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보의 자본주의의 역사 1500~2010 - 제6판
미셸 보 지음, 김윤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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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향한 "여정의 첫째 단계는 아메리카의 정복과 약탈(16세기), 둘째 단계는 부르주아지의 등장과 그 기반확립(17세기)이다."(38) 아메리카 귀금속의 유입으로 화폐와 물가가 크게 동요하자 "혼란스러운 논쟁이 전개되었고 물가 등귀의 원인으로서 농부, 중개인, 수출업자, 외국인, 상인, 고리대업자 등이 뒤범벅이 되어 비난을 받았으며 그뿐 아니라 화폐의 귀금속 함량을 줄인 화폐 액면가의 인상도 함께 비난을 받았다."(43) 각국 정부가 금은의 국외 반출을 저지하는 조치를 취하는 중에 존 헤일스는 그의 <강론Discourse>에서 "각각의 개인은 공공 복리의 구성원이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돈벌이가 되는 모든 거래는 이를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돈벌이가 될 것이다. 한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그러므로 동시에 그의 이웃에게도 이익이 되며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고 썼다. 이로써 "왕국의 부는 상인과 제조업자의 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44-6)


17세기 이후 유럽 각국이 식민지 확장에 몰두하면서, "1621년 토머스 먼은 그의 <영국의 동인도 교역론>에서 해외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즉 귀금속의 축장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문제는 흑자 수지를 가져오도록 이를 순환시키는 것이었다."(61) "국민적 위대성, 국가와 상인의 치부致富, 세계의 제패, 여기에 부르주아지와 군주간의 타협의 기반이 놓여 있었다." 유산계급과 군주제의 대립은 크롬웰의 과두적 공화제를 불러왔다. 크롬웰은 공격적인 중상주의 정책을 취했는데, "1651년 위기를 맞이해 그는 첫 번째 항해조례를 선포했다. 유럽의 상품은 오로지 영국 선박 혹은 그 원산국의 선박만으로 수송될 수 있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의 산품은 오직 영국 선박이나 당해 식민지의 선박에 의해서만 수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660년 두 번째 항해조례는 선장과 승무원의 최소한 4분의 3은 영국인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게 된다."(63)


상인제조업자 밑에서 일하는 "가난한 수공업자와 노동자,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도 민주주의도 아니요, 언제나 똑같은 목표를 가진 법령의 보호였다. 즉 품삯이나 임금의 인상, 노동시간의 단축, 외국의 경쟁에 대한 보호 등이었다. 민주주의와 자유, 이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상인부르주아지나 은행부르주아지, 법학자 그리고 법률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 지지자들은 자유직업인, 농촌의 유력자들, 부유한 상인과 영농가, 그리고 일부 젠트리들이었다." 절대주의를 타도하는 일이 보통선거에 기초한 민주적 정권을 세우는 문제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재산가들(약 5만 명)만이 의회에 보내는 대표를 지명할 수 있었다. 왕국이 추진해온 중상주의 정책으로 오랫동안 혜택을 받아온 부르주아지는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의 거점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즉 대중운동에 직면해 여전히 강력한 지배계급인 구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사이에 신중한 타협이 진행되었던 것이다."(68-70)


로크의 <시민정부론>이 나온 다음 해인 1691년, 영국의 귀족이자 데카르트의 찬양자로서 터키의 무역업자와 런던의 고위 관리, 시장을 역임한 더들리 노스 경은 중상주의를 배격하고 순수한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무역론>을 발표했다. 그는 "무역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 세계는 단일한 국가 또는 단일한 국민에 불과하며 그 속에서 각 국가는 일개인과도 같은 것이다. ··· 한 나라의 상업과 국익에는 유리하지만 다른 나라에는 불리한 모든 방책은 [세계 전체로 보면 자원의] 남용이며 그만큼 공공의 이익을 감소시킨다. ··· 무역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가격을 고정시키는 법이란 없다. 가격 수준은 스스로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며 또 스스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73) 반면 프랑스는 여전히 중상주의 정책을 중시했다. 콜베르에게 "무역회사는 왕의 군대이며 프랑스의 제조업은 그 예비군"이었고, "왕국의 화폐를 증대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이웃나라로부터 그만큼의 화폐를 빼앗아오는 것"이었다.(80)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이 세계무역을 지배할 만큼 충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자 자유무역의 장점을 내세워 중상주의 명제를 버리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절대주의에 맞설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하자 이와 함께 스스로 자유와 자유로운 합의의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고(그리하여 프티부르주아지와 대중에게 지지를 얻었다), 계몽된 귀족계층과 동맹을 맺었다(이로써 농민봉기와 대중적인 불만의 위험에 대처했다). 어떤 경우에나 부르주아지는 국가기구의 최고위직(고등서기관, 행정감독관, 국가관리뿐 아니라 의회나 사법부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을 차지했다. 이는 국가 '기술관료techno-bureoisie'의 최초의 맹아로서 이들은 국가 실무를 다룸으로써 실질적 권력을 확보하게 된다." 형성 당시부터 자본주의는 "일국적이면서 세계적이었고, 경쟁적이면서 독점적이었으며 또한 자유주의적이면서 국가와 연관되어 있었다."(87-8)


생산방식을 개량하고 생산량을 늘리는 기술 발명의 움직임 속에서 바로 새로운 생산형태, 즉 공장이 등장한다. "공장에서는 동력과 기계를 사용했다. 1765년에서 1775년에 걸쳐 와트가 착상, 제작한 증기기관은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기계 작동에 사용되었다(1800년 경에는 약 500대가 사용되고 있었다)."(139) 그러나 애덤 스미스의 세계는 아직 "대공업이 존재하는 세계는 아니었다. 또한 증기력이나 기계장치를 사용하는 세계도 아니었다. 스미스의 세계는 매뉴팩처자본주의의 세계였다. 그가 말하는 공장(못공장, 핀공장)은 '손재주'가 있는 노동자들을 집합시킨 곳이었으며 그가 언급하는 직업들은 아직 수공업적인 것들이었다."(146-7)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예비하던 시기에 "계몽주의 이데올로기와 자연법 사상, 보편적 조화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스미스는 시장을 통해 작용하는 '자연적 자유의 체제'를 신뢰했다."(149-50)


19세기 초, 산업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공장주, 제조업자, 산업가 등의 새로운 세대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산업부르주아지는 아직 응집력 있는 사회계층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던) 공장노동자들도 기계제 생산의 가차 없는 규율과 끔찍한 궁핍의 위협에 지배받고 있었다. 사회적 기반이 없고 배우지 못한 이들 불안정한 노동자는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지 못했다. 이와는 반대로 구사회 계급들은 아직도 건재했다. 즉 귀족과 봉건 지주, 농민, 수공업자, 소매상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또한 과거의 가치 규범을 내건다든지(영국의 에드먼드 버크, 프랑스의 루이 드 보날드와 조제프 드 메스트르) 이성과 형평에 따라 고안된 새로운 사회를 내걸면서(영국의 윌리엄 고드윈과 로버트 오언, 프랑스의 앙리 드 생시몽과 샤를 푸리에) 당시 진행 중인 변화를 비판하는 소리도 대개 이들 계급 사이에서 나오고 있었다."(158-9)


맬서스는 빈곤과 궁핍을 개인 윤리의 문제로 치환했다. 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노동력과 경제력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행복 추구를 미루어야 한다."고 썼다. 이리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은 자연법칙을 존중하지 않은 죄인들이 된다."(162) 리카도 역시 이 불행을 '과학적 필연'으로 설명한다. 그는 "다른 모든 계약과 마찬가지로 임금도 순수한 경쟁과 시장의 자유에 맡겨야 하며 입법자의 간섭에 구속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장 바티스트 세에게 "재산, 자유, 번영이라는 말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생산자본이라는 재산이 있으면 이로부터 수익이 얻어지고 그러려면 생산자본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가 보기에 "다른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닌 모든 규제는 소유권에 대한 침해"에 불과했다.(164-5) 이러한 정신에서 시장의 자유로운 소유권을 옹호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유토피아'가 형성되었다.


인간의 행복이 모든 영역의 수요와 공급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통해 보장된다는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에 맞서 인간의 행복이 그 사회에 적합한 조직화를 통해 보장된다는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사상도 전개되었다. "전자는 상인부르주아지에 의해서 그들에게 자유주의적 터전이 필요할 때마다 (각종 규제 조치와 길드, 독점과 특허, 구빈법, 보호주의에 맞서) 지지되고 이용되었다. 후자는 기술자들(생시몽주의)로부터도 반향이 있었지만 특히 프티부르주아지(수공업자, 상점 주인)와 대중 계층(소매상과 노동자)의 지지를 받았다."(169-70) 대공업의 확립과 공장의 확대 속에서 "매뉴팩처 공장주나 도매상, 그 밖에 수공업자의 후예, 직공장 등은 제조업 공장주가 되어, 농촌의 변화와 이민으로 풍부해진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려는 일념으로 일을 시켰다. 바로 이러한 참상과 참기 힘든 억압 속에서 당시 최초의 근대적 노동자계급의 핵심이 형성되었다."(175)


"부르주아지의 부와 권력은 19세기 노동자들의 극심한 궁핍에 기초해 증대했다. 여러 가지 유형의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 때문에 노동시간은 연장되고 임금은 낮았다. 이들의 생활조건은 종종 전 단계의 농노보다 훨씬 가혹했다. 자선과 온정주의가 때때로 극에 달한 빈궁을 완화해주었고 이민은 이의 배출구 역할을 했다.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 진압은 가차 없는 것이었다." 계급 결집과 대립 속에서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는 '순수하고 완벽한 경쟁상태에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후에는 한계효용이론을 내걸고 '과학적 이론'의 모습을 갖추었다. 마르크스가 그 속에서 젊은 날의 신념을 얻었으면서도 또한 이를 비판했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는 마르크스에 의해 '과학적 사회주의'의 분석에서 유래하는 '역사적 필연성'으로 바뀌게 된다. 이 두 유토피아는 적어도 20세기 말까지 살아 있었다."(228-9)


"19세기 전반기의 공황은 이중의 운동을 통해 조절regulation이 이루어졌다." 물가 하락과 매출 감소는 "불량자본의 주기적인 '추방'이라는 급진적인 처방"을 불러왔고, 실업과 실질임금 하락은 "공황(과 그에 따른 불량자본의 '추방')을 확대"하긴 했지만, 또한 "값싼 가용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불황을 타개할 수 있게 했다."(246-7)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조절양식mode of regulation이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노동자계급이 충분히 강력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세력관계를 확립한 나라들에서는 공황기의 실질임금 하락에 거세게 저항했다. 이와 동시에, 고용주들은 대기업 트러스트나 기업그룹의 결성(미국, 영국), 카르텔의 결성(독일), 직능단체의 조직(프랑스) 등을 통해 자본주의를 재편했다." 위기를 극복하는 와중에 "다시 자본주의 경제의 새로운 조절양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249)


전 세계로 보면, 1913년에 "약 1500만 명의 노동자가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각종 사회입법을 탄생시킨 이 새로운 세력관계는 "많은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신념을 갖게 했다. 폴 라파르그는 "혁명이 임박했다. ··· 인간의 착취를 끝내는 데는 단 두 차례의 봉기로 충분하다."고 했다(1882).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여러분, 내 말을 믿으시오. 사회혁명이 임박했습니다. 10년 안에 사회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나는 노동자들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를 단언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1883)."(265) 그러나 이에 맞서 노동자에 대한 새로운 지배양식이 등장하고 있었으니, "산업자본의 집중과 집적, 트러스트와 국가독점의 형성, 그리고 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무역과 자본 수출을 통한 자본주의 지배 영역의 세계적 확대, 다국적 그룹의 형성, 세계의 분할에 이르게 되는 식민지화 등이 그것이다."(274)


문명 전파라는 사명감으로 포장된 "문명화된 혹은 종교적인 양심이 이를 축복하고 인종주의와 백인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이 마지막 주저를 제거해주었다. 경제적 이익이 이를 재촉하고 때때로 뜨거운 태양과 광활한 공간에 대한 신비감이 이를 자극했다. 근대식 무기는 이에 필요한 용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그 밖에 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 원정대가 등장했다."(284)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이 유착한 금융자본이 등장했고, 국가는 영토 확장이라는 대규모 사업을 집행하는 데 적합한 군국주의로 무장했다. 일국 자본주의를 확장해야 한다는 지배논리에 국민이 동원되면서, "노동자의 국제주의와 반反자본주의는 무쇠 단지가 될 국민감정과 민족주의 앞에서 토기 단지"로 전락했다.(293) 결국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신화는 무너졌다. 1912년, "수년간의 캠페인을 통해 준비된 12월 16일의 반전 총파업은 그 규모와 적절한 시기 선택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297)


"본질적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공황은 1914-18년의 세계대전을 낳았던 것과 똑같은 모순들이 합쳐지면서 초래되었다. 제1세대 공업화 각 부문의 침체와 각국 자본주의 간의 경쟁 격화가 그것이다. 또 보다 공평한 생산물의 분배를 확보하고자 하는 노동운동이 이들을 부추겼다." 이와 동시에 "제2세대 공업 부문이 한창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본가 대부분의 눈에는 체제를 무너뜨리는 사태로 보였던 노동자 계급 일부의 구매력 증대는, 변증법적 역전을 통해 경제 동학과 사회 통합의 요소가 되었다."(355) "대외투자 수익과 부등가교환을 통해, 농산물과 공산품의 협상가격차 확대와 교역조건의 개선을 통해, 식민지 그리고 광물과 농산물 생산국인 신생국으로부터 공업자본주의 강대국으로 막대한 양의 가치 이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구미 노동자계급의 상대적인 구매력 향상은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부분적으로는 전 세계 농민의 수탈에 의해 확보한, 또는 보상된 것이었다."(356)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다양한 초과노동 강제를 통해, 그리고 현대식 장비를 이용한 축적 노력에 기초해 1950-60년대의 생산성 증대가 이룩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노동강화가 수반되든 수반되지 않든 노동 시간의 연장을 의미했으며(농민, 트럭운전사, 가내노동자) 또 다른 경우에는 주로 노동강화를 의미했다(일관작업대 노동, 테일러주의, 성과급 임금제도).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의 탈숙련화와 노동강화로, 또는 생활여건의 하락(8시간 3교대 혹은 8시간 4교대의 야간작업, 교대작업)으로, 그 밖에 이들 여러 가지 경우의 혼합으로 나타났다. 20년 동안 이러한 시도들은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전쟁을 겪고 약탈과 파괴를 경험한 한 세대의 노동자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는 구매력의 증가와 함께 미국이 전간기에 경험한 '소비사회', '대량소비'로의 길이 주어졌기 때문이다."(370-1)


전후 압도적으로 진행된 자본주의의 세계적 단일화(세계시장, 생산의 다국적화)와 지역적 파편화(노동 비용의 불균등, 동일 상품의 '국민적 가치'의 편차)는 새로운 현상처럼 보이지만, 그 근본에는 약자(저개발 국가 혹은 노동계급)의 몫을 수탈하여 강자(선진국 혹은 자본가 계급)의 창고에 축적하는 착취 시스템이 변함없이 작동한다. "16-18세기의 면직물 매뉴팩처, 19세기의 비철금속과 뒤이은 제철 대기업, 자동차공업과 전기공업, 이어서 정보와 원격통신 대그룹"은 여전히 "초과노동, 생산된 가치와 잉여가치의 실현, 더 많은 생산을 유도하는 자본의 확장, 더 넓은 시장과 더 많은 잉여가치 등"을 강요하고 강요당한다. 그러나 이는 "확장의 논리일 뿐 아니라 위기의 논리이기도 하다. 증대된 생산은 배분된 구매력을 감안할 때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시장 포화, 경쟁 격화, 이윤율 저하를 가져오기 때문이다."(429) 자본주의는 역사에 등장한 모든 시기에 걸쳐,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파괴자였다."(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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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1-02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 님의 글 애독하는 독자입니다.
항상 좋은 글 넘 잘 읽고 있습니다. ^^
한가지 궁금한 점은 모든 읽으신 책의 별점을 다섯 개 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여쭤봐도 무례 아니죠?^^

nana35 2018-01-04 07:42   좋아요 1 | URL
첫째는, 딱히 흠잡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는 좋은 책들이기 때문이구요.
둘째는, 평가가 아닌 정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구요.
셋째는, 별 다섯개가 아닌 책들은 (가급적) 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