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 개정판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2
게리 윌스 지음, 김창락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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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나쁜 소식 전달자〉


"독일의 위대한 학자 하르낙은 자신의 저서 《기독교란 무엇인가?》에서, 바울이 〈복음이야말로 유대교라는 율법 종교를 폐지하는 하나의 새로운 힘이라고 확신했다〉고 밝혔다." "바울은 어떻게 예수의 메시지를 그렇게도 일찍이 또 그렇게도 철저하게 전복시킬 수 있었을까?" "사실 바울의 서신들에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하신 일들이나 말씀들에 관한 명시적인 언급이 별로 없다. 그는 조국 유대에 대해 아는 바가 변변치 못했으므로 디아스포라에서 그에게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께 온 관심을 집중한다. 바울 비평가들에 따르면, 바로 이 디아스포라 지역이 바울이 자신의 신학 사상의 구성 요소들을 수집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교 속으로 엮어 넣는 작업을 한 곳이다." "바울은 자신이 사적으로 받은 계시 외에는 예수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도 없었지만, 대담하게 원래의 열두 제자들과 의견을 달리하고 그들을 비판했다."(11-3)


"자기 자신의 종교를 창설하는 사람에게 걸맞게 바울은, 초기 비평가들의 눈에는 '이단들의 원조'가 되었다." "무엇이 바울을 이같은 불화의 사과가 되도록 만들었을까? 바울 자신의 말 속에 그 문제의 기원起源이 있다." "바울 서신들은 특정한 지방의 위기를 처리하기 위하여 써 보낸 임기적臨機的인 글들이다. 바울은 여러 가지 투쟁의 한복판에서 수신인들 편에서 제기한 물음에 답변을 하거나 적대자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이 편지들을 구술하고 받아쓰게 했다. 그의 답변 속에 적대자들의 모습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바울이 상대쪽이 무엇을 외치는지 알지 못하면서 바울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는다. 바울이 사용하는 매정한 말들 중 일부는 그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보이지 않는 그의 비평가들에게 부딪쳐서 울리는 반향이었다." "즉, 바울은 냉정하고 담담한 철학자가 아니라 전투태세를 갖춘 사자使者였다."(13-7)


# 바울의 서신 분류

1. 바울이 쓴 서신 :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2. 바울의 추종자들이 쓴 서신 : 골로새서, 에베소서

3. 바울의 서신을 재진술한 서신 : 데살로니가후서

4. 바울과 다른 관점에서 쓴 서신 : 디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1장 바울과 부활하신 예수


"예수와의 교제를 시작한 초기의 바울은 유대교 율법에 헌신했던 이전의 삶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본 경험을 화해시켜야 했다. 바울은 예수(의 역사)를 유대교 율법의 성취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다〉(롬 10:4)." "그리스어로 Khristos(그리스도)는 Kyrios(주님)처럼 하나의 칭호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Messiah'(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두 낱말─Messiah와 Khristos─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바울은 때때로 예수를 가리켜 '그 메시아'로, 혹은 단순히 '메시아', 또는 '예수 메시아', '메시아 예수'로 칭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예수의 칭호이다.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를 자신의 유대적 운명과 연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울에게 믿음의 기본적 계시는 언제나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었다(고전 15:3-4)."(48)


2장 바울과 부활 이전의 예수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예수의 삶에 대해 조금밖에 이야기하지 않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서신은 예수의 삶의 의미에 대한 해설이 아니다. 바울이 자기가 손수 세운 교회 공동체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러한 일─예수 삶의 의미를 해설하는─에 종사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신들은 특수한 당면 문제들을 놓고 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문제들을 말하는 데 필요한 경우에만 예수의 삶에서 끌어낸 자료를 사용했다.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요구되는 경우에 바울은 그 말씀을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예를 든다면 주님의 만찬(Kyriakon Deipon, '성만찬'을 가리킴), 이혼 문제, 음식 규례의 준수, 전도자가 재정적 원조를 받는 문제에 관해 그렇게 적용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인용을 통해 바울이 제시한 것이 복음서들에 제시되어 있는 후대의 기록들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 아마도 더 가까울 것이라는 사실이 논증되었다."(71)


"예수께서는 자기의 몸이 성전을 대치할 것이라고 주장하셨는데, 바울은 이 주장을 되받아 예수의 몸 안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을 대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시기(oikei, 거처를 정하다, 거처하다) 때문이다. 성령은 더 이상 하나의 물리적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oikei)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 3:16-17, 비교: 고전 6:9, 고후 6:16)." "바울의 말은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만남의 장소를 대치하는 (새로운 참된) 성전이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 사실은 (기원후 70년)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더 정확히는 복음서들이 씌여지기 전에─이 전승이 신도들 가운데 유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80-1)


"바울은 율법의 정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예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 5:14).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8-10).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 7:12)." "이것이 진정한 핵심이다. 바울의 사상은 사랑이 넘치는 예수의 사상에 덧씌운 이질적인 사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동일한 사랑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셈이다."(83-4)


3장 여행자 바울


"바울은 어느 면으로 보나 영웅적인 여행자였다. 그는 어림잡아 적어도 13,000km나 되는 거리를 여행했다. 그 중 상당 부분은 도보 여행이었다." "이 여행은 항상 쉽거나 전적으로 안전하지 않았다. 육지의 산적들, 바다의 해적들, 오만한 관리들, 거친 날씨, 시시때때로 부닥치는 위험, 언제나 뒤따라오는 적개심은 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된 여행은 어쩔 수 없이 꼭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바울은 항상 여행 중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동역자들 또는 그가 세운 교회 공동체의 신도들과 오직 편지로만 의사 전달을 했다는 오해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러 달 동안 끈기 있게 자기가 아는 각 공동체들과 함께 지냈다." "바울이 여러 교회 공동체들과 맺는 관계는 너무나 밀접해서, 이러한 관계를 표현하는 데 가장 친밀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는 신도들을 형제자매들이라 부르며 언제나 형제처럼 느꼈다."(90-5)


4장 바울과 베드로


"베드로와 바울이 안디옥에 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야고보로부터 경고가 내려왔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이방인 형제들과 함께 음식 규정에 어긋나는 음식을 먹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야고보가 내린 이 지시에 순응했다─이것이 바울을 격노하게 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주님의 식사(=성찬식의 음식)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형제들을 위한 통합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바울에게 단순히 주님의 성찬에서 부여되는 통합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안디옥 교회 안에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 속에 임재하셔서 그들이 그의 신비한 몸을 이루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의 임재에서 물러난 것은 예수를 배격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장벽을 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모든 민족에게 연장하는 것을 거부한 그 장벽과 관련이 있다."(128-30)


5장 바울과 여인들


"형제자매들의 처음 공동체들은 그 시대에 가장 평등한 집단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의 자매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들의 보호를 받았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숨기거나 축소시키려는 노력을 수세기에 걸쳐서 협력할 터였다. 그 예로 사람들이 (바울의 여성 동역자인) 유니아에게 한 것─역사에서 그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보다 더 극적인 것은 없다. 유니아는 배경상으로 바울의 친구이며, 감옥 동료이며, 동료 사도이며,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교에 들어온 사람이었다(롬 16:7)." "처음 공동체들에는 직제는 없이 단지 직능들만 있었고, 바울은 성령의 갖가지 은사를 받은 모든 사람의 동일한 위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세 개의 큰' 은사─사도, 예언자, 교사(고전 12:28)─중에서 사도들(apostoloi)을 목록의 첫번째로 넣었다. 유니아가 단지 사도들 가운데 포함된 것이 아니라, 뛰어난(episemoi) 사도들 가운데 포함된다는 것은 아주 높은 명예이다."(138-40)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쓰기를 그곳의 예배 모임에서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전 11:5), 바울은 예배 모임에 입고 올 옷을 두고 일어난 싸움을 말하고 있다." "남자는 하나님의 직접적 형상이기 때문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도 다닐 수 있다. 그런데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남자─의 형상이고, 남자 다음에 창조되었으며 남자의 조력자가 되도록 예정되었다(고전 11:7-9). 남자가 이러한 문화, 즉 유대 사회와 로마 사회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성차별주의의 갖가지 찌꺼기들을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자기와 함께 일하는 여자들에게 사도, 예언자, 봉사자(diakonoi)라는 여러 유형의 영예를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그 여자들은 그가 관여하는 공동체들 속에서 혹은 그녀들을 위해 제시하는 이상 사회에서 2등 시민이 아니다."(148-50)


6장 바울과 문제투성이 공동체들


# 바울의 서신 중재

1. 데살로니가전서 :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자신들을 분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훈계함

2. 갈라디아서 : 할례 받은 신도들과 할례 받지 않은 신도들 사이의 갈등을 훈계함

3. 빌립보서 :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들에게 훈계함

4. 빌레몬서 : 빌레몬에게 그의 노예 오네시모가 행한 잘못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주기를 요청함

5. 고린도서 : 교리, 훈육, 환상, 계급, 성, 인품 등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이에 대응함

6. 로마서 : 로마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관용과 화해의 정신을 베풀 것을 요청함


7장 바울과 유대인들


"바울의 시대에는 그리스도 교회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었다. 예수를 유대인들이 약속된 메시아로 보는 유대 사람들과 이에 더해서 예수를 유대인들이 약속된 메시아로 보는 이방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바울은 이 이방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끌어들이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이었다. 바울은 자기의 추종자들을 아무것도 없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성서로부터 가르쳤으며 그 메시아를 유대교 계약의 성취로 제시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 집단 사이에 하나의 연속체를 발견할 수 있다: 1.예수를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 2.예수를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 3.예수를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비유대인들. 여기에는 유대교적 맥락 밖에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즉 전체 유대인에게 대적하는 집단은 하나도 없다. 여호화에 대한 유대인의 이해와 분열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하나의 가족 싸움을 보고 있는 것이다."(187-8)


"바울을 읽는 데 가장 기본적인 것 중 하나는 그가 '유대인들'을 언급할 때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이다. 우리는 매번 바울을 오해한다. 즉 바울이 위에서 제시한 2번 집단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1번 집단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한다. 2번 집단의 유대인들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부과하려고 해서, 바울과 계속 부딪히면서 갈등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따라서 바울이 유대인들이 〈우리가 이방 민족들에게 구원받는 방법을 말해주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말할 때에, 그는 〈할례주의자들〉 같은 사람들 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의 음식 규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보기에 신도들의 단체 안에 임재해 계시는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을 죽이려 했던 것과 같다(과거에 바울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189-90)


"바울은 이방인들이 유대교 율법의 모든 의식적 요구사항을 준수할 의무는 없다 하더라도, 유대교의 율법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방계 형제들에게, 예수가 성취하신 약속들은 유대교의 약속들이고 그 약속은 율법의 보호 아래 전해 내려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했다.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롬 3:1-2).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이 예수가 성취한 복음의 보관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방인들은 유대인이라는 줄기에 접붙임 받은 것이다. 그 줄기가 없다면, 이방인들은 세계와 그것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상과 연결되지 못한 채 허공에 표류하고 있을 것이다. 스텐달이 적절히 지적하듯이, 이방인 형제들에게 내리는 (바울의) 이러한 주의사항은 그리스도교가 반셈주의가 되는 것에 대항하는 최초의 그리고 최선의 경고이다."(197-8)


"어떤 이들은 바울이 세상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 유대인들의 회개가 선행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줄기를 가지에다 접붙이는 것이다. 바울은 형제들이 유대인의 약속, 역사, 운명에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 그 반대로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바울은 하나님이 유대교의 율법을 폐하신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인류의 〈두 노선〉의 구원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이방 사람들은 예수를 믿게 될 것이고 유대 사람들은 자기들의 율법을 가지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이방 사람들만이 예수를 의지해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예수를 유대교의 계약 그리고 그 성취와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좀 후대 세대들은 예수에게 귀의하는 것을 하나의 분리된 종교, 즉 '신약성서'의 종교에 귀의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신약성서라는 것과, 유대 백성이 받은 약속 안에 들어 있는 구원 외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202-3)


8장 바울과 예루살렘


"예루살렘 교회를 상대로 한 바울의 지속적 투쟁은 예루살렘 교회와 일으킨 첫번째 충돌 때 합의한 것을 이행하려는 그의 열의 속에 명백히 드러난다─그때의 합의사항은 그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편지들의 상당 부분은 예루살렘을 위한 큰 자금을 모으는 일에 관련되어 있다. 이 일은 바울에게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었다. 바울은 그 모금을 유대에 있는 유대인 형제들에게 연결되는 하나의 가교로 보았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유대인 전체에 연결되는 가교일 것이다. 그는 그 모금을 거대한 규모로 조직하고 있었는데, 매년 예루살렘으로 유입되는 수백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막대한 성전세 납부와 견줄 만한 그러한 규모였다." "바울에게는 공동체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이러한 거래가 예수의 몸에 속한 각 지체의 상호성에 대한 물질적 표현, 바로 그것이었다."(207-11)


"왜 예루살렘 형제들은 자신들을 위해 모금한 막대한 헌금을 불쾌하게 여겼을까? 슈미탈스는 야고보와 그의 동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과─그들의 적개심은 머지않아 야고보 자신의 목숨까지 요구하게 될 것이었다─대별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바울 일행은 대부분 할례 받지 않은 형제들인 이방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야고보가 이들이 가지고 온 물질적 자금을 받는 것은 그의 처지를 훨씬 더 어렵게, 심지어는 변호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내에 선교 사업을 펼칠 마지막 기회를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때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의 기부금을 받는다면, 유대인들이 눈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과의 연대성을 천명하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 자체의 선교 가능성을 파괴하게 하는 위협이었다.〉"(216)


9장 바울과 로마제국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후로, 우리는 바울이 한 어떤 말도 들을 수가 없다. 그의 예루살렘 여행과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로마 여행에 대해서는 누가의 사도행전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제국의 시민이었다는 누가의 주장을 의심할 이유는 많이 있다. 바울은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다섯 번 매를 맞은 것 말고도, 로마 관리들에게 세 번 채찍질 당했다고 했다(고후 11:25)─그러나 로마 시민을 채찍질 하는 것은 위법이었다. 키케로가 베레스의 2차 공판에 부쳐 말했다: 〈로마 시민을 사슬로 매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로마 시민을 채찍질하는 것은 범죄다. 로마 시민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실지로 일종의 존속살해 행위이다.〉 이러한 보호장치에 몇몇 예외사항이 있었던 게 발견된다. 그렇지만 그런 예외를 바울의 경우에 적용하려면 여덟 가지 서로 다른 계기에(아마도 여덟 군데의 다른 지역에서) 예외적 상황이 발견되었다고 상상해야 할 것이다."(228-30)


"바울은 유대인 형제자매들을 위해 모금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었다. 바울은 야고보가 그 헌금을 기꺼이 혹은 고맙게 받아주지 않을까봐 걱정했다─누가는 그들을 만나게 했으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 논의조차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야고보가 기꺼이 받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분명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그 일은 누가의 의도를 난처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기록에서 그것을 삭제해야 했다. 그 대신 야고보가 유대인들의 적개심에 대해 바울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고보는 유대인들의 적의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바울이 성전에 가서 몸을 정화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이 조언 역시 역효과를 낸다. 바울이 성전을 더럽히고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체포당한 것은 성전 안에 있는 동안이었기 때문이다. 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신문하고 사형 선고를 받도록 로마인들에게 넘긴다."(232-3)


"로마 공동체의 불명예스러운 내부 분열과 거기서 생긴 가장 위대한 두 사도의 죽음에 대해 신도들 측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보존되어 있지 않다. 유일한 직접적 증거는 이교도 타키투스의 증언이다. 클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는 단지 간접적인 (신중한) 증거를 제공한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형제들 사이의 갈등을 처리하게 위해 돌아온 바울이 밀고자들과 네로의 더러운 거래의 희생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마지막 한 가지 점에서 자신의 거룩하신 스승을 따른 셈이 된다. 그 두 사람을 죽인 것은 종교였다." "두 사람이 네로 치하에서 죽었다면, 베드로는 거꾸로든 똑바로든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았으며, 누가가 바울에게 씌운 로마 시민 신분은 그의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갈기갈기 찢기거나 네로의 정원에 장식용 횃불로 사용되는 끔찍한 방식으로 죽었을 것이다."(242-3)


맺는 말 바울 잘못 읽기


"종교는 예수의 유산을 접수하여 입맛대로 주무른 것처럼 바울의 유산을 접수하여 입맛대로 주물렀다─왜냐하면 예수와 바울은 둘 다 종교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율법의 외형적 준수나, 성전이나 교회, 성직계급 또는 성직자들에 바탕을 두지 않은, 내면적 사랑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들은 둘 다, '종교'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 짐을 벗어던지려고 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사람들과 반목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비록 관습적인 정치의 밑바닥을 파고들거나, 관습적인 정치를 뛰어넘는 방법을 취하긴 했지만, 급진적인 평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었다. 그들은 부자들의 속을 꿰뚫어 보았다. 그들은 오직 두 가지 기본적인 도덕적 의무,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 보았다. 그들은 둘 다 풀어주는 자였지, 가두는 자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들은 갇혔다. 그래서 그들은 죽임을 당했다."(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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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역사와 만나다 -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세계 종교가 되기까지 2,000년의 이야기 비아 만나다 시리즈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지음, 양세규.윤혜림 옮김 / 비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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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광의 백성: 이스라엘


"헬레니즘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ies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었고, 15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에서 유대 문화는 평화롭게 헬레니즘 문화와 동화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98년 헬레니즘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Seleucid가 이스라엘을 정복하며 상황은 급변한다. 기원전 168년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대교를 완전히 뿌리뽑고자 했다. 안티오코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고 그리스 신들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eus의 주도로 봉기가 일어났고, 셀레우코스 왕조는 결국 유대교를 승인하고 성전을 다시 봉헌하도록 허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30년 후에는 마카베오의 핏줄인 하스몬 왕조Hasmonean가 유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리고 이 독립 상태는 기원전 63년 로마에 정복될 때까지 약 한 세기에 걸쳐 이어진다."(24)


# 전사前史 :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에게 멸망(기원전 587~586) -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정복(기원전 539)한 뒤 키루스 대왕이 유대인의 이스라엘 귀환을 허가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기원전 322) - 헬레니즘 & 후기 그리스 유대교 시대 시작


2 예수


"예수의 가르침에는 당대인의 시각에서 익숙한 요소와 낯선 요소가 결합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는 유대교 랍비들과 유사했다. 경전의 뜻을 사람들에게 풀이해 주었고, 남녀노소에게 율법의 핵심을 일깨워 주었다. 나아가 하느님이 결코 가난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저버리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고 계신다고 선포했다. 예수는 산파술의 대가였다. 진심이 담긴 질문이든, 적대적인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든, 그는 질문하는 이들에게 보완하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답하도록 유도하곤 했다. 그러나 예수가 한 활동의 핵심은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가르침은 긴박함으로 가득했다." "예수는 은유와 교훈, 그리고 비유를 통해 폭력을 배격했다. 그리고 사랑이 어떤 윤리 덕목보다 우월하며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함을 단호히 선포했다."(34)


3 메시아의 죽음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도발적인 인물이었던 이유는 그가 수많은 기적을 행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이유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율법을 자유롭게 해석한 것에 있었다. 기적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의 기적을 공관 복음과 같이 '타우마'(경이)로 표현하지 않고 '세메이온'(표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활동은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징조이자 표지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의 적의를 사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그의 대범한 율법 해석에 있었다. 예수는 마치 자신이 율법 위에 있는 존재인 양 율법을 대했다. 그는 결코 율법을 폐지할 마음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경직된 자세로 율법의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다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음을 비판했다. 무엇보다 그는 율법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정의를 외면하는 세태를 비판했다."(38-9)


4 이제 기뻐하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승리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죽음으로써 죽음에 매인 온 인류를 대신해 몸값을 치르시고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믿었다. 이러한 몸값 개념은 훗날 서방 교회에서 때로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로 치르는 속전贖錢과 같은 것으로 혼동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약성서와 초대 교회의 가르침에서 이 은유는 노예 소유자에게서 노예를 해방할 때 치르던 대가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는 죽음과 악의 세력이 노예 소유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 대가를 지불하고 죽음의 나라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불의하고 잔인하며 거짓과 죄로 물든 옛 악마의 제국을 타도했다고 확신했다. 하느님과 인간을 갈라놓은 모든 세력은 산산이 조각났다. 교회는 이러한 기쁜 소식을 로마 세계에 선포하기 시작했다."(53-5)


5 사도들의 교회


"바울은 그리스도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렸다고 확신했다. 바울이 이해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유대인과 그리스인, 할례받은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구별을 아무런 의미도 없게 만들어 버리는 새로운 보편주의였다. 바울은 그저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유대교 율법을 면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율법에 대한 집착 자체가 복음에 충실하지 못한 행위라고 여겼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상속자가 된 것은 모세의 율법에 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앙에 함께 참여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이 율법보다 훨씬 앞선다는 점을 지적했다. 계약은 율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이 계약에 의존한다." "이렇게 부활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족적 차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그리스도교는 지속되었다. 63-5)


6 초대 교회의 성장


"교회가 성장하자 권위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가왔다. 첫 세대 그리스도교인, 특히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자 그리스도교인들은 에피스코포스(주교, 본래 의미는 '감독자')와 프레스뷔테로스(사제, 본래 의미는 '원로')를 세웠다. 예루살렘에 세워진 첫 교회와의 역사적 연속성을 지켜나가면서 신학적·도덕적으로 올바른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돌보는 일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사실 이러한 제도는 이미 사도들의 시대에 세워진 것이었다. 교회가 뿌리를 내리는 곳마다 감독자들과 원로들은 보조자deacon들의 도움으로 새롭게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성찬례를 집전하며, 재화를 나누어 가난한 이들을 구호하고 공동체를 관리했다. 최초의 그리스도교인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지만, 그리스도교 첫 세대가 지나가자 사람들은 주교의 역할이 교회의 일치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70)


7 순교자의 시대


"황제의 명에 따라 제국 차원에서 교회를 말살하려는 시도가 3세기에 일어났다. 이러한 박해는 때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례 없는 강도로 단련된 신앙이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위협에 굴복하여 적잖은 배교자가 나타났음에도, 대다수 그리스도교인의 신앙은 고난을 통해 더욱더 굳건해졌다는 것이다.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는 로마로 압송되어 극심한 고문을 받고 끝내는 순교를 감내해야 했다. 이그나티오스는 각지에 흩어진 공동체에 편지를 보내며 자신이 곧 겪게 될 고난과 죽음이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과 더욱 깊이 연합하는 길이라고 전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순교하고자 했던 그리스도교인의 모습은 비단 고집뿐 아니라 용기와 맑은 영혼의 모범으로 당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86-7)


8 영지주의자


"영지주의를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서 자라난 유기적인 결과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는 사실상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그리스,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지의 종교가 뒤섞인 혼합물에 가까웠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뉴에이지' 영성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가령 나아세니파Naassene sect는 '그리스도'를 숭배했지만 이를 디오뉘소스와 아티스Attis 숭배와 혼합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를 자처하는 영지주의 종파들이 사용한 복음서, 사도들의 행적, 신비주의 문헌들을 비롯한 경전들은 그들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후대에 발명된 것으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와 어떤 믿을 만한 역사적 연결성도 없었다. 심지어 비그리스도교인들도 그 차이를 손쉽게 간파했다." "완전한 인간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영지주의는 특정 부류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는 있었지만 고통받는 온 인류를 향한 기쁜 소식은 아니었다."(90-6)


9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교회


"알렉산드리아는 도시의 창립부터 교육과 상위 문화의 명실상부한 중심지로 군림해 왔다. 최초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지배자들은 왕궁 근처, 브루케이온Brucheium이라고 부르는 구역에 모든 학문을 기리는 거대한 '무세이온'Museum과 도서관을 건설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적 권위와 영향력은 7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2세기 중엽, 최초의 그리스도교 고등교육기관이 설립된 것도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스토아학파 철학자 판타이노스Pantaenus가 설립한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판타이노스를 이어 탁월한 학자이자 그리스 철학과 문헌 해석의 대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와 오리게네스Origenes Adamantius가 차례로 교리문답 학교를 이끌었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학생들에게 지혜의 모든 길은 열려 있으므로 기하학과 천문뿐 아니라 고대 이교 문화의 모든 종교 및 철학 문헌을 탐독할 것을 강조했다."(100-2)


10 그리스도교 세계의 탄생: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는 이미 생전에 또 하나의 사도로 추앙받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제국을 통합하려는 그의 노력을 일종의 전 세계를 향한 복음 선포와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사랑과 자비의 모범은 아니었다. 그는 뜻을 관철하기 위해 군사력 동원하기를 망설이지 않았고, 326년에는 의붓아들 크리스푸스Crispus와 황후 파우스타Fausta의 죽음에 직접 개입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적어도 정책적인 면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을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부합하도록 운영하고자 나름대로 큰 노력을 기울였다. 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과부와 고아들을 돌볼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십자가형을 비롯한 몇몇 야만적 형벌을 폐지했다. 나아가 교회에 노예 해방을 공증할 수 있는 법률적 권한을 부여하는 등 노예 해방 절차를 완화하기도 했다."(113)


11 사막의 도시: 수도원 운동의 시작


"그리스도교 최초의 은수자들은 3세기 후반 이집트에서 나타났다. 처음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 험한 땅으로 향했던 사람들은 세상의 유혹뿐 아니라 적대와 박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 이후 수도자의 수는 교회가 사회적 명망을 얻는 것에 비례해 증가했다. 수도 생활을 향한 4세기와 5세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열정은 '사막이 도시가 되었다'는 말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 "수도 생활이 점차 인기를 끌자, 수도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조차 별다른 고민 없이 동참하게 되었다. 어떤 수도자들은 위대한 사막 교부들이 강조한 사랑의 지침에 따라 살기보다는, 이집트 도시 하층민의 거친 삶을 수도 생활이라는 미명 아래 사막에서 반복할 뿐이었다. 그들은 이교도와 그리스도교인의 대립, 교회 내의 교리 다툼 가운데 자신이 참되다고 믿는 것을 위해 서슴지 않고 파괴와 폭력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 모습은 결코 사막 교부들이 보여준 참된 경건의 이상을 가로막지 못했다."(119-21)


12 아르메니아와 인도의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 국가, 곧 대다수 거주민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국교가 그리스도교이거나 그리스도교였던 국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은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있던) 아르메니아다. (밀라노 칙령 약 13년 전인) 300년경 아르메니아 왕가가 세례를 받은 후 아르메니아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인도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은 대체로 지배자들로부터 환영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매우 번창하던 무역상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법률적 지위를 보장받았고, 인도의 카스트 사회에서 브라만 다음가는 높은 지위를 누리는 한편 상당히 광범위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기도 했다. 초창기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의 행렬은 통치 계층이 누리던 화려한 의전을 과시했다. 그만큼 힌두교 관습도 스며들어 수많은 그리스도교인이 고대 힌두교 관습을 따라 64세가 되면 출가하여 관상과 기도로 여생을 보내곤 했다."(129-34)


13 고대의 경이: 에티오피아의 그리스도교


"5세기 후반은 악숨 문명의 황금기였다. 그리스도교의 영향 아래 문학과 음악을 비롯한 모든 영역의 예술이 발전했고, 악숨 왕국의 상업과 군사력 또한 꾸준히 성장해 갔다. 왕국의 경계는 아라비아 반도 일부까지 확장되었다. 에티오피아의 무역업을 위협할 만한 홍해나 인도양의 세력은 없었다. 에티오피아 그리스도교가 독특한 전통을 서서히 형성하기 시작한 시점도 이 시기였을 것이다. 특히 에티오피아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관행을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준수하고 '정결하지 못한' 음식을 삼가며 할례를 행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까다로운 음식 규정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신자들은 한 해에 250일 동안 동물성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성서가 게즈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시점도 이 시기였다. 아직 그리스도교 정경이 확립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에티오피아 성서는 다른 전통에서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일부 문헌도 포함하여 총 81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143)


14 삼위일체 하느님: 최초의 공의회들


# 성자의 신적 위치에 관한 논의들

1. 양태론(modalism) : 한 분 하느님이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어떨 때는 성부로, 어떨 때는 성자로 존재한다.

2. 양자론(adoptionism) : 그리스도는 본래 인간이었는데 성부 하느님의 신적 아들로 입양되었다.

3. 종속론(theory of subordination) : 성부 하느님만이 완전한 신이며, 성자는 성부 하느님의 하위 표현, 성령은 성자의 하위 표현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레이오스(아리우스)Arius는 일종의 극단적 종속론에 해당하는 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 "아레이오스에 따르면 로고스, 즉 성자는 실제로 피조물이다. 다만 가장 높은 피조물이자,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하기에 앞서 존재했고 다른 피조물에 대해 '하느님'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높여진 존재다. 그러나 크게 논란이 된 아레이오스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그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아레이오스는 오직 성부 하느님만이 창조되지 않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첫 '보편 공의회'가 325년에 소집되었다. 여기서 아레이오스의 주장은 다시 한번 단죄되었고, 공통 신앙고백, 즉 첫 번째 형태의 '니케아 신경'이 채택되었다. 니케아 신경은 성자가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셨음을 분명히 하는 한편 성자를 성부와 '일체(호모우시오스)'이신 분으로 설명한다."(152-3)


15 교부들의 시대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두 신학자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로부터 교부 시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그리스 철학의 개념과 방법론을 통해 신앙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독자적인 그리스도교 철학의 초석을 놓는 데 이르렀다." "동방의 어느 신학자도, 그리스나 시리아의 어느 교부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서방 교회에 남긴 영향에 견줄 만한 것을 동방 교회에 남기지는 못했을 정도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에 거대한 흔적을 남겼다. 사실상 서방 신학의 개념 체계 전체, 즉 주요 용어와 구분, 주제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성찰,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이후 서방 신학이 지향하게 될 방향을 결정했다. 요컨대 서방 그리스도교는 사실상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Augustinian Christianity라고 할 수 있다."(161-3)


16 로마의 멸망


"5세기를 거치며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이탈리아 등 옛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는 만족들의 왕국이 새롭게 들어섰다. 428년 반달족이 로마령 북아프리카를 침공한 사건은 지중해 서방에서 옛 로마 제국의 질서가 결정적으로 붕괴하였음을 시사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를 차지한 게르만 왕들은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따르면서도 로마인들의 가톨릭 위계질서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아리우스파 게르만인들도 니케아 정통 신앙을 수용하게 되었다. 프랑크 살리족(프랑크 부족의 일파)의 왕이 된 클로도베쿠스Clovis가 481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건은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클로도베쿠스에게서 시작된 메로베우스Merovingian 왕조는 강력한 위세를 떨치게 된다. 그리고 200여 년 후 이를 계승한 카롤루스Carolingian 왕조는 로마 이후 중세를 거쳐 근대 초기까지 이르게 될 강대한 유럽 제국을 형성했다."(174-5)


17 서유럽의 수도원 운동과 고전 학문의 보존


베네딕투스를 비롯한 수도자들이 세운 수도원의 도서관과 필사실이 아니었다면 서유럽에서 로마의 멸망과 함께 일어난 문화적 쇠락은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수도원은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당연시되던 문명의 이기에서 점차 떨어져 나갔고,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도 희미해진 서방 교회가 고전고대 문화와 연결될 수 있게 해준 고리였다. 6세기 그리스도교 철학자 보에티우스Boethius는 남아 있는 편린들을 모아 점차 깊이 드리우고 있는 어둠에 맞서기로 했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주석하며 음악과 수학, 기하학과 천문학 교본을 집필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대한 계획을 품었던 보에티우스가 무고에 의해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Theodoric의 명으로 처형됨으로써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문화적으로 황폐해진 서방에서, 고전 학문과 문학을 보존하는 일은 수사들의 몫으로 남았다. 183)


18 그리스도교 세계의 등장


갈리아는 4세기 내내, 그리고 5세기에 접어들 무렵에도 서로마 제국에서 가장 문명화된 속주였으며, 브리타니아는 갈리아만큼 평화로운 곳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번영을 누리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제 서유럽에서 로마의 옛 질서는 종적을 감추었다. 로마의 폐허에는 그리스도교 유럽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태동한다. 옛 로마인의 영토에는 만족 왕국들이 들어섰다. 라틴인의 후손들은 이제 게르만 지배자를 섬기는 처지가 되었다. 아리우스파 왕들이 지배는 차라리 행운이었다. 이단자를 섬기는 것이 이교 지배자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읽는 사람 없는 책과 돌무더기로 변해 가는 기념비만이 남아, 한때 브리튼섬에서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발칸 반도에 이르던 로마의 희미한 기억을 전해줄 뿐이었다. 유럽은 곳곳에서 일어난 왕국들로 인해 갈라졌지만 교회라는 이름으로 위대한 일치에 이르렀다."(187)


19 정통 그리스도교의 형성


"칼케돈 공의회(451년) 이후 가톨릭 교회의 일치라는 이상은 붕괴하고 말았다. 단성론 계열 교회들, 곧 이집트의 콥트 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시리아와 아르메니아의 교회 등은 콘스탄티노플 및 로마 교회와 결별했다. 시리아 동부와 페르시아로 전파된 네스토리오스 계열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이들 교회는 '오리엔트 정교회'라는 집단 용어로 지칭되곤 한다. 교회 분열의 원인이 믿음 자체보다 언어에 있었다는 점이 커다란 비극이었다. '단성론자'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불가침한 인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네스토리오스를 따르던 이들, 이른바 '네스토리우스파'들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원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리엔트 교회'들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상통 관계를 단절한 것은 어느 정도는 황제의 권력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었다."(202-3)


20 통일 그리스도교 제국의 마지막 꿈


"529년부터 로마 법률을 세밀히 개정하여 성문화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시민법 대전』Corpus iuris civilis)이 편찬되었고 여러 법률적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또 법률 교육을 위한 교재들이 발간되었다. 이러한 법률 개혁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가 끝나는 565년까지 이어졌다. 개혁 대부분은 (반드시 이념적으로 정의하지는 않더라도) 법률을 '그리스도교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노예 해방은 보다 용이해졌고, 여성에게 더 큰 권리를 보장했으며, (대개 여성에게 매우 불리했던) 이혼을 매우 어렵게 했고, 어린이를 보호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또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크게 제한했다. 반면 비그리스도교인과 그리스도교 '이단자'와 관련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률들은 가혹했다." "황후 테오도라가 죽기 전까지 그의 치세는 괄목할 만한 문화적·정치적 창조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는 훗날 찬란한 그리스도교 비잔티움 문명의 초석이 된다."(210-1)


21 '동방의 교회' 네스토리우스파 이야기


"우리는 고대와 중세 교회를 서방의 로마와 동방의 비잔티움, 혹은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라는 커다란 두 축으로 일반화하곤 한다. 그리고 여기에 몇몇 흩어진 '오리엔트' 교회가 있었다고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중세 초, 가장 커다란, 적어도 가장 넓게 퍼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가톨릭 교회도, 비잔티움 교회도 아닌 동시리아 교회, 아시리아 교회, 더 간단하게는 '동방의 교회'Church of the East라고 불린,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였다." "오리엔트 교회에는 서유럽과 비잔티움 교회와 필적할 만한 독자적인 체계가 자리 잡았다. (시리아 동부의) 니시비스에 설립된 학교는 규율이 잡힌 하나의 수도 공동체로 운영되며 철학과 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니시비스와 준디샤푸르는 의술 연마의 중심지였다. 실제로 수 세기 동안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 수사들과 선교사들은 그들이 향하는 곳마다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215-7)


22 새로운 힘: 이슬람 세계의 등장


"(무함마드 사후) 칼리파 제국의 초창기는 경이로울 정도의 군사적 팽창의 시기였다. 수많은 아랍 부족들의 저항을 평정하고 난 칼리파 제국의 군사들은 놀라운 속도로, 오랜 세월 서로 간의 끊임없는 전쟁을 거치며 약화된 두 제국, 페르시아와 비잔티움을 유린하며 양편의 광활한 영토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661년부터 750년에 이르는 움마이야 왕조Ummayad 왕조 시기, 이슬람 제국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더 많은 부분을 정복했다. 710년 말 칼리파 제국의 영토는 모로코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대부분과 (스페인 북부의 작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장되었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갈리아 남부에 이르렀다. 움마이야 왕조를 계승한 압바스Abbasid 왕조는 시칠리아와 발레아루스 제도 등 지중해의 여러 섬을 수중에 넣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 세계는 백여 년 만에 옛 터전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며 파편 단위로 축소되고 말았다."(227-9)


23 카롤루스 대제


압바스 왕조의 위대한 이슬람 문명이 찬란한 꽃을 피우던 무렵, 그리스도교 서방에서는 새로운 제국이 태동하고 있었다. 비록 칼리파 제국만큼 오래 존속되지는 않았으나, 이 제국은 중세 서방 그리스도교의 정치, 법률, 관습과 유산의 기초가 된다. 바로 프랑크인들의 제국이었다. 당시 라틴어로는 카롤루스 마뉴스Carolus Magnus, 프랑스어로는 샤를마뉴Charlemagne라고 부르는 프랑크 왕 칼 대제Karl der Grosse가 창립하였기에 카롤루스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절정기 카롤루스 제국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피레네산맥에서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바이에른, 조공국을 포함한다면 모라비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포괄했다. 이는 로마에서 작센 북부에 이르는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롤루스의 후계자들은 옛 프랑크족의 관습을 따라 영토를 분할했고, 두 세대가 지나기 전에 제국은 서로 다른 왕국으로 분열했다. 233)


24 하느님의 얼굴: 성상 파괴 논쟁


"성상 파괴론자들은 성상 숭배가 우상 숭배를 금하는 십계명의 정신은 물론 고대 교회의 관행과 가르침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나아가 그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숭배하는 행위가 그리스도교 신심의 타락을 보여주는 표지와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 적절히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 다마스쿠스의 요안니스는 물질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선하다고 보는 것이 건강한 그리스도교적 입장임을 역설했다. 따라서 인간은 물질을 통해 창조주를 예배하고 흠숭adore할 수 있다." "요안니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완벽한 이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따라서 그리스도라는 하느님의 이콘을 인간의 손으로 다시 모방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참으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행동이라고 요안니스는 주장했다."(246-7)


25 프랑크와 비잔티움: 깊어지는 골


"9세기에 이르러 서방은 카롤루스 대제의 정치 개혁과 '카롤루스 왕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맞이했다. 마찬가지로 예술과 학문의 신선한 부흥이 비잔티움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또한 옛 보편 세계의 두 봉우리가 오래전부터 거의 명목상으로만 유지하던 일치를 더는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 시기이기도 했다." "제7차 공의회의 결의에 대한 라틴어 번역본은 (동방 교회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긴) '공경'과 '흠숭'을 구별하지 못했고, 서방인들은 변덕스러운 '그리스인'들이 어제까지만 해도 성상을 파괴하다 돌연 마음을 바꾸어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791년 카롤루스 대제는 이콘을 승인한 공의회의 결정을 비난하는 칙령을 공표했다. 이는 공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조차 동서방 사이에 균열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253-8)


26 슬라브인들의 개종


"8세기 초 비잔티움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의 분쟁을 야기한 것은 성상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동방과 서방은 교회의 관할권을 두고도 대립했다. 특히 문제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중 어떤 교회가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와 발칸 반도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것인지를 두고 불거졌다. 어떤 지역에 대한 교회의 관할권은 곧 그 지역에 대한 정치적 권한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는 양편 모두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9세기, 슬라브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에 따라 관할권 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261) "1238년 칭기즈 칸Genghis Khan의 손자 바투 칸Batu Khan이 이끄는 몽골군이 러시아를 침공하며 (그리스도교 러시아 역사의 황금기였던) 키예프 시대는 저물었다. 1240년, 키예프가 몽골군에 함락되었고, 거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이후 러시아 그리스도교 중심지는 몽골의 말발굽이 닿지 않는 곳이었으나 확연히 덜 문명화된 북쪽의 한 도시로 이동했다. 모스크바였다."(269)


27 대분열


"11세기 중반, 노르만인들의 침략에 시달리던 교황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내 비잔티움과의 동맹 가능성을 타진했다." "마찬가지로 노르만인들의 침공에 고심하던 콘스탄티노스 9세는 이미 교황과 동맹을 맺고자 시도한 바 있었고, 로마에 상당한 양보를 할 용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Michael Cerularius는 황제의 계획을 가로막고 나섰다." "라틴 교회에 대한 케룰라리오스의 맹렬한 비난에 1053년 훔베르투스는 「그리스인들의 중상모략 반박」이라는 매우 원색적인 제목을 단 글을 통해 대응했다. 양측의 반목은 결국 상호 '파문'으로 귀결되었고, 서서히 교회의 '대분열'로 나아갔다." "'대분열'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았다. 분열은 어떤 면에서는 (결정적인 시기로 알려진) 1054년보다 훨씬 앞선 시점에 일어나 있었으나,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시간이 흐른 후에 일어났다."(274-9)


28 초기 십자군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의 교회 회의는 '하느님의 평화'peace of God 운동을 시작했다. 하느님의 평화 운동은 사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자, 또 전쟁 중이더라도 여성이나 농민, 상인, 성직자를 비롯한 비전투원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파문으로 다스리겠다고 경고했다. 나아가 평화를 수호하겠다는 서약을 요구했다. 또 11세기의 한 교회 회의는 '하느님의 휴전'truce of God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연중 특정일에 무력 행위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 Ⅱ가 제1차 십자군 원정을 촉구한 클레르몽 공의회에서는 '하느님의 휴전'을 재차 강조하며 확장했다." "우르바누스의 호소는 동방에서 들려온 소식 곧 셀주크 투르크가 동방의 그리스도교인은 물론 성지를 방문하는 서방 그리스도교인들을 약탈하고 살해하며 노예로 삼는다는 소문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었다."(282)


29 비잔티움의 영광과 몰락


"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 사이의 갈등과 증오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이라는 비극(비극이라고 부르기조차 부끄러운 졸렬한 사건)에서 정점에 달한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 Ⅲ가 소집한 십자군은 성지에 닿기는커녕 방향을 바꾸어 무역 원정으로 변질되어 콘스탄티노플의 황위 다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203년 6월,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막대한 금전과 이집트 침공을 위한 병력 원조를 약속한) 알렉시오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에게는 십자군에게 치를 자금이 없었다." "이에 분개한 십자군은 1204년 4월 12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수녀들을 끌어내 강간했다. 교회들은 약탈당했고 제대는 훼손되었다. 십자군의 약탈로 콘스탄티노플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플은 이날부터 1261년까지 외세의 지배를 받았고, 라틴인 '총대주교'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를 관할했다."(299-301)


30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는 13세기경 만들어졌으나 제국 자체는 800년 성탄절 로마에서 거행된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을 통해 성립되었다. 교황은 콘스탄티노플 황제에게 바치던 충성을 프랑크 황제에게로 돌렸고, 새로운 제국을 서방 가톨릭 세계의 참되고 신성한 정체로 인정했다. 프랑크인의 군사적 보호가 필요했던 교황의 입장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조치였다." "물론 옛 로마 공화정에서 기원하는 칭호, 즉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의 대표자라는 고대의 신화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황제는 없었다. 그러나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씌운 사건, 그 시점에는 언뜻 보기에 법률적으로도 별 의미가 없었던 카롤루스의 대관식은 황제의 권력이 교회로부터 나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후 수백 년 간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다시금 확고히 하려는 황제와 이를 가로막는 교황 사이의 기나긴 다툼이 벌어졌다."(304)


31 중세 성기


"11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중세 성기中世 盛期, High Middle Age는 (비잔티움과 이슬람 동방과의 접촉이 늘어나며 촉진된) 창의적인 문화 도약의 시대였다." "중세 성기가 서유럽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가장 커다란 성과는 전례 없는 학문 기관인 대학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대학은 근본적으로 교회와 연결되어 있었고, 교황이나 지역 군주의 인가를 받아 설립되었다. 그럼에도 대학은 질문과 토론의 자유를 현저한 수준으로 보장했을 뿐 아니라 장려했다. 대학은 독자적으로 운영되었고, 대학이 위치한 지역 도시에 대해 법률적으로, 또한 재정적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나아가 각지에 설립된 대학들은 서로를 동등하게 받아들였고, 타 대학이 발급한 학위와 증명서를 인정했다. 그리고 어느 대학이든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므로 대학은 국경을 초월해 전체 유럽 단위의 지성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었다."(313-9)


32 이성과 미신: 중세의 두 얼굴


"영적(수도회), 지적(스콜라 철학) 운동의 시대였던 중세 후기의 두드러진 측면 가운데 하나는 마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이 곳곳에서 생겨난 것이다. 물론 중세에 대한 대중적 편견과 같이, 광기에 사로잡힌 이단 심문관들이 수천 명의 '마녀'들을 잡아 화형대로 보내지는 않았다. 우선 광적으로 마녀사냥에 나선 시대는 근대 초, 특히 16세기와 17세기였다. 게다가 '마녀'들을 박해하고 단죄한 것은 교회 법정이 아닌 세속 법정이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의 상황은 달랐다. 사탄을 숭배하는 모임이 실존한다는 믿음이 확산되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교회에도 스며들었다. 137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y XI는 교회 법정이 마녀에게 이단 혐의를 적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본래 마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마녀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악마의 소행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모든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329-30)


33 중세 후기 오리엔트 교회들


"이집트 그리스도교인들(콥트교도)의 관점에서 십자군의 시대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이슬람 통치자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콥트인들은 종종 은밀하게 십자군에 동조하거나 공모를 했을 것이라는 혐의를 사곤 했다. 물론 라틴인들 역시 이들 이집트의 '이단자'들에게 어떤 호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 "13세기 후반, 바그다드를 지배하던 몽골의 가잔 칸Ghazan Khan이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이자 동시리아 그리스도교 공동체(네스토리우스파)는 곧바로 맹렬한 박해에 직면했다. 1369년 몽골 원元 제국을 멸망시키며 중원의 패권을 쥔 명明나라 역시 외국 종교를 근절하기 위한 조직적 정책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고, 결국 중국의 시리아 교회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소멸했다. 또 중앙아시아에서는 (근대 이전 시기의 가장 잔혹한 학살자) 티무르Timur가 곳곳을 유린하며 동시리아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말살해 버리고 말았다."(335-42)


34 비잔티움의 황혼


"14세기 내내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황제들은 불가피한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쉴 새 없이 전력을 기울였다. 반란, 지방 세력의 불복종, 용병에 대한 지나친 의존, 투르크인들의 습격, 경제적 쇠퇴, 소아시아에서 점점 세력을 키우고 있는 오스만인들, 내란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혼란과 시련이 비잔티움 정치의 거듭되는 실상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만족들의 위협도 도사리고 있었다." "여기에 옆친 데 덮친 격으로 1347년 흑사병이 콘스탄티노플과 비잔티움 동부 지역을 강타했고, 비잔티움의 인구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제국의 교역은 이탈리아인들의 배만 불릴 뿐, 비잔티움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르비아인들과 투르크인들과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로마는 원조의 대가로 서방 교회에 대한 동방 교회의 복종을 요구했다." "1373년에는 투르크인들이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장악하고는 그들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347-8)


35 최후의 황제


"서로마 제국은 5세기에 멸망하였으나 법률적, 문화적, 정치적 제도로서의 로마 제국은 동방에서 천년 가까이 존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도읍,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플은 어느덧 화약과 대포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은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도시이자 헬레니즘 문화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나 지정학적 위치 탓에 이곳이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랍인, 슬라브인, 투르크인, 불가르인, 몽골인 등 너무 많은 적이 콘스탄티노플을 에워싸고 있었다. 7세기 이후 비잔티움은 강력한 이슬람 세력과 쉴 새 없는 싸움을 이어갔다. 이윽고 오스만 제국이 부상하자, 비잔티움은 이제 더는 물리칠 수 없고, 무한정 저항을 이어갈 수도 없는 적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1453년 마침내 오스만 투르크의 총공세에 로마 최후의 황제가 스러진 후 40년 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다."(355-6)


36 르네상스 그리스도교 사상


"15세기 그리스도교 동방의 문명이 저물어 갈 무렵, 그리스도교 서방 문명은 위대한 '르네상스'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서유럽 르네상스는 동방 비잔티움 문명의 유산에 빚진 것이었다. 비잔티움 세계가 간직해 온 여러 문헌은 학자들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수백 년 동안 꾸준히 서유럽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근대의 여명을 알리는 새로운 '인문주의'가 등장한 배경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다. 새로운 상공업 계층의 등장, 전반적인 경제 상황의 개선, 그리고 그 결과로 기존에 지주와 교회가 독점하던 부가 세속 사회의 다양한 영역으로 전해진 것, 점차 고전 문헌의 입수가 수월해진 것 등 이에 관한 설명은 수없이 많다. 그 결과 이 시대 고대 세계의 '잃어버린 지혜'를 되찾고자 하는 열정이 이탈리아에서 새롭게 피어올라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듯 '세속적인' 운동만은 아니었다."(365-6)


37 스페인과 이단 심문


"스페인은 수백 년간 그리스도교인과 유대인, 무슬림이 어우러지며 지내던, 유럽에서 가장 다양한 색채를 띤 곳이었다. 세 종교가 언제나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평온하고 관용적인 화합을 이루곤 했다. 그러나 강력한 통일 국가를 꿈꾸던 페르디난트의 야망은 결국 종교의 일치를 강요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페르디난트가 도입한 무기는 이단 심문inquisition이었다." "민족 국가이자 제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종교, 인종의 일치를 강요하며 형성된 '순혈'limpienza de sangre이라는 이념은 수백 년 간 그리스도교인과 유대인, 무슬림 가운데 통혼이 이루어지던 스페인의 문화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꾸었다. 게다가 유대인과 무슬림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더라도 '순수한' 스페인인에게 부여되는 존엄과 권리를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인이었기에, 이단 심문의 대상이 되었다."(375-7)


# 무분별한 인종주의를 배격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1534년 파리에서 예수회를 조직한다. (1540년 교황 인가)


38 종교개혁의 시작


"11세기를 기점으로 가톨릭 교회가 가진 권력가 부는 계속하여 증가했다. 교회는 각국에 막대한 영지를 소유했고 군주와 동맹을 맺었다. 신앙 문제에는 어떤 관심도 동기도 없던 수많은 사람이 교황좌를 노렸다. 타락한 교황들이 교회를 좌우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15세기 후반, 신심 깊은 사람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중간 계층이 꾸준히 성장하여 어느 정도 재산도 있으며 참정권을 가진 다수의 교육 받은 가톨릭 신자들이 형성된 것도 개혁에 유리한 요인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유럽에서 근대 민족 국가가 탄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각국 군주들은 서로 자신이 '절대' 권력을 가지며 자신의 국가에 불가침의 주권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상호 책임 아래 서로의 영향력이 겹치고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더 높은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옛 '봉건' 질서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유럽의 국왕들과 제후들은 여전히 국정에 간섭하던 두 초국가적 권력, 제국과 교회를 거부하기 시작했다."(383-4)


39 종교개혁의 전개


"루터의 글을 통해 종교개혁 운동이 원칙은 확고해졌다. 종교개혁은 '만인 사제직',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전적인 의존, 구원을 향한 대가 없는 선택, 타락한 인간의 (하느님 혹은 악마를 향한) '노예 의지', '그리스도교인의 자유',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고해 성사와 '희생제로서의 미사', 성직자의 독신 등 구원에 도움이 되기 위해 가톨릭 교회가 하는 행위 일체를 부정했다." "또 하나의 '주류 개혁' 전통인 칼뱅 신학의 요소들은 여러 측면에서 전형적인 프로테스탄트 시각을 드러낸다. 성서의 고유한 권위, 철저하게 대가 없이 주어지는 칭의, 구원을 얻는 데 있어 인간 의지의 무력함, 단식과 보속의 무익함, 예정 등이 그것이다. 예정에 있어서 칼뱅이 강조점은 루터와 달랐다. 칼뱅은 이전과 당대의 어떤 신학자들보다도 하느님의 전적 주권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신비를 설명했다."(395-9)


# 칭의(稱義, justification) : '의롭게 됨' 또는 '의롭다고 인정 받음'을 뜻하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을 말한다.


40 재세례파와 가톨릭 종교개혁


"대다수의 '급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기에 '재세례파'anabaptists라고 불렸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성 있는 회심의 징표이므로, 오직 성인만이 받을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정부 모두를 반대하는 것이었기에, 재세례파는 양편 모두에게서 박해를 받았다."(403-4) "가톨릭 내부 개혁의 출발점이 된 트리엔트 공의회(1545)는 면벌부의 판매를 금지하고 주교와 사제에게는 적절한 사목적 의무를 부과했다. 나아가 정경을 확정하고 사제가 되기 위해 받아야 할 교육을 구체화했다. 한편 이와 나란히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비판한 여러 교리, 이를테면 연옥이나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에서 ('공재'가 아닌 '화체'의 방식으로 임하는) 그리스도의 실재, 일곱 성사, 교황의 수위권 등을 재확인했다. 무엇보다 공의회는 루터의 칭의 사상을 거부하며, 구원 활동에 있어 인간 자유의 유효성을 단언했다."(411-2)


# 공재와 화체

1. 공재설consubstantiation :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의 실체에 함께 존재한다는 주장

2. 화체설transubstantiation :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한다는 주장


41 분열과 전쟁: 근대 초 유럽


"정치적 원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종교개혁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이 교회 개혁을 진정으로 갈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혁의 명분이 군주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았더라면 개혁은 가시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국가 단위의 조직으로 통치자에게 종속되어 있었고, 그렇게 교황과 황제 모두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실제로 잉글랜드의 경우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 교회와 결별했다기보다는, 로마와 결별한 결과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유럽의 근대 초기는 극도로 폭력적인 시대였다. 근대 주권국가는 전쟁과 반란, 학살의 도가니 가운데 구축되었다. 새롭게 일어나던 종교개혁 운동이 이러한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교파의 분열을 철저히 이용했다. 즉 근대 초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종교 전쟁'은 아니었던 것이다."(415-6)


42 식민과 선교


"이슬람 칼리파 제국의 부상과 함께 그 터전을 대부분 상실한 그리스도교 세계는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경계 안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는 유럽인들이 종교였다. 유럽을 제외하면 남방과 동방의 몇몇 고립된 지역들이 그리스도교 세계 외곽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적대적인 이웃 사이에 에워싸인 채 사면초가에 몰린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16세기에서 17세기 그리스도교는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진정한 의미의 세계 종교로 자리매김했다. 한편으로 이러한 확장은 새로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아 강제로 그리스도교 세계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를 통해 포교하는 방식으로도 그리스도교 세계는 확장되었다. 당시 이러한 선교를 주도했던 이들은 예수회 수사들이었다. 특히 1582년부터 시작된 예수회의 중국 선교는 동서양 학문 및 문화 교류의 모범이라고 할 만했다."(427)


43 교회와 과학자


"그리스도교 시대가 동트며 당시 번성하던 그리스의 과학이 (학문과 이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반감으로)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는 (엄밀한 역사 연구가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상당한 인기를 끄는 신화 가운데 하나다. 많은 이는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가 과학 및 학문을 적대시하였으며, 이를 로마에서 이루어진 갈릴레오 재판이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리고 과학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교회의 권력이 쇠퇴한 시점 이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갈릴레오에 대한 이단 심문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이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과학의 관계를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교회는 언제나 과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곤 했다. 또 예수회는 당대의 가장 독창적인 과학자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를 심문한 일로 로마 교회가 당한 망신은 오늘날까지 온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437-44)


44 이신론, 계몽주의, 혁명


"16세기 중반 처음 등장한 이신론은 17세기 초부터 18세기 말까지 가장 큰 인기를 누린 종교철학의 형태였다. 이신론의 형태는 다양했으나, 내용은 대부분 같았다. 이신론자들은 유치한 신화, '계시'에 바탕을 둔 진리, 난해한 형이상학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민족과 문화에서 통용될 수 있는 자연 종교natural religion, 다시 말해 '합리적인' 종교,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를 추구했다." "이신론의 흥망성쇠는 전통적으로 '계몽주의'Enlightment라고 부르는 더 큰 문화 운동 가운데 일어났다." "대다수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신이라는 개념을 폐기해야만, 그리고 모든 종교를 거부해야만 참된 계몽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이 보기에 신은 경험적 증거를 간과한 채 인간이 만들어 낸 비이성적인 첨가물이었으며, 종교는 성직자 계층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공상과도 같은 신념 위에 세워진 제도였다."(448-51)


45 근대 초기의 동방 정교회


"근대 초 동방 정교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782년 『필로칼리아』Philokalia('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출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동방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문헌들을 모아놓은 선집으로, 아토스산의 두 수사 성산聖山의 니코데모스Nicodemus of the Holy Mountaion와 코린토스의 마카리오스Macarius of Corinth의 작품이다. 책은 포괄적인 동시에 이전에는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많은 글을 발굴해냈다는 점에서 각광을 받았다. 에바그리오스 폰티코스의 명예를 어느 정도 회복해주었다는 점도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오리게네스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에바그리오스의 저작들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잊혀 있었으나, 그대로 사장되기에 그가 남긴 영성 생활의 지혜는 너무나 탁월하고 동방 그리스도교의 관상 전통에 중요했다." "그러나 『필로칼리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정교회 세계 전체에 걸쳐 일어난 신앙 회복 운동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457-8)


46 19세기: 의심의 시대


"찰스 다윈이 1859년에 출간한 『종의 기원』만큼 전통적인 신앙에 커다란 타격을 입힌 저작은 없다. 이 책에서 다윈은 처음으로 진화, 곧 광대한 시간에 걸쳐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으로 이루어진 성취의 개념에 관해 이야기했다." "19세기에는 '탈종교', 혹은 '유물론' 사상을 주장한 위대한 학파가 탄생한 시기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자아가 영원한 본성을 지닌 영혼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 사회적 충동의 복잡한 혼합물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인간관은 근본적으로 다윈주의적이다." "사회적, 혹은 정치적 선善에 대한 전망을 유물론적 관점으로 분명하게 제시하려 한 19세기 유럽의 이론가 중 가장 막대한 영향력을 남긴 이는 단연 칼 마르크스다." "정치, 문화, 사회를 변증법적 유물론의 창조물로 보는 그의 시각, 역사를 이끄는 힘은 계급 투쟁과 경제적 동기라는 그의 견해는 그를 비판하는 이들에게조차 깊은 영향을 미쳤다."(469-72)


47 19세기: 뜨거운 신앙의 시대


"19세기 개신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움직임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해 곧 북미로 넘어간 일종의 경건 운동, 복음주의evangelicalism의 가파른 성장이다. 복음주의 운동이 강조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성화를 '개인'이 체험하고 회심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복음주의 운동의 특징은 인상적일 정도로 열정적인 형태의 예배였다. 복음주의 운동을 이끄는 이들은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개인의 확신에 입각한 기도의 삶과 복음을 전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동방 정교회에서는 근대 서유럽의 권위주의와 유물론, 영적 빈곤에 대한 대안으로 슬라브 문화의 통일과 정교회 전통의 창조적 회복을 제안하는 '친슬라브주의'Slavophilism라는 흐름이 등장했다. 정치 영역에서 친슬라브주의자들은 대부분 농노의 해방, 사형제 폐지 및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고 의회가 차르를 견제하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자유주의 성향을 보였다."(477-82)


48 20세기 미국


"19세기 미국인 다수가 열광하며 지지한 개신교 복음주의는 단일 교파가 아니었다. 복음주의는 무수한 변이를 거쳤고, 1920년대에는 복음주의로부터 이른바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는 새로운 형태가 등장했다." "여기서 '근본'은 참된 그리스도교를 정의하는 다섯 가지의 기본 '명제', 곧 그리스도의 대속, 기적의 실재, 동정녀 잉태,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성서 무오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최후의 심판이 포함되기도 한다." "미국 복음주의의 발전에 견줄 만한 중요한 흐름, 그리고 전 세계적 차원에서 보자면 더 중요한 흐름은 1910년대에 태동한 '오순절'Pentecostal 운동이다. 오순절 운동은 ('물'로 받는 세례와는 구별되는) '성령에 의한' 두 번째 세례를 믿는 등 다양한 형태의 '열광적' 신앙 운동이다. 이 운동에 동참한 이들은 1세기 교회가 체험했던 영적 '카리스마' 혹은 능력, 즉 방언과 기적처럼 일어나는 치유, 예언, 악귀를 내쫓는 힘 등을 중시한다."(490-1)


49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세기


"'계몽'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많은 사람은 세상이 '미신'과 성직자들의 정략政略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사회, 평화롭고 조화를 이루며 현명하게 움직이는 사회로 진화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다소 어두운 관점이 등장해 이따금 제동을 걸기는 했지만 좀 더 큰 맥락에서 19세기에 등장한 세계가 진보한다는 확신, 세속 사회는 합리적인 과학으로 종교의 악한 영향력을 정화하거나 제거해 '신앙의 시대'보다 훨씬 더 정의롭고 평화로우며 인간다운 사회로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이 무색하게 20세기 말까지 수많은 전쟁이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규모로 일어났다." "서양에서 '제도 종교'의 힘은 눈에 띌 정도로 쇠퇴했다. 그러나 조직적인 '비종교', 혹은 '반종교'는 제도 종교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살인적인 역사적 세력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다."(499-500)


50 20세기에서 21세기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새로운 출발


"전임 교황 요한 23세John XXIII가 1962년에 소집해서 1963년 바오로 6세Paul VI가 교황직에 올랐을 때 이미 진행 중이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현대 로마 가톨릭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커다란 변혁을 이룬 사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부분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7세기부터 가톨릭 신학을 지배한 (다소 무미건조한) '신스콜라주의'neo-scholaticism에서 벗어나 교부 시대와 중세 초기에서 대안을 찾던 가톨릭 학자들의 수십 년에 걸친 노력, 이른바 원천을 향한ad fontes 노정을 지향하는 신학적 회귀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측면에서 공의회는 전례 형식(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전례를 진행하며 평신도 참여가 늘어남), 교회 질서(지역 주교의 위엄과 권위에 대한 강조를 회복함), 해석 방법론(근대 성서학을 긍정함),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 더 나아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 모두 급진적인 개편을 단행했다."(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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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화폐
자크 르 고프 지음, 안수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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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로마 제국의 유산과 기독교화의 유산


"중세 초기에는 화폐, 다시 말해 주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화폐에 관련된 로마 사람들의 관습을 유지하다가 이어 모방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화폐가 주조되었고, 솔리두스 금화가 교역의 주축 통화가 되었다. 하지만 생산과 소비, 무역의 감소에 적응하기 위해 곧 트리엔스 금화, 그러니까 솔리두스 금화 가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화가 주요 통화가 되었다. 감소하긴 했지만 고대 로마 화폐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사용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야만족'으로 보인 이방인들은 로마 사회로 들어와 기독교 국가의 구성원이 되기 전에 (갈리아족을 제외하고는) 화폐를 주조하지 않았다. 그러한 화폐는 로마 제국에서 탄생한 모든 영토에서 유통되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 단일성을 보존하는 진귀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실례로 중세 초기에 명목 화폐로 널리 이용된 것은 로마 제국의 은화인 데나리우스, 즉 드니에였다."(19-21)


2 샤를마뉴 대제 시대에서 봉건시대까지


"카롤링거 왕조에서 봉건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화폐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화폐 제조에 사용된 금속 광산이 더 활발하게 발견되거나 개발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가장 큰 은광인 푸아티에의 멜 광산을 집약적으로 개발함으로써 화폐 주조가 증가하기도 했다." "봉건제가 출현하고 무엇보다 마르크 블로크가 말한 제2기 봉건시대로 나아감으로써 서구 기독교 사회는 사실상 화폐가 확산되는 태동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카롤링거 제국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쇠퇴했기 때문에 주조 작업이며 주조 작업으로 얻는 수익이 세분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샤를마뉴 대제의 개혁 조치로 결국 중세 초기의 여러 화폐는 사라졌지만 황제가 화폐 주조를 독점한 기간을 짧았다. 9세기부터 백작들이 황제의 독점권을 찬탈했으며 백작이 활개친 중세에는 여기저기서 거침없이 화폐를 주조했다. 그렇게 화폐 주조자들이 분산된 상황은 봉건제의 맹렬한 기세와 연관되어 있었다."(25-6)


3 12~13세기의 전환기에 비상하는 주화와 화폐


"상업은 얼마간 여러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는 기독교 사회에 큰 수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의 영향으로, 소규모 지역 시장을 넘어 대규모 정기 시장의 개설과 국제적인 활동으로 발전했다." "통화 확대의 또 다른 원인은 도시의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원자재 구매와 물품 판매를 촉진하는 수공업이 발전하고, 임금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더 커짐으로써 도시에서 화폐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도시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됨으로써 사회계급이 분화되어 부유한 부르주아와 가난한 시민으로 나뉘었다. 십자군 원정에 적지 않은 자금을 댄 영주의 중요성은 약화된 반면 부르주아는 더 부유해졌다." "화폐는 도시의 각종 조합에서 접착제 역할을 했다. 도시에서는 길드, 번성한 도시와 상인들 사이에서는 상인 조합이 창설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사회의 일부 지역에서는 도시와 상업이 발전했으며, 해당 지역은 성장이 더디고 화폐 유통이 활발하지 않던 지역들과 달리 더 많은 부와 힘을 얻었고 외양도 화려해졌다."(30-2)


4 13세기, 찬란한 화폐의 시대


"화폐는 (도시의 납세 재정과 곡물 수요를 책임지면서) 중세 도시에서 점점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부르주아의 첫 번째 야심이 자유를 얻고 무엇보다 스스로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면 다른 주요 관심사는 화폐와 관련된 것이었다." "12세기 말부터 시민들은 시간의 가치에 점점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시간은 곧 돈이라는 관념이 나타난 것이다. 무엇보다 13세기는 수작업을 포함하여 노동의 경제적 가치, 바로 노동의 화폐가치를 점점 더 깊이 인식했다. 도시의 임금 노동자가 확대된 상황이 이와 관련돼 있었다.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복음서(누가복음 10장 7절)의 이 구절이 점점 더 많이 인용되었다. 그렇지만 도시 공동체가 결코 얻지 못할 한 가지 권리가 있었으니 바로 영주와 제후가 움켜쥔 화폐 주조권이었다. 하지만 경제를 원활하게 운영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층은 13세기에 영주에게 자기네 화폐의 안정성을 보증해달라고 요구한다."(49, 54)


5 상업 혁명이 일어난 13세기의 교역, 은, 화폐


은광 개발은 당시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상업에 부응해 주화 보급을 늘려주었다. "13세기에 동방세계에 수출된 주요 화폐는 영국의 스털링, 프랑스의 투르에서 주조된 드니에, 베네치아의 그로소였다. 이탈리아인들이 유럽에서 수출하고 재수출하는 동방세계의 상품 수량이 늘어난 결과 통화량도 증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구사회의 화폐는 아주 먼 거리를 오가며 동방세계의 각종 물품을 교역하는 데 쓰였다. 이를테면 러시아 모피, 소아시아 명반같이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서 취득한 것들을 거래했지만, 긴 13세기 동안 무역상들은 중국에 도달해 비단을, 인도 동부에 이르러 향신료와 보석을, 그리고 페르시아 만에 도달해 진주를 거래했다. 여기서 13세기의 서구사회에서 혹은 서구사회를 통해 화폐가 대대적으로 확산된 이유 중 하나가 서구사회, 영주 사회 그리고 특히나 도시 사회에서 상류층 부르주아 계급의 사치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62-3)


"(은화의 확대, 금화의 재등장과 더불어 세 번째 층위의 화폐로 등장한) 낮은 가치의 화폐, 즉 저품위 보조화폐는 특히 도시에서 일상생활의 갖가지 필요를 충족시켰다. 그러한 보조화폐는 종종 '검은 돈'이라 불렸다. 그렇게 해서 베네치아에서는 엔리코 단돌로 총독이 13세기 초에 2분의 1데나로에 해당하는 작은 동전을 주조했다. 우리의 긴 13세기 말에 피렌체에서 가장 빈번하게 주조된 화폐는 콰트리노, 혹은 일반적으로 둥그스름한 빵 하나의 가격에 해당하는 4데나로짜리 동전이었다. 통상 이 작은 주화로 자선을 베풀기도 했다. 13세기에는 자연스러운 사회변화에 의해, 그와 동시에 탁발수도회의 가르침과 설교의 영향을 받아 자선 행위가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왕령으로 파리에서 주조된 드니에는 '자선 행위의 드니에'가 되었다." "가치가 낮은 주화는 점점 더 중요해졌는데, 이는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상당히 소소한 거래에까지 화폐 사용이 확대되었음을 입증한다."(73)


6 화폐와 여러 정체의 탄생


"시기상 가장 앞서고 압도적인 체제이자 화폐를 제일 많이 조달받은 것은 교회, 다시 말해 교황청의 정체였다. 교황청은 토지에서 그리고 교황의 직접 지배를 받는 도시들에서 나오는 소득을 거두었으며 이러한 수입은 일명 성 베드로의 재산이었다. 교황청은 한편으로 기독교 사회 전역에서 특별한 십일조를 받았다. 사실 십일조는 기독교 사회 전역에서 성직자들이 생계를 보장하는 데, 예배당을 유지하는 데,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각종 경비가 증가하면서 교황청에 십일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교황청은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의 계율 32에서 의무로 부과되는 십일조의 성격을 상기시켰다. 교황청에 지불해야 할 최소한도의 금액도 정해두었다. 교황청은 13세기에 구조조정을 실시했으며 생계의 원천인 여러 세원(稅源)은 교황과 교황청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교황제의 재무와 세제 틀은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렀던 14세기에 최적화되었다."(80-1)


"13세기에 기독교를 믿는 주요 군주정에서 왕의 재무를 관리하는 특별 기구가 발달했다. 대개 그렇듯이 영국 군주정이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영국의 군주정은 노르망디 공국에서 탄생한 선구적인 기구를 도입해 세련되게 다듬었다. 그렇게 해서 12세기부터 플랜태저넷 가 출신의 헨리 2세(1154~1189)는 어떤 관리 기구를 마련했다. 정당하게도 그에게는 '유럽의 첫 번째 화폐 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헨리 2세의 자문관이었던 솔즈베리의 존은 《폴리크라티쿠스》에서 군주정의 세제 문제를 다루었다. 그에게는 경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가 관건이었다. 당시 경제에 관한 관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왕국의 모든 백성의 이익을 위해 화폐 유통을 보장하고 감독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통치자의 부가 아니라 모든 백성의 이익을 위해 올바르게 통치하는 것이었다. 군주정의 세제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 윤리의 문제와 연관돼 있었다."(81-2)


7 대출, 부채, 고리대금


"13세기는 화폐의 사악한 본질에 새로운 모습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 모습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차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3세기 지성사의 대발견이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뒤쫓아 〈돈은 새끼를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고리대금은 자연에 반하는 죄이기도 했다. 자연은 이제 스콜라 신학자들이 보기에 신의 창조물이었으니까 말이다. 당시 고리대금업자의 운명은 어떠했는가? 돈이 가득한 주머니를 목에 걸고 그를 아래로 끌고 가는 모습이 새겨진 여러 조각이 보여주듯이 구원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며 지옥의 사냥감이었다. 이를테면 5세기에 교황 레오 1세(대大레오)가 이미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리대금의 수익금은 곧 영혼의 죽음이다.〉 1179년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고리대금업자는 기독교 사회의 도시에 있는 이방인들이며 그들에게는 기독교식 장례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98-9)


"실뱅 피롱은 resicum이라는 용어가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어떻게 지중해 지역 공증인과 상인들에게서 나타났는지 잘 보여주었다. 이 단어는 카탈루냐 페냐포르트 출신으로 도미니쿠스 회 수도사인 라이문도의 중개로 스콜라 신학자들의 어휘와 사고 속에 들어왔다. 그는 '해상 대출'에 resicum을 사용했다. 중세인들은 오랫동안 바다를 몹시 두려워했다. 육상 여정이 통행세를 거두어들이려는 영주들에게 가로막히고, 특히 숲 속을 지날 때는 도적들의 위협을 받긴 했지만, 여러 그림과 봉헌물에 나와 있듯이 바다는 실로 위험한 곳이었다. 바다는 상인의 생명이나 상품의 무사 배달을 위협했으며, 해적보다 조난 위험 때문에 그 보상으로 이자 징수 및 고리대금 행위가 정당화되었다. 이자를 거둬들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이유는 대출 기간에 대부금으로 직접 이익을 취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 돈은 노동의 대가였다."(111-2)


8 새로운 부와 가난


"새로운 부자들은 기독교 사회의 유력자들 가운데 자리 잡았다. 새로운 부에 대면하여 새로운 가난이 그들의 활동을 탐욕과 악덕이 아니라 내가 언급한 '카리타스'와 미덕의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부에 새로운 가난이 대립되었다. 이 가난은 더이상 원죄의 결과도 욥의 가난도 아니었고, 기독교의 영성에서 예수상의 변화와 관련해 가치가 부여된 가난이었다. 예수는 점점 초기 기독교 교리에서 구현된 옛 모습, 다시 살아난 신인(神人)이자 죽음의 위대한 정복자라는 옛 모습에서 벗어났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헐벗음으로 상징되는 가난의 모델을 제공한 신인이 되었다. 1000년 이후 초기 기독교 사상의 사도들에게 돌아가자는 모든 움직임을 강력하게 선동한 것은 근원 회귀에 의한 갱신, '벌거벗은 채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따르자는 권고였다. 즉, 감내하는 가난과 자발적인 가난이 있었다."(115-7)


"무엇보다 탁발수도회, 주로 프란체스코 회는 자발적인 가난을 통해 새로운 부를 가난한 사람들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영적·사회적 수단을 찾아내려 했다. 13세기에 교회와 힘있는 속인들은 수도회의 영향 아래 한 가지 특별한 활동으로 새로운 부와 투쟁하고 새로운 가난을 장려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언제나 우선 교회의 주된 사업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그럴 만한 재력과 사회적 지위가 있었던 기독교인들의 활동이었다. 바로 자선사업인데, 중세에는 일반적으로 자비로운 일이라고 했다. 인간의 자비의 기초가 신의 자비였다. 이러한 자비는 특히 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틀림없이 다시 살아나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13세기에는 기부에 의한 병원 설립과 운영이 특히 발달했다." "자선 행위의 진화는 프란체스코 회가 겪었던 것처럼 새로운 부와 가난의 등장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118-20)


9 13~14세기, 위기에 처한 화폐


"중세의 여러 화폐는, 일반적으로 화폐 주조권과 유통권을 가진 공권력이 정해진 법정 시세에 따라 유통시켰다. 그러니까 영주, 주교, 그리고 제후와 왕이 그런 공권력이었다. 이러한 법정 시세 말고도 업계가 정한, 부차적이고 유동적인 '거래상의' 혹은 '자발적인' 시세가 존재했다. 오랫동안 이 이중 시세는 상당히 안정된 채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13세기 말에 화폐 주조권을 가진 권력은 한편으로는 통화 단위로, 또 한편으로는 금속 무게로 표현되는 교환 가치를 변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동은 화폐 유통을 경제 현실에 맞추기 위한 조치만은 아니었으며 제후들, 특히 그저 불완전한 세제를 갖추었던 프랑스의 왕에게는 자신의 부채를 줄이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와 반대로 상인들과 임금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했으므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수차례의 화폐 변동은 14세기 민중 봉기와 정치 소요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131-2)


10 중세 말에 개선되는 재무 체계


새로운 화폐 수요를 부분적으로 충족시킨 두 가지 주요 수단은 어음과 보험이었다. 이를 다루는 은행가들 간의 계약 체결은 때로 갱신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사체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령 '콤파니아'의 경우 계약 당사자들은 서로 긴밀이 연결되어 있었고 위험, 희망, 손실과 이익을 공유했다. '소시에타스 테라에'는 '코멘다'와 가까웠다. 대부업자는 혼자 위험을 떠안았고 이득은 일반적으로 반씩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항은 유연했다. 투자 자본은 상당히 다양하게 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직이 지속되는 기간은 일반적으로 한 사업, 한 여행에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일정시간─1년, 2년, 3년, 대개 4년─ 따라 정해졌다." "일부 상인, 일부 가문, 일부 집단을 중심으로 복잡하고 힘있는 조직들이 발달했는데,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조직에 '컴퍼니'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가장 유명할 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조직은 피렌체의 저명한 가문들이 운영했다. 페루치가, 바르디 가, 메디치 가 말이다."(152-3)


11 중세 말의 여러 도시와 통치 체제 그리고 화폐


"도시는 15세기 사회의 주요 시련 가운데 하나를 겪었다. 부채를 진 것이다. 이는 분명 공동의 부채, 그러니까 공채거나 개인의 빚이었으며 무엇보다 공채 판매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부채는 사회 계층 간에 적대감을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상호 신뢰를 무너뜨렸다. 도시를 사랑하는 시민의 마음도 시들해졌다. 그리고 도시들은 권한을 침해하는 제후와 왕에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채는 여러 측면에서 도시의 힘과 이미지를 약화시켰다. 중세 유럽은 13세기에 상당히 도시화되었는데, 재정에 관련된 문제로 점차 제후들에게 예속되었다. 중세 도시는 충분한 재정 능력을 갖지 못했다. 도시는 화폐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강제력을 보유하지 못한 반면, 그런 수단을 갖고 있었던 제후들은 나중에 화폐가 우세해졌을 때 국가 지도자 위치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혜택을 입은 사람은 채권자들 뿐이었으며, 그들에게서는 정말로 의심할 여지 없는 부자의 모습이 보였다."(157-8)


12 14~15세기의 가격과 임금 그리고 주화


"전쟁은 격렬한 전투나 소규모 교전 그리고 노략질 형태로 15세기 중반까지 거의 모든 서구사회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왕정 체제 혹은 (도시 같은) 공동의 체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세금은 인정받기 어려웠고 제후들은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차입금은 기독교 사회를 항상 위기로 몰아갔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피렌체의 바르디 가에서 돈을 차용했으며 이로써 바르디 가는 파산하게 된다. 백년전쟁 후에 프랑스를 재건하기 위하여 샤를 7세는 자크 쾨르에게 돈을 빌렸는데, 나중에 그 돈을 상환하지 않기 위해 자크 쾨르를 투옥한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막시밀리안 황제가 뉘른베르크의 명가인 푸거 가문에서 돈을 차용했다. 푸거 가문은 황제의 도음을 타이롤과, 심지어 에스파냐의 새로운 구리 광산과 은 광산의 개발에 이용했다. 푸거 가문은 샤를 캥과 에스파냐 펠리페 2세를 돕는 은행가가 되었으나, 에스파냐 군주정의 국가 파산으로 몰락하고 이어 16세기에는 사라지게 된다."(173-4)


13 탁발수도회와 화폐


"현대 및 동시대 역사학자들은 탁발수도회, 특히 프란체스코 회가 역설적으로 자발적인 가난이라는 개념에서 '시장 사회'에 영감을 줄 화폐에 대한 견해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확실하고 중요한 것은 프란체스코 회가 하층민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제공하기 위해 신용대출 기관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15세기 말에만 그렇게 하긴 했지만 말이다. 새로운 가난은 중세 말까지 여전히 탁발수도회, 특히 프란체스코 회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다니엘라 랑도는 공영 전당포를 〈담보물의 보증과 저금리 지불이라는 수단으로 도시의 노동 계층에게 단기 대출을 보장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로 정의했다." "공영 전당포를 이끄는 사람들은 무상으로 대출을 보장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매우 낮은 이자율, 약 5퍼센트를 유지하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다. 공영 전당포는 맹렬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어찌 보면 고리대금 형태가 보였기 때문이다."(195-7)


14 인문주의와 메세나 그리고 화폐


"기독교 교리는 화폐에 다소 주저하고 심지어 적대감을 보였다. 교회가 중세의 모든 영역에서 주요 권력 기구였기 때문에 화폐를 불신하는 교회는 적어도 14세기까지 사상가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인도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변화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들이 화폐에 대해 사실상 사고를 전환했다고 보았다. 이 시대에 부자의 정의가 변했으며 부가 화폐와 동일시되었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소수의 문화적·사회적 엘리트 계층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를 부인할 수는 없다. 중세 말에 등장한 그러한 엘리트 계층을 인문주의자라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문화적 전환을 촉발한 것은 상인에 대한 태도 변화일 것이다. 일찍이 교회는 우선 지옥에 내던져질 운명에 처했던 상인을, 주로 그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13세기에 정의의 요구에 포함되는 일부 가치를 준수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203-4)


15 자본주의 혹은 카리타스?


"중세 유럽에 존재하지 않은 자본주의의 구성요소들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귀금속이든 이미 중국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던 지폐든 간에 화폐를 충분히,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세는 수차례 통화 기근 위기에 몰렸고 15세기 말에도 그랬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후, 많은 양의 귀금속이며 금과 은이 정기적으로 유럽으로 운송된 다음에야 비로소 자본주의에 대한 첫 번째 욕구가 충족되었다." "자본주의가 정착되는 데 요구되는 두 번째 조건은 다양한 시장 대신 단일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중세에는 시장이 열려 곳곳에서 다양한 주화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각지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과 롬바르디아 사람들은 주화 사용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단일시장은 16세기에 접어들어 비로소 구성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세 번째 체제는 어떤 기관의 등장이었다. 그것은 15세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인정받지 못했으나, 1609년 마침내 암스테르담에 설치된 상품 및 증권 거래소이다."(216-7)


"폴라니는 중세에 독립적인 경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사회 전체가 종교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경제 역시 그 속에 얽혀 있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화폐는 중세 서구사회에서 하나의 경제적인 실체가 아니다. 화폐의 본질과 사용은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역사학자 아니타 게로잘라베르는 요한의 사도서한(5, 4, 8, 16)에 따라 중세사회를 지배한 신은 '카리타스'였다고 상기시켰으며 〈자비는 기독교인의 자질을 가늠할 수 있는 덕목으로 보인다. 자비에 반한 행동은 신에 반한 행동이며 자비를 거스르는 죄는 논리적으로 가장 중대한 죄에 속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폐가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행위인 고리대금이 어떻게 가장 중대한 죄 가운데 하나로 단죄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카리타스'는 중세의 인간과 신 사이에 그리고 중세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중요한 사회적 관계를 구성했다." "따라서 중세에 확산되는 화폐 문제는 기부의 확대와 연관지어야 한다."(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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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문명 - 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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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1세기부터 15세기 말까지 유럽 기술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진보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갈수록 수가 늘어나던 수공업자들이 기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응용역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응용역학을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실용적 용도로 쓰기 위해서 연구했다. 기계는 생산과정에서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방앗간mill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적절한 사례이다. 물레방아는 기원전 1세기에 소아시아에 알려졌고 수직 형태의 풍차는 서기 7세기 페르시아에 알려져 있었지만, 방앗간 건설이 진정으로 크게 유행한 곳은 중세 유럽이었다. 무명의 수공업자들은 일련의 기발한 기계장치를 고안해 물이나 바람에서 나온 회전력을 망치, 압축기, 드릴, 맷돌 등 잘 분화된 여러 운동 장치로 전환했다. 유럽은 곧 놀랄 만큼 많은 방앗간으로 뒤덮이게 되었다."(30-1)


"실리주의적 풍조는 중세 도시 문명에서 탄생했고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촉진했으며 베이컨 철학에 의해 범위가 좁혀지고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 풍조는 새로운 기계에 대한 커져가는 열광과 그러한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에 대한 열렬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다른 한편으로, 역학, 화학, 현미경 관찰, 정성定性 천문학은 이제 막 태동했고 새로운 탐구 분야로의 진입 장벽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시계공, 렌즈 제작자, 정밀 도구 제작자 같은 고도로 숙련된 수공업자와 과학자가 발상과 제안을 주고받은 사례는 많다." "아울러 유럽에는 학자와 수공업자 이외에도 학자나 수공업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은 아마추어 과학자 집단이 대규모로 존재했고 그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 초기 과학의 진보에서 이 명인virtuosi들이 했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확실히 숙련공들이 수행한 역할보다 훨씬 컸다."(48-9)


1장 유럽, 시계를 만들다


"종은 중세 도시 생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종은 공동체의 삶을 지배했고 종소리는 〈만물을 질서와 평온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모두가 종소리의 의미를 알았고 종소리는 언제나 메시지를 전달했다. 종소리는 시각을 알려주고, 불이 났거나 적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군대나 평화로운 모임에 소집하며, 잠자리에 들 때, 일어날 때, 일터에 나갈 때, 기도할 때와 싸울 때를 알려주고 장을 열 때와 닫을 때를 알리고, 교황의 선출과 국왕의 즉위, 승전을 축하했다. 널리 퍼진 믿음에 따르면 종소리는 폭풍과 전염병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도시와 교회, 수도원이 아름다운 종이나 소리가 맑은 종을 갖는 것은 그곳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효율적으로 종을 치는 장치도 개발되었다. 톱니바퀴와 왕복 지렛대로 구성된 이러한 장치들이 기계식 시계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다."(54-5)


"도시는 급성장하고 있었고 새로운 도시 문화가 전례 없이 활발하게 꽃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종 제도와 전통, 기득권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될 경직성에 아직은 발목이 잡히지 않았을 때였다. 13세기는 대학과 고딕 성당의 확산, 조토 디 본도네와 조반니 치마부에가 가져온 미적 혁명,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찾고자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려는 유럽인 최초의 시도를 목격한 시기였다. 그 세기 후반에는 최초로 대포가 제작되었다. 기계식 시계와 대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현한 것이 전적으로 우연은 아니다. 두 가지 모두 수적으로 또 질적으로, 금속 직공의 괄목할 만한 성장의 소산이었으며 뒤에 가서 보겠지만 초창기 시계 제작자 다수가 또한 대포 제작자였다. 대포와 기계식 시계의 동시 출현은 유럽식 발전의 특징을 증언하는 것이면서 또한 앞으로 전개될 양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56)


"시계, 특히 커다란 공공 시계는 당시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시계를 설치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은 대개 지역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시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는 특별히 임명된 〈관리장〉의 정기적인 임금까지 포함되었다. 시계를 설치할지 말지의 문제는 종종 길고 열띤 논쟁 끝에 결정되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의 공공 시계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본질적으로 유용한 물건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58-9) "아무도 시계가 없거나 극소수만이 시계를 휴대하고 있던 시대에 시각을 알리는 공공 시계의 유용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실용성만이 언제나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다. 일보 도시들은 15세기 한 프랑스 문헌이 표현한 대로, 〈도시를 빛낼 크고 훌륭한〉 기계를 갖고 있다는 명성을 두고 다른 도시와 경쟁했다." "따라서 도시의 자부심, 실용성, 기계에 대한 관심이 결합하여 비교적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시계의 확산이 촉진되었다."(64)


공공 시계가 보급되면서 점차 가내용 시계가 확산되는 길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추가 유일한 원동력인 한 가내용 시계는 쉽게 옮길 수 없었다. 그것들은 받침대로 받쳐야 하거나 벽에 단단히 고정시켜야 했다. 쉽게 옮길 수 있는 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류의 원동력을 고안해야 했다. 동시대의 누군가에 따르면, 위대한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태엽 장치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고 1410년이 되자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태엽〉으로 돌아가는 시계를 제작하고 있었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증거로 보았을 때 시계에서 태엽을 사용하게 된 시기는 적어도 15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태엽 발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태엽의 발명으로 쉽게 운반 가능한 시계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 가서는 손목시계와 회중시계 같은 휴대용 시계의 제작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76-7)


"대부분의 시계가 쇠나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공공 시계였으므로 시계 제작자들이 대장장이나 자물쇠공, 총포 대장장이, 일반적인 금속 노동자인 것은 이해할 만한다. 하지만 가내용 시계와 회중시계가 점차 흔해진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상황은 변했다. 더 작은 시계들은 값비싼 장치였고 부유층이 소유했다. 시계는 사치품이라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를 특징짓는 장식 과잉 열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새로운 유행을 만족시켜야 하는 수공업자들은 이제 대장장이나 자물쇠공보다 보석 세공인의 기술이 필요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커다란 공공 시계 제작자〉와 〈작은 시계 및 회중시계 제작자〉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직 일반화된 현상은 아니었지만) 시계 제조업이 두드러진 산업으로 발전한 제네바 같은 중심지는 시계공들이 눈에 띄는 사회적 지위도 획득했다."(83-4)


"18세기가 밝아오자 런던과 제네바는 유럽 시계 제조업의 최대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두 중심지의 부상과 더불어 시계 제작 및 상업에서 새로운 원原산업적, 원原자본주의적 작업 방식이 출현했다. 특히 17세기 전반기 이후 시계 제작이 발달한 지역의 수공업자들은 특정 부품 생산을 전문화하기 시작했다. 태엽 제조공이 최초로 출현한 전문 직공으로 보이며 다른 전문가들도 곧 뒤를 따랐다. 18세기 초에 런던 클라컨웰 지구의 여러 거리들은 탈진기 제조공, 선반공, 원뿔형 도르래 절단공, 비밀 태엽 제조공, 마감공 같은 직공들이 차지했다. 이미 1701년에 회중시계 제작은 분업의 이점을 증명하는 실례로 꼽혔다. 제네바에서는 두 전문 직공 집단이 시계공 길드와 구분된, 자신들만의 길드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따라 조립공들은 1698년에, 조각공들은 1701년에 길드를 조직했다. 이러한 발전은 자연히 다른 직종에도 영향을 미쳤다."(106-7)


2장 중국, 시계와 조우하다


"대포를 탑재한 원양 범선으로 유럽인들은 대해의 주인이 되어 이슬람의 해운과 교역 대부분을 파괴하고 아시아 내 무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세계 무역은 본질적으로 아메리카에서 동쪽의 유럽으로, 그곳에서 다시 동쪽의 아시아로 다량의 은이 유출되고 그 반대 방향으로는 다량의 상품이 이동하는 것이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서양인들에게 서양 상품에 대한 동양의 낮은 수요는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아시아의 제품들이 주요 경제 부문에 걸쳐 유럽 시장에서 유럽의 상품과 성공적으로 경쟁한다는 사실이었다. 브리스톨의 상인이었던 존 캐리가 표현한 대로 〈동인도 무역은 우리에게 매우 해로운데 우리의 정금을 수출할 뿐 우리의 상품이나 제품은 거의 수출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제조된 상품을 수입해와 우리 제품의 소비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으니 기계식 시계가 그중 하나였다."(118-22)


"시계는 예수회원들이 베이징의 궁성 문을 열 때도 활약했다. 소문에 따르면 예수회원들은 예를 갖춰 조정에 나가 황제에게 시계 두 점과 다른 공물을 몇 점 바치고 싶다고 간청했다. 시계 가운데 하나는 쇠로 만들어졌고, 도금된 용과 독수리 및 기타 형상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형 시계였다. 나머지 하나는 도금을 한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태엽으로 돌아가는 작은 시계였다. 둘 다 종을 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었다."(125) "〈스스로 울리는 종〉에 대한 천자들의 애착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17세기와 18세기 내내 시계와 자동 창치, 그리고 그와 비슷한 아름답고 신기한 장치들이 끊임없이 베이징의 황궁으로 흘러들어갔다. 강희제(1662~1722년 재위)는 황궁에 크고 작은 시계를 만드는 제작소를 차리기까지 했고 특유의 유연성을 보인 예수회원들은 예수회에서 전문 시계공을 선발해 중국 선교단에 포함시켰다."(129)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의 중국인들은 서양 시계와 천문학의 관련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서양 시계를 장난감으로, 오직 장난감으로만 보았다." "16세기 말에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중국인들이 유럽의 어떤 물건에도 관심이 없지만 〈온갖 종류의 렌즈만은, 특히 형형색색의 렌즈만은 구입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유럽인들이 렌즈를 가지고 현미경과 망원경, 안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동안 중국인들은 렌즈를 멋진 장난감으로 사용했다.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렌즈와 시계, 여타 기기들은 유럽 사회가 느끼던 특정한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개발되었고 그 필요는 다시 유럽이 자신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기계 장치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중국인들은 그것을 그저 재미나고 특이한 물건으로 대했다."(131-2)


"중국의 관료 정치 및 관료제적 구조가 중국 수공업자들의 잠재력이 꽃필 기회를 방해했다고 볼 근거가 있다." "꼭 금전적으로 표현된 유효수요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다른 보람 있는 자극들이 수공업자들을 독려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수공업자를 대하는 당시 관리들의 태도를 두고 권력 남용의 무수한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쉽게 일축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명대 중국의 지배적인 사회문화적 가치 체계는 실제로 수공업자와 기술을 천대했다. 올바르게 지적된 대로, 〈예술가artist와 수공업자artisan는 서로 다른 인종이나 마찬가지였다.〉 〈교양 있는 중국인은 수공업자의 작품을 감상할 때 마치 비버의 영리한 작품을 살펴볼 때처럼 놀랍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명대 중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 체계는 수공업자를 억압하고 응용과학과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방해했다."(147-8)


"사실 아래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모호하고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왜 중국은 시계와 대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왜 중국은 산업화로 나가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암암리에 비중국적인 조건에서 중국을 평가한다. 그러나 로빈 G. 콜링우드가 썼듯이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가 한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왜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중국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라는 묻는 것은 다소 예의 없을 뿐 아니라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150-1)


에필로그


"시계가 등장한 직후부터 사람들은 활동 시기를 서로 맞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시간에 무척 민감해졌고 궁극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일은 필요이자, 미덕, 집착이 되었다. 따라서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계를 갖게 될수록 다른 사람들도 그와 유사한 장치를 가져야만 했고 기계는 자신이 확산되는 조건을 창출했다. 그와 동시에 시계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을 바꾸고 있었다. 유럽의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불가항력으로 진행되었다. 균등한 시간 체계가 계절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불균등한 시간 체계 그리고 그 밖의 시간 구분 방식들을 대체했다. 〈첫 미사 시간〉이나 〈저녁 기도 시간〉 같은 표현들이 완전히 폐기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동일한 길이의 〈시계의of the clock〉 시간(정각o'clock)이란 더 추상적인 표현이 점차 자리를 잡았고 마침내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156-7)


"기계는 하나의 도구이다. 그러나 〈중립적인〉 도구는 아니다. 우리는 기계를 사용하면서 기계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생텍쥐페리는 〈기계는 조금씩 인간성의 일부가 될 것〉이며 〈모든 기계는 자신의 기능 속에서 원래의 정체성을 잃고 점차 [인간의] 녹이 끼게 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얘기했다. 그러나 기계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우리 역사 점차 녹이 껴가고 있고 인간사를 다루는 데 언제나 유용하거나 이롭지많은 않은 기계적 세계관에 조금씩 물들어간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다는 대로 〈기계가 끼치는 해악은 인간 자신도 기계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만이 기계를 그렇게 덮어놓고 비난할 것이다. 우리는 갈수록 더 많은 기계와 더 좋은 기계가 절실하다. 경제와 기술의 발전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계를 좋고 훌륭한 용도로 쓸 수 있도록, 철학의 발전과 인간사를 다루는 능력의 발전도 간절히 필요로 한다."(1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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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의 등장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4
아론 구레비치 지음, 이현주 옮김 / 새물결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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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개인은 파악하기 힘들다


"바이넘은 (12세기의 개인화 과정 연구에서) '내적 인간(Homo interior)'에 대한 관심이 계발될 수 있었던 성직자와 수도원 공동체에 대한 분석만으로 논의를 국한시킨다. 그녀의 의견에 따르면, 이 시대의 남녀는 자신 안에서 인간 본성, 즉 '자아'(그 자신[seipsum], 육체적 존재[anima], 개인[ego])를 발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신의 이미지[imago Dei])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개인은 현대적인 의미의 개인이 아니라 중세 말에 발견되고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개인이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 풍경'(자아의 발견)에 대한 관심과 '개인의 발견'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벨라르와 그 밖의 다른 12세기 저자들은 윤리 문제를 논할 때는 진지한 의도를 갖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들은 개인을 유형이나 '모범'에 따라 나누었다."(28)


"이 시대 사람들은 '모범'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이미 존재하는 형태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찾고 또 발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 집단의 수가 증가하고 일종의 경쟁(구 수도회와 신 수도회)이 심해짐에 따라 사회적 역할의 다양성에 대한 자각이 핵심적인 쟁점이 되었고,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바이넘은 각자 고유한 내적 동기와 감정을 가진 독립적인 개인을 12세기 종교 생활의 중심에 놓는 것은 잘못이며, 모든 개인은 독특하며 따라서 개인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만을 부각시키는 것 또한 잘못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에 들어와서 생긴 것이지 중세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내적 동기에 대한 탐구는 특정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함께 등장했으므로 이 시대에는 개인적 삶의 방식과 같은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과 집단은 다음 세기가 되어서야 분리되기 시작했다."(29-30)


2장 개인과 서사시 전통


"'영웅적'이라는 말은 스칸디나비아인의 의식에서 발견되는 기본 범주 가운데 하나다. 이 개념은 인간적 삶을 뛰어넘는 형식 속에서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가진 인간이지만 완전한 개인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영웅적이라는 범주는 이 시대의 시간관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영웅의 영광이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래에서였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고대의 시의 저자와 청중은 모두 영웅의 죽음에 주목했다. 영웅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짧은 생애 동안 영웅은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위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영웅의 태도는 미래를 바라보는 태도에 의해 형상화되며, 죽음은 영원불멸한 영광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세 가지 범주(영웅주의, 죽음, 시간)는 중세 내내 북유럽 사람들의 삶을 이끈 윤리적 규범의 핵심적인 측면이었다."(50-2)


"이 세 가지 요소 외에 운명(Fate)이라는 범주를 추가할 필요가 있는데, 운명은 세 가지 범주를 포용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영웅은 업적을 성취하고 마지막 죽음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그가 걸어나갈 길은 모두 '예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족 고유의 사상 체계에서 운명은 이 세계의 위나 저편에 있는 얼굴 없는 '운명(fatum)'도 아니며 눈 먼 운명의 여신(Fortuna)의 수레바퀴도 아니다. 운명(destiny)은 '프로그램'처럼 영웅 안에 '입력되었지만', 이 운명은 삶에 대한 개인적 태도의 일부분으로 지각되기도 했다. 영웅은 운명이 지시한 대로 따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운명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운명을 '창조한다'. 이처럼 영웅의 운명은 영웅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며 영웅은 운명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이고 영웅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이 놀랄지라도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이 운명을 알린다. 영웅의 운명은 그의 존재의 일부분인 것이다."(52-3)


"스칸디나비아의 서사체 산문(narrative prose)인 사가는 문학 장르로 중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역사 자료다." "사가의 등장인물은 대체로 실존 인물들이다. 사가는 소설이 아니다. 사가의 청중뿐 아니라 저자도 사가에 서술되는 이야기는 실제의 삶에 충실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중세인이 이해하는 현실은 오늘날 우리가 현실이라고 이해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중세의 현실은 환상과 기적의 영역과 결합되어 있다. 사가에는 현실의 사람 외에 온갖 종류의 초자연적 창조물, 늑대인간(werewolves), '살아 있는 죽은 자(living dead)'가 등장한다. 마법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행동과 주술이 그랬던 것처럼, 예언과 꿈은 반드시 실현되며 사건의 진행을 결정짓는 요인들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가는 이 모든 환상적 요소들을 마치 일반인들의 행동이나 대화를 다루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또 그와 비슷한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있다."(81-3)


"무엇보다 사가 저자의 주된 관심인 결투는 각자의 이익과 열정에서 비롯된 인간들 사이의 투쟁이었고, 이 결투는 이와 관련된 인물과 그들의 자질이 드러나는 '인간적' 사건이었다. 결투를 통해 사가 영웅의 우수함이 측정되며 인간적 가치와 등장인물의 본질이 시험받는다. 결투는 인간의 모습을 한 인물들에 의해 수행된다. 그리고 그러한 결투의 기저에 깔린 동기가 엄밀한 의미에서 늘 인간적이거나 개인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더라도 그러한 이유는 사회의 눈으로 볼 때 개인이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의 개인은 집단 안에서 아직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았고 집단 원리가 이끄는 행동과 사상이 여전히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예와 공적, 좋은 평판, 가족, 친척, 친구의 명예에 대한 관심이 다른 사람들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였다." "사가의 저자는 영웅의 용기, 영웅의 강함과 전쟁 기술을 정성 들여 묘사한다."(88-9)


"사가에서 퍼스낼러티는 매우 애매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흐릿한 윤곽만으로 제시된다. 우리와 근접해 있고 좀더 이해하기 쉬운 문화에서 퍼스낼러티를 '원소'로 해석한다면, 이 시대의 개인의 퍼스낼러티는 그렇게 자기 충족적인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과 분리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개인은 가족적 연대, 소유나 우정으로 연결되지 않은 이방인이나 '외지인'과는 명백하게 구별된다.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개인은 신중한 입장을 취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언제라도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다." "주인공의 '자신과 같은 종류'의 동아리 안에서는 개인과 퍼스낼러티를 나누는 경계선이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이 동아리 안에서는 복수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즉 사가의 등장인물은 '자신과 같은 종류'와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다. 도리어 그는 자신의 집단에 융해되는 듯하다. 개인은 그저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고리일 뿐이다."(99-100)


3장 페르소나: 개인을 찾아서


"인간의 의식 속에는 모든 사회적 행동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세계상이 존재한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고 실제로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기독교는 개인의 제도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신앙일 뿐 아니라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르침과 의지에 따라 세워진 사회 공동체이다. '자연적' 인간 또는 '육체적' 인간과 세례를 받고 '기독교적' 인간으로 변모한 사람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 간극은 '기선성' 행위를 통해서만 건널 수 있다. 세례 행위는 다름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일인 동시에 '자연적 인간'이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식이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인간은 구원의 기회를 얻는다. 기독교 공동체의 '문화적 코드', 원리, 규범을 흡수한 인간(human being)은 한 사람(person)이 된다. 1234년에 나온 한 텍스트는 〈그리스도 교회의 세례를 통해 인간은 한 사람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161-2)


# 기선성(initiation) : 신학 용어로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고 인간의 모든 일을 미리 예정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성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를 통해 기독교는 개인의 '내적 공간'을 탐구하고 개인을 좀더 심오하게 이해하는 데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인간의 에고는 재해석되었고 추론과 오감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각, 의지, 인성을 가진 실체의 조합으로 파악되었다.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한 인간적 책임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주었던' 고전 시대의 전형적인 운명관을 받아들이는 대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운명도 아니요, 숙명도 아니요, 악마도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세계의 중심은 창조자를 대면하는 에고(ego)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극적인 감정으로 자신이 살아온 길에서 겪은 경험들에 반응했는데, 그는 젊었을 때는 죄가 넘치는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진정한 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기에 대한 앎은 신에 대한 앎, 즉 신에게 가는 길로 제시되었다." "개인의 자기 표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한 작품은 이 히포의 주교가 쓴 『고백록』이다."(164-5)


"그렇다면 중세 철학에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세 철학의 본질인 신학에서 개인은 어떻게 해석되었을까? 신학자는 개인이 아니라 '페르소나'를 다루고 있으므로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는 중세 내내 고도로 추상적이었다. 보에티우스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이성적이고 나눌 수 없는 본질(혹은 '이성적 본질의 개인적 실체')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전 자연에서 가장 완벽한 것, 즉 이성적 본질 속에 구현된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창조'보다는 '창조자'에게 사고를 집중하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또는 거의 유일하게 신, 즉 신성한 페르소나에 대해서만 말한다. 신성한 인성[예수]의 '페르소나들[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에 대한 탐구는 신의 삼위일체와, 신이며 인간인 그리스도의 이중적 본질에 대한 논의의 본질적 요소였다."(171-2)


"이 시대의 신학만이 개인의 인류학적 측면을 상세하고 고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유럽 언어의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돌려보면 퍼스낼러티, 개인성, 인간적 특성을 의미하는 모든 단어들이 얼마나 느리고 얼마나 힘겹게 일상적 언어에 편입되는지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심리와 관련된 개념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정착되어 일상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자아에 대한 개인의 태도나 자아의 자각을 의미하는 접두어 'self'와 관련된 단어들은 종교개혁 후에야 증가하였다. 개인적인 목표나 감정적 상태를 가리키는 일군의 단어들이 폭넓게 사용된 것 역시 종교개혁 이후였다. 개인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이해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개인의 영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독립적 존재로 간주되던 인간의 감정은 점차 개인의 감정적 성질, 즉 사람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해석되었다."(175)


4장 전기문학과 죽음


"세속적인 근심과 목적 추구에 얼마나 매몰되어 있었는지 몰라도 중세인들의 행동적이고 감정적인 삶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두려움은 갑작스러운 죽음, 말하자면 기도나 '선한 행동'으로 준비되지 않고, 고백할 시간이나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용서받을 시간도 갖지 못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 시대에는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사제들은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죄의 참회와 속죄를 미루어서는 안 되며 적절한 시기의 참회는 신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끊임없이 설교했다.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에 그려진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는 무시무시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춤추는 사람(이들은 다양한 사회적 지위와 계층을 대표하고 있다)들 중 누구도 누가 이 춤을 이끄는지 그리고 언제 이 춤이 끝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179-80)


"중세 사람들은 동시에 두 세계에 초점을 두면서 세계를 성찰했고, 두 세계 사이에 지속적이고 활기찬 쌍방향 소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 중세인들의 신념에 따르면 삶의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실 더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개인에 대한 진실한 평가는 생전의 행동을 근거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었다(기독교 이전 시대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누군가의 영광스런 업적은 그가 죽은 후에도 남아 있는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왜냐하면 모든 영혼에 판결을 내릴 '최고의 재판관(Supreme Judge)'이 존재하며 죽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죄인인지 정의로운 사람인지)는 판결이 내려지는 마지막 순간에야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피상적이고 무의미하다. 세속적 관심은 '영원'에 비하면 무의미하고 영원의 바로 그 문전에서만 영혼의 진실한 '가치'가 드러난다."(184-6)


5장 자서전: 고백록인가 변명서인가?


"학자들은 13세기 초에 고해성사가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는 사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의 주의를 끄는 것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공포된 결의문, 즉 모든 기독교인은 1년에 한 번 사제에게 고해해야 한다는 결의문이다. 규칙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고해는 신앙인들의 자기 분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고해는 자신의 행동이 죄가 되는지 정당한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해는 때때로 신앙인의 의식과 거의 관련이 없었고 고해성사의 신성모독으로 이내 타락하였다. 즉 수많은 신앙인들은 이런 종류의 자기 분석을 할 능력도 없었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고해성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도울 수도 없었으므로 고해는 피상적 의식으로 격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의 원리는 세워졌고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자각의 발전 과정에서 이것은 중요한 단계였다."(201)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가 보기에 개인의 행동의 옳고 그름 또는 죄에서 자유로운지 여부는 개인의 행동과 이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내적 동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아벨라르는 주로 죄의식에 기초해 구원의 문제에 접근하려는 당시의 보편적인 방법에 반대하여, 신앙을 내면화하려는 경향을 철학적으로 실체화하였다. 이러한 원리는 전 시대에 본질적이었던 전통과 근본적인 단절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 이전 세대의 사람들은 행동의 의도나 감정적 상태를 완전히 무시당한 채 행동 그 자체로만 비난받았다. 이들은 관련된 사람의 정신을 무시하고 객관적으로 조명된 행동 그 자체만을 고려했다." "아벨라르의 분석의 핵심은 한 개인의 의사(意思, wish)에 있었다. 개인이 죄의 길을 걷게 될지 아니면 포기할지는 이미 내려진 도덕적 선택에 의거한다. 복음서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 말하자면 그 안에 담겨진 도덕법을 잘 알지 못한 사람은 죄가 없다고 아벨라르는 생각했다."(224-5)


"따라서 고백과 참회는 의식이나 의무적 과정으로서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지만 저지른 죄를 자각한 결과 생기는 진지한 감정적 불안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는 중요하다. 개인은 자신을 최후의 심판을 받을 존재로 인식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개인의 의식에 필연적으로 매우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구원은 개인의 정신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외적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구원은 내적으로 죄를 정화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 신과 의식적으로 '연합'한 후 진실로 그 구원을 얻으려 희망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미 오래 전에 상징이 된 인물들에 대해 말할 때에도 이 철학가의 시야에서 개인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벨라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을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제시하는 대신, 비극적 상황에 사로잡힌 실제적 개인으로 제시한다. 아벨라르는 삼손이라는 성서적 인물 안에서 고통받는 인간을 바라본 최초의 작가였다."(225-6)


"아벨라르의 『나의 불행 이야기』를 자서전이라 부를 수는 결코 없다. 자서전과 유사한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충분히 진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치유할 수 없는 자만심의 정신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고백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 책은 오히려 변명서(apologia)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 참회 형식을 빌려 자기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 게다가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이용하여 자신을 고양시키려 하였다. 우리가 그의 신산한 삶의 사건들과 위기의 순간에 겪은 감정적 경험에 대해 많이 알게 된 후에도 개인으로서의 그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퍼스낼러티는 가면 뒤에 숨겨져 있다. 더욱이 가면은 여러 개다. 왜냐하면 그는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대로 이 가면, 저 가면을 갈아 썼기 때문이다." "이론상 고백록은 솔직한 진술들을 담고 있어야 하지만 아벨라르의 고백은 표현할 수 없거나 표현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숨긴다."(248-9)


"그러나 아벨라르 안에서 비로소 새로운 유형의 개인, 즉 자발적 개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자발적 개인은 자신의 내적 세계를 보호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끊임없이 불편한 관계를 맺으면서,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도록 부추기는 갈등에 사로잡힌 개인이다. 수도원, 학교, 철학자들 사이 그리고 교회 세계 등 모든 곳에서 음모의 덫이 항상 자기 주변에 만들어지고 있다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즉 그의 퍼스낼러티의 특징 때문에 그리고 그가 획득하고자 했던 새로운 사회적 지위 때문에 그는 어떤 집단과도 동화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따라서 끊임없는 갈등이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느낌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역으로 기존의 틀을 전혀 못 견뎌하는 개인에 대해 사회가 왜 그토록 유보적이고 종종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는가를 설명해준다."(251-2)


"야콥 부르크하르트, 칼 람프레히트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유럽 문화에서 인간 개인성에 대한 관심이 처음 등장한 것은 르네상스 시기라고 주장한다. 그 이전에는 관심의 초점이 늘 '전형적인 것'에 쏠려 있었고 개인성은 경멸되었다는 것이다. 12세기와 13세기에서 '개인이 발견된다'고 말하는 현대의 학자들은 비록 매개 변수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로 이런 전제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10세기와 11세기로 좀더 거슬러 올라가도 등장인물의 개인적 특성과 개인의 모습에 대한 관심이 문학에서 발견되며, 이런 관심은 연대기를 비롯한 여타 역사물뿐 아니라 몇몇 성부전에서도 발견된다고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왔다." "에티엔느 질송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분석하면서 이들을 일반적 법칙에 대한 예외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결코 예외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인간적 현상이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진다."(266)


6장 다섯 달란트 우화


"중세의 개인 탐구와 관련하여 독특한 흥미를 제공하는 베르톨트의 설교는 『다섯 달란트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베르톨트는 신성로마제국의 공위 기간(제왕의 서거나 폐위 등으로 왕좌가 비었던 기간) 동안 설교자로 활동했다. 중앙 권력의 약화, 강해진 선제후의 영향력, 내전의 증가, 강도 기사(robber knight)의 증가, 시민권의 침식, 지배자들의 변덕스러운 신민 통제, 소작농 탄압, 불안정한 도시 상황, 이 모든 것이 약 1250년과 1275년 사이의 기간, 정확히 말해 베르톨트가 설교한(그는 1272년에 죽었다) 시기의 독일의 상황이었다." "이처럼 혼란이 만연한 중요한 순간에 사람들은 특별히 인간성의 핵심, 본질, 운명에 대한 영원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정확히 이 시기에 독일에서 오직 정신의 탐구에만 전념하던 것이 예술적이고 지적인 활동의 흥미로운 만개를 가져온 것 역시 우연은 아니다."(273-4)


# 다섯 달란트 : 페르소나(자기자신), 소명(직분), 지상에서 보낼 시간, 재산, 타인과의 관계(이웃 사랑)


"베르톨트는 얼굴 없는 대중에게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청중은 개개인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베르톨트는 주인이 하인에게 맡긴 달란트에 관한 신약의 우화를 설교 주제로 선택했다(「마태복음」 25:14~30). 베르톨트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이 우화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달란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르톨트는 하인 한 사람에게 일 달란트를 맡긴 부분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그는세례받지 않은 아이들과 관련해서 이 우화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례받은 아이들을 의미하는 다른 하인에게 맡긴 두 달란트와 관련되는 부분 역시 한편으로 제쳐 두었다. 베르톨트는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세번째 하인에게 다섯 달란트를 준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베르톨트는 이 사람에게서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완전히 책임질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인간을 읽는다. 베르톨트는 개인의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278-80)


"신이 인간에게 준 첫 선물은 자유의지를 지닌 '페르소나'였고 두번째 선물은 개인의 사회적 기능 즉 지위와 직업의 소명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희망에 따라 직무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신의 의도를 따라 직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직업을 바꾸거나 한 사회 범주에서 다른 사회 범주로 이동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레겐스베르그의 베르톨트가 이해하는 '페르소나'는 사회적으로 결정된 개인이다. 개인의 특성은 계급, 지위, 사회 집단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베르톨트가 말하는 '페르소나'에는 법률 서적의 '추상적 개인'은 없었고 지주, 지배자, 기사, 농부, 장인, 상인 같은 다양한 사회 유형만이 존재했다. 상인의 퍼스낼러티를 구성하는 요소는 기사의 그것과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수도승의 퍼스낼러티의 구성 요소는 농부의 그것과 다르다. 베르톨트의 사상은 다양한 지위와 조합으로 이루어진 위계질서 속에 살던 중세 개인의 자각이 가진 특수한 속성을 분명히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287)


"따라서 '페르소나', 직무나 일, 시간과 재산은 분리될 수 없는 전체로 설교된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동시에 전체로서 사회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런 이익은 신의 의지가 준행되었다는 익숙한 종교적 형태로 제시된다. 달란트는 원래 신의 소유이지만 신은 선하게 사용되기를 바라며 인간에게 달란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신학 형태 이면에 설교자 자신도 인식 못한 새로운 세속적 내용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즉 친숙한 신학적 세계관과 상인 계급의 사회적 의식 안으로 슬며시 들어온 세계관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상인들의 의식의 중심에는 (최소한 비공식적이나마) 인간과 그들의 세속적 욕망이 들어서 있었다. 이들의 새로운 세계상은 창조자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았고 이런 의미에서 신학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미 새로운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다."(297-8)


7장 기사와 상인


"기사는 단독으로 전투에 임했으므로 무엇보다 자신의 힘과 용기에 의지해야 했다. 그를 보호하는 것은 잘 짜여진 전투대형이 아니라 사슬 갑옷, 무기, 대응 속도와 기마술이었다. 말을 탄 기사는 자족적인 이동 요새와 유사했다." "기사의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은 엄격한 법칙과 고도의 의식(儀式)에 종속되어 있었다. 기사 계급에 들어가기 위한 의식, 전장의 싸움이나 마상창시합 참가, 서정시와 유행, 언행에 대한 예절들은 모두 상징주의와 보편적 규약이 함께 녹아 있는 규범의 지배를 받았다.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그는 사회의 '중앙 무대', 특히 다른 기사들 사이에서 중앙 무대에 있을 때에만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생각했고 그렇게 느꼈다. 기사에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고귀한 사회 계층의 대표자로 제시해야 함을 의미했다. 기사는 마상창시합에 참가한 동료 기사와 아름다운 여성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306-7)


"기사들이 자기 자신을 특별한 사회적 기능을 가진 계급(ordo)으로 자각하기 시작한 역사적 시기는 13세기였는데, 이 시대는 기사들이 자신을 개인으로 보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롤랑, 프로방스의 서정시, 독일의 음유시처럼 기사도적 용기와 특별한 영웅을 찬양하는 서시시가 등장한 이 시기는 기사 문화의 상승기였다. 기사도 윤리는 새로운 가치를 낳았다. 우선 개인의 열정을 전례가 없는 높이까지 고양시킨 궁정식 예절과 궁정식 사랑이 그러했다. 그리고 생과 같은 우연한 속성이 아니라, 개인을 특징짓는 도덕적 자질의 모든 영역에서 확인되어야 할 기사의 명예와 고귀함 등 새로운 가치가 탄생하였다. 프랑스의 서정시인과 독일의 음유시인들이 예찬한 숙녀들은, 여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개별화된 이상(ideals)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면 세계를 좀 더 깊이 통찰하고 사랑의 감정적 경험에 주의를 집중하려고 노력한 기사도 시인들이 이루어낸 결실이었다."(308)


"알레고리와 기억을 활용한 『장미 이야기』 같은 로망스의 영웅은 방황하는 기사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대면하거나 진실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도 있는 탐험과 모험을 소망한다. 명민함, 다재다능, 교묘함, 심지어 다른 사람을 속이는 능력(engin, ingenium)이 기사에게 요구된다. 기사는 오직 자기만을 의지하고 자신의 정신·육체적 힘과 기술에 의지해야 한다. 한편 그는 일상적인 사회 세계와 분리되어 있으므로 이 세계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대때로 이 소외감은 광기와 거친 상태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런 극한 상황 즉 '경계선' 상태를 통과해야 로망스 영웅들은 내적 평화, 연인 또는 신과의 평화를 얻는다. 트리스탄과 퍼시벌, 그리고 궁정식 로망스의 다른 등장인물들에서 우리는 맹렬하게 자신의 내적 에고를 찾는 개인의 모습을 대면한다." "이처럼 기사의 사회·심리적 지위가 개인화로 향하는 특별한 경향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이런 경향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통제되고 있었다."(312-5)


"(상인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개인은 시간을 중시했다. 도시 거주자들은 시간의 흐름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사람들은 좀더 규칙적으로 시간을 계산했고 이와 동시에 도시의 명성을 높일 수 있게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의 도시의 탑에 기계 시계가 장착되었다. 시간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보물이라는 찬사를 더욱 빈번하게 듣게 되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의 인본주의자, 베르나르디노 다 시에나 같은 설교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상인들은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는다. 상인들의 일은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상인들은, 신은 자신의 일을 적절하게 조직하기 위해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을 돕는다고 믿었다. 지상 세계와 지고의 세계 사이에는 상호 이해와 상호 작용이 있었다. 이 시대의 많은 상업 문서에는 사업이 번영하도록 도와달라고 창조자, 성모 마리아 및 성인들을 부르며 호소하는 말들이 들어 있다!"(331)


"개인의 세속적 성공이 구원을 위한 신의 선택을 받은 징조라고 믿는 사상(프로테스탄트 윤리)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는 종교개혁은, 로마 문화권에서는 실패했지만 게르만 문화권에서는 성공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은밀한 심처(心處)' 속에 운명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회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행운'에 대한 고대 게르만 개념이 중세 말에 다시 한번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출신의 한 상인은 자신의 선조가 '자비, 행운, 이익'으로 신의 보답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세 개의 두운으로 이루어진 이 상투적 문구는 신의 은총과 상업적 수입 사이에 운명이 딸린 행운이 있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부는 한편으로 창조자가 높은 곳에서 내려준 성공과 기업가의 부단한 노력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 국가에서도 자본주의적 관계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보면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탄생에서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된다."(332-4)


8장 수사 살림베네와 다른 사람들


"살림베네가 글을 쓸 당시는 천년왕국설이 요아킴주의의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요아킴 델 피오레는 성령의 시대가 1260년에 시작될 것이라 예언했는데, 정확하게 바로 이 때에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호엔스타우펜의 힘이 붕괴되자 신성 로마 제국이 종식되고 있다는 전망이 대두되었다. 세계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 실현되고 있는 듯했다. 새로운 불안이 이탈리아에 출현하였으며, '형제단(Apostle Brethren)'으로 알려진 운동이 시작된 것도 1260년이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옹호했고, 재산, 노동, 부역을 거부했다. 이와 동시에 편타(鞭打) 고행자들의 행렬이 이탈리아의 도시와 마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쉽게 감격하고 심지어 신경을 다 소모할 정도로 뭔가에 매달리는 불건전한 신경병적 성향이 만연한 역사의 바로 이러한 순간에 사람들이 개인을 예민하고 날카롭게 관찰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345)


"우울함, 두려움, 비관주의, 피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전망, 이런 것들은 후대에 증언을 남긴 특별한 개인과 대중을 사로잡은 감정들이었다. 개인들은 이제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으며 어떤 조언이나 충고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없으며, 자신은 분리되고 고립되었다고 느꼈다. 사회 구조가 좀더 복잡해지고, 개인은 공통점이 전혀 없는 서로 다른 원리에 근거를 둔 수많은 집단에 소속되고, 안정적인 심리적 총체를 제공하던 전통적 소사회가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 상황이 출현한 것이 바로 이 시대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고 지적 '박탈'의 결과로 개인은 새로운 자각을 얻었는데, 이러한 자각은 주로 극단적 이기주의와 도덕적 허무주의로 표현되었다." "이 같은 경향은 살림베네에게서도 많이 발견된다. 그는 가족적 유대감이 부족했고, 부모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자신처럼 서원을 한 형제에게 거의 무관심했다."(345-6)


9장 '이 광기 속에서 방법을 찾아라'


"〈자전적 도표〉(1336)라는 드로잉에서 오피키누스의 가슴에 위치한, 지중해를 의인화한 지도는 '내 동기의 계시'라는 문구로 완성된다. 유죄에 대한 자각과 고양된 죄의식은 당시 서유럽 사회의 각계 각층 사람들의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고, 설교자들은 이 의식을 적극적으로 증폭시켰다. 이런 자각과 의식은 인간 오피키누스 안에 집중되었고, 이와 동시에 전체 세계에 투영되었다. 우주는 죄로 가득 찼으며, 이 죄는 주로 이 개인의 영혼에 집중되었다.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도 오피키누스였고 이 세계를 자신 속으로 통합하는 것도 오피키누스 바로 그였다. 그의 정신 상태의 발산은 전세계에 퍼진다. 세계를 그리면서 오피키누스는 자신의 에고, 구원에 대한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결코 떠나지 않는 죄의식과 영혼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누그러지지 않는 두려움을 가지고 세계를 성찰했다."(374)


"우리는 중세에서 개인의 자기 자각의 성취는 심각한 장애물에 직면했으며, 때로는 정신적 질병과 관련된 현상을 수반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종교는 겸양, 참회, 죄의 속죄를 강조했고 개인의 독창성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이 독창성을 용납할 수 없는 자만심의 근원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비난으로 인해 에고는 자기 부정과 자기 비하를 통해서 또는 세계 전체를 포용할 정도로 자신을 확장시킴으로써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다. 오피키누스의 정신적 혼돈에 관하여 논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나는 그의 고양된 자기 자각과 심오한 죄의식 사이의 놀랄 만한 모순에서 그 혼돈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이처럼 갈등적인 상황에서 개인이 자기를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개인이 종교성의 무게와 여기서 유래하는 죄의식에 의해 분쇄되지 않았다면, 그의 퍼스낼러티는 정신적 질병의 징후처럼 보이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382)


10장 단테와 페트라르카


"단테의 글에서 직접적인 자기 찬양이나 자기 비하를 찾아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페르소나'에 대한 흥미가 부족해서가 결코 아니다.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름 아니라 중세에는 그런 류의 발언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단테는 자기 자랑이나 자기 검열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 이유도 설명했다. 그러나 분명히 단테는 자기가 뛰어난 개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각은 어떤 예외도 없이 저승세계 전체를 횡단하고 탐구하는 단테의 능력 안에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세계를 일련의 분산된 '장소'로 또 동시에 일관되고 조화롭게 조직된 체제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에도 반영되어 있다. 또한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자로 다름 아닌 위대한 베르길리우스를 선택한 것에도 이러한 자각이 반영되어 있다."(389-91)


"페트라르카는 그의 메시지 『후손에게』에서 진실로 겸양한 기독교인과 자신의 가치를 자각한 시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듯 보인다. 첫번째 인물인 '불쌍한 유한자(the poor mortal)'는 신의 면전에서 겸손함, 연약함,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이 모두는 중세 시대에는 일상적이었다). 전통에 따라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전 생애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킨 '개종', 즉 최고 진실의 발견에 대해 말한다. 죄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모든 생각을 '신성한 지식'을 향한 방향으로 돌렸던 것이다. 반면 두번째 인물은 월계수관을 쓰고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시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을 숨기지 않는다. 페트라르카는 위대한 시인에게 따르는 무한한 명예들을 열거한 후에 이 시인들은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분명히 인정한다. 그가 자신을 놀랄 만한 재능을 지닌 작가로 간주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91-3)


11장 개인을 찾아나선 역사가


"개인성의 자발적 발산은 기독교 중세 문화의 영역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주변, 즉 자기 제어나 겸양의 요구 같은 윤리적 통제가 도덕적 의무로서 아직 확고하게 뿌리 내리지 않았거나(스칸디나비아의 문학 작품에서 살펴봤듯이 집단에 통합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가치와 일정한 분리감을 자각하는 개인 같은 완전히 기독교화되지 않은 환경) 개인 자신의 이상 심리의 결과로 뿌리가 잠식된 장소에서 나타났다."(413) "개인과 개인성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이것은 산발적이었고 때로는 후퇴도 했으며, 때로는 매우 현격했다. 중세의 개인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인으로의 진화 과정은 일직선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두 개인은 전혀 다른 유형의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개인은 우리의 선조이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와 다른(생소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자신들만의 독특한 성질을 지닌 사람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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