통제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무의식적 혹은 하下의식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 사이의 경계는 구체적인 실험 절차와 맥락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학계는 〈등록〉 혹은 〈전前주의적 처리〉와 같은 분리되고 고정된 구조 내지 절차의 존재를 부인하고, 특정한 반응을 낳는 통로가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가정을 지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감정이 인지에 미치는 영향이 포괄적이고 복합적이라는 것은 명백하지만, 감정이 생각에 대하여 일관된 〈하의식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권적인 개입 지점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감정이 과잉 학습된 인지 습관과 대단히 흡사하게 작동한다는 아이슨과 다이아몬드의 1989년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쌓이고 있다. 현재까지 그 어떤 실험도 감정이 인지와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감정이 언제나 간접적으로, 예컨대 인지 편향, 피부전도 수준, 심장박동률 등을 통하여 실험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다."(43)


"특히 우울은 점차 인지 장애로 간주되고 있고, 우울증에 대한 인지 치유가 개발되고 성공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우울증의 공통적인 특징은 환자가 부정적인 자기평가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그 생각이 편향된 것이고, 그 생각의 정확성을 점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 생각은 고조된 감정적 각성과 결합되어 있고, 또한 그 자체로 의식에 대한 〈만성적인 접근성〉을 갖는다. 따라서 우울증에 대한 인지 치유는, 그 생각이 의식의 표면에 떠올랐을 때 환자가 그것을 식별하고,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다. 슬픔과 스트레스 역시 인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가까운 과거에 발생한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는 피험자들의 생각은 덜 넓고, 덜 자기준거적이며, 덜 감정적이다. 이는 트라우마에 대한 회피 전략과 고도의 심리 통제 전략의 결과로 간주된다."(43-4)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은 감정이 〈정서가valence; 情緖價, 즉 쾌감가hedonic tone〉와 〈강도intensity〉를 갖고 있으며, 감정은 그 두 가지 점에서 일반적인 인지와 날카롭게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프레이다는 정서가, 즉 사물, 사건, 상황에 대한 감정적 반응의 쾌감과 불쾌감이 모든 목표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바우어는 이를 가리켜, 〈감정은 진화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바우어에 따르면, 인간 유기체는 다양한 필요들의 긴급성을 가늠할 수 있어야 하고, 행동 절차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계획할 수 있어야 하며, 예기치 못한 사태를 대비하여 내외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이란 그런 체제가 관심을 목표에 정향된 행동으로 번역하는 작업의 부산물이라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감정에 쾌감이나 불쾌감이 부여되는 것, 감정에 특정한 강도가 구비되는 것이, 감정이 목표를 세우도록 해주거나 혹은 목표를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45)


"감정이 깊이 추구되는 목표와 긴밀히 연관된다면, 감정은 지속적으로 〈심리 통제〉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심리 통제의 작동에 핵심적인 것은 소위 〈재귀 제약reflexivity constraint〉이다." "심리 통제 과제가 긍정적으로 제시될 경우에는 재귀 계약의 원리를 위반할 가능성이 적다. 긍정적인 수행을 점검하는 과정이 그 수행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목표가 설정될 경우, 그것은 〈아이러니한 과정〉으로 귀결된다. 분홍색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으면 사람은 즉시, 무언가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피할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피해야 하는 그것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이 문제를 극복한다고 해도 곧바로 두 번째 문제가 닥쳐온다. 일시적으로나마 과제의 실행에 실패하지 않았다 해도, 어떻게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일에 성공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따라서 심리 통제는 〈재귀 계약〉 때문에 최선의 경우에도 가끔씩만 성공할 수 있다."(50-1)


2장 인류학의 답변


"(구성주의적) 감정 인류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미셸 로살도는 감정에 몇몇 생리적인 측면이 결부되어 있기는 하지만, 〈개인이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압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조직된 행위와 발화 양식의 한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녀는 샤흐터와 싱거에게 의존했는데, 그 두 사람은 1962년의 고전적인 연구에서 피험자들에게 부신호르몬을 주사하고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피험자들은 고양감에서 불안에 이르는 다양한 감정을, 실험자들이 피험자들에게 기대한다고 말해준 것에 일치하게 경험했다. 로살도는 그 실험이 보여주는 점은, 감정에 생물학적인 요소(각성)가 결부되기는 하지만 생물학적인 요소는 모호하고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결정적인 것은 그 각성에 대한 해석이고, 그 해석은 학습되는 것이며, 따라서 중요한 것은 문화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로살도는 자신의 연구로부터 인간 자아의 조형성 테제를 도출해냈다. 인간의 자아는 거의 무한대로 조형적이라는 것이다."(64-6)


"구성주의 인류학자들이 인간의 감정에는 폭넓은 공통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반면, 심리문화학파 인류학자들은 그런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아서 클라인만과 조앤 클라인만은 '고통'과 '경험'이라는 서양의 핵심 개념을 그들이 보기에 문화적으로 중립적인 방식으로 재정의했다. 이어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을 명시적으로 개입시켰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신중하게 재정의된 고통 개념을 이용하여 공동체로부터 개인을 분리시키고, 그 개인에게서 정치적으로 유감스러운 '고통' 상태를 식별해낸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중국인들에게서 극심한 정치 테러와 억압이 남긴 개인적인 후유증들, 즉 어지러움, 두통, 우울을 발견했다." "클라인만을 따른 젠킨스는 엘살바도르를 탈출한 난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우울을 발견했다. 그러나 동시에 젠킨스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신체적인 증상이 문화적으로 특수하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미국 병원에서 오진을 받기 일쑤였다는 점도 발견했다."(84)


"모든 공동체는 감정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할 것이다. 사회적 삶에 어떤 통일적인 목표 혹은 에토스가 존재한다면(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감정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자아에게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촘촘한 목표들의 네트워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첫째, 공동체의 안정성은 공동체가 감정에 대하여 일관된 지침을 제공할 능력을 갖추었느냐에 의존한다. 또한 감정이 인지 습관인 한, 감정은 원칙적으로 조형적이다. 물론 그 노력은 의당 심리 통제에 연루된 문제들에 봉착한다. 감정이 조형적이기에 둘째, 공동체의 감정질서는 개인의 노력이 지향하기도 하도 이끌리기도 하는 이상理想과 전략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 감정질서의 그 두 가지 측면이 보편적이라면, 그것들은 지극히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그 두 가지 측면과 결과 때문에 우리는 감정의 자유라는 이상을 이론화하고 그 이상에 기초하여 개별적인 감정체제들을 평가할 수 있다."(93-4, 103)


3장 이모티브


"실험 심리학자들은 한편으로 실험자들 자신이 불확실하고 변화하기도 하며 비본질적인 주관적인 경험의 영역에 갇혀 있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주관적 지각의 결함에 대한 통제 장치를 갖춘 반복 가능한 실험이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피험자의 경험적이고 인지적인 결함에 초점을 맞추고, 피험자는 자신의 몸을 불완전하게 〈통제〉한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실험의 초점을 그 결함과 불완전성에 맞춘다. 그 두 유형의 결함을 신경생리학적이고 생화학적인 메커니즘의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데카르트적) 이분법은 사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근대 서양의 〈주체〉 모델, 즉 고요한 경험의 장소로서의 주체가 준거하는 이분법이다. 감정을 자연스럽게 발생한 비의지적인 생리적 각성 상태와 주관적 〈느낌〉의 합성물로 파악하는 서양의 상징적인 감정관도 바로 그 주체에 토대를 둔 것이다. 인류학은 그러한 감정관이 서양의 문화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108)


"포스트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인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서 쉽게 식별되는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은 자의적인 기호적 구조를 갖춘 담론에 불과하다. 포스트구조주의가 비판한 것은, 현상을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고 또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면 현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확보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근대 사회의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주관적 경험과 감정을 갖는 개별적인 인간, 일련의 깊이 평가되는 목표들을 추구하고 선택하며 계획을 수행하는 개별적인 인간─을 경험하는 것도 비판했다. 그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순전히 담론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담론이 다른 어떤 담론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음은 물론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실험 심리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실은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다시 말해서 기표 체계의 허구적인 기의로서 주조된 것이며, 그 〈과학〉의 〈발견들〉은 실상 이미 내려진 결론의 포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115-6)


"포스트구조주의는 그 자체로 이미 기표가 아닌 기의에 접근할 수 없다고, 다시 말해서 제약적인 전제조건들을 구비한 음험한 담론 구조의 일부가 아닌 기의에 〈결코〉 접근할 수 없다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담론이 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묻는다. 담론 구조에 이미 통합되지 않은 어떤 것에 우리가 어떻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기만 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반한다. 우리가 사용한 그 이름이 불가피하게 기호 체계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스트구조주의는 〈날 기의〉(다른 것의 기표이기만 한 것이 아닌 기의)를 〈기의〉 범주의 도달할 수 없는 순수한 예로 취급하고, 그리하여 모든 알 수 있는 기의는 일련의 기표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결국 〈기표〉 개념은 존재하는 모든 것과 같아진다. 기표 개념이 어느덧 어떤 것을 그와 다른 그 어떤 것과도 구분해주지 못하는, 미끄럽기로 악명 높은 존재 개념과 같아진 것이다."(121-3)


"포스트구조주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적절한 해석은 〈사회적인〉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부딪친 적이 없는 기의로 비난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실제 연구는 그 설교와 정반대로 진행된다. 그들은 사회적인 것에 대한 특정한 비전을 신비스럽도록 전능한 것으로 감싼다. 사회적인 것이 언어와 담론을 발생시키는 맥락 안에 슬쩍 삽입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포스트구조주의가 오독되고 실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포스트구조주의를 전적으로 새로운 용어들로 재구성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회적인 것을 담론이 발생하고 텍스트가 생산되는 맥락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은밀하고 편리한 방식으로 확보할 수 없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오늘날 학문의 너무나 많은 맥락에서 전적으로 무용했을 것이다. 문학이든 역사이든 문화이든 〈사회적〉 관계이든, 오늘날 학자는 사회적인 어떤 것을 조사함으로써만 자신의 전문가적인 지위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125)


"포스트구조주의의 난문에서 벗어나려면 제1항과 제2항의 관계를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아니라 번역의 관계로 간주해야 한다. 그렇게 접근하면 두 가지가 가능해진다. 첫째, 분석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수많은 철학자들이 수행한 번역에 대한 논의를 끌어들일 수 있다. 둘째, 번역은 언어와 언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 양상들 사이에서, 처리 습관들 사이에서, 언어적 구조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데카르트적 유형의 주체성을 재도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을 서로 다른 수많은 언어와 코드의 메시지들이 도착하는 장소, 메시지의 일부는 다른 코드로 성공적으로 번역되지만 다른 코드는 번역에 실패하는 장소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인지 심리학의 연구는 번역 작업의 한계, 불완전성, 부정확성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인지에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감정과 발화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발화는 감정을 말로 번역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128-9)


"활성화란 〈입력〉 〈생각〉 〈기억〉 등(이것들을 총괄하여 〈생각 재료〉로 칭한다)이 〈처리〉되도록, 즉 번역되도록 제공된 상태를 가리킨다. 〈주의〉(혹은 〈의식〉)는 번역이 발생하는 장소의 하나이되, 번역 작업의 강도가 가장 큰 장소이고, 새로운 번역 노력(학습)이 수행되어야 하는 장소이다." "활성화되는 것은 생각 재료 전체에서 극히 적은 일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성화된 것 내부에는 자아가 탐색하고 결정해야 할 대단히 많은 선택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그곳에서 주의의 번역 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코드화된 메시지는 수많은 미결정성과 모순을 담고 있다. 그곳에는 또한 생각 재료들이 통과할 수도 있는, 아직 열리지 않은 많은 다른 문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활성화된 것의 안에서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감각을, 그리하여 역사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곳이 바로 〈감정의 지대〉이다. 따라서 심리학의 발견을 인류학의 현장조사 결과와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아주 정당한 일이다."(141-9)


"〈나는 두려워요〉 〈나는 화가 나요〉와 같은 감정적 발화들, 즉 내가 1인칭 현재시제 감정문이라고 칭하는 발화들은 일종의 화행speech act으로, 그것도 기술적─말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기술하거나 재현하는 것─이지도 않고 수행적─말로써 무언가를 행동하는 것─이지도 않은 화행으로 지칭하는 것이 옳다. 나는 그러한 발화를 〈이모티브emotive〉로 칭하고자 한다. 수행적 발화는 스스로를 지시함으로써 세계에 무엇인가를 행하는 발화이다. 〈나는 여러분의 지명을 받아들인다〉는 진술에서 동사인 받아들인다accept는 그 진술 자체를 지시하는 것 혹은 그것에 이름붙이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그 진술을 수용acceptance으로 만든다. 이때 그 수용은 기술적인 진술과 달리 세계를 변화시키는 화자의 행동이다. 이모티브는 수행문과 달리 자기준거적이지 않다. 〈나는 화가 난다〉고 말할 때 〈화가 난다〉는 단어는, 〈나는 받아들인다〉에서 〈받아들인다〉가 수용인 것과 같은 방식의 화가 남은 아니다."(163-4)


"이모티브는 주의에 제공된, 즉 진행 중인 번역 과제를 언어적인 〈기술記述〉로 옮기는 번역인 동시에, 여타의 대기 중인, 주의의 역량을 넘쳐나는 번역 과제들을 기술로 옮기는 번역이다. 이모티브는 그것이 〈지시〉하는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동시에, 그 지시물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이모티브는 수행문과 유사하다. 세계에 무엇인가를 행하기 때문이다. 이모티브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도구요, 감정을 구축하고 숨기고 강화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것은 보다 성공적일 수도, 덜 성공적일 수도 있다. 이모티브는 〈분산된 자아disaggregated〉의 내부에서 주의에 포착되어 다양한 상위의 목표들에게 이용되는 역동적인 도구다. 그러나 그 이모티브는 양날의 검이다. 그것은 그것이 기여하도록 의도된 그 목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화, 그것도 정치적인 관련성을 갖춘 개념화가 구축될 수 있는 지점은, 유전적으로 입력된 〈기본〉감정이라는 추정적 개념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164-5)


4장 감정의 자유


"앞서 나는 감정을 목표 조정과 관련된 생각 재료의 활성화로 정의했다. 생각 재료가 활성화되었다는 것은, 가장 단순한 경우에서도 목표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제거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목표 갈등이 나타났다는 신호이다. 전투에서 병사가 최초로 적병을 죽여야 할 때, 사람을 마비시키는 듯한 죄책감과 역겨움의 물결이 닥쳐오기 때문에, 병사는 갑작스러운 차가운 공포를 느낀다. 이는 비폭력이라는 목표와 군인다움이라는 목표가 충돌했음을 나타낸다. 비폭력을 배제하기로 하면, 그것을 주의로부터 제외하라는 신호가 심리 통제에 전달된다. 비폭력이라는 목표가 제거되어야만 군인다움이라는 복잡한 활동이 문제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심리 통제는 자아의 어떤 감각에서 나온다. 이때의 자아는 〈인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자아이고, 그 자아는 무엇인가가 걸려 있는 행동 지대가 되어야 하는 자아이다. 활성화된 광대한 범위의 생각 재료들은 어떻게든 다듬어지고 재배열되어야 한다."(186-7)


"이모티브는 생각 활성화들을 다듬고 재배열하는 수단이다. 다만 이모티브는 자아-탐색적이고 자아-변경적인 힘이다. 따라서 이모티브는 결코 심리 통제의 편리한 수단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모티브는 생각 재료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의도치 않게 심리 통제의 애초 목표를 전복시킬 수도 있고, 또한 웨그너와 스마트가 〈깊은 활성화〉라고 칭한 것을 강화할 수도 있다. 그 복잡한 이모티브를 이용하여 심리적인 균형을 유지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고, 또한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이모티브는 너무도 독자적이서 그 결과를 예측하기가 대단히 힘들지만, 화자의 규범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모티브를 통하여 확보하려는 그 〈균형〉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를 알기 위해서라도 사람은 이용 가능한 모델 내지 규범들 속에서 적절한 것을 찾고 선택해야 한다. 감정 인류학 연구가 보여주듯이, 규범적인 감정관리 양식은 모든 정치체제, 모든 문화적 헤게모니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다."(187-8)


"감정이라는 복잡한 생각 활성화는 목표와 이상理想의 변화를 향하기도 하고, 그 속의 긴장과 갈등을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관리가 파탄으로 치닫기도 하고, 새로운 관리 전략이 투입되기도 한다. 관리하는 자아도, 관리의 지향점도 지속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 감정 관리라는 개념의 〈관리〉는 이모티브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것을 포착하기에 부적절한 은유다. 따라서 이모티브가 수행하는 것에 대한 은유로는 〈관리〉보다 〈항해〉가 낫다. 〈항해〉는 항로의 급격한 변경 가능성은 물론 선택한 항로를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수정 가능성도 포함한다. 〈항해〉라는 단어는 합목적적인 행위를 함축하는데, 목표의 변경은 그 변경이 보다 높은 우선순위 목표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경우에만 합목적적이다." "〈항해〉는 높은 수준의 목표 변동을 포함하는 대단히 광범위한 감정적 변화들을 가리킨다. 〈항해〉는 〈관리〉를 포함하지만, 이때 그 관리는 고정된 목표 세트의 이름으로 이모티브의 자아-변경 효과를 이용하는 관리이다."(188-9)


제2부 역사 속의 감정: 1700~1850년의 프랑스


5장 감상주의의 만개 1700~1789


"몰리에르의 『돈 주앙』(1665)은 악명 높은 그 바람둥이 귀족이 수많은 여성을 유혹하던 그의 매력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여자들이 그에게 끌린 것은 사실로서 주어져 있을 뿐이다. 여자들의 감정 역시 격정적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탐구되지는 않는다. 플롯도 돈 주앙의 매력이 야기한 갈등에 집중한다. 라파예트의 선구적인 작품 『클레브 공작부인』(1678)에서조차 주인공들은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진다. 그에 대한 설명도 없고, 이해도 없다. 그로부터 백 년 뒤 문학과 정치는 상전벽해를 보여준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1792)는 성격상 감정적인 것인 유혹의 수단을 묘사하는 데 수백 페이지를 할애한다. 위선적인 발몽은 그의 먹잇감인 아름답고 독실한 투르벨이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이타애적으로 대하는지 목격하도록 고의로 일을 꾸민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녀가 그의 감수성, 즉 그의 감정적 예민함, 그녀를 사랑하는 능력, 그녀에 의해 변화될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도록 일을 꾸민다."(216-7)


"1789년 여름 프랑스 삼부회가 왕국의 헌정체제를 영구히 변혁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때, 제르멘 드 스탈 부인은 프랑스인들이 인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진지하고 사심없는 열광'이 모든 프랑스인을 움직이고 있다. 모든 곳에 공적인 정신이 자리 잡았다. 상층도 그렇다. 그 모든 사람들 중 최고는 나랏일을 결정하는 데 국민의 의지가 중요하게 작용하기를 '가장 열렬하게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감정의 정치적 역할은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뒤에 의문에 붙여졌다. 그의 몰락 이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감정에 대한 지배적 견해가 근본적으로 변했고, 감정이 한때 수행했던 역할이 은폐되고 부인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1794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는 과학, 합리성, 사회계약론, 자연권에 대한 논의로 제시되었고, 프랑스혁명은 그 새로운 이념을 적용하려던 잘못되어버린 시도로 파악되었다. 혁명의 발발과 〈공포정치〉의 과격한 국면은 사회적인 틀로 설명되었다."(217)


"이 시기는 통상 〈이성의 시대〉, 즉 새로운 자연과학이 확산되고 사회계약론과 수요와 공급의 법칙 같은 새로운 정치경제 이론이 높은 지위를 획득한 시대로 해석되어왔다. 최근의 역사가들은 출판 산업에 의해 열성적으로 뒷받침되던 새로운 독서하는 공중, 그림 전시회, 도서관, 카페 등의 새로운 공적 기관에 집중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살롱, 프리메이슨, 사적인 통신 네트워크 등은 〈새로운 공적 영역〉의 핵심 기관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혁명은 새로운 정치 이념을 현실화하려는 일치된 시도라기보다 그 공적 영역이 낳은 새로운 정치적 실천(정치문화)의 귀결이다. 그 새로운 실천들(전부는 아니다)이 입각하고 있던 특수한 감정적 성격, 감정을 선한 힘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감정표현과 친밀성에 대한 열광 등이 당대를 지배하던 명예 코드에 대한 감정적 피난처였으며, 그 피난처가 혁명과 관련된 사건들에서 핵심적이었다. 나는 그 모든 현상들을 〈감상주의sentimentalism〉로 통칭하고자 한다."(222-3)


"감상주의는 강력한 이모티브의 작성에 필요한 처방전들을 다량으로 제공했다. 감상주의의 주창자들은 연민, 이타애, 사랑, 감사는 모두 똑같이 자연적인 감성들이고, 그것들이야말로 도덕과 사회적 결속의 뿌리이자 토대라고 주장했다. 그런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무분별한 열정에 대한 최선의 방어 장치요, 미덕을 훈련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런 생각을 수용하고 〈나는 사랑하고 있어요〉 〈나는 연민을 느껴요〉라고 말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감정이 솟구쳐서 그 문장을 확인해주면, 그것이 의식 내지 합리적 지도의 피안에 위치한 타고난 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했을 것이고, 이어서 선과 아름다움의 원천인 그 감정이 자극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 이모티브를 발화하고 이어서 그 작동을 체험한 사람은, 그 성공이 그가 진실로 자연적인 감정의 샘물을 마셨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그때 그 사람을 압도한 것이 자연이었으니만큼, 그 느낌과 강도와 진정성은 함께하는 것이었다."(248)


"물론 그 감정은 (감상주의의 주장과는 달리) 무릇 학습되고 계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모티브로 이끌어낸 감정 역시 학습되고 계발된 것이다. 감정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믿어지던 18세기의 현실에서는, 감정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기보다 결합시켰다. 사람들은 감정을 공유하였고, 그래서 감정은 공적 자원이었다. 사람들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당황하기보다 넉넉한 진정성과 사회적 결속의 표지로 받아들였다. 물론 그 수용 능력 역시 실천에 의하여 계발될 수 있는 것이었다. 소설에 의해 생성된 것이건, 삶에 의해 자극된 것이건, 감정은 동일한 것이었고, 감정을 낳는 원천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 그 자체였다. 그 결과, 예술과 삶의 경계가 흐려졌다. 사람들은 감정의 인지와 감정의 표현이 예술에서든 정치에서든 사생활에서든 올바른 행동을 낳는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당대의 소설과 연극과 예술은 교육적 경향을 노골화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과 도덕 교육은 동일한 것이었다."(249)


"감상주의적인 소설, 연극, 오페라는 마니교적이었다. 그것들은 절대선에 절대악을 대립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그로써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올바른 도덕적 판단을 유도하고자 했다. 마자의 연구는 18세기 변호사들이 변론문을 작성할 때 감상주의 문학의 플롯 구조와 강렬한 감성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 보여준다. 그런 변론문은 혁명 전야의 프랑스에 수만 건이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변론문에는 정치, 사회, 감성, 도덕이 융합되어 매력적인 개혁주의 비전으로 제시되었다. 일부 변론문은 마치 소설처럼 읽혔다(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여기서도 무너진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당대인들은 소설의 비할 수 없는 사실주의와 교육적인 힘을 찬양했다. 변호사들도 변론문의 그 양식을 진실성의 표지로 간주했다. 변론은 인쇄되었고, 여론은 법정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소송에 대한 여론의 판단은 법정의 판결보다 더 큰 무게를 지녔다."(259-60)


6장 프랑스혁명과 감상주의 1789~1815


"선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물론 낙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그 관점이 선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1789년이 되면 도덕적 감수성의 존재는 아예 상식이었다. 따라서 모든 프랑스인에게 일일이 물어보지 않고도 한 사람이 그들 모두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 "사실 캐럴 블룸이 루소와 루소의 동시대인들 사이의 차이를 과장한 면도 있다. 물론 루소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루소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루소가 동료 철학자들과 벌인 갈등, 그의 외롭고 어쩌면 편집증적인 행동 방식은 고립된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감상주의자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도덕적 감각의 필연적인 무오류성을 강조한 것은 루소만이 아니었다. 루소는 그 이념을 확산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것뿐이다. 그가 그 일을 했을 때, 수천 명의 교육받은 독자들은 이미 루소의 생각을 이해하고 찬양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272-3)


"역사가인 프랑수아 퓌레가 인지하지 못한 것은, 정치적 주장과 정책의 정당화에 투입된 〈인민〉 〈자유〉 〈민족〉과 같은 추상들이 감상주의적 신념에 의해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그 추상적인 빈 단어들이 공포정치 기간 동안 발휘한 정치적 힘은 제도와 정치에서만 유래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상주의에서도 발원했다. 역사가인 파트리스 이고네가 포착하지 못한 것은, 자코뱅이든 감상주의자이든 혁명가들은 개인주의적인 가치와 공동체적인 가치가 서로 상충된다고 파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각 개인이 타고난 도덕적 감각의 명령에 자진해서 따르기만 하면 공동체의 승리는 의당 보장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의견이 서로 엇갈릴 경우에는 우선 협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각자가 자신의 가슴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아야 했다. 이때 자신의 감정이 자연적이라는 확신이 들 경우,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이야말로 도덕이 결여된 존재였다."(273-4)


"1789년의 사건들은 낙관주의와 이분법적 감상주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국민의회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정식화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던 그 유명한 '8월 4일 밤'은 온통 감상주의적 발화와 제스처로 치장된, 국민 자체를 감정의 피난처로 전환하려던 시도였다." "감상주의의 맥락에서 볼 때 두드러지는 것은, 국민의회의 공식 의사록이 개혁을 의원들의 자연적인 감수성에서 대두한 감상적인 이타애 행위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의사록은 〈애국적인 희생〉을 강조하지만, 이때 〈애국적〉 행위란 협소하게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애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날 밤 회의는 폐지할 특권을 거명할 특권을 보유한 의원들의 개혁 제안을 우선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귀족 의원은 귀족 면세 특권의 폐지를, 성직자 의원은 십일조세 특권의 폐지를, 도의 대표는 지역적 특권의 폐지를 제안했다. 감상적인 개혁의 홍수가 일어났고, 감정표현이 계산적인 생각을 마비시켰다."(277-8)


# 감정의 피난처 : 감정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전 지대를 제공해주고, 감정적 노력의 이완을 허용하는 의례, 공식 비공식 조직, 관계


"감정적으로 온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었다. 콩도르세는 의원들에게 열정이 아니라 이성에 입각하여 행동하라고 촉구하면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보다 계몽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1792년 10월 31일이라는 늦은 시점에 발표된 신문 논설에서 그는 연설에 열정을 이용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콩도르세를 따르지 않았다. 브리소는 1792년 4월 25일에 입법의회에서 비판자들에 대하여 콩도르세를 변호했다. 그는 콩도르세가 볼테르와 달랑베르 같은 사람들과 협력하여 구체제하의 광신에 대항하여 투쟁했던 오랜 노력을 되돌아보면서 말했다. 〈여러분, 만일 그 위대한 인물들의 불타는 정신이 우리의 영혼에 불을 붙여주고 우리 영혼에 그 정신의 위대함과 힘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여러분이 자유에 대하여 행하는 연설이 오늘과 같은 호응을 얻었겠습니까?〉 브리소는 콩도르세의 위대함을 감상주의의 전진 속에 통합시켜서 제시했던 것이다."9283-4)


"자코뱅이 공화국에 대한 엄중한 위협에 직면하여 도입한 입법들의 강조점 역시, 적의 위선적인 가면을 벗기고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에 찍혀 있었다. 자코뱅이 가혹한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만인을 강제로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조치들은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취해졌다. 자코뱅의 법이 요구한 것은 진실한 헌신이었다." "따라서 자코뱅의 공포정치 입법은 지롱드의 전쟁 정책과 다를 바 없고, 역사가인 마자가 분석한 변론문과도 다를 바 없다. 공포정치 역시 진실한 감정은 강하다고 가정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의 본색은, 진실한 감정이 있으면 저지르지 않았을 잘못으로 인하여 혹은 진실한 감정에 내장된 그 강력함의 부재로 인하여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793년 9월 17일의 혐의자법에 의하여 체포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행동과 관계와 말과 글에 의하여 스스로가 폭정의 파당 ······ 자유의 적이라는 것을 드러낸 사람들〉이었다."(294-5)


"자코뱅은 새로운 체제를 자연적이고 보편적이며 쾌감을 주는 이타애 위에 건설하고자 했다. 만일 그런 감정이 실제로 있었더라면, 자코뱅의 정책은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이고, 보다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모티브 이론이 인간의 감정에 대한 사실에 보다 근접한 이론이라면, 우리는 자코뱅의 입법이 체제의 적만큼이나 큰 고통을 체제의 지지자들에게도 주었으리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 고통은 정작 체제의 활동가들에게서 가장 강력하게 느껴졌다. 이는 공화국을 드러내놓고 반대한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수의 공화국 활동가들(연맹주의자들 포함)이 처형된 것에서 입증된다. 공포정치하에서 내적인 의심과 외적인 의혹은 서로를 강화했다. 모두가 스스로 위선자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감상주의 이모티브가 발휘하던 확인해주는 힘은 약화되었고, 사람들은 타인을 겨냥함으로써 외적인 의혹을 피하려 했다. 정확히 누구를 겨냥하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모두가 유죄였기 때문이다."(298-9)


"당시에는 아무도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이 공포정치의 종식을 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가 사후적으로 아는 것일 뿐이다. 그때는 아무도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이 자코뱅적인 판본의 감상주의의 종식을 의미한다는 것, 심지어 정치에 감정을 긍정적으로 개입시키려는 거의 모든 시도의 종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렇듯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이모티브에 대한 염증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남용되지 않은 새로운 어조가 공식적, 비공식적 맥락을 주름잡기 시작했다. 자코뱅의 청교도적인 감시위원회가 폐지되고 부패가 공공연해지자, 파리에 냉소적인 파티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목에 빨간 리본을 맨 여자들이 극장과 무도장에 나타났다. 그것은 기요틴에서 처형된 사람들에 대한 유희적 기억 행위였다." "나는 그 시기가 망상으로부터 벗어난 시기였다고, 자코뱅주의뿐만이 아니라 감상주의가 부추긴 모든 종류의 감정적 자기훈련에 대한 망상으로부터 깨어난 시기였다고 주장한다."(303-4)


"감상주의가 1789년 이전의 대항 언어로서 거둔 성공이 크면 클수록, 그 후의 실패는 그만큼 가혹했다. 대략 테르미도르의 반동 직후에 시작된 감상주의적 원천과 감상주의적 어법의 삭제 작업은 1814년경이면 사실상 완성된다. 이데올로그들과 샤토브리앙만이 아니라 쿠쟁과 기조 그리고 토크빌까지 포함되는 새로운 세대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과거의 지평에 실제 역사와는 달랐던, 오로지 남성적인 계몽주의만을 그려놓았다. 그들이 그려놓은 계몽주의는 오로지 이성의 산물이었고, 그 결과물이 1789년의 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은 능력 있는 남성들의 공적인 고려와 토론과 투표에 의한 이성의 지배를 보장해주는 입헌군주정을 수립했다. 8월 4일 밤은 평등의 원칙이 적용된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것과 감상주의가 혼용되어 있던 현실은 망각되거나 삭제되었다. 공포정치는 일탈로 치부되었고, 그 일탈은 사슬에서 풀려난 훈육되지 못한 아랫것들의 정치적 열정의 부산물로 간주되었다."(314-6)


7장 자유로운 이성과 낭만적인 열정 1815~1848


"18세기 말에 이성과 감정은 반대되는 힘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19세기 초에 이성과 감정은 반대되는 힘으로 이해되었다. 18세기 말에 미덕은 자연적인 감성을 토대로 자라난다고 생각되었다. 19세기 초에 미덕은 의지가 이성의 안내를 받아 열정을 규율함으로써 성취하는 결과물로 생각되었다. 사실 고대부터 17세기까지 미덕은 그렇게 함양된다고 생각되었다. 18세기 말에 사람들은 이타애와 박애라는 자연적 감정에 의해 인도되어야만 최선의 정치 개혁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일부 사람들은 19세기에도 여전히 이타애와 박애에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부여했지만, 이제 그보다 훨씬 더 중요시된 것은 개인적인 특성들이었다. 그 특성에는 원칙에 대한 헌신, 군인 같은 용기, 필요할 경우 폭력까지 투입할 각오, 그리고 특히 정의와 권리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포함되었다." "감상주의는 19세기 초에 이르러 그 이념만이 거부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이념이 18세기에 점하던 중요성 자체가 아예 시야에서 사라졌다."(327)


"빅토르 쿠쟁은 1833년에 공공교육부의 수장이 되었고, 이때 자신의 철학 체계를 프랑스 교육의 커리큘럼에 통합시켰다." "인간 의식에 대한 쿠쟁의 견해에서 감정은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쿠쟁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서 그는 진리, 자유, 정의, 미, 선과 같은 관념들─보편적으로 발생하는 것들─이 추론하는 능력, 판단하는 능력, 선택하는 능력 등, 우리 모두가 보유하고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의 근본인 추론 능력은 우리를 감각 인상이라는 경험 세계를 훌쩍 넘어서는 영역과 연결시킨다. 쿠쟁은 이성을 찬양했고, 이성의 힘을 강조했다. 그 힘은 칸트의 주장처럼 감각 인상에게 선험적 구조(우리가 결코 입증할 수 없는 것)를 제공하는 힘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데카르트가 열어젖힌 길과 비슷한 길을 따라) 신의 존재와 같은 진리들에게 접근시킨다. 쿠쟁의 철학은 〈합리적 유심론rational spiritualism〉이라고 이름붙일 만하다."(331-3)


"쿠쟁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기독교적인 관점에 매우 가깝게 그려냈다. 다만 그것은 완전히 세속적이고 과학적이었다. 사람들은 쿠쟁을 읽으면서 혁명이라는 재앙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재앙에 대한 처방이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소수 엘리트의 제도적 힘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쿠쟁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감정 상태를 생생하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 감성을 믿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감정은 (너무나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안전한 안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쿠쟁은 그들에게 감정을 이성의 신호이자 조력자이자 지지자로 평가하도록 초대한다. 적절하게 훈련되기만 하면 감정은 올바른 생각과 선한 행동과 적절한 미적 판단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내면에 존재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탐색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광대한 탐험의 영역을 열어준다."(338-9)


"테오도르 주프루아는 전적으로 기조의 관점에 의거하여 최근의 역사에 대한 젊은 세대의 판단을 작성했다. 기조와 주프루아는 혁명이 혁명을 추동했던 사상의 부정적 성격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그 평가에는 감상주의가 아예 탈각되어 있었다. 기조는 18세기의 진보 세력이 두 가지 문제점 때문에 실패했다고 파악했다. 첫째, 18세기의 사상은 〈적을 제거하기〉만을 원했다 둘째, 18세기의 철학은 〈인간을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았다〉. 그 결과 이성은 〈그 논리적 정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주프루아가 보기에 혁명 초기의 감정주의와 과격한 국면에 나타난 격렬함은 새로이 발견된 그 부정적 신념의 울림을 반영하는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혁명이 파괴를 건설로 대체해야 하는 국면으로 이동하자, 혁명가들은 내부 투쟁에 빠져들었고, 결국 구체제 세력이 지배권을 탈환했다." "그의 생각을 지배하던 것은 나폴레옹 치세를 특징짓던 타협과 수용의 분위기, 제정 말기의 위기, 복고왕정에 대한 실망이었다."(350-2)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이 감상주의 예술과 다른 점은, 예술의 교육적 역할을 거부한다는 것, 장르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1815년 이후의 새로운 세대에게 예술은 독립을 선언했다. 예술은 삶이 아니다. 예술이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도 비예술적인 실제적인 것이 미치는 효과와 다르다. 정확히 이 지점에 예술의 힘이, 즉 피난처로서의 예술, 숭고한 것과 상상적인 것의 우월한 영역으로서의 예술의 힘이 자리한다. 예술가는 예술이 가진 표상의 힘을 이용하여 환상적인 것, 이국적인 것, 불가능한 것을 묘사함으로써 예술의 독립을 구현한다. 신화, 전설, 이교적인 상징주의, 동양, 중세, 머나먼 곳, 잊힌 것, 그런 주제들을 통하여 아름다움은 스스로를 인간에게 각인시킨다. 아름다움은 예기치 못한 것, 낯선 것에서 튀어나오는 법이다." "낭만주의자들은 그처럼 예술을 나머지 사회생활로부터 단호하게 분리시킴으로써 감정의 피난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362-4)


8장 민사소송 속의 감정


"1815년 이후에 움튼 새로운 시대는 이성과 감정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멘드비랑, 쿠쟁 같은 이들은 재단장한 데카르트적 이분법에 의거하여 내면 탐색을 과학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물론 이론에서의 그 구분이 고스란히 실천에 적용될 수는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감정은 인간 동기의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혹은, 감정과 생각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분법이 실천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 능력에 대한 깊은 비관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자신(그리고 타인)을 환경과 신체의 영향에 휘둘리는 존재로, 망상에 가득 찬 존재로, 간헐적으로만 합리성을 따르는 존재로 바라보았고, 또한 그것이 감정과 희망에 미치는 영향을 두려워했다. 자신의 연약성에 대한 느낌은 명예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지만, 연약한 사람들은 명예의 유연성에서, 즉 은폐를 통하여 치유하는 명예의 능력에서 피난처를 찾았다."(390-1)


"재정의된 명예 코드와 결합된 새로운 비관론은 보다 관대하고 그래서 보다 유연한 질서를 창출했다. 1792~1794년과 비교해서 기대치가 근본적으로 낮아졌다. 동시에 나폴레옹 법전은 아내와 자식에 대한 가부장의 권력을 실체적으로 뒷받침했다. 그 권력은 남자가─아무리 연약하다고 할지라도─여자와 아이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합리적이라는 근거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조르주 상드처럼 비판적인 사람이 보기에는, 남자란 합리적이기는커녕 깨지기 쉬운 존재였고 따라서 그 자체로 위험이었으며, 그 위험은 남자에게 부여된 법적인 권력에 의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1794년 이후의 역사는 체계적인 자기기만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드의 감상주의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기대치의 저하가 성격상 비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의 감정 경험과 더욱 합치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새로운 시대의 근본 문제는 비관론에 있었다."(391)


"민사소송에서 변호사들이 사용한 이모티브들은, 직업적인 연설가인 그들이 일종의 감정적인 조형성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그들 직업의 비밀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능숙하게 다룬 것은 법과 유서 깊은 연설 기술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발화를 통해서 감정을 느끼는 데서도 대단히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감정적 조형성을 통하여 변호사들은, 사람이 어떻게 법, 명예, 이익이 요구하는 행동 안에 감정의 삶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것은 일반인들도 감정의 조형성에 의하여 일탈적이고 위반적인 감정을 규범적인 요구와 화해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감정의 조형성은 존중받는 동시에 인간의 취약성의 신호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비판적이고 냉소적이기까지 한 시선이었다. 상드는 그러한 양가성을 공격함으로써 과거의 감상주의적 진실성과 자연주의적 규범을 본질적으로 우월한 규범으로 내세웠지만, 자코뱅주의의 실패와 감상주의의 추락 및 삭제를 결코 되돌릴 수는 없었다."(429-33)


"포스트혁명 체제는 명료한 동기들을 보유한 통일적인 자아가 공적 영역에서는 탁월함을 추구하고 사적 영역에서는 (감정의) 충족을 추구하는 체제였다. 이는 그 자체로 놀라울 것이 전혀 없다. 그러한 질서의 구축은 적어도 1794년부터 모든 개혁가들이 공공연하게 선언하던 목표였다." "감정의 이해에서 감상주의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감정의 공적 효용성과 관련해서는 감상주의가 높이 평가되지 않았다. 미덕은 더 이상 자연적인 단순성에서 나올 수 없었고, 진실성은 쉽게 식별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감성은 정치를 안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타애, 박애, 곤경에 빠진 미덕,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각별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도덕적으로 인간을 고귀하게 해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박애와 상호적인 존중심은 계약관계를 고양시켜주고 신용을 뒷받침했다. 사랑이 관습, 예의범절, 가족의 명예와 충돌할 경우, 일부는 사랑에 더 높은 도덕적 지위를 부여했다."(463-4)


"포스트혁명 체제의 가장 강력한 힘은 계약적 관계와 감정적 유연성이 결합된 데 있었다. 체제의 비판자들은 계약의 자유에 기초한 사회는 이윤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요, 그 사회는 이윤 동기를 그 정신적인 공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이 경쟁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만인에게 부여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만인에게 애국적 이타성을 요구하던 공포정치와 달리, 1815년 이후에 정립된 계약적 자유와 경쟁의 체제는 공적 영역과 시장에서 움직이는 사람에게 특정한 감정적 태도를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 체제는 사람들이 감정적 태도를 시험하고 선택할 넓은 여지를 허용했다. 그 체제는 또한 동기와 감정을 엄격히 검사하지 않아도 되는 사적 영역으로의 후퇴도 허용했다. 물론 감정 작전의 여지는 빈자보다 부자에게, 그리고 여성보다 남성에게 훨씬 컸다. 그러나 포스트혁명 체제는 전체적으로 보아 감상주의자들이 건설하려는 체제보다 더 유연하고 더 살아갈 만한 체제였다."(467)


9장 결론


"심리 통제는 생각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주의의 용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생각을 주위로부터 격리시키는 작업은 아이러니한 과정이다. 주의 밖에는 주의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는 생각 재료들이 〈활성화〉 상태, 즉 주의에 입장할 준비 상태에서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 통제를 포함하여 주의를 인도하는 전략들은 활성화된 막대한 양의 생각들 중에서 어떤 생각이 주의의 집중적인 수행활동에 접근할 것이냐를 결정한다." "번역 작업은 모든 인간의 삶에서 매순간 발생한다. 다만 그 번역은 언제나 미결정적이다. 그리고 번역이 개인들 사이에서보다 오히려 더 개인 내부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 미결정성은 개인에게 풍부함과 창조성을 부여한다. 활성화된 생각 재료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생각 재료에 결부되어 있는 세계와 목표들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받아들이게 하기도 하고, 그와 다른 해석과 목표들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게 해준다. 항해는 그렇듯 행위 주체성을 보장한다."(476-7)


"사람은 이모티브를 사용하여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일시적으로나마 관리할 수 있다. 이모티브는 활성화된 생각 재료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적인 심리 통제 전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감정문을 발화할 때 스스로도 그 문장을 듣고, 상대방이 그 문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며, 자기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그 사회적인 동시에 자기수용적인proprioceptive 〈입력〉은 〈기술〉된 상태를 확인하거나 높이는 방식으로 활성화들을 유발하거나 변경시킨다. 따라서 이모티브는 원하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예측 불가능하다. 이모티브는 번역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번역의 결과는 언제나 미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모티브가 기술된 상태를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효과를 생산하거나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모티브가 목표 달성을 촉진시키기보다 목표의 수정 혹은 거부라는 활성화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480)


"높은 우선순위 목표들과 감정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목표가 깊이 수용되었다는 것은, 그 목표가 다른 많은 것들과 연결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 목표는 다른 중요한 목표와 결합될 수도 있고, 다양한 유형의 보조적이고 단기적인 목표들과 결합될 수도 있다. 감정문은 종종 그런 목표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맥락에서 작성된다." "감정의 자유란 이모티브의 효과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규범적 감정은 빈번히 목표 갈등을 유도함으로써 관철된다. 공포정치 시기의 파리에서는 기요틴에 대한 공포가 구의회에서 오만함을 과시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목표 갈등을 유도했을 것이다. 〈감정체제〉는 일련의 감정 규범을 수립하고 위반자들을 처벌하는 실천들의 복합체다. 대부분의 감정체제는 감정 규범이 이완되어도 좋은 통로, 심리 통제의 아이러니한 효과가 발동되도록 허용되는 통로, 즉 감정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 같다. 이상적인 감정체제는 감정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는 체제일 것이다."(481-2)


"섀프츠베리는 로크에 대한 비판에서 인간에게는 생득적인 도덕 감각이 구비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감각은 감성의 덕성스러운 충동으로 느껴진다고 강조했다. 섀프츠베리의 주장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허치슨, 마리보, 디드로 등 다양한 사상가들에 의해 즉시 수용되었다." "그러나 감상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감정적 감수성이 생득적인 도덕 감각을 구성한다는 자연주의적 교의에 있었다. 그 신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모티브를 이용하여 자신을 훈련함으로써 강렬한 〈자연적〉이고 선한 감성을 느끼고자 했다. 그들은 그때 거둔 성공이 감상주의 교의의 타당성을 입증한다고 여겼다." "선한 감정의 자연적 기원에 대한 믿음은 정치 개혁의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다만 그 믿음은 개혁에 대한 희망을 과도하게 단순화시키는 동시에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만들었다. 정치 개혁은 자연적인 감정을 보호하기 위한 규범을 수립하는 것이라기보다, 자연적인 감정의 장애물들을 쓸어버리는 작업으로 보였다."(484-6)


"공포정치의 종말과 나폴레옹 독재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체제를 가져왔다. 의당 감성주의 교의는 거부되었다." "민주화된 명예 코드가 신속히 제공되었고, 그 코드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자기이익에 상응하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이를 통하여 공적인 치적과 사적인 치부致富가 공존하는 새로운 남성 영역의 비전이 나타났다."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던 특정 부류의 남자들─예를 들어서 변호사들과 정치가들─의 감정적 유연성은 그들에게 위신과 권위를 부여해주었지만, 사적인 영역에는 여전히 감상주의가 살아 있었다. 따라서 비록 감상주의 이모티브의 지적 토대가 이미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 이모티브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구성하고 있었다." "민주화된 새로운 명예 코드의 장점은 규범 이탈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지원해준다는 데 있었다. 일탈하더라도 적절히 은폐되기만 하면 용납해줄 수 있다는 면죄부가 새로운 명예 코드에 들어있었던 것이다."(487-9)


"우리의 〈항해〉는 우리의 〈지도〉를 변경시킨다. 프랑스혁명을 횡단하면서 감정체제의 정치사를 검토해보니, 18세기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감상주의가 그들을 전례 없는 새로운 종류의 감정의 자유로 안내해주리라고 믿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 믿음은 1794년 7월 28일에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쥐스트와 함께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이 현기증 나는 실패에 대한 반응 속에서 근대의 이분법적 감정론이 작성되었다. 그 관점은 기대를 낮추었고 보다 큰 유연성을 허용했다. 다만 대가가 따랐다. 우리에게 우리의 자결 능력에 대한 체계적이고 비관적인 폄하라는 고통스러운 짐이 지워진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그 비관적 이분법이 단순한 구성물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는 아기와 목욕물을 한꺼번에 내다버렸다. 주체성subjectivity과 함께 자아selfhood도 버려진 것이다. 이모티브 이론은 우리가 돛에 바람을 가득 안고 항해할 수도 있는 광대한(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노력의 영역을 회복시켜준다."(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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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 프랑스혁명200주년기념총서 5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 총서 5
F.퓌레 / 일월서각 / 2000년 1월
평점 :
품절


신판을 펴내며


"혁명의 먼 기원은 15,16세기 중세 프랑스 사회가 겪은 위기에 있다. 또한 리슐리외가 주도한 절대왕정의 건설과 이에 수반된 사회적 개편, 그리고 17세기 이중─과학과 철학의─혁명의 지연된 효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1789년의 사건들을 순수한 구조적 설명으로 축소시킬 수만은 없다. 그들의 양상은 사회적 모순 속에 '각인된' 불가피한 유형이 아니다. 혁명적 사실 그 자체, 즉 '사건'에게 역사적 불연속성을 창조하는 기능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기층 민중을 동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1788년의 흉작이 주요 사건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기상적 우연 때문이다. 그리고 루이 16세가 자신을 파멸시킬 그 위기에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서 영불 상업조약에 서명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의 기원은 단순한 정신의 소유자에게만 단순할 뿐이다." "프랑스 혁명의 기원에 관해 살펴볼수록 이 역사 속에는 우연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과 구사회와 구왕정을 장기 지속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6)


제1장 루이 16세 시대의 프랑스


"자연으로부터 삶의 물질적 조건, 특히 무엇보다도 빵을 쟁취하기 위한 사람들의 투쟁은 아주 오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국가의 부 가운데 농업생산이 차지하는 압도적 우위, 낮은 노동 생산성, 인구와 식량 간의 불안한 균형 등이 그것이다. 실제에서나 의식상에서나 문제는 생존이었다." "수확이 좋았든 나빴든 사람들은 먹고 살았다. 그러나 흉년이 들거나 서리, 우박, 가뭄 같은 기후적 재난, 나아가 전쟁과 그로 인한 약탈 등이 겹치면 곡식의 품귀는 경제적, 사회적 파노라마의 대종을 이룬다. 즉 사재기, 밀 가격 폭등, 빵값 상승 등이 그것인데, 이는 사회적으로 선별적 결과를 가져온다. 도시와 농촌에서 기아로 인한 사망은 가장 가난한 계층의 잉여 인구를 제거하였고, 따라서 생산된 부와 양립할 수준으로 어린이와 어른의 수를 유지시킨다. 1709년의 위기가 그러하였고 1741년의 위기도 마찬가지였다. 공황이 지나가고 '숙청'이 행해지면 정상, 말하자면 불안정 상태로의 복귀를 중심으로 사회적 회복이 진행된다."(13-4)


"그런데 왜 1789년에 혁명이 발생했는가? 우선, 역설적이지만 그 풍요함 때문이다. 1789년은 빈곤한 세기의 정점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한 세기의 부유한 나라에서 터진 것이다. 부유하다는 것은 물론 상대적으로 그 직전 과거와 비교해서, 그리고 주변 대부분의 국가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모든 프랑스 사람이 경기 상승의 혜택을 평등하게 입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실제로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고 그 이상으로 소작료가 인상되었는데 여기에서 우선 이득을 본 사람은 토지 소유자, 그리고 지대 수입으로 살아가는 영주였다. 농촌 경작자의 경우 손바닥만한 토지를 가지고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따라서 시장에 내다 팔거나 다음 해를 위해 저장할 아무런 잉여 생산도 가지지 못한 소농민들에게 이 농산물 가격 상승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기대하지 않던 중요한 동맹자, 곧 부르주아지가 도시의 풍요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17-8)


"부르주아지는 개혁을 요구했지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드라마가 시작된다. 이미 절대왕정의 개혁적 소명이 꺼져버렸기 때문이다. 개혁안, 대담성, 능력, 심지어는 주기적이지만 최고의, 즉 프랑스 왕의 선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저항 세력이 개혁 세력보다 더 강력했다는 점이다. 루이 14세에 의해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귀족들이 이제 그 복수를 한 것이다. 그들은 종교적, 세속적 직책 등 국가를 장악하였으며 자기들의 막중한 사회적 위치, 부, 정치적 보수주의 등으로써 국왕의 우유부단함과 유능한 개각의 개혁안을 분쇄하였다. 귀족이 단지 전통의 이름으로 절대주의를 공격한 반면, 개명된 제3신분은 개혁의 이름으로 절대주의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대조적인 조류가 합쳐 권력을 약화시켰으며 귀족이 기본적으로 바랐던 대로 그 권력을 꼼짝달싹 못하게 얽어매었다. 군주의 중재가 가능했던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뛰르고는 1776년 그가 실각당했을 때 알아차렸다."(20-1)


"1788~1789년의 대규모 정치적 위기는 1788년 후반기의 흉작과 함께 시작되었다. 1787년의 홍수, 가뭄, 그리고 프랑스의 서부를 강타한 1788년 7월 13일의 우박 등에 의해 1788년 여름 수확이 격감된 것이다. 경기 국면의 우연이 겹쳐 대규모 경제위기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소농민들이 타격을 입었다. 그 후 다시 한번 고전적 메카니즘, 즉 단기적 경련이 시작되었다." "도시에서도 곡가 상승에 의해 민중들의 소비가 격감되었고, 나아가 공산품 시장이 위축되었다. 더욱이 1786년 영불 상업조약에 의해 영국 상품의 프랑스 수입 관세가 낮아짐에 따라 무서운 경쟁의 문이 열리자 그만큼 기업들은 취약해졌다. 가격은 상승한 반면 직물공업은 침체에 빠지고 고용은 감소하였다." "경제적 주기는 18세기의 모든 변화로부터 고조된 사회적·정치적 긴장을 정점에 올려놓았다. 특히 그것은 국왕과 특권층, 부르주아지 사이의 거대한 논쟁에 신참자를 소개하였으니 민중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24-5)


"도시 민중 계급의 수는 계속 증가했지만 아직 근대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지는 못하였다. 자기 노동력을 자유롭게 판매하는 순수 임금 생활자─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인─로부터 소규모 장색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중간적 지위가 존재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고용주의 집에 거주하면서 동업조합적 규제 속에 살아가는 도제, 섬유산업 분야에서 상인이 제공하는 원료를 가지고 상인을 위해 단순 노동을 하는 가택 거주 노동자, 그리고 임금이 부정기적이고 보조적 수입에 불과한 수없이 많은 소규모 소유주들이 있었다. 하나의 계급의식 속에 노동세계를 통합하기에는 아직 생산 형태가 너무 개인적이었고, 따라서 너무 다양하였다. 도시 민중의 집단적 반작용이 생산자의 투쟁이 아니고 대개의 경우 소비자의 대응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파업이나 임금 인상 요구보다는, 가격 상승에 반대하거나 빵값 규제를 위한 폭동 속에 주기적으로 도시의 분노가 결집되었던 것이다."(37-8)


제2장 신분들의 반란


"국민당은 오늘날의 정당과 같이 중앙집권화된 정치조직은 아니었다. 국민당은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다. 그것은 여론 그 자체, 도시의 여론이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클럽의 여론이었다. 1788년 말, 수년 전 브르뙤이유 장관에 의해 폐쇄된 클럽들의 문이 다시 열렸으며, 특히 그들의 수가 급증하였다." "중앙집권화에 의해 타격을 입은 과거의 자치정신이 고개를 들었고 게다가 실업과 빈곤이 겹쳐 시끄럽던 지방과 몇몇 클럽이 연결되었다. 온갖 수단이 다 동원되어 통신이 이루어졌고, 도시 사이에 연락망이 짜여졌다. 즉 구왕국이 하나로 통일된 것은 반란과 공포 속에서였다. 빠리는 논쟁의 중심지였고, 이 논쟁은 클럽이라는 폐쇄사회의 테두리를 점점 벗어났다. 루이 14세에 의해 생명력을 빼앗겼던 수도 빠리는 불현듯 그의 모든 권리를 회복했으며 18세기가 그에게 부여해 준 역할을 떠맡았다. 빠리에 있는 6,7백개의 카페에서는 오락이나 말장난 혹은 소위 빠리적 기질이 투영된 행태 대신 정치적 토론이 분분했다."(67-8)


"1788년 말, 재기용된 네께르는 국왕의 선한 의지를 보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스위스 재정가는 국민당에게 양보하고자 했다. 귀족들에 대하여 '묵인할 수 없음'을 표시하려는 왕과 마리 앙뜨와네뜨의 동의를 얻어, 그는 12월 27일, 제3신분의 수를 배가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머릿수별 표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만일 이를 유지한다면 이미 한 양보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루이 16세의 중재는 너무 우유부단하여 아무 가치가 없었다. 그는 제3신분의 기만 높여주었고 귀족들의 불만만 샀다. 이로써 그는 국민당과 특권층 사이의 투쟁만 격화시킬 뿐이었다. 제3신분은 더욱 과격한 가설을 향해 전진하였다. 2월에 씨에이에스는 그의 유명한 팜플렛인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귀족을 국민으로부터 냉정하게 제외해 버렸다. 〈이 계급은 그들의 나태함 때문에, 국민과는 확실히 관계가 없다.〉 발언권은 이제 삼부회로 넘어갔다."(69)


제3장 1789년 여름의 세 혁명


"관례에 따라 각 바이아쥬(재판 관할 구역) 단위별로 모인 세 신분은 그들의 대표가 삼부회에 가지고 갈 진정서를 작성하였다." "여러 진정서들은 왕과 국민 사이의 화합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입법권은 국민과 동시에 왕에게 속하고 행정권은 왕에게만 속한다는 것인데,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부심하던 빠리의 제3신분이 이러한 생각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였다." "새로운 사회적 행복에 대하여 이처럼 종교적으로 속화된 관점은 폭력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던 '혁명'은 목표로서 정의되었지 결코 수단으로서 정의된 것은 아니었다. 식량 폭동으로 분열된 1789년의 프랑스에서, 엘리뜨와 농민들은 폭력에 대한 옹호 속에서가 아니라, 화해에 대한 신화 속에서 교감하였다. 18세기의 철학은 태어날 아기의 모습을 그렸지 출산 방식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바란 것이 전반적인 화합이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70-2)


"18세기가 꿈꾼 혁명은 무기의 혁명이 아니었으며 빈곤의 혁명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제3신분의 법률가들 뒤에서 무수히 많은 빈자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무정부 상태 속에서 영주제를 파괴하였다. 강력하게 폭발한 폭력은 이제는 귀족들의 이해관계 이상의 것을 위협하였다. 우선 무엇보다도 영지를 구입한 부르주아의 수가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이제 이들 역시 마찬가지의 타격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특히 봉건적 소유와 부르주아적 소유 사이에 경계선을 긋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혁명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였다. 무력으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첫번째 방법이나 이는 농민들에 대항하여 부르주아 민병대와 왕의 군대를 연합시킴으로써 결국 국왕의 처분에 맡기는 꼴이 될 것이었다." "격렬한 토론 끝에 8월 11일에 최종적으로 표결된 법령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국민의회는 봉건제를 완전히 폐지한다.〉 사실상 모든 앙시앙레짐의 사회체제를 폐지한다는 뜻이다."(90-3)


"뒤이어 8월 26일에 표결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더이상 부르주아지의 전술적 신중함이나 소심함의 산물에 그치지 않았다.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에 대한 사상이 이 헌장의 기조를 이루었다." "물론 이 새로운 원리들이 프랑스에게만 고유하였던 것은 아니다. 근대적인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원리들도 인터내셔날의 소산, 즉 유럽의 세계주의적인 작품이었다. 이것들은 이미 아메리카 독립전쟁의 식민지군을, 최근에 들어서는 네덜란드의 주장관에 대항하는 네덜란드 애국파들을, 그리고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는 벨기에 민주주의를 고무시켜왔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가장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국민의회는 이들의 사상과 스타일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천재들의 예견에 비견될 만한 것을 공동으로 작성하였다는 희귀한 예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그것은 미국의 전례를 뛰어넘어 유럽의 모든 기대에 새로운 시대적 바이블을 제공하였다."(95-6)


제4장 행복한 해


"1789년 여름의 사건들을 공통의 정치적 목표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고리 사슬로써 즉 빠리의 도시 혁명이 위협받는 대표들의 손에서 횃불을 이어받고, 다시 농민혁명이 구체제에 최후의 타격을 가했다는 식으로 재구성하려는 유혹이야말로 얼마나 근사한가!"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의회의 혁명, 빠리와 도시의 혁명, 그리고 농촌의 혁명이라는 세 개의 동시 자연발생적인 혁명이 충돌하였고, 이로써 개명된 개혁주의 일정이 뒤죽박죽 변하였던 것이다. 그 중 첫번째, 즉 국민의회의 혁명만이 명확한 정치 의식과 미래 사회의 비전을 가진 혁명이었다. 나머지 두 개의 혁명에는 과거와 미래가, 향수와 공상이 뒤섞여 있었다. 철학보다는 상황에 의해서 동원된 이 두 혁명은, 18세기의 사상뿐만 아니라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빈자들의 천년왕국설에 의해 배양되었다. 특히 이 두 혁명은 앙시앙레짐이 직면하였던 위기의 새로운 차원을 즉 성급함과 민중 폭력이라는, 시스템의 다른 이면을 보여 주었다."(107-8)


"국민의회 의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조우는 이미 설정된 조화가 아니라 놀라움의 만남이었다. 빠리는 그들을 위해서 봉기한 것이 아니었으며, 농촌은 내놓고 의원들에게 강요하기도 하였다." "법과 절차를 존중하는 이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폭력과 무식한 사람들의 피어린 각성 등은 견디기 힘든 발견이었지만, 시류와 역류를 하나의 같은 급류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거기에 양보하여야 했다." "국민의회는 법을 제정할 수 있었고, 그 법은 시행되어야 했고, 준수되어야 했다. 농민들은 사실상 봉건적 권리의 무조건적 폐지를 강요하면서, 의회로 하여금 실상을 분명히 보도록 강요하였다. 도시와 농촌에서 1789년 여름에 태어난 이 새롭고 예측하지 못한 힘을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국민의회는 이제 더이상 국왕에 대한 적대감만을 고려해서는 안되었다. 한쪽 눈으로는 점점 높아지는 민중적 요구를 주목해야 했던 것이다. 좌파와 우파 공히 궤도 이탈을 경계하였다. 1789년에 중용의 길은 정말 비좁았다."(108-9)


"라 파이에뜨의 뒤에 몰려든 젊은 해방 귀족들은 영국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가 꿈꾸어온 부르주아 사회의 무통 분만을 성사시킬 뻔하였다. 가장 초보적인 계산, 그 건조한 정확성도 이 경우 웅변적이었다. 54명의 제헌의회 의장 가운데 33명이 귀족이었고, 자꼬뱅 클럽에서도 평민들과 더불어 애기용 공작,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 빅또르 드 브로이 등이 계속해서 의장직을 차지하였다. 애국적 여론이 그 형태를 잡아가던 쌀롱에서나 귀족 신분에 대한 전래의 존경이 새로운 지위에 대한 애착과 아무 충돌없이 화합되었던 도나 구역 의회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790년은 절대군주제에 의해서 가신화되었던 귀족계급의 복수를 해준 듯했다. 그것은 불랭비에, 쌩시몽, 몽떼스뀌외 등의 복수였으며, 또한 영국에서 실현된 바 있었던 기능의 새로운 분배에 대한 약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태의 흐름은 이 뛰어난 혁신적 귀족들의 추억을 잃어버린 환상 속에 남겨 놓을 것이다."(122)


제5장 혁명의 일탈


"1790년 7월, 위험은 지나갔고 용수철은 이완되었다. 작업 완수의 만족감, 질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선호, 식량공급의 정상화 등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희구하게끔 하였다. 의회는 조용한 가운데 위임받은 일을 하면 되었다. 또 앙시앙레짐의 잔해 위에 제3신분이 꿈꾸어 온 아름다운 집을 짓는 것도 의회의 일이었다. 커다란 방들을 가진 이 밝은 집에서 각자는 자신의 재능과 재산, 그리고 일반적으로 믿어져오던 것 이상으로 전통의 위신 등에 따라 정해진 장소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합법적인 국가와 그 대표자들에게, 혁명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1792년 8월 10일, 뛸르리에서 전개된 드라마는 루이 16세의 개인적 운명과 이미 거리로부터의 압력으로 인해 위축된 입법의회의 운명을 훨씬 초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붕괴였다. 제헌 국민의회가 세운 건물의 대들보가 무너졌다. 민중의 개입으로 이번에는 대중 투표의 길이 열렸고, 군주제가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135)


"왕의 도주, 그것은 신화의 종말이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입헌군주가 된 루이 16세는 수수께끼적 인물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가 연출한 이중적 게임에 대해서 알고 있다. 우리는 10월 사태 이후 그가 '무력에 의해 빼앗겼던' '왕권에 반하는 법령'에 저항하기 위해 스페인에 있는 자기 삼촌에게 보낸 편지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은? 바렌느 사건 이전에는 마라가 예언가적인 대변인 역할을 하던 단지 소수만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도주, 검거, 그리고 거대하고 고요한 빠리로의 귀환은 동상을 감싸고 있던 베일을 찢어버렸다. 바르나브는 소유권 때문에 불안해 하던 제헌의회로 하여금 국왕이 유괴되었던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었으며, 루이 16세는 수정된 헌법에 별 어려움없이 선서할 수 있었다. 이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보수정치의 메카니즘에서 사랑받고 존경받는 왕이라는 본질적인 부속이 빠져버린 것뿐이었다."(138)


"제헌의회나 10월 1일에 이를 계승한 입법의회나 모두 이제부터는 결정권을 가진 축이 되지 못하였다. 이제 다른 곳에서, 즉 온건파가 빠진 자꼬뱅 클럽, 민주주의적 출판물, 빠리의 거리 등지에서 동원명령을 찾아야 했다. 동원, 그것은 곧 전쟁이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는 공포에 질린 프랑스를 자신들의 품으로 던져줄 패배를 원하였다. 바르나브를 중심으로 뭉쳤던 소수의 온건파 외에도 자유주의적 귀족과 보수적 부르주아들은 라 파이에뜨가 생각했던 것처럼 짧은 기간의 전투로도 장군들이 문제의 클럽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은 혁명전쟁이었다. 로베스삐에르의 반대는 고립된 자의 독백이었다. 브리쏘와 지롱드 파의 변설가들이 주축이 된 개전파에게 있어서 전쟁은 미지의 세계로 도피하는 격이었다. 불안과 불확실의 구름이 혁명 프랑스의 기상을 무겁게 눌렀다. 비가 올 것이었고, 실제 비가 내렸다. 혁명이 안정될 수 있던 마지막 기회가 이 비와 함께 사라졌다."(138-9)


"바르나브는 최초의 패전이 정치권에 대중의 격렬한 난입을 야기시키고 군주제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배신의 의심을 받고 있던 왕에 대하여 싸우기를 거부한 장군들에 대항하여, 그리고 권력과 비판 사이에서 주저하던 브리쏘 파에 대항하여 민중의 방어적 반사운동이 마침내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상뀔로뜨는 자율적이고 무서운 세력이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8월 10일은 불완전한 승리였다. 비공민적이라고 의심받는 부자들에 대항하여, 혁명이란 곧 국민과 평등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던 모든 사람들을 결합시킨 이 정열과 이해관계가 복합된 1792년의 애국주의, 즉 '위기에 처한 조국'과 '라 마르세이에즈', 그리고 8월 10일의 애국주의는 재출현이나 연속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제2의 혁명이었다. 혁명적 애국주의는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벌써 순교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후일 패배와 함께 이 종교는 자신의 종교재판소와 화형용 장작더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139, 172)


제6장 혁명의 낭만주의


"1789년 여름처럼, 그리고 바렌느 사건 당시처럼 대중들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8월 10일의 사태로도 종식시키지 못한 대규모 귀족의 음모라는 신화는 정확한 정보를 접하지 못하던 당시의 여론을 지나치게 흥분시켰다. 더할 나위 없이 불길한 루머가 빠리의 구석구석에 퍼졌다. 공포는 압제로 분출되었다." "8월 14일 이후 공무원과 공민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모든 시민들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새로운 선서를 해야만 했다. 선서를 하지 않으면 반혁명 용의자로 간주될 것이었다. 8월 11일의 법령은 자치시가 경찰조사를 수행하도록, 그리고 각 도가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죄인들'의 처벌은 일일 행사였다. 사람들은 감옥을 일소하자고 말하고 다녔다. 산악파의 리더들은 대학살을 피하기 위해서는 탄압을 합법적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8월 17일 설치된 특별재판소는 처벌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는데, 이 재판소의 관용 자체가 또한 의심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183-5)


"(전황이 불리해지고 징집이 시작되자) 배신에 대한 강박관념, 자원병들이 이제 빠리를 떠나면 자신들의 처자식을 감옥에 있는 음모자들의 처분에 맡기게 된다는 생각 등이 상뀔로뜨의 의식을 흐리게 했다. 다시 한번 불행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해묵은 불안이 무의식의 어둠을 뚫고 솟아나와 광적인 집단폭력으로 개화되었다. 9월의 학살에 관해서 조레스는 〈불안은 혁명의 힘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8월 10일 이전에 이미 (인간 진보의 상위단계로 이행할) 필요성과 지성의 혁명이 자리잡을 수 있었으나 그들이 불러일으킨 힘의 움직임은 다른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즉, 단기적으로 볼 때 전면에 나서는 것은 빈곤과 격정과 처벌적 폭력의 혁명이다. 이러한 류의 혁명이 없다면 필요성과 지성의 혁명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꼬뮌도, 감시위원회도 학살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학살을 방관하면서 단지 그 범위를 줄이고자 했을 뿐이다. 법무장관 당똥은 모든 간섭을 자제하였다."(189)


# 9월의 학살 : 상뀔로뜨가 빠리 지역의 모든 감옥에서 데려온 수인들을 상대로 '인민법정'을 열고, 소위 말하는 반혁명 음모자들에 대한 자의적인 처형을 집행한 사건


"국왕은 어떻게 할 것인가? 로베스삐에르가 보기에 왕을 재판한다는 것은 왕을 폐위시킨 사람들을 재판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혁명 자체를 상고심에 회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그의 결론은 재판없는 처벌이었다." "루이 16세에 대한 어떠한 개인적인 원한이 의원들을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로베스삐에르 스스로 이를 고백하였다. 〈나는 국민주권의 힘 앞에 굴복한 죄인의 면전에서 가슴 속으로는 공화주의적 덕성이 동요함을 느꼈다.〉 재판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다수─사형에 찬성한 혁명파들─가 필요로 했던 것은 타협에 대한 모든 희망의 다리를 끊는 일, 1789년의 정치적, 사회적 성과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는 반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 그리고 국가재산을 수취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새로운 정치제도와 관련된 모든 이익을 보장하는 일 등이었다. 반혁명에 대한 도전으로 왕의 머리를 던짐으로써 그들은 후퇴하지 않도록 분연히 자신에게 제동을 건 것이다."(195-8)


"공화파의 승전으로 인해 국민의회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였다. 이제 화평을 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이 국토 방위의 문제로만 제한되지 않는 마당에 피정복국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모든 정파가 분열되었으며, 이들 모두는 또한 1792년 4월 작동되기 시작한 톱니바퀴의 노예였다. 차후 평화를 거론하는 사람은 반혁명 용의자라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브리쏘 같은 사람은 '자매 공화국'을 수립하는 쪽으로 기울었지만, 좌파에서는 병합을 요구하는 소리가 퍼져나왔다. 결국 가장 냉철하였던 사람들을 압도하였던 광적인 제국주의적 바람을 가장 설득력있게 표현한 사람은 좌파 산악당원이었던 쇼메뜨였다. 〈빠리와 피터스부르그 그리고 모스크바를 가르고 있는 땅은 곧 해방되고 자치도시화되며 자꼬뱅화 될 것이다.〉" "자발적 합병이라는 신화만이 적어도 원칙적인 수준에서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합병의 정당성이 조금씩 변모해갔다. 해방의 십자군에 프랑스의 정열적 팽창주의가 접합된 것이다."(201-3)


"(뒤무리에의 배신으로) 외부로부터의 위험이 심각해지고 방데에서 반혁명운동이 일어날 무렵 물가상승이 주 원동력이었던 민중의 소요가 재개되었다." "민중들의 요구에 대하여, 모든 부르주아지는 초기에 체계적으로 거부하였다. 이 부분, 즉 경제적 자유에 있어서 산악파와 지롱드 파는 원칙적으로 분열되지 않았다." "실제의 민중과 혁명적 부르주아지가 생각했던 민중 사이의 괴리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들에게는 정치가 우선이었던 데 반해 민중들에게는 경제와 정치가 하나의 불길로 용해되어 방데의 폭발과 마찬가지로 국민공회를 위협하였던 것이다. 대중의 원초적 원한이 방데에서는 가톨릭적이고 영주적인 황금시대에 대한 농촌적 신화를 중심으로, 그리고 빠리에서는 이보다 더욱 신화적인 공동의 평등이라는 이념을 중심으로, 서로 반대되는 축을 구심점으로 응고되어갔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부르주아 혁명에 있어서 그 위험은 동일하였으니, 바로 고립이었다."(212-4)


"1793년 6월 2일은 하나의 단절이었다. 지롱드 파가 제거됨으로써 혁명적 낭만주의가 무대에서 사라졌다." "6월 2일은 내각 변동 그 이상이었다. 모든 부르주아 혁명은, 비록 민주주의적 음조를 띠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대의제에 대한 신앙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혁신적 이론과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민중의 오랜 열정 사이에 조화를 찾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런데 6월 2일은 의회주의에 매우 심각한 타격을 가하였다. 당똥과 대다수 산악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국민공회는 로베스삐에르가 말한 바 있는 '도덕적 봉기'만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의회는 육체적으로 포로가 되었다. 이제 처음으로 무장 세력이 국민의 대표기관에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이 세력이 근위대가 아니고 평민이라는 점 또한 별로 중요하지 않다! 6월 2일 발진된 메카니즘은 미쉴레가 말하였듯이 그 속에 '프뤽띠도르와 브뤼메르'를 간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지 지롱드 파의 패배만이 아니라 혁명의 패배였다."(222-3)


제7장 비탄의 시간


"공포정치는 산악파 정치가들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1793년 여름 동안 그들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충분히 밝혀진다. 반혁명의 위협은 국경에서, 그리고 방데에서 여전히 존재하였다. '연맹주의자'의 봉기는 혁명 진영을 두 개의 적대적인 블록으로 분열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체포령이 내려졌던 20명의 지롱드 파 의원들이 도망을 치는 것이 가능했을 정도로 6월 2일 이후 바람은 관용쪽으로 불고 있었다. 혁명적 독재가 조직화되지 않은 가운데 여름이 지나갔다. 해방자적 사명에 충실한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타도하고자 한 속박이라는 수단에 의지하기를 꺼려하였다. 폭력적 조치들은 거리로부터 강요될 것이었다. 바로 9월 사태가 국민공회로 하여금 혁명군의 조직, 반혁명 용의자 체포령, 최고 가격, 최고 임금 등을 통과시키도록 강제하였다. 바로 상뀔로뜨의 압력으로 인해 10월과 12월 사이에 혁명적 조치들이 가속적으로 채택된 것이다."(225)


"1793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태들은 공포정치에 대한 요망이라기보다는 위기의 강렬함이 공포정치의 필요성을 한층 높여주었고, 이로써 위협을 받고 있던 부르주아지가 공포정치를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쟁취한 정복의 본질, 즉 의회주의라는 18세기의 발명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독재는 국민공회에 의해서 통제되는 독재였다. 그리고 상뀔로뜨는 귀족과 마찬가지로 이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가을과 겨울 동안 정부는 과격 행동에 대한 제어장치를 가중시켰다. 에베르가 제거됨과 동시에 상뀔로뜨 운동의 정치적 자율성이 사라졌다. 극적인 상황에 의해서 배태된 독재는 시류가 관용으로 흐름에 따라 약화되었다. 자본가적 이윤에 대한 규제는 제르미날 이후 완화되었고, 부르주아지의 안전에 대한 제약은 떼르미도르 9일 종식되었다. 모든 혁명의 불가피한 모델이기는 커녕 혁명력 2년의 독재는 우연과 예외적인 것, 그리고 비탄으로 점철되었다."(225-6)


"전투적 행동에 있어서 상뀔로뜨를 결합시킨 것은 바로 최고 곡물 가격을 제정하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그들의 꿈을 부추긴 것은, 재산권이 일반적으로는 인정되나 개인적인 필요에만 국한되는 이상 사회, 즉 자본가적 독점에 대한 거부였다." "사회적 이상에 있어서 반동적이었던 이들 지구 상뀔로뜨들은, 그들의 가장 최근 역사가인 알베르 소불에 의하면,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혁명집단이었다." "그러나 전투적 활동가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이들은 행정회합을 공개하였고, 구두로 투표하였으며, 고발을 시민의 의무라고 간주하는가 하면 만장일치를 깨는 것에 대해 공포를 느꼈고, 항상 폭력에 의존하는 등 매우 오래된 기층의 집단심리를 표출하였다." "혁명적 심성의 배후에서, 인민의 '소요'가 항상 불질러온 두 개의 열정(평등과 처벌)이 분출되었다. 단두대, 이 '평등의 허울'은 이들 두 열정을 만족시킨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모순에 대한 유토피아적 해결책에 불과하였다."(227-8)


"꼬르들리에 파의 참모부를 제거함으로써 공안위원회는 국민적 대표권에 대한 시정의 압력─1792년 8월 10일 이래 부르주아 혁명을 그 궤도로부터 이탈시켜 왔던─을 종식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르미날은 결정적인 달이었다. 모든 영역에서 부르주아 자유주의로의 복귀가 시작되었고, 따라서 이를 떼르미도르 파에게서만 찾는 것은 상당히 그릇된 시각이다. 반면 당똥을 처형했지만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모순─1789년 이후 성숙한 새로운 부르주아지가 전쟁의 열매를 포기하지 않은 채 자유주의적 정부로 복귀하고자 한다는─은 소멸되지 않았다. 제르미날에서 떼르미도르까지 로베스삐에르의 정부는 부르주아지의 세력을 확고히 하였으나, 평화를 달성하려는 노력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 채 공포정치에 매달려, 독재와 신화라는 미지의 세계로 대책없이 피신하였다. 떼르미도르는 제르미날의 변화에 제도를 적응시켰다는 의미에서 현실로의 복귀를 완수한 것에 불과하였다."(27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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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사
알베르 소불 지음, 최갑수 옮김 / 교양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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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부 구체제의 위기


"구체제를 구성하는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이라는, 각 '신분'의 기원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기도 드리는 자와 싸우는 자, 그리고 이들 양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노동하는 자 사이에 구분이 확립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직자 신분은 처음부터 교회법의 규제를 받는 특별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그 뒤에 속인들 가운데서 귀족이라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성직자도 귀족도 아닌 사람들은 '수고하는 자들(laboratores)'의 범주를 이루었고, 이로부터 제3신분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신분의 형성은 더뎠다. 처음에는 단지 부르주아, 다시 말해서 자치권을 인정하는 특허장을 지닌 도시의 자유민들만이 제3신분을 구성하였다. 농촌의 평민들은 1484년에 처음으로 제3신분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그 일원이 되었다. 세 신분은 점차 확고해져 군주제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신분제는 축성을 받고 왕국의 기본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33-4)


"농업 인구가 국민의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농업 생산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나라에서 농민의 요구가 특별히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농민의 요구는 봉건적 부과조(賦課租, 일종의 토지세)의 문제와 토지의 문제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났다. 봉건적 부과조의 문제에서 농민의 견해는 일치했다. 진정서는 영주들과 특권계급에 맞서 농민들이 단결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간접세보다는 봉건적 부과조와 십일조가 수많은 불평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과중하고 굴욕적일 뿐만 아니라 그 기원을 알지 못하는 농민들에게 부당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십일조와(생산물 지대인) 샹파르는 생산물이 아닌 화폐로 납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농민들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된다면 화폐의 구매력 저하로 부과조는 미미해질 것이었다. 이러한 여러 문제에서 부르주아지들은 농민들과 의견이 같았다. 그렇기에 제3신분의 단결은 강화될 수 있었다."(74-5)


"일단 봉건적 부과조가 폐지되자 1789년부터 농민층 내부에서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이 나타났다. 이미 대규모 경작자의 이익과, 토지를 약간밖에 지니지 못하거나 전혀 지니지 못한 농민 대중의 이익은 양립할 수 없었다. 전자가 진보한 농업 기술을 이용하여 시장을 염두에 두고 생산하려 한 반면에, 후자는 폐쇄 경제 혹은 준(準)폐쇄 경제로 만족하였다. 구체제가 시도했던 개혁(경작지의 인클로저, 곡물 유통의 자유 등)이나, 공동지와 경작의 문제를 두고 농민층은 분열하였다. 1789년 이후, 유산 농민층은 농촌의 대중이 자신들의 이익에 위험한 존재라는 점을 자각하였다." "이처럼 구체제 말기에 벌써 미래의 대립 관계가 농민층 내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단지 특권계급에 대한 반발과 증오로만 단결할 뿐이었다. 혁명이 일어나 봉건적 부과조, 십일조, 특권 따위가 폐지되자, 유산 농민층은 질서의 편에 가담해버렸다. 조르주 르페브르는 이를 〈부르주아지와 농촌 민주주의 사이의 타협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75-6)


"비록 부르주아지가 변화와 개혁을 원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혁명 관념을 품지 않았다. 제3신분 전체는 국왕에게 대단한 존경심, 거의 종교적 감정에 가까운 존경심을 품었다. 국왕은 국민적 이념을 구현하는 존재였으며, 누구도 군주제를 전복할 생각은 전혀 품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특권계급을 파괴하기보다는 거기에 융합되기를 바랐고, 특히 상층 부르주아지가 그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부르주아지가 라파예트에게 열광하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부르주아지는 또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회 계서제를 유지하여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는 계급과 분명하게 구별되기를 바랐다." "민중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경멸은 평민에 대한 귀족의 경멸과 다르지 않았다. 특권계급에 대항하여 민중계급의 지지를 호소하였던 부르주아지가, 혁명력 2년에 민중계급이 권력을 요구하였을 때 왜 분노와 공포를 느꼈는지는 바로 이러한 계급적 편견을 고려해보면 납득된다."(89)


"'고등법원'은 국왕의 이름으로 최종심을 행하는 최고 법원이었다. 고등법원은 옛 국왕의 궁정회의가 전문화하여 그것으로부터 갈라져 생겨난 것으로서, 17~18세기에는 등기권과 간주권에 기반을 두고 무제한적이고 보편적인 권한을 주장하였다." "관직 보유자가 사망했을 때 국왕은 그 관직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고의 조세 수입 형태로) 관직 매매제가 시행된 결과 관직이 세습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관직 매매제가 야기한 사회적·정치적 결과는 매우 중요하였다. 부르주아지와 특권계급 사이에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었다. 사법관들(고등법원 양반들)은 직책 덕분에 상속이 가능한 귀족 작위를 부여받은 법복 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의 충원은 호선(互選)을 통해 이뤄져 국왕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다. 이처럼 사법 관직은 완전히 독립적이 되어 18세기에 오면 군주제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였다. 18세기 말에 고등법원의 배타성은 더욱 커졌고, 사법 관직은 폐쇄적이 되었다."(107-9)


# 등기권 : 국왕이 제정한 법률에 효력을 부여할 권리 / 간주권 : 국왕이 제정한 법률의 등기를 거부할 권리


"1788년 봄에 왕권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만인의 과세 평등을 도입하려 하자, 이에 대해 저항한) 법복 귀족과 대검 귀족(기사 계급)의 결합이었다. 특권계급은 왕권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하여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대검 귀족과 법복 귀족은 힘을 합쳐 왕권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부르주아지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특권계급은 비록 입헌 체제와 기본적 자유의 보장을 요구하고 과세 동의권을 삼부회에 맡기고 선거로 구성되는 지방 삼부회에 지방 행정을 넘기라고 강경하게 주장하기는 했지만, 여러 다양한 기관에서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 우월성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특권계급이 절대 군주제에 대항하여 훌륭하게 투쟁을 전개하고 제3신분을 잘 이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주의의 폐허 위에서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확립하고 사회적 특권을 유지하겠다는 확고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129-30)


1부 국민, 국왕, 법: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 운동 1789~1792년


▶ 법률 혁명(1788년 말~1789년 6월)


"1788년 8월 8일에 국왕이 다음 해 5월 1일에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한 약속은 제3신분에게 커다란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이제까지 제3신분은 절대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특권계급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파리 고등법원이 삼부회는 〈1614년의 절차에 따라 정기적으로 소집되고 구성될 것〉이라고 결정하면서부터 특권계급과 부르주아지의 동맹은 깨졌다. 부르주아지는 이제 신민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들의 진정서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 국왕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 "제3신분 출신 인사들은 여론을 부추기는 데 이를 이용했다. 정치적 문서가 홍수를 이루었고, 암묵적인 합의 속에 언론의 자유가 확립되었다. 법률가, 사제, 특히 중간 부르주아지 출신 인사들이 써낸 소책자나 논설이 급증했다." "부르주아 출신 인사들의 이러한 일련의 선전 저술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특권을 폐지하려는 유산계급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을 뿐, 노동자, 농민, 소작인 계층의 운명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144-9)


"1789년 6월 23일 하루는 혁명의 진전에서 중요한 고비였다. 국왕의 무력 행사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3신분 대표들은 사태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했다. 마침내 루이 16세는 친림회의 연설에서 삼부회의 과세 동의권을 받아들였고 개인의 자유와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동의했다. 그것은 곧 입헌적 정부의 여러 원칙을 승인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세 신분의 합류를 명령하면서 왕권은 새로운 양보의 길을 텄다. 이제 삼부회는 소멸했으며, 국왕의 권위는 국민의 대표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삼부회를 개칭한) 국민의회는 붕괴된 구체제의 폐허 위에서 법률상의 절차를 거쳐 재건 작업에 착수할 생각이었다. 7월 7일, '헌법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7월 9일에 국민의회는 스스로가 '제헌국민의회'임을 선언했다.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법률혁명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국왕과 특권계급이 기정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던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다시 제3신분을 굴복시키기 위해 무력 사용을 결심했다."(162)


▶ 민중 혁명(1789년 7월)


"제3신분 대표의 배가 문제와 머릿수 표결 문제─귀족과 성직자 두 신분의 대표를 합친 것과 동일한 수의 제3신분 대표를 선출하고, 신분별 투표가 아닌 머릿수 표결을 해야 한다는─에 대한 귀족의 반대는, 그들이 특권을 완강하게 고수하리라는 관념을 고착화했다. 그리하여 '특권계급의 음모'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민중은 특권파가 공세를 취하기 전에 먼저 국민의 적을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제적 위기가 대중의 결집을 부채질했다. 1788년은 특히 흉년이었다." "물자의 공급 부족과 높은 물가로 인한 폭동은 1789년 봄부터 발생하기 시작했고 수확 직전에 위기가 절정에 달해 7월에는 크게 늘어났다. 민중의 의식 속에서는 특권계급의 음모와 경제적 위기가 긴밀하게 결합하였다. 특권파가 제3신분을 굴복시키려고 곡물을 매점한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민중은 자신들의 열망을 담고 있는 국민의회를 국왕이 무력으로 해산하려 한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163-4)


"파리에 재무총감 네케르의 파면 소식이 알려진 것은 7월 12일 오후였다. 이 소식은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민중은 그것이 반동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금리 생활자와 금융업자들은 네케르의 파면을 곧 파산이 도래할 위험이라고 여겼다." "시위 군중의 주력은 튈르리 궁의 정원에서 랑베스크 공의 독일 근위대와 충돌했다. 이 소식이 신호가 되어 민중이 무기 상점을 약탈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7월 14일 군중은 전면 무장을 요구했다. 무기를 구할 요량으로 그들은 보훈병원에 침입해 3만 2천 정의 소총을 탈취한 뒤 바스티유로 향했다." "(바스티유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루이 16세는 시간을 벌기로 결심했다. 7월 15일, 국왕은 의회에 모습을 나타내 군대의 철수를 공표했다." "7월 14일은 새로운 계급을 권좌로 끌어올려놓은, 부르주아지의 진정한 승리인 동시에, 그 이상의 것, 즉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날의 사건은 모든 억압받는 인민들에게 무한한 희망을 열어주는 듯 보였다."(166-9)


▶ 제헌의회(1790년, 타협의 실패)


"1790년 내내 제헌의회는 커져 가는 위험 속에서 프랑스의 재건 작업을 추진했다. 특권계급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으며, 인민대중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조급해했다. 이러한 이중의 위협에 직면하여 제헌의회의 부르주아지는 입헌군주제라는 보호막 아래에서 주도권을 구축하였으며, 특권계급의 일부를 체제로 끌어들이려고까지 했다. 이렇게 하여 타협 체제가 들어섰다. 타협 정책은 1688년에 일어난 영국 명예혁명을 본떠, 종속된 민중계급의 기반 위에서 상층 부르주아지와 특권계급의 지배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중추를 이루는 부유한 명사들은 이를 받아들일 태세였다. 하지만 특권계급은 그렇지 않아서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려면 인민대중에게 호소해야만 할 것이었다. (파국을 막으려면) 여전히 국왕을 설득하고 귀족을 납득시켜야 했다. 이러한 타협 정책의 주인공이 바로 라파예트였다. 허영심이 많고 고지식했던 그는 상반되는 것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했다."(189)


"절대 군주제로 복귀하거나 특권 체제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지킬 희망이 남아 있는 한, 귀족은 부르주아지의 승리에 반대했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승리하는 것은 곧 특권계급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의 이러한 저항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부르주아지는 도시의 인민대중 및 농민층과 맺은 동맹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러한 저항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부르주아지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독재를 받아들일 것이었다. 봉건제가 완전히 파괴되고 특권 체제의 부활을 위한 모든 시도가 영원히 불가능해져서야 마침내 특권계급은 타협을 받아들여 7월왕정을 통해 대부르주아지와 함께 권력에 참여했다. 그러나 1790년의 특권계급은 그들 나름의 목표를 전혀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망명자들의 술책, 외국 조정의 음모, 반혁명의 개시에 희망을 걸 수 있었던 만큼 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90년에 라파예트가 시도한 타협과 화해 정책은 오직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193-4)


▶ 제헌의회의 부르주아지와 프랑스의 재건(1789~1791년)


"제헌의회 의원들은 계몽사상의 아들로서 사회와 제도를 합리적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사회와 제도가 토대를 둔 원칙에 보편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민중 세력의 압력과 반혁명적인 기도에 직면한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로서, 스스로 엄숙하게 선언한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자신들이 속한 계급의 이익에 맞게 재건 과업을 왜곡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제헌의회의 부르주아지는 과업을 수행하는 데 토대로 삼았던 '원칙들'이 보편적 이성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그 원칙들의 우렁찬 표현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발견한다. 그 서문에 따르면, 권리들에 대한 〈무지, 망각 또는 멸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를 초래한 유일한 원인들〉이다. 이제 〈단순하고 명백한 원리들에 근거한 시민들의 여러 요구들〉은 오직 〈헌법의 유지와 만인의 행복〉을 가져올 뿐이다. 이는 곧 계몽 시대의 정신에 잘 부합하는 이성의 전능함에 대한 낙관주의적 믿음이었다."(207-8)


"제헌의회 의원들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 정식화라는 외피 아래 상황의 산물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국왕의 권위에 도전한 과거의 반란을 합법화하는 한편, 자신들이 세운 질서를 겨냥하는 민중의 모든 시도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인권선언'은 수많은 모순을 안게 되었다. 제1조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선언했지만, 평등을 사회적 유용성에 종속시켰다. 제6조는 과세의 평등과 법 앞의 평등을 형식적으로 인정했을 뿐, 부에서 야기된 불평등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 제2조는 소유권을 인간의 소멸할 수 없는 자연권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엄청나게 많은 무산 대중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10조는 종교적 자유에 색다른 제한을 가했다. 이단종파의 경우 〈그들의 의사 표명은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되었다.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고 제11조는 확언한다. 그러나 특정한 경우에 법은 〈그러한 자유의 남용〉을 억압할 수 있었다."(211)


"1789년 11월 2일, 제헌의회는 교회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그런데 이 재산은 부동산이라서 '현금화'하는 일이 필요했다. 1789년 12월 19일 의회는 4억 리브르의 교회 재산을 매각하기로 하고, 이에 상당하는 양의 '아시냐'를 국유 재산을 담보로 삼아 지불을 보증하는 어음의 형태로 4억 리브르만큼의 아시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아시냐는 교회 재산으로 상환하는 연리 5퍼센트의 채권에 불과했다. 교회 재산을 매각함에 따라 국가의 부채가 감소되는 양만큼 아시냐의 폐기는 예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국고는 여전히 텅 비었고, 부채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다. 의회는 일련의 조치를 취해 국채인 아시냐를 더는 이자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무제한의 강제 유용 능력을 지닌 화폐로 변모시켰다."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시냐는 그 목적이 변질되면서, 예산 부족을 메우는 수단으로 변모했다. 결국 아시냐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정치적·사회적 행동의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239-40)


▶ 제헌의회와 국왕의 탈주(1791년)


"혁명 이념의 선전과 확산력은 처음부터 각국의 국왕들을 불안하게 했다. 혁명의 사건들과 1789년의 원칙들은 그 자체가 다른 나라의 인민들을 동요시키고 국왕들의 절대 권력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파급력을 지녔다." "더욱이 국외에서는 부르주아지나 귀족들 사이에 계몽사상이 번져 있어서 특히 독일과 영국이 혁명의 전염에 민감했다." "하지만 곧 유럽 곳곳에서 혁명에 대한 반동이 나타났다. 특권계급은 봉건제가 폐지된 뒤에, 성직자들은 교회 재산이 몰수된 뒤에 반혁명파가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요에 겁을 집어먹었다. 망명자들은 구체제 계급들이 혁명 프랑스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백방으로 기를 썼다." "새로운 프랑스와 구체제의 유럽은 마치 봉건 특권계급과 자본주의 부르주아지가, 그리고 군주제적 전제주의와 자유주의 정부가 서로 대립하듯이 맞섰다. 망명자들과 루이 16세가 절대 권력과 사회적 우위를 회복하기 위해 외국에 호소하자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250-3)


"국왕의 탈주(1791년 6월 20일)는 왕권과 혁명적 국민 사이에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이 있음을 드러내주었다. 탈주하기 전에 루이 16세가 작성하여 프랑스인들에게 발표한 성명은 그의 의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는 부이에 군대의 영내에 도착한 후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군대와 함께 파리로 되돌아와 의회와 클럽을 해산하고 절대 권력을 재확립할 생각이었다. 루이 16세가 계획한 모든 비밀 정책의 목표는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1789년 10월에 이미 루이 16세는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4세에게 비밀 첩자 퐁브륀 신부를 파견하였다. 또한 알자스에 영지를 가진 독일 제후들과 갈등이 악화되도록 갖은 애를 썼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루이 16세는 단순하고 나약하며 무분별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국민을 배반하면서까지 자신의 절대 권력을 재확립한다는 유일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일 만큼은 총명했다."(259)


"국왕의 탈주는 인민대중의 국민 의식이 강화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군주제가 외국과 결탁했다는 것을 드러내주어, 농촌 구석에까지 격렬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 사이에 외국의 침입에 대한 공포가 나타나자, 국경의 요새는 자발적인 방어 태세에 들어갔고 의회는 국민방위병 중에서 10만 명의 의용군을 선발했다. 1789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사회적이며 국민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그런 와중에도 부르주아지는 냉정을 유지했다. 그들은 농민 전쟁을 두려워했고, 또 그것 못지않게 도시의 민중 운동도 싫어했기 때문이다. 의회는 왕권과 국왕의 거부권을 정지하여 프랑스를 사실상의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의회는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의도적으로 차단했다. 의회는 '국왕 납치 사건'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냈다." "국왕의 반역과 특권계급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의 부르주아지는 국민이 유산자의 국민으로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그들에게 혁명은 끝난 것이었다."(259-61)


▶ 입법의회(전쟁과 왕위의 전복, 1791년 10월~1792년 8월)


"1791년의 헌법이 설정한 자유주의적 군주제의 실험은 1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민중의 압력과 국왕이 이끈 특권계급 반동의 틈바구니 속에서, 권좌의 부르주아지는 대내적인 어려움을 회피하고자 대외적인 어려움을 악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국왕의 암묵적인 동조 아래 프랑스와 혁명을 전쟁의 와중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계산은 빗나갔다. 전쟁은 혁명 운동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동시에 왕위의 전복을 초래했고, 몇 달 뒤에는 권좌의 부르주아지까지 끌어내렸다. 무모하게 시작된 특권계급 그리고 유럽과의 충돌 때문에 혁명적 부르주아지는 민중에 호소해야 했고 결국 그들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국민의 사회적 토대가 확대되었다. 국민은 정말로 전쟁으로부터, 국민적인 동시에 혁명적인 성격을 띠는 전쟁으로부터 탄생했다. 이 전쟁은 특권계급에 대항하는 제3신분의 전쟁이자, 동맹으로 맺어진 구체제의 유럽에 대항하는 국민의 전쟁이었다."(265)


"언뜻 보기에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 브리소파와 궁정의 결합으로 주전파(主戰派)가 형성되었다. 우선, 전쟁은 외국의 개입에서 유일한 구원의 길을 기대하며 항상 동일한 이중 정책을 추구한 궁정이 바라던 바였다. 1791년 12월 14일, 국왕은 트리어 선제후에게 만약 1792년 1월 15일까지 망명자들이 집결한 군대를 해산하지 않는다면 '프랑스의 적'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통고했다. 궁정은 그토록 간절히 바랐으나 여태껏 이루어지지 않은 외국의 개입이 이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기를 바랐다. 트리어 선제후를 위협한 바로 그날, 루이 16세는 실제로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자신의 최후통첩이 거절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표명했다." "전쟁은 다른 이유에서 브리소파도 바라던 바였다. 대내적 측면에서, 브리소파는 전쟁을 통해 반역자들과 루이 16세의 정체를 폭로할 생각이었다. 가데는 1792년 1월 14일 입법의회의 연단에서 〈반역자들에게 미리 단두대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273-4)


"적과 협정을 체결하려는 가증스러운 왕권에 대항해 파리만이 아니라 전국이 궐기했다. 1792년 8월 10일의 봉기는 단지 파리 민중만이 아니라 연맹제 참가자들이 대표하는 전 프랑스 인민의 업적이었다." "왕권의 몰락과 더불어 푀양파, 말하자면 혁명의 발발에 이바지한 동시에 라파예트와 그의 뒤를 이어 삼두파의 지도를 받아 혁명을 제어하고 그 고삐를 늦추려고 한 자유주의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지도 역시 무너졌다. 궁정과 타협해 봉기를 저지하려고 노력했던 지롱드파는 자신들의 것이 아닌 그 승리로부터 큰 이득을 얻지 못했다. 반면에 로베스피에르와 장차 산악파라 불릴 사람들이 이끄는 수동 시민들, 즉 장인들과 소상점주들이 갑자기 정치 무대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퀼로트의 등장으로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가 새로운 국민적 실체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리하여 8월 10일의 제2차 혁명이 예고했던 민주적이며 민중적인 공화국에 대한 저항이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288-92)


2부 '자유의 전제': 혁명정부와 민중 운동 1792~1795년


▶ 입법의회의 종언(혁명의 약진과 국가 방위, 1792년 8~9월)


"입법의회는 국왕권의 행사를 정지시키고, 새 헌법을 기초할 국민공회를 보통 선거를 거쳐 선출하여 구성한다고 결정하면서 민중의 승리를 즉각 승인했다." "그러나 입법의회의 마지막 6주간(1792년 8월 10일~9월 20일)은 봉기 코뮌과 의회의 충돌로 점철되었다. 이는 혁명의 진전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띤다. 의회가 대변하는 합법적 권력에 맞서 8월 10일의 '봉기 코뮌'이라는 혁명적 권력이 등장하였다." "지롱드파는 봉기 코뮌의 권력 탈취와 독재를 고발하면서 격렬한 공세를 취했다." "두 권력 사이의 대립은 국민공회가 개원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그 뒤에는 지롱드파와 산악파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8월 10일의 승리자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할 생각이었으며, 입법의회는 선거에 의해 중소부르주아지 출신 288명으로 구성된 봉기 코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층 부르주아지와 지롱드파가 지배하는 의회는, 봉기 코뮌이 제시하고 산악파가 이어받은 혁명적인 조치들에 근본적인 거부감을 느꼈다."(299-300)


"그런 가운데 프로이센군의 진격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9월 20일, 맹렬한 집중 포격 후에 프로이센군은 켈레르만이 장악하고 있던 발미 고지의 전면에서 정오 무렵 작전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프로이센 왕은 프랑스군이 허둥지둥 퇴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상퀼로트들은 잘 버텼고 (프로이센군은) 더욱 치열하게 포격을 가했다." "전 유럽에서 정예로 유명한 군대의 포격 앞에서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보병 부대는 전진을 멈추었고, 브라운슈바이크는 감히 돌격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발미의 승리는 전략상의 승리라기보다는 군대의 사기가 거둔 승리였다. 상퀼로트의 군대가 유럽 최강의 군대를 버텨낸 것이다. 혁명은 자신의 힘을 세상에 드러냈다. 국민적이고 민중적인 새로운 군대가 수동적인 기율만을 훈련받은 직업 군대에 성공적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이제 대불동맹군에게 혁명 프랑스는 쉽게 물리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309-10)


▶ 지롱드파의 국민공회(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파산, 1792년 9월~1793년 6월)


"1793년 1월 21일, 국왕의 처형은 프랑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유럽을 경악하게 하였다. 국왕 처형식은 이날 오전 11시에 대규모 무력시위가 펼쳐지고 사람들이 크게 몰려든 가운데 혁명 광장(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국왕의 처형으로 왕권은 전통적이며 거의 종교적인 위신에 타격을 받았다. 루이 16세는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처형되었고, 이로써 신권 군주제는 종언을 고했다. 국민공회는 배수의 진을 친 셈이었다. 이 국왕 시해자들에 대하여 유럽은 무자비한 전쟁을 일으켰다. 혁명 프랑스와 구체제 유럽의 대립, 그리고 국왕을 구출하려고 온갖 시도를 다했던 지롱드파와 이에 맞선 산악파의 대립은 그 절정에 달했다." "지롱드파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특권계급과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처형됨에 따라 지롱드파가 이제까지 추구해 온 지연 정책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국왕의 사형으로 산악파가 국민에게 제시한 유일한 해결책은 승리뿐이었다."(327-8)


"지롱드파는 전쟁을 선포했지만, 그것을 이끌 줄을 몰랐다. 그들은 국왕을 비난했지만, 국왕의 유죄 판결 앞에서 그만 뒷걸음쳤다. 그들은 군주제에 대항하여 민중의 지지를 호소했지만, 민중과 더불어 통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경제적 위기의 악화에 이바지했지만, 민중의 모든 요구를 거절했다. 이런 의미에서 (지롱드파를 무력으로 해산시킨) 5월 31일~6월 2일의 사건은 단순히 정치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적 도약이자 국민적인 반응이며, 특권계급의 음모가 또다시 나타나는 것을 방어하고 처벌하려는 행동이었다. 특권계급의 반혁명이 지롱드파의 반대라는 외피를 쓰고 재차 공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상층 부르주아지가 제거되고 정치 무대에 상퀼로트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 사건에 사회적 의의를 부여해주기에 충분하다. 이런 점에서 조르주 르페브르는 이 사건을 가리켜 '1793년 5월 31일과 6월 2일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360-1)


▶ 산악파의 국민공회(민중 운동과 공공 안전의 독재, 1793년 6월~12월)


"6월 2일의 사건 후 몇 주 동안에 산악파에게 제기된 고민거리는 지롱드파에게 유리해질 반동은 조장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민중 운동을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사실상 지롱드파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중립을 지킨 일부 부르주아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산악파는 유산자들과 온건파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산악파는 반란위원회의 민중 투사들이 5월 31일에 제안한 정치적·사회적 강령, 즉 지롱드파 인사들을 체포할 것, '상소파'의 모든 인사들을 국민공회로부터 제명 처분할 것, 혐의자를 체포하고 파리에 생활필수품을 확보하는 책임을 질 유급 혁명군을 창설할 것, 양곡의 최고 가격제를 실시하고 모든 생활필수품에 공정 가격제를 도입할 것, 군대와 행정을 엄격히 단속해 부정을 바로잡을 것 등을 모두 실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산악파는 민중 운동을 좁은 테두리 속에 가두어 부르주아지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실현되기 어려운 이러한 평형상태는 결국 7월에 위기가 악화되어 무너지고 말았다."(364)


"민중 운동은 상퀼로트의 전(前)자본주의적인 정신을 특징으로 하며, 자본주의적인 농업의 발전에 맞서 악착같이 공동체적 관습을 고수하려 했던 농민의 정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사업의 발전에 꼭 필요한 자유를 지키려고, 소상점주와 장인들에게는 그렇게 소중했던 경제적 규제와 공정 가격제를 없애려는 상공업 부르주아지의 정신 상태에 상퀼로트는 뿌리 깊은 반감을 품었다." "9월 4일, 오랫동안 억눌려 온 민중의 흥분이 마침내 폭발했다. 아침부터 노동자들, 특히 긴축과 군수품 제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파리 코뮌에 빵을 요구하기 위해 그레브 광장으로 무리지어 모여들었다. 이 운동이 노동자들로부터 비롯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즉 그것은 상퀼로트 가운데서도 가장 무산자 계급화된 계층으로서 항상 가치가 떨어진 아시냐로 임금을 받아 생계유지에 큰 곤란을 겪었던 노동자층으로부터 비롯했다." "결국 국민공회와 공안위원회는 마지못해 공포 정치와 통제 경제의 길을 걸었다."(386-90)


▶ 승리와 혁명정부의 몰락(1793년 12월~1794년 7월)


"민중의 (과격한) 요구는 혁명의 통합성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고, 온건파의 주장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통제 경제와 모두를 복종시킬 수있는 공포 정치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반되는 요구 사이에서 공안위원회는 어떻게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혁명정부는 '온건주의'와 '과격론'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793년의 겨울이 끝나 갈 무렵, 갑자기 식량 위기가 더 악화됐다. 방토즈에 진보적인 반대파와 민중의 불만이 합쳐지자, 혁명정부는 부동주의(不動主義)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정부는 과격파를 숙청했다. 코르들리에 클럽의 지도자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곧 민중 운동의 특정한 요구를 단죄한다는 뜻이었다. 이리하여 혁명정부는 자신들의 투쟁 대상이라고 주장했던 온건파에게 좌우되는 처지에 빠졌다. 한동안 혁명정부는 온갖 수단을 다 활용하여 온건파의 압력을 견디어냈다. 그러나 결국 혁명정부는 탄생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모순의 희생물이 되었다."(419)


"로베스피에르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엄격하여 동료들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 거의 친교를 맺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속셈이 있는 사람, 또는 야심가로 오해를 받았다." "테르미도르 8일(1794년 7월 26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의 단상에서 반대파를 공격하고, 공포 정치가 과격하게 행해진 책임을 관용파로 가장한 잔혹한 공포 정치가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고발한 의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고 해서 몰락을 자초했다. 비난받을 만한 소지가 있는 자들은 모두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 클럽에서 박수갈채를 받고 양 위원회는 어찌할 바 몰라 동요하고 있을 즈음, 그의 반대파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날 밤, 오래전부터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을 획책해 온 의원들과 그들로부터 공포 정치의 종식을 보장받은 평원파의 음모가 진행되었다. 이 일시적인 공모에서 두려움이 연대의 유일한 근거였다."(477-9)


# 테르미도르 10일에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쿠통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 19명이 재판 없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정치적 차원에서 산악파 부르주아지와 파리의 상퀼로트 사이에, 즉 혁명정부와 구(區)의 투사들 사이에는 일시적인 적대 관계 이상의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했다. 전쟁은 권위주의 정부를 필요로 했고, 상퀼로트들은 이 점을 알았기에 스스로 그러한 정부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전쟁과 그 전쟁이 요구하는 것은, 산악파와 상퀼로트들 모두가 희구했던 민주주의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 두 부류가 동일한 민주주의관을 지녔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상퀼로트가 실제로 행한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직접 지배의 경향을 띠었다. 그런데 혁명정부는 그러한 관행이 전쟁 수행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겼다." "상퀼로트들이 보여준 이러한 정치적 태도는 부르주아지가 구상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어쩔 수 없이 대립했다. 상퀼로트는 특권계급을 분쇄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를 요구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혁명정부를 용서할 수 없었다."(482-3)


▶ 테르미도르파의 국민공회(부르주아 반동과 민중 운동의 종언, 1794년 7월~1795년 5월)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자 혁명정부는 살아남지 못했고, 반동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혁명정부를 억압했던 민중 운동과 파리의 상퀼로트는 확실히 혁명력 2년 제르미날 이후 세력을 잃어갔고, 그때부터 공안위원회가 내세운 사회적·경제적 정책은 점차 민중적 성격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테르미도르 9일의 사건은 하나의 단절이 아니라 기존 경향의 가속화였다.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부터 다음 해 봄까지 반동이 진전되었지만, 아직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시기에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 운동이, 즉 '신사들'과 상퀼로트가 정면으로 대치했다. 혁명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가르게 될 대규모 민중 봉기에서 한편은 두려움을, 다른 한편은 희망을 느꼈다. 1789년 이후, 파리의 민중은 무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력 3년 프레리알의 패배는 파리 상퀼로트의 최후이자 민중 운동의 결정적 소멸을 의미했다. 혁명은 부르주아 노선을 되찾았다."(487-8)


"테르미도르파는 독립적인 소생산자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민중의 이상을 거부했다. 그렇지만 평원파 인사들은 혁명에 확고하게 집착했기에, 공화국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혁명력 3년 브뤼메르 25일(1794년 11월 15일)에 평원파가 내세운 법규를 마련하여 망명자를 계속 처벌했다. 그들의 정책 목표는 모든 '1789년의 애국파 인사들'을 규합해 반혁명의 진행을 막고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온건파의 공세는 혁명력 2년 체제와 특히 자코뱅파를 반대하는 우파의 모든 잡다한 세력, 즉 보수적인 부르주아, 왕당파, 입헌군주파 사이에 형성된 일종의 동맹 관계로 이어졌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구체제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강령은 공포 정치가들에게 복수하고 상퀼로트를 굴복시키며 정치적·사회적인 측면에서 민주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막자는 것처럼, 전적으로 부정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이들은 언론과 '귀공자행동대'라는 두 가지 수단을 중요하게 활용했다."(492-5)


"정치적·사회적 반동과 더불어 도덕적 반동도 나타났다. 혁명력 2년에 민중은 공화주의적 덕성을 천부적으로 소유한 존재로 간주되어 찬양을 받았으나, 이제는 멸시를 받게 되었다. 귀공자행동대의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인 쥘리앙은 《회상록》에서 민중은 〈사적인 덕성으로 맡은 바 본분을 다할 때는 의심의 여지 없이 매우 존경할 만하지만〉, 공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민중의 〈소박함〉은 이제 상스러운 것이 되었다. 1794년 프레리알이 되자, '상퀼로트주의'는 체포할 충분한 사유가 되었다." "존대를 하지 않고 말을 놓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시투아이앵(citoyen)', '시투아이앤(citoyenne, 여자 시민)'에 대신해서 '신사(monsieur)'와 '숙녀(madame)'라는 호칭이 다시 나타났다." "게다가 대중의 끔찍한 빈곤과 소수의 파렴치한 부유함의 대조는 반동의 사회적 속성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냈다. 겨울이 닥쳐오면서 기근이 악화되자 그러한 대조는 더욱 두드러졌고 분노가 고조되었다."(503-5)


3부 '유산자가 지배하는 나라' : 부르주아 공화국과 사회의 공고화 1795~1799년


▶ 테르미도르파의 국민공회의 종언(1795년의 여러 조약과 혁명력 3년의 헌법)


"메시도르 5일부터 프뤽티도르 5일까지(1795년 6월 23일~8월 22일) 두 달에 걸쳐, 부아시 당글라가 국민공회에 제출한 헌법 초안에 대하여 토론이 진행되었다." "온건한 공화주의자들과 입헌군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로도 독재로도 가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1789년의 원칙으로 되돌아가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 원칙은 이제 부르주아지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고 수정되었다.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지도력은 최소한 유복한 유산자라고 할 수 있는 '명사들'에게 귀속되어야 했다. 부아시 당글라는 메시도르 5일의 보고에서 이 점을 명백하게 밝혔다. 〈절대적 평등이란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테르미도르파는 특히 상퀼로트들의 권력 복귀와 특정 의회나 한 개인의 독재를 두려워했다. 그 결과 여러 예방 조치와 보장 수단이 헌법에 도입되었다. 이리하여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에서 항상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강구하지 않은 채, 결국 권력은 무력하고 불안정해졌다."(551-5)


"테르미도르파는 한편으로 자신들의 인기가 형편없음을 알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입헌군주주의자들이 선거라는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고 책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권력을 계속 장악할 작정이었다. 제헌위원회의 한 위원은 물었다. 〈과연 누구의 손에 헌법이라는 신성한 공탁물을 맡길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변이 바로 혁명력 3년 프뤽티도르 5일(1795년 8월 22일)의 법령이었다. 이 법령은 선거인회가 새로운 의원의 3분의 2를 현직 국민공회 의원들 가운데서 선출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더욱이 13일(8월 30일)의 법령은 그러한 비율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시 선출된 국민공회 의원들이 직접 선출하는 호선(互選)의 방식으로 부족 인원을 메울 수 있음을 명기했다. 이는 곧 테르미도르파에게 유리한 것이었으며, 새로운 의회에서 종래의 산악파와 입헌군주파의 반대 세력을 동시에 제거함을 뜻하는 것이었다."(556-7)


"그러나 당시 프랑스는 내전과 대외 전쟁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상황이었다. 방데의 반란은 종식되지 않았고, 대불동맹도 여전했다. 테르미도르파는 혁명력 3년의 헌법을 통해 새 체제로 하여금 합병된 벨기에의 9개 도를 포함하여 '합헌적인 경계선'을 유지하고 보장한다고 선언하고, '자연 국경'의 개념에 의거하여 외교 정책의 방향을 규정하게 함으로써 총재정부가 취할 정책의 기본 노선을 결정하였다. 곧 1796년 봄에 전투가 재개될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하는 데서 신체제가 물려받은 것은, 가치가 절하된 아시냐와 조직이 무너진 군대였다. 혁명력 3년의 헌법을 실시하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이 헌법은 특히 매년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특징을 지녔는데, 이는 대내외의 평화를 전제로 했다. 혁명력 2년 당시와 달리 민중에게 호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총재정부파'로 변신한 테르미도르파는 특권계급의 새로운 공세를 이겨내기 위해 헌정 질서를 위반하고 이윽고 군대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559-60)


▶ 제1차 총재정부(자유주의적 안정화의 실패, 1795년~1797년)


"(아시냐를 대체한 새로운 지폐) 토지환이 붕괴되고 정화 체제로 복귀한 이후 공화국의 재정 상황은 참으로 비참했다. 인플레이션에 뒤이어 디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유통되는 정화의 양은 부족했고, 1796년에 작황이 좋았던 만큼 물가는 더욱 폭락했다. 그 결과 적어도 민중의 비참함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총재정부가 예산의 수지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정치적인 저의를 품은 양원은 모든 효과적인 재정적 노력을 거부했다." "통제 경제를 포기한 후에 테르미도르파가 그랬듯이, 총재정부는 금융업자, 은행가, 조달 상인, 군수품 납품업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 내에서는 칭호를 박탈당한 옛 자작인 바라스와 전직 주교인 탈레랑이 방탕한 사교계의 일원이었다. 그들 주위에는 사업가와 이른바 '금융 협잡꾼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체제에 편승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모리배로서, 자신들의 재산을 보장해주는 다른 체제가 있다면 그것을 위해 총재정부를 기꺼이 저버릴 것이었다."(584-6)


"한편 국민 총동원령 이후 병력이 더는 교체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정복하느라 군대가 프랑스로부터 멀어지자, 병사들은 점차 일반 국민으로부터 유리되어 갔다. 외국 땅에 주둔한 군대는 필연적으로 직업 군인화되어 갔고, 이제는 장군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국민에 대한 헌신은 서서히 지휘관에 대한 충성심과 모험심, 그리고 곧이어 약탈로 바뀌어 갔다. 혁명력 2년 당시에는 군대와 인민의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면,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이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 역시 시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려는 듯 보였다." "애국주의는 공화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내용을 상실했고, 민족주의가 나타났다. 공민 정신과 혁명적 열정은 곧 외국인에 대한 경멸, 군사적 영광에 대한 애착, 민족적 자만심으로 바뀌어 갔다. 셰니에는 이윽고 〈항상 승리하는 '위대한 국민'〉을 찬양했다.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는 '위대한 국민(Grande Nation)'이라는 표현이 총재정부 말기부터 유행했다."(589-90)


"혁명력 5년 제르미날의 선거에서 왕당파가 승리를 거둔 이후 국내 정세와 여론의 냉담한 반응 때문에 총재정부는 장군들에게 좌우되었다. 체제의 성격상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민중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외 정책의 방향은 불가피하게 국내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대불동맹 측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오벤의 휴전 이후 우디네에서 시작된 협상을 질질 끌었고, 영국 특사 제임스 해리스가 릴에서 재개한 프랑스와의 협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왕당파 우파가 우세를 점한다면,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더 유리한 협상 조건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총재정부와 보나파르트의 유대 관계를 강화해주었다." "이렇게 보나파르트와 총재정부의 상호작용과 양보로 말미암아 프뤽티도르의 쿠데타와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서 주요한 이득을 본 쪽은 바로 보나파르트였다."(598-9)


# 프뤽티도르 18일의 쿠데타(1797년 9월 4일) : 삼두파(바라스, 라레벨리에르, 뢰벨)와 사전 교감을 가진 보나파르트가 왕당파의 반역을 제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한 사건


#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년 10월 18일) :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한 뒤, 오스트리아와 맺은 평화조약.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얻고 롬바르디아를 포기하였으며, 프랑스는 이오니아 제도와 네덜란드를 획득하였다.


▶ 제2차 총재정부(부르주아 공화국의 종언, 1797년~1799년)


"프뤽티도르의 쿠데타 이후 실행된 비상 체제는 비록 '총재정부의 공포 정치'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사실상 혁명력 2년 공포 정치의 창백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테르미도르파 부르주아지에게는 공안위원회가 수립했던 것과 같은 경제적 독재는 의제가 될 수 없었으며, 총재정부에게는 혁명정부를 특징짓는 '강제력'이 여전히 부족했다." "총재정부의 기반은 여전히 협소했기 때문에 정치적 안정화는 불가능했지만 대륙의 평화가 계속되는 한, 체제는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혁명력 3년 헌법의 자유주의적인 작동 원리가 또다시 타격을 입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제2차 총재정부의 구성과 전쟁의 재개로 최후의 위기가 가까워졌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국가 권위의 회복과 명사층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우위가 양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사들은 군대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정치 권력을 상실하고 말았다."(608-7)


"브뤼메르 18일(1799년 11월 9일)의 쿠데타가 그렇게 쉽게 성공했던 이유는 그것이 지닌 사회적 성격에서 비롯한다. 새로운 사회의 지배적인 요소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했더라면 쿠데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테르미도르파는 보수적인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우위와 정치적 권력을 확립했고, 총재정부는 그것을 보존해 왔다. 그러나 혁명력 7년에 들어서 자코뱅파의 압력이 유산자들의 특권을 위협하는 듯 보였다. 사회적 공포가 되살아났다. 이것이 바로 헌법 개정 세력을 묶어준 끈이었다. 혁명에서 비롯된 두 뷰류의 새로운 사회 범주는 특히 평온함과 사회적 안정을 열망했다." "지주 농민층과 사업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해주고 자신들의 권리를 언제까지나 보장해주며 경제를 혁신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을 강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 체제를 갈망했다. 그들은 곧 통령정부와 제1제정의 사회적 토대를 형성할 것이었다 바로 이들에게서 명사들의 핵심 세력이 배출되었다."(646-7)


결론부 혁명과 현대 프랑스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다. 조레스의 《프랑스혁명의 사회주의사》에 따르면, 영국혁명과 미국혁명이 〈좁은 의미에서 부르주아적이고 보수적인〉 데 비하여 프랑스혁명은 〈넓은 의미에서 부르주아적이고 민주적〉이었다. 프랑스혁명이 그러했던 것은 특권계급이 완강하게 버텼기 때문이었다. 이는 앵글로·색슨 식의 모든 정치적 타협을 불가능하게 했고,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완강하게 구질서를 완전히 파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오직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공포 정치가 〈무시무시한 망치질〉을 했고, 프랑스혁명이 〈거대한 비질〉을 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한 사회·정치적 도구는 바로 도시와 농촌의 인민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중소부르주아지의 자코뱅 독재였다. 이 인민대중은 자유롭게 노동하고 교환하는 독립적인 농민층과 장인층으로 이루어진 사회 범주로서, 그들의 이상은 자립적인 소생산자들로 이루어진 민주주의였다."(726-7)


"혁명력 2년의 시도는 궁극적으로 실패했지만, 본보기로서 가치가 있다. '1793년'의 인사들, 특히 로베스피에르파는 원칙적으로 선언된 권리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경제적 자유의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모순을 극복하여, 사회민주주의적인 공화국의 틀 안에서 '향유의 평등'을 실현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참으로 웅장하고 극적인 시도였다." "경제적 자유와 자본주의적 집중이 사회적 괴리를 심화하고 대립을 악화시켜, '향유의 평등'은 더욱 가능성 밖으로 밀려났다. 자신들의 상황에 고착되어 항상 개인의 노동에 입각한 소규모 소유제에 집착했던 소장인들과 소상점주들, 즉 '1793년' 당시 상퀼로트의 후예들은 유토피아와 폭동 상태를 오락가락했다. 동일한 모순, 동일한 무력감이 항상 사회민주주의의 시도를 괴롭혔다." "평등주의적 공화국은 여전히 기대의 영역에 머물렀다.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으면서 항상 집요하게 추구하는 '이카리아(Icarie)'였다."(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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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제학 - 왜 경제적 인센티브는 선한 시민을 대체할 수 없는가
새뮤얼 보울스 지음, 최정규 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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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호모 이코노미쿠스,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법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 그리고 정책입안자들이 법을 설계하거나 정책을 수립하거나 사업체를 조직하려고 할 때, 사람들(시민이든 피고용인이든 사업 파트너이든 아니면 잠재적 범죄자이든)이 이기적이며 도덕에 무관심하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시민·피고용인·학생·채무자의 행위 모델로 삼는 것은 결코 신중한 방식이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패러다임에 따라 정책을 펴면 도덕적 무관심과 이기심이라는 가정을 점점 더 사실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유인이 없을 때보다 유인이 있을 때 훨씬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곤 한다. 둘째, 벌금이나 보상 같은 물질적 인센티브가 때로는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흄이 주장하는 대로 부정직한 사람의 탐욕을 이용할 수 있도록 아무리 정교하게 인센티브를 설계하더라도, 인센티브만으로는 좋은 거버넌스가 확립될 수 없다."(27-9)


"시장경제가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런 정책들은 이기심을 부추길 뿐 아니라, 협력적이고 관대한 시민문화를 견고하게 유지해주는 사회적 수단을 훼손할 수 있으며, 시장이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사회규범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대출을 신청할 때 자기 자산과 부채 상황을 정직하게 적어내는 것, 약속을 잘 지키는 것,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은 일상적인 미덕도 이른바 몰아냄 효과crowding-out라 불리는 문화적 재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장 같은 경제제도는 이런저런 규범이 부재하거나 위태로울 경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같은 지식기반 경제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회규범이라는 문화적 토대가 필요하다. 이런 규범 중 하나가 '악수는 말 그대로 악수handshake is indeed handshake'라는, 즉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확신이다. 누군가 이를 의심하는 순간, 그 불신 때문에 교환을 통한 상호 이득의 창출은 제한될 수 있다."(29-30)


"내가 모색하려는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한 경험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가정을 대체하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일반적인 가정과 달리 사람들은 의사결정을 할 때 먼 미래까지 고려하지 않으며 계산에 능하지도 않고 일관적이지도 않다. 나아가 사람들은 현상유지 편향을 보이며 미래의 서로 다른 시점에 놓인 대안들 간의 선택에서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편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교육받은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경제학자들이 계산착오라 할 법한 행위를 지속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일어날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0보다 크면 그 사건을 확실히 일어나지 않을 사건과 전혀 다른 것으로 취급한다." "경제학자들은 선택 행위를 모든 인간 행위의 중심에 놓는데, 이제 경제학자들도 사람들이 그다지 선택에 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35-6)


2장 부정직한 자들을 전제로 한 법질서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는 것이 입법자의 임무라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으로부터, '악한 사람'을 가정하며 경제적 거버넌스와 법을 강조하는 시스템적 사고로 초점이 전환되는 긴 여정은 16세기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서 시작한다. 〈공화국을 수립하고 법을 제정하려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악하며,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결코 좋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배고픔과 가난이 부지런한 사람을 만들며, 법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들 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기적(〈부패한〉) 시민들로는 좋은 거버넌스가 형성될 수 없다고 본 점에서 대부분의 현대 경제학자들과 거리가 있고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가까웠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했다. 〈법이나 명령만으로는 부패가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좋은 관습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한 것처럼, 법이 준수되기 위해서는 좋은 관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45-7)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해야 할 일차적 임무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기질〉에 의해 동기 부여된 시민들이 마치 선한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보통의 성향과 욕구를 가진 시민은 도덕적 성향과 도덕적 욕구가 없더라도 〈그들의 행동이 법에 의해 관리된다면〉 잘 통치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담긴 새로운 아이디어는 한 사회 거버넌스의 품격은 시민이 가진 품성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거버넌스는 사회가 좋은 시민들로 이뤄지느냐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제도가 시민들 간 상호작용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현대 자연과학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한 사회 거버넌스의 질은 정치체제의 창발적 속성, 즉 정치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시민들의 특성으로부터 직접 추론할 수 없는 전체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좋은 정부란 질서 잡힌 사회의 창발적 속성이었다."(47-8)


"그로부터 2세기 뒤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가 전달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는 바로 이런 사고의 급진적인 형태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이 괴짜 런던 의사는 자신의 책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미덕은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맨더빌의 벌집은 부도덕한 탐욕과 시샘 어린 경쟁 위에서 번성했고, 꿀벌들이 도덕적으로 변하자 붕괴의 무질서가 뒤따랐다. 절약의 미덕이 상품 수요를 줄여 경제적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맨더빌의 통찰은 케인스 경제학의 기초였던 절약의 역설을 예고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꿀벌의 우화》 1714년도 판 표지에는 이 저서가 〈인간의 약점들이 시민사회의 장점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도덕적 덕성을 대신하도록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담론〉을 포함한다고 쓰여 있다. 맨더빌은 결론부에 〈무리 중에서 가장 악한 놈마저도 공공선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적었다."(48-9)


"데이비드 흄은 저서 《에세이: 도덕, 정치 그리고 문학》(1742)에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했다. 〈어떤 형태의 정부 체계를 모색하더라도 (···) 사람들은 모두 부정직하며, 그들의 행동 목적은 오로지 사익의 추구에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 이익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을 통치해야 하며, 이익을 수단으로 삼아 그칠 줄 모르는 탐욕과 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공익을 위해 협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제러미 벤담 역시 〈의무duty와 이해interest의 결합 원리(의무를 다하는 것이 각자에게 이득이 되게 하라)〉를 공공정책의 입안 원리로 제시했다." "부정직한 사람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가 마키아벨리, 흄, 벤담 그리고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경제행위자들과 시민들이 실제로도 도덕에 무관심하다고 보았던 것은 아니다." "실제 이 고전적 저자들은 한편으로 정책이 이익을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윤리적이고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에 대한 호소를 간과하지 않았다."(50-1)


"부정직한 사람을 전제로 한 법질서라는 주장이 호소력을 갖게 된 이유는 시민들이 실제로 부정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종교적 열광이나 권력 추구 같은 좀 더 해를 끼칠 수 있는 다른 '열정'에 비해, 이기심의 추구는 이롭거나 적어도 해는 끼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둘째로 경험적 문제인데, 국민국가 규모로 운영되는 정부가 좋은 정부가 되는 데 기초를 제공하려면 덕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일곱 가지 죄악 가운데 탐욕이 가장 큰 죄로 여겨졌기에, 이기심이 존중할 만한 동기로 인정받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기심이 좋은 거버넌스를 형성하는 기초로서 받아들일 만하게 여겨진 데에는 전쟁과 무질서가 드리운 그림자도 한몫했다. 레몽 아롱이 〈총력전의 세기〉라 부른 20세기를 포함해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유럽의 사망자 중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의 비중이 가장 높았던 때가 17세기였다."(52-4)


"더 이상 미덕을 좋은 정부의 필수 조건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은 단순히 인간 동기에 대한 현실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타인'이 친인척이거나 이웃 또는 친구라면 그들의 처지에 대한 우리의 관심, 그리고 사회규범 위반에 대한 사회적 제재나 보복을 피하려는 욕구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낯선 사람이 상호작용을 하는 환경에서는 윤리적이고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가 좋은 정부의 기초로 불충분하다는 우려가 생겼고, 그 대응의 하나로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제약과 인센티브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시민적 덕성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키아벨리가 우려했던 것은 시민적 덕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지, 시민적 덕성이 없다거나 그것이 부적절하다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조차 어떠한 경제 혹은 사회 시스템도 시민적 덕성 없이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55)


"고전학파 경제학자들(그리고 이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간과한 사실은 이기심을 이용하고자 설계한 인센티브 제도가 도덕적 행위를 비롯한 친사회적 행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아마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첫 번째 원리는 인센티브와 도덕이 가산적이며 분리 가능하다는 가정이다. 두 요소가 가산적이며 분리 가능하면 두 요소 간에는 시너지 효과도, 역의 시너지 효과도 발생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암묵적으로 분리 가능성을 가정함으로써 두 가지 중요한 가능성을 간과해왔다. 첫째로 이기심이 공익에 이바지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면 시민적 덕성이 약해지거나 시민적 덕성이 주요한 동기로서 덜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특정 조건에서는 윤리적이고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와 이기적 동기가 함께 번성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고, 그 결과 더 나은 사회적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58-62)


"(각 행위자 간의) 계약이 완전하다면 이기적 개인 간의 경쟁을 통해 도달한 균형은 '모든 것이 가격을 가지며' 그리고 '그 가격이 적절'하도록 보장한다. 따라서 경쟁시장은 파레토 효율적인 결과를 낳는다. 여기서 파레토 효율적인 상태란 누군가의 처지를 악화시키지 않고는 어느 누구의 처지도 개선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정리의 가정들, 특히 계약이 완전하다는 가정은 시장실패(조정되지 않은 교환이나 경제적 행위가 파레토 비효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는 이상적인 세계란 어떤 특징을 갖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세계에서는 좋은 거버넌스를 위해 굳이 도덕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다시 말해 이 정리는 사람들의 선호와 상관없이 참이다." "이 정리의 가정이 성립하는 한에서, 경쟁적 교환은 거래가 자발적이며 결과가 효율적이기만 하다면 시민들이나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흔히 적용되는 규범적 기준이 필요없는 특별한 영역이 되었다."(65-7)


"교환을 통해 공급되는 재화나 서비스의 양과 질에 대한 정보는 매우 비대칭적이거나 입증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여기서 비대칭적이라 함은 거래되는 재화나 서비스의 양과 질이 교환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입증 불가능하다 함은 양과 품질에 대한 정보가 두 당사자 모두에게 알려져 있더라도 그 정보를 법정에서 계약을 강제하기 위해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 경우 계약이 교환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시장실패는 환경적 파급효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장실패는 자본주의 경제에 필수적인 일상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노동시장과 자본시장에서도 일어난다. 고용계약만으로는 피고용인이 열심히 일하도록 규정하고 강제할 수 없다. 대출 계약 역시 채무자가 무일푼이 된다면 계약 이행을 강제할 수 없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 정리'의 전제가 되는 완전한 계약 가정을 위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71-3)


"케네스 애로는 '보이지 않는 손 정리'를 설명하는 논문에 이렇게 적었다. 〈어쩌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을 포함한 사회적 행위 규범은 시장실패를 보완하는 사회적 대응일지도 모른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계약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가격이 도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도덕이 가격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 때가 있다. 애로가 주장한 핵심은 사회규범이나 도덕 규칙을 통해, 개인 행동이 타인에게 초래하는 편익이나 비용을 내부화하는 효과가 있다면 시장실패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경제를 구성하는 주요 시장, 즉 노동시장·신용시장·지식시장 등이 계약의 불완전함 속에서도 비교적 잘 작동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사회규범이나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가 긍정적인 노동윤리, 자신이 추진하려는 프로젝트 내용을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 약속을 지키려는 책임감 등을 장려하기 때문이다. '도덕경제moral economy'라는 말은 결코 형용모순이 아니다."(75-6)


3장 도덕감정과 물질적 이해관계


"이타주의나 호혜성, 타인을 돕는 데서 얻는 내적 즐거움, 불평등 기피, 윤리적 헌신을 비롯해 자신의 부나 물질적 보수를 극대화하는 수준 이상으로 타인을 돕는 여러 동기를 가리켜 '사회적 선호'라 해보자. 사회적 선호는 단지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의 보수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적 선호를 이렇게 넓게 정의하는 이유는 타인의 보수나 후생에 무관심한데도, 그 밖의 다양한 도덕적 동기나 내재적 동기로부터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을 돕고 사회규범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사회규범을 지키는 이유는 이를 위반했을 때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회규범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노숙자를 돕는 것이 빈곤층의 처지 개선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자기만족warm glow〉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정직한 이유가 거짓말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직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89-90)


"나는 어떤 행동에 관련된 물질적 기대 비용과 기대 편익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적 개입을 가리켜 (경제적 또는 금전적이라고 명시하지 않고) '인센티브'라고 표현하고, 공공재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근접 동기들을 시민의 '체험 가치experience values'라고 부르겠다." "인센티브가 체험가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센티브의 총효과 즉 직접효과와 간접효과의 합은 인센티브 제공이 행동의 비용과 편익에 미치는 효과만을 고려할 때 기대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인센티브가 사회적 선호를 몰아냈다고crowding out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인센티브와 사회적 선호는 서로 대체제라는 말이다. 즉 각 요소가 행동에 미치는 효과가 다른 요소의 수준이 증가함에 따라 감소한다는 것이다. 인센티브가 사회적 선호에 미치는 효과가 양(+)이라면, 이 경우에는 끌어들임 효과crowding in가 발생한다고 하며, 이때 사회적 선호와 인센티브는 서로 보완재가 되어 서로가 서로의 효과를 강화한다."(92-6)


"존 스튜어트 밀은 정치경제학을 〈단지 부를 소유하려는 존재〉로서의 개인에 대한 연구로 국한시킴으로써 정치경제학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 실제로 윤리적 동기나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가 존재하지 않거나(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센티브의 효과가 이런 동기의 효과에 단순히 더해지는 것이라면(밀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밀이 이런 윤리적 동기나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를 배제한 것은 놀랍기는 해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이 두 가지 가정 중 어느 하나도 정당화될 수 없다. 호혜성·관대함·신뢰 같은 동기는 보편적이지만, 인센티브가 명시적으로 제공되면 사라질 수도 있다. 복잡한 사고를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 즉 인센티브와 개인 선호의 상관관계를 고려하는 입법자는 몰아냄 효과의 성격(범주적인지 한계적인지, 강한지 약한지)과 이 몰아냄 현상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나타는지에 관한 정보를 통해 적절한 인센티브 수준을 결정하고자 노력한다."(131-2)


# 몰아냄 효과의 성격

1. 몰아냄의 범주적 효과categorical crowding out :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사실 자체가 체험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2. 몰아냄의 한계적 효과marginal crowding out : 인센티브의 크기가 체험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4장 정보로서의 인센티브


"대부분의 인센티브는 체험가치에 부정적인 효과를 끼친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시민이나 피고용인을 완전히 이기적인 사람으로 믿는 정책은 사람들을 정확히 그 믿음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만들곤 한다." "여기서 몰아냄 효과가 일어나는 두 가지 인과적 메커니즘을 구별해보자. 첫째, 인센티브는 선호에 영향을 미친다. 인센티브는 우리가 놓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신호를 전해줌으로써, 그 상황에 적절한 행동이 무엇이며 우리가 가진 상이한 선호들 가운데 어떤 선호를 적용해야 하는지 알려준다(예컨대 〈쇼핑할 때는 이기적으로만 행동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가족관계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이를 가리켜 '선호가 상황 의존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센티브의 존재와 성격 자체는 우리가 처한 상황의 일부가 된다. 둘째, 몰아냄 효과는 인센티브가 사람들이 생애에 걸쳐 자신의 선호를 습득해나가는 과정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를 가리켜 '선호가 내생적'이라고 말한다."(143-5)


"인센티브는 목적을 갖는다. 때로는 인센티브를 통해 그 목적이 너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에 인센티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인센티브를 설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내가 수행해야 할 작업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인센티브는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 따라서 이런 경로를 통해 선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경제학자들에게도 익숙하다. 마크 레퍼 연구팀이 지적하듯, 인센티브는 '보상을 설계하는 사람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인센티브는 그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인지 공정함을 추구하려는 사람인지), 그가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상대방을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 일의 성격이 어떤지(얼마나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인지) 등을 알려준다. 이렇게 드러난 정보는 그 일을 수행하려는 상대방의 동기에 영향을 줄 수 있다."(147-8)


"인센티브가 전달하는 '불쾌한 소식' 효과는 보통 주인(principal)과 대리인(agent)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주인은 보상이나 벌금 같은 인센티브를 통해 대리인으로 하여금 좀 더 주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고자 한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주인은 실행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든 가능한 인센티브 각각에 대해 대리인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알고 있어야 (혹은 추측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대리인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대리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가능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주인이 특정 인센티브를 선택할 때, 대리인은 주인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를 파악해낼 수있다." "인센티브가 주인이 악의적 의도를 갖고 있거나 대리인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불쾌한 소식을 전달해주는 신호로 기능할 때, 몰아냄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주인이 공정하거나 그가 대리인을 믿는다는 신호를 전달할 수단을 갖는 경우라면 그 효과는 반전될 수도 있다."(148-52)


"몰아냄 효과를 초래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를 살펴보자. 이번 이유는 경제학자들에게는 다소 덜 친숙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따질 때 맥락적 단서를 찾게 되는데, 인센티브가 그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인센티브가 가져오는 프레이밍 효과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한 가지 설명에 따르면, 시장 친화적 인센티브는 심리학자들이 '도덕적 거리두기'라고 하는 현상을 일으킨다. 도덕적 거리두기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윤리적 스위치를 필요에 따라 켰다 껐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가령 사람들에게 개인적 행복에 대해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묻는다고 생각해보자. 하나는 〈당신이 무척 즐거웠던 경험을 몇 가지 알려주세요〉라고 묻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당신이 무척 즐거웠던 경험을 몇 가지 알려주세요. 단 당신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당신의 답변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습니다〉라고 묻는 방식이다. 후자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위반은 해도 좋다는 맥락적 단서를 던져준다."(152-4)


"자기 결정권 메커니즘은 인센티브의 영향을 받는 사람의 자율성에 대한 욕구 자체에 기인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이 보상 없이도 행동 자체로부터 만족을 얻고 있을 때 인센티브의 도입이 행동을 '과잉 정당화'할 수 있으며, 인센티브가 부여됨에 따라 개인들은 스스로를 더 이상 자율적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될 수 있다고 한다. 가령,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의 경우, 어른이 손을 뻗어 닿지 않는 물건을 집는 것을 도와줬다고 장난감을 상으로 주면, 상을 받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이후 어른을 덜 돕게 되더라는 이야기 말이다. 이 연구를 진행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보상이 주어지고 나면, 아이들은 예전에는 그 자체로 충분한 목적일 수 있었던 행동을 단지 더 가치 있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돕고자 하는 내재적 동기가 감소한다. 그리고 이제 보상 자체가 충분치 않다고 느끼면 도움주기를 그만둘지도 모른다."(163-5)


# 인센티브가 사회적 선호를 몰아내는 세 가지 이유

1. 불쾌한 소식 효과

2. 도덕적 거리두기 효과

3. 통제 기피 효과(자기 결정권에 기반한 내재적 동기 감소)


5장 자유주의 시민문화


"우리가 특정 선호를 갖게 되는 방식은 억양을 습득하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선호를 습득하는 과정은 우리 생애 초기에 일어나고, 그 과정은 대부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습득 과정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교류하는 방식에 크게 의존한다." "인센티브의 효과로 돌아가 보자면, 선호가 내생적으로 형성된다는 것과 상황 의존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것(프레이밍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의 경우 인센티브의 효과가 장기적인 학습 과정에 영향을 주고, 그 결과는 수십 년 혹은 전 생애에 걸쳐 지속된다는 점이다. 이와 반대로 선호가 상황 의존적이라는 것은 새로운 상황에 놓이면(예컨대 인센티브가 철회됐을 때), 선호의 레퍼토리 중 무엇에 따라 행동할지도 함께 변한다는 뜻이다. 선호가 상황 의존적일 때, 인센티브는 일종의 신호 역할을 하는 반면, 선호가 내생적일 때, 인센티브는 장기적 효과를 초래하고 이렇게 학습된 선호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192-3)


"인센티브가 있을 때 왜 사람들은 관대한 행동(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데도 타인을 돕고자 하는 행동)을 자기 이익을 위한 행동으로 오해하게 될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인센티브로 인해 그 관대한 행동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저 사람 돈 때문에 그렇게 한 거야.〉 나머지 하나는 인센티브가 때때로 개인들을 윤리적 프레임으로부터 보수 극대화 프레임으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인센티브가 있을 경우 집단 내 관대한 행동이 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보편화된 행동 방식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인센티브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면, 관대한 선호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들의 빈도가 실제보다 낮게 감지될 것이다. 이런 경향이 새로운 행동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순응주의적 효과와 결합할 경우, 관대한 성향은 문화의 지속 및 진화가 일어나는 선택 과정에서 자기 이익 추구 성향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입을 것이다."(198)


"자유주의 국가는 기회주의와 불법행위를 완전히 뿌리 뽑기에 충분한 정보도, 이를 강제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들의 신체적 상해나 재산권 상실 그리고 여타 불행에서 오는 최악의 결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할 능력이 있으며 또 실제로 그래왔다. 그리하여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썼듯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위협이 더 엄격히 통제된다〉는 사실에 기초한 〈문명화 과정〉이 가능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한 가지 결과는 〈매일의 일상이 변덕스러운 운에 따른 급작스런 변화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고, 물리적 폭력은 군대 내로 국한된다〉는 것이다. 불행은 법을 통해서, 또 사람들이 재앙적 손실에 직면했을 때 출구전략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직업 등의 이동 가능성에 의해, 최근에 확립된 사회보험을 통해 완화된다." "이처럼 자유주의 사회가 위험을 줄여주는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229-30)


"잘 모르는 잠재적 파트너와 만나서 거래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이때 당신이 거래 파트너와 협력할 수 있으려면 신뢰가 얼마나 확고해야 할까? '상대를 신뢰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확신' 정도는 배반하는 사람을 상대로 당신이 협력했을 때 얼마나 피해가 큰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상대의 배반에 이용당했을 때 불운한 협력자로서 당신이 치러야 하는 비용이 매우 크다면, 당신은 상대가 신뢰할 만하다는 확신이 클 때에만 협력적으로 나설 것이다. 한편 순진하게 협력했다가 상대의 배반으로 치러야 하는 비용의 크기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면, 상대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를 신뢰하고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법치 등 자유주의 국가가 갖는 여러 측면들은, 배반하는 사람을 잘못 믿고 협력했을 때 받게 될 불이익이 그렇게 크지 않도록 보완해준다." "물론 시장도 이러한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시장과 법치는 생면부지의 이방인들 사이에 신뢰가 진화하도록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는 데서 시너지 효과를 낸다."(231-2)


6장 입법자의 딜레마


"(존 스튜어트 밀의 조언을 탈피한) 경제이론들은 계약이 불완전할 때(모든 중요한 사항을 계약서에 명확히 규정할 수 없고 그 계약을 강제할 수 없을 때) 교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연구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미시경제학은 노동시장이나 금융시장의 작동을 설명하면서, 애로가 말했던 것처럼 계약이 경제주체로 하여금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비용과 편익을 내부화하도록 강제하지 못할 때, 사회규범과 도덕적 코드로써 계약을 대신할 방식을 자세히 기술한다. 노동자들은 노동윤리가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에 페이스북으로 친구들과 노닥거리면 고용주가 그만한 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차입자들도 스스로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실패할 경우 대출금을 못 갚을 투자 프로젝트에 대해 그 위험성을 과소 보고하는 걸 자제할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가격이 이런 도덕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241-2)


"계약이 불완전해서 시장실패가 발생하는 경우, 신뢰나 호혜성 같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규범이 이런 시장실패를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경우 완전 계약에 가깝도록 이상적인 인센티브 체제를 만들려는 공공정책이나 법 관행, 예컨대 신뢰 게임에서 돈을 충분히 돌려주지 않을 때 벌금을 매긴다든지 하이파 어린이집에서처럼 부모가 지각할 때 벌금을 부과하는 조치는 이런 규범을 악화시킴으로써 시장실패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그 결과 자원배분은 더 비효율적이게 된다." "신뢰와 호혜성 같은 규범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어떤 메커니즘에서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남는다. 부정직한 자들을 전제로 한 법질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해결 방안이 아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는 차선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적절했을 정책적 개입이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그런 정책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268-9)


"인센티브는 사회가 잘 작동하는 데 필수적이다.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도덕에 무관심하다면, 인센티브 하나만 가지고서 경제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만들 수는 없다. 따라서 윤리와 여타 사회적 선호는 필수적이다. 인센티브는 적어도 '해는 끼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디자인되지 않는 한, '더 나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공공정책은 개인들의 선호가 어떤지, 인센티브가 그 선호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명확히 규정된 사적 재산권, 경쟁, 유연성과 이동성 등의 조건은 계약이 완전할 때 시장이 잘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이다. 계약이 완전하지 않을 때에는 이런 조건들을 갖추려는 시도가 상호 이득이 되는 교환을 가능케 하는 사회규범을 손상시킬 수 있다. 반대로 이런 사회규범을 장려하는 경제적·사회적 제도는 시장의 기능을 저해한다. 왜냐하면 그런 제도들은 그 경제와 보이지 않는 손의 이상적 경제 사이의 간극을 넓힐 것이기 때문이다."(282-4)


7장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가 해야 할 일


"사람들은 거래하고,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저축하고, 투자하고, 투표하며 어떤 정책을 옹호할 때 '어떤 것을 얻으려'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의 행동 동기는 획득 동기에 맞춰져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체성 동기에 맞춰져 있기도 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세금을 통한 소득재분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런 프로그램이 중산층에게는 직접적인 혜택을 주지는 않지만 일종의 보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득재분배 정책을 이런 식으로 프레이밍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서 재분배에 반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은 그 행동에 결부된 정체성의 측면을 무시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미국 등 여러 나라들에서 사람들이 소득재분배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윤리적인 이유에서다. 그런 견해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믿음에 기반한다."(294-5)


"이로부터 입법자는 정치적 수사와 정책적 옹호에 관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이기심에 호소하면 사람들이 특정 정책을 지지하게 만드는 데에 사회적 선호를 이용할 수 없다.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최저임금 인상 지지 서명을 받는 자원봉사자들은 임금 인상이 지역경제를 부흥시키리라는 주장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들은 주민들에게 현재 최저임금이 얼마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임을 알게 됐다. 최저임금 수준을 알려주자 사람들은 설마 하는 표정과 함께 분노했고, 그러고 나서 진심 어린 서명이 이어졌다. 두 번째 교훈은 덜 명료하다. 이기심에 호소하면 유권자들은 〈그래서 내가 얻는 게 뭐냐?〉 하는 질문을 던지기 마련이고, 유권자들이 윤리적·사회적 고려를 덜 하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따라서 이기심에 호소하는 방식은 시민들의 사회적 선호를 활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적 선호를 경기장 밖에 세워두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295-6)


"인센티브는 장기적으로 사회적 선호 체계의 진화를 저해할 수 있다. 사회적 선호에 토대를 둔 도덕감정은 좋은 정부의 필수적인 기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는 사회적 선호를 저해하는 인센티브 사용을 뿌리 뽑으려 할 때, 모든 사람이 그 시도를 지지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선호와 인센티브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나, 인센티브가 때로는 경제적 상호 교류에서 발생하는 공동 이익을 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왜 인센티브가 파이를 줄이는데도 현실에서는 인센티브가 사용될까? 파이의 크기라는 은유 자체에 그 해답이 있다. 인센티브를 사용하는 사람과 파이 전체의 크기가 아니라 자기 조각의 크기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인센티브가 돈을 빌려주거나 고용을 하는 등의 경제적 교류와 관계된 전체 잉여의 크기를 줄인다고 하더라도,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사람의 조각은 더 커질 수 있다."(310-2)


"입법자가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사회에는 이기심뿐만 아니라 여러 유형이 사회적 선호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된 선호를 가진 개인들이 혼재한다는 점이다." "입법자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공익에 이바지하도록 유도하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는 정반대 상황에 직면한다." "우리는 이타주의자들이 공공재에 많이 기여하는 동시에 무임승차자들에게 벌을 내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공재에 기여하는 관습을 유지하는 데 처벌이 역할을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타주의자들은 무임승차자를 처벌하는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의 희생에 무임승차한 셈이다." "사람들이 다양한 비율로 이타적이면서 동시에 호혜적일 때, 이들의 이타성이 높아지면 공공재에 대한 평균적인 기여도가 오히려 하락한다. 호혜적인 선호를 가진 사람이 보다 이타적이게 되면 무임승차자를 처벌하려는 의지가 감소하고, 이타성의 이런 간접효과가 공공재 기여를 늘리는 이타성의 직접효과를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314-6)


"좋은 사람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선이라는 개념에 무관심한 사회가 성공적으로 유지되었다는 역사적·민속지학적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회적 선호의 어두운 측면을 염두에 둔다면, 입법자가 직면한 도전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회적 선호를 가지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거나 적어도 해롭지 않은 목표를 위해 활용한다는 것은, 이기심을 가지고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관대함이나 공정성, 그 밖의 시민적 덕성 같은 긍정적 사회적 선호들은 공공정책이나 법안에 의해 강화될 수도 있고 또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책 당국자들에게는 다루기 어려운 자원일 수 있다. 따라서 부정직한 자들에 대한 흄의 격언을 다음과 같이 확장할 필요가 있다. 좋은 정책과 법질서는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이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인 동기를 유발·배양·강화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표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3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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