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의 등장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4
아론 구레비치 지음, 이현주 옮김 / 새물결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1장 개인은 파악하기 힘들다


"바이넘은 (12세기의 개인화 과정 연구에서) '내적 인간(Homo interior)'에 대한 관심이 계발될 수 있었던 성직자와 수도원 공동체에 대한 분석만으로 논의를 국한시킨다. 그녀의 의견에 따르면, 이 시대의 남녀는 자신 안에서 인간 본성, 즉 '자아'(그 자신[seipsum], 육체적 존재[anima], 개인[ego])를 발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것(신의 이미지[imago Dei])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개인은 현대적인 의미의 개인이 아니라 중세 말에 발견되고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개인이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 풍경'(자아의 발견)에 대한 관심과 '개인의 발견'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벨라르와 그 밖의 다른 12세기 저자들은 윤리 문제를 논할 때는 진지한 의도를 갖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들은 개인을 유형이나 '모범'에 따라 나누었다."(28)


"이 시대 사람들은 '모범'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이미 존재하는 형태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찾고 또 발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 집단의 수가 증가하고 일종의 경쟁(구 수도회와 신 수도회)이 심해짐에 따라 사회적 역할의 다양성에 대한 자각이 핵심적인 쟁점이 되었고,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바이넘은 각자 고유한 내적 동기와 감정을 가진 독립적인 개인을 12세기 종교 생활의 중심에 놓는 것은 잘못이며, 모든 개인은 독특하며 따라서 개인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는 것만을 부각시키는 것 또한 잘못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에 들어와서 생긴 것이지 중세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내적 동기에 대한 탐구는 특정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함께 등장했으므로 이 시대에는 개인적 삶의 방식과 같은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과 집단은 다음 세기가 되어서야 분리되기 시작했다."(29-30)


2장 개인과 서사시 전통


"'영웅적'이라는 말은 스칸디나비아인의 의식에서 발견되는 기본 범주 가운데 하나다. 이 개념은 인간적 삶을 뛰어넘는 형식 속에서 자유와 한계를 동시에 가진 인간이지만 완전한 개인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영웅적이라는 범주는 이 시대의 시간관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영웅의 영광이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은 시간 속에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래에서였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고대의 시의 저자와 청중은 모두 영웅의 죽음에 주목했다. 영웅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짧은 생애 동안 영웅은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위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영웅의 태도는 미래를 바라보는 태도에 의해 형상화되며, 죽음은 영원불멸한 영광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세 가지 범주(영웅주의, 죽음, 시간)는 중세 내내 북유럽 사람들의 삶을 이끈 윤리적 규범의 핵심적인 측면이었다."(50-2)


"이 세 가지 요소 외에 운명(Fate)이라는 범주를 추가할 필요가 있는데, 운명은 세 가지 범주를 포용하고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영웅은 업적을 성취하고 마지막 죽음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그가 걸어나갈 길은 모두 '예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족 고유의 사상 체계에서 운명은 이 세계의 위나 저편에 있는 얼굴 없는 '운명(fatum)'도 아니며 눈 먼 운명의 여신(Fortuna)의 수레바퀴도 아니다. 운명(destiny)은 '프로그램'처럼 영웅 안에 '입력되었지만', 이 운명은 삶에 대한 개인적 태도의 일부분으로 지각되기도 했다. 영웅은 운명이 지시한 대로 따를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운명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운명을 '창조한다'. 이처럼 영웅의 운명은 영웅 자신의 본질을 표현하며 영웅은 운명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들이고 영웅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이 놀랄지라도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이 운명을 알린다. 영웅의 운명은 그의 존재의 일부분인 것이다."(52-3)


"스칸디나비아의 서사체 산문(narrative prose)인 사가는 문학 장르로 중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역사 자료다." "사가의 등장인물은 대체로 실존 인물들이다. 사가는 소설이 아니다. 사가의 청중뿐 아니라 저자도 사가에 서술되는 이야기는 실제의 삶에 충실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중세인이 이해하는 현실은 오늘날 우리가 현실이라고 이해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중세의 현실은 환상과 기적의 영역과 결합되어 있다. 사가에는 현실의 사람 외에 온갖 종류의 초자연적 창조물, 늑대인간(werewolves), '살아 있는 죽은 자(living dead)'가 등장한다. 마법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행동과 주술이 그랬던 것처럼, 예언과 꿈은 반드시 실현되며 사건의 진행을 결정짓는 요인들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가는 이 모든 환상적 요소들을 마치 일반인들의 행동이나 대화를 다루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또 그와 비슷한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있다."(81-3)


"무엇보다 사가 저자의 주된 관심인 결투는 각자의 이익과 열정에서 비롯된 인간들 사이의 투쟁이었고, 이 결투는 이와 관련된 인물과 그들의 자질이 드러나는 '인간적' 사건이었다. 결투를 통해 사가 영웅의 우수함이 측정되며 인간적 가치와 등장인물의 본질이 시험받는다. 결투는 인간의 모습을 한 인물들에 의해 수행된다. 그리고 그러한 결투의 기저에 깔린 동기가 엄밀한 의미에서 늘 인간적이거나 개인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더라도 그러한 이유는 사회의 눈으로 볼 때 개인이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의 개인은 집단 안에서 아직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았고 집단 원리가 이끄는 행동과 사상이 여전히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예와 공적, 좋은 평판, 가족, 친척, 친구의 명예에 대한 관심이 다른 사람들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였다." "사가의 저자는 영웅의 용기, 영웅의 강함과 전쟁 기술을 정성 들여 묘사한다."(88-9)


"사가에서 퍼스낼러티는 매우 애매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흐릿한 윤곽만으로 제시된다. 우리와 근접해 있고 좀더 이해하기 쉬운 문화에서 퍼스낼러티를 '원소'로 해석한다면, 이 시대의 개인의 퍼스낼러티는 그렇게 자기 충족적인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과 분리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개인은 가족적 연대, 소유나 우정으로 연결되지 않은 이방인이나 '외지인'과는 명백하게 구별된다.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개인은 신중한 입장을 취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언제라도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다." "주인공의 '자신과 같은 종류'의 동아리 안에서는 개인과 퍼스낼러티를 나누는 경계선이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이 동아리 안에서는 복수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즉 사가의 등장인물은 '자신과 같은 종류'와 자신을 분리시킬 수 없다. 도리어 그는 자신의 집단에 융해되는 듯하다. 개인은 그저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고리일 뿐이다."(99-100)


3장 페르소나: 개인을 찾아서


"인간의 의식 속에는 모든 사회적 행동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세계상이 존재한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고 실제로 사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기독교는 개인의 제도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신앙일 뿐 아니라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르침과 의지에 따라 세워진 사회 공동체이다. '자연적' 인간 또는 '육체적' 인간과 세례를 받고 '기독교적' 인간으로 변모한 사람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존재하는데, 이 간극은 '기선성' 행위를 통해서만 건널 수 있다. 세례 행위는 다름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일인 동시에 '자연적 인간'이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식이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인간은 구원의 기회를 얻는다. 기독교 공동체의 '문화적 코드', 원리, 규범을 흡수한 인간(human being)은 한 사람(person)이 된다. 1234년에 나온 한 텍스트는 〈그리스도 교회의 세례를 통해 인간은 한 사람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161-2)


# 기선성(initiation) : 신학 용어로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고 인간의 모든 일을 미리 예정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 성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를 통해 기독교는 개인의 '내적 공간'을 탐구하고 개인을 좀더 심오하게 이해하는 데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인간의 에고는 재해석되었고 추론과 오감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각, 의지, 인성을 가진 실체의 조합으로 파악되었다.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한 인간적 책임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주었던' 고전 시대의 전형적인 운명관을 받아들이는 대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운명도 아니요, 숙명도 아니요, 악마도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세계의 중심은 창조자를 대면하는 에고(ego)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극적인 감정으로 자신이 살아온 길에서 겪은 경험들에 반응했는데, 그는 젊었을 때는 죄가 넘치는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진정한 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기에 대한 앎은 신에 대한 앎, 즉 신에게 가는 길로 제시되었다." "개인의 자기 표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한 작품은 이 히포의 주교가 쓴 『고백록』이다."(164-5)


"그렇다면 중세 철학에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세 철학의 본질인 신학에서 개인은 어떻게 해석되었을까? 신학자는 개인이 아니라 '페르소나'를 다루고 있으므로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는 중세 내내 고도로 추상적이었다. 보에티우스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이성적이고 나눌 수 없는 본질(혹은 '이성적 본질의 개인적 실체')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전 자연에서 가장 완벽한 것, 즉 이성적 본질 속에 구현된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창조'보다는 '창조자'에게 사고를 집중하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또는 거의 유일하게 신, 즉 신성한 페르소나에 대해서만 말한다. 신성한 인성[예수]의 '페르소나들[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에 대한 탐구는 신의 삼위일체와, 신이며 인간인 그리스도의 이중적 본질에 대한 논의의 본질적 요소였다."(171-2)


"이 시대의 신학만이 개인의 인류학적 측면을 상세하고 고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유럽 언어의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돌려보면 퍼스낼러티, 개인성, 인간적 특성을 의미하는 모든 단어들이 얼마나 느리고 얼마나 힘겹게 일상적 언어에 편입되는지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심리와 관련된 개념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정착되어 일상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자아에 대한 개인의 태도나 자아의 자각을 의미하는 접두어 'self'와 관련된 단어들은 종교개혁 후에야 증가하였다. 개인적인 목표나 감정적 상태를 가리키는 일군의 단어들이 폭넓게 사용된 것 역시 종교개혁 이후였다. 개인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이해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개인의 영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독립적 존재로 간주되던 인간의 감정은 점차 개인의 감정적 성질, 즉 사람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 해석되었다."(175)


4장 전기문학과 죽음


"세속적인 근심과 목적 추구에 얼마나 매몰되어 있었는지 몰라도 중세인들의 행동적이고 감정적인 삶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두려움은 갑작스러운 죽음, 말하자면 기도나 '선한 행동'으로 준비되지 않고, 고백할 시간이나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용서받을 시간도 갖지 못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 시대에는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사제들은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죄의 참회와 속죄를 미루어서는 안 되며 적절한 시기의 참회는 신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끊임없이 설교했다. 교회의 프레스코 벽화에 그려진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는 무시무시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춤추는 사람(이들은 다양한 사회적 지위와 계층을 대표하고 있다)들 중 누구도 누가 이 춤을 이끄는지 그리고 언제 이 춤이 끝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179-80)


"중세 사람들은 동시에 두 세계에 초점을 두면서 세계를 성찰했고, 두 세계 사이에 지속적이고 활기찬 쌍방향 소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 중세인들의 신념에 따르면 삶의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실 더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개인에 대한 진실한 평가는 생전의 행동을 근거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었다(기독교 이전 시대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누군가의 영광스런 업적은 그가 죽은 후에도 남아 있는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왜냐하면 모든 영혼에 판결을 내릴 '최고의 재판관(Supreme Judge)'이 존재하며 죽은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죄인인지 정의로운 사람인지)는 판결이 내려지는 마지막 순간에야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피상적이고 무의미하다. 세속적 관심은 '영원'에 비하면 무의미하고 영원의 바로 그 문전에서만 영혼의 진실한 '가치'가 드러난다."(184-6)


5장 자서전: 고백록인가 변명서인가?


"학자들은 13세기 초에 고해성사가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는 사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의 주의를 끄는 것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공포된 결의문, 즉 모든 기독교인은 1년에 한 번 사제에게 고해해야 한다는 결의문이다. 규칙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고해는 신앙인들의 자기 분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고해는 자신의 행동이 죄가 되는지 정당한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해는 때때로 신앙인의 의식과 거의 관련이 없었고 고해성사의 신성모독으로 이내 타락하였다. 즉 수많은 신앙인들은 이런 종류의 자기 분석을 할 능력도 없었고 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고해성사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도울 수도 없었으므로 고해는 피상적 의식으로 격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의 원리는 세워졌고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자각의 발전 과정에서 이것은 중요한 단계였다."(201)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가 보기에 개인의 행동의 옳고 그름 또는 죄에서 자유로운지 여부는 개인의 행동과 이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내적 동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아벨라르는 주로 죄의식에 기초해 구원의 문제에 접근하려는 당시의 보편적인 방법에 반대하여, 신앙을 내면화하려는 경향을 철학적으로 실체화하였다. 이러한 원리는 전 시대에 본질적이었던 전통과 근본적인 단절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 이전 세대의 사람들은 행동의 의도나 감정적 상태를 완전히 무시당한 채 행동 그 자체로만 비난받았다. 이들은 관련된 사람의 정신을 무시하고 객관적으로 조명된 행동 그 자체만을 고려했다." "아벨라르의 분석의 핵심은 한 개인의 의사(意思, wish)에 있었다. 개인이 죄의 길을 걷게 될지 아니면 포기할지는 이미 내려진 도덕적 선택에 의거한다. 복음서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 말하자면 그 안에 담겨진 도덕법을 잘 알지 못한 사람은 죄가 없다고 아벨라르는 생각했다."(224-5)


"따라서 고백과 참회는 의식이나 의무적 과정으로서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지만 저지른 죄를 자각한 결과 생기는 진지한 감정적 불안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는 중요하다. 개인은 자신을 최후의 심판을 받을 존재로 인식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개인의 의식에 필연적으로 매우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구원은 개인의 정신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외적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구원은 내적으로 죄를 정화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 신과 의식적으로 '연합'한 후 진실로 그 구원을 얻으려 희망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미 오래 전에 상징이 된 인물들에 대해 말할 때에도 이 철학가의 시야에서 개인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벨라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을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제시하는 대신, 비극적 상황에 사로잡힌 실제적 개인으로 제시한다. 아벨라르는 삼손이라는 성서적 인물 안에서 고통받는 인간을 바라본 최초의 작가였다."(225-6)


"아벨라르의 『나의 불행 이야기』를 자서전이라 부를 수는 결코 없다. 자서전과 유사한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충분히 진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치유할 수 없는 자만심의 정신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고백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 책은 오히려 변명서(apologia)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 참회 형식을 빌려 자기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다. 게다가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이용하여 자신을 고양시키려 하였다. 우리가 그의 신산한 삶의 사건들과 위기의 순간에 겪은 감정적 경험에 대해 많이 알게 된 후에도 개인으로서의 그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퍼스낼러티는 가면 뒤에 숨겨져 있다. 더욱이 가면은 여러 개다. 왜냐하면 그는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대로 이 가면, 저 가면을 갈아 썼기 때문이다." "이론상 고백록은 솔직한 진술들을 담고 있어야 하지만 아벨라르의 고백은 표현할 수 없거나 표현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숨긴다."(248-9)


"그러나 아벨라르 안에서 비로소 새로운 유형의 개인, 즉 자발적 개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자발적 개인은 자신의 내적 세계를 보호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끊임없이 불편한 관계를 맺으면서,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도록 부추기는 갈등에 사로잡힌 개인이다. 수도원, 학교, 철학자들 사이 그리고 교회 세계 등 모든 곳에서 음모의 덫이 항상 자기 주변에 만들어지고 있다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즉 그의 퍼스낼러티의 특징 때문에 그리고 그가 획득하고자 했던 새로운 사회적 지위 때문에 그는 어떤 집단과도 동화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따라서 끊임없는 갈등이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느낌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역으로 기존의 틀을 전혀 못 견뎌하는 개인에 대해 사회가 왜 그토록 유보적이고 종종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는가를 설명해준다."(251-2)


"야콥 부르크하르트, 칼 람프레히트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유럽 문화에서 인간 개인성에 대한 관심이 처음 등장한 것은 르네상스 시기라고 주장한다. 그 이전에는 관심의 초점이 늘 '전형적인 것'에 쏠려 있었고 개인성은 경멸되었다는 것이다. 12세기와 13세기에서 '개인이 발견된다'고 말하는 현대의 학자들은 비록 매개 변수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로 이런 전제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10세기와 11세기로 좀더 거슬러 올라가도 등장인물의 개인적 특성과 개인의 모습에 대한 관심이 문학에서 발견되며, 이런 관심은 연대기를 비롯한 여타 역사물뿐 아니라 몇몇 성부전에서도 발견된다고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왔다." "에티엔느 질송은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분석하면서 이들을 일반적 법칙에 대한 예외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결코 예외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인간적 현상이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진다."(266)


6장 다섯 달란트 우화


"중세의 개인 탐구와 관련하여 독특한 흥미를 제공하는 베르톨트의 설교는 『다섯 달란트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베르톨트는 신성로마제국의 공위 기간(제왕의 서거나 폐위 등으로 왕좌가 비었던 기간) 동안 설교자로 활동했다. 중앙 권력의 약화, 강해진 선제후의 영향력, 내전의 증가, 강도 기사(robber knight)의 증가, 시민권의 침식, 지배자들의 변덕스러운 신민 통제, 소작농 탄압, 불안정한 도시 상황, 이 모든 것이 약 1250년과 1275년 사이의 기간, 정확히 말해 베르톨트가 설교한(그는 1272년에 죽었다) 시기의 독일의 상황이었다." "이처럼 혼란이 만연한 중요한 순간에 사람들은 특별히 인간성의 핵심, 본질, 운명에 대한 영원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정확히 이 시기에 독일에서 오직 정신의 탐구에만 전념하던 것이 예술적이고 지적인 활동의 흥미로운 만개를 가져온 것 역시 우연은 아니다."(273-4)


# 다섯 달란트 : 페르소나(자기자신), 소명(직분), 지상에서 보낼 시간, 재산, 타인과의 관계(이웃 사랑)


"베르톨트는 얼굴 없는 대중에게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청중은 개개인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베르톨트는 주인이 하인에게 맡긴 달란트에 관한 신약의 우화를 설교 주제로 선택했다(「마태복음」 25:14~30). 베르톨트는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이 우화를 독창적으로 해석했다. 실제로 '달란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르톨트는 하인 한 사람에게 일 달란트를 맡긴 부분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그는세례받지 않은 아이들과 관련해서 이 우화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례받은 아이들을 의미하는 다른 하인에게 맡긴 두 달란트와 관련되는 부분 역시 한편으로 제쳐 두었다. 베르톨트는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세번째 하인에게 다섯 달란트를 준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베르톨트는 이 사람에게서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완전히 책임질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인간을 읽는다. 베르톨트는 개인의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278-80)


"신이 인간에게 준 첫 선물은 자유의지를 지닌 '페르소나'였고 두번째 선물은 개인의 사회적 기능 즉 지위와 직업의 소명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희망에 따라 직무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신의 의도를 따라 직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직업을 바꾸거나 한 사회 범주에서 다른 사회 범주로 이동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레겐스베르그의 베르톨트가 이해하는 '페르소나'는 사회적으로 결정된 개인이다. 개인의 특성은 계급, 지위, 사회 집단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베르톨트가 말하는 '페르소나'에는 법률 서적의 '추상적 개인'은 없었고 지주, 지배자, 기사, 농부, 장인, 상인 같은 다양한 사회 유형만이 존재했다. 상인의 퍼스낼러티를 구성하는 요소는 기사의 그것과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수도승의 퍼스낼러티의 구성 요소는 농부의 그것과 다르다. 베르톨트의 사상은 다양한 지위와 조합으로 이루어진 위계질서 속에 살던 중세 개인의 자각이 가진 특수한 속성을 분명히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287)


"따라서 '페르소나', 직무나 일, 시간과 재산은 분리될 수 없는 전체로 설교된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동시에 전체로서 사회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런 이익은 신의 의지가 준행되었다는 익숙한 종교적 형태로 제시된다. 달란트는 원래 신의 소유이지만 신은 선하게 사용되기를 바라며 인간에게 달란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신학 형태 이면에 설교자 자신도 인식 못한 새로운 세속적 내용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즉 친숙한 신학적 세계관과 상인 계급의 사회적 의식 안으로 슬며시 들어온 세계관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상인들의 의식의 중심에는 (최소한 비공식적이나마) 인간과 그들의 세속적 욕망이 들어서 있었다. 이들의 새로운 세계상은 창조자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았고 이런 의미에서 신학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미 새로운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다."(297-8)


7장 기사와 상인


"기사는 단독으로 전투에 임했으므로 무엇보다 자신의 힘과 용기에 의지해야 했다. 그를 보호하는 것은 잘 짜여진 전투대형이 아니라 사슬 갑옷, 무기, 대응 속도와 기마술이었다. 말을 탄 기사는 자족적인 이동 요새와 유사했다." "기사의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은 엄격한 법칙과 고도의 의식(儀式)에 종속되어 있었다. 기사 계급에 들어가기 위한 의식, 전장의 싸움이나 마상창시합 참가, 서정시와 유행, 언행에 대한 예절들은 모두 상징주의와 보편적 규약이 함께 녹아 있는 규범의 지배를 받았다.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그는 사회의 '중앙 무대', 특히 다른 기사들 사이에서 중앙 무대에 있을 때에만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생각했고 그렇게 느꼈다. 기사에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고귀한 사회 계층의 대표자로 제시해야 함을 의미했다. 기사는 마상창시합에 참가한 동료 기사와 아름다운 여성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306-7)


"기사들이 자기 자신을 특별한 사회적 기능을 가진 계급(ordo)으로 자각하기 시작한 역사적 시기는 13세기였는데, 이 시대는 기사들이 자신을 개인으로 보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롤랑, 프로방스의 서정시, 독일의 음유시처럼 기사도적 용기와 특별한 영웅을 찬양하는 서시시가 등장한 이 시기는 기사 문화의 상승기였다. 기사도 윤리는 새로운 가치를 낳았다. 우선 개인의 열정을 전례가 없는 높이까지 고양시킨 궁정식 예절과 궁정식 사랑이 그러했다. 그리고 생과 같은 우연한 속성이 아니라, 개인을 특징짓는 도덕적 자질의 모든 영역에서 확인되어야 할 기사의 명예와 고귀함 등 새로운 가치가 탄생하였다. 프랑스의 서정시인과 독일의 음유시인들이 예찬한 숙녀들은, 여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개별화된 이상(ideals)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면 세계를 좀 더 깊이 통찰하고 사랑의 감정적 경험에 주의를 집중하려고 노력한 기사도 시인들이 이루어낸 결실이었다."(308)


"알레고리와 기억을 활용한 『장미 이야기』 같은 로망스의 영웅은 방황하는 기사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대면하거나 진실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도 있는 탐험과 모험을 소망한다. 명민함, 다재다능, 교묘함, 심지어 다른 사람을 속이는 능력(engin, ingenium)이 기사에게 요구된다. 기사는 오직 자기만을 의지하고 자신의 정신·육체적 힘과 기술에 의지해야 한다. 한편 그는 일상적인 사회 세계와 분리되어 있으므로 이 세계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대때로 이 소외감은 광기와 거친 상태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런 극한 상황 즉 '경계선' 상태를 통과해야 로망스 영웅들은 내적 평화, 연인 또는 신과의 평화를 얻는다. 트리스탄과 퍼시벌, 그리고 궁정식 로망스의 다른 등장인물들에서 우리는 맹렬하게 자신의 내적 에고를 찾는 개인의 모습을 대면한다." "이처럼 기사의 사회·심리적 지위가 개인화로 향하는 특별한 경향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이런 경향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통제되고 있었다."(312-5)


"(상인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개인은 시간을 중시했다. 도시 거주자들은 시간의 흐름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사람들은 좀더 규칙적으로 시간을 계산했고 이와 동시에 도시의 명성을 높일 수 있게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의 도시의 탑에 기계 시계가 장착되었다. 시간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보물이라는 찬사를 더욱 빈번하게 듣게 되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의 인본주의자, 베르나르디노 다 시에나 같은 설교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상인들은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는다. 상인들의 일은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상인들은, 신은 자신의 일을 적절하게 조직하기 위해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을 돕는다고 믿었다. 지상 세계와 지고의 세계 사이에는 상호 이해와 상호 작용이 있었다. 이 시대의 많은 상업 문서에는 사업이 번영하도록 도와달라고 창조자, 성모 마리아 및 성인들을 부르며 호소하는 말들이 들어 있다!"(331)


"개인의 세속적 성공이 구원을 위한 신의 선택을 받은 징조라고 믿는 사상(프로테스탄트 윤리)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는 종교개혁은, 로마 문화권에서는 실패했지만 게르만 문화권에서는 성공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은밀한 심처(心處)' 속에 운명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회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행운'에 대한 고대 게르만 개념이 중세 말에 다시 한번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출신의 한 상인은 자신의 선조가 '자비, 행운, 이익'으로 신의 보답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세 개의 두운으로 이루어진 이 상투적 문구는 신의 은총과 상업적 수입 사이에 운명이 딸린 행운이 있다는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 부는 한편으로 창조자가 높은 곳에서 내려준 성공과 기업가의 부단한 노력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로마 가톨릭 국가에서도 자본주의적 관계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보면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탄생에서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된다."(332-4)


8장 수사 살림베네와 다른 사람들


"살림베네가 글을 쓸 당시는 천년왕국설이 요아킴주의의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요아킴 델 피오레는 성령의 시대가 1260년에 시작될 것이라 예언했는데, 정확하게 바로 이 때에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호엔스타우펜의 힘이 붕괴되자 신성 로마 제국이 종식되고 있다는 전망이 대두되었다. 세계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 실현되고 있는 듯했다. 새로운 불안이 이탈리아에 출현하였으며, '형제단(Apostle Brethren)'으로 알려진 운동이 시작된 것도 1260년이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옹호했고, 재산, 노동, 부역을 거부했다. 이와 동시에 편타(鞭打) 고행자들의 행렬이 이탈리아의 도시와 마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쉽게 감격하고 심지어 신경을 다 소모할 정도로 뭔가에 매달리는 불건전한 신경병적 성향이 만연한 역사의 바로 이러한 순간에 사람들이 개인을 예민하고 날카롭게 관찰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345)


"우울함, 두려움, 비관주의, 피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전망, 이런 것들은 후대에 증언을 남긴 특별한 개인과 대중을 사로잡은 감정들이었다. 개인들은 이제 믿을 것은 자기밖에 없으며 어떤 조언이나 충고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없으며, 자신은 분리되고 고립되었다고 느꼈다. 사회 구조가 좀더 복잡해지고, 개인은 공통점이 전혀 없는 서로 다른 원리에 근거를 둔 수많은 집단에 소속되고, 안정적인 심리적 총체를 제공하던 전통적 소사회가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 상황이 출현한 것이 바로 이 시대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고 지적 '박탈'의 결과로 개인은 새로운 자각을 얻었는데, 이러한 자각은 주로 극단적 이기주의와 도덕적 허무주의로 표현되었다." "이 같은 경향은 살림베네에게서도 많이 발견된다. 그는 가족적 유대감이 부족했고, 부모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자신처럼 서원을 한 형제에게 거의 무관심했다."(345-6)


9장 '이 광기 속에서 방법을 찾아라'


"〈자전적 도표〉(1336)라는 드로잉에서 오피키누스의 가슴에 위치한, 지중해를 의인화한 지도는 '내 동기의 계시'라는 문구로 완성된다. 유죄에 대한 자각과 고양된 죄의식은 당시 서유럽 사회의 각계 각층 사람들의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고, 설교자들은 이 의식을 적극적으로 증폭시켰다. 이런 자각과 의식은 인간 오피키누스 안에 집중되었고, 이와 동시에 전체 세계에 투영되었다. 우주는 죄로 가득 찼으며, 이 죄는 주로 이 개인의 영혼에 집중되었다.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도 오피키누스였고 이 세계를 자신 속으로 통합하는 것도 오피키누스 바로 그였다. 그의 정신 상태의 발산은 전세계에 퍼진다. 세계를 그리면서 오피키누스는 자신의 에고, 구원에 대한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결코 떠나지 않는 죄의식과 영혼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누그러지지 않는 두려움을 가지고 세계를 성찰했다."(374)


"우리는 중세에서 개인의 자기 자각의 성취는 심각한 장애물에 직면했으며, 때로는 정신적 질병과 관련된 현상을 수반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종교는 겸양, 참회, 죄의 속죄를 강조했고 개인의 독창성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이 독창성을 용납할 수 없는 자만심의 근원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비난으로 인해 에고는 자기 부정과 자기 비하를 통해서 또는 세계 전체를 포용할 정도로 자신을 확장시킴으로써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다. 오피키누스의 정신적 혼돈에 관하여 논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나는 그의 고양된 자기 자각과 심오한 죄의식 사이의 놀랄 만한 모순에서 그 혼돈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이처럼 갈등적인 상황에서 개인이 자기를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개인이 종교성의 무게와 여기서 유래하는 죄의식에 의해 분쇄되지 않았다면, 그의 퍼스낼러티는 정신적 질병의 징후처럼 보이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382)


10장 단테와 페트라르카


"단테의 글에서 직접적인 자기 찬양이나 자기 비하를 찾아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페르소나'에 대한 흥미가 부족해서가 결코 아니다.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름 아니라 중세에는 그런 류의 발언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단테는 자기 자랑이나 자기 검열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 이유도 설명했다. 그러나 분명히 단테는 자기가 뛰어난 개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각은 어떤 예외도 없이 저승세계 전체를 횡단하고 탐구하는 단테의 능력 안에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세계를 일련의 분산된 '장소'로 또 동시에 일관되고 조화롭게 조직된 체제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에도 반영되어 있다. 또한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자로 다름 아닌 위대한 베르길리우스를 선택한 것에도 이러한 자각이 반영되어 있다."(389-91)


"페트라르카는 그의 메시지 『후손에게』에서 진실로 겸양한 기독교인과 자신의 가치를 자각한 시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듯 보인다. 첫번째 인물인 '불쌍한 유한자(the poor mortal)'는 신의 면전에서 겸손함, 연약함,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이 모두는 중세 시대에는 일상적이었다). 전통에 따라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전 생애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킨 '개종', 즉 최고 진실의 발견에 대해 말한다. 죄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모든 생각을 '신성한 지식'을 향한 방향으로 돌렸던 것이다. 반면 두번째 인물은 월계수관을 쓰고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시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을 숨기지 않는다. 페트라르카는 위대한 시인에게 따르는 무한한 명예들을 열거한 후에 이 시인들은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분명히 인정한다. 그가 자신을 놀랄 만한 재능을 지닌 작가로 간주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391-3)


11장 개인을 찾아나선 역사가


"개인성의 자발적 발산은 기독교 중세 문화의 영역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주변, 즉 자기 제어나 겸양의 요구 같은 윤리적 통제가 도덕적 의무로서 아직 확고하게 뿌리 내리지 않았거나(스칸디나비아의 문학 작품에서 살펴봤듯이 집단에 통합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가치와 일정한 분리감을 자각하는 개인 같은 완전히 기독교화되지 않은 환경) 개인 자신의 이상 심리의 결과로 뿌리가 잠식된 장소에서 나타났다."(413) "개인과 개인성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이것은 산발적이었고 때로는 후퇴도 했으며, 때로는 매우 현격했다. 중세의 개인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인으로의 진화 과정은 일직선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두 개인은 전혀 다른 유형의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개인은 우리의 선조이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와 다른(생소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자신들만의 독특한 성질을 지닌 사람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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