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 이토록 곡해된 사상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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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체제에 대한 견해를 수정한 대다수 급진주의자들이 단순히 주변의 면화공장 수가 줄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구레나룻이나 머리띠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던져 버린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맞섰던 체제가 너무 강고해서 깨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커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꿀 가능성에 대한 환멸이 결정적이었다."(17) 이처럼 자본주의는 놀랄 만한 진보를 성취했지만, "단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만도 엄청나게 달려야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한계가 자본 그 자체이며 자본의 끊임없는 재생산이 자본주의의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20) "마르크스주의의 의미는 그것이 엄밀히 한시적이라는 데 있으며, 따라서 자기 정체성의 전부를 그것에 투여하는 사람은 핵심을 놓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그 자체이다."(14)


2.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으로만 괜찮다?


"사회주의가 되려면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넉넉해야 한다. 마르크스나 엥겔스부터 레닌과 트로츠키에 이르기까지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이와 다르게 생각한 적이 없다."(28) 물질적인 기반이 결여된 상태에서 끔찍한 희생을 강요한 스탈린주의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마르크스 작업의 평판을 떨어뜨린다기보다 오히려 그 타당성을 증언해준다."(31)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작동할 수 없다는 이들은 "풍족한 조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 해도 복잡한 현대 경제를 시장 없이 어떻게 운영할 수 있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점점 더 많은 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놓는 대답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시장은 사회주의 경제의 빠뜨릴 수 없는 일부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른바 시장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소유되지만 자치적인 협동조합들이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32-3)


3.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이다?


"생산력-생산관계 모델의 명백한 결함 가운데 하나는 결정론적인 측면이다. 여기서는 어떤 것도 생산력의 전진에 저항할 수 없는 듯하다. 역사는 불가피한 내적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 역사를 관통하여 뻗어나가며 그 과정에서 여러 다른 정치적 장치들을 무너뜨리는 단 하나의 역사적 '주체'(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생산력)가 있다. 이는 복수심을 가진 형이상학적 관점이다."(51) 그러나 마르크스의 작업에는 생산력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낳는다는 생각 말고 다른 방향의 사유도 있다. 여기서는 "사회적 생산관계가 생산력보다 선차적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 사유에서는 사회적 관계와 계급투쟁을 만들어내는 인간이야말로 역사의 명실상부한 창조자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역사는 인간이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활동에 불과하다"고 쓰고 있다.(56)


4.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마르크스가 (푸리에나 생시몽, 오언을) 반대했던 것은 무엇보다 순전히 논변의 힘을 통해 반대파를 이길 수 있다는 이 유토피아주의자들의 믿음이었다. 그들에게 사회란 사상의 전쟁터이지 물질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었다."(72) "<고타 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 1875)에서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에는 그것이 태어난 자궁인 낡은 질서가 남긴 선천성 반점이 찍혀 있으리라고 쓰고 있다. 그러니 '순수한' 출발 지점이란 없다."(75)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란 "우리가 집단적으로 우리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대체로) 정치적 제스처 게임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을 말한다." "진정으로 다른 미래는 현재의 단순한 연장도 그것과의 절대적 단절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해방 개념은 평탄한 연속성과 철저한 단절 둘 다를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매우 희귀한 존재, 즉 냉철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한 몽상가였다."(79)


5 .마르크스주의는 만사를 경제로 환원한다?


"경제환원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야말로 '생산'이란 단어의 가장 좁은 의미에서 생산을 위한 생산을 믿는다. 반면 마르크스는 더 폭넓은 의미에서 생산을 위한 생산을 믿는다. 그는 인간의 자기실현 자체가 목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며 다른 어떤 목표의 도구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112) 계급은 "경제적 실체인 만큼이나 사회적 구성체이자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것은 관습과 전통, 사회적 제도, 가치와 사유 습관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 현상이다." "생산은 삶의 특정한 형식들 안에서 수행되고 따라서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노동은 언제나 의미를 띠며 인간은 의미 있는 (문자 그대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동물이므로, 노동은 결코 단순히 기술적이거나 물질적인 사건일 수 없다. 신에게 기도하거나 조국을 찬양하거나 아니면 비상금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으로 볼 수도 있다. 요컨대, 경제적인 것은 언제나 그 자체보다 더 많은 것을 전제한다."(116-7)


6. 마르크스에게 세계는 물질 덩어리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은 "역사나 물질이나 정신의 노리개가 아니라 자신의 역사를 만들 능력을 지닌 적극적이고 자기결정적인 존재이다."(125) 유물론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정신'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애초에 그런 질문을 제기하지도 못한다고 답할 것이다. 사회적 협동이 없었다면 우리를 살아 있게 해주는 물질적 생산도 없었을 것이며,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상당 부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의식은 어떤 유령 같은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물질 덩어리지만 독특하게 창조적이고 표현적인 덩어리이며 우리가 '정신'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창조성이다."(127) 따라서 "이 현실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현실을 우리 자신의 활동과는 별개의, 자연적이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소외라 칭한 것이다."(129)


7.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사라진 노동계급에만 집착한다?


"구분을 복잡하게 만들고 위계를 무너뜨리고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의 형태들을 잡다하게 섞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성이다. 어떤 삶의 형태도 이보다 더 혼종적이고 다원적이지는 않다. 정확히 누가 착취받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되면 이 체제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평등하다. 자본주의는 가장 독실한 포스트모더니스트만큼이나 반反위계적이며 가장 열렬한 국교회 목사만큼이나 관대한 포용주의자이다."(153)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계급이 점유하는 위치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커다란 망치를 다루는 근육질 남성만이 아니라 "노동력을 자본에 팔 수밖에 없고 자본의 억압적 규율 아래 신음하며 자신의 노동 조건에 대한 통제력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 모두를 포괄한다."(159)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은 "제 기능을 다하면서도 박탈당하고, 특정하면서 또한 보편적이며, 시민사회의 불가결한 일부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156)


8.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폭력적인 정치 행동을 선호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조직된 노동계급이 다양한 동맹 세력과 더불어 부르주아 혹은 자본주의적 중간계급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소규모 반란 집단이 아닌 대다수의 행동이다. 사회주의는 대중적 자치에 관한 것이며,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전문 포커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혁명을 대신 해줄 수는 없다."(174) 혁명주의자들 역시 개혁을 옹호한다. 하지만 이들이 개혁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그와 같은 개혁을 더 장기적이고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데 있다.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조만간에 체제가 절대 양보하지 않는 지점에 이를 것이며, 마르크스주의에서 이 지점은 사회적 생산관계로 알려져 있다. 혹은, 좀 거친 기술적 용어로는, 물적 자원의 통제권을 절대 내놓지 않으려고 작정한 지배계급이다. 오직 그 지점에서만 개혁과 혁명 사이의 결정적인 선택이 중대한 문제로 떠오른다."(176)


9. 마르크스주의는 전권을 가진 국가를 믿는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시들어 소멸하리라 희망한 것은 중앙 행정부라는 의미의 국가가 아니었다. 복잡한 근대 문화에서는 어디서든 그런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자본> 제3권에서 "모든 공동체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공동의 활동들"에 관해 썼다. 행정체로서의 국가는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끝을 보고자 희망했던 것은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폭력의 도구로서의 국가였다."(181-2) "국가는 스스로를 위로부터 사회를 형성하는 존재로 보지만, 실상은 사회가 낳은 산물이다. 사회가 국가에서 나온 게 아니라 국가가 사회에 기생한다. 전체 구조가 뒤집힌 것이다." "마르크스의 목표는 국가와 사회, 정치와 일상생활의 이런 간극을 전자를 후자에 녹임으로써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가 민주주의라 부른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현존하는 국가는 그저 "현 체제가 입힌 인간적 손상의 일부를 닦아낼 수 있을 뿐이다."(185-6)


10. 마르크스주의는 최근의 급진적 운동에 기여한 바 없다?


로버트 J. C. 영에 따르면 1960년대 이전에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문제와 더불어 젠더라는 이슈를 체계적으로 제기하고 논의한 것은 공산주의 운동이 유일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의 권리를 확고히 옹호했을 뿐 아니라 세계 반식민주의 운동에도 가장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실제로 20세기 전반부에 걸쳐 그 운동에 가장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의 세 가지 가장 위대한 정치투쟁, 즉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여성해방, 파시즘에 대항하는 싸움의 선두에 섰다. 반식민주의 전쟁의 위대한 1세대 이론가 대다수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없어서는 안 될 출발점을 제공했다."(196-7) 또한 마르크스는 "자연 자원에 대한 단기적인 자본주의적 착취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생산 사이의 갈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독일 이데올로기>를 쓸 때부터 이미 "사회 분석에 지리학적이고 환경적인 요인들을 포함"시킨 현대적 환경주의자이기도 했다.(2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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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재만 옮김 / 라티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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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


◎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출현


"제조업은 소규모 상업 부르주아지를 파산시키는 거대한 설비를 세우기 위해, 독립적으로 일하는 수공업자들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자연력을 이용하기 위해 대규모 자본을 필요로 한다. 제조업은 노동의 분업, 수력과 특히 증기력의 활용, 기계의 활용이라는 세 가지 커다란 지렛대를 이용해 지난 세기 중엽부터 세계를 급속도로 혼란에 빠뜨렸다. 제조업은 좁게 보아 중간계급을 창출했고, 크게 보아 노동계급을 창출했으며, 때가 되면 분명 권좌에서 쫓아낼 것이긴 하지만 중간계급이라는 선택받은 이들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한편, '그리운 옛 시절'의 수많은 소규모 중간계급 사람들이 제조업으로 인해 전멸하고 부유한 자본가들과 가난한 노동자들로 갈라졌다는 것은 명백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제조업의 집중화 경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과 마찬가지로 인구도 집중된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데, 제조업에서 인간, 즉 노동자는 제조업자가 임금이라는 형태로 이자를 지불하는, 자본의 한 조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60)


◎ 대도시 프롤레타리아트 주거지의 실상


"보통 빈민굴에는 단층이나 복층인 작은 집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데, 지하실을 주거용으로 쓰기도 하는 이 집들은 거의 언제나 대중없이 짓는다. 방 서넛과 부엌 하나를 갖춘 이 집들은 런던의 일부 지역을 뺀 잉글랜드 전역에서 노동계급의 일반적인 거처다. 거리는 보통 비포장에 험하고 지저분하며, 채소와 고기 찌꺼기가 그득하고, 하수도나 배수로가 없는 대신, 물이 고여 악취가 진동하는 웅덩이들이 있다. 게다가 형편없고 난잡한 건축 방법 때문에 다수가 모여 사는 좁은 공간에서 환기마저 원활하지 않으니, 이런 노동자가 거주 구역에 어떤 분위기가 팽배해 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맑은 날이면 거리가 빨래를 말리는 장소로 쓰여서, 집과 집 사이에 매단 빨랫줄에 젖은 옷들이 걸려 있다."


"집들 사이에 가려진 통로로 들어가면 보이는 그 불결하고 위태로운 폐허는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다. 멀쩡한 창유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벽은 부스러지는 중이고, 문설주와 창틀은 헐겁거나 깨져 있고, 문은 낡은 판자를 대충 못질해 만든 것이다. 이 도둑들의 거주지에는 훔쳐갈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문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사방에 쓰레기와 재가 무더기로 쌓여 있고, 문 앞에 부어버리는 구정물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웅덩이로 모인다. 여기서는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 급여가 가장 적은 노동자들이 도둑이나 매춘의 희생자들과 구별을 두지 않고 부대끼며 살아간다. 이들 대부분은 아일랜드 인이거나 아일랜드 혈통이다."(67-8)


◎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간의 공간 단절


"이 도시(맨체스터)는 기묘하게 건설되어서, 어떤 사람이 여기서 자기 업무와 즐거운 산책으로만 활동을 국한한다면, 몇 년 간 매일 이 도시를 드나들면서도 노동자 구역, 나아가 노동자를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현실은 대체로 무의식적이고 암묵적인 합의에 따라, 또한 노골적이고 의식적인 결정에 따라, 중간계급을 위해 떼어둔 지역과 노동자 지구들을 뚜렷하게 분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부르주아지 상층은 더 멀리 떨어진 콜턴과 아드윅, 또는 치탐 힐과 브로턴, 펜들턴의 산들바람 부는 고지대의 정원 딸린 저택에서, 멋지고 안락하고 30분이나 15분마다 맨체스터로 향하는 합승마차가 지나가는 집에서 건강에 좋은 시골 공기를 마시며 자유롭게 지낸다. 이런 배치의 가장 좋은 점은 이 부자 귀족들이 모든 노동자 구역의 오른쪽과 왼쪽에 숨어 있는 음울한 참상을 보지 않고도 그 구역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가장 짧은 도로를 이용해 상업 구역으로 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88)


◎ 부르주아지가 파괴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체에 상해를 입혔는데 그 상해가 죽음을 초래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과실치사라고 부른다. 만일 가해자가 자신이 입힐 상해가 치명적인 것을 사전에 알았다면, 우리는 그의 행위를 살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수백 명을 제 수명보다 훨씬 일찍 부자연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내몰 때, 즉 칼이나 총알 못지않은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내몰 때, 수천 명에게서 생활필수품을 빼앗고 그들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위치로 몰아넣을 때, 법의 완력을 이용해 그들을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묶어둘 때, 이 희생자 수천 명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상황이 지속되도록 허용할 때, 그럴 때 사회의 행위는 앞에서 말한 한 사람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살인이다."(142-3)


"술은 노동자들에게 거의 유일한 쾌락의 원천이며, 세상만사가 공모해 그들을 술로 이끈다. ··· 노동자의 사교 욕구는 술집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데, 다른 장소에서는 친구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어떻게 술집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이런 환경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폭음에 빠지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불가피한 일이다. ··· 음주는 더 이상 방탕한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악덕이 아니다. 음주는 하나의 현상, 선택권이 전혀 없는 대상에 작용하는 상황의 필연적이고도 불가피한 귀결이 된다."(150)


"1840년 리버풀에서 상층계급과 젠트리, 전문직 종사자 등의 평균 수명은 35세였고, 사업가와 형편이 괜찮은 수공업자의 평균 수명은 22세였으며, 숙련노동자와 날품팔이, 시중을 드는 계급 일반의 평균 수명은 15세에 불과했다. 의회의 보고서들에도 이와 비슷한 사실이 많이 담겨 있다. 사망률이 아주 높게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어린 자녀들의 음울한 사망률 때문이다. 어린이의 연약한 신체로는 열악한 생활환경의 악영향을 견뎌내기가 몹시 어렵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거나 둘 중 한 명이 사망한 가정의 아이들은 대개 방치되어 즉각 방치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방금 인용한 보고서에 따르면 맨체스터에서 노동계급 자녀의 57퍼센트 이상이 5세 이전에 죽는 반면에 상층계급 자녀의 경우 이 비율이 20퍼센트이고 시골의 모든 계급의 자녀의 경우 32퍼센트를 넘지 않는데, 이런 사실에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155)


노동자들이 제공받는 교육의 질이 어떠한지는 어린이 고용위원회의 보고서에 실린 한두 가지 사례를 토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열일곱 살 먹은 한 소년은 2의 2배가 4라는 사실을 몰랐고, 자기 손에 돈을 쥐고도 2펜스가 몇 파딩[영국의 옛 화폐 단위, 4분의 1페니]인지도 몰랐다. 몇몇 소년들은 런던은 물론이고 자기들 고향에서 걸어서 겨우 1시간 거리인 데다가 울버햄프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윌렌홀Willenhall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몇몇은 여왕의 이름을 비롯해 넬슨Nelson, 웰링턴Wellington, 보나파르트Bonaparte라는 이름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 바울이나 모세, 솔로몬을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들이 딕 터핀Dick Turpin[18세기 영국의 노상강도], 특히 잭 셰퍼드Jack Sheppard[18세기 영국의 강도, 절도범, 탈옥범]의 생애와 활동, 성격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160)


◎ 분업의 파괴성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강제노동의 영향은 분업 때문에 몇 배로 증대해왔다. 대다수 부문들에서 노동자의 활동은 매년 똑같고 매분마다 반복되는, 순전히 기계적인 하찮은 작업으로 전락한다. ··· 이런 노동은 정신활동을 할 틈을 주지 않으며, 다른 생각을 일체 못할 정도로 노동자의 주의력을 잡아끈다. 이렇게 노동하라는 형벌, 즉 먹고 자기에도 부족한 시간만을 줄 뿐 야외에서 운동을 하거나 자연을 즐길 시간을 전혀 주지 않고 정신활동을 할 시간은 더더욱 주지 않은 채 시종일관 노동하라는 형벌이 어떻게 인간이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을 완화할 수 있겠는가?"(168)


◎ 여자와 아동노동 착취


"실을 잣고 직물을 짜는 작업에서 인간 노동의 몫은 주로 끊어진 실을 잇는 것이고 나머지는 전부 기계가 담당한다. 이 일을 하는 데는 근육의 힘이 아니라 손가락의 유연성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남자는 이 일에 불필요할 뿐 아니라 손의 근육이 더 발달하기 때문에 실제로 여자와 어린이보다 부적합하며, 따라서 자연히 거의 전부 여자와 어린이로 대체된다. 이런 이유로 근육을 사용하고 힘을 쓰는 일을 증기력이나 수력이 대체하면 할수록 고용할 필요가 있는 남자의 수가 줄어든다. 또한 여자와 어린이는 임금이 더 싸고 이 부문들에서 남자보다 일을 잘하기 때문에 남자를 대체해간다. 방적 공장에서 소모방적기를 차지하는 이들은 거의 전부 여자와 소녀다."(191)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아내의 취업은 필연적으로 가정을 완전히 해체하고, 가정에 토대를 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런 해체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부모까지도 도덕적으로 대단히 타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생후 1년간 아기를 걱정할 시간도 없고 남들처럼 다정하게 돌볼 시간도 없는 어머니, 실제로 아기를 거의 보지도 못하는 어머니는 자식에게 참된 어머니일 수 없고, 불가피하게 자식에게 점점 무관심해지며, 모르는 사람 대하듯이 자식을 애정 없이 대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훗날 가정생활을 망치기 마련이고, 언제나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가정을 결코 편하게 느끼지 못하며, 그 결과 이미 전반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노동계급의 가정을 더욱 흔들게 된다."(194)


◎ 노동운동의 의의 


"조합과 파업은 부르주아지의 패권이 오로지 노동자들 간의 경쟁, 즉 노동자들의 응집력 부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리고 조합은 아무리 편파적이고 아무리 편협한 길이라 해도, 바로 현존 사회질서의 핵심 중추를 겨냥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 사회질서에 엄청난 위협이 된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현존 사회질서 전체에 가장 쓰라린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지점은 경쟁이다. 노동자들 간의 경쟁이 타파된다면, 모든 노동자가 더 이상 부르주아지에게 착취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재산의 지배는 끝장날 것이다. 임금이 수요와 공급의 관계, 노동시장의 우연한 상태에 달려 있는 까닭은 단지 이제까지 노동자들이 사고팔리는 동산으로 취급되는 처지를 감수해왔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더는 사고팔리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는 순간,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노동력뿐 아니라 의지까지 가진 인간의 역할을 맡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오늘날의 정치경제학 전체가 끝장날 것이다."(275)


◎ 공상적 사회주의 비판 (오언주의)


"여론의 지지를 얻는 방법 외에 다른 모든 방법을 거부할 정도로 철저하게 유순하고 평화적인 영국 사회주의자들은 기존 질서를 나쁜 그대로 받아들인다. 게다가 그들의 입장과 현재 정식화되어 있는 그들의 원리를 감안할 때,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기에는 너무나 교조적이다. 그들은 하층계급들의 도덕적 타락을 한탄하면서도 이런 옛 사회질서의 해체에서 진보의 요소를 보지 못하고, 유산계급의 사적인 이해관계와 위선이 부패를 훨씬 더 많이 초래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그들은 어떠한 역사적 발전도 인정하지 않거니와,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고 또 필연적인 지점까지 국민들이 정치적 발전이라는 행진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도외시한 채, 국민들을 단숨에, 하룻밤 사이에 공산주의 상태로 데려다 놓으려 한다. 그들은 노동자가 부르주아에 분개하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이런 계급적 증오는 효과가 없고 결국에는 도덕적 유인만이 노동자를 목표를 더 가까이 데려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증오 대신 현재 영국의 상황에서 훨씬 더 효과가 없는 박애와 범애를 설교한다. 그들은 심리적 발전만을, 즉 과거와 전혀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인간의 발전만을 인정하지만, 그 개인을 포함해 전 세계는 과거에 의존한다. 이처럼 그들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너무나 형이상학적이어서 거의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294-5)


◎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선동


"언젠가 나는 어떤 부르주아와 함께 맨체스터로 들어가면서 그에게 형편없고 건강에 해로운 건축 방법과 노동자 구역의 참혹한 여건에 대해 말했고, 이렇게 난잡하게 건축된 도시는 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 사람은 끝까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우리가 헤어진 길모퉁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여기서 큰돈을 벌 수 있죠.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 영국 부르주아는 돈만 벌 수 있으면 자기 노동자들이 굶주리건 말건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인생의 모든 상황이 돈을 척도라 삼아 평가되고,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것은 허튼 수작, 비실용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헛소리로 치부된다. 그런 까닭에 물물교환에 종사하는 이 유대인들은 부에 관한 학문인 정치경제학을 제일 좋아한다. ··· 부르주아는 자신이 공원들과 구매와 판매가 아닌 다른 어떤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336)


"한 계급 전체의 편견은 낡은 외투 벗듯이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안정적이고 편협하고 이기적인 영국 부르주아지는 편견을 떨쳐낼 여지가 가장 적은 계급이다. 이런 추론들은 모두 근거가 가장 확실한 것들이다. 결론과 전제의 근거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일부는 역사적 발전에 관한 사실들, 일부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성요소들이 전부 명확하게 규정되고 선명하게 구분되는 영국만큼 예언하기 쉬운 곳은 없다. 혁명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평화롭게 해결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언한 것보다 혁명이 완만하게 일어날 가능성은 있다. 그렇지만 이 가능성은 부르주아지의 발전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에 달려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요소들을 흡수할수록 혁명 과정에서 유혈사태와 복수, 만행이 덜 자행될 것이다."(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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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 평전 - 프록코트를 입은 공산주의자
트리스트럼 헌트 지음, 이광일 옮김 / 글항아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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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과 제조업자를 겸한 엘리트층을 독일어로 '파브리칸트Fabrikant'라고 한다. 엥겔스가 태어나고 자란 파브리칸트들의 세계는 "제조업과 상업,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가정에 충실한 일상으로 꽉 짜인 세계였다."(64) 엥겔스의 고향인 "부퍼탈에 와본 사람들은 (오염물질을 부퍼강으로 마구 흘려보내는) 공장 말고 다른 것에도 주목했다. "바르멘과 엘버펠트는 둘 다 종교적 감수성이 매우 강한 곳이다. 교회들은 거대하고 출석률도 높다. 교회마다 성경과 선교사는 물론이고 주보週報 같은 것을 발행하는 협회도 있다." 당시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보면 교회 첨탑이 공장 굴뚝 사이로 자리를 다투듯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엥겔스에게 부퍼탈은 '몽매주의자들의 시온 산'이었다. 바르멘과 엘버펠트를 지배하는 정신은 과격한 경건주의였다."(66) "근면과 부는 신의 은총의 징표였으며, 가장 열렬한 경건주의자는 대개 가장 성공한 상인들이었다. (엥겔스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엥겔스2세도 그런 사람이었다."(68)


당대 독일은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의 낭만적 충동이 휘몰아치고, 헤르더가 주창한 민족 이념을 계승한 시인 노발리스(1772-1801)와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2-1814)의 열정이 분출하는 시기였다. 피히테는 "프랑스 치하에서 고통받는 베를린 청중들에게 개인도 민족과 하나 됨을 통해서만 완전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민족 자체가 하나의 영혼과 하나의 목적을 지닌 아름답고 유기적인 실체라고 선언했다."(78)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에 가슴이 벅찼던 엥겔스는 1836년에 쓴 짧은 시에서 "활의 명수인 스위스의 영웅 빌헬름 텔,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사 부용Bouillin, 중세 서사시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에서 사악한 용을 죽인 지크프리트 같은 낭만적인 영웅들을 찬미했다." 엥겔스는 평생에 걸쳐 문화적 애국주의를 간직했으며, "프롤레타리아 국제 연대를 주창하고 조국에서 추방당했을 때도 영웅적 운명의 세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81)


낭만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엥겔스의 정치 의식화는 "브레멘에서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청년독일파를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주세페 마치니(1805-1872)가 결성한 청년 이탈리아당에서부터 귀족주의적인 토리당 분파로 존 매너스 경이 주도한 청년 영국파, 청년 아일랜드 운동의 공화파 서클까지 다양한 청년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운동들은 하나같이 낭만주의적인 민족 이념을 중심으로 애국적 열정의 부활을 주창했다."(88) 엥겔스는 "문학적 차원에서는 영웅 신화에 여전히 끌렸지만 독일의 정치적 미래는 중세에 대한 봉건적 향수로 후퇴하는 차원이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청년독일파의 입장에 적극 동조했다.(90) "엥겔스는 헤겔이 1822-23년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사후에 출간한 <역사철학 강의>를 접하고 거기 제시된 합리적이고 정연한 역사의 발전 과정에 곧바로 매료됐다."(106)


헤겔 철학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독법은 보수적인 입장이다. 역사가 이성이 자유로 향하는 개선행진을 총괄하는 과정이라면, 어떤 단계 이후의 시기는 전 단계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합리적이며 자유로운 시대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헤겔이 국가를 "그 법률체계와 정치구조를 통해 이성과 자유를 토대로 한 특정한 목적을 추구하는 살아 있는 실체로 격상시킴으로써 국가의 목표가 극적으로 고양됐다. 국가는 이제 사적 소유권을 보호하고, 영토를 방어하고, 법을 집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필요악이 아니었다. 국가는 훨씬 고상한 목적을 갖게 됐다. 절대이성의 구현과 같은 것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베를린 궁정 사람들도 헤겔 철학 중에서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현상학 부분은 잊었을지 몰라도 국가의 권위를 높여주는 그런 이론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용하다는 것은 잽싸게 간파했다."(117-9)


급진파는 스승의 저작에 대해 좀 더 진보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이들은 프로이센의 현실─권위주의의 확대, 종교적 규제, 헌법 제정 가능성의 상실 등등─을 접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기리기 위해 자유의 나무를 심기도 했던) 스승이 그런 상태를 진실로 이성이 정점에 도달한 단계로 믿었다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엥겔스가 보기에 "정신이 역사 속에서 구현되는 과정은 모든 기성 정치 체제와 그 지배적인 의식 형태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같이 가는 것이었다. 각 단계는 그 자체 안에 포함된 그런 긴장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약화되면서 종국에는 이성과 자유가 지배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따라서 변증법적 긴장을 중시한 급진파에게 "불변의 영원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문명은 나름의 현실과 철학과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부정되고 수렴될 운명을 지닌 것이었다. 나아가서 이는 헤겔 이전의 철학은 물론이고 헤겔 자신의 사유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였다."(119-21)


1842년 10월, 자원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을 훈육하려는 아버지의 계획은 "아들을 멀리 영국 맨체스터로 보내는 것이었다. 거기서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의 인근 샐퍼드 투자 상황을 체크하면서 영국식 장사 수완을 배운 다음 돌아와서 엥겔스키르헨 공장 일을 돕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굉음 요란한 공장과 무뚝뚝한 상인들이 많은 면직도시Cottonpolis에서 일하다 보면 분명 더 과격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역시 헛된 기대였다. 맨체스터로 가는 길에 엥겔스는 공산주의를 만나게 된다."(140) 종교적 유산을 내버리고 사회주의 인간 이데올로기로 그 자리를 메운 "헤스의 실천적이고 사회적인 이론화 작업은 청년 헤겔파를 공산주의적인 방향으로 끌어갔다." 1842년 가을, 엥겔스에 따르면 일부 청년 헤겔파(본인도 포함시켰다)는 "정치적 변화를 더욱 촉진시켜야 한다며 공유재산에 토대한 사회 혁명이야말로 일반 원칙에 부합하는 유일한 인류의 상태라고 선언했다."(153)


"엥겔스에게 사적 소유란 정치경제학의 모든 자질구레한 측면까지(예를 들면 임금, 교환, 가치, 가격, 화폐 등등)를 망라하는 개념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그는 맨체스터에서 두 눈으로 목격했다. 엥겔스는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전제인 동시에 제거 대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적 소유의 폐기 및 그에 따른 개인적 탐욕의 제거는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결국 역사의 종언 및 공산주의의 도래로 귀결된다." "파리 센 강 좌안左岸 아파트에 살고 있던 마르크스가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에 매료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191)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서 엥겔스는 "저널리스트로서의 특출한 재능을 과시하면서 청년 헤겔파의 '환상'과 '이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허튼소리'를 '살아 있는 현실'과 극적으로 대비시켰다. 이렇게 정치철학과 물질적 현실을 결합함으로써 이후 엥겔스의 많은 논쟁적인 저작의 선구가 된다."(193)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는 "정치적 설득을 목표로 한 유연한 선전 작업이었다. 풍경, 사람들, 산업 등등 모든 부문에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부여했다." "맨체스터의 다양한 경제 분야별 차이─면방적공장 외에 유통, 서비스, 건설, 소매업 등등─는 슬며시 무시되고 노동과 자본이라는 흑백 대립이 도시의 핵심으로 강조된다. 마찬가지로 부유한 노동계급 시민사회─노동자들에게 기술교육을 제공하는 기계공 연구소나 친선모임, 노동자 클럽, 정당, 각종 기관의 부설 교회 등등─도 전혀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엥겔스는 오로지 역사적 소명을 성취하고자 열망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획일적인 모습만을 제시한다."(207) "후일 주류 마르크스 사상으로 여겨지는 것 가운데 상당 부분─계급 분리의 본질, 현대 산업자본주의의 내재적 불안정성, 부르주아는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시각, 사회주의 혁명의 불가피성 등등─은 엥겔스의 이 탁월한 저서에서 이미 최초로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다."(211)


"파리는 '공산주의자동맹' 형성의 무대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신들의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합류한 정치적 도구였다. 여기서 엥겔스는 조직정치의 음습한 기술을 배웠다. 파리의 여인숙과 공장을 누비면서 엥겔스는 세계 차원의 공산당으로 정점에 도달할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 활동─표 조작에서부터 절차상의 술책까지─은 물론,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논쟁적인 책 <공산당 선언> 집필을 마르크스와 함께 했다."(216) "두 사람의 우정의 첫 결실은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반대하여>(1845)라는 제목의 팸플릿이었다. 이 짧은 책은 맨체스터와 파리에서 보낸 시절 이후 청년 헤겔파의 관념론적 잔재에 대한 두 사람의 거부감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새로 수용한 유물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역할을 했다."(221)


"바이틀링의 원시적인 공산주의 말고 유럽 대륙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하는 마르크스·엥겔스에게 또 하나의 위협이 되는 것은 프랑스 철학자 프루동을 중심으로 한 '진정眞正' 사회주의 또는 '철학적' 사회주의였다." 마르크스는 "프루동 철학의 프티부르주아적 성격, 공상적인 노동 교환 계획, 자본주의적 관계들을 종식시키는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수행하는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인식 부재 등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볼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륀과 프루동의 '진정사회주의' 개념이었다. 진정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소명을 무시하고 공산주의가 요구하는 극적인 사회적 도약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철학이었다. 그들의 접근법은 "부르주아 사회의 존재, 즉 그에 따르면 경제적 조건과 정치적 체제를 기정사실로 놓고 출발했다." 국제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프티부르주아적 생활양식을 보전하려는 편협한 시도는 공산주의의 최종 승리에 방해가 되는 것이었다."(244-6)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 독일노동자교육협회 런던 사무국에서 출간된 이후 '침묵의 음모'에 밀려 묻히고 말았다. 공산주의자동맹 회원 몇 백 명은 아마도 이 소책자를 읽었을 것이고, 영어 번역판도 1850년 하니가 운영하는 차티스트 운동 계열 신문 <붉은 공화파>에 연재됐다. 그러나 책은 많이 팔리지도 않았고,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현실 역사가 <공산당 선언>을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848년 2월 24일 아침,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파리에 있는 도심 별장에서 걸어 나오다가 얼굴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혁명의 냄새가 떠도는 것이 느껴진다"고 단언했다. 그날 오후 파리의 카퓌신 거리는 피로 물들고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늘어선 가로수들은 바리케이드용으로 베어졌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다시 시작된 프랑스 군주제는 와해됐다."(263)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희망적인 시각으로는 1848년의 놀라운 사건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교과서처럼 보였다. 유럽의 낡은 정치·법률 제도는 급변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맞지 않았고, 따라서 새로운 경제 현실에 맞춰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산업화라고 하는 토대와 봉건적인 상부구조 사이의 불일치가 커짐에 따라 다음 단계로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혁명이 올 것은 분명했다. 중산층이 제 손을 더럽히며 구세계를 제거한 다음, 즉 부르주아 혁명 다음 단계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가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1848~49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을 촉진한 요인은 경제 불안에서부터 민족 통일의 열망, 왕정을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도입하고자 하는 공화파의 요구 등등 다양했다." 지역·국가별로 노동자들의 지지 정도, 급진파 지도부의 존재 여부, 반동세력의 반격 수준 등에 따라 상황은 극심하게 요동쳤고, 1848년 혁명은 결과적으로 원래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267-9)


"이제 마르크스는 소심한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그르쳤다"고 공공연히 비난하면서 노동자를 위한 독자 정치노선을 발전시켜갔다.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1848년의 노동계급-중산층 동맹은 이제 확실히 재조정을 거쳐야 할 시점이 됐다. 프롤레타리아 지배를 곧장 도입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294)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독일 제국 헌법 쟁취 투쟁>을 집필했다. 여기서 "1848년의 수확 전체를 허사로 만들었다는 혹평을 받은 '빌어먹을 악당들'은 바로 부르주아지였다." 유럽의 대전환이 실패로 끝난 이후 새로운 2단계 모델을 재고해야 하는 두 사람에게 안성맞춤인 장소가 있었다. "1848년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비켜간 영국 수도 런던은 이주민과 망명객, 혁명가, 공산주의자들의 피난처였다. 유럽 대륙의 혼란에서 멀찍이 비켜서 있던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보수적인 영국은 이후 40년 동안 엥겔스의 고향이 된다."(305-6)


"다시 맨체스터로 돌아온 엥겔스는 굴욕스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로 들어갔다. 여기서 면사綿絲 장사로 보낸 20년은 낙담과 좌절로 점철된 희생의 시기였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기간을 '엥겔스의 질풍노도 시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엥겔스가 그렇게 된 것은 상당 부분 마르크스 책임이었다. 1850-70년 엥겔스는 자기 인생에서 의미 있는 많은 것들─지적 탐구, 정치 활동, 마르크스와의 공동 작업 등등─을 포기하고 과학적 사회주의의 대의를 위해 희생했다. 가히 영웅적인 행동이라 할 만했다. 마르크스는 위로조로 "우리 둘은 동업자 관계야. 내가 이론적인 부분과 조직 쪽을 맡고 있는 거지"라고 설명했다. 반면에 엥겔스의 역할은 장사를 통해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우선 마르크스와 그의 늘어나는 식구들을 보살펴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마르크스가 돈 걱정 없이 <자본론> 집필에 전념하도록 돕는 것이었다."(310)


엥겔스의 헌신은 자신의 경제적 안락함과 철학을 연구할 시간, 심지어 명예까지 모두 내놓은 것이었다. 엥겔스가 <자본론>에 한 기여 역시 단순히 통계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마르크스의 경제철학을 먼저 듣고 방향을 잡아주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마르크스와 가정부 헬레네 렌헨 데무트 사이에 태어난 프레디 데무트 문제도 엥겔스는 기꺼이 떠안았다. 데무트의 출생증명서에는 아버지 난이 공란이었는데, "이때 비공식적으로 친부임을 인정해준 사람이 엥겔스였다. 마르크스 부부의 결혼생활을 지켜주기 위해, 그리고 좀 더 큰 차원에서는 정치적 대의를 위해 (영국에 망명 온 혁명가들은 섹스 스캔들을 빌미로 정적을 매장시키는 데는 선수였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아들이 자기 세례명('프레더릭'은 '프리드리히'의 영어식 표기)을 쓰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당연히 엥겔스의 명예는 훼손됐다."(340)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엥겔스가 식견을 펼칠 무대를 제대로 찾았다.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발행되는 종급 석간신문 <팰맬 가제트>에 군사평론가로 소개를 해준 것이다." 엥겔스는 양군이 자브뤼켄 근처에서 첫 대규모 전투를 벌인다는 사실을 정확히 예측해 특종을 만들어냈다. "엥겔스의 권위가 더욱 빛을 발한 것은 1870년 8월 프랑스군이 스당에서 패하고 보나프르트 황제가 포로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였다. 이후 엥겔스의 예언이 계속 맞아 들어가면서 마르크스 일가는 그를 '참모부General Staff'나 짧게 '장군The General'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됐다."(371-2) 이를 계기로 엥겔스는 식민주의의 본질에 관해 좀 더 폭넓게 성찰하기 시작했다. "1850년대 말 어느 시점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연대와 민족해방이 공동의 운명이라는 믿음을 서구의 '유서 깊은 문명화된 민족들'로부터 비유럽권 민족들까지 확대시켰다."(376)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엥겔스가 제공한 빅토리아 시대 공장 생활에 대한 끔찍하고도 살벌한 세부 묘사로 장식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사지를 잘라 파편적인 인간으로 만들었고, 그를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켰으며, 그가 하는 노동의 모든 매력을 파괴해 혐오스러운 고역으로 변질시켰다." 마르크스가 '자본 축적'의 산업 과정을 묘사한 대목이다. "그들은 노동자의 삶의 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변질시키고 그의 아내와 자식까지 자본이라는 괴물의 수레바퀴 밑으로 집어넣는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오랜 세월 <자본론>을 구상하는 동안 제대로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자금, 이런 신랄한 산문을 가능하게 해준 돈은 궁극적으로 바로 그 노동력 착취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착취 대상은 자본이 괴물인 에르멘 앤드 엥겔스사 공장 노동자들이었다."394) 엥겔스는 마침내 1869년 6월 에르멘과의 동업자 계약을 끝내고 지긋지긋한 자본가 역할을 청산했다.


런던으로 이주한 엥겔스는 "리전트 파크 로드 122번지 서재에서 얽히고 꼬이고 분파로 갈려 갈등하는 운동 진영을 조율했다." "이제 맨체스터 부르주아 사회의 도덕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만큼 엥겔스는 마르크스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리지와 터놓고 동거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정치 게임에 다시 복귀해 평생 동지인 마르크스와 손잡고 공산주의의 대의를 위해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402-3) 두 사람은 급속히 산업화되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태동하는 사회주의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을 옹호하는 논쟁적인 팸플릿 <프랑스 내전>을 저술했는데, "유럽 전역에서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됐고 증쇄를 거듭할 정도로 많이 팔린 이 소책자는 음험한 인터내셔널이 세계 노동계급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인식을 굳혀놓았다."(418)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터내셔널에 침투하려는 바쿠닌의 행동보다 "더욱 위협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가 제시한 이념의 힘이었다. 바쿠닌이 주창하는 무정부주의는 완벽한 자유와 삶이라는 관념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바쿠닌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주의는 기존의 불공정한 부르주아 체제 대신 인간을 질식시키는 독재적인 국가 권위주의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바쿠닌은 산업시대의 낙오자들인 빈민, 소작농, 룸펜프롤레타리아들에게 "구성원 각자가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소규모의 자율적 공동체로 조직된 사회라고 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정치 노선으로 보면 이는 자본주의 국가의 권위를 즉각 폐기하는 운동을 의미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는 사회혁명의 결과로서, 그리고 일시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치면서 저절로 사라질 것(소멸)이라고 한 것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노선이다."(422-3)


"엥겔스는 사냥을 주도적으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총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순간부터 그는 중앙집권화된 정책 결정 기구로서의 인터내셔널의 근간을 흔들려는 바쿠닌 일파에 대한 투쟁 전선에 뛰어들었다. 군사적인 마인드를 가진 엥겔스 입장에서는 인터내셔널을 반反권위주의적인 노선에 입각해 "단순히 연락과 통계 정리를 위한 사무소"로 만들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야심은 공산주의의 대의를 깡그리 무장해제할 수 있는 것으로 비쳤다. 또 엥겔스는 바쿠닌의 안티테제를 마르크스의 권위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으로 간주했고, 따라서 또 다른 권력 중심은 제거돼야만 했다."(424) 그러나 무정부주의는 이미 인터내셔널을 위협할 정도로 깊이 침투해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바쿠닌과의 노선 투쟁에서 승리했으나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후 인터내셔널은 미국에서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4년 뒤 해체됐다."(426)


한편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운동권에는 혁명의 양상을 둘러싼 "두 가지 사상 계파가 있었다. 하나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이끄는 노동해방단 일파로 마르크스주의 정통 노선을 따라 러시아는 서구 유럽의 산업화, 노동계급 빈곤화, 계급의식 발전 노선을 따라야만 프롤레타리아 혁명(러시아의 농민 대중도 합세하게 된다)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접근방식은 나로드니키(러시아어로 '인민주의자들populists')가 채택한 것으로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저술에 큰 영향을 받아 원시적인 농촌 공동체(러시아어로 옵시나Obschina)라는 독특한 전통에 비추어 러시아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길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구식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온갖 끔찍한 사태를 겪지 않고도 토지 공동 소유, 공동체적 생산관계,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한 농업 등을 토대로 공산주의 체제를 훨씬 빨리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444-5)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직면한 역사적 난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엥겔스는 초기 공산적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언의 경험을 비교했다. 오언이 1820년대 뉴래너크 공장에 고용한 노동자들의 경우 러시아 옵시나 소작농과 마찬가지로 "몰락해가는 공산주의 소수 집단의 제도와 관습을 따랐지만" 사회주의 원칙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보여주지 못했다. 러시아는 코뮌을 통해 사회주의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더디고도 고통스러운 역사의 행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엥겔스의 선견지명이 빛나는 예언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에서 "50만 지주와 8000만 소작농을 부르주아 차지借地 제도가 통용되는 새로운 계급으로 바꾸려면 끔찍한 고통과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역사는 가장 잔인한 여신이다. 역사의 여신은 수많은 시체더미를 밟고 전진한다. 전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경제적 발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대목이다."(448)


1883년 3월 14일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후 엥겔스는 과학적 발전에 헤겔을 접목하고자 했다. "과학 탐구의 3대 영역─에너지 보존, 세포 구조, 다윈식 진화론─에 주로 의존하면서 엥겔스는 후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세 가지 법칙을 뉴턴의 3대 운동 법칙 스타일로 제시했다. 첫째 법칙은 '양量·질質, 질·양 전화轉化의 법칙'으로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질적 변화는 물질의 양적 변화 또는 갈등 누적에 따르는 운동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 법칙은 '대립물 상호침투의 법칙'으로 헤겔 변증법을 충실히 따라 "안티테제의 두 극은 긍정과 부정으로서 대립된 상태인 동시에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런 모든 대립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 침투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세 번째 변증법은 '부정의 부정 법칙'이다. 어떤 현상의 내적 모순은 다른 체계, 즉 대립물을 낳고, 이 대립물은 다시 목적론적 과정의 일부로서 부정되어 좀 더 높은 단계의 발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469-70)


"바쿠닌과 프루동이 그랬던 것처럼 뒤링은 마르크스·엥겔스가 제시한 중앙집권주의와 경제결정론을 비판하고, 대신 점진주의적인 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먼 훗날이 아닌 지금 여기서 노동계급에게 구체적인 물질적 이득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477) <반反뒤링론>에서 엥겔스가 진정으로 성공을 거둔 부분은 "자연과학 연구를 통해 풍부하게 살까지 붙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방법론을 자본주의에 적용한 것이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법칙은 이제 생물학, 화학, 진화론은 물론이고 부르주아 사회 내부의 긴장을 설명하는 좋은 도구가 됐다."(479) 엥겔스는 일련의 압박이 누적되면 양적인 변화는 질적인 변화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엥겔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한 긴장, 경제적 토대와 정치적 상부구조의 괴리는 임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이어진다고 그는 단언했다."(482)


"루카치를 필두로 프랑스의 장폴 사르트르와 루이 알튀세를 거치면서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엥겔스가 1880년대에 정식화한 것은 결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유물론이고, 그의 변증법이며, 그의 과학주의이고, 마르크스와 헤겔을 그의 방식으로 잘못 결합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루카치는 "엥겔스의 변증법 설명에서 생기는 오해는 크게 봐서 엥겔스가─헤겔의 잘못된 선례를 따라─변증법을 자연에까지 확대 적용한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엥겔스가 일부러 마르크스의 이론을 왜곡했다거나 마르크스가(!) 반대의견을 말하기를 거북해할 만큼 두 사람의 우정이 탄탄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계를 완전히 잘못 파악한 것이다." "마르크스 본인도 1870년대에 다시 헤겔 저작에 관심을 가졌고, 변증법이 자연과 사회에 공히 적용된다고 처음 주장한 것도 그였다."(484-6)


1883년 이후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원고를 교정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엥겔스식의 편집의 면모가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대목이 제3권의 "논란 많은 제3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노동력 절감 기술의 발달로 실제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여력이 점차 줄기 때문에 이윤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이런 이윤율 저하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자체의 취약성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원고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요"라고 했는데 엥겔스는 좀 더 단정적으로 자본주의의 "붕괴"라고 표현했다. 작은 변화지만 자본주의의 시스템적 "위기"나 "붕괴"를 통해 공산주의의 도래를 주장하고 싶어하는 20세기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불도그가 부분적으로나마 자의적인 가필을 한 것은 오로지 공산주의라는 대의를 위해서였다."(492)


1890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19.7퍼센트를 득표한 독일사회민주당SPD이 "보통선거권과 도시사회주의는 물론이고 비례대표 투표 시스템까지 주장한 것은 정치 지형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표시였다. 엥겔스는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론도 그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1848년 혁명의 영웅이자 줄곧 유혈 폭력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고자 했던 엥겔스는 이제 자신의 정치 전략을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게 가다듬었다. 유럽 경제가 산업혁명에서 독점자본주의 단계─국가 카르텔, 식민지 착취, 대형 금융기관 등의 지원이 따른다─로 이행하면서 자본주의는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건한 체제임이 입증됐다."(546) 엥겔스는 한때 스스로를 기요틴을 만지작거리는 프랑스 혁명가 모습으로 그렸지만 이제는 "기습의 시대, 의식화된 소수가 의식 없는 대중을 이끌고 나가는 혁명의 시대는 지났다"고 선언했다.(548)


"엥겔스는 바리케이드와 무장 봉기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지만 '합법적인 수단에만 의존하는 것'은 단호히 거부하고 늘 조심스럽게 사회주의자들의 도덕적 무력 사용권을 옹호했다." "이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등장함으로써 엥겔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만행과 SPD의 개량주의 및 정치적 점진주의 노선 모두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549-50) 엥겔스는 참정권 확대 전략으로 노동자들의 표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공산주의자들은 1790년대의 프랑스 전쟁이 혁명 분위기를 고조시킨 것처럼 유럽 대륙의 전쟁이 유럽의 노동계급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급진적 의식을 각성시킬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알자스로렌을 합병하고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민족주의적 적대감이 고조된 이후로 엥겔스는 전쟁이 민족주의를 격화시켜 노동자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553)


엥겔스는 기성관념에 도전하고 새로운 경향을 추구하고 자신이 내세웠던 입장에 대해서도 종종 다시 생각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사회란, 시대에 관계없이 일정한 형태로 고착돼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다른 모든 사회현상과 마찬가지로 계속 변화하고 변형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엥겔스는 말년에 과학철학자 카를 포퍼 비슷하게 과학의 근본적인 오류 가능성을 경계하는 입장을 보였다. 엥겔스는 "무조건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지식도 결국은 우리가 일련의 오류를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끝없는 체험을 통하지 않고는 무엇을 완전히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복음으로 생각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1895년 8월 5일 그가 사망한 후, 플레하노프와 레닌은 제각각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대표되는 마르스크주의를 완벽한 이론체계이자 변경 불가능한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 혁명 과업에 매진했다.(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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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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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당대의 혁명가들은 "도덕적 목적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행동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으며, 그 목적을 정당화시키려면 보편적인 가치 척도에 호소해야 한다고 믿었다. 유럽 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먼저 확정해야 한다. 둘째, 이에 비추어 현재의 사회구조 중 어느 부분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폐기되어야 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혁명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찾아야 한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는 "가치란 사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사실을 보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성적 존재는 역사 과정의 본성과 법칙을 올바로 통찰하기만 하면 독립적으로 알려진 도덕적 기준들에 의지하지 않고도 어떤 수단을 채택하는 것이 좋은지, 다시 말해 어떤 길이 자신이 속한 질서의 요구에 가장 잘 부합하는지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21-3)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에서의 위치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불변의 보편적 자연권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을 자기방어적인 자유주의적 환상이라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부한다. 사회주의는 호소하지 않고 요구하며 권리에 대해 말하지 않고 사회구조의 제약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활 방식에 관해 말한다."(26) "그가 서명한 성명서나 선언문, 행동강령에는 도덕적 진보, 영원한 정의, 인간의 평등, 개인이나 민족의 권리, 양심의 자유, 문명을 위한 투쟁 등의 문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런 말들은 한때는 민주주의 운동의 이상을 대변했지만 이제는 상투어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28) 마르크스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그 중에서 옳고 독창적이며 중요해 보이는 것을 전부 추려낸 다음, 그 자료를 근거로 사회를 분석하는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냈다." 그 학설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기본 원리들을 포괄적이면서도 상세하고 현실성 있게 결합한 비범함에 있다."(34)


볼테르와 루소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상이 거둔 승리가 유럽문화에 미친 영향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끼친 영향에 거의 맞먹을 정도이다.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을 자유로이 탐구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성의 법정에 세우는 정신은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서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회계층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적 용기는 당시 유행하는 미덕이 되었고 지적 공정함은 그 이상의 미덕이었다."(73) 헤겔에게 이러한 "급진적 경험주의는 과학적 독단주의의 구현으로 보였다. 그는 과학적 독단주의는 신학을 대체하고자 하지만 사실은 자연과학에서 성공한 방법들만이 그 밖의 모든 경험 분야에서 타당할 수 있다는 오류를 가지고 있으며, 신학보다도 훨씬 더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모든 시대는 그 자궁 속에 미래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고 앞으로 올 시대의 윤곽을 예시하고 있다."(76-7)


"기계적 모델은 사물의 작용을 예측하거나 통제하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합리적 설명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건들이 인간의 역사를 구성할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적 방법만으로는 특정한 예술작품이나 과학 속에 구현되어 있는 특정한 인물이나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개별적 특성, 개별적 본질, 목적 등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그것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특성들이 그것의 전후에 일어난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 전체는 유일무이하며 단 한 번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과학적 방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역사와는 정반대로, 과학적 방법은 동일한 현상이라든가 특징들의 동일한 결합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규칙적으로 되풀이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79-80)


"투쟁과 긴장이라는 개념은 역사에서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동적 원리를 제공한다. 사유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 현실이며 사유 과정은 가장 명료한 형태로 표현된 자연의 과정이다. 전보다 더 높은 동일성으로서의 영속적인 흡수와 해소의 원리, 즉 지양止揚, Aufheben은 논증적 사유에서와 같이 자연에서도 일어나며, 자연의 과정들이 유물론이 전제하는 기계적 운동처럼 목적 없는 과정이 아니라 내적 원리를 보유하고 있고 점점 더 자기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88) 마르크스는 "자신이 다루는 모든 것을 합리적 통제의 지배하에 둠으로써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변형시키고, 자신이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외적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이 인류의 발전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에 이 새로운 견해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관념론적 형이상학을 격렬히 비판하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위대한 철학자 헤겔을 변함없이 믿고 찬미했다."(94)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한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읽고 독단주의에서 깨어난 마르크스는 "한편으로는 가치 있는 헤겔의 방법으로 무장을 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허울뿐인 건물을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면서 서로 관찰 가능한 경험적 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 대상들을 가리키는 기호들로 대체하는 것이 자기세대의 의무로 보았다."(118) 1843년 11월,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영토를 떠나 이틀 뒤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민주적 개혁을 너무나 격렬하게 옹호했기 때문에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통렬한 문필 능력을 갖춘 자유주의적 저널리스트로 받아들여졌다." 1843-5년에 걸친 파리 생활 동안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분명히 가다듬은 마르크스는 "많은 국가의 경찰에게 비타협적인 혁명적 공산주의자이자 개량주의적 자유주의의 적이며 국제적 지부들을 갖춘 단체에서 체제전복 운동을 꾀하는 악명 높은 지도자로 알려지게 된다."(119-120) 


파리에서 마르크스가 가진 의문은 "프랑스 혁명이 실패한 궁극적 원인이 무엇인가? 이론과 실천에서 어떤 결함이 있었기에 총재 정부와 제1제정이 등장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는 부르봉 왕가가 복귀할 수 있었는가? 반세기가 지나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는데, 그들이 피해야 할 오류는 어떤 것들인가? 사회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 즉, 미리 알기만 했더라면 대혁명을 지켜낼 수도 있었을 법칙들은 없는가? 등에 대한 것이었다."(129) 그는 "케네와 아담 스미스를 위시해 시스몽디, 리카르도 세이, 프루동 및 이들의 추종자 등 주로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읽었다. 이들의 명쾌하고, 냉철하고, 비감상적인 태도는 독일인들의 혼란스러운 주정주의나 현란한 수사와는 대조적이었다. 경험적 탐구를 강조하고 실천적으로 기민하면서도 대담하고 독창적인 일반 가설을 내세우는 이들의 주장은 마르크스를 매료시켰다."(130)


"마르크스가 판단하기에 파리에서 만난 공산주의자들 중에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뿐인 것 같았다. 그는 다름 아닌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였다."(149) 마르크스는 자신이 세우고 있는 역사적 테제의 "정당성 여부를 입증해 줄 수 있는 물질적 증거인 발전하는 산업사회의 실태에 관한 풍부하고 구체적인 자료를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엥겔스가 이것을 제공해 주었다. 반면에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통해서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엥겔스가 보기에는 당시 개혁가들 내에서는 추상적 개념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는 추상적 개념이 기초를 이루고 있는 철학은 진정한 혁명적 철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수집한 사실들을 이러한 추상적 개념을 공격하는 무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끼워넣을 굳건한 틀이 필요했는데, 마르크스에게는 바로 그러한 틀이 있었던 것이다."(153-4)


"마르크스는 인간을 핵심 요소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인간이란 쾌락이라든가 지식, 안전, 혹은 무덤 너머의 구원 등과 같은 어떤 단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의 원리에 따라 인간적 능력 전체의 조화로운 실현이라는, 지성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목적들을 추구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그 결과 어떤 집단이나 세대 혹은 문명이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다른 집단이나 세대 혹은 문명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결정하고 설명하게 된다. 아울러 인간들 사이의 상태와 가치들 자체는 부분적으로 실현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좌절되기도 하면서 그러한 상태와 가치들을 이어받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모든 노동과 창조의 핵심인 이러한 끊임없는 자기 변혁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고정된 원리라든가 불변의 보편적 목적, 인간의 영원불변의 상태 따위의 개념을 불합리한 것으로 만든다."(188)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 체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노동 개념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노동을 행복과 해방의 정수이자 인간들 사이의 대립 없는 이성적 조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인 동시에 자유로운 인간 본성의 가장 완전한 표현인 자유로운 창조 행위와 동일시한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노동을 여가와 대비시키고는 계급투쟁이 폐지되면 노동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최소한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노동은 이제 더 이상 착취당하는 노예들의 노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인간들이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사회화된 삶을 만들어가는 노동이 될 것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양립적 태도와 이 때문에 후대에 미친 영향은 마르크스가 "진화론적 결정론과 자유 의지론을 결합시켜 자유 선택을 설명하는 데서도 나타난다."(190-1)


마르크스는 당대의 특성을 결정하는 핵심 현상을 '계급투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륀과 헤스 같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학설에 대해 적극 반대했다. 계급투쟁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투쟁 목표인 자신들의 권리와 이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애초부터 인간은 말 그대로 인간이라는 평등한 존재로, 다시 말해 폭력을 거부하고 인간들의 연대 의식과 평등한 정의에 대한 의식, 인류의 고결한 감정에 호소함으로써만, 상이한 이해관계들이 지속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엇보다도 자기 계급이 지고 있는 짐을 다른 계급의 어깨 위에 옮겨놓음으로써 벗어 버려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러한 이론을 내세워 마르크스 일당의 이론은 단지 현존하는 계급들의 역할을 뒤바꿔놓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보기에 현존하는 모순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립하는 이해관계들을 하나의 동일한 이상으로 융합하는 것뿐이다."(212-3)


마르크스는 "1845년 기조 정권의 탄압으로 파리에서 추방당했다. 이는 프랑스의 기조 정권이 당대를 호령하던 프로이센 왕의 자질에 관해 공격적인 논평을 싣고 있던 사회주의 잡지 <전진>에 폐간 조치를 내리라는 프러시아 측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브뤼셀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는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임박한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준비시키는 과업에 착수했다."(232-4) "1847년에 <공산주의자 동맹>의 런던 본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자기 조직의 신조와 목적을 분명히 나타내는 문서를 작성하도록 부탁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는 그 부탁을 최근 들어 머릿속에 완성된 새 학설을 정리, 요약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1848년 초에 문건을 작성해 넘겨주었고, 이 문건은 파리 혁명이 일어나기 몇 주 전에 <공산당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238)


마침내, 파리를 필두로 "도처에서 전제주의 정부들이 전복되고 제후들이 새로운 법령들을 약속하고 온건한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관리들을 임명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 군대만은 여전히 왕에게 충성을 보이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반동 정부의 타도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노동자와 급진적 부르주아지가 잠정적으로 동맹을 맺을 것을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는 1789년에 봉건주의의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그 때문에 1848년에 다음 단계로 전진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지금까지는 순수 사유의 영역에서만 혁명들을 달성했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독일의 사상가들은 견해의 급진성에서는 프랑스보다 훨씬 앞섰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18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후진적인 독일은 발전된 산업주의 단계에 도달해 이웃의 민주주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전진하려면 먼저 두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고 보았다.(249-50)


혁명의 불길이 번진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공허한 잡담'과 '의회의 정신박약'에 반발해 격렬한 폭동들이 일어났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처참한 실패로 끝난 원인을 부르주아지의 취약함과 의회적 자유주의자들의 무능함에서도 찾았지만, 주된 원인은 속임수에 잘 넘어가는 대중의 정치적 맹목성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대중은 자신들을 기만하고 자신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다가 결국에는 아주 쉽사리 자신들을 파멸시키고 마는 가장 악랄한 적과 그 대리인들에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충성스러웠다. 그는 여생을 혁명의 현실적인 조건들을 분석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 못지않게 혁명 지도자들이 무지한 군중을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하는 것이 최선인가와 같은 순전히 전술적인 문제들을 고찰하는 데 바쳤다. 이것은 주로 이때의 독일 혁명에서 얻은 교훈의 영향이었다."(253-4)


"프로이센 정부는 1849년 7월 (선동적인 논설을 써대는) 마르크스를 라인란트에서 추방했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갔다. 파리의 정치적 상황은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하는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말미암아 전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금방이라도 중요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마르크스는 파리에 도착한 직후 "프랑스를 떠나거나 아니면 브리타니에 있는 모비한으로 가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자유 국가들 중에서 벨기에의 문은 그에게 닫혀 있었고, 바이틀링을 추방한 바 있으며 바쿠닌에게도 거의 호의를 보이지 않았던 스위스는 그의 체류를 승인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마르크스는 "7월에 라인란트를 떠나 파리에 도착한 지 1달 후에 친구들이 보내준 돈으로 (혁명의 징후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영국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49년 8월 24일 런던에 도착했다."(259-61)


마르크스는 본래 "혁명은 소규모의 잘 훈련된 혁명가 집단에 의한 쿠데타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집단은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직접 인민을 대표하는 집행 위원회를 구성해 인민의 이름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여 공격의 선봉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광범위한 노동 대중은 속박과 암흑 속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탓에 새로운 국면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역량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 불가피한 과도기를 "영구 혁명의 상태라고 말했다. 이 불가피한 과도기를 이끄는 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나머지 모든 계급에 대해 행하는 계급 독재이다." 영구 혁명 원리는 레닌에 의해 채택되어 1917년 러시아에서 문자 그대로 가장 충실하게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은 1848년의 사건을 계기로 적어도 실천에서는 이 원리의 중요한 측면들을 포기해 버렸다."(271-3)


마르크스에 따르면, 결국 "1848년의 사건이 가르쳐 준 중요한 교훈은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운명과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 주는 것이 혁명적 지도자의 첫 번째 임무라는 것이다. 이것은 길고도 힘든 과정이겠지만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혁명은 단지 모험가들과 성급한 자들의 산발적 폭동 속에서 에너지만 낭비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1871년의 파리 코뮌을 탄생시킨 혁명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그 혁명에 대한 지지를 거절했다." 부르주아지와의 협력 여부 역시, 공산주의의 전단계로서 의의를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독일과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부르주아지의 강력한 힘과 동맹 세력인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부르주아지의 공공연한 결정을 지켜보고는, 부르주아지의 협력이 그들에 비해 힘이 약한 노동자 계급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274-5)


"1850년 경 마르크스의 명성과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1851년의 쾰른 재판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이 계속 줄어들었다. 공업과 상업의 눈부신 발전으로 자유주의와 과학 및 문명의 평화로운 진보에 대한 믿음이 또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거의 흘러간 역사상의 인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즉 이전 세대에는 강력한 이론가이자 선동가였지만 지금은 망명하여 런던의 한 구석진 변두리에서 그때그때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써서 먹고 살아가는 인물 정도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5년 후에는 이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되었다. 물론 영국에서는 그때까지도 예외였다." 마르크스를 "이런 위치(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지도자이자 구세주)에 오르게 한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유럽 사회주의의 성격과 역사를 근본적으로 뒤바꿔놓은 1864년의 제1차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창설이었다."(314-6)


"1857년에 최악의 경제 공황이 시작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공황이 불만과 폭동을 불러올 것이라고 보고 유럽이 여태껏 겪었던 것 중에 가장 가혹한 이 공황을 열렬히 환영했다."(330) 밤낮으로 인터내셔널 활동에 매진한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을 장악하면서 예전의 정력적인 모습을 되찾은 듯 했다. 이 당시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거의 쾌활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 심지어 그의 이론적 저작들에서까지도 이 새로 찾은 활력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흔히 그렇듯이, 한 분야의 작업을 열심히 하게 되면 그동안 손을 놓고 있던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1859년에 자신의 경제이론을 개략적으로 제시한 바 있었다. 그는 빈곤과 건강 문제 때문에 그동안 중단했던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마침내 마르크스의 역작이 완성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332-3)


<자본론> 1권에서 "노동자들에게 대단히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던 핵심 테제는, 소비하는 것 이상의 부를 생산해내는 유일한 사회 계급이 있는데 그것이 곧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과, 순전히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천연자원, 기계, 운송수단, 신용 대부 등의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그 잉여 가치를 차지하는 자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348) 그러나 마르크스는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민주적 저항이 증가하면서 생길 결과를 고려하지 못했다. 또한 정치적 민족주의가 자본주의 자체의 발전을 방해하고 변형시키는 힘이나 무제한적인 착취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 혹은 부르주아지 중에서 점차 빈곤해지는 계층이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게 될 운명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반동 세력과 동맹을 맺게 될 때 그들이 구체제를 지키는 보루가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파시즘도 복지 국가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352-3)


마르크스는 "실레지엔에서 방직공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1842년에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측하고는 하이네를 격려해 그 봉기에 관한 유명한 시를 쓰게 해서 당시에 자신이 맡고 있던 파리의 잡지에 실었다. 또한 1851년, 1857년, 1872년에도 혁명을 예상했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이윤율이 저하할 것이고, 산업과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집중화되는 경향을 보일 것이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수준은 떨어질 것이며,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긴밀하게 결합할 것이라는 등의 예언들은 대체로 당대에는 그가 예상한 형식대로 들어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 자원에 대한 통제가 중앙으로 집중될 것이고, 대기업의 생산 방식과 낡은 분배 방식 사이의 갈등이 점차 커져 양립할 수 없게 됨으로써 사회와 정치 영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산업화와 과학이 전쟁 형태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이런 모든 현상으로 말미암아 생활 방식이 급격하게 변화할 것"이라고 올바르게 예측했다.(361)


마르크스는 비록 파리 코뮌을 정치적인 대실책이라고 보았지만,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여, 코뮌에서 활동하다 코뮌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최초의 순교자들로 자리매김했다. 코뮌을 격찬한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은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연설문으로 쓰인 것이었다. 이 연설문의 공표는 인터내셔널의 회원들에게 당혹과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인터내셔널의 해체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경찰과 일반 대중은 인터내셔널 하면 곧 코뮌의 무자비한 악행들을 떠올리게 되었다."(372-3) 마르크스는 "자신의 노력이 기껏해야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피로스의 승리로 끝나자,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에 대한 여러 세대에 걸친 희망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도 있는 혹독한 투쟁보다는 차라리 바쿠닌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한 후에 인터내셔널이 평화적으로 해체되도록 내버려두기로 결심했다."(378)


"마르크스는 세상을 단순히 흑백의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게는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은 적이었다." 마르크스는 "자기 친구들 중에 더 조용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겪은 신념의 위기들, 이를테면 헤스나 하이네 같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내적 천착(?)에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신념의 위기들을 사적인 감정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부르주아적 타락의 징후, 더 심하게 말하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싸움이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 예술적 목적을 위해 사회 불안을 이용하는 경박함과 무책임한 방종을 보여주는 부르주아적 타락의 징후라고 보았다. 개인감정에 대한 극도의 엄격함과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희생적인 규율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그의 사상은 모든 나라의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적들에 의해 모방되었으며, 모든 영역에서 그의 진정한 계승자들과 관용적인 자유주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구분 짓는 특징이 되었다."(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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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17가지 모순 - 이 시대 자본주의의 위기와 대안
데이비드 하비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 기본 모순


1.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 사용가치 : (같은 품목이라 하더라도)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다.

  - 교환가치 : (정상적인 상황에서) 균일하고 질적으로 같다.

  → 교환가치는 모든 상품의 가치를 측정하는 독립적인 척도인 화폐로 환산된다.


2. 화폐와 사회적 노동의 가치

  - 화폐 : 타인의 사회적 노동을 청구하는 수단

  - 사회적 노동 :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의 합

  → 시장가격은 특정 시공간에서 특정 조건의 공급과 수요에 좌우된다. 따라서, 재현물(화폐)과 재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실재(사회적 노동) 사이에는 간극(우연적 누락 & 고의적 조작)이 존재한다.  


3.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국가의 집합성

  - 사유재산 : 소유물과 그 소유물을 처분할 권리를 가진 법률적 개인으로 규정된 한 사람 간의 사회적 결합

  - 자본주의 국가의 집합성 : 국가권력은 강압적으로 사유재산권 행사를 제한할 수 있다. (시장 실패와 같은 외부 효과 규제)

  → 국가는 사유재산권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산화불가능한' 형태의 화폐 자원을 독점하고, 무력을 사용하여 사유재산권을 수호한다.


4. 사적 전유와 공동의 부 (사적 개인이 사회적 노동의 결실을 합법적으로 전유)

  - 사적 전유 : 사회적 가치와 분리된 화폐는 탈취와 약탈, 시장 교환을 통해 개인이 무제한적으로 축적할 수 있다.

  - 공동의 부 : 사회적 노동이 만들어내는 부의 총합 (common wealth)

  → 토지, 노동, 화폐가 대상화되고 그 뿌리에 있는 문화적 삶이 떨어져 나가면서, 공동의 부는 국가가 승인한 사유재산권 원칙에 따라 재구성된다.


5. 자본과 노동 (소외된 사회적 노동)

  - 자본 : (사회적) 노동이 창출하는 잉여가치를 통해 재생산되는 가치

  - (사회적) 노동 :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는 능력

  → 사회적 노동이 화폐 수익을 산출하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중심으로 조직되면서, 자본은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고, 노동의 피지배 조건은 강화된다.


6. 자본의 고정성과 이동성

  - 고정성 : 화폐, 생산활동, 상품 같은 물질적 형태로 표현되는 자본

  - 이동성 : 화폐에서 생산수단으로, 노동에서 상품으로, 상품에서 다시 화폐로 돌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자본

  → 과정과 사물 양자를 오가는 자본순환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은, 자본 일반의 이익보다는 개별 자본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쓰인다.


7. 자본 생산과 실현

  - 생산 : 노동 과정에서 순환하는 자본

  - 실현 : 시장에서 순환하는 자본

  → 생산 과정에서 지불되는 노동의 몫을 줄이려는 각종 시도는 시장의 총수요를 제한하고, 유효수요 부족은 결국 자본 축적의 지속성을 저해한다.



※ 움직이는 모순


8. 기술 혁신과 일회용 인간

  - 기술 혁신 : 자본의 수익성을 지탱하거나 증대시키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물신의 대상

  - 일회용 인간 : 기술혁신은 육체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자기규율, 노동의 질, 문화적 관습, 임금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

  → 불안정한 잠재 노동인구의 과잉은 화폐가 가치의 역사적 재현물이라는 의무를 벗어던질 수 있게 하며, 자본의 약탈성을 억제하는 규제를 제거한다.


9. 분업

  - 기술적 분업 : 원칙적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특정한 공정 내에서 결합되는 업무들

  - 사회적 분업 : 적절한 훈련이나 사회적 위치를 요구하는 특화된 업무들 (가령, 젠더 관점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노동을 비숙련노동으로 분류하는 일)

  → 자본은 세분화되어 내부경쟁이 치열한 노동시장(탈숙련화와 국제분업)을 창출하여, 통일성을 갖춘 노동조직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10. 독점과 경쟁

  - 집중 : 사유재산에 내재한 독점권력은 교환의 기초가 되며, 나아가 경쟁의 기초가 된다. (계급독점권력)

  - 분산 : '시간을 통한 공간의 절멸' 가속화로 공간적인 장벽이 줄어들면서, 많은 지역 산업과 서비스가 보호막과 독점특권을 상실했다.

  → 자본은 경쟁을 환영하지 않고, 독점지위를 구축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갈망한다. (초超대기업, 시장을 지배하는 느슨한 동맹, 지적재산권 부여)


11. 불균등한 지리적 발전과 공간의 생산

  - 불균등한 지리적 발전 : 다양한 자본이 군집을 형성하여 '집적의 경제'를 이룰 때, 해당 지역의 우월적 지위는 기존 장소의 고정된 가치를 위협한다.

  - 공간의 생산 : 투기자본은 자본과 노동의 잉여를 흡수하는 역동적인 공간을 생산하지만, 자본 팽창과 질적 전화를 위해 이를 파괴해야 한다.

  → 자본은 언제나 사회적 부의 사적 전유와 축적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시민들의 [인위적으로] 구성된 충성과 갈등을 빚는다.


12. 소득과 부의 격차

  - 다양한 사회집단 : 자본은 노동 통제를 공고히 하는 사회집단 내/간의 갈등을 조장하며, 노동통제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사회적 해방을 지원한다.

  - 부의 분배 : 자본이 재생산되려면 자본과 노동 간의 소득 분배는 한쪽으로 치우쳐야 한다. (이윤 극대화와 임금률 감소 혹은 노동생산성 향상의 공존)

  → 자본은 일자리 창출만큼이나 실업 양산에도 주력하여 잉여노동을 통제하고, 예비 노동력의 '부분적 프롤레타리아트화'를 통해 임금 하한선을 끌어내린다.


13. 사회적 재생산

  - 숙련 노동 : 공교육은 분업에 적절한 기술집합의 생산과 자본이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적 순응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 비숙련 노동 : 노동이 아주 낮은 임금을 받는 경우는 노동자가 자신의 인적자본을 형성하는 데 충분히 투자하지 않음을 반영한다.

  → 사유화와 사용료 지불이 전통적인 공교육 영역에 침투하면서, 이제 교육을 원하는 이들[특히 저소득층]은 사회적 재생산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 한다.


14. 자유와 지배

  - 자유 :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를 지키려는 노력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과 조응한다.

  - 지배 : 개개인이 시장교환 특유의 사회적 관계와 규약을 내면화하면서, '시장의 자유' 이면에 자리한 국가의 폭력과 지배를 자명하게 받아들인다.

  →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권력과 강제가 부재한 사회, 물리력이 작동하지 않는 세상"을 역설하지만, 이때의 자유는 '통치성'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 위험한 모순


15. 무한한 복률 성장

  - 복률 성장 : 자본의 본성은 '무한한' 이윤 추구이기 때문에, 제로성장 상태의 자본주의 경제란 성립불가능하다.

  - 평가절하 비용 : 자본이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일정한 비중의 창조적 파괴를 실행할 때,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라는 지정학적 투쟁이 발생한다.

  → 지식과 정보의 과잉, 부채와 금융 전략 같은 스펙터클의 급속한 확장은 복률 성장의 '물질적'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헛된 조바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16. 자본과 자연의 관계

  - 상품화된 자연권 : 사적 개인이 자연을 화폐자산처럼 자본화하면서, 막강한 잠재 권력을 가진 불로소득 계급이 형성되는 기초를 마련한다.

  - 환경운동 : 변덕스러운 환경재난이 자본이 만들어 낸 불행의 책임을 덮어쓰게 되면서, 환경운동은 반자본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 자본이 자연을 상품화·화폐화하면서, 자연의 다양성과 인간의 잠재력이 억압당한다. 자본은 자연과 인간본성을 극도로 소외시킨다.


17. 보편적인 소외

  - 노동의 경제적 합리화 : 노동에서 소외된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소비에서도 소외되고, 결국 자신의 필요에서 소외된 개인으로 전락한다.

  - 인간본성의 반란 : 어떤 가치 있는 연결의 상태에서 고립되고 떨어져 나온 소외alienation 상태는 회복불능의 상실감과 비통의 감정을 내면화한다.

  → "노동시간이 절감되었음에도 자유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노동에서 해방된 시간이 '개인의 자유로운 자아실현'에 사용되지 않는다면, 이 노동시간 절감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앙드레 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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