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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 현대성의 형성-문화연구 10
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장 현대를 바라보는 눈
"현대 혹은 모던이라는 말은 1920년대 이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익숙한 유행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1920~30년대에 들어서였다. 물론 1920~30년대에 꽤 널리 쓰였던 현대 혹은 모던이라는 말들 또한 지금 우리가 말하려는 '현대'와 동의어는 아니다. 예를 들면 '모던'은 그 자체로 모던풍 즉 현대적인 스타일을 말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걸이나 뽀이, 룸펜, 인테리, 빠 등등 서양말의 다발을 묶을 수 있는, 어떤 경향성을 말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현대성을 역사상의 한 시대로 고려하는 것보다 일종의 태도로 생각해보려 한다면, 1930년대의 '모던'은 서구적인 삶의 패턴을 지향하려는 의식적인 태도이자 행동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당시의 현대란 '동시대' 그리고 '바깥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현대라는 말은 적어도 시간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조선에서 공간적으로는 부재하는 이율배반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새로운 단어였다."(23-5)
"개조와 개발, 개혁과 혁신, 문명과 진보라는 용어는 개항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으며, 개화된 세계가 만들어낸 문화 속에서 살고자 하는 문화주의와 문화생활은 삶의 새로운 가치로 떠올랐다. 지식인들은 사회의 개조, 가족의 개조, 교육의 개조, 여자의 개조, 인간의 개조, 민족의 개조를 지상과제로 삼았으며 봉건적인 유습이 남아있는 모든 제도와 가치를 '개조'를 통해서 개조하려고 했다. 개조는 열강의 침탈에서 오는 위기감과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잇는 유일한 대안이었으며 문명진보된 세상으로 향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런 측면과 함께 봉건에 대한 결별을 보다 분명하게 실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주의의 등장에 의한 것이었다. 내셔널리즘은 서구중심의 현대적 프로젝트에 대항하는 경계 밖의 유일한 대안으로 등장했으며 이를 통해서 현대사회로의 진입을 꿈꿀 수 있는 이데올로기였다."(31-2)
이성을 향한 무한한 신뢰로 대표되는 모던 프로젝트가 구축한 "문명에 대한 회의 혹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서구의 관념론이 계몽기의 조선에서 개조론으로 등장했을 때, 조선의 모던 프로젝트는 방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특히 서구의 현대화 과정과 조선의 경우를 등가로 놓았을 때 개조론은 매우 곤혹스러운 논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일련의 계몽주의적 프로젝트가 실현되지 않은 조선으로서 산업화와 문명에 대한 회의론적 태도는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엉뚱하게 현대화의 논리는 정신주의적이고 관념적인 개조의 논리로 빠져들어갔으며 이런 정신적 '개조'가 식민지배에 부합되면서 곧 뒤틀린 현대화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적 문명이라는 물질적 토대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그 토대를 위한 경제적 프로젝트들이 실현되기 시작할 무렵에 물질에 대한 회의론에 바탕을 둔 정신적 개조의 사고들은 현대로 진입하는 과정 자체를 관념적으로 몰고갔다."(34-5)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사상과 함께 서구의 모더니즘의 여러 움직임들이 다시 한번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다시 현대를 지칭할 수 있는 말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바로 '신흥新興'이라는 말이었다." "신흥이라는 말이 현대를 지칭하는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 노동자혁명에서처럼 전혀 다른 차원의 현대화 프로젝트가 가능하다는 의식이 지식인들의 사고 속에 자리잡으면서 사회주의 사상이 퍼진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신흥은 막연한 모던의 환상과 반봉건의 계몽적 의식이 아니라 문명이나 개조나 문화가 이룰 수 있는 사회적 정체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반발과 역동의 진보적인 인식이었다. 관념적 개조론과 교양주의적 문화주의에 의한 조선의 계몽적 사고들이 사회의 체제와 구조에 대한 인식의 결여라는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면 신흥사상은 이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듯 보였다."(38-40)
"(1920년대 말에 이르면) 이제 개조라는 말은 점차 사라지고 문화라는 말도 더이상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새롭게 등장한 '모던'이란 말에는 개조와 문화가 지니고 있던 계몽주의적인 무게가 더이상 실려있지 않았다. 식민지가 점점 뿌리깊게 자리잡힐수록 한편으로 그 상황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적인 의식이 깊어갔지만, 더 어찌해볼 수 없는 일상의 현실은 계몽적인 힘을 점점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현대는 이제 계몽주의자의 엄숙한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 속의 발랄한 모더니스트를 통해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라는 거대한 사회문화적 흐름이 계몽적인 의식이나 독점화된 문화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이 시기로부터 우리는 낯설지 않은 '현대인'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때의 모던은 굳세게 지향해야 할 의지로서가 아니라 경박하고 자유분방하며 천박스러운 유행으로 등장한다."(42)
2장 물질과 과학의 시대
"발전모델로서 서구, 동시대적인 보편성으로서 세계화, 자본의 궁극 원리로서 물질적 평등성을 반영하는 이러한 패러다임은 곧 현대적인 삶의 궁극적 가치지향점이었으며 이는 물질로 보장되는 행복과 이익을 향한 자본주의 유토피아의 순조로운 출발인 듯이 보였다. 따라서 새로운 상품과 소비체계에는 현대적 삶의 가치지향점을 보다 분명히 밝혀놓는 문구를 반드시 삽입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물질에 대한 경험은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현대적인 삶의 가치를 보장하는 물질은 자본을 위해 생산되며 자본을 위해 창안되고 발달한다. 따라서 돈이 없는 자들에게 신문물이 주는 풍요와 유토피아는 옆에서 보는 환상일 뿐이었다. '오락'과 '이익'을 주는 물건은 자본을 소유한 자에게만 가져다 주는 '사회 봉사'였으며 새로운 세계가 가져다준 물질적 평등의 세계는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만 한정되었다."(74-5)
"새로운 물질과 물건의 유입은 물질의 정통성을 대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이 전혀 새로운 현상이었을 때 문화를 재조직하는 경향을 강하게 띤다. '양깡깽이'를 연주하고 건반을 두드리는 음악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으로 문화적 이질감을 배제한 채 '새로움만을 즐기는 것'에 대한 비아냥거림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기존의 문화적 전통과 어울릴 수 없는 이물감은 문화적으로 이원화된 구조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서구화된 문화 혹은 이질적인 물건과 그를 둘러싼 새로운 사회적 구조는 계급적인 갈등이 필연적이었다. 새로운 것은 늘 상층 부르주아들에게 우선 열려 있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이를 재생산하고 소비하는 새로운 구조가 이른바 '문화계'를 장악하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문화예술의 엘리트화와 함께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단절된 '계'를 형성하였다. 물질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문화에 대한 계급적인 분절과 이에 따른 문화적 괴리를 가져온 것이다."(79-80)
3장 지식인, 룸펜과 데카당
"현대가 문을 열면서 지식인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낡은 사상과 문화를 대체하면서 사회 곳곳에 변화를 가져올 의식과 사상들을 풀어놓는 것이 새로운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봉건적인 지식인으로서의 '선비'는 어느덧 사라지고 새로운 문화를 흡수한 '인텔리겐차'들이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들의 겉모습은 민족주의자, 문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모더니스트 등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지만 그 이면에는 현대주의자로서의 공통적인 정서가 있었다. 새로운 지식인들은 일본이나 중국 혹은 서구를 통해 신식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배운 것을 조선을 향해 외치면서 이 땅의 선지자로 등장했다. 새로운 지식인들은 조선이 피폐한 문명과 낙후된 경제, 봉건적인 정치에서 벗어나 진보된 문명을 받아들이고 개조와 개혁을 통해 강건해지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서구와 강대국의 문화와 철학적인 기조를 수용하고 이를 조선에 접목시키려 했다."(112)
"현대로의 이행기 그리고 식민지 시기의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된 열패감은 점차 지식인을 자기 스스로의 개인적 좌절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구한말과 1910년대까지의 계몽주의적인 목소리는 한편으로 계속되고 있었지만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는 '박제화된 천재' 의식으로 토로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지식인들은 자신을 짓누르는 봉건적 삶과 현대화된 자신의 의식과의 괴리를 가장 먼저 체험했던 이들이었다. 그 모순이 가장 먼저 표출된 것은 당연하게도 그의 집안, 매일 몸으로 부딪는 아내에 관한 것이었다. 신소설을 썼던 이해조가 구식결혼한 아내를 버리고, 유학을 하면서 얻은 신사고를 신식여성(일본여성)과 재혼하는 것으로 가장 먼저 적용시켰듯이 봉건을 상징하는 구식여성을 버리고 신식여성과 연애하는 것은 전형적인 전환기 지식인의 갈등의 표상이었다." "봉건과 현대의 갈등은 지식인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집안에서부터 균열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회와의 균열로 이어졌다."(116-7)
"식민지 지식인들은 딜레탕트, 데카당으로 자신의 입지를 삼았고, '룸펜'으로서의 생활에 자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식인인 그들은 '민간사업民間事業이래야 십지十指를 굴屈하지 못하는(열 손가락을 꼽지 못하는)' 조선에서 '팔자에 타고난 룸펜'이었으며, 따라서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어찌해볼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것은, 가난하지만 궂은 일은 할 수 없다는 지조였지만 그들이 표현한 대로 '무위도식, 무기력, 무정견無正見' 속에서 타인에게 기생하려는 의존적인 경향성까지 보인다. 이들 룸펜들은 가난 속에서 자족하고 자위하는 삶의 방식을 하나의 '낭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룸펜의 낭만은 그 자체가 지식인 문화로 재빨리 이해되고 흡수되었다. 바로 룸펜문화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정서가 시작된 셈이었다. 룸펜문화가 싹트던 때가 1930년 전후였으니, 1970년대 말까지로 잡아도 물경 50년간을 지식인 사회는 데카당을 그들의 전유물로 인식했다."(122-3)
4장 유행과 대중문화의 형성
"대중문화의 존재는 사회의 지배방식을 뒤바꿔 놓는다. 대중매체의 전면적인 확산은 매체를 통한 문화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대중들의 잠재되어 있는 '욕망의 설득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의지나 신념이 아니라 욕망의 정서와 감정이 분출되는 식민시기 유행가나 영화들이 민족과 역사와 독립을 외쳤을 것이라는 상상은 당연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중문화는 역사가 묻어 있을 뿐 역사를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중들의 저항과 반발의 역사는 소멸하는 듯이 보인다. 이제 식민지라는 역사의 굴레 속에서 대중은 또 하나의 질곡을 더하게 되었다. 그것은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요구되는 투쟁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으며 그런 세태에 떠밀려 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가 시작되는 식민지 조선에서 대중문화의 본질은 비극적이며 외래의존적이며 무저항적이며 감각적이며 퇴폐적일 수 있다."(152-3)
"1920~30년대 대중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아마 영화일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이미지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대중들의 미의식을 바꿔놓는 데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영화에 의해 촉발된 대중들의 문화적 삶의 변화는 단순히 전통문화에 대한 상실감이라거나 서구문화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라는 비판의 잣대를 넘어서고 있었다."(160) "1926년 나운규가 〈아리랑〉으로 '나운규의 시대'를 열면서 영화는 이제 대중들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벗어나 대중의 정서와 미의식을 장악하는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로 부상했다. 외국 영화가 대거 수입되면서 영화는 도시적인 일상의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서양 영화의 상영은 서구화된 육체, 성에 대한 개방적 관심을 포함한 도시적 삶의 모든 양식을 변모시켰다. 1930년대 모던 걸과 모던 보이의 등장에 영화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없었다."(163)
"유행은 대중을 전제하고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의 대중적 행동양식이다. 대중들로 하여금 '복제'에 의한 '차별화'를 가능케하는 도시의 일상은 누구도 비켜가지 못하고 휩쓸리는 수많은 물결들을 만들어낸다. 단발이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정체성의 위기를 주었던 때로부터, 봉건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차이화로서 기능하고 새로운 가치를 표상하는 상징으로서 복제되기 시작할 때부터, 유행은 삶의 스타일로서 자리잡았다. 구체적으로 표상되는 유행이 반드시 가치지향점을 지닌 현상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행이 스타일 그 자체로 향유될 때 유행의 메커니즘은 완성된다." "유행을 무지몽매한 대중들의 부박한 휩쓸림으로 보는 당대의 시각은 본격적으로 이질적인 문화가 일상으로 퍼지기 시작한 1920년대 무렵에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특히 사회주의이론을 흡수한 식자들에게 유행은 자본주의적 상술에 의해 등장한 것이기에 더 부정적인 시각이 작동하였다."(169-70)
5장 신식 여성의 등장
"신식 교육을 받았던 남성들이 새로운 가치관과 함께 그들에게 손해볼 것 없던 봉건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음에 비하여,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봉건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을지라도 그것과 완벽히 결별하지 않으면 수용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대부분 신식 남성들은 가부장적인 제도의 혜택으로 유학과 신문물의 세례를 받았으며, 자신의 새로운 가치를 사회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서로 상충되고 충돌하는 현실적인 제약들을 감당해야 했다." "여성들 역시 이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새로운 선택은 여성이라는 이유때문에 남성들보다 훨씬 많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어정쩡한 선택에서 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결정에 분명한 가치를 결합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들이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였을 때는 남성들처럼 신구의 양면을 절충하기보다는 어느 한쪽을 분명히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야 하는 '당찬 여성'이 되었다."(204-6)
"여성해방의 시각을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 적용하는 것은 신여성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던 사회관이기도 했다. 따라서 신여성들의 사회관은 때로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일만큼 대담했다. 이런 사고는 특히 1920년대 사회주의사상이 유입되면서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인식과 현존하는 사회부조리에 대한 혁명적 전복의식이 팽배해지면서 더욱 커져갔다. 사회주의적 접근은 여성해방을 바라보는 시각에 좀더 정치하고 구조적인 접근을 가능케 했지만, 사회주의이론이 일상 속에서 상투화될 때는 모든 것을 생산조건의 모순과 계급적 대립에 원인을 두는 상식적 결론에 머무르곤 했다." " 이 시기의 다른 모든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사상은 기존의 관념주의적 개조론이나 혹은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사상과 혼재되어 그 자체로 수미일관한 이론적 체계를 지니고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213-4)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글은 일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맞물려 있는 현대화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대한 중대한 몇가지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첫째는 기생과 다방 마담 등을 포함한 새로운 인간군들이 지녔던 첨예한 현대적 의식과 행동을 알 수 있으며, 둘째는 현대화를 향한 투쟁의 대상이 봉건왕족이나 보수적 권력이 아닌 식민통치자였다는 비참한 현실을 읽을 수 있으며, 셋째는 현대화의 준거가 분명히 서구(혹은 일본)에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 글은 조선사회가 본격적으로 대중사회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알려준다. 그들은 현대적인 사고와 실천이 봉건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제약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풀어주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일상 속에서 현대를 체험하고 현대문화를 형성하던 일군의 여성들은 바로 기생과 새로운 대중문화 생산자들이었다."(222)
6장 도시의 꿈과 도시의 삶
"봉건적인 왕권중심의 사회구조에 걸맞는 서울의 공간배치는 현대화의 이정표가 박히는 곳마다 뒤틀리고 확장되었다. 본래 한양 도성의 공간배치는 동서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배치는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일반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합하고 포섭하는 공간이었다. 현대화 과정에서 무너진 봉건적인 공간은 성곽 허물기와 남북축 간선도로의 확장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성곽은 도시를 폐쇄적으로 만들어 지켜내는 봉건사회의 단적인 흔적이다. 성곽허물기는 바로 '도성'이라는 봉건 도읍이 '도시'라는 근대로 변모하기 위한 허물벗음이었지만 그것은 곧바로 공간이 지녔던 권위의 해체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도로를 중심으로 한 도시공간의 재편은 도시 안에서 사람들의 속도를 인간적인 것에서 기계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렸으며 전차에 이어, 도시와 도시를 연걸하는 빠른 운송수단인 기차도 1900년에 한강철교가 세워짐에 따라 서울과 인천을 가로지르게 된다."(247-9)
"(쇼윈도로 대표되는) 도시적인 물질들이 주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경험들은 '근대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졌고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특히 도시를 수놓는 네온사인이 처음 등장했을 때, 갑자기 등장한 호화로운 도시의 불빛에 사람들이 꼬여들었고 거기서 느끼는 문화적 충격 또한 적지 않았다." "도시의 새로운 공간은 물론 상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공간을 형성하고 장악하는 방식 또한 도시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도시적 공간은 일상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일상의 이탈적 공간으로 형성된다. 예를 들면 주거를 위한 주택공간의 변화는 매우 느리지만 상점이나 술집의 공간 변화는 매우 빠르다. 새로운 공간이 도시에 들어서면 도시의 일상이 변화하며 일상의 삶 또한 그에 따라 변하게 되는데, 곧 도시적 공간은 일상에서의 일탈을 일상화시키는 공간을 형성하며 도시적 삶은 일상에서의 일탈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된다."(257-9)
# 카페 : 공개화된 성적 서비스의 공간이자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모이는 장소
7장 현대적 인간의 탄생
"자유연애의 사상이 만연하고 이로 인해 서구화된 인간관계의 변화를 예고하면서 가치관의 갈등은 극심해졌지만 그것은 현대화 과정에서 서구화된 육체와 자본주의적 성을 정착시키는 자연스런 단계였다." "그러나 도덕적 가치의 변화는 서구적 '자유연애'의 만연과 일본식 '성문화'의 확산과 함께 일상을 조직하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도 틈입되고 있었으며 성과 육체에 대한 폭넓은 상업적 관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자본주의적 경제의 변화가 가장 빠르게 나타나는 것은 일상에서 소비재의 변화이다. 욕망을 중심으로 한 소비사회는 경제적인 구조의 문제 이전에 의식의 재빠른 변화를 요구하며 욕망으로 일상이 재조직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면서 일상의 욕구를 재조직하는 광고가 가장 먼저 일상에 끼어들고, 상품을 매개로 인간의 욕망을 상품화하는 행위들어 점차 늘어간다. 성의 상품화는 필연적으로 상품의 대량생산과 맞물려 등장한다."(291-3)
양 극단을 지양하는 과도기적 상황 아래에서 "서구문화의 유입과 함께 (늘어나던) 성적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새로운 가치로 받아들였던 것이 사회주의적인 시각에서의 성이었다." "성의 해방은 성의 평등을 전제한 것으로 그것이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연애관이었다. 혁명적 연애관은 봉건적인 성의식에서 해방되고 부르주아적인 퇴폐적 성의식을 견제하는 역할로 자리잡았지만 이러한 사회주의적 연애관에 대한 이해조차 실상은 자유주의적 연애관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사회적 변혁을 위한 활동 속에서 성 행동은 생물학적인 성적 욕구에 의해 충족되는 건조하고 단순한 행위일 뿐이다. '연애감정'에 의한 사랑이란 부르주아의 사치일 뿐이라는 극단적 표현에 표면적으로는 찬동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성 해방의 한 방향을 열어준 이런 가치관은 사회주의가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전유되었던 것과 함께 '찰라적 성관계'에 일종의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해주는 것이기도 했다."(296-8)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은 자본주의적인 병폐의 결과로 치부되었지만, 그와 함께 이들이 기존의 가치와 권위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심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비난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외양과 태도뿐 아니라 반사회적인 행동양식에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미미하지만 '근대 도시생활에 부댓기는 피로한 신경의 소유자들에게서 유일한 위안인 모던식 생활의 일체의 것을 박탈하는 것은 확실히 가혹한 일일 것'이라는 시각 또한 존재했다. 현대로 진입하는 도시생활 자체가 피폐한 정신과 피곤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으며 거기서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현대적 인간군이며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인간형일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도시적 삶과 현대적인 일상 속에서 그들은 물질로 향유된 새로운 정신을 배태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아름다운 도시의 무지개'라고 부른 박팔양의 시각은 사뭇 긍정적이기까지 하다."(317)
"1930년대 서구의 문화가 '모던이즘'으로 불리며 퍼지고 있을 때 봉건적인 삶의 양식은 변하고 있었고, 현대적인 일상의 풍속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어느덧 현대적인 의식의 변화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삶은 분명 변모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삶의 가치들 그리고 그것이 표상하는 체계들을 굴절시켰다." 「모던심청전」에서 묘사되는 "꿈결에 보는 오색채운은 더이상 '영롱'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루미네이션'으로 빛난다. 등장하는 선녀는 학을 타고 내려오되 더이상 트레머리와 날개옷을 갖춰입은 달덩이 미인이 아니다.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과 서구인에 대한 관심으로 등장하는 선녀(삽화)는 젖가슴과 배꼽이 드러난 반라의 파리여인이다." "이제 이러한 신화가 창조되는 곳은 성황당이거나 칠성당이 아니며 신을 매개하는 무당집도 아니다. 새로운 신은 바로 안방의 담벼락에 붙어있는 신문지의 광고를 통해 등장한다."(3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