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중음악 (반양장) - 민스트럴시부터 힙합까지, 200년의 연대기
래리 스타, 크리스토퍼 워터먼 지음, 김영대.조일동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8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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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중음악의 주제와 흐름


# 대중음악의 주제

1. 음악 듣기 : 비평적(음악의 형식, 사운드, 의미, 문화적 배경, 음색, 가사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으로 음악 듣기

2. 음악과 정체성 :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나이 들어가면서 그때그때 음악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 양상

3. 음악과 테크놀로지 : 레코드, 라디오, 디지털, 샘플링 등이 대중음악을 한층 더 '대중화'하는 데 끼친 영향

4. 음악 산업 : 음악을 생산(작곡가, 작사가, 편곡자, 프로듀서 등)하고 유통(메이저와 인디)하는 산업망 조감

5. 중심부와 주변부 : 중심부(개신교 백인 중산층)의 취향과 주변부(그밖의 소수자들)의 취향 간의 상호 작용


"1937년 인류학자 랠프 린턴은 '100퍼센트의 미국인'이라는 논문에서 〈보통의 미국인들이 지닌 '미국주의(Americanism)' 혹은 소중한 그들만의 전통을 보호하려는 욕구가 분명히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그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순간에 수많은 외국의 요소들이 그들의 문명에 이미 스며들어 있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외국의 요소들이란 아시아, 중동, 유럽, 아프리카, 미국 원주민들의 문화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런 것이다. 린턴이 말한 '보통의 미국인들'은 직장에 출근하며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에 독일식 기술로 인쇄되어 고대 셈족의 언어로 쓴 신문 기사를 읽을 것이다. 미국의 제도가 외국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초래될 심각한 결과를 비판하는 최신 칼럼을 읽으면서 그들은 유대인의 신에게, 인도·유럽어를 사용해, 그들이 100퍼센트 미국인임을 감사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미국산'이라고 알고 있는 대중음악도 이와 비슷하게 수입된 전통을 받아들여 만들어낸 것이다."(31-2)


# 대중음악의 흐름

1. 유럽계 미국 음악 : 영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포크 발라드, 악보음악, 다양한 형태의 댄스음악이 주류를 형성

2.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 : 20세기 전반에 걸쳐 래그타임, 블루스, 재즈, 스윙부터 로큰롤, 소울 음악까지 광범한 영향

3. 라틴아메리카계 미국 음악 : 쿠바의 하바네라와 룸바, 아르헨티나의 탱고, 브라질의 삼바와 보사노바 등의 영향


2 After the Ball: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대중음악


"유럽인들의 눈에 독특한 '미국' 음악이라고 인지된 최초의 장르는 바로 민스트럴 쇼(민스트럴시, 블랙페이스)라고 불리는 극장식 연예 예술이었다. 민스트럴은 주로 백인 연주자들이 인위적으로 자신의 피부에 검은색을 칠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악, 춤, 옷, 방언 등을 패러디함으로써 이뤄지는 공연 예술의 한 가지다." "블랙페이스 민스트럴시의 발전에 관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획기적인 미국 대중문화의 한 형식은 여러 인종 간의 교류가 빈번했던 뉴역의 제7번 구 같은 노동계급 주거 지역의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등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초기의 블랙페이스 공연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노동계급의 백인 청소년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 형태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한, 미국이 최초로 만들어낸 독창적인 대중문화의 표출로도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백인의 인종차별적 관념이 투영되지 않았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46)


"토머스 다트머스 라이스는 뉴욕 제7번 구의 빈민 가정에서 태어난 백인 배우였다. 그는 〈Jim Crow〉(1829)라는 노래를 통해 민스트럴시의 대중적인 잠재력을 증명했다." "짐 크로 캐릭터는 흑인의 것도 백인의 것도 아닌 어정쩡한 변종의 방언을 구사하는데, 이는 상류층 청중이 스스로 위협적이라 느낄 만한 풍자적인 이야기를 은밀히 전달하거나 혹은 가식적인 정치인과 사회의 엘리트를 쓰는 화려한 단어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1830년대에 라이스는 미국 밖에서 스타일과 내용 면 모두 보편적으로 '미국적'이라고 여겨지는 예술을 퍼뜨린 최초의 미국인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라이스의 곡 〈Jim Crow〉의 제목이 187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이어지는 인종차별의 근간, 즉 극장, 묘지, 병원, 음식점, 학교에서 흑인을 배제하는 이른바 '인종분리 법안'의 배경으로 활용되어, 흑인을 가리키는 경멸적인 용어로 탈바꿈한 것은 그야말로 끔찍한 모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47-50)


"남북전쟁기부터 시작해 1910년 즈음에 이르기까지 브라스 밴드 콘서트는 미국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적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금관 악기(트럼펫, 코넷, 트롬본, 튜바 등)로 이루어진 군악대는 미국의 탄생 이후 늘 함께 해왔고, 특히 독립전쟁 이후 그 유행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1878년 한 언론은 〈브라스 밴드가 없는 마을은 성가대가 없는 교회처럼 동정의 대상이다. 마을의 정신은 밴드에 의해 확인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19세기 말에 있었던 브라스 밴드 열풍은 애국주의와 대중음악의 역동성 안에서 그 동력을 키워왔고, 점점 강해지고 있던 미국 국가주의를 그 새로운 에너지로 활용했다. 핵심적인 레퍼토리로는 주로 애국적인 음악, 즉 독립전쟁 와중에 국가의 통합을 상징했던 행진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곡은 청중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국외에서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과시할 때(파나마 운하 공사나 1898년의 미서전쟁 등) 필요한 공적 후원의 분위기를 한층 돋우기도 했다."(60-1)


"1890년대를 기점으로 현대적인 의미의 미국 대중음악 산업이 비로소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틴 팬 앨리─주로 동유럽에서 건너온 유대계 사람들이 모여 작곡가를 고용해 음악을 만들던 맨해튼 남쪽 구역의 28번가 지역─의 사업가들은 도심을 중심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음악 시장을 겨냥한 히트곡을 양산하기 시작했고, 곡당 1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베스트셀러'가 등장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새로운 세기가 도래할 무렵, 새로운 무대 공연 양식인 보드빌(vaudeville)이 민스트럴시의 뒤를 이어 가장 널리 사랑받는 무대극 예술 장르로 등장해, 틴 팬 앨리 음악을 소개할 중요한 창구로 떠올랐다. 보드빌은 민스트럴 쇼와는 달리 모든 출연자가 공연 내내 무대를 떠나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다양한 종류의 공연자, 즉 가수, 곡예사, 코미디언, 던지기 곡예사, 댄서, 동물 등이 특별히 일관된 주제의식 없이 무대 위에 잇따라 등장해 공연을 펼치는 형태였다."(63)


"래그타임(ragtime)은 1880년대에 등장해 세기말까지 무려 10년 이상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어떤 면에서 래그타임 광란은 민스트럴시에서 이어진 면도 없지 않은데, 이를테면 백인 음악인이 그들이 공연을 좀 더 다채롭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 스타일을 단순화해 차용했다는 측면에서 유사했다. 다른 한편으로 래그타임은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의 기법과 가치 등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음악 산업에 좀 더 많은 수의(물론 그조차 턱없이 적은 수이기는 해도) 흑인 작곡가가 참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상업적 인기의 정점을 달리던 1890년대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사이의 기간에 래그타임은 거의 모든 종류의 밴드가 즐겨 연주하는 장르가 되었다. 브라스 밴드, 컨트리 현악단, 교향악단, 밴조, 만돌린 앙상블, 그리고 이른바 고전적인 래그타임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로 피아노 연주까지 그 레퍼토리는 실로 다양했다."(67-9)


3 천연두처럼 전염되는 음악: 댄스음악과 재즈(1917~1935)


"1920년대는 미국 대중문화의 발달에서 결정적인 시기다. 먼저 독립과 자유로운 이동의 대표적 상징물이던 자가용을 수백만 명이 넘는 가구에서 소유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부유층의 독점적 권리로 통하던 전화 역시 중산층 가정에까지 진출했다. 포노그래프와 라디오, 할리우드 영화, 타블로이드 신문은 미국 전역의 대중문화를 하나로 만들기 시작했다. 신세대 인기 연예인들은 대도시는 물론 소도시, 시골 마을 주거지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에 걸쳐 자신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친근하게 알리기 시작했다. 미국 연예 산업의 기본적 틀이 이 시기를 통해 비로소 모양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할리우드 유성영화는 이제 '스타' 산업과 노래를 홍보하는 중요한 매체로 발돋움했고, 로스앤젤레스는 미국 연예 산업의 중심지를 놓고 뉴욕과 경쟁하는 유력한 도시로 떠올랐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시골의 읍 단위, 심지어 조그마한 촌 동네에 이르기까지, 대중매체는 미국인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78-9)


# 포노그래프(phonograph) : 금속 박(foil)이나 밀랍으로 코팅된 실린더에 물리적으로 홈을 냄으로써 원음을 저장해 재생할 수 있도록 고안된 기계


"1925년 마이크(microphone)라는 새로운 장치를 이용한 전기 녹음(electric recording)이 커다란 깔때기 모양의 메가폰(megaphone)에 소리를 불어넣는 낡은 어쿠스틱 녹음 시스템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전기 녹음은 어쿠스틱 녹음보다 훨씬 '원음에 충실한(high fidelity)' 기술로 평가받았고, 전기 녹음 방식의 보급으로 인해 특정한 음향 효과를 구현하는 엔지니어의 역할이 더욱 막중해졌다. 전기 마이크의 발전으로 엔지니어는 인간의 목소리를 포함해 어떤 특정한 소리를 고립시키거나 증폭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새로운 가창 방식이 등장하는데, 이는 미국 대중음악의 다음 단계의 발전에 매우 특별한 영향을 끼친다. 크루닝(crooning)이라고 불리는 부드럽고 친근한 창법이 새로운 세대의 연주자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빙 크로스비를 비롯한 크루너(crooner)들은 최초의 근대적 슈퍼스타가 되었고, 그들의 이미지는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섬세히 다듬어지고 널리 홍보되었다."(80-1)


"포노그래프 음반 회사의 주요 경쟁자는 새로 등장한 라디오 방송망이었다." "대중음악은 1920년대 초반 상업 라디오 방송의 태동기부터 라디오의 주요 상품이었다. 방송국들은 댄스음악 밴드와 가수의 공연 실황을 방송했고, 네트워크 라디오를 통해 시카고나 샌프란시스코의 청취자가 뉴욕에서 열리는 유명 가수의 공연 실황을 들을 수 있었다." "라디오는 미국인들의 음악 경험과 사교 활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공황 시기에 포노그래프와 음반을 구매할 여력이 없던 이들은 그 대신에 라디오 수신기를 구입했고, 그 덕분에 다양한 종류의 음악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다. 라디오는 가장 작은 시골 마을과 거대 도시를 이어주었고, 노동자들에게는 짜릿한 일상의 즐거움을 제공했다. 라디오는 노래를 알리고, 음악을 이용해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디스크자키는 방송에서 광고주의 상품을 홍보해주면서 라디오의 상업적 잠재력을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81-3)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미국 대중음악의 변화와 동일한 맥락에서 미국 사교댄스도 몇 가지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19세기 민스트럴시의 케이크워크와 함께 간접적인 방식으로 시작되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식 춤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1910년 무렵 래그타임 곡의 오케스트라 버전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흑인 스타일의 느슨함에 기반을 둔 춤이 잇따라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데, 이를테면 폭스트롯을 비롯해 텍사스 토미, 터키 트롯, 버니 허그, 그리즐리 베어, 보스턴 딥, 원스텝 등이 당시에 유행한 춤이다." "미국 사교댄스의 긴장을 풀어헤친 또 하나의 자극제는 바로 19세기 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유래한 탱고였다. 탱고는 유럽의 사교댄스 음악, 쿠바의 하바네라, 이탈리아의 경가극, 아르헨티나 가우초의 발라드가 섞인 음악아로, 1910년 저 유명한 모리스 모베가 뉴욕의 한 카바레에서 이 춤을 공연해 대중에게 처음 그의 존재를 알렸다."(84-7)


"사교댄스 음악에 불어닥친 '아프리카계 미국화'의 다음 단계는 이른바 재즈 광란(Jazz craze)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시작되어 192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재즈는─때로 '재스(jass)'나 '핫 뮤직(hot music)'으로도 불렸다─1900년 무렵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에서 탄생했다. 미국과 카리브 해 지역 사이의 관문이라는 뉴올리언스의 위치는, 이 도시의 복합적 계층의 주민─백인, 크레올, 흑인 공동체의 문화적 차이를 포함한다─과 프랑스 식민지 문화의 강력한 잔재가 합쳐지면서 그 어떤 미국의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혼종적 음악 문화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재즈가 뉴올리언스에서 발생한 음악이기는 하지만, 이 새로운 음악이 정작 처음으로 녹음된 곳은 뉴욕과 시카고였다. '재스(jass)'라는 명칭을 내세운 최초의 녹음은 1917년 뉴욕에서 이루어졌는데, 바로 뉴올리언스 출신의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ODJB)라는 백인 그룹이었다."(93-4)


"재즈가 주류 대중음악에 남긴 엄청난 파급력을 두고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뉴올리언스에서 건너온 이 새로운 음악이, 이미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던 싱커페이션을 사용하는 댄스음악 열풍의 와중에, 적절한 순간에 때맞춰 도착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음악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였던 백인 청중이 기본적으로 재즈를 래그타임이 발전된 하나의 형태로 여겼던 것은 분명하며, 유명한 초기 재즈 밴드의 녹음은 기본적으로 래그타임과 구별하기 어려운 음악을 담고 있다." "재즈에 영향을 받은 대중음악의 초창기 녹음에는 흔히 동물 농장에서 들을 법한 잡음 같은 소란스러운 효과음이 활용되었고, 유명 재즈 밴드의 광고에는 으레 연주자들이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거나 익살스러운 몸짓을 하거나 심지어 사육제 등의 풍경이 담겨 있기도 했다." "재즈를 듣는 백인 청중 대부분의 눈에 재즈는 흑인과 가까이하지 않으면서도 자극적이고 대담하며, 익살스럽고 꽤 위험하기까지 한 흑인 문화를 체험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107)


4 I got Rhythm: 틴 팬 앨리 음악의 황금기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음악적 구조와 연주 스타일이 대중음악계를 새로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을 이끌어낸 것은 전문적인 선율의 장인들이었다." "어빙 벌린은 뉴욕의 가난한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자랐다. 그는 노래하는 웨이터로 경력을 시작해 래그타임에 기반을 둔 대중음악 작곡가로 성공을 거둔다. 의사이자 피아니스트의 아들로 대학 교육을 받은 리처드 로저스는 로렌즈 하트나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 같은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당대의 히트곡을 써냈다. 콜 포터는 인디애나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예일 대학, 하버드 대학, 파리의 스콜라 칸토룸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 마지막으로 조지 거슈윈은 이민자인 가죽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간극을 메운 인물이 되었다." "바로 이 틴 팬 앨리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이 이른바 '스탠더드'라고 불리는 음악을 무수히 만들어냈고, 이러한 음악은 오늘날 재즈와 팝 음악인에게 여전히 필수적인 레퍼토리로 남아 있다."(110)


"유대 이민자, 특히 동유럽에서 건너온 이들은 20세기 초반 음악계에서 작곡가, 작사가, 연주자, 그리고 제작자이자 홍보가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의 인생사에는 왜 연예 산업에서 유대계 이민자들의 지분이 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이유가 담겨 있다. 수세기 동안 신분 상승 기회를 차단당해 왔던 하층 이민자들은 보드빌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뉴욕의 길거리에서 다양한 공연 기술을 갈고 닦으며 음악, 춤, 코미디에 그들의 야망을 모두 쏟아부었다. 세기가 전환될 무렵, 대규모 극장 예약 대행사의 상당수를 유대인이 운영했고, 젊은 음악인들은 이런 확고한 기반을 바탕으로 더는 반유대주의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빙 벌린, 제롬 컨, 조지 거슈윈 같은 야심찬 젊은 음악인에게 음악 산업은 어설픈 가르침을 주었으니, 이는 음악 출판업자들에게 돈을 벌어줄 노래를 만들 수만 있다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110-2)


"틴 팬 앨리 음악은 내용이나 주제의식에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골치 아픈 사회적 현안, 즉 인종주의, 대량 실업,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등장한 파시즘 등과는 별다른 연관을 맺지 않았다. 무려 60퍼센트 이상의 실업자가 발생했다는 이른바 '대공황 시기'에도 시대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틴 팬 앨리 음악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틴 팬 앨리 음악이나 연극·영화는 일상생활의 압박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그 주된 목적이었다. 특히 가사와 공연 형태는 문화적 이상으로서의 개인주의와 낭만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낭만적 사랑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가정을 마련해 정착할 수 있다는 의식은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공유되었다." "그러므로 틴 팬 앨리 노래의 가사와 공연 스타일은 점차 확장하고 있던, 다양한 민족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백인이 다수를 점하던 중산층의 욕망에 기대려는 노력을 반영했다."(113-6)


5 St. Louis Bluse: 레이스 레코드와 힐빌리 음악


"음악 산업계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1918~1940)에 음악 관련 업체가 새로운 청중을 겨낭하기 시작했던 것은 분명하며, 이 과정에서 그 이전까지는 무시되던 유형의 음악─미국 남부의 민요 전통에서 유래한 특별한 장르─을 녹음해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골 공동체를 떠나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애틀랜타, 내슈빌 같은 도시로 옮겨 간 수백만의 이주민들은 이러한 음악적 다양화의 과정을 더욱 촉진했다." "레이스(race)와 힐빌리(hillbilly)는 1920년대 초반부터 1940년대 후반 사이에 미국 음반 산업이 남부 지역의 음악을 홍보하고 분류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다. '레이스 레코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연주를 녹음한 음악을 말하며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청취자에게 판매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이와는 달리 '힐빌리' 혹은 '올드 타임(old-time)' 음악은 연주와 판매 모두 남부의 백인이 대상이었다."(132)


"레이스 레코드를 통해 퍼져나간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장르 중 하나는 블루스로, 19세기 말 무렵 딥 사우스─특히 미시시피 델타에서 텍사스 동부에 이르는 지역─의 흑인 공동체에서 시작된 음악 장르다. 초기에 미국의 주류 팝 음악에 블루스 전통이 끼친 영향은 매우 간접적이었고, 전문적으로 작곡된 '블루스 노래'의 형태는 틴 팬 앨리와 보드빌적인 감수성으로 걸러졌을 뿐 아니라 음악 산업의 상업적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수가 녹음한 최초의 블루스가 미시시피 델타나 텍사스 동부의 소작농이나 노동자가 부른 컨트리 블루스가 아니라, '진짜 니그로 음악'으로 한몫 잡으려는 전문 작곡가가 만든 블루스곡(이전까지 클래식 블루스라 불리던)이라는 사실이 한편으로 납득되기도 한다." "이른바 블루스 열풍(1920~1926)의 정점에 발매된 초기음악들은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잘 팔려 나갔다."(138-9)


"컨트리(포크) 블루스 형식은 최초의 보드빌 블루스곡보다 수십 년 앞서 존재했다. 포크 블루스가 미시시피 델타 지역에서 처음 생겨났다는 것에는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한다." "19세기 델타 지역은 딥 사우스 지역 중 목화 농사가 가장 집중적으로 행해지던 곳으로, 북미로 건너온 대다수의 노예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처럼 블루스는 빈곤한 흑인 노동자의 음악이었고, 그들이 경험한 일면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역동적이면서도 유연한 틀이 되어주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컨트리 블루스는 완전한 구술 전통의 음악이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하나의 노래에서 시작된 여러 버전을 귀로 익히고 기억을 통해 전달해, 세대에서 세대로 내려가며 퍼져나간다. 블루스는 본질적으로 개인적 형태의 음악 만들기 장르이므로, 개별 음악인이 이미 존재하고 있던 노래나 다른 사람이 만든 음악의 일부에서 새로운 노래를 재조합하는 식으로 자기만의 버전을 구성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146-8)


"'힐빌리 음악', 훗날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 혹은 더 간단하게 '컨트리 음악'으로 다시 명명될 이 장르는 영국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민요, 발라드, 춤곡으로부터 발전해왔다. 그러나 초기 컨트리 음악에 시골 문화의 순수성이 오롯이 담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 되면 가장 고립된 시골 마을에서조차 이미 도시의 시설과 제도, 취향, 기술의 영향이 발견된다. 최초의 상업적 남부 음악가들은 민스트럴시, 보드빌, 서커스, 약장수 쇼 등에게서 두루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초창기의 라디오가 힐빌리 음악의 대중화에 커다란 역할을 한 데 반해 레이스 음악(흑인 음악)을 홍보하는 데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대부분의 라디오와 라디오 방송국은 백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즉, 라디오는 레이스 음악을 널리 알리는 데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같은 이유로 레이스 음악은 포노그래프에 좀 더 많이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155-7)


"컨트리 음악은 늘 시골과 도시, 고향과 이주,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음악이었다. 이는 1920년대 컨트리 음악의 주요 청중의 성격을 고려해볼 때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바로 기계화된 농업과 미국 경제의 변화 때문에 급진적인 변환과 마주한 시골 사람, 직업을 찾고 새로운 삶을 만들기 위해 고향을 떠난 이주자가 그들이다. 초기 컨트리 음악이 담긴 음반을 들으면 우리는 급격한 변화의 시절에 전통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관한 입체적인 관점을 얻게 된다. 한편으로는 발라드와 사랑 노래, 좋았던 옛 시절의 모습, 가족, 건강, 단란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며, 또 다른 한편에는 무너진 사랑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들, 이 마을 저 마을로 쉬지 않고 이주하는 이야기가 있다. 초기 컨트리 음악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두 뮤지션, 즉 카터 패밀리와 지미 로저스는 히트 음반과 라디오 출연을 통해 명성이 높아졌고, 이어지는 세대의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인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159)


6 In the Mood: 스윙 시대(1935~1945)


"'스윙'이라는 단어는 ('재즈', '블루스', '로큰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사용하던 영어에서 유래했다. 훌륭한 연주에서 파생되는 유연한, '로킹(rocking)'한 리듬의 운동량을 표현하는 동사로 먼저 쓰인 이 단어는, 나중에는 자유, 생기, 즐거운 기분으로 특징짓는 감정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기에 이른다." "193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수많은 대형 오케스트라─베니 굿맨, 토미 도시,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글렌 밀러 등─가 전국 인기 음악 차트를 도배했다. 이러한 빅 밴드들은 매일 밤마다 라디오에 출연했고, 그들의 연주는 전국적으로 대도시의 호텔과 볼룸에서 울려 퍼졌다. 이들의 음악은 나이트클럽과 식당에 설치된, 동전을 넣어 작동시키는 음반 재생기인 주크박스의 목록에도 등장했다." "빅 밴드는 근본적으로 대도시적 현상이자 세련과 첨단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작은 시골 동네에서 이따금 벌어지는 빅 밴드의 순회공연은 그 자체로 대단히 흥분되는 사건이었다."(170-1)


"스윙 음악의 기본적인 정서는 분방한 즐거움, '흔들며(swinging)', '신나게 즐기는(having a ball)' 것이었다. [이러한 '놀아보자(let's party)'라는 태도는 의심할 바 없이 1933년 미국의 '금주법' 폐지로 더욱 확대되었다]. 스윙의 청취자는 사회적 경계, 이를테면 민족 집단, 원주민과 이민자, 남부와 북부, 도시 거주자와 시골 사람, 노동계급과 확장된 중산층, 진보적 엘리트 식자층 등을 모두 가로질러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민주적인 정신에 입각하고는 있으나, 연주와 공연에서 스윙은 상당히 엄격한 규율을 자랑했는데, 전문 편곡자가 미리 기보하여 편곡하는가 하면, 연주자들은 음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연주해야 했으며, 덕분에 개별적으로 즉흥연주를 할 여지는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몇몇 학자에 따르면 이렇게 상당히 구조적인 음악 만들기는 뉴딜 시기 동안에 대형화된 산업, 노동조합, 정부 기구의 성장 등 미국인의 삶에서 증가하기 시작한 관료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한다."(172)


"비록 스윙이 오늘날에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악 정도로 여겨지지만, 초창기 시절 스윙의 핵심적인 관객은 대학생 정도 나이의 청년과 십대 소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터버그(jitterbug: 지르박)'라 불리던 열정적인 젊은 춤꾼은 좋아하는 밴드의 음반을 공부하고, 완벽한 스텝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며, 팬클럽을 만들고, 팬 잡지를 사고, 때로 도시에서 도시로 좋아하는 밴드를 따라다녔다[예상대로 스윙 열풍은 학부모들의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빅 밴드는 미국 대중음악에 젊은 에너지를 새삼 불러왔다. 전성기 시절 스윙은 흑인의 미학에 영향을 받은, 그리고 질식할 것 같던 경제 공황에서 이제 막 벗어난 미국 안에 자라나던 낙관주의와 정확히 일치했던 야단스럽고 활기찬 음악이었다. 비록 빅 밴드 대부분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취를 감췄지만, 스윙의 음악적·문화적 영향력은 전후 R&B와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 종국에는 로큰롤에 이르기까지 강력하게 지속되었다."(177)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사이에 일어난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이른바 '노래하는 카우보이'들의 부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행한 삼류 소설, 혹은 카우보이 노래 모음집의 발간, 또 톰 믹스 같은 무성영화 스타들의 영화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카우보이의 영웅적 이미지는 이후 수많은 컨트리 음악인에게 도입되었는데, 대공황 시기에 종종 폄하되곤 했던 힐빌리의 이미지를 대체했다. 남부와 마찬가지로 거친 서부 역시 오랫동안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역으로 자리해왔는데, 특히 미국인이 자신들의 역사, 전통, 성격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이미지와 이야기의 보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미국 대중문화에서 남부의 이미지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본적으로 전통, 종교적 도덕성, 그리고 과거를 전형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데 반해, 서부는 운동, 독립, 미래 등의 소재와 흔히 연관되곤 했다. 곧, '웨스턴(서부)'이라는 용어는 '힐빌리'의 대체물이 되었다."(199)


7 Choo Choo Ch’Boogie: 제2차 세계대전 이후(1946~195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0년 동안 음악 산업은 음악의 소리와 영상 이미지를 재생하고 전송해주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 독일과 일본에서 개발된 '자기 테이프 녹음'은 기존에 통용되던 음악 녹음 방식을 뛰어넘는 다양한 이점이 있었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마스터'로 쓰일 포노그래프 음반 위에 직접 녹음하는 공정에 비해 테이프 녹음은 훨씬 폭넓은 사운드를 담아내는 데 용이했다. 이에 더해 테이프 녹음은 연주자가 이전 연주에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녹음할 수 있고, 녹음한 소리에 다양한 층위를 더할 수 있었다." "라디오 방송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의 기술적 발전에 영향을 받았다. 1920년대 초반 이래로 이 분야를 지배하고 있던 AM 방송 기술에 더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FM 방송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음반 산업계가 새로운 위협으로 여겼던 텔레비전은 1950년대 중반이 되면 새로운 가수와 음반을 출시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216-9)


"1946년 즈음에 대중의 관심은 베니 굿맨, 카운트 베이시, 글렌 밀러 같은 유명한 연주자 또는 밴드리더에게서 새로운 세대의 크루너로 옮겨 가고 있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 사이에 최고의 인기를 구사한 가수─프랭크 시나트라, 페리 코모, 냇 '킹' 콜, 도리스 데이, 조 스태퍼드, 페기 리 등─대부분은 스윙 시대에 자신의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이들인데, 이들은 점차 늘어가는 십대 청취자를 대상으로 홍보되었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있었던 AFM의 녹음 금지 사태─연주자에게는 해당되었지만, 대부분의 재능 넘치는 보컬리스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는 빅 밴드와 함께 노래하던 가수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악을 (때로는 합창단을 반주로 삼아) 녹음하도록 내모는 계기가 되었다. 기업 운영에 정통한 이들 혹은 최고의 사업 대리인과 함께 이 가수들은 이 기회를 오래 지속될 성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219-20)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남부의 전통에 뿌리를 둔 대중음악 형식이 새롭게 다시 등장했다. '레이스' 음악과 '힐빌리' 음악 같은 옛 범주의 음악은 일련의 개명 과정을 거쳤는데, 이는 변화된 사회적 태도, 남부 음악의 경제적 잠재력에 대한 음악 산업계의 인식 변화 등을 두루 반영한 결과였다. 1942년에 《빌보드》는 이러한 음반에 대해 분류를 시작했는데, 이러한 음악을 하나의 범주인 '웨스트 앤드 레이스'로 포괄하더니 이 혼성적인 명칭은 다시 '아메리칸 포크 레코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949년 《빌보드》는 '레이스'와 '힐빌리'를 좀 더 품격을 높이고 현대식으로 변형해 'R&B'와 '컨트리 앤드 웨스턴'이라는 용어로 각각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들 컨트리 앤드 웨스턴과 R&B음악의 성공은 전쟁 직후 기간에 일어난 수많은 작은 독립 음반 레이블의 재부상에 빚을 지고 있다. 이들은 주요 업체들이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미국 대중음악 지도의 영역을 개척하는 데 열성적인 노력을 기울였다."(235-7)


# 리듬 앤 블루스(R&B) 음악

1. 점프 블루스(jump blues) : 강력한 스윙풍, 부기우기풍의 파키 음악을 전문적으로 연주 

2. 블루스 크루너(blues crooner) : 블루스와 팝 가창을 혼합한 쿨한 스타일의 접근 방식

3. 시카고 일렉트릭 블루스 : 도시적 감상을 지향하는, 한층 거칠고 요란스러운 유흥가 음악

4. 보컬 하모니 그룹 : 흑인 교회에서 훈련받은 젊은 가수들이 만들어낸 세속적인 대중음악


#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

1. 컨트리 크루너 : 팝 중심적 스타일에 특화되어 컨트리 음악과 팝 음악 간에 가교 역할

2. 블루그래스(bluegrass) : 전통 남부음악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단장한 신고전주의

3. 홍키통크(하드 컨트리, hard country) : 길가 술집 같은 곳의 소리와 정서를 담은 음악


8 Rock Around the Clock: 로큰롤(1954~1959)


"1950년대 중반에 등장한 로큰롤은 미국 대중음악, 더 나아가 세계 대중음악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로큰롤의 등장은 문화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그 중요성 때문에 로큰롤이라는 장르를 신화화하거나 장르에 대한 흔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다음의 문제를 한 번 곱씹어보자. 우선 로큰롤은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 혹은 단일한 스타일의 음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로큰롤은 젊은 세대를 주 향유층으로 공략했던 최초의 대중음악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로큰롤이 미국 대중음악 역사상 백인과 흑인이 함께 어우러져 즐겼던 최초의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로큰롤'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틴 팬 앨리', '힐빌리 음악', R&B'와 같이 철저히 상업적이며, 단지 마케팅 방편으로 새로운 음악 팬을 겨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로큰롤이라는 장르가 노린 새로운 음악 팬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등장하는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였다."(266)


"1950년대에 청소년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새로운 세대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대개 이런 종류의 집단은 춤, 패션, 말투, 음악 등 자신을 대표할 그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의 상징을 갖추어야 했다. 1950년대의 경제적 풍요로움은 이 세대에게 전례 없는 강력한 구매력을 부여했고, 이 세대는 자신의 입맛과 정체성에 어울리는 새로운 여가와 유흥 문화에 시간을 투자했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기성 상업 문화에 의해 조작된 제품과 유행 간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세대 스스로 선택한 제품과 유행 간의 변덕스러운 주고받기 관계가 성립되었다. 로큰롤은 1950년대 초반과 중반에 점점 늘어나는 젊은 세대의 예기치 못한 음악적 선택의 결과로 등장했는데, 1950년대 말에는 주류 음악 산업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 및 복제된 문화였으며, 1960년대에는 이러한 십대가 어른이 되어 그들 스스로 제품과 마케팅을 통해 통제력을 갖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재생산한 문화였다."(267)


"로큰롤과 청소년 혹은 청소년기의 밀접한 관계는 1960년대에 이르면 서서히 마무리되기 시작하는데, 로큰롤을 들으며 자란 기성세대가 더 성숙한 형태의, 그리고 동년배를 위해 음악을 만드는 주체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새로운 음악을 그냥 '록'이라고 줄여 불렀다. 로큰롤이 가진 세대적인 문화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또 한 가지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기존의 시장 구조가 인종적이고 지역적인 구도에서 세대적인 시장으로 재편되면서 미국 문화의 풍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1950년대에 로큰롤 음반은 흑인만이 다니는 도심 공립학교의 댄스파티에서, 혹은 백인이 다니는 교외의 사립학교에서, 혹은 시골 사교 모임에서 모두 울려 퍼졌다. 이것은 인종, 계급, 지역이 극단적으로 나뉘어 있던 1950년대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실로 독특한 문화적 현상이었다. 로큰롤 음악은 이 단절적인 대중의 구분 사이에서 징검다리 같은 역할을 했다."(270)


"로큰롤의 등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커버 버전이라고 불리는 상업적·음악적 흐름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이것은 단순히 다른 가수가 이전에 불렀거나 연주했던 음악을 다시 녹음하는 작업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음악의 실천가, 사업가, 학자들은 이 단어를 종종 훨씬 더 제한적인 의미, 즉 종종 원곡 스타일과 감수성을 포함시켜 기존에 녹음되었던 연주를─때로는 거의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다시 녹음해 경제적 이득을 얻는 형태의 행위로 사용한다. 물론 음악에서 무언가를 빌리는 행위는 음악 자체만큼이나 뿌리가 깊은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효과가 발견되면서부터, 사회적 불평등이 발견되면서부터 이 행위는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의 전통·스타일·연주자가 다른 전통·스타일·연주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그 자체로 일종의 음악적 차용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빌린다'는 행위는 종종 '훔치는'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271)


9 Good Vibrations: 미국 대중음악과 브리티시 인베이전, 1960년대


"1960년대 초는 보통 미국 대중음악 발전 단계에서 일종의 혼탁한 시기, 혹은 초기 로큰롤 시대의 흥분과 1964년에 비틀스가 미국에 입성하기까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던 시기쯤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흐름이 등장했다. 먼저 〈The Twist〉와 여타 다른 종류의 댄스음반의 범람으로 촉발된 사교댄스 열풍이 그것인데, 로큰롤 음악에서 처음으로 일련의 새롭고 특징적인 움직임과 함께 그에 어울리는 사회적 관습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로큰롤을 듣고 자란 첫 세대는 작사가와 작곡가의 위치에서 음악 산업의 실권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로큰롤의 새로운 스타일이 지닌 잠재력이 캘리포니아에서 등장했는데, 이 흐름을 이끈 것은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와 그 리더 브라이언 윌슨이었다. 윌슨은 혁신적인 연주자, 작가,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통합시킴으로써, 앞으로 나올 수많은 뮤지션의 모범적인 롤 모델을 만들어냈다."(311)


"보컬 그룹 테디 베어스의 멤버로 데뷔한 열일곱 살의 필 스펙터는 스승으로 모신 제리 리버와 마이크 스톨러를 모방하는 대신에 자신의 위치를 작곡가 겸 프로듀서로 설정했고, 1960년대 로큰롤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 무대 뒤에서 일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그는 이 신생 사업에서 어느 쪽이 떠오르는 진짜 권력인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는데, 그 권력이란 바로 음반의 '소리'를 결정하는 사람들이었다." "필 스펙터와 함께 일했던 작곡가의 면면을 언급하는 것은 마치 1960년대가 낳은 가장 천재적인 재능의 보유자를 모두 나열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를테면 캐롤 킹과 제리 고핀, 베리 만과 신시아 웨일, 제프 베리와 엘리 그리니치 콤비가 그들이다. 이들과 같이 재능 있는 작곡가를 위해 뉴욕에 있는 브릴 빌딩(브로드웨이 1619번지)과 근처의 다른 사무실들에 작업 공간이 마련되었는데, 피아노가 놓인 좁은 방에 여러 명이 빽빽이 모여 가수와 인디 레이블에 제공할 곡을 써냈다."(316-8)


"같은 시기에 디트로이트에서는 배리 고디 주니어라는 인물이 필 스펙터의 필레스 레코드사와 유사한 형태의 작곡, 프로듀싱, 마케팅 조직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타운[미국 자동차 산업의 본거지인 디트로이트의 별명인 모터 타운(motor town) 혹은 모터 시티(motor city)를 본뜬 이름]은 필레스 레코드사를 훨씬 능가하는 성공담을 써 내려갔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미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악 산업 전체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성공담이었다는 점이다." "모타운의 음악은 단순히 흑인 청취자만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 팝 음악을 최대한 넓은 범위의 청취자에게 들려주고자 노력했다. 그가 차별을 둔 유일한 요소가 있다면 로큰롤처럼 '세대'라는 범주였다. 모타운의 음악은 다양한 인종과 지역, 계급을 넘나들 수 있도록 고안되었지만, 레이블의 좌우명에서 알 수 있듯이 본질적으로는 '젊은 미국의 소리(the sound of young America)'였다."(321-2)


"1964년 2월 초 비틀스가 미국에서 그들의 〈I Want to Hold Your Hand〉를 내놓고 처음으로 정상에 오른 바로 그 시점에, 그들은 이미 고향인 영국을 비롯해 유럽에서는 익히 알려진 인기 스타였다." "역사적으로 미국 대중이 영국에서 건너온 문화에 대해 일종의 로망을 품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는 해도, 미국의 비틀 마니아(beatle mania)처럼 본국 출신이 아닌 팝 뮤지션에게 이 정도로 엄청난 집착을 보인 것은 분명 전무후무한 일이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초였던 비틀스의 전국적인 성공과 함께 시작된 영미 팝 음악 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에 미국 차트에서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에릭 클랩튼, 엘튼 존, 스팅, 오아시스 등 상당수가 영국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지점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미국이 점점 더 공공연하게 전 세계로부터 팝 음악의 영향을 취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신호였다는 점이다."(332-5)


10 Blowin’ in the Wind: 컨트리, 소울, 어번 포크, 록의 등장, 1960년대


"절충주의적 음악들이 팝 차트의 전면에 등장하던 1950년대와 1960년 동안에도 주류 시장에 뛰어들지 않은 대중음악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며, 특별히 선택된 혹은 지역 대중을 대상으로 준비된 아티스트와 음반이 그렇지 않은 음악보다 팝 차트에 진출할 확률은 훨씬 낮았다. 뉴욕과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팝 혹은 록 중심의 라디오 방송을 듣던 로컬 음악 팬이라면 1960년대 내내 벅 오언스나 멀 해거드 같은 뮤지션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을 비롯해 조지 존스, 소니 제임스, 웹 피어스, 키티 웰스, 로레타 린 등 도시의 라디오 방송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컨트리 가수들은 같은 시기에 미국의 남부나 서부의 컨트리 방송국에서는 필수적인 레퍼토리였다." "이 시기의 젊은 컨트리 아티스트 대부분은 엘비스나 버디 홀리의 로커빌리 스타일 대신, 홍키통크에 뿌리를 둔 사운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이 새로운 스타일은 이른바 '내슈빌 사운드'라고 불렸다."(356-8)


"레이 찰스는 훌륭한 작곡가로서 초기 R&B 히트곡, 이를테면 〈I've Got a Woman〉이나 〈Hallelujah I Love Her So〉 같은 고전을 써냈다. 또한 탁월한 편곡자이자 이례적일 만큼 빼어난 키보드 연주자로서 주류 팝의 문법뿐 아니라 재즈에도 통달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뛰어난 보컬리스트였던 그는, 한번 들으면 결코 잊기 힘든 독특하고 강렬한 표현력이 담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찰스의 가장 개성적인 녹음들은 그저 단순히 빼어난 개인적 표현에서 더 나아가 미국 대중음악 스타일에 관한 독창적이고 포괄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1950년대에 레이 찰스가 개척한 가스펠-블루스 조합의 음악이 본질적으로 소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중요한 소울 가수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음악은 제임스 브라운, 아레사 프랭클린, 커티스 메이필드, 오티스 레딩, 슬라이 스톤 등 수많은 가수에게 수량화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361-2)


"어번 포크 음악을 이끌어간 밥 딜런은 뉴욕에서 부상하고 있던 어번 포크계에서 어쿠스틱 싱어송라이터로서 이력을 시작했다. 1960년대는 그야말로 어쿠스틱 어번 포크 음악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베이비부머들이 대학에 갈 나이가 되자 문화와 정치에 대한 관심과 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이들은 전통적인 포크 음악을 비롯해, 당시의 현안(소련과의 냉전, 핵무기 개발과 실험, 인종 문제 등)을 다룬 '브로드사이드(broad-side)'의 주요 구독자로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1962년에는 가장 유명한 포크 스타 킹스턴 트리오조차 피트 시거의 매력적인 반전(反戰)곡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을 녹음했고, 이는 예상하지 못한 팝 히트곡(21위)이 되었다. 이것은 어번 포크 운동과 당대의 청중 사이에 점점 증가하고 있던 정치 의식화를 증명하는 부분으로, 결국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의 성공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 이듬해에 나올 〈Blowin' in the Wind〉의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373-4)


"로큰롤은 음악을 즐기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재밌는' 음악, 즉 대개 밝고 영리하며, 심각하지 않은 메시지를 담은 음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의 로큰롤에서 이미 변화의 바람은 불기 시작했다. 밥 딜런의 일렉트릭 스타일과 포크 록의 주창은 팝 음악계에 일종의 성장 호르몬을 주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이비부머가 어른이 되었듯이 로큰롤도 어느날 갑자기 어른의 음악이 된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고, 로큰롤은 록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급격히 성장해버렸다. 심각한 주제를 다룬 팝 음반, 정치적이고 시적 가사를 담은 음악이 온갖 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박동은 곧 살펴볼 야심찬 콘셉트 앨범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1960년대 말 그야말로 강렬하고 믿을 수 없이 혁신적인 창의적 음악으로 팝계가 꽃을 피웠던 그 시절이 도래하고 있었다(물론 어른이 된다는,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압박은 또한 허세에 가득 찬 음악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380)


"1960년대 말 새로운 록 음악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와 당대를 규정하는 정치적·사회적 불만의 결합은 곧 저 유명하고도 다루기 어려운 문화 현상, 바로 반문화(counterculture)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그렇게 구조적이거나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흐름은 아니었다. 종종 신화적으로 묘사되곤 하는 반문화의 주축들이 베트남 전쟁 등을 반대하고 인권운동을 지지하던 젊은 록 팬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 중에는 나이든 기성세대도 적지 않았고, 그들 중 대다수는 새롭게 등장한 젊은 록 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가령 젊은 록 팬의 상당수는 아예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보수적인 정치적 의제를 지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운동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을 선포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운영해가는 체제에서 여성이나 유색인종이 늘 배제되던 한계도 있었다."(385)


11 1970년대: 록 음악, 디스코, 그리고 팝의 주류


"냉소주의가 퍼지는 가운데 1960년대 후반의 이념 대립은 수그러질 줄 몰랐고, 대중음악은 1920년대와 1950년대의 재즈와 로큰롤에 대한 '불안'과 똑같은 모양으로 보수적인 정치인과 정치 평론가의 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1970년대가 정말 흥미로운 것은, 미국 사회가 보수적인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에 정확히 발맞추어 히피 복장과 속어, 사이키델릭 이미지, 그리고 록 음악이 AM 라디오, 네트워크 델레비전 방송,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주류 문화로 진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이 역시 1920년대와 유사한데, '재즈 시대'는 강력한 정치적 보수주의 시기에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반 대중음악 시장은 크게 두 범주의 소비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우선 새로운 십대 신세대 계층으로, 이들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들이다. 그리고 스물다섯 살부터 40대에 이르는 연령대의 성인으로, 이들은 로큰롤과 함께 성장해 조금 더 성숙된(말하자면 좀 더 보수적인) 즐길 거리를 찾는 이들이었다."(408)


"많은 미국인이 1960년대가 그냥 가버리기를 희망했지만, 또 다른 이들은 그 시대가 져버린 것에 애도를 표했다. 지미 핸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도어스의 짐 모리슨의 죽음, 무엇보다 록 음악의 성취감을 때로는 과잉될 정도로 고취시켰던 비틀스가 해산함으로써 종말을 고한 반문화는 록 음악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1970년 12월 31일 폴 메카트니는 공식적으로 비틀스와의 사업적 유대 관계를 해지한다는 내용이 담긴 짧은 법률 문서를 접수했다. 많은 록 음악 팬에게 이 '팹 포(Fab Four)'의 파국은 1960년대가 마감된 데 대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였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이것이 록 음악 자체의 절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후반에 록이 주류 대중음악의 정반대편으로 규정되는 반문화 운동의 음악이었다면, 1970년대 록은 주류 대중음악을 다시 정의 내리게 도왔으며, 확장되고 더욱 중앙집중화된 연예 산업의 가장 주요한 수입원으로 성장했다."(409)


"1970년대 동안 컨트리 앤드 웨스턴 음악은─이제는 그냥 '컨트리'로 통용되는─하나의 거대한 사업으로 성장해 남부 백인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청취자를 강화하는 동시에 젊은 중산층 청취자에게까지도 다가가게 되었다." "컨트리 음악의 인기로 돈을 번 팝 가수를 한편에, 주류 팝으로 나아간 인정받는 컨트리 음악인을 다른 한편에 두는 이분법은 197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 컨트리 스타인 올리비아 뉴튼존과 돌리 파튼의 사례에서 잘 나타난다." "1970년대 후반 뉴튼존이 영화《그리스》(1978)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통해 컨트리 음악을 버리고 대세이던 옛 로큰롤 스타일의 음악으로 갈아타면서, 골수 컨트리 팬이 평소에 품은 의혹은 상당 부분 정당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좀 더 공정하게 보자면 뉴튼존이나 덴버 같은 이른바 팝 기회주의자들이야말로 1970년대 내내 컨트리 음악의 청취자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415-8)


"로큰롤의 자신만만한 후손인 록은 1970년대에 걸쳐 음악 산업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비틀스, 밥 딜런, 브라이언 윌슨,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을 받은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인들은 스스로를 예술가로, 그리고 그들의 녹음을 하나의 예술 작업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종종 자아도취의 찌꺼기 같은 결과물로 이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중 몇몇은 롱 플레잉(long-playing: LP) 레코드라는 매체를 적극 활용해 획기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을 창조해냈다. 록 공연의 거대한 규모, 콘서트의 엄청난 소리와 극적인 광경은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 즉 팬이 만든 하나의 잠정적 도시라는 강렬한 본능적 감정을 이끌어냈다. 동시에 음악 산업은 록 음악의 매력을 일부 끌어와 가령 '팝 록'과 '소프트 록' 같은 장르를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록의 인기를 확장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며, 톱40 라이도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에 홍보되었다."(425-6)


"디스코 시대는─대략 1975년부터 1980년까지─록 음악에 대한 거대한 대중적 대안의 출현을 의미했다." "디스코는 밴드의 중요성을 덜 강조했고 그 대신 음반 작업을 감독하는 프로듀서, 나이트클럽에서 이 음악을 트는 디스크자키, 그리고 익명의 스튜디오 음악인의 뒷받침 속에 노래했던, 종종 경력을 짧게 마감한 화려한 가수에 음악의 초점을 맞췄다. 또한 디스코는 개별 조각의 모음으로서 마치 건축물같이 디자인된 록 음악의 개념을 거부했다. 한 번에 몇 시간을 계속 춤추고자 하는 관객을 위해 디스크자키는 기존의 싱글 음반을 재발굴해 12인치 LP 음반의 용량을 채울 만큼 길이를 늘려야 했으며, 동시에 곡을 중간에 끊지 않고 한 장의 음반에서 다른 음반으로 넘어갈 수 있게 소리를 섞는 기술을 개발해야만 했다(이러한 턴테이블 기술은 힙합, 하웃, 테크노 등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대중 장르에서 활요될 기존 음반을 사용하는 방법에 길을 터놓았다)."(438-9)


12 아웃사이더의 음악: 프로그레시브 컨트리, 레게, 살사, 펑크, 훵크, 랩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주류 컨트리 음악은 깔끔한 내슈빌 사운드가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고, 하드코어 컨트리의 기수 멀 해거드를 위시해 AM 톱40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던 컨트리와 팝의 다양한 혼합이 그러한 흐름을 이끌었다. 하지만 신세대 컨트리 뮤지션들은 1960년대 반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음악과 태도를 음악 안에 포용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레시브 컨트리라고 불리는 음악은 베이커스필드 컨트리 음악에 담긴 홍키통크와 로커빌리의 결합, 싱어송라이터 장르(특히 밥 딜런의 작품), 1960년대 말 버즈의 멤버였던 글램 파슨스 등의 컨트리 록 스타일 음악에 두루 영감을 받은 장르다. 일반적으로 프로그래시브 컨트리 뮤지션은 당대의 동료보다는 훨씬 지적이고 자유로운 내용의 곡을 주로 썼고, 히트곡 위주의 작품 활동에서 벗어나 컨트리 음악 전통의 한계를 새롭게 실험하는 데 더욱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이런 아티스트들은 상당수의 컬트 팬을 만들어냈다."(448)


"레게(raggae)는 카리브 해 지역의 민속음악과 미국의 R&B가 만나 만들어진 장르로, 록 시대에 제3세계에서 건너온 최초의 음악 스타일이다. 미국 내 레게의 인기는 흔히 이전 시대의 '이국적' 음악 열풍─아르헨티나의 탱고와 쿠바의 룸바─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도래할 월드 비트 운동과 연계해서 이해할 수 있다. 자메이카의 변두리 빈민가 킹스턴에서 탄생한 레게는 1973년 미국에서 첫 성공을 거두었는데, 1970년대에는 밥 말리와 지미 클리프로 대표되는 소수의 자메이카 뮤지션이 미국 내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미국과 영국의 록 뮤지션, 이를테면 에릭 클랩튼, 폴 사이먼, 폴리스, 엘비스 코스텔로 등의 뮤지션이 이 장르에서 영감(그리고 수익)을 얻었다. 또한 1980년대의 랩 음악 역시 자메이카의 '더브(dub)' 음악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더브란 기존에 녹음된 음악 반주에 맞춰 그 위에 말로 이루어진 퍼포먼스를 입히는 레게 전통의 한 갈래였다."(453)


"록 음악이 대중음악계에서 그 존재감을 공고히 하고 있던 1970년대에 라틴 음악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눈에 띄게 쇠퇴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틴 스타일과 아프리카계 미국 R&B, 재즈 등이 뒤석여 만들어진 '부갈루' 현상의 여파 이후─그리고 심지어 맘보와 기타 기반 록 음악의 성공적인 결합 이후에도─뉴욕의 라틴 음악인은 대부분 손 몬투노(son montuno) 형식에 뿌리를 둔 쿠바 댄스음악의 치피쿠(tipico: 전통적) 사운드로 회귀했다." "이런 음악적 보수주의에 대항해 1970년대는 리듬이 강조되고, 화성적으로 진보된 음악 스타일이 뉴욕의 댄스 클럽에 새롭게 상륙했다. 이 장르의 이름은 살사 혹은 '(핫)소스'로 불렸는데, 이는 라틴 음악인 사이에서 강렬하고 열정적이고 리드미컬한 음악을 칭하던 하나의 은유적 표현이었다. 재즈, 스윙, 로큰롤 같은 단어처럼 살사는 하나의 미적 감수성일 뿐 아니라 장르 구분을 의미하기도 하고, 마케팅적인 상표의 이름이기도 했다."(459)


"1970년대에 모습을 드러낸 첫 '대안적(alternative)' 물결은 바로 록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록은 1960년대 반문화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출발했지만, 1975년에 이르면 대중적 취향의 중심부와 위태롭게 가까워졌고, 이러한 변화는 몇몇 젊은 음악인들에게는 록의 반항적이고 혁신적인 잠재력이 가식적인 응석받이 록 스타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대형 음반사들에 의해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펑크 록─권위에 반항하고 중산층의 가치를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하나의 문화양식으로서─의 황금시대, 즉 상업적이고 인위적인 록 음악에 대항하는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basics)〉라는 혁명은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지속되었다. 그와 연관된 음악적 장르와 감수성은 오늘날의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에게 심오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펑크 록과 함께 나란히 등장한 뉴 웨이브 음악은 더욱 의식적으로 예술적이며 실험적인 방식으로 록의 상업주의를 비판해나갔다."(464-5)


"펑크 록은 명품 선글라스, 리무진 창문, 저택 벽 뒤에 숨은 록의 가식과 백만장자 슈퍼스타에 대한 저항이었다. 훵크 음악(funk music)은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철학을 내세운 또 다른 움직임으로, 기본적으로는 춤을 향한 박동이었다. 대부분의 AOR(album-oriented rock)은 주로 백인 남성 청취자를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춤보다는 감상을 위한 음악이었다. 그에 반해 도시 공동체에서 흑인의 춤은 여전히 사회 생활의 주요한 뼈대로, 전통적인 가치를 전달하고 진기함과 흥분을 만들어내는 주된 도구로서 남아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 불어닥친 트위스트 열풍 이후 처음으로 훵크 음악, 그리고 그 후손인 디스코는 강렬한 춤의 열기를 다시금 팝의 한복판으로 가져오고야 만다." "훵크는 R&B와 팝의 크로스오버 시장을 지배하던 말랑말랑한 소프트 소울의 지배에 대항하여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이 가진 가치를 격렬하게 재확인시켰고, 1970년대 중반 더욱 상업화된 디스코 음악 사운드의 초석을 닦았다."(476-7)


"힙합 문화는 뉴욕에 살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푸에르토리코인, 캐리비안계 미국인 등에 의해 구축되었는데, 독창적인 시각 예술(그래피티), 춤[브레이크댄싱으로 불리는 곡예적인 솔로 춤과 프리크(freak)라고 불린 열정적인 커플 댄스], 음악, 옷, 언어를 포함하고 있다." "힙합을 낳은 청년 문화는 한편으로 전통적인 가족 또는 이웃 기반의 시설과 지역 문화 센터 같은 공공기관에 대한 지원 중단에 좌절한 이들의 사회적 저항이자, 또 한편으로는 괴리되고 적대적으로 뒤바뀐 도시 환경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시도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힙합은 브롱크스의 특정 지역, 즉 뉴욕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황폐화된 지역에 국한되어 벌어진 현상이었다. 힙합 문화가 지역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지어 전 세계로 동시에 홍보되는 오늘날의 멀티 플래티넘 랩 음반조차 특정한 지역이나 도시 환경의 특징, 사회적 그룹과 관계망에 관한 내부적 언급으로 가득하다."(482-3)


13 1980년대: 디지털 테크놀로지, MTV, 그리고 팝 음악의 종류


"1980년대는 팝 음악의 제작에 혁명을 가져올 기술이 대거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디지털 녹음 기술의 발전은 5인치짜리 콤팩트디스크(CD)의 개발로 이어졌고, 이는 한편으로 비닐 레코드의 급속한 몰락을 의미했다." "디지털 기술은 사운드를 프로듀스하고 조작하는 새롭고 더욱 저렴한 기기들─드럼 머신, 시퀀서, 디지털 샘플링을 위한 샘플러─그리고 이러한 기술을 표준화해 다른 제작사가 만든 기기들과 상호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규약인 악기 디지털 인터페이스(MIDI)의 탄생을 불러왔다. 휴대가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디지털 기술과 1990년대 초 개인용 컴퓨터의 급속한 팽창은 음악인들이 개인 홈 스튜디오를 꾸며 힙합, 테크노 같은 새로운 장르를 성장시키도록 자극했다. 인공위성 기술은 사상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의 전 세계 동시 중계를 가능하게 했으며, 광섬유의 발전은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음악인까리 실시간으로 스튜디오 녹음을 합작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492-3)


"연예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는 케이블 텔레비전의 성장과 폭발로 곧바로 이어졌는데,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산물은 바로 1981년에 출범한 뮤직 텔레비전(MTV)이었다. MTV는 산업의 작동 방식을 바꾸었고, 신인을 데뷔시키고 최신 음악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가장 선호되는 매체로 급속히 성장했다. MTV에서 처음 방송된 노래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Video Killed the Radio Star〉였지만, 실제로 MTV─그리고 좀 더 나이 든 25~35세 청취자를 공략했던 자매 방송인 VH-1─는 라디오, 그리고 다른 미디어와 상승 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록 슈퍼스타들을 끊임없이 배출해냈다. 또한 MTV는 1980년대 초 팝 음악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유리스믹스, 폴록 오브 시걸스, 애덤 앤트, 빌리 아이돌, 토머스 돌비 등 영국 아티스트를 널리 홍보함으로써 이른바 제2의 브리티시 인베이젼이라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자 MTV의 영향력은 음악 산업 전반에서 뚜렷이 감지되었다."(493-4)


"컨트리 음악은 60년의 여정을 거쳐 주변부에서부터 중심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었고, 록과 팝 성향의 컨트리 슈퍼스타 가스 브룩스, 클린트 블랙, 리바 매킨타이어 등을 내세워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악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1970년대 초 이후 극심한 세분화의 과정을 겪고 있던 록은 수백 가지의 세부 장르와 서브 장르로 나뉘었고, 이중 몇몇(어덜트 컨템퍼러리, 헤비메탈)은 대규모의 팬을, 몇몇(하드코어, 트래시, 테크노, 펑크 록, 유로 디스코)은 규모는 작지만 충성스러운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랩 음악은 1970년대 중반 흑인·라틴·캐리비안 계열 미국인들의 청년 문화로 뉴욕에서 등장해, 1980년대에 이르면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산업으로 발전했다. 1990년대 동안 중심부와 주변부, 주류와 비주류 음악 간의 관계는 더욱더 복잡해져, 의도적으로 반상업적인 기치를 내건 장르인 갱스터 랩, 스피드 메탈, 그런지(grunge) 등이 《빌보드》 앨범 혹은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495)


14 Smells Like Teen Spirit: 힙합, '대안적' 음악, 연예 산업


"20세기 말로 접어들면, 성공한 팝 음악에서 일관된 스타일이 더는 발견되지 않는다. 1990년대의 베스트셀러를 되짚어보면 이른바 '어덜트 컨템퍼러리' 디바라고 불리던 셀린 디옹, 자넷 잭슨, 머라이어 캐리를 비롯해 컨트리 음악 스타 클린트 블랙, 리바 매킨다이어, 샤니아 트웨인, 가스 브룩스가 공존했고, 4인조 R&B 보컬그룹 보이즈 투 맨, 갱스터 래퍼 스눕 도기 독, 투팍 샤커, 노토리어스 B.I.G., 하드 록과 헤비메탈 밴드 에어로스미스와 메탈리카, 펑크에서 영향을 받은 얼터너비트 록 밴드 너바나, 펄 잼,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자기 고백적 '얼터너티브 싱어송라이터' 앨러니스 모리세트, 기록적인 인기를 모은 낭만적 사운드트랙 앨범 《The Bodyguard》(1993)와 《Titanic》(1996)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 장르가 차트를 나누어 가졌다. 음반 회사들이 신세대 팝 슈퍼스타를 발굴·홍보하는 데 어느 때보다도 혈안이 되면서 신인의 앨범 역시 매우 성공적이었다."(540)


"1986년과 1987년을 힙합의 새로운 시장이 탄생한 시기라고 본다면, 1988년은 그보다도 더 중요한 전환점이 만들어진 시기다. 바로 MTV 최초의 힙합 전문 프로그램의 출범이 그것이다. 힙합 이야기꾼인 팝 파이브 프레디 브레이스웨이트는 신설 프로그램 《요! MTV 랩스》를 진행했는데, 이는 방송국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인 프로그램으로 등극해 일일 방송으로까지 확대 편성된다." "랩 음악의 주류 입성은 몇 가지 흥미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몇몇 래퍼와 프로듀서가 그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멀티 플래티넘 크로스오버 히트곡에 쏟아붓는 한편, 다른 이들은 '팝 랩'이라고 불리는 상업주의에 저항하면서 〈The Message〉 같은 음악에 담겼던 사회적 진실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상반된 노력은 훨씬 더 강렬한 하드코어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랩 역사상 가장 유명한 크로스오버 히트곡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547)


"디스코 열풍을 잇는 동시에 힙합과 어깨를 나란히 할, 새로운 형태의 일렉트로닉 댄스음악이 1980년대 미국의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그리고 런던, 뒤셀도르프 등 유럽 도시에서 동시에 발전되었다. 1980년대 장르인 개러지와 하우스 음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스타일은 후에 테크노(techono)라는 개념으로 느슨하게 묶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 형태와 양상은 매우 다양했다." "테크노는 주로 댄스 클럽, 그리고 레이브(rave)라고 불리는 반(半)공공행사에서 연주되었는데, 이는 1960년대 반문화와 히피 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본질적으로 테크노는 전체 청년 문화에서 음악적인 한 영역으로서, 그 안에서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의 차이는 장르의 역사에 흐르는 맥락과 공유된 지식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다. 테크노 문화는 디스크자키 및 프로듀서에게 그 역할이 집중되어 있으며, 이들은 디스코나 힙합과 달리 종종 익명으로 일하며 음지에 숨어 기계를 움직인다."(561-2)


"'얼터너티브 음악'이라는 일종의 만능적 개념을 다루는 데 문제가 되는 순간은 바로 전혀 다른, 심지어 서로 충돌하는 두 개의 개념을 함께 다뤄야 하는 경우다. '얼터너티브'라는 개념은 '언더그라운드'와 '인디펜던드'처럼 기존 음악에 저항하는 음악을 묘사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이 관점에서 얼터너티브 음악은 지극히 우상 파괴적이며 반상업적이고 비주류적이다. 그리고 추종자에게 얼터너티브는 상업적이기보다는 지역적이고, 대량생산적이기보다는 수제적이며, 가식적이기보다는 진정성 있는 음악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 이르면 대규모 음반 회사들이 인디 레이블을 야구의 팜 시스템(farm system)과 기능적으로 동일한 개념, 즉 차세대 대박 상품을 찾아내는 데 최적화된 작고 전문화되고 현장과 밀착한 조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돈이 되지 않는 음악으로서 얼터너티브 음악이라는 경제적인 정의는 유지되기 어려워졌다."(566)


15 결론


"미국인들은 종종 흑인과 백인의 음악이 마치 원래부터 뚜렷이 개별적으로 존재해온 것처럼 말하는데, 사실 이는 이른바 '짐 크로 법'에서 갈라져 나온 어떤 사회적 관념의 실체를 말해주는 것일 뿐이다. 인간을 인종으로 분류하는 이러한 방식은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닐 뿐더러, 사실 미국을 제외한 세계의 다른 곳을 메우고 있는 인류의 다양성이라는 측면과는 뚜렷하게 다른 입장이기도 하다. 물론 인종은 생물학적 사실이기보다는 사회적인 허구에 가깝지만, 그 허구는 사람들이 종종 그들이 만든 가상의 조상을 기반으로 목적을 성취하고 다른 사람들을 철저히 차별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음악에는 색이 없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19세기 민스트럴쇼에서 백인 연주자들이 처음으로 얼굴에 검은 칠을 한 것처럼 현대 대중문화에서 인종적 고정관념이 그 발전 과정에 중요한 추동력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597)


"섹슈얼리티와 젠더는 미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중심적인 또 하나의 정체성─고정관념을 반영하거나 혹은 깨뜨리거나─이다. … 실로 많은 대중음악이 사랑과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때로 공공 권력이 음악에 담긴 섹슈얼리티에 대한 표현을 다양한 방식으로 주시하고 검열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한편으로 정치 혹은 종교의 권력자들이 보았을 때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랑에 관한 표현이나 관점 역시 우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가령 동성 간의 관계나 동성애에 관한 묘사는 연예 산업에서 늘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한 가지 말해둘 것은, 수많은 팝 스타─예컨대 리틀 리처드, 데이비드 보위, 프린스, 마돈나─는 종종 의도적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불분명하게 하는 캐릭터를 구축해냈다는 점이다. 섹슈얼리티라는 측면에서 음악은 다층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 특히 최적화되어 있고, 이는 누가 듣느냐에 대한 실질적 척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598-600)


"미국인들이 계급 구별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될 때도 있으나, 계급의식은 세련된 방식으로 포장된 미국 대중음악의 수면 바로 아래에서 은밀히 끓고 있기도 하다. 척 베리의 〈Maybellene〉(1955)에서 여성을 쫓아다니는 남성의 이야기는 남성이 소유한 노동계급의 차인 V-8 포드와 여성이 타고 다니는 고급차 캐딜락 쿠페 드 빌로와 대조를 이룬다(엘리트 문화의 상징인 프랑스어의 사용 역시 그러한 대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크리스털스의 1962년 작 〈Uptown〉은 뉴욕의 사회적 지형을 잘 그려내고 있는데, '쉴 틈 없이' '다운타운(downtown)에서 일하는 젊은이의 일상을 추적하면서, 그가 일과를 마치고 사랑하는 사람의 거처가 있는 '업타운'으로 매일 저녁 돌아가 '왕(king)'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대개 그들의 계급적 소속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대중음악에는 부, 가난, 인간의 마음에 미친 경제의 영향에 관한 언급이 가득하다."(600-1)


"세대적 정체성은 새로운 스타일을 착취하고 창조하는 데, 또는 적어도 진기함을 표현하는 데 크게 의존하는 연예 산업에서는 지속적으로 활용된 주제였다. 대중음악은 미국의 청년 문화에 대한 관점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1920년대의 재즈 광란으로 시작해 로큰롤 시대와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청년 운동을 통해 세대 정체성은 미국의 음악 산업과 뮤지션, 관객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음악 산업은 이제 열두 살부터 열여섯 살 사이의 연령대, 즉 백스트리스 보이스, 스파이스 걸스,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세대와, 산업이 주로 치중하는 세대, 즉 록, 랩, 얼터너티브 음반을 구입하는 열일곱 살부터 스물다섯 살 사이의 젊은 성인층을 따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시대별로 사춘기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양하게 표현해온 팝 음악은 이제 우리가 각자의 나이에 맞게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서가 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장은 아니다."(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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