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이산의 책 33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 이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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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민주주의'를 표방한 혁명의 도도한 물결은 '위대한 조타수' 마오쩌둥의 사상과 개인에게 종속된 거대한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부르주아 복귀'의 위험을 막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한다는 목표 아래 일어났던 이 동란은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앙의 위기'를 낳"았고, 인민의 단결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된 투쟁은 "폭력과 보복의 끝없는 악순환만 가져왔다."(431) 마오는 "문화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딛고 승리의 개가를 올리는 사람들은 항상 문화수준이 낮은 사람들이었다"(437)고 지적하면서, 후진성이 사회주의 혁명에 거대한 이점으로 작용한다는 오랜 마오주의적 신념을 문화대혁명에 투사했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사회가 새로운 착취계급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들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막는 "오늘의 관료들이었다."(448) 그러나 마오가 그토록 환멸하는 관료들은 "그의 혁명동지였으며 간부들"이었기에, 이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그가 이끌었던 혁명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마오는 "개인의 정치적 행동을 기준으로 하는 계급개념에 도달"하여, "누가 어떤 계급에 속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계급적 입장'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자의적으로 규정된 계급 이론은 "여러 이론적·정치적 이유로 인해 너무나 쉽게 '계급의 적'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집단이나 개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박해를 당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450-1)


문화대혁명이 선포한 사상과 목표에 고무된 학생집단과 공식 당기구가 조직한 '조반파'(造反派)가 공세에 나서자, 류사오치는 당 관료의 자녀들을 동원하여 새로운 '조반' 학생조직을 결성하고 운동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공작조는 문화대혁명의 공격방향을 지식인·교수·교사·작가 등을 의미하는 "'부르주아적인 권위'와 계급출신이 '안 좋은' 사람들"로 바꾸었는데, "이들은 사실상 정치적 공세 앞에서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459) 1966년 8월 초, "반란을 일으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라는 슬로건 아래 "'홍위병'이라는 글자를 새긴 완장을 찬 어린 학생들이 베이징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461)


"혼란으로 점철된 1966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수백만의 홍위병은 마오의 초상화를 들고 주석의 '붉은 소책자'를 흔들며 도시의 거리를 행진하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홍위병의 맹공이 마침내 '실권파'를 향하자, "당 관료와 행정간부들은 '체포'되어 고깔모자를 쓰고 거리를 행진해야 했으며 또 대중대회장에서 자신의 '범죄행위'를 고백하고 각종 비판투쟁대회에 끌려가 심리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종종 학대를 받았다." 과거 농촌으로 하방되어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도시의 젊은이들이 문화대혁명에 참가하기 위해 도시로 돌아오면서 홍위병의 수가 점점 불어났고 이 운동의 폭력성과 파벌투쟁이 격화되었다."(466-7)


1967년 노동자와 병사들이 정치무대의 중심에 등장하면서 문화대혁명은 "지방·성·지구의 당 권력기관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奪權) 단계로 이동했다."(468) 마침내 1967년 2월 5일 상하이 인민공사가 공식 선포되고 당 지도부를 전복시킨 '혁명위원회'가 각지에 수립되자, 마오쩌둥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타도하라"는 슬로건은 반동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한 해 전에 그가 방출시킨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다시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민들이 결성한 각종 조직은 '반혁명적' 조직으로 선포되었고, "대다수 당 간부는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혁명가이거나 최소한 개조 가능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485)


"질서가 시대적 요구라는 메시지는 폭력을 부추겼다고 지목된 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492) 1967년의 '뜨거운 여름'은 "소수의 지도자들이 꾸민 음모"로 전락했고, 수많은 조반파 학생들은 "빈농과 하下중농으로부터 재교육을 받기" 위해 다시 농촌으로 보내졌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에 대한 전면 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정통 레닌주의 정당의 부활로 끝이 났다. 단,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한 정적들은 제거되었다." 1969년 많은 피를 흘리고 분쇄된 대중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던 대다수 중국인들의 마음속에는 "무슨 변화가 있었는가?"라는 의문만이 남게 되었다.(504)


이제 중국정치는 배신감과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진 대중의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된 채, "관료기구의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벌어지는 파벌투쟁"(535)으로 새시대의 막을 열고 있었다. 마오는 "재건된 당의 지도 아래 국가적 단결과 화해를 실현하는 데 중점을 놓았고, 이전의 당 지도자 대부분의 복귀와 문화대혁명 동안 그토록 호되게 비난받았던 당 간부들의 명예회복을 공식적으로 찬성했다."(540) 급진주의자들이 숙청되면서, "문화대혁명의 급진화와는 반대로 탈脫급진화가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되었다."(549) 린뱌오를 반동분자로 낙인 찍은 "'비림비공(批林批孔, 린뱌오를 비판하라, 공자를 비판하라)운동은 1년이 넘도록 관영언론과 대중생활을 지배했다."(558)


마오쩌둥이 1976년 9월 9일 82세로 세상을 뜨자, "문화대혁명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난 중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은, 아직 남아 있던 급진적인 마오주의 전통과의 희박한 연결고리를 잘라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575) 마오 이후의 시대를 장악한 덩샤오핑의 정치적 동맹에 역동성을 부여한 것은 "정의와 보복을 갈구하는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불타는 욕망이었다. 덩샤오핑 자신이 그 동란의 희생자였다는 사실로 인해 과거 10년 동안 고통을 겪었던 수백만 명이 덩샤오핑에게 동정과 지지를 보냈다."(605) 민주활동가들은 1976년의 천안문 시위를 '혁명사건'으로 다시 선포한, "덩샤오핑과 그의 동지들이 보인 지지에 의해 더욱더 고무되었다."(609)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이 1978년에 덩샤오핑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지지했고 1979년 초 몇 달 간 여전히 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해 덩샤오핑에게 의존하고 있었지만, 마오 이후 정권의 완고한 레닌주의 지도자들은 공산당의 조직적 통제를 넘어서는 운동을 좀처럼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덩샤오핑마저도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확실히 자리를 굳히자마자, 민주활동가들을 "무정부주의와 범죄자로 비난"하면서, '4대'(四大), 즉 "크게 견해를 말하고(大鳴), 대담하게 의견을 발표하며(大放), 대변론(大辯論)을 하고, 대자보를 쓸(大字報)" 권리를 폐지했다."(611-2)


덩샤오핑이 생각하는 정치개혁은 "문화대혁명으로 무너져 내린 중국공산당의 레닌주의적 조직규범을 다시 회복하는 것"과 "공산당 관료들을 평균적으로 더 젊게, 더 잘 교육받게, 전문적으로 더 능력 있게 만들어 관료통치의 합리화를 이룩한다는 의미였다."(628)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민주' 개념에는 "계획경제에 대한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진지하게 고려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자신이 1956년 9월 제8차 당대회에서 천명한 "중국사회의 주요 모순은 적대적 사회집단 사이에서가 아니라 '선진적인 사회주의 체제와 낙후된 생산력 사이'에 존재"(632)한다는 명제를 되살려, 신속한 경제발전이라는 목표에 모든 사회(주의)적 이해관계를 종속시켰다.


자본축적을 위한 농촌 착취를 달성하기 위해 "1955~1956년의 집단화운동 때 그랬던 것처럼 탈집단화 역시 '칼로 자르듯이 일률적'으로 성취되었다."(645) 대부분의 당 간부들은 처음에는 사상적 확신에 따른 저항과 자신의 권력과 소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탈집단화에 반대했지만, 점차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와 영향력이 사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자산임을 깨닫기 시작했다."(647) 도시의 개혁가들은 정규 국가노동자의 평생직장 보장제도를 폐지하는 '철밥통 타파'가 "활력없는 노동력을 단련시키고,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656)


부르주아지가 완전히 제거된 중국에서 그 자리에 진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후보는 거대한 공산당 관료기구의 간부들이었다."(663) 이들은 시장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기회를 사적으로 전용할 때, 정치적으로 유리한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고, 경제적 기능을 계속해서 공산주의 체제에 의존했으며, 노동계급과 자유노조의 반발로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즉, 새롭게 탄생한 중국의 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갖는 계급이 아니었다."(668)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은 '부강한 국가'라는 "내셔널리즘적인 목적에 종속되었으며, 근대적 경제발전과 강력한 국가기구는 이를 위한 기본적인 요소"(678)에 불과했다.


공산당 관료기구는 중국의 병을 '봉건적' 문화의 악영향 탓으로 돌리면서, 5·4 시대에 대두한 문화적 반전통주의를 "공산당 정권의 보수적인 방어수단으로 부활시켰다."(688) 여기에 "덩샤오핑 정권의 지지자나 이론가로 남아 있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민주'의 목표를 버리고 자본주의 독재를 옹호하는 신권위주의를 선택했다. 이런 지적인 변화는 사회경제적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685) 인플레이션과 긴축정책으로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점점 하락하는 가운데 "부정축재를 일삼는 관료들과 수상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커져가는 분노가 결합하여 1989년 겨울과 봄 광범위한 사회적 동요를 낳았다."(682) 


1989년 4월 15일, 지식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정치적으로 기민한 학생들은 민주적 성향의 후야오방에 대한 자신들의 진심어린 존경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 마침내 정치적 기회가 왔음을 인식했다." 대중소요가 퍼져나가자, 덩샤오핑은 "1989년의 학생활동가들을 문화대혁명 시기의 반란자들과 비교하면서 둘 다 '천하동란'(天下動亂)을 일으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692) 자발적인 학생운동에서 문화대혁명의 메아리를 감지한 덩샤오핑은 "마오 이후의 질서가 가져온 신성한 '안정'을 정복하려는 젊은 신세대를 처벌하기로 마음먹었다."(697)


"베이징 대학살이 끝나고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중국의 정치생활과 지적인 생활은 1980년대보다 훨씬 더 억압적으로 변했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박해는 한층 심해졌으며 비밀경찰의 활동은 더욱 확대되었다. 투옥은 훨씬 빈번히 일어났으며, 신문·잡지·책·영화에 대한 당의 검열은 더욱 엄격해졌다."(707) 그러나 한층 강력하게 전개된 '대외개방' 정책으로 눈부신 경제적 업적이 이룩되자, 사회는 너무나 빨리 '정상'으로 돌아갔다. "민주화운동을 낳은 강력한 정치적·도덕적 열정이 이토록 빨리 사그라지고 사라져버렸다는 것, 그리고 정부가 조장하는 소비주의와 내셔널리즘의 물결에 파묻혀 버렸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인 동시에 좌절감을 안겨주는 일이었다."(708)


덩샤오핑의 대를 이은 장쩌민 총서기는 1997년 봄 연설에서 "'극좌주의'의 '화석화된' 사고를 비난하면서 국유기업의 개혁에 대한 계획을 제시했다." 그는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라"(抓大放小)라는 슬로건 아래 국가가 곡물거래와 더불어 첨단방위산업 및 첨단기술산업을 계속 소유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민영화되거나 최소한 부분적으로 비국유화"할 것이라고 천명했다.(720) 사회주의의 마지막 보루마저 제거한 공산당 정권은 이데올로기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내셔널리즘과 애국주의를 마음껏 조장했다. 마침내 1990년대 이후로 "갈수록 거세지는 쇼비니즘적인 내셔널리즘이 사실상 중국 공산주의 국가의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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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5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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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타락을 낳고, 타락은 광기를 낳고, 광기는 인간을 죽인다. 타락한 세계에는 죄를 짓는 인간과 죄를 사하는 인간은 있어도, 그러한 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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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이산의 책 32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 이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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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은 제국을 지탱하던 신사-지주층이 낡은 질서에 기생하여 착취에 몰두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발전이 미약한 상태에 머무르면서, "메이지 시대 일본이 추구했던 방식과 유사한 '근대화로의 보수적인 길'을 걷지 못했다."(28) 전통적 제도에 광범위한 불만을 갖고 있던 새로운 지식인층은 "단지 제국주의 외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양의 도구와 사상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화와 역사 일체를 거부하는 반反전통주의 아래 혁명을 이끌었으며, "세계질서 속에 자리잡은 국민국가로서의 중국에 대한 내셔널리즘적인 헌신"(36)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1919년 5·4운동으로 "도시에 가득 퍼져 나간 정치적 행동주의"는 지식인이 대중을 조직하고 이끌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산둥의 독일 조차지를 일본에게 넘긴다는 "베르사유의 운명적인 결정이 야기한 격렬한 내셔널리즘적 분노"는 서양의 '선진' 국가들이 "중국에 민주와 과학의 원칙을 가르칠 수 있다는 믿음"을 산산조각냈으며, 지식인들은 "서구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대신 유럽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사회주의 이론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44)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의 옛 전통과 오늘날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의 지배를 모두 거부할 수 있는 길이었다."(45)


1924~1927년에 걸쳐 도시와 농촌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대중혁명운동은 "어느 때보다도 더 급진적인 사회혁명을 지향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공합작의 잠복기를 이용하여 "혁명의 강력한 원동력에 더욱 광범위하게 접근"(51)하면서, "도시 부르주아지와 토지혁명을 두려워하는 신사-지주층의 자녀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장제스 군대"와의 긴장은 파열점에 다다랐다.(55) 1927년 장제스 군대가 선제공격에 나서 상하이의 노동조합과 학생조직을 궤멸시키자, 마오쩌둥은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되새기면서 "혁명은 반드시 폭력투쟁의 형태를 띨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58)


대장정은 장시의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이 "국민당 군대로부터 끔찍한 보복을 당하도록 내버려둔 엄청난 정치적 패배"(65)였지만, 생존자들에게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극한의 절망적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는 "혁명적 사명감에 신성함을 부여했으며,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을 낳았다."(68) 반면, 난징의 국민정부는 "도시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고, 이를 위한 추동력도 전혀 발휘하지 않았다." 장제스에게 "국가의 독립은 사실상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하고 외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계속 의존하는 것을 의미했다."(60-1) 혁명을 완수하는 과업은 공산주의자의 몫으로 남았다.


중국공산당은 내셔널리즘의 우산 아래 "외부의 적과 대치하는 모든 사회계급의 중국인"을 집결시켰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국민의 일원이나 최소한 '인민'의 일원으로서 자격을 박탈당하고 제국주의 외세의 대변자라는 이름으로 축출되었다."(80) 게릴라들은 "경제·정치·군사상의 각종 임무를 수행할 수 있고 또 사상적으로도 순수한 다기능의 팔방미인"(89)이 되어야 했다. 마오주의자들은 엄격한 교의와 정통이론을 만들어놓고 여기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사회경제적 자유와 정치적·지적 억압 사이의 불일치는 1949년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마오주의의 가장 큰 특징"(90)이었다.


1949년 "농촌을 이끄는 도시"의 시대를 선포할 때 마오쩌둥은 "혁명가들의 정신과 이데올로기가 도시화로 인해 부패할 위험성을 경고했다."(139) 그가 보기에 국가 개조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은 오염된 정신이며, 이후로 마오쩌둥은 권력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정신을 새롭게 창조할 것을 선포한다. 1951년 일어난 대규모 사상개조운동은 마오쩌둥이 "우리나라가 민주사회로 철저히 바뀌고 공업화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지식인의 개조가 필수적이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되는데, 이 운동은 "대중집회, 비판과 자기비판으로 이루어진 소집단의 '투쟁회', 공개적인 모욕, 사상범들로부터 서면 혹은 구두로 '자백'을 받아내는 낯익은 마오주의식 방법들을 그대로 보여준다."(135)


1953년 시작된 제1차 5개년계획은 철저히 소련의 산업화 방식을 모방했다. "도시 공업화 비용은 대부분 농촌에서 착취하여 충당"했는데, 이는 "국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농업세를 부과하고, 농민이 국가가 정한 낮은 가격으로 정부에 팔아야 하는 곡물의 할당량을 크게 늘려서 책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172) 소련의 공업화 모델은 중앙집권적 경제계획과 방대한 관료제를 전제로 삼는다. 결국 행정의 간소화를 선호하는 마오주의는 "전문화된 행정기구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으며, 혁명정당의 간부들은 행정가와 기능 관료로 변신했다."(173)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에서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국가정책의 도구"로 전락했다.(177)


사회주의로 향하는 중간 기착지에 불과한 "근대적 공업발전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표"인 것처럼 인식되자, 마오쩌둥은 "죽어가는 사회주의 목표와 혁명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농촌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189) 당시 중국의 농업정책은 급진적 집단화로 재앙을 초래한 소련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신중하게 추진되고 있었는데, 이와 반대로 마오는 농촌의 합작사업이 "너무 더디게 진행된다고 선언했다."(202) 마오는 농민대중에 대한 인민주의적 신념을 고취하여 "혁명적인 농민과 충분히 혁명적이지 못한 당을 대립"(204)시키면서, 1949년 이후 공산주의 정책을 이끌었던 소련 모델을 폐기하고 자력 갱생을 도모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와 마오주의자들에게 "근대적 경제를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근대적 경제발전이 가져올 국가와 사회의 관료화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225)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당 지도자들이 공업화에 필요한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이라는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지식인을 이용하고 싶어했다면, 마오는 지식인을 "기존 관료기구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대중운동의 한 부분으로 이용하고 싶어했다."(233) 1956년 마오가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라는 슬로건을 부활시킨 것은 "지식인들을 사상적·정치적 속박에서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의 활력을 회복시키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238)


사회주의적 비판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기존 당 관료들에 의해 점차 "'사회주의의 적'으로 낙인찍혔고 '반혁명분자'로 비난받게 된다." 마오 역시 비난의 대열에 합류하는데, 이는 마오가 지식인들의 "평등주의적이고 반관료주의적인 목표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만,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는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56) 당 관료들에게 소외당한 백화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마오주의자들은 뒤이어 일어난 반우파투쟁을 도구삼아 "당 내부에 존재하는 '우경 기회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는 데 성공했다. 1957년 초부터 시행된 하방下放운동은 각급 기관의 사무실을 텅 비게 만들었고, "마오주의자들은 당 조직을 다시 장악했다."(269-70)


1차 5개년계획이 가져다준 사회적 불평등, 도농 격차, 이데올로기 쇠퇴에 따른 폐단을 치료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택한 방식은 "농촌을 공업화하는 것이었다."(271) 대약진운동이 설정한 유토피아적인 사회·경제적 목표들은 마오가 말했던 "인민의 '무한한 창조력'과 '사회주의를 향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에 의지하고 있었다."(279) 이 낙관적인 관념은 자본주의적 관계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 중국의 후진성이 "혁명에 유리한 조건"이라는 마오 특유의 인식을 반영한다. '전문가'는 없고 오직 "사상적으로도 건전하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한 만능인"이라는 새로운 세대로 이루어진 "교양 있는 노동자 국가의 창조"가 대약진운동의 희망찬 목적지였다.(298)


1955년 합작화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인민공사화 운동은 밑에서는 농촌간부와 빈농의 자발적인 급진주의가, 위에서는 마오와 마오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유토피아주의가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하면서 광란의 속도로 진행되었다.(304) 엄청난 노동의 낭비를 가져온 재래식 용광로 사업은 곧바로 철회되었지만, 덜 요란했던 다른 농촌공업은 실용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우리의 혁명은 전쟁과 같다"는 마오의 공언 속에, 농민들은 '군사화' '전투화' '규율화'에 발맞추어 농장으로 나갔다. 그 결과는 "육체적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요구"와 "비현실적으로 늘어나는 노동시간을 받아들여야 했던 농민들의 체력소모였다."(316)


1959년 연이어 발생한 홍수와 가뭄이 농업생산과 국가경제 전반을 강타하자, 펑더화이는 단호한 태도로 "인민공사화와 국가경제의 붕괴, 대중으로부터 당의 이탈, 억압적인 정치·경제적 환경을 비난하고, 이 모두가 마오주의자들의 '프티부르주아적 광신'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322) 마오쩌둥은 "농촌으로 달려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하겠다는 거대한 정치적 위협을 앞세워 대약진운동을 강행했지만, 가중되는 식량부족 앞에 그의 이데올로기적 호소는 공염불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대약진운동은 마오의 정치기반을 붕괴시키고 농민과 공산당 사이의 상호 불신과 반감이라는 유산을 남긴 채 1960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약진운동 이후 "대중의 분위기는 가라앉고 비정치적이 되었다."(343) 질서로 회귀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 앞에 관료제가 다시 번창했다. "되살아난 레닌주의 정당의 조직적 효율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베이징의 지도자들은, 생산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다시 회복하고 생산자를 위한 물질적 인센티브를 재차 강조하는 두 가지 방법을 결합하여 단시일 내에 국가경제를 부흥시키는데 성공했다."(347) 마오가 보기에 관료계급은 '수정주의'를 가능케 하는 부르주아지와 같은 의미였다. 와신상담에 들어간 마오는 "지금까지 이룩한 혁명의 성과를 파괴하고 새로운 혁명에 다시 착수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349)


마오쩌둥은 '소자본주의'에 대한 양보를 허용한 당시의 경제적 성공이 인민의 평등을 훼손하고, 엘리트주의와 불평등을 초래하는 악습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1965년 "마오는 관료주의자 계급을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억압자로 비난"하면서, 당 고위 지도자들을 "정치적·사상적 불결의 주된 근원으로 간주했다."(379) 관료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대중지도자의 능력을 중시하는 정치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새로이 고안된 작품은 '마오 숭배'였다. 마오는 '올바른' 개인숭배와 '잘못된' 개인숭배를 분리하면서, "개인숭배는 필수적인 정치적 자산"(384)이라고 주장했다. 당 내부의 실권파를 향한 문화대혁명의 전선이 가차 없이 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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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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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줄곧 가난을 쓴다. 아니, 빈곤을 쓴다. 그는 빈곤을 응시하고, 빈곤에 몸을 담근다. 여기에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인간은 있어도, 그러한 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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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들 洪秀全과 太平天國 이산의 책 44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양휘웅 옮김 / 이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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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837년 음력 2월 말, 훙훠슈는 화 현의 현시縣試에 합격했지만 광저우에서 실시된 부시府試의 관문을 통과하는 데는 또다시 실패"한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서 잠자리에 든" 훙훠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침상 주위에 모여들어, 자기에게 지옥의 염라왕을 만나볼 것을 권하는 꿈을 꾼다." 그는 꿈에서 흑룡포를 입고 금빛 수염을 기른 아버지를 본다. "훙훠슈에게 말을 거는 그의 눈에는 분노와 슬픔의 눈물이 고여 있다."(93-4) 아버지는 훙훠슈에게 요괴들이 설치는 지상으로 돌아가야 하며, "훙훠슈의 훠(火), 즉 '불' 대신에 '완전함'을 뜻하는 취안(全)을 사용하도록 명한다."(97) 해석이 불가능한 기이한 꿈이었다.


"하루는 리징팡이 훙슈취안의 집에 들렀다가 이상야릇한 책을 보고는, 훙슈취안에게 빌려 달라고 한다." 그 책은 량아파가 성경을 재구성해 만든 <권세양언>으로서, "훙슈취안이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읽어본 적이 없는,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았던 조그만 책자이다." 책에 푹 빠진 리징팡은 훙슈취안에게 그 책을 읽어볼 것을 권했고, 훙슈취안은 그의 당부를 따랐다. 세기말의 혼돈을 묘사한 이 책자의 내용은 "훙슈취안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에 말을 걸 뿐 아니라, 1839~1842년에 광저우 일대를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던, 전쟁(1차 아편전쟁)의 세계에 말을 건다."(101) 꿈이 현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광저우 강화 직후인 1841년은 나라 안에 "민족반역자, 즉 한간漢奸이 가득하다는 믿음"이 팽배해졌다. 청조의 만주족 군관들은 외국인과 교역한 자, 중국어를 통역한 자, 그들의 배를 조종한 자를 색출하여 한족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다. 영국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모호한 반역죄를 적용하여 한족을 죽였다."(105) 유교 경전이나 고전 문헌들에서는 이 기괴한 대참사를 명확히 정의내릴만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권세양언>의 창세기와 이사야서에 묘사된 투쟁이 훙슈취안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선민의식, 우상숭배에 대한 신의 분노, 거대한 불의 형벌과 가혹한 고난, 선과 악의 세력이 벌이는 대전쟁, 세계의 최후와 천국의 도래 등 책자에 나와 있는 이상한 용어와 더 이상한 이름들을 떠올린 "훙슈취안은 그 열쇠가 자신의 머리와 마음을 열었다고 느낀다. 그가 꿈에서 보았던 금빛 수염을 가진 남자는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이며, 주 여호와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참살해야 할 무수한 요괴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요괴들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훙슈취안의 형이기 때문에, 훙슈취안은 말 그대로 하느님의 중국인 아들이다."(123) 훙슈취안은 성서를 철저하게 사적私的으로 내면화한다.


오랜 방랑과 선교생활 동안 지방 지주-신사층과의 반목과 투쟁, 재판을 거친 양대 지주 펑윈산의 석방과 훙슈취안의 귀환은 쯔징산 일대에 자리잡은 "배상제회 신도들에게 새로운 열정을 가져다준다. 과거에 토착 무속巫俗에 익숙하고 무당들 사이의 신들림을 목격했던 이곳 산악지대 주민들은 이제 천당을 꿈꾼다." 배상제회 신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동안 간혹 누군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땅으로 고꾸라졌고, "그는 이따금 경고, 질책, 예언의 말을 쏟아낸다."(190) 그 중에서도 하카客家 출신의 숯쟁이 양슈칭은 빙의憑依 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발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대변자"로 인정받는다.


1849년 말 내지 1850년 초가 되면 만주족과 그들을 섬기는 관료들이 "요괴와 동일시되는 경우"가 부쩍 많아진다. "배상제회 신도들이 잡혀가 '날조된 죄명'으로 처벌을 받았던 청조의 관아는 '요관'(妖官)이 관장하는 곳으로 묘사된다."(200) 1850년 2월, 너무 많이 참아왔다고 생각한 배상제회의 근거지에서 '군'(軍)에 대한 말이 떠돈다. "이제 훙슈취안의 근거지는 이따금 '조정'(朝廷)으로 불리고, 훙슈취안은 '태평왕'(太平王)을 자처한다."(202) 1850년 7월 말, "예수는 훙슈취안에게 "천국을 위해 싸우고" "모든 강산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온 세상에 천부와 천형의 진정한 법을 보여주고" 하느님이 그에게 그의 왕국을 통치할 '전권'을 주었음을 깨달으라고 말한다."(217)


청군이 태평군의 근거지 전역에 대한 압박을 가해오자, 1851년 8월 중순, 훙슈취안과 지도부는 태평천국운동이 발생하고 성장한 쯔징 산 일대를 버리고 새로운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노정에 오른다. 융안 성(永安城) 함락에 성공한 1851년 9월 25일, 훙슈취안이 꿈에서 "하늘에서의 첫 번째 전투를 벌인 지 14년 만에 태평군은 굳건한 지상의 성을 얻었다."(236) 역경을 이겨낸 신의 아들은 지상천국의 환희에 사로잡힌다. "훙슈취안은 태평천국 신도들에게 도덕에 대해서 일벌백계를 선언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예외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여자들과의 교제를 즐긴다."(253)


북진을 계속한 태평군은 1853년 3월 난징 공략에 성공한다. 태평군은 "모든 살아 있는 청군 요괴들을 색출하여 살육"함으로써 난징을 정화한 후에, 수도 천경(天京)을 선포한다. 당시 태평군의 편제는 "오장이 4인의 병사를 관리하고, 양사마가 5인의 오장을 포함한 25인을 통솔"하는 구조였다. 이를 본딴 25개의 가족 단위는 공동의 곡물창고와 공중公衆 예배당을 세워야 했고, 모든 가정은 "필요로 하는 음식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공동창고에 보관"해야 했다.(287-8) 통제와 절제로 점철된 사회 구조는 훗날 중국공산당이 "태평천국에 가담한 사람들을 원原사회주의자로 평가"(18)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태평천국의 신도들은 난징이 곧 지상낙원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이 천국의 성벽 너머에는 온갖 모략과 잔혹함으로 가득 차 있는 전쟁"(312)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태평군은 두 가지 중요한 실책을 범한다. 하나는 서구 열강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일이다. 난징을 방문한 영국 공사 본햄은 태평천국이 "구약을 바탕으로 하늘의 계시를 위조"(327)한다고 비난했고, 미국 공사 매클레인은 "그들이 성서의 진리를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서구 열강이 태평군을 지지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편에 적대적인 태평군이 안정성과 미래의 교역확대라는 측면에서 청조보다 더 큰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도부의 내분이 태평군을 침식해 들어갔다. 하느님의 대변자를 자처한 양슈칭이 성서에 기록된 내용은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하나가 진정한 계시라는 말을 내세워, 천왕에게 바치는 '만세'(萬歲)의 영화를 요구하자, 훙슈취안은 양슈칭의 역모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난징에 진입한 북왕 웨이창후이와 친르강 장군은 양슈칭은 물론이요,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을 모조리 학살한다. 신앙도 가려주지 못하는 "믿음과 신뢰의 위기상황에서, 훙슈취안은 오직 "자기 친인척만을 신뢰했다."(401)


태평군은 상하이의 중국인 거주지 방어전에 나선 서구 열강과의 격렬한 전투에서 좌절을 겪으면서 재앙으로 빠져든다. "양쯔 강 일대에서, 한때 열렬히 선전되었던 태평천국의 토지제도는 이제 징수, 헌납, 몰수를 통해 어떤 곡식을 뽑아낼 수 있는가"(489)라는 강압으로 바뀌었고, 1861년 이후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단련團練을 조직하여 태평군에 맞서기 시작했다. "홍슈취안 자신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천부나 천형으로부터 (위로와 격려가 담긴) 그런 말들을 받지 않았다." 홍슈취안은 난징에서 출판한 자기 책의 마지막 부분에 양슈칭의 마지막 절규를 옮겨 적었다. "너희 하느님의 성이 불타오르리니, 그것을 구할 길은 없도다!"(501-2)


1863년 12월, 성을 방어할 방도가 전혀 없다고 간언하는 리슈청 장군에게 훙슈취안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내린다. "너는 군사가 없다고 말하지만, 하늘에 있는 짐의 병사들은 마치 물처럼 한없이 많다. 왜 짐이 요괴 쩡궈판을 무서워해야 하느냐?"(510) 지상의 병사를 잃고, 천상의 병사에게 의존하던 훙슈취안은 1864년 6월 1일,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훙슈취안의 아들이자 유주인 톈구이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요괴들이 지상천국을 무너뜨리는 광경을 목도한다. 체포 후, 심문관에게 자신의 가장 큰 소망이 "잡념을 다 버리고 유교경전을 공부해서, 가장 낮은 학위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 톈구이푸는 11월 18일, "열다섯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처형된다."(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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