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중음악 (반양장) - 민스트럴시부터 힙합까지, 200년의 연대기
래리 스타, 크리스토퍼 워터먼 지음, 김영대.조일동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8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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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중음악의 주제와 흐름


# 대중음악의 주제

1. 음악 듣기 : 비평적(음악의 형식, 사운드, 의미, 문화적 배경, 음색, 가사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으로 음악 듣기

2. 음악과 정체성 :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나이 들어가면서 그때그때 음악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 양상

3. 음악과 테크놀로지 : 레코드, 라디오, 디지털, 샘플링 등이 대중음악을 한층 더 '대중화'하는 데 끼친 영향

4. 음악 산업 : 음악을 생산(작곡가, 작사가, 편곡자, 프로듀서 등)하고 유통(메이저와 인디)하는 산업망 조감

5. 중심부와 주변부 : 중심부(개신교 백인 중산층)의 취향과 주변부(그밖의 소수자들)의 취향 간의 상호 작용


"1937년 인류학자 랠프 린턴은 '100퍼센트의 미국인'이라는 논문에서 〈보통의 미국인들이 지닌 '미국주의(Americanism)' 혹은 소중한 그들만의 전통을 보호하려는 욕구가 분명히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그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순간에 수많은 외국의 요소들이 그들의 문명에 이미 스며들어 있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외국의 요소들이란 아시아, 중동, 유럽, 아프리카, 미국 원주민들의 문화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런 것이다. 린턴이 말한 '보통의 미국인들'은 직장에 출근하며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에 독일식 기술로 인쇄되어 고대 셈족의 언어로 쓴 신문 기사를 읽을 것이다. 미국의 제도가 외국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초래될 심각한 결과를 비판하는 최신 칼럼을 읽으면서 그들은 유대인의 신에게, 인도·유럽어를 사용해, 그들이 100퍼센트 미국인임을 감사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미국산'이라고 알고 있는 대중음악도 이와 비슷하게 수입된 전통을 받아들여 만들어낸 것이다."(31-2)


# 대중음악의 흐름

1. 유럽계 미국 음악 : 영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포크 발라드, 악보음악, 다양한 형태의 댄스음악이 주류를 형성

2.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 : 20세기 전반에 걸쳐 래그타임, 블루스, 재즈, 스윙부터 로큰롤, 소울 음악까지 광범한 영향

3. 라틴아메리카계 미국 음악 : 쿠바의 하바네라와 룸바, 아르헨티나의 탱고, 브라질의 삼바와 보사노바 등의 영향


2 After the Ball: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대중음악


"유럽인들의 눈에 독특한 '미국' 음악이라고 인지된 최초의 장르는 바로 민스트럴 쇼(민스트럴시, 블랙페이스)라고 불리는 극장식 연예 예술이었다. 민스트럴은 주로 백인 연주자들이 인위적으로 자신의 피부에 검은색을 칠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악, 춤, 옷, 방언 등을 패러디함으로써 이뤄지는 공연 예술의 한 가지다." "블랙페이스 민스트럴시의 발전에 관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획기적인 미국 대중문화의 한 형식은 여러 인종 간의 교류가 빈번했던 뉴역의 제7번 구 같은 노동계급 주거 지역의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등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초기의 블랙페이스 공연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노동계급의 백인 청소년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 형태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한, 미국이 최초로 만들어낸 독창적인 대중문화의 표출로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백인의 인종차별적 관념이 투영되지 않았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46)


"토머스 다트머스 라이스는 뉴욕 제7번 구의 빈민 가정에서 태어난 백인 배우였다. 그는 〈Jim Crow〉(1829)라는 노래를 통해 민스트럴시의 대중적인 잠재력을 증명했다." "짐 크로 캐릭터는 흑인의 것도 백인의 것도 아닌 어정쩡한 변종의 방언을 구사하는데, 이는 상류층 청중이 스스로 위협적이라 느낄 만한 풍자적인 이야기를 은밀히 전달하거나 혹은 가식적인 정치인과 사회의 엘리트를 쓰는 화려한 단어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1830년대에 라이스는 미국 밖에서 스타일과 내용 면 모두 보편적으로 '미국적'이라고 여겨지는 예술을 퍼뜨린 최초의 미국인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라이스의 곡 〈Jim Crow〉의 제목이 187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이어지는 인종차별의 근간, 즉 극장, 묘지, 병원, 음식점, 학교에서 흑인을 배제하는 이른바 '인종분리 법안'의 배경으로 활용되어, 흑인을 가리키는 경멸적인 용어로 탈바꿈한 것은 그야말로 끔찍한 모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47-50)


"남북전쟁기부터 시작해 1910년 즈음에 이르기까지 브라스 밴드 콘서트는 미국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적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금관 악기(트럼펫, 코넷, 트롬본, 튜바 등)로 이루어진 군악대는 미국의 탄생 이후 늘 함께 해왔고, 특히 독립전쟁 이후 그 유행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1878년 한 언론은 〈브라스 밴드가 없는 마을은 성가대가 없는 교회처럼 동정의 대상이다. 마을의 정신은 밴드에 의해 확인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19세기 말에 있었던 브라스 밴드 열풍은 애국주의와 대중음악의 역동성 안에서 그 동력을 키워왔고, 점점 강해지고 있던 미국 국가주의를 그 새로운 에너지로 활용했다. 핵심적인 레퍼토리로는 주로 애국적인 음악, 즉 독립전쟁 와중에 국가의 통합을 상징했던 행진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곡은 청중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국외에서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과시할 때(파나마 운하 공사나 1898년의 미서전쟁 등) 필요한 공적 후원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기도 했다."(60-1)


"1890년대를 기점으로 현대적인 의미의 미국 대중음악 산업이 비로소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틴 팬 앨리─주로 동유럽에서 건너온 유대계 사람들이 모여 작곡가를 고용해 음악을 만들던 맨해튼 남쪽 구역의 28번가 지역─의 사업가들은 도심을 중심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음악 시장을 겨냥한 히트곡을 양산하기 시작했고, 곡당 1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베스트셀러'가 등장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새로운 세기가 도래할 무렵, 새로운 무대 공연 양식인 보드빌(vaudeville)이 민스트럴시의 뒤를 이어 가장 널리 사랑받는 무대극 예술 장르로 등장해, 틴 팬 앨리 음악을 소개할 중요한 창구로 떠올랐다. 보드빌은 민스트럴 쇼와는 달리 모든 출연자가 공연 내내 무대를 떠나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다양한 종류의 공연자, 즉 가수, 곡예사, 코미디언, 던지기 곡예사, 댄서, 동물 등이 특별히 일관된 주제의식 없이 무대 위에 잇따라 등장해 공연을 펼치는 형태였다."(63)


"래그타임(ragtime)은 1880년대에 등장해 세기말까지 무려 10년 이상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어떤 면에서 래그타임 광란은 민스트럴시에서 이어진 면도 없지 않은데, 이를테면 백인 음악인이 그들이 공연을 좀 더 다채롭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 스타일을 단순화해 차용했다는 측면에서 유사했다. 다른 한편으로 래그타임은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의 기법과 가치 등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음악 산업에 좀 더 많은 수의(물론 그조차 턱없이 적은 수이기는 해도) 흑인 작곡가가 참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업적 인기의 정점을 달리던 1890년대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사이의 기간에 래그타임은 거의 모든 종류의 밴드가 즐겨 연주하는 장르가 되었다. 브라스 밴드, 컨트리 현악단, 교향악단, 밴조, 만돌린 앙상블, 그리고 이른바 고전적인 래그타임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로 피아노 연주까지 그 레퍼토리는 실로 다양했다."(67-9)


3 천연두처럼 전염되는 음악: 댄스음악과 재즈(1917~1935)


"1920년대는 미국 대중문화의 발달에서 결정적인 시기다. 먼저 독립과 자유로운 이동의 대표적 상징물이던 자가용을 수백만 명이 넘는 가구에서 소유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부유층의 독점적 권리로 통하던 전화 역시 중산층 가정에까지 진출했다. 포노그래프와 라디오, 할리우드 영화, 타블로이드 신문은 미국 전역의 대중문화를 하나로 만들기 시작했다. 신세대 인기 연예인들은 대도시는 물론 소도시, 시골 마을 주거지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 걸쳐 자신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친근하게 알리기 시작했다. 미국 연예 산업의 기본적 틀이 이 시기를 통해 비로소 모양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할리우드 유성영화는 이제 '스타' 산업과 노래를 홍보하는 중요한 매체로 발돋움했고, 로스앤젤레스는 미국 연예 산업의 중심지를 놓고 뉴욕과 경쟁하는 유력한 도시로 떠올랐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시골의 읍 단위, 심지어 조그마한 촌 동네에 이르기까지, 대중매체는 미국인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78-9)


# 포노그래프(phonograph) : 금속 박(foil)이나 밀랍으로 코팅된 실린더에 물리적으로 홈을 냄으로써 원음을 저장해 재생할 수 있도록 고안된 기계


"1925년 마이크(microphone)라는 새로운 장치를 이용한 전기 녹음(electric recording)이 커다란 깔때기 모양의 메가폰(megaphone)에 소리를 불어넣는 낡은 어쿠스틱 녹음 시스템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전기 녹음은 어쿠스틱 녹음보다 훨씬 '원음에 충실한(high fidelity)' 기술로 평가받았고, 전기 녹음 방식의 보급으로 인해 특정한 음향 효과를 구현하는 엔지니어의 역할이 더욱 막중해졌다. 전기 마이크의 발전으로 엔지니어는 인간의 목소리를 포함해 어떤 특정한 소리를 고립시키거나 증폭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새로운 가창 방식이 등장하는데, 이는 미국 대중음악의 다음 단계의 발전에 매우 특별한 영향을 끼친다. 크루닝(crooning)이라고 불리는 부드럽고 친근한 창법이 새로운 세대의 연주자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빙 크로스비를 비롯한 크루너(crooner)들은 최초의 근대적 슈퍼스타가 되었고, 그들의 이미지는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섬세히 다듬어지고 널리 홍보되었다."(80-1)


"포노그래프 음반 회사의 주요 경쟁자는 새로 등장한 라디오 방송망이었다." "대중음악은 1920년대 초반 상업 라디오 방송의 태동기부터 라디오의 주요 상품이었다. 방송국들은 댄스음악 밴드와 가수의 공연 실황을 방송했고, 네트워크 라디오를 통해 시카고나 샌프란시스코의 청취자가 뉴욕에서 열리는 유명 가수의 공연 실황을 들을 수 있었다." "라디오는 미국인들의 음악 경험과 사교 활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공황 시기에 포노그래프와 음반을 구매할 여력이 없던 이들은 그 대신에 라디오 수신기를 구입했고, 그 덕분에 다양한 종류의 음악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다. 라디오는 가장 작은 시골 마을과 거대 도시를 이어주었고, 노동자들에게는 짜릿한 일상의 즐거움을 제공했다. 라디오는 노래를 알리고, 음악을 이용해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디스크자키는 방송에서 광고주의 상품을 홍보해주면서 라디오의 상업적 잠재력을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81-3)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미국 대중음악의 변화와 동일한 맥락에서 미국 사교댄스도 몇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19세기 민스트럴시의 케이크워크와 함께 간접적인 방식으로 시작되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식 춤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1910년 무렵 래그타임 곡의 오케스트라 버전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흑인 스타일의 느슨함에 기반을 둔 춤이 잇따라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데, 이를테면 폭스트롯을 비롯해 텍사스 토미, 터키 트롯, 버니 허그, 그리즐리 베어, 보스턴 딥, 원스텝 등이 당시에 유행한 춤이다." "미국 사교댄스의 긴장을 풀어헤친 또 하나의 자극제는 바로 19세기 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유래한 탱고였다. 탱고는 유럽의 사교댄스 음악, 쿠바의 하바네라, 이탈리아의 경가극, 아르헨티나 가우초의 발라드가 섞인 음악아로, 1910년 저 유명한 모리스 모베가 뉴욕의 한 카바레에서 이 춤을 공연해 대중에게 처음 그의 존재를 알렸다."(84-7)


"사교댄스 음악에 불어닥친 '아프리카계 미국화'의 다음 단계는 이른바 재즈 광란(Jazz craze)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시작되어 192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재즈는─때로 '재스(jass)'나 '핫 뮤직(hot music)'으로도 불렸다─1900년 무렵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에서 탄생했다. 미국과 카리브 해 지역 사이의 관문이라는 뉴올리언스의 위치는, 이 도시의 복합적 계층의 주민─백인, 크레올, 흑인 공동체의 문화적 차이를 포함한다─과 프랑스 식민지 문화의 강력한 잔재가 합쳐지면서 그 어떤 미국의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혼종적 음악 문화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재즈가 뉴올리언스에서 발생한 음악이기는 하지만, 이 새로운 음악이 정작 처음으로 녹음된 곳은 뉴욕과 시카고였다. '재스(jass)'라는 명칭을 내세운 최초의 녹음은 1917년 뉴욕에서 이루어졌는데, 바로 뉴올리언스 출신의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ODJB)라는 백인 그룹이었다."(93-4)


"재즈가 주류 대중음악에 남긴 엄청난 파급력을 두고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뉴올리언스에서 건너온 이 새로운 음악이, 이미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던 싱커페이션을 사용하는 댄스음악 열풍의 와중에, 적절한 순간에 때맞춰 도착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음악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였던 백인 청중이 기본적으로 재즈를 래그타임이 발전된 하나의 형태로 여겼던 것은 분명하며, 유명한 초기 재즈 밴드의 녹음은 기본적으로 래그타임과 구별하기 어려운 음악을 담고 있다." "재즈에 영향을 받은 대중음악의 초창기 녹음에는 흔히 동물 농장에서 들을 법한 잡음 같은 소란스러운 효과음이 활용되었고, 유명 재즈 밴드의 광고에는 으레 연주자들이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거나 익살스러운 몸짓을 하거나 심지어 사육제 등의 풍경이 담겨 있기도 했다." "재즈를 듣는 백인 청중 대부분의 눈에 재즈는 흑인과 가까이하지 않으면서도 자극적이고 대담하며, 익살스럽고 꽤 위험하기까지 한 흑인 문화를 체험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107)


4 I got Rhythm: 틴 팬 앨리 음악의 황금기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음악적 구조와 연주 스타일이 대중음악계를 새로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을 이끌어낸 것은 전문적인 선율의 장인들이었다." "어빙 벌린은 뉴욕의 가난한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자랐다. 그는 노래하는 웨이터로 경력을 시작해 래그타임에 기반을 둔 대중음악 작곡가로 성공을 거둔다. 의사이자 피아니스트의 아들로 대학 교육을 받은 리처드 로저스는 로렌즈 하트나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 같은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당대의 히트곡을 써냈다. 콜 포터는 인디애나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예일 대학, 하버드 대학, 파리의 스콜라 칸토룸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 마지막으로 조지 거슈윈은 이민자인 가죽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간극을 메운 인물이 되었다." "바로 이 틴 팬 앨리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이 이른바 '스탠더드'라고 불리는 음악을 무수히 만들어냈고, 이러한 음악은 오늘날 재즈와 팝 음악인에게 여전히 필수적인 레퍼토리로 남아 있다."(110)


"유대 이민자, 특히 동유럽에서 건너온 이들은 20세기 초반 음악계에서 작곡가, 작사가, 연주자, 그리고 제작자이자 홍보가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의 인생사에는 왜 연예 산업에서 유대계 이민자들의 지분이 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이유가 담겨 있다. 수세기 동안 신분 상승 기회를 차단당해 왔던 하층 이민자들은 보드빌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뉴욕의 길거리에서 다양한 공연 기술을 갈고 닦으며 음악, 춤, 코미디에 그들의 야망을 모두 쏟아부었다. 세기가 전환될 무렵, 대규모 극장 예약 대행사의 상당수를 유대인이 운영했고, 젊은 음악인들은 이런 확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더는 반유대주의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빙 벌린, 제롬 컨, 조지 거슈윈 같은 야심찬 젊은 음악인에게 음악 산업은 어설픈 가르침을 주었으니, 이는 음악 출판업자들에게 돈을 벌어줄 노래를 만들 수만 있다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110-2)


"틴 팬 앨리 음악은 내용이나 주제의식에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골치 아픈 사회적 현안, 즉 인종주의, 대량 실업,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등장한 파시즘 등과는 별다른 연관을 맺지 않았다. 무려 60퍼센트 이상의 실업자가 발생했다는 이른바 '대공황 시기'에도 시대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틴 팬 앨리 음악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틴 팬 앨리 음악이나 연극·영화는 일상생활의 압박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특히 가사와 공연 형태는 문화적 이상으로서의 개인주의와 낭만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낭만적 사랑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가정을 마련해 정착할 수 있다는 의식은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공유되었다." "그러므로 틴 팬 앨리 노래의 가사와 공연 스타일은 점차 확장하고 있던, 다양한 민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백인이 다수를 점하던 중산층의 욕망에 기대려는 노력을 반영했다."(113-6)


5 St. Louis Bluse: 레이스 레코드와 힐빌리 음악


"음악 산업계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1918~1940)에 음악 관련 업체가 새로운 청중을 겨낭하기 시작했던 것은 분명하며, 이 과정에서 그 이전까지는 무시되던 유형의 음악─미국 남부의 민요 전통에서 유래한 특별한 장르─을 녹음해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골 공동체를 떠나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애틀랜타, 내슈빌 같은 도시로 옮겨 간 수백만의 이주민들은 이러한 음악적 다양화의 과정을 더욱 촉진했다." "레이스(race)와 힐빌리(hillbilly)는 1920년대 초반부터 1940년대 후반 사이에 미국 음반 산업이 남부 지역의 음악을 홍보하고 분류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다. '레이스 레코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연주를 녹음한 음악을 말하며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청취자에게 판매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와는 달리 '힐빌리' 혹은 '올드 타임(old-time)' 음악은 연주와 판매 모두 남부의 백인이 대상이었다."(132)


"레이스 레코드를 통해 퍼져나간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장르 중 하나는 블루스로, 19세기 말 무렵 딥 사우스─특히 미시시피 델타에서 텍사스 동부에 이르는 지역─의 흑인 공동체에서 시작된 음악 장르다. 초기에 미국의 주류 팝 음악에 블루스 전통이 끼친 영향은 매우 간접적이었고, 전문적으로 작곡된 '블루스 노래'의 형태는 틴 팬 앨리와 보드빌적인 감수성으로 걸러졌을 뿐 아니라 음악 산업의 상업적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수가 녹음한 최초의 블루스가 미시시피 델타나 텍사스 동부의 소작농이나 노동자가 부른 컨트리 블루스가 아니라, '진짜 니그로 음악'으로 한몫 잡으려는 전문 작곡가가 만든 블루스곡(이전까지 클래식 블루스라 불리던)이라는 사실이 한편으로 납득되기도 한다." "이른바 블루스 열풍(1920~1926)의 정점에 발매된 초기음악들은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잘 팔려 나갔다."(138-9)


"컨트리(포크) 블루스 형식은 최초의 보드빌 블루스곡보다 수십 년 앞서 존재했다. 포크 블루스가 미시시피 델타 지역에서 처음 생겨났다는 것에는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한다." "19세기 델타 지역은 딥 사우스 지역 중 목화 농사가 가장 집중적으로 행해지던 곳으로, 북미로 건너온 대다수의 노예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처럼 블루스는 빈곤한 흑인 노동자의 음악이었고, 그들이 경험한 일면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역동적이면서도 유연한 틀이 되어주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컨트리 블루스는 완전한 구술 전통의 음악이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하나의 노래에서 시작된 여러 버전을 귀로 익히고 기억을 통해 전달해, 세대에서 세대로 내려가며 퍼져나간다. 블루스는 본질적으로 개인적 형태의 음악 만들기 장르이므로, 개별 음악인이 이미 존재하고 있던 노래나 다른 사람이 만든 음악의 일부에서 새로운 노래를 재조합하는 식으로 자기만의 버전을 구성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146-8)


"'힐빌리 음악', 훗날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 혹은 더 간단하게 '컨트리 음악'으로 다시 명명될 이 장르는 영국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민요, 발라드, 춤곡으로부터 발전해왔다. 그러나 초기 컨트리 음악에 시골 문화의 순수성이 오롯이 담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 되면 가장 고립된 시골 마을에서조차 이미 도시의 시설과 제도, 취향, 기술의 영향이 발견된다. 최초의 상업적 남부 음악가들은 민스트럴시, 보드빌, 서커스, 약장수 쇼 등에게서 두루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초창기의 라디오가 힐빌리 음악의 대중화에 커다란 역할을 한 데 반해 레이스 음악(흑인 음악)을 홍보하는 데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대부분의 라디오와 라디오 방송국은 백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즉, 라디오는 레이스 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같은 이유로 레이스 음악은 포노그래프에 좀 더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155-7)


"컨트리 음악은 늘 시골과 도시, 고향과 이주,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음악이었다. 이는 1920년대 컨트리 음악의 주요 청중의 성격을 고려해볼 때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바로 기계화된 농업과 미국 경제의 변화 때문에 급진적인 변환과 마주한 시골 사람, 직업을 찾고 새로운 삶을 만들기 위해 고향을 떠난 이주자가 그들이다. 초기 컨트리 음악이 담긴 음반을 들으면 우리는 급격한 변화의 시절에 전통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관한 입체적인 관점을 얻게 된다. 한편으로는 발라드와 사랑 노래, 좋았던 옛 시절의 모습, 가족, 건강, 단란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는 무너진 사랑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들, 이 마을 저 마을로 쉬지 않고 이주하는 이야기가 있다. 초기 컨트리 음악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두 뮤지션, 즉 카터 패밀리와 지미 로저스는 히트 음반과 라디오 출연을 통해 명성이 높아졌고, 이어지는 세대의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인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159)


6 In the Mood: 스윙 시대(1935~1945)


"'스윙'이라는 단어는 ('재즈', '블루스', '로큰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사용하던 영어에서 유래했다. 훌륭한 연주에서 파생되는 유연한, '로킹(rocking)'한 리듬의 운동량을 표현하는 동사로 먼저 쓰인 이 단어는, 나중에는 자유, 생기, 즐거운 기분으로 특징짓는 감정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기에 이른다." "193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수많은 대형 오케스트라─베니 굿맨, 토미 도시,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글렌 밀러 등─가 전국 인기 음악 차트를 도배했다. 이러한 빅 밴드들은 매일 밤마다 라디오에 출연했고, 그들의 연주는 전국적으로 대도시의 호텔과 볼룸에서 울려 퍼졌다. 이들의 음악은 나이트클럽과 식당에 설치된, 동전을 넣어 작동시키는 음반 재생기인 주크박스의 목록에도 등장했다." "빅 밴드는 근본적으로 대도시적 현상이자 세련과 첨단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작은 시골 동네에서 이따금 벌어지는 빅 밴드의 순회공연은 그 자체로 대단히 흥분되는 사건이었다."(170-1)


"스윙 음악의 기본적인 정서는 분방한 즐거움, '흔들며(swinging)', '신나게 즐기는(having a ball)' 것이었다. [이러한 '놀아보자(let's party)'라는 태도는 의심할 바 없이 1933년 미국의 '금주법' 폐지로 더욱 확대되었다]. 스윙의 청취자는 사회적 경계, 이를테면 민족 집단, 원주민과 이민자, 남부와 북부, 도시 거주자와 시골 사람, 노동계급과 확장된 중산층, 진보적 엘리트 식자층 등을 모두 가로질러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민주적인 정신에 입각하고는 있으나, 연주와 공연에서 스윙은 상당히 엄격한 규율을 자랑했는데, 전문 편곡자가 미리 기보하여 편곡하는가 하면, 연주자들은 음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연주해야 했으며, 덕분에 개별적으로 즉흥연주를 할 여지는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몇몇 학자에 따르면 이렇게 상당히 구조적인 음악 만들기는 뉴딜 시기 동안에 대형화된 산업, 노동조합, 정부 기구의 성장 등 미국인의 삶에서 증가하기 시작한 관료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한다."(172)


"비록 스윙이 오늘날에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악 정도로 여겨지지만, 초창기 시절 스윙의 핵심적인 관객은 대학생 정도 나이의 청년과 십대 소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터버그(jitterbug: 지르박)'라 불리던 열정적인 젊은 춤꾼은 좋아하는 밴드의 음반을 공부하고, 완벽한 스텝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며, 팬클럽을 만들고, 팬 잡지를 사고, 때로 도시에서 도시로 좋아하는 밴드를 따라다녔다[예상대로 스윙 열풍은 학부모들의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빅 밴드는 미국 대중음악에 젊은 에너지를 새삼 불러왔다. 전성기 시절 스윙은 흑인의 미학에 영향을 받은, 그리고 질식할 것 같던 경제 공황에서 이제 막 벗어난 미국 안에 자라나던 낙관주의와 정확히 일치했던 야단스럽고 활기찬 음악이었다. 비록 빅 밴드 대부분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취를 감췄지만, 스윙의 음악적·문화적 영향력은 전후 R&B와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 종국에는 로큰롤에 이르기까지 강력하게 지속되었다."(177)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사이에 일어난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이른바 '노래하는 카우보이'들의 부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한 삼류 소설, 혹은 카우보이 노래 모음집의 발간, 또 톰 믹스 같은 무성영화 스타들의 영화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카우보이의 영웅적 이미지는 이후 수많은 컨트리 음악인에게 도입되었는데, 대공황 시기에 종종 폄하되곤 했던 힐빌리의 이미지를 대체했다. 남부와 마찬가지로 거친 서부 역시 오랫동안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역으로 자리해왔는데, 특히 미국인이 자신들의 역사, 전통, 성격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이미지와 이야기의 보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미국 대중문화에서 남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본적으로 전통, 종교적 도덕성, 그리고 과거를 전형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데 반해, 서부는 운동, 독립, 미래 등의 소재와 흔히 연관되곤 했다. 곧, '웨스턴(서부)'이라는 용어는 '힐빌리'의 대체물이 되었다."(199)


7 Choo Choo Ch’Boogie: 제2차 세계대전 이후(1946~195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0년 동안 음악 산업은 음악의 소리와 영상 이미지를 재생하고 전송해주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 독일과 일본에서 개발된 '자기 테이프 녹음'은 기존에 통용되던 음악 녹음 방식을 뛰어넘는 다양한 이점이 있었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마스터'로 쓰일 포노그래프 음반 위에 직접 녹음하는 공정에 비해 테이프 녹음은 훨씬 폭넓은 사운드를 담아내는 데 용이했다. 이에 더해 테이프 녹음은 연주자가 이전 연주에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녹음할 수 있고, 녹음한 소리에 다양한 층위를 더할 수 있었다." "라디오 방송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의 기술적 발전에 영향을 받았다. 1920년대 초반 이래로 이 분야를 지배하고 있던 AM 방송 기술에 더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FM 방송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음반 산업계가 새로운 위협으로 여겼던 텔레비전은 1950년대 중반이 되면 새로운 가수와 음반을 출시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216-9)


"1946년 즈음에 대중의 관심은 베니 굿맨, 카운트 베이시, 글렌 밀러 같은 유명한 연주자 또는 밴드리더에게서 새로운 세대의 크루너로 옮겨 가고 있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 사이에 최고의 인기를 구사한 가수─프랭크 시나트라, 페리 코모, 냇 '킹' 콜, 도리스 데이, 조 스태퍼드, 페기 리 등─대부분은 스윙 시대에 자신의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이들인데, 이들은 점차 늘어가는 십대 청취자를 대상으로 홍보되었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있었던 AFM의 녹음 금지 사태─연주자에게는 해당되었지만, 대부분의 재능 넘치는 보컬리스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는 빅 밴드와 함께 노래하던 가수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악을 (때로는 합창단을 반주로 삼아) 녹음하도록 내모는 계기가 되었다. 기업 운영에 정통한 이들 혹은 최고의 사업 대리인과 함께 이 가수들은 이 기회를 오래 지속될 성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219-20)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남부의 전통에 뿌리를 둔 대중음악 형식이 새롭게 다시 등장했다. '레이스' 음악과 '힐빌리' 음악 같은 옛 범주의 음악은 일련의 개명 과정을 거쳤는데, 이는 변화된 사회적 태도, 남부 음악의 경제적 잠재력에 대한 음악 산업계의 인식 변화 등을 두루 반영한 결과였다. 1942년에 《빌보드》는 이러한 음반에 대해 분류를 시작했는데, 이러한 음악을 하나의 범주인 '웨스트 앤드 레이스'로 포괄하더니 이 혼성적인 명칭은 다시 '아메리칸 포크 레코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949년 《빌보드》는 '레이스'와 '힐빌리'를 좀 더 품격을 높이고 현대식으로 변형해 'R&B'와 '컨트리 앤드 웨스턴'이라는 용어로 각각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들 컨트리 앤드 웨스턴과 R&B음악의 성공은 전쟁 직후 기간에 일어난 수많은 작은 독립 음반 레이블의 재부상에 빚을 지고 있다. 이들은 주요 업체들이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미국 대중음악 지도의 영역을 개척하는 데 열성적인 노력을 기울였다."(235-7)


# 리듬 앤 블루스(R&B) 음악

1. 점프 블루스(jump blues) : 강력한 스윙풍, 부기우기풍의 파키 음악을 전문적으로 연주 

2. 블루스 크루너(blues crooner) : 블루스와 팝 가창을 혼합한 쿨한 스타일의 접근 방식

3. 시카고 일렉트릭 블루스 : 도시적 감상을 지향하는, 한층 거칠고 요란스러운 유흥가 음악

4. 보컬 하모니 그룹 : 흑인 교회에서 훈련받은 젊은 가수들이 만들어낸 세속적인 대중음악


#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

1. 컨트리 크루너 : 팝 중심적 스타일에 특화되어 컨트리 음악과 팝 음악 간에 가교 역할

2. 블루그래스(bluegrass) : 전통 남부음악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단장한 신고전주의

3. 홍키통크(하드 컨트리, hard country) : 길가 술집 같은 곳의 소리와 정서를 담은 음악


8 Rock Around the Clock: 로큰롤(1954~1959)


"1950년대 중반에 등장한 로큰롤은 미국 대중음악, 더 나아가 세계 대중음악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로큰롤의 등장은 문화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그 중요성 때문에 로큰롤이라는 장르를 신화화하거나 장르에 대한 흔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다음의 문제를 한 번 곱씹어보자. 우선 로큰롤은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 혹은 단일한 스타일의 음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로큰롤은 젊은 세대를 주 향유층으로 공략했던 최초의 대중음악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로큰롤이 미국 대중음악 역사상 백인과 흑인이 함께 어우러져 즐겼던 최초의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로큰롤'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틴 팬 앨리', '힐빌리 음악', R&B'와 같이 철저히 상업적이며, 단지 마케팅 방편으로 새로운 음악 팬을 겨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로큰롤이라는 장르가 노린 새로운 음악 팬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등장하는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였다."(266)


"1950년대에 청소년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새로운 세대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대개 이런 종류의 집단은 춤, 패션, 말투, 음악 등 자신을 대표할 그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의 상징을 갖추어야 했다. 1950년대의 경제적 풍요로움은 이 세대에게 전례 없는 강력한 구매력을 부여했고, 이 세대는 자신의 입맛과 정체성에 어울리는 새로운 여가와 유흥 문화에 시간을 투자했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기성 상업 문화에 의해 조작된 제품과 유행 간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세대 스스로 선택한 제품과 유행 간의 변덕스러운 주고받기 관계가 성립되었다. 로큰롤은 1950년대 초반과 중반에 점점 늘어나는 젊은 세대의 예기치 못한 음악적 선택의 결과로 등장했는데, 1950년대 말에는 주류 음악 산업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 및 복제된 문화였으며, 1960년대에는 이러한 십대가 어른이 되어 그들 스스로 제품과 마케팅을 통해 통제력을 갖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재생산한 문화였다."(267)


"로큰롤과 청소년 혹은 청소년기의 밀접한 관계는 1960년대에 이르면 서서히 마무리되기 시작하는데, 로큰롤을 들으며 자란 기성세대가 더 성숙한 형태의, 그리고 동년배를 위해 음악을 만드는 주체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새로운 음악을 그냥 '록'이라고 줄여 불렀다. 로큰롤이 가진 세대적인 문화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또 한 가지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기존의 시장 구조가 인종적이고 지역적인 구도에서 세대적인 시장으로 재편되면서 미국 문화의 풍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1950년대에 로큰롤 음반은 흑인만이 다니는 도심 공립학교의 댄스파티에서, 혹은 백인이 다니는 교외의 사립학교에서, 혹은 시골 사교 모임에서 모두 울려 퍼졌다. 이것은 인종, 계급, 지역이 극단적으로 나뉘어 있던 1950년대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실로 독특한 문화적 현상이었다. 로큰롤 음악은 이 단절적인 대중의 구분 사이에서 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했다."(270)


"로큰롤의 등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커버 버전이라고 불리는 상업적·음악적 흐름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이것은 단순히 다른 가수가 이전에 불렀거나 연주했던 음악을 다시 녹음하는 작업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음악의 실천가, 사업가, 학자들은 이 단어를 종종 훨씬 더 제한적인 의미, 즉 종종 원곡 스타일과 감수성을 포함시켜 기존에 녹음되었던 연주를─때로는 거의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다시 녹음해 경제적 이득을 얻는 형태의 행위로 사용한다. 물론 음악에서 무언가를 빌리는 행위는 음악 자체만큼이나 뿌리가 깊은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효과가 발견되면서부터, 사회적 불평등이 발견되면서부터 이 행위는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의 전통·스타일·연주자가 다른 전통·스타일·연주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그 자체로 일종의 음악적 차용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빌린다'는 행위는 종종 '훔치는'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271)


9 Good Vibrations: 미국 대중음악과 브리티시 인베이전, 1960년대


"1960년대 초는 보통 미국 대중음악 발전 단계에서 일종의 혼탁한 시기, 혹은 초기 로큰롤 시대의 흥분과 1964년에 비틀스가 미국에 입성하기까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던 시기쯤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흐름이 등장했다. 먼저 〈The Twist〉와 여타 다른 종류의 댄스음반의 범람으로 촉발된 사교댄스 열풍이 그것인데, 로큰롤 음악에서 처음으로 일련의 새롭고 특징적인 움직임과 함께 그에 어울리는 사회적 관습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로큰롤을 듣고 자란 첫 세대는 작사가와 작곡가의 위치에서 음악 산업의 실권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로큰롤의 새로운 스타일이 지닌 잠재력이 캘리포니아에서 등장했는데, 이 흐름을 이끈 것은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와 그 리더 브라이언 윌슨이었다. 윌슨은 혁신적인 연주자, 작가,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앞으로 나올 수많은 뮤지션의 모범적인 롤 모델을 만들어냈다."(311)


"보컬 그룹 테디 베어스의 멤버로 데뷔한 열일곱 살의 필 스펙터는 스승으로 모신 제리 리버와 마이크 스톨러를 모방하는 대신에 자신의 위치를 작곡가 겸 프로듀서로 설정했고, 1960년대 로큰롤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 무대 뒤에서 일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그는 이 신생 사업에서 어느 쪽이 떠오르는 진짜 권력인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그 권력이란 바로 음반의 '소리'를 결정하는 사람들이었다." "필 스펙터와 함께 일했던 작곡가의 면면을 언급하는 것은 마치 1960년대가 낳은 가장 천재적인 재능의 보유자를 모두 나열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를테면 캐롤 킹과 제리 고핀, 베리 만과 신시아 웨일, 제프 베리와 엘리 그리니치 콤비가 그들이다. 이들과 같이 재능 있는 작곡가를 위해 뉴욕에 있는 브릴 빌딩(브로드웨이 1619번지)과 근처의 다른 사무실들에 작업 공간이 마련되었는데, 피아노가 놓인 좁은 방에 여러 명이 빽빽이 모여 가수와 인디 레이블에 제공할 곡을 써냈다."(316-8)


"같은 시기에 디트로이트에서는 배리 고디 주니어라는 인물이 필 스펙터의 필레스 레코드사와 유사한 형태의 작곡, 프로듀싱, 마케팅 조직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타운[미국 자동차 산업의 본거지인 디트로이트의 별명인 모터 타운(motor town) 혹은 모터 시티(motor city)를 본뜬 이름]은 필레스 레코드사를 훨씬 능가하는 성공담을 써 내려갔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미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악 산업 전체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성공담이었다는 점이다." "모타운의 음악은 단순히 흑인 청취자만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 팝 음악을 최대한 넓은 범위의 청취자에게 들려주고자 노력했다. 그가 차별을 둔 유일한 요소가 있다면 로큰롤처럼 '세대'라는 범주였다. 모타운의 음악은 다양한 인종과 지역, 계급을 넘나들 수 있도록 고안되었지만, 레이블의 좌우명에서 알 수 있듯이 본질적으로는 '젊은 미국의 소리(the sound of young America)'였다."(321-2)


"1964년 2월 초 비틀스가 미국에서 그들의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내놓고 처음으로 정상에 오른 바로 그 시점에, 그들은 이미 고향인 영국을 비롯해 유럽에서는 익히 알려진 인기 스타였다." "역사적으로 미국 대중이 영국에서 건너온 문화에 대해 일종의 로망을 품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는 해도, 미국의 비틀 마니아(beatle mania)처럼 본국 출신이 아닌 팝 뮤지션에게 이 정도로 엄청난 집착을 보인 것은 분명 전무후무한 일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초였던 비틀스의 전국적인 성공과 함께 시작된 영미 팝 음악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에 미국 차트에서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에릭 클랩튼, 엘튼 존, 스팅, 오아시스 등 상당수가 영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지점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미국이 점점 더 공공연하게 전 세계로부터 팝 음악의 영향을 취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신호였다는 점이다."(332-5)


10 Blowin’ in the Wind: 컨트리, 소울, 어번 포크, 록의 등장, 1960년대


"절충주의적 음악들이 팝 차트의 전면에 등장하던 1950년대와 1960년 동안에도 주류 시장에 뛰어들지 않은 대중음악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며, 특별히 선택된 혹은 지역 대중을 대상으로 준비된 아티스트와 음반이 그렇지 않은 음악보다 팝 차트에 진출할 확률은 훨씬 낮았다. 뉴욕과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팝 혹은 록 중심의 라디오 방송을 듣던 로컬 음악 팬이라면 1960년대 내내 벅 오언스나 멀 해거드 같은 뮤지션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을 비롯해 조지 존스, 소니 제임스, 웹 피어스, 키티 웰스, 로레타 린 등 도시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컨트리 가수들은 같은 시기에 미국의 남부나 서부의 컨트리 방송국에서는 필수적인 레퍼토리였다." "이 시기의 젊은 컨트리 아티스트 대부분은 엘비스나 버디 홀리의 로커빌리 스타일 대신, 홍키통크에 뿌리를 둔 사운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이 새로운 스타일은 이른바 '내슈빌 사운드'라고 불렸다."(356-8)


"레이 찰스는 훌륭한 작곡가로서 초기 R&B 히트곡, 이를테면 〈I've Got a Woman〉이나 〈Hallelujah I Love Her So〉 같은 고전을 써냈다. 또한 탁월한 편곡자이자 이례적일 만큼 빼어난 키보드 연주자로서 주류 팝의 문법뿐 아니라 재즈에도 통달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뛰어난 보컬리스트였던 그는, 한번 들으면 결코 잊기 힘든 독특하고 강렬한 표현력이 담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찰스의 가장 개성적인 녹음들은 그저 단순히 빼어난 개인적 표현에서 더 나아가 미국 대중음악 스타일에 관한 독창적이고 포괄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1950년대에 레이 찰스가 개척한 가스펠-블루스 조합의 음악이 본질적으로 소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중요한 소울 가수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음악은 제임스 브라운, 아레사 프랭클린, 커티스 메이필드, 오티스 레딩, 슬라이 스톤 등 수많은 가수에게 수량화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361-2)


"어번 포크 음악을 이끌어간 밥 딜런은 뉴욕에서 부상하고 있던 어번 포크계에서 어쿠스틱 싱어송라이터로서 이력을 시작했다. 1960년대는 그야말로 어쿠스틱 어번 포크 음악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베이비부머들이 대학에 갈 나이가 되자 문화와 정치에 대한 관심과 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들은 전통적인 포크 음악을 비롯해, 당시의 현안(소련과의 냉전, 핵무기 개발과 실험, 인종 문제 등)을 다룬 '브로드사이드(broad-side)'의 주요 구독자로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1962년에는 가장 유명한 포크 스타 킹스턴 트리오조차 피트 시거의 매력적인 반전(反戰)곡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을 녹음했고, 이는 예상하지 못한 팝 히트곡(21위)이 되었다. 이것은 어번 포크 운동과 당대의 청중 사이에 점점 증가하고 있던 정치 의식화를 증명하는 부분으로, 결국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의 성공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 이듬해에 나올 〈Blowin' in the Wind〉의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373-4)


"로큰롤은 음악을 즐기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재밌는' 음악, 즉 대개 밝고 영리하며, 심각하지 않은 메시지를 담은 음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의 로큰롤에서 이미 변화의 바람은 불기 시작했다. 밥 딜런의 일렉트릭 스타일과 포크 록의 주창은 팝 음악계에 일종의 성장 호르몬을 주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이비부머가 어른이 되었듯이 로큰롤도 어느날 갑자기 어른의 음악이 된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고, 로큰롤은 록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급격히 성장해버렸다. 심각한 주제를 다룬 팝 음반, 정치적이고 시적 가사를 담은 음악이 온갖 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박동은 곧 살펴볼 야심찬 콘셉트 앨범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1960년대 말 그야말로 강렬하고 믿을 수 없이 혁신적인 창의적 음악으로 팝계가 꽃을 피웠던 그 시절이 도래하고 있었다(물론 어른이 된다는,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압박은 또한 허세에 가득 찬 음악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380)


"1960년대 말 새로운 록 음악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와 당대를 규정하는 정치적·사회적 불만의 결합은 곧 저 유명하고도 다루기 어려운 문화 현상, 바로 반문화(counterculture)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그렇게 구조적이거나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흐름은 아니었다. 종종 신화적으로 묘사되곤 하는 반문화의 주축들이 베트남 전쟁 등을 반대하고 인권운동을 지지하던 젊은 록 팬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 중에는 나이든 기성세대도 적지 않았고, 그들 중 대다수는 새롭게 등장한 젊은 록 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가령 젊은 록 팬의 상당수는 아예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보수적인 정치적 의제를 지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운동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을 선포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운영해가는 체제에서 여성이나 유색인종이 늘 배제되던 한계도 있었다."(385)


11 1970년대: 록 음악, 디스코, 그리고 팝의 주류


"냉소주의가 퍼지는 가운데 1960년대 후반의 이념 대립은 수그러질 줄 몰랐고, 대중음악은 1920년대와 1950년대의 재즈와 로큰롤에 대한 '불안'과 똑같은 모양으로 보수적인 정치인과 정치 평론가의 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1970년대가 정말 흥미로운 것은, 미국 사회가 보수적인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에 정확히 발맞추어 히피 복장과 속어, 사이키델릭 이미지, 그리고 록 음악이 AM 라디오, 네트워크 델레비전 방송,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주류 문화로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이 역시 1920년대와 유사한데, '재즈 시대'는 강력한 정치적 보수주의 시기에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반 대중음악 시장은 크게 두 범주의 소비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우선 새로운 십대 신세대 계층으로, 이들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들이다. 그리고 스물다섯 살부터 40대에 이르는 연령대의 성인으로, 이들은 로큰롤과 함께 성장해 조금 더 성숙된(말하자면 좀 더 보수적인) 즐길 거리를 찾는 이들이었다."(408)


"많은 미국인이 1960년대가 그냥 가버리기를 희망했지만, 또 다른 이들은 그 시대가 져버린 것에 애도를 표했다. 지미 핸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도어스의 짐 모리슨의 죽음, 무엇보다 록 음악의 성취감을 때로는 과잉될 정도로 고취시켰던 비틀스가 해산함으로써 종말을 고한 반문화는 록 음악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1970년 12월 31일 폴 메카트니는 공식적으로 비틀스와의 사업적 유대 관계를 해지한다는 내용이 담긴 짧은 법률 문서를 접수했다. 많은 록 음악 팬에게 이 '팹 포(Fab Four)'의 파국은 1960년대가 마감된 데 대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였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이것이 록 음악 자체의 절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후반에 록이 주류 대중음악의 정반대편으로 규정되는 반문화 운동의 음악이었다면, 1970년대 록은 주류 대중음악을 다시 정의 내리게 도왔으며, 확장되고 더욱 중앙집중화된 연예 산업의 가장 주요한 수입원으로 성장했다."(409)


"1970년대 동안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은─이제는 그냥 '컨트리'로 통용되는─하나의 거대한 사업으로 성장해 남부 백인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청취자를 강화하는 동시에 젊은 중산층 청취자에게까지도 다가가게 되었다." "컨트리 음악의 인기로 돈을 번 팝 가수를 한편에, 주류 팝으로 나아간 인정받는 컨트리 음악인을 다른 한편에 두는 이분법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 컨트리 스타인 올리비아 뉴튼존과 돌리 파튼의 사례에서 잘 나타난다." "1970년대 후반 뉴튼존이 영화《그리스》(1978)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통해 컨트리 음악을 버리고 대세이던 옛 로큰롤 스타일의 음악으로 갈아타면서, 골수 컨트리 팬이 평소에 품은 의혹은 상당 부분 정당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좀 더 공정하게 보자면 뉴튼존이나 덴버 같은 이른바 팝 기회주의자들이야말로 1970년대 내내 컨트리 음악의 청취자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415-8)


"로큰롤의 자신만만한 후손인 록은 1970년대에 걸쳐 음악 산업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비틀스, 밥 딜런, 브라이언 윌슨,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은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인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로, 그리고 그들의 녹음을 하나의 예술 작업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종종 자아도취의 찌꺼기 같은 결과물로 이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중 몇몇은 롱 플레잉(long-playing: LP) 레코드라는 매체를 적극 활용해 획기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을 창조해냈다. 록 공연의 거대한 규모, 콘서트의 엄청난 소리와 극적인 광경은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 즉 팬이 만든 하나의 잠정적 도시라는 강렬한 본능적 감정을 이끌어냈다. 동시에 음악 산업은 록 음악의 매력을 일부 끌어와 가령 '팝 록'과 '소프트 록' 같은 장르를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록의 인기를 확장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며, 톱40 라이도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에 홍보되었다."(425-6)


"디스코 시대는─대략 1975년부터 1980년까지─록 음악에 대한 거대한 대중적 대안의 출현을 의미했다." "디스코는 밴드의 중요성을 덜 강조했고 그 대신 음반 작업을 감독하는 프로듀서, 나이트클럽에서 이 음악을 트는 디스크자키, 그리고 익명의 스튜디오 음악인의 뒷받침 속에 노래했던, 종종 경력을 짧게 마감한 화려한 가수에 음악의 초점을 맞췄다. 또한 디스코는 개별 조각의 모음으로서 마치 건축물같이 디자인된 록 음악의 개념을 거부했다. 한 번에 몇 시간을 계속 춤추고자 하는 관객을 위해 디스크자키는 기존의 싱글 음반을 재발굴해 12인치 LP 음반의 용량을 채울 만큼 길이를 늘려야 했으며, 동시에 곡을 중간에 끊지 않고 한 장의 음반에서 다른 음반으로 넘어갈 수 있게 소리를 섞는 기술을 개발해야만 했다(이러한 턴테이블 기술은 힙합, 하웃, 테크노 등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대중 장르에서 활요될 기존 음반을 사용하는 방법에 길을 터놓았다)."(438-9)


12 아웃사이더의 음악: 프로그레시브 컨트리, 레게, 살사, 펑크, 훵크, 랩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주류 컨트리 음악은 깔끔한 내슈빌 사운드가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고, 하드코어 컨트리의 기수 멀 해거드를 위시해 AM 톱40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던 컨트리와 팝의 다양한 혼합이 그러한 흐름을 이끌었다. 하지만 신세대 컨트리 뮤지션들은 1960년대 반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음악과 태도를 음악 안에 포용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레시브 컨트리라고 불리는 음악은 베이커스필드 컨트리 음악에 담긴 홍키통크와 로커빌리의 결합, 싱어송라이터 장르(특히 밥 딜런의 작품), 1960년대 말 버즈의 멤버였던 글램 파슨스 등의 컨트리 록 스타일 음악에 두루 영감을 받은 장르다. 일반적으로 프로그래시브 컨트리 뮤지션은 당대의 동료보다는 훨씬 지적이고 자유로운 내용의 곡을 주로 썼고, 히트곡 위주의 작품 활동에서 벗어나 컨트리 음악 전통의 한계를 새롭게 실험하는 데 더욱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이런 아티스트들은 상당수의 컬트 팬을 만들어냈다."(448)


"레게(raggae)는 카리브 해 지역의 민속음악과 미국의 R&B가 만나 만들어진 장르로, 록 시대에 제3세계에서 건너온 최초의 음악 스타일이다. 미국 내 레게의 인기는 흔히 이전 시대의 '이국적' 음악 열풍─아르헨티나의 탱고와 쿠바의 룸바─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도래할 월드 비트 운동과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다. 자메이카의 변두리 빈민가 킹스턴에서 탄생한 레게는 1973년 미국에서 첫 성공을 거두었는데, 1970년대에는 밥 말리와 지미 클리프로 대표되는 소수의 자메이카 뮤지션이 미국 내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미국과 영국의 록 뮤지션, 이를테면 에릭 클랩튼, 폴 사이먼, 폴리스, 엘비스 코스텔로 등의 뮤지션이 이 장르에서 영감(그리고 수익)을 얻었다. 또한 1980년대의 랩 음악 역시 자메이카의 '더브(dub)' 음악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더브란 기존에 녹음된 음악 반주에 맞춰 그 위에 말로 이루어진 퍼포먼스를 입히는 레게 전통의 한 갈래였다."(453)


"록 음악이 대중음악계에서 그 존재감을 공고히 하고 있던 1970년대에 라틴 음악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눈에 띄게 쇠퇴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틴 스타일과 아프리카계 미국 R&B, 재즈 등이 뒤석여 만들어진 '부갈루' 현상의 여파 이후─그리고 심지어 맘보와 기타 기반 록 음악의 성공적인 결합 이후에도─뉴욕의 라틴 음악인은 대부분 손 몬투노(son montuno) 형식에 뿌리를 둔 쿠바 댄스음악의 치피쿠(tipico: 전통적) 사운드로 회귀했다." "이런 음악적 보수주의에 대항해 1970년대는 리듬이 강조되고, 화성적으로 진보된 음악 스타일이 뉴욕의 댄스 클럽에 새롭게 상륙했다. 이 장르의 이름은 살사 혹은 '(핫)소스'로 불렸는데, 이는 라틴 음악인 사이에서 강렬하고 열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음악을 칭하던 하나의 은유적 표현이었다. 재즈, 스윙, 로큰롤 같은 단어처럼 살사는 하나의 미적 감수성일 뿐 아니라 장르 구분을 의미하기도 하고, 마케팅적인 상표의 이름이기도 했다."(459)


"1970년대에 모습을 드러낸 첫 '대안적(alternative)' 물결은 바로 록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록은 1960년대 반문화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출발했지만, 1975년에 이르면 대중적 취향의 중심부와 위태롭게 가까워졌고, 이러한 변화는 몇몇 젊은 음악인들에게는 록의 반항적이고 혁신적인 잠재력이 가식적인 응석받이 록 스타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대형 음반사들에 의해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펑크 록─권위에 반항하고 중산층의 가치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하나의 문화양식으로서─의 황금시대, 즉 상업적이고 인위적인 록 음악에 대항하는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basics)〉라는 혁명은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지속되었다. 그와 연관된 음악적 장르와 감수성은 오늘날의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에게 심오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펑크 록과 함께 나란히 등장한 뉴 웨이브 음악은 더욱 의식적으로 예술적이며 실험적인 방식으로 록의 상업주의를 비판해나갔다."(464-5)


"펑크 록은 명품 선글라스, 리무진 창문, 저택 벽 뒤에 숨은 록의 가식과 백만장자 슈퍼스타에 대한 저항이었다. 훵크 음악(funk music)은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철학을 내세운 또 다른 움직임으로, 기본적으로는 춤을 향한 박동이었다. 대부분의 AOR(album-oriented rock)은 주로 백인 남성 청취자를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춤보다는 감상을 위한 음악이었다. 그에 반해 도시 공동체에서 흑인의 춤은 여전히 사회 생활의 주요한 뼈대로, 전통적인 가치를 전달하고 진기함과 흥분을 만들어내는 주된 도구로서 남아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 불어닥친 트위스트 열풍 이후 처음으로 훵크 음악, 그리고 그 후손인 디스코는 강렬한 춤의 열기를 다시금 팝의 한복판으로 가져오고야 만다." "훵크는 R&B와 팝의 크로스오버 시장을 지배하던 말랑말랑한 소프트 소울의 지배에 대항하여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이 가진 가치를 격렬하게 재확인시켰고, 1970년대 중반 더욱 상업화된 디스코 음악 사운드의 초석을 닦았다."(476-7)


"힙합 문화는 뉴욕에 살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푸에르토리코인, 캐리비안계 미국인 등에 의해 구축되었는데, 독창적인 시각 예술(그래피티), 춤[브레이크댄싱으로 불리는 곡예적인 솔로 춤과 프리크(freak)라고 불린 열정적인 커플 댄스], 음악, 옷, 언어를 포함하고 있다." "힙합을 낳은 청년 문화는 한편으로 전통적인 가족 또는 이웃 기반의 시설과 지역 문화 센터 같은 공공기관에 대한 지원 중단에 좌절한 이들의 사회적 저항이자, 또 한편으로는 괴리되고 적대적으로 뒤바뀐 도시 환경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시도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힙합은 브롱크스의 특정 지역, 즉 뉴욕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황폐화된 지역에 국한되어 벌어진 현상이었다. 힙합 문화가 지역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지어 전 세계로 동시에 홍보되는 오늘날의 멀티 플래티넘 랩 음반조차 특정한 지역이나 도시 환경의 특징, 사회적 그룹과 관계망에 관한 내부적 언급으로 가득하다."(482-3)


13 1980년대: 디지털 테크놀로지, MTV, 그리고 팝 음악의 종류


"1980년대는 팝 음악의 제작에 혁명을 가져올 기술이 대거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디지털 녹음 기술의 발전은 5인치짜리 콤팩트디스크(CD)의 개발로 이어졌고, 이는 한편으로 비닐 레코드의 급속한 몰락을 의미했다." "디지털 기술은 사운드를 프로듀스하고 조작하는 새롭고 더욱 저렴한 기기들─드럼 머신, 시퀀서, 디지털 샘플링을 위한 샘플러─그리고 이러한 기술을 표준화해 다른 제작사가 만든 기기들과 상호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규약인 악기 디지털 인터페이스(MIDI)의 탄생을 불러왔다. 휴대가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디지털 기술과 1990년대 초 개인용 컴퓨터의 급속한 팽창은 음악인들이 개인 홈 스튜디오를 꾸며 힙합, 테크노 같은 새로운 장르를 성장시키도록 자극했다. 인공위성 기술은 사상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의 전 세계 동시 중계를 가능하게 했으며, 광섬유의 발전은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음악인까리 실시간으로 스튜디오 녹음을 합작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492-3)


"연예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는 케이블 텔레비전의 성장과 폭발로 곧바로 이어졌는데,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산물은 바로 1981년에 출범한 뮤직 텔레비전(MTV)이었다. MTV는 산업의 작동 방식을 바꾸었고, 신인을 데뷔시키고 최신 음악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가장 선호되는 매체로 급속히 성장했다. MTV에서 처음 방송된 노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Video Killed the Radio Star〉였지만, 실제로 MTV─그리고 좀 더 나이 든 25~35세 청취자를 공략했던 자매 방송인 VH-1─는 라디오, 그리고 다른 미디어와 상승 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록 슈퍼스타들을 끊임없이 배출해냈다. 또한 MTV는 1980년대 초 팝 음악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유리스믹스, 폴록 오브 시걸스, 애덤 앤트, 빌리 아이돌, 토머스 돌비 등 영국 아티스트를 널리 홍보함으로써 이른바 제2의 브리티시 인베이젼이라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자 MTV의 영향력은 음악 산업 전반에서 뚜렷이 감지되었다."(493-4)


"컨트리 음악은 60년의 여정을 거쳐 주변부에서부터 중심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었고, 록과 팝 성향의 컨트리 슈퍼스타 가스 브룩스, 클린트 블랙, 리바 매킨타이어 등을 내세워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악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1970년대 초 이후 극심한 세분화의 과정을 겪고 있던 록은 수백 가지의 세부 장르와 서브 장르로 나뉘었고, 이중 몇몇(어덜트 컨템퍼러리, 헤비메탈)은 대규모의 팬을, 몇몇(하드코어, 트래시, 테크노, 펑크 록, 유로 디스코)은 규모는 작지만 충성스러운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랩 음악은 1970년대 중반 흑인·라틴·캐리비안 계열 미국인들의 청년 문화로 뉴욕에서 등장해, 1980년대에 이르면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산업으로 발전했다. 1990년대 동안 중심부와 주변부, 주류와 비주류 음악 간의 관계는 더욱더 복잡해져, 의도적으로 반상업적인 기치를 내건 장르인 갱스터 랩, 스피드 메탈, 그런지(grunge) 등이 《빌보드》 앨범 혹은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495)


14 Smells Like Teen Spirit: 힙합, '대안적' 음악, 연예 산업


"20세기 말로 접어들면, 성공한 팝 음악에서 일관된 스타일이 더는 발견되지 않는다. 1990년대의 베스트셀러를 되짚어보면 이른바 '어덜트 컨템퍼러리' 디바라고 불리던 셀린 디옹, 자넷 잭슨, 머라이어 캐리를 비롯해 컨트리 음악 스타 클린트 블랙, 리바 매킨다이어, 샤니아 트웨인, 가스 브룩스가 공존했고, 4인조 R&B 보컬그룹 보이즈 투 맨, 갱스터 래퍼 스눕 도기 독, 투팍 샤커, 노토리어스 B.I.G., 하드 록과 헤비메탈 밴드 에어로스미스와 메탈리카, 펑크에서 영향을 받은 얼터너비트 록 밴드 너바나, 펄 잼,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자기 고백적 '얼터너티브 싱어송라이터' 앨러니스 모리세트, 기록적인 인기를 모은 낭만적 사운드트랙 앨범 《The Bodyguard》(1993)와 《Titanic》(1996)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 장르가 차트를 나누어 가졌다. 음반 회사들이 신세대 팝 슈퍼스타를 발굴·홍보하는 데 어느 때보다도 혈안이 되면서 신인의 앨범 역시 매우 성공적이었다."(540)


"1986년과 1987년을 힙합의 새로운 시장이 탄생한 시기라고 본다면, 1988년은 그보다도 더 중요한 전환점이 만들어진 시기다. 바로 MTV 최초의 힙합 전문 프로그램의 출범이 그것이다. 힙합 이야기꾼인 팝 파이브 프레디 브레이스웨이트는 신설 프로그램 《요! MTV 랩스》를 진행했는데, 이는 방송국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인 프로그램으로 등극해 일일 방송으로까지 확대 편성된다." "랩 음악의 주류 입성은 몇 가지 흥미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몇몇 래퍼와 프로듀서가 그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멀티 플래티넘 크로스오버 히트곡에 쏟아붓는 한편, 다른 이들은 '팝 랩'이라고 불리는 상업주의에 저항하면서 〈The Message〉 같은 음악에 담겼던 사회적 진실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상반된 노력은 훨씬 더 강렬한 하드코어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랩 역사상 가장 유명한 크로스오버 히트곡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547)


"디스코 열풍을 잇는 동시에 힙합과 어깨를 나란히 할, 새로운 형태의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이 1980년대 미국의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그리고 런던, 뒤셀도르프 등 유럽 도시에서 동시에 발전되었다. 1980년대 장르인 개러지와 하우스 음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스타일은 후에 테크노(techono)라는 개념으로 느슨하게 묶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 형태와 양상은 매우 다양했다." "테크노는 주로 댄스 클럽, 그리고 레이브(rave)라고 불리는 반(半)공공행사에서 연주되었는데, 이는 1960년대 반문화와 히피 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본질적으로 테크노는 전체 청년 문화에서 음악적인 한 영역으로서, 그 안에서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의 차이는 장르의 역사에 흐르는 맥락과 공유된 지식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다. 테크노 문화는 디스크자키 및 프로듀서에게 그 역할이 집중되어 있으며, 이들은 디스코나 힙합과 달리 종종 익명으로 일하며 음지에 숨어 기계를 움직인다."(561-2)


"'얼터너티브 음악'이라는 일종의 만능적 개념을 다루는 데 문제가 되는 순간은 바로 전혀 다른, 심지어 서로 충돌하는 두 개의 개념을 함께 다뤄야 하는 경우다. '얼터너티브'라는 개념은 '언더그라운드'와 '인디펜던드'처럼 기존 음악에 저항하는 음악을 묘사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이 관점에서 얼터너티브 음악은 지극히 우상 파괴적이며 반상업적이고 비주류적이다. 그리고 추종자에게 얼터너티브는 상업적이기보다는 지역적이고, 대량생산적이기보다는 수제적이며, 가식적이기보다는 진정성 있는 음악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 이르면 대규모 음반 회사들이 인디 레이블을 야구의 팜 시스템(farm system)과 기능적으로 동일한 개념, 즉 차세대 대박 상품을 찾아내는 데 최적화된 작고 전문화되고 현장과 밀착한 조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돈이 되지 않는 음악으로서 얼터너티브 음악이라는 경제적인 정의는 유지되기 어려워졌다."(566)


15 결론


"미국인들은 종종 흑인과 백인의 음악이 마치 원래부터 뚜렷이 개별적으로 존재해온 것처럼 말하는데, 사실 이는 이른바 '짐 크로 법'에서 갈라져 나온 어떤 사회적 관념의 실체를 말해주는 것일 뿐이다. 인간을 인종으로 분류하는 이러한 방식은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닐 뿐더러, 사실 미국을 제외한 세계의 다른 곳을 메우고 있는 인류의 다양성이라는 측면과는 뚜렷하게 다른 입장이기도 하다. 물론 인종은 생물학적 사실이기보다는 사회적인 허구에 가깝지만, 그 허구는 사람들이 종종 그들이 만든 가상의 조상을 기반으로 목적을 성취하고 다른 사람들을 철저히 차별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음악에는 색이 없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19세기 민스트럴쇼에서 백인 연주자들이 처음으로 얼굴에 검은 칠을 한 것처럼 현대 대중문화에서 인종적 고정관념이 그 발전 과정에 중요한 추동력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597)


"섹슈얼리티와 젠더는 미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중심적인 또 하나의 정체성─고정관념을 반영하거나 혹은 깨뜨리거나─이다. … 실로 많은 대중음악이 사랑과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때로 공공 권력이 음악에 담긴 섹슈얼리티에 대한 표현을 다양한 방식으로 주시하고 검열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한편으로 정치 혹은 종교의 권력자들이 보았을 때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랑에 관한 표현이나 관점 역시 우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가령 동성 간의 관계나 동성애에 관한 묘사는 연예 산업에서 늘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한 가지 말해둘 것은, 수많은 팝 스타─예컨대 리틀 리처드, 데이비드 보위, 프린스, 마돈나─는 종종 의도적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불분명하게 하는 캐릭터를 구축해냈다는 점이다. 섹슈얼리티라는 측면에서 음악은 다층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 특히 최적화되어 있고, 이는 누가 듣느냐에 대한 실질적 척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598-600)


"미국인들이 계급 구별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될 때도 있으나, 계급의식은 세련된 방식으로 포장된 미국 대중음악의 수면 바로 아래에서 은밀히 끓고 있기도 하다. 척 베리의 〈Maybellene〉(1955)에서 여성을 쫓아다니는 남성의 이야기는 남성이 소유한 노동계급의 차인 V-8 포드와 여성이 타고 다니는 고급차 캐딜락 쿠페 드 빌로와 대조를 이룬다(엘리트 문화의 상징인 프랑스어의 사용 역시 그러한 대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크리스털스의 1962년 작 〈Uptown〉은 뉴욕의 사회적 지형을 잘 그려내고 있는데, '쉴 틈 없이' '다운타운(downtown)에서 일하는 젊은이의 일상을 추적하면서, 그가 일과를 마치고 사랑하는 사람의 거처가 있는 '업타운'으로 매일 저녁 돌아가 '왕(king)'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대개 그들의 계급적 소속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대중음악에는 부, 가난, 인간의 마음에 미친 경제의 영향에 관한 언급이 가득하다."(600-1)


"세대적 정체성은 새로운 스타일을 착취하고 창조하는 데, 또는 적어도 진기함을 표현하는 데 크게 의존하는 연예 산업에서는 지속적으로 활용된 주제였다. 대중음악은 미국의 청년 문화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1920년대의 재즈 광란으로 시작해 로큰롤 시대와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청년 운동을 통해 세대 정체성은 미국의 음악 산업과 뮤지션, 관객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음악 산업은 이제 열두 살부터 열여섯 살 사이의 연령대, 즉 백스트리스 보이스, 스파이스 걸스,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세대와, 산업이 주로 치중하는 세대, 즉 록, 랩, 얼터너티브 음반을 구입하는 열일곱 살부터 스물다섯 살 사이의 젊은 성인층을 따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시대별로 사춘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양하게 표현해온 팝 음악은 이제 우리가 각자의 나이에 맞게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서가 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니다."(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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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병사들 - 평범했던 그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죙케 나이첼.하랄트 벨처 지음, 김태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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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당시 독일 국방군 사이에서 '이야기되고 예상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지금과 달랐으며, 따라서 타인에게 자랑하여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만한 일들도 지금과 달랐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대부분은 언뜻 보기에는 아주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다만 우리가, 인간은 그저 자기 '태도'에 따라서 행동하는 법이라고, 그리고 그런 태도가 이념, 이론, 거대한 신념과 결합되어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사람들이 기대한다고 믿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한다. 이는 추상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기보다는, 그들이 놓인 구체적 장소, 목적,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까 독일 군인들이 왜 그처럼 잔혹하게 5년 동안 전쟁을 수행했으며 5000만 명을 희생시키고 대륙 하나를 모조리 황폐하게 만들 만큼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는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전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알아야 한다."(13-4)


1 / 군인의 눈으로 전쟁 보기: 프레임 분석


"인간들이 행하는 해석과 행위를 이해하려면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즉 어떤 해석 틀과 표상과 관계 안에서 그 상황을 인식했고 그 인식한 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재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프레임 분석 방식을 도입한다. 프레임을 고려하지 않으면 과거 행위에 대한 학문적 분석은 규범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로 현재의 규범적 척토를 끌어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쟁과 폭력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종종 그저 '잔인하게' 보이곤 한다. 그러나 사실 '잔인하다'는 것은 다만 도덕적인 범주일 뿐이다. 또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종종 아예 비정상적이거나 병리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들 시각에서 이 세계를 재구성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거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임 분석을 활용하여 도덕 중립적이고 비규범적인 시선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행해진 폭력을 바라보아야 한다."(19-20)


"1차 프레임은 각 시대의 인간이 배경으로 행동하는 폭넓은 사회·역사적 구조들을 포괄한다. 그러나 보통은 아무도 1차 프레임이 지니는 정위(定位) 기능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2차 프레임은 역사·문화·지리적으로 1차 프레임보다 좀 더 구체적인 프레임이다. 이는 우리가 대부분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경계를 그릴 수 있는 사회 문화적 공간을 말하는데, 가령 어느 정권의 통치 기간이나 어느 헌법의 효력 기간 같은 것이 있고, 제3제국 같은 사적(史的) 구조의 역사 등도 이에 속한다. 3차 프레임은 더욱 구체적이다. 이는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맥락들이며, 특정 인물들이 그러한 맥락 안에서 행동하게 한다. 예컨대 전쟁은 군인들이 전투를 수행하게 한다. 4차 프레임은 한 개인을 어떤 상황 안으로 밀어 넣는 그 개인의 특성, 인식 방식, 해석하는 관점, 의무감 등이다. 이 차원에서는 심리학이 중요하며, 개인적 특성과 개인적 결정 방식 등이 중요하다. 여기서는 2차 프레임과 3차 프레임을 분석할 것이다."(20-1)


# 프레임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1. 문화적 결속 : 문화적 결속이나 의무는 종종 자기 보존 욕구를 뛰어넘을 정도로 강하게 작용하며, 종종 어떤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을 택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낳는다.

2. 무지 : 역사는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은연중에 변화하는 사회·심리적 환경을 대개 인식하지 못하고, 사후에 조정한다.

3. 예상 :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기존의 프레임으로 파악하려 한다. 그런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절멸 과정의 치명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4. 시대별 맥락 : 특정 시대를 지배하는 것과 '정상성'에 대한 그 시대의 관념이 무엇인가, 무엇이 일상적이고 무엇이 극단적인 것으로 간주되는가는 프레임의 중요한 배경 요소이다.

5. 역할 모델과 역할 요구 : 평범한 일상이라면 다원적 역할들에 따른 선택 가능성과 행동 대안들이 존재하지만, 전시의 사건 맥락들에서는 이런 가능성과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6. 해석 틀 : 해석 틀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상황들을 유형화하고 자동으로 분류하는 틀이어서, 우리 삶을 구조화한다. 해석 틀은 체험된 일을 분류할 때 일종의 선해석을 제공한다.

7. 공식적 의무 : 평범한 일상에서는 완전한 예속부터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연속적 단계들이 있지만, 군대에서는 계급과 직책에 따라 운신의 폭이 정해져 있고, 명령에 종속되어 있다.

8. 사회적 의무 : 인간은 인과 관계를 따지고 합리적 계산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행동한다. 이런 사회적 의무는 꼭 의식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내면화되어 있다.

9. 상황 : 어떤 사람의 인격적 특성보다 그가 처한 특정한 상황이 그 사람의 행위에 훨씬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그다음에는 모든 일이 경로 의존성을 보인다.

10. 개인적 성향 : 국가사회주의가 보여준 홀로코스트와 섬멸전을 보면, 폭력적이고 반인륜적인 태도가 친사회적 성향에 가까웠다. 개인적 편차는 비교적 하찮은 의미만 가질 뿐이다.


2 / 군인의 세계


"2차 프레임의 구성 요소들은 대개의 경우 당사자에게 의식된다. 예를 들어 1935년 독일인들 대부분은 제3제국 사회의 특징을 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때 바이마르공화국과의 차이를 강조했을 것이다. 가령 경제 성장이 시작되었고 치안과 질서가 강화되었으며 민족적 자부심을 되찾았고 총통과의 일체감이 생겼다는 등 여러 가지 차이를 언급할 것이다. 이런 2차 프레임은 바로 ('체제 시대(Systemzeit)'라 경멸적으로 불린) 직전 시기와의 근본적 차이 때문에 매우 명료하게 의식되었다. 당대의 인터뷰에서도 이제 〈새롭고〉 〈좋은〉 때가 시작되었다는, 〈다시 위로〉 올라가고 〈무엇인가 행해지는〉 때가 시작되었다는, 〈청소년들이 길거리를 방황하지 않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는 때가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자주 강조하곤 한다." "그것은 아주 새롭고 중대한 어떤 것이 등장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경험, 한마디로 말해 '위대한 시대'의 현장에 있다는 강렬한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52)


"제3제국에서 발전한 프레임에서 군인들의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특별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 측면은 유대인 문제(Judenfrage)와 더불어 차츰 뿌리내린 생각, 즉 인간은 그 범주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생각이다. '범주에 따라'라는 표현이 뜻하는 것은, 어느 집단의 구성원이, 가령 '아리아계' 독일인 집단 구성원이 어떤 개인적 노력이나 실패를 통해 다른 집단에, 가령 '유대계' 독일인 집단으로 옮겨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측면은 국가사회주의의 일상이다. 이제까지 여러 연구들은 사회적 활동의 상징 형식들, 가령 '이데올로기', '세계관', '강령' 등을 주로 탐구했으며, 그래서 일상생활의 사회적 활동들이 (무엇보다도 반성적으로 의식되지 않기 때문에) 상징 형식들보다 훨씬 강력한 구성력을 지닌다는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적인 것들이 지닌 구성력이야말로 제3제국 프레임의 본질적 측면 중 하나이다."(53)


"페터 롱게리히의 관찰에 따르면, 독일 사회의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의) '탈유대화(Entjudung)'는 〈개인적 생활 영역들로 점진적으로 침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바로 이를 통해서 도덕적 기준들을 재편성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정상적'이라거나 '비정상적'이라고, '선하다'거나 '악하다'라고, '점잖다'거나 '괘씸하다'라고 여기는 기준에 확연한 변화가 생겼다. 국가사회주의 사회는 비도덕적이지 않다. 집단 학살조차도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 타락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국가사회주의 도덕'이 놀랍도록 빠르고 심대하게 뿌리내린 결과였다. 이 도덕은 민족과 민족 공동체를 도덕적 행위의 준거 집단으로 정의하고, 가령 전후 민주주의 시대와는 다른 사회적 가치와 규범을 정착시켰다. 이런 도덕적 규준에는 평등이라는 가치가 아니라 불평등이라는 가치가 속했고, 개인의 가치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민족'의 가치가 속했으며, 보편적 연대가 아니라 일부의 연대가 속했다."(61)


"사회적 범죄의 한편에는 범죄를 계획하고 예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가해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런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방관자나 관객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이런 범주들로 나눌 경우, 결국 전쟁과 집단 학살과 섬멸로 사람들을 이끌어 갔던 행위 맥락을 적절하게 서술하지 못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런 행위 맥락에서 실은 관객이나 방관자는 없다. 모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즉 어떤 사람은 더 강력하고 열성적으로, 어떤 사람은 좀 더 회의적이고 무관심하게, 공동의 사회적 현실을 함께 만들어 낼 뿐이다." "여기에서 본질적 부분은 일상의 실천적인 변화이다.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한 공개적 항의는 그 어디에서도 없었고, 유대인들이 겪는 구체적인 일들에 대한 비판도 없었다." "다시 말해, 정치권의 주도뿐 아니라 개인들이 이를 학습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사회주의 프로젝트가 놀라울 만큼 단기간에 그렇게 광범위한 동의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70-1)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순수 군사적 가치들이 독일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1866년과 1871년의 승리가 전통적 귀족 엘리트층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민적 도덕규범의 이상들이 포기되고 그 대신 전통적 상류층의 명예 규범이 방향을 제시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인본주의적 이상과 평등의 관념이 규범적 측면에서 격하되었던 것이다. 〈명예 문제는 높은 위치를, 도덕 문제는 낮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본주의의 문제나 인간 평등의 문제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이러한 과거의 이상들은 전반적으로 사회적 하류층들이 지닌 허약함의 특징이라고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엘리아스는 이를 독일 시민 계층에서의 '게슈탈트 전환(Gestaltwandel)'이라고 부르는데, 19세기 후반의 이런 변화를 통해 명예 문제, 인간의 불평등성, (결투 등에 의한) 명예 회복 문제, 민족 문제 등이 계몽과 인본주의 이상보다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74)


3 / 전투, 죽음과 죽어 감


〈폭탄 투하가 내게는 욕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짜릿합니다. 기분이 상쾌하지요. 총살만큼이나 기분 좋아요.〉(공군 중위, 1940년 7월 17일)


"사람들은 말한다. 전쟁이 사람을 야만스럽게 만든다고. 그리고 군인은 폭력을 경험하면서, 절단된 신체, 피살된 동료, (섬멸전에서처럼) 집단 학살 당한 남자, 여자, 아이들을 보면서 포악해진다고." "폭력에 대한 역사적이고 사회심리학적인 연구들에서도 이런 야만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틀렸을 수 있다. 첫째, 이런 생각은 폭력 사용이 매력적 경험이라는 사실, 예컨대 '짜릿한 일'일 수 있음을 처음부터 간과한다. 둘째, 극단적 폭력을 저지르러면 먼저 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어쩌면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함을 처음부터 간과한다. 극단적 폭력 사용을 위해서는 어쩌면 어떤 무기 하나, 비행기, 아드레날린, 평소에는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 정도면 족할지도 모른다." "군인들은 폭력적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야만화' 같은 토포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이야기들에서 극단적 폭력에 적응하는 사회화는 종종 며칠 만에 이루어졌다."(91-2)


"군인들은 자신들이 수행하는 총격을 뚜렷하게 보이고 입증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또 자주 이야기했다. 그들은 자신의 총격 수와 자신이 소속된 비행전대와 적의 총격 수를 매우 정밀하게 헤아렸다. 의외가 아니다. 이 총격 수에 의거해 포상과 진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기 비행장에 몇 차례 성공적으로 착륙하고 그 작전에서 가한 총격 수를 면밀하게 합산하고 나서 뒤늦게 1급 철십자훈장이나 기사철십자훈장도 수여되곤 했다. 조종사들은 (특히 육군 병사들과는 달리) 전공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적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불타거나 폭발하는 것을 보면서, 지상의 건물이나 기차나 다리가 터지고 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성공을 거두었는지 그리고 어떤 성공을 거두었는지를 눈으로 확인한다. 공중으로부터의 살인에는 이를 미적 체험으로 인식하고 감지하도록 만드는 두 측면이 있다. 첫째는 바로 가시성이고 둘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비교적 안전한 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113)


"해군들도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미리 사회화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적국 상선의 승무원들이 해전에서 죽어 가는 것에 대해 누구도 회의를 가지지 않았다. 이는 늦어도 1917년에는 거대한 해군력을 지닌 나라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불문율로 수용되었다. 해전에서는 개별 군인들이 개인적 능력에 기초해 자신의 용맹함과 탁월한 조종 실력 덕에 살아남을 기회가 매우 드물었다. 제대로 맞으면 우리가 침몰하고 적을 제대로 맞히면 그쪽이 침몰한다. 그러므로 격침과 익사 이야기를 과시하면서도 감정적인 면이 드러나지 않음은 의외가 아니다. 게다가 해전에서는 비교적 먼 거리에서 어뢰를 쏜다. 그래서 특히 잠수함 승조원들은 비행기 조종사들과는 달리, 대개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다. 수상 공격 시에는 상갑판에 네 명만 있고, 수중 공격 시에는 지휘관만 잠망경으로 목표물을 본다. 나머지 승조원은 기껏해야 침몰하는 배의 소음을 들을 뿐이다. 그래서라도 이들에게 연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130)


〈뮐러: 러시아의 어느 마을에 빨치산이 있었어요. 그럼 당연히 마을을 초토화 시켜야죠.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말이에요. ······ 우리 부대에 브로지케라는 사람이 있었죠. 베를린 출신이었어요. 그는 마을에서 보이는 사람은 모조리 집 뒤로 끌고 가서 목덜미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죠. 그때 이 녀석 나이가 스무 살인가 열아홉 살인가 그랬어요. 이 마을에서 남자의 10분의 1을 총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병사들은 〈애걔, 대체 10분의 1이 뭐야? 이 마을 놈들 씨를 말려야 하는데〉라고 말했죠. 우린 맥주병에 휘발유를 채워서 테이블 위에 세워 두고 밖으로 나오면서 아주 느긋하게 뒤로 수류탄을 던졌죠. 그러면 모조리 활활 타올랐죠. 초가지붕들이었거든요. 여자고 아이고 모조리 쏴 죽였죠. 그중에 빨치산은 아주 적었어요. 저는 빨치산이라고 확신하지 않으면 절대 총을 쏘지 않았어요. 하지만 많은 동료들은 그런 걸 무지무지 재미있어했지요.〉


"뮐러의 이야기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그가 자기 이야기 안에 베를린 출신 브로지케라는 준거 인물을 심어 놓고 자신은 긍정적인 의미로 그자와 구별한다는 사실이다. 브로지케의 행동은 분명 범죄적이었고, 살인을 저지르면서 〈무지무지하게 재미있어〉하던 〈많은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비교해 뮐러의 태도는 그렇지 않았다. 군인들이 법률적으로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음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지점이 하나 있다. 즉 가해자가 범죄적 행위의 전체 테두리 안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더라도, 이처럼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은 부당한 일에 가담했다는 도덕적 책임을 면하려는 것이다. 집단 학살과 이른바 유대인 작전에서 가해자들은 내부에서 여러 집단으로 구별되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요구를 이처럼 각자 다르게 해석한다는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학살이 전체적으로 제대로 작동하도록 보장한다."(141-2)


〈디크만: 우리는 간첩 년 하나를 우리 부대에서 처형한 적이 있어요. 스물일곱 살인가 그랬죠. 그 여자는 전에 우리 부대 주방에서 일했어요.〉

〈브룬데: 그 마을에 사는 여자였나요?〉

〈디크만: 마을에 사는 여자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전에 마을에 산 적이 있었죠. 보병대가 아침에 그년을 끌고 왔죠. 오후에 참호 앞에 세우고 처형했어요. 그년은 영국 정보부 소속이라고 자백했죠.〉

〈브룬데: 처형 명령을 누가 내렸나요?〉

〈디크만: 사령관이 명령했죠. 저는 총을 쏘지는 않았어요. 그냥 처형을 지켜봤지요. 우리는 테러리스트를 서른 명 잡았는데,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어요. 지하실에 처넣었다가 벽에 세우고 방아쇠를 당겼지요.〉


"디크만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은 아이들까지 테러리스트로 간주해서 가차 없이 〈벽에 세우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을 적으로 보는 환상 역시 독일의 전쟁 범죄에서만 특이하게 나타나는 점은 아니다." "이것은 그저 광기라기보다는 프레임 변화다. 이런 프레임에서는 적을 정의할 때 어느 집단에 속하는가가 중요하지, 예컨대 나이와 같은 그 외의 속성들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프레임에서는 범주상 적으로 정의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것이 전쟁의 실천적 규범 구조에 속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을 법률에 따라 수사할 경우 이를 예외적으로 일어난 일로 간주하는 모순을 범하곤 한다. 그래서 이를 오판하게 된다." "즉, 자기 목적적 폭력 역시 전쟁의 구조적 폭력이 아니라 다만 바람직하지 않은 예외일 뿐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폭력의 장이 일단 열리면, 다른 사람의 어떠한 사소한 행동이라도 그를 사살하는 충분한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다."(151-2)


〈놈들은 우리를 '독일 돼지들'이라고 부르죠. 우리에겐 바그너, 리스트, 괴테, 실러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있는데, 놈들은 우리를 '독일 돼지들'이라고 불러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독일인들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그래요. 이 인간적인 면을 놈들이 악용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렇게 우리를 욕하는 거라고요.〉(1942년 1월 27일)


〈암베르거: 어느 상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토할 것 같아. 이런 방식으로 유대인을 집단 총살하는 것 말이야. 이런 식으로 죽이는 건 무슨 사명 같은 게 아니지! 깡패들이나 하는 짓이야.〉


"프레임이 어떤 힘을 가지는지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지표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을 자신과 다르게 볼 때 느끼는 당혹감이다. 그래서 다른 민족이 자신들을 '독일 돼지들'로 볼 때 느끼는 깊은 분노는 유대인 섬멸이라는 끔찍한 범죄가 군인들의 생활 세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니까 유대인 섬멸은 적어도 그들에게 문화 민족이라는 자화상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게 만드는 위치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대화는 유대인 섬멸이 어떤 한계를 넘어선 짓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사회주의 윤리는 많은 군인들에게 너무도 지당한 신념을 부여했다. 유대인이 객관적으로 문제이며 이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신념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배치하는 프레임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군인들은 대개의 경우 정말로 집단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한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다."(192-3)


〈로트키르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유대인들이 그래도 몇 사람은 빠져나와서 늘 떠들고 다니겠지요. ······언젠가 보복을 당할지도 몰라요. 유대인들이 권력을 잡아 보복을 한다면 끔찍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유대인이 권력에 접근하게 할지가 문제이지요. 왜냐하면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 등 외국의 대다수 국민들도 유대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죠. 그들은 악마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우리를 이기기 위해서요. 우리가 당시 볼셰비키와 계약을 맺었던 것과 다르지 않지요. 한동안 그랬잖아요. 그들도 이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계에서 대세가 어느 방향으로 흐를 것인가,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이지요.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해요. 그리고 그들을 또다시 자극할 일은 모두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에게 보여 줘야 하죠. 이봐, 우리는 이성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 참여하기 원한다고.〉


"반유대주의 정책이 지닌 의의를 분명히 인정하는 사람이 그것의 실행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다. 또한 그 실행 방식이 어마어마한 분노를 불러일으킨 실수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계의 미래를 책임지는 국가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달리 말하면, 반유대주의 정책 실행 방식이 부적합하다고 느껴도 로트키르히의 논리가 뿌리내린 인종주의적 세계관이라는 프레임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니고, 독일이 국제 정치에서 예나 지금이나 동등한 자격으로 신뢰받을 수 있다는 자화상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오만하거나 순진하거나 그저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지만 이는 당대의 프레임을 이루는 것이며, 로트키르히 같은 당대의 사람들은 이 프레임 안에 자신의 행동을 배치한다. 종전 후 독일 사회의 1970년대까지도 그들은 자신이 저지르거나 묵인한 일이 틀렸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프레임에 기인하는 것이다."(205-6)


〈특임대의 행동도 모두 역시 특이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에 대해 아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작전이 끝나면 자신도 같은 인종인 수천 명과 똑같은 운명에 처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열심히 일했고, 나는 이것이 늘 놀라웠다. 그들은 희생자들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그들에게 결코 누설하지 않았으며, 희생자들이 옷을 벗을 때 아주 자상하게 거들어 주었고, 반항하는 자에게는 폭력을 사용했다. 또 불안에 떠는 사람을 인도해 가거나 처형 때 옆에서 붙드는 일도 했다. 그들은 희생자들을 잘 인도해서 총을 들고 기다리는 친위대 부사관을 못 보도록 하고 이 친위대원이 희생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목덜미에 총을 댈 수 있도록 했다. 가스실로 데려갈 수 없는 병들고 허약한 자들까지도 유혹해서 데려갔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했다. 마치 자신이 가해자에 속한다는 듯이.〉


"'희생자에게 책임 돌리기'가 잘 작동할 때는, 희생자가 처한 여건을 염두에 두지 않고 희생자의 인성이 바로 그 행동을 야기했다고 보게 된다. 특히 열등시되거나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오만 가지 편견들에 이런 메커니즘이 나타난다." "이는 마치 실험용 동물을 가지고 실험할 때 그 실험 조건은 언급하지 않고 그 동물의 태도만 서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희생자의 행동을 이야기할 때 가해자 자신이 창출한 조건들을 '배제'할 뿐 아니라 애초부터 인식조차 하지 않는 고찰 방식을 갖게 하는 것 또한 저 근본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에서 '유대인'은 화자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영역에 속한다. 희생자가 죽어 간 실험 조건들을 자신이 만들었기에 가장 명료하게 알고 있었을 루돌프 회스조차 자서전에서 이런 관점을 취한다. 예를 들어 이른바 '특임대' 구성원들, 즉 희생자들을 가스실로 데리고 가고 그들이 살해당한 뒤 다시 끌어내는 수인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회스는 이런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213-4)


"국가사회주의에서 〈점잖음〉의 윤리가 생기는 동기는 특히 개인적으로 치부하지 않는다거나 살인, 강간, 약탈 등의 각종 범죄들을 저질러도 거기에서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드높은 이상을 위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잖음의 도덕 덕분에, 서양의 기독교 윤리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으로 극악한 일들까지 정당한 일로, 나아가 불가결한 일로 여기면서 자신의 도덕적 자아상에 통합시킬 수 있었다. 또한 살인까지 저지르며 그 〈추잡한 일〉을 실행하면서 고뇌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국가사회주의 도덕 덕분에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윤리적으로 악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었다. 힘러 같은 유대인 섬멸 이론가들, 루돌프 회스 같은 실제 수행자들, 그리고 또 다른 무수한 사람들은 인간을 섬멸하는 일이 자기 '인간성'에 반하는 불쾌한 업무지만, 바로 그러한 감정을 이겨 내고 살인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그 가해자의 탁월한 인격을 보여 준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하곤 했다."(233-4)


"도청 기록은 일반적으로 나치 정권 지도급 인사 개개인이 민족 동지들로부터 각각 어느 정도 주목을 받았는지 보여 준다. 이런 대화를 훑어볼 때 두드러지는 부분은 총통 신앙에 대한 언급이다." "총통 신앙은 계급과 직위를 망라하여 철두철미한 확신에 가까웠다. 이와 관련된 많은 발언은 마치 화자가 히틀러와 개인적 관계가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대중 스타가 닿을 수 없을 만큼 저 멀리 있고 남다른 특징을 지니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친밀하고 가까운 느낌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프로파간다에서 철저한 계산을 통해 총통을 디자인하고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은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모든 자기 연출과 마찬가지로 실상 매우 현대적인 특징을 지닌다. 처칠이 히틀러처럼 연서를 수천 통 받는다거나 괴링처럼 딸이 태어났을 때 전보를 10만 통 이상 받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우리라. 제3제국의 지도급 인사들은, 아니 적어도 이 두 인물은 대중 매체의 전문적 연출로 나타나는 대중문화 현상을 이미 보여준다."(318-20)


〈볼게초겐: 아, 우리가 진다면! ······ 저는 절대 전쟁에서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러시아에서는 상황이 안 좋지만요. 아돌프는 결코 포기하지 않아요! 그에게 최후의 1인이 남아 있는 한,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다면 어떻게 될지 그는 알거든요! 그는 마침내 가스를 쓸 거예요. 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에게는 상관없지요.〉


"이런 류의 발언은 총통 신앙이 지닌 두 가지 기능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한편으로는 자기 운명의 희비가 그에게 위임된다. 총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승리를 위해 충분한 수단과 냉혹함을 가지고 있다.(〈그는 알거든요!〉) 좀 더 흥미로운 다른 측면은, 전능한 총통이라는 이미지가 의심을 물리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볼게초겐 하사는 전쟁에서 정말 승리할 것이라는 데 의심을 품고 있다.(〈러시아에서는 상황이 안 좋지만요.)〉 하지만 총통의 이미지를 상징처럼 불러들임으로써 의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 "총통 신앙을 간직하는 것은 인지 부조화를 줄이는 수단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이런 신앙에 대해 점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미래의 전망이 의심스러울수록, 총통 신앙은 더 굳건해져야 한다. 총통의 능력과 힘을 의심한다면 앞서 투자한 이런 감정들까지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총통의 운명은 곧 독일 국민의 운명이다."(325-6)


"군인의 덕목은 특히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 군인들이 내면의 신념으로 〈최후까지〉 싸우게 만들었다. 〈마지막 총알까지〉 싸우는 것이 군인의 모범적 행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어 가면서, 정치 지도부와 군 수뇌부는 〈최후까지〉 싸울 것을 더욱 철저하게 요구했다. 그리하여 전쟁 말기가 되면 이처럼 끝까지 싸우는 것이야말로 국방군의 상징이 되었다. 1941~1942년 모스크바 근교에서의 동절기 위기에는, 전술적으로 전투가 결판날 때까지 싸우라는 요구가 마침내 '열광적으로' 싸우다 죽으라는 요구로 변하기 시작했다." "장군들은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 부하들이 전장에서 죽는 것이 어떠한 군사적 가치도 가져올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고집스럽게 현지 사수 명령을 고수했고 이를 따르지 않는 부대 지휘관들을 교체해 버렸다." "히틀러는 병사들의 희생이 고귀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으며 그것이 국가 통합의 대전제라고 보았다."(360-2)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운다는 토포스는 해군에서는 매우 특이하게 나타났다. 1918년의 수병 반란(Matrosenrevolte)이라는 오점이 있는 해군 지휘부로서는 2차 세계대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런 잘못을 갚는 일이었다. 해군 참모총장 에리히 레더는 1939년 9월 3일 이미 절망적 열세에 처한 해군은 〈명예롭게 죽는 법을 안다〉는 사실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소망과 현실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묻게 된다." "강경한 말은 말에 그쳤다. 자기희생은 단지 소규모 전투 부대에만 요구되었다. 이런 소규모 전투 부대에는 임기응변으로 급작스럽게 만들어 기술적으로 무르익지 않은 무기들을 주었다. 인간 어뢰, 폭탄선, 1945년부터는 2인승 잠수함까지 있었다. 인간 어뢰를 조종하는 병사들의 손실은 어마어마했으므로 수지 타산이 전혀 맞지 않았다. 젊은 병사들의 희생정신은 일본 대사 오시마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그는 이런 태도를 가미카제 조종사 정신에 견주었다."(379-82)


"독일군 병사들이 무엇보다 중시하는 것은 자신의 임무가 무엇이든 제대로 완수해 내는 것이었다. 민간인일 때 훌륭한 회계사, 농부, 목수였던 것처럼, 잠수함 기능사로서도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공병으로서도 잘 싸우고자 했다. 물론 열악한 노동 조건, 잘못된 생산 방식과 노동 과정과 지시 등에 대한, 모든 공장에서 흔한 비판이 군대에도 있었다." "파국적인 전체 상황의 맥락 안에서 유독 자신의 업적을 강조하는 이야기 모델은 군인들의 대화에서 흔히 나타난다. 이는 일상에서 '회사', '연구소', '상관' 등에 대해 나누는 대화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훌륭한 노동'이라는 이상이 행위자의 인식과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러한 '전문성'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스스로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직업 노동과 전쟁 노동이 지니는 구조적 공통점이자 심성적 공통점이다."(401-3)


"우리는 군인들이 가진 프레임이 민간인의 프레임에서 전쟁의 프레임으로 이동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에서 결정적인 요소이며, 이런 요소가 그 어떤 세계관이나 성향, 이데올로기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후자는 기껏해야 군인들이 어떤 것을 예측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여기며 어떤 것을 놀랍거나 화나는 일로 보는가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뿐, 그들이 실제 행동하는 데에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말은 이 군인들이 저지른 일을 볼 때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은 평소 여건에서는 결코 하지 않을 일을 하도록 만드는, 사건 및 행동의 맥락을 형성한다. 이런 맥락 안에서 군인들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유대인을 죽이고 국가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나라를 '열광적으로' 수호한다. 이제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과대평가하는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전쟁을 일으키는 동기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군인들이 왜 사람을 죽이고 전쟁 범죄를 범하는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460)


4 / 국방군의 전쟁은 얼마나 국가사회주의적이었는가?


"전쟁 상황에서 행동의 일반적 특징 중 하나는 적이라고 정의(定義)하는 것이 이 정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적'으로 정의된 사람의 행동은 그가 적이라는 증거로 인식된다. 이런 점은 독일 국방군의 전쟁에서나 다른 전쟁들에서나 차이가 없으며, 국가간 전쟁이나 비대칭전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누가 적이고 누가 적이 아닌지는 언제나 군인들이 내리는 정의에 달려 있다. 적에 맞서, 적의 세계 지배 야욕과 폭력에 맞서 자위권을 발동했다는 흔해 빠진 논리는 전범 재판이나 인터뷰나 증언들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래야만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폭력이 일어났다면 그런 정당화 자체가 불필요해진다." "역사적·문화적·정치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눈앞의 상황과 거기 있는 사람들에 대해 내리는 정의가 그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프레임을 형성한다. 그다음에는 집단 사고와 폭력의 역학의 작용으로 인해 거의 언제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470-3)


"정의에 의거한 살인─즉, 자기방어로 정의된 살인─이라는 이런 해석은 인종 학살에까지 확장할 수 있다. 적어도 인종 이론 창시자들과 홀로코스트 조직자들에게는 유대인 살해 역시 자기방어로 정의되었다. 또한 그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민족 전체였다. 그들이 살해할 유대인들은 때로는 빨치산, 즉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 비정규 적군으로 간주되었다. 한 독일군 병사가 말했듯, 〈유대인이 있는 곳에 빨치산이 있다.〉 자기방어로 정의된 살인은 문화적·역사적 맥락에도 존재한다. 1990년대 르완다에서 후투족이 투치족을 학살한 것은 어떤 인식 및 해석 방식 때문이었는데, 미국의 역사가이자 인권 운동가 앨리슨 데스 포지스는 이를 〈거울 보고 규탄하기(accusation in a mirror)〉라고 표현했다. 이는 인종 학살의 환상에 빠져 상대편이 자기편의 절멸을 꾀하고 있다고 억측하는 것이다." "살인을 목적으로 한 모든 형태의 공격과 조직적 학살은 필연적인 자기방어 행위로 인식된다."(473-4)


"모든 전쟁에는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전우애이고 집단의 중요성이다. 군인들은 결코 혼자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인들의 사회적 환경은 그들이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며, 어떤 기준들에 의거해 행동하고 그 행동을 평가하는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집단의 모든 구성원은, 그 집단이 자기를 본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본다. 어빙 고프먼이 '낙인'에 대한 저서에서 발견한 것처럼, 이를 통해 집단에 순응해야 할 가장 강력한 동기가 생긴다. 전시의 군인은 극단적 여건 속에서, 자신이 당분간 떠날 수도 없고 언제까지 유지될지도 모르며, 자기 마음대로 조직할 수도 없는 집단의 한 부분인 것이다. 민간인과는 달리, 누구와 함께 지낼지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자기가 속하고 자기가 함께 형성하는 집단을 고를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집단은, 특히 생사가 오가는 전쟁 중에는 규범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481-2)


"독일 국방군이 저지른 폭력이 가령 영국군이나 미군이 저지른 폭력보다 '일반적으로 더 국가사회주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아무리 악의로 바라보아도 군사적 위협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학살한 경우에만 그 폭력이 국가사회주의 특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련 전쟁 포로 학살, 그리고 무엇보다 유대인 학살이 이에 해당한다. (모든 인종 학살에서 그러하듯이) 전쟁은 이를 위해 문명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한 새로운 장을 제공했다." "폭력을 단지 일탈로 정의하기를 그칠 때에야 비로소 우리 사회가 지닌 자기 환상을 벗어나서 우리 사회에 대해, 우리 사회의 작동 방식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생존을 위한 인간 공동체의 사회적 행위 가능성들 중 하나로 이해할 때, 이 생존 공동체가 곧 살인 공동체이기도 함을 알게 된다. 스스로 비폭력적이라는 현대의 믿음은 망상이다. 여러 이유에서 인간은 서로를 죽인다. 그리고 군인은 그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죽인다."(4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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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 - 라이더가 말하는 한국형 플랫폼 노동
박정훈 지음 / 빨간소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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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을 우리말로 옮기면 '정거장'이다. 정거장 경제, 정거장 혁명, 정거장 노동으로 부르면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경제나 노동 앞에 플랫폼을 붙였을까? 지하철 정거장을 우선 떠올려보자. 사람들은 어딘가를 가기 위해 입장료를 내고 정거장에서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린다. 만약 '직업'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정거장이 있다면 어떨까?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일감'이라는 열차를 기다릴 테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거장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린다. 사람들이 마치 구름처럼 모여 있다고 해서 플랫폼 노동을 '클라우드(cloud) 노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이번에 도착한 열차에 모두가 타지 못할 수도 있다. 열차에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 열차를 기다려야 한다. ... 이러한 플랫폼 노동의 과정을 요약하면 '로그인-대기-일감 탑승-수행-대기 또는 로그아웃'이다."(17-8)


# 정규직─1~2년짜리 비정규직─(주 단위로 근무 시간을 조정하는) 극단적 비정규직─(필요할 때만 쓰는) 플랫폼 노동자


"비 오는 날 배달 산업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상여금을 줘서라도 좀 더 많은 이들이 앱에 접속해 일하게 해야 한다. 반대로 봄가을처럼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에는 주문은 적고 일하려는 라이더들은 많다. 쓸데없이 상여금을 많이 줄 필요가 없다. 이렇게 극단적인 임금 유연화가 필요하므로 근로자로 쓸 수가 없다. 게다가 디지털 세계에는 퇴근이 없다. 서버는 잠을 자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로부터 일감과 업무 지시를 받는 노동력도 노동법에서 정한 노동시간의 제한을 받으면 안 된다. 놀고먹는 노동자가 없는 '꿈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탄생한 플랫폼에서 노동자는 반드시 사용자여야 하며, 발전된 기술을 통해서든 자기 착취를 통해서든 끊임없이 감시당해야 한다. 그래서 플랫폼자본주의를 감시자본주의라고 부른다. 플랫폼은 노동법을 절대로 펼칠 수 없도록 노동법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노동법이 펼치는 낡고 구태의연한 모든 시도는 플랫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23)


"플랫폼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철폐함으로써 이 산업이 발생시키는 사회적 문제와 비용에 대한 책임에서도 벗어난다. 그렇다면 플랫폼 기업이 던져버린 책임을 누가 떠맡을까? 오롯이 개인이다." "배달, 청소와 숙박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에 대한 책임도 개인에게 돌아간다. 생산수단을 일하는 사람이 가졌으니 책임도 일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디지털 세계의 플랫폼은 이론상 무한대로 노동력을 소유할 수 있다. 생산수단을 버리는 대신 데이터를 소유함으로써 얻은 성과다. 상상해보라. 중국의 플랫폼 기업이라면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는 순간 억 단위의 플랫폼 노동력에 대한 데이터를 소유할 수 있다. 근로자로 고용할 경우 상상하기 힘든 숫자다. 이는 오래된 자본의 꿈인 무한 축적을 가능케 한다. 심지어 노동력 관리와 책임의 위험에서도 해방한다. 진정한 공유경제라면 책임과 이윤도 공유하겠지만, 그런 자선 사업을 누가 하겠는가."(25-6)


"플랫폼 자본주의는 태생부터 독점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엄청나게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이 독점이 사회 전체적으로 효율적이라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플랫폼 기업은 네트워트 효과를 바탕으로 카카오뱅크 같은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낸다. 플랫폼의 원래 뜻인 정거장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과 열차를 연결하는 역할만 한다. 하지만 플랫폼 자본은 중개만 하지 않는다. 정거장을 청소하는 사람, 관리하는 역무원, 정거장 주변에 좌판을 깐 장사꾼, 우동과 김밥을 파는 깔끔한 프랜차이즈, 렌터카 회사와 관광 안내소, 택시를 떠올려보라. 카카오 가입자 숫자를 바탕으로 카카오뱅크를 만들고 카카오택시와 카카오카풀까지 뛰어든 것처럼, 플랫폼 자본은 데이터 독점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자본 축적이 아니라 데이터 축적이야말로 플랫폼자본주의의 원리다. 그래서 적자 운영 중인 많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데이터 독점에서 우위를 차지하면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의 투자를 받는다."(32-4)


# 네트워크 효과 : 어떤 상품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도 똑같은 상품을 쓰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


2 배달의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


"배달의민족이 만든 '혁신'이란 무엇일까? 배달의민족은 전국에 있는 수백만 장의 전단을 스마트폰 앱 속에 집어넣었다." "전단 찾느라 거실을 활보하지 않고, 가장 중요하게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이불 속에서 스마트폰으로 배달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편리함을 소비자에게 제공한 것은 배달의민족이 만든 커다란 혁신이다." "음식점에도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준다. 무엇보다도 장사하는 사람의 영원한 숙제인 좋은 장삿목과 비싼 임대료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면 오프라인 가게는 잘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심지어 홀 손님을 아예 받지 않고 배달만 한다면 매우 좁은 곳으로 가도 된다." "오프라인 손님을 버리고 배달만으로 성공하려면, 배달 수요가 충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예측까지 가능해야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손님들이 접속하게 만드는 것, 곧 최강의 독점적 플랫폼이 탄생해야 한다. 배달의민족은 바로 이것을 해냈다."(58-61)


"손님이 배달의민족에서 스마트폰으로 결제할 때마다 약 3퍼센트의 수수료가 음식점에 부과된다. 요기요도 3퍼센트를 부과한다. 배달의민족은 손님이 음식점을 검색하면 가까운 동네 음식점이 노출되게 만들었다. 음식점은 노출 비용을 내야 하는데, 이것을 '깃발'이라고 부른다. 가령 망원동에 사는 손님이 '치킨'을 검색했을 때 내 음식점이 노출되게 하려면 망원동 깃발을 사야 한다. 이 임대료가 월 8만 8천 원이다. 깃발을 하나만 꽂으면 디지털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목인 앱 상단 노출이 잘 안 된다. 하지만 몇 개의 깃발을 꽂아야 자기 음식점이 위에 노출되는지는 사장도 잘 모른다. 그래서 이용자들끼리 깃발 꽂기 전쟁을 하는데, 월 100만 원에서 200만 원을 쓰는 음식점도 있다. 배달의민족이 광고 노출 알고리즘을 알려주지 않는 한 얼마의 광고비를 써야 노출이 되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정보 독점을 바탕으로 한 수수료 정책은 플랫폼의 전형적인 수법이다."(62-3)


"플랫폼 회사는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개인정보를 제공해 앱을 깔 수 있도록 무료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배달 할인 쿠폰'까지 뿌린다. 이 효과를 알 수 있는 사례가 초복, 중복, 말복에 뿌려지는 치킨 할인 쿠폰이다. 이날 밤 동네 치킨집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새벽까지 오토바이의 불빛들이 골목 구석구석을 밝힌다. 소비자 시장을 쿠폰으로 자극해 반대편 시장인 공급 시장을 터뜨리는 것이다. 쿠폰을 통해 소비자가 자주 플랫폼을 사용하다 보면 디지털 단골이 만들어진다. 소비자에게 앱을 여러 개 까는 건 너무나 귀찮은 일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사용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출근길에 익숙한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정류장을 계속해서 이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교차보조금 사용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플랫폼 사업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줄이다. 이 자금은 어디서 왔을까? 배달의민족의 지분 대부분은 국제 투기자본이 갖고 있다."(64-5)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플랫폼의 형태는 양자 또는 3자 중개다. 손님-음식점-라이더(3자)를 연결하거나, 클라이언트와 노동자(양자)를 중개한다. 그런데 한국은 주문 중개 플랫폼과 배달 대행 플랫폼이 나뉘어 있다. 여기에는 동네 배달 대행사가 끼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플랫폼 산업은 2개의 플랫폼(주문 중개, 배달 대행)이 손님-음식점-동네 배달 대행사-라이더, 4자를 중개한다. 여기에는 배달 대행 플랫폼 사와 동네 배달 대행사의 독특한 관계도 있다. 배달 대행 플랫폼 사는 동네 배달 대행사와 '위탁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이 동네 배달 대행사는 라이더와 '알선 계약'을 맺는다. CU 편의점 알바가 CU 본사의 직원이 아니고 동네 편의점의 직원인 것처럼, 플랫폼 회사는 라이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게다가 CU 편의점 알바가 가맹점의 직원인 것과 달리, 라이더는 배달 대행사의 직원도 되지 못한다. 두 번 멀어지는 셈이다."(74-5)


3 우버이츠는 왜 한국에서 철수했을까


# 배달 산업의 플랫폼 형태

1. 우버이츠형 : 2019년 10월 한국시장에서 철수

2. 배민라이더스(배달의민족), 요기요플러스(요기요)

3. 프랜차이즈형(부릉, 바로고, 생각대로)


"우버이츠는 라이더가 일하고 싶을 때 스마트폰의 앱에 로그인하면, 자동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음식점의 배달 주문을 연결하는 서비스다. 스마트폰으로 온 배달 주문을 수락한 뒤 음식점에서 음식을 받아 손님에게 전달하면 된다. 이때 주문이 들어온 음식점 위치만 알려주고 최종 목적지인 손님의 주소는 알려주지 않는다. 라이더가 음식점에 도착해야만 손님의 주소를 알 수 있다. 주거 밀집 지역이고 상점이 별로 없어 다음 주문을 받기 힘든 소위 '똥콜'을 거절하고, 상점이 많아 다음 콜이 뜰 확률이 높은 소위 '꿀콜'만 잡아서 가는 걸 막기 위해서다. 정보를 통제하고 선택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플랫폼의 또다른 특징이다. 결제는 모두 앱에서 미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라이더가 카드 결제기를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스마트폰, 오토바이가 있다면 오토바이로, 자전거가 있다면 자전거로, 오토바이도 자전거도 없다면 도보로 할 수 있다."(89-90)


"수많은 정보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힘과 권력이다. 당연히 기존의 대기업들도 이런 힘을 사용해왔다. '영업 비밀'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산재를 은폐하고, 경영상의 위기를 과장해서 정리해고를 하거나 임금 상승을 억제하기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플랫폼은 정보의 배타적 독점 자체가 기업의 수익 모델이자 가치라는 점이다. 이러한 정보 비대칭이 만드는 효과는 역설적이게도 '불신'이다. 라이더는 정보가 없기 때문에 두 가지 선택 상황에 놓인다. 자기 자신을 불신하거나 플랫폼을 불신한다." "더욱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본인의 판단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라이더는 자연스럽게 플랫폼이 좋아할 만한 태도로 열심히 일하거나, 플랫폼이 불공정하다는 영원히 확인할 수 없는 불신을 안고 떠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플랫폼 노동의 화두다. 나는 이것을 노동과정의 불확실성에서 나오는 '비통제의 통제', '마음에 대한 지휘'라고 부른다."(96-7)


"그래도 우버이츠는 전투콜이 아니다. 알고리즘이 강제로 배차한 배달 주문을 라이더가 수락하거나 거절하면 된다. 게다가 한 건씩만 배달하면 된다. 따라서 여러 건의 배달을 묶기 위해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전투콜을 잡기 위해 1초 단위의 싸움을 할 필요도, 좀 더 빠르게 콜을 잡기 위해 성능 좋은 스마트폰을 살 필요도, 주행 중에 스마트폰을 바라볼 필요도 없다. 안전하다. 그런데 배달을 한 개씩만 하면 돈이 안 된다. 음식 픽업하는 데 10분, 배달하는 데 10분, 다음 콜을 기다리는 데 10분이 걸린다면 한 시간에 2~3개 정도 배달이 한계다. 이러면 최저임금도 안 나온다. 우버이츠는 이 문제를 높은 배달 단가로 해결한다." "우버이츠는 초기에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무료 배송 마케팅을 했다. 그러다 우버이츠가 손님에게 배달료를 받자 콜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소비자는 쿠폰 할인과 저렴한 배달료만 부담하면 되는 다른 배달 플랫폼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이다."(98-9)


"(우버이츠 시스템을 모방한) 쿠팡이츠는 우버이츠보다 긴 계약서를 갖고 있었다. 쿠팡이츠의 계약서는 플랫폼 노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에 꼼꼼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4조 회사 및 배송사업자 간 관계 1항 회사와 배송사업자 또는 일체의 제3의 제공자 사이에는 ①자회사 또는 계열사 ②파트너십, 고용 또는 대리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회사와 라이더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을 명확히 써놓았다." "〈제8조 배송사업자에 대한 평가 1항 물품 수령인은 쿠팡이츠 사이트 등에 배송사업자의 배송 서비스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2항 배송사업자에 대한 배송 서비스 평가 결과가 회사가 정한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회사는 배송사업자의 회사 배송 프로그램(앱)의 접속 권한을 상실·제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물품 수령인은 손님을 말한다. 손님의 별점 평가를 통해서 앱 접속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약관에 집어넣었다. 회사는 그 기준을 구체적으로 공지하지 않는다."(101-4)


"〈제14조 면책 2항 배송사업자가 배송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경우 배송사업자의 책임과 비용으로 해결하여야 하며, 회사는 이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부담하지 않습니다.〉 플랫폼의 욕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조항이다. 배송사업자이기 때문에 사고 나면 오롯이 사장인 네가 책임지라는 뜻이다. 과연 라이더가 사장일까?" "계약 내용만 보면 책임은 회피하고 경제적으로는 종속시키는 독소 조항이 가득하다. 계약서엔 회사의 책임과 의무에 관한 사항이 거의 없다. 서로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진행되는,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서명해야 하는 계약은 결코 자유로운 계약이 아니다. 사용자와 노동자를 규정하는 법률이 자유로운 계약을 기반으로 한 민법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노동자를 보호하고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법인 이유를 쿠팡이츠 계약서가 잘 보여준다. 플랫폼이라는 간판을 붙인다고 해서, 근로계약서가 아니라 '약관'을 쓴다고 해서 이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107-9)


4 개인사업자인가, 근로자인가


"(요기요플러스의) '배송 업무 위탁 계약서'라는 제목의 계약서 '제6조 을의 지위'에는 의미심장한 문장이 나온다. 〈'을'은 '갑'의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의 지위로서 '갑'에게 종속되지 아니하며, 위탁 계약 업무는 '을'의 재량과 책임하에 수행하되, 본 계약에서 약정한 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의무를 부담한다.〉" "'제4조 위탁 계약의 이행 방법'에는 음식의 배송 순서, 배송 시간, 배송을 위한 고객과의 연락 등 배송 업무 수행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을의 재량과 책임으로 결정한다고 적혀 있다. 이 계약서만 보면 배송 업무 일체를 을인 라이더에게 맡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기요플러스는 용산에 사람이 부족하면 성북에서 일하던 라이더를 용산으로 이동시켰다. 식사 시간에는 아예 조를 편성했다. 1시와 2시는 철수와 영희, 2시와 3시는 재덕과 정훈, 3시와 4시는 윤정과 미정 등으로 조를 짜서 공지했다. 당연히 근태 관리와 강제 배차가 이루어졌다. 라이더에게 배송 업무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한은 없었다."(127-9)


"배민라이더스는 2019년 여름, 라이더를 모집하기 위해 입사 4주 안에 200건 이상의 배달을 하면 100만 원의 보너스를, 그다음 4주 안에 또 200건 이상을 하면 100만 원의 보너스를 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8주 일하면 총 200만 원의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고가 나면 보너스를 못 받는다. 라이더의 잘잘못은 따지지 않는다. 라이더의 잘못이 없어도 사고가 나면 무조건 프로모션 조건이 사라진다. 프로모션 때문에 무리하게 운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것은 지각, 무단결근, 무단 조퇴 등에 대해 단 1회라도 근무 건당 300원씩 차감한다는 페널티 제도였다." "이 공지는 카톡으로 하는 임의 조치가 아니라 서면 계약 조항이었다. 플랫폼 기업이 그렇게 강조한 '우리 라이더들은 근로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예요'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계약이다."(139-41)


# 2019년 11월 6일 라이더유니온 기자회견 이후 페널티 제도 폐지


"배민라이더스는 안정된 배달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전업으로 일하는 '라이더스'라는 이름의 라이더를 모집했고, 순간순간 급증하는 배달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부업으로 일하는 '배민커넥터'라는 이름의 라이더를 따로 모집했다." "2019년 7월, 배민커넥터를 모집하면서 회사는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배민커넥터는 '일반인'이므로 전업 라이더인 '라이더스'와 같은 조건에서 전투콜을 수행하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배민커넥터로 새로 들어온 라이더에게 15초 먼저 배달 콜을 볼 수 있도록 조치했다. 라이더스는 15초 동안 배민커넥터가 가져가고 남은 배달을 처리하는 신세가 됐다." "(한동안 이런 사정을 모르던) 라이더스들은 콜이 급감한 이유를 이상하게 여길 따름이었다. 이는 라이더가 앱의 알고리즘에 따라 디지털과 1:1로 관계를 맺고 일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사람과 달리 앱은 일그러진 표정, 격앙된 어조, 적절하지 않은 단어와 욕설, 말실수 등을 하지 않는다. 애플리케이션에는 표정이 없다."(145-7)


"중요한 것은 (라이더의 근무 환경을 실험해서 얻은) 데이터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속도와 숫자가 아니라, 데이터화된 속도와 숫자라는 점이다. 가령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내비게이션에 나온 도착 예정 시간이 15분인 곳을 배민 라이더가 신호 위반과 과속, 자기만이 아는 지름길과 골목길을 통해서 7분 30초 만에 도달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실제로는 20명쯤 필요한 일을, 초인적인 노동을 하는 배민 라이더 10명이면 충분하다는 데이터로 뽑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데이터화·알고리즘화된 노동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중립적이라는 환상을 만든다." "회사 측도 이게 정말로 괜찮은 시스템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돌려봐야 안다. 많이 돌려보고 데이터를 축적하면 할수록 서비스는 나아진다. 게다가 배달이 덜 발전한 나라로의 진출을 노린다면, 배달에 최적화된 한국에서의 끊임없는 실험은 합리적인 경영 전략이다. 그래서 배민라이더스 라이더들이 자신을 '실험용 쥐'라고 부르는 것이다."(148-9)


"라이더들 간의 갈등이 단순히 배달료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배달료뿐 아니라 오토바이 임대료, 배달 개수 등이 기존 라이더, 배민커넥터, 신규 라이더 사이에 모두 달랐다. 그 결과 라이더들 사이에 위화감이 커지고 갈등이 생겼다. 단결은커녕 원수가 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보인다. 배민라이더스는 이 갈등을 잘 활용했다. 배민커넥터에 대한 우대 정책으로 라이더스의 불만이 고조되자 배민커넥터에게 20시간 근무 제한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라이더유니온이 매일 바뀌는 프로모션에 문제를 제기하자 회사는 프로모션을 없애버렸다. 일부 라이더들은 라이더유니온이 설쳐서 근무 조건이 불리하게 바뀌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라이더들은 출근하는 공장도, 함께 밥을 먹는 식당도 없기 때문에 노조가 이에 관해 해명하는 전단 한 장 뿌릴 수 없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갈등을 악용해 노조를 탄압했던 대기업들이 한 수 배워야 할 판이다."(150-1)


5 부릉은 무엇으로 사는가


"2019년 3월 28일 배달 대행 플랫폼 부릉은 라이더 4명의 애플리케이션 접속을 일방적으로 차단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계약이 되어 있는 것도 없는데 그러면 저희가 계속 이거를 책임져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본사가 거짓말한 건 아니다. 플랫폼 사는 동네 배달 대행사와 위탁 계약을 맺고, 동네 배달 대행사는 다시 라이더와 계약을 맺는다. 따라서 라이더와 플랫폼 회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본사와 전 지점장이 갈등을 빚은 원인은 배달료였다. 전 지점장 김 씨는 1.5킬로미터 이내의 배달 한 건당 3,700원의 높은 배달료를 라이더에게 지급했다. 부릉 본사는 이것이 시장 가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500원을 인하하라고 요구했다. 김 씨는 거부했다. 지점장이 갑자기 교체되고 배달 단가가 일방적으로 내려갔다." "부릉 본사가 배달 단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배달 단가는 프로그램 사가 정하지만, 라이더에 대한 책임은 없다는 게 부릉의 입장이다."(163-5)


"배달 대행 플랫폼은 백가쟁명이다. 춘추전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달 대행 프로그램 사는 동네 배달 대행사와 음식점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배달 한 건당 프로그램 사용료를 가져감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따라서 지역 배달 대행사와 음식점을 늘리는 게 핵심이며, 이를 통해 디지털 지대를 가져가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배달 대행 프로그램 사들이 프랜차이즈화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전략도 각양각색이다. 이 책에서는 부릉처럼 배달료, 음식점 영업 등에 상당히 개입하는 배달 대행 플랫폼을 '관리형 배달 대행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위탁 계약한 동네 배달 대행사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사용료만 받는 플랫폼을 '디지털 임대형 배달 대행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건물의 출입 통제부터 세입자까지 직접 관리하는 건물주고, 후자는 임대만 주고 세입자는 신경 안 쓰는 건물주라고 보면 된다. 전자에 비교해 후자가 영세한 편이다."(171)


"동네 배달 대행사의 가장 큰 특징은 '초기 자본주의'와 닮았다는 점이다. 배달 세계에서 만들어진 규칙은 있지만, 우리 사회가 만든 근로자 보호, 사고 예방과 치료, 보호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네 배달 대행사에서 일을 시작할 때 대부분은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흔히 라이더를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라이더가 세무서에 사업자 등록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배달 일 한다고 사업자를 내는 라이더는 없다. 세무적으로 따지면 인적용업사업소득자다. 그럼 실제로는 어떻게 일할까? 그냥 일한다. 심지어 면허를 확인하지 않는 예도 있다. 무보험 오토바이를 태우는 지역 회사도 있다. 그야말로 무법천지다. 계약서도 안 쓰는데 산재보험에 가입할 리 만무하다. 반면 규칙은 빡빡하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 오전 11시부터 오후 11시, 주말 필수 근무 등 출퇴근에 대한 지휘·감독이 엄격하다. 휴무도 마음대로 못 쓴다."(175-6)


"2009년 11월 〈OBS〉에서 동네 배달 대행업체 약 30곳을 조사했다. 이 중 4곳은 산재보험 가입 자체가 불가하다는 답변을 당당히 했고, 25곳은 모두 원하면 가입이라고 안내했다. 단 한 개 업체만이 법이 규정한 대로 의무 가입이라고 답했다. 의무 가입이라고 답한 곳도 라이더로부터 산재보험료로 매일 1,200원을 걷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인 라이더가 한 달에 부담해야 할 산재보험료는 15,630원이다(2019년 기준, 2020년은 14,030원이다). 나머지 절반의 산재보험료 15,630원을 업주가 부담해야 하지만, 라이더에게 전가했다. 즉 30곳 모두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라이더가 원하면 가입시켜준다는 업체들 가운데 산재보험료 명목으로 매일 1,600원을 걷는 업체가 있는가 하면, 월 4만 원, 심지어 매일 3,000원을 걷는 업체도 있었다. 산재보험료를 종사자와 업주가 5:5로 분담하는 경우는 23퍼센트에 불과했다. 무법천지라고 할 만하다."(181-2)


6 플랫폼 산업의 진짜 '혁신'을 위한 조건


"근로기준법은 그 이하로는 근무 조건을 후퇴시키지 말라는 최후의 보루이다. 문제는 이 보호에 울타리가 있다는 점이다. 누구는 들어오고 누구는 들어오지 못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이 '종속성'이다. 근로자에게는 반드시 자신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 사장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최근에 근로자 개념을 '노무를 제공하는 자'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장이 여러 명이거나 사장을 찾기 힘든 플랫폼 노동자에게 어울리는 대안이다. '경제적 종속성' 개념을 대입해서, 비록 그 회사에 출근하지 않더라도 그 기업을 위해 일하고 이를 통해 소득을 얻는다면 근로자로 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본사로부터 물건을 납품받고, 가격, 영업시간, 마케팅 등의 관리를 받는 편의점 사장도 근로자로 해석할 수 있다. 근로자 개념의 확대를 통해 기존 근로기준법으로 플랫폼 노동자뿐 아니라 프랜차이즈의 지휘·감독을 받는 위장된 자영업자를 보호할 수 있다."(207-8)


"(이런 조치 후에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 정말로 개인사업자로 일하기를 원하는 라이더들을 위해서는 공정거래법의 적극적 해석과 적용이 필요하다. 여기서 핵심은 플랫폼 노동자가 불공정 거래 행위에 대해 신고하고 대처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기반이 최소한 현재의 노동청과 노동위원회 근로감독관 제도만큼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불공정 거래 행위로 인해 플랫폼 노동자의 손해를 입증할 수 있는 징벌적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플랫폼 노동자가 소를 제기하고 대응하기란 매우 힘들다. 새로운 계약에 동의하지 않으면 앱 접속 자체가 막히기 때문이다. 자료를 확보하기도 힘들다. 앱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는데 접속을 막으면 어떻게 증거 자료를 확보하겠는가? 따라서 증거를 중시하는 송사에 휘말리면 정보가 없는 플랫폼 노동자가 일단 불리하다. 플랫폼이 가진 정보와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보장되어야 한다."(209-10)


"이런 법제도들의 활용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조합 할 권리다. 다종다양한 산업 형태 때문에 근로기준법의 일률적 적용이 어렵다는 고민이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권리를 박탈하는 논의로 흐른다면 곤란하다." "이 문제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ILO(국제노동기구) 핵심 협약을 비준하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조합 결성권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다. 국가가 전교조를 하루아침에 법외노조라고 통보하듯이 법적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 또 종속성이 약한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노조 할 권리는 노동청의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기존 근로기준법이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낡았다고 하는데, 낡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노조법이다. 일단 전 세계의 상식인 ILO 핵심 협약 비준으로 누구나 노조할 수 있게 만들자. 핵심 협약을 비준하기 싫다면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면 된다."(212)


"강력한 정보 독점과 속도도 문제다. 과거의 기업이라면,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중간 관리자가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만나 술도 마시고 회유도 하고 보너스도 돌릴 것이다. 하지만 플랫폼 기업은 수만 명이든 수백만 명이든 간단한 앱 공지와 문자 하나로 모든 노동자에게 즉각 선전할 수 있다. 배민라이더스는 배민커넥터의 노동시간을 20시간으로, 라이더스의 노동시간을 60시간으로 줄이는 발표를 하면서 민주노총과 협의했다는 문장을 붙여 노동자들 간 불화를 조장했다. 또한 매일 바뀌는 수수료에 대한 라이더유니온의 문제 제기에 프로모션 폐지로 맞섰다. 이렇게 되면 라이더들은 자신들의 불리한 처우가 압도적인 힘을 가진 플랫폼이 아니라, 거기에 힘도 없이 맞선 노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노조는 이에 대응할 수단이 많지 않다. 동료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보의 비대칭과 소통 창구의 독점은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무력화한다."(214-5)


"식상하지만 똑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거리에 돈을 뿌리고 먼저 가져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배달 산업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길거리가 아니라 사람과 안전, 시스템에 돈을 뿌려야 한다. 이 돈을 함께 지급하는 것이야말로 플랫폼 기업이 만들어 낸 난폭 운전과 수많은 사고에 대한 해결책이다. 사실은 이 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탄생한 것이 플랫폼 산업이다. 플랫폼 산업은 고정급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 또한 소비자의 수요와 라이더의 공급, 계절적·문화적 요인에 따라 배달료는 물론이거니와 근무 방법과 시간 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노동력 데이터를 갖고 있다. 이것들이 플랫폼의 존재 이유다. 문제는 이러한 데이터에 기반을 둔 명령이 듣고 잊어버릴 수 있는 욕설이 아니라는 점이다. 빅데이터를 통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AI가 정한 근무 조건은 신의 심판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의 이름을 빌려 사람을 착취하고 탄압하는 인간이다."(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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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3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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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공화국의 해체 과정


B. 권력공백의 단계 : 파펜-슐라이허 시기


제7장 "신국가"


"브뤼닝의 실각과 함께 권력은 힌덴부르크를 둘러싼 소규모 집단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독일에서 의회민주주의의 종식을 의미했다. 1930년 이후 대통령정부라는 개념은 헌법적 현실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브뤼닝은─우리가 그의 정부에 건 기대들을 어떻게 평가한다 하더라도─임기가 끝날 때까지 그의 지배의 의회민주주의적 작업방식을 확고히 지켰다. 브뤼닝의 후임자인 파펜이 당시 자신의 정부가 권위적인 유형의 브뤼닝 정부를 단순히 지속하고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되돌아보면 파펜 스스로가 그의 정부와 브뤼닝 정부 간의 〈결정적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펜의 반응은 새 선거를 통하여 마지막 남은 잠재적인 민주적 다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선거가 얼마나 과격한 결과를 낳을지는, 당시의 정치적 사정을 보든 주 의회 선거의 경과를 보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15)


"파펜 정부의 형성과 형태는 독일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거의 철저했다. 거기에는 중간계급과 노동자층 대표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공화국으로부터 빌헬름 제국 시기의 귀족-관료적 정권으로 그리고 경제적 권력 집단들로의 후퇴를 입증했다. 좌파들의 신문은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귀족내각〉, 〈반동적 집중의 내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던 반면에, 중간정당들의 반응 또한 결코 미약하지 않았다. 국가당은 헌법정신에 거슬러 구성되었고, 극우정당들이 공식적으로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면서, 극우정당들의 지시만을 수행하는 내각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기독교 사회당 역시 분명히 거리를 두었고 적어도 나치당에게 공식적으로 책임을 함께 지도록 요구했다. 독일민족인민당 역시 그들이 새 제국정부의 형성과 목표 설정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것에 대해 아무런 연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고집했다."(23-4)


"슐라이허가 기존 권력구조의 틀 내에서 나치당을 길들이기 위해 노력했던 반면에, 파펜 주위의 사람들은 근본적인 개혁, 곧 권위주의적 국가의 창출을 위해 그러한 조치들을 이용하고자 애썼다." "그 핵심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칼 슈미트의 비판에 의거하여 〈입헌적인 [즉, 영향력이 없을 정도로까지 제한된] 의회주의〉를 통해 국가질서의 정치적·헌법적 기본 특징들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중심의 권위주의적〉 국가에 대한 요구는 헌법 제54조에 대한 공격을 의미했는데, 이에 따르면 정부는 제국의회의 신임을 필요로 했고 불신임 표결의 경우에 물러나야 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군주적 반(半)절대주의로의 후퇴를 의미했다. 즉, 의회의 통제에 아주 제한적으로만 노출된 국가수반은 내각을 자신의 〈초당적인〉 통찰력으로 선택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정부를 모든 당파적 이해관계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들어야 했다."(26-9)


"〈신국가〉의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권위관계의 선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군주제적 이데올로기에 의식적으로 접목하여 나치의 지도자 개념에 맞서 〈혁명적-보수적〉 지배 개념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국가의 〈지배자〉로서의 힌덴부르크가 부분적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히틀러보다 우위에 놓여졌다. 그 때문에 포괄적인 헌법 개혁을 통해서 〈정당들과 사회세력들의 놀이 공으로서 이리저리 차이지 않고 그 위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는 강력하고 초당적인 국가권력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질서는 〈지배의 헌법적 생존조건들〉로부터가 아니라 정신적-도덕적 조건들로부터 그 정당성의 기반을 얻었다. 그것은 〈결코 협상 대상이 아니며〉 제한되어서는 안 되었고 〈신에 의해서만 책임을 지므로 본질적으로 절대적이었다〉: 〈지도자는 초자연적으로 정당화'되어지는' 반면 (신이 보낸 인물인) 지배자는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37)


제8장 프로이센, 파펜의 쿠데타


"프로이센은 1919년 이래 짧았던 두 번의 예외(슈테거발트 내각과 마르크스 내각)를 제외하면 사민당 주도의 바이마르 연정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전보다 더 정치적 타협 준비가 되어 있는 사민당이 〈부르주아 블록〉 내에 계속 머물렀고, 중앙당이 철저한 민주정치를 더욱 결연하게 주장했던 바로 이 순간의 프로이센 정치 상황은 제국의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전반적인 권력 이동이 바이마르 질서의 가장 중요한 이 토대(사민당 주도의 연정구조)를 고립시켰다." "브뤼닝의 실각에 따른 여러 사건들은 중요한 부분 문제인 프로이센 문제를 구체적인 정치적 결전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극우적 파트너와 독일민족인민당의 영향을 받고 있는 파펜 내각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장 거대한 지방정부(프로이센)를 신속히 제압하여 자신의 권위주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82-3)


"프로이센 내각은 파펜에게 내정 간섭의 법률적 계기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파펜의 간섭의 근거는 무엇보다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프로이센 쿠데타를 헌법적으로 정당화시키기 위한 주요 논거는 이른바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이었다. 우익이 활용했던 그 오래된 전술, 즉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와 사민당의 〈마르크스주의〉를─실제 의미와는 상관없이─동일시하여 사민당을 포함한 모든 연정을 〈볼셰비즘적〉이라고 비난하는 전술은 파펜과 힌덴부르크의 마지막 의구심을 잠식시킴으로써 새로운 승리를 거두었다. 관건은 극단적으로 분열된 의회가 정상적인 후속 정부를 구성하지 못할 경우 정부 운영의 문제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들어왔다는 주장이, 의회 소수파인 〈민족적 야당〉이 폭력을 통해서만 달성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정부 교체의 〈국가 정치적〉 근거를 다시 한 번 더 제공해야 했다."(85-90)


"프로이센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파펜은 평소의 방식대로 대단히 신속하게 진행된 협의를 〈이것은 결국 국가이성의 활동이다〉라는 말로 끝냈다. 이로써 결국 법치국가 사상에 대해 권력국가 사상이 우위에 섰다는 것이 아주 공개적으로 표현되었다. 〈프로이센에 대한 제국의 간섭〉은 결코 은밀한 쿠데타가 아니었다. 이것은 오히려 동원된 제국군대에 의해 지원받았고, 독재의 계관법률가 칼 슈미트에 의해 법정에서 변호되었다. 〈헌법을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거였다." "2개의 바이마르공화국 헌법 규정을 반대하는 데 〈국가이성〉이 동원되었다. 반 년 뒤 파펜은, 슐라이허와 함께 연합하여 행한 쿠데타에서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런 쿠데타의 명수를 만났다. 하지만 히틀러의 부총리로서 파펜은, 히틀러가 자신을 위해 헌법 전체를 폐지하는 데 〈국가이성〉과 〈국가이익〉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지켜보게 될 것이었다."(100-1)


"쿠데타는 진정한 내전상황을 초래했다. 한편에서는 힌덴부르크와 슐라이허에게 충성하는 제국군대가 서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기관으로서 프로이센 경찰과 아울러 바이마르 연정 정당, 제국기치, 그리고 총파업이라는 가장 효과적인 투쟁 수단을 갖고 있는 노조가 서 있었다. 그리고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고 각자 고유한 목표에 기초한 이 전선 사이에는 또한 나치 전투조직과 공산주의 전투조직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경찰지도부, 특히 베를린 경찰지도부가 저항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저항 의지를 원천적으로 억제하는 데 있어서 제국군대에 대한 결코 부당하다고 볼 수 없는 존경심만으로도 충분했다. 지속적인 경제 위기 속에서, 무질서와 혁명적 저항에 대한 혐오가, 관헌국가로부터 전수된 이러한 혐오에 근거한 일련의 금기사항들이 위와 같은 존경심과 더불어 한 역할을 하였다."(113)


"제국기치의 한 회원의 말을 믿는다면, 조직을 강화하고, 모든 반(反)공화주의적 노력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영구적인 공화국 긴급 보호 상황〉 선언에 전력투구할 강한 세력이 제국기치 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장은 대단히 불충분하였다. 그리고 결정권은, 7월 20일 헌법에 근거한 항의로 대항했지만,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지닌 자신들의 직책에 따른 의무인, 구체적인 정치적 책임의식을 지니고서 대항하지 못했던, 너무 조심스런 집행부와 공화주의적 장관들, 정당집행부, 노조집행부에게 있었다." "독일사민당의 최고결정기구는 7월 20일 사건 4일 전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헌법의 법적 기초에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만장일치로〉 내렸다." "합법성 유지가, 권위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헌법 적대세력에 의해 합법성이 일방적으로 이용되는 〈상황에 맞는〉 유사합법성으로 전환되는 곳에서는 그 한계를 갖기 마련이었다."(116-7)


제9장 파펜 내각의 고립


"프로이센에 대한 작전은 파펜 시대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불과 며칠 후, 7월 31일 선거가 반대 진영의 압도적인 다수 득표와 함께 대통령 내각의 자화자찬격 정부 계획에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은 순간 환상은 산산히 깨지고 말았다. 파펜이 제국의회 해산과 선거 일정의 최대한 연기를 통해 자신의 출발을 위해 벌었던 8주의 기간은 이날로 막을 내렸다. 모든 정당이 기대와 우려 속에서 기다렸던 선거 결과는 성공적 작전의 주역들이 희망했던 명예 획득을 저해하였다." "프로이센 작전은 공화국 지지파의 약점을 노출시키면서 동시에 나치당의 권력 장악 기대감을 강화하였고 전체주의 운동권이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결정적 선도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며칠 동안 〈신국가〉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폭력적이고 소란스러운 프로이센 장악은 강화된 국가 권위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그것에 대한 민주적 정당들의 외면을 확고하게 한 동시에 반항적인 나치당에게 그들의 권력 장악 구상을 위한 좋은 사례를 제시하였다."(127-8)


"1932년 7월 31일의 선거는 내정적 정쟁(政爭) 중지와 집회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유혈충돌로 분출된 극도의 긴장과 흥분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전반적으로 선거 결과는 모든 진영에 실망을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에 비해 증가된 투표율에서 나치당은 그들의 제국의회 의석을 충분하게 배가할 수 있었으며 주 의회에서 차지했던 규모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대통령 선거 2차 투표에서 얻었던 득표 이상을 많이 넘어서지는 못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 조건 아래에서 나치가 이룩한 확장의 최종점은 이미 도달했던 것이다. 독일 유권자의 62.8%가 이 시점에조차 나치 지배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던 반면 나치가 도달한 상한선은 37.2%였다. 나치당은 사민당이(독립사민당 없이) 1919년 바이마르 국민의회 선거에서 당시 단독 지배권을 주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때 얻었던 득표율보다 낮은 지지를 얻었다."(137-8)


"한편 부르주아적 중도진영은 사라졌으며 〈민족〉 진영과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공고화 이후 나치당의 더 이상의 팽창이 어려워 보였던 반면에, 그 양 진영 사이에 중앙당은 동요 없이 서 있었다. 이처럼 정당 진영의 경화와 포화상태 속에서 정당의 종식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거나─논의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유리한 타협을 가능하게 하였을 자기 진영의 성장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채 서로 맞섰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무엇보다 대통령 내각의 막대한 패배였다. 그의 유일하고 안전했던 의회 내 기둥이었던 독일민족인민당과 독일인민당은 대폭 약화되어, 정부는 중앙당과 나치당 협력에 의해 문제 없이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런 유리한 과반수는 파펜 정부를 헌법상 정식으로 축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를 막을 수 있는 길로서는 파펜과 히틀러의 협력 아니면 제국의회의 해산, 이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었다."(141-2)


"〈히틀러의 권력 요구를 제어하고〉 그의 대중 운동을 〈긍정적인〉 민족주의 안에서 강력하고 제국군대에 의해 통제되는 대통령 내각으로 이끈다는 오랫동안 추진되어 온 계획은 이제 결정적 단계에 접어들었다." "7월 31일은 새로운 단계를 열었으며 그 결과는 히틀러를 전문가들이 보증하는 정부의 총리로 만드는 것이었다. 슐라이허가 볼 때는 상황이 아직 그런 조치를 허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즉, 제국군대와 국가 기구는 온전해 보였고, 슐라이허와 힌덴부르크의 입지는 신뢰할 만한 제어력과, 대통령 독재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야망에 대한 균형추를 보증하고 있었다.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에는─제 3단계로서─나치당을 분열시키는 대안만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1932년 7월, 8월 슐라이허가 추진한 계획의 전환은 그로 하여금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제국군대의 권력 토대가 충분치 않았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하였다."(144-5)


"8월 30일 파펜, 가일,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 마이스너와 함께 노이데크에서 새롭고 대폭적인 경제 및 제도 계획에 관해 논의했다. 이 기회에 최종적으로 의회해산 명령이 결정되었으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재선거를 수개월 연기하며, 그동안 비상명령을 통한 대규모 제도 개혁을 실시하는 계획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하지만 뢰베 대신에 괴링이 제국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고 사민당이 의장단과 모든 서기직으로부터 배제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신임 의장이자 의회에 적대적인 〈운동〉의 대표인 괴링은 의회와 대통령 내각을 반목시키고, 의도된 의회해산에 대한 항의의 표현으로 이미 대통령 선거를 통해 입증된 제국의회의 다수 확보 능력과 업무능력을 강조함으로써 나치당의 전술적 능력을 과시하였다. 이틀 후 연립내각 협상의 지속을 알리는 중앙당과 나치당 공동성명이 뒤따랐다. 이제 정부는 거의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사방으로부터 동시에 위협받고 있음을 깨달았다."(159-60)


제10장 파펜에서 슐라이허로


"1932년 11월 6일에 선출된 제국의회는 새로운 연립 가능성을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 이제 전체주의적 정당들의 부정적 다수(의석의 50.7%)는 옛 브뤼닝 블록에 대응했다. 이제 사민당에서 인민당까지 〈대연립〉(38.2%)도 하르츠부르크 전선도(42.3%) 정부 구성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 기본적 상황 내부에서 중심축의 이동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이론적으로도 중앙당-바이에른인민당과 나치당 사이의 연립을(48.8%) 불가능하게 했고, 민족인민당은 7월 31일에 잃었던 핵심적 위치를 되찾았다." "부르주아 정당들의 4년에 걸친 감소 또한 이제 멈췄다. 극히 명백히 여기에 책임이 있었던 것은 7월 선거에 비해 낮은 투표율(80.6% : 84.0%)만도 아니었고, 또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투표로부터 추적당한 주민들의 싫증도 아니었다. 정치적 발전의 가능성 있는 전환점은 나치당의 지속적 상승이라는 신화가 일격을 맞았음─히틀러의 전체주의적 지배 요구에 대한 거부─을 알려주었다."(190-2)


선거결과는 나치의 팽창에 맞선 민주적 정당들의 증가된 대항력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미 시작된 나치당의 후퇴 운동은 며칠 후에 작센의 지방자치단체 선거 및 뤼벡의 시장선거에서 계속되었으며, 모든 선거 단위에서 가시적으로 된 충분히 가능성 있는 현상이라는 점은 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대학에서 대학생들의 선거행위에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특히 나치당 내부의 분위기와 고려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식이었다. 히틀러의 완전한 권력 요구는 이제 특히 나치당의 당지도부에서 파괴 현상과 분열 현상을 야기한 심각한 부담에 직면한 것으로 보였다. 이것은 처음에 힌덴부르크와 파펜의, 이어서는 슐라이허의 새로운 그리고 최종적인 길들이기 시도를 야기한 상황이었다. 너무도 명백히 나치당의 팽창 능력에 한계를 보여준 마지막 선거의 결과는 길들이기 구상의 반대자들을 나치의 권력의식 및 그 조직적인 토대에 대한 새로운 과소평가로 오도했다."(209)


"(힌덴부르크는 히틀러 및 카스와의 협상이 실패한 뒤) 먼저 파펜에게 의사를 타진했다. 사실 파펜은 히틀러의 비타협적인 태도가─8월 13일 이상으로─진정한 국가비상사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관점을 명확히 제시했다. 제국의회에 반대하고 거의 무한정 확장된 헌법 제48조로써만 통치하던 힌덴부르크는 이제 그 이상의 조치를 취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이 그러한 상황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까지 정부를 유지시키고 그의 총리직 아래서 모든 저항에 맞서 필요할 경우 정부의 계획을 폭력으로 관철시키는 것을 지지했다. 반항적인 제국의회의 배제, 모든 정당들 및 반(半)정치적인 조직들에 대해 제국군대와 경찰을 통한 억압 그리고 국민투표나 〈새로 소집된 국민의회〉를 통하여 허용된 헌법 개혁 등은 후겐베르크 측에 의해서도 강하게 영감을 받은 제안이었고, 이를 위해서 파펜은 〈만일의 경우 바이마르 헌법의 중단〉을 감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235-6)


"슐라이허는 독일민족인민당에 의해서만 담지된 그토록 협소한 내각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것이 자신의 필생의 업적, 즉 국방부장관의 초당적인 역할을 위험에 빠뜨리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어쨌든 그는 이러한 권력도구를 폭력적인 복고정책을 위해서 투입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그는 의문의 여지 없이 히틀러에 대한 폭력 행위가 위험스러워 보이게 한 〈제국군대의 내적 분열〉을 고려했음에 틀림없었다." "슐라이허는 다시 한 번 〈제국군대의 신뢰〉에서 나오는 전권적인 주장으로 정치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늙은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또 정치적 위기의 이성적인 중재를 위한 최후의 기회를 허비할 수도 있는 총리를 해임했다. 그와 함께 가일도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광범위한 개혁안들은 외관상 명백히 포기되었지만 〈새로운 국가〉라는 이상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240-2)


"슐라이허의 관념들은 도달가능한 모든 정당들과 집단들의 접근과 협력에 지향되었으며, 파펜 식의 원칙적인 개혁 선전을 포기했다." "그는 의회의 일시정지(새로운 선거 없이)를 생각했다. 제국기치와 철모단은 통일적인 제국전사연맹으로 통합되고, 이러한 종류의 다른 모든 조직들은 해체되어야 하며, 노동조합들은 하나의 단일 노동조합으로 통합되고, 나치당은 완전히 금지되어야만 했다." "이 계획 또한, 사민당 중앙위원회가 어떠한 협정도 거부함으로써, 파괴되었다. 사민당은 공산당과의 경쟁에 대한 두려움과 정치화된 장군에 대한 불신을 공화국의 파탄에 대한 인식보다 더 강하게 갖고 있었다." "슐라이허는 두 가지 요인들을 경시했는데, 이들은 결국 일차적으로 그의 실각과 〈길들여지지 않은〉 나치당의 승리를 초래했다. 그 두 가지 요인이란 그의 달갑지 않은 친구이자 그의 등 뒤에서 히틀러와 힌덴부르크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파펜과 자신의 모든 계획을 지원했던 독일민족인민당의 이탈이었다."(256-7)


제11장 "집권"으로 가는 길


"사건은 많았지만 결과는 적었던 1932년 말, 정치적 장면은 제국대통령 관저를 둘러싼 중재자들과 책략가들의 바쁜 활동으로 결정지어졌던 권력 공백의 징후 속에 있었다. 그 가운데 공산주의자들은 짧은 파시스트적 간주곡 이후의 그들의 집권을 꿈꾸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적 통일전선과 민주주의·의회주의적 결집의 구호들 사이에 끼여서 노동조합의 실용주의적 요구의 압박을 받고 있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상당한 기반과 행동의 자유를 상실했다. 중앙당은 카스의 잃어버린 핵심적 지위를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폭넓은 우익 정부의 구상을 위해 좌익과의 연대를 대폭적으로 희생시켰다. 독일 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 사망했고, 중도 우익은 완전히 분열했으며, 공화국에 적대적이었던 보수주의의 독일 민족주의 부류는 파펜의 전복으로 새로운 내적 갈등에 빠졌다. 나치들은 마침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오인할 수 없는 위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259)


"슐라이허는 (상호대립을 상쇄하고 미미한 정부의 지반을 확대하기 위해) 파펜의 프로이센적 해결안을 고수하는 동시에, 의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사회보험의 사안을 지지하며 노동조합과 협상했지만, 독일 산업의 제국협회 요구에 대해서도 지지를 약속했다. 그는 위로부터의 권위주의적 군사독재를 거부했지만, 대통령 내각은 그의 〈초당파적〉 노선이 정당정치적 이해를 통해 방해받지 않도록 할 것임을 장군이자 제국 국방부장관으로서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실각 2주 후인 12월 16일, 파펜은 귀족클럽의 연례집회에서 명예 손님으로 연설을 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의 좌절된 개혁 계획을 슐라이허의 균형 전술에 대해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파펜은 스스로가 집권해 있던 1932년 8월과 11월에는 히틀러에 대한 모든 양보를 거절하고 슐라이허의 계획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이제 병든 개인으로 강등된 그는 스스로 히틀러를 통해 권력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했다."(260-8)


"브뤼닝의 실각 이후, 이제 86세인 힌덴부르크는 사실상 〈측근〉(Kamarilla)이란 슬로건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을 만큼, 그의 최측근의 영향력에서만 자문을 받았다. 4명의 충복 중 새로운 별이 파펜이었던 반면에, 슐라이허의 영향력은, 분명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마이스너와 무관하지 않게, 눈에 띄게 줄었다." "파펜에 대한 재신임이 힌덴부르크의 희망사항에서 첫 순위를 차지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치당과 교감을 주고받으며 정부를 공격하는 방식은) 파펜의 첫 임용을 이끌었던 생각이었고, 브뤼닝의 배제를 초래했던 행동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나치 문제에 대한 힌덴부르크의 분열적 관념에 부합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이러한 관념 때문에 일찍이 브뤼닝의 해결 노력이 저지되었다. 그것은 히틀러와 싸워야 할지 그를 등용해야 할지 선택하지 못하는 무능력이었고, 그가 신임하는 사람을 통해 나치당을 그의 〈민족주의적인〉 친구들의 진영으로 이끌고자 하는 기대이기도 했다."(290-1)


"슐라이허의 억제책은 우익단체들과 경제계들에게는 실망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그들은 종국적으로 히틀러 군대 쪽으로 옮아갔다." "장군은 황태자가 정상에 서 있는 군주정의 복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파펜의 실패 후에 슐라이허를 바라보며 가졌었던 기대에도 부합하지 못했다." "나치 지도부는 나치적 혁명에 뒤이어 군주정적 복고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전적으로 열어 놓았고─빌헬름 2세의 귀환을 거부했던 브뤼닝과는 다르게─파펜이 실제로 힌덴부르크를 그러한 해결에 관하여 설득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아 보였다. 군주정으로 넘어가는 교각으로서의 온순한 나치, 그것은─무솔리니의 해법을 바라볼 때─이제 바이에른의 군주정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외교계의 계산 속에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고려되었던 생각이었으며, 또한 대기업 후원자들의 희망을 움직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권력을 얻은 후에는, 그러한 희망이 곧바로 무시되었다."(305-7)


"힌덴부르크는 〈빌헬름 2세와 히틀러 사이에서 남의 자리를 맡아주는 비극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결정도 1933년 1월 30일의 국민투표도 아니었다." "불분명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았던 제국군대의 권력 지위는 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키지는 않았을지언정, 저지시킬 능력이 없었다." "반 년 뒤에 이미 효력 있는 안전장치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민주주의의 담지자들은 배제되었다. 즉, 정당들, 의회, 주, 노동조합들, 경제, 언론과 문화가 〈획일화〉의 궤적을 따라 사라졌던 반면에, 제국군은 확실한 통제하에 들어갔다. 권위주의적 대통령 중심적 민주주의의 껍데기뿐인 연속성은 1년간 더 지속되었다. 그리고는 힌덴부르크가 사망했고 군대는 1934년 6월 30일의 학살─에른스트 룀 숙청─을 재가했으며, 아무런 저항 없이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바쳤다. 나치 지배가 공고화되었던 이 시기의 끝에 히틀러의 무제한적인 단독 통치와 그의 전체주의적 기구들이 확립되었다."(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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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공화국의 해체 2 - 민주주의에서 권력붕괴 문제에 관한 연구
칼 디트리히 브라허 지음, 이대헌 외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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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공화국의 해체 과정


A. 권력의 상실 과정 : 브뤼닝 시대


제1장 브뤼닝 정부의 성립


"의회가 지배하는 마지막 다수파 정부─사민당의 뮐러 내각─는 1928/1929년에 오랜 협상 끝에 그리고 여러 중간단계를 거쳐 출범하였으며, 수많은 내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연립정부들보다 더 오래 유지되었다." "그러나 1918년 이후 공화국의 구조와 메커니즘의 민주적 건설의 태만함 등은 더 없는 부담이 되었고, 그 결과 공화국은 비록 뜻밖인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그 최대의 시험대에 올라 있었다. 새로운 정치형식에 친숙해질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았고, 전쟁 이전 시기의 안정된 사회에 대한 기억과 냉정한 현재에 대한 맹목적 실망이 너무 생생했다. 따라서 모든 위기현상이 전후문제라는 보다 더 큰 연관관계 속에 있다면, 그 현상은 대중을 타협으로 애써서 균형을 이룬 정당정치에 대한 분노로, 또 복잡하지 않은 강력한 질서, 결단력 있고 권위주의적인 지도부 등에 대한 강한 기다림으로 몰고 갈 수 있었다."(16-20)


"유럽의 동반자가 될 당시의 적대국가들과 끈질기면서도 평화적인 논쟁에서 공화국의 외적인 해방과 내적인 공고화를 위한 (외무장관) 슈트레제만의 수단인 〈화해정책〉은 새로이 시작되는 경제위기의 인과관계에 빠져들었다." "슈트레제만의 죽음은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와 결합되었다. 이 세계사적인 사건은 수출시장에서 독일의 상황에, 외국자본의 회수에, 산업상황에, 실업의 증가와 농업의 판매위기에 동시에 뚜렷이 악영향을 미쳤다. 전면에서 이익단체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1929년 3월에 새로이 형성된 농업의 〈녹색전선〉 또한 의회 안팎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정부는 이미 1929년에 현저한 조세수입 감소를 기록해야만 했고, 절약에 대한 호소가 제기되었다. 1929/1930년 겨울엔 연립정부 내의 사회주의파와 자본주의파의 갈등이 번번이 일어났다. 이는 슈트레제만이 죽기 하루 전에 독일인민당과 사민당 사이에 타협을 달성한 후였다."(21-2)


"실업의 증가가 점점 더 거대한 사회적 부담금을 필요로 하였지만, 경제적 위기현상들이 조세수입의 감소에 반영되었을 때, 이제 갈등은 새로이 대연정의 정치적 영역에서 발생하였다." "독일인민당은 근본적인 개혁, 즉 사회적 부담금의 축소에서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을 보았다. 이에 반해 사민당은 재정적인 치유를 무엇보다도 실업보험의 희생으로─바로 지금─실행해서는 안 된다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지지하였다. 사민당은 부담금의 증액 (피고용인이 항상 절반을 부담)과 보험부담금의 유지를 요구했다. 근본적으로 한편에서는 〈부담금 축소〉, 다른 한편에서는 〈부담금 증액〉이라는 투쟁구호와 함께 실업자의 보조 전반에 대한 요구권을 둘러싼, 말하자면 독단적인 〈자율경제〉에 맞서서 어렵게 달성한 노동자의 〈생존권〉과 〈존엄성〉에 대한 인정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전선도 점차 정당정치적으로 명확히 특징지어졌으며, 대연립을 가로질러 진행되었다."(24)


"오락가락하는 사민당과 특히 〈비타협적인 노동조합들〉의 책임은, 향후 정치적 형세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 행사가능성이 의회주의 정부 형태의 타도와 더불어 완전히 가로막힐 위험성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연립의 붕괴를 감수했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구성원의 의지에 구속된 그리고 그 통일성의 유지를 위하여 투쟁하는 한 정당의 딜레마에 근거를 둔 〈비극적인〉 책임이었다." "그 결과는 가장 강력한 민주정당 및 제국의회의 완전한 자기배제였다. 반 년 후에 제국의회는 이론적으로도 대연립정부를 구성할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 이익정책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마르크수주의적인 원칙들이 타협능력이 있는 현실주의를 이긴 것은 정치적 영역에서 당 전략의 실패를 의미했으며, 사민당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패배였다." "1930년 3월 27일은 〈사민당과 독일민주주의 전체의 암흑의 날〉이 되었다."(38-9)


# 1930년 3월 브뤼닝 정부 출범


제2장 권위주의 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경제적·정치적 상황에 대한 깊은 불만은 공산당보다 나치당에게 훨씬 더 유리했다. 나치당의 상승은 즉각 가시적으로 사민당을 축출하고 중도우파의 지탱가능한 연립을 안정시키려던 힌데부르크(바이마르공화국 2대 대통령)-브뤼닝 계획의 파탄을 의미했다. 이미 후겐베르크─브뤼닝 내각 초기부터 제국의회의 해산공작을 벌였던 독일민족인민당의 당수─의 국민발의를 위한 선동은 당에 위신과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점차 〈이행정책〉에 불만을 품은 경제계의 재정적 후원까지도 얻게 되었다." "이 전복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활동능력과 연립능력을 갖춘 옛 제국의회의 파괴에 뒤이었다. 적어도 여러 지역 선거의 결과들은 이 운동을 매우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 운동은 독일민족인민당의 약화와 중도정당의 감퇴에 모든 주에서 나치당의 놀라운 성장을 대비시켰던 반면에, 공산당도 부분적으로 사민당을 제물로 삼아 득표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92-3)


"브뤼닝의 독자노선은 점차 국내정책이 복잡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차없는 재정개혁〉에 지향되어 있었으며, 그는 모든 다른 문제들을 이 문제보다 하위에 두었다." "그는 자신의 구상들을 여러 차례의 선언을 통하여 국내정치적인 결과에 상관없이 〈모든 합헌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여〉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제국의회의 배제와 해체에 직면한 모든 민주적인 정당들의 경고와 염려, 명백히 저돌적으로 성장하는 나치적 급진주의의 파괴적 선동에 대한 언급,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독일무대의 흥분과 무분별이 반영된 새로운 제국의회의 완전한 활동불능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은 브뤼닝의 사고와 계획 속에서 가차없는 정부령을 통하여 자신의 재정경제적 계획을 관철시킬 수 있는 가능성들과 계획들의 배후로 밀려난 듯했다." "브뤼닝은 자신의 확고한 개혁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의회에 반대하여 또는 의회 없이 예전에 종종 위협하였던 권위주의의 길로 나아갔다."(97-8)


"1930년 7월 15일에 브뤼닝은 정치적 협상 가능성 및 타협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재정적 조치들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제국의회의 논쟁을 개시했다." "7월 16일의 표결에서 정부는 공산당, 사민당, 나치당 등 야당과 독일민족인민당 다수파의 반대로 193 대 256으로 패배하였다. 뒤이어 브뤼닝은 정부가 (재정) 보전안에 대한 협상의 지속에 전혀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고 선언하고, 즉시 대통령의 비상령을 선포하는 길로 나아갔다. 정부가 형성된 후 독일민족인민당 우파를 끌어들이려던 정부의 희망이 거의 충족되지 못하고, 정치적 타협이라는 민주적인 길을 포기한 후, 이 길은 이제 외관상으로도 (정상궤도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사민당이 비상령을 무효화시키자는 안을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과 연결시켜 제출하자, 7월 18일의 격렬한 논쟁과 브뤼닝의 새로운 패배가 이어졌고, 이어 브뤼닝은 대통령령을 통해서 제국의회를 해산하였다."(99-100)


"브뤼닝은 1930년 7월 18일에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는 우연적인 다수(Zufallsmehrheit)의 저항에 반의회 투쟁으로 대답함으로써, 그리고 흥분한 국민들에게 그러한 상태에서 조기선거라는 거의 도발적인 (무리한) 요구를 부과함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고려해왔던 경제정책을 (어쩔 수 없이) 일관성 있게 수행하고 있다는 전술적 의구심과 모든 정치적 고려를 일거에 희생시켰다. 이제 그는 선거를 통하여 의회에서 안정된 기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주로 민주적인 의회로 인한 계획들의 위험과 교환하여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위험을 얻었다. 그 영향 면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이 더 큰 위험은 이제 정치적 지평선을 점점 흐리게 하였으며, 마침내 바이마르공화국을 구출하기 위하여 잘 계획된 모든 경제적 조치들을 환멸스럽게 만들게 될 것이었다. 이제 원칙적으로 반공화국적인 나치당이 거리와 의회에서 제일의 정치적 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109-10)


제3장 공황기의 정부


"1930년 9월 14일의 선거에서 제국의회 의석수의 증가로 인한 의회 신참자들의 대거 진입을 포함하는 의회에서의 엄청난 세력관계 변화는 오직 극단적인 정당들, 특히 나치당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나치당이 9배로 늘어난 원내교섭단체가 되어 제국의회로 들어왔을 때, 이미 선거운동에서 결코 소박하지 않은 대담한 당의 기대치는 초과 달성되었다. 나치당은 민족적 보수주의자들 대신에 대중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대중들은 사회적으로 위기에 취약한 소부르주아층 및 농민층에 속하면서, 심리적으로는 감성적이거나 증오심에 불타는 왕조적·권위주의적 영광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브뤼닝은 이 선거가, 예상했던 나치표의 성장을 미연에 방지하고, 향후 4년 이내에 활동능력이 있는 의회의 권력배분을 만들어 냄으로써, 공황과 곤궁에 처한 정부가 극복되고 좌우의 열병에 가까운 급진적인 운동이 고갈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144-5)


"부르주아층을 선거에 끌어들인 구호들은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모든 부르주아 정당 및 우익정당들의 위협물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투쟁〉은 공산당의 득표증가로 귀결되었고, 중도파의 결집은 근본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결국 〈책임 없는 자들의 승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비투표자들에 대한 호소로 5백만 명이나 더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였으나, 이들은 주로 나치를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증가하는 실업자 외에도 벌이가 나쁜 단기노동자들과 사무직원, 소기업가들이 수백만 명이나 있었다. 여기에 소시민적 중간계급, 농민층, 청년들이 추가되었다. 이들은 인플레이션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저축과 내적·외적인 안전을 상실하였다." "본래 '신생정당들'은 청년들에게 무조건적인 신뢰, (직접적인) '행동'이라는 비합리적인 철학 그리고 청년운동의 저항 이데올로기 등을 제공하였는데, 이들은 이제 정치적인 능동성으로 바뀌었다."(149-50)


"나치당은 1930년 11월 30일 브레멘에서 9월 14일에 비해 득표수(25.5%)를 거의 2배로 늘렸다." "브뤼닝은 28개 법안을 포함하는 거대한 전체 안이 제국의회에 상정되어 각 정당 간의 협의─그가 제출한 프로그램의 입법적인 측면에 대한 정규적인 의회의 논의─후에 아마도 다수의 동의를 받을 가능성이 없어 보인 12월 3일에 해임되었다. 힌덴부르크는 이미 이틀 전에 헌법 제48조를 근거로 하여 〈경제와 재정의 안정〉에 관한 포괄적인 비상령을 발동시켰다. 1930년도 예산을 법령으로 (7월 26일) 강제로 통과시킨 데 이어 1931년의 예산도 비상령으로 강제로 통과시켰다. 이는 총 104억 마르크에 달하는 것으로 1930년에 비해 (수입과 지출을 합쳐) 총 11억 5천 2백만 마르크의 긴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보전정책에도 모자랐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판매 위기와 실업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었다."(171-5)


"1931년 7월 1일 이후 국가 간의 모든 채무지불의 1년간 유예를 제안한 이른바 후버 모라토리움(Hoover-Moratorium)은 배상의 역사에서 사실상 결정적인 한 장을 의미했다. 독일은 모든 지불을 1년간 유예함으로써 가장 큰 이익을 볼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 계획은 특히 상호 채무관계에 가로막혔던 유럽의 구매력과 수입능력의 회복에 대한 미국의 관심에 사실상 상응하는 경제적 관점들이 깔려 있었다. 그 계획은 여전히 강하게 결합되어 있던 미국 자본이 전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독일 신용능력의 붕괴를 최후의 순간에 막으려 했다. 주식시장은 후버 선언의 출판에 주가 상승으로 답했다. 유럽 최대의 배상채권자인 프랑스의 저항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긴 했으나, 힘든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매우 넓게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대담할 정도로 솔직한 정책도 위기의 정치적 결과를 극복하지는 못했다."(207-9)


제4장 대통령 내각과 〈민족적 반대파〉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공화국의 모든 반대자들은 〈하르츠부르크 전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장교단과 방위단체 출신의 반공화주의자들과 왕조주의자들은 정치지도자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경제 지도자들은 이 외부 권력의 대표자들을 지지하였다. 경제 지도자들은 이제 중요한 이익단체들과 함께 기존의 부르주아적·사회민주주의적인 타협질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환영받기도 했던 브뤼닝의 권위주의적 임시처방책에 대해서도 결단코 반대하였다. 여기에는 독일민족인민당, 나치당, 철모단, 전국농업연맹(Reichslandbund), 여러 경제단체들, 독일인민당, 경제당, 전독일연맹, 그리고 여러 귀족가문들이 대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건설적인 개혁안이나 혁명계획을 위한 공통분모 혹은 정치적 기반을 공유하지 않았다." "따라서 뒤이은 파펜과 슐라이허 정부의 영향 아래 있었던 '권력공백'의 단계는 이미 이 순간에 두드러졌던 것이다."(216-8)


"후일 후겐베르크 자신의 발언에 따르면 하르츠부르크 자체는 (현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투쟁의 선포이자, 〈민족적 반대파〉 연합이 최후의 승리로 나아가는 시작을 의미했으며) 특히 우익반대파가 공동의 대통령후보를 합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경우에서도 후겐베르크는 분명 여전히 히틀러를 자신의 앞잡이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 자신의 천재적인 동맹자들, 〈민족적 부르주아지〉 및 경제계의 대중선동적인 나치의 활동에 대한 거부감을 힘닿는 대로 화해시키고자 했다. 나아가서 그는 순진한 자의식에서 추가적인 독일정책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거기서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다른 한편에서 독일민족인민당 및 나치당과 더불어 독일민족인민당과 중앙당 사이에 있는 많은 정당들이 어떻게 전술적으로 평행선 속에 설정될〉 수 있는가였다. 그렇지만 나치당은 하르츠부르크에서 예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자신의 노선을 조종했다."(221)


"1931년 11월 25일, 한 나치 이탈자에 폭로된 〈복스하이머 문서〉는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을 경우 그것을 실행할 계획을 작성한 것이었다." "이 문서는 현존하는 국가질서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타도된 뒤에 나치의 집권이 오게 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어 〈나치 돌격대, 지역방위부대들〉 또는 유사한 조직들은 유일한 질서의 담지자로서 〈공석이 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각 내각의 기능을 넘겨받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치) 반역사건의 법적인 추적은 제국고등검찰과 제국대심원에 의해 저지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국정부가 마지막 시간에 급진주의에 대하여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킬 수 있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려는 실천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 또 정치적 측면의 판결을 정치적으로 매우 오락가락하는 사법부 관료들의 판단에 맡겼다는 점, 그리고 나아가서 바로 지금 우파와의 연립 탐색, 즉 후겐베르크와 히틀러를 둘러싸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253-7)


"그 사이에 경제적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 파멸적인 영향은 공적·사적인 생활 전체로 확산되었다. 확실히 국제관계의 수정을 위한 브뤼닝의 노력은 궁극적으로 독일에 대한 배상금 지불 압력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전망을 열었다. 후버 모라토리움은 일시적인 비상령으로서 인정받았다. 그것은 최종적인 해결의 필요성에 대한 전반적 인식을 빠르게 성장하게 한 전기를 마련했다." "브뤼닝의 올바르고 진정한 긴축재정 정책이 외국에서 얻은 신뢰는 경제적·군수기술적인 문제들의 이성적이고 전체적인 규정에 대하여 새로운 길을 여는 협상에서 본질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성은 독일 내에서 그의 낮은 인기 때문에 중단되었고, 결국 배상회의가 1932년 4월과 7월로 연기되자, 군축회의의 결의안은 심지어 1932년 12월까지 지연되었다. 이 결의안은 결국 그의 후임자들과 이어서는 히틀러가 세밀한 계획과 끊임없는 노력의 결실을 따서 자신의 바구니에 담을 수 있었다."(260-1)


제5장 제국대통령 선거


"힌덴부르크는 단호하게 자신의 고유한 목표로서 모든 정치적 노력의 중심을 우파정부 건설에 옮겨 놓았다." "재선에 나서기로 결심한 힌덴부르크의 최종적인 결론은 특징적인 것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파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나의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조건 늦어도 5월에는 치러져야만 할 프로이센 선거 이후에 집중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협상들을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제 정부를 우파로 이동시키고 〈집중정부〉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브뤼닝 체제의 가장 중요한 지역기반인 프로이센 정부를 교체하는 것 또한 말하자면─완전히 〈민족적 반대파〉의 의미에서─제국대통령궁의 정치적 계획 일정에 포함되었다. 공화주의적 기관들의 권력 상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게 될 사건들은─이는 브뤼닝의 실각과 프로이센 정부에 대한 폭력적인 작전이다─그러한 계획으로부터 발전된 것이지 직접적인 깜짝 작전의 결과는 아니었다."(291)


"적어도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와 대결하여 명백한 승리를 거둔 것은(49.6% : 30.1%) 민주적 결집후보의 첫 번째 목적을 충족시켰다. 이는 또한 점차 커지던 나치의 권력 요구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한계를 지키라고 요구한 것이었고, 나치 지도부의 고조된 분위기를 당의 상황에 위협적인 심각한 침체상태에 빠뜨렸다. 뒤스터베르크가 재기불가능할 정도로 패배한 것(6.8%)은 〈민족적 반대파〉 내부의 경쟁관계를 명백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후겐베르크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했다. 독일민족인민당, 철모단 그리고 그 밖의 〈민족적 단체들〉은 의문의 여지 없이 엄청난 수의 유권자들을 나치당의 매우 영향력 있는 급진적 선동에 빼앗겼다." "나치의 득표수는 1930년의 제국의회 선거와 뒤이은 지방선거에 견주어서 추정해보면 계속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 수는 본래 당이 기대했던 수준에 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목할 만한 관찰자들의 추정보다도 약간 뒤처져 있었다."(326)


"헌법은 제1차 선거에 대해 절대다수를 요구했으나, 힌덴부르크는 간발의 차로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 물론 이러한 헌법의 여러 규정에 따라 제국대통령의 제2차 선거는 4월 10일로 예정되어 되었다. 우파의 다른 매력적인 통일후보자를 얻으려는 시도들과 황태자를 옹립하려는 노력들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의 지속적인 경쟁관계와 대비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황태자는 얼마 후에 곧 자신은 히틀러를 선택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신뢰의 파괴에 대해 좌파는 엄청나게 분노했고, 슐라이허도 몹시 화가 났다. 슐라이허는 아마도 히틀러를 쳐부수기 위해 황태자의 입후보를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선거에서 히틀러(36.8%)는 힌덴부르크(53%)에 맞서 더 높은 득표의 증가를 달성(6.6% : 3.4%)했으나, 수많은 선거연설에서 표현되었던 2천만 표에서 3천만 표의 기대는 명백히 성공하지 못했다."(328-32)


"어쨌든 힌덴부르크는 주로 1925년에 그에 반대했던 집단들의 힘으로 재선되었고, 따라서 그의 재선은 이제 압도적으로 정반대되는 기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25년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1918/1919년의 바이마르〈체제〉를 반(反)공화주의적으로 바로 잡아줄 것을 기대했다면, 1932년의 투표는 명확한 다수가 안정된 민주적 상황 그 자체의 유지와 재건에 대한 희망을 지닌 것이었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인 의미로 이해되었건 간에 말이다." "이 선거는 공화국의 마지막 승리로 보일 수 있었다. 그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이어 공화주의자들을 때려눕히며, 이제 그 반대자를 물리치고, 마지막으로 히틀러 정부를 순치시키려 했을 때, 힌덴부르크는 중요한 모든 과제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화는 시시각각으로 상승하여, 마침내 한 민족의 정치적 판단력의 상징적인 이미지로까지 되었다."(333-5)


제6장 브뤼닝의 실각


"1932년 4월 13일, (제국 국방장관과 내무부장관을 겸임했던) 그뢰너는 친위대와 그에 속하는 모든 참모부와 시설들, 돌격대 예비대, 자동차 돌격대, 해양 돌격대 및 기수 돌격대, 항공단, 위생단, 지도자학교, 돌격대 병영, 병기창들에도 관계된 돌격대 금지를 공표했고, 이어 4월 14일 경찰조치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가택수색과 광범위한 압수뿐만 아니라 나치본부인 뮌헨의 〈갈색의 집〉의 임시점거를 포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저항에 부딪치지 않았다. 이러한 경과는 나치 측에서─괴벨스의 메모가 보여주듯이─준비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슐라이허 측의 즉각적인 대적행위를 계산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추정을 분명하게 해주었다. 히틀러 자신이 그의 돌격대 부하들에게─그는 그 수를 40만이라고 계산했다─새로운 합법적인 전술을 호소했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을 〈이제부터는 단지 당 동지들이라고만〉 표현했으며 박두한 주 의회선거를 〈복수의 날〉로 일컬었다."(349-50)


"슐라이허가 그뢰너와 결별한 결정적인 요인은, 방위단체들의 탈정치화를 통하여 우익을 안전하게 포섭하는 문제와 내정적 위기를 해결하는 동시에 국가가 통제하는 군사력 강화를 성취한다는, 그가 선호하던 계획이 내무부의 돌격대 금지를 통하여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모든 〈군사적이고자 하는 조직들〉에 대해 유보적이었고 특히 철모단의 점증하는 정치화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현실정치적인 주의력은 나치당의 상승에 집중되었다. 그는 국방정책에 대한 나치당의 긍정적인 태도를 제국군대에 적대적인 급진적 좌익에 대한 균형추로서 계산에 넣고, 그들의 쿠데타 의도를 온전한 제국군대를 동원하여 중지시키고, 그들의 정치적 승리의 행진을 세계경제 대공황 동안의 책임을 통해서─그리고 고령의 힌덴부르크가 그러한 실험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보장해주는 한─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361-3)


"그의 협력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뢰너의 돌진〉을 통해 위협받고 있다고 여겨졌던 이 기본구도를 슐라이허는 이 몇 주뿐만 아니라 다음 몇 달간 확고히 견지했다." "슐라이허는 정부의 기반을 우측으로 넓히려는 노력이 〈그의〉 총리인 브뤼닝을 통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 희망이 실패한 것으로 보이자 그는 자신의 힘으로 나치당과의 교감을 넓혀 갔으며 이제는 그뢰너뿐만 아니라 브뤼닝도 실각시키는 쪽으로 일을 꾸몄다. 〈우리는 슐라이허 장군으로부터 위기는 계획한 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괴벨스는 이렇게 들떠서 승전가를 구가하였다. 브뤼닝의 실각은 이제 회복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문제는 이제 누가 의회적으로 묵인되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의 마지막 정부의 해체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거둘 것인가, 권위주의적인 개혁가들인가 혹은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전체주의자들인가에 있었다."(363-5)


"한편 4월 24일 주 의회 선거 결과 (사민당 지도부가 명명한) 〈나치공산주의자들〉이 의석의 절대다수인 52%를 차지했다. 민주주의 다수파 형성이 결국 봉쇄되었던 동안에, 나치당과 공산당은 수많은 불신임안과 선동안─한편으로는 볼셰비즘에 대항한,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에 대항한 수없이 인용되었던 방어벽으로서─으로써 그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공동의 의회 내 승리를 거두었다. 나치당은 정부와 공산당을 반목시켜 이용했고, 공산당은 다시금 민주주의 세력의 모든 유보에 대해서 볼셰비키의 권력장악으로의 길은 바로 파시스트적 중간정권을 거쳐 간다는 천편일률적인 기대로써 대응했다. 이제 독일의 모든 의회들에서, 새로운 권력분배의 긍정적 이용에 대한 어떠한 전망도 열어 놓지 않은 채 민주적 메커니즘의 기능능력이 마비되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인수를 할 능력이 없는 다수의 일관된 부정성, 즉 권력공백이었다."(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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