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이산의 책 33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 이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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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민주주의'를 표방한 혁명의 도도한 물결은 '위대한 조타수' 마오쩌둥의 사상과 개인에게 종속된 거대한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부르주아 복귀'의 위험을 막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한다는 목표 아래 일어났던 이 동란은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앙의 위기'를 낳"았고, 인민의 단결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된 투쟁은 "폭력과 보복의 끝없는 악순환만 가져왔다."(431) 마오는 "문화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딛고 승리의 개가를 올리는 사람들은 항상 문화수준이 낮은 사람들이었다"(437)고 지적하면서, 후진성이 사회주의 혁명에 거대한 이점으로 작용한다는 오랜 마오주의적 신념을 문화대혁명에 투사했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사회가 새로운 착취계급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들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막는 "오늘의 관료들이었다."(448) 그러나 마오가 그토록 환멸하는 관료들은 "그의 혁명동지였으며 간부들"이었기에, 이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그가 이끌었던 혁명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마오는 "개인의 정치적 행동을 기준으로 하는 계급개념에 도달"하여, "누가 어떤 계급에 속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계급적 입장'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자의적으로 규정된 계급 이론은 "여러 이론적·정치적 이유로 인해 너무나 쉽게 '계급의 적'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집단이나 개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박해를 당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450-1)


문화대혁명이 선포한 사상과 목표에 고무된 학생집단과 공식 당기구가 조직한 '조반파'(造反派)가 공세에 나서자, 류사오치는 당 관료의 자녀들을 동원하여 새로운 '조반' 학생조직을 결성하고 운동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공작조는 문화대혁명의 공격방향을 지식인·교수·교사·작가 등을 의미하는 "'부르주아적인 권위'와 계급출신이 '안 좋은' 사람들"로 바꾸었는데, "이들은 사실상 정치적 공세 앞에서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459) 1966년 8월 초, "반란을 일으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라는 슬로건 아래 "'홍위병'이라는 글자를 새긴 완장을 찬 어린 학생들이 베이징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461)


"혼란으로 점철된 1966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수백만의 홍위병은 마오의 초상화를 들고 주석의 '붉은 소책자'를 흔들며 도시의 거리를 행진하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홍위병의 맹공이 마침내 '실권파'를 향하자, "당 관료와 행정간부들은 '체포'되어 고깔모자를 쓰고 거리를 행진해야 했으며 또 대중대회장에서 자신의 '범죄행위'를 고백하고 각종 비판투쟁대회에 끌려가 심리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종종 학대를 받았다." 과거 농촌으로 하방되어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도시의 젊은이들이 문화대혁명에 참가하기 위해 도시로 돌아오면서 홍위병의 수가 점점 불어났고 이 운동의 폭력성과 파벌투쟁이 격화되었다."(466-7)


1967년 노동자와 병사들이 정치무대의 중심에 등장하면서 문화대혁명은 "지방·성·지구의 당 권력기관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奪權) 단계로 이동했다."(468) 마침내 1967년 2월 5일 상하이 인민공사가 공식 선포되고 당 지도부를 전복시킨 '혁명위원회'가 각지에 수립되자, 마오쩌둥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타도하라"는 슬로건은 반동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한 해 전에 그가 방출시킨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다시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민들이 결성한 각종 조직은 '반혁명적' 조직으로 선포되었고, "대다수 당 간부는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혁명가이거나 최소한 개조 가능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485)


"질서가 시대적 요구라는 메시지는 폭력을 부추겼다고 지목된 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492) 1967년의 '뜨거운 여름'은 "소수의 지도자들이 꾸민 음모"로 전락했고, 수많은 조반파 학생들은 "빈농과 하下중농으로부터 재교육을 받기" 위해 다시 농촌으로 보내졌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에 대한 전면 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정통 레닌주의 정당의 부활로 끝이 났다. 단,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한 정적들은 제거되었다." 1969년 많은 피를 흘리고 분쇄된 대중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던 대다수 중국인들의 마음속에는 "무슨 변화가 있었는가?"라는 의문만이 남게 되었다.(504)


이제 중국정치는 배신감과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진 대중의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된 채, "관료기구의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벌어지는 파벌투쟁"(535)으로 새시대의 막을 열고 있었다. 마오는 "재건된 당의 지도 아래 국가적 단결과 화해를 실현하는 데 중점을 놓았고, 이전의 당 지도자 대부분의 복귀와 문화대혁명 동안 그토록 호되게 비난받았던 당 간부들의 명예회복을 공식적으로 찬성했다."(540) 급진주의자들이 숙청되면서, "문화대혁명의 급진화와는 반대로 탈脫급진화가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되었다."(549) 린뱌오를 반동분자로 낙인 찍은 "'비림비공(批林批孔, 린뱌오를 비판하라, 공자를 비판하라)운동은 1년이 넘도록 관영언론과 대중생활을 지배했다."(558)


마오쩌둥이 1976년 9월 9일 82세로 세상을 뜨자, "문화대혁명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난 중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은, 아직 남아 있던 급진적인 마오주의 전통과의 희박한 연결고리를 잘라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575) 마오 이후의 시대를 장악한 덩샤오핑의 정치적 동맹에 역동성을 부여한 것은 "정의와 보복을 갈구하는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불타는 욕망이었다. 덩샤오핑 자신이 그 동란의 희생자였다는 사실로 인해 과거 10년 동안 고통을 겪었던 수백만 명이 덩샤오핑에게 동정과 지지를 보냈다."(605) 민주활동가들은 1976년의 천안문 시위를 '혁명사건'으로 다시 선포한, "덩샤오핑과 그의 동지들이 보인 지지에 의해 더욱더 고무되었다."(609)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이 1978년에 덩샤오핑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지지했고 1979년 초 몇 달 간 여전히 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해 덩샤오핑에게 의존하고 있었지만, 마오 이후 정권의 완고한 레닌주의 지도자들은 공산당의 조직적 통제를 넘어서는 운동을 좀처럼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덩샤오핑마저도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확실히 자리를 굳히자마자, 민주활동가들을 "무정부주의와 범죄자로 비난"하면서, '4대'(四大), 즉 "크게 견해를 말하고(大鳴), 대담하게 의견을 발표하며(大放), 대변론(大辯論)을 하고, 대자보를 쓸(大字報)" 권리를 폐지했다."(611-2)


덩샤오핑이 생각하는 정치개혁은 "문화대혁명으로 무너져 내린 중국공산당의 레닌주의적 조직규범을 다시 회복하는 것"과 "공산당 관료들을 평균적으로 더 젊게, 더 잘 교육받게, 전문적으로 더 능력 있게 만들어 관료통치의 합리화를 이룩한다는 의미였다."(628)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민주' 개념에는 "계획경제에 대한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진지하게 고려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자신이 1956년 9월 제8차 당대회에서 천명한 "중국사회의 주요 모순은 적대적 사회집단 사이에서가 아니라 '선진적인 사회주의 체제와 낙후된 생산력 사이'에 존재"(632)한다는 명제를 되살려, 신속한 경제발전이라는 목표에 모든 사회(주의)적 이해관계를 종속시켰다.


자본축적을 위한 농촌 착취를 달성하기 위해 "1955~1956년의 집단화운동 때 그랬던 것처럼 탈집단화 역시 '칼로 자르듯이 일률적'으로 성취되었다."(645) 대부분의 당 간부들은 처음에는 사상적 확신에 따른 저항과 자신의 권력과 소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탈집단화에 반대했지만, 점차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와 영향력이 사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자산임을 깨닫기 시작했다."(647) 도시의 개혁가들은 정규 국가노동자의 평생직장 보장제도를 폐지하는 '철밥통 타파'가 "활력없는 노동력을 단련시키고,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656)


부르주아지가 완전히 제거된 중국에서 그 자리에 진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후보는 거대한 공산당 관료기구의 간부들이었다."(663) 이들은 시장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기회를 사적으로 전용할 때, 정치적으로 유리한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고, 경제적 기능을 계속해서 공산주의 체제에 의존했으며, 노동계급과 자유노조의 반발로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즉, 새롭게 탄생한 중국의 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갖는 계급이 아니었다."(668)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은 '부강한 국가'라는 "내셔널리즘적인 목적에 종속되었으며, 근대적 경제발전과 강력한 국가기구는 이를 위한 기본적인 요소"(678)에 불과했다.


공산당 관료기구는 중국의 병을 '봉건적' 문화의 악영향 탓으로 돌리면서, 5·4 시대에 대두한 문화적 반전통주의를 "공산당 정권의 보수적인 방어수단으로 부활시켰다."(688) 여기에 "덩샤오핑 정권의 지지자나 이론가로 남아 있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민주'의 목표를 버리고 자본주의 독재를 옹호하는 신권위주의를 선택했다. 이런 지적인 변화는 사회경제적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685) 인플레이션과 긴축정책으로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점점 하락하는 가운데 "부정축재를 일삼는 관료들과 수상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커져가는 분노가 결합하여 1989년 겨울과 봄 광범위한 사회적 동요를 낳았다."(682) 


1989년 4월 15일, 지식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정치적으로 기민한 학생들은 민주적 성향의 후야오방에 대한 자신들의 진심어린 존경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 마침내 정치적 기회가 왔음을 인식했다." 대중소요가 퍼져나가자, 덩샤오핑은 "1989년의 학생활동가들을 문화대혁명 시기의 반란자들과 비교하면서 둘 다 '천하동란'(天下動亂)을 일으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692) 자발적인 학생운동에서 문화대혁명의 메아리를 감지한 덩샤오핑은 "마오 이후의 질서가 가져온 신성한 '안정'을 정복하려는 젊은 신세대를 처벌하기로 마음먹었다."(697)


"베이징 대학살이 끝나고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중국의 정치생활과 지적인 생활은 1980년대보다 훨씬 더 억압적으로 변했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박해는 한층 심해졌으며 비밀경찰의 활동은 더욱 확대되었다. 투옥은 훨씬 빈번히 일어났으며, 신문·잡지·책·영화에 대한 당의 검열은 더욱 엄격해졌다."(707) 그러나 한층 강력하게 전개된 '대외개방' 정책으로 눈부신 경제적 업적이 이룩되자, 사회는 너무나 빨리 '정상'으로 돌아갔다. "민주화운동을 낳은 강력한 정치적·도덕적 열정이 이토록 빨리 사그라지고 사라져버렸다는 것, 그리고 정부가 조장하는 소비주의와 내셔널리즘의 물결에 파묻혀 버렸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인 동시에 좌절감을 안겨주는 일이었다."(708)


덩샤오핑의 대를 이은 장쩌민 총서기는 1997년 봄 연설에서 "'극좌주의'의 '화석화된' 사고를 비난하면서 국유기업의 개혁에 대한 계획을 제시했다." 그는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라"(抓大放小)라는 슬로건 아래 국가가 곡물거래와 더불어 첨단방위산업 및 첨단기술산업을 계속 소유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민영화되거나 최소한 부분적으로 비국유화"할 것이라고 천명했다.(720) 사회주의의 마지막 보루마저 제거한 공산당 정권은 이데올로기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내셔널리즘과 애국주의를 마음껏 조장했다. 마침내 1990년대 이후로 "갈수록 거세지는 쇼비니즘적인 내셔널리즘이 사실상 중국 공산주의 국가의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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