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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평전 - 고뇌하는 진화론자의 초상
에이드리언 데스먼드 외 지음, 김명주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11월
평점 :
1부 1809~1831
18세기 중엽 다윈의 양가 할아버지들을 포함하여 '기계로 인한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정통파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자수성가한 비국교도들로서, 국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정치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던 세상에서 아웃사이더들이었다. 그들은 성장하는 산업도시들에서 번성했던 반국교회 예배당 문화에 속했다. 이래즈머스의 자유사상을 제외하면, 그들의 지적 전위성은 조사이어와 같은 유니테리언파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희망에 찬 굳건한 신앙으로서, 새롭게 나타난 산업 엘리트들의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들의 신념에 따르면, 신앙이란) 자동제어 엔진처럼, 즐거움과 고통이 기계적으로 작동하여 인간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생을 행복하게 산다. 그리고 내세에는, 방치되어 있던 결함들이 수리되어 모든 사람이 완전한 존재로 회복된다."(30-2)
아버지 로버트는 사냥과 화학실험에만 몰두하던 다윈을 에든버러 의대에 입학시켰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에든버러에서 만난 해면동물 전문가 그랜트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친親프랑스주의자였고,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과학과 사회의 급진적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다윈은 타협을 모르는 진화론자의 날개 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랜트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없었다. 자유사상가였던 그는 자연의 권좌 뒤에 영적인 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는 단지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힘들이 작용한 결과이며, 모든 것은 자연 법칙에 따른다. 그가 영웅시하는 프랑스의 진화론자들인 악명 높은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와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처럼, 그도 상상력이 넘치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화론은 어딜 가나 교회와 과학의 기득권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70-1)
"물질과 정신, 위험한 라마르크주의, 검열, 권력. 이들은 격정을 부추기는 문제들이었으며, 과학이 객관적인 관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과학은 정치협상의 복잡한 단편이었다. 물론 다윈은 어렸고, 대부분의 문제들은 그저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게다가 그가 에든버러에 있는 이유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던 데다, 그마저 그가 혐오하는 것이었다." "찰스는 결국 의학공부를 못 견디고 1827년 4월에 학위를 받지 못한 채 영원히 의대를 떠났다." "에든버러의 논쟁은, 자연현상에 의거한 설명과 초자연현상에 의거한 설명, 자본주의와 특권 귀족과의 긴장을 똑똑히 드러내보였다. 인간을 물질적 존재로, 자연을 세속적이고 경쟁적인 시장으로 재정의하기 위한 투쟁은 구시대적인 스코틀랜드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한동안 다윈은 과학의 사회적 측면을 맛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세계를 엿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86-7)
신앙과 새로운 지식 사이에서 고뇌하던 다윈은 <기독교의 증거>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페일리에 따르면, 기독교의 계시는 '미래의 보상과 처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그리고 내세에서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논리는 현세에서 저지르는 행동을 규제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영원한 지옥이 없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할 동기가 사라지고 인간의 규칙에 충분한 권위가 실리지 않게 된다. 반면 미래의 보상을 약속하면, 권력과 부의 불평등하고 무작위적인 분배라는 되풀이되는 문제가 해결된다. 현세의 부당한 처우가 내세에서 고쳐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굶주린 대중은 자신들의 곤경과 비천한 사회적 지위를 감내할 것이다. "이 한 가지 진리가 세상사의 성격을 바꾼다"고 <기독교의 증거>는 단언한다. 그것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 즉, 도덕세계가 자연세계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다." 다윈은 이 논증에 매료되었고, 페일리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140)
2부 1831~1836
1831년 12월 27일 비글호에 올라탄 다윈은 항해 중에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를 탐독했다. 거기에는 "생명이 진화를 해왔으며 모든 생명의 계보를 나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명쾌한 반론이 마치 변호사가 쓴 책처럼 차곡차곡 전개되어 있었다. 동물들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하나의 줄기로 모일까? 라이엘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인간의 계보에 침팬지가 있다는 것, 유인원이 "인간의 속성과 위엄"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라이엘은 나아가,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가 지금 완전히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옛 화석들이 출현하는 순서를 보면 인류를 향한 전반적인 진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특유의 독특한 표현방식으로 논했다. 그는 진보가 없다면 종변형도 없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종이 어떻게 죽고 탄생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졌으며, 게다가 다윈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책보다도 계통학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225)
"다윈은 산훌리안 항구에서 발견한 '마스토돈'을 떠올렸다 그것을 멸종시킨 요인은 홍수 같은 격변이 아니다. 적어도 지층에 그런 증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 마스토돈이 작은 계곡에 매몰되어 있었던 지점은, 융기한 고원의 자갈 섞인 조개껍데기 층 위를 덮고 있는 일종의 롬층[모래, 부식토, 진흙이 섞인 비옥한 흙]이었다. 그러므로 마스토돈은 조개껍데기가 쌓인 시대보다 나중에 살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비슷한 조개가 오늘날의 바다에 살고 있으니, 기후는 그때로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식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갈층은 비옥하지 않아서 관목 정도밖에는 부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윈은 절멸에 관한 더 일반적인 두 가지 가설, 즉 홍수 같은 격변 탓이라는 설명과 기후변화 탓이라는 설명을 폐기했다. 라이엘이 말하는 창조자는 여전히 믿었지만, 라이엘의 기후변화설과는 결별한 것이다. 그는 자기만의 방향으로 가지를 쳐나가고 있었다."(272-3)
3부 1836~1842
"당대는 과학의 호시절이었다. 한사코 저항하던 옛 지층들이 비로소 정복되어, 암석들이 최초로 창조된 형태들을 드러내 보였으며, 캄브리아기, 실루리악, 데본기는 일상용어가 되고 있었다. 지질학은 어둡고 머나먼 과거를 들여다보는 은밀한 구멍이며, 지금은 화석이 된 생물들이 살았던 왕국들의 운명과 대륙들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창이었다."(351) "다윈은 라이엘의 강연을 듣고 비로소 그 화석들의 중요성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멸종한 메가테리움과 오늘날의 나무늘보, 멸종한 글립토돈과 오늘날의 아르마딜로가 서로 가까운 관계임을 이해했던 것이다. 다윈은 그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항해를 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그저 유럽과 아프리카산의 마스토돈과 코뿔소라고 추정했을 뿐, 이들이 남아메리카 고유종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일로 더욱 예리해진 다윈은 마침내 중요한 질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왜 한 장소에 살았던 과거의 생물과 현재의 생물이 그렇듯 가까운 관계일까?"(355)
급진적인 유니테리언파가 보기에 "자연은 기적의 영역이 아니라, 법칙과 질서에 따르는 것이었다. 유니테리언파의 이런 '결정론'은 생명이 스스로 발달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했다." 생명체가 점차 고등한 상태로 올라간다는 견해는 "속박을 제거할 것, 종교와 시민의 제약을 없앨 것, 누구나 신이 준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 다시 말해 모든 이가 자연과 신이 의도한 대로 상승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국교회 성직자들은 시민들을 낮은 단계에 묶어두고 있는 것이었다. 일부 급진적인 유니테리언파가 개혁과 진화를 동일한 맥락으로 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연이 스스로 발달한다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전혀 공포가 아니었다. 마티노를 중심으로 한 이래즈머스 집단은 찰스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결정론적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366)
"'살아 있는 원자'는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이었다. 이들은 인간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던 시대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고, '살아 있는 원자'는 이들의 믿음에 과학적 근거를 가져다주었다. '살아 있는 원자'는 완벽한 정치적 유비를 제공했다. 권력은 아래에서 위로 '위임하는 것'이었다. 신이나 군주가 위에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원자들'인 민중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이었다. 스스로 조직하는 원자라는 개념은 민주적인 언론을 통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다윈은 신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물질에 동력을 부여한다는 케임브리지 시절의 전통적 입장으로부터 세속적인 입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원자'라는 개념은 자연이 스스로 발달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윈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였다."(376)
"다윈은 종의 형태가 복잡해질수록 종에게 주어진 생명은 줄어든다는 오언의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동물과 식물의 계통사史를 표현하기 위해 "불규칙하게 분기하는" 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 만일 생명을 수령이 엄청나게 오래된 거대한 떡갈나무 한 그루로 표현한다면, 포유류 화석들은 생명력이 다해서 "죽어가는 말단의 싹"에 해당할 것이다. 나무의 줄기는 모든 생명이 비롯된 먼 과거의 공통조상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무줄기가 하나인 것은 궁극의 기원이 하나라는 뜻이다. 다윈은 지구에서 생명이 처음 비유기물로부터 저절로 출현한 일은 멀고 희미한 과거에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분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도처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 관련이 없는 수백만 그루의 생명의 나무가 우후죽순 생겨난다고 한다면 문제가 "엄청나게 꼬인다." 생명의 기원은 실루리아기 이전의 어딘가에서 찾아야 하는 단 한 차례의 유일한 사건이었다."(387-8)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유류인 주머니쥐가 사실은 파충류라고 주장한 일 때문에 그랜트는 즉결심판에 처해졌다. 다윈은 당대의 자연 과학자들이 관찰한 사실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진보라는 신념과 신의 창조라는 신앙이 충돌한 이 사건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라마르크주의의 지뢰밭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연이 거침없이 상승한다는 개념은 이미 폐기했다. "내 이론에 따르면, 진보로 향하는 절대 경향 따위는 없다." 환경은 "서서히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변하며, 생명도 마찬가지다. 환경조건이 안정되게 유지될 때도 있는데, 그런 경우 종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은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로 전혀 향상되지 않았다. 일부 동물들─예를 들면 기생충─은 심지어 단순해졌으며, 만일 이들이 멸종하면 다른 종들이 "퇴화하여" 그 생태적 지위를 메울 것이다. 그러므로 (다윈이 보기에) 거침없는 상승과 보증된 진보는 급진파의 신화였다."(463)
4부 1842~1851
찰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큰 딸 "애니는 죽을 이유가 없었다. 다음 세상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이 세상에서 벌을 받을 짓조차 하지 않은 아이였다. 찰스의 말을 빌리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는" 애니는 병에 굴복했고, 자연의 낫이 애니를 습격하여 그 아이를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애니의 잔인한 죽음은 찰스가 질질 끌고 가던 도덕적이고 공정한 우주에 대한 넝마 같은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훗날 다윈은, 비록 오래 끌기는 했지만, 이 시기가 자신의 기독교적 믿음에 종언을 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집안에서도 믿음의 문제에 관해 훨씬 자유로워졌다. 언제나 힘들고 위험했던 아홉 번의 임신을 겪는 동안, 에마는 그들이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는 안심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더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함에 따라 이별에 대한 위협도 사라졌다. 그들은 분명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할 것이다. 이제 찰스의 입장은 믿지 않는 자였다."(647-8)
5부 1851~1860
"종교계 인사들이 (번영하는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만국박람회의 공을 신에게 돌리는 동안, 문인 자유사상가들은 다른 쪽으로 고무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직업을 구하려는 세속적인 필요로 런던으로 왔다." "이들 모두는, 수정궁이 상징하는 새로운 시대는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개혁을 요구할 것이며, 자연의 통역사들은 영국 국교회의 특권계급이 향유하는 지위와 보상을 요구할 정당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불안정한 연합을 형성했는데, 그 연합의 신조는 실증주의, 공화주의, 세속주의, 유물론, 심지어는 신을 믿지 않는 훨씬 극단적인 '주의'까지 온갖 사상을 망라했다. 이러한 엘리트 지식인들은 자연을 경쟁적인 시장으로 새롭게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보, 기술, 그리고 도덕과 인간을 자연 법칙에 맞추어 설명하는 일에 헌신한, 진화의 새로운 후원자들이었다. 이들은 변화의 주축이 되어 세상을 다윈에게 안전한 장소로 만들고 있었다."(652-3)
"마침내 자연선택에 관한 연구를 재개할 길이 닦였다. 때가 무르익었다. 젊은 개혁가들이 부상하고 있었고,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진화론자들이 자리를 잡았으며, 과학의 사회적 토대는 눈에 띄게 변하고 있었다." 1854년 10월, "라이엘과 후커가 찾아와 다윈이 "추악한 사실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라이엘은 좌절했고, 후커는 동요했으며, 다윈은 조심했다. 신중할 것, 아직도 이것이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 문제는 다른 모든 것에 파급을 미칠 너무나도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공책을 덮은 때로부터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창조의 초자연적 조직이 넝마가 되었음에도, 다윈은 여전히 후커에게 자신은 "양쪽의 논증을 모두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윈은 "종이 변한다는 입장만을" 지지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와 같이 대단히 민감한 문제에 관하여 심지어 친한 사람들의 반응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던 다윈은 스스로를 혼란스러운 입장에 몰어넣는 희생을 감내했다."(690-1)
"다윈의 맬서스주의적 통찰력이 인구론에서 나왔다면, 다양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그의 메커니즘은 산업의 진보에 대한 청사진과 매우 비슷했다. 다윈은 산업에 많은 투자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웨지우드가家 사촌들은 공장의 조직화를 일구어낸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노동력의 명확한 분업을 바탕으로 하는 생산라인을 생각해냈다. 이것은 각각의 직공에게 하나의 전문화된 일을 맡김으로써 생산성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력의 기계화와 그것이 생산에 미치는 영향을 다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윈은 자연선택이 경쟁에 처한 동물 간의 "생리적 분업"을 자동적으로 증대시킨다고 주장했다. 북적이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과도한 경쟁─다윈은 이것을 자연계의 종種공장이라고 불렀다─은 비어 있는 생태적 지위를 이용할 수 있는 변종에게 이익을 준다. 이러한 변종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아 그 빈틈을 활용할 것이다."(698-9)
여전히 자신의 이론을 세상에 공개하기를 주저하고, 농장에서 비둘기 교배를 통해 자연 선택에 의한 종변형의 유비를 관찰하고 있던 다윈에게 "1858년 6월 18일, 우편배달부가 도착하는 순간, 그가 쌓아올린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다윈은 그동안 사회적 지위를 잃을까봐, 그리고 물론 반발이 클까봐 두려워하며, 그 오랜 세월 동안 끔찍한 시련과 정신적 고뇌를 겪어왔다. 그리고 병 때문에 늦어지고,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을 손대는 일로 인한 방황을 거쳐서, 마침내 20년 만에 출판 가까이에 와 있었다. 그런데 조용한 금요일 아침, 세상 반대편에서 우편물 한 개가 도착했다. 안에는 월리스가 쓴 스무 장 가량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다윈의 격려에 대한 응답이었다. 다윈은 일생의 역작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라이엘에게 "선생님의 경고가 참혹한 현실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소연을 했다. 다른 이가 그를 "앞질렀던" 것이다."(777)
그렇긴 해도, 월리스의 이론은 다윈의 이론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살아갈 수 있는 부유한 향사 자연학자도 아니었고, 헉슬리 같은 직업 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웨일스 변경지방에서 가난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14세에 런던에 와서 건축업자의 견습공이 되었다. 밤에는 토튼엄코트 대로 바로 옆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집합소인 '과학의 전당'에서 지냈다." 월리스는 선택에 대해 "개체들 간의 극심한 경쟁을 상정하기보다는 환경이 부적합한 개체를 제거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월리스는 보르네오 섬에 사는 다야크족을, 다윈이 야만적인 푸에고인들을 바라본 관점과 달리, 인류평등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자의 관점으로 보았다. 그리고 월리스는 다윈이 제쳐놓은 질문을 제기하려 하고 있었다. 즉, 자연선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진화의 힘은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것, 이것이 핵심이었다. 다시 말해, 자연선택의 목적은 "완벽한 인간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779-81)
# 7월 1일 공동논문 발표, 1859년 11월 22일 <종의 기원> 출간
6부 1860~1871
"월리스와 다윈의 견해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다윈은 자연선택이 건축가로서의 신을 대신하듯, 성선택이 예술가로서의 신을 대신하도록 했다. 동물은 스스로 육종가가 되어 새로운 변종들을 만들어내며, 인간도 결혼상대를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왔다. 하지만 다윈이 새의 화려한 깃털을 성선택 탓으로 돌릴 때마다, 월리스는 자연선택이 초래한 다른 적응을 지적했다. 암컷 새들의 칙칙한 빛깔은 개방된 둥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위장색이다. 나방의 야단스러운 색깔은 포식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경고색이며, 이런 종류를 흉내내어 의태를 하는 나방들도 있다. 월리스는 성선택이 인종을 만드는 "주된 요인"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에 관해서라면 자연선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윈에게 이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다." "월리스는 자연선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고집하면서 다윈보다 더한 다윈주의자로 나서고 있었다."(908)
"월리스는 인류의 확장된 의식을 선택의 영역에서 완전히 빼버렸다. 야만인들은 필요보다 훨씬 큰 마음의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고릴라의 뇌보다 약간 큰 뇌 정도면 충분하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지식인만한 뇌를 갖고 있다. 이것은 과잉지능이다. 자연선택은 당장 쓸모가 있는 것만을 상대하기 때문에, 야만인들에게 그러한 뇌를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힘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자연선택은 앞을 내다보는 눈이 없다. 자연선택은 미래의 필요가 아니라 그날그날의 생존에 대비할 뿐이다. 그리고 치열한 자본주의 탓에 도덕적 장애인이 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의 "사회적 야만"을 보면, 자연선택은 더 나은 문명을 만들어낼 힘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월리스는 더 고차원적인 영적인 힘이 인류의 운명을 인도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슬플 만큼 당신과 생각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다윈은 월리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945-6)
7부 1871~1882
"다윈은 자신이 공격에 노출되어 있음을 잘 알았다. 진화론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자연선택설의 운명은 시간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과 도덕성이라는 '성채'는 어떠한가? <인간의 유래>에서 다윈은 이 종교의 마지막 보루를 습격하여, 인간의 가장 신성한 형질들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 성채는 함락되지 않았고, 마이바트가 수호하는 인간은 자랑스럽게 난공불락의 존재로 건재하다. 이것은 다윈의 가장 뼈아픈 좌절이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의 수정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 서재로 향했다. 몇 달 동안 중단했다 다시 붙들었다 한 끝에, 마침내 12월에 이 힘든 작업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진화evolution'라는 말이 등장했다." "공격은 대가답게 이루어졌다. 다윈은 마이바트의 <종의 기원에 관하여>를 관통하는 가장 질긴 실을 베었다. 아가일과 오언 부류가 단단하다고 믿고 있었고 월리스조차 우려했을 만큼 강한 매듭을 끊어버렸던 것이다."(978-9)
"일부만 진화한 구조들은 기능을 할 수 없는 실패작일 뿐일까? 완전한 구조는 단 한 번의 창조적 도약으로 생길 수 있을까? 다윈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사실들을 쌓아올렸다. 그는 기능을 바꾼 기관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제거했다. 물고기의 부레가 양서류의 폐가 되고, 호흡관이 연장되어 날개맥이 있는 곤충 날개가 되었다. 마이바트는 핵심을 잘못 짚은 것이다. 초기 형태의 폐, 눈, 날개는 호흡을 하거나 보거나 펄럭일 필요가 없다." "마이바트의 '자연 법칙'은 오언, 아가일, 그레이의 법칙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칙령이며, 인도하고 지령하는 의지력의 표현이었다. 이 힘이 우주 속에서 엄밀한 과학적 질서를 유지하며, 생명을 조화로운 물결에 실어 앞으로 민다. 하지만 아름다운 조화를 갖춘 한 물고기나 개구리가 인도와 지령을 받아 다른 물고기나 개구리로 도약하는 것은 다윈의 눈에는 부자연스럽고, 지나치게 비쳤다. 이 정도면 과학은 "기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셈이었다."(979-80)
"누구보다도 다윈을 일관되게 지지했던 이들은 유니테리언파 교도들과 자유종교 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다윈이 자신들과 같은 합리적인 반국교 전통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항상 다윈의 자연주의적 관점을 높이 평가했다."(1117) 대수도원에 안치된 "다윈의 시신은 이 새로운 자연을 낚아챈 새로운 전문가들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성소에 안치되었다. 이 매장은 이 전문가들을 신격화하는 것이었으며, 떠오르는 세속주의에 바치는 최후의 의식이었다. 이것은 자연의 시장의 상인들, 다시 말해 과학자들과, 정치와 종교계에 몸담고 있는 그들의 부하들이 권력을 계승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명성을 얻고 있는 이러한 전문가들이 그들의 스승에게 보답하는 것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다윈이 창조를 자연주의화하고, 인간 본성과 인간의 운명을 그들의 손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사회는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악마의 사제"는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