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흥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탐색한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이현수 감수 / 좋은씨앗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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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개종의 역사에서, 흔히 통용되는 인상은 "기독교의 성장이 3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급격히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수 곡선이 보여주는 다소 이례적인 특성 때문에 '기적적으로 보이는' 성장기에 불과하다.(24) 우리가 기독교 개종 흐름을 통상적인 신흥종교의 성장 속도에 맞추어, "매 10년당 40퍼센트의 속도로 성장했다고 가정하면 100년도에는 7,530명의 기독교인이 존재했을 것이며 200년도에는 21만 7,795명의 기독교인이, 300년도에는 629만 9,832명의 기독교인이 있었을 것이다."(22-3) 따라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대대적이고 폭발적인 도약의 물결을 일으킨 원인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응으로 보는 게 바람직하다."(28) 기독교 성장률이 4세기부터 급격히 둔화된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제국에 더 이상 전도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아서"라는 추정이 가능하다.(32) 


아울러 "기독교로의 집단 개종이 군중이 자발적으로 전도자에게 반응하면서 일어났다는 주장은 개종 프로세스의 구심점이 교리의 흡입력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과학은 교리의 흡인력은 매우 부차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대다수의 사람이 새로운 신앙이 전하는 교리에 큰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은 개종한 이후라는 것이다."(34) 이는 기존 관계에 애착 정도가 낮은 사람들의 일탈 행위로 설명할 수 있다. 통일교 개종자의 사례를 살펴보면, "문선명 교인들이 전도하기 위해 접촉했던 사람들 가운데 입교한 사람은 '구성원에 대한 대인적 애착'이 '비구성원에 대한 애착'보다 컸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개종의 본질은 이데올로기의 추구나 포용이 아니었다. 개종의 본질은 한 사람의 종교적 행동을 친구나 가족 구성원의 종교적 행동과 일치하도록 조정하는 것이었다."(37) 


"새로운 신앙의 성공적인 창시자들은 전형적으로 그들과 이미 강력한 애착관계가 형성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통념과 어긋나는 개종의 또다른 측면은, 종교성이 낮은 집단에서 개종이 더 큰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이다. "현대 미국의 신종교(cult) 집단으로 개종한 사람의 다수는 그들의 부모가 종교적 소속이 없었다고 보고한다." 이것을 이론적 명제로 기술하면, "신흥종교 운동은 주로 종교적으로 소극적이며 불만이 있는 사람들과, 가장 순응화된(세속화된) 종교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로부터 주로 개종자를 모집한다."이다.(40-1) 개종 운동의 폭발적인 성장은 "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비례적으로 그 운동의 사회적 표면적이 늘어나기 때문"이며, "대부분의 신흥종교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는 재빨리 폐쇄적이거나 반半 폐쇄적인 네트워크로 변하기 때문이다."(43)


"초기 교회가 훌륭한 데이터가 존재하는 다른 모든 신종교 운동과 같았다면, 초기 교회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니라 좀 더 기득권층에 기반을 둔 운동이었다."(60) 근대 과학의 성장과 더불어 기독교의 가르침에 문제 의식을 가진 이들이 교육 수준이 높은 자들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헬라와 로마의 과학과 철학이 부상하자 이교도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겼고 이것 역시 교육받은 자들이 먼저 간파했다." 즉, "종교적 회의론은 기득권층에서 가장 만연한다." 이들은 "기성 브랜드의 신앙에 확신이 없음을 '무교'로 표현"하지만, "반反기성적 신비주의, 주술, 종교 교리를 믿는 것에 관심을 표할 가능성이 '가장 큰' 집단이기도 하다." 문화 혁신을 초기에 수용하는 이들은 "수입이나 학력 면에서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며, "신흥종교는 항상 ‘새로운 사상’을 의미"한다.(66-7)


기존 통설에 따르면, "유대인에 대한 선교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발흥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1세기부터 2세기 초반까지 교회 성장의 출발 기반을 제공한 것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으며, 이뿐 아니라 최소한 4세기까지 유대인이 계속 기독교 개종자의 중요한 원천이었으며, 유대계 기독교는 5세기까지도 여전히 비중 있는 존재였다."(81-2) 2차대전 이후 해방된 유대인 공동체가 주변부에 머물렀듯이, "사람들이 두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 모순이나 상호 압박이 생기고 타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각 집단에서의 지위가 낮아"지는 주변화 현상이 나타난다. 이때, "사람들은 주변적 위치를 탈피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시도"(86-7)하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명제는, 사람들이 "이미 익숙한 기성 종교(들)과 문화적 연속성을 보유한 새로운 종교를 더 수월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90)


"잠재적 개종자가 자신의 문화적 유산을 상당 부분 보전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일부 첨가하기만 해도 된다면 전환 비용은 최소화"된다.(90) "디아스포라 유대인 네트워크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을 수적으로 크게 압도"했으며, "도시에 주로 거주했고, 빈곤한 비주류 집단이 아니었다."(93-4) 또한, "헬라파 유대인 가운데 다수는 이미 민족적 의미에서는 유대인이 아니고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유대인인 상태였다." 헬라파 유대인은 헬라 문화를 포용했지만 "영적인 게토에 갇혀 '야만인'의 한 부류로 인식"되는 것에 모멸감을 느꼈으며, 따라서 "유대인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헬라 사회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어떤 절충과 통합이 시급히 요구"되었을 것이다.(94-5) 이들은 "비교적 현세적이고 절충적이며 세속적"(97)이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가장 잘 된 집단이었다."(100)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기에 가공할 역병이 로마 제국 전역을 강타했다."(115) "고전 사회가 이런 재난에 의해 지축이 뒤흔들리고 희망을 잃는 일이 없었더라면 기독교가 지배적인 신앙으로 부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역병 초기부터 "기독교의 사랑과 선행의 가치관은 사회 봉사와 공동체 결속으로 현실화되었다. 재앙이 닥쳤을 때 기독교인은 더 훌륭하게 대처했고, 그 결과는 '월등히 높은 생존률'이었다." 기독교인의 월등한 생존율은 "기독교인이나 이교도 모두에게 “기적”으로 비쳐졌을 것이고, 이는 개종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보여준 우월한 생존률로 말미암아 이교도가 유실된 애착관계를 기독교인과의 새로운 애착관계로 대체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졌다."(117-9)


기독교 교리의 독특한 점은 "고도로 '사회적인' 윤리 강령을 종교와 결부"시켰다는 것이다. 이교도들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발상"을 낯설어했다. "실제로 하나님이 희생을 통해 그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했다. 아울러 이런 책임은 가족과 부족의 유대를 넘어 실상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 모든 자들"(고전 1:2)에게로 확장되어야 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생각이었다."(134-5) 결국, "기독교인은 죽음을 불사하는 역량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사망할 확률도 훨씬 적다는 걸 누구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는 대규모 개종으로 이어졌다.(141)


"그레코-로만 사회에서는 원치 않는 여아와 기형 남아를 유기하는 것은 합법적이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용인되었으며 사회 전 계층에 걸쳐 빈번하게 행해지던 일이었다."(151) 기독교는 "모든 형태의 영아 살해와 낙태를 금지함으로써 이교도 가운데 존재했던 성비 불균형의 주 원인을 제거"했으며, 이는 여성 사망률 감소와 더불어 기독교 공동체의 '여초女超 현상'을 초래했다.(154) "여성에 대한 보다 호의적인 시각은 기독교인이 이혼과 근친상간, 외도, 일부다처제를 죄악시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160) 아울러, "기독교인 여성은 비교적 상당히 늦은 나이에 초혼을 했으며 배우자 선택권도 훨씬 넓었다. 이교도 여성이 종종 사춘기 이전에 혼인과 동시에 성관계를 강요당했음을 볼 때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162)


"여성이 공급 부족인 세계에서 혼령기의 기독교 여성이 기독교 남성 수를 크게 초과했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딸을 불신자와 결혼시킬 때 신앙을 저버릴 염려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통혼은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개종 매커니즘에 관해 아는 바로는 이런 통혼은 2차 개종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높은 비율의 족외혼은 기독교가 폐쇄적인 신자 공동체로 전락하지 않고, '개방형 네트워크'로 활력을 유지한 비결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당대의 출산력이 대체수준(replacement levels, 총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출생률)을 하회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출산력은 이교도의 출산력을 크게 상회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 역시 그레코-로만 사회의 기독교화에 일조했다."(176-7)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서의 명령을 지켰던 기독교인들의 "출산율은 이교도보다 훨씬 높았으며 사망률은 훨씬 낮았다."(179)


'도시 규모'도 기독교화에 영향을 주었을까? 피셔에 따르면, "절대치의 인구가 많을수록 일탈적 하위문화 형성에 필요한 '임계치'를 모집하기가 더 쉽다."(203) 당대의 도시들은 좁은 면적과 높은 인구밀도를 보였으며, "무질서, 사회 해체, 불결함, 질병, 비참함, 공포, 문화적 혼돈"이 어우러진 장소였다.(224) 잦은 신착자 유입은 "사회 통합을 가로막고, 일탈과 무질서"를 초래했으며, 내부의 인종 분열이 사회통합을 저해했다.(237) 안정된 애착관계의 네트워크가 부실한 가운데, 도시인들은 위험과 절망, 증오가 만연한 일상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그들은 틀림없이 안식과 희망과 구원을 갈망"했을 것이다. "노숙자와 빈민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기독교는 구제뿐 아니라 희망도 제공했다." 기독교가 제공한 확장된 가족 공동체는 "도시의 삶을 더 잘 견뎌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문화였다."(241-2)


"(기독교를 탄압한) 유세비우스가 보기에도 순교자의 용맹과 절개는 기독교가 가진 미덕의 방증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교도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246) "간증은 사람들이 간증자의 주장을 믿는다고 해도 간증자에게 돌아갈 상대적 실익이 별로 없거나 손해 볼 일이 많을 때 그 설득력이 배가된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종교적 섬김에 대한 대가로 낮은 수준의 물질적 보상을 받을 때 그들의 신뢰도는 더 높아진다." 동일한 논리를 순교에 적용할 수 있다. "순교자는 가장 큰 신뢰를 받는 종교적 가치의 표방자다. 그리고 이 점은 순교에 자발적 측면이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배교를 선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고문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사람은 그 종교에 상상을 초월하는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며 또한 그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한다."(260)


에드몬슨은 "베드로가 (로마로) 되돌아가 기꺼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사람마다 아무리 요동하는 자라도 마음과 양심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찰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60년대의 순교자들은 대속의 증거인 예수의 고난에 자신들의 고난을 더함으로써, 재림 예언의 실패와 소수의 개종자라는 위기를 해소했다."(280-1)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을 보면, "순교에 직면할 정도의 역량은 집단적으로 생성된 헌신 가운데 특출난 경우에 해당되며, 지명도 있는 구성원들이 순교에 엄청난 지분 가치를 거는 결과를 초래했다. 순교는 공개적으로 행해졌을 뿐 아니라 종종 대규모 구경꾼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준비 기간 중에 순교의 문턱에 선 사람들은 열렬하고 직접적인 예찬의 대상이 되었다."(268-9) 순교는 대중들에게 기독교에 가입하는 행동을 '훌륭한 거래'로 인식시켜 주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교의 무기력과 이교 자체의 취약점으로 인해 기독교에 상당한 확장 기회가 열렸다."(303) 1세기 제국의 다원성은 '과잉' 수준이었다. "다양한 새로운 신들이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대거 유입되었으며 그 결과 E. R. 도즈의 말처럼,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대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295) 그러나 이교도의 신들은 기독교의 신과 여러모로 달랐다. 폼페이의 신성모독적인 그라피티가 시사하듯이 "고전 신화에는 신들이 종종 심심풀이로 인간에게 못된 짓을 하는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아더 다비 녹크는 이런 신들을 숭배하며 진실한 믿음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고찰했다."(298-9) 반면, 기독교의 신은 그리스 판테온의 신들처럼 변덕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선과 악의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된 초자연적인 상태를 관장하는 '합리적인 신성'이었다.


"고전시대 철학자들은 자비와 동정심을 병리학적인 감정으로, 그러니까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해야 할 성격상의 결함으로 간주했다. 자비란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 도움이나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므로 정의와 상반되었다. 그러므로 '자비는 실상 전혀 이성의 통치를 받지 않으며' 인간은 '자비라는 충동을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기독교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비가 주요한 미덕이며 자비로운 신이 인간에게도 자비로울 것을 요구한다고 가르쳤다."(317) 기독교는 '민족성(ethnicity)을 완전히 탈피한' 통일성 있는 문화를 제시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기독교인 가운데에는 민족성이 점차 희석되고, 새롭고 보다 보편적이며 실로 세계시민적인 규범과 관습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319) "기독교가 개종자에게 선사한 것"은 바로 그들의 '인간성'이었다.(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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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헬레니즘 3 -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연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42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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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형상 없이 영적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이성적인 활동으로 받아들인 그리스인들은 "유대인을 특수한 비非그리스인 (barbarisch) '철학자들'로 간주"했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여타 지역에서 그리스적 교육을 받은 자들이 이해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화시킨 사상"으로서, 이들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하늘이나 우주와 동일시하여 한편으로는―가령 헤카타이오스와 포세이도니오스, 바로(Varro)와 같이―철학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반면 유대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진리를 배타적으로 주장하고 종교제의적 율법 규정을 통해서 유대교 밖의 주변세계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유대교가 "진지한 고대 역사가들에게 심하게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대교는 "미신적이고 관용을 베풀지 않는, 참으로 '불경'한 종교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163)


기원전 3세기 "유대의 가장 강력한 평신도 가문인 토비아스 가문은 이미 기원전 3세기 중반에 그리스인들과 매우 밀접하게 접촉"하면서, "유대교의 하나님 신앙과 시온 산의 종교제의를 헬레니즘 환경에 혼합주의적으로 동화시켰다." 그러나 강력한 보수파인 대제사장 '의인 시몬'을 중심으로 하는 "오니아스 가문과 토비아스 가문 사이의 권력투쟁은, 기원전 175년 안티오코스 4세가 왕권을 승계한 이후 실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개혁시도의 역사적 배경이 된다." 토비아스 가문의 히르카노스는 암마니티스를 예루살렘과 경합하는 "반半독립적 통치 지구로 분리"시키고, "혼합주의적 색채를 갖는 유대인 성전을 건립한다." 안티오코스 4세가 자신의 지원을 대가로 성전 금고에 손을 대는 불경을 저지르자, 수세에 몰린 급진파들은 "유대교의 법을 완전히 폐지하라고 조언"하기에 이른다.(164-5)


급진파들은 "그리스적 '계몽'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하나님을 경배함에서 '미신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원초적이고 '이성적인' 형태를 회복하려 했을 것이다." 기원전 167년과 164년 사이에 절정에 달했던 대결은 율법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유대교의 배교자들은 바빌로니아로의 유배 이후 유대인들이 살아왔던 관습을 강압적으로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이 약화되고 마카베오 봉기가 성공을 거두자 "유대교는 예루살렘의 개혁이라는 절대절명의 위협을 물리치고, 기원전 142년 데메트리오스 2세의 칙령을 통해 국가의 독립을 얻는 데 성공했다." 유대 묵시사상의 창시자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한 역사란 '계약'에 근거"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고, 그 계약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율법'이었다. 그 결과 "유대교의 정신적 변화는 현저하게 토라에 집중되었다."(166-7)


"율법과 성전을 지배하려던 통치권력의 명백하고도 부당한 간섭에 대해 팔레스타인의 유대교가 가졌던 저 극도의 민감함이란 새롭게 각성된 '열성주의(Eifer)'의 열매였다."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휘감은 "이 '무정부적인 급진성'은 로마시대에 디아스포라로 확대되어 강력한 민족적, 종말론적인 미래 대망으로 표현되었고,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유대의 반란들과 기원후 66-70년, 116-117년, 132-135년에 일어난 유대인들의 처참한 재난의 주요 원인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168)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희망이 정치적으로 강하게 채색될수록, "기원전 63년에 다시 유대민족이 자유를 상실한 사건은 더욱 가혹하게 느껴졌다. 자유를 되찾으려는 그들의 계속된 노력은 이방인의 통치란 자신들이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게 하는 위협이라고 느끼게 했고 '마카베오의 기적'이 다시 찾아오게 될 것이라 믿게 했다."(172-3)


'토라를 고수'하려는 강력한 결의는 유대교 내에서 신학적 근거를 갖고 제의나 율법을 비평하려는 시도를 차단했다. 그것은 "율법을 수여 받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비평적인 성찰에 대해서도 관용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런 비평적 성찰은 "헬레니즘적 개혁 시도와 비슷하게, 이스라엘 최고의 신앙적 유산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아니 더 나아가서는 변절하여 이방세계로 돌아서는 것"으로까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유대교의 한가운데에서 형성된 초기 기독교 운동에 반응했던 유대교의 뿌리 깊은 비극이 여기에 존재한다. 나사렛 예수와 스테파노스, 바울은 자신들의 민족에 대해 좌절했다. 유대인들이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띤 그들의 율법에 대한 경건을 창조적이고 자기 비판적으로 변형하려는 운동들을 더 이상 수용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76-7)


"지혜신학에 이미 내포된 '자연에 대한 계시', 즉 자연질서 특히 천체의 목적성과 완전성에서 신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은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헬레니즘 환경의 '종교적 공통유산(Koine)'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 "사후의 삶에 주어지는 보응사상, 다가올 평화의 나라를 대망하는 사상, 그리고 하늘의 실체들과 구원자들, 천사들, 악령들과 죽은 자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상, 더 나아가 점성학과 예지, 마술의 중요성, 꿈, 환상, 하늘과 지하세계로의 여행, 황홀한 영감의 언어,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통하여 그에 대한 지식을 초자연적으로 얻는 방법 등"의 사상적 측면들을 고찰해봐도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헬레니즘적 동방세계의 혼합주의라는 바다에서 완전히 봉쇄된 섬"이 아니었다.(182)


비록 팔레스타인 내·외부의 유대교가 혼란스러울 정도의 다양성을 보였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중심은 토라"였다. 토라는 "헬레니즘과의 대결을 통하여 유대교의 중심점"이 되었고, 투쟁이 격렬할수록 "더욱더 계시의 유일한 독점적 매개체가 되었다." 디아스포라에서 그리스 교육을 받은 집단들에게조차도 "율법은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결속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자신의 윤리적인 유일신론을 통하여 헬레니즘적 제의들에 대한 우월감을 표현하기 때문이다."(183) 민족적 자기 보존을 위한 이 기본 욕구는 "보편적 선교 사명에 대한 의식"을 제약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예언적이고 종말론적인 소식과, 그것에 기초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선포의 혁명성"은 누구보다도 유대교의 자가당착성을 잘 알고 있던 '그리스어 사용 유대인들'을 파고들었다.(185)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 '토라 존재론'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역사 속에서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표현한 기독론이었는데, 이것은 더 이상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자체 내에서 일어난 종말론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이었으며, 종말이 임박했다는 신념에 근거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사적' 사명은 온 세상 민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민족적 자기 과업 설정으로 실현되었다."(186)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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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헬레니즘 2 -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연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41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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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시라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대교가 헬레니즘 문명과 만나, 양측 모두에게 아마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을 첫 번째 시기의 끝지점이자, 비판적인 저항이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였다. 그는 대략 기원전 180-175년, 예루살렘에서 헬레니즘적 개혁이 시도되기 직전에 예루살렘 상류층과의 대결에 휩싸인다." 벤 시라가 볼 때, "그들은 율법을 배교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이 인간 개개인에게 요구하시는 행함이란 이 세계에서 의미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정당한 신적 보응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항변한다." 벤 시라는 인류의 중심이 여전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유일하고 놀라운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신정론을 펴면서, 옛 예언자들의 표현을 빌려 "이스라엘의 민족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이 도래하기를 탄원한다."(423)


벤 시라가 "유대 지혜의 '민족주의화' 과정에서 '지혜'를 모세의 토라와 동일시"했듯이, 아리스토불로스는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모세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유대인과 피타고라스 모두에게 숫자 '7'은 거룩했다는 사실을 통해 '지혜'와 '로고스'가 세계의 영적인 질서원리가 되고, 동시에 개인의 지각과 도덕적 의지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지혜전승에서 역사에 대한 문제는 후퇴한 반면, 그 중심에 우주론적이고 개개의 인간학적 관심이 놓인다는 점이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바리새주의적 전통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론적 의미가 토라에 부여되고, 토라는 모든 랍비적인 삶과 사고의 중심과 목적이 된다." 이러한 '토라 존재론'이 가져온 하나의 결과는 "역사의식의 상실"이었다.(424-5)


마카베오 봉기시대 초기에 우리는 예언자들의 유산을 지키면서 유대교 묵시사상의 근원을 형성했던 하시딤을 만난다. "다니엘서, 그리고 에녹1서의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시딤적인' 묵시사상의 전형적인 요소는 세계사에 대한 통일적 관점이다. 이 세계사의 중심에 바로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의 여정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임박한 종말로 치닫는다. 여기서 현재, 즉 마지막 시기에 인간의 교만과 배교는 정점에 다다른다." 유대교 묵시사상은 "근본적으로 헬레니즘의 신탁문학이나 점성술에 기초한 '세계순환론'과 구별된다." 이제 지혜와 예언이 서로 합류한다. "예언자는 현자요, 현자는 예언자이다. 지혜와 계시를 이해함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사상적 발전은 그리스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동방세계 종교들의 대응이라는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425-6)


유대교 묵시사상의 "끝자락에 에센파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대략 기원전 150년 정도에 '하시딤'에서 분리되었다. 이때는 마카베오 가문의 요나단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직에 앉자, '의義의 교사'가 그 동료들과 예루살렘의 제의중심적인 공동체를 떠나 엄격한 규율과 높은 정신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도승적인 종단을 설립하였을 때였다." 에센파는 '두 영靈'에 관한 "결정론적이고 이원론적인 교의를 통해 묵시적인 역사관에 체계적인 토대를 부여"하고자 했고, "지혜전승에 담긴 인간학적인 요소를 구원론을 위한 인간학"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그러한 앎은 "천상의 세계를 포함하여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존재와 사건' 전체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신비한 세계관이 가진 '학문적' 수단들로 역사와 인간의 운명에 관한 비밀을 파악하려는 욕구"의 발로였다.(426-7)


한편, "하시딤적인 묵시사상의 중심에 초자연적인 계시가 수용된다. 이 계시는 (선지자들의) '원原 계시'와 경험적 지식에서 얻은 전통적 지혜를 능가하고, 또한 그리스인들의 합리적인 사고를 능가한다"고 알려졌다. 에센파 사람들에게 "이 지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계시'를 통한 '구원의 지식'이 된다."(431)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존재로서 어려움을 지고 살아가는 하층민들과 관계된 일이었다." 따라서 "강력한 종말론적 희망과 그에 부합하는 역사관이 초기 바리새주의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에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현실의 고난에서 태동한 "헬레니즘적 개혁에 대한 저항과 마카베오 봉기가 만들어 놓은 상황은 근본적으로 신약시대의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상황을 규정함은 물론, 디아스포라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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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헬레니즘 1 -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연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40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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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에 형성된 디아도코이 왕국에 의해 생성된 초기 헬레니즘 문명은 동방세계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일차적으로는 매우 비종교적인 세력으로 다가왔다." 헬레니즘 문명은 무엇보다 전쟁 수행 능력에서 두드러졌고, 이들의 세련된 전쟁기술은 유대인들의 "유대교 묵시문학과 성전聖戰 사상, 그리고 후기의 마카베오 봉기로 이어지는 유대교의 팽창정책을 가능하게 했다." 이와 더불어 제국이 집행한 억압 통치와 세금 체제, "특히 모든 종류의 세금징수를 도급으로 집행하는 전형적인 그리스의 제도"는 그 후 수세기 동안 유대지역의 견고한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유대 지역의 대제사장과 '원로회' 조직인 '산헤드린'(Synhedrion) 간의 미묘한 균형을 분할 통치에 이용했고, 여기서 유대 성전국가라는 '정치체政治體'가 발전한다.(211)


그리스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봉직하면서 팔레스타인의 부를 철저하게 이용하여 이익을 증대했다." 그들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넘어 아라비아 쪽으로, 더 나아가 에게 해와 소아시아 서쪽 지역과도 무역을 강화"했으며, 낯선 국제 교류의 증대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촉진하여 각지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낳았다. "유대교의 디아스포라는 한편으로는 유대인 용병들과 이주민들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들을 통해서 더욱 확장되었고 이집트와 키레나이카 (Cyrenaika) 지역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지속된 오랜 평화는 경제적 발전을 촉진했고,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까지 진출한 페니키아인들의 무역식민지 활동은 "비유대적인 환경과의 분리를 추구하는 유대 신정주의적인 프로그램을 진정한 시험대"에 오르게 했다.(212)


이제 유대사회의 지도층은 "헬레니즘 문명이 그들에게도 제공한 경제적, 사회적 상승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계속해서 성전국가의 무위無爲의 잠에 빠져 분리주의적인 외피外皮를 입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기원전 246-222년) 시대에 토비아스 가문의 요셉이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징세도급관의 수장首長으로 놀랍게 부상"했던 사례는 이 새로운 정신이 발휘되는 공간을 차지하고자 했던 시도들의 흔적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헬레니즘이 경제적 영역에서 결코 급격한 단절을 초래하지는 않았으며, 팔레스타인은 페니키아라는 매개를 통해 이미 페르시아 시대에 시작된 발전을 더욱 강화"하고 거기에 올라탔다는 점이다.(213)


그렇지만 "헬레니즘 문명에 대한 관심은 주로 예루살렘의 풍요로운 귀족들에게 한정되었다. 강력한 경제적 착취나, 새로운 지배자들과 그들을 모방하는 자국 내 귀족들이 경제적 이익추구에만 몰두해 사회적 배려에 무관심하게 되어 하층민들과 지방 주민들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묵시적 사변思辨에 대한 토양과, 바르 코흐바(Bar Kochbar) 봉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 된 후대의 봉기를 위한 토대를 제공했다."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가난과 불평등의 사례는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 벌어진 고난의 기록들이다. "헬레니즘은 거의 모든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서로 뒤엉킨 총체적 세력"이었고, 따라서 "비非그리스인이 이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다리를 필요로 했으니, 그것은 헬레니즘 세계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통용 그리스어 '코이네'(Koine)였다."(213-4)


"기원전 175년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리스어는 더욱 폭넓게 확산"되었고, "대제사장 야손이 예루살렘에 김나시온을 건립하면서 그 발전은 정점에 이르렀다." 당시 유대교 상류층의 헬레니즘화 과정은 "유대교가 헬레니즘적 환경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폴리스를 세움으로써 친親그리스적인 귀족들의 특권을 강화하고 보수적인 집단을 무력화"하려 했다. 서기관 그룹에서 유래한 율법학자 계층은 이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이면서, "모든 백성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것"을 저항의 지향점으로 삼았고, 수백 년간 지속된 전통 수호의 종착점은 기원후 2세기의 '랍비단(Rabbinat)'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분명하게 반反헬레니즘적 경향이 있는 이 운동도 그리스식 교육이론의 방법과 형태"를 띠었다."(357-8)


"그리스식 교양교육의 침투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어로 기록된 유대교 문학이 시작된 것으로도 입증된다." 유대문학은 유대인 자신들의 역사를 주로 다루었으며, "에녹과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에게 문명을 전달한 자로 각색했다. 반면 제사장이자 유대인이었던 에우폴레모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특별히 강조하는 방식으로 유대 민족사를 묘사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키레네의 야손은 그의 방대한 작품에 헬레니즘적 개혁이 일어났던 당시의 가장 최근 사건들과 유다 마카베오의 독립투쟁을 헬레니즘적 역사기록 같은 장중한 방법으로 서술했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새로운 유대인 독립 국가의 "종교적, 민족적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문학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팔레스타인 모국 밖으로 확산되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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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 하권 - 역사적 예수,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하나님 나라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2
제임스 던 지음, 차정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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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서 저자들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경구투의 권고를 반복하면서,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예수가 말한 것이 제대로 (회중에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암시"(28)가 담겨 있다. 예수의 선교는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 핵심이며,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정점을 이룬다.(60) 이를 대표하는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하나님의 의가 편만해지며, 지금-오늘 필요한 빵을 바라며, 빚이 탕감되고, 책임을 완전히 포기하려는 유혹에 직면하여 결연히 반응하고, 잠정적인 법정 기소에서 건짐받기를 구하는 기도"이다.(64)


그러나 예수는 "가난이나 사유 재산 폐지의 부름을 이상화하지도, 절대적인 평등주의를 전파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떤 소유물도 신뢰하지 않을 수 있는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가깝다는 것을 적시하였을 뿐이다."(71) 유대인들은 종파주의적 관점에서 율법위반자들을 '죄인'으로 간주했지만, 예수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을 언약 바깥으로, 하나님의 은혜 너머로 내치듯 취급한 이스라엘 내부의 경계선 두르기에 반대했다." 그렇기에 "예수는 '죄인들' 자체보다 경멸적으로 '죄인들'을 정죄한 자들을 더욱 비판"했으며, 가난한 자들의 입지를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협한 규정과 도덕 관념으로 '죄인들'로 간주된 자들의 입지 또한 긍정"하고자 했다.(80)


율법을 가르칠 때 예수가 차별화한 지점은 "모든 구절들을 똑같이 구속력이 있다거나 외관상 모순되는 것들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추정하기보다 한 구절을 다른 구절과 대립적으로 설정한 것이었다."(117) 가령,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거나 병을 고치는 이야기에서 논쟁으로 삼은 문제는 "안식일이 지켜져야 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는 "안식일을 언약에 대한 충성의 지표로 다루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제아무리 신성한 것이 있더라도 선을 행하거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어느 경우에도 잘못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124-5)


기름 부음은 전통적으로 '왕, 제사장, 예언자'라는 세 가지의 역할과 연관되어 있다. 왕적 메시아는 "모든 자를 위해 정의를 집행하는 강력한 통치자"이며, "악을 뿌리 뽑고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멸망시키는 호전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186) 비록 예수가 메시아를 참칭하고 성전을 파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지만, 예수는 메시아라는 호칭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결코 한 번도 자신에 대해 '메시아'라는 직함을 사용하거나 다른 자들이 그에게 적용한 것을 솔직하게 환영한 것으로 회고되지 않기 때문이다(막 14.62은 유일한 예외이다)."(2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막 14.62)


흥미로운 대목은 예언자로서의 예수이다. "종말론적 기대의 견지에서 예언자의 역할은 거의 왕적 메시아의 그것만큼 현저하였고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의 희망보다 더 넓게 확산되어 있었다."(231) 예수 자신이 "이사야 예언을 자신의 선교를 위해 교훈적이고 영감적이라고 보았으리라는 것은 매우 개연성이 높다."(241) 예수는 "열두 제자들의 선택,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 것, 치유와 축귀 활동, 예루살렘 입성, 성전에서의 상징적 행동, 그리고 마지막 만찬 등", 예언자들의 방식대로 행동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가난한 자와 죄인의 명분을 옹호함에 있어 예수가 자신의 선교를 고전적 예언자의 우선권에 따라 자의식적으로 구상했을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242-3)


*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거부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거부하는 것이라. (눅 10.16)


더욱이, 예수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아버지'로 호칭한다. 즉,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그 나름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감각적 이해를 표현"(310)하며, "예수의 자기 이해에 결정적이었을 뿐더러 심지어 핵심적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아들 됨 의식은 종말론적 내재성과 긴박성 가운데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직접적 권위의 원천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 전통이 시사하는 바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기도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제자들을 같은 '아들 됨' 의식으로 유도했으며, 아울러 예수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도 아버지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터하여 살도록 격려했다"는 사실이다.(318-9)


*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 11.3/눅 7.23)


공관복음의 개요를 살펴보기만 해도 "모든 복음서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다양한 가르침을 베풀고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는 것에 이어 예수의 체포, 심문, 처형이 이어지는 형태로 된 그 마지막 기간에 대한 공통된 틀로 짜여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특징의 가장 명백한 설명은 그 틀이 전통화 과정 내에 일찌감치 고정되었고 복음서로 기록되는 전환기를 통틀어 그 상태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그 참여자들의 기억에 뿌리내려 그들에 의해 그 틀 속에 자리 잡은 전통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의 고난에 대한 기억은 곧바로 그리스도교 영성에 강력한 요인이 되었다."(374-5)


예수의 십자가형과 죽음에 대한 전통은 "처음부터 성서적 암시를 부각시키고 전반적으로 영적인 교화의 성격을 부여하고자 형성된 흔적이 역력하다. 그것이 시작부터 예수의 죽음이 기억된 방식이었다."(392) 한 가지 주목할 지점은, 예수 전통이 "예수의 처형에 바리새인이 연루된 어떤 기억도 보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대제사장들(archiereis)은 꾸준히 부각된다. 수난 서사와 관련되는 한, 유대인 쪽에서 예수의 체포와 정죄라는 드라마를 펼치는 주연 배우들은 대제사장들이었다. 이는 나아가 예수의 체포와 정죄 배후에 작용한 결정적인 요인들이 토라가 아니라 성전과 대제사장의 권위에 대한 쟁점들이었음을 분명히 암시한다."(397-8)


"정결 체제는 지배 계층의 이데올로기"였으며, 성전은 이러한 관심들의 중심에 놓여있기에, "예수가 정결 의식을 무시한다는 보고들"은 종교 권세자들의 심기를 거스르기 충분한 대목이었다.(401-2)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그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들의 손아귀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과 다름없는" 예루살렘 여정을 거행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복음서 저자들은 부활 사건이 가져온 본격적인 안목에 비추어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전체의 순서가 예정되어 있었다는 확신을 가졌다. 누가는 특히 하나님이 미리 정한 '계획', 곧 발생한 것의 신적인 필연을 강조하며 불길한 말로 예루살렘 여정의 이야기를 시작한다."(403-4)


부활에 관해 "바울이 공명하는 초기의 고백적 공식문구 하나는 로마서 1.3-4이다." 여기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 부활"과 동일한 지평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파악한다.(503) 바울은 그리스도 부활의 의의를 '첫 열매'로 묘사하는데, 이 이미지는 "죽은 자의 추수로서의 부활에 해당된다." 그러한 은유는 "예수의 부활을 마지막 부활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예수 사후 "그리스도교의 첫 설교가 예수의 메시지를 반복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선포"임을 보여준다. 즉, "예수의 복음에서 예수에 대한 복음으로, 선포자 예수에서 선포의 대상 예수로 방향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511-2)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 1.3-4)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예수 전통을 통하여 여전히 예수를 청종하고 만난다. 예수는 그 속에서 말하고 토론하고 식탁 교제를 나누며 치유한다. 예수 전통이 강대상이나 무대, 거룩한 공간이나 이웃이 앉아 있는 방에서 읽히는 것을 듣는 가운데 우리는 최초의 제자 및 교회 집단들과 더불어 앉는다. 그들이 예수에 대한 기억을 나누었을 때, 예수의 제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키워갔을 때, 증언과 논쟁을 위해 스스로 준비했을 때, 그 예전을 거행하고 그 가운데서 삶과 예배를 위한 참신한 교훈을 배웠을 때, 바로 그 시절의 그들과 우리는 함께 앉는 것이다. 그 전통을 통해 누구든지 그리스도교가 발원한 예수, 기억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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