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이산의 책 32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 이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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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은 제국을 지탱하던 신사-지주층이 낡은 질서에 기생하여 착취에 몰두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발전이 미약한 상태에 머무르면서, "메이지 시대 일본이 추구했던 방식과 유사한 '근대화로의 보수적인 길'을 걷지 못했다."(28) 전통적 제도에 광범위한 불만을 갖고 있던 새로운 지식인층은 "단지 제국주의 외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양의 도구와 사상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화와 역사 일체를 거부하는 반反전통주의 아래 혁명을 이끌었으며, "세계질서 속에 자리잡은 국민국가로서의 중국에 대한 내셔널리즘적인 헌신"(36)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1919년 5·4운동으로 "도시에 가득 퍼져 나간 정치적 행동주의"는 지식인이 대중을 조직하고 이끌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산둥의 독일 조차지를 일본에게 넘긴다는 "베르사유의 운명적인 결정이 야기한 격렬한 내셔널리즘적 분노"는 서양의 '선진' 국가들이 "중국에 민주와 과학의 원칙을 가르칠 수 있다는 믿음"을 산산조각냈으며, 지식인들은 "서구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대신 유럽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사회주의 이론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44)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의 옛 전통과 오늘날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의 지배를 모두 거부할 수 있는 길이었다."(45)


1924~1927년에 걸쳐 도시와 농촌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대중혁명운동은 "어느 때보다도 더 급진적인 사회혁명을 지향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공합작의 잠복기를 이용하여 "혁명의 강력한 원동력에 더욱 광범위하게 접근"(51)하면서, "도시 부르주아지와 토지혁명을 두려워하는 신사-지주층의 자녀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장제스 군대"와의 긴장은 파열점에 다다랐다.(55) 1927년 장제스 군대가 선제공격에 나서 상하이의 노동조합과 학생조직을 궤멸시키자, 마오쩌둥은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되새기면서 "혁명은 반드시 폭력투쟁의 형태를 띨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58)


대장정은 장시의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이 "국민당 군대로부터 끔찍한 보복을 당하도록 내버려둔 엄청난 정치적 패배"(65)였지만, 생존자들에게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극한의 절망적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는 "혁명적 사명감에 신성함을 부여했으며,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을 낳았다."(68) 반면, 난징의 국민정부는 "도시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고, 이를 위한 추동력도 전혀 발휘하지 않았다." 장제스에게 "국가의 독립은 사실상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하고 외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계속 의존하는 것을 의미했다."(60-1) 혁명을 완수하는 과업은 공산주의자의 몫으로 남았다.


중국공산당은 내셔널리즘의 우산 아래 "외부의 적과 대치하는 모든 사회계급의 중국인"을 집결시켰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국민의 일원이나 최소한 '인민'의 일원으로서 자격을 박탈당하고 제국주의 외세의 대변자라는 이름으로 축출되었다."(80) 게릴라들은 "경제·정치·군사상의 각종 임무를 수행할 수 있고 또 사상적으로도 순수한 다기능의 팔방미인"(89)이 되어야 했다. 마오주의자들은 엄격한 교의와 정통이론을 만들어놓고 여기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사회경제적 자유와 정치적·지적 억압 사이의 불일치는 1949년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마오주의의 가장 큰 특징"(90)이었다.


1949년 "농촌을 이끄는 도시"의 시대를 선포할 때 마오쩌둥은 "혁명가들의 정신과 이데올로기가 도시화로 인해 부패할 위험성을 경고했다."(139) 그가 보기에 국가 개조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은 오염된 정신이며, 이후로 마오쩌둥은 권력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정신을 새롭게 창조할 것을 선포한다. 1951년 일어난 대규모 사상개조운동은 마오쩌둥이 "우리나라가 민주사회로 철저히 바뀌고 공업화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지식인의 개조가 필수적이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되는데, 이 운동은 "대중집회, 비판과 자기비판으로 이루어진 소집단의 '투쟁회', 공개적인 모욕, 사상범들로부터 서면 혹은 구두로 '자백'을 받아내는 낯익은 마오주의식 방법들을 그대로 보여준다."(135)


1953년 시작된 제1차 5개년계획은 철저히 소련의 산업화 방식을 모방했다. "도시 공업화 비용은 대부분 농촌에서 착취하여 충당"했는데, 이는 "국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농업세를 부과하고, 농민이 국가가 정한 낮은 가격으로 정부에 팔아야 하는 곡물의 할당량을 크게 늘려서 책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172) 소련의 공업화 모델은 중앙집권적 경제계획과 방대한 관료제를 전제로 삼는다. 결국 행정의 간소화를 선호하는 마오주의는 "전문화된 행정기구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으며, 혁명정당의 간부들은 행정가와 기능 관료로 변신했다."(173)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에서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국가정책의 도구"로 전락했다.(177)


사회주의로 향하는 중간 기착지에 불과한 "근대적 공업발전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표"인 것처럼 인식되자, 마오쩌둥은 "죽어가는 사회주의 목표와 혁명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농촌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189) 당시 중국의 농업정책은 급진적 집단화로 재앙을 초래한 소련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신중하게 추진되고 있었는데, 이와 반대로 마오는 농촌의 합작사업이 "너무 더디게 진행된다고 선언했다."(202) 마오는 농민대중에 대한 인민주의적 신념을 고취하여 "혁명적인 농민과 충분히 혁명적이지 못한 당을 대립"(204)시키면서, 1949년 이후 공산주의 정책을 이끌었던 소련 모델을 폐기하고 자력 갱생을 도모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와 마오주의자들에게 "근대적 경제를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근대적 경제발전이 가져올 국가와 사회의 관료화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225)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당 지도자들이 공업화에 필요한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이라는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지식인을 이용하고 싶어했다면, 마오는 지식인을 "기존 관료기구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대중운동의 한 부분으로 이용하고 싶어했다."(233) 1956년 마오가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라는 슬로건을 부활시킨 것은 "지식인들을 사상적·정치적 속박에서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의 활력을 회복시키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238)


사회주의적 비판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기존 당 관료들에 의해 점차 "'사회주의의 적'으로 낙인찍혔고 '반혁명분자'로 비난받게 된다." 마오 역시 비난의 대열에 합류하는데, 이는 마오가 지식인들의 "평등주의적이고 반관료주의적인 목표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만,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는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56) 당 관료들에게 소외당한 백화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마오주의자들은 뒤이어 일어난 반우파투쟁을 도구삼아 "당 내부에 존재하는 '우경 기회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는 데 성공했다. 1957년 초부터 시행된 하방下放운동은 각급 기관의 사무실을 텅 비게 만들었고, "마오주의자들은 당 조직을 다시 장악했다."(269-70)


1차 5개년계획이 가져다준 사회적 불평등, 도농 격차, 이데올로기 쇠퇴에 따른 폐단을 치료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택한 방식은 "농촌을 공업화하는 것이었다."(271) 대약진운동이 설정한 유토피아적인 사회·경제적 목표들은 마오가 말했던 "인민의 '무한한 창조력'과 '사회주의를 향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에 의지하고 있었다."(279) 이 낙관적인 관념은 자본주의적 관계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 중국의 후진성이 "혁명에 유리한 조건"이라는 마오 특유의 인식을 반영한다. '전문가'는 없고 오직 "사상적으로도 건전하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한 만능인"이라는 새로운 세대로 이루어진 "교양 있는 노동자 국가의 창조"가 대약진운동의 희망찬 목적지였다.(298)


1955년 합작화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인민공사화 운동은 밑에서는 농촌간부와 빈농의 자발적인 급진주의가, 위에서는 마오와 마오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유토피아주의가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하면서 광란의 속도로 진행되었다.(304) 엄청난 노동의 낭비를 가져온 재래식 용광로 사업은 곧바로 철회되었지만, 덜 요란했던 다른 농촌공업은 실용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우리의 혁명은 전쟁과 같다"는 마오의 공언 속에, 농민들은 '군사화' '전투화' '규율화'에 발맞추어 농장으로 나갔다. 그 결과는 "육체적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요구"와 "비현실적으로 늘어나는 노동시간을 받아들여야 했던 농민들의 체력소모였다."(316)


1959년 연이어 발생한 홍수와 가뭄이 농업생산과 국가경제 전반을 강타하자, 펑더화이는 단호한 태도로 "인민공사화와 국가경제의 붕괴, 대중으로부터 당의 이탈, 억압적인 정치·경제적 환경을 비난하고, 이 모두가 마오주의자들의 '프티부르주아적 광신'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322) 마오쩌둥은 "농촌으로 달려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하겠다는 거대한 정치적 위협을 앞세워 대약진운동을 강행했지만, 가중되는 식량부족 앞에 그의 이데올로기적 호소는 공염불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대약진운동은 마오의 정치기반을 붕괴시키고 농민과 공산당 사이의 상호 불신과 반감이라는 유산을 남긴 채 1960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약진운동 이후 "대중의 분위기는 가라앉고 비정치적이 되었다."(343) 질서로 회귀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 앞에 관료제가 다시 번창했다. "되살아난 레닌주의 정당의 조직적 효율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베이징의 지도자들은, 생산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다시 회복하고 생산자를 위한 물질적 인센티브를 재차 강조하는 두 가지 방법을 결합하여 단시일 내에 국가경제를 부흥시키는데 성공했다."(347) 마오가 보기에 관료계급은 '수정주의'를 가능케 하는 부르주아지와 같은 의미였다. 와신상담에 들어간 마오는 "지금까지 이룩한 혁명의 성과를 파괴하고 새로운 혁명에 다시 착수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349)


마오쩌둥은 '소자본주의'에 대한 양보를 허용한 당시의 경제적 성공이 인민의 평등을 훼손하고, 엘리트주의와 불평등을 초래하는 악습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1965년 "마오는 관료주의자 계급을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억압자로 비난"하면서, 당 고위 지도자들을 "정치적·사상적 불결의 주된 근원으로 간주했다."(379) 관료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대중지도자의 능력을 중시하는 정치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새로이 고안된 작품은 '마오 숭배'였다. 마오는 '올바른' 개인숭배와 '잘못된' 개인숭배를 분리하면서, "개인숭배는 필수적인 정치적 자산"(384)이라고 주장했다. 당 내부의 실권파를 향한 문화대혁명의 전선이 가차 없이 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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