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1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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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권력구조의 문제


제1장 바이마르공화국의 형성에 대하여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의 길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귀족과 독일 부르주아층의 결합을 거쳤다. 그리하여 1870/1871년의 승리는 혁명의 정신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결산일 뿐만 아니라 독일적 정치발전과 서방적 정치발전 사이의 분열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 민족적 성공들은 민주적 이상의 빛바랜 광채보다 통일의 사상과 성공의 경험으로부터 더 강한 인상을 받았던 자유주의자 다수를 비스마르크 지지자로 만들었다. 민족적 이데올로기 앞에서의 시민적 자의식의 이 내적 붕괴는 독일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단절을 표시했다. 봉건적 사회구조와 강력한 관료제에 기초한 〈민주적 장식물로 치장한 군주적 국가〉는 이제 시민을 안전하게 길들일 줄 알았다. 비스마르크의 헌법조작,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들, 프로이센 지배의 군사정치적 및 정신적 전통을 통하여 대의제적·민주적 발전은 저지당했고 세기 전반기의 징후들 역시 뒤로 내던져버려졌다."(50-1)


"1918년의 혁명은 양면성─패전의 비참함과 〈응급처방이자 전술적 방편〉으로 도입된 민주주의의 불충분함─을 가진 사건이었으며, 공화국은 국가질서를 전혀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았고 강력한 봉건적 및 관헌국가적인 기구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요구들을 힘들이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대두하였으며 그 존재가 독일제국의 패전과 연결되어 있으며 지속적으로 부담을 안고 있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약체성은 이중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 사상의 정착과 젊은 국가의 역사적 기초에 대한 의식의 심화가 어떤 시기에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활발한 반대세력들은 겉보기에만 그리고 단기간에만 움츠러들었다; 그들은 심지어 혁명이 일어났던 몇 주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쟁 전과 전쟁 중의 선전을 벗어나지 못한 정치적으로 피동적인 대중을 곧 다시 장악하였다."(64-5)


"급속히 재강화되는 대산업, 10만 병력으로의 감축 뒤에 팽팽하게 자율적으로 조직화된 제국군대, 새로운 질서에 의해 거의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은 관료의 중단되지 않은 권력, 곧 다시 화해불능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전락하는 정당들, 사회적 및 경제적 이해관계들을 대변하는 실질적으로 강화된 집단들, 사려 깊게 보호되고 섬세하며 모든 신분상의 하락을 배상하고도 남는 위신에 대한 다양한 사회계층들의 욕구, 특히 순수한 민주적 타협을 거부한 군주적-보수적 및 민족주의적 반대운동들의 세력 및 영향력 강화: 이 모든 원심적인 세력들이─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공화국의 권력분배를 문제 삼았고 무의식적이지만 상당히 효과적으로 끊임없이 발호하는, 위기의 순간들에 위험스럽게 발생하는 아주 상이한 상대들의 연합으로 결합되었는데, 약한 민주주의 국가는 이들에 대해 충분한 방어수단도, 효과적 통합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다."(78-9)


제2장 의회민주주의에서 대통령제 국가로


"전후 몇 년간의 난제들에 직면하여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으나 정부 부처 관료들의 반의회적 활동들에 도움이 된, 각료에게 폭넓은 전권을 양도한 결정은 입법부를 상당한 정도로 약화시켰다." "의회적 공화국의 민감한 구조와 그것을 지탱하는 정당들 사이의 대립들이 흔히 정부형성시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를 초래했기 때문에 곧 성과 없는 연정협상 대신에 그들의 전문지식, 사회적 처지 및 정치적 태도 덕분에 관료층의 신뢰를 보장받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를 세우려는 경향이 형성되었다. 이로써 헌법이 그것에 허용한 권력에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제국의회는 통제기관으로서 더욱 강하게 공격을 받았다. 경제적 관계들의 복잡화로 국가가 경제에 점점 더 간섭을 확대하고 정당은 이익단체들의 영향을 받게 됨에 따라 권력은 입법부로부터 국가관료 및 사적 관료의 수중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서 의회는 더 이상 아무런 통제를 행사할 수 없었다."(86-9)


"의회적 정치구조를 파괴하고 비스마르크-빌헬름적 관헌국가를 복구하려는 그러한 시도들은, 분화된 정당구조 덕분에 정부 형성은 연정의 틀 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특히 더 위험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불안정한 타협의 기초 위에서 사람들은 의회적으로 약한 내각, 대다수의 경우에 심지어 단지 관용받는 소수내각을 넘어서지 못했다." "정부의 결성은 의회 다수당을 통한 당연한 권력 인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별로 안정적이지 못한 연립정부를 창출하기 위한,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힘겨운 협상을 의미했다. 그러한 협상에서는 실제적인 연정강령뿐만 아니라 장관 자리의 분배도 중요하였다. 야당이 여당을 교체하거나 그 거꾸로 교체하는 관습은 의회의 다수파 구성 상황으로 형성될 수 없었다. 동시에 계속적인 연정구성의 어려움들은 정부의 연속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요와 더불어 이미 일찍부터 정부 구성에서 제국대통령의 기능을 강화시켰다."(90)


"이론적 토론은 항상 재삼재사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정당국가적인 실제 사이의 차이를 물고 늘어졌으며, 이 대립들을 너무 낙관적으로 그리고 분별없이 동일시했다." "의회적인 정당국가를 둘러싼 징후적 논쟁은 이미 세계경제 대공황이 발생하기 오래전에 상당한 규모에 달했다. 한 유명한 법학자의 1927년 베를린에서의 총장 취임 연설은 한 사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매우 조심스럽게 권위주의적 국가론의 초안이 구체화되었으며 이것을 대통령제 정부 그리고 특히 파펜 실험의 문필적 및 정치적 지지자들이 수용할 수 있었다. 정당국가에 대한 이 비판 역시 정당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위탁에 결속된 〈인민의 심부름꾼〉으로서의 의원에 대한 〈순수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칼 슈미트가 동일한 이름의 글에서 (극복해야 할) 〈오늘날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기초〉라고 일컬었으며, 그것이 1919년 독일헌법도 완전히 지배했다."(98-9)


# 정당정치 내의 의원들이 토론이 아니라 파벌들의 결정─책임지지 않는 익명의 권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의회적) 정당국가는 극복되어야 한다는 주장


"반동적-군국주의적 및 민족주의-권위주의적 집단들의 비타협적 태도 못지않게 파국적이었던 것은 여기서 새로운 헌법의 구속력 없는 자유주의를 내키지 않아 했고 혁명사건들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단초들을 배신당한 것으로 믿었던 사회주의적 성향의 대중들의 실망으로 인한 냉담성이었다. 이렇게 해서 의회는 극단적인 좌·우 급진정당들을 얻었으며 그 강세는 곧 집단들의 자유로운 대결과 건설적인 야당의 여지를 거부했으며 의회적 메커니즘을 결국 치명적으로 마비시켰다." "〈순수하지 못한 다수〉로의 그들의 성장은 의회를 완전한 마비와 지속적 자기해체의 상태로 빠지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속에서는 초의회적이고 권위적인, 민주적 헌법을 극도로 긴장시키며 결국 파괴하는 조치들만이 통치를 가능하게 했다." "바로 이것이 결국 민주적 틀을 파괴했고 집단들의 끝없이 고조된 적대상태를 갑작스런 폭력적 종말로 몰고 갔다."(108-9)


"이 과정에서 단 하나의 헌법결정의 도입과 확장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유명한 제48조는 계엄입법과 비상사태입법의 전통에 접속하였다; 그것을 헌법으로 삽입한 것은 국민의회에 의해서 많은 우려들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민주적 성향의 의원들 다수의 동의를 얻어 당시 국가의 내·외적 상황에 직면하여 가결되었다." "여기서 제국대통령의 예외권과 비상령권의 삽입은 분명히 (민주주의자였던) 에버트의 인물에 맞추어져 있었고 결코 헌법을 초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위기상황에서 헌법의 온전한 보존과 헌법적 질서의 재건을 위한 수단으로서 의도되었다. 공화국 초기에 제48조의 적용도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그 당시는 물론 권위주의적 해결책의 가장 용감한 지지자들조차도 이 조항이 언젠가 매년 계속하여 정부의 모든 시도들의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고 전체주의적 국가질서로의 이행을 지지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계산하지 못했다."(116-8)


# 힌덴부르크 제국대통령 선출 이후 권위주의적 대통령군주제의 기반으로 해석·활용되었다.


제3장 민주적 공간에 있는 정당들


"유일하게 의회정치를 가능케 했던 정당들의 연정(聯政)은 점점 더 이익단체들과의 연결 및 그들 조직의 진입을 예상해야 했고, 이는 정당들의 내부구조와 기능적 배치를 계속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공화국의 정당구성이 전체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은 채 과거 붕괴되었던 군주제 상태에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국가가 지속적 안정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에서 가정할 수 있는 것만큼 좋은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빌헬름 국가의 정당들은 갑작스럽고 결코 예상하지 않았던 혁명에 의해 새롭게 부여된 위치, 즉 임시적인 의회민주주의의 첫 번째 책임자라는 아주 상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곧바로 내외적으로 경직화 경향, 즉 군주제적 권위주의 국가에서 정당과 의회가 맡았던, 소극적이고 찬반에서 거의 무의미한 역할에 부응하는 외형과 내용을 채택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143-4)


"가령, 사회의 가장 약한 부류인 〈노동자 계층의 삶의 원칙〉으로서의 철통같은 조직, 수와 조직 면에서 뛰어난, 거의 군대와 같은 결합을 통한 대중의 구조화를 자랑했던 사민당의 전통적 형태들과 탄탄한 결속은 흔들렸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이러한 이질화 과정과 이에 수반한 지도부의 마찰, 그리고 독립사민당(USPD), 스파르타쿠스동맹 및 공산당의 이탈을 가져왔던 극좌파에서의 분리경향 등에 맞서서, 곧바로 사민당 중도파의 조직적 이념적 경직화가 시작되었다. 중도파는 과거 투쟁에서 전수되었던 조직의 내부 원칙에 의존했고, 또한 지도부의 구성뿐만 아니라 외부와 관련한 당의 전술과 당 내부의 통합과정에서도 단호하게 전쟁 전의 전통에 의존했다." "특히 〈반동적〉 제국군대에 대한 불신은 처음부터 공권력 중 군대와 같은 권력요소에 대해서 본질적인 영향력 행사를 방해했고, 이 요소가 결국 우익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144-6)


"바이마르 국민의회에서 계속된 경향, 즉 사민당 의원들 중 절반 이상이 노조 경험을 갖고 있고, 그들 중 3분의 1 이상에게 노조관료가 본업이었다. 설사 그들이 정식으로 당 경력에 연결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주 의회, 지자체 의회 그리고 작은 행정기구에서 일했다 하더라도, 당과 노조간부들의 권력과 정치양식은 꼼꼼한 관료지배의 빛과 그림자 모든 면을 지니면서 의회활동, 즉 당의 의회주의적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고 제국의회 원내교섭단체의 전술적 활동을 현저하게 제한했다." "사민당 의원들은 사적 관계를 통해 당 지도부와도 확실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사민당 원내교섭단체의 행동과 주도권은 자주 당론과 의회 외부에서 활동하는 다른 기관의 결정을 선도했다. 거기에 계속적으로 현실적인 개혁적 방향으로 기울었고, 자신들의 조합원들이 사민당 지지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사회주의 계열 노조들의 영향이 첨가되었다."(152-3)


"긴장의 해결방식과 기존 국가와 사회질서에 대한 사민당의 입장은 다른 민주정당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현실노선을 추구하는 점진적 사회주의의 참여 하에서 구성된 바이마르 연정의 안정과 유지─이것은 바이마르의 기회였다. 이것 대신 우리는 전통적 야당의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주저하고 당 구조 및 당의 이데올로기적·마르크스적 이상을 새로운 과제에 적응시키는 데 머뭇거리는 사민당의 완고한 망설임을 기록한다. 이는 또한 우파 및 극좌파의 모든 접촉시도를 반대한 민감성과 연결된다. 지금까지 신뢰할 수 있었던 유권자 계층을 잃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이념적이고 조직적인 부동성이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을 해야 할 시점에서 우유부단하고 이중적인 그리고 결국은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결정했다." "이로써 나치가 승리하기 오래전에 이미 공화국 최후의 보루로서의 그들의 권력은 거의 저항 없이 차례로 무너졌다."(161)


# 주요 우파 정당들

1. 독일민족인민당(DNVP) : 반反혁명·반反공화주의 세력들을 주축으로 결집된 정당

2. 독일민주당(DDP) : 공화국의 안정과 자유주의 구축을 우선시한 부르주아 정당

3. 독일인민당(DVP) : 국내정치보다 강대국과의 외교정책을 중시한 부르주아 정당

4. 중앙당 : 반反극단·반反권위주의적 태도로 타협자세를 유지한 가톨릭 기반 정당


"중앙당이 핵심부를 중심으로 아주 안정적으로 그룹화되고 마지막까지 사회적으로 다채로운 〈국민정당〉(Volkspartei)으로 남았던 반면, 독일민주당과 독일인민당뿐만 아니라, 온건한 보수주의적-기독교적 우파와 독일민족인민당 역시 변형과 해체 과정의 소용돌이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큰 흐름은 사민당의 조직 자체는 흔들지 못했지만 그들의 정치 활동은 마비시켰다. 공산당과 나치당은 이러한 역동성의 양극점이 되었다." "〈독일중간계급 제국당〉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유사 정당들〉 역시 바이마르 정당체제의 이러한 위기적 전개의 테두리에서 일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파괴적 효과는 의회소속 정당들의 통합관심을 여론과 유권자의 영역에서 민감하게 교란시켰고─정치적 대립을 화해할 수 없는 개별 이해들의 적대감과 증오의 태도로 변형시킴으로써─다수당을 구성하기 위한 협력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179)


제4장 전체주의적 정당들의 발흥


"의회 메커니즘을 결국 완전히 절름발이로 만드는 데 성공한 두 정당은─각자 자기 나름대로─1918년 혁명과 관련된 문제 덕분에 형성되고 프로필을 얻게 되었다. 독일공산당(KPD)은 혁명이 의회적인 경로로 들어서고 바이마르공화국의 타협안이 소련식의 발전 과정에 의도적으로 대립적인 방향을 취하게 되었을 때 최종적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서 평의회 혁명가들은 다수파사민당(MSPD)의 길에서 이탈해나갔다. 나치당(NSDAP,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소속당)은 이에 반해 혁명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이 사건은 보수적-군주적 집단에 의해 역사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특수집단들은 일반적인 야당적 태도를 넘어서서 우선 혁명과 패전의 결과로서 바이마르공화국과의 어떤 전술적 타협에도 반대하는 반(反)혁명적 활동을 전개했다."(183-4)


"독일공산당과 나치당의 형성 과정과 내정적 위치는 일정한 유사성을 보였는데, 이것은 조직형식을 보더라도 확인이 된다." "이들은 민주적 다원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명령구조로, 의회적 타협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획일화된 독재 방식으로 맞서고, 연정과 야당의 위치를 주고받는 게임에 기초한 민주적 연속성을 애초부터 봉쇄했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내부 운동과정은, 이것은 자유로운 국가 내의 사회 유동성의 정치적 표현인데, 정치적 자유를 결코 훼손하지 않는 합법적 표현 형식에서 제약을 받게 되었다. 동시에 역동적인 정치적 발전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민주적 의미에서 다수당 연정이나 야당연합의 형성에 지속성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의회정당들의 한계를 넘어서 의회를 초월한 영역으로 치달아, 결국에는 완전히 전체주의적이고 어떤 화해도 거부하는 정치적 구원종교의 영역에로 흘러들었다."(184-5)


"1919년 창설된 코민테른은 주도적 역할을 차지하면서 무엇보다 서방에서 실패한 혁명 대신 러시아 혁명의 영광을 실현하고자 했으며 (독일공산당은) 명백히 모스크바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공산주의 당 노선의 고립된 성격이 이러한 제한을 통해 그만큼 더 첨예하게 바이마르공화국의 내정적 역동성 한가운데서 드러난다. 이 성격은 1928년 이후 당의 성장, 곧 영향력 증가와 유권자의 바람이 갖는 일정한 고유 비중을 통해서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공산당의 명령과 복속 구조는 이러한 최악의 경우에조차 견지되었고, 대중적 기반이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간부정당으로서의 공산당은 원격조종되었고 종교와 비슷한 형태의 기대내용들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호전적인 나치조직과의 경쟁에서 더욱 강화된 바 있다." "그러나 혁명적인 반란시도들이 실패하고(1918~1923) 의회제공화국이 안정화되면서 공산당은 합법적 영향력을 통해서 대중을 얻으려는 방법으로 전술을 바꾸었다."(194-5)


"극단적 저항운동으로서 나치즘은 국민의 정치·사회적 구성에 대한 생각에서만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반(反)자본주의적 논리와 혁명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사회질서, 관료적 관헌국가를 전복하기보다는 그것의 보다 철저한 조직화와 계서적이고 명령추종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기반 및 권력확장을 지향하는 일련의 주장들을 가지고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나치당은 단순한 반항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적개심운동'으로서 시작했다. 군사적 패배와 〈과다한〉 민주적 변혁으로 비로소 정치화된 소수의 실망자들이 그 핵심을 형성했다. 1930년 이후 대중정당의 조직화된 지지층, 특히 간부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자기 신분과 가족 내에서 스스로를 국외자로서 느꼈으며 노이로제가 될 만큼 자존심이 상했고, 균형감각을 갖지 못하고 적응을 잘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밖에도 괴벨스 현상에서 표현된 것처럼 정치적 영향력을 얻게 된 프롤레타리아화한 지식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201-2)


# 나치운동의 세 가지 뿌리

1.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반反의회주의 감정에 기반한 저항

2. 경제적·사회적 위신의 하락을 두려워한 '중간계급의 공포'

3. 청소년의 세대 문제와 낭만주의의 반항적 분위기 이용


제5장 정치적 공간에서의 급진운동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거의 모든 공공생활 영역의 논의를 지배하였던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위기'라는 표어는 특히 전통적인 정당의 본질과 기능을 겨냥한 것이었다. 민주적 정당들의 운동능력, 수용능력 그리고 재생능력이 거의 사라져 간 대신에, 낭만적·유기체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정치대표체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커졌다. 즉, 정당 대신에 '운동' 혹은 '연맹', 사회 대신에 '공동체', 민주적 조직 대신에 권위주의적 종자구조, 의회주의적 조정 대신에 혁명적 투쟁, 자유로운 결정 대신에 무조건적 복종, 다원주의 대신에 완전한 통합 등이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잡아갔다. 그 배후에는 특히 '낡은 것'의 지배적 계서제(階序制)에 대한 전반적 저항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저항은 세대 문제가 표출된 것으로 초시대적 성격을 지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상황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그 정도가 특히 강했다."(239-40)


# 종자구조(從者構造, Gefolgschaftsstruktur)

'종자'(Gefolgschaft)란 본래 영주, 군주 혹은 귀족과 종자 사이에 신뢰와 복종에 기초한 관계로, 게르만 법률의 본질적 요소인 commitatus 및 이로부터 파생된 모든 현상들을 지칭하는 용어. 나치는 이 개념을 독일사회의 모든 영역, 특히 노사관게에 도입하여 지도자-종자의 도식을 발전시켰다.


"나치는 권위주의적 정치공동체의 이상에 가장 분명하고 설득력 있는 형식을 만들어 냈으며, 모든 본질적 특징들을 통일시키는 듯이 보였다." "이는 합리적 논리를 비합리적 비전에 기초한 신념공동체(신앙연합체)의 신비로운 연대감으로 대체하고, '지도자' 속에 체현된 '일반의지'를 통하여 무미건조하고 역겨운 일상정치를 조화로운 '민족공동체'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한 조직원리들이었다. 여기서 '낡은 것들'에 대한 청소년─청소년은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좌파'단체들이 그랬다) 혹은 혁명에 대한 책임(그 '민족적' 반대파들이 그랬다)을 덮어씌웠다─의 저항은 조직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슬로건들은 급진정당들의 (젊은) 연령 구성으로 매우 효과가 있었다. 이 슬로건들은 '상대화 경향이 있는 지식'보다는 교양에 희의적인 '행동'을 중시하였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대학교 및 대학생의 활동영역에서도 일찍 호응을 얻었다."(246-7)


"활동적인 전쟁세대 및 전후세대, 〈특히 참전자들〉의 모집에서 외관상 군대와 유사한 대형과 엄격한 기술적 구성으로 반대파의 준군사조직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경쟁자가 된 것은 지도자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단체가 아니라, 국가에 충실하고 헌법을 보호하는, 심지어 외국에 지부를 두기까지 한 대중조직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일차적으로 반공화주의적 정당들과 그 준군사단체들의 파괴활동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투쟁은 또한 해체되던 종파 집단 및 단체의 민족지상주의적·권위주의적인 유토피아를 파괴하는 데에도 유용했다. 이 단체들은 역설적으로 제국기치(참전자 및 공화주의자연맹)가 지켜낸 상태를 극복한 후에 본래 실천하고자 했던 규정을 넘어서 낭만적·영웅주의적인 지도자 국가라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인지대(Nienandland)로, 민족공동체라는 초민주적 독재의 비전으로 나아갔다." "이 소수파는 결국 (공화국) 말기에 정당정치의 개편으로 〈민족적 반대파〉에 흡수되었다."(268-9)


"제국기치는 공식적으로 350만 명의 회원이 속했으나, 시대의 민주주의에 걸맞은 어떤 것을 갖지 못했다. 이 조직의 존재는 정치적 반목의 격렬함과 국내정치에서 공화국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음을 의미했다." "나치 돌격대(SA)는 (제국기치가 해체되면서) 점차 비워진 공간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돌격대는 거리에서도 나치당의 권력성장이 존중받도록 배려했고, 폭력과 테러로 시민을 협박할 수 있었다.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집회, 행진, 가두투쟁 등 공공영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강력한 반(反)제국기치 세력이 된 돌격대는 오랫동안 철모단의 대중운동 그늘에 가려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도 결국 당군대(黨軍隊)는 〈민족적 반대파〉의 모든 연합단체들과 전사단체들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과 더 구체적인 목표를 관철시켰다. 히틀러는 돌격대를 나치당의 〈물리적〉 권력도구로 조직하여 투입하고자 하였다."(269-70)


제6장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


"19세기의 독일 자유주의는 국내정치를 형성하고 개혁할 수 있는 힘을 민족주의 사상에 빼앗겼으나, 사회주의의 발전에 그 흔적을 남겼다. 19세기는 민족주의 사상이 특히 서방 민주주의의 경험과 제안을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게 차단한 과정이었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전쟁의 패배를 예상하지도 못했고, 패배를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그로부터 국내외 정책에 파생된 모든 결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차단 과정은 독일인들의 저항으로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거대한 정치적 흐름들 사이의 논쟁을 민족주의적 고립이라는 좁은 공간으로 몰아넣었다. 여기서 이 흐름들은 중재되지 못하고, 따라서 거의 불가피하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서로 충돌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중한 배상이행 정책의 대표자들조차 (자신의 입장에 대한) 공개적 고백으로부터 국제관계의 냉정한 평가로 물러섰다.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들은 공화국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활동)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284-5)


"반유대주의는 독일에서 최대의 정치적·세계관적 관철능력을 발전시켰는데, 경제적·사회적 구조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이 사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오히려 반유대주의가 전체주의적 행동계획과 구성계획을 통해서 민주적 사회의식 및 국가의식을 파괴하는 데서 차지하는 전술적·전략적 중요성을 증명해 준다. 전체주의적 운동이 적과 동지라는 극단적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사회적, 정신적, 종교적으로 위기의식에 휩싸인 당대인들에게 제공한 것은 〈속죄양의 철학〉이라는 편안한 탈출구였다. 이는 불쾌감과 실패, 공포와 분노의 근거를 잘 묘사하여 손쉽게 특정의 소수 그룹에 뒤집어씌우려는 아주 오래된 심리적·의식적인 욕구였다. 모든 박해의 기반이 된 이 욕구는 결국 위기의 탈출구로, 문제를 극도로 단순화시킨 사람의 수중에 있는 가장 예리한 무기가 되었다. 여기서 실망, 적응의 어려움, 현실적인 문제의 부정,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비이성적 공격성 등은 증오감으로 귀결되었다."(289-90)


"나치즘은 민족지상주의적·전체주의적인 정당으로서보다는 경제적 현실과 사회적 위신 요구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중간계급 선박의 이른바 조난구호자로 나섬으로써 대중운동이 될 수 있었다." "중간계급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신분제적 감정의 영역, 즉 사회의식의 영역에서 긴장된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상황, 더 대규모의 경제정책적 융합 및 기능적 종속 경향 등의 압력 아래 있었다. 이 계층은 프롤레타리아화의 위협에 대항하는 보루, 경제적 상태와 사회 이데올로기적 요구 사이에 놓여 있는 격차의 해소책, 신분제적 특수 존재─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위기에 책임이 있는 실망스러운 민주주의를 넘어─의 구제자를 찾았다. 《공산당 선언》의 저자들이 관찰했듯이, 그런 추동력으로부터 성장한 것은 혁명적 이데올로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 이데올로기였다. 전투적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는 이 계층의 지속적인 몰락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 되었다."(300-1)


"이제 가장 급진적인 반대파 정당이자 동시에 가장 시끄러운 반공운동 조직인 나치당을 선택한 사무직원, 부르주아지, 농민 등은 아직 거의 초안도 잡히지 않은 나치국가에 '찬성한 것'이 아니라 우선 현존하는 국가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민족주의적 혹은 신분제적이고 낭만적인, 반자본주의적인 구호 혹은 계급투쟁에 적대적인 구호를 동원해서 달성했건 간에, 나치당은 중간계급의 거대한 정당이 되었다. 나아가서 나치당은 새로운 (비)투표자, 자포자기에 빠진 실업자들과 본능적 확신에 찬 기회주의자들에게도 손을 뻗칠 수가 있었다. 나치당은 특히 그 경제적 토대를 빼앗긴 계층의 위신 욕구를 채워 줄 신분제적 질서에 대한 희망을 품게 했다. 〈민족적〉(national)이란 이 중간계급적 의미에서 반(反)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을 뜻했고, 〈사회주의적〉이란 반(反)금권정치적인 것을 의미했다." "신분제 원리는 평준화 위협에 대한 균형추로서 사무직원들과 관리계층에게도 유인력을 가졌다."(315-6)


제7장 관료제 문제


"왕조적 절대주의가 만들어낸 직업공무원 계층은 귀족과 더불어 신분제 국가의 붕괴 이후에도 계속 존속했으며, 인민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회집단이었다. 그런데 이 사회집단을 의회민주주의와 결합시키는 일은 그들의 강력한 신분제적 결속으로 처음부터 방해를 받았다. 비스마르크 시기에는 프로이센 내무부장관이었던 푸트카머의 조치를 통해 공무원제도의 절대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이어 전통적으로 계몽된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봉건제에 적대적이었던 이 계층의 태도는 카스트의 계서제적 폐쇄성으로 대체되었다. 또 이 카스트는 종종 기괴하게 보일 정도로 습관과 세계관이 동일했고, 특히 보수적 당국의 정치문제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통일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결정권을 갖는 군주는 엄격하게 조직된 행정 계서제의 꼭대기에 있었다." "〈공무원 계층의 탈정치화〉 요구는 바로 이 시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328-30)


"공무원 계층이 국가의 기본적 제도로서 어떻게 헌법의 전체적 연관관계 속에 편입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관료계층의 가장 영향력이 강한 핵심집단이 민주주의 본래의 문제점들에 거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 집단의 경향과 관심사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문제점들을 행정기술적 과제로 환원시키고, 과도한 전문화를 통하여 법을 〈법학적 대수표〉(Logarithmentafel)로 만들어 입법부를 회피하는, 간단히 말해서 모든 생활을 명령에 끼워 넣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의회의 통제와 내각 상급자들의 취약함은 주로 이러한 기술적 사고방식을 강화시켰는데, 이 사고방식은 다양한 정치적 음모, 심지어는 〈관료의 사보타지〉에 공간을 제공했다. 거기에는 또 기술적 능력을 기반으로 한 질서의 권위주의적 국가상, 즉 계서제로 등급화된 관헌국가의 형식적 신격화가 사회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그리고 유동성이 있는 국가 구상보다 더 가까이에 있었음에 틀림없었다."(336-7)


"민주주의에서는 행정관료 문제와 관련하여 〈사법부의 정치화〉라는 표제어로 종합된 현상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애매한 개념은 사법부가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속한다는 인식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명료하다는 것은 기준들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상징한다." "본래 사법부는 직접적인 국가기구이자 관료적인 실행기구라는 이중적인 기능 덕택에 애매한 중간입장을 취했고, 여론 형성과 조정에서 특히 효과적인 심리적 도구로 작동했다." "모든 법질서는 그 형성으로 인해 관련 공동체에서 권력의 배분에 직접 영향을 미치므로, 모든 법체계에서 사법부는 남용될 수 있다. 이것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도 현저했다. 거기에 영향을 미친 것은 특히─전문적인 특수화 경향과 학문적 법률가 신분의 사회적 폐쇄성 경향 속에 각기 포함된─재판관 권력의 증대였다. 완고한 인사정책은 정치적 과정과 헌법의 발전 속에 표현된 법 개념의 약화와 해체를 더욱 심화시켰다."(348-50)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정치가들과 정치평론가들은 검은 제국군대의 불법적 기구들 및 그밖의 군국주의적 우익급진주의 현상들을 비판했다. 그런데 이 모든 비판이 반역으로 처벌받았던 반면에, (반란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소의 재판(Feme-Prozess)에서 (바이에른의 우익정권 내지 히틀러 반란사건이)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처벌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일방적인 것이었다. 나치 장교들에 대한 라이프치히의 반역죄 재판에서 히틀러를 '증인'으로 출석시킨 것, 재판 자체의 실행, 주심에서 제국재판소 검찰관의 이해할 수 없는 태만 등은 사법관료 수뇌부의 정치적 취약성 혹은 약점을 증명했다." "그러한 현상들의 정치적 영향은 결국 극히 무의식적으로도 조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일방적인 판결들은 증오심에서 부당하게 취급된 사람들, 회의적인 경멸과 권력현실적인 사법부의 평가를 통해서 이득을 본 자들로 채워져 있다."(354-5)


제8장 경제정책적 권력구조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적 권력구조는─정당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 행사와 정치적·경제적인 인적 연합체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관료의 영향력 아래 있던 각종 정부 위원회들의 복잡한 연결과─경제정책의 협상과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를 통해서도 〈전문가 이데올로기〉로 위장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민주적으로 은폐된 그리고 관료적이고 〈전문가적〉으로 정당회된 직접적인 이니셔티브를 통하여 정치적 공간에서 찾아내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민주적 기구들에 의한 최소한의 통제도 빼앗긴 상태였다. 정치에서 이익정치로, 그리고 이익정치에서 정치로의 이 지속적인 변화는 집중 과정, 즉 (연합철강이나 IG 파르벤 같은) 독점적 카르텔 및 콘체른의 형성 과정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의 이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집중 과정은 정치적·경제적 연결 과정들을 떠받쳤고, 여기에 과두제적 성격을 부여했다."(387-8)


"카르텔과 콘체른 체제는 모든 경제생활을 자신과 정치의 관계 속에서 과두제적으로 구조화된 조직들과 영향력 있는 이익적 결합들의 네트워크로 덮어씌웠다." "이에 대한 실질적 조치들은 매우 약했으며, 특히 민족정책적 관점에 의해서 방해를 받았다. 만약 광범위한 반(反)트러스트 입법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말할 수 없었다면, 여기에 기여한 것은 공산당과 부분적으로는 사민당 측에서 자본주의의 이러한 〈최후의 과잉〉이 지닌 불가피성에 대한 결정론적 확신이었다. 특히 노동조합과 사민당 온건파에게서는 희망적인 견해가 발전될 수 있었다. 즉, 이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원하지 않았지만 자유경쟁을 포기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사민당의 지도적인 경제이론가는 1927년에 현존하는 경제에서는 모범적인 민주주의적 경제체제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389-90)


"〈독점 자본주의〉의 경제적·합리적인 자기 정당화는 그에 대한 자유주의적·경제적인 반론 뿐만 아니라 사회정책이나 정치 일반과 관련된 반론에도 완고하게 그러나 엄청나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이는 합리화운동의 전반적인 틀 속에서 카르텔 운동과 콘체른 운동이 갖는 경제적 효율성에서 출발하였고, 다음에는 이윤, 임금, 가격 등이 발전과 인구에 대한 배분을 고려하였다. 반면에 이 자기정당화는 그것이 정치권력의 배분에 미치는 영향 문제를 무시하였다. 세계경제 대공황의 발생과 전개과정은 여기서도 경제와 정치의 밀접한 결합을 보다 더 분명하게 조명해 주며, 결국 경제 체제에 비해 정치 체제가 허약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 이 경제 체제는 구조적·주기적 원인으로 발생한 각종 어려움들을 정치 수준으로 이동시켰고, 아래로부터, 즉 해고된 노동자들, 사무직원들, 소상점주들,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실업으로부터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을 흔들리게 하였다."(392-3)


제9장 제국군대


# 제국군대(Reichswechr)의 세 가지 뿌리

1. 베르사유 조약이 가한 압도적인 구속력

2. 1918년/1919년 독일의 혁명적인 정치 상황

3. 제크트 장군


"독일 정당들 중에서 비무장 화해정책을 가장 선호하였던 사민당이 1919년 당시 재임 중이던 바우어 내각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평화군을 위한 예비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평화조약에 서명한 지 불과 일주일 후에 새로운 제국군대의 재건을 위한 첫 조치를 취한 것도 바로 이 내각이었다." "새로운 군대가 납세자들의 희생으로 군사적으로 쓸모없이 단순한 병사놀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베르사유 조건의 틀을 넘어서야만 했던 것이다." "사민당의 상대자들은 정부에 결여되어 있던 것 모두─명확한 목표 설정, 단호함, 결연함 그리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주민계층의 후원─를 예전에 제국장교단의 형태로 더욱더 많이 보유하였다. 제국장교단은 1918년 11월의 붕괴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되었으며, 특히 〈임시 제국군대〉의 건설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증명되었다."(418-9)


"프로이센-독일제국에서 장교단은 경제적으로가 아니라, ① 위신에 맞게 사회계서 피라미드의 최정상에 위치한 군국주의화된 사회질서와 ② 개인적 충성에 기초한 왕조와의 유대라는 두 가지 중심축에 의거했다." "그 질서 속에서 장교단은 〈제1신분〉, 즉 특권적인 엘리트였다. 게다가 장교단은 나머지 사회 계층에 대해서도 군국주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이 체제는 이미 프로이센 왕조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고, 제국 시기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압력 아래서 장교단은 공격받았던 왕조와 밀접히 결합되었으며, 그리하여 프로이센-독일 군사체제의 두 번째 접점이 형성되었다. 장교단은 자유주의자들의 헌법선서 요구에 맞서 병사들에게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왕조에 대한 개인의 신뢰에 기반을 둔 유대를 강력히 장려하였다. 이는 주로 귀족적인 장교단 내에서 여전히 생생한 봉건적 미래상과 연결될 수 있었다."(421-3)


"(군부가 주도한 카프쿠데타의 실패는) 곧 제크트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제크트는 이제 군지휘부의 책임자 자리를 찬탈했고, 제국군대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대기주의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여기서 첫 조치로서 광범위한 정치적 야망을 동시에 포기하면서 전통적인 지침에 따른 군대의 건설이 주목을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현존하는 정권과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 타협에서 정권은 군지휘부에 있는 장교단을 승인하는 한편, 군대의 재건에 자유재량권을 보장해주었다. 정부는 군정책 영역에서 이렇게 보장된 자율성에 대한 대가로 장교단으로부터는 공식적인 충성선서를 받았고, 또한 정치적으로 더 이상 활동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제국군대는 공식적으로 정치무대에서 물러났으며, 〈비정치적〉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장교단과 국가 사이의 이익 유대를 재건시키려는 시도는 중단되고, (일종의 휴전협정 같은) 임시변통적인 해결책으로 대체되었다."(434-5)


"(군사문제에서 의회를 배제하고자 했던) 제크트의 목표는 국방부장관과 육군지휘부 사령관 사이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국가법적인 의구심이 있었으므로, 그는 〈명령권〉(Befehlsgewalt)과 〈지휘권〉(Kommandogewalt)에 대한 어느 정도 세련된 구별법을 이용하였다. 즉, 후자(지휘권)는 육군지휘부 책임자에게 속하는데, 이는 제국군대의 모든 부대와 기관에 대한 최고명령권 및 장교인사에 대한 결정적인 영향력을 포함해야 할 것이었다. 또한 전자(명령권)는 장관의 소관사항이나 본질적으로는 행정권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처럼 국방부를 〈명령실행 참모부〉와 행정당국으로 나누려는 노력은 제크트의 요구로 그 정치적 중요성을 획득했다. 그에 의하면 육군지휘부의 사령관은 〈어떠한 정치적 속박도 없이 무조건적이고 단독으로···〉 제국군대의 이익을 대표해야 하는 반면에, 국방부 장관은 〈무엇보다도 군부대의 정치적 혼란을 멀리할 수 있어야만〉 했다."(439-40)


"국방부장관 지위의 약화는 군지휘부의 책임자가 내각회의에 참석하고 특히 제국대통령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바이마르 헌법에 의해서 강력해져 거의 군주제적인 부가물로서 제공되었던 대통령의 지위는 일찍이 제국 군지휘부의 주목을 받았고, 또 여기서 장교단의 의도대로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는 듯했다. 따라서 제국군대를 특히 대통령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군사영역으로부터 그것을 넘어서서 대통령에 이르는 직무상의 위계체계에서 이른바 〈직접적인 군사적 보고의 길〉이라는 특별한 통로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군 지도부의 책임자가 국방부장관과 총리를 우회하여 직접 대통령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길은 공식적으로 군사적 기술적인 문제의 논의에만 이용되었으나, 진행 중인 사안이 중요할 경우 장관에게 알리지 않고서도 이용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군 지도부의 책임자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금방 명백해진다."(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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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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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히틀러는 정확히 56년(1889-1945)을 살았다. 생애 전반 30년과 그 뒤 26년 사이에는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는 심연이 놓인 것처럼 보인다. 30년 동안 무엇 하나 변변치 않은 실패자였다. 그런 다음 갑작스럽게 지방의 유명 정치가가 되는가 싶더니 마지막에는 전 세계의 정치를 뒤흔드는 인물이 되었다." "히틀러의 생애를 가르는 단면은 횡단면이 아니라 길게 가르는 종단면이다. 1919년까지는 허약함과 실패, 그리고 1920년 이후로는 힘과 업적이라는 식으로 갈라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그보다는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정치적 삶과 체험에서의 비상한 집중도와, 개인적 삶에서의 정도 이상의 빈약함으로 나누어야 한다. 전쟁 전에 불확실한 보헤미안 생활을 할 때도 그는 마치 가장 중요한 정치가인 양 정치적 시대사건Zeitgeschehen 속에서 살고 움직였다. 그리고 뒷날 총통으로 있을 때도 사생활 면에서는 출세한 보헤미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삶의 결정적 특징은 단조로움과 1차원성이다."(28-9)


"히틀러에게는 성격이나 개성에서 발전도 성숙도 없다. 그의 성격은 일찌감치 확정되었다. 아니 압류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놀랍게도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그 무엇도 덧붙여지는 것이 없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성격이 아닌 것이다.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화해하는 요소는 모두 결여되었다. 자주 수줍음처럼 작용하는, 접촉을 꺼리는 기질을 온건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렇다. 긍정적인 특성들─의지력, 용기, 부지런함, 강인함 등─은 모두 '경직된' 면에 속한다. 부정적 특성들은 가차없음, 복수욕, 신의信義 없음, 잔인성 등이다. 게다가 아주 처음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자기비판 능력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히틀러는 평생 동안 그야말로 자기 자신에만 푹 빠져 지냈으며,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애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히틀러 숭배에서 히틀러는 숭배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최초이자 가장 오래도록 충실한 신도였다."(34-5)


# 히틀러의 정치적 전기

1. 일찌감치 삶을 대체하여 정치에 집중

2. 최초의 (아직은 사적인) 정치 활동.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이민(1913년)

3. 정치가가 되기로 결심(1918년 11월 혁명 이후)

4. 대중연설가로서 자신의 집단최면 능력을 발견함(1920년 2월 24일 첫 대중연설)

5. (모두가 기다리는 기적을 행할 자인) 총통이 되기로 결심

6. 개인적 기대수명에 맞추어 정치 시간표를 짜기로 결심(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삶의 시간과 동기화)

7. 자살 결심(정치적 삶이란 전부 아니면 무無의 문제)


성과


"정권 획득 이전에 히틀러는 오로지 선동가라는 명성만을 얻었었다. 대중 연설가로서, 그리고 대중 최면술사로서의 성과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1930~1932년에 절정에 이른 위기의 기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진지한 권력 후보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권좌에 올라서도 자신을 지켜내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치는 연설과는 다르다고들 했다. 또한 히틀러가 연설에서 통치자들에게 과격한 비난을 퍼부으며 모든 권한을 자신과 자신의 당을 위해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모순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온갖 종류의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맞장구를 쳐대면서, 당시 가장 중요한 근심거리인 경제 위기와 실업 문제에 대해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는 것도 눈에 띄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그 사람이 1933년 권력을 장악한 이후, 매우 활력이 넘치고 발상이 풍부하고 능률적인 활동가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심리적 반작용이 더욱 컸다."(61-2)


"1933년 이전에도 히틀러의 관찰자와 비평가들이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면 연설 재능 말고도 한 가지가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즉 그의 조직 능력인데, 더 엄밀히 말하자면 대단한 업적과 성과를 낳을 수 있는 권력 기구를 만들고 지배하는 능력이었다. 20년대 말의 민족사회주의당은 오로지 히틀러의 작품이었고, 30년대 초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기도 전에 이미 조직력이라는 면에서는 다른 모든 정당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20년대 히틀러의 두 번째 작품은 내전용 군대인 돌격대SA로서, 당시의 다른 모든 정치적 전투 기구들은─민족주의 기구인 철모단, 사회민주당 기구인 제국기, 심지어는 공산당 기구인 붉은전사단까지도─여기 비하면 절뚝거리는 속물 단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돌격대는 전투 열의와 돌격 능력에서 다른 모든 단체를 훨씬 앞섰으며, 잔인성과 살인 의욕에서도 당연히 앞섰다. 오로지 돌격대만이 진짜로 두려운 대상이었다."(62-3)


"30년대 중반의 경제기적이 정말로 히틀러가 이룬 업적인가? 이런저런 반박을 예상할 수 있으나 그래도 이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가 경제나 경제정책 면에서 완전 문외한이라는 말은 맞다. 경제기적에 발동을 건 몇 가지 발상들은 대부분 그의 생각이 아니었고, 당시 모든 것을 좌우한, 대단히 위험한 재정적인 묘기는 분명히 다른 사람, 곧 그의 '재정 마법사'인 히얄마르 샤흐트의 공로였다. 하지만 샤흐트를 데려다가 먼저 제국은행의 수장으로, 이어서 경제장관으로 일하게 한 사람이 히틀러였다. 그리고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전임자들이 주로 재정적 측면의 온갖 고려 끝에 막은 경제 활성화 정책들을 서랍에서 꺼내 작동시킨 사람도 히틀러였다. 세액공제부터 금속 가공 연구소 어음, 근로봉사부터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여러 정책들이 나왔다." "그는 경제가 지금 이 순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만큼 정치적 본능을 지녔다."(66-7)


"경제기적이 가장 인기 있는 히틀러의 업적이었지만, 통치기의 첫 6년 동안 독일의 재무장과 군비확장을 이룬 것도 똑같이 센세이셔널하고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었을 때는 현대적인 무기도 공군도 없이 그저 10만 명의 군대뿐이었다. 1938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와 공군력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믿기 힘든 업적이다! 군사기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상감과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일깨웠다. 이 또한 바이마르 시대에 어느 정도의 사전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게다가 개별적으로는 히틀러의 세부 작업이 아니라 군 지도부가 이룩한 엄청난 성과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명령을 내리고 영감을 주었다. 군사기적은 히틀러의 결정적인 자극이 없었다면 경제기적보다도 더욱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은 경제기적보다 그가 훨씬 더 오래 마음에 품었던 계획과 의도에서 나온 일이기도 했다."(68-9)


"히틀러는 라우슈닝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째서 우리는 은행과 공장의 사회화 따위가 필요한가. 만일 사람들을 확고하게 하나의 규율 안에 집어넣고 거기서 나올 수 없게 한다면, [은행과 공장의] 사회화라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 우리는 사람을 사회화한다.〉 이것은 히틀러 민족사회주의[나치즘]의 사회주의적 측면이다." "인간이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서 소외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목적이 인간의 소외를 없애는 것이라면 인간의 사회화가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 이런 목적을 훨씬 더 크게 달성한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부당함을 제거하는 정도이다. 그것도 지난 30년 또는 60년의 세월 동안 입증된 바로는 효율성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는 이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화는 실제로 소외를, 그러니까 대도시에서의 소외를 제거하는데, 이 경우 개인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자유와 소외란 동전의 양면이고 공동체와 기율도 마찬가지다."(79-81)


성공


"히틀러의 모든 성공은 1930년부터 1941년 사이 12년 동안에 일어났다. 그 이전, 이미 10년이나 계속된 정치 경력에 성공이란 없었다. 1923년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1925년에 새로 정비한 정당은 1929년까지 중요하지 않은 소수 정당이었다. 1941년 이후로도, 실은 1941년 가을부터는 성공이란 전혀 없었다. 군사적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패배를 거듭했으며, 동맹국들은 떨어져나가는데 적진인 연합군은 연합을 유지했다." "원한다면 찾아볼 수는 있지만,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상승과 하강, 그렇다. 성공과 실패가 번갈아 나타난다. 순수한 실패, 순수한 성공, 그런 다음 다시 순수한 실패라는 세 단계를 이렇게 분명히 나눌 수 있는 경우는 없다. 동일한 사람이 오랫동안 겉보기에 희망이 없는 무능력자, 그런 다음엔 거의 그만큼의 기간동안 겉보기에 천재적인 능력자, 이어서 다시 이번에는 겉보기가 아니라 진짜로 희망이 없는 무능력자. 이것은 설명을 요하는 일이다."(95-7)


"그가 편안해져서 채찍을 느슨하게 하거나 떨어뜨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의 에너지와 의지력은 공적인 활동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똑같이 놀라운 것이었고, 그의 지배력은 총리관저의 벙커에서도 절대적인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 그의 통치 영역은 오로지 이 총리관저에만 한정되었지만 그 순간에도 여전히 절대적이었다." "성공에 익숙해진 사람이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운명에 도전하려는 오만함을 드러냈다는 주장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히틀러의 몰락을 불러오는, 러시아를 공격하기로 한 결정은 성공에서 자양분을 얻은 오만함에서 갑자기 떠오른 발상이 아니었다. 이 공격 계획은 아주 오래 전부터 거듭 숙고하여 결정된 히틀러의 주요 목적이었다." "히틀러가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다면 원래 처음부터 그랬다." "1923년의 쿠데타 실패가 그가 수업을 한 유일한 사건이었다. 다른 경우에서는 거의 섬뜩할 만큼 늘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정책은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완전히 동일하였다."(97-9)


"이로써 우리는 뜻밖에도 히틀러의 성공 곡선의 비밀을 풀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이 열쇠는 히틀러 자신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상대한 적들이 변한 것과 적들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성공의 경우는 언제나 양측이 있게 마련이고, 한쪽의 성공은 다른 쪽의 실패가 된다." "히틀러는 단 한 번도 더 강하거나 질긴 적을 상대로 성공을 쟁취한 적이 없었다. 20년대 말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1940년의 영국만 해도 그에게는 너무 강한 적이었다. 우선 그는 약한 자가 강자를 상대할 때 이용하는 교묘하고 풍부한 발상이나 기민함을 갖지 못했다. 1942~1945년의 연합군에 맞선 전쟁에서 연합군의 내부 갈드을 이용하여 그들을 갈라놓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반대로 히틀러는 여러 가지로 부자연스러운 동서 연합군이 서로 단합하는 데 누구보다도 기여한 바가 많았고, 무모한 고집으로 모든 접합점이 터지려는 연합군이 서로 달라붙어 있도록 가능한 온갖 일을 다 했다."(100)


"그에 반해 성공은 모두 정말로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는 적들에 맞서서만 거둔 것이었다. 국내정치에서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이미 속이 다 비어서 실질적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죽음의 일격을 가했다. 국제적으로는 1919년의 유럽 평화조약이 이미 안에서부터 흔들려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 끝장을 냈다. 두 경우 모두 이미 쓰러지고 있는 것을 쓰러뜨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30년대에 히틀러는 철저히 허약한 적들을 상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후예 자리를 놓고 히틀러와 맞서던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은 전략도 없고, 히틀러에 맞서 저항할까 연합할까를 두고 속으로 흔들리면서 자기들끼리 싸우던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30년대 후반의 영국과 프랑스 정치가들이 저항과 동맹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때 히틀러는 외교적 성공을 쟁취했다. 1930년의 독일, 1935년의 유럽, 그리고 1940년의 프랑스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히틀러의 성공은 기적이라는 후광을 잃게 된다."(101)


"외교 분야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919년 파리에서 전쟁 이전 유럽의 4강 체제가 무너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전쟁으로 인해 붕괴되고, 러시아는 유럽과의 협력에서 배제되었다. 그로써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승전국 연합에서도 배제되었다. 동시에 1917년 러시아를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던 미국은 승전국 연합에서 물러나면서 옛날 동맹국들의 평화협정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평화협정은 처음부터 실질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담당했다. 마치 바이마르 공화국이 바이마르 연합을 이룬 세 개 정당만으로 유지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두 경우 모두 기반이 너무 약해서 전체를 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본질이 그대로 유지된 독일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힘만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명기된 제약들에 붙잡아두기에는 너무 강했다." "더욱이 조약의 모욕적인 취급 방식은 독일을 수정주의와 보복주의의 길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미친 듯이 이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118)


오류-잘못된 생각들


"히틀러의 역사적·정치적 세계상, 곧 '히틀러주의'를 짤막하게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역사적 사건을 담당하는 존재는 오로지 민족 또는 종족(인종)이다. 계급도, 종교도,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의 국가도 아니다. 역사는 〈한 민족의 생존을 위한 싸움의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또는 선택하기에 따라서는 〈모든 세계사적 사건은 종족의 자기보존 충동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는 〈원칙적으로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목적은 인간의 종족적 생존의 유지라고 볼 수 있다.〉 또는 약간 덜 방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국가의 목적은 육체적·영적으로 동일한 생명체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유지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국내정치는 한 민족이 외교적 주장을 하기 위해 내적인 힘을 확보하는 일이다.〉 여기서 외교적 주장이란 싸움이다. 〈살려고 하는 자는 싸워라. 그리고 영원한 투쟁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싸우지 않는 자는 삶을 얻지 못한다.〉"(136)


"간단히 말해 정치는 전쟁이자 전쟁 준비이며, 이 전쟁에서는 첫째로 생존공간이 핵심 문제이다. 생존공간의 문제는 아주 보편적인 것으로 모든 민족, 심지어는 모든 생명체에 타당한 것이다. 〈생명체의 자기 보존 충동과 지속적 보존의 욕구는 무한한데, 그에 비해 이 전체 생명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유한하다. 생존공간의 이런 한게가 바로 생존전쟁을 강요한다.〉" "둘째로 전쟁에서는 지배와 종속이 문제가 된다. 〈자연의 귀족주의적 기본 원칙이 원하는 것은 강자의 승리와 약자의 박멸 또는 약자의 무조건 굴복〉이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서로 경쟁하여 더 나은 품종으로 발전해야 하는 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침없는 게임〉이다. 셋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민족들의 지속적인 전쟁에서는 세계지배가 핵심 문제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먼 미래에, 지구 전체의 수단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최고 인종이 지배 민족이 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인류에게 다가올 것임을 짐작하기〉 때문이다."(137-8)


"이것은 히틀러의 세계상의 절반에 불과하다. 다른 절반은 바로 반유대주의다." "민족이론에서는 역사 전체가 생존공간을 놓고 벌이는 민족들의 지속적인 싸움이었다. 반유대주의 이론에서 우리는 갑자기 그것이 역사 전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히틀러에 따르면 민족들의 싸움과 나란히 역사에서 또 다른 지속적인 내용이 있는데, 곧 인종 싸움으로서, 그것은 백인, 흑인, 황인종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 아니라 백인종 내에서 벌어지는 싸움, 곧 '아리안'과 유대인 사이의 싸움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대인과 다른 모든 종족들 사이의 싸움으로서, 그들은 보통 때는 끊임없이 서로 싸우다가도 유대인에 맞서서는 모조리 한편이 되는 것이다. 이 싸움은 말 그대로 목숨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으로, 멸종을 지향하는 싸움이다." "실제로 히틀러는 자신의 특성을 유대인 멸종자라 규정하고 특별히 독일 정치가가 아닌 전 인류의 선두에 서서 싸우는 자라고 주장했다."(140-2)


"히틀러의 정치체계에서 국가가 아주 하위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전혀 다른 맥락인 히틀러의 성과 부분에서 그가 정치가[국가의 사람]가 아니었다는 놀라운 사실에 부딪혔다. 그는 심지어 전쟁이 시작되기 오래전에 독일이라는 국가의 특성으로 보이는 것을 모조리 파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국가 속의 국가들'이라는 혼돈으로 대체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히틀러의 사고체계에서 이런 잘못된 행동의 이론적 근거를 보고 있다. 히틀러는 국가에 관심이 없었고, 국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국가를 하찮게 여겼다. 오직 민족과 종족만이 중요할 뿐 국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국가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으로, 한마디로 전쟁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히틀러에게도 1933~1939년의 기간 동안 전쟁 준비가 없을 수 없었지만, 그가 만들어낸 것은 전쟁 기계일 뿐 국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반드시 뒤탈이 있는 법이다."(147-8)


실수-잘못된 행동들


"유대인들은 해방된 이후로 모든 서방 국가에서 훌륭한 애국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유대인의 애국주의가 독일에서처럼 빛나고도 매우 감정적인 경우는 없었다. 유대인이 히틀러 이전까지는 독일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1933년에 이 모든 것이 끝났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순종적 사랑을 증오로 바꾸어놓았고, 또한 유대인 친구들에게 신의를 지킨 독일인들─분명 대다수는 아니지만 또한 가장 형편없는 계층도 아닌─까지 적으로 만들었다. 독일 안에서 히틀러 파동에 대해 수동적인 저항이나마 꾸준히 지속하게 만든 힘은 그의 반유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로 자신의 권력욕에 처음부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핸디캡─대외적 평판 하락이나 대규모 인재 유출 같은 현상들로 대표되는─을 불러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의 첫 번째 잘못이었다. 아직도 여전히 과소평가 되고 있는 잘못이다."(171-3)


"물론 여기에 다른 잘못들이 덧붙여진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처음부터 독일에 불러들인 폐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두 번이나 자신의 목적에 매우 가까이 다가갔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1938년 가을에 영국과 프랑스의 완전한 동의를 받아 동유럽에서 독일의 패권이 인정되었을 때와, 1940년 여름에 프랑스에 대해 승리하고 또 다른 많은 나라들을 점령함으로써 러시아 이편의 유럽 대륙 거의 전체가 그의 발치에 놓였을 때였다." "〈나는 유럽의 마지막 기회였다〉고 히틀러는 1945년 2월 보어만 구술에서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다만 그는 이렇게 덧붙여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망쳤다.〉 그 기회를 망친 것이 그의 두 번째 잘못이었다." "1938년 가을과 1940년 여름에 히틀러는 두 번이나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못 보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집어던졌다. 이는 1941년에 러시아를 공격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뒷날의 잘못보다도 오히려 더욱 무거운 잘못이다."(173-7)


# 두 번의 잘못

1. 뮌헨 협정 위반(1938) : 체코슬로바키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후 분할하는 조치는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 동맹을 맺도록 부추겼다.

2. 프랑스와의 동맹 무시(1940) :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맺어 유럽의 패권 국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기회를 손수 만들어내고 다시 없애버렸다." "그는 바로 이런 역사적 순간에 스스로 입증했듯이, 극히 드물게도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재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에게 완전히 결여된 것은 정치가의 건설적인 상상력, 곧 지속적인 것을 건설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화조약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전에 국내에서 헌법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평화조약은, 국가들의 공동체에서 헌법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확정 짓기를 꺼리는 것과 초조함이 그 걸림돌이었다. 이 두 가지는 그의 자기 경탄과 맥을 같이했다. 그는 스스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자신의 '직관'을 맹목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그 직관을 속박할 어떤 제도도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신을 대체할 수 없다고 여기고, 살아서 자신의 강령을 무조건 실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라는 데 시간이 필요한 그 무엇도 심지 못하고, 그 무엇도 후계자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후계자를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185)


"설명할 길이 없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의 동기를 찾으려면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히틀러 자신이 그 동기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5년에 히틀러는 정말로 독일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폭파하여 민족에게 살아남을 가능성을 남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까 이런 파괴를 통해 이 민족이 세계정복의 능력이 없음을 입증한 데 대한 벌을 내리려는 것이었다. (1941년, 러시아 전선에서 벌어진) 최초의 패배에서 벌써 이런 배신의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히틀러의 성격과 어울린다. 가장 극단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그의 성향, 그것도 '얼음처럼 차갑게' 그리고 '번개처럼 재빨리' 말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히틀러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써 모스크바 앞의 전투를 통해 예고된 패배를 완전히 결정지었다. 그리고 1942년부터는 패배를 막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히틀러는 승리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195-7)


"히틀러가 이 기간에 점점 더 안으로 움츠러든 것도 특이한 일이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대중과의 접촉이 없고, 전선 방문도, 공습을 받는 도시를 둘러보는 일도, 공개연설도 거의 없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군 사령부에서만 살았다." "이 시기 그의 전략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단을 희생시킨 기묘한 결정처럼) 융통성이 없고, 기발한 발상도 없으며, 구호라면 오로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고,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다. 왜? 히틀러는 언제나 두 가지 목적을 가졌다.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는 것과 유대인을 멸종시키는 것. 첫째 목적은 실패했다. 이제 그는 두 번째 목적에 집중했다. 독일 군대가 그 길고도 희생적인, 아무 소용도 없이 질질 끄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날마다 인간화물을 실은 기차들이 수용소로 달려갔다. 1942년 1월에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 명령이 나왔다."(197-8)


범죄


"히틀러는 통치자나 정복자로서만 잔인했던 것이 아니다. 히틀러에게서 특이한 점은 국가이성이 조금도 그럴 이유나 핑계를 주지 않는데도 상상할 수 없이 대규모로 사람을 죽였다는 점이다. 그렇다. (정치적 계산 능력보다 살인의 욕구가 더욱 강했던) 그의 대량학살은 정치적·군사적 이익에 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히틀러의 대량학살은 전쟁 때 행해졌지만, 절대로 전쟁 행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언제나 개인적인 욕구이던 대량학살을 위한 핑계로 전쟁을 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나의 투쟁』에 이렇게 썼다. 〈전방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쓰러진다면 후방에서는 적어도 해충을 박멸할 수 있다.〉 히틀러에게 해충인 사람들의 박멸은, 전쟁을 통해 후방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만 전쟁과 연관성이 있었다. 그 밖에 이런 박멸은 히틀러에게 자체 목적이지, 승리를 위한 또는 패배를 막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202-3)


"1942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에 전 세계에는 히틀러의 대량학살이 단순히 '전쟁범죄'가 아니라 순수한 범죄이고, 그것도 그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규모로 이루어지는 범죄로서, 보통은 전쟁범죄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문명의 파국이라는 의식이 살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의식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해서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재판에서는 히틀러의 원래 범죄, 곧 폴란드와 러시아 사람들, 유대인들, 집시와 병자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기소에서 부수적인 사항이 되었다. 대량학살은 강제노동 및 추방과 더불어 '인류에 대한 범죄'로 분류되었고, '평화에 대한 범죄', 곧 전쟁 자체와 '전쟁범죄'가 핵심적인 기소 내용이 되었다. 전쟁범죄란 '전쟁법과 전쟁관습의 위반'으로 정의되었다. 하지만 이런 위반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양측 모두에서 이루어졌고, 전쟁 자체란 승전국도 행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졌다는 이유로 피고가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라고 누구든 쉽게 말할 수 있었다."(204-5)


"어쩌면 누군가는 뉘른베르크에서 모든 전쟁이 아니라 오직 침략전쟁과 정복전쟁만을 범죄라고 낙인찍은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겠다. 히틀러는 정복전쟁을 했고, 적어도 동쪽에서만은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2차 대전에서는 '전쟁 책임'의 논란이 없다.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하는 대제국의 건설을 가까운 목적으로, 세계지배를 원대한 목적으로 삼아 이 전쟁을 계획하고 원하고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무조건 범죄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설사 인류는 오늘날의 기술전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워도 마찬가지다. 주권국가들의 세계에서 전쟁을 피할 길이 없다면, 이런 기술시대의 전쟁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해도,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은 인류의 현재 상황논리에 들어 있는 것이다." "결국 뉘른베르크의 시도처럼 전쟁을 범죄로 규정하는 일은 그것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 뿐이다."(208)


"히틀러의 특별한 범죄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전제하는) '전쟁법과 관습의 위반'이 아니며, 그러니까 뉘른베르크 제판에 이름을 준 '전쟁범죄'가 아니다[뉘른베르크 전범재판]." "2차 세계대전 후에 이런 지혜를 잊은 것은 승전국의 잘못이었다. 무엇보다도 히틀러의 범죄를 모든 전쟁에서 일어나는 전쟁범죄와 한통속으로 몰아붙이면서 그 범죄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히틀러의 대량학살은 전쟁범죄가 아니라는 점이 특징이다. 전투의 절박함과 열기 속에서 전쟁포로 죽이기,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인질을 총살하기, '전략적' 공중전에서 순수한 거주 지역에 대한 공습, 잠수함 전투에서 여객선과 중립적인 배들을 침몰시키기, 이 모든 것은 전쟁범죄이며, 분명 매우 끔찍한 것이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일반적 합의에 의해 양측에서 그냥 잊는 게 더 낫다. 하지만 대량학살, 전체 주민계층을 계획적으로 멸종시키려는 것, '해충박멸' 등을 사람에게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210-1)


"1942년 11월에 이중 의미로 많은 것을 드러내주는 유명한 히틀러의 발언이 나왔다. 〈나는 기본적으로 언제나 12시 5분에야 멈춘다〉는 말이다. 독일을 둘러싼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던 이 시기에도 그가 사령부의 테이블 담화에서 아직도 여전히 쉽게 깨지지 않는 자기만족과 심지어 이따금 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한 것은, 연합군이 매일 가까워지는 만큼 이제 남은 마지막 목적 실현에 다가가고 있음을 의식한 것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3년 동안 날마다 전 유럽에서 유대인 가족들은 자기들의 집이나 숨은 장소에서 끌려나와 동쪽으로 이송되어 벌거벗은 채로 죽음공장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 소각장 굴뚝은 날마다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 마지막 3년 동안 히틀러는 지난 11년처럼 성공을 즐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포기하기는 쉬웠다. 그 대신에 전보다 더 많이 살인자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배려마저 버린 채 희생자를 손에 쥐고 멋대로 행동하는 살인자였다."(228-9)


배신


"1944년 8월 22일에 히틀러는 루덴도르프가 1918년 9월 29일에 행한 것과는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뇌우 작전'을 펼쳐서, 갑작스럽게 옛날 바이마르 공화국의 장관·시장·의원·당직자·정책담당 공무원 등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들 중에는 뒷날 연방공화국의 출범 시기에 주인공이 되는 콘라트 아데나우어와 쿠르트 슈마허 등도 끼어 있었다. 이들은 루덴도르프가 비슷한 상황에서 정부를 넘겨주고 전쟁의 청산을 맡긴 인물들로서, 이른바 독일의 정치적 예비군이었다. 루덴도르프는 피할 수 없는 패전에 직면하자 그들에게 지배권을 넘겼다. 히틀러는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을 배제했다." "이 조치는 히틀러 생각에 너무 일찍 이루어졌던 1918년의 전쟁 중단이 이번에도 되풀이되는 것을 반드시 막으려는 첫 번째 조치였다. 그 어떤 기회도 남김없이 쓰라린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기로, 그의 말대로 하자면 〈12시 5분까지〉 계속 싸우기로 결심한 상태였던 것이다."(238-9)


"1918년 11월이 다시 눈앞에 있었다. 히틀러는 이번에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여기서 1918년의 시점에 아주 강렬했다가, 지금 다시 피어난 증오, 독일 '11월의 범죄자들'에 대한 증오, 곧 독일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보지 못한 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1918년 이후에 나온 어느 영국인 기자의 진술에 충심으로 동감한다며 인용하였다. 〈독일인 세 명 중 한 명이 배신자다.〉 이제 그는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분명하고도 정확한 생각을 표현하는 모든 독일인,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난 다음까지 살아남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는 모든 독일인을 가차 없이 죽이려고 했다. 히틀러는 언제나 커다란 증오를 품고 있었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서 많은 기쁨을 느꼈다. 여러 해 동안 유대인, 폴란드인, 러시아인을 향해 분출하던 히틀러의 증오의 힘, 히틀러의 내면에 있는 살인충동은 이제 공개적으로 독일인을 향했다."(240-1)


"아르덴 공격은 2차 대전의 다른 어떤 기획보다도 더 많이 히틀러 자신의 작품이었는데, 군사적으로 보면 정신 나간 기획이었다. 공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시 전쟁 기술의 조건으로 보아 적어도 3 대 1 정도로 전력이 우세해야 했다. 하지만 1944년 12월에 서부전선에서 힘의 상황은, 완전히 우세한 연합군의 공군력을 빼고 보아도 1 대 1에 못 미쳤다 약자가 강자를 공격한 것이다. 게다가 공격 지점에서 잠깐만이라도 우세하기 위해서 히틀러는 골격만 남기고 동부의 방어전선에서 병력을 몽땅 동원해야만 했는데, 당시 참모총장 구데리안이 러시아군이 강력한 공격을 해 올 것이라는 절망적인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히틀러는 이중으로 큰 모험을 한 것이다. 서부전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 나중에 제국 서부 지역의 방어를 위해 꼭 필요한 병력을 소진하는 것이고, 동시에 러시아군이 공격해 올 경우 동부전선은 방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실제로 일어났다."(242-3)


"여기서 히틀러의 핵심 동기가 전혀 외교적인 것─서부전선에서 뜻밖의 극단적인 결전을 벌여 서방세력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어 타협을 강요한다. 그렇지 않다면 동부 전선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고, 서방세력은 자기들의 몫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이 아니라 국내 문제이고, 실제로 자기 나라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추정하면 그의 사고방식은 훨씬 덜 복잡한 것이 된다. 국민의 다수와 히틀러 사이에는 1944년 가을에 이미 틈이 벌어져 있었다. 대다수 국민은 히틀러가 바라는 전망 없는 결전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1918년 가을과 같은 결말이 나기를 원했고, 이제 그만 끝나기를, 가능하면 온건한 결말, 그러니까 서부전선에서 끝나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러시아군을 밖에 묶어두고 서방세력을 들어오게 하는 것, 그것이 1944년 말에 대부분의 독일 국민이 속으로 바라던 결말이었다. 히틀러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었지만, 아르덴 공격으로 그것을 망쳐놓을 수가 있었다."(245)


"정말로 적군보다 더욱 잔인하게 파괴를 실행하는 것이 히틀러의 의도였다. 적군은, 적어도 서방의 적군은 〈도이치 민족이 가장 원시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반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갖지는 않았다. 그 결과 이제 빠른 속도로 진행된 적군의 점령은 적어도 서부에서는 압도적으로 구원으로 여겨져 환영을 받았고, 나치 국민을 만나리라 기대했던 미국·영국·프랑스군은 그와 달리 망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히틀러와는 아무 상관도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점령군은 당시 그것을 아첨하는 위장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총통에게 배신당했다고 느꼈고, 사실이 그랬다. 연합군이 이미 착수하고 있던 '재교육'은 마지막 몇 주 동안 히틀러가 강력한 방식으로 이미 완수해 놓았다. 독일인들이 이 마지막 몇 주 동안 겪은 것은 마치 그동안 함께 살아온 남편이 갑자기 살인자임이 드러나자, 사람들에게 남편을 물리치고 자기를 구해달라고 외치는 여자와 같았다."(250-1)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사랑했는가? 그는 독일을 찾아냈다. 알지 못한 채 선택했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독일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독일 국민은 그가 선택한 민족이었다. 그의 타고난 권력본능이 나침반 바늘처럼 그들을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로 그랬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권력의 도구로서 그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는 독일을 위해 원대한 야망을 가졌고, 그런 점에서 자기 세대의 독일 사람들과 마음이 맞았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야망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 둘이 합쳐져서 히틀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독일의 파괴는 히틀러가 자신에게 부과한 마지막 목적이었다. 그가 파괴하려던 다른 것들에서 그랬듯이 이것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다. 그로써 그는 독일이 마지막에 자기에게 결별을 선언하도록, 그것도 생각보다 더 빨리 더욱 근본적으로 결별하도록 하였다."(2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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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일인 이야기 - 회상 1914~1933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이유림 옮김 / 돌베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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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Prolog


"독일에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초등학생이었던 세대는 날마다 여러 나라들이 벌이는 거대하고 자극적이고 매혹적인 게임처럼 전쟁을 경험했다. 이는 평화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신나고 극적인 만족감을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나치즘의 근본 비전이 되었다. 여기서 나치즘은 선전의 힘과 단순성, 판타지에의 호소, 활동 동기 등을 얻었다. 또한 내부의 적에 대한 편협함과 잔인함도 여기서 비롯했다. 이 놀이를 함께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숫제 '적'으로도 인정하지 않고 그저 흥이나 깨는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많은 것들이 나치즘을 강화하고 그 성격을 변하게 했다. 하지만 그 뿌리는 바로 여기, 독일 군인들의 '전선 경험'이 아니라 독일 학생들의 전쟁 경험에 있다." "전쟁을 현실로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 이를 다르게 평가하기 마련이다." "나치즘의 근간이 된 세대는 1900년에서 1910년 사이에 태어나 전쟁이라는 현실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이를 거대한 놀이로 경험한 사람들이다."(31-2)


"1918년 혁명은 나와 내 또래에게 전쟁과 정반대로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우리의 실제적인 일상생활을 전혀 바꾸지 않아서 때로 지루할 지경이었지만 환상에는 마르지 않는 풍부한 재료를 제공했다. 혁명은 일상생활에 새로운 변화를 많이 가져왔고 이 변화는 매우 다채롭고 자극적이었지만 우리의 환상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혁명은 전쟁과 달리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단순하고 분명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혁명의 모든 위기,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파업과 총성과 반란과 시위 행렬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혼란스러웠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게 뭔지는 끝내 분명해지지 않았다." "혁명의 와중에 권력은 거리에 굴러다녔다. 그 권력을 집어 든 사람들 가운데 진정한 혁명가는 아주 드물었다." "진정한 혁명가들이 아마추어처럼 비조직적인 폭동을 연달아 일으키면 방해자들이 반혁명으로 맞섰다. 그들은 정부군으로 위장한 이른바 '자유군단'을 내세워 혁명을 몇 달 만에 피비린내 나게 진압했다."(44-6)


"혁명에 반대하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안정은 멀었다. 오히려 베를린에서는 3월에 혁명의 시체를 매장하고서야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뮌헨에서는 4월에야.) 베를린에서는 노스케가 원래 혁명을 지원했던 '인민해병대'를 적절한 절차 없이 해산하려고 하자 시가전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결과는 처음부터 분명했고 승자의 복수는 잔혹했다. 1919년 봄 좌파 혁명이 형태를 갖추려고 헛힘을 쓸 때, 이후의 나치 혁명은 히틀러가 없었지만 이미 완성되어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때 에베르트와 노스케를 구해준 자유군단은 단원들의 구성, 특히 견해, 태도, 투쟁 방식에서 이후의 나치 돌격대와 그냥 똑같다. 그들은 이미 '도망치려다가 총에 맞았다'는 장치를 만들어냈고 고문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그리 많이 묻거나 가려내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적수까지 벽에 세워 총살함으로써 1934년 6월 30일을 예고했다. 실천을 뒷받침할 이론만 부족했다. 이론은 나중에 히틀러가 제공한다."(49-50)


# 1934년 6월 30일 : 에른스트 룀을 비롯한 정적, 정부 요인, 유대인을 학살한 '긴 칼의 밤'을 지칭한다.


"세계대전은 모든 민족이 다 경험했고, 혁명, 사회적 위기, 총파업, 부의 재편, 화폐 평가절하 등도 거의 다 경험했다. 하지만 어떤 민족도 1923년 독일에서처럼 이 모든 게 한꺼번에 터무니없이 극단적으로 치솟는 일은 경험하지 않았다. 돈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 기준이 사라져버린, 어마어마한 사육제謝肉祭의 행렬과 끝없는 피투성이 농신제農神祭는 어떤 민족도 경험한 적이 없다. 1923년을 겪고 난 다음 독일인은 꼭 나치즘이 아니라도 어떤 환상적인 모험에라도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나치즘의 심리학적·정치학적 뿌리는 훨씬 더 깊이 내려간다. 하지만 나치즘의 광란적인 특징을 결정하는 것은 그때 이미 만들어졌다. 냉혹한 광기, 불가능한 것을 향해 오만할 만큼 거침없이 나가는 맹목적 결단력, '우리한테 유용한 것이 정당한 것이다'와 '불가능이란 없다'는 원칙, 1923년 같은 경험은 어떤 민족이 영혼의 상처 없이 치러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듯하다."(72)


"8월, 1달러는 1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도 들은 양 숨을 멈추고 말았다. 두 주일 뒤에는 이에 대해 웃었다. 달러가 100만 경계선에서 새로운 추진력이라도 얻었는지 속도를 열 배 높여 곧 1억, 이어 10억 마르크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9월이 오자 100만 마르크는 아예 실제적인 가치가 없어지고 10억 마르크가 지불 단위가 되었다. 10월 말 지불 단위는 1조 마르크였다. 그러는 사이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제국은행이 지폐 발행을 중단했다." "8월 중순, 정부는 극렬한 거리 폭동으로 인해 허우적거렸다." "이제 우리는 국가가 멸망하길, 제국이 분해되길, 그러니까 우리 사생활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걸맞은, 끔찍한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라인란트가 변절했다, 바이에른이 변절했다, 황제가 돌아왔다, 프랑스군이 진군했다 등등 소문이 이토록 무성한 적이 없었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구분하기 어려웠다."(82-3)


"그러다가 정말 기대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돈이 다시 나올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얼마 뒤 정말 새로운 화폐가 나왔다. '렌텐마르크'라고 적힌 작고 볼품없는 회녹색 지폐. 렌텐마르크로 처음 물건 값을 치를 때면 다들 약간 미심쩍은 마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인은 그 돈을 실제로 받고 물건을 내주었다. 1조 마르크 가치가 있는 상품,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다음 날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믿을 수 없었다." "그 몇 주 전 슈트레제만이 총리 자리에 올랐다. 정치는 단박에 훨씬 평온해졌다. 이제 아무도 공화국이 무너질 거라고 수군대지 않았다. 온갖 '동맹'이 툴툴거리면서 겨울잠을 자려고 물러났다." "그랬다. 우리 세대가 독일에서 경험한 딱 한 번 뿐인 진정한 평화기가 시작되었다. 1924년부터 1929년까지 6년 동안 슈트레제만이 외무장관으로 독일 정치를 이끌었던 슈트레제만 시대."(85-8)


"1914년부터 1924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나이 든 세대는 자신의 이상과 확신을 의심하면서 소심해졌다. 반면 젊은이들은 공적인 소란, 센세이션, 무정부주의, 무책임한 숫자 놀음의 위험한 매혹밖에 아는 게 없었다. 공적인 긴장이 멈추고 사적인 자유가 돌아오자 그들은 이를 선물이라기보다는 박탈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저 이 모든 것을 자기가 본 것보다 더 커다란 규모로 직접 해보기만 기다렸다. 그러면서 모든 사적인 생활을 '지루하다' '부르주아적이다' '고리타분하다'고 치부했다. 대중은 무질서의 온갖 센세이션에도 익숙해졌다. 게다가 그들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커다란 미신, 즉 그동안 맹목적이고 교조적으로 칭송해온 전지전능하신 성 마르크스의 마법적인 능력과 그가 예언한 역사 발전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표면 아래에는, 거대한 재앙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곧 닥칠 재앙의 전조마저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딱 어울리는 듯했다."(90-3)


"1930년 봄 브뤼닝이 공화국 총리 자리에 올랐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독일에 처음으로 엄격한 주인이 생긴 것이다." "배상금을 지불하는 게 불합리하다고 증명하기 위해 그는 은행이 문을 닫고 실업자 수가 600만까지 올라가는 등 독일 경제가 거의 무너지도록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국가 재정을 유지한다고 '허리띠를 더 졸라매라'는 엄격한 가장의 처방전을 가차 없이 적용했다." "브뤼닝은 이를 악물고 모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감당했다. 외국 여행을 불가능하게 만든 '외환 관리'와 이민을 불가능하게 만든 '이민세', 나중에 히틀러의 효과적인 고문 도구에 속하게 된 것 가운데 많은 것을 브뤼닝이 도입했다. 더 나아가 언론 자유의 제한과 제국 의회의 억압도 그 시작은 브뤼닝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이런 일이 일어난 다음 과연 무엇을 더 지켜야 할지 묻기 시작했다."(110-1)


"브뤼닝에게는 진정한 추종자가 없었다. 그는 '묵인되었다.' 그는 차악이었다. 몹시 가학적인 고문 전문가에 맞서 학생들을 때리면서 〈내가 너희들보다 아프다〉라고 말하는 엄격한 교사였다. 사람들은 브뤼닝이 히틀러를 막을 딱 하나뿐인 보호막으로 보였기에 그를 감쌌다. 브뤼닝도 당연히 이를 알고 있었고 그가 정치적으로 생존하는 이유는 히틀러에 대항하는 한편 히틀러가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절대 히틀러를 없앨 수 없었다. 브뤼닝은 히틀러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동시에 히틀러를 보존해야 했다. 히틀러는 실제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되지만 계속 위험하게 남아 있어야 했다. 브뤼닝은 2년 동안 이를 악물고 얼굴에는 미소를 띤 채 어려운 줄타기를 해냈는데, 이것만 해도 대단한 성취였다. 그가 균형을 잃는 순간이 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럼 그다음엔? 브뤼닝의 시대에는 내내 이런 질문이 남았다. 그럼 그다음엔? 음울한 현재가 무시무시한 미래에 대한 전망 덕분에 가벼워 보이는 시대였다."(112)


"1932년 여름까지 점점 더 숨이 막혀가더니 브뤼닝이 갑자기 별다른 이유도 없이 실각하고 파펜-슐라이허의 막간극이 이어졌다.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귀족들이 정부를 세우더니 반년 동안 정치는 마치 헝가리 경기병들의 질주 같았다. 공화국이 무너지고 헌법이 효력을 잃고 제국 의회는 해산되었다가 다시 선출되기를 거듭했다. 신문은 금지되고 프로이센 정부는 떠나고 행정 기구 고위층은 모두 바뀌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이 마치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명랑한 분위기에서 일어났다." "그때 나치들은 어느새 최종적으로 허용된 제복을 입고 거리를 꽉 채우는가 하면 폭탄을 던지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그해 8월 사람들은 히틀러와 부총리 자리를 놓고 흥정하다가, 11월에는 파펜과 슐라이허가 갈라진 뒤 히틀러에게 총리 자리를 제안했다." "모든 진지한 장애물은 치워졌다. 헌법도 없고 법적 계약도 없고 공화국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118-9)


혁명Die Revolution


"1933년 1월 30일, 아침신문 표제는 다음과 같았다. 〈공화국 대통령 히틀러 호출.〉 무력감에 짜증이 났다. 대통령은 지난해 8월에 이어 11월에도 히틀러를 불러서 각각 부총리와 총리 자리를 제안했다. 히틀러는 그때마다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고, 그때마다 정부에서는 근엄하게 '절대 다시' 이런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절대 다시' 하지 않겠다는 결의는 기껏해야 석 달 동안 유지되었다. 그때 이미 독일에서는 마치 오늘날 세계가 그러는 것처럼 히틀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언제나 다시 점점 더 쉽게 제공하다 못해 숫제 강요하려는 병적인 욕망이 그의 적수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점심 때 신문 표제는 〈히틀러 다시 지나친 요구〉였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히틀러의 성정에 맞지도 않을 테지. 이렇게 다시 한 번 독배를 피할 수 있게 되는구나." "5시쯤 저녁신문이 나왔다. 〈민족주의자 중심 내각 구성, 총리 히틀러.〉"(134-5)


"1933년 2월 무렵 독일인들 대부분이 공산주의자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는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이 문제를 너무나 간단히 접어버렸다는 것은 탓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처음으로 나치 시대 독일인들의 성격상 집단적 약점이 드러난다. 독일인들은 국회의사당이 불에 조금 그을렸다고 해서 헌법으로 보장된 개인적 자유와 기본권을 빼앗겨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 공산주의자들이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으니 정부가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음 날 나는 연수원 동료 몇 명과 함께 이 사건에 대해 토론했다." "내가 말했다. 〈어떤 공산주의자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고 해서 내가 읽고 싶은 신문을 못 읽게 하다니, 이건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요?〉 누군가가 가볍게, 악의 없이 대답했다. 〈아뇨, 왜 그래야 하죠? 지금까지 「전진」이나 「적기」를 읽으셨나요?〉"(151-2)


"혁명이란 무엇인가? 법률 전문가들은 헌법을 그 안에 규정된 것과 다른 방법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빈약하나마 이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1933년 3월 나치 '혁명'은 혁명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엄밀하게 '합법적으로', 헌법이 허용한 방법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눈속임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찬찬히 살펴봐도 그해 3월에 일어난 일들이 정말 '혁명'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지 여전히 의심이 간다. (기존 질서와 그 수호자인 경찰, 군부 등을 타격하는) 혁명이 늘 감동적이고 장엄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참극, 폭력, 약탈, 살인, 방화 등이 함께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가'이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용기를 보여주며 목숨을 걸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바리케이드는 시대에 조금 뒤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어떤 형식이든 자발성, 봉기, 헌신, 반란 등은 참된 혁명을 이루는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보인다. 1933년 3월 혁명에는 그 가운데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154-5)


"네 가지 요소가 결합해 나치 정권이 세워졌다. 네 가지 요소란 테러, 축제와 장광설, 배반, 마지막으로 집단적 허탈 상태다. 집단적 허탈 상태란 수백만이 동시에 신경쇠약에 걸린 듯 정신을 놓은 상태다. 많은 나라, 사실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태어날 때 이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렸다. 하지만 어떤 국가도 이토록 혐오스럽게 탄생하지는 않았다. 유럽 역사는 두 가지 형태의 테러가 있다. 하나는 고삐 풀린 혁명적 군중이 승리에 취했을 때 나타나는 걷잡을 수 없는 살의다. 다른 하나는 무적의 국가기구가 권력을 과시하며 위협하려고 냉혹하고 면밀하게 계획해서 일으키는 잔혹 행위다. 이 두 가지 테러는 대개 혁명과 억압으로 나눠진다. 첫째 테러는 혁명적이다. 순간적인 흥분과 분노, 도취 상태에 빠졌다는 데서 그 변명을 찾는다. 둘째 테러는 억압적이다. 혁명에서 일어난 만행을 보복한다는 데서 그 변명을 찾는다. 이 두 가지 테러를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결합하는 게 나치의 몫이었다."(155-6)


"3월 말 나치는 이제 혁명적 활동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고 느꼈다. 혁명적 활동의 조심스런 첫걸음은 1933년 4월 1일부터 유대인에 대항해 불매동맹을 맺는 것, 즉 그들을 보이콧하는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유대인에 대한 '계몽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사실 유대인은 '하류 인간'으로 일종의 동물인데 악마의 특성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널리 퍼진 두려움 너머 이상하고도 실망스러운 일이 있다면 이렇게 나치가 누군가를 살해하겠다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밝힌 일이 독일 전체에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 이는 나치가 그때부터 다른 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 무대에서 거듭 써먹어 성공한 수법이다. 한 나라든, 민족이든, 인종 집단이든 나치가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공공연하게 위협하면 갑자기 그게 일반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것도 협박을 받은 사람들이 과연 존재할 권리가 있는지를 문제 삼아 널리 토론했다."(172-4)


"모두들 갑자기 유대인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견을 세우고 표명할 권리가 있다고 느꼈다. 더 나아가 반드시 표명해야 한다는 의무감까지 생겼다."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서 일하면 이를 범죄로 간주하거나 적어도 눈치가 없다고 평가하는 게 곧 일반적인 의견으로 인기를 끌었다. 유대인의 옹호자에게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유대인들은 뻔뻔스럽게도 의사, 변호사, 언론인 가운데 이렇게 높은 백분비를 차지한다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람들은 대체로 '유대인 문제'를 백분율 계산으로 다루기를 좋아했다. 공산당원 가운데 유대인 백분비가 너무 높지 않은지, 세계대전 전사자 가운데 유대인 백분비는 너무 낮지 않은지 조사하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스스로 지식인인 체하는 어떤 남자는 아주 진지하게 전체 유대인 가운데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사람은 12,000명 뿐인데, 이는 이에 상응하는 아리아인의 숫자에 비하면 너무 적다고 주장하면서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어느정도 정당화'하기도 했다.)"(175)


"(이 모든 일에 깃들어 있는 광기를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나치 정권 아래에서도 적어도 처음 몇 년 동안 일상생활은 겉보기에 전혀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영화관, 극장, 카페가 꽉꽉 들어차고 야외와 무도장에서는 쌍쌍이 춤을 추었다. 사람들이 평온하게 거리를 거닐고 젊은이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몸을 쭉 편 채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나치도 이를 선전용으로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에 와서 보라. 유대인들까지도 얼마나 잘 지내는지 와서 보라.〉 광기, 공포와 긴장, '하루하루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무도, 그 비밀스런 흐름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마치 베를린 지하철역에서 〈수염을 잘 깎아서 기분 좋은 하루〉라는 카피가 달린 면도날 광고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남자 얼굴을 보면서 그가 벌써 4년 전에 대역죄로 플뢰첸제 교도소 마당에서 머리가 잘린 그 남자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191)


작별Abschied


"그 무렵 내가 작별을 해야 했던 것이 대법원만은 아니었다. 작별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극단적인 좌우명이 되었다. 예외도 없었다. 내가 살던 세계가 날마다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고 녹아내리더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식적인 영역에서 눈에 띄게 일어나는 일이 거의 가장 무난한 일이었다. 그래, 정당이 사라졌다. 해산했다. 우선 좌파정당이 해산한 다음 우파정당도 해산했다. 나는 어느 정당의 당원도 아니었다. 대중이 그 이름을 말하고 그가 쓴 책을 읽고 그가 한 연설을 토론하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이민을 떠나기도 했고, 수용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더 불안한 것은 어쩐 일인지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던 별로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사람들까지 꽤 많이 사라진 것이다. 날마다 듣다보니 그 목소리가 마치 지인처럼 익숙해진 라디오방송 아나운서가 집단 수용소로 사라졌다. 그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까지 곤란해졌다! 여러 해 동안 우리와 동행하던 남녀 배우들도 갑자기 사라졌다."(241-2)


"(공산당원이던) 한스 오토는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된 채 친위대 병영 마당에 누워 있었다. 체포된 다음 '잠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4층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다. 매주 악의 없는 해학으로 베를린 시민을 웃기던 신문 만화가가 자살했다." "5월에 상징적으로 책을 불태운 일은 신문 기사에 그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점과 도서관에서 책들이 사라졌다. 좋든 나쁘든 현대 독일 문학이 완전히 지워졌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치가 참아주던 몇몇 작가들은 이제 볼링 핀처럼 허공에 홀로 서 있었다. 그 밖에는 고전이나 갑자기 솟아난 끔찍하고 부끄러운 수준의 혈통문학과 향토문학 뿐이었다." "많은 신문과 잡지가 신문 가게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거기 남아있는 신문과 잡지에 일어난 일이 더 이상했다. 정말 그 신문이나 잡지인지 도저히 다시 알아볼 수 없었다." "「베를리너 타게블라트」나 「포시셰 차이퉁」처럼 오랜 전통을 지닌 민주적·지성적 신문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나치 기관지로 탈바꿈했다."(242-4)


"1933년 여름 나치가 아니었던 독일인들은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을까?" "우월성이라는 유혹에 굴복한 사람들은 초기 나치 정책이 보여주던 초심자의 도락적 성격에 연연한다.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이 모든 게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처음에는 확신에 차서 평온하게, 시간이 지나면 자기를 속이려 애쓰면서 나치 정권은 반드시 몰락한다고 예언한다. 마침내 나치 정권이 자리를 잡고 성공했을 때, 그들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무장하지 못했고 허황한 통계에 따라 면밀하게 계산한 심리적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뒤늦게 나치에 복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집단에서 나왔다." "우스운 것은 언젠가 실망을 모두 맛본 다음 그들이 옳다고 증명되리라는 사실이다. 나치가 몰락한 다음 그들이 돌아다니면서 내 이럴 줄 알았다고 떠벌리는 모습이 선연하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은 희비극적 인물로 남을 것이다."(249-50)


"둘째 유혹은 원한을 품는 것, 즉 피학적으로 증오와 고통과 한없는 비관주의에 자신을 넘겨주는 일이다. 이런 반응은 독일인들이 패배를 맞을 때 거의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반응이다. 즉 독일인은 누구나 (사생활이나 공공생활에서) 영영 포기해버리고 싶은, 무심하고 기진해서 자신과 세계를 기꺼이 악마에게 넘겨주고 싶은, 화가 나고 우울해서 도덕적으로 자살하고 싶은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한다. 모든 위로를 거부하다니! 아주 영웅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자세에 가장 유독하고 위험하고 악랄한 위로가 숨어 있는 걸 아무도 보지 못한다. 이렇게 마음껏 자기를 희생하면서 바그너적인 죽음과 몰락에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패배를 패배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패자에게 남은 가장 큰 위안이다. 아이가 인형을 잃어버리고 나서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서럽게 엉엉 울어대는 게 나치와의 전쟁에서 지고 난 다음 독일인의 기본자세가 되리라고 감히 말한다.(1918년 많은 독일인이 이미 이런 태도를 보였다.)"(250-1)


"셋째 유혹은 앞에서 나온 유혹에 굴복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증오와 고뇌로 영혼이 망가지고 싶지는 않다. 선량하고 온유하고 친절하고 '착하게' 남아 있고 싶다.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증오와 고뇌를 블러일으키는 일이 몰려드는데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귀를 막고 숨어들 수밖에 없다. 이는 부드러운 것을 딱딱하게 만들어 결국 현실감각을 잃고 마는 다른 형태의 광기로 이어진다." "갑자기 다양한 전원문학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1934년에서 1938년까지 독일에서는 어린 시절의 회상록, 가족소설, 풍경 화보집, 전원시와 섬세하고 여린 소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나왔다.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문학계에서도 이를 거의 알아채지 못했다. 나치의 공공연한 선전문학을 빼면 거의 모든 책이 다 이런 분야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것도 시들해졌는데 아마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런 문학에 필요한 무해함을 더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253-5)


"아니, 개인 생활로 물러나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어디로 물러나든 내가 피해 도망친 그것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나치 혁명이 정치와 사생활의 오랜 분리를 없애버렸고, 나치 혁명을 단지 '정치적 사건'만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혁명은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생활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독가스처럼 벽을 통해 스며들었다. 이 독가스에서 벗어나려면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신체적으로 멀어지는 것, 이민이었다. 즉 내가 태어나 언어를 배우고 교육을 받은 나라, 게다가 애국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는 나라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독일과 작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독일이 독일로 남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민족주의자들 스스로 독일을 망가뜨렸다.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자기 나라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했다. 그러나 비록 수많은 통용구와 상투적 표현으로 가려 있지만 진정한 갈등은 민족주의와 내 나라에 대한 충실함 사이에서 일어났다."(269-73)


"1933년 10월 13일 토요일, 독일이 군비축소회의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날 저녁 히틀러가 연설을 마친 다음, 라디오에서 국가의 첫 소절이 흘러나오자 (사법연수생을 위한 훈련소에 있던 우리는) 모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몇몇은 나처럼 머뭇거렸다." "〈이건 중요하지 않아. 난 아니잖아. 이건 중요하지 않아〉 하는 느낌이 혀 위에 쓴맛처럼 남았다. 이런 느낌으로 나는 팔을 들어 올린 채 3분쯤 허공에 뻗고 서 있었다. 국가와 호르스트 베셀 노래가 딱 그만큼 오래 걸렸다. 거의 다 절도 있게 딱딱 끊어가며 쩌렁쩌렁 같이 불렀다. 나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 그러듯 입술을 조금 달싹이면서 같이 부르는 시늉만 했다. 하지만 모두 팔은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이 끈 달린 인형의 팔을 들어 올리듯 라디오가 우리 팔을 잡아당겼다. 눈이 없는 라디오 앞에 그렇게 서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거나 부르는 척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른 사람의 비밀경찰이었다."(326)


"이런 '훈련소'에서도 의심할 나위 없이 행복이 피어난다. 동료애라는 행복이다." "동료애는 나치의 커다란 유혹 물질이자 미끼였다. 나치는 행복을 갈망하는 독일인들을 진전섬망증에 이를 때까지 동료애라는 알코올 속에 빠뜨렸다. 히틀러유겐트, 돌격대, 국방군, 수많은 훈련소와 연맹들을 통해 어디에서나 독일인을 동료로 만들었고 저항할 수 없는 나이에서부터 이런 마취제에 익숙해지게끔 했다." "동료애는 시민적인 의미에서든, 더 나쁜 종교적인 의미에서든 자기 스스로 책임진다는 느낌을 완전히 없애버린다." "'각자 자기를 위해서'라는 냉혹한 법칙이 아니라 '모두 한 사람을 위해서'라는 관대한 법칙 아래 살게 해준다." "더 나쁜 것은 동료애가 자기 자신과 신과 양심 앞에서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덜어낸다는 사실이다. 그는 동료들도 다 하는 일을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곰곰이 생각할 시간도 없다. 동료가 그의 양심이고 그는 동료들이 다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용서받는다."(3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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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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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871년 베르사유에서 출범한 도이치 민족국가를 어째서 단순히 '도이칠란트'라 명명하지 않고 '도이치 제국'이라 명명했던가? 그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이 나라가 민족국가 '도이칠란트' 이상의 것이자 그 이하의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하라는 것은 제국이 수많은 도이치 사람들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갖는 도이치 제국이었던 것이다. '도이치 제국'이라는 칭호는 이 부족한 부분을 감추어주는 대신, 그것을 넘어선 부분도 암시했다. 즉 중세에 생긴 '도이치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민족을 초월한 유럽 전역의 제국이라는 함의였다. '도이치 제국',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먼저 프로이센이 통치할 수 있는 만큼의 도이칠란트, 또는 도이칠란트가 지배할 수 있는 만큼의 유럽 및 세계라는 두 가지 의미였다. 앞의 것이 비스마르크의 생각이고, 뒤의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에 이르는 길은 도이치 제국의 역사이며 동시에 그 몰락의 역사이다."(19)


도이치 제국의 성립


"프로이센과 도이치 민족주의 진영─이 둘은 모두 도이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프로이센은 1701년에 처음으로 국가로 등장하여, 1756~1763년에 벌어진 7년 전쟁 이후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1815년 빈 회의 이후 비로소 도이치 강대국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 프로이센은 언제나 강력하게 폴란드를 지향했으며, 1796~1806년 10년 동안은 절반 도이치, 절반 폴란드의 두 민족 국가였다. 1815년에야 비로소 프로이센은 이른바 서방으로 방향을 돌려 도이칠란트에 편입되었다."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 시대에 생겨났다. 하나의 도이치 민족국가라는 생각은 19세기 이전에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13세기부터 신성로마제국은 점점 더 해체되어 난립한 수많은 나라들의 연합체였다." "당시 도이치 사람들이 이를 특별히 부자연스럽게 여긴 것도 아니었으니, 도이칠란트가 응집된 권력체, 즉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거론조차 될 수 없었다."(23-5)


"처음에 이 둘은 동맹을 맺기는커녕 적대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런 적대감에는 충분한 이유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오늘날의 일반적인 정치 개념을 동원해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프로이센은 '우파'다. 토지는 깨뜨릴 길이 없는 귀족 지배를 받고, 현대적인 절대주의 관료제로 무장한, 아직도 널리 봉건제의 흔적을 지닌 농업국가였다. 귀족 지배와 절대주의 관료제는 오늘날 우리가 분명히 '우파'로 분류하는 특성이다. 그에 비해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좌파' 운동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혁명 프랑스를 모방했다. 덕분에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 운동과 결속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을 통해 비로소 강력해졌다. 나폴레옹은 도이치 사람들에게 상이한 두 가지 반응을 만들어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선 안 돼!〉 하는 반응과,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하고야 말겠어!〉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반응이었다."(25-6)


"1815~1848년의 도이치 연방은 항상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공동 지배를 받았다. 오스트리아는 의심의 여지 없이 도이치 연방의 강력한 세력이었으며, 언제나 의장 국가였다. 하지만 또 다른 강대국 프로이센이 있었다. 1815년 메테르니히 재상 치하의 오스트리아는 이 다른 강대국과 협조하기로 결심했었다. 1848년 이후로는 더 이상 그렇지가 않았다. 도이치 연방의 재건 자체가 이미 프로이센의 의지에 맞서 오스트리아가 강제한 것이었다. 두 나라는 새로운 연방에서 경쟁국이자 라이벌, 적대국으로 등장했다. 이 경쟁에서 처음에는 오스트리아가 우세했다. 1848년까지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억압을 받았다. 1848년 이후로 민족주의는 더는 완전히 억압할 수 없게 되었다. 도이치 사람들이 그 사이 역사적인 일순간이나마 도이치 제국의 실현 가능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경험을 잊지 않았다.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이제 전혀 힘이 없는데도, 항상 고려해야 할 정치적 인자가 되어 있었다."(35-6)


"프로이센은 도이칠란트 정책을 통해 언제나 '작은 도이칠란트', 심지어는 단순히 북도이칠란트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다민족국가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통일 도이칠란트의 지배 세력도 되기를 바랐으니, 일종의 슈퍼 도이칠란트를 겨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의 비스마르크인 슈바르첸베르크 영주가 1850년에 실제로 추진했던 (당시) '7,000만 제국'을 겨냥하는 길이었다. 슈바르첸베르크는 1852년에 갑작스럽게 죽었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그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앞으로 도이칠란트를 놓고 벌어질 싸움에서 프로이센을 격퇴해야 할, 가능하기만 하다면 파괴해야 할 경쟁자로 간주하려는 그의 경향만은 죽지 않았다. 자극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던 비스마르크는 그 사실을 아주 강하게 느꼈다. 그가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던 시절, 오스트리아의 도이칠란트 정책은 직접적인 공격성을 덜 취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36-7)


# 대對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물(1866년)

1. 프로이센의 영토 확장 : 하노버 왕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선제후령 헤센, 나사우 등지를 프로이센 주州로 편입

2. 북도이치 연방 창설 : 보통·평등선거로 선출된 '제국의회'와 한 명의 '제국총리'라는 민주주의-의회주의 요소 포함

3. 남도이치 국가들과 동맹 체결 :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다름슈타트와 군사동맹 및 관세동맹 체결

4. 오스트리아의 변화 : 1,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도이칠란트와 결별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국가로 변모


"1870년에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 시대 원래의 기원과 결합하였다. 다시 프랑스에 맞서고, 다시 나폴레옹 황제에 맞서게 되었으니, 프로이센, 북도이칠란트, 심지어는 남도이칠란트의 민족주의자들조차 1870년의 프랑스 전쟁을 19세기 처음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행한 정복 전쟁에 대한 복수라고 느꼈던 것이다. 19세기 초의 민족적 자부심과 프랑스 증오가 갑작스럽게 모조리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도이치 사람들이 강자였다!" "영국 역사가 테일러는 이따금 (남도이치 국가들의 독자적인 주권을 어느 정도 유지해준) 비스마르크를 제국 건설자가 '제국 훼방꾼'이라 부르고 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민족 통일을 허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도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도이치 제국은 북도이치 연방 시절보다 훨씬 더, 연방국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연합국가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모든 작은 도이치 소망들이 충족되고 나면 가장 먼저 나타날 민족주의 진영의 목표는 큰 도이칠란트였다."(48-50)


비스마르크 시대


"비스마르크는 국내에서 보수주의 진영과 민족주의-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타협에 기반하여 제국을 건설했다. 비스마르크는 처음부터 마음속으로 적들과 합의를 보고 있었고, 그들과 더불어 정직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는 두 가지 근거를 가진 것으로, 첫째로 자기가 자유주의자들의 민족주의 열망을 만족시키고, 둘째로는 화해를 한 다음 그들을 제국의 국내 정치에 참여시킨다는 생각에 근거했다. 비스마르크는 개인적으로 보수적인 군주제 신봉자였다. 하지만 그의 제국이 기반을 두고 있는 헌법의 타협점은 절반 입헌군주제를 지향했고, 그가 제국 건설에서 지향한 정치적 타협은 보수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의 지속적인 연합정권이었다. 1867~1879년에 '철혈 총리'는, 전체적으로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되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1871년 이후로 민족주의 자유주의자들과의 타협이 더는 내부의 만족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었다."(55-6)


"중앙당das Zentrum과 사회민주당SPD은 제국 건설과 거의 동시에 창설되었다." "중앙당은 도이치 가톨링당이다. 가톨릭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부정할 길이 없이 민족을 넘어선 단체다. 중앙당은 당시 강력하게 로마를 지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정당이 이른바 알프스 산맥 너머 로마를 바라보기 때문에, '산맥너머 당'이라고 욕했다. 하지만 중앙당에서 지속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전혀 다른 점이었다. 다른 모든 도이치 정당들은 계급정당이었다. 보수당은 귀족의 정당이고, 자유당은 당시 강력하게 대두하던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의 정당이었고, 방금 등장한 사회민주당은 처음에는 순수한 노동자 정당이었다. 그에 비해 중앙당만은 그 어떤 계급과도 결속되지 않은 채, 모든 계급을 포괄했다." "중앙당의 이런 특성, 즉 계급을 넘어서는 그 구조가 비스마르크에게는 으스스했다." "그래서 그는 1870년대에 중앙당을 그냥 박멸하고 찢어 없애려고 했지만 이 일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다."(56-8)


"사민당은 계급정당이었고, 비스마르크는 제4계급인 노동자계급도 정치적 조직을 이루어 토론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을 철저히 이해했다." "비스마르크가 사민당에게 화를 낸 것은 그 계급적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첫째로는 사민당의 국제적인 태도, 둘째로는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당시 아직도 사민당이 갖고 있던 혁명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1878년부터 사민당에 맞서 가차 없는 전쟁을 펼쳤다." "사민당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후반부에는 고작 절반만 합법이었다. 사민당은 의회에서 자리를 차지하려 노력할 수 있고, 선거운동을 하고, 실제로 의회에 대표자를 내보낼 수도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런 헌법상의 권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밖에 나머지 모든 일이 금지되었다. 그런데도 이런 박해의 시대에 사민당은 특이할 정도로 꾸준하게 선거를 치를 때마다 세력이 강화되었다. 그것이 비스마르크 시대를 뒤덮은 무거운 정치적 먹구름의 하나였다."(58-9)


"대외적으로는 새로운 강국 도이칠란트에 맞서 프랑스-영국-러시아 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도이치 제국이 1871년에 이룩한 것을 넘어서는 순간 부딪치게 될 연합이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는 깊은 모욕감을 느꼈다. 자신이 취한 위협의 몸짓이 어디까지나 방어용이지 공격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의 정치가들에게, 특히 러시아 총리인 고르차코프에게 깊은 개인적인 실망감을 드러냈다. 또 다른 점이 더욱 중요했다. 1875년의 '전쟁 코앞까지 가는 위기' 이후로는, 연합의 '악몽'이 프랑스의 복수라는 '악몽'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순간부터 비스마르크가 활발한 평화 정책을 펼쳤다고 말할 수 있다. 유럽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 방지가 곧 도이치 제국의 이익이라고 보는 정책이다. 오늘날 비스마르크의 명성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평화 정책이지만 그가 도이치 제국이 위험한 상황에 연루되는 일들을 막는 것에 실제로도 성공했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65-6)


"비스마르크는 정치가로서의 유능함과 최고의 정직한 의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루고자 했던 것을 자기 시대에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 그 자신이 제국 건설 과정에서 강대국 프랑스와의 갈등을 통해 도이치 제국에 지속적인 적, '불구대천 원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베를린 국제회의와 그 이후의 정책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이 동맹을 맺을 길을 닦아놓았다. 동시에 그가 막아보려고 노력하기는 했어도 분명히 눈에 보이는 갈등을 속에 지닌 채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당시 유럽의 [광대한] 터키 영토를 물려받으려고 했다. 그를 통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에는 장래의 갈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통치하던 도이칠란트는 그의 가장 깊은 의도와는 반대로, 1878~1879년에 이미 이 갈등에 연루되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러시아-오스트리아 갈등은 1914년 1차 대전을 만들어낸 직접 원인이 된다."(80-1)


황제 시대


# 비스마르크 퇴임(1890)의 두 가지 직접적인 결과

1. 사회주의자 [박해]법 연장 무산

2. 러시아와의 배후 안전 계약 연장 무산


"1890년대 중반까지도 혁명은 사민당의 강령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사민당 안에서 '수정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방향이 차츰 발전되어 나왔다.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랬다. 우리는 혁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사회 속으로, 국가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서 어느 날인가 국가를 접수할 수 있어야 한다." "당대회의 영원한 수정주의 논쟁에서 수정주의자들은 정기적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강해졌다." "황제 시대에는 프로이센 헌법 갈등이나 문화투쟁, 사회주의 박해 같은 것이 없었다. 여러 정당들이 어울린 의회는 국내 정치에서 통치를 위해 점점 더 중요해졌는데, 정부는 의회에서 새로운 법률안을 계속 통과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이 시기에, 민주화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그러면 과장이 될 테니까─장래 민주화의 조용한 사전事前 정지 작업이라 할 수 있는 대중 정치화가 이루어졌다."(87-8)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다음에 일종의 '대국大國 감정' 같은 것이 생겨났다. 빌헬름 황제 시대에 매우 많은, 그것도 가능한 모든 계층 출신 사람들이 갑자기 원대한 민족적 전망, 민족적 목적을 눈앞에 그렸다. 〈우리는 세계적 강대국이 된다, 우리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도이칠란트가 전 세계의 앞장에 선다!〉는 전망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애국심은 이전과는 다른 성격이 되었다. 이 시기 도이치 사람들을 고무한 '민족주의'는 이제 스스로 아주 특별한 존재, 미래의 강대국이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이었다. 이런 변화는 기술 산업의 발전을 통한 외적 생활의 개선과 보조를 맞추었다." "당시 도이치 사람들은 많은 영역에서 유럽의 선두에 서 있었다. 영국이 아직 느린 속도로, 프랑스는 더욱 느린 속도로 산업화가 계속되었고, 러시아는 이제 겨우 산업화의 초기에 들어서고 있는데, 도이칠란트는 기술-산업 측면에서 놀라운 속도로 현대화되었고, 또한 그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지녔다."(90)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유럽의 식민 제국주의 시대였다. 모든 큰 국가들이 유럽을 넘어 유럽 밖으로 확장하려는 '세계정책'을 추구하고, '세계 강대국'이 되려고 했다." "당시 유럽 전체에 저항할 길 없는 설득력을 가진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나타났다. 단순히 유럽에서의 권력 체제와 세력 균형의 시기는 지나고, 이제 바야흐로 세계 권력 체제가 들어서고 있다. 이 체제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세계 패권을 요구해온 유럽의 국가들이 대규모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의 세력 균형이 유럽 중심의 세계 세력 균형으로 넘어갈 것이다." "새로운 판에서 도이칠란트도 이전의 식민지 강대국들과 나란히 하나의 세계 강대국으로 올라서는 한편, 영국은 다른 나라들과 나란히 세계 강대국의 하나라는 지위로 내려와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그들의 눈앞에 떠돌았다. 뒷날의 제국총리 뷜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그늘로 밀어넣으려는 게 아니다. 그냥 우리도 양지로 들어가자는 것뿐이다.〉"(92-3)


# 황제 시대의 세 가지 위기

1. 제1차 모로코 사태(1905) : 프랑스가 이집트를 영국에게 넘기는 대신 모로코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권을 인정받자 도이치 제국은 황제를 탕헤르에 파견하면서 이에 맞섰지만 오히려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을 성사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2. 러시아-오스트리아 갈등(1908) :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비호를 받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여 갈등이 발생하자, 도이치 제국은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 사태를 종결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군비 강화를 촉진했다.

3. 제2차 모로코 사태(1911) : 프랑스가 알헤시라스 조약을 위반하여 남부 모로코로 영토를 더욱 확장하자, 도이치 제국은 또다시 포함砲艦 한 척을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영국이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제국총리 베트만 홀벡은 전쟁 발발시, 도이치 제국이 승리하려면 오스트리아의 참전, 사민당의 동참, 영국의 중립이라는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 세 조건을 토대로 바라보면, 1914년에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한 후에 갑자기 등장한 상황은 도이치 제국에 유리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은 도이치 제국의 전쟁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전쟁, 곧 오스트리아 대對 세르비아의 전쟁이 된다.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한다면, 첫째로 오스트리아가 도이치 제국 편에─이는 오스트리아 전쟁이지 도이치 전쟁이 아니니까─설 것이고, 둘째로 도이치 사민당이 차르 러시아에 맞선 전쟁을 승인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셋째로, 그리고 이것이 가장 좋은 점인데, 영국은 거의 확실하게 이런 동유럽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즉시는 아닐 것이다─실제로 이것은 올바른 생각이었다. 영국은 역사상 순수한 동유럽의 문제에는 늘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4-5)


"(그러나 중립국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를 전격전으로 제압한다는 슐리펜 작전 계획은) 처음부터 영국을 적의 편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영국이 개입할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영국은 프랑스가 완전히 힘을 잃는 꼴을 그대로 조용히 앉아서 구경할 수만은 없었다. 패배한 프랑스를 포괄하는 도이치 세력권이 영불해협과 대서양까지 뻗어 나온다면, 영국은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륙의 강력한 세력과 마주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벨기에는 영국을 마주 보는 해안 국가다. 벨기에 해안선을 지배하는 자는 영국을 위협하게 된다. 특히 그것이 빌헬름 2세 치하의 도이칠란트처럼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나아가 법적인 측면도 있었다. 도이칠란트를 포함하는 유럽의 강대국들은 수십 년 동안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해왔다. 이 중립성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나라가 영국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벨기에라는 완충 국가가 파괴되는 것을 손 놓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117-8)


"물론 대륙의 모든 강대국은 1차 대전을 대규모 공격으로 시작하면서 제각기 빠른 승리를 희망했지만, 모든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하고, 러시아가 오스트리아(갈리치아 지방에서)와 도이칠란트(동프로이센에서)를, 그리고 프랑스가 로렌과 아르덴에서 도이칠란트를 공격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또한 도이치 군대가 벨기에와 프랑스를 공격한 것도 실패했다. 전쟁 처음 몇 달 동안에 이미 모든 전장에서─모든 나라 참모부의 확신과는 달리!─1차 대전의 결과에 기본이 되는 사실이 드러났다. 곧 당시의 전쟁 기술 수준에서는 방어가 공격보다 우세했다. 공격은 고작해야 토지를 얻을 수 있었을 뿐, 심지어는 적대국이 세르비아나 벨기에 같이 작은 나라라 해도 적국을 전쟁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덕분에 1차 대전은 소모 전쟁의 우울한 특성을 지녔다. 전략적 수확도 없이 거듭 되풀이되는 학살 전쟁이었을 뿐이다."(121-2)


"사민당 내부의 좌익 세력은, 1914년에 벌써 당의 애국적 전쟁 정책을 몹시 못마땅해하면서 동참했다. 다음 몇 해가 지나는 동안 사민당의 좌익 세력이 더욱 강해지다가, 1917년에 마침내 새로운 '독립 사회민주당'USPED이 갈라져 나왔다. 이 정당은 전쟁을 거부하고 전쟁 채권 발행을 승인하지 않았다." "결국 의회 안에 두 그룹이 형성되었다. 우파 그룹은 부분적으로 상당히 극단적인 전쟁 목적, 곧 정복과 합병을 추구하면서 거대한 식민 제국, 거대한 전쟁배상금을 요구했다. 그에 비해 중도좌파 그룹은, 그냥 멀쩡한 상태로 전쟁에서 빠져나오기만 해도 기뻐해야 하며, 그렇기에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합의 평화조약, 곧 '영토 합병과 전쟁배상금이 없는' 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마치 위대한 전쟁 목적만 있으면 이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거나, 아니면 합의할 각오만 하면 벌써 타협에 의한 평화조약을 이룰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논쟁은 몹시 격분한 가운데 진행되었다."(129-31)


"도이칠란트는 1917년에 체제가 엉망이 되었다. 겉으로는 헌법상 바뀐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헌법이 더는 기능하지 못했다. 도이치 제국의 외교는 실질적으로 군 총사령부가 이끌었고, 국내 정치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의회 다수파가 이끌었다. 서로 날카롭게 나뉘어 대립하던 이들 두 개의 권력 중심부는 많은 문제들을 두고 서로 협조했다." "의회 다수파는 '총력 동원령'에 동의했으나, 국내 정치의 개혁이라는 의미를 밑바탕에 깔았다. 이른바 '보조 인력법'이 결의되었고, 이로써 처음으로 기업가와 노동조합의 장래 임금 협상권, 기업체 안에서 노동조합의 협력 등과 같은 일들이 관철되었다. 미래를 포함하는 이런 장치들은 당시 도이칠란트에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는데, 총사령부는 그것이 못마땅했으나 자신들이 군사 프로그램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이처럼 1917년 말 도이칠란트에서 황제와 제국총리는 이미 실세가 아니었고, 한편에 군사령부, 다른 편에 의회 다수파가 실세였다."(132-3)


1918년


"1918년의 시작을 알리는 대형 사건은 볼셰비키 러시아와의 평화조약, 곧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이었다." "막 시작된 러시아 내전의 혼란 속에서, 그리고 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협상국들의 개입 아래서, 도이치 제국의 실권자들은 갑자기 이 조약을 넘어 러시아 전체를 도이칠란트의 종속 아래 둘 가능성을 보았다. 도이치 군대가 조약에서 확정된 국경선을 훨씬 넘어 진군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1918년 여름에 도이치 군대는 북부 나르바에서부터 드네프르 강을 넘어 '돈 강변의 로스토프'에 이르는 긴 선상線上에 섰다. 그러니까 그들은 거의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차지한 만큼이나 멀리 진출한 것이다. 러시아의 거대한 지역을 이미 손아귀에 넣고도, 볼셰비키 통치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진짜 러시아를 도이치 제국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도이치 동부 제국은 1918년의 나중에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그대로 침몰했고 거대 동부 제국의 환영幻影만 뒤에 남겼다."(137-9)


"서부전선에 집중하게 된 루덴도르프는 미국이 대규모로 개입하기 이전에 전선戰線을, 그것도 영국 전선을 무너뜨리려고 모든 것을 동원했다." "여기서 1차 대전이 적어도 서부에서는 아직도 보병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어떤 군대도 개별 군인의 행군 속도보다 더 빨리 진격할 수는 없었다. 방어군은 배후에 철도를 두고, 철도를 통해 다른 전선에서 병력을 이쪽으로 수송해 올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3월 21일에 도이치 총공격이 시작되어 며칠 동안 대규모 승전보가 나오고, 상당수의 포로와 엄청난 지역의 확보가 이어졌다. 그런 다음 사태 진행이 차츰 느려지다가 완전히 멈추어버렸다. 도이치군의 공격은 3월 말에는 이미 전략적으로 실패한 공격이 되었다. 말하자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앞이 꽉 막혀버린 것이다. 엄밀히 살펴보면 그로써 이미 겉보기로나 실질적으로나 서부전선에서 도이치군의 승리 가능성은 물 건너간 일이었다."(141-3)


"이런 상황에서 루덴도르프는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9월 28일에 그는 휴전 청원을 하기로 힌덴부르크와 합의했다." "외무장관 힌체는 윌슨 대통령의 공감을 얻기 위해 국내 정치 측면에서 휴전 청원을 뒷받침하자고 제안했다. 즉 미국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면 의회 민주주의 정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새로운 민주주의 도이칠란트가 평화를 청하는 것이 좋겠다. 윌슨 자신이 내놓은 평화 강령에 기반을 둔 평화를 말이다! 그러니까 의회 다수파가 내각을 구성하고, 그것 말고도 제국을 의회주의-내각제 군주국으로 만들도록 헌법을 고쳐야 한다. 내각제 국가에서, 의회는 불신임 투표를 통해 장관들과 총리를 해임할 수 있다. 즉 임박한 군사적 붕괴 때문이 아니라, 이런 민주주의 개혁의 측면에서 평화를 청원한다는 인상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9월 29일 총사령부에서, 곧이어 황제가 등장하여, 즉각적으로 의회 다수파 출신 장관들로 구성된 내각제 정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147-9)


"암담한 이 순간에 사민당이 이 돌파구로 뛰어들었다. 이런 특이한 발전은 평화 시에 이미 준비되었던 것이지만, 이제 다가오는 몇 주와 몇 달 동안 완전히 결정적인 것이 될 참이었다. 사민당은, 적어도 사민당 다수파는 다른 어떤 정당보다도 책임을 떠맡을 각오가 되어 있어다. 사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버트는, 우리더러 책임을 떠맡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돌파구로 뛰어들어야 하고', 도이치 제국에서 아직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민당에게 휴전 청원을 내라는 요구를 하고, 수십 년 전부터 그들이 이루고자 노력한 것, 곧 나라를 의회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에 동의해주었으니 더 말할 게 무엇이랴. 이제 의회는 불신임 투표를 통해 총리와 장관들을 경질할 수 있고, 그 밖에도 이미 시효가 끝난 프로이센의 [납세액에 따라 각기 심한 차별적 권리를 두는] 3등급 투표제를 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사민당은 얼마간의 토론과 숙고를 거친 끝에 이 거래를 성사시키기로 했다."(150)


"11월 초에 발생한 도이치 혁명은, 정부에 아무 보고도 하지 않은 채로 영국 함대에 맞서 한 번 더 거대한 일전을 감행하겠노라는 해군 지휘부의 단호한 결정을 통해 촉발되었다. 도이치 함대 병사 일부가 이 계획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마침내 11월 4일 킬Kiel 시의 대규모 해병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해병 폭동은 시기적으로 '황제 문제' 논쟁─윌슨 대통령이 군주제 폐지를 요구하면서 벌어진 논쟁─과 맞물려 일어난 일로, 정치적으로는 이렇다 할 목표도 없었다. 하지만 함대와 도시를 장악하고 나자 해병들은 폭동을 일으킨 죄로 사형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미 시작한 일을 어떻게든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혁명에는 지도자도 없었지만, 이는 대중에게서 터져 나온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후방의 군대는 제각기 병사 평의회를 결성하고, 공장은 제각기 노동자 평의회를 만들었다." "더 이상 혁명을 멈출 수 없을 듯이 보였다. 11월 9일에는 수도 베를린마저 혁명 세력이 장악했다."(154-6)


"11월 9일에 총사령부는 대부분 사단장인 39명의 전방 지휘자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휴전이 이루어질 경우 군대가 왕좌의 유지를 위해, 즉 황제를 위해 혁명 세력에 맞서 싸울 것인지 여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사단장들의 한결같은 판단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군대는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폐하를 모시고 도이칠란트로 돌아갈 각오는 되어 있지만, 밖을 향해서든, 안을 향해서든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뒤이어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10월 말에 자기들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에 임명한 그뢰너 장군을 보내, 황제에게 퇴위나 적어도 망명을 권하기로 결심했다. 황제는 11월 9일에 다시금 특이하게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이런 권고를 따랐다. 빌헬름 2세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났고, 그로써 자신의 황제 직위뿐만 아니라, 장래의 군주제 부활의 기회도 함께 파묻어버렸다. 11월의 나중에 나온 공식적인 퇴위 선포는 실질적으로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159-60)


"휴전협정은 11월 11일에 발령되었다. 8월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승리의 기분에 젖어 있었다. 10월 초에 휴전 청원의 소식을 통해 비로소 사람들은, 군 최고사령부가 아닌 제국 정부가 전쟁이 승산이 없다고 선포하고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11월 9일에는 정부가 순수한 사민당 정부로 바뀌더니 그와 동시에 [해병들의 폭동으로 시작된] 혁명이 성공[=공화국 출발]했고, 영주들은 모조리 퇴위했으며 황제도 퇴위했다는데, 어쨌든 황제는 도망을 갔다.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별다른 정보가 없던 도이치 대중에게, 순수하게 시간적 경과로만 따지면 사건은 다음과 같은 모양새였다. 우리는 전쟁에 이기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동안에도 언제나 합의평화만 바라던 약삭빠른 놈들이 정권을 잡더니 전쟁을 포기해버렸다. 그러자 혁명이 일어났고, 이어서 우리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런 토양 위에서 나중에 이른바 '배후에서 단도 휘두르기'라는 전설이 생겨났다."(162-3)


"1918년은 거대한 거리 전투로 끝을 맺었다. 베를린 전투에서 혁명군인 민간 해병대는 옛날 군대 잔당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베를린에서 새해는 이른바 '스파르타쿠스 주간'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기간에 최초의 의용군이 혁명 세력의 새로운 시작을 잔인하게 유혈 진압했다." "12월과 1월 베를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1919년 전반부에 수많은 도이치 대도시들에서 되풀이되었다. 일종의 조용한 내전이 진행된 것이다. 이 내전에서 의용군은, 에버트-노스케 정부의 완벽한 비호를 받아, 이어서 에버트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샤이데만-노스케 정부의 비호를 받아, 수많은 대도시에 아직 남아 있던 노동자 평의회와 병사 평의회 출신 행정부 인물들을 피로써 쓸어냈다. 사민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 다수파는, 황제 시대 군대의 반혁명 세력과 결탁하여 1918년의 혁명을 실질적으로 없었던 일로 만들었다. 이 혁명에서 단 하나의 결과만 남았으니 곧 군주제의 종결이었다."(167)


바이마르와 베르사유


"1914년 이전까지 도이치 제국은 당시 유행하던 표현대로 하자면 '포위된' 나라였다. 4개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중 세 나라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1차 대전에서 도이치 제국에 맞서 연합했다. 네 번째 강대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차 대전의 결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 대신에 허약한 후속 국가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크기로 보아 전혀 강대국이 될 수 없었으니 조만간 가장 가까이 있는 강대국, 곧 도이칠란트의 영향력 아래 들어올 것이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이 된 러시아는 유럽의 체제 바깥에 존재했다. 러시아는 서방국가들에 맞서기 위해 또 다른 추방된 나라인 도이칠란트와 연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전쟁의 결과물인 무장 해제와 전쟁배상금을 통한 약화는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국은 장기將棋 게임에서 흔히 말하는 바, (패전 후에) 전쟁 전보다 더욱 강화된 위치를 갖게 된 것이다."(174-5)


"도이칠란트에서는 내면으로 조약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 조건이 수정되어야 마땅하다는 전반적인 합의를 이룬 가운데, 처음부터 우선순위를 둔 논쟁이 있었다. 무장해제 규정을 비껴가며 먼저 군사 강국이 되어야 하나, 아니면 배상금 문제를 떨쳐버리고 우선 경제를 재건해서 경제적으로 강대국이 되어야 하나? 앞의 주장은 국방군의 정책으로, 특히 당시 사령관이던 제크트 장군의 정책이었다. 이것이 먼저 관철되었다. 제크트는 비밀리에 재무장 노력을 했고, 아주 분명히 보이는 일이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오로지 러시아와의 협조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아주 일찌감치, 1920년대 초에 벌써 국방군과 붉은군대 사이에 비밀 군사 협력이 이루어졌다. 소련은 도이치 국방군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된 무기, 탱크, 공군, 화학무기 등을 연습할 땅을 제공했다. 그 대가로 국방군은, 당시 아직 건설 중이던 붉은군대에 교육과 도이치 참모부의 여러 방식을 전수했다."(176-7)


"도이치 외교부와 전체 정책에서는 우선순위가 달랐다. 재무장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배상금 부담을 털어내고 그로써 도이치 경제를 재건할 기회를 갖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 목표를 위한 도이치 정책은 사회적 파국을 감수한 것이었다. 바로 국내 정치의 분위기에 파괴적으로 작용한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정책이었으니, 이는 1919년에서 1922년까지 빠른 속도로 커지다가, 1923년에는 질주 속도로 진행되었다." "물론 일시적인 경제적 이점도 있기는 했다. (실질임금이 계속 떨어지고는 있었지만) 도이치 산업체는 저축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전후에 대규모 병력의 귀환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에서도 생겨난 대량 실업 사태를 피할 수가 있었다. 도이치 산업체는 엄청난 물량을 계속 낮아지는 가격으로 수출하면서 계속 가동되었다. 그러니까 도이칠란트에서 인플레이션으로 가장 많은 고통을 받은 계층은 노동자가 아니라 저축 자산을 가진 중산층이었다."(179-80)


"(1929년 세계 경제공황으로 등장한) 디플레이션 정책은 배상금을 떨쳐내기 위해, 바이마르 시대 도이칠란트가 떠맡은 두 번째 대규모 사회적 파국이었다. 세계 경제공황은 단순히 도이치 제국만이 아니라 (러시아를 뺀) 서방세계 전체에 타격을 주었다. 경제공황을 맞은 모든 나라들, 특히 미국도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정치적 지불, 즉 한편에는 미국을 향한 유럽 연합국의 부채 상환, 다른 한편에는 서유럽 연합국을 향한 도이칠란트의 배상금 지불은, 점점 더 붕괴하는 세계 경제에 부담일 뿐으로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1931년에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이런 모든 정치적 지불의 중단을 요구하고, 우선 1년 동안 이른바 '후버 모라토리움'을 단행했다." "1932년 로잔에서 30억 마르크의 최종 금액이 합의되었지만, 이 돈을 실제로 갚지도 않았고, 요구도 없었다. 그러니까 당시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은, 도이칠란트를 일부러 가난하게 만들어 배상금에서 벗어난다는 자신의 정책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188-9)


"1932년에 도이칠란트는 수정주의 노선에서 또 다른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해에 제네바에서 국제 군축회의가 열렸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서방국가들은, 도이칠란트의 무장해제를 전반적인 무기 감축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었다. 이 규칙이 이번 도이치 정책의 지렛대가 되었다. 도이치 대표는, 서방국가들이 도이칠란트의 강압적인 무장해제만큼 무기 감축을 하든가 아니면 도이칠란트에도 그들과 동일한 정도로 재무장할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으로 도이칠란트는 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 12월 제네바 군축회담에 참석한 서방국가들은, 이제 더는 브뤼닝이 아닌 슐라이허를 수반으로 하는 도이치 정부에, 대등한 군사적 무장의 권리를 인정해주었다. 그러니까 1932년 말에 도이칠란트는 여러 우회로들을 거쳐서, 1919년 이후로 강대국으로의 부활에 걸림돌이 되던 두 개의 핵심적인 부담, 곧 엄청난 전쟁배상금 지불의 의무와 매우 작은 방어력만 유지할 의무를 털어버린 것이다."(190)


힌덴부르크 시대


"새로운 공화국은 황제 국가의 전체 시설들, 군대, 관료 집단, 사법부, 교회, 대학들, 심지어 대규모 농민들과 사업가들까지 거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고, 그들이 지금까지와 똑같은 성격과 옛날의 품격, 사회의 기준이 되는 드높은 지위까지 고스란히 지니도록 해주었건만, 그들은 거부의 자세를 견지했다. 거부감은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고위 관료와 장관들은 투덜대며 충성했다. 국장급과 서기관급 관리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다했고 또 쓸모도 있었지만, 옛날 국가에 대해 지녔던 열광을 지니지 않은 채 그냥 임무를 수행했다. 심지어 그들은 공화국 초기에 우파 쿠데타, 곧 1920년의 카프Kapp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도, 일종의 수동적 저항을 통해 쿠데타 정부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고작 이것이 공화국 정부가 옛날 엘리트층에서 찾아낸 가장 호의적인 태도였다. 군대는, 예컨대 카프 쿠데타 때, 고위 관료층과는 달리 합법적 정부와 불법적 정부 사이에서 냉정한 중립을 지켰다."(198-9)


"각종 대학들에서 공화국의 처지는 몹시 나빴다. 당시 대학생들과 교수들, 고등학교 교사들과 고등학생들은 직립부동의 반反공화파, 군주국 지지, 민족주의, 보복주의 입장이었다. 교회의 경우 이런 태도가 조금 온건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적어도 개신교는 오늘날 좌파인 만큼이나 당시에는 우파였다. 가톨릭 중앙당이 정부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가톨릭교회도 공화국에 대해 극히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산업계의 사정은 더 복잡했다. 혁명 직후인 11월에 기업주와 노동조합들 사이에 '슈틴네스-레기엔 협정'이 맺어졌다. 노동조합과의 협조 아래 미래의 임금 조건들을 규정하겠노라는 일종의 평화조약이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기업가와 노동자들 사이에 적대적인 계급적 이해관계를 도로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 모든 그룹들의 거부감이야말로, 1919~1924년까지 에버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공화국이 도이치 제국의 지속적인 국가 형태로 굳어질 수 없었던 이유였다."(199-200)


"이어서 중간기인 1925~1929년 사이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갑자기 견고해진 듯이 보였다. 이제 처음으로 헌법에 따라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등장했다." "황제 시대의 지배 계층은 공화국에서도 실질적인 지배 계층으로 남아 있었지만, 새로운 국가가 진짜 자기들의 나라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던 그들이 이제 갑자기 달라진 눈길로 이 나라를 바라보았다. 힌덴부르크 대통령 치하의 공화국은, 힌덴부르크가 최고로 존경할 만한 황제 시대 핵심 인물의 하나로서 세계대전 기간에 이미 일종의 대리 황제 노릇을 했던 사람이니만큼, 에버트와 사민당의 공화국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그때까지 의회에서 국가에 거부감을 가진 가장 강력한 우파 정당, 곧 도이치 민족주의 국민당이 이제 공화국 정부에 동참할 각오를 했다는 사실에서 재빨리 드러난다." "더는 중도-좌파 정당들에만 의존하지 않고, 중도-우파 연합에 의해서도 아주 정상적인 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이것이 공화국을 견고하게 만들었다."(200-1)


"1929년 10월에 세계 경제공황이 터졌다. (사민당이 주도하고 우파 자유주의자들이 참여한) 대연정 정부를 이끌어 온 슈트레제만이 매우 불운하게도 바로 이 10월에 죽었다. 그러자 정부는 도이칠란트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악화된 이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정부가 붕괴되고 1930년 3월에 힌덴부르크는 슐라이허의 충고를 받아들여 예정대로 브뤼닝을 총리로 지명했다. 브뤼닝은 헌법 48조에 근거하여, 의회를 고려하지 않고 통치할 전권을 대통령에게서 위임받았다. 이 48조 조항은 국가원수가 긴급사태라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긴급명령을 통해 의회의 입법권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어차피 대통령은 의회 해산 권한을 지녔다. 의회가 대통령의 긴급명령을 철회할 경우, 대통령은 언제라도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다. 이제 브뤼닝은 대통령의 이름으로 이 모든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힌덴부르크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 군주제 부활을 목적으로 계획한 쿠데타를 위한 과도정부였다."(205)


"브뤼닝 정권은 형식적으로는 헌법의 틀을 지켰기에 역설적이게도 브뤼닝이 바이마르 헌법의 최종 수호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세계 경제공황이 터지자, 브뤼닝은 이제야말로 외교적 측면에서 절호의 기회를 보았다. 이는 곧 도이칠란트에서 경제 위기를 의도적으로 과격하게 악화시켜서 전쟁배상금을 털어낼 기회였다. 그것이 처음에는 미리 기획된 쿠데타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그는 1930년 7월에 의회를 해산했고, 9월에 새로운 선거를 하기로 했다. 여기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선거에서 히틀러의 민족주의-사회주의[=나치] 정당이 갑자기 제2정당으로 올라선 것이다. 저 '좋던' 힌덴부르크 시절에는 그냥 소수당에 지나지 않던 정당이었다. 이 정당은 유권자의 19퍼센트에 해당하는 600만 표를 얻어 107개 의석을 차지했다. 이로써 도이치 국내 정치 무대에서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되는 새로운 세력이 갑자기 나타났다."(206-7)


# 나치당의 급부상 요인

1. 경제공황이 야기한 빈곤을 저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현

2. 상처입은 자부심과 원한을 품고 있던 민족주의의 재등장

3. 지도자를 갈망하는 대중의 마음을 점령한 히틀러의 매력


"슐라이허는 브뤼닝에게 히틀러 운동이 더 막강해지기 전에 군주제 쿠데타를 끝내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브뤼닝이 꾸물거리자 그는 힌덴부르크를 설득하여 브뤼닝을 밀어내고 새로운 권위주의 헌법으로 넘어가는 일을 완수할 총리를 임명하려 했다. 이 시점에 슐라이허가 찾아냈다기보다 거의 만들어낸 인물이 바로 프란츠 폰 파펜이었다." "파펜은 브뤼닝과는 반대로, 즉시 쿠데타를 시작했다. 맨 먼저 의회를 해산했다. 7월 말에 선거가 있었고, 나치당이 이번에는 유권자의 37퍼센트를 얻어 도이칠란트 제1정당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도 강력해졌다. 1932년 7월의 의회는, 시민 계층과 사민당이 아무리 대규모 정당연합을 해도 정부를 구성할 다수가 되지 못한 최초의 의회였다." "이에 앞서 파펜은 총리로 임명된 직후에, 이른바 '프로이센 타격'을 수행했었다. 바이마르 정당연합이 계속 정권을 잡아온 합법적인 프로이센 정부를 중단시킨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는 프로이센의 독립을 진짜로 끝낸 사건이었다."(211-4)


"어쨌든 슐라이허는 11월 말에 파펜의 국가 쿠데타 계획에 동참하지 않고, 파펜을 그대로 몰락시켰다. 이어서 힌덴부르크는 (몹시 못마땅해하면서) 국가 쿠데타를 연기하고 슐라이허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 사이 파펜은 어떻게든 히틀러를 통제해볼 속셈을 계속 품고 있었다." "파펜은 히틀러를 귀족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히틀러는 재능이 있는 평민, 벼락 출세자이니, 이른바 '남작들의 내각'에 청강생으로 참석시켜주면 몹시 기뻐할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는 히틀러의 훨씬 더 큰 게획들과 훨씬 높은 명예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1933년 1월 말에 민족주의-사회주의당과 도이치 민족주의당의 연합정권이 성립되었을 때, 어떤 평론가가 깜짝 놀라고 경악해서 파펜에게 비난 섞인 질문을 던졌다. 〈뭐라고요, 히틀러를 권좌에 앉혔단 말입니까?〉 파펜은 몹시 거만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잘못 생각하신 게요. 우리가 그를 참가시킨 거지.〉 그는 얼마나 잘못 생각했던가!"(217-9)


히틀러 시대


"히틀러는 제국총리로 임명되고 난 다음 1933년 2월부터 7월까지 4개월 만에 정치권력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러고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그때까지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종류의 권력, 곧 완벽한 전권을 장악했다. 따라서 권력 장악은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단계는 1933년 처음 절반의 기간에, 정치 영역을 말끔하게 정리한 일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있었던 정치적 생명체, 곧 바이마르 의회 민주주의 잔재와 새로 나타난 권위주의적 대통령제가 혼합된 정권이 1933년 1월 30일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1933년 7월 14일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정당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통령제 정권이나 의원내각제 정권도 없어지고, 그 사이에 새 총리 혼자서 자기 당을 이끌고 통치했다. 그동안 숨이 멎을 정도의 사건들이 진행되었는데, 물론 수많은 법률 위반과 끔찍한 일들과 비열한 일들이 행해졌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1933년 2월 27일의 의회 건물 화재 사건이다."(224)


"2월 28일 체포가 시작되고, 한 주 뒤에 치러진 선거에서 민족주의-사회주의당은 도이치 민족주의당과 합쳐도 겨우 과반을 넘는 52퍼센트 정도를 득표했다. 민족주의-사회주의당 혼자만 따지면 겨우 49.3퍼센트 득표였다. 절대 다수의 표를 얻으리라는 희망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공산당 의원들이 사라지고 나자 나치당은 갑자기 절대 다수파가 되었고, 시민 계층 정당들과 힘을 합치면, 심지어 의회 자체를 없애는 헌법 개정에 필요한 2/3 의석이 되었다. 3월 23일에 의회가 의회주의 헌법을 없애는 문제를 다루게 되었을 때, 이 2/3 의석이 성립되었다. 사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이 이른바 전권 위임법에 찬성했다. 이는 정부가 말하자면 합법적으로, 의회의 협조 없이 법을 만들 권한을 갖는 것으로, 앞으로 4년 동안 유효했다. 이것은 2월 28일의 쿠데타 이후 두 번째 국가 전복 쿠데타였다. 바로 6월과 7월에는 모든 시민 계층 정당들의 완전한 자진 해산과, 사민당 및 공산당의 금지가 진행되었다."(225-6)


"이 기간에 극히 특이한 일은, 시민 정당들이 실제로도 더는 활동하고자 하지 않고, 말하자면 정치적 무無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 것을 만족스럽게 여겼다는 점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제대로 정의되거나 경계를 정하거나 확실하게 잡히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공중에 떠도는 '가스 형태의' 성격을 지녔지만, 그런데도 몹시 중요한 것이었다. 1914년 8월의 분위기와 똑같이 1933년의 분위기도 큰 의미를 지녔다. 이런 분위기 전환이야말로 앞으로 나타나는 총통 국가의 진짜 권력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감정, 민주주의에서 구원되고 해방되었다는 감정이었다. 국민의 다수가 원치 않는다면 민주주의란 게 대체 무엇인가? 당시 대부분의 민주주의 정치가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우리가 정치적 삶에서 물러난다. 우리가 없어져야 한다. 1933년 6월과 7월에 민주주의 정당들은, 1918년 11월에 도이치 영주들이 보인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226-7)


"이 시기에 일어난 그 온갖 불법에도 불구하고, 강제수용소 설치나 마구잡이 체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분명한 반유대주의 정책의 처음 징후들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주민 계층 사이에서 하나의 확신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위대한 순간이다.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순간, 신이 보내신 한 사람, 민중 한가운데서 일어선 지도자를 찾아낸 순간이다. 그가 기율과 질서를 찾을 거고, 민족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아, 도이치 제국이 새롭고 위대한 시간을 맞이하게 해줄 거다〉라는 확신. 히틀러가 정치 장면 전체를 실질적인 저항도 없이 깨끗이 청소해버리고, 자신의 대열 밖에 잇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에 맞서 저항하거나, 계획을 무산시킬 사람이 없는 상황을 만들도록 해준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꼭 민족주의-사회주의당을 따랐다기보다는, 지도자[=총통]의 뒤를 따랐다. 당시 벌써 그는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일어난 것이 바로 '획일화'[=관제화] 과정이었다."(228-9)


"권력 장악의 두 번째 단계. 히틀러의 체제는 당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히틀러 체제는 여러 민족주의-사회주의 조직체들을 결합한 것이었는데, 이 조직체들 중 월등하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당의 군사 조직인 돌격대SA였다." "그러나 국방군과 돌격대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자 히틀러는 국방군의 편을 들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랬던 것 같다. 그중 작은 이유는, 히틀러가 처음부터 대규모 군비 확장과 뒷날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사후에 총리와 대통령의 직함을 하나로 묶는 권력 장악을 완성하기로 굳게 결심한 터였다. 그러려면 국방군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까 히틀러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협정을 군대와 맺어야 했다. 그런 협정은 결국 국방군이 새 대통령인 히틀러에게─이전에 힌덴부르크에게 그랬듯이─직접 종속된다는 의미였다."(230-2)


"돌격대 지도부를 무시무시하게 학살한 일도 대부분의 대중만이 아니라 옛날 상류층의 승인을 받았다." "그들이 예측할 수 없는 잔인한 기습, 예를 들면 사업장 기습 같은 짓을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 지도자가 여기서도 질서를 다시 세웠다는 것, 마침내 정상적인 상태가 돌아왔다는 것을 사람들은 환영했다." "이 두 번의 정치적 쿠데타 행위, 1933년 3~7월의 쿠데타와, 1934년 6~8월의 쿠데타에 뒤이어 평온한 시기가 찾아왔다. 1934년 가을부터 1938년까지는 '그 좋던' 나치 시대였다. 이 기간에 이전의 테러는 제한되었다. 수용소는 계속 있었지만, 들어간 사람보다 나온 사람이 더 많았다. 삶은 정상으로 돌아온 듯이 보였다. 동시에 히틀러의 경제 기적도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1933~1937년 사이에 대량 실직 상태를 완전고용 상태로 바꾸어준 경제의 활성화인데, 이로써 히틀러는 옛날 사민당 추종자 거의 전부와 옛날 공산당에 표를 찍은 사람의 상당수를 자기 편으로 돌려놓거나, 적어도 중립으로 만들었다."(234-5)


"이 시기에 도이치 제국은 대체 어떤 국가였는가? 자주 이야기되지만, 정당 국가는 아니었다. 오늘날의 도이치 민주공화국[=동독]이나 소련 같은 국가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구조화가 이루어진 정당 하나의 지배를 받는 국가는 아니었다. 나치 정당은 중앙위원회도 정치국도 없었고, 히틀러는 정당 협의회를 소집하여 문제를 논의한 적도 없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뉘른베르크에서 매우 화려하게 전당대회가 열리곤 했지만, 그런 화려한 과시 말고는 보통 전당대회라 부르는 요소가 없었다. 당대표가 당 출신 의원들과 함께 모여, 당의 정강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회의가 없었던 것이다. 뉘른베르크에서 그런 회의가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조직들, 국가 속의 모든 국가들─이라 부르고 싶다면─이들이 매우 인상적인 시위를 했고, 그런 기회에 오직 히틀러만, 그리고 언제나 다시 히틀러만 연설을 했다. 그 자신은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당이 국가를 통치한 것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주로 당을 통해 통치했다."(236-7)


"또한 오늘날 자명하게 여겨지는 것과도 반대되는 것으로, 원래 의미에서의 전체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였다. 히틀러의 국가에는 이전의 도이치 제국보다 훨씬 더 많은 국가 속 국가들이 있었다. 에른스트 프렝켈은 자신의 저서 『이중 국가』에서, 제3제국에는 자의恣意 및 테러 지배의 국가와 나란히, 오래되고 습관이 된 관료국가, 심지어는 법치국가가 있었다고 썼다." "수많은 특수 역할들로 나뉜, 전체주의 아닌 이런 국가가, 어떻게 총통 국가로 남아 있었던가? 그 모든 '권위주의적인 무정부 상태'(당시 사람들의 말대로)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위가 계속 존재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그 최고 권위는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시간과 장소에서, 언제라도 자기 의지를 관철시킬 수가 있었다. 이것은 짧게 두 마디 말로 답할 수 있다. 곧 선전과 테러를 통해서였다. 이 두 가지 도구가 히틀러의 나치 제국 마지막까지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다."(237-9)


"잘 알려져 있듯이, 히틀러는 1938년 이후로 유대인 박해를 계속 강화했다. 1938년에 히틀러는 제국 전역에 걸쳐, 위에서부터 기획된 프로그램 한 가지를 시도해보았다." "테스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별로 해롭지 않게 들리는 '수정의 밤'이란 말은, 도이치 사람들이 그에 대해 반응한 방식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이다[=매우 차가운 반응]." "도이치 민족의 대중, 히틀러에 충실한 대중이 실질적인 유대인 박해에는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히틀러가 '최종 해결'을 결정했을 때,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냈던 것인데, 그 사실은 자주 간과되곤 한다. 최종 해결은 도이칠란트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유대인 근절 수용소는 폴란드 동부에 있었다. 다른 나라들과 도이칠란트에서 이루어진 일은, 고작 유대인의 수송뿐이었다." "괴벨스가 이끌던 도이치 신문에는 이렇게 보도된 적이 없었다. 〈유대인은 근절되어야 한다.〉 그러니 하물며 〈유대인은 지금 근절되고 있다〉는 보도는 더욱 없었다."(260-2)


"도이치 여론에 대량 학살을 의도적으로 감춘 일은, 도이치 사람들이 그에 맞서 아무 일도 안 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변명을 해준다." "도이치 사람들이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대해 알았느냐 몰랐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적으로만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다. 물론 매우 많은 소문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믿었는지는 모르겠다. 외국에서도 오랫동안 그것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도이치 제국의 역사에서 유대인 박해와 유대인 근절의 시도를 침묵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고, 이 나라 역사에는 영원한 오욕이다. 하지만 총통 국가의 많은 요소들과는 달리, 이것을 도이치 제국의 역사에서 그리고 실제 체제의 역사에서 처음부터 존재한 요소들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히틀러가 없었어도 1933년 이후에 아마도 일종의 총통 국가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가 없었어도 아마 두 번째 세계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다만 수백만 유대인 학살만은 없었을 것이다."(262-3)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는 1차 대전에서 상당히 분명한 두 가지 교훈을 이끌어낸 바가 있었다. 첫째 교훈은, 동부에서 러시아에 맞선 세계대전은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러시아는 1차 대전에서 전쟁 이전에 생각되던 것보다 더욱 취약했음이 드러났다." "동시에 서부전선에서는 주로 영국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 그러므로 영국에 맞선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영국은 동맹을 원하지 않았고, 도이칠란트가 러시아를 정복하여 굴복시키는 것을 받아들일 각오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도이칠란트가 전통적인 대륙 중앙의 위치로 만족한다면, 그러니까 프랑스를 보호하고 러시아도 그대로 놓아둔다면, 엄청난 양보를 해줄 각오는 되어 있었다." "히틀러의 구상은 영국이 적어도 선의의 중립을 통해, 동부에서 대규모 도이치 정복 전쟁을 방관하는 일이었고, 영국의 구상은 도이칠란트가 더욱 커지고 더욱 만족해서('유화宥和되어') 평화로운 유럽에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267-70)


# 영국의 속내 : 유럽의 평화가 깨지면 동아시아, 지중해, 근동에서 '대영제국'의 취약점들이 공격받게 된다는 우려


"뮌헨 협정에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지대를 도이칠란트에 그냥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모든 중요한 외교적인 결정에서 도이칠란트는 영국과 협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영국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아마도 뮌헨 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히틀러로서는 바로 이것이 패배라고 느낀 지점이었다. 그는 동부에서 자유로운 손을 원했었다. 그래서 바로 그 어떤 협의나 경고도 없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몸통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는 그것을 다시 더 나누었다." "1939년 3월, 체임벌린 내각은 마침내 유화정책의 방법을 바꾸었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약속과 양보만으로 유혹했다면 이제는 위협도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히틀러가 동유럽에서 독단적인 확장 정책을 계속한다면, 이제 영국이 그것을 방해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위협의 상징이 1939년 3월 말에 나온, 영국의 폴란드 보장 약속이었다. 폴란드가 러시아에 맞서 동맹을 맺자는 히틀러의 제안을 거절한 다음 나온 약속이었다."(273-4)


"그렇다면 소련은 어째서 히틀러의 정책에 함께 했는가? 스탈린은 히틀러의 최종 목적이 소련을 향한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고, 히틀러도 스탈린이 그것을 모르게 하려고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1936년 이후로 여러 나라들, 곧 일본, 이탈리아, 몇 개의 작은 국가들과 '반反코민테른'[반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실은 이미 반反소련 동맹이었다. 조약 안에는, 도이칠란트가 소련에 맞선 전쟁을 벌일 경우, 소련과 이미 조약을 맺은 국가들은 선의의 중립을 지킬 것이라는 비밀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에 스탈린은 전쟁을 피하고 공을 서방으로 떠넘겨서, 도이칠란트가 영국 및 프랑스와의 전쟁에 휩쓸려 들어감으로써, 가능한 한 오랫동안 히틀러를 소련에 대한 전쟁에서 멀리 떼어놓을 기회를 보았다. 이런 전조 아래서 스탈린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히틀러와 함께 소련과 도이칠란트 사이에 자리 잡은 동유럽을 분할했다."(275)


"히틀러의 내면에는 공명심 강한 영웅 노래 요소가 있었다. 믿을만한 전승에 따르면 '최고원수' 괴링이 1939년 8월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생결단만은 하지 말지요.〉 그러자 히틀러가 대답했다. 〈나는 평생 판돈을 몽땅 거는 게임을 해왔소.〉" "그는 언제나 전체와 초超거대를 지향한 사람이었다. 그는 도이칠란트를 세계 강대국, 그야말로 유일한 강대국으로 만들 수 없다면, 하다못해 도이치 역사상 최고의 파국이라도 마련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이런 파국을 마지막에 의식적으로 원했다는 징후들이 있다. 처음으로 실패의 가능성이 드러난 1941년 말에 벌써, 그는 외국 외교관들을 개인적으로 접견한 가운데 이런 발언을 했다. 〈도이치 민족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릴 만큼 충분히 강하고 또 희생의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민족은 스러져서 더욱 강한 다른 세력에게 파괴되어야 합니다. 나는 도이치 민족을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이오.〉"(286)


"전쟁 마지막에 실제로 히틀러는 동료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군사적 패배를 도이치 민족 전체의 몰락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1945년 3월 18일과 19일에 나온 저 유명한 '네로 명령'이 그것인데, 여기서 히틀러는 제국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자원을 주민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까지, 적의 손에 떨어지기 전에 모조리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군비 장관이던 슈페어가 이 명령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가로막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사고에서 이 명령은 극히 특징적인 것이다. 그는 분명 자기가 가장 위대한 승리의 제공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도이칠란트에 파괴의 제공자라도 되겠노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히틀러는 언제나 파괴라는 카테고리로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유대인을 파괴하려 했고, 소련을 파괴하려 했다. 이제는 이른바 역사적 대히트를 남기려고 도이칠란트의 파괴를 바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입증되지 않는 일이지만, 입증된 히틀러의 여러 발언들 덕분에 설득력을 얻는다."(287)


도이치 제국의 사후事後 역사


"1949년에는 도이치 제국 사후 역사에서 가장 깊은 분기점이 나타났다. 서쪽에는 3개 서방국가 점령 지역의 통합으로 생겨난 도이칠란트 연방공화국BRD이, 동쪽에는 예전 소련의 점령 지역에서 나온 도이치 민주공화국DDR이 나타난 것이다." "서방국가 총리들은, 새로운 헌법, 즉 오늘날 연방공화국의 기본법을 제정할 의회 위원회의 소집을 망설였다. 서부 도이치 국가를 세우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이런 조치가 동부 도이치 국가의 성립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동쪽에서 실제로 아무런 마찰도 없이 이루어진 일). 이런 장애의 표현이 바로 많은 논란이 있는 기본법의 전문前文이다. 이 전문에서 기본법의 제정자들은 이른바 양심의 가책을 증언했다. 그들은 새로운 서부 도이치 국가를 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전체 도이치 국가, 도이치 제국이 1945년의 줄어든 국경선 안에서나마 다시 세워져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이런 소망을 에두른 문구로 표현하였다."(294)


"그러나 연방공화국은 새로운 국가이다. 이 나라는 지리적인 관점에서만 과거 도이치 제국의 부활이 아닌 것만이 아니라, 과거 도이치 제국에서 단편으로 남은 잔재도 아니다. 도이치 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니더작센이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같은) 몇몇 주州들도 함께 국가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들 몇몇 주에서는 그 또한 도이치 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당들, 곧 기독교 민주주의 동맹 내지 기독교 사회주의 동맹CDU/CSU이 가장 강력한 정당이다. 또한 연방공화국은 과거 도이치 제국의 헌법이나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윤곽을 지닌 헌법을 내놓았다.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국가인 것이다. 그리고 소련 점령 지역에서 생겨난 국가도 똑같이 새로운 국가이다. 이에 대해 상세한 근거 제시를 할 필요도 없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도이치 제국의 국가 형태와 비슷한 점이 없고, 도이치 제국을 그 어떤 형태로라도 계속한다는 주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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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미래 - 왜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월터 카우프만 지음, 이은정 옮김 / 동녘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들어가는 글


#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1. 인류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존하고 양육한다.

2. 인간 실존의 이유와 궁극 목적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본다.

3. 비전을 가르친다.

4. 비판 정신을 기른다.


1장 네 가지 유형의 마음가짐


"인문학과 관련한 마음가짐에는 먼저 통찰가visionaries와 사변가scholastics 유형이 있다. 이 구분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을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우선 통찰가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일반적인 상식과 단절되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자신들의 비전을 알리기 위해 계속 시도한다. 대개 이들은 현실의 언어가 불충분하다고 여기며 그로 인해 때때로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를 겪기도 한다. 통찰가의 이미지를 종교계에서는 예언자나 교부 성직자로, 철학이나 문학, 역사, 예술계에서는 천재로, 과학계에서는 미친 과학자로 부여해왔다. 반면 사변가는 자신의 엄격함과 전문성에 자부심이 있으며, 자기 분야의 공론이나 공통의 노하우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이 학교 저 학교를 떠돌아다닌다. 보통 이들은 자기 시대의 통찰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자기가 속한 분야의 통찰가들을 과거 통찰가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적대시한다."(43-4)


"통찰가들은 장인정신을 가진 어떤 인물로도 대체할 수 없다. 통찰가와 자신만의 위대한 비전이 없는 사변가를 대립적인 것으로만 맞세운다면, 이런 이분법은 한쪽에만 모든 좋은 특질을 부과하는 마니교Manichaean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나는 통찰가의 범주를 광인crackpots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하려고 한다. 통찰가와 사변가는 모두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통찰가는 기발한 논의를 뒷받침하는 아이디어들ideas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 그들은 강박적이거나 편집증적일 수도 있으며 아주 빈번하게는 두 경우 모두일 수도 있다. 가령 뉴턴의 예처럼 가장 위대한 통찰가조차도 때때로 어떤 시기에서는 이런 광인의 유형에 속했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광인들이 뉴턴과 같은 천재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런 비전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의 세부 사항들을 면밀하게 검토할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사변가들의 공동의 노력이 요구된다."(52-3)


"소크라테스는 사변가가 아니었다. 그는 외톨이였으며 자기 시대의 만연한 상식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가진 비전을 구체화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통찰가가 되려하기보다는, 사변가-반대주의자antischolastic가 되고자 했다. 그는 시대가 품고 있는 신념과 윤리를 면밀하게 검토했으며, 일반적 합의에 무비판적으로 기대고 있는 지식인들의 주장을 비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며, 혼란스러운지, 또한 유명한 교사와 정치가, 대중 연설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려고 애썼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 유형을 구현한 인물이다. 세 번째 유형의 인물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줄기찬 비판 능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평가critics는 예술이나 음악, 문학이나 영화 분야의 평론가들이 아니다. 사실 이들 중 몇 명은 사변가이며 대다수는 (통찰가와 사변가들이 경멸했던) 저널리스트이다."(63-4)


"저널리즘과 사변주의는 대립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변가는 엄격함과 견실함에 가치를 두고, 저널리스트는 신속함과 관심을 끄는 것에 가치를 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자의 구분이 아니라 저널리스트들의) 에토스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급하게 서두르는 이런 일이 30년 후에도 존속될 수 있는 것인지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의 에토스가 '모든 시대를 위한 소유물'을 창조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었던 투키디데스나 '사후에 태어나기'를 희망했던 니체 같은 철학자의 에토스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많은 사변가들이 학문적인 저널을 위해 엄격함을 과시하면서 시의적절한 주제들로 글을 써내려가지만, 이들은 정작 자신의 출판물이 30년을 버티리라는 아니면 적어도 10년이라도 버티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의 엄격함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면, 그것들은 겉으로만 그럴 듯해 보일 뿐이어서 처음에는 견고해 보이지만 조잡한 작품인 경우가 많다."(73-4)


"비평가에 대해 논할 때 우리는 이를 소크라테스 유형과 저널리스트 유형으로 구분해야 한다. 두 가지는 아주 분명하게 반대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사명 중 하나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무지와 그들이 주장하는 지식의 허위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정의를 빌려보면, 저널리스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 더 관심을 끌기 위해 인용부호를 추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경건하고 믿을 만한 신념이라도 혼란스럽거나 잘못된 주장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 유형은 검증받지 않고 널리 공유되고 있는 확신에 중요한 지위를 부여하는 한 시대의 신념과 도덕을 엄밀하게 따져보려고 시도한다. 이 유형이 주요하게 문제로 삼는 것은 일반 여론과 특권적인 패러다임에 의존하는 지식이다."(75-6)


"당연한 것이지만 소크라테스적 유형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나의 관심은 다양성의 측면이 아닌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깊은 숙고에서 비롯되었다. 중요한 점은 예전에 우리가 지녔던 것보다 적은 한 가지 유형만을 갖게 된 것이 유감이라는 뜻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유형이 필수불가결하게 속해 있는 하나의 혼합물을 인문학이 요구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적 에토스를, 만일 그것이 없다면 음식의 맛이 밋밋해지고 무미해지는 소금이나 후추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소금이나 후추로만 만들어진 음식은 훨씬 더 최악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유는 많은 점에서 잘못이 있다. 독일의 예가 보여준 것처럼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맛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두 사람의 소크라테스적 교사가 참여한 대규모의 교수진은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비판적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비전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많은 소크라테스적 교사가 필요하다."(85)


2장 독서의 기술


"(고전을 읽는) 첫 번째 독서법에서 저자에 대한 독서가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모르지만 그는 알고 있다.'" "경전의 수호자들은 텍스트에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유용한 지식이 있다는 인상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강하게 남겼다. 경전의 출처는 신비에 싸여있거나 성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전의 의미는 어떤 부분에서는 평이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극단적으로 모호한 것처럼 여겨졌다. 따라서 많은 난해한 구절들에는 그에 대한 주해註解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제자들은 해석을 할 줄 모르지만 자신은 할 수 있다는 소위 권위자들의 주장을 사실로 믿게 했다. 주해는 전형적으로 처음에는 텍스트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 다음에는 그 안에 자신의 생각을 부여하고, 그 다음에는 그 생각에 다시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이와 같은 독서 방식을 '성서 해석적exegetical' 이라고 부른다."(116)


"이런 독서는 거의 대부분 자기-기만을 포함하고 있다. 성서 해석적 독서가는 자신이 텍스트에 권위를 부여한 후에, 그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읽어내고 다시 이 생각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한다." "성서 해석적 독서가는 텍스트의 저자가 이런 방식의 읽기와 사고방식, 그리고 존재양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런 도전은 심지어 미연에 제지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령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성서 해석적인 독서를 의도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들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에게 어떤 권위도 부여하지 않았으며 고대의 시에 자신의 생각을 보여하지도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들 중 몇몇은 위대한 시인에 대해 가차 없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텍스트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획기적인 태도 덕분에 그들은 서양 철학의 정초자가 될 수 있었다."(123-4)


"첫 번째 독서 방법을 '우리는 모르지만 그는 알고 있다'는 정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두 번째 독서 방법은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는 모른다'로 정리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두 번째 방법은 독단적이다." "독단적인 독서 방식의 세 가지 변형들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불평을 늘어놓을 때 쓰는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X에 대해 알았다면(가령, 키르케고르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읽었더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둘째 형태는 약간 다른 방식의 불만으로, 다음과 같다. '그에게 우리처럼 뛰어난 기술이 있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셋째 형태는 다소 품위 있는 불평으로, 다음과 같다. '그는 완전히 형편없는 것은 아니고, 몇 가지 점은 우리 같은 부류에 근접해 있어.'" "독단적인 독서가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기피하며, 대안과 단점에 대해 눈을 감고, 그 텍스트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들여다보기를 거부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근시안적인 태도로 거만을 떨고 있을 뿐이다."(128-31)


"세 번째 독서 방식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알 수 없으니 진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자.' 이와 같은 독서법은 불가지론적agnostic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독서 방식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독서가의 관심은 다른 것에 있다." "첫째는 '골동품수집가antiquarian' 형태로, 이들은 우표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갖는 마음으로 텍스트를 읽으며, 오래되고 희귀한 것을 선호한다. 둘째는 '미학적인aesthetic' 형태로, 이들은 키르케고르나 플라톤의 텍스트를 미학적인 방식으로 읽을 수 있으며, 어떤 시인이나 소설가, 종교 경전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려고 든다. 셋째는 '현미경적microscopic' 형태로, 이들은 한 작가의 작품 전체oeuvre는 말할 것도 없고 책 한 권조차도 몇 번씩 읽어낼 수 있을 만한 호흡을 갖고 있지 않다." "여기서 저자는 지워져버리며, 도전적으로 '너'와 만나는 것은 회피되고, 분해될 수 있는 작은 파편들만 다루게 된다."(131-2)


"네 번째 독서 방식인 변증법적 독서는 그 안에 세 가지 핵심 요소가 있다. 첫 번째 요소를 나는 '소크라테스적'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찰되지 않은 삶the unexamined life'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독서가들은 문화 충격을 회피하기보다는 그것을 기대한다. 이들은 자신의 삶과 믿음, 그리고 가치를 점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텍스트에서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이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 시대의 통설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변증법적 독서가는 자신이 길들여져 온 다양한 통설의 외부에 있는 관점을 추구한다. 텍스트는 그가 자유롭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텍스트는 자기-해방autoemancipation의 보조물이다." "그는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누군가의 권위를 기대하기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대안적인 관점을 추구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들 사이에 놓여 있는 거시적인 대립 지점을 찾아내려는 노력이다."(137-8)


"변증법적 독서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를 나는 대화적dialogical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텍스트는 우리가 그것에 질문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너You'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텍스트가 인도하는 곳으로 우리 자신을 이끌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의 독특한 목소리를 경청해야 하고, 또한 그것이 다른 목소리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이 목소리가 우리에게 도전하고 충격을 가하며 불쾌감을 주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이런 독서가들은 텍스트에 권위를 부여하려고 하지도 않고, 옳다는 주장을 펼치려 하지도 않으며, 미리 동의하려고 마음먹지도 않는다. 이들은 텍스트의 목소리를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이 우리의 관점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으며, 모든 점에서 동의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예상한다. 변증법적인 독서가는 자신에게 묻는 것을 허용하며, 또한 자신도 텍스트에 물음을 던진다." "이것이 독서가와 텍스트 간의 대화를 시작하게 해준다."(139-41)


"변증법적 독서의 세 번째 요소는 '역사-철학적'인 것이다. 독단론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진리인 것처럼 제시하는 것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증법적 독서가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이전의 독자와 논평, 그리고 해석과도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 이런 자료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가 함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도와준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실수는 대개 자신의 실수보다 훨씬 더 잘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자료들은 그것의 도움 없이는 간과했을 수도 있을 문제점과 실수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변적인 독서가는 자신의 학파에 속한 소수의 정예부대가 제시하는 해석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가 잦다. 이런 독서가는 본질적으로 자신과 같은 견해를 공유하는 동료들이 제시하는 해석만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변증법적 독서가는 다양한 시대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텍스트를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해 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인다."(164-5)


# 변증법적 독서의 '역사-철학적' 요소를 구성하는 세 가지 동심원

1. 텍스트 : '텍스트 내적인 증거들에 의존(번역 과정에서 탈락되는 의미 문제를 포함한다)'해서 저자의 주된 문제의식을 살펴본다.

2. 작품세계 : 작가의 작품 전체와 작품 세계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서 작가의 기질이나 사고방식에 대한 일정한 상像을 그려본다.

3. 시대배경 : 시대배경을 제쳐두면 텍스트의 의미meaning를 파악하기 어렵고, 텍스트의 의의significance는 전혀 판단할 수 없다.


3장 서평의 정치학, 번역과 편집의 윤리학


4장 고등교육과 종교의 위상


5장 비전은 가르칠 수 있는가


6장 학제 간 연구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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