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전야의 최면술사 - 메스머주의와 프랑스 계몽주의의 종말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알마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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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780년대 프랑스인들은 메스머주의mesmerism가 자연에 대해, 자연의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에 대해,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사회와 정치를 지배하는 힘들에 대해 진지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메스머주의에 너무나 심취했다. 덕분에 오늘날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빚어낼 수 있도록 그들이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준 사고방식 중에서 메스머주의는 중요한 한 항목이 되었다. 이런 유산 속에서 메스머주의의 위치가 결코 인정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세계관의 원천이 된 것들 가운데 불순하고 유사과학적인 것들에 대해 한층 더 까다로웠던 이후 세대들이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메스머가 누린 인상적인 지위를 애써 잊어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 계몽사상의 원칙들이 어떻게 혁명적 선동으로 다시 채용되고 이후 19세기 신조들의 기본 요소로 변형되었는지 보여주는 것도 메스머를 (정당한) 원래 위치로 되돌려놓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20-1)


1 메스머주의와 대중 과학


"1778년 2월 파리에 도착한 프란츠 안톤 메스머는 포착하기 어려운 어떤 유체流體를 발견했으며 그것이 모든 물체에 침투할 뿐 아니라 물체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고 주장했다. 메스머가 실제로 유체를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진공상태에서는 행성들이 서로를 잡아당길 수 없으므로 그 유체가 중력의 매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메스머는 이 원초적인 〈자연의 작인(作因, agent)〉으로 우주 전체를 목욕시키는 한편, 그 유체를 지상으로 끌어내려 파리 시민들에게 열, 빛, 전기, 자기력을 제공하고자 했다. 특히 그 유체를 치료에 적극 활용할 것을 권장했다. 그는 신체가 자석과 비슷하며 질병은 몸속에서 유체의 흐름을 방해하는 〈장애물〉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몸 안의 〈자극磁極〉들을 메스머 유체로 처치하거나 마사지함으로써, 흔히 경련 상태로 나타나는 〈위기〉를 유도하고, 건강 또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회복하는 방식으로 유체의 작용을 통제하거나 강화할 수 있었다."(28-9)


"오늘날에는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메스머주의야말로 1780년대 글을 아는 프랑스인들의 관심에 완벽히 부합했다. 과학은 메스머의 동시대인들에게 그들이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보여주며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 힘들은 볼테르를 통해 알려진 뉴턴의 중력, 피뢰침에 대한 열광과 파리의 최첨단 학회와 박물관들에서 시연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프랭클린의 전기電氣, 1783년 처음으로 사람을 들어 올려 전 유럽을 놀라게 한 샤를의 열기구와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에 사용된 기적의 기체였다. 메스머의 보이지 않는 유체가 특별히 더 기적적으로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가 우주에서 제거하려던 플로지스톤보다, 혹은 그가 플로지스톤을 대체하려 했던 칼로릭보다 메스머의 유체가 더 비현실적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인들은 《백과전서》의 '불'이나 '전기' 항목에서 메스머의 것과 같은 유체에 대한 설명을 읽을 수 있었다."(33-7)


"이론의 포화는 자연스럽게 일반 독자들에게 혼란을 안겼다. 그러나 실망을 안기지는 않았다. 이 보이지 않는 힘들이 때로 기적을 행했기 때문이다. 1783년 10월 15일, 그런 기체 가운데 하나가 필라트르 드 로지에를 메츠의 공중으로 실어 날랐다. 사람의 첫 비행에 관한 그 소식은 과학에 대한 열광의 물결 속에서 프랑스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여성들은 〈열기구 모자〉를 썼고 아이들은 〈열기구 과자〉를 먹었다. 시인들은 열기구 비행에 관한 무수한 송시들을 지었다." "과학자들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었다. 자연을 제어하는 과학자들의 능력은 프랑스인들에게 경외감을, 거의 종교적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곧 그 시대의 독자층은 과학의 힘에 도취되었고 과학자들이 우주에 이식한 실제의 힘과 가상의 힘에 놀랐다. 대중은 실재와 상상을 구별할 수 없었기에 자연의 경이를 설명한다고 약속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유체든, 과학적인 것처럼 들리는 어떤 가설이든 거기에 집착했다."(48-53)


2 메스머주의 운동


"메스머주의가 그 지지자들의 내적인 삶을 어떻게 지배했는지는 세르방의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르방은 법철학자이자 루소주의자이며 볼테르, 달랑베르, 엘베시우스, 뷔퐁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세르방은 맹목적으로 신비주의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관찰 가능한 사실에 집착했고 로크와 콩디악이 형이상학자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의 근거를 강력히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과학적 진보에 대한 그의 열광은 경험의 경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메스머주의의 폭넓은 유행과 그 주창자들이 보여준 설득력 때문에 사람들은 메스머주의의 과학적이고 종교적인 원칙들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콩도르세는 계몽사상의 수많은 태도들을 대표하던 인물로서 메스머주의를 거부했지만, 자신의 거부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그 이유를 글로 쓰기도 했다. 이렇듯 메스머주의는 지나가는 유행 이상의 어떤 것을 표상했다."(99-101)


"메스머주의는 동시대인들의 태도의 핵심을 파고들어 과학과 종교가 만나는 모호하고 사변적인 영역에서 권위가 필요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1784년 봄, 《주르날 드 브뤼셀》이 〈조만간 메스머주의가 유일한 의학이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자, 정부는 그것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음을─특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메스머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이비 과학 담론 속에 급진 정치사상을 섞어 넣고 있다는 파리 경찰의 비밀 보고서가 제출되었기 때문에─걱정하기 시작했다. 《비밀 회고록》은 1784년 4월 24일자에서 메스머주의를 조사하기 위한─메스머와 그의 추종자들이 믿었던 대로 프랑스의 가장 특권적이고 편견에 찬 과학자들이 메스머주의에 일격을 가하고 이를 분쇄하기 위한─왕립위원회의 임명을 보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메다르의 묘지도 메스머주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했으며 그보다 더 이상한 것들을 만들지도 않았다. 메스머주의는 마침내 정부의 시선을 끌었다.〉"(101-3)


"생마르탱은 마르티네 드 파스칼리로부터 영들에 관해 배웠다. 마르티네는 마르티니즘 창설자로 카발라 사상과 탈무드 전통, 그리고 가톨릭의 신비주의를 혼합해 설교했다. 물질세계는 원시인들이 한때 지배했었고 근대인들이 〈재통합〉할 필요가 있는 좀더 실재적인 영의 세계에 복속되었다. 윌레르모의 비밀 메시지들은 재통합을 이끌 원시종교를 드러내겠다고 약속했다. 퓌세귀르의 몽유증은 영의 세계와 직접 접촉할 기회를 제공했다. 바르브랭의 메스머 치료법은 어떤 물질적인 종류의 유체도 제거함으로써 구식 〈유체론자〉들의 기반을 와해시켰다. 이리하여 생마르탱은 후대의 여러 메스머주의자들을 신비주의 마르티니즘을 통합해 엮어냈고, 그 결고 몽유를 향한 열렬한 지지의 물결이 계속되었으며 앙시앵 레짐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메스머주의의 사유에 전형적인 것이 되었다. 메스머의 사상은 메스머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관계없다고 믿었던 초자연적 영역으로 거침없이 번져나갔다."(110-1)


3 메스머주의의 급진적 경향


"메스머주의자들이 발행한 팸플릿에서 메스머는 줄곧 인류의 고통을 종식시킬 발견을 품에 안고 파리에 도착한, 헌신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과학아카데미, 왕립의학회, 의사회, 마지막으로 기성 학계의 축소판인 왕립위원회가 차례로 그를 타박하고 모욕하고 박해했다. 공개 진료를 통해 자신의 치료법을 입증해 보이고 전통적인 의사들과 경쟁하겠다는 메스머의 제안은 박해자들의 간계에 휘말렸다. 그의 체계는 전문가 집단을 위협했고 그들은 인간의 고통이라는 대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위협을 무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존의 다른 이익집단들과 결탁했다. 그리하여 메스머는 학계의 관료주의에 등을 돌렸고 비전문가들에게 호소했다." "일부 메스머주의 관련 저술들이 짙은 정치색을 띠게 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부의 후원을 받는 특권적인 기구들이 다수의 민중을 개량하기 위한 운동을 억압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28)


"메스머주의자들과 고등법원은 최적의 관계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참사관들이 메스머주의에 동조적이었는지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라 아르프는 고등법원 절반이 메스머주의를 지지했다고 말했고 이는 상당히 믿을 만한 추정이었을 것이다. 라 아르프 자신이 메스머주의의 여러 집회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법원이 혁명 기구는 아니었으며, 고등법원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서 메스머주의가 급진적 명분으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메스머주의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반정부세력은 고등법원에서 나왔다. 그리고 1785년에 이르러 많은 메스머주의자들에게 정부는 악의 화신으로 각인되었다. 그들이 당대 가장 인도적인 운동이라 믿었던 것을 정부가 박해했기 때문이다. 3년 뒤 고등법원이 칼론과 브리엔 내각의 프로그램에 반대하며 전국신분회 소집을 요구했을 때 코른만 집단은 이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며 정부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고등법원이 베푼 은혜에 보답했다."(132-3)


"베르가스는 처음 메스머주의 팸플릿 《동물 자기에 관한 또다른 공상》에 쓴 주석에서 반反귀족적 관념들을 발전시켰다. 그는 귀족과 연결된 모든 것─그 문장紋章, 허세, 조상을 이유로 내세우는 특권의 주장, 기사도의 미신─에 대한 비난을 쌓아갔다." "베르가스는 모든 고위직을 제3신분에게 개방할 것을 요구했고 〈같은 목적에 두 목소리를 내는〉 두 특권 계급 사이의 충돌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는 민중에게 〈모든 시민을 고귀하게 만들고 모든 귀족을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왕과 결속할 것을 주장했고, 1789년의 팸플릿에서 끝없이 되풀이되었던 큰 질문을 제기했다. 〈어떻게 오래된 귀족에게서 그 영향력을 박탈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가? 그들의 케케묵은 권력보다 더 수지맞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신에게는 오직 법과 백성과 왕만 있을 것이다.〉 이런 호소는 1789년 제3신분의 요구에 관한 시에예스 신부의 고전적 설명 못지않게 극단적인 것이었다."(150-1)


4 급진적 정치 이론으로서의 메스머주의


"카라와 베르가스는 메스머주의의 우주론적인 측면을 다루면서,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지만 모호하고 거만한 메스머의 말에서 정치 이론을 끌어냈다." "혁명 기간 동안 카라는 자신의 글 《새로운 물리학 법칙》에서 자신의 공화주의적 정치관을 하나의 예언으로까지 밀고 나갔다. 곧 〈인류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일들을 지배하는 우주의 가장 위대한 물리적 체계가 그 자체로 하나의 진정한 공화국이기 때문에〉 프랑스는 공화국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나아갔다. 1787년에 이르러서 그는 주저 없이 미덕과 악덕을 〈우주의 메커니즘〉과 연결시켰다. 그리고 그는 정치와 의학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물리적 질환과 사회적 병리가 모두 냉수마찰, 머리 감기, 식이요법, 철학서들로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대의 예언자와 마법사들이 원시적 메스머주의를 실천했으며 델피 신탁의 예언과 리쿠르고스의 입법을 지지한 것은 정치적 메스머주의의 한 형식이었다고 주장했다."(157-9)


"카라와 마찬가지로 베르가스는 특히 왕립위원회 보고서 이후 수많은 메스머주의 저술들에서 하나의 중심 주제였던 호혜적인 도덕적·물리적 인과관계에 관한 동시대의 대중적 이론 위에 메스머주의 체계를 확립했다." "베르가스는 자연이 도덕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를 모두 지배한다는 데 동의했다. 메스머 유체─자연의 보존 작용─가 물리적이며 도덕적인 동인으로서 작용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물리적인 동시에 규범적인 질서로서 자연법칙에 관한 동시대의 개념들에 의지해 이런 관념을 발전시켰다. 그의 문서에 남은 두 강연 기록에서 그는 자연이 〈하나의 꾸준하고 지속적인 조화〉를, 즉 무생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유체의 자연적 상태를 유지할 목적으로 그 법칙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부조화, 혹은 질병에는 물리적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원인도 있었다. 양심은 〈우주의 모든 지점으로 향하는 수많은 가느다란 가닥들로 연결된〉 하나의 물리적 유기체였다."(163-6)


"루소의 글들을 읽고 그에게 찬사를 보냈던 베르가스는 심지어 자신을 메스머주의의 루소로 여겼다. 《신 엘로이즈》나 《고백록》을 읽고 난 후 장자크와 자신들을 동일시했던 다른 프랑스인들과 달리, 베르가스는 루소의 여러 관념들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했고 그렇게 해서 스승(루소)의 도덕적 열의는 유지하는 한편 사회의 계약적 기원 같은 그의 미숙한 원리들 가운데 일부는 폐기했다. 베르가스는 인류가 타고난 사회적 피조물이며 진정으로 자연적이며 원시적인 사회는 인간과 함께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최초의 우주와 마찬가지로 원시 사회는 완전한 조화가 지배하는 신의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프랑스가 되돌아가야 할 하나의 규범적 질서였다. 〈사회라는 말은 현재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 그것은 존재해야 할 사회, 곧 자연적인 사회, 우리 자신의 자연이 질서정연할 때 만들어야 하는 관계에서 비롯된 사회다. ··· 사회를 인도하는 규칙은 조화다.〉"(170-1)


5 메스머에서 위고까지


"19세기에 1780년대식 순수한 메스머주의자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혁명 이후 메스머주의자들은 전반적으로 영성주의의 특성을 보이는 그들 나름의 관념들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자연의 물리 법칙과 도덕 법칙의 상호작용을 강조했고 전형적으로 윤리와 정치의 〈뉴턴적〉 이론을 옹호했다. 그들은 빛, 전기, 다른 요인들에 관한 유사과학적 분석을 내놓았다. 또 원시 언어의 편린들에 의해 알려진 원시의 자연사회를 믿었고 그에 상응하는 범신론, 신정정치, 배성교拜星敎, 점성술, 천년왕국설, 윤회설의 요소들 그리고 신령들의 위계질서가 인간과 신을 연결짓는다는 믿음의 요소들을 담고 있는 원시 신앙에 대한 믿음을 견지했다. 메스머주의자들은 이런 관념들─많은 영성주의자들의 상투 수단─에 그들 특유의 의학 이론, 유체, 몸이 수면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 내면의 인간이 공간과 시간을 자유롭게 떠돌며 내부의 감각들이 영의 세계와 접촉하는 것이라고 흔히 설명되는 몽유의 실행을 덧붙였다."(183-5)


"메스머주의는 정치 이론가들─신비주의 보수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까지─에게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었다. 혁명 이후 리옹의 주도적 신비주의자였던 피에르 발랑슈는 메스머주의를 포함해 일루미니즘 교리들을 대부분 다루었다. 그리고 파브르와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보수적이고 신정적인 사상들과 같은 선상에 섰다. 그는 또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반대자인 신비주의자 샤를 푸리에를 놀라게 했다. 발랑슈의 《뷜탱 드 리옹》에서 푸리에는 자신의 철학을 이끄는 원칙인 우주적 조화를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베르가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물리 법칙과 도덕 법칙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체계를 확립한 푸리에에게 우주적 조화는 임박한 종말에 뒤따를 미래의 유토피아 국가를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모든 정치·도덕·경제 이론들을 불 속으로 집어던지고 가장 놀라운 사건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우주적 조화로 갑작스럽게 이행하기 위해서.〉"(202-3)


"발자크의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하고 추모사를 낭독했던 빅토르 위고는 초자연적인 것을 향해 가는 발자크의 마지막 여행에서 더할 수 없이 적합한 수행원, 혹은 더할 수 없는 메스머주의자 호위병이었다." "메스머주의의 가장 강한 물결이 윤회하는 영혼, 보이지 않는 영혼의 위계, 원시 종교, 그리고 영성주의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위고의 시들을 관통해 흘렀다. 《레미제라블》에 부친 위고의 〈철학적 서문〉에서 메스머주의는 《인간 희극》에 부친 발자크의 서문에서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했다." "메스머주의는 태양과 달과 별들이 유체의 바다에서 조용히 회전하고 있는 〈우주적 조화〉에 대한 전망으로 위고를 안내했다. 위고는 그것을 〈생명의 유체〉라고 칭했다." "18세기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딸을 잃은) 위고의 고통을 담아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위고는 종교로 향했지만 계몽사상과 함께 죽은 정통 그리스도교로 향하지는 않았다. 그는 과학, 혹은 〈고등과학〉의 도움으로 천상을 추구했다."(219-21)


6 결론


"상류사회를 겨냥했던 메스머주의의 특성은 1780년대 동안 상류층들 사이의 삶의 풍조, 18세기 프랑스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풍속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메스머주의의 급진적인 성격이 바뤼엘 신부가 상상했던 것과 같은 혁명 분파들의 비밀연계망에 의해 앙시앵 레짐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글을 아는 상류층 사이에 믿음이 결여된 탓에 체제의 기반이 얼마나 침식되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작용한다. 라파예트, 브리소, 베르가스, 카라는 체제에 맞선 그들의 공격을 조정할 다른 기회를 찾았을 것이다. 그들이 체제의 악을 확신하는 데 반드시 메스머주의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메스머의 입에서 나오는 뜻 모를 게르만어에서 혁명적 메시지를 읽어냈을 때, 프랑스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기 위한 토론의 장으로서 메스머의 통을 선택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질서에 대해 느끼는 불만의 깊이를 깨달았을 것이다."(229)


"급진주의자들에게 메스머주의는 그들의 발전을 가로막았거나 가로막는 것으로 보였던 기성 학계에 맞설 무기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급진주의자들에게 〈과학적〉 정치 이론을 제공했다. 브리소 같은 젊은 혁명가에게 메스머주의는 혁명에 앞서 10년 동안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최첨단 과학의 유행이라는 쟁점에 관여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내면의 감정들, 프랑스의 과학과 문학계의 정상에 오르겠다는 야심과 정상에 있는 이들에 대한 증오를 일깨웠다. 정상은 본래 협소한 것이지만, 브리소, 카라, 마라는 기성 학계의 협소함을 정치적 견지에서 해석했다. 그들에게 학자들은 낮은 신분의 출중한 천재들을 탄압하는 철학의 〈독재자〉와 〈귀족〉으로 여겨졌다. 혁명이 발생하자 탄압에 대한 그들의 증오심은 철학에서 정치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런 증오심은 불의 성질이나 열기구의 방향을 통제하는 최선의 방식에 관한 쇠락한 담론들 속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의 불꽃이었다."(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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