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서진 - 청(淸)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사 역사도서관 9
피터 C. 퍼듀 지음, 공원국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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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패러다임으로 보면 중앙유라시아는 "근대 세계의 주요한 추세들과 격절된, 유달리 고립된 지역"이지만, 고전적인 관점 하에서는 "유라시아의 '교차로'로서 오랜 무역, 정복 그리고 종교적, 문화적인 교류를 통해 주위를 둘러싼 모든 정주 세계와 연결된 지역"이었다.(75) 칭기스칸의 몽골 제국을 유목 문명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이후를 쇠퇴기로 보는 관점은 "이미 약해진 시기부터 그 기원으로 역사를 거꾸로 읽음"(30)으로써, "초원의 지배자들이 감행한 혁신"과 우발성을 봉쇄하고, 무대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행위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환경결정론적 명제이다."(34) '중국의 서진'은 이러한 관점을 역사에 성립시킨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말은 기병을 대체할 만한 수단이 나오기 전까지 최고의 전술무기였으며, "유목 경제의 기둥이자, 전쟁의 핵심 요소였다." 정주 문명들은 초지草地가 부족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수요를 충당할 만큼 말을 길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은 초원과 정주 민족들을 연결하는 고정 핀이었다." 농목 문명은 반복해서 마차馬茶 시장을 열었지만, "야만인 약탈자들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굴욕"이라고 역설하는 비판론자들의 공격은 물론, "말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하고, 변경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협정을 강제하는 지도자"(63)의 등장이 강대한 세력 결집을 불러한다는 현실적 난관에 부딪혀, 교역은 수시로 이어지고 끊겼다.  


중국 왕조들은 "평화적인 교역 관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동/서 몽골의 정치 역학 관계를 이용하여 "어떤 통치자가 강해질 때마다 다른 편을 지원해, 몽골이 통합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목"하도록 만드는 "계획적인 분할 통치 정책"(89)을 구사했다. 그러나 "장기적 안목을 지닌 초원의 지도자들은 교역 특권을 이용해 자국의 재원을 조성"하여 대륙을 위협하거나 점령하곤 했는데, "이것은 만주족 국가를 건설한 누르하치가 초기에 추구하던 전략"(104)이기도 하다. 


몽골과의 타협이나 교역을 거부하고 초원을 완전히 점령해야 한다는 강경론자들의 발언은 국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변방에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을 수반하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명이 변경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내륙으로부터 효율적으로 재원을 모으고 이를 변경으로 수송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략물자를 화폐로 구매할 만큼 상업화가 충분하지 않았고, 한족 통치자 및 관료 세계가 초원과 격리되어 있었으며, 발달된 행정 기구가 부족"하다는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 그렇지만 "개중법과 상둔商屯을 통해 상인들의 이윤 동기를 전략적 방위에 동원"하려 했던 시도는 "후계자들에게 귀중한 경험의 보고가 되었다."(111-2)


"청은 18세기 유라시아의 팽창하는 '식민 제국' 가운데 하나였다."(417) "중앙아시아적 요소를 포함한 신층 청나라"는 몽골 원정을 감행한 강희제의 역동적인 개입을 통해 "전무후무한 팽창 프로젝트의 주체"(181)로 거듭났다. 청의 통치 엘리트들은 "안보와 자급"을 목표로 서진을 감행했으며, 이 지역을 "대규모 영구 군사 주둔지를 부양하고, 스스로 꾸려 나갈 수 있는 곳"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여기에 "이미 확립된 사회구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행정 관료들이 새로운 통치 방법을 실험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 변경의 큰 매력이었다. 신장 점령은 "새로 열린 땅에 식민주의자들의 꿈"을 심는다는 "전 세계 제국 건설자들의 기획과 평행한 것이었다."(419-20)


변경 점령의 첫 걸음인 둔전 개발은 "순전히 군사적인 원조 아래서 진행되었지만, 민간인들이 곧 뒤를 이었다." 청의 관리들은 "농민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면 경작에 더 큰 동기가 부여되리라 믿고, 민영화, 사유화 추세를 장려"(426)했지만, 군사적 통제의 약화는 제국 통치를 침식하는 원인이 되었다. 변경의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인구들은 하나의 행정 체계로 포용할 수 없었고, 개발은 오직 힘으로만 버틸 수 있는 긴장들을 야기했다." 자립 기반이 허약한 이 지역은 "19세기 동안 (변경을 지탱하던) 자원들이 내지內地로 돌려지면서 와해되기 시작한다."(444-5)


현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한대에서 당의 주둔 도시를 거쳐 지금까지 오아시스에서 중국이 연속적으로 존재했다"(418)고 서술하면서 정복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역사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점과는 다르지만, 청의 통치 엘리트들도 자신들의 정복 사업을 정당화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청의 관료들과 황제는 하늘의 뜻이 (준가르의 지도자) 갈단을 패배시켰고, 황제가 적의 죽음을 예견했으며, 갈단은 절망 속에서 자결했다는 신화를 구성해냈다."(586) 옹정제는 정복사업을 "더욱 넓은 지역으로 계속 확장되는 도덕의식"에 비유하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이 '좁고 지역적이고 이기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질책했다."(599)


청의 서진은 '중국'이라는 영토의 크기와 '한족'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18세기 중국은 민족주의의 시대가 아니었지만, 그 속에서 19세기 말 중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정의定義들이 작동하는 틀을 다져놓았다."(656) 중국 역사가들은 결코 "'정복'(쟁취爭取)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통일'이라는 말"(645)을 사용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민족들에 대한 통치를 확립하여 비한족 민족들을 종속적인 타자로서 병합하려는 제국의 기획이 포함되어 있다."(656) 유목민들을 역사에 무대에서 영구히 추방한 제국의 기획이 민족국가와 연속성을 갖는 것이다.


"국경이 확정되고 팽창이 멈추었을 때, 제국은 내부의 도전에 직면했고 영광의 시절은 끝났다."(697) 중국의 통치자들은 "러시아와 국경선을 확정하고, 준가르 몽골 국가를 멸망"시킨, 1760년을 국가 계획의 완성기로 보았다. "영세 농민들에게 출구를 마련하여 경작지에 대한 중심부의 압력"(715)을 감소해주던 "변경에서의 군사적인 도전이 종료됨으로써 점차 관료 체계에서 역동성이 빠져나갔다."(699) 그럼으로써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과 평행선을 달리던 중국은 "계속적으로 전쟁에 투자한" 유럽에 뒤쳐지게 되었고, 이들이 남쪽 해안에 등장하자 대륙의 약점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네 가지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들이 청을 19세기 서구의 침투에 노출시켰다. 즉, 몽골을 격퇴한 직후 남부 해안에서 새로운 도전들이 등장한 것, 초원 유목민들에게 성공적으로 적용되던 정책들이 남쪽의 해양 환경에서 실패한 것, 중앙의 이해와 지방 세력가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던 협상을 통한 타협이 탈중앙집권화로 옮아가기 시작한 것 그리고 16세기부터 진행되던 상업화가 중앙에 대한 충성심을 침식한 것이 그것이다."(719-20) 대륙이 초원으로, 정복이 침탈로, 제국이 식민지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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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혼돈 - 중국 명대의 상업과 문화
티모시 브룩 지음, 이정.강인황 옮김 / 이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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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세운 "홍무제의 목표는 (자급자족형 농경 국가를 건설하여)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농경지에 묶인 백성들은 최대 20리(12km) 내에서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법으로 정한 최대 범위인 100리(58km)를 통행증 없이 벗어날 경우에는 "장형杖刑 80대에 처해졌다. 만일 신고하지 않고 국외로 나갔다 돌아오면 사형을 당했다." 사회적 신분 이동도 엄격하게 제한받았다.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공장工匠의 아들은 공장이 되어야 했고, 군인의 아들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직업을 바꾼 자에 대한 벌은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자에 대한 벌만큼이나 가혹했다."(40)


"홍무제는 상업이 도시지역에 국한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상거래를 금지하거나," 농촌지역에 상업을 위한 장소를 지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100) 그러나 농촌이야말로 가장 실질적인 재화를 생산하는 전진 기지였으며, 생산물의 증대는 소작인과 지주간의 '개인적 유대감'을 "단순한 경제적 계약관계로 변화시켰다."(119) "요역徭役에서 지세地稅로의 전환은 사적 유대가 사라지는 추세를 한층 강화했고, 소작인들은 계약에 명시된 의무 이외의 요구사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120) 


"농작물의 생산이 늘어나자 잉여농작물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고, 잉여농작물이 정기적으로 유통되면서 전적으로 상업을 목적으로 한 작물의 재배가 생겨났다." 여기에 국가가 교통통신 수단에 많은 투자를 한 결과 "일상용품의 유통까지 용이하게 만들 정도로 인프라가 개선되었다."(31) 국가의 정보와 물자를 감당하는 수송 부담이 가중되자, "정부의 배를 부리는 뱃사람들은 제한된 분량의 개인 물자를 함께 싣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들은 직접 팔 물건이나 위탁 받은 화물을 실어, 그것을 거래한 이익으로 비용을 조달했다."(74) 결국 명의 상업화는 "자급자족 경제에서 방향을 돌린 것이라기보다는 (역설적으로) 그 결과"(32)인 셈이다.


"경제 관련 텍스트는 명조 서민문화의 일부였다."(87) 명초에는 과거제를 통한 출세길에 오르지 못한 "수만 명의 글을 아는 사람들(신사층)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어 경제생활의 문서화를 돕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90) 홍무제는 "종교개혁기 유럽의 국가들이 신기술에 직면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특정한 책을 금서"로 지정하는 방식 대신, 책에 부과하는 세금을 면제해주고, 백성들에게 주입하기 알맞은 사상을 널리 배포하는 수단으로 인쇄술을 이용했다. "홍무제의 권고와 수상이 담긴 책은 필독서였다."(94)


이는 상업의 발달이 '개명改名된 이기심'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생성하고, 이 관념이 다시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순환구조를 잘 보여준다. 유학자들 중에서도 추쥔과 같은 이들은 "이런 상황에 고무되어 경제의 운용방식이나 상업활동과 관련한 국가의 역할이 적절히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상품을 재분배하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이루는 데는 국가보다 상인이 더 낫다"(140-1)는 점을 역설하면서, 국가의 수공업 공장 운영이나 소금 같은 필수품 전매, 해금 정책 등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조편법 시행과 유럽 상인들의 진출에 힘입어 은銀이 결제수단으로 대중화되면서 상업의 발달이 더욱 촉진된다. 1520년대부터 관료들은 해외무역을 더 강력하게 규제했지만, "대외무역 금지는 비생산적이었고 무역과 관련된 폭력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무역과 해금 사이의 긴장은 "기근으로 고통을 겪었던 1540~1550년대에 '왜구'(倭寇)를 비롯해서 이들과 결탁한 중국인 선원 및 해외상선들이 무역이 허락되지 않는 곳을 습격하면서 절정에 달했다."(167)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유교적 신분 질서도 흔들렸다. "일부 상인은 신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고 일부 신사는 그들을 받아들이며 고전을 연구하여 상업을 합리화할 수 있는 이론을 찾았다." 상업이 촉진한 다양한 물건들은 "신사층의 문화적 소일거리로 흡수되었고, 신사층은 예술품을 놓고 품평과 감상을 하는 동시에 이 같은 상품의 생산을 자극했다."(181-2) 그렇다고 이들이 아래로부터 유입을 마냥 반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사층은 국가 관료의 공식 권력과 발흥하는 상인층 사이에서 자신들의 비공식적인 권력이 사그라들자, "시대의 부패를 한탄하고 스스로를 문명의 마지막 대희망"(188)으로 그려냈다.


유럽과의 무역 대금으로 받은 방대한 양의 은은 물론이요, 동전의 액면가를 넘어서는 동銅 같은 귀금속을 "그냥 두기에는 경제가 너무나 활력에 넘쳐"(211) 흘렀다. 이 상황에 걸맞는 새로운 규칙이 요구되었지만, 청빈과 자선에서 근면과 이윤으로 방점을 이동한 기독교와 달리 "유교는 눈앞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준비된 이론도 제공하지 않았다."(204) 명대 후기에, 변화의 조류에 올라타는 "가장 인기 있는 방법은 가족의 자산을 부계 [남성] 친족과 함께 모아서 종족宗族의 공동자산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자본을 집약시켜 상업망에 참가한다는 의의뿐만 아니라 종족 내에서 "존경과 의무의 위계를 세워 연장자의 지위를 강화시켜주는 장으로 기능했다."(212)


명말의 상인들은 선대제先貸制를 통해 농촌 노동자들에게 "원료의 형태로 자본을 이전시키고, 그들이 생산한 상품을 통제"했던 유럽 산업자본가들과 달리,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된 직물을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판매하는" 이득에 골몰하였다. 다나카 마사토시에 따르면, 생산자를 고리대로 옭아매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할 수 없게 하는 명의 '원료-생산물 교환제'는 "생산관계를 변화시키기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로 가는) 발전의 자극 요인"(260-1)이 되지 못했다. 명대의 활력이 근세 유럽의 상업발전과 다른 길을 간 이유는 자급자족형 인프라 경제 안에서 생산, 소비되는 상품의 일부가 시장 경제를 통해 유통되긴 했지만, "시장 경제가 인프라 경제를 인수하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용해시킬 정도로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262)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정체성의 진화"를 거듭한 신사층은 "교육받은 엘리트와 돈 많은 엘리트라는 두 줄"로 사회를 단단하게 구속했다. 신사층은 겉으로는 향락과 퇴폐를 경고하면서도 상인과의 거리를 "축소하기는커녕 강화하는 방식"(330)으로 문제를 해소해 나갔다. "상업망이 없었다면 많은 신사층은 왕조교체기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청대의 신사층과 상인의 융합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제자리를 고수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가부장주의와 위계, 지배계급의 정의라는 보수적 가치"(341)를 붙들고 중국의 사회구조를 지탱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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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세사
미야쟈키 이치사다 / 신서원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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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시대에 이르면 본래 천자와 신하들 사이에만 존재하던 군신관계가, 효렴孝廉이라는 관료 추천을 통해 관계에 입문한 유학생과 지방관 사이에도 성립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성립된 군신 관계는 "가정도덕인 효행보다도 중요하다고 간주"되었는데, 이것은 "개인이 입신출세하는 것이 일족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설령 불행하게 자신 또는 그 일가가 멸망하는 비운을 당해도, 그의 충성이 조정에 인정되면 나머지 일족이 영예를 받고 특전을 향유했기 때문이다."(24-5) 이는 통일왕조가 무너지면서 보편 원리의 사적 전용轉用이 시대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징후였다.


도의가 무너진 자리를 이윤 추구가 파고들었다. 난세에 이르러 부자들이 동전을 수중에 넣고 시장에 내놓지 않자, "전납錢納으로 부賦를 부담"해야 했던 농민들은 본적지에서 도망하여,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객客으로 떠돌았다. 이들은 "큰 도시로 들어가 날품팔이 인부가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장원에 들어가 예농隷農"(34) 신세로 전락했다. 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을 이룬 위魏는 구품관인법을 도입하여 재능있는 인물을 등용하고자 했지만, 태평성대를 마음껏 누리려는 귀족층은 이를 문벌 자제들의 출세 수단으로 악용했다.


통일을 이룬 조씨 일가의 위 왕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진晋왕에 봉해진 사마씨 일가는 조씨 일가가 예정된 각본대로 한 왕조를 선양禪讓받은 것을 모방하여 무력으로 왕조교체를 이루었다. 진무제는 위왕조가 일족을 권력의 중심부에서 배척하여 자신들에게 왕조를 탈취당한 것을 거울삼아, "그 반대되는 정책을 취해 대대적으로 봉건을 행해서 일족의 자제에게 영토를 분배했다." 그러나, 사병을 거느린 봉건 제후들은 왕조의 기대와 달리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무력에 호소"했으며, 곧 팔왕의 난이라는 일족간의 살인극을 벌인다.(97-8)


팔왕은 장래의 일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당시 진의 영토 안에서 머무르던 이민족들은 "문명화한 숙번(熟蕃, 정부당국에 잘 순응하는 야만인)"이었고, 중국적 교양을 어느정도 체득한 집단이었다. 이들이 자립하자, "부패한 중국정권보다 소박한 이민족 정권"(104)을 선호한 서민은 물론 지식계층이 자진하여 그들의 휘하로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엇이든지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125) 


"이른바 오호五胡시대에는 화북 중원지방에 이민족이 집단적으로 이동하여 우왕좌왕하는 한편, 동시에 새로운 민족이 만리장성 저편으로부터 중국으로 적지 않게 흘러들어 왔다."(207) 격렬한 이민족간의 투쟁을 진압하고 동화 정책을 편 북위의 효문제는 왕조의 안정을 위해 도도한 기세로 한화韓化정책을 추진하였다. 통합을 모색한 한화정책이 의도와 달리 "중국사회의 산물이던 귀족제도를 되살려 관리 선임에 가문의 등급을 중시"(224)하는 풍토를 되살리자, 왕조 방위에 중심축을 담당하는 선비족 군인집단이 소외되어갔다.


"차가운 북풍을 맞으며, 언제 발생할 지 모르는 북방기병의 습격에 대비"하는 무천진의 장군과 사병들은 각별한 동료애를 품은 결속력 강한 집단이었다.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뒤, 북변의 육진은 관계가 끊어져 방치되고 그 지위가 점점 저하"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군벌 투쟁을 종식시키고 대륙을 석권한 것은 수 문제隋 文帝였다. "그는 종래의 구품관인법이 귀족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제도로 타락했다는 점을 간파하고, "중앙 정부에서 시험을 행하고, 급제자에게 고위관직에 오를 자격을 내리는" 과거제를 시행하여 왕조의 안정을 기했다.(258)


수 왕조는 남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진 나라를 손쉽게 멸망시키고, 대륙 통일을 이루었지만, 무리한 토목 공사와 고구려 원정 실패로 막대한 고통에 시달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수 왕조를 대체한 당唐은 한제국의 재건으로 간주되었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한대에는 "귀족과 서민을 하늘로부터 부여된 본질적 차이가 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유품'流品 사상이 아직 발달하지 않아, "서민에서 개인의 실력으로 조정 대신으로까지 출세하여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당대에 재차 성행한 귀족주의는 서민이 관료로 출세하는 길을 원천봉쇄했다.(286)


"보통의 왕조라면, 안사의 난과 같은 대란을 겪고 난 뒤 곧 멸망해 버리고" 대륙은 다시금 혼돈으로 빠져드는 것이 수순이다. 그런데 당왕조는 거듭된 내란으로 "반신불수와 같은 상태에 빠져들었으면서도 150여 년 정도를 여전히 존속했다." 그것은 당 왕조가 재정국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종래의 왕조가 거의 예외없이 무력으로 지탱되었던 무력국가인 것에 반하여, 재정국가는 소금 전매 같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우선 재원을 확보하고 재정을 충족시켜"(313)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국제 교역에 힘입은 근세적인 상공업 도시의 발달도 한몫을 담당했다.


재정 정책은 왕조의 생명을 이어가는 극단적인 처방으로서, 당왕조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큰 희생을 초래했다. "일상 생활에 필요불가결한 소금에 몇 십배의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억지정책이었다."(328) 국가 전매제가 영속화되자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밀수를 감행하는 집단이 대거 생겨났고, 이들은 곧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비밀결사로 이어졌다. 마침내 주전충이 환관과 관료들을 대량 살육한 후에, 천자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후량後梁을 세운다. "이때부터 중국은 (또다시) 단명왕조가 잇따라 일어나는 오대五代의 분열시대로 접어든다."(336)


저자는 후한 말부터 송 왕조 이전까지를 중국 중세로 정의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운명과 이유 없는 재앙"(348)이 끝없이 이어지는 '대분열'과 '혼돈'이다. "힘이 만사를 결정하고, 권력관계만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잣대였기 때문에, "강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포악하고, 일단 권력을 잃으면 이제까지의 응보를 일시에 받는" 비극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이 때마다 몇 십배 몇 천배의 사람이 죄없이 희생자가 되는 구조가 짜여져 있었다."(349) 송 왕조가 문치文治를 내세운 것이 우연이 아닌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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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
세오 다쓰히코 지음, 최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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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8~9세기는 하나의 종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통일 왕조가 유라시아 대륙의 세 거점을 장악한 시기이다. 크리스트교의 프랑크왕국과 동로마제국, 이슬람교의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 불교의 토번과 당 왕조는 "육로와 해로를 잇는 교통과 정보망의 개혁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일종의 세계 경제 체제를 형성"하였다.(60-1) 당 왕조는 유목 민족을 두려운 적수이자 격퇴해야 할 야만으로 규정하고 장성을 쌓아 분리하는 데 주력한 진한秦漢 왕조의 두려움을 반복하지 않고, 농목접경선에 사슬처럼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농목 접경 지대는 옛부터 농업과 유목이라는 다른 생업이 연결되는 통로 공간이자, "각 지대에서 생산된 산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여 정보와 부가 집적되는 장소"였다.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축적된 정보와 부를 보증하고 조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접경선을 따라 "많은 도시와 정치권력이 발생"했다.(40) 수 왕조의 수도로 출발한 장안은 대륙의 서북 지역에 위치한 농목접경지대에서 세계 경제 체제의 거점으로 기능했으며, "농목 복합에 기반을 둔 중국 고전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43) 


중국 역사에서 "내중국(중국 본토)과 외중국(만주, 내/외몽골, 신강, 티벳)을 모두 포괄하는 왕조는 몽골족의 원과 만주족이 세운 청"이 있으며, "몽골, 신강 전역과 만주 남반부를 통치권에 넣은 당"(74)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서 장안과 북경이 가장 오랜 기간 왕도王都로 지속한 근본적인 이유는 두 도시가 농목접경선에 있어 왕도의 기능을 하는 데 꼭 필요한, 내중국의 농경 지역에 대한 통치 기능과 외중국의 유목 지역에 대한 외교적 정치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85) 


처음부터 이상理想 도시로 설계된 장안은 "'도시는 대지를 상징하는 네모꼴을 취함으로써 대지를 덮고 있는 둥근 하늘의 중심과 우주축을 통해 연결된다'는 중국의 전통적 도시계획에 기반"(67)하여 네모 형태를 취하였다. 여기에는 "왕도를 하늘이나 신이 정통성을 부여한 도시로 연출함으로써 왕도의 위상을 명확히 나타냄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군사력 집중도가 낮은 상황을 상징의 힘으로 극복"(107)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왕도가 군사력에 바탕을 둔 무력 지배의 한계를 보완하고, 국가 통합에 이바지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현체로 기능한 것이다.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 전통 사상에는 "지상에 있는 우주의 거울로 왕도를 건설한다는 천문사상, 왕조 의례의 무대로 왕도를 짓는다는 예사상禮思想, 중국 고래로 <주례>가 제시한 이상 도시의 모델, 그리고 음양오행 사상, 왕자王者에게 적합한 토지인지를 감정하는 역경易經 사상" 등이 속한다.(153) 여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세계 종교인 불교가 비한족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기제로 활용되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었다. 전근대에는 극소수의 지배계급을 대상으로 "같은 왕조에 속한다는 공유의식을 형성하면 왕조의 정통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108)


왕조 후기로 가면, 당 왕조의 존재는 기성 사실이 되고 "황제, 관료, 서민 모두 충실한 주거환경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세계의 수도를 수놓은 활발한 상업 활동은 도시 기능을 분화시켜, "성 안팎을 무대로 (백성들의 삶에 밀착된) 민간설화가 널리 유행하였다."(216) 공고한 제국 체제가 이완되면서 장안은 "모든 백성에게 무의미하고 무표정하던 건축 당시의 격자형 도시 공간"에서 "주민이 공유하는 생활 공간"으로 거듭났다. 여기에 "상업 교통로가 안정되고 확대됨에 따라 불교사원을 비롯한 종교 시설로 전국 각지에서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졌고, 이후 장안은 성지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우주론에 기반을 둔 성스러운 도시가 밟아간 변화의 과정이다."(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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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 세계사의 맥락에서 중국을 공부하는 법 새로운 옥스퍼드 세계사
폴 로프 지음, 강창훈 옮김 / 유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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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중국인 공동체의 주요한 특징은 그들이 "세계와 인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였으며, 초자연적 설명이나 신성한 창조주는 필요하지 않다고 이해"(33)한 점이다. 여기에는 서구 사상에서 두드러지는 형이상학적 탐구가 배제되어 있다. 중국 사상가들은 "대체로 우주를 매우 친숙한 공간으로 여겼고, 인간을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꾸준한 노력을 통해 도덕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22) '존재의 대연쇄'라는 서구의 관념이 위계질서의 사다리를 놓았다면, 중국 사유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전체"속의 개별적 존재들에 주목한다.


'차이'보다는 '관계'에 관심을 두는 경향에는 대륙을 하나로 이어준 문자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갑골문에 남겨진 문자들은 상징성이 무척 강했기 때문에 "언어가 다를 경우에도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상 왕조에 뿌리를 둔 한자는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 걸쳐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를 하나의 정치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45) 그러나 '조화'를 중시하는 사상이 처음부터 각 지역에 할거하는 집단들 간의 현실적인 '차이'를 압도할 수는 없다. '조화'는 '차이'를 메우는 격렬한 투쟁을 통해 달성되기 마련이다.


"기원전 1045년경 상나라 서쪽의 주족周族이라는 봉신이 상나라의 수도를 정복했다." 주족은 하늘을 "인간 세상에서 정의가 승리하도록 도와주는 자비로운 힘으로서 우주 전체를 뜻"한다고 보았으며, 하늘이 자신들의 정복 전쟁을 축복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천명天命의 기원이다."(50) 주족의 기운이 쇠하고 격렬한 분쟁의 시기가 재개되자, 전국 시대의 각국 군주들은 "출신 성분보다는 기술과 조직력을 기준으로 군사와 관료를 선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쟁의 성패가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는 것보다 군사를 무장시키고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58)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전국 시대 초기(기원전 600년경 ~ 400년경)는 전 세계가 "전례없는 변화와 불확실성"을 겪은 시기였다. 혼란을 수습한 "진나라의 법가적인 군주들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교역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전시에 경제력을 총동원할 수 있도록 국가 구조를 재편했다."(60) 체제 안정성을 갉아먹은 지나친 가혹함을 제외하면, 진나라는 이후의 "모든 왕조가 제도적 전범으로 삼은 중앙 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창조한 기념비적인 업적"(90)을 남겼다.


한나라는 흉노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이룩한 제국과 문명이 국경 너머에 있는 '야만적인' 유목 민족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우월 의식을 갖게 되었지만, 유목 민족의 문화 가운데 수많은 요소를 흡수"(95)하기도 했다. 동중서는 "황제를 천자이자 하늘과 땅 사이의 중재자"로 규정하고, "온 세상의 조화와 안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반신적半神的 법제정자"(103)라는 생각을 유가적 통치 이념에 포함시켰다. "유가 사상으로 합리화한 법가의 제도들로 제국의 원형"을 만든 한 왕조는 "로마 제국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붕괴된 것과 대조적으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었다."(115-6)


한왕조가 붕괴하고 유목 민족들이 장성 이남에서 정치적 세력을 확대하면서, '중국인'이라는 말의 정의가 크게 확장되어, "수많은 비한족 계열 민족은 물론이고 그들의 물질문화와 사회 규범마저도 통합"되었다. "남중국과 북중국은 독자적으로 진화했지만, 양측 모두 스스로를 '문명화된 중국인'이라고 주장했으며, 모든 영토를 아우르는 하나의 중앙 집권적 제국이라는 옛 한나라의 이상을 회복하기를 갈망했다."(122) 이 시대의 군주들이 잔혹하고 저열한 인간성을 유감없이 표출하여, 유가의 원칙을 무너뜨리자,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고 조정에 나아가는 길을 포기"하는 도가의 가르침이 재조명되었고, 이는 "불교가 성장하는 데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129)


장성 이북과 이남의 문화가 혼융되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시기가 당 왕조이다.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서유럽의 샤를마뉴 대제가 로마 제국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실패한 것과 달리, 당나라는 "영토, 중앙의 통제력, 번영, 문화적 화려함 등의 측면에서 대제국 한나라를 가볍게 뛰어넘었다."(178) "당나라의 평화와 번영, 당나라 조정의 이국적 뿌리 그리고 당나라 군대가 중앙아시아에서 이룩한 안정 덕분에 당나라는 전례 없는 국제 교역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 지구적인 교차로였다."(158) 


당나라는 강력한 귀족층과 관료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했지만, 송나라는 "지식인층이 과거 시험을 통해 조정 관료로 진출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유학자 관료들은 "예술, 문학, 철학에서 중국 문화사상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문명화되지 못한' 유목 민족에 대한 반감"(208)과 여성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좋은 여성'으로 성장하도록 키워내는 것이 훌륭한 가문"(210)이라는 편협한 사고를 사회 전반에 퍼뜨리기도 했다. 빈약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송 왕조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남부 지방을 본격적으로 개간한 농업 혁명과, 금속 화폐와 더불어 종이 현금 증명서를 사용한 상업의 번영 덕택이었다.


원 조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송을 몰락과 피정복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송나라의 신유가 사상을 후원했다." 몽골은 "거란인, 탕구트인, 위구르인, 티베트인과 전략적 동맹을 맺고 이들에게서 선발한 인재들을 정부 관료로 통합해냄으로써 한족이 이전에 결코 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각 민족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융합시켰다."(232) 영토와 종족, 그리고 문화까지 사회의 전반적인 경계를 제국 규모로 확장한 그들 덕분에 "14세기 원 왕조가 몰락한 뒤 송나라 황제가 꿈꾼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한족 왕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233)


명을 건국한 홍무제의 소농小農 중시 정책도 "두 번째 상업 혁명이 중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명나라 때는 서남부 지방에서 더 많은 토지가 개간"되었고, 구릉이나 모래흙에서도 잘 자라는 아메리카산 작물의 유입은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전 시기에 걸쳐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 기여했다." 국제 교역이 꾸준히 성장했으며, "상인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함에 따라 아직 이론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 유가의 상인에 대한 전통적 선입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248-9)


청나라는 사방으로 원정을 전개하여, 현재의 중국 국경을 획정하였다. 강희제는 정복 전쟁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간언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황제였다. 그는 "우수하고 헌신적인 한족 인재를 관료로 선발"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번영을 누린 위대한 시기"를 열었다. 청 왕조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보수성이 뚜렷하였으며, 한족 관료들도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수용하여 "명나라 말기에 유행한 개인주의와 철학과 예술 분야에서의 창조성을 부정했다."(273) 청 조정은 국제 교역을 "문명이 덜 발달한 '야만인'이 천자와 그 조정에 존경을 표시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쯤으로 여겼고, 18세기 말 "세계의 권력 지형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지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280-1)


1차 세계 대전 후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독일의 이권을 일본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한 것은 중국인에게 위선의 극치라는 인상"(317)을 심어 주었다. 이에 실망한 쑨원은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뒤 제정 러시아가 청 조정에게 강요했던 불평등 조약을 즉각 포기하는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그 결과 "1923년 쑨원과 그의 추종자들은 국민당을 레닌의 노선에 따라 공식적으로 개조했다."(325) 그러나, "급진적인 공산당 조직가와 좀 더 보수적인 국민당 당원 사이에는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다."(326) 장제스는 국민당에 파시즘의 기운을 불어넣었고, "국민당 열성분자들은 독일의 나치 돌격대Brown Shirts를 벤치마킹하여 남의사藍衣社를 결성했다."(335)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도시에서 노동 운동을 벌이던 공산당 조직이 장제스에게 마구잡이로 숙청 당하면서 농촌을 기반으로 삼은 마오쩌둥이 세력을 넓혀갔다. "홍군은 농촌 마을들을 안전하게 보호했고, 그래서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토지 몰수와 지주 처형을 수행할 수 있었다."(340) 일본과의 전쟁보다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한 장제스는 국민들 사이에서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라의 일부마저도 팔아넘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344)되었으며, "농민들은 일본에 저항하는 홍군에 자식들을 기꺼이 입대시켰다."(351)


전후 권력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마오쩌둥의 통치 방식은 "대중 운동을 통해 전체 인민이 당의 정책을 이행하도록 조직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모든 인민을 '단위'單位 조직에 편입시켜 "강력한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도 결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민의 삶을 통제"(371)했다. 숙청과 정치적 파행, 박해로 점철된 마오쩌둥의 시대가 지나간 뒤,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국가 사회주의의 낭비와 비능률로부터 중국 경제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의 경제 개방이 "정치권력에 대한 당의 독점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젊은 동료들이 "다당제 국가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논의를 시작"(396)하자 다시금 숙청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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