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발견 : 서구적 사유의 그리스적 기원 까치글방 91
브루노 스넬 지음, 김재홍 옮김 / 까치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서론


"유럽적 사고를 이끌어가는 과정을 초기 그리스 정신 가운데에서 추적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인에게서의 사유의 '발단'을 근본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스 인들은 미리 앞서서 그들에게 주어져 있던 사고의 도움을 받아서 새로운 대상(과학과 철학 따위)을 획득하고 또 (논리적 절차와 같은) 오래된 방법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사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처음으로 창출했다. 그리스 인은 보다 활동적이고, 추구하고, 탐구하는 정신으로서의 인간의 정신을 발견─다른 어떤 종류의 형식으로 존재하다가 이 시기에 비로소 정신'으로' 규정된─했다. 그 토대에는 인간의 새로운 자기 이해가 놓여 있다. 정신의 발견이라고 하는 이 과정은 호메로스부터 시작된 그리스 문학과 철학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들인 서사문학, 서정문학, 극문학(희곡) 등은 이 여로 위에 있는 단계들인 것이다."(7-8)


1장 호메로스의 인간 이해


"서구의 먼 장래의 발전을 결정한 인간과 그 깨어 있는 명석한 사고에 대한 관념(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관념)은 그리스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기원전 5세기에 성취했던 것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메로스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단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는 그의 언어가 예시해준다. 이미 관찰된 바이지만, 비교적 원시 언어에서는 추상어가 발전되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구체적-감각적 의미를 지닌 언어 중에는 보다 발전된 언어에서는 기이하게 생각될 수 있는 풍부한 구체적 표현법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일례를 들면, 호메로스는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들을 대단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즉 horan, idein, leussein, athrein, theasthai, skeptesthai, opsesthai, dendillein, derkesthai, paptainein 등이 그 예들이다. 이에 반하여, 호메로스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동사들은 blepein과 theorein이라는 두 말밖에 없다."(18)


"derkesthai라는 말은 특정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뱀(drakon)은 derkesthai로부터 파생된 명사인데, 뱀이 이렇게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자신의 눈에 섬뜩한 '눈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리한 눈초리로 응시하는 것'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뱀이 특별히 잘 볼 수 있다거나 뱀의 시력이 아주 우수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의 눈초리를 그렇게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메로스의 경우에 derkesthai라는 말은 눈의 기능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에 의하여 지각되는 눈빛을 말한다. 즉 어떤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은 감정을 표출하는 제스처인 것이다." "theasthai라는 말은 무엇을 본다는 것은 같지만, 그것은 동시에 입을 쩍 벌리고 본다는 의미이다. 즉 horan, idein, opsesthai라는 동사들은 결코 '봄' 그 자체의 기능을 표현하는 하나의 통일된 동사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때그때마다 '보다'라는 특정한 방식을 표현하는 몇몇의 동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18-22)


"초기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언어 및 조형예술에서 신체를 통일체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보다'라는 동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다'라는 초기 동사들은 본다는 행위를 그 구상적 양태에 의하여, 즉 그 행위와 결부된 태도 혹은 감정에 의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나, 후기의 언어는 이 행위 자체의 본래 기능을 어의의 중심으로 보다 강하게 밀어내고 있다. 언어가 점차적으로 사상(事象) 그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 사상이라는 것은 구상적인 것도 아니고, 그것 자체로 특정의 명백한 정서와도 결부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기능이다. 그러나 이 기능이라는 것이 일단 인식되고 명명되자마자, 그것은 존재하게 되며, 그것이 존재한다는 의식은 갑자기 공동의 소유물이 된다. 즉, 신체의 경우처럼 그 숨겨진 통일성이 벗겨지거나 발견되자마자, 그것은 더이상 '사지(四肢)의 총체'가 아니라 '신체 자체'로 인식 가능하게 된다."(26-7)


"이러한 사정은 정신과 영혼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과 신체, 육체와 영혼은 상호 대립 개념이어서, 이들 개념 각각은 그 대립 개념에 의하여 규정되기 마련이다. 육체에 대한 표상이 없는 곳에는 영혼에 대한 어떠한 표상도 있을 수 없다. 역도 그러하다. 호메로스 역시 '영혼' 혹은 '정신'을 특징짓는 고유한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후기 그리스 어에서 영혼을 의미하는 psyche라는 말도 원래는 사고하고 감각하는 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호메로스에게서 psyche는 그것이 인간에게 '생기를 주고 있는' 한에서, 다시 말하여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한에서 혼일 뿐이다. 혼의 영역을 표현하는 또다른 말인 thymos는 정동(情動, 흥분)을 일으키는 것이며, noos는 여러 가지의 표상(관념, 이미지)을 초래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호메로스의 언어 가운데 하나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간격은 '신체'를 표현하는 언어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다른 말들에 의하여 채워진다."(28-30)


"영혼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맨 처음 피력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살아 있는 인간의 영혼을 psyche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혼은 신체 및 신체적 기관의 성질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성질을 부여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성질은 호메로스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영혼에 부여하고 있는 속성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호메로스 자신에게는 언어상의 모든 전제가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상의 모든 전제라는 것은 호메로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사이의 시대에, 다시 말하여 서정시의 시대에서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단편」 4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모든 길을 걸어간다고 해도 영혼의 끝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영혼의 의미는 깊다〉." "그가 영혼을 무한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까닭은 신체적인 것과의 구분을 명확하게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44-5)


2장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신앙


"신앙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항시 불신앙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신앙(credo)'이라는 것은, 이것과 아주 대조되는 허위 신앙, 즉 이단 신앙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신앙은 사람들이 그 옹호를 위해서든 혹은 그것에 저항해서든 싸워야 하는 도그마와 결부된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에게는 교의(敎義)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신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민족이 다른 신앙을 혹은 다른 신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을 수조차 없었다. 아메리카에 상륙했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인디언의 신들이 마땅히 우상이요, 악마로 여겨졌으며, 유대 인들에게도 그들의 이웃 사람들의 신들은 야훼의 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해서 거기서 그 지방의 토속적인 신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자신은 거기에도 아폴론, 디오니소스, 아르테미스라는 신이 마땅히 있는 것으로 알았다."(54)


"아낙사고라스와 디아고라스가 국외로 추방되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처해진 일 따위의,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거의 모든 불신앙에 대한 법률상의 박해는 기원전 431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에서 기원전 5세기 말까지의 단기간인 약 30년 동안에 발생했다. 더구나 이 기간은 올림포스 신들이 본래적인 생명이 이미 다한 때이다. 이들 재판은 활력이 넘치고 자부심을 지닌 종교심의 치기 어린 불관용이 아니라, 상실된 위치를 회복하려는 경우에 생겨나는 신경과민 현상이었다." "'신을 경외하라'는 법률은 우선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즉 종교에 대한 모독을 하지 않아야 하며, 그 다음에는 제의에 대한 공적인 행사에 참여해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가 항시 관례적인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에서 종교 생활의 초기 단계에 적용된 이러한 규정들은 신념, 신조, 교의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56-8)


"credo quia absurdum(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소위 터툴리아누스적인 말은 그리스적인 것이 아니다. 고전-그리스적 관념에 따르면, 신들 자신이 우주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 호메로스에게서 신들은 항시 지극히 자연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심지어 헤라가 태양신인 헬리오스를 대양에 잠기도록 강요하는 것조차도 어디까지나 '자연적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것을 달성하려는 마법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의 신성은 무로부터 무엇인가(有)를 창조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 인들에게는 천지창조의 역사라는 것은 없다. 그리스 신성은 단지 사물을 고안하든지 혹은 변형하는 행위만을 할 수 있다. 호메로스에게서도 초자연적인 일은 확고한 질서에 따라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들이 (새로운 국면 전환을 일으키기 위해) 세속적인 일에 꼭 개입해야만 할 때에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올바른 법칙이 있다."(60-1)


"「일리아스」의 첫머리에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에 불화가 생겼을 적에,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브리세이스의 인도를 요구하면서 아킬레우스의 격노를 촉발시킨다. 이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그의 검에 손을 얹고 아가멤논을 향하여 검을 뽑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한다. 바로 그 순간에 아테나가 나타난다(명백하게 말해지고 있는 바처럼 그녀는 단지 아킬레우스에게만 나타난다). 그 여신은 그를 제지하면서 지금은 그가 물러서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분노를 잠재우도록 경고한다. 즉시 아킬레우스는 여신의 권고에 따라 그의 검을 칼집에 꽂았다." "호메로스에게서 인간은 아직 그 스스로 결단의 발기자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자각은 비극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호메로스의 경우에, 인간이 숙고한 후에 어떤 결단을 내렸을 때 그는 그 결단이 신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63)


"호메로스의 신들은 우리와 너무도 친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 신들이 얼마나 대담하게 창출되었는가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 올림포스 신들만이 유일한 지배자는 아니었고, 특히 본토에서는 지하적, 신비적, 황홀적 신성이 버티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새롭게 침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 시, 높은 차원의 정신적 관심사는 결국 호메로스적 종교에 의하여 규정되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형성된 직후에 그리스의 조형미술은 신들을 위대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신들을 위해서 건축된 신전들은 어떠한 숭배 의식이나 혹은 비교 행위(秘敎行爲)에 사용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단지 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한 아름다운 집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도 건축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의 예술은 이 신들을 보다 아름답고, 보다 경탄할 만한 형태로 만들고자 무려 300년 간에 걸쳐서 노력했다."(71)


"이 신앙은 계몽주의 시대의 낙관주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염세주의에 가까웠던 그들은 인간을 가을의 나뭇잎처럼 비참하게 사라져가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인생에 대하여 깊은 비탄에 빠져 이야기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 인들은 신들이 하늘에서 편안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봄으로써 이 지상 세계의 비참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후기 그리스 인들은 별들이 고착된 궤도에 따라 운행하는 모습을 스스로 관찰하고 경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에 의해서 그들의 지상 생활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적, '관조적' 삶을 실제적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지상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할 때에도 이 '이론'에는 호메로스적 경탄(thaumazein)으로부터 유래하는 종교적 감정의 여러 흔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철학적 사유로의 전진은 이들 신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73-4)


3장 헤시오도스에게서의 신의 세계


"헤시오도스는 칼리오페(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목소리)의 이름에 〈이 뮤즈는 모든 뮤즈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명성을 알린다거나,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키는 기쁨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헤시오도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칼리오페는 왕들이 판결을 내릴 때 그들의 곁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훌륭한 재판관의 '유쾌한' 언변이 어떻게 평화를 초래하는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헤시오도스는 칼리오페의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말할 경우에 비단 기분 좋은 울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말 또한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서 칼리오페는 뮤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는 헤시오도스가 칼리오페를─더군다나 아홉 자매 가운데 오직 그녀만을─시의 내용 및 일반적으로 인간의 언변의 의미와 관련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81)


"헤시오도스의 경우에, 신성의 현현이 우리들에게 정말로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은, 헤시오도스 자신이 시인으로서의 서품을 부여받는 것을 묘사하고 뮤즈들과의 만남을 서술할 때뿐이다. 호메로스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이다. 호메로스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에서도 신들의 간섭을 받고 있다." "헤시오도스에게서는 정말 신화적인 것조차, 다시 말하여 신들이 특수한 작용을 하는 인격체로서 표현되는 이야기까지도 끌어들이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적인 것에 대한 조망을 주려고 시도하는데, 말하자면 그는 신들을 인간이 그것들을 신들로서 경험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으로부터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신들을, 마치 그것들이 식물 혹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원래부터 우리에게 대상적으로 주어져 있는 자연에 속하는 것인 양 취급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이 신들을 일종의 린넨 체계 및 계보도로 압축하고 있다."(86-7)


"가장 미천한 신성에게도 확고한 장소를 할당하는 이 계보도는 신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무엇을 말하고 있다. 신들의 계보에 대한 사색이 이미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한 어떤 인간이 무엇인가의 기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경우에, 그 사람은 어떤 일 혹은 어떤 식물, 어떤 동물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아주 오래된 확신이다. 이와 같은 신들의 계보에 대한 사색이 기원과 본질에 관한 질문과 오래전에 마주쳤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원시적인 관념들로부터 헤시오도스를 떼어내는 어떤 합리적인 경향이 시사되고 있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개개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원리와 체계이다. 따라서 그는 철학뿐 아니라,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신론(一神論)의 선구자이며,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만물이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결국 이 신들은 신적인 것의 하나의 통일체로 묶이고 만다."(89)


"헤시오도스의 계보도는 상호간에 결합되지 않은 두 개의 다른 계통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 단지 밝은 신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누크, 즉 '밤'은 부친 없이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태어난 자손을 가지고 있다. 누크이 자손들은 예를 들면 질투, 기만, 노년, 싸움, 노고, 기아, 고통, 살해 등이다. 이것들은 단지 생명에 대하여 악의와 적의의 모습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다른 신들에 대하여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후에 아낙시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등의 철학자들이─물론 이들 각자의 이론은 상이한 형식이기는 하지만─세계를 설명할 때 대립의 이론을 내놓도록 했다." "그런데 이 밤의 악마적인 힘을 가진 자손들은 우리들의 세계 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계속적으로 작용을 미치고 있으므로, 제우스가 지배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90-1)


4장 초기 그리스 서정시에서의 개성의 자각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의 시구는 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호메로스와 아주 유사하다는 면에서, 이들 시구로부터 근본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오디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이 그 모습을 나타내어, 마치 아프로디테가 사포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부드럽게 위로할 때에야 비로소 완전하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경우에 그 회상이라는 것은 현재의 사태에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예전의 체험에만 미치고 있을 뿐이다. 오디세우스는 인생의 변화무쌍한 흥망성쇠와 인간을 지배하는 리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오디세우스가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에 말을 걸기 시작했을 때, 혹은 그의 가슴속에 thymos가 격분했을 때, 이것은 아르킬로코스가 그의 thymos에 말을 걸기 시작한 경우와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호메로스의 thymos라는 것은─유사하게 마음도─원칙적으로는 신체적 기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정신의 활동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126-7)


"그런데 서정시인들이 심적인 것(das Seelische)을 또 다른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영혼과 정신이라는 말에 따라 확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지닌 단편적인 자료만으로 충분한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정시인들의 이 새로운 사상은 당시에 아직 그 정도로까지 명확한 형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심적인 것을 표시하는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못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정시인들이 이 영혼을 신체적 기관과는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몇몇의 어휘를 통해서 확신을 가지고 추정해볼 수 있겠다. 아르킬로코스가 자신의 thymos를 〈고뇌로 교란되어〉라고 말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대장에 대하여 그는 〈용기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가 아직 알지 못했던 심적인 것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표시하는 표현법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27)


"서정시인들이 드러내는 개인적 감정 가운데에는 영혼의 분열과 정신적인 것에서의 공유에 대한 의식이 발견되고 있다. 물론 아르킬로코스, 사포, 아나크레온은 정신의 자발성을 비교적 좁은 감각의 영역 안에서 겨우 찾아내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강력한 감정의 움직임은 그들에게는 여전히 신성의 개입이며, 단지 영혼의 곤경만이 자기 고유의 것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의식적인 개인적 행위의 영역은 아직 열려져 있지 않았다. 이 영역은 비극에 들어 처음으로 성취되었다. 서정시인들이 발견한 것은 조형 예술가, 사상가, 정치가들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위대한 개인의 성과는 점차 확산되어가는 크나큰 역사의 흐름으로 운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행위와 운명의 실로 짜여 있기에, 그 직물은 한편에서 보면 단지 씨줄로만 짜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단지 날실로만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145)


5장 핀다로스의 제우스 찬가


"헤시오도스는 서사시 시대로부터 서정시 시대로의 과도기에 서 있었다. 혹독한 농경 생활과 목자(牧者)의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그가 음송 시인으로서 노래해온 영웅 전설의 세계가 그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그 세계보다도 한층 현실적인 주위 세계로 눈을 돌렸다. 그는 신적인 것을, 왕과 영웅의 행위에 제멋대로 간섭하는 올림포스 산의 귀족적 사회 안에서 찾으려 하는 일을 그만두고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서의 이 신적인 것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엄밀히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서사시의 전통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핀다로스의 경우에도 뮤즈들은 질서 있는 세계가 어떻게 점차적으로 생겨났을까 하는 이 서사시적인 사건을 노래한다. 그러나 뮤즈들의 본래의 임무(기능)는 서사시가 아니고, 오히려 제우스의 업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존재의 깊은 의미를 폭로하는 서정시를 노래하는 것이었다."(167-8)


"헤시오도스와 핀다로스 사이의 알카익 기의 서정시에는 심적인 것의 긴장, 정신적인 것의 복잡한 상호 관계, 가치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 등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핀다로스는 알카익 기의 대부분의 서정시인들과 달리 그의 개인적 감정과 그와 다른 사람들과의 정신적 결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 그는 자신이 어떤 가치를 거부할 것인가를 논의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 세계에서 찬미해야 할 것, 자신이 신적인 것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한계 있는 것은 어떻게 보편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에 관여하며, 인간적인 것은 어떻게 초인간적인 것에 관여하는가를 단지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이다. 따라서 이전 세대의 시인들과 직접적인 교섭 관계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핀다로스는 초기의 '개인적' 서정시에서 발견된 것을─이것이 본질적으로는 그의 공적인데─제의가에서 성장한 축제시로 결실을 맺도록 하고 있다."(168)


"핀다로스가 테베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 아티카에서는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갔다. 비극은 이 세계에 정의가 행해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요구를 내세운다. 따라서 비극은 인간에 대하여, 더욱이 신들에 대하여 사회적인 훌륭한 행위를 넘어서라는 다양한 요구를 내놓는다. 거기에는 찬양의 목소리가 그쳐버린다. 핀다로스는 이와 같은 사상에서 의식적으로 멀찍히 물러서고, 이와 같은 사상을 불손한 것으로 간주한다. 때때로 그는 전승하는 전설의 어느 한 구절이 신적인 것의 찬란함을 흐릿하게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꺼이 그것을 고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상적인 것이 그에게 얼마나 미약하고 무력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의 질서와 미에 대해서는 결코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는 또한 현존하는 것을 변화시키려고 의도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고귀한 침착성을 유지한 채 세계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169-70)


6장 그리스 비극에서의 신화와 현실


"〈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보고하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음직한 일을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유명한 명제(「시학」 제9장 2절 1451a)는 역사 기술과 시작(詩作)이─기원전 5세기에 실제로 그랬던 바처럼─서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작은 역사 기술보다도 〈더 철학적이다.〉 시작은 보편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의식은 기원전 5세기에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그리스 비극은 합창대의 노래에서 발생했다. 초기의 합창대 노래는 신화적 사건을 직접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노래했기 때문에, 이미 드라마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바대로이다. 그 결과로 신화와 현실, 시작과 진실이 서로 관련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것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호메로스적인 노래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다."(171-2)


"합창 서정시와 드라마의 시원에는 제의적 품이 있었고, 이 춤에서 신적 세계는 현재의 지상적 현실과 합치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서사시에서 보고하는 사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 경우에 현실이란 일찍이 있었던 일로, 그것은 참으로서─혹은 허위로서─'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화적 사태가 실제로 연기됨에 따라서 재현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연기는 연기자와 구경꾼에게서 신화적 사건(die Mythische Begebenheit))으로 '실재하고 있다(ist).'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이 지금 아무개에 의하여 연기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대적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신화적 현실은 '의의'를 지닌 사태여서, 그 의의는 몇번이라도 현재화시킬 수 있는 것이며, 그 사태는─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비단 개별적인 것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80)


"비극은 신화의 사건들을 엄격하게 반영하지도 않으며, 서사시에서 제재로서 사용하고 있는 사건을 역사적 진실로서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극은 인간의 행동 중에서 사태의 동기를 추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은 필요하다면 사실을 버리는 일조차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를 심적 과정의 결말로서 파악한 맨 처음의 사람은 아이스킬로스이다. 그는 첨예화된(인위적인) 상황 가운데에서 인간 행동의 핵심이 되는 것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표현하려고 한다. 일상적인 현실의 행위 가운데 수많은 동기가 뒤섞여 흐르고 있어서 참된 행위의 근본 형식, 즉 자유로운 결단은 단지 희미한 반성의 형태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은 거의 같은 정도로 중요한 두 개의 요구 사이에 인간을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정의와 운명에 대해서 정통한 바탕 위에서 고귀한 죽음을 선택하도록 행동의 저 근본적 형식을 순수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190-1)


"아이스킬로스가 그려낸 인물들이 처하게 되는 부자연스럽고 첨예화된 여러 상황은 정상적이고 악의 없는(순진한) 인간에게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일을 행할 때에 인간은 항시 자유롭다고 자각하는 곳에서, 이들 인물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모델을 그리고 그들의 행위 가운데서 가장 고유하고 내면적인 이상적 상황을 찾아낸다." "호메로스 세계의 인간은 아직 흔들림 없는 세게에 보호되고 있으며, 그 세계는 분명하게 인간에게 말을 걸고, 인간 편에서도 분명하게 답변을 한다. 신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보다 위대한 것인 한에서, 물론 초월적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통찰력과는 독립적으로 확실하고 또 항상적으로 거기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스킬로스에게서 이 신들의 세계는 한층 모호하게 된다." "이제 인간은 신적인 것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근거로 하는 만큼 더욱더 독자적으로 되어간다."(192-3)


"이미 아이스킬로스는 존재자의 관념을 정의의 관념과 연결시켰다. 즉 가상은 hybris(오만함)에 속한다." "에우리피데스 시대에 이르러 이 대립은 이미 여러 면에서 인식 비판, 신화 비판, 도덕 비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대립은 에우리피데스의 전체 사고를 꿰뚫고 있으며, 우리가 극히 피상적인 의미로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가 파악하고 있는 그 태도에 미치기까지 이것이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색채가 풍부하고 화려한) 사치스러운 단장이 아이스킬로스의 특색이었다고 한다면, 특정한 인물들의 누더기 옷이 에우리피데스의 특색이다. 경험적 관조에 나란히 사회적 관념들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사회적 관념들이 보여주는 바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신적인 것이 주어진 현상 세계의 빛 가운데 나타난다는 신앙이 퇴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의 행동이라는 문제가 적법한 것에 대한 사변을 더욱 강하게 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94-5)


"알카익 기의 서정시의 신화는 승리, 혼례, 제의적 축제에 따라 시공간적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비극의 신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가능한 상황들을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그 관심은 철학적인 색조마저 띠고 있다. 비극이 목표로 하고 있는 인간 행위에 대한 문제성이 인식의 문제가 되며, 소크라테스가 이 문제를 선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해결하기를 주장하는 데 이르기까지는 그리 먼 장래의 일이 아니었다. 그 경우 현실적인 것은 목적론적 개념으로서 완전히 추상적으로 파악된다. 이제 의미를 주는 층(신적 세계)과 의미를 수용하는 층(인간 세계)은 보편과 특수라는 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에우리피데스는 이러한 경지와는 아직 떨어져 있었다. 그는 시인이지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을 생명 있는 인물들에게서 보았던 것이지, 개념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197)


7장 아리스토파네스와 미학


"시인의 목적과 의의가 인간의 개선에 있다는 사상으로의 전환을 처음으로 제시한 자는 아리스토파네스이다. 즉 시인들은 교사였다. 오르페우스는 신성과 제의의 교사였고, 무사이오스는 의술과 신탁의, 헤시오도스는 농경의, 신에 필적하는 호메로스는 영광과 명예의 교사였다. 이 시인들과 성인들의 관계는 교장(교사)과 어린이들의 관계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을 예술 및 더 나아가 모든 문화의 참된 요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오늘날에도 또 하나의 예로 삼고 있다. 이 도덕상의 요구를 물려받은 것은 플라톤이지만, 다만 그는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소크라테스를 심판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견해와 크게 다르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이러한 철학상의 요청에 반해서, 비극은 단지 감각적 쾌락에만 호소할 뿐이라는 경험적 발견을 끄집어내놓고 있다."(203)


"아리스토파네스는 에우리피데스를 비단 부도덕하다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궤변을 늘어놓는 소피스트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빈틈 없는 교활함과 약삭빠름을 비난한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야말로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진 비합리적인 힘들을 제시한 최초의 극작가이다. 메데이아와 파이드라가 바로 그녀들의 격정 때문에 위대한 여성이었기에, 에우리피데스는 편협한 이성의 옹호자나 계몽가일 수는 없다." "에우리피데스는 신들이 박탈된 의미를 잃은 세계 안에서 홀로 비틀거리며, 현실에 눈을 고정시키며 서 있는 이 두 사람─「아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의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형제─의 호메로스적 영웅들의 정체를 혹독할 정도로 단호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기대야 할 곳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의 결과이다. 즉 인간은 허무 위에 서 있으며, 인생의 우연사에 절망적으로 내맡겨지고 있다는 것이다."9220-1)


8장 인간의 지식과 신의 지식


"음유시인(Rhapsode) 크세노파네스는 본질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을 질료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신적인 것에서 규정하려고 함으로써, 그는 탈레스의 전통에서 이탈하여 헤시오도스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그는 eis theos, 즉 〈신은 오직 하나이다〉(「단편」23)라는 극히 중요한 발견에 도달한다. 크세노파네스는 여러 다양한 의인적 신들을 폐기하려고 한다. 그에게서 최초로 신적인 것이 포괄적인 통일체(umfassende Einheit)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가 파악한 신은 역시 분명하게 그 자신과 닮았고, 그가 얻으려고 노력한 것(이상)과 비슷하다. 다시 말하여, 그가 생각하는 신적인 것은 음유시인으로서 그가 파악한 인간적인 것에 대한 보족이며, 그가 생각하는 지혜는 인간에게 갖추어진 최고의 것인 까닭에 그것은 신성에게도 갖추어진 최고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만을 가질 수밖에 없으나, 신은 더욱더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233)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적인 것을 정신보다도 더욱 순수한 것으로 파악하는 한편, 또 달리 인간의 지식에서도 바로 그 일자(一者)로 향하는 경향을 크세노파네스 이상으로 강하게 지적함으로써 이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광범위한 지식 대신에 집중적인 지식을 요구한다. 즉 〈모든 것을 꿰뚫어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통찰력을 이해하는 지혜는 오직 하나이다.〉(「단편」41)" "또 그는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해서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단편」55)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눈과 귀는 나쁜 증인이다. 만일 그것들이 오랑캐적인 영혼(barbarous psychas)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단편」107)" "설령 경험이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경험이 로고스, 즉 의미의 철저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가치하다. 로고스는 모든 말의 근저에 놓여 있으며, 모든 적절한 말의 그 객관적 존재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237-8)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인간은 알크마이온의 경우처럼 감각 지각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인식으로 올라가 일자인 존재의 사고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어떤 종류의 은총에 의해서 지식에 도달한다." "신성은 파르메니데스를 '순수한' 사고로 이끈다. 그는 이 사고에 의해서 순수한 존재를 파악한다. 알크마이온이 감각 지각 및 인간의 지식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는─귀납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반면에, 파르메니데스의 경우에 여신은 감각적 지각과 그것에 의해서 파악되는 생성을 미망으로서 배제하도록 가르친다. 여신은 인간적 지식에서 신의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지 않고, 존재에 대한 유일한 큰 (직관적) 인식으로부터, 사고와 존재, 존재와 비존재 등에 대한 진리를, 즉 그 길의 목표를 연역한다. 그래서 예지계는 그 독립된 실재로서 발견된다."(242-4)


"크세노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어떤 필연성에 따라 천계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문제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회상록」 1, 1, 11행 이하).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일에 몰두하는 대신에, 인간은 최우선적으로 인간적인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신적인 일은 인간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탐구자는 각기 신적인 일에 대해서 각양각색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인간은 바람이나 비 그리고 사계절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에 반해서 인간사(人間事)에서, 이를테면 경건, 미, 정의 등의 경우에는 그 덕을 획득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호메로스로부터 출발해서 고찰해왔던 전통과 단절해서, 키케로의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면 '철학을 천상으로부터 지상으로' 끌어내렸던 것이다."(245-6)


9장 덕의 권유─그리스 윤리 사상에 대한 소고


"행복과 유용한 것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초기 그리스에서 행복한 인간은 'olbios'이다. 즉 그러한 인간은 충만한 상태에 있으며,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는 호사와 화려함의 빛에 잠겨 있다. 그는 'eudaimon'하다. 즉 그는 만사를 훌륭하게 성취시켜 주는 선한 다이몬(Daimon, 靈)을 자기 편으로 하고 있다. 헤시오도스가 그의 형제 페르세스에게 덕을 권하고 그 보답으로 그에게 행복한 생활을 약속하는 경우에, 그는 부와 번영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덕이란 이득이라든지 유용이라는 것과 거의 같다. 그러나 그후 알카익 기에 이르게 되면, 영광의 순간에 인간적인 것을 넘어 신의 영역에 접하고 신과 같이 되는 인간이 eudaimon하고 olbios이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 광채와 인간 존재의 확대를 알고자 노력한다. 행복으로의 권고를 할 필요는 없어진다. 누구라도 그것을 성취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255)


"arete(덕)와 agathos(선)라는 말은 애초에는 아직 유용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초기에는 전혀 도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호메로스가 어떤 한 인간은 'agathos'하다고 말할 때, 그는 인간이 도덕상으로 비난할 만한 여지가 없다든가, 혹은 마음이 선량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훌륭한 군인과 우수한 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처럼 유용하고, 소용 있고, 수완(능력) 있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arete라는 말도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품위, 공적, 성공, 신망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행복'이나 '유용'처럼, 단지 그 자신의 이익에 기여하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더 일반적인 타당성을 요구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도덕 현상으로의 경향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arete는 '훌륭하고', '유능한' 남자, 다시 말하여 agathos한 사람에게서 기대되는 '능력'과 '공적'이다."(255-6)


"정의(법)는 도덕에서 기대되는 것을 실현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도덕에 관한 사색을 깊게 하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타인에게 손해를 주면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 '이웃의 불행을 대가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타인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명망과 권력을 얻지 않는다'고 하는 이 도덕상의 원칙들은 법률의 토대가 되며, 폴리스의 성문법을 통해서 인간에게 의식되게 된다." "이러한 격언들은 일체의 공리주의적 고려들을 넘어서고 있다. 자신의 행동을 타인의 행동과는 다른 척도로 추정하지 말라는 요구는 그리스 인들에게는 벌써부터 법(정의)의 관념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dike는 개개인이 받아야 할 몫이다. 실정법적 준칙으로는 'suum cuique(각자에게 그 몫을 주시오)'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dikaiosune는 자신의 동료와의 관계에서 각자가 자신의 몫을 지키고, 타인의 세력 범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노력이다."(270)


"솔론은 인간이 걷는 길이 아무리 불확실하다고 할지라도, 이 한 가지 일은 절대로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부정의는 설령 그 사람의 손자 대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처벌되어야만 한다." "아르킬로코스는 위대한 것(영화로운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말했지만, 솔론은 부정의에 의해서 영화롭게 되는 것은 사라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정의는 영속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 최고의 덕이다. 솔론이 왜 이와 같이 정의를 옹호하고 있는가 하는 그 근거라는 것이, 이미 정의에 대해서 헤시오도스나 혹은 아르킬로코스가 이야기했던 바를 훨씬 넘어선 곳으로 그를 이끌어간다. 다시 말하여, 그는 자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어도, 또한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정의에 대한 분노에 의해서도 아니라, 부정의에 대해서 과감하게 맞서고 있다.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이해 관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질서와 공평성을 수호하는 것이다."(277)


"소크라테스는 알카익 기-고전기의 도덕 사상에서 후기 고전기-헬레니즘 기의 도덕 사상으로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소크라테스가 선을 성찰할 때 완전한 공정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행위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 그것과 대결해야 하는 순간을 고찰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박식하고 지혜로운 교사인 양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 자신이 사용하는 노골적인 비유를 통해서 산파술(Hebammenkunst)을 행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즉 그는 누군가가 자력으로(자기 자신으로부터, aus sich) 획득해야만 하는 지식을 다 드러낼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을 뿐이다. 아티카 비극이야말로 처음으로 인간의 행동을 심적 결단이라는 계기에서 해석했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행위라는 의식을 개화시켰다. 소크라테스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제 힘으로 행위해야만 한다. 그리고 선을 발견하도록 스스로 노력하라."(282-3)


10장 비유, 비교, 은유, 유추─신화적 사유에서 로고스적 사유에로의 길


"신화적 사유와 논리적 사유의 대립은 이것을 자연의 인과적 설명에 적용하는 경우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연에 대한 인과적 설명의 영역에서도 신화적 사고에서 논리적 사고로의 변화가 행해지고 있음은 곧 명백해진다. 즉 원래에는 신들, 영들, 영웅들의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 후에 이르러 그 충분한 근거가 합리적으로 추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경우 신화의 인과적 설명은 자연과학적 인과성이 파악할 수 있는 자연의 사건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물(物)의 기원과 생명에 관심을 기울임에 따라 그 원인이 정밀하게 규정될 수 없는 현상으로 향해지는 것이다. 더욱이 그 이상으로 신화의 인과적 설명은 자연 영역을 멀찍이 넘어선 곳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이는 사상, 감정, 소망, 결의 등의 기원도 역시 신들의 개입으로 환원되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 존재의 이해에도 기여하기 때문이다."(336)


"신화적 사고는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의 형태로 한 사고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사고의 형태는 심리학적으로는 논리적 사유로부터 구별되는데,그 까닭은 논리적 사유가 탐구를 그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해서, 신화와 비유의 이미지는 상상력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적인 차이를 초래한다. 즉 논리적 사유에서의 진리는 추구되고, 탐구되거나 혹은 인출되어야만 하는 무엇으로, 그것은 모순율의 엄격한 고려를 통해서 방법적으로 정확하게 해결되어야만 하는 과제의 미지수 X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만인이 승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신화적 여러 형태는 의미 깊은 것으로서(als sinnvol und bedeutend) 직접적으로 나타나며, 비유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직접 이해될 수 있는 살아 있는 언어를 말하고 있다. 즉 그것들의 이미지는 뮤즈의 선물로서 (시인이나 청자의) 마음 속에 직관적으로 선명하게 떠오른다."(337)


"활동하는 인간 정신이 발견한 알카익 기는 극도로 경험에 굶주린 시대였다. 엠페도클레스의 말처럼, 이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피로하지 않은 눈'을 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보고 있다. 처음에는 여전히 새로운 경험이 풍성하고 번창하고 있는 신화와 자주 혼합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에 가서 신화가 시에, 경험은 막 싹트려고 하는 과학에 소재를 제공하는 분리가 확립될 때까지 행해진다. 그러나 아티카의 비극에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에 대한 기쁨이 정신적-심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 앞에서 움츠려들게 되면서 풍부한 경험을 즐긴다는 것도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고전기의 철학자들에게 점점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은 사고를 통해서 통제될 수 있고, 반복 가능성, 인식에 의한 두 대상간의 동일성의 확증 그리고 모순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등에 따르는 엄밀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경험적 사실들만이다. 여기서 많은 것이 제거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생생하게 생명적인 것이었다."(338)


11장 그리스 어에서의 자연과학적 개념의 형성


"과학적 개념 형성을 위한 언어상의─이것은 동시에 정신적이라는 의미도 포함하는데─모든 전제는 그리스에서 이미 매우 오래된 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만일 그리스 어에 정관사가 없었다면 그리스에서 어떻게 해서 자연과학과 철학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학적 사고라는 것이 '물이라는 것(물, to hundor)', '차가운 것(차가움, to psuchron)', '생각하는 것(사고, to noein)' 등과 같은 어법이 없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정관사가 이른바, 이와 같은 '추상 개념'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보편을 특수로 상정하거나, 형용사적인 것 혹은 동사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확정할 수 있었겠는가?" "사실상 키케로도 (그리스어에서 간결하고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아주 단순한 철학 개념을 라틴 어로 재현하는 데 노심초사했다. 그것은 단지 관사가 그에게(라틴 어에) 있지 않았다는 그 이유 때문이었다."(342)


"고유명사와 사물명사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세게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원래 언어 속에 있는 두 개의 형식이다. 실체사는 구체적인 것을 표시하는(지시하는) 이상의 기능을 가진다. '사고', '보편자'와 같은 추상명사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추상명사의 복수형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명사가 설령 실체사의 독립적인 형태로서 사물명사 및 고유명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더라도, 추상명사는 그것들과 동일한 근원적 형태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추상명사는 발전된 사고의 단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일반 정관사의 출현과 더불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언어에서도 사물명사 및 고유명사와 명확하게 대조되는 추상명사의 전형태가 보이고 있다. 후기에 이르러 추상명사로서 파악되는 많은 말들은 원래는 (신화적인) 고유명사였다. 가령 호메로스의 경우에 공포는 Daimon(초자연력)으로서, 즉 위협하는 자 Phobos로서 나타난다."(345)


"자연과학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는 그 본질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물'과 관련을 맺고 있다. 만물의 기원과 본질은 '물'이라고 탈레스는 말했다. 그는 이 경우에 오케아노스는 신들의 원천(genesis, 아버지)이라고 말한 호메로스의 말(「일리아스」 제14가 201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신화적 고유명사 대신에 사물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미 헤시오도스는 모든 신들과 정령들을 계보학적 체계로 정리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다양한 현상에 대한 체계적 전망을 세우려고 시도한 바 있다. 이때 헤시오도스는 사물명사가 아니라 신화상의 고유명사를 사용한다. 탈레스는 만물 가운데 있는 공통의 물질을 상정함으로써 개물(個物)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물질에 대한 이와 같은 표시법은 흙, 물, 공기, 불을 '원소'로 규정하게 됨으로써, 그리스 초기 철학 더욱이 자연철학적 사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354)


12장 인간성의 발견과 그리스 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고전 예술에서 다양한 우연적인 모습을 동반하는 임의의 인간을 묘사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를,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이데아'를 묘사했다고 종종 이야기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비그리스적이며, 비플라톤적이다. 어떤 그리스 인들도 결코 인간의 이데아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플라톤이 단 한번 불과 물의 이데아와 결부시켜 인간의 이데아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농담거리로 말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머리카락의 이데아, 먼지의 이데아, 오물의 이데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파르메니데스」 130C). 기원전 5세기의 조상(彫像)을 그 시대의 말을 빌려 묘사하고자 한다면, 그 조상은 아름다운 혹은 완전한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거나, 또 달리 고대의 서정시에서 인간을 찬미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말을 이용한다면, '신과 같은'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366)


"플라톤과 동시대인이었던 이소크라테스는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을 설명하는 대목(15, 253=3, 5)에서 이와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도시, 법률, 기술, 기예 등, 요컨대 전문화(全文化, die ganze Kultur)는 ('교육(교양, paideia)'에 의해서 숙달될 수 있는) 연설과 설득 능력에 따라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키케로는 인간적인 것, 말하는 능력과 교양(교육), 즉 키케로 자신이 생각하는 이 휴머니티의 중요한 요소들을 이소크라테스로부터 직접 물려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페트라르카에게 넘겨주고 있다. 이소크라테스의 경우 인간임(Mensch-Sein)에 대한 그의 긍지는 그리스 인이며, 아테나이 사람인 국민적 자부심과 결부되어 있는데, 페트라르카에게도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 인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인간'인 셈이다. 이들 두 사람은 그들 자신을 가장 잘 교육받은(교양 있는) 민족의 구성원, 다시 말하여 가장 잘 연설하는 민족의 구성원으로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366-7)


"신들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은, 그리스 인들에게는 세계는 Kosmos(질서, 질서 있는 세계)이고, 엄격한 질서가 만물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인들은 이 '자연'의 존재를 비단 믿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을 파악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자연을 명확히 파악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이 신들의 배후에는 생(生)에 풍부한 내용과 의미 그리고 근거를 주는 한층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더욱더 명확히 이해했다. 유럽의 문화는 이 질서를 인식하는 자에게는 법칙성으로서, 감각하는 자에게는 아름다움으로서, 행위하는 자에게는 정의로서 나타난다고 하는 그리스 인들의 발견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비록 그것들이 이 세계에 숨겨진 채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에 진리, 미, 정의가 존재한다는 신앙이야말로 그리스 인의 잃어버릴 수 없는 유산이다. 이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힘을 유지하고 있다."(381-2)


"그러나 그리스 인이 우리의 모델이라는 복고주의적(혹은 의고주의적[擬古主義的]) 신앙은 본질적인 점에서 한정되어야만 한다. 고대 고전주의는 더 이상 고대의 조형예술, 문학, 철학의 여러 작품들 및 정치적 제도들이 정말로 완전해서 그것들이 시간을 초월한 타당성이 있고, 우리의 창조 활동을 위한 도전받을 수 없는 모범이 된다는 의미에서 서구적 사고, 시작(詩作), 조형의 모범이 되지는 않는다. 이 신앙은 지난 1세기 반에 걸친 역사적 연구에서 파괴되어버렸다. 고고학 자체가 대개는 그리스 및 로마 문화의 역사적 제약성을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즉 고대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지는 만큼 바로 이 고대의 완전무결한 성과는 우리와 대단히 이질적인 여러 정신적 전제들에서 생겼다는 것이 더욱더 분명하게 되었다. 어떤 성과가 더 위대하고 더 의미가 충만하면 충만한 만큼 그 성과는 '시대의 정신'이라는 특성을 더욱 강렬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382)


13장 칼리마코스에게서의 유희에 대하여


14장 아르카디아 : 어느 정신적 풍토의 발견


# 아르카디아 : (베르길리우스가 창안한) 목자(牧者)들의 나라, 사랑과 시의 나라


"초기 그리스 인들은 신화를 역사로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 이르면 신화와 역사라는 두 영역은 비극과 역사 기술이라는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다. 이제 무엇보다도 다음의 두 경향이 전승에서 해방된 신화를 발전시키게 된다. 그 한 가지는 옛날 시대의 영웅들과 사건들이 한결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결과 그것들이 점차 현실적인 삶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는 경향이다. 예를 들면 전설상의 인물들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 경향의 일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신화를 상연하는 경우에 형편을 낫게 하는 새로운 극적 상황이 고안되는 경향이다. 헬레니즘 시기의 문학은 신화적인 인물들의 심리학적인 해석을 한층 밀고 나아가 그들을 이전보다도 더 자연주의적인 환경으로 옮겨놓았다. 이와 반대되는 다른 쪽의 헬레니즘 시기의 문학은 항상 (이렇듯 현대풍으로 각색된) 신화의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강조한다."(413)


"일찍이 그리스 인에게서도 정치적으로 비참한 시대에는, 정치는 이론과 실천으로 분열했었다. 플라톤은 참된 정치적 관심에서 출발했으며, 그의 사회적 입장과 그 자신의 성향은 자신을 정치가로서 활동하도록 방향지웠다. 그런데 그는 아테네의 민주 정치에서 자신이 활동할 여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기존의 국가 제도에는 지나칠 정도로 부정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체념하고 정의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현존하는 국가 제도에서는 몸둘 장소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플라톤은 모든 정치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당면했다. 완전한 국가의 성립을 방해하는 반정신적 요소, 요컨대 부정의, 격정, 권력욕 등이 항시 되풀이해서 그의 사고를 움직이게 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에 심사숙고해서, 그는 끝까지 객관적으로 정의는 무엇인가, 선은 무엇인가, 이것들에 대한 지식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424)


"베르길리우스는 이 가혹하고 악의에 찬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그 현실을 배후로 돌려놓고 있다. 그가 아르카디아로 떠나갈 때, 이 혼란한 시대를 개탄하는 그의 마음에는 이 시대를 다소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도, 나아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원망(願望)조차 없었다. 보다 나은 나라를 추구하는 것은 그의 사고나 의욕이 아니라, 그의 감정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정의가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모든 것이 친하고 화목하게 함께 생활하는 목가적인 평화이며, 사자와 어린 양이 사이좋게 지내고, 모든 대립을 풀어 하나로 화합하고, 모두가 큰 사랑 가운데 화합하는 황금 시대였다. 이러한 일은 기적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훗날 그가 「농경가」를 지었을 때, 그는 아우구스투수의 업적에서 이 기적을 보았다. 즉 아우구스투스는 (아르카디아의 꿈을 실현한 것처럼) 이탈리아에 다시 안녕과 평화와 질서를 되찾아주었다."(425)


"그리스 문학에서 알레고리와 상징은 서로 화해하고 있어서 문제될 만한 것은 없다. 예를 들면 한 그리스 시인이 헤파이스토스에 대하여 서술하는 경우, 그것은 불을 의미한다. 이 표현 형식의 발달 경로를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헤파이스토스는 어느 도시를 파괴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신이 불의 모습으로 되어 맹위를 떨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몽 사조는 이렇게 가르쳤다. 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헤파이스토스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지 '불'만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시학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시인은 반드시 생생하게 묘사해야만 한다. 따라서 불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헤파이스토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아름답고, 시적인 것이라고. 신들의 이름의 이와 같은 '환유적(metonyumischen)' 사용의 배후에는 한편으로는 합리주의가, 다른 한편으로는 시론과 시적인 수식 욕구가 숨어 있다."(439)


15장 이론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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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화의 제국 -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
스벤 베커트 지음, 김지혜 옮김, 주경철 감수 / 휴머니스트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서론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는 글로벌화한 대량생산 형태의 자본주의는 1780년경 산업혁명과 함께 출현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전쟁자본주의war capitalism는 16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기계와 공장보다 먼저 등장했다. 그리고 전쟁자본주의는 공장이 아니라 들판에서 번성했으며, 기계화가 아니라 토지에 집중되고 노동집약적이었으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토지와 노동의 폭력적인 약탈에 의존했다. 이런 약탈행위로 일군 엄청난 부와 새로운 지식으로 유럽의 제도와 국가가 강화되었으며, 이 모두는 19세기까지, 그리고 이후 유럽이 이룬 놀라운 경제발전의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많은 역사가가 이 시대를 '상인'자본주의 또는 '상업'자본주의의 시대라고 일컬었지만, 유럽 제국의 팽창과 자본주의의 긴밀한 관계는 물론, 그 민낯과 폭력성을 더 잘 표현하는 것은 '전쟁자본주의'라는 용어다."(24)


"자본주의를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임금노동자를 떠올린다. 하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자유노동이 아니라 노예노동에 기반했다. 산업자본주의라고 하면 우리는 계약과 시장을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거의 폭력과 신체적 구속에 의지했다. 근대의 자본주의는 재산권을 우선시하지만, 초기 자본주의의 특징은 확고한 소유권과 대규모 약탈이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국가를 등에 업은 강력한 제도와 법의 지배에 의지한다. 전 세계로 뻗은 제국을 창조하기 위한 최종 단계에서는 국가의 힘이 필요했을지 몰라도, 초기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노예주의 노예 지배나 변방 자본가의 원주민 지배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자의적 행동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자본주의가 지극히 공격적인 방식으로 해외에 진출해 축적한 결과물 덕분에, 유럽인은 여러 세기를 이어온 면화의 세계들을 장악할 수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글로벌 경제를 고안해낼 수 있었다."(24-5)


"그렇다면 면화의 제국을 뒷받침하는 주장들이 왜 다른 상품들에는 적용되지 않을까? 다른 상품들과 달리 면화는 경작지와 공장이라는 두 단계의 노동집약적 생산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탕수수와 담배는 유럽에서 대규모 산업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담배는 새로운 거대 제조기업의 등장을 초래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인디고를 재배하고 가공하는 과정은 유럽의 제조업자들에게 거대한 새 시장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아메리카에서 쌀 경작은 노예제와 임금노동의 폭발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면화는 그랬다. 그 결과 면산업은 다른 어떤 산업과도 다르게 세계 전역에 널리 분포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여러 대륙을 연결한 면화는 근대 세계를 이해할 열쇠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근대 세계의 특징인 심각한 불평등과 글로벌화의 오랜 역사,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정치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도 함께 제공한다."(26-7)


1장 전 지구적 상품의 등장


"식물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면화는 〈형태적 유연성〉 덕분에 다양한 환경에서 자란다." "면화를 재배한 사람들 다수가 수천 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다른 이들도 자신들과 같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들은 대략 남반구 위도 32~35도에서, 북반구 위도 37도 사이의 지역에 살았다. 이 지역들은 면화 재배에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열대 식물인 면화는 생육기간에 온도가 섭씨 1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서 통상 섭씨 16도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또 널리 알려진 대로 200일 이상 서리가 내리지 않고 연 강수량이 500~630mm이며 생육기간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지역에서 잘 자란다. 이는 세계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기후로, 면화가 여러 대륙에 풍부하게 분포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면직물 생산은 1,000년 전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업이었다."(39)


"세계의 그 많은 지역에서 그 많은 사람이 실을 잣고 그 실로 옷감을 짰던 면화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제조산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세기까지 면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여전히 가정 내 소비를 위한 가내생산이었다. 하지만 1780년대 산업혁명에 앞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도 면제품은 대개 노동집약적인 생산물이었기에 중요한 가치저장수단이자 교환수단이 되었다. 어느 지역이든 지배자들은 한결같이 면직물을 공물이나 세금으로 요구했고 사실상 면화는 정치경제의 탄생과 함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면직물은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메소아메리카 전역에서 이상적인 교환수단이었다. 면화와 달리 면직물은 장거리를 쉽게 운송할 수도 있고 썩지 않아서 가치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근대 이전 세계 거의 어디에서나 면직물로 식량과 제품, 심지어 보호수단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것을 구매할 수 있었다."(55-6)


"수요가 늘자 면직물은 가정에서 벗어나 첫걸음을 뗐다. 인도에서는 직업 방직공이 출현했다. 그들은 원거리 무역 물품을 공급하며, 국내는 물론 지배자들과 부유한 상인들에게 면직물을 제공하는 데 집중했다." "작업장이 일반화되면서 새로운 유형의 방직공도 일반화되었다. 남성 위주의 개인들로, 특별히 시장 판매용 제품을 생산하는 방직공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장이 생겨났어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전문화된 생산은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작업장이 아닌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형적이었다. 이들 농촌의 시장 생산자들과 자급을 위해 생산하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글로벌 통상에서 신흥 세력, 곧 상업자본가들이 장악한 선대제先貸制 네트워크에 의존하는지 그 여하에 있었다. 19세기 상업화된 면직물 생산의 토대를 형성했던 이런 네트워크에서 방적·방직공은 도시 상인을 위해 실을 잣고 면직물을 제조했으며, 상인은 그들의 생산품을 취합해 먼 곳의 시장에 내다 팔았다."(58-60)


2장 전쟁자본주의의 구축


"유럽의 자본가와 지배자들은 다양한 수단을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변화시켰다. 무력을 동원한 교역을 통해 유럽을 중심으로 복잡한 해양 무역망을 창출할 수 있었고, 재정-군사 국가fiscal-military state의 구축으로 세계 구석구석 외딴 곳까지 세력을 떨칠 수 있었다. 해상보험에서 선하증권船荷證券에 이르기까지 각종 금융상품이 마련되어 자본과 상품의 장거리 운송이 가능해졌으며, 법률체계의 발달로 글로벌 투자에 어느 정도 안정성이 보장되었다. 또 원격지의 자본가와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어 현지 방직공과 면화 재배인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토지를 약탈하고 아프리카인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플랜테이션 농장도 번성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런 변화는 산업혁명으로 향하는 첫걸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면화 세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면화의 제국에 통합되었다."(74-5)


# 재정-군사 국가 : 조세와 재정의 혁신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군사 활동과 전쟁을 지속했던 국가들


"모든 유럽 동인도회사들의 공통점은 인도산 면직물을 구매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향신료와 교환하기 위해, 또 국내 소비를 위해 유럽으로 가져갈 면화를 구매했다. 또 이제 막 신세계에 자리잡기 시작한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할 노예들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운송할 면화를 구매했다. 이렇듯 당시 면직물은 세 대륙을 망라하는 무역 체제와 얽혀 있었다. 이런 무역 체제는 콜럼버스와 다 가마의 기념비적인 원정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킨 결과였다." "그 결과 유럽이 아시아로 팽창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면직물은 핵심 품목이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1621년에 이미 5,000여 필의 면직물을 영국으로 수입했는데, 40년 뒤에는 수입량이 다섯 배로 증가했다. 실제로 면직물은 동인도회사의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이 되었고, 1766년에는 면직물이 동인도회사의 전체 수출품 가운데 75% 이상을 차지했다."(78)


"전쟁자본주의는 세계를 '내부'와 '외부'로 가를 수 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유럽인들의 역량에 의지했다. '내부'는 모국의 법과 제도와 관습을 포괄했고, 국가가 부과한 질서의 지배를 받았다. 반대로 '외부'를 특징지은 것은 제국의 지배, 방대한 지역의 수탈, 원주민 학살, 자원 약탈, 노예화,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국가의 효율적인 감시를 벗어난 민간 자본가들의 방대한 토지 지배였다. 이런 제국의 보호령들에는 내부의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소유주들이 국가를 능가했고, 폭력이 법에 도전했으며, 사적 행위자들이 대담한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해 시장을 개조했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것처럼, 그런 지역들이 〈다른 어떤 인간 사회보다 더 신속하게 부와 강대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사회적 백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자본주의 '내부'에 의지하는 전혀 다른 사회와 국가들이 등장하는 데 그 기반을 제공한 것이 바로 그런 사회적 백지 상태였다."(85-6)


3장 전쟁자본주의가 치른 대가


"영국 면산업의 눈부신 발전 덕분에 영국 정부와 영국 자본가들은 전쟁자본주의로 얻은 결실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새로운 기계와 새로운 생산조직, 대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들은 사상 초유의 생산성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생산비용이 낮아져 영국의 제조업자들은 기대했던 새로운 시장에 진출했다. 면제품의 가격이 저렴해지자 내수시장이 확대되었고, 면직물의 디자인이 중간 계급 소비자들의 자기표현에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어감에 따라 면직물은 더 폭넓게 유행했다." "영국 면산업의 진정한 호황은 바로 수출 호황이었다. 1800년에 이르러 영국에서 제조된 면직물이 세계 시장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자, 그와 동시에 수백 곳의 공장 소유주, 상인, 선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농촌지역에서 새로 지은 공장에서 일하는 방적·방직공 수천 명이 새로이 해외 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영국산 면제품은 이제 세계 시장에서 인도산 면제품을 재빠르게 대체해나갔다."(133-5)


"예전에 인도의 방적·방직공이 장악했던 여러 수출 시장을 이제는 영국산 면직물이 차지했지만, 애초에 영국 제조업자들은 전쟁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지역에서의 판매에만 집중했다. 산업혁명의 황금기이던 18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영국산 면제품 수출의 3분의 2 이상이 그런 지역들로 향했다. 나중에 면직물 수출은 영국이 200년 동안 막대한 부를 쌓은 대서양 경제의 통로들로 흘러들었다.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주인에게서 보급받은 의복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의 생산자들과 달리 자신들의 의복을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독 수익성 있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로 노예를 취급했던 아프리카 무역에서도 영국산 면직물의 수요가 높았는데(아메리카에서 면화 재배가 호황을 이룬 결과, 심지어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상인들이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인도산 직물과 동일한 영국산 직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덕분이었다."(136)


"면산업은 제국의 팽창으로 얻은 여러 전리품 가운데 하나로 시작해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솜털이 난 흰색 꼬투리에서 새로운 글로벌 체제인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된 셈이다. 물론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발명과 혁신은 있었다. 하지만 오직 면산업만이 지구 전체에 영향력을 미쳤고, 강제노동과 강력하게 연결되었으며, 국가로부터 유독 최고 수준의 지원을 받으며 세계 전역의 필수적인 시장들을 장악했다. 나중에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지만, 산업자본주의는 발생 직후에 여러 다른 곳에서 전쟁자본주의가 확대, 강화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영국이 자국의 공장에 더 저렴한 면화를 안정적으로 공급한 자국 상인들이 역량에 기대어 일방적으로 앞장서서 산업자본주의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의 면제조업자들은 엄청난 양의 면화를 새롭게 요구한 반면, 산업자본주의의 제도적 구조는 여전히 미숙하고 고루해서 수요을 모두 충족시킬 만큼 면화를 충분히 생산할 노동력과 영토를 창출할 수 없었다."(144)


4장 노동력의 포획, 토지의 정복


"1791년까지도 제조업에 사용할 목적으로 생산된 면화 대부분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영세농들이 재배한 것이었고, 주로 현지에서 소비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면산업의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면화는 무력을 동원하여 토지와 노동력을 약탈하는 것이 특징인, 전 지구적이고 역동적이며 폭력적인 형태의 새로운 자본주의와 마침내 결정적 연결고리를 마련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기계화된 제조업의 절박한 요구와 전근대적 농업의 생산으력 사이에 생겨난 커다란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필요한 노예제가 있었다. 공장들이 급속히 팽창하며 면화를 너무 빠르게 소비한 탓에 전쟁자본주의의 전략만이 필요한 토지와 노동의 재분배를 보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토착민과 토지를 빼앗은 정착민, 노예와 플랜테이션 농장주, 현지 장인과 공장 소유주들은 일방적이지만 지속적인 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운 새로운 한 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150-1)


"카리브해 지역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오스만 제국과 인도의 농부들과 달리 토지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거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토착민이 소멸되고 서아프리카에서 거의 매일 노예가 도착하면서 새롭게 성장하는 시장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카리브해 지역 플랜테이션 농장주들과 다른 면화 재배인들을 구별하는 결정적 요소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과 인도의 강력한 영주들도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그들의 면화 농장에서 노동을 시켰지만, 그곳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의 노예제 같은 제도가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더욱이 카리브해 지역에서 자원의 신속한 재편을 가능하게 했던 자본 유입이 다른 곳에서는 방해를 받았는데,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없었던 데다 오스만 제국 및 인도 통치자들의 정치권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카리브해 지역에서만이 사실상 아무런 제약도 없이 새로 확보한 토지와 노동력이 투입되면서 면화 재배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160)


"그렇게 해서 서인도 남아메리카의 면화가 리버풀, 런던, 르아브르, 바르셀로나의 시장에 쏟아져 들어왔고 결국 기계화된 방적이 급속히 팽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팽창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인도 제도에는 면화 재배지로서 적합한 땅이 적어서 면화 생산에 제약이 있었으며,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사탕수수보다 면화가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토지가 풍부한 브라질에서뿐 아니라 서인도 제도에서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들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들과 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1790년부터 서인도 제도의 면화 수출은 크게 감소해 영국 시장 점유율이 10%까지 축소되었다. 1819년 이후 영국인이 재배한 면화에 부여된 관세 혜택조차 그런 추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서인도 제도의 시장 점유율은 하염없이 하락했는데, 이는 〈흑인들의 해방으로 더욱 가속되었다.〉"(166)


"1791년 가장 중요한 면화 생산지인 생도맹그에 혁명이 일어나 그 지역을 뒤흔드는 바람에 면화를 포함해 세계 시장을 겨냥한 상품의 생산이 거의 중단될 뻔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노예 반란으로 생도맹그의 예속된 주민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프랑스 식민 지배 체제를 물리쳤으며, 아이티라는 국가의 탄생과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냈다. 전쟁자본주의는 가장 힘없어 보이는 행위자인 수십만 명에 이르는 생도맹그 노예들의 수중에서 최초의 중요한 전기를 맞았다. 당시 생도맹그 면화 생산은 영국에 수입되는 전체 면화의 24%를 차지했지만, 4년 뒤인 1795년에는 그 비중이 4.5%에 불과했다." "확실히 전통적인 면화 생산 기법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인근에는 수급에 충분한 면화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 있었다. 바로 신생국 미국이었다. 바로 그곳에서 노예제에 기반을 둔 면화 생산이 기록적인 수준까지 치솟았다."(166-8)


5장 노예제가 지배하다


"미국 면화의 대영 수출은 1791~1800년에 93배 증가했고, 1820년까지 다시 일곱 배가 증가했다. 1802년에 이미 영국 시장에서 미국은 단일 면화 공급처로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고, 1857년에는 중국만큼 많은 면화를 생산하게 되었다. 휘트니의 조면기 덕분에 생산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미국산 육지면은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요구에 꼭 맞아떨어졌다. 미국산 면화는 조면기를 사용해 섬유의 손상이 컸지만, 유럽과 다른 지역의 하층 계급 사이에 수요가 높았던 저렴하고 조악한 품질의 면사와 직물을 제조하기에는 알맞은 원료였다. 만약 미국에서 면화를 공급하지 못했더라면 오랜 면화 시장의 현실을 볼 때 면사와 면직물의 대량생산이라는 기적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고, 새로운 소비자들도 이런 값싼 상품을 구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떠들썩하게 이야기되는 직물 부문에서의 소비자 혁명은 플랜테이션 노예제 구조에 나타난 극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180)


"여기에는 면화, 주민을 축출하고 공지로 만든 토지, 노예제, 이 세 가지가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리버풀 크로니클》과 《유러피언 타임스》는 면화 재배에 노예노동이 더없이 중요해서 노예가 해방된다면 면직물 가격이 두세 배 올라갈 것이고, 영국에 참혹한 결과를 안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악몽 같은 무자비한 강압이 수백만 노예들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이러한 폭력이 종식될 가능성이 있다면 면화의 제국에서 풍성한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미국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폭력의 종식이라는 악몽이 현실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을 세계의 주도적인 면화 재배인으로 만들어준 세 번째 이점을 이용했다. 그것은 바로 정치권력이었다. 남부의 노예 소유주들은 '5분의 3 타협안'으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헌법에 새겨넣었다. 노예를 소유한 대통령, 대법원 판사, 의회 양원의 강력한 대표들은 노예제도에 거의 무한한 정치적 지원을 보장했다."(188-9)


# 5분의 3 타협안 : 흑인 인구의 5분의 3에 해당하는 투표권을 백인 노예주에게 인정해주자는 내용의 타협안으로,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남부 주와 북부 주 사이에 합의되었다.


"면화가 미국 경제를 지배하면서 면화 생산 통계치는 〈미국 경제를 평가하는 데 차츰 더 중요한 단위가 되었다.〉 서양 세계에서 미국산 면화의 중요성이 너무 커진 탓에 독일의 한 경제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북부나 서부가 사라진다고 해도 미국의 남부가 사라지는 것과 비교한다면, 세계에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세계경제에서 자신들의 중심적 역할을 확신하고 기쁨에 차서 자신들이 〈근대 문명의 운명을 좌우할 운전대〉를 쥐었다고 선언했다. 《아메리칸 코튼 플랜터》는 1853년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국의 노예노동은 인류에게 지금까지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축복을 가져다주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이런 축복이 지속되려면 노예노동도 지속되어야 한다. 세계에 공급할 면화를 자유노동으로 생산하는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자발적 노동으로 면화를 재배해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200-1)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서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대영제국에서 멀어지기 시작해, 대서양을 가로지른 연결이 정치·군사적 행동에 의해 단절될 수 있음이 드러나자 영국의 산업이 미국산 면화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미국산 면화에 대한 높은 의존도에 대한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우려는 세 가지 문제에 집중되었다. 첫째, 그들은 1810년대 미국에 눈에 띄게 많아지기 시작한 공장들이 점점 더 많은 양의 면화를 소비해 유럽 소비자들이 사용할 면화의 양이 감소할까 염려했다. 둘째, 특히 영국 제조업자들은 유럽 대륙의 생산자들이 세계의 면화 수요를 더 늘릴 경우 미국에서 공급되는 면화를 두고 그들과 경쟁하게 될까 걱정했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문제는 〈노예제의 지속성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피로 얼룩진 생산물〉에 의지하는 것은 〈미국의 노예제라는 범죄〉에 〈의지하는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였다."(202-3)


"역설적이지만 면화를 갈구하는 제조업자들에게 예기치 않은 곳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이유로 구제책이 나타났다. 경쟁관계인 아시아 면산업의 공정이 서서히 지속적으로 붕괴하면서 면화 수급 문제가 완화된 것이다." "아시아 지역과 지방의 무역 네트워크는 지속되기는 했어도 결코 다시 번성하지는 못했다. 관습, 편의성, 이윤으로 특징지어졌던 이들 소규모 무역 네트워크는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특성을 지닌 유럽의 자본과 국가 권력 때문에 와해되었다. 사실 미국에서 노예제 덕분에 가능했던 면화의 저렴한 가격이 다른 모든 곳의 현지 제조업을 붕괴시키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텐치 콕스가 예리하게 통찰했던 것처럼, 영국 제품을 인도로 수출한 일은 인도인들에게 〈팔지도 못할 제품을 만드느니 면화를 재배하는 쪽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했을 것이다." "이처럼 면화가 유통되는 대체 경로들이 파괴되면서 세계 곳곳의 농촌지역의 더 많은 영토와 더 많은 노동력이 글로벌 경제에 잠식당했다."(220-2)


6장 산업자본주의, 날개를 펴다


"전쟁자본주의 경제모델은 산업화에 필요한 원료, 특히 원면과 여러 중요한 제도적 유산을 제공했지만, 영국의 사례는 다음 단계인 면직물 대량생산에 전쟁자본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또한 영국의 사례는 산업화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 수 있는 국가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법적으로, 관료주의적으로, 기반시설로, 군사적으로 자국 영토에 파고들 수 있는 강력한 국가가 없었다면 산업화는 결단코 불가능했다. 시장을 조성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세수를 늘릴 도구를 마련하고, 국경을 순찰하고, 임금노동자의 동원을 감안하여 변화를 촉진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실제로 자국 면산업을 육성하는 국가의 능력이 산업화된 곳과 산업화되지 않은 곳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근대 국가들을 표시한 지도는 일찍이 면공업의 산업화가 목격되었던 지역을 표시한 지도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251-2)


"그 결과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인 산업자본주의는 특정 경로로만 움직였다. 영국의 선례를 따를 수 있었던 자본가들은 보통, 자국의 제조업 성장이 국력을 강화할 방법이라고 여기며 산업화 기획을 포용한 국가에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경제활동과 국가의 영토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런 국가들에서 통치자, 관료, 자본가는 장기적 자본 투자, 노동력 동원, 확장되는 국내 시장과 해외 시장, 지구 경제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 법과 관료주의, 군사력과 기반시설을 통해 영토의 경계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신생 국민국가의 정치인들에게는 영국식 모델을 기반으로 산업사회를 건설하지를 고려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산업은 부의 원천이자 탁월한 전쟁 도구이기도 했다." "결국 산업자본주의는 1860년대에 크나큰 위기[미국 남북전쟁]를 겪으면서 전쟁자본주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262-3)


"사실 노예노동 자체가 제조업에 전혀 부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면직물공장에 노예가 채용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예제가 지배하는 사회는 면공업의 산업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초기의 산업화는 전 지구적으로 전쟁자본주의에 의지했으나, 지구상에서 전쟁자본주의가 가장 난폭한 형태를 취했던 지역들은 결코 산업화를 달성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쿠바는 대규모의 노예화된 노동자들에게 의지했지만, 19세기 내내 단 한 곳의 방적공장도 갖지 못했다. 전쟁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사적 파벌들 사이의 전쟁 상태는 산업자본주의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면공업의 확산을 설명해주는 것은 국가의 역량만이 아니다. 국가 내부의 권력 분포 역시 그 설명에 도움을 준다. 노예제 국가들은 자국 산업가들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지지하는 문제에서 더디고 취약하기로 악명이 높았다."(271-2)


# 가령, 브라질에서는 사탕수수나 커피를 생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압력 때문에 여타 국가들에서 산업화를 가능하게 해준 보호주의─높은 관세 같은─가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이 국면이 중요한 이유는 그 형태의 다양성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토지와 노동을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특유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율되지도 않고 억제되지도 않은 자본가의 진취성이 특징적인 전쟁자본주의와, 기반시설에서는 물론이고 행정적·법적·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가 개인의 진취성을 이끌었던 산업자본주의의 공존에 의지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정지된 것이 아니었다. 전쟁자본주의 덕분에 가능했던 산업자본주의는 강력한 새 제도와 구조를 만들어냈다." "1860년 이후로 영토와 사람들을 식민화한 주체는 수탈과 사적인 신체적 구속으로 지탱되는 노예주들이 아니라 국가권력으로 지탱되는 자본이었다." "가장 위대한 제도적 혁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초법적extralegal 강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임금노동은 노동자와 노동을 이전과 전혀 다른 법적·제도적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275-7)


7장 산업노동력의 동원


"분명 산업혁명은 주로 노동력 절감 기술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방적 부문에서 생산성이 수백 배나 향상된 것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이런 기계들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역시 노동력이 필요했다." "계몽주의는 경제적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했고, 그 결과 유럽에서 노예제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아프리카 노예들을 맨체스터, 바르셀로나, 뮐루즈로 데려오는 일은 논외의 문제가 되었다. 지역주민을 노예로 만들 수도 없었다. 더욱이 노예노동에는 경제적으로 크게 불리한 측면이 있었는데, 예속적인 조건 아래에서는 작업에 동기를 부여하기가 어려웠고 감독 비용이 컸다. 더욱이 노예노동의 경우에는 일 년 내내, 때로는 노동자의 일생 동안 비용이 발생했고, 호경기와 불경기를 거듭하는 산업자본주의의 까다로운 주기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성과 남성, 소녀와 소년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바뀌었다."(288-9)


"제조업자들이 많은 사람을 공장으로 끌어들여 일을 시키는 데에 따르는 문제를 모면하기 위해 선택한 한 가지 방법은 먼저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 즉 저항할 수단이 거의 없던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 안에서 오랫동안 확고히 유지되어온 권력관계, 특히 가장인 남성이 적합하다고 여기는 대로 아내와 자녀의 노동력을 배치할 수 있었던 가부장제의 오랜 전통에 의지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은 사실 이런 오래된 사회적 위계질서와 권력관계를 바탕에 두고 있었으며, 이런 것들을 수단으로 삼아 좀 더 폭넓게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고용주들은 생계를 보장하는 비자본주의적인 방식이 존속해야만 자신들이 사용하는 노동력의 '저렴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또한 인도 등지의 면화를 재배하는 농촌지역이 세계 시장을 위한 생산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알려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298-9)


"초기 면제조업자들이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했다. 유럽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들의 여성들 역시 직물을 생산했지만, 아프리카나 아시아와 달리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여성들은 가정을 벗어나 공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이는 직물의 산업화에 결정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유산과 농촌지역의 변화는 거의 언제나 더 노골적인 형태의 강요로 보완되었다. '직기 주인'의 강요와 '채찍 주인'의 강요가 크게 달랐다고는 하지만,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공장 내에서 노동자들을 징계하기 위해, 공장에 채용된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나지 못하게 막기 위해 완력을 사용하는 일이 횡행했다. 문제의 공장들에 투자한 제조업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물리적 폭력까지도 사용했는데, 이런 일이 사적으로 저질러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국가의 용인을 받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304-5)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규율을 시행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노동조건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끔찍했던지, 세계 곳곳의 노예 소유주들이 산업노동자들의 조건에 비하면 노예노동의 조건이 더 낫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독일 면산업에서는 주 6일 하루 14~16시간씩 노동하는 것이 하나의 규범이었다. 1841년 푸에블라에서는 하루 노동시간이 점심 휴식시간 1시간을 포함해 평군 14.8시간이었다. 프랑스 제2제정 시기 하루 노동시간은 평균 12시간이었으나, 고용주들이 원할 경우 노동자들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했다. 1873년까지 바르셀로나 섬유공장의 노동시간 역시 매우 길었다. 어디서나 생산 작업은 위험했고, 기계는 귀가 멀 정도의 소음을 동반했다. 이런 조건들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1850년대 작센 정부가 징병을 시도했을 때, 군복무를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노동자는 전체 방적공의 16%, 방직공은 18%에 불과했다."(307)


8장 전 지구적 면화 만들기


"면화의 매매에 관한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리버풀의 상인들은 면화의 재배와 제조, 판매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다루는 조련사가 되었다." "리버풀의 면화 시세는 수십만 방적공장 노동자들의 고용 여부를 결정했다. 전 세계가 리버풀의 면화 시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사실은 그 도시의 상인들이 지구상의 드넓은 지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반영한다. 리버풀의 면화 가격이 오르면 루이지애나의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면화 농경지 구입을 새로 결정할 것이고, 노예무역업자들은 수천 명의 젊은 노예를 이 새로운 영토로 들여와 이윤을 얻었을 것이다. 리버풀에서 날아온 소식이 어느 날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내는 데 일조했고, 어느 날엔 인도의 철도 건설에 투자할 것을 독려했으며, 또 어떤 날엔 스위스나 구자라트 또는 멕시코 마초아칸의 가정에서 이루어지던 방적과 직조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었다."(320)


"상인들은 편지를 쓰고, 공급자와 소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을 하고, 계산을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상인들이 창조한 면화의 제국이 몹시 방대했기에, 그들은 곧 특정 부문만 전문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일부 상인들은 면화를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항구로 옮기는 데 주력했고, 다른 이들은 대양을 횡단하는 교역에 주력했으며, 일부는 면화를 제조업자들에게 파는 데 주력했다. 반면 다른 상인들은 면제품 수출을 전담했고, 또 다른 상인들은 특정 국가나 지역에 수입된 면제품을 배급했다. 일반적으로 상인들은 특정 지역에서 자신들의 무역에 집중했고, 세계의 특정 지역을 서로 연결시키는 전문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사업은 놀랍도록 제각기 달라 보였다. 사실 글로벌 체제는 중앙의 제국주의적 명령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 인맥을 갖추고 때로는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한 수많은 행위자들에 의해 구축되었다."(327)


"유럽의 자본, 그리고 뉴욕과 보스턴의 점점 더 많은 자본이 미국의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면화상인들을 이어주는 중간상인, 곧 도매상 집단을 거쳐 면화 농업의 팽창에 투입되었다. 도매상은 공장과 플랜테이션 농장 사이에 이어지는 상인들의 연쇄사슬을 완성하는 연결고리였다. 재배인과 연결된 도매상과 면화 수출상 사이의 상호 작용을 지렛대 삼아 유럽의 자본은 기계의 생산 리듬에 맞춰 면화를 제공하도록 미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몰아 세웠다." "도매상에게는 8%를 웃도는 대출 이자가 또 다른 수입원이 되었다. 도매상은 유럽 상인들에게서 자본을 끌어왔고, 그렇게 해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도매상을 통해 세계의 상품시장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자금시장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도매상은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자영농에게서 수집한 면화를 수출업자에게 판매해 면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수적으로도 가장 많았다."(345-6)


"이런 여신與信 체제는 전 지구적 범위였기 때문에 쉽게 붕괴할 수 있었다. 그 체제의 각 부분은 모두 다른 모든 부분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제국의 어느 한 부분에서 누군가 실패하면 그 위기가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랭커셔의 제조업자들은 해외 시장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상인들이 해외 시장에서 제품 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국내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귀하가 우리의 상품을 구입한지 11개월이 경과했고 우리의 부채가 심각해서 올봄에는 분명 상황이 급박해질 터라 현금으로든 제품으로든 조속한 송금을 요청하니 양해 바랍니다.〉 뉴욕 상인 햄린 판 페흐텐은 근심에 차서 이렇게 간청했다. 간혹 그래왔듯이, 면화 가격이 크게 떨어지면 상인들은 그들이 지급한 선급금보다 적은 가치의 면화를 받게 되므로 채무를 상환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 결과는 1825년, 1837년, 1857년에 들이닥친 전 세계적 대공황이었다."(350-1)


"경제질서가 이처럼 믿을 만한 정보와 신뢰, 신용에 의지한 탓에 상인들은 시장 밖에서 만들어진 네트워크들에 의지하게 되었다. 임금노동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글로벌 무역을 만들어내는 일은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의 사회적 관계에 달려 있었다. 상인들이 남달랐던 것은 자본을 축적하고 분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정보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만이 아니었다. 확대가족의 결속, 지리적 인접성, 동일종교, 동일민족, 출신지를 기반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 네트워크에 의지하는 능력 엿기 상인들을 남다르게 한 요인이었다. 무역이 위태롭고 회사의 생존이 오직 거래처 한 곳의 신뢰도에 좌우되던 세계에서는 신뢰성이 필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신뢰 강화 방법을 모색하며 역사가들이 '관계형 자본주의relational capitalism'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자, 더 쉽게 신뢰성이 생겨났다. 이처럼 면화 시장을 더 크게 좌우한 것은 시장 밖의 사회 관계였다."(360)


9장 세계를 뒤흔든 전쟁


"유럽의 제조업자들과 상인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기고 수십만 명의 공장노동자에게는 가혹한 노동 환경을 안긴 면산업은, 미국을 세계경제의 중심무대로 밀어 올리며 〈지금껏 미국에서 계획되거나 실현되었던 것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농산업〉을 구축했다. 면화 수출만으로도 세계의 경제지도 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남북전쟁 직전에 면화는 미국이 해외로 내보낸 상품의 전체 가치의 61%를 차지했다."(378) "그러나 미국 남북전쟁의 발발은 1780년대 이래 전 세계적 면화 생산망과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탱해오던 관계를 단박에 날려버렸다. 영국의 외교적 승인을 강제로 받아내기 위해 남부연합 정부는 면화 수출의 전면 금지를 단행했다. 남부연합이 이 정책의 수명이 다했음을 깨달았을 무렵에는 북부의 봉쇄로 면화 대부분이 남부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산 면화의 유럽 수출은 1860년에 380만 꾸러미로 감소했고 1862년에는 사실상 전무했다."(382-3)


"제조업자들이 공장을 폐쇄하고 방적·방직공들이 고통을 겪는 동안에도 면화무역상들은 한동안 황금기를 누렸다." "가격변동성이 커지고 투기가 확산되자 투기적인 시장 거래, 특히 판매와 관련된 투기 거래를 제도화하려는 상인들의 움직임도 확산되었다." "제조업자들은 면섬유의 새로운 공급처를 강력히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조업자들의 압박을 받고 면산업 노동자들의 고충과 집단행동을 염려한 정부 관료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면은 그들 국가경제의 중심이었고 사회의 궁극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였다." "자국 산업에 필수적인 원료를 저렴한 가격에 확보하는 문제에 이처럼 지대한 공적 관심이 쏟아진 것은 과거와 분명하게 결별했음을 의미했다. 1780년대 이래 상인들이 면화 시장을 확고히 지배해왔지만, 이제 면화는 수십 년 동안 상인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며 강력해진 국가의 문제가 되었다."(385-8)


"면화 기근에 직면한 제조업자들과 식민지 관료들은 갈수록 시장의 기능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비롯된 면화기근은 식민지(인도)의 원료 생산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열어놓았다." "면화 가격의 급격한 상승 덕분에 정부 개입의 효율성이 커지고 순조롭지 않던 세계 시장을 향한 생산으로의 이행이 원활해졌다. 남북전쟁 발발 후 두 해 동안 인도 면화의 가치는 네 배 이상 상승했다. 그 결과 인도의 농사꾼은 새로 개간한 토지뿐 아니라 식량작물의 재배에 전용되던 토지에서도 면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캘커다 주재 미국 영사에 따르면, 인도의 면화 재배농들이 이처럼 예전에 없던 농산물 수출에 주력하자 〈예상치 못한 대량 공급〉이 초래되었다. 이런 예기치 않은 면화의 대량 공급은 미국의 전쟁 기간 동안 큰 수익을 안겼을 뿐 아니라 공장 운영을 지속하려는 유럽의 면제조업자들이 필요한 원료를 얼마간 확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392-4)


"1865년 4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총성이 멈췄을 때, 유럽이 지배한 85년의 면화 역사에서 가장 큰 혼란이 마무리되었다. 쿨리부터 소작인, 임금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노동력 동원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세계 곳곳에서 시험되었고 면화 생산이 남북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갈지는 미지수였지만, '자유노동' 면화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거의 보편적이 되었다. 미국 전역의 해방노예들이 그들의 자유를 축하하고 있을 때 제조업자들과 노동자들은 새롭게 풍부해진 면화 공급을 동력 삼아 공장들이 수용 능력 이상으로 가동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상인들에게는 축하할 일이 거의 없었다. 리버풀의 베어링 브라더스사는 1865년 2월 런던에 있는 그들의 동업자에게 〈종전에 관한 소문이 거의 공포를 유발했다〉라고 알렸다." "보스턴의 얼음 상인 캘빈 W. 스미스는 봄베이에서 이렇게 전했다. 〈이곳에서 영국인과 파시교도들이 짓는 침울한 표정은 내가 지금껏 어떤 치명적인 상황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이다.〉"(416-7)


10장 전 지구적 재건


"노예 덕분에 면화의 제국이 혁명적으로 바뀌었듯이, 노예해방은 면화 자본가들을 그들 나름의 혁명으로 향하게 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면화 재배 노동력을 조직할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에 골몰했다. 미국의 면화 재배를 도맡았던 노예의 해방과 어느 때보다 커진 면화 수요를 조화시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값싼 면화를 찾는 면제조업자들의 불안정한 수요 탓에 〈면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면화의 수입량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산업화된 유럽 국가들의 무역에서 면화는 여전히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품목이었고, 면제품 수출은 유럽에서 해외 시장에 내놓은 상품목록에서 최상위를 차지했다. 수십만 노동자가 직물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으므로 이런 수요와 판로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회의 사회적 안정을 보장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너무나 중요한 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면화의 제국을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 재편해야만 했다."(422-3)


"면화의 제국을 그 핵심부터 재건하려면 면산업가, 상인, 지주, 국가 관료가 나서서 가정 중심의 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재배농민들의 선택을 분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국민국가를 강화하며, 농촌 지역의 농부들을 생산자이자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기 위해 합법적이고 때로는 불법적인 강제력을 용인하는 권력자들에 의지해야 했다. 그들은 신용, 토지의 사적 소유, 계약법을 포함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확산시켜 농촌 마을을 혁명적으로 바꾸려 했다. 그들은 프랑스 식민 관료들이 매우 적절하게 〈새로운 착취 양식〉이라고 불렀던 것을 찾아냈다."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과 폭력과 수탈이 포함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세계의 면화 재배지역으로 더 넓게 퍼져나갔다. 이제 지배력은 주인의 권위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공정하지도 않은 시장과 법, 국가 같은 사회적 기제에서 비롯되었다."(427-8)


"역설적으로, 지주들은 지역에서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한 바로 그 시기에 국가경제 안에서는, 역사가 스티븐 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권력의 쇠퇴〉를 경험했다. 면화 가격이 하락할 조짐을 보이고 그들이 소비하는 물품은 보호 관세에 직면한데다가 자본이 부족해지면서 자본의 조달 비용이 높아지자, 지주들은 남북전쟁 기간에 등장한 국내 산업화의 정치경제에서 부차적인 존재로 밀려났다. 전 지구적으로 이 면화 재배인 집단이 상인들만큼 강력했던 적은 없었지만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는 지역 정치를 장악했고 중앙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제 권력은 그들과 같은 원료 공급자들에게서 결정적으로 멀어졌다. 당시 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남북전쟁은 세계에서 면화 재배인으로는 마지막으로 강력한 정치집단을 형성했던 이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갔다. 면제조업자에게 나타난 이런 중대한 변화로 면화 제국은 안정되어갔다."(439-40)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이집트산, 브라질산, 인도산 면화는 세계 시장에 새롭게 등장한 중요한 존재들이 되었다." "면화의 생산은 이렇게 여러 대륙으로 확대되었는데 그런 현상이 노예제 없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더 주목할 만했다." "(노예가 아닌 농사꾼들이 면화를 생산하도록) 지구 전역의 농촌지역을 재편하려는 이 모든 투쟁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은 이제 국가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때는 노예노동에 더없이 중요했던 노예주의 뻔뻔스러운 물리적 폭력이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으로, 국가가 나서서 제도화하고 시행한 새로운 형태의 강제력으로 대체되었다. 그렇다고 물리적 폭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계약과 법, 세금에서 오는 압력에 비해 물리적 폭력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국가는 영토 안에서 새로운 주권을 발전시키면서 노동에 대한 그 주권도 확대했고 제도라는 산업자본주의의의 새로운 힘을 증명했다."(446-7)


11장 파괴


"소수의 면화거래소들이 차츰 글로벌 면화무역을 지배하게 되자 면화의 제국 안에서 예전 방식으로 일하던 수입업자, 중개인, 도매상의 중요성은 훨씬 더 줄어들었다. 그런 거래소에서의 거래는 종교, 친족, 출신지의 유대관계로 조성된 신뢰의 네트워크에 좌우되지 않았다. 대신에 면화거래소 같은 이런 기구들은 비인격적인 시장이었다." "이제 거래는 실제의 물리적 면화를 뛰어넘어 대단히 추상화되고 표준화되었다. 자연의 엄청난 다양성은 관행과 계약을 통해 몇 개의 범주로 묶였는데, 그 범주들은 자본의 요구에 따라 면화를 동일한 표준으로 측정할 수 있게 하는 추상화에 합치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면화 자체의 표준화였다. 너무 편차가 커서 선물 거래의 목적에 맞춰 다루기 어려웠던 면화의 자연적 특성은 〈육지면 중품〉이라는 가상의 품질로 단일화되었고, 계약은 이 품질의 구체적인 제조 단위에 맞추어 표준화되었다."(483-4)


"글로벌 면화 시장이 이렇게 재건된 결과, 사업이 급성장했다. 뉴욕면화거래소는 1871년에서 1872년 사이에 500만 꾸러미(실제 수확량보다 약간 많은 양)의 선물거래 계약을 주고받는 한편, 10년 뒤에는 3,200만 꾸러미의 계약을 주고받았다. 이는 실제 면화 수확량의 7.5배에 이르는 양이다. 글로벌 면화무역은 이제 실제로 면화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미래 가격 추이를 예측하는 일이 되었다. 면화 재배와 면공업의 모든 중심지에서 주간에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면화 가격, 곧 면화의 '국제 가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래소들의 능력에 따라 그런 예측이 가능해졌다. 이제 면화무역은 면화의 제국 전역에 위치한 항구 도시들의 거리를 누비던 수입업자들과 도매상과 중개인들의 한가로운 속도에 맞춰서 진행되지 않았다. 이제는 산업자본과 금융의 리듬이 면화무역을 지배했다. 상인들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특히 그들의 핵심 기능 가운데 많은 부분을 국가가 차지해버렸다."(485)


"면화 시장의 세계화는 사회구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임금노동자, 차지농, 소작농의 공통점은 생계농업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기본적인 생산과 소비가 세계 시장에 달려 있었다. 면화는 [한때] 〈부차적인 작물〉이었고 〈소작인은 면화 가격이 아무리 높아도 주저 없이 면화 대신 곡식을 재배했다. 곡식을 재배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와서는 수백만의 농사꾼은 주로 면화에 생활을 의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세계 시장의 통합이 사회적 차별화와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곡식을 손에 넣지 못해 주기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무산 차지농과 농업 노동자 집단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났다. 아프리카의 한 필자는 〈면화와 식량불안이 나란히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멕시코의 라라구나에서는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아동의 비율이 기록적인 수준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소규모 농장의 삶은 늘 궁핍했다."(501-2)


12장 새로운 면화제국주의


"19세기 해방을 향한 위대한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의 면화 소비국들, 미국, 일본은 결정적으로 면화 재배가 가능한 영토를 장악하고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반도, 서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서 식민지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력이 확대되고 국가의 힘이 커지면서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면화의 제국도 그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른바 '면화 열풍'은 세기 전환기에 새로 등장한 제국주의 세력들이 과거 남북전쟁 기간 동안 식민 당국들이 했던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뛰어들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1870년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들을 세계 시장을 위한 면화 재배로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면화 자본가들이 세계 각지의 농촌지역에 어느 정도 압력을 가하는 한편, 19세기 후반 들어 면제조업자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안전하고 값싼 면화를 공급하고자 하는 오랜 관심이 더욱 깊어졌기때문이다."(514-6)


"1898~1913년 사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면화 가격이 121%까지 인상되자 유럽과 일본의 제조업자들은 미국이 국내 재배지에서 수확한 면화를 국내 공장에서 소비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져서 면화가 부족해지고, 면화 가격이 인상될까봐 염려했다. 일부 투기꾼이 시장을 '매점하고서' 새로 세운 면화거래소에서 선물거래와 현물거래를 조작해 가격을 더 높게 책정하는 시도가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그러한 염려는 더욱 증폭되었다. 이런 매점매석이 수그러들자 '면화 포퓰리즘'의 물결이 미국 남부의 농촌지역을 휩쓸었다. 1892년에는 미국의 면화 농장에 병충해의 일종인 목화다래바구미가 번져 면화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의 신흥 지역에 방적공장들이 확산되면서 면화수요로 인한 압력이 가중되었다." "이와 동시에 '원자재 자급'이라는 보편적 개념이 유럽과 일본의 정책 입안자들과 자본가들에게 차츰 중요한 정치적 목표가 되었다."(516-7)


"하지만 면화의 추가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큰 성과는 미국 면화 단지의 확장이었다. 미국의 이런 면화 재배 확대는 어떤 면에서 러시아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는데, 러시아는 국가의 대리자들과 군대가 지속적으로 영토를 쟁탈하고 그 영토에 접근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반시설의 건설을 지원했다. 러시아에서처럼 미국은 나중에 황무지에 배수시설을 만들고 물길을 내고 관개시설을 건설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추쿠로바에서 그랬듯이) 중앙아시아의 농사꾼들을 이주시키고 유목민들을 강제로 정착시켜 면화를 재배하게 한 반면에, 미국은 역사가 존 위버의 표현을 따르자면 〈도전적인 개인들의 주도〉와 〈질서정연한, 국가가 보장하는 사유재산권의 확실성〉을 결합시켜, 원주민 대다수를 면화경작지대에서 내몰고 동부에 살던 시민들이 이주해 오도록 장려했다." "이렇게 늘어난 면화 경작지는 포르투갈의 전체 면적보다도 더 넓은 면적이었다."(525-6)


13장 남반구의 귀환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집단행동을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했을 뿐 아니라 새롭게 강화된 국민국가에 압력을 넣어 복지 향상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독일은 노동친화적인 여러 법률을 제정했다. 1871년 이후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12세 이하 아동의 공장 노동이 금지되었고, 14세 미만 아동의 유효 노동시간은 제한되었다. 1910년에 제정된 법률에 따르면, 여성은 주중 10시간 이상, 토요일에는 8시간 이상 노동할 수 없으며, 13세 이하 아동의 노동은 일절 금지되었다. 매사추세츠주는 1836년에 최초의 노동법을 통과시켰고, 1877년에는 공장 안전 법규를 통과시켰으며, 1898년에는 여성과 미성년자의 야간노동을 금지시켰다. 그러다 결국 야간에는 공장 문을 닫게 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노동법에 따라 노동비용이 인상되었고, 여성의 야간노동과 14세 미만 아동의 노동은 불법으로 규정되었다."(578)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가는 점차 민주적 정당성을 추구해나갔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자본가들에게는 한때 그들의 가장 중요한 권력의 원천이었던 강력한 국가에 의지하는 것이 이제 가장 크고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 그러한 국가 덕분에 결국 노동 계급이 작업현장과 정치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자본가들에게는 국가는 양면적인 존재였다. 국가는 지구 전역의 농촌지역에서 노동력을 동원한 일을 포함해 산업자본주의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지만 자본가들에게는 '덫'이 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노동조건과 임금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가정책에 접근해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때 전 지구적 사회 갈등(생도맹그에서 노예를 동원한 일이 영국 면제조업자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끼쳤을 때)이나, 지역적 사회 갈등(인디언 농민들이 영국인 소유의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동하기를 거부했을 때)은 이제 차츰 국가 차원의 갈등으로 변해갔다."(579)


"제조업자들은 자국의 해당 산업을 글로벌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더욱 강력해진 정부에 접근해 정책을 활용함으로써 경쟁의 압력에 대처했다. 독일의 면산업은 특정 산업 부문의 구체적인 필요에 최적화된 독일 관세 체제에 의지했다. 제조업자들이 집단행동에 나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원하도록 국가에 압력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과 뉴잉글랜드의 면제조업자들은 전 지구적인 면화의 제국 안에서 자신들이 누리던 높은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노동비용이 치솟는 바람에 그들의 노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노동과 자본의 국가 통제에 따른 기회와 제약으로 인해 유럽의 노동 비용이 상승하자 세계의 다른 지역, 즉 노동력이 더 저렴하고 국가의 규제로 인한 제약이 덜한 지역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결과적으로 남반구는 20세기 세계 면산업이 애초의 진원지로 복귀하는 것을 환영했으며, 한 세기에 걸친 발전을 되돌려놓았다."(580-2)


"(이집트와 중국, 그리고 인도 같은) 탈식민사회에서 달라진 점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사회적 힘의 균형만이 아니었다. 국가와 사회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달라졌다. 면공업의 산업화에 뒤늦게 뛰어든 후발주자들은 잉글랜드, 유럽 대륙, 북아메리카의 첫 세대 산업가들이 직면했던 것과 다른 세계를 맞닥뜨렸기 때문에, 노동, 영토, 시장, 원료의 동원을 포함해 산업자본주의로 더 신속히 이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산업자본주의가 국가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탈식민주의 세계에서 그런 '대약진'은 종종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 탈식민주의 체제, 심지어 탈자본주의 체제가 이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영토, 자원, 특히 노동의 식민지적 통합이라는 수단을 채용했다. 산업자본주의가 국가 자체의 생존에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는 산업자본주의에서 산업에 방점을 찍었다. 사실 때때로 자본주의가 산업화의 도정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626)


14장 에필로그: 씨실과 날실


"1963년, 면화의 제국에 대한 유럽의 지배는 끝났다. 1960년대 말이면 글로벌 면직물 수출에서 영국의 비중은 고작 2.8%에 불과했다. 150년 전만 해도 영국은 그 시장에서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한때 영국의 면직물공장에서 6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했지만, 이제 남은 노동자는 고작 3만 명 남짓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뮬방적기와 직기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실직상태에 놓이자 면화 도시들도 파국을 맞았다. 대륙의 몰락을 상징하는 증거는 1958년에 등장했는데, 오랫동안 자유무역의 견고한 투사였던 맨체스터상공회의소가 노선을 바꾸어, 영국 면직물산업에 보호가 필요하다고 선언했을 때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명백한 패배 선언이었다. 그런데 놀랍도록 생산적이고 무서우리만치 난폭한 이 생산 체제에서 유럽이 밀려나고 미국 역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지만, 면화의 제국 자체는 존속했다. 오늘날의 세계는 전보다 더 많은 면화를 생산하고 소비한다."(632)


"지형부터 노동 체제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재편되어 온 면화의 제국을 통과하는 여행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근대 세계를 사유할 때 그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은 세계의 농촌지역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지배하는 것은 대체로 도시, 공장, 산업노동자이다. 그러나 근대 세계의 많은 것이 농촌지역에서 등장했으며, 농촌 주민들이 다른 곳에서 사요외는 상품의 제조자이자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상품의 소비자로 변했을 때 등장했다. 농촌을 강조하면 자본주의 역사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소였던 강압과 폭력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폭력의 여러 형식들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 식민주의, 강제노동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핵심에 놓여 있었다.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특정 지역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일할 것을 강요하는 일은 면화의 제국 전 역사를 통틀어 변함없이 등장하는 요소였다."(6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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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 역사의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어떻게 탄생했나
도널드 케이건 지음, 박재욱 옮김, 한정숙 감수 / 휴머니스트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서론


"〈아마도 내 설명에는 신기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재미가 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사는 똑같지 않더라도 비슷하게 전개되기 마련이므로 미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과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찾는 사람이 이 책을 유용하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이 책은 한 번 듣기에 좋은 경연용 글이 아니라 영원한 유산이 되도록 저술되었다.〉(1.22.4)" "이 문단은 투퀴디데스가 자기 역사책에서 사실을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왜 그토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실이 반드시 정확해야만 투퀴디데스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즉, 그는 미래에 지혜로운 사람이 이 자료를 활용하여 특히 전쟁 같은 긴장된 상황에서 인간 행동의 일정한 정형들을 연구하고 교훈을 얻어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를 기대했다. 만약 그의 서술 내용에서 사실이 잘못되었다면 해석 역시 잘못된 것일 테고, 그렇다면 정치적 지혜를 이끌어낼 수도 없게 된다."(34-5)


1장 수정주의 역사가 투퀴디데스


"(수정주의자 본능을 지녔던) 투퀴디데스는 특정한 사람을 지목해 논변을 펼치지도 않고, 심지어 누군가의 견해를 반박할 때에도 자기 관점을 '대안적 설명'이라 이름 붙여 제시하지 않았다. 오직 신중한 조사와 숙고 끝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실과 거기에서 추출되는 결론만을 독자에게 제시했다. 투퀴디데스가 택한 방법은 크게 성공했다. 무려 2,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바라보는 데 있어 투퀴디데스와 다른 관점이 존재했음을 알아챈 독자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책과 여러 고대 자료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투퀴디데스가 살던 시대에 그와 다른 견해가 존재했고, 그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이러한 다른 견해에 반대하는 강력하고 성공적인 논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잊히고 가려진 동시대 견해를 복원해 투퀴디데스가 제시한 해석과 비교하면 투퀴디데스의 정신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의미를 흥미롭게 다시 조명할 수 있다."(42)


# 수정주의자 :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기존 방식을 날카롭고 철저하게 재검토하여 새롭고 통합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중대하게 바꾸려는 저자


"그렇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기원전 431년 봄부터 기원전 404년 봄까지 벌어진 사건을 따로 떼어내 스파르타와 아테나이가 벌인 단일한 전쟁으로 정의한 사람은 투퀴디데스가 처음이다." 그 기간에 벌어진 몇몇 분쟁을 독립적인 전쟁으로 다룬 당대 혹은 직후의 저술가들과 달리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합된 하나의 긴 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변을 펼쳤다. 〈사건이 발생한 순서대로 여름과 겨울을 나누어서 스파르타인과 동맹국들이 아테나이 제국을 끝장내고 장벽과 페이라이에우스 항을 점거하던 때까지 이야기이다. 전쟁은 27년간 이어졌다. 누군가 조약으로 전투가 중단된 시기는 전쟁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틀렸다. 10년 전쟁과 그에 뒤이은 의심스러운 휴전 기간, 이후에 벌어진 전쟁을 여름과 겨울 단위로 합산하면 전쟁은 이미 내가 말한 기간(27년)과 똑같은 햇수만큼 지속되었고, 단지 며칠만 차이가 난다.〉(5.26.1-3)"(54-6)


2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 케르퀴라 위기


"투퀴디데스는 스파르타인이 전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이유가 〈동맹국들이 제기한 논변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아테나이가 보유한 힘이 날로 커지고 헬라스 대부분이 이미 아테나이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1.88)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상 투퀴디데스가 자신이 내린 상황 판단을 마치 스파르타인의 판단처럼 제시한 것이다. 투퀴디데스는 당시 아테나이가 얼마나 강력해졌으며 스파르타인이 이에 대해 얼마나 경계심을 품었는지를 보여주는 보충 설명을 길게 덧붙여 자기주장을 뒷받침한다.(1.89-118) 이로써 투퀴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원을 에피담노스 문제보다 훨씬 이전에서 찾아야 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울러 투퀴디데스는 이 보충 설명의 끝 부분에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결정한 행위는 페르시아 전쟁 직후부터 시작된 지속적인 과정에서 단지 마지막 단계였을 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66-7)


"스파르타와 아테나이는 (아테나이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이 성장하여 성공과 부, 권력을 차지하고 서서히 아테나이 제국으로 탈바꿈한 페르시아 전쟁 직후의 시기부터 경쟁을 시작했다. 스파르타에는 처음부터 아테나이가 강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수상쩍게 여기고 못마땅해 하는 분파가 존재했다. 그들은 페르시아군이 도주한 뒤 아테나이가 성벽을 재건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다. 아테나이인이 이러한 반대 의견을 확연한 태도로 거부하자 이들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은밀히 이를 갈았다.〉(1.92.1) 기원전 475년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게루시아(스파르타 원로원)'에서는 아테나이와 전쟁을 벌여 새로 결성된 동맹을 분쇄하고 해상을 제패하자는 제안이 등장했다. 스파르타인은 얼마간 논쟁을 벌인 끝에 이 안을 거부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반反아테나이파가 늘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68-9)


"대개 아테나이 민회에서는 거의 모든 논쟁이 하루 안에 끝났다. 그러나 케르퀴라 동맹 문제는 하루를 더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궁극적으로 거대한 전쟁을 초래할 정책을 결정했는데, 아테나이는 케르퀴라와 방어동맹만 맺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조약은 헬라스 역사에서 이때 처음 등장했다. 투퀴디데스는 케르퀴라와 코린토스 사절의 연설을 서술할 때에는 그들의 말 자체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표현하도록 그대로 전달했다. 그런데 아테나이인의 연설은 하나도 전하지 않았다. 다만 아테나이인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라고 '자신이 믿는 바'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고 만다. 투퀴디데스는 최종 결정을 이끌어낸 동의안을 누가 제안했고 또 누가 옹호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플루타르코스에 의존해야 한다. 〈사람들을 설득하여 코린토스와 싸우고 있는 케르퀴라를 돕게 하고 해군력을 갖춘 활기찬 나라와 연합하게 만든 이는〉 바로 페리클레스였다."(87)


# 케르퀴라 동맹 문제 : 케르퀴라가 코린토스와의 분쟁에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테나이에게 동맹을 요청한 사안. 아테나이가 중립을 취한 결과로 코린토스가 케르퀴라 함대를 장악하게 되면 아테나이의 제해권이 위협받고, 이를 막기 위해 케르퀴라와 동맹을 맺으면 코린토스는 물론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둘째 날 회의에서 다수가 방어동맹을 지지하도록 설득한 데에는 분명히 페리클레스의 연설 필요했다. 여기에서 투퀴디데스는 문제에 부딪혔다. 페리클레스는 분명 특유의 방식으로 인상적인 연설을 했을 테고 늘 그렇듯이 회의를 주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설득하여 케르퀴라인을 돕게 만든〉 이가 바로 페리클레스이며, 앞으로 엄청난 고난을 안기고 참혹하게 종결된 전쟁이 바로 그가 추진한 정책 때문에 벌어졌다는 인상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당대의 아테나이에서는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초래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투퀴디데스는 바로 이 견해를 반박하려 했고, 그러기 위해 아테나이인의 결정을 특정 개인과 무관하게 취급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 민회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모든 아테나이인이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인 것처럼, 그리고 상황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89)


3장 전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2 ─ 케르퀴라 위기에서 메가라 봉쇄령까지


"아테나이는 아테나이 제국에 속한 모든 항구와 아테나이의 시장 겸 중심지인 아고라에 메가라인이 출입하지 못하게 막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전쟁보다 낮은 강제 수단인 경제 봉쇄는 현대 세계에서는 외교적 무기로 자주 활용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전시가 아닌 평시에 봉쇄 조치가 내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 또한 분명 페리클레스가 고안한 혁신적인 조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후 벌어진 전쟁이 이 봉쇄령 때문이었고 또 페리클레스가 이 봉쇄령을 동원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메가라 봉쇄령은 코린토스와 동맹을 맺은 폴리스들로 전쟁이 확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외교적인 압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이해해야 한다. 코린토스는 펠로폰네소스인을, 그리고 누구보다도 스파르타를 싸움에 끌어들여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인은 메가라를 징벌하여 다른 폴리스가 추가로 코린토스를 돕지 못하게 억제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99-100)


"마침내 기원전 432년 7월 에포로스들은 스파르타 민회를 소집하고 동맹국 중 아테나이에 불만을 가진 폴리스는 모두 스파르타로 오도록 초청했다." "(전쟁을 선동하는 코린토스인의 연설) 다음 발언자는 아테나이 사절 중 한 사람이었다. 투퀴디데스는 그가 〈다른 일 때문에 스파르타에 왔다가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다.〉(1.72.1)고 말한다. 그 '다른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이는 아테나이인에게도 해명할 기회를 주려고 만든 핑곗거리였음이 분명하다. 페리클레스와 아테나이 입장에서는 스파르타 동맹국들의 불만 사항에 대해 해명은 해야겠지만 스파르타 민회에 공식 대변인을 보내지는 않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공식적인 사절을 보낸다면, 평화조약에 따라 불화를 중재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가 아테나이의 행위를 심판할 권리를 가졌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런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아테나이인은 스파르타 민회의 논의에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102-3)


"스파르타가 메가라 봉쇄 사안을 (30년 평화조약에 명시한 대로) 중재에 회부했다면 페리클레스는 중재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고 또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테이다이아와 아이기나가 대표를 파견해 기원전 432년 스파르타 민회에서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해서, 스파르타가 포테이다이아와 아이기나 건으로 아테나이 제국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또 메가라 봉쇄령처럼 아테나이가 추진하는 상업 정책과 제국 정책에 개입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에서 양보를 한다면 에게 해에서 아테나이가 장악한 헤게모니와 아테나이 제국에 대한 지배권이 스파르타의 용인 여부에 달려 있다고 인정하는 셈이었다. 아테나이가 지금 협박이 무서워 뒤로 물러선다면 이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동등하다고 주장해온 입장을 스스로 저버리는 행위이며, 또 장차 더 많은 협박을 당하게 될 수도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민회 연설에서 외부 압력 때문에 유화책을 써서는 안 된다고 자세히 설명했다."(112)


4장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


"페리클레스의 전쟁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아테나이인이 수비에 치중하고 함대를 보존하며 전시에 제국을 확대하려 시도하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2.65.7)" "(투퀴디데스도 이에 동의했지만) 동시대 아테나이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 첫해에 앗티케를 침공한 스파르타군이 아테나이 서북부 모퉁이만 휩쓸었다면 사람들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페리클레스가 내린 명령에 따라 기꺼이 성벽 뒤에 머물며 교전을 회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테나이인은 스파르타군이 도시에서 고작 60스타디온 떨어진 아카르나이 인근에 이르자 더 이상 참아서는 안 될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자기 땅이 약탈당하는 모습은 끔찍한 일이었다.〉(2.21.2)" "페리클레스가 추진하던 정책을 향해 매우 거센 분노와 비판이 쏟아졌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 민회가 자신이 수립한 전략을 거부하고 지상전을 강행하지 않을까 두려웠다."(119-21)


# 페리클레스 전략의 실패 요인

1.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스파르타에서도 평화파가 득세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쟁 피해를 겪은 양측의 감정은 격해지고 전쟁을 지속하려는 결심이 한층 굳어져갔다.

2. 기원전 430~427년에 역병이 발생하여 도시 거주민의 3분이 1이 사망하면서 페리클레스의 권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심지어 펠로폰네소스에는 역병이 번지지 않았다.)

3. 페리클레스는 아테나이가 축적한 전비(동맹에서 걷는 수익까지 포함한)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전쟁 개시 후 3~4년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반대파들의 비난과 소송에 맞서 기원전 430년에 행해진 연설에서) 페리클레스는 자기 정책의 결과로 빚어진 현재의 끔찍한 상황을 이해해달라거나 용서해달라고 호소하기는커녕 대담하게도 자신이 폴리스의 효율적인 지도자가 될 가장 탁월한 자질을 갖췄다고 주장한다. '아프라그모네스(고요함을 사랑하는 자들)'는 불행과 공포로 인해 바보, 겁쟁이에 자기밖에 모르는 자가 되어버렸다. 이에 비해 전쟁을 지속하기를 지지하고 '아프라그모네스'를 반대하는 논변을 펼치는 이는 용감하고 연륜을 쌓았으며, 현명하고 거기에 더해 진정한 지도자로서 탁월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적어도 페리클레스 본인은 이 강력한 연설에서 스스로를 이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고, 투퀴디데스도 페리클레스를 그렇게 그렇게 묘사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는) 오직 페리클레스만이 발언을 허락받았고, 그의 강력한 언어는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철저한 옹호 덕분에 더욱 증폭되었다."(147-9)


5장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는 민주정이었나


"투퀴디데스가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이었으나 사실 점점 제1시민이 통치하는 정체가 되었다〉(2.65.10)고 말한 것은 자기 기준에서 볼 때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가 민주정이라 부르기에 부족했다는 뜻이다."(153-4) "그러나 (많은 희곡작가와 정적들이) 페리클레스와 내연녀를 인신공격하고 정치를 빈정대며 풍자하는 일은 사실상의 군주제나 독재정에서는 생각도 하기 힘들다. 어떤 이들은 페리클레스의 권력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프린키파투스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은 전혀 적절하지 않다. 로마의 초대 황제가 제아무리 군주정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프린켑스라는 호칭 뒤에 숨기려 했어도,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행해진 것과 같은 정치 지도자에 대한 공공연한 악담과 공격을 받았다면 아무 처벌도 하지 않고 넘겼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페리클레스에 대한 비방과 풍자는 놀라우리만치 자유로운 민주정이 만들어낸 산물이며, 어떤 다른 곳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160)


"오늘날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나이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달리 고대의 비평가들은 이 체제가 '실제로' 민주정이라는 점을 확신했고, 바로 민주정이기 때문에 본성상 나쁘다고 믿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기원전 5세기 말의 타락한 민주정을 기원전 5세기 중반 위대한 아테나이를 이룩한 민주정과 같은 반열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정치 체제가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투퀴디데스는 정치 영역에서 성공하려면 희귀할 정도로 탁월한 지혜가 필요하며, 그러한 지혜를 가진 자는 소수라고 확신했다. 그런 정치적인 재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을 재능 있는 희귀한 개인의 의견보다 우위에 두는 민주정은 성공할 가망이 없다. 재능 없는 시민들이 정치 천재에게 지도권을 내어준 다음에야 나라가 성공할 길이 열렸다.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를 민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야말로 당시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견해를 수정하려는 특히 대담한 시도였다."(172-4)


6장 클레온은 운이 좋아 승리했는가


"투퀴디데스는 자기 역사책에서 기원전 427년에야 처음 클레온을 소개한다. 그리고 클레온이 〈시민 중 가장 난폭했고, 당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3.36.6)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대부분 니키아스와 클레온이 서로 매우 다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니키아스는 페리클레스의 정책을 따르는 자로서 평화를 옹호했고, 신중하고 고결한 인품을 가진 신사였다고 한다. 반면 클레온은 페리클레스를 반대하는 자였고, 전쟁을 옹호했고, 선동정치가였으며 속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보통 묘사되듯이 그렇게 다른 인물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니키아스와 클레온은 모두 귀족 가문이 아니라 '신인' 계층 출신이었다." "니키아스와 클레온은 둘 다 자기 가문에서 무엇으로라도 크게 이름을 떨친 첫 인물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아마 둘 다 부자였겠지만 폴리스에서 유난히 특출한 사람은 아니었다."(177-9)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이루어낸 놀라운 승리는 비할 데 없이 중요했다. 〈헬라스인이 보기에 이 일은 전쟁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스파르타군을 항복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40.1)" "아테나이인은 투퀴디데스와 그가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부른 이들과 의견이 달랐다. 아테나이인에게 데모스테네스와 클레온은 기적에 가까운 일을 이룩한 위대한 영웅이었다. 아테나이인은 당시 최고의 영웅이었던 클레온에게 감사를 표했다." "클레온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테나이 재정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 수준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전쟁을 계속하려 했다. 클레온은 당당하게 포로를 압송한 지 두 달가량 지난 뒤인 8월 둘째 주 정도에 튀딥포스라는 자를 파견해 아테나이 동맹국에게 새롭고 더 높은 금액의 조공을 부과한다는 명령을 전달하고 이를 실행할 준비를 갖추었다."(206-8)


# 클레온의 승리(기원전 425년) : 평화협상을 지지하는 니키아스파와 맞서던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스팍테리아 섬에 있는 스파르타 중장보병들을 공격하여, 그 중 스파르타 완전시민(120여 명)을 생포한 승리. 이 패배로 함대를 억류당하고 포로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스파르타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졌다.


"투퀴디데스가 튀딥포스 법령을 언급했다면 클레온의 공격적 제국주의와 아테나이 속국들에 대한 그의 가혹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할 수 있겠지만, 이는 동시에 클레온과 데모스테네스가 페리클레스의 원래 전략에서 벗어난 작전으로 거둔 승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전면에 드러내는 결과가 된다. 이 승리로 아테나이는 제국의 수입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었고, 장기전을 치를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는 페리클레스 전략의 최대 약점을 교정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튀딥포스를 언급한다면 페리클레스 전략의 단점이 강조되고, 페리클레스의 원래 전략을 충실히 따랐더라면 분명히 승리했을 것이라는 투퀴디데스의 칭송은 벽에 부딪힌다. 그렇게 되면 독자는 페리클레스가 실수했으며, 클레온이 무분별하고 운만 좋은 미친 남자가 아니라 대담하고 명민한 지도자였다고 결론짓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는 진실은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210)


7장 암피폴리스의 투퀴디데스와 클레온


"우리에게는 투퀴디데스가 암피폴리스에서 한 행동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보다 투퀴디데스가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투퀴디데스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마음먹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려 했다면, 자기 변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약한 부분인 운명의 날에 왜 에이온에 있지 않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이 일에 대해서 분명 투퀴디데스는 제대로 변명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투퀴디데스는 (자신과 반대측의 변론을 언급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겉으로는 자신을 변호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가장 냉정한 태도로 객관적인 이야기만 전했다. 그리고 핵심 질문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이로써 이천 년이 넘도록 독자들은 대부분 투퀴디데스는 잘못이 없고 페리클레스 사후 민주정이 분노하고 이성을 잃은 탓에 투퀴디데스가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결론을 내렸다."(224)


# 암피폴리스 함락(기원전 424년) : 투퀴디데스는 스팍테리아 사건 이듬해에 장군으로 선출되어 제국의 트라케 지역(핵심 근거지가 암피폴리스) 방어 임무를 맡았는데,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가 이 도시를 기습 공격해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투퀴디데스는 반역죄를 선고받고 남은 전쟁 기간 동안 국외로 추방되었다.


"아테나이인은 암피폴리스를 비롯해 빼앗긴 여러 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전함 30척에 중장보병 1,200명, 기병 300기, 렘노스와 임브로스 출신의 뛰어난 대규모 경보병 특수 부대를 보냈다. 클레온이 장군으로 이 군대를 이끌었다." "투퀴디데스는 이번 작전의 동료 장군을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전쟁을 통틀어 트라케 지역에서 벌어진 작전을 모두 검토해도 장군 한 사람이 혼자서 군대를 이끈 경우는 없었다." "아테나이인이 예외적으로 대규모 군대를 오직 장군 한 명에게, 그것도 다수의 동료 시민에게 경험이 부족하다고 의심받는 장군에게 맡겼을 리는 없다. 투퀴디데스가 클레온과 동행한 장군 혹은 장군들을 언급하지 않은 일 역시 결코 우연한 누락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 작전은 재앙으로 끝났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이 실패한 작전의 책임은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관계자가 모두 뒤집어썼다. 이것은 의도치 않은 일일 리가 없다."(228-9)


# 브라시다스의 기습 : 암피폴리스 포위 작전에 앞서 정찰을 마치고 트라케 문을 지나 철수하던 아테나이 군이 브라시다스의 기습을 받아 600명 가량 전사(스파르타군은 7명 전사)한 사건. 클레온과 브라시다스도 함께 전사했다.


"클레온은 브라시다스와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정책이 자기 폴리스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진심으로 확신하고 추구했다. 물론 클레온의 저급한 태도가 아테나이 정치 생활의 품격을 낮추기는 했다. 반란을 일으킨 동맹국에게도 지나치게 가혹했는데, 이를 잘했다고 칭찬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클레온이 아테나이 대외 정책을 형성하고 수행하면서 광범위한 여론을 대변했고 늘 열정과 용기로써 자기 생각을 행동에 옮긴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동시대인 다수가 거의 항상 클레온 편에 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만 투퀴디데스가 클레온과 브라시다스가 죽음으로써 평화로 나아갈 길이 열렸다고 한 말은 옳았다. 당분간 아테나이에는 니키아스가 강력하게 이끄는 평화 정책에 반대할 만한 위상을 갖춘 인물이 없었다. 이 평화는 거짓으로 드러나고 아테나이인에게 재앙과 최종적인 패배를 안겨주겠지만 이는 클레온과 아무 상관 없는 결과였다."(241-2)


8장 시켈리아 원정은 어떻게 결정되었나


"투퀴디데스가 시켈리아 원정을 설명하는 내내 그려낸 모습에 따르면 이 작전은 시켈리아 섬 전체를 정복하고 착취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아테나이 군중은 이 작전이 얼마나 거대한 모험이며 얼마나 어려울지, 또 얼마나 위험할지도 알지 못한 채 권력과 탐욕에 찌들어 이 일의 실행을 요구했다. 투퀴디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다수는 이 섬이 얼마나 큰지도 몰랐고 헬라스인과 비헬라스인을 포함해서 섬 주민이 얼마나 많은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신들이 펠로폰네소스인과 벌이는 전쟁에 비해 결코 작지 않은 대규모 전쟁을 벌이려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6.1.1)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인이 시켈리아로 1차 벙력을 보내기로 결정한 일을 설명한 뒤 니키아스의 입을 통해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아테나이인은 시시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핑계를 댔지만 실은 시켈리아를 정복할 의도였고 이는 거대한 사업〉(6.8.4)이었다."(252)


# 시켈리아 원정 : 시켈리아 서부에 있던 에게스타와 셀리누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고, 열세에 몰린 에게스타가 아테나이에 도움을 요청한다. 주전파(알키비아데스)와 평화파(니키아스)가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아테나이는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지만, 적절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원정에 임했다가 결국 코린토스와 스파르타의 원조를 받은 쉬라쿠사이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인이 시켈리아의 지리와 인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큰 사업인지도 알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시켈리아를 향한 대규모 원정이 시작되기 적어도 9년 전인 기원전 424년에 아테나이 삼단노선 60척이 시켈리아에서 장기 주둔을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투퀴디데스는 에게스타와 레온티노이의 요청에 아테나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서술했는데 이 내용 역시 아테나이인이 무지했거나 무모했다는 주장에 타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민회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지 않고 대신 에게스타로 사절단을 보내 〈에게스타인이 말한 대로 국과 신전에 돈이 넉넉한지 살피고 동시에 셀리누스인과 벌이던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조사하도록〉(6.6.3) 결정했다." "에게스타인은 아테나이에 은괴를 60탈란톤─전함 60척을 한 달 동안 부양할 수 있는─이나 제공해 더욱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253-4)


"투퀴디데스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아테나이인은 '엘피스(희망)'에 가득 차서 출발했다. 이 대목에서 투퀴디데스를 읽는 독자는 아테나이인이 1년 전에 불운한 멜로스인에게 경멸조로 했던 말을 틀림없이 떠올리게 된다. 이 이야기는 시켈리아 원정 직전에 서술되었다. 〈그래요. 희망은 험악한 시절에 위안을 줍니다. ····· 그러나 희망의 대가는 엄청나게 비싸기에, 단 한 번의 시도에 전부를 거는 이들은 그 시도가 실패했을 때에야 대가를 알게 됩니다.〉(5.103) 아테나이인의 냉정한 논평은 사실로 증명되었고, 스파르타가 도우리라는 희망에 운명을 걸었던 멜로스인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독자는 아테나이의 위대한 무적함대가 맞이할 끔찍한 운명을 이미 알기에 여기에 담긴 반어법을 놓칠 리 없다. 투퀴디데스는 이 모두를 통해 이번 원정대는 무지하고 탐욕스런 군중이 결정하고 응원한 행사이며,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되는 일이었다고 암시한다."(279)


9장 시켈리아의 재앙은 누구의 책임인가


"니키아스는 전략가로서 원정 실패의 핵심 원인이 된 실수를 저질렀다. 쉬라쿠사이를 점령하려면 기병이 꼭 필요했다. 아테나이군이 처음부터 기병을 보유했다면 쉬라쿠사이는 항복할 도리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어떤 도움을 얻더라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니키아스 본인이 원정대 출발 전에 기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테나이군이 기병 부대를 원정대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은 특히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착오는 판단을 잘못 내린 탓이 아니라 목적을 잘못 설정한 탓이었을 것이다. 니키아스는 시켈리아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억지로 이 작전에 참가한 뒤에도 최소한의 행동만 하고 제대로 된 교전은 피하려 했다. 니키아스는 아마 쉬라쿠사이를 직접 공격하는 심각한 상황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으리라. 그러다가 그는 전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작전에 필요한 병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89-90)


"(전황이 점차 불리해졌고, 본인도 본래 후퇴하는 편을 선호했지만) 니키아스는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심하면 더 좋지 않은 결과도 맞이해야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내내 아테나이인은 기대를 저버린 장군들에게 가차없는 모습을 보였다. 위대한 페리클레스조차 정책과 전략의 결과물이 시민들을 분노하게 하자 모욕당하고 처벌받았다. 니키아스는 분명히 귀환하자마자 심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니키아스는 자신의 명성과 안위를 염려해 (부정직한 보고서를 올리면서) 아테나이인에게 자기 뜻대로 철수하거나 아니면 1차와 같은 규모로 추가 원정대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니키아스는 애초에 아테나이인이 원정에 나서지 못하게 막으려고 꼼수를 부리다가 실패한 경험에서 아무 교훈도 배우지 못한 듯하다. 아테나이인은 이번에도 니키아스의 바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추가 함대와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니키아스를 해임하지도 않았다."(304-7)


"역사가들은 대부분 투퀴디데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러한 조치들이 아테나이 직접 민주정의 탐욕과 무지,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아테나이인은 아테나이 민주정을 비난하는 주된 이유인 변덕과 우유부단함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좌절과 실망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이 시작한 일을 끝마치려는 일관성과 결단력을 드러냈다. 아테나이인이 저지른 실수는 사실 정치 체제와 무관하게, 약하고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강력한 나라라면 다들 겪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당한 강대국은 대개 그대로 군사를 되돌리면 위신에 타격을 입는다고 생각한다. 철군 자체도 불미스럽지만 주변 국가들이 이 나라의 국력과 결단력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안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모험을 할 때에는 대개 승리할 전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지원을 멈추지 않는다."(307-8)


"투퀴디데스가 니키아스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자기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를 덧붙이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니키아스의 동시대인들과 같이 시켈리아에서 벌어진 재앙의 가장 큰 원인은 니키아스가 정치가로서 또 장군으로서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투퀴디데스는 니키아스의 무능이 시켈리아에서 벌어진 재앙의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투퀴디데스가 보기에 니키아스의 무능만으로는 시켈리아 원정의 실패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으며, 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도 아니었다. 투퀴디데스는 재앙이 벌어진 주된 이유는 페리클레스 사후 민주정이 현명하고 절제력을 지닌 강력하고 총명한 지도자에게 견제를 받지 않았고, 생각 없고 야심 가득한 선동정치가에게 현혹되었으며, 그리하여 스스로를 무지와 탐욕과 미신과 공포에 내맡겼기 때문이라는 점을 독자가 이해하기 바랐다."(325)


결론


"우리가 본 대로 투퀴디데스는 사건에 대한 자신의 서술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매우 다양한 장치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들이 속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고, 진실을 강조하고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해 자료를 선택했다." "투퀴디데스가 특이한 곳에 강조점을 둔 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해석을 위해서였다.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가 투퀴디데스의 해석을 반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증거를 거의 대부분 투퀴디데스 본인이 제공한다는 점이다. 투퀴디데스 스스로 투퀴디데스식 해석의 목적을 알려주고 있다. 투퀴디데스가 목적한 바는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투퀴디데스의 진실이 꼭 우리의 진실일 필요는 없다. 투퀴디데스의 역사 서술을 유익하게 사용하려면 그가 제시하는 증거와 그가 덧입힌 해석을 구분해야만 한다. 오직 그 후에야 투퀴디데스가 바란 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영원한 유산〉으로 사용할 수 있다."(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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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철학을 번역하다 : 플라톤의 파이돈
남경희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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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자연언어는 신이 창조하여 인간에게 선사한 것도,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정신에 심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사는 특정 공동체 구성원들이 아마도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모두가 참여하여 이루어낸 가장 포괄적이고 기반적인 문화 활동의 성과다. 언어 형성을 위한 정신적 활동은 너무나 기초적이고 편재적이기에, 마치 물고기가 수압에 대해, 우리 신체가 기압에 대해 그러하듯이, 우리는 그것의 영향력을 간과한다. 자연언어는 인간의 정신이 숨 쉬는 공간이기에, 나름의 압력을 가하고 있다. 자연언어는 그 자체가 특수적이고 개별적인 문화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적인 좌표대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를 사용하는 언어 주체들의 사고방식, 세계관, 인간관, 사회관, 관점 등이 내장되어,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차적 문화 활동 전체의 기본 틀이나 범주로 기능하며 정신 전체의 분위기나 기상도, 사유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12-3)


1부 고전 번역론: 철학의 매체에 대한 철학적 반성


1장 언어와 사유의 관계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권의 어휘들이 그 청각적 또는 시각적 모습은 달라도 의미는 동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령 '어머니', 'mother', 'meter'는 각각 한국어, 영어, 그리스어 어휘로서 외적(기표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의미 내용은 '한 가족의 2세를 낳거나 양자로 삼아 양육하는 여인'으로 서로 같다. 즉 기표는 물리적 존재이니만큼 발성 구조나 시공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나, 그 배면의 의미는 정신적 내용이기에 그런 차이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과연 '어머니'와 'mother', '사랑'과 'love'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와 'meter'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정서나 태도는 시간과 거리의 차이만큼 다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효도'라는 덕목이 중요하지 않았으며, 고대 그리스의 'meter'가 한국의 '어머니'처럼 자식에게 희생적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23)


# 의미동일론 비판


"동서고금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다르지만, 그를 도구로 사용하는 주체인 정신이나 사고의 구조, 논리, 방식 등은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이 통념이다. 사유의 내용은 물론 다를 수 있지만 인간 정신의 사유 틀, 사유법, 사유의 구조는 지역과 시대라는 시공적 차이를 넘어서 보편적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종이 자연 진화의 결과라 한다면, 인간 정신도 자연적·문화적 진화의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일관된 입장이다. 정신이 등장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요인은 신경생리학적 기반에 더하여 다른 인간과의 사회적 관계이며, 사회적 관계에서 핵심은 언어이다. 인간의 정신은 다른 인간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자라나는 것인데, 그 사회적 관계의 기초이자 가능 근거는 언어일 것이다. 인간이 유아 시절부터 무인도에서 자라난다고 한다면, 그는 정신적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추정이다."(25-6)


# 사유선재론 또는 언어도구론 비판


"의미동일론은 더 근본적이고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념에 기대고 있다. 그것은 우리 밖 세계의 모습이 고정적이고 동일하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 밖 외계 내의 대상이나 사태가 일정하며 객관적인 그 자신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그것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믿는다." "우리의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문장의 경우에도 비슷한 입장을 견지한다." "이 경우 역시 어떤 언어(기표)를 사용하느냐는 우리의 내면 감정이나 정서의 풍경화가 지니는 모습에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배우지 않은 유아들도 다양한 감정이나 정서 등의 심적 상태를 품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문제는 유아들의 심적 상태와 그들이 배우게 될 다양한 심적 술어들의 의미 혹은 공적 사용 기준 간의 관계를 해명하기가 쉽지 않다. 양자는 사실상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전자는 주관적인 것이고, 후자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28-30)


"감정과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의 존재 순서는 뒤바뀌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감정 상태가 생기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감정 어휘들이 고안되는 것이기보다는, 감정 어휘들을 배우면서 감정 상태가 형성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감정 어휘들을 기존의 언어공동체로부터 학습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달리 이들 어휘를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감정 어휘의 학습은 어떤 객관적·공적 사용 기준을 매개로 하거나, 또는 그 어휘의 사용례들을 접하고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로 아동이 자신의 내면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감정 어휘를 사용하는 경우, 그 술어의 의미나 사용 근거가 되는 것은 자신의 내면 상태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그 술어의 공적 사용 기준이나 사용례들에 대한 기억이다. 타인이 아동의 심적 문장을 이해하는 준거 역시 그 공적인 것이다."(30)


# 세계동일론 비판


2장 플라톤 시대의 담론 문화: 준구술 시대


"에릭 해블록은 호메로스 시대에서 300~400년 지나 등장한 자연철학자들도 구술 시대의 사상가라고 자리매김한다. 소크라테스 역시 저술 없이 대화나 토론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설파했다는 점에서 구술 시대의 현자로 평가할 수 있다. 철학함에서 그가 의지했던 언어 매체는 구어, 대면적 구어였다. 몇몇 소피스트는 직접 저술을 했으나, 그런 저술 활동은 주로 자신을 시인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들의 주된 활동은 대면적 담론이었으며, 그들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아고라agora에서의 연설과 토론, 혹은 법정에서의 변론 기술이었다. (플라톤 시대 역시 저술의 출판과 대중의 독서가 일반화될 수 있는 물리적·문화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가 구술 시대인가 문자 시대인가의 물음은 그의 저술 의도만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철학함의 모습, 그의 저서에 담긴 철학적 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도 필수적이다."(43)


"고대 그리스가 공적인 공간에서도 글보다 말을 더 중시했던 구조적 이유는 고대 그리스가 대면적 사회라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규모가 큰 곳이 20여만 명, 그중 정식 시민은 4~5만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소규모 공동체였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면 서로를 익숙하게 알 수 있는 좁은 사회였다. 이러한 대면사회에서는 구태여 규범, 관습, 권리 관계를 위탁할 문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문서란 말하자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타자 또는 제3자이며, 스스로는 증언할 수 없는 물리적 존재라는 점이다. 말보다 문서에 의존하면 문자의 비대면성, 간접성, 사물성, 비활성성 등 때문에 불안감이 더 커질 수 있다. 이에 비해 대면적이고 구술적인 관계는 사람을 직접 대하고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확실성, 직접성, 인격성, 행위성 등의 특색이 있다 글과 달리 말은 인격의 일부이자 행위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46)


"'개인의 신원' 또는 '자아 정체성'을 의미하는 영어 어휘 'personal identity'에서 'identity'는 개인의 고유하며 개성적인 자아라기보다는 원래 '소속', '타자와 함께하는 것', '타자와 공유하는 동질적인 성질'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 개인에게 신원을 물으면 그가 소속한 집단을 말해야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내면적 개인, 정신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개념은 플라톤 시대에는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공동체적인 시기에 홀로 행하는 독서와 사색은 특이하고 예외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현자들은 지혜를 전하고 자연철학자들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며 저술했으나, 그것은 이들이 사유 주체로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루는 것이라기보다는 학예의 여신 뮤즈Muse의 도움으로, 혹은 신들의 신탁을 통해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시인들은 뮤즈를 호출하여 영감을 요청하고, 파르메니데스 등의 자연철학자들은 뮤즈의 인도를 받아 진리의 길을 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53-4)


"철학자나 현자들이 자신의 사상을 타인들에게 가르치는 데 있어서 도서라는 매체에 의탁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제작할 수 있는 필사본이 소량이고 글 읽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그 범위가 제한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선의 방법은 대면을 하고서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를, 또는 수사술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플라톤의 대화록 저술 목적 역시 구술적 가르침을 재현함으로써 후대의 시민들을 이런 대면적·상호적 철학함으로 초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게 인간 정신의 성장과 발전은 서재나 연구실에서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의 대화·토론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적이고 정치철학적인 과정이다. 플라톤의 저술은 독자가 홀로 독서하면서 동료 시민들을 떠나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사색의 여정을 떠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대화와 토론을 하기 위한 자료로서 저술된 것이다. 그것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위의 아고라였던 것이다."(62-3)


"구술적 철학함은 역설적이다. 구술적 철학함은 역동적이고 가변적이며 관계적이지만, 철학자들은 이런 역동적이고 상호적인 말하기를 통해 정태적이고 불변적이며 자체적인 실재를 찾아간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철학의 목표를 불변하는 실재나 진리를 지적으로 정관하는 상태(프로네시스phronesis)라고 논한다." "이런 역설이 어떻게 가능한가? 대화와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상호 공유하는 지평이나 좌표대를 구축한다. 자연스레 구축·형성된 공동의 좌표대는 일종의 문서적 세계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철학적 대화와 토론이 진행됨에 따라 참여자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내용들만이 그 좌표대에 등록되고 저장·축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객관화·합리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말은 점차 구체적이고 특수한 삶의 현장에서 비상하여 플라톤이 말하는 자체적인 존재자들이 세계에 이르게 된다."(84-5)


"플라톤의 대면적 철학함의 모델은 구술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그가 생각하는 구술적 활동의 성격이나 내용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전에는 전승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암송하고 이를 자기화하여 자신의 행동과 삶을 위한 지침으로 삼는 것이었다. 플라톤 이전에 말이란 단지 지혜의 전승·전달을 위한 매체이거나 소통의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말(소통 수단으로서의 로고스)은 아직 진리 발견의 방법(이성으로서의 로고스)으로서의 지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시민들이 진리와 실재를 탐구함에서 실질적인 사유 주체로 격상될 수 있었던 것은 말하기가 진리 발견의 방법의 지위에 오르면서이다. 진리 발견을 위해서는 특별한 예외적 능력이나 과정이, 가령, 신탁, 계시, 신들림, 영매 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말하기에 의존하되, 말의 정신과 논리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96-7)


"플라톤이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타무스의 입을 통해 문자를 비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문자는 사람들의 정신에 망각을 주입한다. ②지식의 보관을 문자에 의존하기에 그들 정신의 암기력을 소홀히 하게 된다. ③문자는 정신에 외적인 것이며, 타자에 속하는 매체이다. ④문자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내부로부터 암기하려 하지 않는다. ⑤문자는 기억하기가 아니라 생각나게 하기를 위한 간접 도구에 불과하다. ⑥문자나 문헌을 통해서는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 지혜로 보이는 바만을 획득할 수 있다. ⑦문헌의 독서로는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 ⑧많은 것을 읽기만 해서는 단지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이기만 할 것이다. ⑨다루기 힘든 사람들이 되어 학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구술 시대에 말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글은 독자가 읽기까지는, 그리고 글의 의미를 새기고 수용하기까지는 가수假睡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106-7)


"플라톤은 진리 발견의 능력을 감싸고 있던 신성성의 안개를 흩날려버리고 세속화했다. 그것은 일상의 감각 경험과는 다른 능력이기는 하되,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일종의 선험적인 기억력이다. 이런 세속화와 함께 그 특별한 능력이 대상으로 하는 바 역시 다른 위상을 부여받게 된다. 인간은 선험적 기억력을 통해서 일상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접하기는 하되, 그것은 영웅과 신들의 세계가 아니라 보편자·추상체의 세계, 개념들의 세계이다. 이제 '신적이고', '초월적이며', 비경험적인 기억력은 시인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 모두가 지닐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시인과 같이 선택되거나 점지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보통 시민들도 스스로의 사유 활동에 의해 뮤즈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단 이런 초자연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기억력을 향유하고 배양하려면 정신의 정화, 신체적인 것을 정신에서 씻어내는 정화 과정, 즉 철학함의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25)


3장 그리스의 담론 매체와 이성의 발견


"전쟁에서 적과의 투쟁은 물론, 동일 진영 내에서도 전략 토론과 전리품 분배를 둘러싼 치열한 다툼, 올림픽 경기에서의 승부 경쟁, 아고라에서의 정치적 논쟁, 법정에서의 논고와 변론, 나아가 소피스트들과 철학자들의 이론적 토론 등의 다양한 경쟁적이고 논쟁적인 관계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심지어 인간의 정신적 활동도 정신 또는 영혼을 구성하는 이질적 요소들 간의 주도권 경쟁이라고 설명했다. 지성과 기개와 욕망, 검은 말과 흰 말과 이들을 통어하는 기사, 지성과 감정, 억견(doxa)과 인식 등 간의 경쟁과 갈등이 인간 정신 내면의 풍경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담론 문화도 경쟁적이기에 변증술, 이중 논변, 반론술, 논박법, 쟁론술 등 다양한 논쟁 방식이 생겨났다. 경쟁적 관계란 말의 권리나 말의 평등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며, 이런 믿음은 전시에나 평화 시에나 그들 도시적 삶에서 주축의 원리이자 가치로 기능했다. 132)


"우리의 생각이나 발언들이 논리적·이성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 특히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논변에서 이미 확립된 것이다. 이들은 존재의 단일성, 존재와 사유의 일치, 운동과 다수의 불가능성을 논하는 다양한 역설을 개진했는데, 그 정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들은 존재 개념에 대한 논리적 분석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이들 논변의 논리적 지렛대는 논리학의 제1원리라 할 동일률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순을 찾아 논파하는 철학적 방법론인 논박법을 진리 검증의 핵심적 방법으로 제안한다. 이는 논리학의 제2원리인 모순 배제율의 원형을 이룬다. 플라톤은 스승의 정신을 이어받아 철학적 사유의 중심 원리는 논리나 이성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를 관찰하기보다는 로고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진상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136)


"우리는 상호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조건, 진리를 위한 조건, 이들 조건을 충족시키는 제반 사항들을 모두 합하여 이성이나 합리성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언어적 소통은 이성을 전제하며, 이성을 형성해간다. 언어는 이성의 현현이며, 이성은 말의 본질이다. 이성이나 합리성이란 다름 아닌 이해와 진리를 위한 조건, 그러므로 말이 곧 말이 되기 위한, 말다운 말의 조건이다. 그리스적 언어관은 말에 대한 인식적 관점을 취한다 할 수 있는데, 말에 대한 다른 관점과 비교할 때 그 고유성이 드러날 수 있다. 유가의 언어 이론은 정명론正名論에 요약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언어란 규범이다. 동아시아에서 언어란 사실을 기술하기보다는 행위를 처방하고 규제하는 규범의 역할을 한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게 행동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동아시아적 사유에서 사물에 로고스를 준다는 생각은 낯설 뿐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생각이다."(140-1)


"플라톤 대화 모델의 사고관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문자 문화의 영향이라 추정할 수 있다. 플라톤은 저술을 하고, 문자의 특색에 주목하고 반성하면서 사유를 점차 정신이 독립적으로 홀로 수행하는 특유의 활동이라고 보았으며, 경험계와는 다른 고유의 대상에 관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새로운 사고관의 특징을 지적해보자. 첫째, 사고 활동이란 정신이나 영혼이 신체와 독립적으로, 그리고 홀로 수행할 수 있는 고유의 활동이다. 둘째, 감각 대상을 다루거나 기표 또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 자체적이고 보편적이며 개념적인 존재를 인식과 논구의 대상으로 한다. 셋째, 이들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 이들에 대해 새로운 종류의 활동, 가령 비교, 평가, 공통점 추출, 추론, 연역, 일반화 등의 활동을 수행한다. 그리고 넷째, 이들을 경험계의 대상들, 또는 이들에 대한 인식과 관계시킨다."(146-7)


"문자의 비효율성이나 의존성은 오히려 정신의 등장이나 활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적극적 기능을 한다. 문자는 정신에 의해 사념될 수 있는 추상적이며 비가시적인 존재를 요청한다. 그런 것의 매개 없이 그것은 소통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자는 무언가의 대리인이다. 문자가 언어라고 한다면, 그것의 존재 기반이 되는 자체적이고 추상적인 의미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문자는 이들 추상체를 대리하는 것이며, 추상체는 문자의 배후 후견인으로서 이들을 지원한다고 여겨지기에 문자 문화는 추상체나 자체적인 것의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을 강화시켰을 수 있다. 글에 대한 이런 믿음은 말에도 전이되어 언어 일반에 대한 입장을 형성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문자에 대한 반성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그가 철학적 사유에서 필수적이라 생각했던 바, 즉 자체적인 것,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것, 정신의 고유 영역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을 것이다."(148-9)


# 플라톤 철학의 두 가지 측면

1. 구술 문화적 요소 : 대화록이라는 저술 형식, 이야기식 문체, 문자에 대한 명시적 비판, 소크라테스의 대면적 철학함, 아카데메이아에서의 철학함의 방식, 당시 문자 자원의 희소성

2. 문자 문화적 요소 : 형상의 존재, 자체성의 개념, 지적 정관(프로네시스), 실재의 불변성, 정태적 인식의 주체로서의 정신, 실재 탐구에서 차선의 방법인 언어방법론, 가설의 방법, 변증법, 분석과 종합의 방법, 추론과 연역적인 사고의 강조


4장 고대 그리스어의 언어철학


"문자 형성의 기반이 무엇이냐는 언어관 형성에 기초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그리스 문자는 음성을 가시적 매체로 전사하는 음성문자이다." "음성문자는 그 자체로서는 물리적 끄적임이기에 그것의 의미, 혹은 그것이 지칭·묘사하는 사물이나 사태와 전혀 무관하다. 기표는 기의에 대해 자의적이다. 그래서 음성문자적 문화는 끄적임의 배후에 그 물리적 흔적을 언어로 역할하게 하는 의미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가시적 끄적임이나 흔적은 시각적인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홀로는 언어기호로 기능할 수 없다. 그래서 그를 소통의 매체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것이 배후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배후의 것은 끄적임과는 달리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며, 눈이나 귀로는 지각할 수 없으나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으로는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을 수 있다."(178)


"미국의 고전학자 찰스 칸은 그리스어 be동사('einai' 동사)의 진리 확인적 역할을 조명하면서 그리스어 be동사는 ①'존재한다'는 의미('a is' = 'a가 있다'), ②계사적 역할('a is P' = 'a는 P이다')에 더하여, 보다 기초적인 의미로서 ③진리 서술적 의미('a is P' = 'a가 P라는 것은 참이다')를 지니고 있다고 논한다. 그리스어 be동사는 자신이 연결사가 되어 서술된 사태가 객관적 사실이며 진리임을 주장하고 확인하는, 상위 술어(메타)적인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는 것이다. 칸은 그 근거로 'einai'의 분사형에서 파생된 부사('ontos')와 형용사('on')가 결합된 어구 'ontos on'이 '진정으로 실재인really real'을, 'to onti'가 '실제로really'나 '진실로truly'를, 'esti tauta'가 '이들은 사실이다these are real' 또는 '이들은 진실이다these are true'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더 나아가 '진술된 바가 진리이다 또는 사실이다'라는 진리언명적 의미가 그리스어 be동사의 보다 중심적인 의미라고 주장한다."(186)


"'einai' 동사를 사용하여 무언가를 서술하고, 서술되는 바가 진리임을 주장하려 한다는 것은 역으로 그것이 논파될 가능성을 우려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be동사를 사용한 사실 언명이나 주장이 일상적이고 빈번히 이루어질수록 진리 주장에 대한 비판 의식은 첨예해질 수 있다." "플라톤 철학에서, 더 일반적으로 서양철학에서 인식론이나 존재론이 중심적인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의 be동사가 지닌 서술적 역할이나 진리주장적 의미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 이래 서구적 사고에서는 실재란 무엇이냐, 언표되는 바가 객관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냐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철학은 오랫동안 서구 학문의 중심이었고, 철학이나 학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진리의 인식이었다. 자연철학자들은 서양철학의 비조鼻祖로 평가되는데, 그들의 전형적인 물음, 아르케에 관한 물음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었다."(186-8)


"그리스어를 포함한 서구어에서는 형용사에 정관사(고대 그리스어에는 정관사만 있음)를 붙이면 그 형용사가 기술하는 성질을 지닌 어떤 보편자나 추상체를 가리키는 어휘를 만들어낼 수 있다. 'the red'는 보고 만질 수 있는 'red apples', 'red lights' 등과 대조되어 빨강 자체, 빨강의 성질, 빨강의 본질을, 'the just'는 'just societies', 'just decisions' 등에 공통적인 덕목인 정의 자체, 정의로움, 정의의 본질을 지칭한다. 이들 보편적이고 추상적이며 자체적인 것, 그러면서 특수자들에 공통적인 본질은 관사의 도움을 받아 존재론적인 추론을 거치면 쉽사리 실체로서의 추상체나 보편자로 변모한다. 서구어의 관사가 이렇게 형용사를 실체화할 수 있는 이유는 지칭적인 기능을 행하기 때문이다. 지칭될 수 있는 것은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이다. 'the red'나 'the just' 역시 관사적인 것, 즉 지칭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어떤 존재자이다."(197-8)


"플라톤은 형용사와 보통명사의 의미 근거와, 이들에 의해 기술되는 물상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성질의 근거가 되는 것이란 동일하다고 추론했다. 사물들이 특정한 형용사('정의롭다')나 명사('정의')에 의해 의미있게 서술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어휘에 의해 기술되거나 지칭되는 어떤 속성(가령 '정의로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형용사나 명사는 그 실체 또는 형상을 명명하는 이름이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꽃, 아름다운 산하는 모두 '아름답다'고 의미있게 서술될 수 있고, 그런 기술이 진리일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아름다움'이라는 어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이면서도 '아름다움'의 근거가 되는 이것을 플라톤은 그리스어 형용사에 관사를 붙여 'to kalon(아름다움the Beautiful)'이라고 부르며, 나아가 이를 'to Kalon auto kath' hauto(자신에 즉해 있는 아름다움 그 자체Beautiful itself)라 칭하면서 다양한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분리 구분했다."(200-1)


"그리스어 동사 'einai'와 라틴어 동사 'existere'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어 'einai'는 지속적 상태를 나타내는 동사로서 'gignesthai(생겨나다)'와 대조된다. 이에 비해 라틴어나 영어의 존재동사는 오히려 '생겨남'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사이다. 라틴어 'existere'는 두 어휘 요소 'ek-sistere'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에 비추어볼 때, 이 동사는 '앞으로 나옴', '걸어 나옴', '존재하게 됨',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대낮의 밝은 빛 속으로 부상함'을 의미한다. 이 동사의 접두사인 'ex(ek)'는 과정의 완료를, 그리고 어간 'sistere(서게 되다)'는 지속성을 함의하는 'stare(서 있다)'와 달리 부정과거aorist의 일회성이나 순간성을 함의한다. 이렇게 분석해보면 'existere'라는 동사는 'gignesthai'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 즉 생성 과정이 완료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existere'는 '존재하게 되다', '생성 과정의 결과로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다'를 의미한다."(208)


"이 어휘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부상하게 되다'를 의미하므로, 존재자들이란 '부상하게 된 것들id quod existit'이다. 이렇게 부상하게 되어 대낮의 빛 속에 들어선 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부상하지 않고 어두운 배경에 머무를 수도 있으며, 곧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중세 신학은 성서의 영향을 받아 존재와 본질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런 구분법에는 존재가 우연적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우연한 존재의 개념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개념으로 계승된다. 'einai'의 명사적 형태라 할 수 있는 그리스어 'ousia'는 '우연적 현존existence'이 아니라 '항구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 '본질essence'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고대 그리스의 'einai'는 중세적 'existere'와 달리,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 있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의 존재 개념은 중세나 이후 실존철학의 존재 개념과는 정반대적이라 할 정도로 현격한 차이를 지닌다."(208-9)


"'praxis(프락시스)'와 'poiesis(포이에시스)'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또는 행위철학의 중심 이론 중 하나인데, 이는 그리스적 사유에서 동사상 구분에 대한 민감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poiesis'는 대략 '노동', '제작'이라 번역될 수 있는 어휘로,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적 활동을 의미한다. 외재적 목적이 성취되면 그 행위는 종료된다. 가령 '(밭을) 갈다'라는 동사가 기술하는 경작의 활동은 밭을 다 갈게 되면 종료된다. 목공일은 가구가 완성되면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다. 이와 달리 '실천'이라 번역할 수 있는 'praxis'는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산책하기, 놀이하기, 운동하기, 명상하기, 지적 호기심 충족하기, 수학문제 풀기, 우주의 질서를 관조하기 등의 활동은 실천적 활동이다. 이들 활동은 어떤 외부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즐거움을 주며 가치를 지니기에 활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211-2)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활동을 두 종류로 구분하는 것은 윤리적 삶과 행위를 규정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삶의 목표는 'eudaimonia(에우다이모니아)'이다. 통상 이는 'happiness' 또는 '행복'이라 번역되어 왔는데, 이는 일종의 마음의 상태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심리적 상태라기보다는 어떤 활동을 의미하는데, 다양한 활동 중에서도 앞서 구분한 바, 자체 목적적인 활동인 실천(프락시스)이다. 삶의 목표인 에우다이모니아는 어떤 행위를 통해 도달한 상태나 무엇을 성취하여 이룬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가치를 지닌 진행적인 실천 활동인 것이다." "노동이나 제작이란 부정과거 동사상(일회성으로 끝나는 활동)이나 완료 동사상(행위의 온료 또는 행위에 의해 이르게 된 상태)적 활동이다. 이에 비해 실천이나 그 전형인 에우다이모니아는 반과거 동사상(진행적 활동)으로 표현될 수 있는 활동이다."(212)


2부 플라톤의 『파이돈』 : 철학적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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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웃음의 나라 -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
정병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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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청년장군


"협의과정에서 북측이 취하는 전형성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회의의 공식성을 중시해서 격식을 갖춰 웃으며 악수하고, 덕담을 주고받는다. 상대방의 설명을 먼저 잘 듣고 메모하다가 실무적인 내용보다 원칙적인 문제를 찾아서 거론한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비판하고 꾸짖기도 하면서 상대방을 위축시킨다. 자기편 주장을 강하게 말하면서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갈등을 고조시키고 격앙된 감정을 표현하면서 그 상태로 회의를 끝내기도 하고, 다시 만나서 논의하기로도 한다. 다시 회의가 시작되면 다시 웃고 덕담하고 원칙과 도덕으로 비판하고···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기 주장을 관철하거나, 상대방의 제안을 조정하도록 해서 최대한 자신들의 입장과 체면을 지킨다. 결국은 받을 것이었는데 자존심 하나를 지키려고 그 어려운 과정을 반복한 것이다. 그동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북 협상 과정에서 겪었던 일이고, 앞으로의 협상에서도 패턴은 비슷할 것이다."(22)


"미사일 발사 같은 도발의 원리도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하기는 국제사회의 동정이나 연민으로 얻을 수 있는 지원이 얼마나 되겠는가? 국제 구호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실제로 어떤 지원을 받았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북한은 아무리 어려워도 그런 방식으로 국제사회의 동정을 구하는 가난한 나라 취급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뚜렷했다. 개인적 자선과 마찬가지로 국제원조도 대상국의 상태와 실력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참혹한 모습으로 도움을 청해도 가난한 걸인에게는 동전을 던져줄 뿐이다. 입성이 반듯하고 갚을 능력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는 단위나 지원방식이 달라진다. 실력과 배짱이 있는 상대가 '나'를 해칠 수 있는 힘까지 가지고 당당하게 요구를 한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대기근상황에서 발사한 미사일 광명성은 바로 그런 길을 가기로 했다는 선언으로 들렸다."(24)


2장 행복을 교시하는 나라


"〈행복 넘쳐요〉라고 노래하는 유치원 아이들의 '행복'과 '장군님'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장군님'을 왜 '아버지'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주체사상의 논리에서 보면 이들은 스스로를 항일 유격대의 전통을 이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아직도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민족을 해방시키려는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령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고난을 견디며 바른 편에 서서 바른길을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압도적인 외세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가난하고 괴롭지만, 올바른 길을 가는 자신들이 언젠가는 승리해서 통일을 이루고 민족을 해방시킬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의 노래하는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듯 물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부럼 없어라〉나 〈우리식대로 살자〉든가 〈조선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라는 표어도 남한식으로 해석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들 나름의 도덕원리에 바탕을 둔 정신주의적 표현이기 때문이다."(62-3)


"남아프리카 부시맨 문화에서는 선물을 받고 감사하거나 칭찬하는 법이 없다. 평등사회의 문화원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예를 들어 사냥꾼이 큰 짐승을 잡아 온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모두 둘러앉아 맛있게 먹으면서 고기가 질기다고 불평을 한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냥꾼의 뜨거워진 가슴을 식히기 위해서라고 한다." "'고마움'은 선물을 주고받는 그 자리에서 바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그와 같거나 더 큰 선물로 확실하게 갚는다." "북한 당국도 소떼를 몰고 온 정주영 회장에게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개발권으로, 감귤을 보내온 제주도민들은 전세기편으로 직접 평양에 오게 하는 식으로 그때의 고마움을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계산'했다." "〈우리 손으로 직접 나누어 주고, 아이들이 먹는 것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하면 줄 수 없다〉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런 꼬리표가 붙는 '선물'은 안 받겠다는 것이 북쪽의 일관된 입장이다. '선물'은 장군님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69-70)


"대기근 발생 초기에 국제사회의 구호를 기대하며 공개한 육아원과 아동병원에서 외부 사람들이 찍은 아이들의 참혹한 영양실조 사진은 모금 활동에 일부 활용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폭넓게 북한정권의 실패와 인권상황을 고발하는 이미지로 확산되었다. 그후 북한 당국은 그런 현장에 더이상 외부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관리했지만, 이미 널리 퍼진 이미지들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어 아직도 수많은 반북 정치집회에 동원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후에도 여러차례 평양에 갔었지만 다시는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지난 20세기 중반부터 아프리카의 비아프라,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전쟁과 자연재해로 수많은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그 아이들의 참혹한 사진들은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렇게 많은 끔찍한 사진들을 돌려 보면서 국제사회는 그 아이들을 얼마나 구했을까? 깡마른 북쪽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우리는 과연 얼마나 도왔을까?"(79-80)


3장 아버지 나라의 교육


"혁명투쟁 중에 희생된 동지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거두어 키워주는 수령의 '어버이'로서의 이미지는 국가 전체로 확대된 가족 개념의 출발점이 되었다. 혁명학원과 정치적 양부모 관계의 의미에 대해서는 탁아소와 유치원부터 모든 교육기관에서 반복학습을 통해 가르친다. 세대가 거듭되면서 혁명학원은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가족국가'의 확대종가로서의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북한에서는 혁명을 (기득권 세력에 맞선) 사회 내부의 평등보다는 외세로부터의 해방으로 개념화했다. 외부와의 혁명투쟁이 길어지다보니 '대를 이어' 혁명을 해야 한다. 그 혁명의 효율을 위해 선택과 집중은 불가피하고, 선택의 기준은 개인의 능력보다 신뢰를 우선한다는 논리다. 특별히 신뢰받는 혁명가족의 아이들은 국가적으로 특별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장기화된 혁명의 현실은 처음에 추구하던 혁명의 이념과는 달리 특권 의식으로 나타났다."(107-8)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총 4천 명 이상이 교육받았다. 중국이 가장 많은 수를 돌보았고, 몽골과 소련으로 보낸 고아들까지 포함하면 최소 2만 5천명 이상을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이 돌봐주었다고 한다."(110-1) "동구권 국가에서 교육받은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1960년대 초중반까지 모두 북한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한 동구권 사회의 영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귀국 직후 이들은 집중적인 사상 재교육을 받았다. 심각한 문화충격으로 재적응에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귀국 전쟁고아들은 '어버이 수령'의 특별한 사랑을 증명하는 존재들로서 외교 및 통역 분야는 물론, 과학기술 분야에서 전문가 집단을 형성하고 지도적 역할을 했다. 평양과 해외에서 그들과 교류해본 전 루마니아 대사는 전쟁고아들처럼 '어버이 수령'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집단들이 국제적 고립과 위기상황에서도 체제의 전복을 막아주는 '평형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114-5)


4장 태양민족의 탄생


"김일성의 삶 이야기는 대부분의 신화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문화영웅'의 통과의례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다. 즉, 평범한 출생배경을 가진 어린 영웅은 소년기에 집을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훌륭하게 성장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성물聖物, 두자루 권총'을 물려받고, 성스러운 산(백두산) 속으로 들어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시련을 겪으며 민족을 노예로 삼은 외적을 물리치고, 마침내 고향(만경대)에 돌아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만든 '해방조국(지상낙원)'의 태양이 되어 영생한다는 서사구조다." "영웅의 '통과의례'처럼 소년 김일성은 두 번의 천리길 여행을 통해 청년이 된다. 그리고 '밖'에서 '안'으로 돌아오는 개선장군으로서의 '귀국',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수령으로서의 '건국'이 장년이 되는 과정이다. 그의 노년은 '민족의 태양'으로 추앙받으며 사랑과 이적을 보여주는 삶이었고, 그는 죽어서도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조상신'으로서 '영생'한다."(150-1)


"김정일의 탄생으로 북한의 신화는 세 명의 대성인(김일성, 김정숙, 김정일), 성스러운 삼위三位의 신격을 갖게 되었다." "김정일의 탄생설화는 예수 탄생을 둘러싼 다양한 전설과 성서적 표현을 번안한 형태로 전개된다. 그의 탄생은 성스러운 백두산의 겨울밤, 눈덮인 소나무 가지 사이로 이상한 별이 빛날 때, '정일봉' 아래 통나무집에서 〈룡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가 태어났다는 전설적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늘에는 날개 달린 천사들이 노래하고,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따라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것처럼, 김정일의 탄생은 먼저 민족의 향도성인 〈광명성〉이란 새 별이 솟아나는 것으로 예시되었다고 한다. 땅에서는 마구간에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동방박사들이 선물을 바친 것처럼, 백두산 밀영 통나무집에서 태어난 〈어리신 장군님〉에게 충성스러운 빨치산 '경위대원(호위대원)'들이 소박한 장난감을 바쳤다고 한다."(169-70)


"극장국가의 권력은 영토나 물리적 강제력을 확대하는 것보다 주로 사람의 마음을 잡는 일에 주력했다. 또한 극장국가의 정치와 행정체계는 국가의례의 준비와 집행을 다른 어떤 복지적, 경제적 심지어 군사적 이해보다도 앞세웠다. 그렇다면 (아직 기근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에게 '악의 축'으로 낙인 찍힌 2002년에 처음 개최된) 「아리랑공연」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국가적 장중함과 긍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국가가 초라하게 위축된 상황일 때 더욱 스스로의 존재감을 안팎 모두에게 과시적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문화적으로 익숙한 예술창작 방식을 총동원하여 종합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리랑공연」이다. 즉, 김일성으로 상징화되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정치적 정통성을 재확인하고, 주체적 삶을 지키기 위한 김정일의 선군정치의 힘을 보여주고, 미래의 유토피아 통일조국에서 〈태양민족〉, 〈김일성민족〉이 세계적으로 영원히 중심에 선다는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다."(177-8)


5장 빨치산과 고난의 행군


"'유격대국가'로서의 역사는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강요한 자기중심적 권력서사만은 아니다. 주체적 해방서사에 목마른 탈식민국가의 여러 집단들이 이런 이야기를 서로 만들고 유통하면서 스스로 하나의 문화적 논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만든 이야기에서 구체적 사실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교훈적 이야기의 설득력 있는 의미구성이 중요하다. 그 이야기를 통해 그 사회의 어른들과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 가치관 교욱으로서의 효과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수령과 국가권력에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교육 효과가 있는 다양한 영웅적 미담들도 꼭 사실 그대로일 필요는 없다. 황당할 정도로 많은 신화나 영웅담 형식의 과장된 이야기가 항상 보급된다. 통제된 정보매체 속에서 '이야기'에 굶주린 어른들과 아이들은 같은 주제지만 늘 새롭게 창작되고 있는 변주곡들을 반복해서 소비하고 있다."(195)


"외부세계는 북한이 핵과 미사일에 매달려서 경제적 파탄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군대를 앞세운 선군정치의 힘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자주성'을 지켰다고 주장한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군대가 〈총 한번 쏴보지 못하는 무력한 집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주의 제도가 붕괴되고 인민들은 전쟁과 약탈, 민족분쟁으로 인하여 자기의 정든 보금자리마저 빼앗기고 다른 나라로 류랑의 길을 떠나고 있지만〉, 조선은 그런 파국을 막았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택한 '군사우선 사회주의', 즉 '선군정치'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고, 이웃한 사회주의 패권국 중국의 변질된 '경제우선 사회주의'와 대비되는 정통성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군정치는 사회주의 체제의 근본적 국가운영 원리이 '당'과 '군'의 서열관계를 역전시킨 것이다. 합당한 물적 토대를 혁명의 원동력으로 강조하는 정통 맑스주의의 전제도 뒤집은 것이다."(204-5)


"흔히 북한을 '벼랑끝 외교'를 펼치는 나라라고 한다. 늘 외부세계의 예상과는 다른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정말 벼랑끝에서 몸을 던질 각오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 정책결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극장국가 내부에서 그들 자신이 스스로 연기를 멈추도록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문화적 '연기'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계기만 있으면 한순간에 대본이 바뀐 듯이 입장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있다. 실제로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은 하루아침에 모든 전선의 일본 군인들이 무기를 놓게 하였다. 마지막 한사람까지 죽창을 들고 싸우고자 했던 일본 국민들도 그의 한마디에 주술에서 풀린 듯 개인적 복수심까지 접고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을 환영했다. 천황이란 상징체계의 중심이 움직임으로써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210-1)


"북한 기근피해가 가장 혹심했던 1995~98년간에 남한사회가 당시의 경제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소극적으로 대응한 배경에는 기근으로 인해 북한체제가 조기에 붕괴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참혹한 기근이 진행되고 있다 해도 그 기근을 발생시킨 체제가 있는 한 구호활동은 그 비극을 연장시킬 뿐이니, 그 체제가 붕괴하기를 기다려(혹은 적극적으로 붕괴시켜) 일거에 구원하자는 논리였다. 돌이켜보면 이는 '기근'현상에 대한 무지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리 혹독한 기근이라도 기근 자체는 체제를 붕괴시키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들은 권력에 저항할 힘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사회에서 발생한 '기근'에 대한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최근에 비로소 피해규모가 드러난 중국의 대약진운동 시기 대기근의 경우 사망자만 약 3천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정치체제는 물론이고 권력구조에조차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220-1)


"당시 북한 주민들이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단순히 좀더 잘살아보겠다는 행위가 아니었다. 자살만큼이나 극단적인 저항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미 반세기 이상 북한은 국민들을 극도로 군사적인 빨치산국가의 구성원으로 사회화시켰다. 그 국가공동체를 이탈하는 것은 비겁한 배반이고 반역적인 범죄로까지 여기도록 했다. 발각되면 그 처벌은 개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가족과 친척에게까지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탈북난민들은 항상 붙잡혀서 송환되는 것에 대해 극단적인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는 송환된 후 자기 자신의 운명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에 대한 염려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종류의 공포심은 극단적인 죄책감과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위험한 고비를 넘겨서 일단 안전한 곳에서 쉬고 잘 먹으면 곧 심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북한에 남기고 온 가족 때문이었다. 국경을 넘은 자신의 행동이 비겁한 배반이라는 생각을 오래도록 지우지 못했다."(228)


# 기근의 3단계 진행과정

1. 경계 : 기근 초기에는 공동체적 이타성이 높지만 결핍이 심각해지고 사회적 통제가 이완되면서 점차 유대감이 사라진다.

2. 저항 : 심한 결핍으로 활동이 감소하고 사회관계도 침식되면서 공공재 파괴현상이 나타나고 가족단위의 유대만이 남는다.

3. 탈진 : 가족마저 붕괴되어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식량자원을 통제하는 권력에 복종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6장 차별과 처벌


"평양과 지방은 확실히 달랐다. 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현격한 질적 차이가 느껴졌다. 도로와 건물 상태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복장, 표정, 걸음걸이와 자세까지 차이가 있었다. 물질적 생활수준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복지수준도 격차가 큰 듯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평양으로 들어와 살고 싶어 한다." "평양은 도시 슬럼 같은 문제도 없다. 경계관리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평양시민들은 지방민들이 소지한 '공민증(남한의 주민등록증)'과 다른 '평양시민증'을 소지한다. 평양시민증은 1997년 기근이 한참 심해질 때 새로 만들었다. 식량배급이 먼저 끊긴 지방에서 마지막까지 식량이 배급되고 있던 평양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평양 이주는 물론 방문까지 철저하게 관리했다. 평양 방문허가증은 국경을 넘는 비자와 같은 기능을 했다. 국가 안에 또 하나의 국경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기근시기의 끝자락에 내가 본 평양 경계선에는 메마르고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256-7)


"탈북한 사람들은 대부분 출신성분이 나빴거나 가족과 친척 중에 정치적 과오가 있다는 이유로 차별받았다고 했다. 상당수는 바로 그 반대의 이유로 우대받고 당당하게 살았다. 그때 나오는 표현이 〈깨끗하다〉 〈더럽다〉 〈썩었다〉 〈순수하다〉 〈오점〉 〈전염〉 같은 말이다." "이런 문화체제에서는 '오염되었다'고 지목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도 혈연적 친밀도에 따라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위험시한다. 그들은 남들보다 낮은 위치에서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했다." "출신성분이나 과오로 사회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다시 '깨끗하게' 해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수령뿐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덕성실화는 각 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위험시되던 오염된 성분의 인재들을 바로 현장에서 사면하고 구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차별제도 자체를 없애는 조치는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별적인 그의 '은사'는 예외적이고 특별한 것이 된다."(270-1)


# 사회적 낙인stigma의 세 가지 유형(어빙 고프먼)

1. 신체적 흠이나 장애로 인한 낙인

2. 반역적인 믿음, 부자연스러운 감정, 정신질환, 의지박약 같은 성격적 결함에 따른 낙인

3. 인종, 민족, 종교처럼 가계에 따라 전달되면서 가족 모두를 오염시킬 수 있는 부족적(집단적) 낙인


"북한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여성을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라고 하면서 전통가족을 〈붉은 가정〉으로 바꿨다고 공식적으로 밝혀왔다. 그러나 실제 가족관계를 비롯한 일상생활은 가부장적 가족주의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했다." "요즘 북한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부장적 가족생활 문화는 1972년 수령 중심 '유일사상체계' 확립과 관계가 있다. '조선식 사회주의'는 서구식 사회주의와 다르다는 주장과 함께 전통적인 가정생활 방식이 되살아났다." "1980년대 이후 북한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서고 김정일 후계체제가 공식화되면서 이른바 '사회주의 대가정'이란 개념이 나타났다. 생물학적 혈연관계인 부모자식 관계처럼 정치적 생명을 준 수령을 아버지로 당을 어머니로 '섬기는' 인민이 되라는 것이다. 이런 이념을 가정에서도 매일 생활의례를 통해서 되새기도록 했다. 수령과 당에 대한 충성과 효성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가 다시 강화됐다."(278-80)


7장 저변의 흐름


"(대기근의 여파로 공식 배급체계가 무너지고 식량과 에너지를 포함한) 국내 자원이 고갈된 상황에서 중요한 문제는 필요한 물자를 외부에서 확보하는 일이었다. 때마침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시작한 중국은 생존의 열쇠였다.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시 돌아와서 가지고 온 물건들을 장마당에서 팔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중국에서 팔릴 만한 물건(또는 사람)을 모아 다시 그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해서 점점 그 길을 넓혀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사 올 돈을 처음 마련한 사람들은 주로 중국이나 다른 외국(일본과 한국)에 있는 가족을 통해서 외화를 모으거나, 외부세계와의 연줄을 통해서 그쪽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들고 나가 목돈을 만들었다. 그렇게 초기 교역자금을 마련하고 이윤증식 기술을 익힌 사람들을 '돈주'라고 했다. 초기 돈주들 중에는 골동품으로 큰돈을 쥔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305)


"초기 돈주 중에서 중국과 한국 '대방'과 연줄이 있고, 또 당간부나 고위 관료들과도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었던 사람들은 직접 '와쿠(교역허가권)'를 받아서 무역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그중 능력 있는 사람들은 국가기관(당, 군, 정) 소속 기업이나 무역회사의 이름을 빌려서 공식적으로 교역하고 비공식적으로 상납하면서 이윤을 챙겼다." "진짜 돈주의 출현과 소비재의 유행을 보고 자본주의의 맹아라거나 체제붕괴의 조짐이라고 여기는 주장이 많다. 그러나 스스로 생산수단을 갖지 못하고, 임금고용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돈주들을 자본가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오히려 기존 권력체제를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고, 스스로의 안전과 신분상승을 꾀하고 있다. 즉, 시장을 통해서 관료층과 상호의존관계를 맺은 돈주들이 혼인과 신분세탁을 통해서 기존의 계급체제에 새롭게 편입되는 구조다. 이런 방식의 변화는 사회계급 구성원이 바뀌더라도 사회구조 자체는 유지되게 한다."(310-1)


# 대방 : 북한에서 국경을 넘어온 물건들을 받아서 팔고, 식량이나 생필품을 준비해서 보내주는 중국 쪽 교역 상대방


"이동성이 높은 남한사회와 달리 거주이전이 자유롭지 않은 북한에서는 이웃과 동네, 즉 지역사회가 정치적 기능면에서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생활면에서도 중요한 거점이다. 대개는 평생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민반 등 기초 지역조직들은 상부의 명령을 주민들에게 전달하고 보고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정치적인 상호감시체제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일상생활면에서는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들을 협동해서 해결하는 기능과 주민들 간의 상부상조 네트워크 역할도 했다. 특히 공식적 배급체제가 무너진 위기상황에서는 지역단위 주민들이 전통적인 '계'나 '두레' 방식으로 비공식적인 자원과 기술을 모아서 대응했다. 실제로 장마당에 진출한 사람들 중에는 이웃들을 통해 장사기술을 배우고, 동네에서 '모음돈(모아먹기, 계)' 또는 '다니모시(모음쌀, 십시일반)' 방식으로 씨앗자금을 마련한 사례들이 많았다고 한다."(328-30)


"대기근 초기에 김정일은 역설적으로 '웃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지도자의 웃음'은 김일성의 영정사진으로 등장했다. 모든 가정과 공공장소에 근엄한 표정의 수령 초상을 모시고 살던 인민들은 활짝 웃는 얼굴로 나타난 거대한 초상화에 어리둥절했다. 절망적 현실 속에서 낙관적 미래를 과시하기 위해 김일성의 영정을 더욱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그리도록 김정일이 직접 지시했다. 그 이후 계속된 비극과 고난의 시대에 김정일 자신도 파안대소하며 현지지도를 했다. 체제의 한계를 웃음을 통해 극복하려 한 것이다. 그 아들 김정은도 위기감을 높이는 미사일 발사 현장에서 주위 사람들과 함께 웃는 모습을 연출했다." "낙관적 정서를 퍼트리기 위해 국가권력이 선도한 웃음은 '관제' 영화와 TV드라마 속에서 '웃음과잉'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이렇게 공식 미디어에 나타난 웃음은 비공식 통로로 국경을 넘어서 들어온 새로운 오락문화의 강한 침투력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이기도 했다."(339-40)


"생활의례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매주 한 번 하는 '생활총화'다." "생활총화는 대기근으로 사회제도가 흔들린 상황에서 뚜렷하게 형식적인 집단의례로 변질되어갔다. 생계문제로 바쁜 사람들은 생활총화가 있는 날 빠지기도 하고, 형식적으로 몇 사람만 이야기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심지어는 참가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딴짓을 하면서 의례의 권위와 긴장도를 떨어뜨리는 방식의 저항도 자주 나타났다. 여러가지 전술로 변질되고 있기는 해도 생활총화는 북한 사람들의 심성과 행동패턴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고백, 비판, 반성, 교정, 새 출발로 이어지는 일련의 생활총화 과정은 본질적으로 종교성이 강한 생활의례다.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먼저 드러내 보이고, 용서받아서, 다시 깨끗해진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정화의례이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에게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와 비슷한 일종의 '고백의 문화'라 할 수 있다."(3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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