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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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 했나? / 1980년


"1980년대의 한국에서 '중산층'의 체제친화적인 보수성에 심리적 면죄부로 작용한 건 바로 '86·88'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담론이었다. 물론 87년 6월항쟁이 잘 보여주었듯이, '중산층'이 독재체제에 대해 무한대의 친화성과 인내심을 발휘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몸에 밴 부정부패와의 친화성이 '하층'에까지 전염된 탓에 한국인들은 '이기적 탐욕'을 자극하는 선전·선동에 매우 취약하였던 바, 바로 이 지점을 독재체제의 지역분열주의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6·25 시절 자동차에 탄 미군에게 껌과 초콜릿을 구걸했던 한국의 아이들이 커서 자동차를 만들어 미국에 팔아먹었다는 건 (정주영을 민중의 영웅으로 추켜세운) 김동길을 포함한 다수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살 떨리는 감격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광주'는 잊혀졌으면 하고 바라는 '과거지향적 갈등'이었을 뿐이고, 88올림픽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의 영광은 '미래지향적 비전'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23-4)


"신군부가 시도한 대대적인 여론조작과 관련해 우리가 가장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은 12·12쿠데타세력과 5·16쿠데타세력의 차이점이다. 12·12쿠데타는 5·16쿠데타로부터 18년이나 지난 시점에 일어났다. 18년 동안에 많은 변화를 겪은 한국인들이 또다시 일개 육군 소장이 집권하는 걸 반길 리는 만무했다. 무엇보다도 〈1960년대처럼 국민이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어서 경제성장이라는 '기능적 필수조건'이 다른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던 사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군부에겐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치밀한 '음모와 공작'이 필요했다." "전두환의 부하들은 전두환의 리더십을 미화하지만, 과거 그 어떤 군인도 전두환만큼 사조직 결성과 유지에 공을 들이진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더 공정한 평가가 될 것이다. 곧이어 발생할 '광주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도 바로 그런 사조직의 기이한 단결력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55-6)


"신군부가 추진한 '음모와 공작'의 핵심은 여론조작이었다." "(언론이 자신들의 '애완견이자 보호견'이 되어주길 원했던) 신군부는 이미 1980년 3월 중순 이전에 보안사 언론대책반을 통해 이른바 'K(king)공작'을 입안하였다. 'K-공작'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여론조작 방안으로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과 허화평 사령관비서실장 등 이른바 전두환그룹의 '5인방'이 주도하였다. K-공작의 큰 시나리오는 3김을 민주정치세력, 신군부를 안정구축세력으로 차별화하여 '선안정 이론'을 확산시키고 언론계 간부들의 성향을 분석하여 협조가능한 사람들을 포섭한다는 두 가지로 구성돼 있었다. 이에 따라 보안사팀은 연일 계속되던 대학생 시위와 노동쟁의를 '혼란'으로 몰아붙였으며 3김의 대결양상을 '구태의연한 정치작태' '대통령병에 사로잡힌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비춰지도록 언론 논조를 유도하였다."(57-8)


"당시의 유화 국면 속에서 언론 검열은 완화되기 시작했고, 휴교령이 내려졌던 대학도 3월 1일을 기해 다시 문을 열었다. 박정희 시절 축출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다시 학원으로 돌아왔으며, 학생들에게는 거리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학내에서의 비폭력 시위와 자치권 일부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권력장악을 위한 신군부의 준비는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80년 2월부터 특전사는 '충정명령'이라는 강력한 폭동진압 훈련에 돌입했다. 말이 좋아 훈련이지, 이건 '인간폭탄 만들기' 훈련이었다. 영외 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외출과 외박이 전면금지된 상황에서 전 장병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가혹한 지옥훈련을 받으면서 까닭 모를 적개심과 분노를 키워가고 있었다. 병행된 정신교육 훈련은 장병들이 그래야만할 이유를 제공했다. 그 주요 내용은 〈시위 군중의 배후에는 빨갱이가 도사리고 있다.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64)


"계엄사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령 10호에 의거해 18일 새벽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었고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도 금지되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18일 새벽 2시경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사실상 헌정 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전두환은 미리 준비한 치밀한 전국계엄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보안사령부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기 이전인 16일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를 소집해, 17일 24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사실과 검거할 블랙리스트 8백여 명을 통보했다. 5월 17일 수배령이 떨어진 사람 가운데 6백여 명이 체포되었고, 신문과 방송은 수배자들의 명단과 죄목을 경쟁하듯 쏟아냈다. 신군부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의 조작을 위해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하였다." "이들에게는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김대중과의 관계를 대라면서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115-6)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조작과 관련해 손호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두 야당지도자 중 김영삼 신민당 당수는 구속 대상에 제외됐고 김대중만이 구속됐다는 사실이다. 신군부는 정권장악의 마지막 장애물인 민중세력을 공격, 세칭 '시민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민주화진영을 분열시켜 그 힘을 약화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이를 위해 재야 민중세력과 좀더 직접적인 연계를 유지해왔고 박정희정권의 오랜 정치공작에 따라 '급진적' 이미지가 국민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으며 지역기반 역시 소외된 호남인 김대중을 내란혐의의 구속대상으로 삼는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신군부는 광주·호남민들의 강한 반발이라는 효과를 초래한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의 역사를 내다보고 말한다면, 신군부가 저지른 가장 큰 범죄행위는 바로 이처럼 지역분열주의 공작을 펼쳤다는 점이었다."(118-9)


"계엄령 선포 후, 세상은 쥐죽은듯 조용해졌지만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신군부는 특전사 소속 7여단과 11여단 병력을 광주로 내려보냈다. 이른바 '충정훈련'으로 이미 '인간폭탄'이 돼 있는 병력이었다. 5월 17일 오후 광주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선 공수부대병력 1천여 명이 작전개시 준비를 마치고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명령은 '화려한 휴가'였다. 그러나 그 '휴가'는 차마 필설로 다하기 힘든 '인간사냥'을 위한 것이었다." "밤 11시 40분, 문공장관 이규현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계엄확대가 발표되고 두 시간이 지난 후,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5월 18일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린 상태에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든 학생 1백여 명과 무장 공수대원이 대치하였다." "오후 3시에는 공용터미널에 공수특전단이 투입되었다."(120-3)


"신군부는 광주에서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인 후에 그 진실을 은페하기 위한 공작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시도된 건 붙잡힌 광주시민군들을 '비열한 짐승'으로 만들어 그들의 저항의지, 아니 복수욕을 완전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최정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엄사는 27일 새벽, 투항한 시민군들을 체포하여 버스 4대에 실어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 갔다. 끌고 가는 과정이나 그곳에서 계엄사가 시도한 일은, 모진 구타와 고문 그리고 배고픔으로 시민들이 투사가 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생명을 구걸하게 하는 비열한 짐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엄청나게 적은 양의 식사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은 먹이를 구하는 동물에 불과하다는 자기확신을 심으려 했고 살인적인 구타는 그들에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배신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연출한 '지상의 지옥'이야말로 광주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행위였다."(177-8)


"광주학살 후, 전두환은 광주학살을 은폐하고 왜곡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 국방정보국이 작성한 1980년 6월 25일자 비밀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두환은 정부조사관들에게 학생이나 민간인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필름)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음. 이 사진을 구하려는 것은 『타임』, 『뉴스위크』 등 외신이, 저항하는 민간인에 대해 군인들(대부분 특전사 병력)이 잔혹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도한 것을 상쇄시키려는 의도임. 또한 그러한 물증은 반정부활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음.〉" "광주의 진실에 대해 티끌만큼이라도 말하는 건 모두 유언비어 유포로 체포되었고, 모든 사람은 오직 신군부의 발표만을 앵무새처럼 되뇌어야만 했다. 출판물 탄압은 80년대 내내 상시적으로 자행되었다. 5공은 분서갱유라 해도 좋을 정도로 '표현의 자유'에 억압적인 족쇄를 채움으로써 국민이 광주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끔 하였다."(181)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모든 열성을 다했듯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만들기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KBS는 8월 2일 『김대중과 한민통』이라는 특집 프로그램까지 내보냈는데, 이 프로그램은 김대중을 거의 간첩 수준으로 묘사했다. 차라리 간첩 수준이기만 했더라면 좋았겠지만(나중에 진실규명이 될 수 있으므로) 그것만도 아니었다. 원색적인 표현을 동원해 김대중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인간이며 이중인격자라는 인신공격까지 가하였다. 방송에 뒤질 신문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일보』와 더불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경향신문』의 9월 11일자 특집기사는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변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정도의 차이일 뿐 당시 모든 언론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조작에 혈안이 돼 있었다."(208-9)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전두환 단일후보를 총투표자 2525명 중 2524표의 찬성과 1표의 무효표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전두환은 9월 1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했는데, 이는 12·12 쿠데타 이후 164일 만의 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였던 것이다. 대통령 전두환은 9월 29일 개헌심사위원회를 통해 선거인단에 의해 대통령 간선제와 대통령의 7년 단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공고했고, 10월 22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했다. 새 헌법안은 한국 투표사상 최고인 95.5%의 투표율과 91.6%의 찬성률을 기록하면서 10월 27일 공포되었다." "제8차 개정헌법에 따라 전두환은 국회를 해산했고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그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은 모두 전두환이 임명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제11대 국회가 개원하기까지 156일 동안 215건의 안건을 접수하여 100% 가결했다."(233-6)


"1980년 신군부가 일련의 가혹한 조치들을 통해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정도를 넘어서 수족처럼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 건, 5공의 '파시즘 체제'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어준 효과를 내게 되었다는 걸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70년대를 겪은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탄압하는 권력, 탄압받는 언론'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1980년 들어 신군부가 언론장악을 위해 저지른 일련의 조치들도 국민의 눈에는 '탄압받는 언론'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물론 국민들은 언론이 신군부의 강압으로 보도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는 건 알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인식이 곧 신군부와 언론의 유착관계에 대한 인식의 수준으로까지 나아간 건 아니었다." "언론이 사실상 5공 파시즘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여론조작을 왕성하게 전개하면서 최소한 국민의 '수동적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애를 썼기 때문에 5공 파시즘의 작동 방식이 비교적 부드러울 수 있었던 것이다."(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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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어떻게'라는 물음은 특정한 결과를 낳은 상호작용의 연쇄를 면밀히 살펴보도록 이끈다. 그에 반해 '왜'라는 물음은 제국주의, 민족주의, 무장, 동맹, 거액 금융거래, 국가의 명예 관념, 동원의 역학 같은 범주별 원인遠因들을 조사하도록 이끈다. '왜' 접근법은 특정한 분석적 명확성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실상을 왜곡해 허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허상 안에서는 인과적 압력이 꾸준히 증대하고, 사태를 내리누르는 요인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정치적 행위자들이 그들의 통제 바깥에 있는 오래된 세력들의 한낱 실행자가 된다. 그에 반해 이 책에는 행위능력으로 가득하다. 핵심의사결정자들(국왕들, 황제들, 외무장관들, 대사들, 군 사령관들, 그외 수많은 관료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계산을 해가면서 위험을 향해 나아갔다. 전쟁 발발은 어느 정도 자기반성을 할 줄 알았고, 다양한 선택지를 인정했으며, 입수 가능한 최선의 정보를 바탕으로 최선의 판단을 내린 전쟁 행위자들의 연쇄 결정의 정점이었다."(31-2)


1부 사라예보로 가는 길


1장 세르비아의 유령들


"1903년 6월 11일 오브레노비치 국왕 시해는 세르비아 정치사에서 새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는 1804년 민중봉기를 이끌어 세르비아에서 오스만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1813년 오스만이 반격에 나서자 오스트리아로 피신해야 했다. 2년 뒤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이끄는 두 번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유연한 정치적 수완가인 밀로시는 오스만 당국과 협상해 세르비아의 공국 지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망명지에서 귀국한 카라조르제비치는 오스만의 묵인 아래 오브레노비치의 명에 따라 암살되었다. 주요 정적을 제거한 오브레노비치는 오스만으로부터 세르비아 공 칭호를 받았다." "경쟁하는 두 왕가,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사이에 노출된 위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지배하는 유달리 무례한 정치문화, 이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탓에 세르비아 군주정에서는 정쟁이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세르비아 통치자들 가운데 재위 중에 자연사한 이는 놀랄 만큼 적다."(42-3)


새로 즉위한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가 입헌군주제를 천명하면서 "세르비아왕국은 이제 진정한 의회제 정치체, 즉 군주가 존재하되 통치하지 않는 정치체가 되었다." "정당은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언론은 오브레노비치 가문 치하에서 규범이었던 검열에서 마침내 벗어났다. 정치권은 대중의 요구에 더 부응하고 여론에 더 호응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세르비아는 정치적 실존 면에서 새 시대의 문턱에 있었다. 그러나 1903년 쿠데타로 해묵은 문제들이 해소되기도 했지만, 장차 1914년 사태를 무겁게 내리누를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왕가 살해를 위해 결성된 음모단 네트워크가 차츰 와해되기는커녕 세르비아 정치와 공적 생활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남았다." "새 정권이 음모단의 유혈사태에 기대어 존속한다는 사실은 음모단 네트워크가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맞물려 공개 비판을 어렵게 만들었다."(54-5)


"야심차고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못하는 세르비아 경제에서는 군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사실 역시 민간 당국이 군 지휘구조의 도전에 취약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세르비아 정부에는 19세기 다른 나라들에서 의회제를 지탱한 대규모 지식계급과의 유기적 연계마저 없었다. 이런 정부에게 민족주의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이자 문화적 힘이었다. 되찾지 못한 세르비아 땅을 병합하려는 세르비아인들의 열의는 민중문화에 스며든 신화적 열망뿐 아니라 농지 면적과 소출이 줄어들어 살기 힘들어진 농민층의 토지 갈등에도 기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의 경제적 곤경은 빈의 가혹한 관세와 목조르기 탓이라는 정부의 주장(아무리 미심쩍더라도)에 국민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리 없었다. 외세의 속박 탓에 베오그라드 정부는 바다로 진출하여 후진성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구를 확보하는 데 집착하게 되었다."(82-3)


"1908~1909년 겨울 모든 열강은 베오그라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편입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단념하고 불가피한 결과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세르비아 통일이라는 이념에 얽매인) 온건파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보였던 쟁점은 국가가 당면한 곤경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는 문제 하나뿐이었다. 온건파라 해도 민족주의 프로그램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다(부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논쟁의 어휘를 택한 극단파의 수사법이 언제나 유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온건파는 극단파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외부 관찰자는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 어떤 입장차가 있는지 분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상과 달리 겉보기에 그들은 견고한 만장일치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정치문화의 이 위험한 역학이 훗날 1914년 6월과 7월에 베오그라드에 다시 출몰할 터였다."(88-9)


"(1차 발칸전쟁 이후) 베오그라드가 새로 획득한 영토에 살던 대다수 사람들은 세르비아의 통치가 시작되자 괴롭힘과 억압을 당했다." "정복된 지역들은 한동안 식민지의 성격을 띠었다. 정부는 새 영토의 문화적 수준이 너무 낮아서 자유를 줄 경우 나라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이유로 이런 결정을 정당화했다. 실제로 정부의 주요 관심사는 여러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비세르비아인들을 민족정책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세르비아에게 이것은 두 종류의 전쟁이었다. 다시 말해 정규군 부대만이 아니라 이 시절에 아주 흔했던 빨치산 무리와 자유계약 전사까지 싸우는 전쟁이었다. 새로 획득한 지역들에서 공식 당국과 비공식 집단의 결탁은 소름 끼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학교와 목욕탕, 모스크 같은 오스만 건물들이 숱하게 파괴되었다." "1913년 10월과 11월에 영국 부영사들은 병합 지역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자행하는 조직적인 위협, 자의적인 구금, 구타, 강간, 마을 방화, 학살을 보고했다."(98-9)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 표적이 된 이유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내 슬라브족 소수집단에게 어떤 적의를 보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암살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말대로 〈향후 군주로서 그가 모종의 개혁을 추진하여 우리의 통일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영토회복주의자들 중 다수는 (슬라브족의 땅에 자치권을 더 많이 주는) 이 개혁안이 영토회복주의 계획에 치명적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스스로를 개혁하여 빈에서 연방제 노선을 따라 통치하는 삼중 국가로 변모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래서 이를테면 자그레브가 부다페스트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수도가 된다면, 세르비아는 남슬라브족의 피에몬테라는 선봉 역할을 빼앗길 위험이 있었다. 요컨대 대공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테러 운동들의 논리 중 변치 않는 한 갈래, 즉 명백한 적과 강경파보다 개혁파 및 온건파를 더 우려하는 갈래를 예증한다."(106-7)


"(대공 암살 실행자로 뽑힌 자들은) 근대 테러 운동들이 먹이로 삼은, 이상은 넘치고 경험은 부족한 젊은이 특유의 바로 그 음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성과 연애를 하고 싶어하면서도 젊은 여성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족주의 시詩와 영토회복주의 신문 및 팸플릿을 읽었다. 청년들은 세르비아 민족의 고통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했고, 세르비아인을 뺀 모두가 그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비천한 동포들의 수모와 치욕을 그들 자신의 일인 양 느꼈다. 특히 오스트리아 때문에 보스니아 동포들이 쥐는 경제 악화에 대해 곱씹어 생각했다(보스니아가 실은 세르비아의 심장부 대부분보다 더 산업화되었고 1인당 소득도 더 높다는 사실은 간과한 불평이었다). 희생은 주요 관심사, 거의 강박관념이었다." "프린치프와 차브리노비치 두 사람은 코소보 신화에서 아주 중요한 자살 암살자 인물형에 심취했거니와 더 넓게 보면 자신을 범세르비아 운동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08-10)


2장 특성 없는 제국


"두 차례 군사적 재앙이 합스부르크제국의 마지막 반세기 동안 그 궤적을 규정했다. 1859년 솔페리노에서 프랑스-피에몬테 동맹군은 10만 병력의 오스트리아군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신생 이탈리아 민족국가 창건의 길을 열었다. 1866년 쾨니히그레츠에서 프로이센군은 24만의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여 신생 독일 민족국가에서 합스부르크제국을 몰아냈다. 이 두 차례 충격은 오스트리아 영토 내부의 생활을 바꾸어놓았다. 패전에 휘청거린 신절대주의적 오스트리아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탈바꿈했다. 1867년 타결된 대타협에 따라 지배적은 두 민족, 즉 서부의 독일인과 동부의 헝가리인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그 결과 마치 노른자가 두 개 든 쌍란처럼 오스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흔히 '치스라이타니엔'이라 불린 영토와 헝가리왕국이 반투명한 외피 안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독특한 정치체가 출현했다."(130-1)


"남동유럽 지역은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진 두 강대국이 경쟁하는 긴장 지대가 되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둘 다 오스만이 물러난 이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예부터 튀르크족에 맞서 유럽의 동쪽 관문을 지킨 수호자였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발칸반도의 신흥 슬라브계(특히 정교회) 민족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후견 세력 사이에 자연스러운 공통 이해관계가 있다고 역설했다. 또 오스만이 후퇴하면서 러시아정책수립자들에게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한 타키 해협(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향후 통제권 문제가 불거졌다. 그와 동시에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와 목표를 가진 야심찬 신생 발칸 국가들이 출현했다. 이 요동치는 지형 곳곳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한 수 둘 때마다 상대방의 이점을 상쇄하거나 줄이려는 체스 선수처럼 책략을 썼다."(149-50)


"발칸전쟁은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의 안보 지위를 파괴하고 더 크고 더 강한 세르비아를 만들어냈다. 세르비아왕국의 영토는 80퍼센트 이상 확장되었다. 2차 발칸전쟁 기간에 최고사령관 푸트니크 휘하의 세르비아군은 인상적인 규율과 주도권을 보여주었다. 그 전까지 합스부르크 정부는 베오그라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논의할 때면 무시하는 투로 말하곤 했다. 한 예로 언젠가 에렌탈은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치는 "짓궂은 아이"에 비유했다. 그런 경솔한 언행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1912년 11월 9일 참모본부 보고서는 세르비아의 급성장한 공격력에 놀라움을 표했다. 1912년 초부터 추진한 철도망 개선, 무기와 장비의 현대화, 전방부대 수의 엄청난 증가(모두 프랑스 차관으로 자금을 마련했다)의 결과로 세르비아는 만만찮은 교전국으로 변모했다. 더욱이 세르비아 병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182)


2부 분열된 대륙


3장 유럽의 양극화, 1887~1907


"1907년 유럽 동맹 지도를 보면 삼국동맹은 (1887년 체제) 그대로였다(다만 이탈리아의 신의는 갈수록 의문시되고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양국동맹 협정문에는 삼국동맹의 어떤 국가든 군대를 동원할 경우 두 조인국은 〈이 사건의 소식을 듣는 즉시 사전 협의를 거칠 필요 없이〉 전군을 동원하여 〈독일이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싸울 수밖에 없도록 신속히〉 배치한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화친 협정(1904)과 영국-러시아 협약(1907)을 통해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연결되어 있었다." "유럽 지정학적 체제의 양극화는 1914년에 발발한 전쟁의 결정적 전제조건이었다. 1887년이었다면 오스트리아-세르비아 관계가 위기가 아무리 심각했다 해도 유럽을 대륙 전쟁으로 끌고 가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양분 구도는 전쟁 이전 수년간 분쟁을 고조시킨 것 못지않게 완화했다. 그러나 두 블록이 없었다면 1차 세계대전은 실제 발발한 대로 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213-4)


"베를린이 이 위협을 막을 방법은 러시아를 자국의 동맹체제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은 1873년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함께 삼제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둘 다 포함하는 모든 동맹체제는 발칸반도에서 두 강국의 이해관계가 겹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양국 간 긴장을 억제하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될 경우,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만약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선택한다면, 프랑스와 러시아의 협력관계를 막는 장벽이 사라질 터였다. 1890년 3월 사임할 때까지 독일제국의 수석 설계자이자 외교정책의 제1입안자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은 이 문제를 충분히 의식했다."(216) "그렇지만 비스마르크식 외교로 달성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삼제동맹이라는 허술한 얼개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발칸에서의 이해관계를 가진 러시아와 관련해 그러했다."(218)


"(독일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왜 1890년대 초 프랑스의 접근을 환영했을까? 분명 독일은 러시아의 친독일파 외무장관 니콜라이 기르스가 기존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재보장조약 갱신을 거절함으로써 러시아가 정책 방향을 전환하도록 부추겼다. 1890년 6월 평시 독일군 병력을 1만 8574명 늘리자는 온건한 군사 법안이 조약 비갱신 결정에 뒤이어 제출되었던 것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불안감을 자아냈다." "프랑스의 거액 차관을 좋은 조건에 제공받을 전망도 러시아에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움직인 결정적 촉매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영국이 삼국동맹에 가담할 두려운 가능성이었다." "(1890년대 초의 정세는) 극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경쟁국인 영국이 러시아의 강력한 서쪽 인접국인 독일과 힘을 합치고 더 나아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경쟁국인 오스트리와와 협력하기 직전처럼 보였다."(222-3)


"(유럽 세력균형의 새로운 판도를 열어젖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영국 정치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독일의 흥기가 아니라 영국의 숙적 러시아가 크림전쟁(1853~1856) 이후 강요받은 합의로부터 풀려날 전망이었다.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정한 1856년 파리조약의 조항들에 따라 흑해의 물길은 흑해 연안을 소유한 국가들의 군함에도, 다른 어떤 국가의 군함에도 〈공식적으로 영원히 차단〉되었다. 이 조약의 목표는 러시아가 동지중해를 위협하거나 영국의 영토와 인도행 해로를 교란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패전으로 1856년 조약의 정치적 토대가 무너졌다. 새로 수립된 프랑스공화국은 크림전쟁 합의를 깨고 흑해에서 러시아의 군사화에 반대하던 입장을 포기했다. 영국 혼자서는 흑해 조항들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러시아는 흑해 함대 건설을 밀어붙였다."(233)


"(적대적인 강대국 연대의 출현을 저지하는) 비스마르크 전략에는 대가가 따랐다. 독일은 항상 자기 체급보다 약한 펀치를 휘둘러야 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에서 제국들의 식민지 쟁탈전에 끼어들지 말아야 했고, 다른 강국들이 세계 세력권을 두고 다툴 때 방관자로 남아야 했다. 또한 베를린은 이웃 강국들에 모순적인 약속을 해야 했다. 그 귀결은 독일제국의회의 구성을 결정하는 유권자들이 원치 않는, 무력한 국가라는 의식이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방대한 제국의 주변부라는), 본국에 비교적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교환하고 거래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독일은 그런 제안을 믿을 만하게 할 수가 없었는데, 이미 붐비는 테이블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 애쓰면서도 거래할 것이 전혀 없는 벼락부자 같은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변변찮은 남은 몫을 차지하려던 독일의 시도는 기성 제국 클럽의 강경한 저항에 부딪혔다."(240-1)


"1890년 독일이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을 포기한 것은 어느 정도는 스스로 부과한 비스마르크 정책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1890년의 태도 변화(비스마르크 실각, 레오 폰 카프리비의 재상 취임,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제국 정치의 핵심 행위자로 부상)는 독일 대외관계의 새로운 단계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1890년대 초의 '신노선'은 본래 협의하여 의도한 방침이라기보다는 우유부단과 좌고우면의 결과였다. 비스마르크가 갑작스레 퇴장하면서 생긴 공백은 그대로 남았다." "자유재량 정책은 독일에 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은 중대한 위험을 수반했다." "(별다른 안보 이득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친교가 깊어감에도 영국이 독일과 더 가까운 관계를 추구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영국 정책수립자들은 먼저 프랑스와, 그 후에 러시아와 유화하는 정책의 이점을 고려하기 시작했다."(243-4)


"1907년부터 등장한 새로운 국제 체제가 유독 독일에게 불리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유럽 강국들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의 경우에만 독일 견제를 우선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 유럽 국가들이 체결한 일련의 협정은 세계사적 변천의 결과로 생각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그런 변천으로는 중일전쟁과 지역 강국 일본의 부상, 아프리카 분쟁과 중앙아시아에서의 그레이트 게임으로 인한 재정 부담, 아프리카와 남서유럽에서 오스만 권력의 쇠퇴, 강대국들의 중국 쟁탈전뿐 아니라 그에 따른 중국 국내의 대격동까지 포함한 중국 문제 등이 있었다. 독일의 '안절부절'과 벼락부자처럼 끈덕진 요구가 당시 정세의 일부이긴 했지만, 이 시대를 재조정한 과정들을 더 폭넓게 분석한 연구들은 독일이 터무니없는 국제적 행위로 고립을 자초했다는, 한때 널리 수용되었던 견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266)


4장 유럽 외교정책의 뭇소리


"20세기 초 유럽은 군주국들의 대륙이었다. 가장 중요한 여섯 강국 중 다섯이 이런저런 군주국이었고, 한 나라(프랑스)만 공화국이었다. 발칸반도의 신생 민족국가들(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마, 루마니아, 알바니아)은 모두 군주국이었다. 고속순양함, 무선전신, 전기 시가라이터의 이면에는 크고 복잡한 국가들을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생명활동에 얽어매는 이 고색창연한 제도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 각국 집행부들의 중추는 여전히 이런저런 남녀가 차지하고 앉아 있는 왕위였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에서 각료들은 황제에게 임명받았다. 세 황제는 국가 문서에 무제한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각국 군대에 공식 권한을 행사했다. 왕조들의 제도와 인맥은 국가 간 소통을 구조화했다." "군주들은 정치적 행위자일 뿐 아니라 상징적 행위자였으며, 이 역할로 집단 감정과 연상작용을 사로잡고 집중시킬 수 있었다."(282-3)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했든 안 했든, 유럽 대륙에 군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국제관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일부분만 민주화된 체제에서 모든 공문서와 인사에 접근할 수 있고 모든 집행 결정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주권자, 각국 정부의 중심점으로 추정되는 군주의 존재는 모호함의 원인이었다. 군주들이 서로 만나서 국가의 큰일을 해결하는 순전한 왕조식 외교정책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았다. 허사로 돌아간 비외르쾨 회담이 그 증거였다. 그럼에도 군주를 집행부의 키잡이 겸 화신으로 보고픈 유혹은 외교관, 정치인, 특히 군주들 사이에서 여전히 강력했다. 군주들의 존재는 정책 수립 과정의 중심축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국왕들과 황제들은 국제관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었다. 그 귀결인 불명확성은 확실하고 투명한 국가 간 관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계속 방해했다."(301-2)


"언론에 집착하는 태도의 밑바탕에는 그와 상반되는 태도가 있었다. 각료와 관료, 군주는 언론을 대중의 감정과 태도를 반영하는 거울이자 드러내는 채널로 생각했고, 이따금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외무장관이라면 누구나 적대적인 언론 캠페인에 노출될 경우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부정적인 기사에 대한 두려움은 숱한 외무부들이 비밀을 엄수한 한 가지 이유였다." "대다수 정책수립자들은 언론을 영리하고 분별력 있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론이 휘발하는 성질이 있다고, 즉 금세 잦아드는 단기적인 선동과 광란에 휘둘리기 쉽다고 보았다. 민심이 상반되는 자극들에 의해 움직이고, 정부에 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표현을 바꿔 말하자면, 여론은 대개 〈고삐 풀린 혀와 대책 없는 손을〉 결합한다고 보았다. 여론은 광란적이고 곧잘 공포에 휩싸였지만, 몹시 변덕스러웠다."(363-4)


"정책수립자들이 여론을 통제했던 것도, 여론이 그들을 통제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론과 공적 생활의 상호성에 대해,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에 대해 말해야 한다. 정책수립자들은 때때로 여론을 알맞은 방향으로 유도하려 하면서도, 자신들의 자율성과 정책수립 과정의 통합성을 신중하게 보호했다." "더욱 근본적인, 그리고 더욱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는 심성구조의 변화였다. 이 변화는 강경한 입장이나 대립을 요구하는 쇼비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쟁을 받아들이는 깊고도 광범한 마음가짐으로 표출되었다. 이제 전쟁은 국제관계의 본성상 확실히 일어날 사태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쌓인 마음가짐의 무게는 1914년 7월 위기 동안 공세 계획 성명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민간 지도자들의 웅변적인 침묵을 통해 드러났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에 살았더라면 강대국 간 전쟁이야말로 최악의 사태라고 지적했을 법한 사람들이었다."(380-1)


5장 얽히고 설킨 발칸


"발칸반도에 대혼란을 가져온 연쇄 전쟁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1911년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은 오스만 주변부에 대한 발칸 국가들의 전면전에 청신호를 보낸 격이었다. (당시 영국령이었던) 이집트와 (사실상 프랑스령이었던) 모로코와 달리, 나중에 리비아라고 알려진 3개 주(빌라예트)는 오스만제국에 속한 지방이었다. 오스만의 마지막 아프리카 영토인 이 지방들에 대한 이탈리아의 전혀 정당하지 않은 공격은, 당대의 어느 영국인 관측자의 표현대로, 발칸 국가들에게 〈돌파구를 열어준〉 사건이었다. (오스만 세력을 몰아내자는 이야기만 무성하던) 발칸 국가들은 이탈리아의 침공 이후에야 비로소 싸울 마음을 먹었다. 세르비아 외무부의 정치적 수장이었던 미로슬라브 스팔라이코비치는 1924년에 이 사태를 되돌아보면서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과정을 개시한 사건으로 이탈리아의 트리폴리 공격을 꼽았다. 〈뒤이은 모든 사태는 그 첫 공격의 진전에 지나지 않습니다.〉"(387)


"오늘날 대체로 잊힌 이탈리아-오스만 전쟁은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유럽 국제체제를 교란했다. 이탈리아의 점령에 맞선 리비아의 투쟁은 현대 아랍 민족주의의 출현을 자극한 중요한 초기 촉매들 중 하나였다. 삼국협상 국가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리비아를 강탈하려는 이탈리아의 대담한 행보를 부추긴 반면, 이탈리아의 삼국동맹 파트너들은 마지못해 묵인했다. 이런 국제정세는 중요한 진실을 드러내 보였다. 삼국협상 국가들의 개입으로 삼국동맹의 약점이, 아니 지리멸렬함이 노출되었다. 이탈리아의 행동이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칸반도 전체의 안정을 깨뜨릴 것이라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거듭된 경고는 무시되었다. 이탈리아는 명목상으로만 그들의 동맹인 것처럼 보였다." "이탈리아가 훗날 삼국협상에 붙을 뚜렷한 기미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이탈리아는 서로 모순되는 약속들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는 복잡하고 모호한 외교정책을 펴고 있었다."(395)


"삼국동맹의 콩가루 상태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더욱 중요한 추세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침공하면서 유럽 대다수 국가들로부터 미지근한 지지를 받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정세였는데, 친오스만 유럽 연대가 전면적으로 해체되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1850년대에 출현한 유럽 열강의 협조체제는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강탈하려던 러시아를 견제했다(그 결과 크림전쟁이 일어났다). 이 연대는 러시아-오스만 전쟁 이후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다른 형태로 재편되었고, 1880년대 중반 불가리아 위기 때 재조정되었다. 이제 이 연대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탈리아와 전쟁을 시작할 무렵 오스만제국은 영국에 동맹을 요청했지만, 이탈리아와 소원해지고 싶지 않았던 런던 정부는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뒤이어 발칸전쟁으로 유럽 협조체제는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중대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396-7)


"발칸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은 옛 동맹 패턴의 반전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에는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지원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를 비호했다. 1914년 이 구도가 뒤집혔다." "이 발칸 지정학 재편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몇 년씩 걸리는 장기지속 현상이 아니라 급변하는 지정학적 환경에 적응하는 단기 현상이었다." "세르비아는 이제 발칸에서 러시아의 돌출부였다. 이것은 필연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결과가 전혀 아니었다." "발칸의 정교회 '자녀들'을 대신해 행동하겠다는 러시아의 주장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약화하고,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터키 해협의 발칸 배후지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포퓰리즘적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범슬라브주의는 러시아 민족주의 언론에 인기가 있었을지 몰라도, 히틀러의 생활권Lebensraum 개념과 비교해 정치행위의 신조로서 딱히 더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438-40)


"1913년 10월 세르비아와의 교착상태를 겪으면서 오스트리아가 향후 위기에 대처할 때 준거로 삼을 몇 가지 전례가 확립되었으며, 실제로 사라예보 암살사건 이후 양국 사이에 위기가 폭발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그 전례들에 따라 대처했다. 가장 명백한 전례는 최후통첩의 효과가 입증된 듯 보였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10월 17일 통첩은 언론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세르비아군이 마침내 알바니아에서 철수했다는 소식에 빈 사람들은 희열을 느꼈다." "두 번째 전례는 세르비아가 빈과의 소통을 관리하면서 장차 화근이 될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도발하고 불순응하는 정책을 다정함에 가까운 간사한 정중함으로 포장한다는 인상이었다." "베오그라드는 빈이 온갖 모욕을 침착하게 감내하면서 계속 몰아붙여야만 굴복하고, 오스트리아가 압박을 늦추는 즉시 도전과 도발을 재개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세르비아는 궁극적으로 무력만을 이해한다는 공리가 더욱 힘을 얻었다."(452-3)


"푸앵카레가 고위직에 취임할 무렵 프랑스에서는 역사가들이 '민족주의 부흥'이라 부르는 정치 기조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공화국 정치인들은 방어주의 안보정책, 즉 국경 요새화, 중포重砲, '국민무장군'으로 개념화된 군대의 짧은 훈련 기간에 역점을 둔 안보정책을 채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에 반해 아가디르 사건 이후 프랑스는 군대의 직업적 이해관계를 고려하고, 훈련 기간을 늘리는 한편 지휘체계를 더 효율적으로 일원화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다음번 전쟁에 명백히 공격적인 태세로 대비하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1905년 팽배했던 대중의 평화주의적이고 반군사적인 분위기가 한결 호전적인 태도에 자리를 내주었다. 프랑스인 모두가 민족주의 물결에 휩쓸렸던 것은 아니지만(주로 젊고 지적인 파리 사람들이 새로운 호전주의를 받아들였다) 군사력 회복은 공화국 정치의 되살아나는 신조들 중 하나가 되었다."(464-5)


6장 마지막 기회: 데탕트와 위험, 1912~1914


"전전 막판 러시아-독일 데탕트는 발트항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에서 거둔 성과는 보잘것없었다. 양국은 우호적으로 대화하면서도 실질적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 언론에 배포된 공동성명은 알맹이 없는 일반론이었으며, 회담에서 "새로운 협정"을 맺지 않았고, 〈균형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입증된 국가들의 집단화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독일은 실제로 오스트리아에 자제를 촉구하여 빈에서 베를린의 동맹 약속이 과연 확고하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킨 반면, 러시아는 발칸 피후견국들을 이미 책동했고 앞으로도 책동할 예정이었다. 오스만제국의 곤경을 이용할 의도가 러시아에 없고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역사적 임무'가 이제 옛일이라는 사조노프의 확언은 줄잡아 말해도 실상을 호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러시아-독일 양해의 기반이었다면, 실로 위태로운 토대였다."(496-7)


"데탕트는 복잡한 방식으로 동맹 블록들의 유동적인 구조와 상호작용했다. 데탕트는 핵심 정치행위자들의 위험 의식을 낮춤으로써 결과적으로 위험 수준을 높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레이는 런던 대사회의(1차 발칸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정전회담)를 주재한 뒤 위기를 해결하고 "평화를 지키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데, 결국 이 자신감 탓에 후일 1914년 7월 사태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영국과 독일의 발칸 데탕트로부터 독일이 맹방 오스트리아를 계속 억제할 거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억제할 거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야고브와 베트만도 런던 정부가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 정책의 진짜 성격을 마침내 알아차렸고 설령 이 지역에서 러시아가 분쟁을 일으키더라도 중립을 지킬 거라는, 똑같이 미심쩍은 통찰을 이끌어냈다. 게다가 유럽 국제체제에서 일부 국가들이 데탕트 국면을 조성하면 다른 국가들의 연대가 공고해지기도 했다."(507-8)


"삼국협상의 연대가 헐거워질지 모른다는 우려에 단기적으로 동맹 약속이 단호해졌으며, 유럽 곳곳에서 호전적인 정책 파벌들이 부상하면서 이 추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시기에) 독일인들도 러시아의 굉장한 경제 성장과 활력에 감명을 받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사령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정학적 상황이 독일에 불리한 방향으로 급변하고 있는 것이 명약관화했다. 슐리펜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 헬무트 폰 몰트케는 초지일관 암울하고 호전적인 관점에서 독일의 국제 상황을 전망했다. 그의 전망은 공리를 닮은 두 가지 가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두 동맹 블록 간 전쟁은 장기적으로 불가피하다. 둘째, 시간은 독일 편이 아니다. 장차 독일의 적이 될 나라들, 특히 급속히 팽창하는 경제와 사실상 무한한 인력을 가진 러시아는 해가 갈수록 군사력을 키울 것이고, 결국 도전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한 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싸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510-1)


"세계 제국들의 무대에서 독일의 선택권은 아주 제한되었고, 동맹 블록들로 나뉜 유럽의 상황은 비교적 닫혀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전쟁 없는 세계정책'에 관심 있는 독일 정치인들의 이목을 끌어모은 지역이 있었다. 바로 오스만제국이었다. 제국들이 특히 험악하게 각축을 벌인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정책은 전통적으로 다소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1880년대 들어 베를린은 한층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영국의 이집트 점령(1882)으로 영국과 소원해진 콘스탄티노플 정부는 베를린에서 적극적으로 파트너를 구하며 독일 정부의 관심을 부추겼다. 독일 은행, 건설사, 철도회사는 술탄의 제국에서 개발이 덜된 지역들부터 진출해 사업권과 이익영역을 확보했다." "이런 모험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초기에는 다소 변덕스러웠지만 점차 확실하고 일관된 지원으로 바뀌어갔다. 1911년 콘스탄티노플 주재 독일 대사는 오스만제국이 독일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익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523)


# 러시아 측의 안보 우려를 증폭시키는 계기로 작용


"삼국협상 정치인들의 수사에서 오스트리아의 쇠락이 불가피하다는 서사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유용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서사는 세르비아를 이중군주국의 구닥다리 구조를 쓸어버릴 현대성의 전령으로 묘사하며 세르비아의 무력투쟁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문화와 행정, 산업 면에서 유럽 현대성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반면 발칸 국가들(특히 세르비아)은 경제적 후진성과 생산성 하락의 악순환에 여전히 갇혀 있었음을 보여주는 차고 넘치는 증거를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이런 거대 서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의사결정자들로 하여금 그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심지어 그들 자신에게도 숨길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면, 정치는 저마다 다른 미래를 내포하고 있는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역사의 비인격적 전진 운동에 보조를 맞추는 일이 된다."(544-5)


"발칸 반도에서 프랑스와 러시아가 합동 작전을 펼친다는 전략은 시나리오이지 계획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양국 정책수립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독일에 미칠 법한 영향을 놀라울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프랑스 정책수립자들은 군사적 위협의 균형이 얼마만큼 독일에 불리하게 기울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1914년 6월 프랑스 참모본부는 〈군사적 상황이 독일에 불리하게 변경되었다〉라고 만족스러운 투로 지적했으며, 영국의 군사적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방어적인 것이고 적에게만 공격적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던 까닭에, 핵심 정책수립자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베를린의 선택지를 줄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국제관계 이론가들이 '안보 딜레마'라고 부르는 상황, 즉 한 국가가 자국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가 〈다른 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549-50)


"세기말적 남자다움에 호소하는 표현이 이 무렵의 서신과 메모에서 워낙 광범하게 나타나므로 그 영향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었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 해도 이런 표현은 분명 유럽 남성성의 역사에서 아주 특정한 순간을 반영한다. 젠더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19세기 말 수십 년과 20세기 첫 10년 동안 욕구 충족(음식, 섹스, 상품)에 집중하던 비교적 폭넓은 형태의 가부장적 정체성이 더 좁고 냉정하고 금욕적인 정체성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종속되고 주변화된 남성성들(예컨대 비백인 프롤레타리아의 남성성)과의 경쟁에 직면한 엘리트층 내에서 '진정한 남성성'의 표현이 강조되었다. 특히 군 지휘부 집단들 사이에서 체력, 강인함, 의무, 아낌없는 봉사가 그전까지 강조되었던 상류층 출신이라는 사실을 점차 대체했다." "페미니스트 사상가 로자 마이레더는 1905년에 〈그들은 전통적인 남성성의 규범에 들어맞기만 하면 패배의 참혹함이나 행위의 순전한 부당함에 무감각하다〉고 썼다."(559-60)


3부 위기


7장 사라예보 살인사건


"때때로 역사가들은 대공이 인기가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암살 자체는 사태의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고 기껏해야 더 먼 과거에 뿌리박은 결정의 구실이었다고 추론했다. 그러나 이 결론은 실상을 호도하는 것이다. 우선 인기가 있었든 없었든, 제위계승자의 에너지와 개혁 열의는 널리 인정받았다. 콘스탄티노플 주재 오스트리아 공사는 세르비아인 동료에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보기 드문 활력과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국정에 완전히 헌신했으며 죽지 않았다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공은 제국의 존속을 보장하려면 〈국내 정책 분야에서 방침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이해한 사람들〉 전부를 자기 주변으로 모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대공 암살은 단순히 그 개인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그가 상징하던 것, 즉 왕조의 미래와 제국의 미래, 그리고 둘을 통합한 '합스부르크 국가 이념'까지 타격을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의미했다."(587)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기는커녕 파시치(더 나아가 세르비아 당국)는 관습적인 자세와 태도로 되돌아갔다. 다시 말해 이번 사건으로 세르비아인들 자신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사라예보에서 피해를 입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자업자득이다, 세르비아인들은 말로써, 필요하다면 무력으로써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다는 등 이런저런 주장을 폈다." "이 견해에 따라 베오그라드 정부는 세르비아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오스트리아의 비난을 정당한 이유가 전혀 없는 공격으로 묘사했고, 공식적으로 도도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세르비아의 적절한 대응책이라고 밝혔다. 이 모든 주장은 베오그라드 정치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면 이해할 만한 일이었지만, 세르비아가 오만과 기만, 책임 회피로 일관한다고 여긴 오스트리아를 격분시킬 수밖에 없었다. 참사에 대한 세르비아 국가의 공동 책임이 추가로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가 분개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604)


8장 확산되는 파문


러시아는 자신들이 발칸의 불안정에 기여한 역사는 도외시한 채,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가 평화롭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런던과 파리 모두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러시아의 서사에 반대할 의향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인기 없고 전쟁을 도발하던 엄격한 차기 군주가 오랜 치욕과 학대에 격분한 자국 시민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대표하던, 부패해 무너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탐욕스러운 정권이 애석할 것 없는 그의 죽음의 책임을 떳떳하고 평화로운 슬라브족 이웃에게 덮어씌울 태세였다. 사라예보 사건에 이런 틀을 씌우는 것이 러시아의 행동 결정을 공식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틀 짓기의 결과로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 발생할 경우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저지할 장애물 중 일부가 제거되었다. 발칸 개시 시나리오가 일촉즉발 가능성이 되었던 것이다."(634-5)


"독일 지도부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공격을 계기로 러시아가 개입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가동되고, 결국 대륙 전쟁이 발발할 위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일부 역사가들은 빌헬름과 베트만, 그들의 군사고문들이 일촉즉발 사라예보 위기를 독일에 유리한 조건에서 다른 강대국들과 분쟁을 벌일 기회로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 물음에 답하자면, 먼저 독일 핵심 의사결정자들이 러시아가 개입할 것으로 예상하지도 않았고 개입을 유발할 생각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7월 말까지 위기에 대처하는 동안 독일 정부의 특징이었던 군사적 대비를 꺼리는 태도에는 현재 대비태세에 대한 군부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겠지만, 분쟁을 발칸반도로 국한하려는 독일 지도부의 바람 또한 반영되어 있었다. 다만 이 정책으로 분쟁을 국한하는 데 실패할 경우 독일의 군사 대비태세가 위태로워질 위험이 있었다."(640-1)


"오스트리아는 의사결정 이론가들이 말하는 '중대 결정', 즉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고, 돌이킬 수 없는 변혁적 결과를 가져오고, 결정자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당시 위기를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평가했고, 여러 요인과 위험에 대해 논의했다. 오스트리아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려는 세르비아 당국, 이런 사건을 중재할 수 있는 국제 사법기구의 부재, 향후 베오그라드에 순응을 강요할 수 없는 당시 국제 정세 등을 고려하면, 오스트리아가 덜 과격한 해법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의 대응은 (1914년의 다른 어떤 행위자들보다 더한 정도로) 근본적으로 기질과 직관에 따른 비약,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현재 어떤 상태이고 강대국으로 존속하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공통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적나라한 결정 행위'였다."(662)


9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프랑스인들


"(7월 21일~23일간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푸앵카레는 강경함이라는 복음을 전도했고 러시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맥락에서 강경함이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조치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료들이 시사하는 대로, 푸앵카레도 러시아 대담자들도 대공 암살 이후 모종의 조치를 정당하게 취할 자격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임기응변도, 새로운 정책 성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푸앵카레는 그저 1912년 여름부터 구상해온 방침을 굳게 고수하고 있었다." "푸앵카레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숱한 대화를 나누며 예견한 발칸 대응 정책을 평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불렀는데,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불요불굴 연대에 직면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십중팔구 물러설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설령 모든 예측이 어긋나더라도, 전쟁보다 나쁜 상황은 강력한 러시아가, 그리고 바라건대 영국의 육군력과 해군력, 상업력이 감당할 것이었다."(690-1)


10장 최후통첩


"오스트리아 수뇌부는 최후통첩 시나리오를 논의하는 회의는 물론 다른 회의들에서도 오늘날 말하는 출구전략을 조금이나마 닮은 것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세르비아는 조용히 지내는 이웃들 사이에 있는 불량국가가 아니었다. 인접국 알바니아는 여전히 매우 불안정했으며,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통제 아래 있는 마케도니아 영토를 먹어치우기만 하면 예전의 친러시아 정책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다.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 지역 병합과 루마니아를 영토 보상으로 달래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오스트리아는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오스트리아 정치 엘리트들은 여전히 베오그라드와의 분쟁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더 폭넓은 문제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푸앵카레가 서파리에게 세르비아에게는 "친구들"이 있다는 이례적인 경고를 했다는 소식이 빈에 도착했을 때조차 베르히톨트는 방침 변경을 고려하지 않았다."(694-6)


"베오그라드에서 숙명론 분위기를 쫓아버리고 최후통첩 요구에 순응해 전쟁을 피해보려던 각료들의 마음을 돌린 것은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강경해지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각료들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양보하지 않는 선에서 오스트리아의 요구에 최대한 순응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답변서를 다듬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세르비아의 답변서는 지저분해 보였을지 몰라도 외교적 얼버무림의 걸작이었다." "답변서 작성자들은 (자신만만한 자화자찬으로 시작되는) 자신들의 응답으로 양국 사이의 모든 오해가 풀릴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정부는 사적 개인들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언론이나 〈협회들의 평화로운 업무〉를 직접 통제하지 않는 까닭에 빈에서 제기한 혐의에 놀라고 고통받은 터였다. 작성자들은 최후통첩의 각 항에 답변하면서 수락과 조건부 수락, 회피, 거부를 절묘하게 혼합했다."(711-3)


"1914년 7월 28일 오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비트이슐에 있는 황제 별장의 집무실 책상에서 타조 깃펜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이즈음이면 베오그라드는 이미 인구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벌써 군복무 연령의 모든 남성이 징집되고 많은 가족이 친척과 함께 내륙으로 피난을 떠난 뒤였다. 7월 28일 오후 2시 정각에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들불처럼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모든 신문의 호외가 행상들이 거리로 가져가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이날이 지나기 전에 도나우강에서 탄약과 지뢰를 운반하던 세르비아 증기선 두 척이 오스트리아 공병들과 경비원들에게 몰수되었다."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 58세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한껏 흥분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나 자신을 오스트리아인으로 느끼고, 썩 희망적이지 않은 이 제국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은 기분이다. 나의 모든 리비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바친다.〉"(720-2)


11장 경고사격


"7월 24일 열린 러시아 각료평의회는 다섯 가지를 결의했다. ①오스트리아 측에 최후통첩의 시한 연장을 요청한다. ②세르비아 측에 국경에서 전투를 개시하지 말고 군대를 자국 중부로 후퇴시킬 것을 권고한다. ③차르에게 키예프, 오데사, 카잔, 모스크바 군관구의 동원을 "원칙적으로" 승인할 것을 요청한다. ④육군장관에게 군사장비 비축을 가속할 것을 지시한다. ⑤현재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투자 중인 러시아 자금을 회수한다. 이튿날, 더욱 엄숙한 각료평의회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전날 각료평의회에서 결정한 사항들을 확인하고 정교한 추가 군사조치들에 동의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조치는 각료평의회가 '전쟁 대비기간'이라고 알려진 일군의 복잡한 규제를 승인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동원에 대비한 많은 계획을 포함한 이 조치들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댄 군관구들만이 아니라 유럽 러시아 전역에 적용될 예정이었다."(729-30)


"상술한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사조노프와 그의 동료들은 위기를 고조시키고 유럽 전면전의 가능성을 대폭 끌어올렸다. 우선 러시아의 사전동원은 세르비아 정계의 공감대를 바꾸어놓았다. 원래 최후통첩 수락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베오그라드 정부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을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또한 사전동원은 러시아 국내에서 행정부에 대한 압력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군복 입은 남자들의 광경과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운명을 '좌시하지' 않을 거라는 소식에 민족주의 언론이 환호성을 질렀기 때문이다." "사조노프는 왜 그렇게 했을까? 사조노프는 처음부터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조치가 러시아의 반격을 촉발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최후통첩에 대한 그의 대응은 그의 이전 언행과 완전히 일맥상통했다. 그는 세르비아의 영토회복주의에 대항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권리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737-8)


12장 마지막 날들


"러시아의 총동원은 7월 위기의 가장 중대한 결정 중 하나였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총동원이었다. 이 시점에 독일 정부는 러시아가 7월 26일부터 시행 중이던 '전쟁 대비기간'에 상응하는 '전쟁 위급상황'을 아직 선포하기도 전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전히 세르비아를 물리치는 데 초점을 맞춘 부분동원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 사건 순서는 훗날 프랑스와 러시아의 정치인들을 꽤나 불편하게 했다.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정부가 7월 위기 동안 자국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펴낸 오렌지북Orange Book에서, 편집자들은 러시아의 총동원이 다른 나라의 조치에 대응한 결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총동원령 날짜를 3일 앞당겼다." 프랑스 역시 러시아의 동원령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동원조치'에 맞선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독일은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7월 위기 내내 상대적으로 차분한 하나의 섬이었다."(780-1)


"오스트리아가 굼벵이처럼 대응한 탓에 국지화 정책의 성공에 필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가 무너졌다면, 독일 정부는 이 정책을 왜 그토록 악착같이 고수했던 걸까?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무력 개입을 방지하는 더 깊은 구조적 요인들(러시아의 무장 프로그램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사정 같은)을 믿었다는 데 있다." "독일 정부가 국지화에 전념한 다른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대안이 부족했다는 데 있다. 합스부르크 맹방을 포기하는 방안은 논외였는데, 평판과 권력정치 때문만이 아니라 독일 의사결정자들이 세르비아를 고발하는 오스트리아의 정당성을 정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사적 공격력의 균형이 독일에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면, 독일의 유일한 강대국 맹방을 잃을 경우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었다(독일 계획자들은 이미 이탈리아를 실질적은 자산으로 여기기에는 너무 신뢰할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792-4)


"러시아가 부분동원령을 공포한 7월 29일에 열린 회의에서도 독일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팔켄하인 육군장관은 전쟁 위급상황 선포에 찬성한 반면, 헬무트 폰 몰트케 육군참모총장과 베트만 재상은 중요한 운송체계에서 경비 근무를 확대하는 방안에만 찬성했다." "7월 31일 군사적 조치를 놓고 또다시 갈팡질팡하는 차에 모스크바의 푸르탈레스 대사로부터 러시아가 전날 한밤중에 총동원을 명령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카이저는 즉시 전화를 걸어 전쟁 위급상황 선포를 명령했고, 7월 31일 오후 1시 이 명령이 팔켄하인을 통해 군대에 하달되었다. 이제 먼저 동원한 책임은 분명히 러시아에 있었다. 이는 베를린 지도부에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독일 일부 도시들에서 일어난 평화주의 시위를 감안하면, 독일의 참전이 방어적 성격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어야 했다." "러시아 정부가 총동원령 철회를 거부하자 독일은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804-6)


"외교의 시간이 끝나가고 군인의 시간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베를린 주재 바이에른 군사전권위원은 동원령 발표 이후 육군장관을 방문했을 때, 〈복도에서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악수하는 이들을 어디서나〉 보았다. 〈누군가 장애물을 넘었다고 자축했다.〉 7월 30일 파리에서 이그나티예프 대령은 〈프랑스 측에서 생각하기에 유리한 전술적 상황을 이용할 기회를 잡은 데 대한〉 프랑스 동료들의 "숨김없는 기쁨"을 보고했다.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고무되었다. 7월 28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모든 것이 파국과 붕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소. 나는 흥이 나고 대비가 되어 있고 행복하다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쾌활한 알렉산드르 크리보셰인은 제정의회 의원 대표단에게 독일이 조만간 괴멸될 것이고 전쟁이 러시아에게 "호재"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우리를 믿으세요. 신사분들, 만사형통일 겁니다.〉"(843-4)


"다가오는 싸움에 열광하는 쇼비니즘적 표현들이 드문드문 있기는 했지만 이는 예외적이었다. 유럽 남자들이 증오스러운 적을 물리칠 기회를 덥석 붙잡았다는 신화는 그동안 철저히 타파되었다. 대부분의 장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원 소식은 엄청난 충격,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리고 도심지에서 멀어질수록, 장차 전쟁에서 싸우거나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일가친척을 잃을 사람들이 동원 소식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차르의 말이 전해지자, 독특한 군사적 소명과 전통을 지닌 카자크인들은 〈적과 싸우고자 불타올랐다.〉 그런데 그 적은 누구인가? 아무도 몰랐다. 동원 전보에는 구체적인 정보가 없었다. 소문이 넘쳐났다. 처음에는 모두 중국과 전쟁하는 게 틀림없다고 상상했다. 〈러시아가 몽골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중국이 전쟁을 선포했대.〉 이내 다른 소문이 퍼졌다. 〈잉글랜드랑, 잉글랜드랑 싸운대.〉 이 견해가 한동안 우세했다."(845-6)


결론


우리는 의사결정자들에게 작용한 객관적 요인들과 그들이 서로 나눈 이야기들을 구별해야 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이 많고 참을성 강한 이웃을 끊임없이 도발하고 못살게 구는 젊은 비적들과 국왕 시해자들로 이루어진 민족에 관한 이야기가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지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을 방해했다. 반대로 세르비아에서는 탐욕스럽고 막강한 합스부르크 제국이 자신들을 희생시키고 억압한다는 공상이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에서는 침공과 분할을 예상하는 어두운 미래상이 1914년 여름 내내 의사결정을 괴롭혔다. 러시아에서는 동맹국이 러시아를 거듭 욕보였다는 이야기가 과거를 왜곡하는 동시에 현재를 명료하게 하는 등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널리 회자된 이야기는 오스트리아가 중부유럽과 동유럽에서 안정의 버팀목 역할을 한다는 기존의 전제를 점차 대체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쇠락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서사였다."(852)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다룬 연구에서 폴 케네디는 교전국들 전부를 탓하거나 아무도 탓하지 않는 식으로 범인 색출을 회피하는 것은 "물렁한"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케네디의 말대로라면 더 딱딱한 접근법은 손가락질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 책임 지우기에 중점을 둔 서술의 문제는 결국 엉뚱한 국가에 누명을 씌울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런 서술에 전제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책임에 초점을 맞춘 서술은 첫째로 상호작용하며 갈등을 빚은 관계에서 궁극적으로 한 주역은 옳게 행동하고 다른 주역은 잘못 행동한 것이 틀림없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고발 서사의 또 다른 단점은 다자간 상호작용의 과정보다는 특정한 한 국가의 정치적 기질과 구상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야를 좁힌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책임을 지우려는 수사관은 의사결정자들의 행위를 일관된 의도에 따라 계획한 행위로 해석하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855-6)


"1914년 전쟁 발발은 온실 안에서 연기 나는 권총을 손에 쥔 채로 시체를 지켜보는 범인을 발견하며 끝나는 애거서 크리스티 류의 드라마가 아니다. 이 이야기에는 연기 나는 총이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주요 인물들 모두가 연기 나는 총을 쥐고 있다. 이렇게 보면 1차 세계대전 발발은 범죄가 아닌 비극이었다. 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프리츠 피셔와 그의 역사 서술을 지지한 동료들이 올바로 주목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정책수립자들의 호전성과 제국주의적 피해망상을 꼭 최소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인들만 제국주의자였던 것도 아니고, 그들만 피해망상에 굴복했던 것도 아니다. 1914년에 전쟁을 불러온 위기는 유럽 국가들이 공유한 정치문화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극적이고 진정으로 상호적인 위기이기도 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14년에 정치인들이 얻고자 다투었던 상들 가운데 그 무엇도 뒤이은 대재앙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지 않았다."(856-7)


"그들은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험을 실감하기도 했을까? 이것은 1914년 이전과 1945년 이후의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의사결정자들과 일반 대중 모두 핵전쟁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파악했다(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위에 생긴 버섯구름 이미지가 일반 시민들의 악몽에 나왔다).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 경쟁이 벌어졌음에도 초강대국들 간 핵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1914년 이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많은 정치인들의 마음속에서 단기전에 대한 기대와 장기전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테면 서로를 상쇄하여 위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막았다." 우리는 전전 유럽 어디서나 이렇게 기대와 두려움이 상쇄된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914년의 주역들은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하고 꿈에 사로잡힌 채 자신들이 곧 세상에 불러들일 공포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이었다."(8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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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무력 정치사 - 민족주의자와 경찰, 조폭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존슨 너새니얼 펄트, 박광호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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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1980년대 말 학생, 노동자, 지식인, 종교 단체, 중산층이 단합하여 권위주의 지배를 종식시킨 이후 국가는 중산층이 계속 방관자 입장을 취하도록 애써왔다. "한국사에서 주목할 만한 함의 하나는 국가와 비국가 폭력 전문 집단이 강제 철거와 노동 억압 시장에서 협력한 것이다. 왜 유독 강제 철거와 노동 억압인가? 그 답은 이 둘 모두가 중산층의 사회경제적 안녕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강제 철거는 무엇보다, 주택 공급을 늘릴 뿐 아니라 강력한 경제 성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사회 기반 시설을 증진하는 대규모 재개발과 [도시] 미화 사업의 일부이다. 또한 노동 불안은 국가의 경제적 활력을 위협한다. 그런데 그런 사업에서 국가의 폭력 행위는 정치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런 사업 대다수에서 국가는 폭력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다. 즉 실제로 폭력을 수행하는 행위자가 아니라 폭력의 관리자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사례에서 중산층은 뚜렷이 침묵을 지킨다."(21-2)


2장 국가와 국가 권력: 이론적 고찰


"선진국에서는 비국가 집단을 과거보다 덜 사용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국가는 하청 강제력을 이용한다. 다만 국가가 제공하는 합법적 틀 내에 있는 하청 집단들을 주로 이용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국가와 초법적 활동을 하는 비국가 집단들 사이의 협력과 공모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다양한 수준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 국가 형성에 관한 문헌은 현대의 발전된 정치체에서 이런 집단의 다양한 역할을 대개 가리거나 철저히 무시한다. 사실 그런 제도적 협약을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정당한 폭력 자원과 부당한 폭력 자원, 합법적 서비스를 명령하는 자와 불법적 서비스를 명령하는 자라는 엄격히 양분된 개념들이 복잡해진다. 더욱이 물리적 능력과 민주주의 능력, 이 둘이 모두 강한 정치체에서도 그런 사례들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면, 그런 현상은 그저 약하거나 실패한 국가에서만 나타난다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26-7)


3장 한국의 무력 시장: 사법부에서 경찰, 국정원까지


"행상은 사회계층에서 맨 밑바닥에 위치했는데, 대개 '태생이 천한,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로 여겨졌고 실제로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 행상, 특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행상들은 높은 계층의 약탈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원선에 따르면 "고려왕조 말엽, 지방 관리의 갈취와 산적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행상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대동단결해 상인 조합을 조직했다." 달리 말해 행상의 재산권과 안전권에 대한 집행이 공적 영역에서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적 보호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던 것이다. 19세기에 행상들은 조선 정부와 중요한 관계를 형성했다. 국가는 그들에게 반관半官 징수원(시장에서 판매세 징수), 밀정, 염탐꾼의 역할을 요구했고 무력 충돌이 일어날 때에는 이들을 지원 부대로 뽑기도 했다. 이런 긴밀한 관계와 다양한 역할로 인해 그들은 가장 중요하고 유력한 비정부조직이 되었다."(52-3)


"현대의 범죄 폭력 집단의 역사적 기원은 해방 후 정치, 경제 무대를 지배한 불법 무장 '청년 집단'의 역사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정계 보스와 실세들과의) 광범위한 관계망을 통해 비국가 범죄 집단들은 박정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국가 형성에서 막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61년과 1963년 사이 박정희의 지배 아래 경찰은 조직적 활동으로 범죄 집단의 일원 약 1만 3000명을 체포했다. 사회 혼란에 책임이 있는 집단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공식 명목이었다. 2004년에 발간된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차 영문보고서는 대개 그런 활동이 시민들의 승인을 얻어냈다고 말한다. 대중의 지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유용했다. 비록 이후 박정희가 1963년, 1967년, 1971년에 대통령직을 얻기(유지하기) 위한 노력에서는 꼭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범죄 조직들이 흔히 박정희 반대파의 기반이었다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53-5)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잔혹하게 억압한 뒤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권력 공고화 과정에서 시민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한편 대중의 환심을 사는 이중 전술을 사용했다.〉 전두환 행정부는 이를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구호 아래 실시하며 군사 반란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 처음에는 계엄포고령 제13조 선포, 그리고 1980년 사회안전법을 통해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범죄자와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했다. 군경은 전 지역에 내려진 체포 할당에 따라 영장 없이 시민 6만 7055명을 구금했고 그 중 4만 명을 군대가 운영하는 악명 높은 캠프인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이런 '사회 정화' 및 '각종 일제 단속' 정책들은 정부가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사회에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경찰과 범죄자들이 점점 더 서로 친밀해지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관대한 처분을 내리거나 노동 캠프로 보내는 것은 경찰의 특권에 달려 있었다."(55-6)


"조직범죄 집단들은 여러 합법 사업에도 관여한다. 유력한 혐의들(합법적인 바, 단란주점, 레스토랑 운영 등) 외에도, 민간 경비 산업의 성장은 강제력 행사 전문 틈새시장을 제공했다. 1976년 용역경비업법이 생기며 합법화된 민간 경비 산업은, 국가가 이전까지 직접 담당하던 강제 철거 같은 일들을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영화하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주로 건물을 보호하거나 호송 업무를 하는 집단들과는 달리) 주로 강제에만 집중하는 집단들은 '용역 회사'로 불리고, 더 넓게는 '건설 용역'으로 불리기도 한다. 용역 회사들은 대개 공식 등록이 되어 있고 그런 이유로 합법적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전술들은 흔히 본질상 범죄적이다." "강제 철거 외에도 '용역 회사'는 파업 분쇄를 비롯한 노동 문제에도 깊게 관여한다. 용역 회사가 출현해 강제 철거와 파업 분쇄에도 관여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초에 사회가 점차 투쟁적 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 그리고 민주화 운동과 맥락이 닿는다."(59-60)


"1970년대부터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까지 조직 폭력 집단들 사이의 관계는 경쟁적이고 폭력적이었다. 한국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유력한 행위자 다수를 체포하고 기소해 감옥에 넣은 것도 이 시기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연이어 체포하고 구금하는 동안 다양한 범죄 행위자들이 길고 잔혹한 감금이라는 경험을 공유하면서 점차 서로 친해졌다는 것이다. 그런 공유된 경험은 느슨한 협력 조합, 즉 '형제애'가 형성되는 촉매가 됐다. 일종의 공제조합처럼 상호 보호비를 모으는 이런 조합들은 서로 더 쉽게 협력하거나 협조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집단 간 갈등을 줄이고자 조직됐다."(64) "(보스들의 모임은 조직 간의 분쟁 해결 외에도 지역 사회를 타겟으로) 장학금, 임대료 지원, 기타 재정 관련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이 계획의 목적은 일단은 지역사회와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해 지역사회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지역 경찰과 정치인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66)


4장 국가 추구자, 민족주의자, 불법 무장 단체: 대한민국의 시작


"본디 식민지 시기부터 조직적 범죄와 폭력에 관여한 조직들은 정치권력들의 정쟁 도구로 이용됐다. 가장 유명한 무리는 김두한이 이끄는 조직과 정진영(또는 정진룡)이 이끄는 조직이었다. 이 둘은 모두 항일 활동으로 유명해졌는데, 나중에는 일본인에 고용되어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 의용정신대)을 조직하고 이끌어 사실상 합법적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1945년 식민 지배가 끝나면서 김두한과 정진영은 자신들이 거느린 용역들을 정당과 실세에게 대여했다. 김두한은 우익에 붙었고, 정진영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위해 일했다." "이 집단들은 정치사회화 과정과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을 모집하는 데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으며, 결국 각 정계 보스와 정파 형성을 위한 권력의 기초를 마련했다." "폭력적 정치 활동이라는 '더러운 일' 외에도 대개 불법 자금에 의존하는 그런 집단들은 강제된 혹은 '지발적 기부금'에 기댔는데, 그 액수는 놀랍게도 1949년 국가 세입의 절반쯤이나 됐다."(74-5)


"정치 깡패, 민족주의자, 불법 무장 단체, 국가 행위자 사이 협력의 시대는 이승만 이후 시기에도 규모가 훨씬 작아지긴 했지만 각기 다른 수준으로 계속됐다. 박정희가 무력 시장을 대체로 강화할 수 있었고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제력의 공적 자원을 통해 무력 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임기 전반에는 적어도 민주주의를 약속하며 활동해야만 했다. 이승만 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회 세력을 흥분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1961년과 1970년 사이 그런 협력을 추동한 논리는 국가의 고능력과 저자율성을 고려할 때 규범적 이해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가 권위주의를 공식적으로 도입하자 한국의 국가강도는 고능력, 고자율성으로 바뀌었다. 요컨대 국가는 과거와 같은 그런 협력적 관계가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한동안 단절되었던 그런 관계는 1980년대 중반에 전두환이 박정희의 후임으로 들어서면서 회복된다."(93-4)


5장 국가 확장, 시민사회의 발흥, 그리고 전술의 변화: 박정희에서 전두환까지


"(국가와 비국가의 협력 관계는) 전두환 시기 노동 시위 억압과 강제 철거 부문에서 다시 시작했다. 전두환이 고도로 발달된 강제력을 뽐내던 국가를 물려받았음에도 협력 관행을 다시 활성화한 것은 국가 자율성이 가파르게 하락한 결과였다. 가장 중대한 것은 인구가 과거에는 시골의 농민이 지배적이었다가, 필요하다면 커다란 압력을 가하려 하고 또 그런 힘이 있는 교육받은 도시민으로 빠르게 변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유롭고 공정한 민주 선거는 1987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은 그 전부터 이미 정치 엘리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무력 시장에서 국가와 비국가가 다시 협력하게 됐다는 것은 국가가 값싼 노동력과 재개발이라는 공공재(증가하는 중산층이 요구한 재화)를 공급할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바로 그 재화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강제력을 사용하는 일에서 일어날 사회 세력으로부터의 처벌을(그리고 국제적 비난을) 편하게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97)


"선거 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전인 제3민주화 국면(1984~1987년)이 특히 중요하다. 1983년 전, 강제 철거와 관련해서 국가는 재개발 과정에서 사실상 모든 면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목동 재개발 과정에서 대규모 시위들이 한창 벌어지는 동안 그 과정을 민영화하면서 달라졌다. 노동 억압과 관련해서는 민간 경비 회사와 기타 비국가 행위자들(예컨대 구사대)을 허가하는 조치가 이른바 노동자대투쟁(1987~1989) 기간 중인 중인 1987년에 시작됐다."(117-8) "1987년 전, 노동을 포함한 시민사회의 다양한 부분과 중산층 사이의 동맹은 권위주의 통치 체제를 제거하는 목표를 공유했다. 정치 문제가 해결되자 중산층은 흩어졌다. 노동자와 학생의 급진적 집단들이 잠재적으로 국가와, 더 중요하게는 자신들의 지위에 유해하다고 본 것이다. 이 분열은 연이은 정부들이 흔히 민간 대리인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핵심 요소의 하나였다."(120)


6장 강제 철거의 정치: 목동 재개발에서 인사동 노점상 철거까지


"1960년대 초 판자촌을 없애는 표준 절차는 주택을 헐고, 필요하다면 주민들을 강제로 도시 바깥으로 내쫓는 것이었다. 내쫓긴 철거민들은 동일한 혹은 그보다 열악한 다른 주택을 짓곤 했다. 그러니까 도시로 돌아와 집을 다시 짓는 것이었다. 이런 철거 정책은, 판자촌이 특히 취약한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날 때도 시행됐다." "(철거민들은 시청에 항의하거나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철거에 대응하기도 했지만) 가장 흔한 것은 철저한 물리적 저항이었다. 경찰과 지역 행정관들은 건물 철거와 강제 퇴거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경찰이 주민을 내쫓기 위해 불도저, 물대포, 최루탄을 사용하는(미국 남부의 민권 운동 시기를 연상시키는) 광경이 비일비재했다. 1966년과 1970년 사이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은 '불도저'라는 별명이 붙은 이였다. 특히 시청이 스스로 많은 수의 철거민을 감당하기 힘들 때, 용역들이 간간이 동원됐다. 하지만 경찰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이 모든 일의 선두에 섰다."(124-5)


"1972년 초, 서울특별시청은 1971년 11월 이전에 지은 판잣집은 부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항공사진을 통해 판자촌 약 17만 3900곳이 확인됐고, 그 소유권이 사실상 합법화됐다. 이로써 본질상 두 유형의 판자촌 주민이 탄생했다. 적어도 약간의 권리가 있는 판잣집 소유주와 권리가 없는 세입자 말이다." "재개발 정책은 두 집단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소유주들은 단순히 퇴거해 보상을 받기도 했을 뿐 아니라 지역의 재개발과 향상이 지가 상승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큰 이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세입자들은 스스로 퇴거하거나 강제로 쫓겨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이 정책으로 판잣집 소유주는 정부 편에 서게 됐고 세입자는 국가 세력, 부동산 투기꾼, 건설회사, 더 많은 상업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업가들, 그리고 극심한 주택 부족으로 증가한 집값에 직면한, 점점 늘어나는 서울의 중산층에 맞서는 자리에 서게 됐다."(125-6)


정부가 주도한 목동 사업 이후 "공공 관리 재개발 모델을 대신해 공동 재개발 사업 체계가 개발됐다. 이 계획에서는 재개발 과정이 사실상 민영화되어 재개발 이후 남은 이익이 얼마든 그것은 회사로 돌아간다." "공동 재개발 사업은 중요한 일들을 했다. 첫째, 전에는 제한했던, 판잣집 소유주로 인정된 이들의 수를 확대했고 그에 따라 기존의 소유주와 세입자 사이의 연대가 깨졌다. 결국 잠재적 저항 수준을 일부분 효과적으로 감소시켰다. 둘째, 더 중요한 것으로, 이전까지 정부에 지워졌던 재정 부담을 없앴다. 정부는 재정 부담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재산세도 더 걷게 됐고, 그와 동시에 당시 1970년대 오일 위기의 여파로 인한 해외 건설의 감소로 큰 타격을 입었던 국내 사업 시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셋째, 정부의 역할을, 단지 그 과정을 간접적으로 관리하고 사용되지 않는 국유지를 판매하는 역할로 축소했다. 시 관리들은 강제 퇴거 같은 좋은 소리 들을 게 없는 조치들을 직접 수행하지 않게 됐다."(131-2)


7장 노동 억압의 정치: 한국노총, 구사대에서 컨택터스까지


"1987년 이후 노동자들의 요구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중반까지 파업과 노동쟁의의 주된 이유였던 경제적 이해를 넘어섰다. 특히 파업들은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노조를 설립할 권리, 그리고 노조의 이해가 아니라 집단행동을 억압하는 데 이용됐던 국가조합주의적 노조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했다. 달리 말해 노조 활동들은 작업장의 민주화에 집중했다. 국가의 대응은 흥미롭다. 1987년 8월 초까지, 정권은 노동쟁의에 방관자적 태도를 보였다. 예컨대 당시 정권은 경찰을 눈에 띄게 동원해 노동자들의 저항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민주주의의 창시자라는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가 '퇴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국가의 초기 무대응은 정주영이 두 가지 보호 전략을 쓰는 계기가 됐다. 첫째, 구사대를 만들었다. 둘째, 용역들을 모집해 다루기 힘든 노동자들과 파업들을 진압하는 데 사용했다. 다른 기업들도 그에 따라 구사대를 만들고 노동을 억압하는 주요 강제 집단을 고용했다."(153-4)


8장 결론, 그리고 한국 사례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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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3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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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히스테리와 광기 속에서 / 1976년


"긴급조치 9호 발표가 있은 지 9개월여 후인 1976년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민주화 진영의 큰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또는 '명동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선언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3·1 기념 미사를 통해 발표되었다." "'3 ·1 민주구국선언’의 초안은 김대중이 작성했다. 김대중은 그 이전 명동성당에서 추기경 김수환을 만나 〈내가 투옥되는 것으로 국민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주고 싶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새로운 전기'가 만들어지기엔 세상은 너무 얼어붙어 있었다. 3월 5일 문공장관 김성진은 이 선언에 대해 〈헌법질서를 파괴하려는 비합법 활동〉이라고 주장했으며, 서울지검은 '정부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정부 여당의 '전가의 보도'는 여전히 월남 패망이었다. 3월 17일 신민당 의원 한병채가 명동 사건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공화당 의원 홍병철은 〈한 의원을 월남으로 보내라〉라고 야유했다."(25-8)


"1975년 5월 21일 박정희와 회담한 이후 변질된 김영삼의 행보는 민주화운동에 찬물을 끼얹었을 뿐만 아니라 신민당의 내분을 몰고 왔다. 1976년 5월 25일에 치러진 신민당 전당대회가 〈우리 야당사에서 가장 추악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당시의 내분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는 박 정권의 공작정치가 개입된 탓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과 신민당이 면책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5·25 전당대회를 전후하여 김영삼 등의 주류에 도전하는 비주류는 이철승, 고흥문, 신도환, 정해영, 김원만, 정운갑 등을 중심으로 하여 1975년의 '박-김 회담 의혹', '김옥선 파동 때의 굴복' 등을 걸고 넘어졌다. 비주류는 당헌을 고쳐 집단체제로 가자고 주장했고, 김영삼은 단일지도체제를 고수하겠다며 파벌 세력 강화로 맞섰다. 이런 갈등은 결국 수백 명의 주먹 부대와 각목이 난무하는 폭력 충돌로 이어졌다."(32-3)


# 각 파가 전당대회를 따로 개최하여 주류의 김영삼과 비주류의 김원만이 각각 선거관리위원회에 당 대표 등록을 신청했지만 모두 각하되고, 김영삼은 총재 지위가 6월 9일자로 소멸되자 6월 11일에 사퇴함. 9월 15일에 전당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이철승 389 대 김영삼 364로 이철승 대표최고위원 선출


"1976년 10월 24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 정부의 기관 요원인 박동선 씨가 1970년대 연간 50만 내지 1백만 달러 상당의 뇌물로 90여 명의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한국 정부, 미국 정치인들에게 수백만 달러 뇌물 제공'이라는 톱기사 제목과 함께 무려 10면에 걸쳐 내보냈다."(61) "이 사건은 비단 미국의 정·관계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박동선은 한국 권부와 유착, 미국의 쌀 수입 중개권을 획득해 커미션을 챙기는 방법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고, 그 돈 가운데 일부는 미국 정계뿐만 아니라 박 정권의 정치자금으로도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막대한 액수의 돈이 박 정권에 흘러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박동선이 미시시피나 루이지애나 같은 쌀 생산 주 출신 의원들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인 결과) 한국은 비싼 값으로 쌀과 다른 작물을 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한국 내의 부정부패 차원에서도 깊이 살펴봐야 할 사안이었다."(63-4)


8장 '1백억 달러'의 빛과 그림자 / 1977년


"1977년 1월 20일 '인권대통령'을 표방한 지미 카터의 대통령 취임 이후 코리아게이트 파문은 더욱 확대되었다." "2월부터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한미 관계 조사권을 위임받은 프레이저 위원회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미 선거 공약에서 인권·도덕 외교와 주한미군 철수를 내걸었던 카터는 3월 10일 한국 정부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11월에는 중앙정보부 워싱턴 실무책임자인 참사관 김상근이 망명을 했는데, 그 배후에는 이미 미국에 망명해 있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있었다. 김상근 망명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그 해 12월 4일 해직되고 그 후임에 김재규가 임명되었다. 프레이저 위원회는 37명의 증인을 출석시킨 가운데 20여 회의 청문회를 열었는데, 이 청문회의 핵심은 김형욱과 김상근의 증언이었다. 김형욱과 김상근은 6월 10일까지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되어 '박정희의 가슴에 통한의 못질'을 하는 증언을 하였다."(69-70)


4월 19일에 일어난 '백지 팸플릿' 사건은 1977년의 얼어붙은 정국을 잘 보여준다. "사건 내용은 간단하다. 4·19를 맞아 연세대 몇몇 학생들이 그날 백지를 돌렸을 뿐이다. 굳이 언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을 만큼 박 정권의 광기는 극을 치닫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지 성명서는 각자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학생들은 백지를 돌린 지 채 1분도 안 되어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에선 그 흰 백지에 뭐가 들었나 싶어 햇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불에 태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백지를 마이크로필름쯤으로 아는 그 멍청이들의 눈에 그런다고 뭐가 보일 리가 있을까. 죄목은 씌워야겠고, 찾아낸 물증은 없고, 궁지에 몰린 멍청이들이 생각해낸 죄목은 참으로 기발하다. 이름하여 '이심전심 유언비어 유포죄'. 결국 이 해괴망칙한 죄목에 걸린 4명 중 김철기 씨는 제적되고 나머지는 정학을 맞았다.〉"(96)


"박정희가 농촌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가 하는 증언은 무수히 많다. 그는 생각뿐만 아니라 직접 몸으로도 보여 주었다. 그는 농민들의 술인 막걸리를 좋아했고 자주 농민들과 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유감 없이 보여 주었다. 혹자는 그게 다 '이미지 조작'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원초적인 농촌 사랑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의 농촌 및 농촌 사랑은 직접적이었으나 심리적이고 지엽적이었던 것임에 반해, 농촌과 농민에게 가해진 불이익은 간접적이었으나 사회적이고 구조적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흑백 TV도 제대로 못 보는) 가난한 농민을 위해 컬러 TV 방영을 할 수 없다는 박정희가 그 가난한 농민들의 자식들이 도시의 공장에서 인권유린을 당하는 것에 대해선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그들을 빨갱이로 모는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 그러한 이중성을 잘 말해 준다고 하겠다."(109)


9장 동일방직과 현대아파트 / 1978년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은 주로 중소기업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박 정권의 폭압적인 노동 통제, 한국노총의 어용화, 상대적 임금 우위 등의 이유로 대기업에선 노동운동이 일어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은 임금인상이나 부당해고 반대, 근로조건 개선 그리고 노조결성과 활동보장 등을 내걸고 싸웠는데, 운동이 크게 일어난 기업의 내부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인간적 모독이 투쟁의 주된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절대 빈곤하에서도 인권운동의 성격이 강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박 정권하에서의 인권운동은 불가피하게 반독재투쟁의 성격일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가공할 정권의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민주노조운동에 가장 큰 힘을 보태준 건 종교단체들이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도시산업선교회의 역할이 지대했다. 박 정권을 비롯하여 민주노조운동에 반대하는 세력이 도시산업선교회를 그대로 놔둘 리 만무했다."(134-5)


"동일방직은 전체 1천3백 명의 노동자 중 1천 명 이상이 여성 노동자였는데,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헌신적인 지원에 힘입어 최소한의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수준의 노조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로 여자지부장을 선출해 모범적인 민주노조의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회사는 1975년 말부터 남자 대의원들을 동원하여 어용노조화를 시도하였다. 회사 측의 공작에 대해 정현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 공원들이 대부분인 공장에서도 현장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은 남자이고, 여자들의 의견은 참고조차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을 경우에도 초기에는 대부분의 간부직은 남성들에 의해 독차지되기가 일쑤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을 깨뜨리려고 하는 기업주들은 노동조합의 힘의 원천이 남자 노동자라는 판단 아래 남자 분회 간부를 매수하는데, 이는 상당한 정도로 성공하여 그들은 주로 노동조합 파괴에 앞장서게 된다.〉"(148-9)


"4월 1일자로 무더기 해고를 당한 1백24 명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올려져 전국의 공장에 배포되었다. 이들의 재취업을 막기 위해 박 정권이 그렇게 한 것이다. 다른 건 다 제쳐 놓더라도 박 정권의 재취업 방해 공작이 잘 말해 주듯이, 〈동일방직 사태는 단순한 노사분규나 노동청에서 말하는 노조 안의 조직분규가 아니라 정부·노총·회사가 합작하여 산업선교와 관련된 민주노동운동을 파괴함으로써 산업선교와 노동운동 모두를 말살하려는 첨예한 실례〉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박 정권의 만행에 대해 언론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완전한 침묵을 지켰다."(156-8)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유신체제라는 거대한 바위에 던져진 한 알의 계란과도 다를 바 없었다. 여성 노동자들을 '공순이'로 조롱하거나 폄하했던 사람들 역시 유신체제의 그런 야만적인 음모극에 조연 역할을 했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164)


"박정희 정권은 점점 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와 박정희 이상으로 심한 권력 중독에 빠진 그 주변 충성파들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조갑제는 1979년 박 정권의 파국은 이미 1978년에 시작된 것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8년은 긴급조치 9호의 공포에서 벗어난 민주화운동 세력의 저항이 본격화된 해이기도 했다. 3년 묵은 긴급조치 9호는 그 약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중요 학생 사건 일지에 따르면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1975년엔 10건, 1976년엔 13건, 1977년엔 23건으로 늘더니 1978년엔 31건으로 급증했다. 1978년의 학생 사건들 가운데 3분의 2는 통일주체대의원 선거와 그들에 의한 대통령 선거 시기를 전후하여 일어났다.〉 대통령 선거는 1978년 7월 6일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대통령 선거를 (공산국가에서 형식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에 빗대어) 조롱하는 전단을 찍어 뿌렸다."(175-6)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를 한 건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고 통행금지까지 하루 해제하고 고궁을 무료 개방하였으며, 1천3백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취임식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서중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국의 축하사절로는 만주침략의 중심 인물로 전범 A급이었던 전 일본수상 기시가 이끈 일본인 12명뿐이었다. 유신체제의 '원조격'인 대만에서조차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어서인지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외국특별경축사절을 공식 초청하지 않았다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체육관에서 당선된 유신 대통령 취임에 경축사절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유신체제로 한국은 따돌림 받았고 한국인 모두는 미개인 취급을 받았다.〉" "김대중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12월 27일 서울대병원에서 가석방되었지만 곧바로 자택 연금을 당했고, 신문 방송은 김대중에 대해 일체 보도를 금지당했다."(179-80)


"투기와 부정부패 열풍 속에서 죽어나는 건 가난한 서민들이었지만, 그들에겐 탈출구가 없었다. 저항의 길을 꽉 막혀 있었다. 점점 더 두텁게 형성되어 가고 있던 중산층은 탐욕의 문화에 몸을 내맡겼다. 이와 관련, 김교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 욕구의 충족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찾게 됨에 따라 박정희의 통치는 끝없는 경제과실을 약속해야 했으며, 이를 공급하는 것을 정치의 전부로 생각하게끔 되었다. 여기에 중독되다시피 하여 국민 쪽에서도 한 가지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은 또다른 경제 욕구를 요구하여 성장정책은 멈출 줄 모르는 직선행을 계속해야 했다. ····· 이 같은 물질적 상승 작용이 몰고 온 국민적 규모의 과열 현상은 마침내 모두가 앞을 다투어 돈을 벌겠다는 배금사상을 초래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기열병으로 말미암아 유신 후반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열병이 뒤범벅이 된 사회 불안과 혼미의 길을 치닫게 되었다.〉"(187)


10장 박정희 시대의 종말 / 1979년


"1979년 4월 16일 중앙정보부는 소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을 발표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크리스천 아카데미 내 불법 용공 비밀서클 결성〉이라는 제목의 반공법 위반 사건이었다. 3월 9일부터 4월 4일까지 중앙정보부에서 관련자들에게 갖은 고문을 해서 조작해낸 이 사건은 박 정권의 말기적 증상을 잘 보여 주었다. (중간에 서서 화해를 모색해보겠다는 이들의 '중간집단운동'에 대해서조차 박 정권은 반공법을 들이밀고 고문을 자행했다.) 1980년 1월 항소심 판결에서 이우재는 징역 및 자격정지 5년, 한명숙은 2년 6월, 장상환은 2년을 선고받았으며, 신인령은 집행유예, 김세균은 선고유예, 황한식과 정창렬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주도했던 목사 강원용도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법을 집행하는 기관들은 인권침해를 아예 상습화, 생활화하였고, 고문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듯 그것마저 상습화, 생활화하였다."(205-7)


"박 정권의 정보기관들은 정권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는 데에도 치열한 경쟁을 했다. 중앙정보부가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을 발표한 지 4일 후인 4월 20일, 치안본부는 〈북괴 지령에 따라 통혁당을 재건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결정적 시기에 봉기하여 대한민국을 전복, 적화를 기도해 오던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총무부장 임동규 등 7명을 간첩 및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송치했다〉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조사가 착수되어 한 달 후 같은 시기에 대대적으로 발표된 것인데,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은 중앙정보부 작품인 반면, 이 사건은 치안본부 작품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1980년 4월 22일 항소심에서 임동규는 무기(남민전 사건에도 연루), 지정관은 징역 및 자격정지 7년, 양정규는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6월, 박현채는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선고를 받았다."(210-1)


"6월 29일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동경에서 열린 선진 7개국 정상회담을 마치고 내한한 것이었다. 그러나 6월 30일과 7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은 국제 관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최악의 것이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 정진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 대통령이 약속을 깨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들먹이자 다음 날 2차 회담에서는 미국 측이 한국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구속 중인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다. 카터는 준비해 둔 100명의 정치범 구속자 명단까지 내밀면서 벤스 국무장관에게 이를 발표토록 했다. 박 대통령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졌음은 물론이다.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한국에는 한국식의 인권이 있다'며 카터의 구속자 석방 요구를 '지나친 내정 간섭'이라고 몰아붙였다. 박정희·카터 회담은 결국 참담하게 막을 내렸다.〉"(220-2)


"절대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한 박정희는 점점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79년 8월 9일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백87명이 사기성 폐업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사 4층을 점거하고 벌인 항의 농성 사건도 박정희의 종말을 재촉한 사건이었다."(227) "(동생들의 학비와 부모님의 약값을 벌기 위해 철야작업한다는) 노동자들의 사연은 박 정권의 안중에 없었다. 박 정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오직 정권안보였다. 8월 11일 새벽 2시경 경찰은 이른바 '101호 작전'으로 불리는 농성 진압 작전을 개시하였으며, 그 와중에 YH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박 정권의 폭력에 항의하여 신민당은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카터가 방한한 지 불과 40여일 만에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 미 국무부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8월 14일 미 국무부는 〈경찰측 행위의 책임자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합당한 처벌을 하기 바란다〉라고 논평했고, 8월 15일 박 정권은 〈미국은 명백한 내정 간섭을 하고 있다〉라고 답했다."(230-1)


"박 정권은 1979년 들어 '성장'과 '안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조건 한 방향을 향해 밀어붙이기만 하는 개발독재 성장주의의 부작용과 폐해가 극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는 단호한 의지나 군사작전식 대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상호는 〈1978년부터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경제위기는 박 정권의 해결 능력을 넘어선 것이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태생적 한계인 정당성의 부재를 보완하기 위해 성장과 수치의 경제에 포박당해 있었다.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 물량 위주의 성장정책에서 안정화 기조로의 전환은 단순히 관련 장관의 교체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신 선포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중화학공업 정책의 전반적 실패를 자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신 정권의 물적 토대였던 독점자본의 이해와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이었다.〉"(254-5)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열흘 후에 10·26 사건이 벌어지자)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임명했다. 그러나 실세는 정승화가 아니었다. 10월 27일 중앙정보부는 보안사에 완전히 접수당했고, 중앙정보부의 부서장급 20여 명은 온갖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절대권력 박정희가 사라진 공간에서 주도권이 중앙정보부에서 보안사로 넘어간 것이었다. 한국 군부의 노른자위를 점령하고 있는 하나회의 우두머리인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이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1월 3일 박정희의 국장(國葬)이 치러졌고, 11월 6일 전두환이 TV 카메라 앞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민주공화당은 대통령의 서거로 공석이 된 총재를 선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 11월 12일 당 고문 김종필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267)


"12·12 쿠데타가 벌어진 1979년 말은 정치적으론 '서울의 봄'을 예고하는 상황이었는지 몰라도 경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 해 초 '이란혁명'으로 이란의 석유 생산량이 감소되면서 번진 파장은 12월 중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산유국회의(OPEC)가 원유값을 일시에 4배로 올리기로 결정하는 사태까지 빚고 말았다. 이른바 제2차 오일 쇼크가 발생해 기름값이 2배로 뛰면서 한국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었다." "대중은 절대 빈곤하에서보다는 경제성장의 과실의 맛을 조금 본 상태에서 경제에 대해 더욱 큰 두려움을 갖는다는 가설은 1980년대 초 한국 사회에서 설득력을 갖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재규는 사형당하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23일에 남긴 유서에서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고 말했지만, 바로 그 며칠 전 민주주의는 광주에서 처참한 학살극과 함께 다시 무덤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304-6)


맺음말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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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0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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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수출전쟁과 안보전쟁 / 1973년


"6개의 전략 산업을 선정해 육성하겠다는 1 ·12 선언에 따라 1973년 5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박 정권은 재정·금융·조세상의 특혜와 지원을 주어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하였으며, 이에 따라 산업별로 울산(석유화학·비료), 구미(전자), 포항(철강), 옥포(조선), 온산(비철금속), 창원(기계) 등에 특화된 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박 정권은 1974년엔 '국민투자기금법'을 마련하여 조성한 기금 가운데 해마다 68%를 중화학공업 부문에 지원하였다. 또 14개 중요 산업에 처음 3년 동안 100%, 다음 2년 동안 50%의 내국세 감면 혜택을 주었고, 중화학고업 제품을 수출하여 생긴 소득에도 소득세와 법인세를 50% 감면하는 파격적인 조취를 취하였다. 이러한 여러 특혜 때문에 국민의 조세 부담은 점점 늘어나 1973년에는 12.6%이던 것이 1981년에는 18.2%까지 뛰었다."(16-7)


"1972년 사토 이후 총리가 된 다나카는 포항제철에 대한 일본의 자금 및 기술 지원에 대해, 포항제철이 건설되면 남한은 북한보다 더 우월한 철강 생산 능력을 갖게 될 수 있으며 일본의 1차적 의도는 남한 내의 저항 세력이 북한의 이익에 따르지 않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2차적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자본이 침투하면서 한국의 대일 의존도는 깊어지고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누렸던 미국의 지위를 점차 대신해 나갔다. 한국의 공장들은 주요한 설비재뿐만 아니라 원자재·중간재와 기술을 일본에서 계속 도입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가동할 수 없었다. 한국은 일본에서 반도체·통신장비·기계 같은 자본재·내구소비재·중간재를 수입하고 이를 텔레비전·자동차·철강재로 만들어 미국에 되팔았다. 한·미·일 무역구조는 일본이 미국과의 무역마찰을 줄이는 데 이용되었다.〉"(54)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의 수는 1971년 9만 6천여 명에서 1972년 21만 7천여 명으로 급증하였고, 1973년에 43만 6천여 명으로 또 한번 급증하였는데, 그것은 1972년 일본이 중국과 외교 정상화를 하면서 대만과의 유대가 끊어지는 바람에 일본인들의 섹스 관광지가 대만에서 한국으로 바뀐 것에 기인한다." "1973년은 외화벌이를 위해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해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부터 관광 기생들에게 허가증을 주어 호텔 출입을 자유롭게 했고, 통행금지에 관계없이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박 정권은 매매춘 여성들에게 안보 교육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국가 경제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에 대한 교양 교육을 실시하여 외국인에게 최대한 서비스를 하도록 독려하였다. 그 교육 내용은 〈일제시대 정신대를 독려하였던 독려사와 너무 흡사하여 '신판 정신대 결단식' 같았다.〉"(58-9)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는 비단 일본인 관광객들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 70년대부터 주한미군이 그러한 국책사업의 주요 고객으로 등장했다. 60년대만 하더라도 박 정권은 기지촌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70년대 초에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한 이른바 '닉슨 독트린'의 발표 이후에는 주한미군을 붙잡아 두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한 정책은 주로 미군의 기지촌 환경 개선 요구에 적극 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주한미군과 박정희 정권은 1971년부터 1976년까지 합동으로 '군기지 정화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이 운동은 사실상 박 정권이 전담하다시피해서 추진되었다."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매월 실시하는 교양 강좌에서는 시장, 지역의 공보관, 경관 등이 인사말을 하면서 〈미군을 만족시키는 여러분 모두가 애국자들이다. 여러분 모두는 우리 조국을 위해 외화를 벌려고 일하는 민족주의자들이다〉라고 말하곤 했다."(70-1)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1970년 대통령 선거 당시 그걸 예견했던 김대중은 신병 치료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대중은 그 다음 날 동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비상계엄령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박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말하면서 자신의 독재적인 영구집권을 목표로 하는 놀랄 만한 반민주적 조치이다. 박 대통령의 이와 같은 행위는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한 위대한 한국민의 손에 의해 반드시 실패하리라고 확신한다.〉"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발기인대회를 연 김대중은 4일 후 한민통 동경본부를 결성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에 입국한 7월 10일에서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8월 8일, 김대중은 동경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납치되었다. 결국 김대중은 미국의 개입으로 납치된 지 5일 만인 8월 13일 살아서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78-80)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터진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 가공할 공포로 다가왔다." "정부는 유류 공급을 17%로 줄이고 제한적으로 송전 조치를 단행하였다. 공장들은 일제히 조업 단축에 들어갔다. 11월 8일자 신문들에 실린 대형 기사의 제목들은 당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차량, 난방 유류 5% 절감〉, 〈걷기운동〉, 〈대낮 소등 생활화〉, 〈광고 네온사인 규제〉, 〈목욕탕 신규허가 억제〉, 〈광광, 레저여행도 규제〉, 〈계속 악화되면 택시 풀제 등 2단계 조치 실시〉. 거리엔 가로등이 꺼졌고, 상점의 네온사인도 꺼졌다. 밤거리는 어두워져 사람들은 서둘러 귀가했으며 가정에서도 전등을 한 등씩만 켰다." "이듬해 3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가를 3개월간 동결하겠다고 발표해 한숨 돌리긴 했으나, 그 파동의 영향은 1974년에 물가가 42.1%나 인상되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100-2)


5장 긴급조치와 민주화투쟁 / 1974년


"1973년 12월 24일 김수환, 함석헌, 천관우, 장준하, 김동길, 계훈제, 백기완, 법정, 김재준, 박두진, 이호철, 백낙준, 김윤수, 김찬국, 안병무, 홍남순 등 각계 민주 인사 30명이 발기인이 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선언이 터져 나왔다. 그 날 민주 인사들은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한다는 걸 선포했다." "국무총리 김종필은 12월 26일 밤 9시 40분부터 1시간 40분 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한 특별연설에서 개헌운동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면서 강력한 처벌을 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이는 다음 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개원 청원 서명운동은 그런 정도의 위험으로 주저앉을 성질의 운동이 아니었다." "이에 크게 당황한 박 정권은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 제53조에 따라 대통령에게는 이른바 긴급조치권이 부여되었는데, 박정희는 이 긴급조치라는 전가의 보도를 빼든 것이다."(121-3)


"(대학생 총궐기가 일어난) 4월 3일 밤 10시,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온 박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는데, 이는 민청학련 관련자 처벌을 주목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긴급조치 4호는 문교부 장관에게 학생들이 반체제운동을 계속하면 대학을 폐교시킬 수 있는 권한마저 부여했으며, 심지어 학생의 '정당한 사유 없는 결석이나 시험 거부 행위'에 대해서도 5년 이상의 징역에 최고 사형까지도 선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130) "핵심 주동자인 이철이 체포된 다음 날인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을 적발하였다〉고 주장했다. 민청학련은 학생들이 유인물에 편의상 붙인 호칭이었는데도, 중앙정보부는 이를 폭력으로 정부 전복을 노린 전국적인 불순 학생조직인 양 거창하게 부풀려서 발표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만들어내는 낯익은 용공 조작 수법을 되풀이했다."(132)


"중앙정보부 발표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서 관계 기관의 조사를 받은 사람만도 1천2백4명에 달했으며, 피고인들 중에는 이철, 유인태, 여정남, 나병식, 윤한봉, 정상복, 안양로, 이근성, 김영일(김지하), 류근일, 김병곤 등 기독청년 및 학생운동권 핵심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약 3개월 후 군법회의는 1백80명의 피고인 중에서 14명에 사형, 13명에 무기징역, 그리고 28명에는 15년에서 20년을 구형했다. 당시 선고는 구형한 그대로 떨어졌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변호사 한승헌은 그러한 재판에 대해서 '자판기 판결' 또는 '정찰제 판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건은 〈기소자들의 선고형량 합계가 1천6백50년이나 되어 단일 사건으로는 세계 사법사에도 전무후무한 기록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아울러 또 하나의 세계적인 기록을 세웠는데, 변호사 강신옥이 법정에서 변론 도중 끌려나가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133-4)


1974년 8월 15일에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 기도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8월 21일, 책임을 지고 물러난 박종규의 후임으로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었다." "(박정희에게 신앙과도 같은 충성심을 지녔던) 차지철은 경호실 차장 밑에 행정차장보와 작전차장보를 새로 만들어 현역 장성들을 데려다 앉혔으며, 청와대 내외 경호병력인 수경사 30경비단과 33경비단을 대대급에서 연대급으로 격상시켰다. 또 경호실 요원의 복장을 히틀러의 SS친위대 복장처럼 변경시켰다. 더욱 놀라운 건, '경호목적상 필요한 경우 수경사를 지휘할 수 있다'는 대통령령을 제정하여 민간인 경호실장이 군 지휘권까지 행사할 수 있게끔 만든 것이었다. 전임 경호실장 박종규는 대통령의 '신변 경호' 뿐만 아니라 '심기 경호'를 내세웠는데, 차지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위(保衛) 경호'라는 새로운 경지를 선보였다."(152-3)


"또 차지철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대통령 경호위원회'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기까지 했다." "차지철이 친 '인의 장막'은 그 누구도 뚫고 들어가기 어려웠다. 장관도 차지철이 허락하지 않으면 박정희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장관들에게 대통령 결재를 받을 문서를 꼭 하루 전에 자기 방에 갖다 놓도록 요구했다. 그는 〈일본 명치유신 때 어느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의 귀퉁이에 독약을 발라 놓은 일이 있었다〉라는 이유를 댔지만, 그 핑계를 대고 정보를 독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 1976년 12월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을 때만 해도 김재규와 차지철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을 만났다는 이유로 장관의 정강이를 발로 차는 차지철과 명색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상호 충돌은 이미 예고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에 따른 '정보 전쟁'과 그 여파는 박정희 유일체제를 용납한 한국 사회의 비극이었다."(156-7)


"박 정권은 늘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앞장서는 『동아일보』에 대해 집중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 운동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음모를 꾸몄는데, 그게 바로 12월 16일에 시작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이었다. 이는 박정희의 〈『동아일보』를 혼내 주라〉는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획책한 것이었다. 박 정권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1975년 1월 23일까지 『동아일보』 상품 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 "광고탄압을 주도한 중앙정보부 뒤에는 박정희가 있었다. 당시 대미 로비스트 김한조는 미국의 반응이 나쁘므로 광고탄압을 중단해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건의했지만, 박정희는 듣지 않았다." "그 대신 국민들의 격려광고가 쇄도하여 『동아일보』 광고면은 한동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 탄환임을 알라〉 같은 국민들의 격려문으로 채워졌다."(182-3)


6장 폭력과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 1975년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은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다음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새벽 6시에 사형을 집행했으니 상고가 기각된 지 채 하루도 안 된 20시간만이었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흥선, 이수병, 하재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 중형 선고를 받은 학생들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니, 이는 당시의 법이라는 건 박정희와 그 하수인들의 기분 내키는 대로였다는 걸 의미한다. 김삼웅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긴급조치 4호를 통해 반체제적인 학생들과 이들의 배후라고 판단한 교수, 종교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것이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조작이었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라는 공안 사건을 통해 학생들에게 겁을 주고, 학생 시위가 북한측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선전하여 이를 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227-8)


"4월 30일 패망한 베트남은 한국에게 무엇이었을까? 베트남 특수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파병 군인들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베트남 파병 군인들은 지금까지도 고엽제 피해와 다른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정부는 그간 그들을 외면해왔다. 또다른 문제도 있다. 문부식은 베트남전쟁과 광주민중항쟁이 무관치 않다며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끔찍한 폭력을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참전 용사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그들의 부모 형제가 사는 한국 사회의 농촌 구석구석까지 전해졌다. 한국인들이 그야말로 고루고루 '달러의 맛'을 본 시기가 그때이다. 그것을 대가로 한국인들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되어도 된다는 윤리적 감각의 황폐화, 말하자면 '성장의 열매'와 폭력이 공존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249)


"5월 13일에 공표된 긴급조치 9호는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였다.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 및 헌법 비방 행위 금지, 학생 집회 및 시위 금지〉 등도 당연히 따라 붙었다." "변호사 이정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름하여 긴급조치 9호! 산천이 떠는 법률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권자이고 헌법 재정 권력자로서의 국민이 '헌법'이라고 입만 벙긋해도 긴급조치 9호의 올가미가 다가오고 있었고, '헌법'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유인물만 들고 다녀도 수사기관에 불려가야 했다. ····· 망치질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제3의 쿠데타임과 동시에 민주정치를 박살내는 핵폭탄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1974년 1월 8일에 나온 긴급조치 1호 이래로 그간 공표된 긴급조치의 모든 반민주성을 포괄한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었다. 긴급조치는 한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9호는 햇수로 5년, 날수는 1천6백69일(4년 6개월)이나 지속되면서 8백여 명의 구속자를 낳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250-2)


"1975년 7월 8일 사회안전법, 민방위기본법, 방위세법, 교육관계법 개정안 등 소위 '4대 전시입법'이 발표되었고, 7월 16일 국회 회기 만료 직전에 휴회 선언을 틈타 새벽 3시에 여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 통과되었다. 사회안전법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에 대해 출옥 후에도 보안처분을 하도록 규정하였고, 보안처분은 2년 단위로 무제한 연장 가능하게 만들었다. 민방위법은 '베트남 사태'를 계기로 안보 위기 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제정된 것으로 17~50세의 남자를 대상으로 준군사적인 민방위대를 조직하도록 규정하였다. 교육관계법 개정안은 교수 재임용제의 신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법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병영 체제화를 위한 것이었다." "1971년 4월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서준식은 7년의 형기를 다 마치고도 복역 기간 중인 1975년에 제정된 바로 이 사회안전법에 소급 적용당하여 모두 4차례에 걸친 보호감호 처분으로 계속 감옥살이를 하였다."(261-3)


"4·19 이후 폐기되었던 이승만 시기 어용의 대명사인 학도호국단이 이름 하나 바뀌지 않은 채 25년 만에 다시 등장하였다. 학도호국단 창설 설치령은 박정희와 김영삼의 회담이 있은 후 5월 21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쳤고, 그 결과 9월 2일 중앙학도호국단이 발단하였다." "그 시절 학도호국단을 직접 겪은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일주일씩 경주 화랑 수련원에 보냈는데, 일정에는 매일 한두 시간씩 박정희 전 대통령 어록을 들으며 명상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정신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일주일 후 퇴교할 때에는 정말로 애국심에 불타 올라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 부르면서 감격에 겨워 엉엉 울면서 나오게 만들었다. 나치 치하 독일이나 북한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몇 십년 전 대한민국이 이야기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바랐던 청년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으니, 그에게 당시의 청년문화는 사회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2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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