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군대 - 병사의 눈으로 본 근대일본 일본근대 스펙트럼 3
요시다 유타카 지음, 최혜주 옮김 / 논형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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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근대사회의 형성과 군대


# 일본 군대가 사회 풍속에 미친 영향

1. 신체(동작)의 규율화 : 걸음걸이 교정, 군대식 체조 도입, 시간 준수(시계 보급)

2. 언어의 표준화 시도 : 미진한 효과

3. 양복(군복)과 구두(군화) 복장 : 모범 사례로서의 천황

4. 식생활 개선 : 육식/빵식 확대(각기병 격감), 스튜나 카레류

5. 지역사회 연계 : 각지에서 청년단과 재향군인회 조직/활동

6. 그외 : 기차 탑승 경험, 병영에서 의자와 침대 생활 등


2장 군대의 민중적 기반


# 기층민중에게 비춰진 일본 군대

1. 징병검사 : 인생의례의 장이자 한 명의 남자로 재탄생하는 순간

2. 입·퇴영 의식 거행 : 지역민들이 입대자/제대자를 송영/환영하는 의식

3. 복종과 평등성의 조합 : 계급 외에 가문·직업·빈부의 차가 없고 평등한 의식주 생활

4. 능력주의 : 특기를 갖고 노력한 자(신체적 능력 중요)에게 정당한 보상 지급

5. 사회적 상승 통로 : 지역사회에서 '훈장'으로 통하는 상등병 진급과 하사관/소위후보자 지원 열망

※ '양병(良兵)' 공급지로서의 농촌

6. 그외 :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전파자 양성(주로, 고등소학교 졸업 수준의 학력자들)


3장 총력전의 시대로


"군사 관료기구의 존재 양상이라는 면에서 보았을 때, 일본의 군대는 독특한 정·군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독자적인 정치세력인 군부가 존재했다." "이미 1900년 육해군성 관제의 개정에 의해 확립한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육해군 대신의 임용자격을 현역의 대·중장으로 한정하는 제도─등이 있었는데, 러일전쟁 후인 1907년 '군령' 제정과 '제국국방방침'의 책정에 의해 제도적인 틀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이 가운데 '군령'은 군사에 관한 칙령(법률과 병행하는 법령의 한 형식)을 천황의 친서(親署)와 육해군 대신의 부서(副署)만으로 공포하는 것이 가능하게 정하였다. 일반 칙령의 경우는 의회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지만, 수상의 부서가 필요했다. 즉, 군령의 제정은 새로운 형식의 법령을 독자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육해군이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128-9)


"군부의 성립을 나타내는 제2의 지표는 대략 이 시기에 전문적인 군사 관료층의 형성이 완성된 것을 들 수 있다. 건설기의 육해군 군사 관료 중에는 근대적인 정규 군사교육을 받지 않은 자도 많고, 또 청일전쟁 이전 단계까지는 '전수방위'(專守防衛)적인 성격이 강한 군비 구상을 가진 반주류파가 육해군의 내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육군의 경우, 1889년 월요회 사건(장교의 자주적인 군사연구회인 월요회가 육군대신에 의해 해산된 사건) 등을 계기로,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중심으로 한 조슈벌의 패권 확립과 함께 반주류파가 일소되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대학교에서 막료 교육을 받은 군사 관료층이 점차로 대두한다. 그리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육군대학교 출신의 막료층이 육군성이나 참모본부의 요직을 독점하게 되어 막료 출신자에 의한 일원적인 인사 구성이 실현되어 군사 관료가구가 확립됐다."(129-30)


# 러일전쟁 이후 확립된 일본군의 독자적인 사상

1. 과학적 합리성을 결한 정신주의

2. 경직된 공격 제일주의와 보병의 총검돌격만능론

3. 극단적인 전군 획일주의

※ 제1차 세계대전 연구를 바탕으로 제정된 '전투강요초안'(1926)에서 '정신적 위력'과 '물적 위력'의 균형을 고려하는 논의 제기


"정치적 측면에서 군부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상황과 정면으로 적대하지 않고 지배질서의 재편성에 도움이 되는 범위 안에서 데모크라시 상황에 적응하여 정당내각이나 보통선거를 용인하였다. 다음으로 군사적 측면에서 군 근대화를 위한 대규모 군개혁으로 우가키 군축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가키 군축은 단순한 군축이 아니고, 군축이란 형태를 취한 군비의 근대화였다." 우가키 군축과 더불어 국민동원 정책이 차례로 실현되었다. "하나는 1926년 공포된 청년훈련소령에 의해 설치된 청년훈련소이다. 이곳에서는 만 16세부터 20세까지의 청년 남자를 대상으로 군사훈련이나 공민교육 등의 청년 훈련을 행하였다. 청년훈련소는 1935년 청년학교로 개조된다. 또 하나는 1925년 육군현역 장교 학교배속령의 공포에 따라 실현된 학교 교련이다. 이에 따라 중학교 상당 이상의 학교에 현역 장교가 배속되어 군사 교련이 시작되었다."(139-41)


"제1차 호헌운동이 고양되는 가운데 1913년 '군부대신의 현역 무관제'를 약간 수정하여 육해군 대신의 임용자격을 예비·후비역 장관으로 확대하는 형태로 군제 개혁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예비·후비역 장관이 대신에 임용된 사례는 전혀 없었고, 1918년에 성립한 하라 다카시 내각의 다카하시 고레키요 장상이 주장한 유명한 '참모본부 폐지론'도 군사 관료의 강경한 반발을 일으키는 결과로 끝나버렸다. 또한 육군과 해군이 각각 '대원수'로서의 천황에게 직속하는 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과 해군의 분립 및 대립도 심각했다. 통일된 군사전략과 종합적인 군비 확충계획을 결여한 채로 육·해군이 제각기 자기의 조직적인 이해를 체현하는 군비 확충계획을 위해 광분하는 일본 군부의 뿌리 깊은 체질은 이 시기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한층 더 심각한 문제는 군대의 정통성 근거를 '천황의 군대'에서 구하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다시 보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162-4)


# 군인칙유(1882) : 메이지 천황이 내린 훈계의 말들로 군인들에게 천황이 친히 이끄는 군대의 구성원이라는 엘리트의식을 심어주고, 상관의 명령을 천황의 명령과 동일시하여 절대화하고 있다.


4장 15년 전쟁과 병사


당대의 사회상황을 무규율적인 도시문명의 확산과 농촌사회의 쇠퇴로 파악하는 견해가 널리 퍼져가는 가운데 "'국가혁신'을 요구하는 청년 장교와 중견 막료층의 기대를 받으며 1931년 12월 아라키 사다오 중장이 육군대신에 취임하여 군부에 의한 정치 개입을 본격화하였다. 아라키는 정신주의적이고 황실지상주의적인 육군 장교 그룹인 '황도파'의 중추적인 구성원이었다." "군부의 정치 개입은 비분강개형의 국사적(國士的)인 군인을 많이 만들어낸 군의 근대화에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용병사상에서도 1926년 제정된 전투강요 초안에 보인 일종의 합리적 발상은 1928년 제정된 보병조전, 통수강령, 1929년 제정된 전투강요 등에서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어 다시 정신주의가 강조되어갔다. 이러한 중에 일본의 군대는 천황이 친히 이끄는 군대(황군)라는 자기인식이 강조된 것도 '15년 전쟁' 시기의 커다란 특징이다."(173-4)


# 15년 전쟁 : 만주사변(1931.9.18)부터 태평양전쟁 패전(1945.8.15)까지의 기간


"이때는 황군의식과 정신주의가 고창되는 가운데 다이쇼기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군 개혁이 차례로 부정되어간 시기이기도 했다. 군 개혁에 대한 최대의 부정은 1934년 군대 내무서의 개정일 것이다. 〈쇼와 9년 군대내무서 개정이유서〉에 의하면, "우리 국군은 천황 친솔의 군대로 그 사명을 관철할 각오를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명징하게 하여, 장병이 함께 군의 본의에 기초하여 거상(居常, 평소의 뜻)과 성유(聖諭, 천황의 가르침)를 받들어 그 본무에 정진할 것"이 중시되었다." "구체적인 개정에서 중요한 것은, 부조리한 취급을 받은 경우 상관에게 상신할 수 있는 권리를 정한 제11항과 제12항이 삭제된 사실이다." "제10항("자기에 대한 타인의 취급이 부조리하다고 생각될 때는 찬찬히 순서를 거쳐 그것을 사건 관계자의 바로 위 소속 부대장에게 상신함을 방해하지 않음")이 삭제된 1943년부터는 위법적인 상관 명령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하는 생각이 공공연하게 부정되었다."(179-80)


# 절대 복종의 대표적인 사례 : 황도파 쿠데타(1936.2.26)


현역, 제1·2보충역, 사실상의 면역인 제2국민병역 중에서 "현역병으로 입영한 자는 2년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뒤 5년 4개월간 예비역으로 편입되며 계속해서 10년간 후비역에 편제된다. 이들 예비·후비역병은 평상시에는 생업에 근무하지만, 유사시에는 필요에 따라 군대에 소집되어 전쟁터에 보내진다. 또 보충병역은 현역병의 소요인원을 초과했기 때문에 현역병으로 징집되지 않은 자가 복무하는 병역으로, 전시 병사의 소모를 보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군은 현역병 중심의 동원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군 중앙은 현역병으로 군대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보충병역을 신뢰하지 않아 현역·예비역·후비역 병사들에게 의존하려고 했다. 더욱이 대소전(對蘇戰)을 준비하기 위해 현역병 중심의 정예사단을 준비시켜두지 않으면 안 되었던 때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후비역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특설사단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199)


"예비·후비역 병사는 연령도 높고 가정을 가진 기혼자가 많다. 이른바 '장래의 염려'를 끊지 못하고 생활을 질질 끌면서 전장에 동원되어온 사람들이다. 그런 만큼 체력도 떨어지고 전의도 결코 높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각 부대에서는 "전쟁에서 병사는 젊을수록 정신력이 있다. 예비역이나 후비역은 전투기술은 우수해도 연령이나 기타 관계상 정신력이 박약한 감이 있다. 오히려 미교육이라도 젊은층을 우수하다고 할 만큼 지휘가 용이하다"라는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미교육병이라도 보충병역의 젊은 병사 쪽이 낫다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군 중앙의 대세가 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예비·후비역병에게 모순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쟁 목적이 불명확한 채로 전쟁이 장기화하는 데 따라 그들은 자포자기적 충동에 몰려 군기를 근저로부터 흔드는 존재가 되어갔다."(201)


# 상관의 명령 불복종, 폭행과 협박, 강간과 약탈 범죄 증가


"군 간부가 전장에서 만행을 단속하는 것에 열심이 아니었던 하나의 배경에는 다카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 지나치게 엄격하면 도리어 우려할 만한 결과를 초래한다"라는 의구심이 있었다. 즉 군 간부의 입장에서는 병사의 가슴 답답한 불만이나 노여움이 상관에 대한 범죄 등의 형태를 취하고 군대 안의 질서 그 자체를 향해 폭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방지를 위해 전장에서 다소의 비행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뿌리 깊었던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하극상이란 필경 익명의 무책임한 힘의 비합리적인 폭발이고, 그것은 밑으로부터의 힘이 공공연히 조직화되지 않는 사회에서만 일어난다. 그것은 이른바 도착적인 데모크라시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중국의 민중에 대한 수많은 만행은 군 간부의 입장에서 보면, 밑으로부터의 비합리적인 격정의 폭발에 대한 일종의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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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 현대성의 형성-문화연구 10
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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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현대를 바라보는 눈


"현대 혹은 모던이라는 말은 1920년대 이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익숙한 유행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1920~30년대에 들어서였다. 물론 1920~30년대에 꽤 널리 쓰였던 현대 혹은 모던이라는 말들 또한 지금 우리가 말하려는 '현대'와 동의어는 아니다. 예를 들면 '모던'은 그 자체로 모던풍 즉 현대적인 스타일을 말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걸이나 뽀이, 룸펜, 인테리, 빠 등등 서양말의 다발을 묶을 수 있는, 어떤 경향성을 말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현대성을 역사상의 한 시대로 고려하는 것보다 일종의 태도로 생각해보려 한다면, 1930년대의 '모던'은 서구적인 삶의 패턴을 지향하려는 의식적인 태도이자 행동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당시의 현대란 '동시대' 그리고 '바깥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현대라는 말은 적어도 시간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조선에서 공간적으로는 부재하는 이율배반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새로운 단어였다."(23-5)


"개조와 개발, 개혁과 혁신, 문명과 진보라는 용어는 개항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으며, 개화된 세계가 만들어낸 문화 속에서 살고자 하는 문화주의와 문화생활은 삶의 새로운 가치로 떠올랐다. 지식인들은 사회의 개조, 가족의 개조, 교육의 개조, 여자의 개조, 인간의 개조, 민족의 개조를 지상과제로 삼았으며 봉건적인 유습이 남아있는 모든 제도와 가치를 '개조'를 통해서 개조하려고 했다. 개조는 열강의 침탈에서 오는 위기감과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잇는 유일한 대안이었으며 문명진보된 세상으로 향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런 측면과 함께 봉건에 대한 결별을 보다 분명하게 실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주의의 등장에 의한 것이었다. 내셔널리즘은 서구중심의 현대적 프로젝트에 대항하는 경계 밖의 유일한 대안으로 등장했으며 이를 통해서 현대사회로의 진입을 꿈꿀 수 있는 이데올로기였다."(31-2)


이성을 향한 무한한 신뢰로 대표되는 모던 프로젝트가 구축한 "문명에 대한 회의 혹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서구의 관념론이 계몽기의 조선에서 개조론으로 등장했을 때, 조선의 모던 프로젝트는 방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특히 서구의 현대화 과정과 조선의 경우를 등가로 놓았을 때 개조론은 매우 곤혹스러운 논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일련의 계몽주의적 프로젝트가 실현되지 않은 조선으로서 산업화와 문명에 대한 회의론적 태도는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엉뚱하게 현대화의 논리는 정신주의적이고 관념적인 개조의 논리로 빠져들어갔으며 이런 정신적 '개조'가 식민지배에 부합되면서 곧 뒤틀린 현대화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적 문명이라는 물질적 토대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그 토대를 위한 경제적 프로젝트들이 실현되기 시작할 무렵에 물질에 대한 회의론에 바탕을 둔 정신적 개조의 사고들은 현대로 진입하는 과정 자체를 관념적으로 몰고갔다."(34-5)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사상과 함께 서구의 모더니즘의 여러 움직임들이 다시 한번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다시 현대를 지칭할 수 있는 말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바로 '신흥新興'이라는 말이었다." "신흥이라는 말이 현대를 지칭하는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 노동자혁명에서처럼 전혀 다른 차원의 현대화 프로젝트가 가능하다는 의식이 지식인들의 사고 속에 자리잡으면서 사회주의 사상이 퍼진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신흥은 막연한 모던의 환상과 반봉건의 계몽적 의식이 아니라 문명이나 개조나 문화가 이룰 수 있는 사회적 정체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반발과 역동의 진보적인 인식이었다. 관념적 개조론과 교양주의적 문화주의에 의한 조선의 계몽적 사고들이 사회의 체제와 구조에 대한 인식의 결여라는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면 신흥사상은 이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듯 보였다."(38-40)


"(1920년대 말에 이르면) 이제 개조라는 말은 점차 사라지고 문화라는 말도 더이상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새롭게 등장한 '모던'이란 말에는 개조와 문화가 지니고 있던 계몽주의적인 무게가 더이상 실려있지 않았다. 식민지가 점점 뿌리깊게 자리잡힐수록 한편으로 그 상황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적인 의식이 깊어갔지만, 더 어찌해볼 수 없는 일상의 현실은 계몽적인 힘을 점점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현대는 이제 계몽주의자의 엄숙한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 속의 발랄한 모더니스트를 통해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라는 거대한 사회문화적 흐름이 계몽적인 의식이나 독점화된 문화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이 시기로부터 우리는 낯설지 않은 '현대인'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때의 모던은 굳세게 지향해야 할 의지로서가 아니라 경박하고 자유분방하며 천박스러운 유행으로 등장한다."(42)


2장 물질과 과학의 시대


"발전모델로서 서구, 동시대적인 보편성으로서 세계화, 자본의 궁극 원리로서 물질적 평등성을 반영하는 이러한 패러다임은 곧 현대적인 삶의 궁극적 가치지향점이었으며 이는 물질로 보장되는 행복과 이익을 향한 자본주의 유토피아의 순조로운 출발인 듯이 보였다. 따라서 새로운 상품과 소비체계에는 현대적 삶의 가치지향점을 보다 분명히 밝혀놓는 문구를 반드시 삽입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물질에 대한 경험은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현대적인 삶의 가치를 보장하는 물질은 자본을 위해 생산되며 자본을 위해 창안되고 발달한다. 따라서 돈이 없는 자들에게 신문물이 주는 풍요와 유토피아는 옆에서 보는 환상일 뿐이었다. '오락'과 '이익'을 주는 물건은 자본을 소유한 자에게만 가져다 주는 '사회 봉사'였으며 새로운 세계가 가져다준 물질적 평등의 세계는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만 한정되었다."(74-5)


"새로운 물질과 물건의 유입은 물질의 정통성을 대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이 전혀 새로운 현상이었을 때 문화를 재조직하는 경향을 강하게 띤다. '양깡깽이'를 연주하고 건반을 두드리는 음악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으로 문화적 이질감을 배제한 채 '새로움만을 즐기는 것'에 대한 비아냥거림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기존의 문화적 전통과 어울릴 수 없는 이물감은 문화적으로 이원화된 구조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서구화된 문화 혹은 이질적인 물건과 그를 둘러싼 새로운 사회적 구조는 계급적인 갈등이 필연적이었다. 새로운 것은 늘 상층 부르주아들에게 우선 열려 있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이를 재생산하고 소비하는 새로운 구조가 이른바 '문화계'를 장악하게 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문화예술의 엘리트화와 함께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단절된 '계'를 형성하였다. 물질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문화에 대한 계급적인 분절과 이에 따른 문화적 괴리를 가져온 것이다."(79-80)


3장 지식인, 룸펜과 데카당


"현대가 문을 열면서 지식인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낡은 사상과 문화를 대체하면서 사회 곳곳에 변화를 가져올 의식과 사상들을 풀어놓는 것이 새로운 지식인의 역할이었다. 봉건적인 지식인으로서의 '선비'는 어느덧 사라지고 새로운 문화를 흡수한 '인텔리겐차'들이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들의 겉모습은 민족주의자, 문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모더니스트 등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지만 그 이면에는 현대주의자로서의 공통적인 정서가 있었다. 새로운 지식인들은 일본이나 중국 혹은 서구를 통해 신식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배운 것을 조선을 향해 외치면서 이 땅의 선지자로 등장했다. 새로운 지식인들은 조선이 피폐한 문명과 낙후된 경제, 봉건적인 정치에서 벗어나 진보된 문명을 받아들이고 개조와 개혁을 통해 강건해지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서구와 강대국의 문화와 철학적인 기조를 수용하고 이를 조선에 접목시키려 했다."(112)


"현대로의 이행기 그리고 식민지 시기의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된 열패감은 점차 지식인을 자기 스스로의 개인적 좌절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구한말과 1910년대까지의 계몽주의적인 목소리는 한편으로 계속되고 있었지만 지식인으로서의 한계는 '박제화된 천재' 의식으로 토로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지식인들은 자신을 짓누르는 봉건적 삶과 현대화된 자신의 의식과의 괴리를 가장 먼저 체험했던 이들이었다. 그 모순이 가장 먼저 표출된 것은 당연하게도 그의 집안, 매일 몸으로 부딪는 아내에 관한 것이었다. 신소설을 썼던 이해조가 구식결혼한 아내를 버리고, 유학을 하면서 얻은 신사고를 신식여성(일본여성)과 재혼하는 것으로 가장 먼저 적용시켰듯이 봉건을 상징하는 구식여성을 버리고 신식여성과 연애하는 것은 전형적인 전환기 지식인의 갈등의 표상이었다." "봉건과 현대의 갈등은 지식인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집안에서부터 균열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회와의 균열로 이어졌다."(116-7)


"식민지 지식인들은 딜레탕트, 데카당으로 자신의 입지를 삼았고, '룸펜'으로서의 생활에 자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식인인 그들은 '민간사업民間事業이래야 십지十指를 굴屈하지 못하는(열 손가락을 꼽지 못하는)' 조선에서 '팔자에 타고난 룸펜'이었으며, 따라서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어찌해볼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것은, 가난하지만 궂은 일은 할 수 없다는 지조였지만 그들이 표현한 대로 '무위도식, 무기력, 무정견無正見' 속에서 타인에게 기생하려는 의존적인 경향성까지 보인다. 이들 룸펜들은 가난 속에서 자족하고 자위하는 삶의 방식을 하나의 '낭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룸펜의 낭만은 그 자체가 지식인 문화로 재빨리 이해되고 흡수되었다. 바로 룸펜문화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정서가 시작된 셈이었다. 룸펜문화가 싹트던 때가 1930년 전후였으니, 1970년대 말까지로 잡아도 물경 50년간을 지식인 사회는 데카당을 그들의 전유물로 인식했다."(122-3)


4장 유행과 대중문화의 형성


"대중문화의 존재는 사회의 지배방식을 뒤바꿔 놓는다. 대중매체의 전면적인 확산은 매체를 통한 문화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대중들의 잠재되어 있는 '욕망의 설득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의지나 신념이 아니라 욕망의 정서와 감정이 분출되는 식민시기 유행가나 영화들이 민족과 역사와 독립을 외쳤을 것이라는 상상은 당연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대중문화는 역사가 묻어 있을 뿐 역사를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중들의 저항과 반발의 역사는 소멸하는 듯이 보인다. 이제 식민지라는 역사의 굴레 속에서 대중은 또 하나의 질곡을 더하게 되었다. 그것은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요구되는 투쟁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으며 그런 세태에 떠밀려 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가 시작되는 식민지 조선에서 대중문화의 본질은 비극적이며 외래의존적이며 무저항적이며 감각적이며 퇴폐적일 수 있다."(152-3)


"1920~30년대 대중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아마 영화일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이미지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대중들의 미의식을 바꿔놓는 데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영화에 의해 촉발된 대중들의 문화적 삶의 변화는 단순히 전통문화에 대한 상실감이라거나 서구문화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라는 비판의 잣대를 넘어서고 있었다."(160) "1926년 나운규가 〈아리랑〉으로 '나운규의 시대'를 열면서 영화는 이제 대중들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벗어나 대중의 정서와 미의식을 장악하는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로 부상했다. 외국 영화가 대거 수입되면서 영화는 도시적인 일상의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서양 영화의 상영은 서구화된 육체, 성에 대한 개방적 관심을 포함한 도시적 삶의 모든 양식을 변모시켰다. 1930년대 모던 걸과 모던 보이의 등장에 영화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없었다."(163)


"유행은 대중을 전제하고 자본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의 대중적 행동양식이다. 대중들로 하여금 '복제'에 의한 '차별화'를 가능케하는 도시의 일상은 누구도 비켜가지 못하고 휩쓸리는 수많은 물결들을 만들어낸다. 단발이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정체성의 위기를 주었던 때로부터, 봉건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차이화로서 기능하고 새로운 가치를 표상하는 상징으로서 복제되기 시작할 때부터, 유행은 삶의 스타일로서 자리잡았다. 구체적으로 표상되는 유행이 반드시 가치지향점을 지닌 현상으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유행이 스타일 그 자체로 향유될 때 유행의 메커니즘은 완성된다." "유행을 무지몽매한 대중들의 부박한 휩쓸림으로 보는 당대의 시각은 본격적으로 이질적인 문화가 일상으로 퍼지기 시작한 1920년대 무렵에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특히 사회주의이론을 흡수한 식자들에게 유행은 자본주의적 상술에 의해 등장한 것이기에 더 부정적인 시각이 작동하였다."(169-70)


5장 신식 여성의 등장


"신식 교육을 받았던 남성들이 새로운 가치관과 함께 그들에게 손해볼 것 없던 봉건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음에 비하여,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봉건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을지라도 그것과 완벽히 결별하지 않으면 수용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대부분 신식 남성들은 가부장적인 제도의 혜택으로 유학과 신문물의 세례를 받았으며, 자신의 새로운 가치를 사회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서로 상충되고 충돌하는 현실적인 제약들을 감당해야 했다." "여성들 역시 이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의 새로운 선택은 여성이라는 이유때문에 남성들보다 훨씬 많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어정쩡한 선택에서 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결정에 분명한 가치를 결합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들이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였을 때는 남성들처럼 신구의 양면을 절충하기보다는 어느 한쪽을 분명히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야 하는 '당찬 여성'이 되었다."(204-6)


"여성해방의 시각을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 적용하는 것은 신여성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던 사회관이기도 했다. 따라서 신여성들의 사회관은 때로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일만큼 대담했다. 이런 사고는 특히 1920년대 사회주의사상이 유입되면서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인식과 현존하는 사회부조리에 대한 혁명적 전복의식이 팽배해지면서 더욱 커져갔다. 사회주의적 접근은 여성해방을 바라보는 시각에 좀더 정치하고 구조적인 접근을 가능케 했지만, 사회주의이론이 일상 속에서 상투화될 때는 모든 것을 생산조건의 모순과 계급적 대립에 원인을 두는 상식적 결론에 머무르곤 했다." " 이 시기의 다른 모든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사상은 기존의 관념주의적 개조론이나 혹은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사상과 혼재되어 그 자체로 수미일관한 이론적 체계를 지니고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213-4)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글은 일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맞물려 있는 현대화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에 대한 중대한 몇가지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첫째는 기생과 다방 마담 등을 포함한 새로운 인간군들이 지녔던 첨예한 현대적 의식과 행동을 알 수 있으며, 둘째는 현대화를 향한 투쟁의 대상이 봉건왕족이나 보수적 권력이 아닌 식민통치자였다는 비참한 현실을 읽을 수 있으며, 셋째는 현대화의 준거가 분명히 서구(혹은 일본)에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 글은 조선사회가 본격적으로 대중사회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알려준다. 그들은 현대적인 사고와 실천이 봉건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제약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풀어주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일상 속에서 현대를 체험하고 현대문화를 형성하던 일군의 여성들은 바로 기생과 새로운 대중문화 생산자들이었다."(222)


6장 도시의 꿈과 도시의 삶


"봉건적인 왕권중심의 사회구조에 걸맞는 서울의 공간배치는 현대화의 이정표가 박히는 곳마다 뒤틀리고 확장되었다. 본래 한양 도성의 공간배치는 동서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배치는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일반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합하고 포섭하는 공간이었다. 현대화 과정에서 무너진 봉건적인 공간은 성곽 허물기와 남북축 간선도로의 확장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성곽은 도시를 폐쇄적으로 만들어 지켜내는 봉건사회의 단적인 흔적이다. 성곽허물기는 바로 '도성'이라는 봉건 도읍이 '도시'라는 근대로 변모하기 위한 허물벗음이었지만 그것은 곧바로 공간이 지녔던 권위의 해체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도로를 중심으로 한 도시공간의 재편은 도시 안에서 사람들의 속도를 인간적인 것에서 기계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렸으며 전차에 이어, 도시와 도시를 연걸하는 빠른 운송수단인 기차도 1900년에 한강철교가 세워짐에 따라 서울과 인천을 가로지르게 된다."(247-9)


"(쇼윈도로 대표되는) 도시적인 물질들이 주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경험들은 '근대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졌고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특히 도시를 수놓는 네온사인이 처음 등장했을 때, 갑자기 등장한 호화로운 도시의 불빛에 사람들이 꼬여들었고 거기서 느끼는 문화적 충격 또한 적지 않았다." "도시의 새로운 공간은 물론 상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공간을 형성하고 장악하는 방식 또한 도시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도시적 공간은 일상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일상의 이탈적 공간으로 형성된다. 예를 들면 주거를 위한 주택공간의 변화는 매우 느리지만 상점이나 술집의 공간 변화는 매우 빠르다. 새로운 공간이 도시에 들어서면 도시의 일상이 변화하며 일상의 삶 또한 그에 따라 변하게 되는데, 곧 도시적 공간은 일상에서의 일탈을 일상화시키는 공간을 형성하며 도시적 삶은 일상에서의 일탈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된다."(257-9)


# 카페 : 공개화된 성적 서비스의 공간이자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모이는 장소


7장 현대적 인간의 탄생


"자유연애의 사상이 만연하고 이로 인해 서구화된 인간관계의 변화를 예고하면서 가치관의 갈등은 극심해졌지만 그것은 현대화 과정에서 서구화된 육체와 자본주의적 성을 정착시키는 자연스런 단계였다." "그러나 도덕적 가치의 변화는 서구적 '자유연애'의 만연과 일본식 '성문화'의 확산과 함께 일상을 조직하는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에도 틈입되고 있었으며 성과 육체에 대한 폭넓은 상업적 관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자본주의적 경제의 변화가 가장 빠르게 나타나는 것은 일상에서 소비재의 변화이다. 욕망을 중심으로 한 소비사회는 경제적인 구조의 문제 이전에 의식의 재빠른 변화를 요구하며 욕망으로 일상이 재조직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면서 일상의 욕구를 재조직하는 광고가 가장 먼저 일상에 끼어들고, 상품을 매개로 인간의 욕망을 상품화하는 행위들어 점차 늘어간다. 성의 상품화는 필연적으로 상품의 대량생산과 맞물려 등장한다."(291-3)


양 극단을 지양하는 과도기적 상황 아래에서 "서구문화의 유입과 함께 (늘어나던) 성적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새로운 가치로 받아들였던 것이 사회주의적인 시각에서의 성이었다." "성의 해방은 성의 평등을 전제한 것으로 그것이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연애관이었다. 혁명적 연애관은 봉건적인 성의식에서 해방되고 부르주아적인 퇴폐적 성의식을 견제하는 역할로 자리잡았지만 이러한 사회주의적 연애관에 대한 이해조차 실상은 자유주의적 연애관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사회적 변혁을 위한 활동 속에서 성 행동은 생물학적인 성적 욕구에 의해 충족되는 건조하고 단순한 행위일 뿐이다. '연애감정'에 의한 사랑이란 부르주아의 사치일 뿐이라는 극단적 표현에 표면적으로는 찬동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성 해방의 한 방향을 열어준 이런 가치관은 사회주의가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전유되었던 것과 함께 '찰라적 성관계'에 일종의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해주는 것이기도 했다."(296-8)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은 자본주의적인 병폐의 결과로 치부되었지만, 그와 함께 이들이 기존의 가치와 권위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심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비난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외양과 태도뿐 아니라 반사회적인 행동양식에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미미하지만 '근대 도시생활에 부댓기는 피로한 신경의 소유자들에게서 유일한 위안인 모던식 생활의 일체의 것을 박탈하는 것은 확실히 가혹한 일일 것'이라는 시각 또한 존재했다. 현대로 진입하는 도시생활 자체가 피폐한 정신과 피곤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으며 거기서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현대적 인간군이며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인간형일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도시적 삶과 현대적인 일상 속에서 그들은 물질로 향유된 새로운 정신을 배태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아름다운 도시의 무지개'라고 부른 박팔양의 시각은 사뭇 긍정적이기까지 하다."(317)


"1930년대 서구의 문화가 '모던이즘'으로 불리며 퍼지고 있을 때 봉건적인 삶의 양식은 변하고 있었고, 현대적인 일상의 풍속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어느덧 현대적인 의식의 변화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삶은 분명 변모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삶의 가치들 그리고 그것이 표상하는 체계들을 굴절시켰다." 「모던심청전」에서 묘사되는 "꿈결에 보는 오색채운은 더이상 '영롱'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루미네이션'으로 빛난다. 등장하는 선녀는 학을 타고 내려오되 더이상 트레머리와 날개옷을 갖춰입은 달덩이 미인이 아니다. 서구문화에 대한 동경과 서구인에 대한 관심으로 등장하는 선녀(삽화)는 젖가슴과 배꼽이 드러난 반라의 파리여인이다." "이제 이러한 신화가 창조되는 곳은 성황당이거나 칠성당이 아니며 신을 매개하는 무당집도 아니다. 새로운 신은 바로 안방의 담벼락에 붙어있는 신문지의 광고를 통해 등장한다."(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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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광시대 - 식민지시대 한반도를 뒤흔든 투기와 욕망의 인간사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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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경제 상황은 금광업의 활황을 훨씬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다른 산업도 함께 번성했다면, 금광업의 활황이 그처럼 돋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는 황금광시대이기 이전에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의 시대였다." "황금광시대를 관통한 대공황의 그림자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황금광(黃金狂)시대가 이제 막 시작될 무렵인 1931년 겨울, 식민지 조선은 최악의 경제 위기 상태에 놓여 있었다. 물건은 팔리지 않았고, 곡식 가격은 떨어졌고, 사회는 어수선하고 불안했으며, 국경 너머 만주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대공황, 실업, 물가 폭락, 노동쟁의, 소작쟁의, 만주사변 등으로 얼룩진 아수라장 속에서 유독 금광업만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금광업의 호경기는 너무나 이례적인 것이었던 나머지 '변태 경기'라 불릴 지경이었다."(44-6)


"황금광시대 조선에서는 '금광 출원증'이라는 일종의 광업권증서가 매력적인 투기의 대상으로 대두되었다. 1930년 이후 금광 출원이 급증한 것은 금을 캐겠다는 의도보다는 광업권을 확보하여 기십 기백 배의 가격으로 팔겠다는 투기적인 의도가 강했다. 즉, 황금광시대의 금광 개발자들은 프리미엄을 받고 매도하기 위해 광업권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71) "금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던 시기였지만, 투기꾼들은 하찮은(?) '금'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오로지 '금광'이었다. 금광 거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활발했고, 이를 통해 십만장자 백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엄청난 자본이 요구되는 것도, 그렇다고 발급 받기 위해서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닌, 그 자체로는 그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광업권'이 두 해 동안 무려 87명의 십만장자 백만장자를 배출했으니 세상 물정 아는 이들에게 광업권 투기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76-7)


"일반적인 조선의 부자들은 금보다는 땅을 더 좋아했다. 땅을 팔아 금광을 사기는커녕, 금광으로 한몫을 챙긴 사람조차 땅 매입에 열을 올렸다. 금광으로 조선 굴지의 거부로 성장한 최창학과 방응모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토지를 사들였다. 최창학은 압록강변에 임야 수백만 평과 구성에 2천석지기 논이 있었고, 방응모는 수원에 대농장이 있었다. 조선부자들이 금광을 사지 않았다면 수십에서 수백만원씩을 주고 금광을 매입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바다 건너온 '왜인'들, 곧 미쓰이, 미쓰비시, 구라하 등 일본 굴지의 재벌들이었다. 이 시기 금광 투기꾼에게 '일본 재벌에게 금광 팔기'란 필생의 소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 불어 닥친 골드러쉬는 한반도의 천연자원, 식민지의 값싼 노동력, 일본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금을 캐내고야 말겠다는 일본 정부의 결연한 의지가 결합된 결과물이었다."(84-6)


1930년 1월 11일, 근 13년 동안 금지되었던 금수출이 허용되었고, 일본은행·조선은행·대만은행 등 제국의 중앙은행에서는 금화와 지폐를 교환해주는 태환(兌換) 업무가 재개되었다. "몸에 금붙이 하나 지니지 않은 민초들조차 금해금에 대비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금수출을 금지하였다가 허용하면 '위체(爲替)' 가격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 위체는 금화 대신 대외 무역 거래의 결제에 이용되던 외국환 어음이었다. 위체 시세란 오늘날로 치면 환율에 해당한다. 여기서 금수출을 허용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드러난다. 그것은 금이라는 '상품'을 해외에 팔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화폐 가치를 금에 고정시키는지 아니면 시장 자율에 맡기는지의 문제였던 것이다. 1930년 1월 11일은 금수출을 허용함으로써 일본제국이 금본위제로 복귀한 날이었다. 그날 이후 적어도 국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던 위체 시세만큼은 급속히 안정되었으니 경제 기념일로 지정되고도 남음이 있었다."(219)


"금의 입장에서 금본위제로의 복귀는 '1돈에 5원'이라는 법정 가치의 회복을 의미했다." "금본위제로의 복귀 이후 금광업은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보호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강도 높게 시행된 '산금정책'이었다." "안정적인 금의 공급 없이는 통화 제도의 유지가 불가능했다. 통화 제도가 붕괴된다면, 국가 경제가 근간부터 무너질 것이었다. 금본위제 하의 금광업은 광업으로 분류될 수도 있었지만, 금융업으로 분류되어도 틀리지 않는다. 땅속에 묻힌 정화(正貨)를 캐내는 산업이었던 까닭이다. 조선의 금광 개발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미쓰비시, 미쓰이의 양대 재벌은 광업뿐만 아니라 금융업에서도 독점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조선의 금광 개발에 뛰어든 일본의 양대 재벌은 금광 개발을 통해 그 자체로 수익을 얻는 한편, 계열 은행에 안정적으로 금을 공급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뒀다.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기였던 것이다."(224-5)


"(금본위제 복귀 후) 이제 남은 일은 '위체의 평가 회복→통화 수축→물가 하락→생산비 저하→무역 호조→국제 대차의 개선→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며 경기가 선순환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수출은 늘지 않고 오히려 무역 규모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물가와 물건값은 30%씩 떨어졌어도 일본 상품은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전혀 팔리지 않았다. 대공황의 여파로 국내 해외 할 것 없이 구매력이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호경기가 도래하기는 커녕, '구매력 부족→판매 감소→조업 단축, 가격 인하→이윤 감소→투자 위축, 고용 감축→실업 증가→구매력 부족'으로 이어지는 경기 악순환이 거듭될 뿐이었다. 수출이 지지부진한 판에 정부도 소비를 줄이고, 민간도 허리띠를 졸라매면, 공장에서 무작정 찍어낸 상품들은 도대체 어디다 팔아야 하는가? 다이어트를 하려다 사람 잡은 격이었다."(249-51)


"1931년 9월 20일 영국이 금본위제 정지를 선언했을 때, 이보다 1년여 전에 '금해금일'을 잡고 금본위제 복귀를 축하하며 샴페인을 터뜨렸던 하마구치 총리대신과 내각의 각료들은 현직에 있지 않았다. 하마구치 총리는 금본위제 복귀 10개월 후인 1930년 11월 백주대낮에 극우파 테러범에게 총격을 당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다음해인 1931년 4월 병상에서 총리직을 사임했다."(264) "군축 결정 이후 군부의 반발은 예상보다 거셌다. 내각은 군부가 성명서 몇 장 내는 선에서 그칠 줄 알았지만, 군부는 기어이 총을 들고야 말았다." 민간인 수상의 통제에서 벗어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던 군부는 "영국의 금본위제 정지 이틀 전인 1931년 9월 18일, 내각의 승인 없이 만주철도 보호라는 명분으로 군사적 행동을 취하고야 말았다. 이는 곧장 만주사변으로 비화되었다. 관동군의 명분 없는 군사행동으로 일본의 외교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266-7)


# 재벌을 위시한 투기 자본의 공격으로 금유출이 심화되고 국제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경기 침체 지속


"와카스키 내각이 뚝심을 발휘하고 있는 동안 일본은행의 지불 준비용 금은 심각한 수준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1931년 12월 금 보유고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민정당 정권의 오기도 이제 물리적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결국 민정당 내각은 만주사변 처리 지연과 경제 위기의 책임을 지고 1931년 12월 13일 총사퇴하고, 이누카이 츠요시를 수반으로 하는 정우회 내각이 들어섰다. 일본이 금본위제로 복귀한 지 2년, 와카스키 내각이 출범한 지 8개월, 영국이 금본위제에서 일탈한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누카이 총리는 취임 당일 새 내각의 첫 번째 각의 첫 번째 안건으로 금본위제의 존폐 문제를 상정하여 전격적으로 금수출 금지를 결정했다. 1931년 12월의 금수출 금지 조치로 일본의 금본위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금본위제에 대한 미련은 그 후로도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지만, 일본땅에서건 조선땅에서건 금화와 지폐가 자유롭게 교환·통용되는 '아름다운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았다."(273-4)


"금본위제의 정지는 금의 급격한 유출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국내 통화'로서 금의 기능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국제 통화'는 금뿐이었다. 금본위제가 정지된 이후로도 믿을 수 없는 국내 통화보다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금 보유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금본위제의 정지는 뛰어오르는 금값의 고삐를 풀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금본위제의 정지가 금 준비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정부 차원의 금 수요는 가일층 증대되었다." "1933년 2월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가 대공황 극복의 일환으로 금본위제를 정지하자 잠잠하던 전세계의 금값은 또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세계 금 보유고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제간 공식적인 금 이동이 사실상 정지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86)


"1930년대 초 일본은 심각한 금 유실로 신용 경색의 위기에 몰린 데다 전세계적으로 금본위제가 정지되면서 해외에서 금을 수입해올 길까지 막히게 되었다. 더욱이 만주사변 이후 만주의 처리 문제를 둘러싼 국제 여론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국가 권력을 송두리째 장악한 군부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영국과 미국에 대한 일전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전쟁을 치르려면 군비의 확충과 함께 비상시에도 효험을 발휘하는 유일한 국제 통화인 금 확보가 절실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금을 구해야 했던 것이다."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대대적인 산금정책을 세우고 돈을 풀었다." "육군성과 해군성에 모여 앉은 늙은 군인들은 전쟁을 사랑한 만큼 황금을 사랑했다. 그들은 황금이 필요했고, 황금이 부족했고, 황금에 목말랐다. 따라서 '산금매상안(産金買上案)'은 대장성의 계획이기 이전에 대전(大戰)을 준비하던 군부의 음모였던 것이다. 황금광시대, 1930년대 한반도의 골드러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288-90)


금수출 재금지 이후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으로 추진한 산금정책과 더불어 "금 생산을 늘려 놓은 또 하나의 주요한 동인은 금값 폭등이었다. 금값이 오르니 새로운 금광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이 늘게 되었고, 금값이 오르니 과거 채산성 문제로 채굴이 중지되었던 금광도 재개발될 수 있었다." "1931년 이후 불과 2년 만에 3배 이상 오른 금값은 조선의 금광 개발에서 가장 큰 취약점이었던 채산성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주었다. 금 생산의 채산성을 맞추려면 금맥 자체의 함금 비율이 높거나, 기계화 자동화로 생산성을 현격히 높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금값이라도 생산 원가 이상으로 유지돼 주어야 하는데, 함금 비율이 떨어지는 저품위 광맥이 대부분이고, 기계화도 덜된 조선의 상황에서 금값이 올랐다는 것은 거의 유일한 개발 동력이었다. 1933년 이후 무려 11년 동안 10톤 이상의 금이 꾸준히 생산될 수 있었던 것도 그 기간 동안 금값이 강세를 이어갔기 때문이었다."(300-1)


"황금광시대에 생산된 엄청난 양의 금은 반지나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금광에서 생산된 금이 옮겨진 것은 금은방이 아니라 은행이었다. 조선은행은 매일 금매입가를 고지했고, 금본위제가 정지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금을 매입했다. 금매입가는 주가, 쌀값과 함께 1930년대 조선의 3대 경제 지표였다."(312) "조선은행이 매집한 금은 그때그때 삼엄한 경계 속에 일본으로 송출되었다. 1934년 1월부터 5월까지 조선은행에서 일본은행으로 총 44회에 걸쳐 금이 송출되었다. 연말까지 족회 1백 회는 되었다는 말이다. 한 번에 대략 100kg의 금이 송출되었으므로 조선은행을 통해 일본으로 옮겨진 금괴는 1934년 한 해만 해도 10톤에 달했던 것이다. 1934년 조선의 금 생산량이 16톤이었음을 고려하면, 당시 국내에서 생산된 금의 대부분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은행 금고 속으로 사라졌던 셈이다."(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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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안병직 옮김 / 이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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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제4차위안단


1942년 5월초부터 헌병이나 경찰이 아닌 위안소업자들이 주축이 되어 모집한 "제4차위안단의 위안부로 동원된 사람들은 위안부 경험이 있는 약간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위안소업자들이 위안부들을 동원하는 방법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포로심문보고』에서는 위안부의 동원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비스'의 성격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병원에 있는 부상병을 위문하고 붕대를 감는 일이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장병을 즐겁게 해주는 것에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들 의뢰인들이 사용한 미끼는 다액의 수입, 가족의 부채를 변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 고되지 않은 노동과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신생활에 대한 전망이었다. 이와 같은 허위 설명을 믿고 많은 여성이 해외근무에 응모하고, 2~3백 엔의 전차금(前借金)을 받았다.〉" 23)


"제4차위안단은 일본군부에 의하여 조직되었기 때문에 위안소업자들과 위안부들은 군속적(軍屬的) 대우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외국으로 출국하면서도 여권을 가지고 출국했던 것이 아니라 군이 발행하는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출국했다. 그리고 그들은 출국할 때 여객선이 아니라 군용선을 이용하였으며, 이동할 때에는 주로 군용 교통수단을 이용했기 때문에 요금은 무료였다. 위안부 동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전차금이 어디에서 지출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전차금을 스스로 부담했다는 몇몇 위안소 경영자의 증언이 있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1938년 1월 상해 파견군사령부가 오오우치에게 일본에서의 위안부 모집을 의뢰했는데, 그때의 모집조건은 〈작부는 16세로부터 30세까지, 전차금은 500엔으로부터 1000엔까지, 가업년한은 2개년, 소개수수료는 전차금의 1할을 군부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26-7)


"기존의 연구에 의하면, 군위안소의 유형으로서는 군직영위안소, 군전용위안소 및 일반위안소 중 군도 이용하는 위안소의 세 가지가 있었다고 이해되어왔는데, 요시미 교수는 위안소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위안소는 경영 형태로 보면, 세 가지 타입이 있었다. 첫째는 군직영의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 둘째는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 셋째는 군이 지정한 위안소로, 일반인도 이용하나, 군이 특별한 편의를 요구하는 위안소이다.〉 군위안소 중에서는 군전용 위안소가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데, 많은 경우 이 유형을 민간이 경영하는 위안소로 이해하고 있으나, 요시미 교수는 그 유형을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로 규정했다. 일기에는 위안소의 유형을 가리키는 낱말이 네 가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항공대 소속 위안소', '병참 관리 위안소', 군전용 위안소' 및 '지방인 위안소'이다."(32)


"군위안소의 경영은 경영자(夫婦), 쵸우바 1명, 나카이 1명, 심부름꾼 1~2명 및 위안부 20명 전후로써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쵸우바의 기본업무는 위안소를 방문하는 장병들을 맞이하여 그들을 원하는 위안부에게 안내하고 회계장부를 정리하는 일일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일기의 필자는, 시장에서 위안소의 식자재를 구입하고, 위안소의 대외업무도 담당했다. 위안부들에 관련되는 일로서는 취업 및 폐업의 허가 신청, 성병검사에의 안내, 저금 및 송금 업무와 귀국절차의 업무 등이 있었으며, 소속기관과의 관련업무로서는 연대사령부, 병참사령부 혹은 경무부에 대한 영업일보, 영업월보 및 월별 수지계산서의 제출 등의 업무가 있었다. 위안소가 소속기관에 내는 각종 보고서들을 보면, 위안소 경영의 독립성이 매우 취약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본래 위안부의 모집부터 경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군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본질에 있었을 것이다."(34-5)


"위안부와 업자들의 화폐수입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서는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 아주 많다. 첫째는 일본군 점령지에서의 전시하이퍼인플레를 어떻게 감안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문옥주의 예금통장에 대한 고바야시 히데오 교수의 시산(試算) 결과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옥주의 통장에 기입된 예금을 가지고 인플레를 감안하여 일본의 엔 기준으로 그녀의 실질수입을 계산하면, 1941년 12월의 일본물가를 100으로 하고 버마에서의 월 인플레율을 11~14%로 보았을 때, 1943년 4~9월의 2150엔은 264~405엔, 1943년 10월~44년 3월의 2641엔은 148~266엔, 1944년 4~9월의 900엔은 23~48엔, 1945년 4~9월의 20860엔은 110~321엔으로서 합계 527~1040엔으로 계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화폐수입도 송금하는 데 엄청난제약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송금이 허락되었다 하더라도 조선에서 그것을 현금으로 인출하는 데 있어서도 큰 제약이 있었다."(39-40)


"위안부들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의 성격도 모른 채 전차금과 높은 수입이라는 미끼에 끌려들어 '유괴나 다름없는' 인신매매나 사기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위안부의 동원 방법을 '광의의 강제동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취업허가는 위안부가 위안부로서 종사할 수 있는 장애요인이 없는 한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폐업허가에 있었다. 폐업허가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위안부로 동원될 때의 계약조건이었는데, 그것은 주로 전차금의 문제였을 것이다. 문제는 전차금을 변제했을 경우에도 폐업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폐업이 어려웠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위안소가 군편제의 말단조직으로 편입되어 군부대와 같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들은 항상 추업부(醜業婦)로 천시되었다. 군위안부들이 놓인 위와 같은 처지를 '성적 노예상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41-2)


1부 번역문


1943년 1월 1일 금요일. 맑음

대동아성전 2주년인 1943년 신춘을 맞이하여 1억 민초는 엎드려 삼가 폐하의 만수무강하심과 황실의 더욱 번영하심을 봉축하는 바이다. 나는 멀리 고향을 떠나 버마 아캬브 시 위안소 칸파치 클럽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궁성을 향하여 절을 하고 고향의 부모, 형제 및 처자를 생각하고 행복을 빌었다. 동쪽 하늘의 햇빛도 유심한 듯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와 국가의 융창(隆昌)을 축복하여 준다. 오직 금년 한 해도 무사히 행운 속에서 보내게 하여주옵소서. 처남과 O환(O桓) 군은 위안부를 데리고 연대 본부와 기타 서너 곳에 신년 인사차 갔다 왔다. 일선 진중에서 맞은 새해 첫날도 다 가고 밤이 되어 금년의 행운을 꿈꾸며 여러 날 잠을 못 자서 괴롭던 차에 깊이 잠들었다. p.46


1월 13일 수요일. 맑음

버마 아캬브 시 위안소 칸파치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다. 연대 본부 의무실에 가서 위생 콘돔 1000개를 가져 왔다. 밤 1시 반경에 자다. 어젯밤에는 적기(敵機) 소리가 나지 않았다. p.48


3월 10일 수요일. 맑음

버마 페구 시의 카나가와 씨 댁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다. 랑군의 카나자와 군이 만달레에 갔다 오는 길에 페구에 들러 내가 있는 줄 알고 찾아왔더라. 종일 놀다가 저녁을 먹고 자다. 카나가와 씨의 위안소를 55사단에서 만달레 근처의 이에우(Ye-U)라는 곳으로 이전하라는 명령이 있어 오늘 모처 부대장이 와서 가자 하는데, 위안부 일동은 절대 반대하며 못 가겠다더라. p.61


4월 5일 월요일. 맑음

버마 페구 시 사쿠라 클럽의 카나가와 씨 처소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사쿠라 클럽의 위안부 후미코는 복부가 크게 아파 오후에 해부 수술을 한다더라. 후미코는 작년에 만달레에 있을 때에도 맹복염(盲腹炎)으로 수술하였는데, 이번에 또 수술하는 불행한 몸의 주인공이다 저녁을 먹고 분라쿠관에 놀러 가니 랑군에서 오오하라 씨가 와 있기에 같이 밤 12시 남짓까지 놀다가 사쿠라 클럽으로 돌아와서 잤다. p.67


7월 18일 일요일. 맑고 조금 흐림

인센의 숙사에서 일어나 무라야마 씨 댁에서 아침을 먹고 종일 놀다. 아캬브에서 온 아사하라 씨는 이번에 부대가 이동하여 온 타운기에 갔다 왔는데, 선발대장 치바 대위의 편지를 전하더라. 열어보니, 위안소를 타운기에서 경영하도록 아캬브에서 여자들이 오거든 같이 오라는 것이더라. 오늘 밤부터 무라야마 씨 위안소 내의 일실에서 호이 군과 같이 자기로 하였다. p.94


7월 29일 목요일. 흐리고 비

인센 요마 거리의 무라야마 씨 댁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아라이 씨와 병참에 가서 콘돔을 배급받았다. 위안부 진료소에 가서 등록되지 않은 2,3인의 위안부에게도 진찰을 받게 했다. 이전에 무라야마 씨 위안소에 위안부로 있다가 부부 생활하려 나간 하루요와 히로코는 이번에 병참의 명령으로 다시 위안부로서 김천관에 있게 되었다더라. 중국인 거리에 들러 저녁에 인센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밤 1시경에 자다. p.97


1944년 2월 22일 화요일. 흐리고 조금 비 오고 맑음

싱가포르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니시하라 군과 고리짝 짐을 싸고 있는데, 위안부들이 돌연 취객이 검을 빼 폭행한다기에 니시하라 군이 곧 달려가서 취객을 붙들어 진정시키느라 짐을 완전히 싸지 못하였다. 밤 1시경에 잤다. p.157


2월 29일 화요일. 흐림

싱가포르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요코하마 정금은행에서 저금 1000엔을 찾아 200엔은 전신환으로 고향의 동생에게 부쳤다. 손가방 1개를 사고, 악어지갑 1개를 주문하였다. 물가가 높이 솟아 지갑 한 개에 75엔이다. 이렇게 물가가 폭등하면 장차 어찌 될까. 금년이 윤년이라 2월이 하루 더 있어 29일이 되다. p.159


4월 25일 화요일.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보이를 데리고 시장에 갔다 왔다. 아침을 먹고 클럽 전원이 13시 15분 야스쿠니 신사의 임시대제(臨時大祭)에 즈음하여 엄숙히 요배식을 거행하였다. 카나가와 광옥과 시마다 한옥 2명을 데리고 검역하러 갔더니, 오후에는 휴무라 검역을 못 하고 돌아왔다. 밤 1시경에 잤다. 피마자를 심었다. pp.172-3


4월 29일 토요일. 맑음

전쟁 중의 제3회 천장절이다. 천황 폐하께서는 제44회의 탄신을 맞이하셨다. 우리들 민초는 오직 성수의 무궁하심을 봉축하옵나이다. 특별시청 앞 광장에서 배하식(拜賀式)을 거행하였다. 오늘은 천장절의 경축일이라 군인의 외출이 많아 클럽의 수입이 2450여 엔으로 개업 이래 최고 기록이었다. 밤 1시 남짓에 쵸우바 일을 마치고 잤다. p.173


4월 30일 일요일. 맑고 조금 흐리고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보이를 데리고 자동차로 비치로드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아 왔다. 오늘도 군인의 외출이 많아 어제의 최고 수입을 훨씬 초과하여 2590여 엔의 최신 기록이다. 밤 2시경까지 쵸우바 일을 보다가 잤다. p.174


6월 9일 금요일.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보이를 데리고 오챠로드 시장에 가서 장을 보아 왔다. 오늘 검미 결과는 입원 중인 2명은 퇴원하고 2명만 입원일 뿐, 집에 있는 여자는 전부 합격되었다. 이 달부터는 여자는 담배 배급이 없는데, 클럽의 가업부에 대해서는 접대용으로서 특별히 매일 10개비의 배급이 있다. p.184


10월 28일 토요일. 맑음

싱가포르 시 켄힐로드 88호의 키쿠수이 클럽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고 싱가포르 종합물자배급조합에 가서 손수건과 양말 특별 배급을 받아 왔다. 저녁을 먹고 밤 1시경까지 쵸우바 사무를 보다가 잤다. 필리핀 동방 해상과 레이테(Leyte) 만에서 적함선 70여 척을 격침하고 파괴한 대전과가 있다. 클럽 종업원의 신체검사를 하였다.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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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예와 병사 만들기
안연선 지음 / 삼인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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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위신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군 당국은 1938년 두 가지 지시를 내렸다. 첫째, 위안부의 모집은 군당국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야 하고 모집 담당자는 군에서 신중하게 선정해야 한다. 둘째, 위안부 모집 과정은 조선에서와 같이 관련 지역 경찰과 긴밀히 협력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군 교통 수단이나 군 숙소 등을 제공해서 군이 모집해 온 소녀들을 호송했다는 증언이 많이 있었다. 이들 여성들은 종군 간호부처럼 일본군 조직 내에서 공식성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수송시에도 군수품 수송을 위한 장소, 즉 기차의 맨끝 연결 차량이나 배의 밑바닥에 실려갔다. 위안부 모집자들을 태평양 섬 지역으로 운송하는 동안 "배 안에서 사용 중지"라는 경고문이 선내에 붙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들 모집자들을 각 부대로 할당할 때는 '군수 물자 배급'이라는 명목에 위안부들의 이름을 적었다고 한다."(86)


"위안부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경제적 약자일 뿐만 아니라, 외부모 가족(특히 '편모 가정') 출신이나 고아와 같은 당시 사회적인 배경에서 약자들인 경우가 많았다." "옛 위안부들의 가족 배경에서 발견한 또 하나 눈여겨볼 사실은 장녀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맏딸로서 가족 부양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위안부 모집 대상의 또 다른 그룹은 기생 학교의 소녀들이었다." "위안부들 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모집 대상자가 된 경우도 있었다. 정서운·윤순만 할머니처럼 당시 조선 독립 운동과 연루되어 있던 가족의 딸들 역시 위안부로 차출된 경우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위안부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그룹을 주요 대상으로 모집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집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사회적인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사회적 계급이라는 변수가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87-9)


"위안부들을 통제하기 위해 서로 분열시켜 통제한다는 분리 지배의 원리가 사용되었다. 배족간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위안부들도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위안소에 있었던 기한에 따라 계급이 매겨지기도 했고, 상급자 위안부는 하급자를 처벌할 수도 있었다." "위안부들 사이의 위계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 것은 그들이 '상대하는' 군인들의 계급이었다. 군인들 사이의 위계 구조는 위안부들 사이에서도 재생산되었다. 각 위안부가 '받는' 군인이나 장교의 계급에 따른 특권과 위계 구조가 바로 이들의 지위를 결정했다. 군 위계 구조 내 고위직 장교를 '상대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일상 생활에 차이를 가져왔다. 위계 질서 구조에서 위안부가 지니는 위치에 따라 그들이 하루에 몇 명을 받아야 하는가가 결정되었다. 주로 장교들을 '상대하는' 일본 위안부들은 다른 위안부들처럼 많은 군인들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차별은 이들 여성들을 서로 분열시키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96-7)


"위안부들이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을 때는 사용 가치가 없는 것이므로, 그야말로 사용후 버려지는 소모품과 같은 존재였다. 예를 들어 병이 심해지거나 몸이 너무 약해서 더 이상 성행위를 할 수 없게 되면, 위안부로서의 사용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들의 몸은 성행위를 위해서만 유용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병이나 다른 질병에 걸리지 않은 상대적으로 건강한 위안부만이 그 '유용성'을 인정받았다." "위안부들에게는 성노예에서부터 심지어 전쟁 말기에는 군사적인 업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일이 부과되었다. 예를 들면 군부대 병영의 청소, 군복 세탁, 창 찌르기 등의 군사 훈련, 탄약 상자와 폭탄 나르기, 부상병 간호, 전투에 나가거나 돌아오는 군인들의 환송과 환영, 춤과 노래로 군인들에게 오락 제공, 재사용을 위해 사용한 콘돔 세척하기, 부상병을 위한 헌혈, 심지어는 스파이 활동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103-4)


"위안부들은 매일매일 계속되는 장기적인 성폭행에 대처해 나갈 생존 전략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위안소 체제는 위안부들의 저항을 약화시켰지만, 그러함에도 몇몇 위안부들은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방식으로 저항했다. 저항의 방식은 다양했다. 위안소 탈출을 시도하기, 군인 요구에 저항하기, 되받아치거나 싸우기, 군인 살해, 자살 시도, 실성함(미침), 힘든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술이나 마약 복용하기, 장교와의 친근감을 형성하기 등 여러 가지 생존 전략과 저항의 방식이 존재했다. 그 가운데 가장 대담한 저항 방식 가운데 하나는 바로 위안소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안부들은 늘 감시당하고 있었으므로 탈출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위안소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던 대부분의 위안소들이 최전방 근처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위안부들이 위안소를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바깥은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111-2)


"전후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위안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수치와 비난과 오명뿐이었다. 자신과 가족과 한국 사회는 이들을 '더럽혀진 몸'으로 여겼다. 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더 이상 '정상적인' 다른 여자들과 같을 수 없음에 대한 쓰라린 심정을 토로했다. 위안부들이 자신의 과거를 주위에 밝히자 가족과 친척들은 심지어 이를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이러한 가족들의 반응은 이들을 다시 가족 밖으로 내몰았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사회 운동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옛 위안부들이 자신의 과거를 신고하거나 공개적으로 밝히고자 할 때, 이들은 또다시 가족과 마찰을 빚었다. 이제는 위안부 자신만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 모두가 '더럽혀진 몸'에 대한 수치와 맞부딪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 위안부들에게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것을 운동단체나 정부에 신고차는 것 자체가 '가족의 수치'를 사방에 알리는 것으로 해석되었다."(119-20)


"옛 일본 군인들 가운데는 위안부와 나눈 연애 관계 때문에 전쟁터에서 상실된 자아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일본인 작가 니시노 루미코가 만난 한 군인은 위안부와의 만남이 "진정한 인간적 만남"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는 위안부와 군인의 경험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는 것 중에 하나이다. 위안부들의 구술과는 많이 다른데, 옛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 여성들이 자신들의 동반자였고, 연인이었고,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옛 일본군인들은 그들이 그리던 어머니, 아내, 연인상을 투영시킨 이상적인 여성상의 대용품으로 이들 위안부들을 대상화했던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인간적인 연애 관계에 대한 감정이 위안부를 경멸하는 감정과 함께 공존했다는 것이다. 옛 일본 군인들은 위안부들은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한 대상이라든가, '더러운 여자'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131-2)


"위안부뿐만 아니라, 일본 군인도 엄격한 규제와 통제를 받았다. 그들은 일본제국 군대의 군인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증명해야 했다." "일반병들은 고참들의 가혹한 대우와 혹독한 군사 훈련을 견뎌야 했다. 특히 막 입대해 들어온 신참들은 '지옥 훈련'이라는 것을 거쳐야 했다. 이때 신참들은 매일 맞았다. 군복에 조금이라도 흙이 묻었다거나, 군화가 제대로 광이 나지 않는다거나, 대답이나 태도가 고참의 맘에 들지 않을 때는 신참들은 고참들에게 가차없이 구타를 당했다. 그러나 군인들을 통제된 군생활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길들이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이 필요했다. 혹독한 군생활을 보상하기 위한 일종의 위로·오락으로서(그러니까 당근으로서) 제공된 것은 바로 '성'이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처벌과 보상 체계가 공존했던 것이다. 옛 일본군 장교 요시오카 다다오 역시 일본 군당국이 군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위안부 제도에 의존했음을 시인했다."(142-3)


"옛 위안부와 전쟁 포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옷을 갈기갈기 찢고 발가벗기기, 채찍질하기, 가슴 도려내기, 담배불로 지지기, 자궁에 총을 겨누어 발사하기, 복부 가르기 같은 상상하기도 힘든 행위들을 일본 군인들이 했음이 보고된 바 있다." "폭력은 마치 화폐처럼 군인들이 위안부들한테 원하는 '서비스'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폭력은 위안부들뿐만 아니라 부하 군인들, 그리고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의 주민들에게도 널리 사용되었다. '불굴의 전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전투를 위한 사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군대 내 폭력은 국가 권력에 의해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도화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인들은 일상에서 계속되는 구타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갔다. 말하자면 위안부를 구타하는 것을 포함해 군대 내에서 구타는 하루 일과 가운데 하나로 일상화되었고, 가차없이 냉혹해져 갔다."(148-9)


# 위안소 설치를 합리화하는 주장들

1. 위안소 제도는 기존의 매춘 제도와 다를 바 없다.

2. 전시戰時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3. 남성은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 성욕이 있다.

4. 주둔/작전 지역의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방지한다.

5. 주둔 지역의 치안 유지에 이바지하여 반일감정을 억제한다.

6. 위안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당국이 개입했다.


"(가혹한 폭력과 더불어) 남성성을 부추기기 위한 또 다른 실천 가운데 하나는 여러 명이 함께 위안소에 가서 성관계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마치 하나의 '의식'(ritual)과 같다. 이때는 대개 장교나 고참이 부하들을 이끌고 갔다. 옛 위안부 하군자 할머니는 군가를 부르며 그녀의 방 안으로 행진해 들어오는 군인들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성행위는 그룹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해야만 하는 하나의 통과 의례와도 같다." "군인들이 성적인 필요를 느끼는지, 또는 상대 여성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와는 상관없이 위안부와 성관계를 하는 것은 이들 군인들에게 주어진 권리였을 뿐 아니라 성을 통해 남성성을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였다. 성행위를 통해서 남성다운 행동의 기준에 들었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러므로 성은 군대 내에서 일상 생활을 통해 남성성을 강화시키고 재확인하기 위한 주요 실천 관행 가운데 하나였다."(176-7)


"한마디로 말해 위안부 제도는 남성적 정체성(용맹스럽고 공격적이고 성적화된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는 환경을 군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일본 군대의 위계 구조에서 일반 사병이나 갓 입대한 신병들이 가장 낮은 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대 내 위계 구조, 특히 체벌의 위계 구조에서 위안부들은 일반 사병들보다 더 낮은, 유일한 '부하'들이었다. 군인으로서의 남성적인 지배와 군사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구성된 '위안'을 위한 공간에 위안부들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전쟁터에서 남성은 전투를 위한 하나의 군수품이나 '총알받이'로 전락했다. 그러나 위안소에서는 위안부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통해 전사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들의 주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서 남성적인 주체성을 회복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행위는 남성성의 정수로 여겨진다."(185-6)


"조선의 여성성 모델은 일본 천황의 군대를 '위안'하기 위한 성적인 대상('창녀')으로 규정되는 반면, 모범적인 일본 여성의 역할은 재생산자로서 미래 천황의 군인을 생산하기 위한 모성으로 규정되었다." "조선 여성과 일본 여성 사이의 이분화된 이미지, 즉 성적인 도구와 '국가의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는 가부장적 국가 권력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분류는 서로에 상반되어 개념화되기 때문에, 위안부들을 '더러운 창녀'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일본의 후방에 있는 일본 여성들에게 '정숙한' 부인·어머니·딸의 자리를 비축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분화는 이들 둘 사이의 민족적인 위계 질서의 골을 깊게 하는 데 한몫 했다. 조선과 일본에 걸쳐 통용되었던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기반한 이러한 위계 질서는, 전쟁을 통한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서 식민주의 지배를 당연시하기 위한 또 다른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211-2)


#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가 '조국(homeland)'으로 상징화


"여성의 몸을 민족의 고결함으로 상징하는 담론은 여성에게는 위험한 것이다. 사실 상당수의 위안부들이 전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또한 귀향을 한 경우도 자신들이 위안부였음을 공개하지 않았다. 또다시 수치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속한 공동체, 즉 '민족의 명예'를 훼손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국도 일본도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여성성에 대한 한국 민족주의와 유교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이의 실천은 이러한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을 초래했다. '정숙한' 여성의 성과 '정조'는 민족의 순수성과 연관지어 개념화되므로 위안부들의 침묵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부과된 수치감들은 이들을 침묵하게 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위안부 문제를 부인해 온 일본의 이해 관계에 공모해 온 셈이다."(223-4)


"위안부들에게 강요된 '난잡함' 또는 '더러운' 여성 정체성은 군인들 내에 여성을 혐오하도록 하는 남성 정체성을 강화시켰고, 순종적인 여성성은 우월한 남성성을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위안부들을 노예화된 위치에 놓음으로써 일본 군인의 '주인됨'이 형성되고 강화되었다. 즉 조선인 위안부들의 몸은 일본 군인의 민족적 우월성과 남성성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위안부들의 '오염된' 여성성은 군인들의 남성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위안부 제도를 통해 구성된 여성성에는 모순이 드러난다. 노예화되고 성애화된 위안부의 여성성과의 관계에서 군인들의 남성성은 강화되는 한편, '더러운' 위안부의 몸과 접촉함으로써 군인들 자신도 '오염되고', 성병에 걸려 남성성이 훼손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위안부를 '필요악'의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225-6)


"일본 군인의 민족 정체성은 '광적인' 애국주의, 천황에 대한 충성, 외국인 혐오주의, 집단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들의 민족 정체성은 또한 성별화되어 있었다. 특히 천황제는 일본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의 정체성은 천황제와 민족주의의 결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인 위안부들의 민족 정체성은 반식민주의적이었으나 일본 남성들의 민족 정체성은 식민주의적이었다." "일본에 의한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 형성은 일본인의 우월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위안부를 '미문명화되고' 성애화되고 '음란하고'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것은, 반대로 일본 군인의 문명화되고 우월하고 애국적이고 남성적인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가부장적인 민족주의와 '광적'인 애국주의는 조선인 위안부의 멸시와 고통에 의해 마련된 토양 위에서 번성했다."(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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