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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전쟁
아자 가트 지음, 오숙은.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현존하는 대부분의 수렵채집인은 거주 환경의 낮은 생산성 때문에 인구 밀도가 매우 낮았다. 1제곱마일당 1인보다 낮은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그보다 훨씬 낮은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자주 이동했고 소유물이 극히 적었으며, 따라서 굉장히 평등주의적이었다. 노동과 지위는 주로 성과 연령에 따라 구분되었다." "농업이 등장하기 전까지 수렵채집인은 생태학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환경을 포함해 전 세계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런 조건하에서 수렵채집인의 인구 밀도, 생존양식, 이동성, 사회질서 등은 그 이후의 수렵채집인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34) "인구 밀도가 낮고 산출이 적은 땅에서 꽤나 옮겨다니며 살았다는 사실이 곧바로 경쟁과 텃세가 없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종들은 자신들의 서식지를 금세 채우고 곧 그 경계를 넓혀나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빈 공간이란 없다. 이동과 방랑 생활은 국한된 한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다."(39)
"루소파 인류학자들이 상상했던 자유로운 방랑과는 달리,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그린란드 에스키모와 비슷하게) 사실 '제한받는 방랑자' 또는 '중심 기지가 있는 방랑자'로서 조상들의 고향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이런 영역은 토템과 신화로써 승인되었고 무단 침입은 중대한 범죄로 여겨졌다. 낯선 이들은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침입시에는 쫓겨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40-1) "야생의 가장 풍부한 틈새는 주로 늪이나 호수, 삼각주, 강 하구, 해안 등지와 같은 비옥한 물가에 있었다. 그런 몇몇 틈새에서 이른바 복합 수렵 채집 사회가 진화했다. 이는 인구 밀도가 더 높았다는 뜻이다. 또한 지역 집단 내에서 대가족 집단이 더욱 가까이 모여 살고 있었고, 사람들이 전보다 한곳에 더 오래 정주하면서 식량을 보존하고 계절별로 식량을 저장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단순한 '징발자'라기보다 '수집자'였다는 얘기다."(50)
"결핍과 굶주림이 전쟁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풍부함과 결핍은 먹여 살릴 입의 수에 상대적일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계속 커질 뿐 만족을 모르는 인간적 욕구와 욕망에도 상대적이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경쟁은 결핍은 물론 풍요와 함께 증가하고, 풍요로워질수록 경쟁의 형태와 표현이 복잡해지고 사회적 격차가 벌어지고 계층화가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부유한 남자는 더 많은 아내를 부양할 능력이 있으며 따라서 더 많은 아내를 둘 수 있다." "여성을 둘러싼 경쟁은 치명적인 폭력을 부르는 주된 원인, 때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더욱이 단순한 생계형 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양은 근본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해도, 남들보다 세련되고 풍족한 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양은 사실상 끝이 없다. 그저 고급품 시장으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이른바 과시적 소비가 시작되는 것인데 복합 수렵채집 사회는 이를 경험한 최초의 사회였다."(59)
전쟁이 인간 본성에 내재한다는 관념은 오랜 계보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 성서에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창세기 8:21)이라고 쓰여 있다. 프로이트는 문명이 인간의 원시적 충동이라는 위태로운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이 너무도 어리석고 비이성적이고 자멸적이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이론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성생활의 충동과 나란히 파괴적이며 사실상 자멸적인 충동, 다시 말해 '죽음 본능'이 있다고 주장했다."(64-5) 그러나 학계에서 공격성은 "음식이나 성에 대한 근본적 충동과는 전혀 다른 생리학적 메커니즘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진화론적 계산법에서 양분과 성은 으뜸가는 생물학적 목적으로, 전자는 유기체의 존속과, 후자는 번식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반면에 공격성은 으뜸가는 생물학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전술, 그것도 여럿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66)
"공격성은 기본적인 욕구라기보다 가능하지만 매우 위험한 하나의 전술에 지나지 않으므로, 공격성을 조절하는 감정 메커니즘들은 정반대로 언제든 껐다 켰다 할 수 있다. '켜짐' 위치에서 공격성을 촉발하는 주요 동기와 충동 뒤에 놓인 감정 요인이 단지 두려움과 적대감 같은 느낌만은 아니다. 개인과 집단이 경쟁하며 정신력과 체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느끼는 전율과 즐거움, 심지어 잔인성과 피에 대한 갈망, 살해의 희열이 싸우는 행위 자체를 자극하기도 한다. 이런 것이 모두 공격성을 부채질하고 지탱하기 위한 감정 메커니즘이다. 한편 '꺼짐' 위치에서 공격성을 억지하고 단념시키는 감정 요인은 두려움, 정신적·신체적 피로, 연민, 폭력에 대한 증오, 유혈극에 대한 혐오 등이다. 그 밖에도 협력과 평화적 행위에 대한 엄청난 감정 자극이 있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해, "공격성은 하나의 기술, 잠재성, 성향, 또는 성질로서만 존재한다."(68-9)
"종내 싸움과 살해가 일어나는 이유는, 비용 대비 효과적인 어떤 방법으로든 낯선 개체의 유전자가 아닌 자기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는 개체들의 노력이 바로 진화적 경쟁의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동물이 같은 종의 개체들을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특히 사회적 동물의 경우에는, 같은 종인 집단 내의 성원들이 있는 편이 사냥은 물론 특히 방어에서 그 자신의 성공을 위해 중요하다. 더 일반적으로 모든 동물의 경우를 보면 같은 종의 나머지 성원들 또한 강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제거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의 비용이 진화론적으로 비생산적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요점은 이런 행동 패턴이 파리, 생쥐, 사자, 심지어 인간의 의식적 결정과 복잡한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개체는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는 데 실패해왔고 그들의 부적응 행동을 유발한 부적응 유전자는 선택에서 제외되어 왔다는 것이다."(73-4)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르러 등장한 "언어 기술의 발달과 공유 문화 덕에 수백 명을 아우르는 지역 집단이 진화할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지역 집단 자체가 여러 가지 중요한 진화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은 이른바 '낯선 사람들'인 아주 먼 친족보다 중거리 친족(지역 집단)을 편들기에 유리했다. 더 중요하게는 대가족 집단보다는 지역 집단이 훨씬 더 힘이 셌을 것이다. 지역 집단은 힘의 총량이 훨씬 더 컸다. 이는 지역 집단 내에 살지 않는 경쟁자와 무장 분쟁이 벌어졌을 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게 확실한 이점을 주었을 것이다."(86) "지역 집단은 그들과 달리 지역적으로 집단화되지 않은 사람들(아마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이전의 인류들)과 싸울 때는 분명한 이점을 갖고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역 집단을 이루게 되었을 때에는 그만큼 결정적인 이점을 갖지 못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바로 이것이 모든 '군비 경쟁'의 본질이다."(90)
"자원을 둘러싼 투쟁은 대부분 진화론적으로 비용 효과가 높았다. 싸움의 이점도 가능한 대안들(굶어죽는 것을 제외하고)과 나란히 놓고 저울질해봐야 한다. 그런 대안 가운데 하나가 접촉을 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물론 적이 훨씬 강할 때에는 종종 그러는 편이 나았지만 그 전략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이동해갈 '빈 공간'이 대체로 없었다." "더구나 이동이란 집단 성원들에게 매우 익숙한 자원과 위험이 있는 서식지를 떠나서 미지의 환경으로 여행한다는 것을 뜻했다. 수렵채집인들에게 그런 변화는 무거운 형벌이 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외부 압력에 굴복하다가는 희생 패턴이 생길 수도 있었다. 성공에 고무된 외부 집단은 그 압력을 반복하고 심지어 증대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분쟁의 전략은 현재 분쟁이 되는 대상뿐 아니라 미래 관계의 전반적 패턴까지 고려한다. 자립한다는 것은 사실 미래의 분쟁 발생을 줄인다는 것을 뜻한다. 103)
"수렵채집인들의 전쟁에는 그렇게 여성 납치와 강간이 흔히 수반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여성 때문이었을까? 여성 납치와 강간은 수렵채집인들의 전쟁에서 원인이었을까, 부작용이었을까?"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동기 복합체는 어떤 사회의 사람들이 폭력적 경쟁을 벌여 얻고자 하는 희소한 것들이 다양하게 혼합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체 요인과 번식 요인 두가지 모두 있을 것이다." "수렵채집인들 사이에서 여성은 대개 전쟁의 강한 동기였고 대개 주요 동기이기도 했지만, 유일한 동기였던 경우는 드물다. 물론 여성이 아주 두드러진 동기가 되는 까닭은 번식의 기회가 실로 매우 강력한 선택 압력이기 때문이다."(108-9) "여성 희소성과 남성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요인은 또 있다. 모든 수렵채집인들(과 농경민들) 사회에서 여女유아살해는 주기적으로 행해진다. 부모는 사냥할 수 있고 (혹은 들판에서 일할 수 있고) 방어능력이 있는 사내아이를 선호한다."(114)
# 분쟁의 2차 원인들 (1차 원인 : 자원과 번식)
1. 지배 : 서열, 지위, 위신, 명예
2. 복수 : 제거와 억지를 위한 보복
2-1) 안보 딜레마 : 군비 경쟁 가속화
2-2) 주술 : 초자연적인 믿음, 성스러운 의례, 마법 행위
2-3) 카니발리즘 : 안보 딜레마와 주술에 대한 두려움의 혼합
3. 순전한 호전성 : 놀이, 모험심, 사디즘, 황홀경
"국가 이전 사회에서 복수 원리는 목숨, 재산, 그리고 훗날 국가가 지배하게 된 것들까지 보호하는 데 훨씬 폭넓게 적용되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의지할 곳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친족, 동맹뿐이었다. 해를 입었을 때 앙갚음 하는 것은 가해자를 절멸시키거나 억지력을 재확립하는 주된 방법이다."(139) "서로에게 이로운 상호협조를 강제하거나 적어도 사람들의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개 그들의 유일한 합리적 선택은 보복의 순환뿐이다. 보복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적인 방책이라 해도, 보복은 최적의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다. 보복은 매우 무거운 비용 부담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보복은 계속될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에서처럼, 무엇보다도 적과의 의사소통이 없거나 잘못되면─적대자 사이에 흔한 악의와 두려움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보복의 순환을 끝낼 거래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143)
상호 증폭되는 복수 원리는 경쟁 및 잠재적 분쟁 대상이 될 수 있는 상대방을 향한 의심과 불안을 부추긴다. 이와 같은 안보 딜레마는 '군비 경쟁'을 가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군비 경쟁은 참으로 역설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도 많다. 경쟁자를 앞서기 위해 단계적으로 세력을 계속 확대해나가는 노력이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이 경우 상대방은 파멸하거나 크게 약해지고 승자는 이익을 챙긴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쪽이 한 걸음 나아가면 상대편이 한 걸음 따라잡는다. 결과적으로 그 분쟁에서 서로가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익을 얻지 못한다. 이는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겪은 사건의 이름을 따서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라고 불린다. 양쪽 모두 더 빨리 달려봐도 결국은 서로가 한자리에 머물러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147)
"안보 딜레마로 인한 군비 경쟁의 특징은 양쪽 모두의 근본 동기가 방어적이라는 것이다. 양쪽 모두 상대를 두려워하지만, 한쪽이 안보를 강화하려고 내딛는 한 발짝 한 발짝이 상대를 겁주어 비슷하게 나아가게 만들고, 다시 그 역이 성립하면서 상승하는 나선형을 그린다. 다시 한번 이것은 서로에 대한 의심을 연료로 삼는 '죄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 나선을 중단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이번에도 서로의 의심을 줄일 방법을 찾는 것이다. 혼인 연대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전근대 사회에서 사용한 고전적인 방법이었다."(147) "공동의 초자연적인 신앙, 신화, 숭배, 의례는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고 따라서 결속을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자원 면에서 이것들의 직접적인 비용이 얼마가 됐든, 그 비용은 간접적이되 매우 적응적인 '방어비용'으로 여길 수 있다. 더욱이 신앙, 숭배, 의례는 문화의 나머지 요소들과 비슷해서, 어릴 때 사회적 학습으로 내면화된 후에는 바꾸기가 매우 힘들다."(152)
"왜 인간은 상호억지를 위협하는 선제공격 능력을 나머지 동물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을까? 인간에게는 가장 두드러진 능력, 바로 도구 제작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능력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욱 치명적이 되며, 도구가 근육과 뼈, 치아를 대신하기 때문에 체격이 더욱 호리호리해진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에렉투스보다 몸이 더 가냘프며,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 또한 대형 유인원들보다 근육이 적다. 한마디로, 인간 공격력의 성장은 자연적 방어력의 꾸준한 쇠퇴와 연관되어 있었다."(186) 분쟁 상황에서는 매복과 기습 같은 비대칭 선제공격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상위 권력의 통제와 같은 안보 메커니즘이 없는 상태에서 당사자들은 다시금 '죄수의 딜레마'의 변형인 '안보 딜레마'에 빠진다." "분쟁 상황 자체가 적대자들로 하여금 원래의 경쟁 동기를 넘어서 주기적으로 분쟁을 확대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다."(191)
"생물학에서 복제자는 유전자로, 세포핵 안에 저장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문화에서 복제자는 행위와 관념─리처드 도킨스의 용어로는 '밈meme'─으로, 살아 있는 두뇌에 축적되며 학습을 통해 두뇌에서 두뇌로 전달된다. 이제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주요 차이점 하나가 분명해진다. 전자는 자녀에게만 전해지는 '선천적' 복제자와 관련이 있지만, 후자는 원론상 어떤 두뇌에도 '수평적으로' 복제될 수 있는 획득 형질과 관련이 있다." "문화적 진화가 도약했던 근본적 이유는 생물학적 진화의 최신 기교 가운데 하나가, 다름아닌 크게 향상된 교습과 학습 능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적 진화가 아무것도 없는 빈 서판 위에서 작용해온 것은 아니다. 문화적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에서 하나의 능력으로서 기원했을뿐 아니라, 오래도록 진화한 선천적 성질이 깊이 새겨져 있는 인류의 생리학적·심리학적 '풍경' 위에서 작용해왔다. 212-4)
"끊임없는 진화적 '군비 경쟁'에서 주로 선택에 의해 가동되는 두 진화 형태 모두 시간이 흐를수록 더 복잡한 '설계'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학습과 문화 생성 능력은 그 자체가 생물학적 진화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혁신' 중 하나다. 그후 문화적 진화는 온갖 유형의 복제자들이 번식하고 증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경쟁의 영향력 때문에 더욱 복잡해지면서 생물학적 진화를 계속해왔다. 참여자들이 경쟁에 더욱 능해지고 더욱 '전문적'이 됨에 따라 전체 경쟁은 갈수록 가속화되고 치열해진다. 그들의 적응뿐 아니라 적응 가능성까지 향상되는 것이다." "복잡성의 발생은 그 과정의 점진적 성격에 의해 제한받기도 하지만, '설계 공간'─물리적, 화학적, 유기적, 또는 문화적인─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성향에 의해서도 제한받는다. 따라서 각기 다른 수많은 세계가 진화할 수 있음에도, 비슷한 '제약'으로 인해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비슷한 구조들이 독립적으로 등장해왔다."(216-8)
신석기시대의 농업기술 개량과 확산은 "또다른 진전을 위한 전제조건을 계속 재생산하는 자기강화 과정이었으며, 후퇴하기 점점 힘들어지는 일방통행로가 되었다. 생산적인 재배는 더욱 가치 있는 활동이 되었다. 재배의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더 조밀한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인구가 조밀해지고 재배가 집약적으로 변할수록 인간이 사냥하는 야생동물이, 결과적으로는 수렵채집 활동이 축소되었다." "정주생활은 더욱 광범위한 물질적 소유를 가능하게 했고 엄청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다양화와 정교화를 위한 토대를 서서히 다져갔다. 그렇지만 농업 집약화 과정이 산업화 전야까지 제 갈 길을 가는 동안, 세계 인구의 80~90퍼센트는 중노동, 질병, 영양실조, 높은 사망률에 시달리면서 집약적 재배가 이루어지는 조그만 땅에서 빈약한 생계수단을 뽑아내기 위해 싸워야 했다. 어떻게 이런 역설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이번엔도 개괄적인 답은 인구 성장, 그것도 극적인 인구 성장이다."(225-6)
"서서히 농업 집약도와 인구 밀도가 증가했다. 무장한 전사들의 기습은 더 격하고도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가담한 무리가 클수록 전투 범위는 더 커졌다. 그리고 마을에 주민이 많을수록 기습으로 효과를 보거나 비밀 작전을 펼칠 가능성은 낮아졌다." 부족(연합)이 대규모 이주를 감행하면서, 이런 이동은 연쇄 반응과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얻게 될 전리품이 더 많고 중요할수록 양측 모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공개 전투를 벌이며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땅 자체가 걸렸을 때는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았을 것이다." "본격적인 공개 전투가 도입된 곳에서는 이따금 매복이나 계략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부족 집단끼리 통솔 대형이나 전술적 지휘를 동원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지휘자들은 대개 솔선수범하며 병력을 영웅적으로 이끌었다. 전쟁 지도자가 선두에 서고 부하들이 뒤를 따르는 게르만족의 유명한 '쐐기' 대형은 이런 영웅 유형 지도력의 표현일 것이다. 257-8)
"농업 확산으로 수렵채집인이 꾸준히 축소되던 단계는 이제, 경작에 부적절하더라도 가축을 사육할 수 있는 주변부의 땅을 언제 어디서든 목축민이 차지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이처럼 신석기시대인들 내에서 처음 일어난 중요한 경제 다각화로 인해 농경 사회에는 새로운 유형의 이동성 반半유목민 이웃이 생겼는데, 이들은 군사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수렵채집인들보다 훨씬 중요했다." "목축민들의 인구 밀도와 절대 수는 농경민들보다 훨씬 낮았음에도, 개별 사회집단의 크기는 농경민 집단과 대체로 같았다."(260-1) 정주 공동체들은 목축 부족민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시와 국가 조직을 갖추었지만, "목축민들은 허약한 도시경제의 기반을 이루던 취약한 농경 배후지를 야금야금 잠식함으로써 도시를 상당히 빠르게 쇠퇴와 몰락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과정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일종의 '체제 붕괴'를 일으키는 일상적 메커니즘을 제공했다. 272)
신석기시대와 초기 청동기시대의 동유럽-서아시아 스텝지대에서는 말이 큰 무리를 이루어 번성했다. "기원전 제4천년기에 현지 거주민들은 야생마를 대거 사냥하고 또한 가축화하고 있었다."(275) 가축화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지난한 과정이다. "말의 생물학적 민감성을 인간의 필요에 맞추기 위해서는 천 년에 걸친 점진적인 선택 교배 과정이 필요했다. 아울러 시간이 흐르면서 방법론과 하드웨어의 문화적 혁신이 일어나면서 가축화된 종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말타기가 아주 일찍 시작된 것 같다는 점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효과적인 말타기, 그리고 군사적 목적의 말타기가 문제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군마의 진화는 수천 년 동안 점진적인 여러 단계를 거쳤다. 이 과정의 마지막 주요 발전 가운데 하나─서기 500년경부터 시작된 등자의 발명과 확산─가 군사 기마술을 완성해냈다는 점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278-9)
"기마 목축과 기마 전투의 진화는 목축민의 위협을 크게 증대시켰다. 그러나 기마 목축 사회가 진화할 때쯤에는 농경 사회의 상황도 전과 같지는 않았다. 부족들과 작은 정치체들이 사라지고 국가와 거대 제국이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286) "권력과 권력관계는 더이상 친족 관계에만 기반하지 않았다. 족장과 '빅맨'은 이제 무장 종사, 종속민, 피호민을 이용해 사회적 거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개 지도자의 씨족이나 친척 씨족 출신이었지만 다른 씨족, 심지어 완전한 외부인일 수도 있었으며, 후원자와는 혈연을 능가하는 경제적·사회적 이익과 의무로 묶여 있었다. 엘리트 간의 유대도 부족과 혈연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서로 다른 부족 공동체의 족장들과 '빅맨'들은 서로를 습격하기도 했지만 귀한 물건과 굳건한 동맹, 신성한 우정을 교환하면서 제삼자에 맞서기도 했고, 종종 '부족의 이익'을 배반하면서까지 서로를 지원해 자기 부족 내의 경쟁자와 적수에 맞서기도 했다.(289)
"국가의 진화는 농업으로의 이행과 농업 성장으로 촉진된 과정에 따른 거의 '필연적인' 정점이자 결실이었다─적어도 적당한 조건이 주어진 곳에서는 그랬다. 이는 지구상에서 국가가 처음 등장했던 네 곳인 근동, 중국 북부, 중앙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이 하나같이 농업 혁명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로 명백하게 입증된다."(314-5) "무장 세력은 국가 형성과 관련해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든 특징들을 빚어내는 힘이었다. 독립적이던 예전의 족장들을 강압과 영입을 통해 하나의 종주 체제에 통합함으로써 국가의 중핵을 확대하고, 새로운 범凡엘리트 내의 친족 유대 및 친족을 초월한 제도라는 두 가지 장치로 국가 통치를 강화하고, 종주가 군대·사법·종교의 최고 권한을 장악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관료제화와 문화 융합, 공동의 정체성 형성을 통한 영토의 통합에 의해 더욱 통일된 국가로 바꾸는 일은 모두 무장 세력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322-3)
# 국가 등장의 토대들
1. 농업의 집약화
2. 인구 성장
3. 경제적·사회적 계층화의 심화
4. 주술과 공동 의례
5. 무장 종사단을 거느린 빅맨과 족장의 권력
"무장 집단은 국가 구조 밖에서도 계속 중요했다. 일단 '국가 구조' 자체가 매우 느슨한 개념이었으므로, 지역 권력자들은 자기 수하들과 지역 주민에 대한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정당한 실권자로 여겨졌다. 더욱이 소국가와 패권적인 종주국뿐만 아니라 새로 등장하던 국가 간의 체계 자체도 실상은 대체로 작고 분열되어 있어서, 국가들 주변과 사이에는 많은 '변경지'가 있었다. 부족/야만인 경계지 외에도, 국가 영토 안팎의 무인지대에서는 특정 부족이나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무장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법이나 피의 복수를 피해 달아난 탈주자, 폐적되거나 버려진 서출, 장자가 아닌 이들, 망명한 귀족, 채무자, 도망 노예, 또는 단순히 노략질과 모험적인 생계방식을 택한 빈농들로 잡다하게 구성되었다. 소국가는 작았고 큰 국가의 경우에도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무장 집단─수백 명에 이르는─은 규모가 클수록 지배 권력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었다."(356-7)
"도시국가에서 놀라운 점은 도시가 주변 시골 인구의 많은 부분, 아니 대부분을 융합하고 그 핵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도시국가를 탄생시킨 과정이다. 수메르인 도시국가 인구 가운데 무려 80~90퍼센트가 도시들 안에 살았다고 추정되는데, 이들 도시를 그렇게 만든 것은 기원전 제4천년기 말과 제3천년기 초에 있었던 시골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었다. 이 특이한 데이터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산업사회 이전 사회의 경제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구의 80~90퍼센트가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일부 도시국가가 시골에서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공예 및 원거리 무역 중심지가 되었을 때에도 인구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했다. 도시 인구 대부분이 농민으로서 날마다 가축을 끌고 들판과 농장을 오갔던 것이다." "농민의 도시생활양식이라는 역설이 생긴 이유는 방어적인 제휴 때문이었다."(368-9)
"대체로 도시 요새 진화의 순서는 전 세계에서 거의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흙과 자갈과 목재 구조물에서 시작해서, 갈리아 도시들에서 보듯 돌 외장을 덧붙인 '중간적 형태'를 거쳐 벽돌과 돌 구조물로, 그리고 마침내 순전한 돌 구조물로 진화했다. 이와 나란히 방어용 울타리를 두른 도심 공간은 대개 요새화된 큰 시민 중심지를 거쳐 완전히 에두른 성벽으로 진화했다." "이것은 투자와 정치적 협력이 필요한 대공사였다. 종전의 느슨한 농촌 겸 맹아적 도시의 친족-부족사회를 통합하는 국가 권력의 성장은 이 모든 과정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였다."(384-5) "어디서 등장했든 간에 맹아적 도시국가─흔히 말하는 코뮨─는 지역 귀족의 지배를 뒤흔들려고 했고, 어디서든 그렇게 하기 위한 수단은 시민들, 주로 지역·자치구·길드에서 조직되고 직공과 농민으로 구성된 대규모 보병대였다."(389)
"도시국가들 사이의 아주 가까운 거리와 작은 영토, 단기 군사작전 등으로 인해 인력 동원은 전에 없이 쉬워졌다. 국가 이전의 부족사회, 족장사회, 계층화된 환절 사회나 여타 정치체의 경우와 달리 가까이 있는 작은 밭, 과수원, 목초지를 지키기 위한 집단 협력은 확실히 사리 추구의 성격이 강했고, '무임승차'와 수동적인 '이반' 형태를 강력하게 좌절시키는 집단 제재를 통해 친밀한 도시국가 공동체 안에서 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적의 무리가 도시국가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목격되면, 그 즉시 도시의 남자들에게 무기를 들라고 알려서 적에 맞서고 약탈을 중단시키기 위해 진군할 수 있었다."(398)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결집된 민중의 강한 세력만이 아니었다. 이웃 도시국가에서 민중 기반의 대규모 보병대가 등장하자, 귀족이 이끄는 군소 정치체들은 이런저런 형태로 민중을 포섭해 군대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그래서 불가피하게도 정치적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국가 간 분쟁에서 생존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도시국가 형성은 다시 자기강화와 확장─'전염'─과정을 걸으면서 정치체 내부와 정치체 간의 상호작용을 일으켰다."(402)
"로마 체제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특이한 요소는 그것이 창조해낸 거대한 시민층이었다." "국내 시민 인력의 규모와 패권으로 동원할 수 있는 종속적 '동맹'의 인구 규모에는 뚜렷한 관계가 있으므로, 로마의 방대한 시민층은 거꾸로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패권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번 인력을 동원할 때 이처럼 인력 가운데 상당하지만 한정된 일부만 동원함으로써 로마는 몇 년씩이고 전쟁을 지속하면서 적을 지치게 만들어 쓰러뜨릴 수 있었고, 군사적 역전을 당하거나 재난이 닥쳤을 때마다 새로 모병할 수 있는 엄청난 인력 자원에 늘 의존할 수 있었다."(419-20) "오랜 군사작전, 장기간의 포위, 수비대 복무가 표준이 되어가고 있었다. 큰 도시국가는 복잡해진 투입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채택했다. 병참, 재정, 조직─모두 도시국가의 전성기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초보적이었거나 또는 시민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책임졌던─은 이제 훨씬 복잡한 국가의 일이 되었다."(423)
"말의 가슴과 어깨에 거는 마구가 동물의 목과 복부에 걸어서 숨통을 조이는 단점이 있던 고대의 비효율적인 마구를 대체하며 제1천년기 동안 유라시아를 통해 퍼져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수레와 쟁기를 끄는 일은 황소의 몫이었다. 게다가 말을 먹이는 것은 전문적이고 값비싼 일이었다. 따라서 정주 사회에서 말은 엘리트의 소유물이었다. 말은 실용적이기보다 비싸고 사치스러운 소유물이었고, 그런 이유로 위신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435) "마력馬力은 나머지 사람들과 비교해 귀족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귀족을 정예 기마병력으로 바꿈으로써, 국가 중앙권위와의 관계에서도 엘리트층의 입지를 강화했다." "중앙 관료제화가 반대쪽 극단으로 흐를 경우 지역 지도자들이 권력을 위임받고 전유하여 결국 권력이 조각나기도 했고, 더 나아가 중앙의 권위가 사실상 무너지기도 했다. 마력은 이런 중앙집중화-파편화 긴장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438)
"봉건제와 관련해 무엇보다 유의할 점은 봉건제가 한결같이 국가 구조의 산물이었다는 것, 그리고 국가의 완전한 해체로 귀결되지 않는 한 분절적 형태로나마 국가 구조의 한 형태로 남았다는 것이다. 봉건제는 완전히 지역화된, 친족에 기반하는 족장사회와는 융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봉건제는 큰 국가들에서 특징적으로 진화했다." "봉건제는 중앙권위로부터 토지 수여를 바탕으로 존속하는 기마전사들과 영주들 쪽으로 지역-지방의 정치권력과 사법권력을 끌어당기는 중력이었다." "여기서 핵심적이지만 충분히 인정되지 않는 요인은 모든 전근대 국가의 예산에서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항목, 흔히 예산을 대부분 차지한 항목이 군사비였으며 기병이 가장 비싼 병과였다는 것이다. 기병이 가장 중요했던 곳에서는 국가의 운영과 기병을 육성하고 유지하는 능력이 거의 같은 의미일 정도였다. 이 엄청난 과제가 봉건제를 낳았다."(440-1)
# 봉건제 등장의 세 가지 요건
1. 말을 소유한 사회
2. 전쟁 도구로서 말을 선호하는 환경
3. 소규모 농업경제 국가가 값비싼 기마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귀족층에게 군역의 대가로 토지를 수여하고 조세 대신 지대를 받는 상황
※ 주왕조 시대 중국, 중세 유럽, 중세 일본
"봉건제의 쇠퇴를 초래한 것은 외부 요인이나 내부 요인 때문에 영주-장원 '생산양식' 안에서 발생한 특수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도시생활양식이라는 하부구조의 발달이었다. 11세기와 12세기에 봉건제가 절정에 이르는 동안, 도시가 성장하고 교역이 되살아나면서 통치자들은 수입원을 얻고 행정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는 영주들이, 중세 후기에는 군주들이 근위대(갈수록 봉급을 바탕으로 유지되었다)를 확대하고, 외국 용병을 고용하고, 현금 지급을 바탕으로 봉건적 소집군을 더 오랫동안 유지하고, 자유민들로 이루어진 민중 보병대를 도시와 시골에서 되살릴 수 있었다." "그들은 봉건화만큼이나 자기강화적인 과정을 따라 봉건 귀족을 상대로 꾸준히 권력을 키웠다. 그 결과 13세기부터 유럽의 체제는 더는 '순수' 봉건제 모델에 가깝지 않게 되었고 '준봉건제' 모델이나 국가적 영역통일체corporate state 모델로 전환되었다."(461)
말타기는 가축 떼를 데리고 목초지와 물을 찾아 훨씬 먼 거리를 이동해서 스텝지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었다. "그 결과 스텝지대의 강변과 오아시스 주변에서 반정주-반목축 생활방식에 따라 거주한 인구와 구분되는, 줄곧 이동하며 생활한 완전 유목민 집단이 등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집단이 농사를 짓는 이웃들과 관계를 완전히 끊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완전 유목민은 처음부터 농산물과 기타 물품을 얻기 위해 정주 인구와의 교환을 필요로 하는 공생적 존재였다." "말타기에는 전문적 장비가 필요하지 않았고, 목축-유목 경제와 생활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바로 그 말을 비할 바 없는 전쟁 수단으로 겸용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승용마乘用馬는 스텝지대와 농경지대 간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광대한 목초지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말을 다수 이용할 수 있었고, 사실상 부족의 성인 남성 전원을 포함하는 기마 군단을 창설할 수 있었다."(495-6)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 닫혀 있고 바위투성이인 서유럽의 지형에는 유목민의 말과 가축을 먹일 넓고 탁 트인 목초지, 즉 그들의 특수한 존속양식과 생활방식의 토대가 없었다. 스텝지대 유목민이 이주할 수 있는 최서단 경계는 언제나 헝가리 평원이었고, 여기서 그들은 중부유럽과 서유럽을 습격해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게다가 유목민 부족들은 정주형에 가까워질수록 전리품을 운반하기 위해 수레와 달구지에 더욱 의존했고, 그 결과 약탈 역량은 극대화되었지만 기동성은 떨어졌거니와, 적군에 가로막혀 꼼짝 못할 위험성이 커졌다. 다시 이 과정은 아틸라의 훈족, 마자르족, 크림반도의 타타르족에게 차례로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군사적 우위를 깨뜨렸다. 오스만 튀르크족은 아나톨리아 서부와 발칸 반도의 정주 사회들을 점점 더 직접 통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보병대와 공성병기를 만들어내는 한편 부족과 유목생활의 유산을 대부분 포기했다."(511)
"서양에서는 기병 역시 동양의 경무장 사격 전술과 반대로 중무장 충격 전술로 기울었는데, 그 이유는 앞서 보병과 관련하여 언급한 이유와 거의 같았다. 닫힌 지형과 가까운 군사작전 거리, 고르게 분포한 정착 거주지를 포함하는 반면 이동생활 인구와 넓은 개활지가 없는 조건에서는 치고 빠지기, 사격, 경기병 전술을 실행할 여지가 훨씬 적었다. 이런 조건에서 중무장한 충격기병 병력은 더 가볍게 무장한 적군을 훨씬 쉽게 따라잡고 격파할 수 있었다."(520) "동양에도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귀족 사이에서 육성된 완전무장 창기병(카타프락트cataphract) 같은 중무장 충격기병이 있었고, 서양에도 사격 경기병이 있었다. 그러나 상이한 조건으로 인해 서양에서는 중세의 기사騎士로 정점을 찍은 중무장 충격기병이 우세했다. 그렇다 해도 중무장 충격기병은 유럽사의 대부분 동안 중무장 충격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경기병, 그중에서도 특히 궁기병이 우위를 점했다."(523)
"근대성은 기술과 사회조직의 점진적 진화를 토대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문턱을 넘어가기도 했다. 1만 년 전 신석기시대에 이루어진 농경으로의 이행/혁명과 마찬가지로, 느리고 누적적인 과정이 도약 지점에 도달하자 전면적인 전환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부와 권력은 상호작용을 낳았는데 "첫째로, 이제 생산능력과 군사력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1500년 이후부터 "군사적 하드웨어─특히 화기─가 전쟁의 성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적 하드웨어를 생산하려면 발달한 기술적 하부구조가,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면 고도로 조직된 사회정치적 하부구조가 필요하게 되었다." "근대적 형태를 갖춘 부와 권력의 둘째 측면은 둘 다 극히 효과적인 복제기로서 모든 것을 정복하며 끊임없이 퍼져나갔다."(582-4)
"커다란 정치 블록은 경제적 복잡성과 기술 혁신을 촉진하는 등 의심할 나위 없이 몇 가지 이점이 있었지만, 이런 이점은 독점적·전제적인 중앙권위와 숨 막힐 듯한 제국 행정으로 인해 상쇄되었다. 예를 들어 제정 중국의 눈부신 성취와 지속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맹렬히 경쟁하는 '전국戰國'들로 국토가 쪼개졌던 시기(기원전 5세기부터 221년까지)에 중국의 문화적 유산이 대부분 형성되고 진화와 기술 혁신이 가장 빠르게 이루어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분열된데다가 다양한 국가들 사이에 권력이 더 고르게 분산되었던 까닭에 혁신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기가 더 어려웠다. 더욱이 정치체들 간의 격렬한 정치적·경제적 경쟁이 만연한 유럽의 체제에서 혁신을 받아들인 정치체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반면 혁신을 억압한 정치체는 불리한 위치에 설 공산이 컸다." 상대적 비효율성을 용납하지 않는 "이런 경쟁은 진화의 속도를 크게 높인 요인이었다."(588)
"1980년대 이래로 종족과 민족주의는 순전히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대다수 일족들이 받아들이는 깊은 정서─그들 각자가 공통 혈통이나 조상을 공유한다는─순전히 신화라는 주장이 유행해왔다." 그러나 유전적 현상과 문화적 현상을 이분법으로 나누려는 시도와는 달리 "대다수 종족들은 근대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자기 주위로 형성된 근대 민족주의의 핵을 이루었다. 별개 집단들이 뭉쳐서 형성된 종족이라 해도(대개 종족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충분한 시간 동안 두루 통혼하고 나면 새로운 유전적 표지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여기에 문화적 특성이 더해지면서, "민족적 공동체들은 유전적으로 연관이 있든 없든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특성 때문에 서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기능한다. 집단정체성을 형성하는 이런 복잡한 정신적 메커니즘의 원천과 작동을 외면할 경우, 인류 역사를 형성하는 가장 강한 유대의 일부를 필연적으로 오해하게 된다."(560-1)
"민족-영역 국가의 성장에 관한 학자들의 인식을 왜곡한 유럽 특유의 또다른 현상은 봉건제다. 앞서 지적한 대로 서유럽·중부유럽·북유럽의 민족-영역 국가들은 제1천년기 후반에 이 지역이 문명권으로 들어서자마자 곳곳에서 등장했지만, 중기병에 대한 선호와 부실한 국가 하부구조가 결합한 결과, 훗날 이들 국가의 중앙 정치권위는 봉건적 해체로 귀결되었다. 이처럼 중앙권위의 공백기가 있었던 까닭에 학자들은 1200년경부터 국왕의 권력이 부활하고 서로 비슷하게 기능하는 국가들이 등장한 현상을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의 시작으로 해석했고, 13세기에 민족-영토 국가가 탄생했다고 추정했다. 민족-영토 국가가 실은 유럽에서 나타난 새로운 발전이 아니라 1200년경 유럽에서 재등장한 발전이었음을 감안하면, 민족-영토 국가가 진화한 원인으로 훗날 나타난 근대성의 새로운 요소들, 이를테면 베이컨이 말한 세 가지(화약, 대양 항해, 인쇄기)를 꼽아서는 안 된다."(592)
수백 년간 진행된 '군사혁명'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인 육군 규모의 확대에 이바지한 요소는 "보병의 부활과 급증이었다. 대다수 육군들의 절대적 규모가 커진 것은 비용이 기병의 절반 밖에 들지 않는 보병 때문이었다. 이 과정 역시 1500년경에야 널리 쓰인 보병 화기가 사용되기 한참 전부터, 그런 화기와 무관하게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점을 입증하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14세기와 15세기에 기병대에 맞서 압승을 거둔 잉글랜드의 장궁 대형과 스위스의 장창 대형이었다." 보병의 확대를 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군사혁명'의 또다른 주요 요소인 "화기 방어시설의 도래다. 화기가 야전뿐 아니라 포위전의 양상까지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의 예리코부터 역사시대 내내, 방어시설(기본 건축술은 놀라울 정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의 정점은 적의 습격을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높은 장막벽curtain wall이었다. 화력은 이런 유형의 방어시설에 종지부를 찍었다."(597-8)
'군사혁명'의 주된 비용은 병력에 지급하는 급료와 물품 비용이었다. "분명히 높은 수준의 분쟁은 전쟁에 동원하고 할당하는 자원을 늘린다. 그러나 중요한 이권, 특히 가장 중요한 이권을 둘러싼 투쟁에 휘말리거나 군비 경쟁에 갇혔을 때, 적대하는 세력들은 대체로 무력을 최대한 동원하려 분투하고 으레 자기 역량의 한계를 넓힌다. 서로를 능가해야 하는 그들의 상호적 '필요성'은 방어시설이 중요한 역할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더 많은 투자, 무엇보다 더 큰 군대에 대한 투자로 나타난다. 역사를 통틀어 분쟁 수준이 높을 때면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점에서 근대 초기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필요성은 무한할지라도 자원은 그렇지가 않다. 근대 초기 유럽 육·해군의 규모와 전비가 꾸준히 증대했다 해도, 그것은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강국들이 이전보다 자원을 더 많이 동원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군비 경쟁이 단계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611-2)
국가 통치자들은 "13세기부터 전쟁에 자금을 대기 위해 신용거래에 의존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원천이 있었다. 하나는 유럽의 커다란 무역 도시들에 축적된 막대한 자본이었다. 국가 통치자들은 전제 권력이 없었고 여하튼 무역과 은행업 중심지 일부는 그들의 국경 바깥에 있었으므로,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금융 시장에 의존했다." 그러나 전비가 급증하면서 국가의 채무 불이행 위험이 높아지자 융자는 예전보다 드물어졌다. 이를 보완하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국가는 주로 민간과 군대의 직위를 팔아서 이 자원을 이용했다. 현금을 투자해 직위를 구매한 개인들은 다년간 때마다 국가 급여를 받는 방법뿐 아니라 이익을 얻을 기회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를테면 국가가 연대와 중대 병사들에게 급여와 물품을 지급하라며 할당한 금액과 같은 공금을 횡령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투자금을 환수했다. 여기서도 신용거래라는 손쉬운 유혹은 비용의 악순환을 낳고 비효율성을 배가했다."(632-4)
"그러나 유럽의 일부 국가 엘리트층에게 부를 얻는 방안으로 상업적 폭리 획득이 강제 징수보다 갈수록 유망해졌다 해도, 그리고 국가 리바이어던이 전 영역에서 평화로운 자유무역을 보호할 수 있었다 해도,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줄곧 폭력 분쟁이 경제적 경쟁과 마구 뒤섞였다. 역사를 통틀어, 무역상들은 그들이 충분히 강하기만 하면 자원 및 시장을 공개 경쟁하여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대신 물리력으로 독점하려고 분투했다. 그렇지만 이제 게임은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경쟁자들은 규제와 관세 때문에 타국의 국내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으며, 그들에게 상업적 양보를 강요하고 그들을 약화시키고 식민지와 외국시장에서 몰아내려는 의도로 벌어지는 전쟁의 압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중상주의라는 딱지가 붙은 이 상업-군사 복합체는 17세기와 18세기에 대서양과 북해, 발트 해 연안에 자리잡은 강국들 사이에 끊임없이 벌어진 전쟁 이면에서 작동한 주요 추동력이었다."(638-9)
"전쟁을 위해 이처럼 막대한 자본 축적을 이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고도로 전개된 적자재정 정책이었다. 몰수나 과세와 달리 이 방법은 부자와 사회 유력자들이 자본을 감추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몰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투자한 민간 자본을 국가가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외국의 자원까지 유인했다. 그렇지만 쉽게 빌린 돈을 지금 이용하려면 미래를 저당잡혀야만 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 신중한 투자였고, '자본 차입'에 기초한 모든 투자와 마찬가지로 고위험-고수익 투자였다. 신용 대부를 받으려는 다윈주의적 경쟁이 점점 더 강국들의 군비 경쟁을 지배했다. 모든 강국이 한계와 그 너머까지 돈을 빌려 막대한 빚을 졌다." "영국이 '자본 차입' 경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유일한 이유는 승리를 거두어 식민 제국과 국제적 무역을 주도하는 위치를 차지했고, 이로써 경제가 크게 팽창하는 시기에 국내 경제 또한 부양했기 때문이다."(639-40)
"새로운 의회 체제이자 무역 제국인 잉글랜드의 전쟁을 외국 용병들과 함께 수행할 토착민 직업군대는 17세기 후반에 생겨났다. 이들은 군사 원정을 수행하는 정규군이기도 했다. 그러나 젠트리 엘리트층을 국가에 끌어들인 의회제 잉글랜드는 여전히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 민중이 선거권 없이 억압당하는 사회였다. 그 결과, 민족 감정과 자긍심이 결코 없진 않았음에도 사회적으로 하층민이고 풀이 죽은 정규병들─이들과 함께 나폴레옹을 물리친 웰링턴 공은 무례하게도 이들을 가리켜 '인간 쓰레기'라고 말했다─은 싸우려는 의욕이 별로 없었다. 구체제의 다른 군대들과 마찬가지로, 이 정규병들을 군대와 전선에 묶어두기 위해 엄한 규율과 체형이 마련되었다." "근대 초기 유럽에서 국군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1630년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와 함께 독일에 상륙한 스웨덴군이었다." "스웨덴은 봉건제가 거의 자리잡지 못한 나라이자 국회Riksdag에 농민 대표가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648-9)
# 국민군은 미국(대륙군과 민병대 조합)을 거쳐 혁명기 프랑스와 나폴레옹 제국(대규모 국민개병제)에서 절정에 이른다.
"산업-기술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는 기술 혁신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까닭에, 한 세대에서 최고의 무력이라 해도 다음 세대의 중무장한 병력과 정면으로 대결하기란 불가능하게 되었다."(684) "그렇지만 이 모든 혁명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특히 육지에서 더욱 그랬다. 경제 분야에서 그랬듯 군사 분야에서도, 증기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활동 영역은 육체를 필요로 했으며 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육군은 전장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전신을 통해 쉽게 통제받으면서도, 일단 전장에 도착하고 나면 첨단 통신이라는 정점에서 나폴레옹 시대로까지 추락했다. 육군의 군사작전과 전술적 기동성은 여전히 인간 근육의 제약을 받았고, 육군의 포와 보급품은 말이 끌었다. 제1차세계대전 기간에 강대국들의 육군에는 말이 수만, 수십만 마리씩 있었다. 미리 전신선을 설치할 수 없는 야전에서 지휘와 통제는 걷거나 말을 타는 전령병을 이용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686)
"게다가 화력은 10배 이상 증대한 반면, 병사들은 개활 전장에서 산개하여 은폐하는 동안 강철 폭풍을 막아낼 방편으로 여전히 자기 피부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그 결과, 1차대전 기간에 서부 전선은 살인적인 교착 상태로 빠져들었다." 1880년대부터 일어난 2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지배한 것은 "화학 물질과 전력, 내연기관이었다. 화학산업은 새로운 폭발물들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고 오래지 않아 화학전을 야기했으며, 전기 또한 무선통신을 비롯한 다양한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내연기관이었다." 내연기관은 기계화된 공중전은 물론 "해전 일반에 혁명을 일으켰다. 전기를 이용하는 내연기관의 이중 추진 덕분에 1900년 최초로 운용 가능한 잠수함이 등장했고, 반면 포를 탑재한 전함은 항공기 출현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잠수함과 항공기 역시 1차대전 기간에 군사적 데뷔를 하여 2차대전 기간에는 해전을 완전히 지배했다."(686-8)
# 3차 산업혁명(정보혁명) : 전자공학 기술 적용(레이더)
19세기를 어지럽힌 강대국 간의 전쟁 원인은 무엇일까? "안보를 이유로 일어난 크림 전쟁(1854~56년)을 빼면, 이 전쟁들은 이탈리아의 통일로 귀결된 1859년 전쟁, 미국 남북 전쟁(1861~65년), 독일 통일 전쟁(1864년, 1866년, 1870~71년)이었다. 분명 이 전쟁들 모두 다양한 동기들로 인해 일어났지만, 가장 깊고 가장 격앙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민족 통일, 민족 독립, 민족 자결, 민족 정체성 같은 쟁점이었다. 유럽 전역의 일반적인 군사적 분쟁도 마찬가지였다. 폭력 분쟁이 빈발한 지역들의 특징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민족적 봉기가 되풀이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지역으로는 정복당해 분할된 폴란드, 외세의 지배를 받은 파편화된 이탈리아, 분열된 독일, 잠시 네덜란드에 속했던 훗날 벨기에의 영토, 억압당한 아일랜드,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된 헝가리,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발칸 반도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을 야기하는 원인은 "경제가 전부는 아니었다."(695)
# 민족주의가 근대에 와서 널리 퍼지게 된 요인
1. 철도와 통신 기술이 발달하여 지리적, 시간적 친연성이 강화되면서 언어와 생활양식 등이 융화됨
2. 공동사회가 이익사회(를 넘어 대중사회)로 전환되면서 친족 간의 유대감은 약화되고 민족 개념이 그 자리를 대체
3. 국가 교육제도와 언론 매체, 징병제가 민족의 에토스를 촉진
특히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식민지 쟁탈전은 "영국이 방어를 위해 팽창하면서 다른 국가들의 '안보 딜레마'를 촉발하고, 이후로 더욱 팽창하면서 관련된 모든 국가에서 민족주의 추세를 강화하고 독점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기 시작한 사태였다. 자유무역을 하던 영국은 갈수록 공식 제국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기울었다. 공식 제국이 제한된 전략적 지역들에서 안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필요했고, 다른 보호주의 열강이 저마다 공식 제국을 팽창하기 시작하자 더 일반적인 선제 정책으로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국은 자유무역을 지키기 위해 공식 제국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보호주의 열강에게 토지 강탈의 선제적 측면은 분명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714) "바로 여기에 강대국들이 벌인 양차 대전의 씨앗이 있었다. 산업적-상업적 세계 경제가 개방되지 않고 분할될 것이라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압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717)
"좌파 계열이든 우파 계열이든 전체주의는 과거의 역사적 전제정들과 다른, 20세기 들어서야 등장할 수 있었던 명백히 새로운 유형의 체제였다. 전체주의는 19세기 말부터 당대인 누구나 자신의 시대를 규정하는 특징이라고 날카롭게 의식했던 발전,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발전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 발전이란 바로 대중사회의 등장이었다."(720) "어떤 요인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 우위를 선사했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어떤 강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미국의 현존이었다. 20세기 민주주의의 승리에 관한 연구들은 이 '미국 요인'을 대체로 간과했다. 달리 말해 미국이 없었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20세기의 대규모 투쟁들에서 십중팔구 패했을 것이다. 이 생각으로 정신을 차리고 나면, 대규모 투쟁들에 의해 창출된 세계를 단선적 발전 이론들과 휘그적 역사관 및 진보관을 믿을 때보다 훨씬 더 우연적인─그리고 허술한─산물로 바라보게 된다."(731)
"19세기의 어떤 국가가 자유주의 또는 민주주의 국가인지 결정하는 작업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가령, 노예제가 있었던 남북 전쟁 이전 미국을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국가로 간주할 수 있는가? 19세기에 대다수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선거권은 보통선거권이 아니었다. 이들 국가는 노예와 여성을 선거에서 배제했을뿐더러 재산과 교육을 기준으로 투표하고 선출될 권리를 제한했고, 이 기준을 단계적으로 조금씩만 완화했다."(745) "몇몇 경우, 전쟁을 피하도록 결정하기까지 더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것은 서로 공유하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통적인 세력 균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 내내 체제가 비슷한 국가들은 서로 곧잘 싸웠다. 그렇지만 때로는 분쟁 상황에서 국내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경우에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비슷한 국가들은 중대한 사안 때문에, 그리고 국내의 적들에 맞서 서로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대 진영에 대항해 동맹을 맺곤 했다.(747-8)
"페인 및 칸트의 논리와 반대로 고대 민주정 아테네에서 민중은 줄곧 가장 호전적인 요소였다. 정치이론가들은 오히려 민주정들과 공화정들이 평화롭기보다 호전적이었고 흄의 말마따나 '경솔한 결기imprudent vehemence'를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대중은 고전 고대 이래로 위기시에 변덕스럽고 무모하다는 평판만 얻었던 것이 아니다. 민족의 명예와 영광 같은 문제로 그들을 쉽고도 강하게 자극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드러났다. 이 경향은 프랑스혁명기에 전쟁을 치르는 동안 다시 나타났으며, 훗날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3세, 비스마르크를 비롯해 혁명적 지도자들과 보수적 지도자들 모두 이 경향에 의존했다." "자유주의 국가 영국을 크림 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주로 대중의 압력이었다. 쇼비니즘적이고 호전적인 대중의 광란을 뜻하는 '징고이즘jingoism'이라는 말 자체가 민주화를 강화하고 있던 19세기 후반의 영국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751-2)
"그렇다면 아테네와 로마의 시민들은 어째서 거듭 전쟁에 찬성했고 손실과 파괴, 궁핍, 전쟁 피로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수 년간 참혹한 지구전을 감내했는가? 근대 사회들보다 아테네와 로마가 덜 민주주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 나라가 살아간 농업 시대에는 전쟁을 통해 엄청난 물질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 사이의 균형은 산업화가 도래하고 나서야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부는 더이상 한정되지 않았고 되레 어리둥절할 정도로 급증했다. 농업 생산, 즉 토지는 더이상 부의 주요 원천이 아니었으며 국내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한 산업 생산에 의해, 그리고 훗날 서비스-정보 경제─이 경제에서는 원재료의 중요성이 급감했다─에 의해 대체되었다. 또한 생산이 다른 무엇보다 시장을 지향하게 되면서 교환 이익이 증가하고 상호의존도가 높아졌다. 예전과 달리 이제 적의 경제적 파탄은 자국의 번영에 해가 되었다."(760-1)
# 그 밖의 독립적인 연관 요인들
1. 부富와 안락함
2. 대도시의 서비스 사회 (육체노동 감소)
3. 성 혁명 (젊은 미혼 남성의 공격성 해소 방편)
4. 젊은 남성 수의 감소
5. 가족당 자녀 수의 감소? (자녀 생명에 더 민감)
6. 여성의 선거권
7. 핵무기
세계의 모든 국가가 풍족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고 집단 안보가 대체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전략적 정책은 전형적으로 한 가지 패턴을 따랐다. 고립주의에서 유화로, 유화에서 봉쇄로, 봉쇄에서 냉전으로, 냉전에서 제한전쟁으로, 그리고 피치 못할 경우에만 제한전쟁에서 전면전쟁으로 한 단계식 대응 수준을 높이는 패턴이었다."(790) 자유주의 국가들이 탈식민 전쟁에 휘말리는 동안 "비자유주의 열강은 토착민을 억압하는 제국 전쟁에 덜 관여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아주 효과적으로 억압한 까닭에 저항이 반란으로 확대되지 못했고 또 반란이 불타오르기 전에 진압했기 때문이다. 호전성에 관한 연구들은 비민주주의 제국의 평화가 성공적인 억압과 테러에 달려 있었음을 잊곤 한다. 과거 독일과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패권 영역은 억압과 테러로 유지되었다. 이는 '짖지 않은 개'처럼 자칫 간과하기 쉽지만 중요한 측면이다."(808)
"반란군들이 얻은 불굴에 가까운 이미지는 대개 변변찮았던 그들의 군사적 효력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들이 적의 정규군을 무력으로 물리친 경우는 아주 드물었고, 적에게 입히는 손실보다 그들 자신이 입는 손실이 훨씬 컸다." "사실 양차 대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소모전을 전략으로 선택한 쪽은 민주주의 국가들이었고, 이에 반해 독일과 일본은 번개 같은 군사작전으로 승패를 빠르게 판가름하고자 했다." "메롬이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한참 뒤진 사회들에서 전개된 장기간의 반란 진압전에서 패배하는 경향을 보였다. 민간인 인구에 대한 폭력을 스스로 제한한 탓에, 대개 성공을 거두었던 군사작전도 결국엔 무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국민들 상당수(의 자유주의자)가 깨닫고 나서야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전쟁 지속을 포기했다."(814)
19세기 후반에는 테러가 한층 효율적인 방법으로 등장한다. "고성능 폭탄과 자동화기는 개인과 소집단에게 그들의 수에 비해 손상을 많이 입히는 능력을 주었다. 또한 열차와 그 이후의 자동차는 그들에게 국경을 가로지르는 기동력을 주었다. 그리고 전보와 대중 신문은 그들의 활동을 전국에 알리고 반향을 일으킴으로써 어쨌거나 아주 제한된 행위인 공개적 '테러'의 효과를 엄청나게 확대했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정치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것이 19세기 후반에 러시아나 여타 유럽에서 등장한 무정부주의 테러리즘과 20세기에 등장한 반식민주의 테러의 물질적 토대였다. 테러에 휘둘리기 제일 쉬웠던 쪽은 이 경우에도 자유주의 국가들과 구식 권위주의 국가들이었다."(822-3)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낙후된 지역에서 횡행하는 "대량살상무기 확산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비공식 제국주의', 비개입 공존, 직접 경제 원조, 유화, 봉쇄 등 서로를 강화하는 접근법들을 결합하는 편을 선호한다."(838)
그렇지만 민주주의 평화론은 몇 가지 중대 요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첫째, 윌슨과 그의 후계자들이 군사 개입─멕시코, 도미니카공화국, 아이티,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과테말라에서─을 비롯한 개입을 통해 민주주의를 수립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민주주의는 모두가 바라는 것도, 무조건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화는 단계적인 과정일 것이며, 지나치게 압박할 경우 적정한 다원성을 근근이 유지하며 근대화중인 국가-사회들의 안정을 위협해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대체로 민주주의의 채택은 한낱 의지의 행위가 아니라 경제·사회 근대화와 병행하여 전국 규모로 진행된 일이었다. 경제 근대화, 사회 전환, 민주화는 줄곧 긴밀히 얽혀 있었다." 둘째로 "민주주의 평화 현상은 자유화, 민주화, 경제 발전의 초기 단계에 훨씬 약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아랍과 무슬림 국가들의 민주화로 인해 이들 사회의 호전성이 감소할 것인지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841-3)
종족과 민족을 적절히 통제하고 번영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자유민주주의적 처방전은 그 효과가 제한적이다. "종족들이 분열된 나라는 민주화를 통해 종족들에게 자결권이라는 선택지를 주고 나면 쪼개지는 경향이 있다. 종족성과 민족주의는 19세기와 마찬가지로 20세기에도 분쟁과 전쟁의 주된 원인이었다."(852)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와 20세기에 강대국들이 서로 싸운 햇수는 그 이전 세기들에 비하면 3분이 1 수준이었다. 전쟁을 저지한 주된 요인은 전비가 아니라(상대적인 인구와 부를 고려하면 전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맬서스의 덫이 부서지고 나자 극적으로 증가한 평화의 이익이었다. 이처럼 평화에 따르는 이익이 늘어남에 따라 시장을 지향하며 경제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독립성을 높여가던, 산업화중이거나 산업화된 사회들(체제와 무관하게)에 유리한 쪽으로 전쟁과 평화의 전반적 균형이 기울어졌고, 부의 획득이 더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게 되었다."(849)
국가 전쟁이 특히 치명적·파괴적이라는 그릇된 인상과 달리 인간 싸움에 따른 사망자 수는 국가 치하에서 줄어들었다. "첫째, 국가 치하에서 인간의 치명적 폭력은 국내와 국외에서 확연히 구분되었으며, 국가 영역 안에서 비국가 폭력은 불법화되고 국가의 권위에 의해 대부분 제압되었다. 그래도 환상은 금물이다. 사회 안에서 폭력적 죽음의 비율이 낮아진 까닭은 대개 폭력이 승리했기 때문이지 어떤 평화로운 합의 때문이 아니었다." 무력에 의해 창출되고 유지된 국가사회들은 비록 무력의 산물이기는 해도 "비교적 평화로운 민간생활, 인구가 조밀하고 복잡하고 질서 잡힌 사회, 분업이 발달한 규모의 경제, 그리고 문자문명에 필수인 전제조건을 만들어냈다." "선진 산업-기술-자유주의 사회에서 전쟁의 역할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기는 해도, 전쟁은 국가와 문명의 성장에 영향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기도 했으며 놀라운 문화적 도약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858-9)
"전쟁의 근원을 개인이나 국가, 국제 체제의 본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이 세 '수준들' 각각에 있는 전쟁의 원인은 불가피하지만 불충분한 원인이며, 전체를 조각들로 쪼개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폭력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는─뿐 아니라 그 결과로 나타나는 권력 추구, '안보 딜레마'를 부채질하는 상호 불안 상태까지도 모두 인간 본성에 따라 주조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조되는 것은 인간들이 지질학적 시간 동안 필요와 욕구, 권력 추구, 상호 불안이 말 그대로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던 생존 투쟁 과정에서 진화의 압력을 강하게 받으며 형성되어왔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전쟁은 인간 동기체계 전반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 욕구의 대상들과 동일한 대상들을 얻기 위해 수행해온 것이다. 전쟁이란 정치의 연속이라는 유명한 표현대로, 정치는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들의 목적들과 동일한 목적들을 국내 '수준'과 국가 간 '수준'에서 성취하려는 활동이다."(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