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 30년 세계화가 남긴 빛과 그림자
브랑코 밀라노비치 지음, 서정아 옮김, 장경덕 감수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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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소득 분포의 약 40분위에서 60분위에 이르는 사람들은 1988~2008년 사이에 실질 소득이 80% 가까이 중가했다. 세계화의 수혜자라 해도 무방한 A그룹은 대부분 아시아 신흥국가의 국민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글로벌 신흥 중산층emerging global middle class'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 중산층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따라서 소득과 교육 측면에서 고소득국가의 중간계층을 칭하는 중산층이라는 용어는 이들을 가리키기에 적합하지 않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실질소득이 거의 증가하지 않은 B그룹은 OECD 회원국인 고소득국가 국민이다. 이들은 대체로 그 나라 소득 분포의 하위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을 '고소득국가의 중하위층lower middle class of the rich world'이라 부르기로 한다. 단연코 세계화의 승자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정치가들이 사회보장제도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이점이 크다며 설득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바로 세계화의 패자가 된 것이다."(30-1)


압도적으로 고소득국가 국민이 많은 세계 최상위 1%는 같은 기간 동안 실질소득이 상당한 폭으로 증가했다. "C그룹의 사람들을 '글로벌 금권집단global plutocrat'이라 부르자." B그룹과 C그룹 간의 격차는 "고소득국가에서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간의 소득 격차가 확대됐으며 고소득국가에서 이미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세계화로 이득을 취했다는 것을 시사한다."(33) 실질소득의 증가분을 상대적 변화(백분율 증가)가 아니라 절대적 변화(달러 증가액)로 따지면 결과는 더욱 뚜렷하다. "1988년부터 2008년까지 전 세계 소득 증가분을 100이라 치자. 이러한 절대적 증가분 중 44%가 세계 상위 5%의 손에 들어갔다. 또한 약 20%가 최상위 1%의 차지가 되었다. 이와 반대로 앞서 우리가 세계화의 수혜자로 간주한 신흥국의 '글로벌 신흥 중산층'이 얻은 것은 (20분위로 나눌 때) 분위별로 전체 소득 증가분의 2~4%에 그치며, 모두 합해도 약 12~13%에 불과하다."(44)


"쿠즈네츠 가설은 소득 수준이 매우 낮을 때는 심하지 않던 불평등이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증가하다가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다시 감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고소득국가의 소득 불평등 증가는 쿠즈네츠 가설을 부정한다.(75) "피케티는 (1918~1980년 사이의 소득) 불평등 감소가 전쟁이라는 정치적 힘,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조세, 사회주의 이념과 운동, 경제적 수렴(임금 증가율이 재산소득 증가율을 상회) 등으로 촉발된 특수하고 드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피케티가 보기에 (1차 세계대전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정상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불평등 증가를 낳는다. 이러한 이론으로 쿠즈네츠 곡선의 하강부분과 상승 부분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다. 피케티는 쿠즈네츠 곡선이 쿠즈네츠가 제안한 역U자가 아니라 U자 형태라고 본다." "그러나 시야를 훨씬 더 이전인 18세기와 19세기까지 확대하면 피케티의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소득 불평등 증가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77)


"평균소득이 매우 낮은 사회가 전쟁에 관여하게 되면 그 결과는 두 가지 가능성뿐이다. 첫째, 부유층이 비용 대부분을 부담함에 따라 불평등이 감소한다. 둘째, 저소득층의 소득이 최저 생계수준 미만으로 떨어지면서 인구가 감소한다. 그런데 지배층이 제아무리 착취를 일삼고 저소득층의 운명에 무관심한 사회라 하더라도 두 번째 해결책을 감행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추정하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또한 인구가 감소하면 징집할 수 있는 신체 건강한 남성의 숫자도 줄어든다는 점에서 두 번째 해결책은 자멸을 자초하는 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첫 번째 해결책이 선호되며 우리가 산업혁명 이전 시대의 사회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흔히 불평등이 감소했을 것으로 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산업혁명 이전에는 불평등이 (쿠즈네츠 가설을 확장 보완한) 쿠즈네츠 파동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고 본다."(81)


"산업혁명이 소득 불평등의 추이에 시사하는 바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총 소득이 증가하면 다른 사람의 소득이 최저 생계수준 아래로 떨어지지 않더라도 인구 가운데 일부의 소득이 급증한다. 그 결과 불평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화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적어도 최저 생계 소득 이상을 벌어야 한다고 볼 때 총 소득 증가는 그 자체로 불평등이 증가할 '여지'를 남긴다." "둘째, 산업혁명 이후 불평등과 평균소득 사이에는 그 이전처럼 평균소득이 고정되었던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상관관계가 성립되었다. 나는 쿠즈네츠 가설과 마찬가지로 산업혁명 직후에 증가하기 시작한 불평등이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 고소득국가에서 절정에 이른 원인을 (한층 더 다각화된 제조 부문으로의 이동 등) 구조적 변화와 도시화로 본다. 그 이후로는 쿠즈네츠가 제시한 대로 좀 더 숙련된 노동력이 공급되었고 재분배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자본수익률이 낮아짐에 따라 불평등이 감소했다."(82-3)


"1차 세계대전 이후 불평등을 완화시켰던 요인은 1980년대에 들어 효력을 잃었다." "불평등이 심화된 까닭은 부분적으로는 고숙련 근로자가 저숙련 근로자에 비해 신기술로 훨씬 더 많은 보상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유층 친화적 정책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었다. 그러한 정책들이 기술혁명과 세계화와 상관없이 외생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잘못된 시각이다." "오늘날에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말보다는 그와 정반대로 자본과 자본가들에게 조국이 없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자본을 통제하고 자본에 세금을 부과하기가 전에 없이 어려워졌다. 그 때문에 불평등이 크게 심화되고 말았다."(84-6) "평균소득의 증가는 경제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대리지표에 불과하다. 우리가 관찰하는 불평등의 변화는 경제적 요인과 (뉴딜 정책, 노조의 협상력, 세율 변화, 세계화 등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다."(108)


"고소득국가에서 1980년대 무렵에 시작된 불평등 상승 국면은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불평등이 감소하고 낮은 수준에 머무른다는 쿠즈네츠의 원래 가설에 부합하지 않는다. 내가 쿠즈네츠 순환이나 파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선진국이 현재 보이고 있는 불평등 상승 국면을 제2 쿠츠네츠 파동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제1 쿠즈네츠 파동과 마찬가지로 제2 쿠즈네츠 파동을 유발한 요인은 기술혁신과 변화, 자본의 노동력 대체가 빚어낸 '제2의 기계시대', 부문 간 노동력 이동이다. 제1 쿠즈네츠 파동이 나타났던 시기에는 노동력이 농업 부문에서 제조 부문으로 이동했으며 따라서 농촌지역에서 도시지역으로 인구가 이동했다. 제2 쿠즈네츠 파동의 경우 제조 부문에서 서비스 부문으로 노동력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경제정책이 부유층 친화적인 노선으로 바뀐 것도 제2 쿠즈네츠 파동을 유발한 요인이다."(130-1)


# 제2차 쿠즈네츠 파동의 상승(불평등 심화) 요인

1. 정보 기술의 발달(2차 기술혁명)

2. 서비스업의 노조 조직율 하락

3. 세계화로 가용 노동력 급증과 수월한 자본 이동 → 노동의 협상력 약화

4. 기타 : 동류혼homogamy 증가, 도덕규범, 임금규범 변화


# 쿠즈네츠 파동의 하강을 이끄는 양성 요인

1. 세율 인상과 누진 과세 같은 정책 변화

2. 교육과 숙련도 간의 경주

3. 기술 혁명 초기 단계에 발생한 지대의 소멸

4. 글로벌 차원의 소득 수렴 (저소득국가의 부상)

5. 저숙련 편향적 기술 진보 (저숙련 노동자의 생산성 향상)


"19세기 초반만 해도 지니계수로 측정한 글로벌 불평등과 미국의 불평등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쳐 뉴딜 정책이 시행된 이후에는 글로벌 불평등과 미국의 불평등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글로벌 불평등은 속도는 전보다 느려졌지만 계속해서 증가한 반면에 미국의 불평등은 상당한 폭으로 감소했다. 특히 자본주의 황금기로 간주되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그랬다. 두 가지 불평등이 갈림길을 걷는 양상은 그 이후로도 계속 되었지만 이번에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1980년대의 두 번째 전환기 이후 글로벌 불평등은 중국의 성장에 힘입어 정체상태로 돌아섰다가 감소하기 시작한 반면에 미국의 불평등은 증가하기 시작했다."(171-3)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까지 "가장 큰 소득 평준화 역할을 한 것은 중국이었으며 2000년 이후로는 인도도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169)


미국내 불평등 증가라는 부정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역 요인이 어떤 사람의 생애소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좋은 지역(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시민권 프리미엄citizen premium'을 누리고, 그렇지 못한 지역(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시민권 페널티citizen penalty'를 감수해야 하는 세상이다."(178) "나는 세계 최빈국인 콩고를 '누락'된 나라로 보고 회귀분석을 했다. 다시 말해 각국의 시민권 프리미엄을 콩고에 비해 얼마나 더 많은 소득을 얻고 있는지로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국가 평균 시민권 프리미엄을 산출한 결과 미국은 9,200%, 스웨덴은 7,100%, 브라질은 1,300%이며, 예멘은 300%에 불과하다. 이러한 결과는 (회귀분석의 관점으로 볼 때) 국가 백분위 전반의 소득 변동 가운데 2/3가 넘는 부분을 거주국이라는 단일 변수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음을 뜻한다."(183-4)


# 미국의 불평등 가속화 시나리오

1. 생산의 자본 집약도가 높아지면서 자본과 노동의 대체탄력성 상승으로 자본의 몫 증가

2. 자본소득 집중으로 개인 간 소득 불평등 상승

3. 높은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점점 일치하는 현상 심화

4. 3번 집단 내 동류혼 증가

5. (금권정치가 심해지면서) 저소득 친화 정책 폐기, 공공 투자 감소


"국민의 노력이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글로벌 불평등이 발생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에 따르면 고소득국가의 국민이 저소득국가의 국민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경우 그 두 나라 간의 소득 격차는 환경의 차이만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시민권 지대의 산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이 요인이라는 주장은 두 가지 이유에서 실증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첫째, 우리는 오히려 저소득국가 국민의 근로시간이 더 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둘째, 동일한 노력을 들여야 하는 동일한 직종을 각 나라마다 비교해 보면 국가 간 실질임금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191-2)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중심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가장 포괄적으로 해석한다면 세계화는 생산요소, 상품, 기술, 세계 각국의 아이디어가 단절 없이 이동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도 자본, 상품 수출, 상품 수입은 물론 서비스 무역에도 적용되지만 노동력에는 해당하지 않는다."(196)


# 국제 이주의 네 가지 특징

1. 조국을 떠날 권리와 가고자 하는 나라로 마음껏 이주할 수 없다는 현실의 충돌

2. 생산요소, 상품, 기술,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이동과 달리 노동자의 이동권은 엄격하게 제한

3. 소득 극대화라는 경제학의 원칙이 개별 국민 국가 내부에만 적용되는 관행

4. 국민의 발전이 자국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과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면 장소는 상관없다는 입장의 충돌


"자본주의는 자본소득과 근로소득이 철저히 분리된 형태에서 이 두 요소 사이에 음(-)의 상관관계가 성립되는(근로소득자가 자본소득을 거의 올리지 못하는) 변종으로 변화했다가 양(+)의 상관관계가 성립되는 '신新자본주의'로 나아가고 있다."(253) "이러한 경향은 능력주의meritocracy처럼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뒤엎는 데도 크나큰 정치적 고충이 따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신자본주의는 자본과 노동의 주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원칙으로 하는 고전 자본주의와는 판이하다. 신자본주의에서는 부유한 자본가와 부유한 근로자가 일치한다. 이러한 구조는 부유층이 일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회적으로 널리 용인된다."(255) 여기에 부유층의 막대한 정치 자금 기부와 부유층 친화정책이 상호 작용하면서 "개인의 정치적 중요성이 소득 수준에 비례하며 1인 1표 시스템이 '1달러 1표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 사실 1달러 1표 시스템은 기존의 소득 분포를 정치 차원으로 가져온 데 불과하다."(258)


"제2 쿠즈네츠 파동의 상승 곡선을 탄 고소득국가에서 불평등 증가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중산층 공동화와 부유층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이 그에 대한 인과응보로 나타날 대중의 계급적 저항과 겹치면 포퓰리즘과 자국민 우선주의nativism('토착주의'라고도 한다)를 낳는다. 포퓰리즘도, 금권정치도 고전적 의미의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불평등이 서구의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위협을 끼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259) "중산층의 숫자 감소와 경제권력 약화는 경제와 정치에 다양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교육이나 의료같이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 서비스에 대한 지원이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유층은 사회 서비스의 공공 지원을 중단하기를 바랄 것이다." "부유층은 공교육보다는 치안 강화나 마르크스가 말한 감시 노동guard labor에 공공 재정을 사용하는 편을 선호할 것이다."(267-8)


"부유층의 민주주의 억압 전략 가운데 두 번째는 마르크스식으로는 허위의식의 주입이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으로는 헤게모니의 창출과 비슷하다." "여기에서 허위의식이란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어떤 의도에 휘둘려 스스로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따지기보다 사회, 종교, 다른 사안에 관심을 쏟는 것을 뜻한다. 그러다 보면 서로 불화할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투표를 할 때 경제 사안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으며 때로 이민, 종교, 낙태 등과 같은 사안도 중시한다. 그러나 정치와 언론에 투입되는 사적인 자금이 어마어마하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 두 가지 투자가 매우 비슷한 목적을 띤다는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허위의식은 이념적 '마트라카주'(matraquage, 곤봉으로 머리를 때린다는 뜻의 프랑스어로 언론을 통한 집중 공세나 세뇌를 뜻함)로 창출된다." "다시 말해 문화 전쟁에는 경제권력이 부유층으로 이동하는 실제 현상을 눈가림하는 기능이 있다."(272-3)


"국민건강서비스 삭감, 공교육 축소, 정부서비스 이용료 인상, 은퇴 연령 상향 조정, 0시간 일자리zero hour jobs(출근은 해야 하지만 노동과 수입을 보장받지 못하는 직종) 도입에 따른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 등 사회보장제도가 받은 수많은 공격은 결국 중산층에 대한 공격이다."(279) 이와 더불어 금권정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면서 "유럽에서는 포퓰리즘의 부상과 더불어 세계화에 대한 노출 정도가 줄어들고 있다. 각국이 이주 장벽을 세우고 물밀듯이 밀려드는 자본 유입이나 상품과 서비스의 수입에 대항해 보호조치를 시행하는 한편, 시민권과 국민의 기본권을 재정의[기본권이 신성불가침의 권리가 아니라, 국민 다수의 동의 여부에 좌우되는 권리라는 식의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금권정치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세계화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이고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면모는 유지하되 세계화에 대한 노출 정도를 줄이려는 움직임이다."(283)


우리가 '자율성, 존엄, 자유, 권리 등의 불평등'을 뜻하는 "실존적 불평등의 해소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적어도 세 가지는 있다. 첫째, 집단 간의 차이에 대한 논의는 곧바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확대될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변화를 일으켜야 유리한 집단끼리 뭉쳐 국민이 분열될 수 있다. 다양한 집단이 스스로의 상황에만 초점을 맞춤에 따라 공동 전선이 무너지는 것이다." "둘째, 실존적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면 근본적 문제는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가령, 성매매 합법화 논의의 관건은 "성 불평등 해소에 치중하기보다는 성매매의 경제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데 있다." "셋째, 실존적 평등은 정치적으로 비교적 손쉽게 추구할 수 있는 일이다(물론 보상도 크지 않다).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 조건의 전반적인 평등화를 이루어내려면 다양하게 분화된 집단 간의 법적 평등을 달성해야할 뿐 아니라 소득과 부의 평등을 크게 확대해야 한다."(3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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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전쟁
아자 가트 지음, 오숙은.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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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대부분의 수렵채집인은 거주 환경의 낮은 생산성 때문에 인구 밀도가 매우 낮았다. 1제곱마일당 1인보다 낮은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그보다 훨씬 낮은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자주 이동했고 소유물이 극히 적었으며, 따라서 굉장히 평등주의적이었다. 노동과 지위는 주로 성과 연령에 따라 구분되었다." "농업이 등장하기 전까지 수렵채집인은 생태학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환경을 포함해 전 세계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런 조건하에서 수렵채집인의 인구 밀도, 생존양식, 이동성, 사회질서 등은 그 이후의 수렵채집인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34) "인구 밀도가 낮고 산출이 적은 땅에서 꽤나 옮겨다니며 살았다는 사실이 곧바로 경쟁과 텃세가 없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종들은 자신들의 서식지를 금세 채우고 곧 그 경계를 넓혀나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빈 공간이란 없다. 이동과 방랑 생활은 국한된 한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39)


"루소파 인류학자들이 상상했던 자유로운 방랑과는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그린란드 에스키모와 비슷하게) 사실 '제한받는 방랑자' 또는 '중심 기지가 있는 방랑자'로서 조상들의 고향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이런 영역은 토템과 신화로써 승인되었고 무단 침입은 중대한 범죄로 여겨졌다. 낯선 이들은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침입시에는 쫓겨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40-1) "야생의 가장 풍부한 틈새는 주로 늪이나 호수, 삼각주, 강 하구, 해안 등지와 같은 비옥한 물가에 있었다. 그런 몇몇 틈새에서 이른바 복합 수렵 채집 사회가 진화했다. 이는 인구 밀도가 더 높았다는 뜻이다. 또한 지역 집단 내에서 대가족 집단이 더욱 가까이 모여 살고 있었고, 사람들이 전보다 한곳에 더 오래 정주하면서 식량을 보존하고 계절별로 식량을 저장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단순한 '징발자'라기보다 '수집자'였다는 얘기다."(50)


"결핍과 굶주림이 전쟁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풍부함과 결핍은 먹여 살릴 입의 수에 상대적일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계속 커질 뿐 만족을 모르는 인간적 욕구와 욕망에도 상대적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경쟁은 결핍은 물론 풍요와 함께 증가하고, 풍요로워질수록 경쟁의 형태와 표현이 복잡해지고 사회적 격차가 벌어지고 계층화가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부유한 남자는 더 많은 아내를 부양할 능력이 있으며 따라서 더 많은 아내를 둘 수 있다." "여성을 둘러싼 경쟁은 치명적인 폭력을 부르는 주된 원인, 때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더욱이 단순한 생계형 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양은 근본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해도, 남들보다 세련되고 풍족한 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양은 사실상 끝이 없다. 그저 고급품 시장으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이른바 과시적 소비가 시작되는 것인데 복합 수렵채집 사회는 이를 경험한 최초의 사회였다."(59)


전쟁이 인간 본성에 내재한다는 관념은 오랜 계보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 성서에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창세기 8:21)이라고 쓰여 있다. 프로이트는 문명이 인간의 원시적 충동이라는 위태로운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이 너무도 어리석고 비이성적이고 자멸적이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이론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성생활의 충동과 나란히 파괴적이며 사실상 자멸적인 충동, 다시 말해 '죽음 본능'이 있다고 주장했다."(64-5) 그러나 학계에서 공격성은 "음식이나 성에 대한 근본적 충동과는 전혀 다른 생리학적 메커니즘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진화론적 계산법에서 양분과 성은 으뜸가는 생물학적 목적으로, 전자는 유기체의 존속과, 후자는 번식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반면에 공격성은 으뜸가는 생물학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전술, 그것도 여럿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66)


"공격성은 기본적인 욕구라기보다 가능하지만 매우 위험한 하나의 전술에 지나지 않으므로, 공격성을 조절하는 감정 메커니즘들은 정반대로 언제든 껐다 켰다 할 수 있다. '켜짐' 위치에서 공격성을 촉발하는 주요 동기와 충동 뒤에 놓인 감정 요인이 단지 두려움과 적대감 같은 느낌만은 아니다. 개인과 집단이 경쟁하며 정신력과 체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느끼는 전율과 즐거움, 심지어 잔인성과 피에 대한 갈망, 살해의 희열이 싸우는 행위 자체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런 것이 모두 공격성을 부채질하고 지탱하기 위한 감정 메커니즘이다. 한편 '꺼짐' 위치에서 공격성을 억지하고 단념시키는 감정 요인은 두려움, 정신적·신체적 피로, 연민, 폭력에 대한 증오, 유혈극에 대한 혐오 등이다. 그 밖에도 협력과 평화적 행위에 대한 엄청난 감정 자극이 있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해, "공격성은 하나의 기술, 잠재성, 성향, 또는 성질로서만 존재한다."(68-9)


"종내 싸움과 살해가 일어나는 이유는, 비용 대비 효과적인 어떤 방법으로든 낯선 개체의 유전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는 개체들의 노력이 바로 진화적 경쟁의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동물이 같은 종의 개체들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특히 사회적 동물의 경우에는, 같은 종인 집단 내의 성원들이 있는 편이 사냥은 물론 특히 방어에서 그 자신의 성공을 위해 중요하다. 더 일반적으로 모든 동물의 경우를 보면 같은 종의 나머지 성원들 또한 강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제거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의 비용이 진화론적으로 비생산적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요점은 이런 행동 패턴이 파리, 생쥐, 사자, 심지어 인간의 의식적 결정과 복잡한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개체는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는 데 실패해왔고 그들의 부적응 행동을 유발한 부적응 유전자는 선택에서 제외되어 왔다는 것이다."(73-4)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르러 등장한 "언어 기술의 발달과 공유 문화 덕에 수백 명을 아우르는 지역 집단이 진화할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지역 집단 자체가 여러 가지 중요한 진화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은 이른바 '낯선 사람들'인 아주 먼 친족보다 중거리 친족(지역 집단)을 편들기에 유리했다. 더 중요하게는 대가족 집단보다는 지역 집단이 훨씬 더 힘이 셌을 것이다. 지역 집단은 힘의 총량이 훨씬 더 컸다. 이는 지역 집단 내에 살지 않는 경쟁자와 무장 분쟁이 벌어졌을 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 확실한 이점을 주었을 것이다."(86) "지역 집단은 그들과 달리 지역적으로 집단화되지 않은 사람들(아마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이전의 인류들)과 싸울 때는 분명한 이점을 갖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역 집단을 이루게 되었을 때에는 그만큼 결정적인 이점을 갖지 못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바로 이것이 모든 '군비 경쟁'의 본질이다."(90)


"자원을 둘러싼 투쟁은 대부분 진화론적으로 비용 효과가 높았다. 싸움의 이점도 가능한 대안들(굶어죽는 것을 제외하고)과 나란히 놓고 저울질해봐야 한다. 그런 대안 가운데 하나가 접촉을 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물론 적이 훨씬 강할 때에는 종종 그러는 편이 나았지만 그 전략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이동해갈 '빈 공간'이 대체로 없었다." "더구나 이동이란 집단 성원들에게 매우 익숙한 자원과 위험이 있는 서식지를 떠나서 미지의 환경으로 여행한다는 것을 뜻했다. 수렵채집인들에게 그런 변화는 무거운 형벌이 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외부 압력에 굴복하다가는 희생 패턴이 생길 수도 있었다. 성공에 고무된 외부 집단은 그 압력을 반복하고 심지어 증대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분쟁의 전략은 현재 분쟁이 되는 대상뿐 아니라 미래 관계의 전반적 패턴까지 고려한다. 자립한다는 것은 사실 미래의 분쟁 발생을 줄인다는 것을 뜻한다. 103)


"수렵채집인들의 전쟁에는 그렇게 여성 납치와 강간이 흔히 수반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여성 때문이었을까? 여성 납치와 강간은 수렵채집인들의 전쟁에서 원인이었을까, 부작용이었을까?"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동기 복합체는 어떤 사회의 사람들이 폭력적 경쟁을 벌여 얻고자 하는 희소한 것들이 다양하게 혼합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체 요인과 번식 요인 두가지 모두 있을 것이다."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여성은 대개 전쟁의 강한 동기였고 대개 주요 동기이기도 했지만, 유일한 동기였던 경우는 드물다. 물론 여성이 아주 두드러진 동기가 되는 까닭은 번식의 기회가 실로 매우 강력한 선택 압력이기 때문이다."(108-9) "여성 희소성과 남성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요인은 또 있다. 모든 수렵채집인들(과 농경민들) 사회에서 여女유아살해는 주기적으로 행해진다. 부모는 사냥할 수 있고 (혹은 들판에서 일할 수 있고) 방어능력이 있는 사내아이를 선호한다."(114)


# 분쟁의 2차 원인들 (1차 원인 : 자원과 번식)

1. 지배 : 서열, 지위, 위신, 명예

2. 복수 : 제거와 억지를 위한 보복

  2-1) 안보 딜레마 : 군비 경쟁 가속화

  2-2) 주술 : 초자연적인 믿음, 성스러운 의례, 마법 행위

  2-3) 카니발리즘 : 안보 딜레마와 주술에 대한 두려움의 혼합

3. 순전한 호전성 : 놀이, 모험심, 사디즘, 황홀경


"국가 이전 사회에서 복수 원리는 목숨, 재산, 그리고 훗날 국가가 지배하게 된 것들까지 보호하는 데 훨씬 폭넓게 적용되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의지할 곳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친족, 동맹뿐이었다. 해를 입었을 때 앙갚음 하는 것은 가해자를 절멸시키거나 억지력을 재확립하는 주된 방법이다."(139) "서로에게 이로운 상호협조를 강제하거나 적어도 사람들의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개 그들의 유일한 합리적 선택은 보복의 순환뿐이다. 보복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적인 방책이라 해도, 보복은 최적의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다. 보복은 매우 무거운 비용 부담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보복은 계속될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에서처럼, 무엇보다도 적과의 의사소통이 없거나 잘못되면─적대자 사이에 흔한 악의와 두려움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보복의 순환을 끝낼 거래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143)


상호 증폭되는 복수 원리는 경쟁 및 잠재적 분쟁 대상이 될 수 있는 상대방을 향한 의심과 불안을 부추긴다. 이와 같은 안보 딜레마는 '군비 경쟁'을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군비 경쟁은 참으로 역설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도 많다. 경쟁자를 앞서기 위해 단계적으로 세력을 계속 확대해나가는 노력이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이 경우 상대방은 파멸하거나 크게 약해지고 승자는 이익을 챙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쪽이 한 걸음 나아가면 상대편이 한 걸음 따라잡는다. 결과적으로 그 분쟁에서 서로가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익을 얻지 못한다. 이는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겪은 사건의 이름을 따서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라고 불린다. 양쪽 모두 더 빨리 달려봐도 결국은 서로가 한자리에 머물러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147)


"안보 딜레마로 인한 군비 경쟁의 특징은 양쪽 모두의 근본 동기가 방어적이라는 것이다. 양쪽 모두 상대를 두려워하지만, 한쪽이 안보를 강화하려고 내딛는 한 발짝 한 발짝이 상대를 겁주어 비슷하게 나아가게 만들고, 다시 그 역이 성립하면서 상승하는 나선형을 그린다. 다시 한번 이것은 서로에 대한 의심을 연료로 삼는 '죄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 나선을 중단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이번에도 서로의 의심을 줄일 방법을 찾는 것이다. 혼인 연대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전근대 사회에서 사용한 고전적인 방법이었다."(147) "공동의 초자연적인 신앙, 신화, 숭배, 의례는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고 따라서 결속을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자원 면에서 이것들의 직접적인 비용이 얼마가 됐든, 그 비용은 간접적이되 매우 적응적인 '방어비용'으로 여길 수 있다. 더욱이 신앙, 숭배, 의례는 문화의 나머지 요소들과 비슷해서, 어릴 때 사회적 학습으로 내면화된 후에는 바꾸기가 매우 힘들다."(152)


"왜 인간은 상호억지를 위협하는 선제공격 능력을 나머지 동물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을까? 인간에게는 가장 두드러진 능력, 바로 도구 제작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욱 치명적이 되며, 도구가 근육과 뼈, 치아를 대신하기 때문에 체격이 더욱 호리호리해진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에렉투스보다 몸이 더 가냘프며,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 또한 대형 유인원들보다 근육이 적다. 한마디로, 인간 공격력의 성장은 자연적 방어력의 꾸준한 쇠퇴와 연관되어 있었다."(186) 분쟁 상황에서는 매복과 기습 같은 비대칭 선제공격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상위 권력의 통제와 같은 안보 메커니즘이 없는 상태에서 당사자들은 다시금 '죄수의 딜레마'의 변형인 '안보 딜레마'에 빠진다." "분쟁 상황 자체가 적대자들로 하여금 원래의 경쟁 동기를 넘어서 주기적으로 분쟁을 확대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다."(191)


"생물학에서 복제자는 유전자로, 세포핵 안에 저장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문화에서 복제자는 행위와 관념─리처드 도킨스의 용어로는 '밈meme'─으로, 살아 있는 두뇌에 축적되며 학습을 통해 두뇌에서 두뇌로 전달된다. 이제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주요 차이점 하나가 분명해진다. 전자는 자녀에게만 전해지는 '선천적' 복제자와 관련이 있지만, 후자는 원론상 어떤 두뇌에도 '수평적으로' 복제될 수 있는 획득 형질과 관련이 있다." "문화적 진화가 도약했던 근본적 이유는 생물학적 진화의 최신 기교 가운데 하나가, 다름아닌 크게 향상된 교습과 학습 능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적 진화가 아무것도 없는 빈 서판 위에서 작용해온 것은 아니다. 문화적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에서 하나의 능력으로서 기원했을뿐 아니라, 오래도록 진화한 선천적 성질이 깊이 새겨져 있는 인류의 생리학적·심리학적 '풍경' 위에서 작용해왔다. 212-4)


"끊임없는 진화적 '군비 경쟁'에서 주로 선택에 의해 가동되는 두 진화 형태 모두 시간이 흐를수록 더 복잡한 '설계'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학습과 문화 생성 능력은 그 자체가 생물학적 진화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혁신' 중 하나다. 그후 문화적 진화는 온갖 유형의 복제자들이 번식하고 증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경쟁의 영향력 때문에 더욱 복잡해지면서 생물학적 진화를 계속해왔다. 참여자들이 경쟁에 더욱 능해지고 더욱 '전문적'이 됨에 따라 전체 경쟁은 갈수록 가속화되고 치열해진다. 그들의 적응뿐 아니라 적응 가능성까지 향상되는 것이다." "복잡성의 발생은 그 과정의 점진적 성격에 의해 제한받기도 하지만, '설계 공간'─물리적, 화학적, 유기적, 또는 문화적인─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성향에 의해서도 제한받는다. 따라서 각기 다른 수많은 세계가 진화할 수 있음에도, 비슷한 '제약'으로 인해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비슷한 구조들이 독립적으로 등장해왔다."(216-8)


신석기시대의 농업기술 개량과 확산은 "또다른 진전을 위한 전제조건을 계속 재생산하는 자기강화 과정이었으며, 후퇴하기 점점 힘들어지는 일방통행로가 되었다. 생산적인 재배는 더욱 가치 있는 활동이 되었다. 재배의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더 조밀한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인구가 조밀해지고 재배가 집약적으로 변할수록 인간이 사냥하는 야생동물이, 결과적으로는 수렵채집 활동이 축소되었다." "정주생활은 더욱 광범위한 물질적 소유를 가능하게 했고 엄청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다양화와 정교화를 위한 토대를 서서히 다져갔다. 그렇지만 농업 집약화 과정이 산업화 전야까지 제 갈 길을 가는 동안, 세계 인구의 80~90퍼센트는 중노동, 질병, 영양실조, 높은 사망률에 시달리면서 집약적 재배가 이루어지는 조그만 땅에서 빈약한 생계수단을 뽑아내기 위해 싸워야 했다. 어떻게 이런 역설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이번엔도 개괄적인 답은 인구 성장, 그것도 극적인 인구 성장이다."(225-6)


"서서히 농업 집약도와 인구 밀도가 증가했다. 무장한 전사들의 기습은 더 격하고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가담한 무리가 클수록 전투 범위는 더 커졌다. 그리고 마을에 주민이 많을수록 기습으로 효과를 보거나 비밀 작전을 펼칠 가능성은 낮아졌다." 부족(연합)이 대규모 이주를 감행하면서, 이런 이동은 연쇄 반응과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얻게 될 전리품이 더 많고 중요할수록 양측 모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공개 전투를 벌이며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땅 자체가 걸렸을 때는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았을 것이다." "본격적인 공개 전투가 도입된 곳에서는 이따금 매복이나 계략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부족 집단끼리 통솔 대형이나 전술적 지휘를 동원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지휘자들은 대개 솔선수범하며 병력을 영웅적으로 이끌었다. 전쟁 지도자가 선두에 서고 부하들이 뒤를 따르는 게르만족의 유명한 '쐐기' 대형은 이런 영웅 유형 지도력의 표현일 것이다. 257-8)


"농업 확산으로 수렵채집인이 꾸준히 축소되던 단계는 이제, 경작에 부적절하더라도 가축을 사육할 수 있는 주변부의 땅을 언제 어디서든 목축민이 차지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이처럼 신석기시대인들 내에서 처음 일어난 중요한 경제 다각화로 인해 농경 사회에는 새로운 유형의 이동성 반半유목민 이웃이 생겼는데, 이들은 군사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수렵채집인들보다 훨씬 중요했다." "목축민들의 인구 밀도와 절대 수는 농경민들보다 훨씬 낮았음에도, 개별 사회집단의 크기는 농경민 집단과 대체로 같았다."(260-1) 정주 공동체들은 목축 부족민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시와 국가 조직을 갖추었지만, "목축민들은 허약한 도시경제의 기반을 이루던 취약한 농경 배후지를 야금야금 잠식함으로써 도시를 상당히 빠르게 쇠퇴와 몰락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과정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일종의 '체제 붕괴'를 일으키는 일상적 메커니즘을 제공했다. 272)


신석기시대와 초기 청동기시대의 동유럽-서아시아 스텝지대에서는 말이 큰 무리를 이루어 번성했다. "기원전 제4천년기에 현지 거주민들은 야생마를 대거 사냥하고 또한 가축화하고 있었다."(275) 가축화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지난한 과정이다. "말의 생물학적 민감성을 인간의 필요에 맞추기 위해서는 천 년에 걸친 점진적인 선택 교배 과정이 필요했다. 아울러 시간이 흐르면서 방법론과 하드웨어의 문화적 혁신이 일어나면서 가축화된 종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말타기가 아주 일찍 시작된 것 같다는 점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효과적인 말타기, 그리고 군사적 목적의 말타기가 문제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군마의 진화는 수천 년 동안 점진적인 여러 단계를 거쳤다. 이 과정의 마지막 주요 발전 가운데 하나─서기 500년경부터 시작된 등자의 발명과 확산─가 군사 기마술을 완성해냈다는 점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278-9)


"기마 목축과 기마 전투의 진화는 목축민의 위협을 크게 증대시켰다. 그러나 기마 목축 사회가 진화할 때쯤에는 농경 사회의 상황도 전과 같지는 않았다. 부족들과 작은 정치체들이 사라지고 국가와 거대 제국이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286) "권력과 권력관계는 더이상 친족 관계에만 기반하지 않았다. 족장과 '빅맨'은 이제 무장 종사, 종속민, 피호민을 이용해 사회적 거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개 지도자의 씨족이나 친척 씨족 출신이었지만 다른 씨족, 심지어 완전한 외부인일 수도 있었으며, 후원자와는 혈연을 능가하는 경제적·사회적 이익과 의무로 묶여 있었다. 엘리트 간의 유대도 부족과 혈연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서로 다른 부족 공동체의 족장들과 '빅맨'들은 서로를 습격하기도 했지만 귀한 물건과 굳건한 동맹, 신성한 우정을 교환하면서 제삼자에 맞서기도 했고, 종종 '부족의 이익'을 배반하면서까지 서로를 지원해 자기 부족 내의 경쟁자와 적수에 맞서기도 했다.(289)


"국가의 진화는 농업으로의 이행과 농업 성장으로 촉진된 과정에 따른 거의 '필연적인' 정점이자 결실이었다─적어도 적당한 조건이 주어진 곳에서는 그랬다. 이는 지구상에서 국가가 처음 등장했던 네 곳인 근동, 중국 북부, 중앙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이 하나같이 농업 혁명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로 명백하게 입증된다."(314-5) "무장 세력은 국가 형성과 관련해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든 특징들을 빚어내는 힘이었다. 독립적이던 예전의 족장들을 강압과 영입을 통해 하나의 종주 체제에 통합함으로써 국가의 중핵을 확대하고, 새로운 범凡엘리트 내의 친족 유대 및 친족을 초월한 제도라는 두 가지 장치로 국가 통치를 강화하고, 종주가 군대·사법·종교의 최고 권한을 장악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관료제화와 문화 융합, 공동의 정체성 형성을 통한 영토의 통합에 의해 더욱 통일된 국가로 바꾸는 일은 모두 무장 세력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322-3)


# 국가 등장의 토대들

1. 농업의 집약화

2. 인구 성장

3. 경제적·사회적 계층화의 심화

4. 주술과 공동 의례

5. 무장 종사단을 거느린 빅맨과 족장의 권력


"무장 집단은 국가 구조 밖에서도 계속 중요했다. 일단 '국가 구조' 자체가 매우 느슨한 개념이었으므로, 지역 권력자들은 자기 수하들과 지역 주민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정당한 실권자로 여겨졌다. 더욱이 소국가와 패권적인 종주국뿐만 아니라 새로 등장하던 국가 간의 체계 자체도 실상은 대체로 작고 분열되어 있어서, 국가들 주변과 사이에는 많은 '변경지'가 있었다. 부족/야만인 경계지 외에도, 국가 영토 안팎의 무인지대에서는 특정 부족이나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무장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법이나 피의 복수를 피해 달아난 탈주자, 폐적되거나 버려진 서출, 장자가 아닌 이들, 망명한 귀족, 채무자, 도망 노예, 또는 단순히 노략질과 모험적인 생계방식을 택한 빈농들로 잡다하게 구성되었다. 소국가는 작았고 큰 국가의 경우에도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무장 집단─수백 명에 이르는─은 규모가 클수록 지배 권력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었다."(356-7)


"도시국가에서 놀라운 점은 도시가 주변 시골 인구의 많은 부분, 아니 대부분을 융합하고 그 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도시국가를 탄생시킨 과정이다. 수메르인 도시국가 인구 가운데 무려 80~90퍼센트가 도시들 안에 살았다고 추정되는데, 이들 도시를 그렇게 만든 것은 기원전 제4천년기 말과 제3천년기 초에 있었던 시골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었다. 이 특이한 데이터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산업사회 이전 사회의 경제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구의 80~90퍼센트가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일부 도시국가가 시골에서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공예 및 원거리 무역 중심지가 되었을 때에도 인구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했다. 도시 인구 대부분이 농민으로서 날마다 가축을 끌고 들판과 농장을 오갔던 것이다." "농민의 도시생활양식이라는 역설이 생긴 이유는 방어적인 제휴 때문이었다."(368-9)


"대체로 도시 요새 진화의 순서는 전 세계에서 거의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흙과 자갈과 목재 구조물에서 시작해서, 갈리아 도시들에서 보듯 돌 외장을 덧붙인 '중간적 형태'를 거쳐 벽돌과 돌 구조물로, 그리고 마침내 순전한 돌 구조물로 진화했다. 이와 나란히 방어용 울타리를 두른 도심 공간은 대개 요새화된 큰 시민 중심지를 거쳐 완전히 에두른 성벽으로 진화했다." "이것은 투자와 정치적 협력이 필요한 대공사였다. 종전의 느슨한 농촌 겸 맹아적 도시의 친족-부족사회를 통합하는 국가 권력의 성장은 이 모든 과정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였다."(384-5) "어디서 등장했든 간에 맹아적 도시국가─흔히 말하는 코뮨─는 지역 귀족의 지배를 뒤흔들려고 했고, 어디서든 그렇게 하기 위한 수단은 시민들, 주로 지역·자치구·길드에서 조직되고 직공과 농민으로 구성된 대규모 보병대였다."(389)


"도시국가들 사이의 아주 가까운 거리와 작은 영토, 단기 군사작전 등으로 인해 인력 동원은 전에 없이 쉬워졌다. 국가 이전의 부족사회, 족장사회, 계층화된 환절 사회나 여타 정치체의 경우와 달리 가까이 있는 작은 밭, 과수원, 목초지를 지키기 위한 집단 협력은 확실히 사리 추구의 성격이 강했고, '무임승차'와 수동적인 '이반' 형태를 강력하게 좌절시키는 집단 제재를 통해 친밀한 도시국가 공동체 안에서 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적의 무리가 도시국가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목격되면, 그 즉시 도시의 남자들에게 무기를 들라고 알려서 적에 맞서고 약탈을 중단시키기 위해 진군할 수 있었다."(398)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결집된 민중의 강한 세력만이 아니었다. 이웃 도시국가에서 민중 기반의 대규모 보병대가 등장하자, 귀족이 이끄는 군소 정치체들은 이런저런 형태로 민중을 포섭해 군대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그래서 불가피하게도 정치적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국가 간 분쟁에서 생존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도시국가 형성은 다시 자기강화와 확장─'전염'─과정을 걸으면서 정치체 내부와 정치체 간의 상호작용을 일으켰다."(402)


"로마 체제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특이한 요소는 그것이 창조해낸 거대한 시민층이었다." "국내 시민 인력의 규모와 패권으로 동원할 수 있는 종속적 '동맹'의 인구 규모에는 뚜렷한 관계가 있으므로, 로마의 방대한 시민층은 거꾸로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패권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번 인력을 동원할 때 이처럼 인력 가운데 상당하지만 한정된 일부만 동원함으로써 로마는 몇 년씩이고 전쟁을 지속하면서 적을 지치게 만들어 쓰러뜨릴 수 있었고, 군사적 역전을 당하거나 재난이 닥쳤을 때마다 새로 모병할 수 있는 엄청난 인력 자원에 늘 의존할 수 있었다."(419-20) "오랜 군사작전, 장기간의 포위, 수비대 복무가 표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큰 도시국가는 복잡해진 투입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채택했다. 병참, 재정, 조직─모두 도시국가의 전성기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초보적이었거나 또는 시민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책임졌던─은 이제 훨씬 복잡한 국가의 일이 되었다."(423)


"말의 가슴과 어깨에 거는 마구가 동물의 목과 복부에 걸어서 숨통을 조이는 단점이 있던 고대의 비효율적인 마구를 대체하며 제1천년기 동안 유라시아를 통해 퍼져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수레와 쟁기를 끄는 일은 황소의 몫이었다. 게다가 말을 먹이는 것은 전문적이고 값비싼 일이었다. 따라서 정주 사회에서 말은 엘리트의 소유물이었다. 말은 실용적이기보다 비싸고 사치스러운 소유물이었고, 그런 이유로 위신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435) "마력馬力은 나머지 사람들과 비교해 귀족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귀족을 정예 기마병력으로 바꿈으로써, 국가 중앙권위와의 관계에서도 엘리트층의 입지를 강화했다." "중앙 관료제화가 반대쪽 극단으로 흐를 경우 지역 지도자들이 권력을 위임받고 전유하여 결국 권력이 조각나기도 했고, 더 나아가 중앙의 권위가 사실상 무너지기도 했다. 마력은 이런 중앙집중화-파편화 긴장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438)


"봉건제와 관련해 무엇보다 유의할 점은 봉건제가 한결같이 국가 구조의 산물이었다는 것, 그리고 국가의 완전한 해체로 귀결되지 않는 한 분절적 형태로나마 국가 구조의 한 형태로 남았다는 것이다. 봉건제는 완전히 지역화된, 친족에 기반하는 족장사회와는 융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봉건제는 큰 국가들에서 특징적으로 진화했다." "봉건제는 중앙권위로부터 토지 수여를 바탕으로 존속하는 기마전사들과 영주들 쪽으로 지역-지방의 정치권력과 사법권력을 끌어당기는 중력이었다." "여기서 핵심적이지만 충분히 인정되지 않는 요인은 모든 전근대 국가의 예산에서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항목, 흔히 예산을 대부분 차지한 항목이 군사비였으며 기병이 가장 비싼 병과였다는 것이다. 기병이 가장 중요했던 곳에서는 국가의 운영과 기병을 육성하고 유지하는 능력이 거의 같은 의미일 정도였다. 이 엄청난 과제가 봉건제를 낳았다."(440-1)


# 봉건제 등장의 세 가지 요건

1. 말을 소유한 사회

2. 전쟁 도구로서 말을 선호하는 환경

3. 소규모 농업경제 국가가 값비싼 기마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귀족층에게 군역의 대가로 토지를 수여하고 조세 대신 지대를 받는 상황

※ 주왕조 시대 중국, 중세 유럽, 중세 일본


"봉건제의 쇠퇴를 초래한 것은 외부 요인이나 내부 요인 때문에 영주-장원 '생산양식' 안에서 발생한 특수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도시생활양식이라는 하부구조의 발달이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봉건제가 절정에 이르는 동안, 도시가 성장하고 교역이 되살아나면서 통치자들은 수입원을 얻고 행정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는 영주들이, 중세 후기에는 군주들이 근위대(갈수록 봉급을 바탕으로 유지되었다)를 확대하고, 외국 용병을 고용하고, 현금 지급을 바탕으로 봉건적 소집군을 더 오랫동안 유지하고, 자유민들로 이루어진 민중 보병대를 도시와 시골에서 되살릴 수 있었다." "그들은 봉건화만큼이나 자기강화적인 과정을 따라 봉건 귀족을 상대로 꾸준히 권력을 키웠다. 그 결과 13세기부터 유럽의 체제는 더는 '순수' 봉건제 모델에 가깝지 않게 되었고 '준봉건제' 모델이나 국가적 영역통일체corporate state 모델로 전환되었다."(461)


말타기는 가축 떼를 데리고 목초지와 물을 찾아 훨씬 먼 거리를 이동해서 스텝지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었다. "그 결과 스텝지대의 강변과 오아시스 주변에서 반정주-반목축 생활방식에 따라 거주한 인구와 구분되는, 줄곧 이동하며 생활한 완전 유목민 집단이 등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집단이 농사를 짓는 이웃들과 관계를 완전히 끊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전 유목민은 처음부터 농산물과 기타 물품을 얻기 위해 정주 인구와의 교환을 필요로 하는 공생적 존재였다." "말타기에는 전문적 장비가 필요하지 않았고, 목축-유목 경제와 생활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바로 그 말을 비할 바 없는 전쟁 수단으로 겸용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승용마乘用馬는 스텝지대와 농경지대 간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광대한 목초지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말을 다수 이용할 수 있었고, 사실상 부족의 성인 남성 전원을 포함하는 기마 군단을 창설할 수 있었다."(495-6)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 닫혀 있고 바위투성이인 서유럽의 지형에는 유목민의 말과 가축을 먹일 넓고 탁 트인 목초지, 즉 그들의 특수한 존속양식과 생활방식의 토대가 없었다. 스텝지대 유목민이 이주할 수 있는 최서단 경계는 언제나 헝가리 평원이었고, 여기서 그들은 중부유럽과 서유럽을 습격해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게다가 유목민 부족들은 정주형에 가까워질수록 전리품을 운반하기 위해 수레와 달구지에 더욱 의존했고, 그 결과 약탈 역량은 극대화되었지만 기동성은 떨어졌거니와, 적군에 가로막혀 꼼짝 못할 위험성이 커졌다. 다시 이 과정은 아틸라의 훈족, 마자르족, 크림반도의 타타르족에게 차례로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군사적 우위를 깨뜨렸다. 오스만 튀르크족은 아나톨리아 서부와 발칸 반도의 정주 사회들을 점점 더 직접 통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보병대와 공성병기를 만들어내는 한편 부족과 유목생활의 유산을 대부분 포기했다."(511)


"서양에서는 기병 역시 동양의 경무장 사격 전술과 반대로 중무장 충격 전술로 기울었는데, 그 이유는 앞서 보병과 관련하여 언급한 이유와 거의 같았다. 닫힌 지형과 가까운 군사작전 거리, 고르게 분포한 정착 거주지를 포함하는 반면 이동생활 인구와 넓은 개활지가 없는 조건에서는 치고 빠지기, 사격, 경기병 전술을 실행할 여지가 훨씬 적었다. 이런 조건에서 중무장한 충격기병 병력은 더 가볍게 무장한 적군을 훨씬 쉽게 따라잡고 격파할 수 있었다."(520) "동양에도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귀족 사이에서 육성된 완전무장 창기병(카타프락트cataphract) 같은 중무장 충격기병이 있었고, 서양에도 사격 경기병이 있었다. 그러나 상이한 조건으로 인해 서양에서는 중세의 기사騎士로 정점을 찍은 중무장 충격기병이 우세했다. 그렇다 해도 중무장 충격기병은 유럽사의 대부분 동안 중무장 충격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경기병, 그중에서도 특히 궁기병이 우위를 점했다."(523)


"근대성은 기술과 사회조직의 점진적 진화를 토대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문턱을 넘어가기도 했다.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이루어진 농경으로의 이행/혁명과 마찬가지로, 느리고 누적적인 과정이 도약 지점에 도달하자 전면적인 전환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부와 권력은 상호작용을 낳았는데 "첫째로, 이제 생산능력과 군사력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1500년 이후부터 "군사적 하드웨어─특히 화기─가 전쟁의 성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적 하드웨어를 생산하려면 발달한 기술적 하부구조가,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면 고도로 조직된 사회정치적 하부구조가 필요하게 되었다." "근대적 형태를 갖춘 부와 권력의 둘째 측면은 둘 다 극히 효과적인 복제기로서 모든 것을 정복하며 끊임없이 퍼져나갔다."(582-4)


"커다란 정치 블록은 경제적 복잡성과 기술 혁신을 촉진하는 등 의심할 나위 없이 몇 가지 이점이 있었지만, 이런 이점은 독점적·전제적인 중앙권위와 숨 막힐 듯한 제국 행정으로 인해 상쇄되었다. 예를 들어 제정 중국의 눈부신 성취와 지속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맹렬히 경쟁하는 '전국戰國'들로 국토가 쪼개졌던 시기(기원전 5세기부터 221년까지)에 중국의 문화적 유산이 대부분 형성되고 진화와 기술 혁신이 가장 빠르게 이루어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분열된데다가 다양한 국가들 사이에 권력이 더 고르게 분산되었던 까닭에 혁신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기가 더 어려웠다. 더욱이 정치체들 간의 격렬한 정치적·경제적 경쟁이 만연한 유럽의 체제에서 혁신을 받아들인 정치체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반면 혁신을 억압한 정치체는 불리한 위치에 설 공산이 컸다." 상대적 비효율성을 용납하지 않는 "이런 경쟁은 진화의 속도를 크게 높인 요인이었다."(588)


"1980년대 이래로 종족과 민족주의는 순전히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대다수 일족들이 받아들이는 깊은 정서─그들 각자가 공통 혈통이나 조상을 공유한다는─순전히 신화라는 주장이 유행해왔다." 그러나 유전적 현상과 문화적 현상을 이분법으로 나누려는 시도와는 달리 "대다수 종족들은 근대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자기 주위로 형성된 근대 민족주의의 핵을 이루었다. 별개 집단들이 뭉쳐서 형성된 종족이라 해도(대개 종족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충분한 시간 동안 두루 통혼하고 나면 새로운 유전적 표지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여기에 문화적 특성이 더해지면서, "민족적 공동체들은 유전적으로 연관이 있든 없든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특성 때문에 서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기능한다. 집단정체성을 형성하는 이런 복잡한 정신적 메커니즘의 원천과 작동을 외면할 경우, 인류 역사를 형성하는 가장 강한 유대의 일부를 필연적으로 오해하게 된다."(560-1)


"민족-영역 국가의 성장에 관한 학자들의 인식을 왜곡한 유럽 특유의 또다른 현상은 봉건제다. 앞서 지적한 대로 서유럽·중부유럽·북유럽의 민족-영역 국가들은 제1천년기 후반에 이 지역이 문명권으로 들어서자마자 곳곳에서 등장했지만, 중기병에 대한 선호와 부실한 국가 하부구조가 결합한 결과, 훗날 이들 국가의 중앙 정치권위는 봉건적 해체로 귀결되었다. 이처럼 중앙권위의 공백기가 있었던 까닭에 학자들은 1200년경부터 국왕의 권력이 부활하고 서로 비슷하게 기능하는 국가들이 등장한 현상을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의 시작으로 해석했고, 13세기에 민족-영토 국가가 탄생했다고 추정했다. 민족-영토 국가가 실은 유럽에서 나타난 새로운 발전이 아니라 1200년경 유럽에서 재등장한 발전이었음을 감안하면, 민족-영토 국가가 진화한 원인으로 훗날 나타난 근대성의 새로운 요소들, 이를테면 베이컨이 말한 세 가지(화약, 대양 항해, 인쇄기)를 꼽아서는 안 된다."(592)


수백 년간 진행된 '군사혁명'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인 육군 규모의 확대에 이바지한 요소는 "보병의 부활과 급증이었다. 대다수 육군들의 절대적 규모가 커진 것은 비용이 기병의 절반 밖에 들지 않는 보병 때문이었다. 이 과정 역시 1500년경에야 널리 쓰인 보병 화기가 사용되기 한참 전부터, 그런 화기와 무관하게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점을 입증하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14세기와 15세기에 기병대에 맞서 압승을 거둔 잉글랜드의 장궁 대형과 스위스의 장창 대형이었다." 보병의 확대를 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군사혁명'의 또다른 주요 요소인 "화기 방어시설의 도래다. 화기가 야전뿐 아니라 포위전의 양상까지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의 예리코부터 역사시대 내내, 방어시설(기본 건축술은 놀라울 정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의 정점은 적의 습격을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높은 장막벽curtain wall이었다. 화력은 이런 유형의 방어시설에 종지부를 찍었다."(597-8)


'군사혁명'의 주된 비용은 병력에 지급하는 급료와 물품 비용이었다. "분명히 높은 수준의 분쟁은 전쟁에 동원하고 할당하는 자원을 늘린다. 그러나 중요한 이권, 특히 가장 중요한 이권을 둘러싼 투쟁에 휘말리거나 군비 경쟁에 갇혔을 때, 적대하는 세력들은 대체로 무력을 최대한 동원하려 분투하고 으레 자기 역량의 한계를 넓힌다. 서로를 능가해야 하는 그들의 상호적 '필요성'은 방어시설이 중요한 역할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더 많은 투자, 무엇보다 더 큰 군대에 대한 투자로 나타난다. 역사를 통틀어 분쟁 수준이 높을 때면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점에서 근대 초기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필요성은 무한할지라도 자원은 그렇지가 않다. 근대 초기 유럽 육·해군의 규모와 전비가 꾸준히 증대했다 해도, 그것은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강국들이 이전보다 자원을 더 많이 동원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군비 경쟁이 단계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611-2)


국가 통치자들은 "13세기부터 전쟁에 자금을 대기 위해 신용거래에 의존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원천이 있었다. 하나는 유럽의 커다란 무역 도시들에 축적된 막대한 자본이었다. 국가 통치자들은 전제 권력이 없었고 여하튼 무역과 은행업 중심지 일부는 그들의 국경 바깥에 있었으므로,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금융 시장에 의존했다." 그러나 전비가 급증하면서 국가의 채무 불이행 위험이 높아지자 융자는 예전보다 드물어졌다. 이를 보완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국가는 주로 민간과 군대의 직위를 팔아서 이 자원을 이용했다. 현금을 투자해 직위를 구매한 개인들은 다년간 때마다 국가 급여를 받는 방법뿐 아니라 이익을 얻을 기회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를테면 국가가 연대와 중대 병사들에게 급여와 물품을 지급하라며 할당한 금액과 같은 공금을 횡령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투자금을 환수했다. 여기서도 신용거래라는 손쉬운 유혹은 비용의 악순환을 낳고 비효율성을 배가했다."(632-4)


"그러나 유럽의 일부 국가 엘리트층에게 부를 얻는 방안으로 상업적 폭리 획득이 강제 징수보다 갈수록 유망해졌다 해도, 그리고 국가 리바이어던이 전 영역에서 평화로운 자유무역을 보호할 수 있었다 해도,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줄곧 폭력 분쟁이 경제적 경쟁과 마구 뒤섞였다. 역사를 통틀어, 무역상들은 그들이 충분히 강하기만 하면 자원 및 시장을 공개 경쟁하여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대신 물리력으로 독점하려고 분투했다. 그렇지만 이제 게임은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경쟁자들은 규제와 관세 때문에 타국의 국내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으며, 그들에게 상업적 양보를 강요하고 그들을 약화시키고 식민지와 외국시장에서 몰아내려는 의도로 벌어지는 전쟁의 압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중상주의라는 딱지가 붙은 이 상업-군사 복합체는 17세기와 18세기에 대서양과 북해, 발트 해 연안에 자리잡은 강국들 사이에 끊임없이 벌어진 전쟁 이면에서 작동한 주요 추동력이었다."(638-9)


"전쟁을 위해 이처럼 막대한 자본 축적을 이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고도로 전개된 적자재정 정책이었다. 몰수나 과세와 달리 이 방법은 부자와 사회 유력자들이 자본을 감추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몰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투자한 민간 자본을 국가가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외국의 자원까지 유인했다. 그렇지만 쉽게 빌린 돈을 지금 이용하려면 미래를 저당잡혀야만 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 신중한 투자였고, '자본 차입'에 기초한 모든 투자와 마찬가지로 고위험-고수익 투자였다. 신용 대부를 받으려는 다윈주의적 경쟁이 점점 더 강국들의 군비 경쟁을 지배했다. 모든 강국이 한계와 그 너머까지 돈을 빌려 막대한 빚을 졌다." "영국이 '자본 차입' 경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유일한 이유는 승리를 거두어 식민 제국과 국제적 무역을 주도하는 위치를 차지했고, 이로써 경제가 크게 팽창하는 시기에 국내 경제 또한 부양했기 때문이다."(639-40)


"새로운 의회 체제이자 무역 제국인 잉글랜드의 전쟁을 외국 용병들과 함께 수행할 토착민 직업군대는 17세기 후반에 생겨났다. 이들은 군사 원정을 수행하는 정규군이기도 했다. 그러나 젠트리 엘리트층을 국가에 끌어들인 의회제 잉글랜드는 여전히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 민중이 선거권 없이 억압당하는 사회였다. 그 결과, 민족 감정과 자긍심이 결코 없진 않았음에도 사회적으로 하층민이고 풀이 죽은 정규병들─이들과 함께 나폴레옹을 물리친 웰링턴 공은 무례하게도 이들을 가리켜 '인간 쓰레기'라고 말했다─은 싸우려는 의욕이 별로 없었다. 구체제의 다른 군대들과 마찬가지로, 이 정규병들을 군대와 전선에 묶어두기 위해 엄한 규율과 체형이 마련되었다." "근대 초기 유럽에서 국군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1630년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와 함께 독일에 상륙한 스웨덴군이었다." "스웨덴은 봉건제가 거의 자리잡지 못한 나라이자 국회Riksdag에 농민 대표가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648-9)


# 국민군은 미국(대륙군과 민병대 조합)을 거쳐 혁명기 프랑스와 나폴레옹 제국(대규모 국민개병제)에서 절정에 이른다. 


"산업-기술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는 기술 혁신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까닭에, 한 세대에서 최고의 무력이라 해도 다음 세대의 중무장한 병력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란 불가능하게 되었다."(684) "그렇지만 이 모든 혁명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특히 육지에서 더욱 그랬다. 경제 분야에서 그랬듯 군사 분야에서도, 증기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활동 영역은 육체를 필요로 했으며 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육군은 전장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전신을 통해 쉽게 통제받으면서도, 일단 전장에 도착하고 나면 첨단 통신이라는 정점에서 나폴레옹 시대로까지 추락했다. 육군의 군사작전과 전술적 기동성은 여전히 인간 근육의 제약을 받았고, 육군의 포와 보급품은 말이 끌었다. 제1차세계대전 기간에 강대국들의 육군에는 말이 수만, 수십만 마리씩 있었다. 미리 전신선을 설치할 수 없는 야전에서 지휘와 통제는 걷거나 말을 타는 전령병을 이용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686)


"게다가 화력은 10배 이상 증대한 반면, 병사들은 개활 전장에서 산개하여 은폐하는 동안 강철 폭풍을 막아낼 방편으로 여전히 자기 피부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그 결과, 1차대전 기간에 서부 전선은 살인적인 교착 상태로 빠져들었다." 1880년대부터 일어난 2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지배한 것은 "화학 물질과 전력, 내연기관이었다. 화학산업은 새로운 폭발물들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고 오래지 않아 화학전을 야기했으며, 전기 또한 무선통신을 비롯한 다양한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내연기관이었다." 내연기관은 기계화된 공중전은 물론 "해전 일반에 혁명을 일으켰다. 전기를 이용하는 내연기관의 이중 추진 덕분에 1900년 최초로 운용 가능한 잠수함이 등장했고, 반면 포를 탑재한 전함은 항공기 출현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잠수함과 항공기 역시 1차대전 기간에 군사적 데뷔를 하여 2차대전 기간에는 해전을 완전히 지배했다."(686-8)


# 3차 산업혁명(정보혁명) : 전자공학 기술 적용(레이더)


19세기를 어지럽힌 강대국 간의 전쟁 원인은 무엇일까? "안보를 이유로 일어난 크림 전쟁(1854~56년)을 빼면, 이 전쟁들은 이탈리아의 통일로 귀결된 1859년 전쟁, 미국 남북 전쟁(1861~65년), 독일 통일 전쟁(1864년, 1866년, 1870~71년)이었다. 분명 이 전쟁들 모두 다양한 동기들로 인해 일어났지만, 가장 깊고 가장 격앙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민족 통일, 민족 독립, 민족 자결, 민족 정체성 같은 쟁점이었다. 유럽 전역의 일반적인 군사적 분쟁도 마찬가지였다. 폭력 분쟁이 빈발한 지역들의 특징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민족적 봉기가 되풀이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지역으로는 정복당해 분할된 폴란드, 외세의 지배를 받은 파편화된 이탈리아, 분열된 독일, 잠시 네덜란드에 속했던 훗날 벨기에의 영토, 억압당한 아일랜드,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된 헝가리,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발칸 반도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을 야기하는 원인은 "경제가 전부는 아니었다."(695)


# 민족주의가 근대에 와서 널리 퍼지게 된 요인

1. 철도와 통신 기술이 발달하여 지리적, 시간적 친연성이 강화되면서 언어와 생활양식 등이 융화됨

2. 공동사회가 이익사회(를 넘어 대중사회)로 전환되면서 친족 간의 유대감은 약화되고 민족 개념이 그 자리를 대체

3. 국가 교육제도와 언론 매체, 징병제가 민족의 에토스를 촉진


특히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식민지 쟁탈전은 "영국이 방어를 위해 팽창하면서 다른 국가들의 '안보 딜레마'를 촉발하고, 이후로 더욱 팽창하면서 관련된 모든 국가에서 민족주의 추세를 강화하고 독점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기 시작한 사태였다. 자유무역을 하던 영국은 갈수록 공식 제국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기울었다. 공식 제국이 제한된 전략적 지역들에서 안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필요했고, 다른 보호주의 열강이 저마다 공식 제국을 팽창하기 시작하자 더 일반적인 선제 정책으로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국은 자유무역을 지키기 위해 공식 제국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보호주의 열강에게 토지 강탈의 선제적 측면은 분명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714) "바로 여기에 강대국들이 벌인 양차 대전의 씨앗이 있었다. 산업적-상업적 세계 경제가 개방되지 않고 분할될 것이라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압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717)


"좌파 계열이든 우파 계열이든 전체주의는 과거의 역사적 전제정들과 다른, 20세기 들어서야 등장할 수 있었던 명백히 새로운 유형의 체제였다. 전체주의는 19세기 말부터 당대인 누구나 자신의 시대를 규정하는 특징이라고 날카롭게 의식했던 발전,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발전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 발전이란 바로 대중사회의 등장이었다."(720) "어떤 요인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 우위를 선사했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어떤 강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미국의 현존이었다. 20세기 민주주의의 승리에 관한 연구들은 이 '미국 요인'을 대체로 간과했다. 달리 말해 미국이 없었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20세기의 대규모 투쟁들에서 십중팔구 패했을 것이다. 이 생각으로 정신을 차리고 나면, 대규모 투쟁들에 의해 창출된 세계를 단선적 발전 이론들과 휘그적 역사관 및 진보관을 믿을 때보다 훨씬 더 우연적인─그리고 허술한─산물로 바라보게 된다."(731)


"19세기의 어떤 국가가 자유주의 또는 민주주의 국가인지 결정하는 작업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가령, 노예제가 있었던 남북 전쟁 이전 미국을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국가로 간주할 수 있는가? 19세기에 대다수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선거권은 보통선거권이 아니었다. 이들 국가는 노예와 여성을 선거에서 배제했을뿐더러 재산과 교육을 기준으로 투표하고 선출될 권리를 제한했고, 이 기준을 단계적으로 조금씩만 완화했다."(745) "몇몇 경우, 전쟁을 피하도록 결정하기까지 더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것은 서로 공유하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통적인 세력 균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 내내 체제가 비슷한 국가들은 서로 곧잘 싸웠다. 그렇지만 때로는 분쟁 상황에서 국내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경우에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비슷한 국가들은 중대한 사안 때문에, 그리고 국내의 적들에 맞서 서로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대 진영에 대항해 동맹을 맺곤 했다.(747-8)


"페인 및 칸트의 논리와 반대로 고대 민주정 아테네에서 민중은 줄곧 가장 호전적인 요소였다. 정치이론가들은 오히려 민주정들과 공화정들이 평화롭기보다 호전적이었고 흄의 말마따나 '경솔한 결기imprudent vehemence'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대중은 고전 고대 이래로 위기시에 변덕스럽고 무모하다는 평판만 얻었던 것이 아니다. 민족의 명예와 영광 같은 문제로 그들을 쉽고도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드러났다. 이 경향은 프랑스혁명기에 전쟁을 치르는 동안 다시 나타났으며, 훗날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3세, 비스마르크를 비롯해 혁명적 지도자들과 보수적 지도자들 모두 이 경향에 의존했다." "자유주의 국가 영국을 크림 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주로 대중의 압력이었다. 쇼비니즘적이고 호전적인 대중의 광란을 뜻하는 '징고이즘jingoism'이라는 말 자체가 민주화를 강화하고 있던 19세기 후반의 영국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751-2)


"그렇다면 아테네와 로마의 시민들은 어째서 거듭 전쟁에 찬성했고 손실과 파괴, 궁핍, 전쟁 피로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수 년간 참혹한 지구전을 감내했는가? 근대 사회들보다 아테네와 로마가 덜 민주주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 나라가 살아간 농업 시대에는 전쟁을 통해 엄청난 물질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 사이의 균형은 산업화가 도래하고 나서야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부는 더이상 한정되지 않았고 되레 어리둥절할 정도로 급증했다. 농업 생산, 즉 토지는 더이상 부의 주요 원천이 아니었으며 국내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한 산업 생산에 의해, 그리고 훗날 서비스-정보 경제─이 경제에서는 원재료의 중요성이 급감했다─에 의해 대체되었다. 또한 생산이 다른 무엇보다 시장을 지향하게 되면서 교환 이익이 증가하고 상호의존도가 높아졌다. 예전과 달리 이제 적의 경제적 파탄은 자국의 번영에 해가 되었다."(760-1)


# 그 밖의 독립적인 연관 요인들

1. 부富와 안락함

2. 대도시의 서비스 사회 (육체노동 감소)

3. 성 혁명 (젊은 미혼 남성의 공격성 해소 방편)

4. 젊은 남성 수의 감소

5. 가족당 자녀 수의 감소? (자녀 생명에 더 민감)

6. 여성의 선거권

7. 핵무기


세계의 모든 국가가 풍족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고 집단 안보가 대체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전략적 정책은 전형적으로 한 가지 패턴을 따랐다. 고립주의에서 유화로, 유화에서 봉쇄로, 봉쇄에서 냉전으로, 냉전에서 제한전쟁으로, 그리고 피치 못할 경우에만 제한전쟁에서 전면전쟁으로 한 단계식 대응 수준을 높이는 패턴이었다."(790) 자유주의 국가들이 탈식민 전쟁에 휘말리는 동안 "비자유주의 열강은 토착민을 억압하는 제국 전쟁에 덜 관여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아주 효과적으로 억압한 까닭에 저항이 반란으로 확대되지 못했고 또 반란이 불타오르기 전에 진압했기 때문이다. 호전성에 관한 연구들은 비민주주의 제국의 평화가 성공적인 억압과 테러에 달려 있었음을 잊곤 한다. 과거 독일과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패권 영역은 억압과 테러로 유지되었다. 이는 '짖지 않은 개'처럼 자칫 간과하기 쉽지만 중요한 측면이다."(808)


"반란군들이 얻은 불굴에 가까운 이미지는 대개 변변찮았던 그들의 군사적 효력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들이 적의 정규군을 무력으로 물리친 경우는 아주 드물었고, 적에게 입히는 손실보다 그들 자신이 입는 손실이 훨씬 컸다." "사실 양차 대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소모전을 전략으로 선택한 쪽은 민주주의 국가들이었고, 이에 반해 독일과 일본은 번개 같은 군사작전으로 승패를 빠르게 판가름하고자 했다." "메롬이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한참 뒤진 사회들에서 전개된 장기간의 반란 진압전에서 패배하는 경향을 보였다. 민간인 인구에 대한 폭력을 스스로 제한한 탓에, 대개 성공을 거두었던 군사작전도 결국엔 무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국민들 상당수(의 자유주의자)가 깨닫고 나서야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전쟁 지속을 포기했다."(814)


19세기 후반에는 테러가 한층 효율적인 방법으로 등장한다. "고성능 폭탄과 자동화기는 개인과 소집단에게 그들의 수에 비해 손상을 많이 입히는 능력을 주었다. 또한 열차와 그 이후의 자동차는 그들에게 국경을 가로지르는 기동력을 주었다. 그리고 전보와 대중 신문은 그들의 활동을 전국에 알리고 반향을 일으킴으로써 어쨌거나 아주 제한된 행위인 공개적 '테러'의 효과를 엄청나게 확대했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정치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것이 19세기 후반에 러시아나 여타 유럽에서 등장한 무정부주의 테러리즘과 20세기에 등장한 반식민주의 테러의 물질적 토대였다. 테러에 휘둘리기 제일 쉬웠던 쪽은 이 경우에도 자유주의 국가들과 구식 권위주의 국가들이었다."(822-3)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낙후된 지역에서 횡행하는 "대량살상무기 확산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비공식 제국주의', 비개입 공존, 직접 경제 원조, 유화, 봉쇄 등 서로를 강화하는 접근법들을 결합하는 편을 선호한다."(838)


그렇지만 민주주의 평화론은 몇 가지 중대 요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 윌슨과 그의 후계자들이 군사 개입─멕시코, 도미니카공화국, 아이티,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과테말라에서─을 비롯한 개입을 통해 민주주의를 수립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민주주의는 모두가 바라는 것도, 무조건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화는 단계적인 과정일 것이며, 지나치게 압박할 경우 적정한 다원성을 근근이 유지하며 근대화중인 국가-사회들의 안정을 위협해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대체로 민주주의의 채택은 한낱 의지의 행위가 아니라 경제·사회 근대화와 병행하여 전국 규모로 진행된 일이었다. 경제 근대화, 사회 전환, 민주화는 줄곧 긴밀히 얽혀 있었다." 둘째로 "민주주의 평화 현상은 자유화, 민주화, 경제 발전의 초기 단계에 훨씬 약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아랍과 무슬림 국가들의 민주화로 인해 이들 사회의 호전성이 감소할 것인지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841-3)


종족과 민족을 적절히 통제하고 번영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자유민주주의적 처방전은 그 효과가 제한적이다. "종족들이 분열된 나라는 민주화를 통해 종족들에게 자결권이라는 선택지를 주고 나면 쪼개지는 경향이 있다. 종족성과 민족주의는 19세기와 마찬가지로 20세기에도 분쟁과 전쟁의 주된 원인이었다."(852)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와 20세기에 강대국들이 서로 싸운 햇수는 그 이전 세기들에 비하면 3분이 1 수준이었다. 전쟁을 저지한 주된 요인은 전비가 아니라(상대적인 인구와 부를 고려하면 전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맬서스의 덫이 부서지고 나자 극적으로 증가한 평화의 이익이었다. 이처럼 평화에 따르는 이익이 늘어남에 따라 시장을 지향하며 경제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독립성을 높여가던, 산업화중이거나 산업화된 사회들(체제와 무관하게)에 유리한 쪽으로 전쟁과 평화의 전반적 균형이 기울어졌고, 부의 획득이 더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게 되었다."(849)


국가 전쟁이 특히 치명적·파괴적이라는 그릇된 인상과 달리 인간 싸움에 따른 사망자 수는 국가 치하에서 줄어들었다. "첫째, 국가 치하에서 인간의 치명적 폭력은 국내와 국외에서 확연히 구분되었으며, 국가 영역 안에서 비국가 폭력은 불법화되고 국가의 권위에 의해 대부분 제압되었다. 그래도 환상은 금물이다. 사회 안에서 폭력적 죽음의 비율이 낮아진 까닭은 대개 폭력이 승리했기 때문이지 어떤 평화로운 합의 때문이 아니었다." 무력에 의해 창출되고 유지된 국가사회들은 비록 무력의 산물이기는 해도 "비교적 평화로운 민간생활, 인구가 조밀하고 복잡하고 질서 잡힌 사회, 분업이 발달한 규모의 경제, 그리고 문자문명에 필수인 전제조건을 만들어냈다." "선진 산업-기술-자유주의 사회에서 전쟁의 역할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전쟁은 국가와 문명의 성장에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기도 했으며 놀라운 문화적 도약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858-9)


"전쟁의 근원을 개인이나 국가, 국제 체제의 본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이 세 '수준들' 각각에 있는 전쟁의 원인은 불가피하지만 불충분한 원인이며, 전체를 조각들로 쪼개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폭력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는─뿐 아니라 그 결과로 나타나는 권력 추구, '안보 딜레마'를 부채질하는 상호 불안 상태까지도 모두 인간 본성에 따라 주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조되는 것은 인간들이 지질학적 시간 동안 필요와 욕구, 권력 추구, 상호 불안이 말 그대로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던 생존 투쟁 과정에서 진화의 압력을 강하게 받으며 형성되어왔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전쟁은 인간 동기체계 전반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 욕구의 대상들과 동일한 대상들을 얻기 위해 수행해온 것이다. 전쟁이란 정치의 연속이라는 유명한 표현대로, 정치는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들의 목적들과 동일한 목적들을 국내 '수준'과 국가 간 '수준'에서 성취하려는 활동이다."(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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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04
리처드 D. 앨틱 지음, 이미애 옮김 / 아카넷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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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빅토리아 시대 : 1830년이나 1832년(제1차 선거법 개정안 통과) 혹은 1837년(빅토리아 여왕 즉위)에서 1901년(빅토리아 여왕 서거)까지를 가리킨다.


"1830년대의 영국에서 조지 4세(웨일스 공) 섭정 시대의 오만한 사치는 새로운 산업화로 초래된 불결하고 비참한 상황과 나란히 존재했다." "디즈레일리의 소설 <무녀>(1845)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여왕의 나라,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나라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국가"가 실제로는 "두 나라이고, 그 두 나라는 교섭과 공감이 전혀 없어서 다른 지역에 거주하거나 혹은 다른 혹성에 살고 있듯이 서로의 습관과 사고, 감정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른 교육을 받으며 양육되고 다른 음식을 먹고 서로 다른 관습에 지배되고 동일한 법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 그것은 바로 부자와 빈자이다."라고 묘사했다. 그 둘 사이의 간극은 해마다 넓어져갔고, 그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당대의 큰 난제였다."(38-9) 여기서 등장한 것이 이성의 시대를 대변하는 합리주의였으며, 벤담주의자과 계몽적 합리주의자들은 새로운 권위와 막강한 실제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두 개로 나뉜 나라 중에서 영광의 시대를 대변한 것은 1851년에 개최된 수정궁의 축전(제1차 세계박람회)이었다. 수정궁 축전은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 혹은 역사학자 W. L. 번이 표현했듯이 '평형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했다. 그 시대는 15년이나 20년에 지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우리가 빅토리아 시대의 이미지를 마음에 떠올릴 때 가장 쉽게 연상하는 시절이고, 빅토리아 시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적용될 수 있는 상투적인 문구를 적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였다." "굶주린 40년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온 후에 경제는 큰 도약을 이루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는 영국이 과거에 그 비슷한 풍요도 누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린 시절이었다. 대영제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고, 세계의 선두에 선 은행이자 선적회사였고 제품 공급자였으며, 해군을 통해 상선들의 항로에서 평화를 유지했다."(40-1)


과거 영국에서 "인쇄물과 정치활동의 관계는 비교적 소수에 불과한 권력자들을 상대로 저술된 논쟁적인 팸플릿과 서적을 통해서 주로 형성되어 왔었다. 변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동력은 "공적 의견"─실은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표명하는 정선된 집단의 의견에 불과한─의 지지를 받은 사적인 세력이었다. 그러나 토리당의 지주들과 교회의 저항을 극복하며 1832년에 통과된 선거법 개정법안은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중산층의 대변인이었던 휘그당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것은 신문과 잡지가 유통시키고 형성한, 전례 없이 엄청난 규모의 여론이었다."(119) "1832년과 다시 (곡물법 폐지에 성공한) 1846년에 기치를 올린 주장, 즉 "민중이 승리했다"는 주장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집합의지'라고 부른 것의 유효성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인쇄물이 그 의지를 표현하는 주요한 도구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121)


빅토리아 시대의 출판물이 보여주는 "다방면에 걸친 다양한 목소리 덕분에, 서로 다른 계층들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서로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출판물들이 논쟁의 도가니를 계속 끓어오르게 하는 한, 국민의 마음은 침체될 수 없었다. 또한 동시에 이 출판물들이 해를 끼치지 않고 계급적 증오심과 잠재적으로 위험한 의견 차이를 터뜨려놓을 수 있는 안전밸브가 되었기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계급투쟁을 피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신문과 잡지가 설교단이나 대포보다 더 강력하다고 믿었고, 이치에 맞는 인쇄된 활자로 인해서 병든 사회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은 손상되지 않은 온전한 형태로 번영을 누리면서 20세기에 들어섰고, 그 마음이 활력적이며 그 자유가 축소되지 않았으므로, 출판에 대한 믿음은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니었다."(124)


당대의 번영을 상징하는 철도와 도시는 "문명의 최고의 승리이자 동시에 가장 큰 재앙을 불러온 문명의 과오였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든지 간에 도시는 압도적이었다. 젊은 시절의 디킨스와 여러 해 후의 헨리 제임스 같은 사람들은 도시가 복잡하고 대조적인 광경들과 사람들로 활기를 돋워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도시의 만화경 같은 움직임, 끊임없이 들떠 있는 분위기, 부수는 사람과 건설하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변화들, 곧 영국에서 오랫동안 익숙했던 변화와 달리 규칙적으로 순환하거나 반복되지 않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 광경이 매혹을 느끼게 했다면, 그것은 또한 소름이 돋아나게도 했다. 도시의 밀도와 확장은 속박감, 무기력증, 폐소공포증과 같은 감정을 일으켰다. 도시의 꼴사나운 모양새가 그 장엄함을 무색하게 만들었고, 대다수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은 소수의 사치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132)


프랑스 혁명 이후로 페인 같은 급진파들을 선두로 평민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무제한적인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이 큰 소리로 외쳤지만, 노동자들 대다수는 아직 정치권력이라는 유혹적인 환영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소음이고, 이 소음은 그것을 들은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많은 중도파의 가슴에도 두려움을 일으켰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자코뱅주의와 동일시되었고, 영국이 처음에는 혁명을 치르고 있는 프랑스와, 나중에는 프랑스 제국과 몇 십 년간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실로 역모의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해협 너머에서 일어난 격동적인 이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슬로건을 퍼뜨리는 선동가들이 대중을 일깨우면 내란이 일어날 수 있고 심지어 무정부 상태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140-1)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는 1860년대 말의 어딘가에서 막을 내렸고, 1870년대 중반 이후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빅토리아 시대 중반의 황금기를 후기와 구분하는 한 해를 꼽는다면, 의심할 바 없이 제2차 선거법 개정안으로 도시 노동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어 유권자의 수가 두 배로 확대된 1867년일 것이다. 그 법안으로 말미암아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지난 수십 년간 서서히 쌓여왔지만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으려 했던 논쟁거리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제 평민이 점유하게 된 권력이 영국의 정치구조 및 그보다 더욱 중요한 영국의 문화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지난 몇 십 년간 중산층은 영국 사회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해왔다. 이제는 육체노동자의 차례였다. 민주주의의 도래를 몹시 한탄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떻든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42)


"제1차 선거법 개정(1832)은 영국과 웨일스의 유권자 수를 43만 5000명에서 65만 2000명으로 늘렸고 대략 50퍼센트가 증가한 것이지만 이는 성인 남자 여섯 명 중에서 아직 다섯 명이 투표권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147) "1867년에 중산층의 나머지 절반은 도시 노동자들 대다수와 더불어 투표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남자들이 선거인 명부에 첨가되었다. 이에 따라 의석을 재배분하면서 대도시들은 1832년에 얻지 못했던 의원 선출권을 갖게 되었다. 1884년의 세 번째 마지막 선거 개정안으로 투표권은 200만 농업 노동자들에게 확대되었고 그리하여 시골 지역에서 지방정부의 선거가 가능해졌다." 투표함의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 자유당 정부와 보수당 정부가 번갈아가며 정권을 잡은 것은 새로 투표권을 받은 노동자들이 옛 양당 체제 내에서 움직이는데 얼마간 만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156-7)


이처럼 영국에서 변화의 물결은 온전히 체제 내 개혁으로 이어졌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에드먼드 버크의 정치국가와 사회에 대한 유기체론적 사상을 물려받았다. 국가는 인위적인 수단과 혁신으로 방해되어서는 안 되는 내적 성장 원칙을 가진 유기체이며, 그와 마찬가지로 사회는 몇 백 년의 전통이 살아 있는 결정체로서 명확히 규정된 사회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거의 신비스러운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습된 특권에 기반을 둔 계층구조에 신성함이 있다는 믿음은 사회적 유동성이 증가하고 있는 시대에도 존속했고,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들만이 그런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 내내 하위 계층민들은 '윗사람들'에 대한 상당한 원한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며 중대한 시점에서는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뿌리박힌 관습적인 존중심 덕분에 이런 감정들이 계급 전쟁과 같은 것으로 점화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50-1)


"남자들의 세계가 유용성(utility)이라는 이념을 최고 가치로 삼고 그 이념에 지배되고 있었던 때에, 상류층 여성의 세계가 거의 모든 행위의 시금석으로 삼은 것은 무용성(uselessness)이었다."(94-5) 여자는 가정을 "헌신적으로 수호하는 여사제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관념으로 말미암아 여성의 농노 상태는 정당화되었다." 인습적으로 여자는 "연약한 존재여야 했고, 시골의 오솔길을 함께 걷거나 정찬 식탁으로 인도하는 신사의 팔에 늘 기대야 했다."(98) "19세기 마지막 몇 십 년까지 점잖은 집안 출신이지만 생활 형편이 어려운 여자들에게 개방된 거의 유일한 직업은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처럼) 학교 교사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제인 에어처럼) 개인 가정의 가정교사가 되는 일이었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이든 간에 일은 고되고 사회적 지위는 그녀가 받는 보수만큼이나 낮았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가정교사의 지위는 상급 하인들과 같은 수준이었다."(102)


물질주의적인 가치를 신봉하는 빅토리아인들은 현재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과거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향수'라는 단어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분위기에서는 혁신적인 것, 진보적인 것, 합리적인 것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들은 낭만적 기질과의 친화력으로 말미암아 오래된 것, 보수적인 것, 감정적인 것에 대한 공감도 똑같이 키워나갔다."(165) 빅토리아인들이 "중세 시대를 되풀이하여 환기한 데에는 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빅토리아 시대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안정되고 더욱 공정한 사회를 중세 시대에서 찾으려는 욕구, 의혹이 없는 더욱 통합된 지적 분위기를 찾으려는 욕구였다.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자신들의 방향성이 물리적으로나 지적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질수록 확고한 질서를 갈망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중세 시대는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그처럼 정신적으로 '굳은 땅'을 제공했다고 그들은 믿었다."(169-70)


"기계는 자연을 굴복시키고 이용한 그 시대의 두드러진 상징이었고, 그 비유를 자유로이 확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또한 사회적·정치적 혁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새로 발명된 기계가 아무리 독창적이거나 인상적이더라도 그 자체가 선善은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낳은 산물이었다." "이와 같은 근거에서, 더 사려 깊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변화(과정)와 향상(진보)의 동일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어떤 이들은 목적지와 무관하게 과정이 직선적으로 끝없이 전진한다는 가정을 거부했다. 대신에 그들은 다른 종류의 움직임들이 있다는 역사적 증거를 제시했는데,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진보의 개념을 지지하지 않았다."(177) 앨프레드 월리스의 이론과 찰스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이론(1858)으로 대표되는 지질학과 고생물학 연구의 진전 역시 "자신만만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줄 메시지를 전했다."(178)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이데올로기는 공리주의와 복음주의다. 이 중에서 공리주의는 "제러미 벤담 주위에 몰려든 교조적 열광자들이 주장한 철학의 순수한 형태를 가리킨다. 벤담주의자인 국회의원들과 그 추종자들의 신조를 가리키기 위해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또 다른 명칭은 '철학적 급진주의'이다." "이 명칭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중산층이 신봉한 사회-경제-정치 이데올로기와 일련의 가치들을 가리켰고, 또한 그 시대를 지배했으며 이 강령을 채택하여 행동과 목적, 습관과 편견을 정당화했던 기업가 정신을 가리킨다."(187)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개인의 행동이나 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요소는 '좋은' 결과가 '나쁜' 결과보다 우위라는 것이 입증되는가의 문제였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수학적 계산이었는데, 벤담의 용어로 말하자면 "행복을 가져오는 계산법" 혹은 "도덕적 산수"를 통해 얻어졌다."(191)


벤담주의는 뉴턴의 기계장치를 윤리학에 적용한 것이었다. "공리주의와 떼어낼 수 없었던 것은 고전주의 경제학─대체로 실용적인 목적에서 그 두 학파는 1830년경에 하나로 융합되었다─이었고, 혹은 공리주의의 또 다른 동의어로 종종 부정확하게 사용되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일반적인 명칭을 사용하자면 "정치경제학"이었다. 정치경제학자들, 즉 칼라일이 "음울한 과학"이라고 불렀던 학문을 연구한 사람들은 그 분야에도 물리학에서의 중력의 법칙이나 벤담주의 윤리학의 쾌락/고통의 원칙처럼 최고의 경제적 법칙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체계는 확고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었으며, 공리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경제학은 철학적 권위뿐 아니라 수학적 권위로 공식 인가된 표시를 달고 있었다. 정치경제학이 의존한 철의 법칙 가운데 첫 번째는 토머스 맬서스 목사가 그의 <인구학 개론에 관한 소고>에서 상술한 것이었다."(194-5)


애덤 스미스와 달리, 벤담은 "현재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식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선호만 고려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동료들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스미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과 사회 이익이 동일하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혹은 직관적으로 갖게 된다고 주장했다."(208) "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다른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데 벤담주의의 목소리가 기여한 바가 거의 없었다면, 그것을 주장하도록 여론을 형성한 점에서는 벤담주의의 노력이 공헌하 바가 상당히 컸다. 대개의 획기적인 사회개혁 법령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제가 필요한 상황을 대규모로 조사하는 작업이 선행되었는데, 과학적 성향을 가진 일부 선도적인 벤담주의자들은 지칠 줄 모르고 전문적으로 사실을 수집했다. 그들이 속해 있었거나 간부로 봉사한 위원회에서 발간한 "청서"는 구제 입법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12)


# 벤담주의의 긍정적 유산

1. 입법부와 법률 개혁 주도(특히, 형법 개정)

2. 당파를 초월한 전문가가 주도하는 공공 행정체계 수립

3. 약자를 보호하고 부양하는 국가의 역할 강화


"복음주의는 프로테스탄트 경건파의 한 형태로서 교리와 예배의 형식보다는 인간들이 살아야 하는 방식에 더 관심을 두었고, 더욱이 삶 그 자체를 위해서보다는 내세를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삶에 관심을 두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온갖 도덕적 오점을 찾아내고 영혼의 모든 움직임을 기록한 "영원한 현미경"을 언제나 근심스러운 눈길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복음주의에 공감하지 않은 칼라일은 그것을 "병적인 자기 성찰"이라고 불렀다."(250) "복음주의는 1790년대부터 1830년대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격변이 종교적 무관심과 이신론적 합리주의, 철저한 무신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면서 이전에 유행하던 입장을 배격하고 다시 근본주의적 종교와 유사한 것으로 달아났다." 복음주의와 공리주의는 개인의 성격 안에 융합되어 있었는데, "평일에는 사업가인 사람이 주일에는 복음주의자라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 역사에서 진부한 말에 불과했다."(253-4)


"공리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의 속세의 운명을 이행하는 최고의 수단이 노동이라는 윤리에 똑같이 동의했고, 복음주의자들은 또한 노동이 천국의 보상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한 수단이라고 여겼다."(255) "맬서스주의와 신빈민구제법의 냉혹한 사상이 기독교가 설파하는 자선과 엄밀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의문시한 사람들에게 복음주의는 개인적 곤궁을 해결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은 노동이고, 그와 관련된 금욕의 실천이라고 대답했다. 훈련된 노동자는 결국에 노동자로서 성공했다. 가난이 게으름과 낭비 습관의 결과라는 것은 거의 자명했다."(257)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으로 분열된 국가에서 도덕적 복음주의의 원칙이 널리 수용되면서 화해를 추구하도록 영향을 미쳤고, 윤리적 민주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방식으로 여러 계층을 결합시켰다. 이따금 마찰을 일으킨 계층들 간의 관계는 공동의 도덕을 소유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할 수 있었다."(263)


"과학이 성서의 역사적 확실성과 성서에서 유래한 유대교/기독교적 인간관을 어떻게든 입증해주리라는 희망이 얼마나 남아 있었든지 간에, <종의 기원>은 그러한 희망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조물주가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서 인간을 본래 완벽하게 창조했고 인간의 욕구에 각별히 맞춰서 우주를 만들었다는,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신의 섭리론은 끝나고 말았다."(340) 그러나 진보에 대한 빅토리아인들의 신념은 대단히 뿌리 깊은 것이었기에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이제 인간은 "신의 중재에 의존해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으려면 스스로에게 의지해야 한다.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깨닫고 사용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실증주의 윤리학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자조自助라는 테마가 더욱 숭고한 표현으로 등장한다."(351)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전진은 '컬쳐'(교양/문화)라는 단어의 의미로 집약된다. 19세기 이전에 "컬쳐(culture)는 기본적으로 '자연 생장물의 재배'를 뜻했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유추하여 인간의 (특히 개인의) 수양 과정을 뜻했다. 그러나 보통 어떤 자질의 수양을 뜻했던 이 후자의 의미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수양 자체, 그 자체로서의 어떤 것을 가리키도록 달라졌다. 그것은 처음에 '마음의 전반적인 상태나 습성'을 뜻했고 인간의 완벽함이라는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었다. 두 번째로 그것은 '한 사회 전체의 전반적인 지적 발달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예술의 총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네 번째로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그 단어는 '물질적, 지적, 정신적 삶의 총체적 방식'을 뜻하게 되었다." "사회가 더 이상은 그저 인간들이 공동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 공존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질 수 없었다. 그에 덧붙여서 이제 사회는 그 구성원의 개별적 삶을 향상시킬 책임을 져야 했다."(357-9)


이러한 문화적 이상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널리 만연되어 있는 중산층의 심리 구조와 사회적 민주주의의 확산, 인간의 삶을 저하시킨 공장 체제의 존재였다."(360) "공장과 슬럼가의 생활이 빚어낸 최악의 결과들 가운데 한 가지는 개인이 대중에 융합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는 가장 큰 사회집단이라고 해봐야 가족과 인접한 공동체에 불과했던 농촌과 시골 마을의 생활조건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자선을 받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개체個體였다. 그러나 이제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공장과 제조소와 광산 근처에 음침하게 줄줄이 늘어선 집들을 꽉꽉 채우면서 그들의 정체성은 대체로 상실되고 말았다. 그들은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구성원들로 전환되었다."(363) 개인성과 더 나아가 인간성이 박탈되는 가운데 "무기력과 단조로움이 삶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자각은 공장 체제 덕분에 얻어진, 극소수에 불과한 사회적 이득 가운데 하나이다."(367)


문화의 성장 지체에 대한 답은 교육이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다 같이 구원의 희망이 없는 노동에 구제할 길 없이 종속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낭만주의의 사회적 비전을 신봉하며 그 정신에 따라서 모두 그렇게 주장했다. 교육을 문화적 진보는 아니더라도 대중적인 사회적 진보의 동인으로 간주하며 그토록 신뢰했던 경우는 서구 역사상 거의 없었다." "영국에서 보통교육을 실시하려는 추진력이 대부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초기에 벤담주의적 개선주의자들 사이에서 가장 친숙한 유행어는 '마음의 행진'이었다. 이 표현은, 과학과 기술로 인해서 물질적 환경이 변화되고 국가의 부가 증식되고 있던 그 시기에 진보가 지속될 수 있으려면 오로지 '유용한' 지식이 끝없이 증가하고 축적되며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그 지식을 이용하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368-9)


"철학적 입장에서 예술에 반대한 공리주의적 저항은 광범위한 인도주의적인 문화를 도덕적, 사회적 근거에서 불신하는 경향을 강화시켰다."(399) "복음주의자들은 공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예술을 거부했고, 몇 가지 동일한 이유에서 그러했다.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아니 적어도 더없이 엄격한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예술에 가장 헌신적인 낭만적 옹호자들의 진술을 어떤 입장에서 살펴보면 예술이 종교만큼이나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하는 듯이 보였으므로, 복음주의자들은 그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택은 명료했고,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택은 불가능했다. 내세의 주장은 현세의 주장을 무가치한 것으로 격하시켰다. 그러므로 시詩는 복음주의자들이 저항하려는 세속적 혼란을 일으키는 한 가지 요소라고 간주되었다."(403)


"공리주의와 복음주의의 시대에 수용될 수 있었던 예술의 기준은 대개 '도덕적 미학'이라는 용어로 요약될 수 있었다."(404) 그러나 러스킨과 모리스가 보기에 예술에는 훨씬 더 중요한 기능이 있었다. 예술은 "현대사회를 구제할 수 있고 세계를 인간이 노동하면서 살아가기에 적합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417)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철제 다리나 과도하게 장식된 공공 건물, 대량 생산된 실내 설비들, 개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보기 흉한 벽돌 공장들은 "사회의 질병이 외적으로 드러난 징후이며 그 원인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들은 당대인들이 "주위의 도덕적 추악성을 각성하고 아름다움이 어떻게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지를 인식하도록 지적하는 것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삼았다. 그들에게 예술은 최고로 "유용한" 것이었지만, 그 유용성이란 그들을 주로 몰아세운 정치경제학자들이 결코 생각해보지 못한 의미에서의 유용성이었다."(419) 


"빅토리아 시대 중기의 당당한 정설들에 대항하는 강력한 조류가 1870년대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건하고 시험적으로 보였지만 이전과 비교해볼 때 혁신적으로 확장된 국가 권력 앞에서 경제적, 사회적 개인주의는 물러나고 있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에 의해서 도덕적 심미주의는 전도되고 말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유명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이 중산층이 대경실색하도록 충격적인 언행을 일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습적인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키웠던 일체의 교리와 금언들은 여왕이 서거하기 오래전부터 공격받았다. "빅토리아 시대의"라는 형용사 자체도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롱조의 미묘한 어감을 띠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공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제 빅토리아인들의 마음의 속성이라고 간주된 답답함과 두루뭉술함, 그릇된 진리, 억압과 금기로부터의 해방이었다. "(4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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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평전 - 고뇌하는 진화론자의 초상
에이드리언 데스먼드 외 지음, 김명주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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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1809~1831


18세기 중엽 다윈의 양가 할아버지들을 포함하여 '기계로 인한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정통파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자수성가한 비국교도들로서, 국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정치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던 세상에서 아웃사이더들이었다. 그들은 성장하는 산업도시들에서 번성했던 반국교회 예배당 문화에 속했다. 이래즈머스의 자유사상을 제외하면, 그들의 지적 전위성은 조사이어와 같은 유니테리언파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희망에 찬 굳건한 신앙으로서, 새롭게 나타난 산업 엘리트들의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들의 신념에 따르면, 신앙이란) 자동제어 엔진처럼, 즐거움과 고통이 기계적으로 작동하여 인간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생을 행복하게 산다. 그리고 내세에는, 방치되어 있던 결함들이 수리되어 모든 사람이 완전한 존재로 회복된다."(30-2)


아버지 로버트는 사냥과 화학실험에만 몰두하던 다윈을 에든버러 의대에 입학시켰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에든버러에서 만난 해면동물 전문가 그랜트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친親프랑스주의자였고,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과학과 사회의 급진적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다윈은 타협을 모르는 진화론자의 날개 밑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랜트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없었다. 자유사상가였던 그는 자연의 권좌 뒤에 영적인 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는 단지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힘들이 작용한 결과이며, 모든 것은 자연 법칙에 따른다. 그가 영웅시하는 프랑스의 진화론자들인 악명 높은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와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처럼, 그도 상상력이 넘치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화론은 어딜 가나 교회와 과학의 기득권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70-1)


"물질과 정신, 위험한 라마르크주의, 검열, 권력. 이들은 격정을 부추기는 문제들이었으며, 과학이 객관적인 관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과학은 정치협상의 복잡한 단편이었다. 물론 다윈은 어렸고, 대부분의 문제들은 그저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게다가 그가 에든버러에 있는 이유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던 데다, 그마저 그가 혐오하는 것이었다." "찰스는 결국 의학공부를 못 견디고 1827년 4월에 학위를 받지 못한 채 영원히 의대를 떠났다." "에든버러의 논쟁은, 자연현상에 의거한 설명과 초자연현상에 의거한 설명, 자본주의와 특권 귀족과의 긴장을 똑똑히 드러내보였다. 인간을 물질적 존재로, 자연을 세속적이고 경쟁적인 시장으로 재정의하기 위한 투쟁은 구시대적인 스코틀랜드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한동안 다윈은 과학의 사회적 측면을 맛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세계를 엿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86-7)


신앙과 새로운 지식 사이에서 고뇌하던 다윈은 <기독교의 증거>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페일리에 따르면, 기독교의 계시는 '미래의 보상과 처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그리고 내세에서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논리는 현세에서 저지르는 행동을 규제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영원한 지옥이 없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할 동기가 사라지고 인간의 규칙에 충분한 권위가 실리지 않게 된다. 반면 미래의 보상을 약속하면, 권력과 부의 불평등하고 무작위적인 분배라는 되풀이되는 문제가 해결된다. 현세의 부당한 처우가 내세에서 고쳐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굶주린 대중은 자신들의 곤경과 비천한 사회적 지위를 감내할 것이다. "이 한 가지 진리가 세상사의 성격을 바꾼다"고 <기독교의 증거>는 단언한다. 그것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다. 즉, 도덕세계가 자연세계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다." 다윈은 이 논증에 매료되었고, 페일리의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140)


2부 1831~1836


1831년 12월 27일 비글호에 올라탄 다윈은 항해 중에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를 탐독했다. 거기에는 "생명이 진화를 해왔으며 모든 생명의 계보를 나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명쾌한 반론이 마치 변호사가 쓴 책처럼 차곡차곡 전개되어 있었다. 동물들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하나의 줄기로 모일까? 라이엘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인간의 계보에 침팬지가 있다는 것, 유인원이 "인간의 속성과 위엄"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라이엘은 나아가,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가 지금 완전히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옛 화석들이 출현하는 순서를 보면 인류를 향한 전반적인 진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특유의 독특한 표현방식으로 논했다. 그는 진보가 없다면 종변형도 없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종이 어떻게 죽고 탄생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졌으며, 게다가 다윈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책보다도 계통학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225)


"다윈은 산훌리안 항구에서 발견한 '마스토돈'을 떠올렸다 그것을 멸종시킨 요인은 홍수 같은 격변이 아니다. 적어도 지층에 그런 증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 마스토돈이 작은 계곡에 매몰되어 있었던 지점은, 융기한 고원의 자갈 섞인 조개껍데기 층 위를 덮고 있는 일종의 롬층[모래, 부식토, 진흙이 섞인 비옥한 흙]이었다. 그러므로 마스토돈은 조개껍데기가 쌓인 시대보다 나중에 살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비슷한 조개가 오늘날의 바다에 살고 있으니, 기후는 그때로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식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갈층은 비옥하지 않아서 관목 정도밖에는 부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윈은 절멸에 관한 더 일반적인 두 가지 가설, 즉 홍수 같은 격변 탓이라는 설명과 기후변화 탓이라는 설명을 폐기했다. 라이엘이 말하는 창조자는 여전히 믿었지만, 라이엘의 기후변화설과는 결별한 것이다. 그는 자기만의 방향으로 가지를 쳐나가고 있었다."(272-3)


3부 1836~1842


"당대는 과학의 호시절이었다. 한사코 저항하던 옛 지층들이 비로소 정복되어, 암석들이 최초로 창조된 형태들을 드러내 보였으며, 캄브리아기, 실루리악, 데본기는 일상용어가 되고 있었다. 지질학은 어둡고 머나먼 과거를 들여다보는 은밀한 구멍이며, 지금은 화석이 된 생물들이 살았던 왕국들의 운명과 대륙들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창이었다."(351) "다윈은 라이엘의 강연을 듣고 비로소 그 화석들의 중요성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멸종한 메가테리움과 오늘날의 나무늘보, 멸종한 글립토돈과 오늘날의 아르마딜로가 서로 가까운 관계임을 이해했던 것이다. 다윈은 그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항해를 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그저 유럽과 아프리카산의 마스토돈과 코뿔소라고 추정했을 뿐, 이들이 남아메리카 고유종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일로 더욱 예리해진 다윈은 마침내 중요한 질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왜 한 장소에 살았던 과거의 생물과 현재의 생물이 그렇듯 가까운 관계일까?"(355)


급진적인 유니테리언파가 보기에 "자연은 기적의 영역이 아니라, 법칙과 질서에 따르는 것이었다. 유니테리언파의 이런 '결정론'은 생명이 스스로 발달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게 했다." 생명체가 점차 고등한 상태로 올라간다는 견해는 "속박을 제거할 것, 종교와 시민의 제약을 없앨 것, 누구나 신이 준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 다시 말해 모든 이가 자연과 신이 의도한 대로 상승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을 요구했다. 국교회 성직자들은 시민들을 낮은 단계에 묶어두고 있는 것이었다. 일부 급진적인 유니테리언파가 개혁과 진화를 동일한 맥락으로 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연이 스스로 발달한다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전혀 공포가 아니었다. 마티노를 중심으로 한 이래즈머스 집단은 찰스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결정론적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366)


"'살아 있는 원자'는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이었다. 이들은 인간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던 시대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고, '살아 있는 원자'는 이들의 믿음에 과학적 근거를 가져다주었다. '살아 있는 원자'는 완벽한 정치적 유비를 제공했다. 권력은 아래에서 위로 '위임하는 것'이었다. 신이나 군주가 위에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원자들'인 민중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이었다. 스스로 조직하는 원자라는 개념은 민주적인 언론을 통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다윈은 신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물질에 동력을 부여한다는 케임브리지 시절의 전통적 입장으로부터 세속적인 입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원자'라는 개념은 자연이 스스로 발달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윈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였다."(376)


"다윈은 종의 형태가 복잡해질수록 종에게 주어진 생명은 줄어든다는 오언의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동물과 식물의 계통사史를 표현하기 위해 "불규칙하게 분기하는" 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 만일 생명을 수령이 엄청나게 오래된 거대한 떡갈나무 한 그루로 표현한다면, 포유류 화석들은 생명력이 다해서 "죽어가는 말단의 싹"에 해당할 것이다. 나무의 줄기는 모든 생명이 비롯된 먼 과거의 공통조상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무줄기가 하나인 것은 궁극의 기원이 하나라는 뜻이다. 다윈은 지구에서 생명이 처음 비유기물로부터 저절로 출현한 일은 멀고 희미한 과거에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살아 있는 분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도처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 관련이 없는 수백만 그루의 생명의 나무가 우후죽순 생겨난다고 한다면 문제가 "엄청나게 꼬인다." 생명의 기원은 실루리아기 이전의 어딘가에서 찾아야 하는 단 한 차례의 유일한 사건이었다."(387-8)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유류인 주머니쥐가 사실은 파충류라고 주장한 일 때문에 그랜트는 즉결심판에 처해졌다. 다윈은 당대의 자연 과학자들이 관찰한 사실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진보라는 신념과 신의 창조라는 신앙이 충돌한 이 사건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라마르크주의의 지뢰밭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연이 거침없이 상승한다는 개념은 이미 폐기했다. "내 이론에 따르면, 진보로 향하는 절대 경향 따위는 없다." 환경은 "서서히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변하며, 생명도 마찬가지다. 환경조건이 안정되게 유지될 때도 있는데, 그런 경우 종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은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로 전혀 향상되지 않았다. 일부 동물들─예를 들면 기생충─은 심지어 단순해졌으며, 만일 이들이 멸종하면 다른 종들이 "퇴화하여" 그 생태적 지위를 메울 것이다. 그러므로 (다윈이 보기에) 거침없는 상승과 보증된 진보는 급진파의 신화였다."(463)


4부 1842~1851


찰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큰 딸 "애니는 죽을 이유가 없었다. 다음 세상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이 세상에서 벌을 받을 짓조차 하지 않은 아이였다. 찰스의 말을 빌리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는" 애니는 병에 굴복했고, 자연의 낫이 애니를 습격하여 그 아이를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애니의 잔인한 죽음은 찰스가 질질 끌고 가던 도덕적이고 공정한 우주에 대한 넝마 같은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훗날 다윈은, 비록 오래 끌기는 했지만, 이 시기가 자신의 기독교적 믿음에 종언을 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집안에서도 믿음의 문제에 관해 훨씬 자유로워졌다. 언제나 힘들고 위험했던 아홉 번의 임신을 겪는 동안, 에마는 그들이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는 안심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더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함에 따라 이별에 대한 위협도 사라졌다. 그들은 분명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할 것이다. 이제 찰스의 입장은 믿지 않는 자였다."(647-8)


5부 1851~1860


"종교계 인사들이 (번영하는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만국박람회의 공을 신에게 돌리는 동안, 문인 자유사상가들은 다른 쪽으로 고무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직업을 구하려는 세속적인 필요로 런던으로 왔다." "이들 모두는, 수정궁이 상징하는 새로운 시대는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개혁을 요구할 것이며, 자연의 통역사들은 영국 국교회의 특권계급이 향유하는 지위와 보상을 요구할 정당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불안정한 연합을 형성했는데, 그 연합의 신조는 실증주의, 공화주의, 세속주의, 유물론, 심지어는 신을 믿지 않는 훨씬 극단적인 '주의'까지 온갖 사상을 망라했다. 이러한 엘리트 지식인들은 자연을 경쟁적인 시장으로 새롭게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보, 기술, 그리고 도덕과 인간을 자연 법칙에 맞추어 설명하는 일에 헌신한, 진화의 새로운 후원자들이었다. 이들은 변화의 주축이 되어 세상을 다윈에게 안전한 장소로 만들고 있었다."(652-3)


"마침내 자연선택에 관한 연구를 재개할 길이 닦였다. 때가 무르익었다. 젊은 개혁가들이 부상하고 있었고,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진화론자들이 자리를 잡았으며, 과학의 사회적 토대는 눈에 띄게 변하고 있었다." 1854년 10월, "라이엘과 후커가 찾아와 다윈이 "추악한 사실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라이엘은 좌절했고, 후커는 동요했으며, 다윈은 조심했다. 신중할 것, 아직도 이것이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 문제는 다른 모든 것에 파급을 미칠 너무나도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공책을 덮은 때로부터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창조의 초자연적 조직이 넝마가 되었음에도, 다윈은 여전히 후커에게 자신은 "양쪽의 논증을 모두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윈은 "종이 변한다는 입장만을" 지지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와 같이 대단히 민감한 문제에 관하여 심지어 친한 사람들의 반응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던 다윈은 스스로를 혼란스러운 입장에 몰어넣는 희생을 감내했다."(690-1)


"다윈의 맬서스주의적 통찰력이 인구론에서 나왔다면, 다양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그의 메커니즘은 산업의 진보에 대한 청사진과 매우 비슷했다. 다윈은 산업에 많은 투자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웨지우드가家 사촌들은 공장의 조직화를 일구어낸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노동력의 명확한 분업을 바탕으로 하는 생산라인을 생각해냈다. 이것은 각각의 직공에게 하나의 전문화된 일을 맡김으로써 생산성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력의 기계화와 그것이 생산에 미치는 영향을 다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윈은 자연선택이 경쟁에 처한 동물 간의 "생리적 분업"을 자동적으로 증대시킨다고 주장했다. 북적이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과도한 경쟁─다윈은 이것을 자연계의 종種공장이라고 불렀다─은 비어 있는 생태적 지위를 이용할 수 있는 변종에게 이익을 준다. 이러한 변종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아 그 빈틈을 활용할 것이다."(698-9)


여전히 자신의 이론을 세상에 공개하기를 주저하고, 농장에서 비둘기 교배를 통해 자연 선택에 의한 종변형의 유비를 관찰하고 있던 다윈에게 "1858년 6월 18일, 우편배달부가 도착하는 순간, 그가 쌓아올린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다윈은 그동안 사회적 지위를 잃을까봐, 그리고 물론 반발이 클까봐 두려워하며, 그 오랜 세월 동안 끔찍한 시련과 정신적 고뇌를 겪어왔다. 그리고 병 때문에 늦어지고,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을 손대는 일로 인한 방황을 거쳐서, 마침내 20년 만에 출판 가까이에 와 있었다. 그런데 조용한 금요일 아침, 세상 반대편에서 우편물 한 개가 도착했다. 안에는 월리스가 쓴 스무 장 가량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다윈의 격려에 대한 응답이었다. 다윈은 일생의 역작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라이엘에게 "선생님의 경고가 참혹한 현실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소연을 했다. 다른 이가 그를 "앞질렀던" 것이다."(777)


그렇긴 해도, 월리스의 이론은 다윈의 이론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살아갈 수 있는 부유한 향사 자연학자도 아니었고, 헉슬리 같은 직업 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웨일스 변경지방에서 가난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14세에 런던에 와서 건축업자의 견습공이 되었다. 밤에는 토튼엄코트 대로 바로 옆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집합소인 '과학의 전당'에서 지냈다." 월리스는 선택에 대해 "개체들 간의 극심한 경쟁을 상정하기보다는 환경이 부적합한 개체를 제거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월리스는 보르네오 섬에 사는 다야크족을, 다윈이 야만적인 푸에고인들을 바라본 관점과 달리, 인류평등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자의 관점으로 보았다. 그리고 월리스는 다윈이 제쳐놓은 질문을 제기하려 하고 있었다. 즉, 자연선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진화의 힘은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것, 이것이 핵심이었다. 다시 말해, 자연선택의 목적은 "완벽한 인간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779-81)


# 7월 1일 공동논문 발표, 1859년 11월 22일 <종의 기원> 출간


6부 1860~1871


"월리스와 다윈의 견해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다윈은 자연선택이 건축가로서의 신을 대신하듯, 성선택이 예술가로서의 신을 대신하도록 했다. 동물은 스스로 육종가가 되어 새로운 변종들을 만들어내며, 인간도 결혼상대를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왔다. 하지만 다윈이 새의 화려한 깃털을 성선택 탓으로 돌릴 때마다, 월리스는 자연선택이 초래한 다른 적응을 지적했다. 암컷 새들의 칙칙한 빛깔은 개방된 둥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위장색이다. 나방의 야단스러운 색깔은 포식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경고색이며, 이런 종류를 흉내내어 의태를 하는 나방들도 있다. 월리스는 성선택이 인종을 만드는 "주된 요인"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 일에 관해서라면 자연선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윈에게 이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다." "월리스는 자연선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고집하면서 다윈보다 더한 다윈주의자로 나서고 있었다."(908)


"월리스는 인류의 확장된 의식을 선택의 영역에서 완전히 빼버렸다. 야만인들은 필요보다 훨씬 큰 마음의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고릴라의 뇌보다 약간 큰 뇌 정도면 충분하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지식인만한 뇌를 갖고 있다. 이것은 과잉지능이다. 자연선택은 당장 쓸모가 있는 것만을 상대하기 때문에, 야만인들에게 그러한 뇌를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적인 힘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자연선택은 앞을 내다보는 눈이 없다. 자연선택은 미래의 필요가 아니라 그날그날의 생존에 대비할 뿐이다. 그리고 치열한 자본주의 탓에 도덕적 장애인이 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의 "사회적 야만"을 보면, 자연선택은 더 나은 문명을 만들어낼 힘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월리스는 더 고차원적인 영적인 힘이 인류의 운명을 인도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슬플 만큼 당신과 생각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다윈은 월리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945-6)


7부 1871~1882


"다윈은 자신이 공격에 노출되어 있음을 잘 알았다. 진화론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자연선택설의 운명은 시간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과 도덕성이라는 '성채'는 어떠한가? <인간의 유래>에서 다윈은 이 종교의 마지막 보루를 습격하여, 인간의 가장 신성한 형질들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 성채는 함락되지 않았고, 마이바트가 수호하는 인간은 자랑스럽게 난공불락의 존재로 건재하다. 이것은 다윈의 가장 뼈아픈 좌절이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의 수정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 서재로 향했다. 몇 달 동안 중단했다 다시 붙들었다 한 끝에, 마침내 12월에 이 힘든 작업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진화evolution'라는 말이 등장했다." "공격은 대가답게 이루어졌다. 다윈은 마이바트의 <종의 기원에 관하여>를 관통하는 가장 질긴 실을 베었다. 아가일과 오언 부류가 단단하다고 믿고 있었고 월리스조차 우려했을 만큼 강한 매듭을 끊어버렸던 것이다."(978-9)


"일부만 진화한 구조들은 기능을 할 수 없는 실패작일 뿐일까? 완전한 구조는 단 한 번의 창조적 도약으로 생길 수 있을까? 다윈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사실들을 쌓아올렸다. 그는 기능을 바꾼 기관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제거했다. 물고기의 부레가 양서류의 폐가 되고, 호흡관이 연장되어 날개맥이 있는 곤충 날개가 되었다. 마이바트는 핵심을 잘못 짚은 것이다. 초기 형태의 폐, 눈, 날개는 호흡을 하거나 보거나 펄럭일 필요가 없다." "마이바트의 '자연 법칙'은 오언, 아가일, 그레이의 법칙들과 마찬가지로 신의 칙령이며, 인도하고 지령하는 의지력의 표현이었다. 이 힘이 우주 속에서 엄밀한 과학적 질서를 유지하며, 생명을 조화로운 물결에 실어 앞으로 민다. 하지만 아름다운 조화를 갖춘 한 물고기나 개구리가 인도와 지령을 받아 다른 물고기나 개구리로 도약하는 것은 다윈의 눈에는 부자연스럽고, 지나치게 비쳤다. 이 정도면 과학은 "기적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셈이었다."(979-80)


"누구보다도 다윈을 일관되게 지지했던 이들은 유니테리언파 교도들과 자유종교 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다윈이 자신들과 같은 합리적인 반국교 전통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항상 다윈의 자연주의적 관점을 높이 평가했다."(1117) 대수도원에 안치된 "다윈의 시신은 이 새로운 자연을 낚아챈 새로운 전문가들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성소에 안치되었다. 이 매장은 이 전문가들을 신격화하는 것이었으며, 떠오르는 세속주의에 바치는 최후의 의식이었다. 이것은 자연의 시장의 상인들, 다시 말해 과학자들과, 정치와 종교계에 몸담고 있는 그들의 부하들이 권력을 계승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명성을 얻고 있는 이러한 전문가들이 그들의 스승에게 보답하는 것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다윈이 창조를 자연주의화하고, 인간 본성과 인간의 운명을 그들의 손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사회는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악마의 사제"는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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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하는 종 - 경쟁하는 인간에서 협력하는 인간이 되기까지
허버트 긴티스.새뮤얼 보울스 지음, 최정규.전용범.김영용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 협력하는 종의 두 가지 명제

1. 사람들은 이기적인 이유에서뿐 아니라 진정으로 타인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다. 동일한 이유로 타인의 협력 행위를 악용하는 사람들을 처벌한다.

2. 우리가 이러한 '도덕 감정'을 보유하게 된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던 환경에서 비롯한다. 협력하고 윤리적 규범을 준수하는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생존이나 세력 확장에 더 유리했고, 사회 지향적 동기가 확산될 수 있도록 자연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었다.


협력적 행동이 행위자 자신에게 비용을 초과하는 이득을 가져다주는 경우에는 "전적으로 이기심에 의해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다. 시장 교환은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이 경우 협력은 일종의 공생mutualism으로 나타난다. 이는 행위자와 타인 모두에게 순이득이 발생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협력은 때로는 행위자에게 순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일 수도 있으며, 따라서 협력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적합도fitness를 높이거나 또는 여타 물질적 보수를 증대시킬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협력적 행위는 이타주의altruism로 나타난다." 이기적 공생 모델들은 "다음 두 가지 사실들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 사회에서의 협력은 가족 범위를 넘어서서 훨씬 더 큰 집단 내에서 발생한다. 또한 실제 삶과 실험실 연구 모두에서 보면 협력은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도 그리고 협력을 통해 평판 이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발생한다."(24-5)


"우리는 어떻게 (협력에서 기쁨을 얻거나 도덕적 의무감을 느끼고, 무임승차자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감정의 묶음인) 사회적 선호social preference에 적합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두뇌를 가지게 되었을까? 초기 인류가 처한 환경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 답변의 일부다. 우리의 후기 홍적세 선조들은 대형 포유류가 번성했던 아프리카 사바나 또는 그와 유사한 환경에서 거주했다. 당시 환경에서 사람들은 식량의 획득 및 배분 과정에서 협력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도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태어난 후 오랜 기간 동안 성인에 의존해야만 하는 인간의 느린 성장 과정 역시 자녀 양육과 식량 공급에 있어 비혈족 간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 결과 식량 공급, 자녀 양육, 비협력자들에 대한 처벌, 적대적 이웃으로부터의 방어, 그리고 정보 공유 등을 통해 협력적 전략을 유지하는 집단 성원들은 비협력적 집단의 성원들에 비해 상당한 이점을 가질 수 있었다."(25-6)


사회적 선호가 이기심을 압도하는 세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류는 이타적인 성원들이 이기적인 사람들로부터 착취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여러 방법들을 고안해왔다. 이 가운데 두드러진 것으로는 무임승차자들 또는 협력의 규범을 위반한 사람들에 대한 공적인 따돌림, 배척, 심지어 처형 등이 있다." "둘째, 인간은 장기적이고 정교한 사회화 시스템을 도입해왔고 이를 통해 개인들로 하여금 협력을 하도록 사회규범을 내면화시켰다." "셋째, 자원 및 생존을 둘러싼 집단 간 경쟁은 인간의 진화 동학에서 결정적 힘이었고 이는 여전히 그러하다. 많은 협력적 성원을 보유한 집단은 이러한 도전 속에서도 생존하며 덜 협력적인 집단의 영역으로까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리하여 문화적 전달cultural transmission 과정을 통해 번식상의 우위가 확보되고, 협력적 행동의 확산이 이뤄진다."(27-8)


# 이타성을 설명하는 용어들

1. 도움helping : 타인에게 이득을 제공하는 행위

2. 이타주의altruism : 도움을 철회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남을 돕는 경우

3. 제약constraint :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들의 범위

4. 믿음beliefs : 자신의 행동과 결과 사이의 관계성을 포함하여 머릿 속으로 그리는 세계의 인과구조

5. 선호preference : 특정 행동이 가져올 다양한 결과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 결정하는 좋고 싫은 감정


물질적 보상만을 기준으로 하면 배신이 최적화 전략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상대방이 협력할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고 믿는다면 두 사람은 모두 협력할 것이다. 따라서 상호 협력과 상호 배신 두 경우 모두가 이 새로운 게임의 균형이 되는데, 이때 이 새로운 게임은 기존의 물질적 보수에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보수를 결합시킨 게임이다." "각 경기자들은 타인 역시 협력할 것이라 확신할 경우에만 협력할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상호 협력과 상호 배신은 모두 내쉬균형들이다. 두 개의 내쉬균형 가운데 어느 것이 실현될지는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대한 경기자의 믿음에 달려 있다. 이기심 때문이든 또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악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든, 배신을 선택할 강력한 유혹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실험들에서 상당히 많은 피험자들이 배신이 아닌 협력을 선호한다는 점이 밝혀졌다."(48-9)


#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 : 각 경기자의 선택이 다른 경기자의 선택에 반응하는 최적의 대응 전략인 경우


"우리는 문화를 유전적 전수 이외의 다른 경로를 통해 얻어지는 선호와 믿음의 집합체라고 정의한다. 문화는 그 자체로 진화적 힘이며, 따라서 유전자와 자연환경 간의 단순한 상호작용이 낳은 효과가 아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전달되는 선호와 믿음이 행위의 근접 원인이기는 하지만, 다시 이들 선호 및 믿음도 전적으로 우리의 유전자 구성과 자연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오류라고 생각한다. "자연환경과 유전자가 문화적 진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문화가 유전적으로 계승되는 행위적 특징들의 상대적 적합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의 협력의 기원과 다른 종과 구별되는 속성을 설명할 때 토대로 삼고 있는 두 번째 개념인 "유전자-문화 공진화 개념에 따르면 인간 선호와 믿음은, 유전자가 문화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가 다시 유전적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동태적 과정의 산물이다."(51-2)


"환경 조건은 여러 세대에 걸쳐 연관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연관성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각 세대마다 유전을 통해서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없는 가치 있는 정보들은 학습을 통해서 획득된다. 그러한 정보는 생식세포 안에서 암호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동물은 비유전적 정보 전달 채널을 통해서 현재의 환경 상태에 관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생물학자들이 후생유전epigenetic이라 부르는 그와 같은 정보 전달은 대단히 보편적이며, 인간의 문화적 전달은 그것의 가장 고도하고 유연한 형태를 보여준다." 도킨스는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에서 유기체가 비버들의 댐, 벌들의 벌집, 그리고 심지어 사회구조(예를 들면 짝짓기 관행과 사냥 의례) 등의 형태로 환경적 인공물들을 직접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틈새 구축niche construction 전략은 널리 확산된 후생유전적 전달의 형태 중 하나다.(54-5)


사회적 선호를 설명하는 최후통첩 게임의 결과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제안을 거절한 사람들의 태도다. 응답자들은 약간의 돈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안자들의 불공정한 행동을 처벌하려는 욕구에 의해 동기부여가 된다."(67) "이들 실험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보수를 기꺼이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협력에 대해 포상하고, 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려고 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어떠한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경우에도 그렇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선호를 강한 상호성strong reciprocity이라 부른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도 "피험자들은 상대방이 협력했다고 확신하는 경우, 또는 자신이 협력할 것이라는 의도가 상대방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전달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경우 더 높은 수준으로 협력을 했다. 이 사실은 피험자들이 강한 상호성에 의해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징표다."(68-9)


# 최후통첩 게임 : 제안자가 10달러를 받고 이 중 얼마를 응답자에게 나눠줄지를 제안하는 일회성 게임. 응답자가 제안을 거절하며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통상 제안자들은 50% 가까운 금액을 응답자에게 제안했고, 25% 이하의 제안은 대부분 거절되었다.


이기심 공리를 믿는 사람들은 공공재 게임에서 회차가 진행될수록 기여액이 하락하는 현상을 분석할 때, "실험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행동이 발견되더라도 이를 익명적 상호작용에 익숙하지 못한 피험자들의 혼동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즉 피험자들의 행동은 이들의 믿음(즉 자기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이해)을 반영하는 것이지, 결코 이들의 선호(즉 다양한 결과들에 대한 가치 평가)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설명이 타당하다면 동일한 피험자들은 똑같은 공공재 게임에 한 번 더 참여했을 때 첫 회 때부터 곧바로 기부를 하지 않아야 한다. 안드레오니와 쿡슨은 이러한 예측이 맞는지를 테스트해본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추가 실험에 따르면 "기부의 감소 추세는 무임승차자들에 대한 보복이 진행됨을 반영한다. 실제로 피험자들도 자신들이 기부를 줄였던 이유를 그렇게 이야기하곤 한다."(74-5)


# 공공재 게임 : 10명의 피험자가 10회짜리 게임에 참여하는데 매회마다 개인계정으로 받은 1달러 중 일부 혹은 전부를 공공계정으로 이전할 수 있으며, 그렇게 옮긴 1달러 당 0.5달러가 10명 모두의 보수에 더해진다.


최후통첩 게임을 진행할 때 "한 버전에서는 단지 '교환 게임'이라 부르면서 실험을 진행해봤고, 다른 버전에서는 게임 시작 전에 미리 시사상식 퀴즈를 내고 여기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에게 제안자의 역할을 부여해봤다. 두 실험 모두에서 보통의 경우보다 낮은 제안율과 낮은 제안에 대한 낮은 거부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일 개인들이 단지 자신의 금전적 보수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게임에 어떤 조작을 가했다 해도 게임의 결과는 바뀌지 않아야 한다. 교환 게임이라 부를 때, 또는 시사 퀴즈를 내고 그 결과에 따라 제안자의 역할을 부여할 때 강한 상호성이 상당히 약해진다는 점은 사회구조가 금전적 보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행위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암시한다. 교환 게임이라는 명칭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한다거나, 또는 퀴즈의 도입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 등이 그 예들이다."(99)


협력적 개인들이 "예외적인 인지 능력과 높은 수준의 인내를 갖는다고 가정할지라도, 두 명을 넘어서는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에서는 모델이 보여주고 있는 협력적 내쉬균형 해를 발견할 것이라 믿을 만한 근거가 없으며, 설사 도달하더라도 집단 성원들이 머지않아 협조적 전략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현실성이 희박한 조건하에서가 아니라면, 게임 모델들을 통해 확인되는 협력적 결과들은 접근 가능하지도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를 우리는 진화적 타당성을 결여한evolutionarily irrelevant 내쉬균형이라 부른다."(201) 내쉬균형에서 "개인들은 다른 경기자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미리 예측해야 하고, 또 다른 경기자들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고 예측할지를 예측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게임을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에서 경기자들이 내쉬균형을 실행하는 데 요구되는 조건은 경기자들이 합리적이라는 가정(즉 그들이 최적 대응을 선택한다는 가정)만으로는 유도될 수 없다. 218)


"내쉬균형의 약점을 피할 수 있는 대안적인 균형 개념이 상관균형correlated equilibrium 개념이다. 상관 장치correlating device라는 것이 있어서 각 경기자들에게 각자가 어떤 순수 전략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공적 또는 사적 신호를 보내준다고 해보자. 상관균형이란 상관 장치가 존재해 모든 경기자들이 상관 장치의 조언을 따른다면 그 어떤 경기자도 다른 전략으로 전환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킬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균형이란 오직 "사적 신호가 공적 신호에 매우 근접할 경우에만 존재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들은 어떤 주어진 집단 성원의 행동에 관해서는 거의 동일한 신호를 수신받아야 한다." 현실에서 이에 부합하는 상관장치가 바로 사회규범이다. "사회규범에 의한 협력적 균형은 진화적으로 안정적인 균형 전략일 뿐 아니라, 또한 사회규범 그 자체도 진화적인 적응이어서 경합하는 다른 사회규범의 침투에 대해 안정적이다."(220-2)


"우리의 (유전자-문화 공진화) 모형에서는 제도가 문화적 전달 과정에서 틈새niche의 역할을 함으로써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속성들에 작용하는 선택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환경을 구축해나간다." "식량과 지식을 다른 집단 구성원들과 공유하고,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지배적인 남성이 집단 내에서 번식 기회를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제반 정치적 장치들은 이른바 번식적 균등화 장치reproductvie leveling의 예인데, 이러한 장치들이 틈새를 만들어내 이타주의의 진화에 도움을 준다."(274) "다수준 선택의 결과로 확산되는 이타주의적 속성(자신에게 희생이 되지만 집단 구성원들에게 이득을 주는 행동을 하려는 속성)에는 외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속성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모델로 보여주고자 하는 과정은, 라랑드의 연구팀이 부른 것처럼, 관대한 개인들의 진화라기보다는 이기적 집단의 진화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276)


# 유전자-문화 공진화

1. 선별적 소멸 : 이타주의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존에 기여한다.

2. 균등화 장치 : 집단 내 선택압의 크기를 줄인다. 

3. 집단 사이에서의 유전적 차이 : 사회규범을 위반한 사람들을 배척하는 선별적 유유상종은 유전적 차이를 만들어낸다.

4. 딤의 소멸과 이타주의의 진화

☞ 딤(deme) : 서로 분리되어 존속하는 집단


"집단 간 공격 성향이나 내부인에 대한 편애(패거리주의)는 때때로 전투에 나가서 죽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으로 귀결될 수도 있고, 외부인과의 교류를 회피하기 때문에 배우자 찾기나, 공동보험, 거래 등을 통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 등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러한 성향은 당사자들에게 그리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타주의와 유사한 점이 있다."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초기 인류사회에서 패거리 이타주의가 등장하고 확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첫째, 이타주의자들이 대부분 패거리주의자들이고, 패거리주의자들 대부분이 이타주의자들이었다. 둘째, 패거리 이타주의자들 대부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 집단에 모여 살았다. 셋째, 가치 있는 자원들을 둘러싸고 집단 간 적대적인 경쟁이 자주 일어났는데, 이러한 경쟁에서는 자기 집단 성원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져 다른 집단 사람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했던 집단이 유리했다."(318-9)


# 전쟁이야말로 집단 내 협력을 최대로 이끌어낼 수 있는 수단이다. 이타성과 폭력성의 상호 공존/양의 되먹임.


"우리의 시뮬레이션은 자원 공유 또는 집단 내 유유상종을 만들어내는 집단 차원의 제도들이 진화하는 경우, 집단 선택이 이들 제도들(그 제도들을 채택한 집단에게 그 제도를 유지하는 데 따르는 비용이 드는 경우에도)과 이타주의의 공진화를 가능케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식량 공유 등의 균등화 기제는 이타주의적 선호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아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기적인 개인들에게조차 최적 대응이다." "일단 규범이 정착되면 그 규범은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집단이 친족 이외의 다양한 성원으로 이뤄지는 상황이 되어도 여전히 지속될 수 있다. 규범은 이타주의적 선호의 확산을 가능케 하고, 위반자들에 대한 처벌 성향을 진화시킴으로써, 더 큰 집단에서 균등화 기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이때 인간의 인지/언어 능력은 친족 범위를 넘어서는 이타주의의 진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308-9)


이타적인 선호가 진화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는 모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적합도가 높은 유전자일수록 생존율이 평균을 상회하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특성이 전달되는 수직 전달vertical transmission을 통해서는 적합도가 높은 부모의 특성이 진화한다. 둘째, 부모 세대의 다른 구성원으로부터 젊은 세대로 특성이 전달되는 사선 전달oblique transmission은 이웃이나 교사 또는 정신적 지도자와의 개인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지며, 그 과정에서 젊은 세대의 구성원들은 특정한 규범을 내면화하는 사회화를 경험한다. 셋째, 보수에 기초해 사회적 학습이 이뤄진다는 것은 주기적으로 자신과 타인의 행위를 비교해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보수가 규범의 채택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함으로써 사회화를 단순히 수동적이고 무비판적인 대상에게 규범을 주입하는 것이라고 보는 개인에 대한 과잉 사회화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392)


"처벌이 존재하면 무임승차에 따른 이익이 감소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개인들도 처벌을 피하기 위해 협력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처벌자가 많이 존재하는 집단일수록 협력이 더 잘 이뤄질 수 있다. 개인이 처벌을 할 때보다 처벌을 하지 않을 때 더 높은 보수를 얻는다면 처벌은 이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처벌은 처벌자와 처벌 대상자 모두에게 비용을 초래한다. 그러나 처벌자 개인이 부담하는 비용은 처벌자의 수가 증가할수록 크게 감소한다. 처벌자가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면 처벌의 위협만으로도 무임승차를 억제할 수 있으므로 실제로는 처벌 비용이 거의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단에 강한 상호성을 가진 개인들이 많을수록 그 집단은 더 높은 평균 보수를 얻게 되고, 그렇게 얻게 되는 이득은 집단 내에서 가끔씩 발생하는 무임승차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 비용을 상회할 수 있다."(350)


"공공재에 기여하는 것 그리고 공공재에 기여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모두 이타적 행위이지만 실험 참가자들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훨씬 심혈을 기울인다." "규범 위반자를 처벌하는 것은 처벌 대상자의 행위를 교정하려는 바람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인간이 가진 또 하나의 강력한 동기다. 따라서 실험 참가자들 자신의 설명이나 뇌과학 실험의 결과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실험 참가자들은 규범 위반자들을 처벌하는 것 자체로 기쁨을 느끼는데, 이는 우리가 모델화한 진화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다."(380-1) "협력이 적합도를 극대화하는 행위인데도 협력을 하지 않을 정도로 인내심이 부족한 개인들도, 동료 구성원의 이타적 처벌이 존재하면 부분적으로나마 수치심이나 죄책감 때문에 적합도를 증가시키는 행위를 하게 된다. 이 과정을 크리스토퍼 보엠은 제재 수단 선택sanctioning selection이라고 불렀다."(383-4)


"유전자-문화 공진화 모델과 다수준 선택 모델은 협력 행위의 출현과 확산을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개체군의 구조적 특성이 초래하는 행위의 유유상종을 기반으로 하는 선택 압력이 인류의 진화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규범의 내면화와 집단 내 균등화 제도 그리고 집단 간 적대감과 같은 경험적으로 많이 보고된 행위들의 문화적 전달이 사회적 선호의 진화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셋째, 행위 실험을 비롯한 인간 행동의 관찰에서 드러난 인간 선호의 특징을 보면 인간의 협력을 가장 잘 설명하는 요소는 진정한 이타주의다. 여기서 진정한 이타주의란 미래의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족이 아닌 타인까지 기꺼이 도우려는 의향을 의미한다. 이런 윤리적이고 타인을 고려하며 집단에 이로운 행동을 하려는 사회적 선호는 우리가 묘사한 유전자-문화 공진화와 다수준 선택의 심리적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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