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 서해역사책방 7
안토니 비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제1부 세계가 숨을 죽이리라


"1941년 6월 21일, 지난 8개월 동안 발령된 80차례의 경고와 함께 독일의 의도가 점점 명확히 드러나자, 크렘린은 병적인 흥분 상태에 빠진 듯한 분위기였다. NKVD의 부책임자에게서 그 전날, 그러니까 6월 20일 하루 동안에 최소한 '독일 공군이 39회 이상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는 보고가 올라와 있었다. 독일 국방군의 전쟁 준비는 날이 갈수록 노골적이 되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복잡했던 스탈린은 그조차도 보다 많은 양보를 이끌어 내기 위한 아돌프 히틀러의 책략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스탈린은 대부분의 경고를 이른바 '영국의 선동'으로 간주했는데, 여기에는 소련의 숙적 윈스턴 처칠이 소련과 독일 사이에 전쟁을 유발하기 위해 꾸민 계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독일의 침공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여전히 행여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를 뱀의 최면에 걸린 토끼에 빗댄 괴벨스의 비유에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다."(18-21)


#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개전 소식이 알려지자, 스탈린그라드 기술대학 학생들은 벽에다 큼직한 지도를 내걸었다. 독일로 진격하는 붉은 군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지도였다. 당시 학생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던 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이 독일을 초전에 박살낼 거라고 생각했다.〉 공장에서 탱크와 전투기가 생산되는 뉴스 화면을 수도 없이 봐 온 그들로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업과 군사력을 과대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술적으로 후진국에 머물러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막강한 군사력에 대한 환상은 더욱 커졌다. 게다가 스탈린 체제의 권능이 적어도 국내에서는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한 탓에 소련 국민들은 그 체제가 천하무적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앞날에, 나아가 많은 공장과 공원과 깨끗한 고층 아파트들이 위대한 볼가 강을 내려다보는 시범 도시 스탈린그라드의 앞날에 어떠한 참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28)


"독일군 사령관들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이반(Ivan)', 즉 평범한 소련군 병사들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포위를 당하거나 명백한 수적 열세 때문에 다른 병사들 같으면 항복을 해도 벌써 했을 상황에서도 이 '이반'들은 끝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첫날부터 소련군 병사들의 남다른 용기와 희생은 사방에서 빛을 발했다. 물론 집단적인 공포심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련군의 전반적인 혼란에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1945년 종전과 함께 석방되어 조국으로 돌아온 포로들은 영웅 대접을 받는 대신, 스메르시(SMERSH)에 의해 그 길로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적군에게 생포된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반역죄를 면할 수 없다는 스탈린의 지침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7월 16일, 비테브스크 근교에서 독일군에게 생포된 자신의 아들 야코프와 부자 관계를 끊어버리기까지 했다."(48-9)


"독일에서도 전면전을 치르는 동안의 역학 관계는 필연적으로 강압적인 분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1941년 12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현재 위치를 사수한다는 히틀러의 입장에 반대했던 장군들은 하나같이 제거되었다. 히틀러는 강제로 브라우히치를 물러나게 한 뒤, 국가사회주의자의 의지를 갖춘 장군이 아무도 없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독일군은 스몰렌스크 동쪽에 굳건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가진 우리는 이제 1941년 12월 당시 독일군이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고 미국이 참전함으로써 추축국에 대한 힘의 균형이 지정학적, 산업적, 경제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의 심리적 전환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도시 이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결투의 양상으로 전개된 이듬해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다려야 한다."(78-9)


제2부 바르바로사의 부활


"전 세계의 이목이 독일군의 모스크바 진격에 쏠려 있던 1941년 11월, 동부 우크라이나의 전세는 숨가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남부 집단군의 진격이 정점에 달했던 11월 19일, 클라이스트가 이끄는 제1기갑군의 선봉은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돈 강변의 로스토프에 도착했다. 다음 날 그들은 카프카스로의 진격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인 이 거대한 강의 다리를 장악했다. 그러나 헝가리 군이 맡고 있는 독일군 선봉의 왼쪽 측면이 허술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소련군 사령관 티모셴코는 맹렬한 반격을 개시한 끝에 클라이스트의 부대를 격퇴했다. 모스크바와 카프카스의 유전이 둘 다 코앞에 와 있다고 믿었던 환상에 큰 상처를 입은 히틀러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게다가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들어 독일군 최초의 퇴각 사례로 기록된다는 점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렇게 해서 1942년 1월 6일, 그때까지 사단이나 군단을 지휘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는 파울루스가 졸지에 제6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게 되었다."(82-4)


"파울루스가 처음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1942년 1월은 마침 스탈린이 간신히 모스크바를 지켜 낸 뒤 총공세를 시도한 시기와도 일치한다. 사실 그 무렵은 남부 전선의 모든 독일군이 상당한 곤욕을 치르던 시기였다. 크림의 폰 만슈타인 장군과 그 휘하의 제11군은 아직 세바스토폴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12월 말부터는 카프카스에서 반격에 나선 붉은 군대가 케르치 반도까지 밀고 내려온 상태였다. 분노에 사로잡힌 히틀러는 군단 사령관 폰 스포네크 장군을 군법 회의에 회부해 버렸다." "독일군이 소련군에 '질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믿음에 변함이 없는 히틀러는 따로 예비 전력을 남겨 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마치 군단 사령관들을 해임함으로써 최근의 실패에 대한 기억까지도 모조리 씻어졌다는 듯한 태도였다. 해임된 장군들 가운데 가장 먼저 복귀한 폰 보크 원수는 과연 자기네에게 카프카스 유전을 장악할 만한 힘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97-101)


"5월 12일, 카르코프를 봉쇄하기 위해 볼찬스크와 바르벤코포 양쪽에서 공격을 감행한 붉은 군대는 말 그대로 전멸을 면치 못했다. 파울루스와 클라이스트 군은 24만 명에 이르는 포로와 2천 문의 야포, 그리고 티모셴코 탱크 부대의 전력 가운데 상당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들의 손실은 2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졸지에 나치 언론에서 영웅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반동적인 귀족들에 대해 다분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언론이 평범한 가문 출신의 파울루스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총통은 그에게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했으며, '수적으로 압도적인 적군에게 승리한 제6군의 노고'를 높이 치하하는 전문을 보내왔다. 파울루스의 참모장 슈미츠는 훗날 이 전투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히틀러에 대한 파울루스의 태도였다고 주장했다. 야심만만한 반격을 지원하기로 한 총통의 결단은 파울루스에게 전술적 상황을 판단하는 히틀러의 능력과 현명함을 새삼 확인해 주었던 것이다."(105)


"제6군과 제1기갑군이 6월 28일로 예정된 '청색 작전'의 출발선을 준비하는 동안, 지휘 본부는 적지 않은 혼란에 사로잡혀 있었다. 6월 19일에는 제23기갑 사단의 작전 장교인 라이헬 소령이 일선 부대를 방문하기 위해 피셀러 스토치 경비행기를 타고 이륙했다. 그는 치밀하게 구상된 보안 지침에도 불구하고, '청색 작전'의 모든 계획이 자세하게 적힌 명령문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그가 탄 경비행기가 독일군 점령 지역 너머에서 격추당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 문건을 노획했다는 보고를 들은 스탈린이 틀림없이 위조 문서일 거라며 철저히 외면해 버렸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많은 생존자와 냉전 시대의 독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교활한 소련군의 함정에 말려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소련군의 후퇴를 용인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스탈린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였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110-3)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라'는 스탈린의 명령이 가장 큰 의미를 함축했던 때는 물론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집단 농장은 비축해 둔 곡물을 붉은 군대에 내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애국적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자들을 재판하는 법정도 설치되었다. 가족 가운데 탈영하거나 징집을 거부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신고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의무를 위반할 경우 10년형에 처해졌다." "법정은 또한 민간인 '탈영자'에 대한 결석 재판도 처리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피난민이었다. 유죄 선고를 받은 자는 '당과 소비에트에 대한 반역자'로 처벌을 받아야 했다." "한동안 스탈린그라드 전선 정치국에서는 '1941~42년 겨울 사이에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징집된 남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자신이 살던 마을에 머물며 '피난을 거부한' 자들은 '체계적인 반소비에트 활동'이나 독일군에 부역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146-9)


"8월 23일 거행된, 동부 전선에서 가장 격렬했던 스탈린그라드 공습은 게르니카 이후 리히토펜의 경력 가운데 정점을 차지한다. 제4항공 함대는 그날 하루 동안의 출격 횟수만 1,600회를 기록했으며, 1천 톤의 폭탄을 투하하면서 단 3기만이 격추되었다. 어떤 분석에 의하면 당시 스탈린그라드에 60만 가까운 인구가 살고 있었는데, 공습 첫 주에 4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볼가 강 서쪽에 그토록 많은 시민과 피난민이 남아 있었던 이유는 전형적인 체제의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NKVD는 강을 건너는 모든 선박의 통제권을 거의 장악한 반면, 민간인을 소개하는 일에는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스탈린 역시 공황 상태가 발생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스탈린그라드 주민들을 볼가 강 건너편으로 철수시키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주로 이 지역 출신인 의용군이 더욱 결사적으로 도시를 방어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157-8)


제3부 운명의 도시


"할더가 '만족스러운 스탈린그라드 진격'을 언급한 9월 7일, 카프카스 진격 실패에 따른 히틀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러한 임무를 달성하기에는 리스트 원수의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었다." "폴란드와 스칸디나비아, 프랑스 등지에서 승리를 거둔 후 히틀러는 마치 자신이 정상적인 전쟁의 요소들을 초월한다는 듯 연료나 병력의 부족 등과 같은 '사소한' 요소들을 얕잡아보기 시작했다." "카프카스를 차지하지 못하면 전쟁을 끝내야 할 거라고 장군들에게 말한 바 있듯이 어쩌면 히틀러 본인도 진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차마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볼가 강이 봉쇄된 이상 스탈린그라드의 군수 산업은 파괴되어도 좋지만 지금의 히틀러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그 도시를 무슨 일이 있어도 장악해야 했다. 이 위험한 몽상가는 이를 벌충할 다른 상징적 승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히틀러는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어도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178-9)


"이 위기의 시기에 예레멘코와 흐루시초프가 내려야 했던 가장 중요한 결단은 스탈린그라드 사수라는 신념을 상실한 것이 분명한 제62군의 후임 사령관으로 누구를 선택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9월 10일, 제62군은 도심 깊숙한 곳까지 밀려났다. 제29차량화 보병 사단이 스탈린그라드 남쪽 외곽에서 쿠포로스노에를 통해 볼가 강을 건넜을 때, 제62군과 그 남쪽의 제64군은 서로 차단되어 있었다." "예레멘코와 흐루시초프는 지휘 본부를 강 건너편으로 철수해도 좋다는 스탈린의 허락을 간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볼가 강 서쪽에 아직 지휘 본부가 남아 있는 부대는 제62군밖에 없었다." "마침내 스탈린그라드의 새 사령관으로 추대된 추이코프 장군은 이미 독일군이 백병전, 특히 어둠이 내린 이후의 근접 전투를 가능한 한 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모든 독일군이 소련의 총부리가 뒷덜미를 겨누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했다."(181-4)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자 로딤체프는 독일군의 야포와 공습을 조금이라도 둔화시키기 위해서 적군과의 거리를 항상 50야드로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혹독한 전투의 피로에 눈이 붉게 충혈된 독일군 병사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동료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탓에, 그 동안 팽배했던 승리감도 자취를 감추었다. 상황이 갑자기 일변한 것이다. 그들은 도시 지역에서는 야포가 훨씬 더 위협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포탄의 파편만이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고층 건물이 포격을 당하면 포탄 파편뿐만 아니라 건물의 잔해까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독일군 병사들은 고층 건물의 저격수들에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수시로 하늘도 올려다보아야 했다. 독일 공군기가 나타나면 독일 보병 역시 소련군과 똑같이 은신처를 찾아 몸을 날려야 했다. 그들은 스투카 폭격기가 붉은색과 흰색, 검은색이 어우러진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203-4)


"독일군 장군들은 이 폐허의 도시에서 무엇이 자신의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통적인 범주와 차원의 군사 작전과는 동떨어진 근접 전투는 엄청난 심리적 부담을 안겨 주었다. 군사 이론가들은 진지전이야말로 '변칙적인 병법'이라는 주장을 펼쳤지만, 시가전에서는 독일군 특유의 기동력이라는 장점을 살릴 수 없었고 전투의 상당 부분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를 연상케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제6군은 1918년 1월에 선을 보인 이른바 '폭풍 쐐기 작전'까지 동원했다. 이는 열 명 가량의 병사들이 짝을 이루어 기관총과 경박격포, 화염 방사기 등으로 무장한 채 벙커와 지하실, 하수구 등에 숨어 있는 적군을 섬멸하는 방식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는 베르됭에서의 야만적인 살육보다 훨씬 더 끔찍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독일 병사들은 무너진 건물이나 벙커, 지하실과 하수구 등을 뒤져야 하는 근접 전투를 '쥐들의 전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212-3)


"독일군의 예비 병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련군은 보다 일반적인 전술도 구사했다. 추이코프는 야간 공격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는데, 이는 독일 공군의 대응을 피하기 위한 전술이기도 했지만 독일군이 대부분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점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특히 바티우크 대령이 지휘하는 제284소총사단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시베리아 출신의 병사들이 어떤 먹잇감도 놓치지 않는 천부적인 사냥꾼 기질을 타고 났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독일군 병사들은 밤만 되면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이 발견될 때마다 총을 발사하곤 했고, 누구 한 사람이 발포를 시작하면 주변의 다른 병사들까지도 맹목적인 일제 사격을 불사하는 바람에 9월 한 달 동안에만 2천 5백만 발의 탄약이 소모되었다. 소련 병사들은 가끔씩 밤하늘에 조명탄을 쏘아 올려 공격 개시가 임박했다는 암시를 풍김으로써 더욱 긴장감을 고조시키곤 했다."(214-5)


"도시 안쪽에서는 10월 말이 되면서 피로와 탄약 부족 때문에 독일군의 공세가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11월 1일, 붉은 10월 공장에 대한 제79보병 사단의 마지막 공격은 볼가 강 쪽에서 날아오는 강력한 포격 아래 그 막을 내렸다. 제6군 지휘본부는 소련군의 야포가 자신들의 공격력을 크게 약화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1월 6일자로 모스크바에 제출된 보고서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 있다. 〈지난 이틀 사이에 적군의 전술이 바뀌었다. 아마도 지난 3주에 걸친 막대한 손실의 여파가 아닐까 추정되는데, 이제는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는 작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1월 초로 접어들자 소련군은 동원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반격을 시작했다. 앞 갑판에 T-34 탱크의 포신을 장착한 볼가 함대 소속의 포함들이 리노크의 제16기갑 사단에 포격을 가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야간 공습은 독일군 병사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295-6)


"제6군의 공세에 맞선 소련군 측의 대반격, '천왕성 작전'은 그 전해 겨울에 스탈린이 보여 준 조급증에 비춰볼 때 비정상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불타는 복수심이 그의 조급증을 누그러뜨려 주었던 것이다." "붉은 군대는 '천왕성 작전' 준비 상황을 위장하기 위해 은밀한 기만 작전이 필요했지만, 기대하지 않은 두 가지 행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히틀러가 소련군에게 예비 병력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일의 두 번째 오판은 붉은 군대에게 그보다 훨씬 큰 도움을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주코프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근처의 북쪽 측면에 배치된 제14기갑 군단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지만 그 효과는 지극히 미미했다. 독일은 그 같은 작전 수행 능력으로는 절대로 독일군에게 타격을 입힐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제6군 전체를 완전히 포위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305-10)


"독일이 한 달에 500대의 탱크를 생산하던 그해 여름, 할더 장군은 히틀러에게 소련이 한 달에 1,200대의 탱크를 생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총통은 탁자를 내려치며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사실 소련은 그보다 훨씬 많은 탱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히틀러는 산업 지역을 거의 다 빼앗긴 소비에트 연방이 독일보다 더 많은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나치 지도자들은 소련 인민들의 애국심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산업 설비를 우랄 산맥으로 옮겨 가고자 하는 소련 측의 필사적인 노력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다. 서부 지역에 건설되었던 1,500개 이상의 공장이 볼가 강 동쪽, 특히 우랄 산맥 부근으로 옮겨졌다. 일단 가동되기 시작한 생산 라인은 기계가 고장을 일으키거나 전력이 부족한 경우, 혹은 부품이 부족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중단되는 법이 없었다."(310-1)


제4부 주코프의 함정


"11월 19일, 독일 시간으로 5시 20분에 야포 및 박격포 부대는 '사이렌'이라는 암호에 따라 포탄을 장전했다." "이윽고 최초의 포성이 적막한 대지를 뚫고 터져 나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탄착점을 수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조준을 해둔 탓에 비교적 정확하게 목표 지점을 타격할 수 있었다." "제6군이 폰 바이흐스 장군으로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공격이 시작된 지 17시간 만인 그날 밤 10시경의 일이었다. 루마니아 제3군이 주둔했던 지역의 상황 변화 때문에 제6군의 후미를 보호하고 통신망을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스탈린그라드의 모든 공격 행위는 '즉각 중단'되었다. 기갑 부대와 기계화 부대가 급히 서쪽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 대한 준비가 워낙 부족했다. 추이코프의 제62군은 예상대로 독일군의 이동을 막기 위해 강력한 공세를 취해왔다."(329-39)


"이날 벌어진 사건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파울루스 장군이 별다른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적군의 공격에 대비한 전력을 충분히 구축해 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벌어진 후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붉은 군대의 공격이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제6군의 후미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기만 했을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한편 B 집단군은 총통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상황을 혼자 힘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히틀러의 집착이 최대한의 신속성이 요구되는 시기에 실로 한심한 무기력증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적군의 의도를 분석하기 위해 차분히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제6군의 후방을 지키기 위해 상당수의 병력을 돈 강 부근으로 철수시킨 탓에 독일군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은 크게 줄어들었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그 때문에 남쪽 측면의 대문이 활짝 열려 버렸다는 점이다."(336-40)


"'일시적인 포위'의 위험에 굴하지 말고 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파울루스에게까지 전달된 것은 그가 니즈네치르스카야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파울루스에게는 스탈린그라드 남쪽에 머물러 있던 호트의 병력과 루마니아 제6군단 잔여 병력의 지휘권을 책임지라는 지시까지 함께 떨어졌다. 핵심은 '철도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볼가 강 주변에서 후퇴하여 B 집단군과 합류할 것을 고려하고 있던 파울루스는 이러한 갑작스런 명령이 무척 난감하게 느껴졌다." "파울루스가 니즈네치르그카야로 날아간 것은 지휘 본부가 그곳에서 B 집단군 및 라스텐부르크 부근의 볼프산체와의 비밀회의를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왔다는 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그가 소련을 탈출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즉각 적군의 포위망 안쪽에 해당하는 굼라크로 돌아가 참모들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363-4)


"파울루스는 스트레커가 '모든 군인에게 가장 어려운 양심의 문제'라고 표현한 고민에 봉착했다. 스스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향과 상부의 명령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고민이 그것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제6군의 거의 모든 장교들이 소련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모종의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믿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군단장과 사단장, 참모 장교 등은 확실히 돌파 작전을 선호한 것이 사실이지만, 보병 부대, 특히 연대장과 대대장 선에서는 그 정도의 확신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벙커 속에 진지를 구축한 병사들은 은신처를 버리고 붉은 군대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벌판으로 나가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히틀러가 머지않아 자기네를 구출해 줄 강력한 반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374-6)


"제6군을 구출하기 위한 만슈타인의 계획 '겨울의 폭풍 작전'은 총통의 지휘 본부와 철저한 논의를 거친 끝에 수립되었다. 이것은 제6군에게 돌파구를 열 기회를 제공하고 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한 통로를 뚫음으로써 '1943년의 작전을 염두에 두고' 제6군으로 하여금 볼가 강 주위에 '전초 기지'를 고수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 본인은 제6군의 돌파 작전을 허락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차이츨러에게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퇴각이 불가능한 이유는 〈대의를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고 주장했다. 클루게가 만슈타인에게 경고한 바와 마찬가지로, 그는 아직도 전해 겨울에 있었던 일을 떨쳐 버리지 못한 셈이었다. 히틀러는 참모장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한 부대가 도주하면 그 패배의 물결 속에 법과 질서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한다.〉"(398-401)


"파울루스 군의 의사들이 추위를 싫어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날이 추울수록 환자들의 회복이 그만큼 늦어졌다. 상처 부위에 서리라도 끼는 날이면 치명적인 결과가 빚어진다." "12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심각한 동상으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발이 자줏빛으로 부어오르는 정도의 증세는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서 돌려보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발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얼른 잘라 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12월 둘째 주부터 의사들은 아주 곤혹스러운 현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부상을 당하거나 병에 걸리지도 않은 병사들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보급품이 크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기아에 의한 사망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병리학자들은 이들의 죽음이 '극심한 피로(포위망 안쪽에서 근무하던 600명의 의사들 가운데 감히 기아라는 표현을 입에 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와 정체불명의 질병' 때문이라고 보고했다."(409-10)


"독일군 병사들의 희망은 적군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에 대한 갈망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른바 '포위병[Kesselfever]'이라는 증세를 보이는 이들은 SS 기갑 군단이 나타난 붉은 군대를 시원하게 쳐부수고 자신을 구원한다는 공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돈 전선 지휘 본부의 선전국은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노래를 좋아하는 병사들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확성기가 실린 트럭을 몰고 다니며 선전 방송을 하는 것은 아주 고전적인 방법에 해당했다." "다양한 소리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는 방법도 개발되었다. 이를테면 한동안 째깍거리는 시계 바늘 소리를 들려준 다음, 동부 전선에서 7초에 한 명 꼴로 독일군이 목숨을 잃는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식이었다. 그런 다음 〈스탈린그라드, 히틀러 군의 거대한 무덤!〉이라는 멘트에 이어, 경쾌한 탱고 음악이 얼어붙은 평원에 울려 퍼진다. 때로는 귀를 찢을 듯한 카튜샤 로켓포의 발사음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기도 했다."(415-6)


제5부 제6군의 종말


"1월 10일에 소련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6군이 안고 있던 주된 관심사는 변함이 없었다. 한 의사는 '공적 1호는 변함없는 배고픔'이라고 단언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경계선을 넘어 무인 지대로까지 나아가서는 죽은 소련 병사들의 시신에서 빵조각이나 말린 완두콩 따위를 찾아내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애타게 찾은 것은 소금을 담아 접은 종이였다. 포위망 안쪽의 독일군 병사들의 배고픔도 엄청난 고통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큰 괴로움에 시달린 이들도 많았다. 보로포노포와 굼라크의 수용소에 갇혀 있던 3,500명의 소련 포로들이 바로 그들인데, 그들의 사망률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몇몇 독일군 장교들은 1월 사이에 이 포로들 사이에서 식인 행위가 급속히 번져 나갔음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보고한 바 있다. 1월 말에 이들 수용소에 도착한 붉은 군대는 3,500명 가운데 살아남은 이가 불과 20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471-2)


"'고리 작전'은 1월 10일 일요일의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마리노프카와 카르포프카 지역에 토치카와 포상(砲床) 등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밀물 같은 붉은 군대의 진격을 막는 데는 별로 소용이 없었다. 남은 탱크와 보병들로 반격을 시도하는 독일군의 노력은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붉은 군대는 박격포를 이용해 보병을 탱크로부터 분리시킨 후 생존자를 제거하는 방법을 활용했다. 돈 전선의 정치국은 〈항복하지 않는 적군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물리적·물질적 약점을 고려할 때 제6군의 저항은 실로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처음 사흘 동안 이들이 적군에게 입힌 피해 상황을 보면 그 같은 사실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돈 전선은 26,000명의 병사를 잃었으며 절반 이상의 탱크가 파괴되었다. 붉은 군대의 사령관들은 사상자 수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고스란히 노출된 벌판을 진격한 탓에 쉬운 목표물이 되었다."(476-80)


"한편 소련의 주력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포위망의 서쪽 지역을 강타했다. 제29차량화 보병 사단은 효과적으로 제압되었다. 제3차량화 보병 사단은 연료가 떨어져 차량과 중화기를 포기한 채 수북이 쌓인 눈밭을 도보로 걸어서 퇴각해야 했다. 땅을 팔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병사들을 데리고 허허벌판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월 16일, 제295보병 사단 소속의 한 대대가 완전히 항복을 했다. 포로를 정당하게 처우하겠다는 보로노프의 전단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본 듯했다. 항복한 대대의 지휘관은 댜틀렌코 대위에게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고 한다. 〈도주한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행동이다. 나는 부하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투항하려 한다고 말했다.〉 전직이 영어 교사였던 그 대위는 이렇게 덧붙였다. 〈독일군 중에서 일개 대대 전체가 투항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욱 참담한 심정이었다.〉"(483-5)


"1월 20일 아침, 붉은 군대는 새롭게 구성한 병력으로 공격을 재개했다. 제65군은 이미 그날 밤 곤치라 북서쪽의 저지선을 돌파했다. 몇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굼라크가 그들의 주요 목표였다. 다음 날 저녁, 비행장과 그 부근의 지휘 본부가 철수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미 카튜샤 포대의 공격으로 엄청난 혼란이 발생했다." "그 무렵 이미 파울루스 장군은 거의 자포자기 심정이었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괴벨스가 '전면전'을 주창하며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을 희석시킬 준비를 한 다음 날인 1월 22일, 제6군은 히틀러로부터 운명의 마지막을 알리는 전문을 받았다. 〈항복은 절대 안 된다. 최후의 순간까지 싸워야 한다. 전투 능력을 유지하고 있는 병사들을 총동원하여, '요새'를 사수하라. '요새'의 용기와 불굴의 의지가 새로운 전선을 구축할 기회를 제공하였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제6군은 독일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498-501)


"히틀러는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파울루스의 결단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언급했다." "북쪽 고립 지역에서는 스트레커 장군 휘하의 6개 사단 잔여 병력이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 제11군단의 지휘 본부를 설치한 스트레커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우리 부대는 중화기도, 보급품도 없는 상태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탈진해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한다. 그러나 그들은 얼어 죽는 순간까지도 무기를 놓지 않는다. 스트레커.〉 그의 메시지는 아주 생생했지만, 나치 특유의 상투적인 표현은 빠져 있었다. 그의 전문을 수령한 히틀러는 그날 오후 늦게 답신을 보냈다. 〈본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포위망 북쪽이 유지되기를 기대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잠시 후 또 하나의 명령을 전달했다. 〈제11육군 군단은 적의 전력이 다른 전선에서 마음 놓고 작전을 펼치지 못하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붙들어 두어야 한다.〉"(524-5)


"2월 2일 아침은 짙은 안개로 시작되었다. 이 안개는 싸락눈을 동반한 세찬 바람이 밀려와서야 서서히 걷혀 갔다. 제62군 전체에 독일군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여기저기서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볼가 함대의 수병들과 반대편 강둑의 병사들이 다섯 달 동안 폐허 속에 갇혀 있었던 스탈린그라드의 시민들을 위해 빵 덩어리와 통조림을 들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왔다. 기쁨에 들뜬 사람들은 자신이 마주친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순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소련 수비대는 정말로 스탈린그라드가 막을 내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먼저 죽은 동료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놀랍게만 느껴졌다. 볼가 강을 건너갔던 사단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살아남은 병사가 채 1백 명이 되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붉은 군대는 11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 가운데 485,751명이 목숨을 잃었다."(528)


"독일 육군이 입은 정확한 손실은 지금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지금까지의 독일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패배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제6군과 제4기갑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천왕성 작전이 시작된 이래 포위망 안쪽에서만 60,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대략 130,000여 명이 포로로 생포되었다. 여기에는 8월과 11월 사이 스탈린그라드 주변에서 발생한 사상자의 숫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 이 기간에 4개의 동맹군이 궤멸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슈타인의 구출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점, 또한 소(小)토성 작전 때 발생한 피해 등을 모두 합치면 추축국은 50만 명 이상의 전력을 상실한 셈이다." "이런 와중에 괴벨스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사실을 왜곡하는 뻔뻔스러운 재주를 총동원하여 이 사태를 헤쳐 나갔다." "제6군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던 그들이 이제 180도 방향을 바꾸어,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533-4)


"히틀러는 괴벨스에게, 전쟁이 끝나면 파울루스와 그의 장군들을 군법 회의에 회부하여 자신이 하달한 명령, 즉 마지막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한 벌을 받게 하겠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식탁에서 장황한 설교를 늘어놓던 습관이 이제 거의 사라진 대신, 혼자 식사를 하고 싶어 했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발견했다. 〈왼손이 약간 떨리기 시작했고, 등은 구부정하게 굽었으며,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었고, 두 눈은 튀어 나왔으나 전의 광채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뺨에는 붉은 반점이 생겼다.〉 그러나 히틀러는 밀흐를 만났을 때도 스탈린그라드의 엄청난 희생에 대해 어떤 유감의 표시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또 하나의 모험을 일으켜 더 많은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금년 내에 이 전쟁을 종결지을 생각이네, 이미 그에 따라 독일 국민의 모든 힘을 동원할 방안을 세워 놓았어.〉 히틀러가 밀흐에게 한 말이다."(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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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최대의 전투 : 모스크바 공방전
앤드루 나고르스키 지음, 차병직 옮김 / 까치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서장


"모스크바 전투는 모르긴 몰라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고, 이론의 여지없이 두 군대 사이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의 전투였다. 양측을 합쳐서 약 700만 명의 장병이 참전했고, 그중 250만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실종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러시아 군사 기록에 의하면 전사자, 실종자, 포로로 잡힌 병사를 포함한 95만 8,000명이 결국에는 모두 〈사라졌다.〉 그 외 93만 8,500명의 군인들이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소련군의 전사자 수는 모두 189만 6,500명에 달했다. 반면 독일군의 희생자 수는 61만 5,000명이었다." "모스크바 전투는 국제사회 전체가 주시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미국, 영국, 일본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이 전투의 결과를 어떻게 예측하느냐에 따라서 중요한 정책 결정을 달리 하고 있었다. 독일군을 모스크바 근교에서 저지하지 못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의 귀추를 포함한 전반적인 국제정세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10-1)


1장 히틀러는 1941년에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개전 전야 : 2인의 독재자


"스테판 미코얀은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경고를 담은 첩보를 계속 수집해서 보내던) 자국 정보원들을 불신했던 스탈린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제시한다. 〈정보원들의 보고에 대한 스탈린의 반응은 인간에 대한 그의 극도의 불신을 드러냅니다. 스탈린은 모든 인간이 그를 속이고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어요.〉" "스탈린의 의심증을 놓고 보았을 때, 히틀러가 머지않아서 그를 배신할 것이라는 서구 국가들의 경고를 무시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41년 4월,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인 로렌스 스타인하트와 윈스턴 처칠은 스탈린에게 히틀러의 계획을 알리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독일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리려는 다른 시도들, 특히 영국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스탈린은 이러한 경고를 독일과 소련을 이간질해서 결국에는 서로를 배신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자신들이 득을 보려고 한다〉면서, 스탈린은 불만을 터뜨렸다."(43)


"스탈린이 시간을 벌려고 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전기작가였던 아이작 도이처는 스탈린이 나폴레옹과 화해함으로써 전쟁을 준비할 4년이라는 시간을 벌었던 알렉산드르 1세처럼 되고 싶어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스탈린이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그는 임박한 전쟁을 앞두고 군대를 준비시키는 데에 활용할 수 있었던 시간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준비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막았다." "게다가 스탈린이 당시 폴란드 동부와 발트 해 연안국가들에서의 소련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는 소련과 나치 독일 사이에 영영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적인 시나리오를 믿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독일과 연합국이 오랜 갈등 속에서 서로를 지치게 하는 동안 소련은 숨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었고, 어쩌면 후에 더 많은 영토를 획득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다."(47-8)


2장 우리가 얼마나 똑똑한지 이 꼴을 보고 말해보라지─기습, 개전, 반격


"공격 개시 한 달 만에 독일군은 약 700킬로미터 이상을 진군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경이적인 속도였는데, 이는 그들이 공격한 대부분의 지역들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독일군의 사기는 그들이 소련 영토 깊숙이 진격해 들어가면서 맞닥뜨린 소련군의 혼란에 비례해서 치솟았다." "전쟁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일리야 드루즈니코프는 아들 유리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부대에는 10명당 1대의 총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는 곧 무기가 없는 병사들은 총을 든 병사의 뒤를 줄줄이 따라다녀야 한다는 뜻이었다. 총을 들고 있던 병사가 쓰러지면, 다음 병사가 얼른 그 총을 집어들어야 했다. 장교들은 적군 속으로 뛰어드는 대신에 도망치려고 대열을 이탈하는 병사를 언제든지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병들은 전장으로 달려가서 적군의 시체에서 무기 탄약, 군복 등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거두어오라는 명령도 종종 받았다."(58-9)


"모두가 우왕좌왕 헤매는 상황에서 소련군 최고 사령부, 일명 스타브카(Stavka)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스탈린도 심리적 압박감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고 크렘린 궁에 복귀했고, 그 순간부터 다시 통제권을 손에 쥐었다. 7월 3일, 그는 마침내 대국민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시작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동지들! 형제들과 자매들이여! 우리의 육군과 해군 전우들이여! 나는 당신들에게 말하고 있소, 친구들이여!〉 스탈린은 외쳤다. 독재자 스탈린이 국민들을 〈형제들과 자매들〉 그리고 〈친구들〉이라고 부른 것은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국민들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탈린이 국민들을 신하가 아니라 공동의 싸움을 함께 치러나갈 동료로 대하려고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매우 혁명적인 변화였고, 연설을 듣는 국민들 모두 그렇게 느꼈다."(67)


"히틀러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한 순간, 생사를 건 대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독일군으로서는 소련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모스크바를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그러나 1941년 여름, 목표가 가시권 안에 들어오자 히틀러는 주저했다. 모스크바의 운명, 아울러 궁극적으로는 두 독재정부의 운명이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때, 평소에는 대담하던 히틀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히틀러의 장군들도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공격 초반의 성공이 가져다준 낙관적 관측은 히틀러에게 동부전선의 다른 목표, 특히 우크라이나를 정복할 여유가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한편, 모스크바 점령에 대한 내심의 초조함이 히틀러로 하여금 모스크바 공격을 미루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게 했다. 머지않아서 히틀러의 그 결정이 스탈린에게 한 가닥 희망을 안겨준 중대한 오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마치 두 독재자들이 상대방의 실수에 자신의 실수로 대응하기로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80)


3장 숙청의 대가─혼란의 방어


"스탈린은 독일군의 포로가 된 자들과 탈주병들을 처형당해 마땅한 '변절자'라고 칭하면서 병사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는 지휘관들도 실책을 범하는 경우에는 병사들과 똑같은 처지에 빠진다고 경고하고 싶었다. 게다가 전쟁 초반에 계속된 치욕스런 패배의 책임을 전가할 몇 명의 희생양이 필요했다. 서부전선의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의 부대는 민스크를 점령한 후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는 독일군을 막지 못했고, 그의 수석 부관들은 그 희생양의 역할을 맡을 자들로 즉시 지목되었다. 그들은 체포되었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혐의는 〈반소련군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이었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서 대략 15만 8,000명의 소련군 병사들이 처형되었다. 반면에 독일 군사법정은 동부전선뿐만 아니라 모든 전선에 걸쳐서 총 2만 2,000명에게 도주를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자기 군대의 병사나 장교를 처벌하는 일에 관해서라면 스탈린은 히틀러를 가볍게 능가했다."(94-5)


"스탈린의 지지자들과 옹호자들은 그의 숙청 정치 전략이 독일의 침략 전후를 막론하고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1986년 사망하는 그날까지 스탈린에게 충성했던 몰로토프는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의 군부 숙청을 이렇게 옹호했다. 〈물론 과도한 면은 있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그 모든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 즉 국가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허용되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오직 진정한 스탈린주의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보여주었다. 당신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그 자신조차 그것을 모를지라도, 누구나 인민의 적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전쟁 전 스탈린의 논리였고, 독일군의 진격이 계속되던 전쟁 동안에도 여전히 그의 논리였다.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도망치는 아군의 등 뒤에 총을 쏘는 〈저지부대〉의 형태이든 힘들여서 피란시킬 필요를 없애기 위한 수감자들에 대한 광란의 처형의 형태이든, 오직 숙청 또 숙청만이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107-8)


4장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좌충우돌의 공격


"히틀러가 생각하는 동쪽 정복지의 미래상이란 숙청 정치에 따르는 죽음과 예속 외에는 없었다." "히틀러의 말은 결코 허황된 수사가 아니었다. 군인들 사이의 전우의 개념을 잊으라는 히틀러의 선언은 그 악명 높은 코미사르 지령(Commissar Decree)으로 이어졌다. 붉은 군대 소속의 정치 장교들은 설사 투항할 의사를 표시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처형하라는 지시였다.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하기 한 달도 더 전인 5월 12일에 작성된 코미사르 지령은 이러했다. 〈붉은 군대의 정치 군인은 생포되더라도 전쟁포로가 아니다. 전쟁포로들과 함께 일시적으로 임시수용소에 수용하더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 독일군의 코미사르 지령은 발령과 동시에, 붉은 군대의 정치 장교들로 하여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확고한 결의를 다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어차피 패배는 곧 처형으로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114-5)


"독일군에게 좋은 소식도 있었는데,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모스크바로 곧장 통하는 지형에 관한 것이었다. 소련이 독일 중앙집단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간신히 병력을 보강하여 버티는 가운데, 스몰렌스크까지 도착한 중앙집단군 지휘관 페도르 폰 보크에게 다음 목표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적은 동부전선 중 오직 한 곳에서 철저하게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다. 바로 중앙집단군과 대치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대단한 자기 확신에서 오는 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초기의 여러 목적을 달성했던 히틀러는 부하 장군들의 간청에 대답하기까지 약 3주일 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침내 그가 내린 결론은 보크나 할더뿐만 아니라 브라우히치와 다른 최고 간부들의 제안과도 완전히 상반되는 명령이었다. 핵심은, 현재 북부전선에서는 레닌그라드로 향한 진군을 최우선으로 하고, 남부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캅카스까지 밀어붙이는 데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돌발적인 결정이었다."(128)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명령은 됭케르크 바로 목전에서 구데리안 부대의 진군을 멈추게 했던 결정보다 더 중대한 실수로 느껴졌다."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히틀러도 그의 장교와 병사들이 적군의 군사적 행동에 의한 희생보다 다른 요인에 의해서 더 큰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었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병사들의 희생자 수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었다. 그 결과, 마침내 모스크바를 향하게 된 독일군은 여전히 승리를 구가하고 강력한 힘을 과시했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의 초기처럼 통제 불가능할 정도의 괴물은 아니었다. 독일군은 한 번 이상 호되게 당했고, 구데리안의 경우과 같은 경로와 목표의 갑작스런 변경을 포함하여 그렇게 빠르게 그리고 그렇게 멀리까지 이동하는 데에 따른 긴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것보다 더 어려운 시련에 직면하기 직전이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은 커져갔다."(134-8)


5장 모스크바가 위험하다─함락이 목첩에


"키예프 전투에서는 스탈린이 그의 장군들에게 우크라이나 수도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했으므로, 소련군은 독일군에 포위된 채 큰 손실을 입었다. 주코프 장군과 다른 지휘관들은 후퇴하는 것만이 큰 손실을 막고 전력을 재편성하여 이후의 다른 전투에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떻게 키예프를 적에게 빼앗기는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소리를 질렀다. 히틀러처럼, 스탈린도 그의 장군들의 충고를 조금도 주저함 없이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 "이와 달리 비야즈마 근교에서 일어난 비극은 통신수단과 사령부의 명령 전달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기 때문이었다. 타이푼 작전을 시작하면서, 가능한 많은 붉은 군대 병력을 비야즈마 근교에 포위하여 가두려고 독일군이 신속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소련의 지도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따라서 그곳은 죽음과 파멸의 지옥인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141)


"9월 11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함락하는 데에 곧 성공할 것처럼 보이자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보로실로프 원수의 임무를 대신 맡도록 했다." "새로 임지에 도착한 주코프는 신속하게 명령을 하달하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보이는 장교들을 해고하거나 재배치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후퇴를 금지하고 다시 공격을 시도할 것을 요구했으며,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 총살형을 집행하는 부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달 말 독일군의 진군은 저지되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해서 결국 주민들을 아사 상태에 빠뜨리는 900일 동안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전개되었다." "스탈린과 그의 장군들이 처음에 인식하지 못한 것은, 9월의 후반부 동안 히틀러가 많은 군대를 모스크바 침공을 위한 타이푼 작전에 대처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부대를 재배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레닌그라드에 대한 독일군의 공세가 약화된 이유였다."(157-8)


"스탈린의 귀환 명령을 받고 서부전선의 사령부로 달려갔던 10월 6일 밤, 주코프는 그곳의 장교들로부터 보고를 받고 상황이 정말 암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휘관들은 비야즈마 근처에서 포위된 부대들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주코프의 표현에 따르면 〈서부에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전선이 없었다. 보충할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 공백과 결함을 메울 수가 없었다.〉" "주코프는 포돌스크 사관학교에서 4,000명의 사관후보생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방어선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취약한, 독일군이 진군해서 접근한 말로야로슬라베츠 부근을 맡도록 했다." "그들은 영웅적인 활약으로 시간을 벌었다. 그동안 다른 부대는 모스크바를 완전히 둘러싸며 참호를 파고, 사격 진지와 대전차 장애물을 구축하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면서 결사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또한 장교들이 부대를 재정비하고 방어선을 강화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부대를 끌어모을 시간을 만들어주었다."(163-5)


"그런 와중에도 독일군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10월 14일, 독일군은 르제프를 점령했다. 르제프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2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독일군이 북쪽에서 모스크바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따라서 르제프의 함락은 독일군이 이제 모스크바 침공을 위한 절호의 거점을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르제프에서도 곧 비야즈마에 비교할 수 있을만큼의 대량 학살이 일어나서, 그곳 또한 또 하나의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집어삼킬 지옥의 도가니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비야즈마와 르제프 두 곳에서의 패배는 모스크바에 대한 최종 전투가 실제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모스크바 시민들은 전투가 장기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승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모스크바는 대혼란에 휩싸이기 일보직전이었다."(167-8)


6장 인간의 형제애─기만의 동맹


"소련의 수도를 목표로 한 독일군의 맹공격을 주시했던 것은 당사자였던 모스크바 시민들이나 히틀러 또는 스탈린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명 윈스턴 처칠은 영국에 대한 압박의 부담을 완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소련이 히틀러의 군대를 묶어두기를 바라면서 관찰하고 있었다. 영국은 유럽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공격만 했다 하면 승리를 거둔 독일의 기계 군단에 홀로 저항하여 오랫동안 버텨온 터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틀림없이 주시하고 있었는데, 국민들에게는 털어놓지 않았지만 조만간 미국도 불가피하게 그 국제적 분쟁에 휘말려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군사 지도자들도 분명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군의 공격 진행 과정을 신중하게 관찰하면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붕괴될 소련이라면 독일의 편에 가담하여 동쪽에서 공격을 시도해야 할 것인지를 저울질했다."(169)


"전투지역이 모스크바에 점점 더 가까워짐에 따라서, 모스크바에 주재하던 영국, 미국, 일본 그리고 다른 각국의 외교관들은 소련이 독일의 진격을 막을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점점 더 부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런 진단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국가의 재외공관에서는 내부 동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던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가 표면화되기도 했다. 모스크바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매우 위태로운 근무지였는데, 스탈린 체제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에 기인한 격한 내부 갈등이 재외공관들 안에서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이 그 도시를 점령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은 그런 갈등을 격화시켰다. 모스크바가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각국의 외교관들은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소련의 원조 요청에 서구 국가들이 어떻게 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토론했다."(171-2)


"독일의 침략 전날 밤, 처칠의 개인 비서 존 콜빌은 처칠에게 확고한 반공산주의자로서, 소련 정부를 돕는다는 사실에 고민이 되지 않는지 물었다. 처칠은 대답했다. 〈전혀. 나의 목적은 오직 하나, 히틀러의 파멸이네. 그것으로 내 인생은 아주 단순명쾌해지지. 만일 히틀러가 지옥을 침략한다면, 국회에서 나는 악마에게 최소한 호의적인 언급은 해줄 것이라네.〉" "루스벨트와 그의 최측근들은 곧 처칠을 비롯한 영국 관료들 이상으로, 러시아의 전쟁 수행 노력을 칭찬하고 지원의 대가로 스탈린으로부터 무엇인가 양보를 얻어내려는 그 어떤 현실적 고려도 하지 않는 성선설적 입장의 정책을 펼쳤다.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루스벨트가 러시아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가치가 있는 동맹국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루스벨트는 일시적으로 상호주의 외교관계를 제안한 스타인하트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정책에 의해서 명백히 폐기되었다."(185-8)


7장 대혼란의 모스크바─1941년 10월


"소련의 대조국전쟁에 대한 공식적 견해에 일관된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독일의 침략자들에 대한 항전에서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고 또 엄청난 희생이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941년 10월 16일은 다른 어떤 날보다도 결정적으로 그러한 신화를 산산히 부수어놓았다." "아무리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도 모스크바 사태에 대한 다음 두 가지의 극단적 현상을 조화시킬 수는 없다. 하나는 매우 정화된 해석들이다. 다른 하나는 강탈, 파업 그리고─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체제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여러 행위들을 포함한 법과 질서의 갑작스런 붕괴라는 현실이다. 그러한 일은 대부분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그들의 도시가 독일군에 의해서 점령되기 직전이라고 확신했던 순간에 발생했다. 도시의 시민들은 단결되어 있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분열되었고, 통제가 불가능한 위험한 상황이었다."(205-6)


"독일군은 거의 매일 공중폭격을 함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스탈린은 자주 키롭스카야 지하철역으로 피신해야 했는데, 그는 합판으로 만든 벽에 의해서 역의 다른 공간이나 다른 열차들로부터는 가려진 특별히 준비된 열차칸에서 일하고 잘 수 있었다. 그러나 최소한 한 번은 스탈린은 지상에서 폭격을 직접 목격했다." "스탈린이 그 순간 느낀 것이 용기였든 공포였든 간에, 모스크바가 마치 안팎으로 무너질 듯이 보였던 10월 16일 그날, 그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무것도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시민 다수가 스탈린은 이미 도망갔다고 믿고 있던 상황에서,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들 훨씬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의 결정은 자포자기 또는 결단의 신호로 비추어질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 며칠 동안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던 스탈린의 고민의 이유였을 것이다."(222-3)


"여전히 결정을 서두르지 않고 있던 스탈린은 마침내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갑자기 다시 모든 업무를 장악했다. 그가 생애를 통틀어서 의지해온 전략인 폭력의 사용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10월 19일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내무인민위원부의 군대를 거리에 출동시켰다. 그들은 의심스러워 보이는 자는 누구든지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비상 재판소는 약탈자들은 물론 법과 질서를 위반한 자들을 규율할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즉각적인 처형을 의미했다." "그 뒤로 계속 이어진 강압적 단속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살해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다. 다만 스탈린이 다시 지휘한다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는 없었다. 약탈은 순식간에 중단되었고, 모스크바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독일의 점령을 저지하고야 말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다지기 시작했다."(224-5)


"독일군을 피해 퇴각하는 군인들을 총살하는 사격이 보여주듯이, 소련 지휘부의 상투적 수법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누구든지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소련 정부로서는 현재의 전투와 관련이 있든 없든, 공포 정치를 철회할 어떠한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다. 반대로 억압체제는 계속 유지되었고, 종종 강도가 배가되기도 했다. 주코프가 인민에 대한 호소문을 발표한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스탈린의 총살 집행관들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1930년대의 군부 숙청 재판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을 없애버렸다. 희생자들 중에는 1938년에 재판에 회부되어서 총살된 투하쳅스키 원수와 다른 몇몇 고위 장교들의 부인들, 스페인 내전에서 활약한 유명한 전투기 조종사들인 파벨 리차고프와 야콥 스무시케비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심지어 모스크바를 살리려는 필사적인 노력조차, 내부의 유혈 사태를 중지시킬 수 없었다."(233-4)


8장 파괴 공작원, 곡예사, 스파이─끊임없는 계략


"1941년 10월 초, 내무인민위원회는 독일군이 곧 모스크바를 점령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최후의 저항수단은 지하조직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서 이전이 불가능한 공장과 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예이틴곤의 메모에 적힌 다른 특수 공작원들의 조직 이름은 '어부들', '노인들', '충신들', '무법자들' 그리고 '소가족' 등이었다. 개별 첩보원들의 신상은 모두 코드명으로 기재되었고 각자가 맡은 구체적인 특수 임무도 표시되었다. 예를 들면, '무법자들' 조직의 지휘관 '마르코프'는 전에 강도였다. '무법자들'의 임무는 〈독일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행하는 것〉이었다. '소가족'의 조직원 '그립 바이스'는 〈엔지니어, 스포츠맨 그리고 귀한 집안 출신〉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 직원과의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8년 동안 강제 노동수용소에 수용당하는 선고를 받았지만, '그립 바이스' 자신은 〈아주 충직한 첩보원〉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었다."(237-43)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정확한 보고서 때문에 스탈린을 격노하게 만든 이래로, 소련군 첩보부에 있는 그의 상관들은 조르게가 독일의 스파이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바로 그 때, 조르게는 소련 정부가 원하는 내용을 보고했다. 9월 중순, 주일 독일 대사 오트와 다른 독일 외교관들은 일본이 독일의 참전 요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소련을 공격하는 대신에 일본 정부는 동남 아시아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야망을 달성하는 데에 미국을 최대의 장애물로 보고 있었다." "그 결과, 스탈린은 소련 극동 지역의 대부분의 병력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서 이동시키는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다. 10월로 들어서자, 그들 스스로 시베리아인이라고 부르는 극동 지역의 병사들이 소련의 심장부로 이동했다." "거의 대부분이 방한용품을 제대로 갖춘 시베리아 부대의 지원병이 도착하자, 모스크바 방위군의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263-4)


9장 하느님, 오 하느님─혁명 기념일 : 전쟁의 전환점


"1941년 8월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한 독일 병사는 붉은 군대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사용되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인해전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기 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자 〈기관총 사수의 환상적 표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회상했다. 〈적이 600미터 전방까지 다가오면 우리는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면 파도처럼 밀려오던 맨 앞쪽의 적군들은 거의 쓰러지고, 살아남은 몇 명만이 마치 아무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계속 앞으로 걸었다. 그런 모습은 기분 나쁠 정도로 기이했으며, 믿을 수 없었고, 비인간적이었다. 우리 독일 병사들 같았으면 결코 그렇게 혼자 걸어서 계속 전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된 사격으로 독일군의 기관총은 과열되었고, 소련군 측에서는 끊임없이 병사들을 내보냈다. 소련 병사들은 3일 동안 동일한 방식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동안 소련 진영에서는 사상자를 위한 들것 운반병을 단 한명도 보내지 않았다."(275)


"구데리안은 한때 모스크바 돌파라는 독일의 희망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지만, 어느새 그의 탱크부대가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 말았다. 10월 3일, 구데리안 탱크부대가 오렐을 제압하고 난 직후, 그들은 소련의 T-34 전차와 맞붙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바로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 탱크의 우수한 성능을 즐길 수 있었다. T-34를 만난 직후부터 상황은 역전되었다〉라고, 그는 회고했다." "다른 중요한 변수는 날씨였다. 10월의 진흙탕은 그 자체가 막강한 적이었다. 독일군 중앙집단군 사령관 육군 원수 페도르 폰 보크는 10월 21일자 야전 일기에 〈러시아놈들보다 습기와 진흙탕이 우리를 더 괴롭히다니!〉라고 썼다." "11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서리가 진흙탕 길을 얼어붙게 만들어서 구데리안 부대가 진군하기에 한결 수월해졌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얻은 안도감은 하강하는 기온이 부대에 미칠 영향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상쇄되었다."(279-80)


"추위에 언 것은 독일군만이 아니었다. 탱크를 비롯한 모든 차량에 들어있던 윤활유까지 얼어붙었다. 모스크바 진입로에 주둔하던 독일군 부대에는 부동액은 물론, 꼼짝하지 않고 멈춘 차량을 끌 수 있는 체인조차도 보급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독일군 전투기가 로프를 던져주어서 그것으로 차량을 견인했다.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독일 전쟁 계획 수립자들로 하여금 겨울 장비를 공급할 생각조차 못하게 한 조기 승리론의 지나친 낙관주의적 기대는 점점 심각해지는 보급 수송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시베리아 부대는 모스크바 북서쪽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재탈환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엄청났다." "그 전투에 참전한 예델만은  전쟁의 기록을 정확히 하고자 애썼다. 〈사람들이 '조국을 위하여!', '스탈린을 위하여!'라고 소리쳤다는 것은 신화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 누구도 그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전쟁 뒤에는 수많은 신화만 남았습니다. 진실은 조각조각 발견될 뿐이지요.〉"(290-3)


10장 감상에 빠지지 말라─1941년 11월, 생사의 결전


"스탈린이 주코프에게 12월 6일 최초의 반격을 개시하라고 지시하는 동안, 히틀러는 독일군이 한계에 이르렀고 지칠 대로 지쳤다는 장군들의 간청에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히틀러는 겨울 동안 모스크바 점령과 다른 주요 목표를 위한 군사작전을 잠시 멈추라고 지시했다. 12월 8일에 내린 지령 제39호의 내용은 이러했다. 〈동쪽에서 놀랄 만큼 빨리 찾아온 혹독한 겨울 날씨와 이에 따른 군수물자 보급의 어려움 때문에 모든 주요 공격작전을 중단하고 방어태세로 돌입해야 한다.〉" "그것은 그의 실책, 특히 겨울 전투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결과로 일어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표면상으로는 히틀러가 독일군이 방어태세로 전환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었지만, 실제 전투 현장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고 열악했다. 그는 여전히 장군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모스크바 전투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상황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군사적 판단을 맹신함으로써 스탈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298-9)


"히틀러는 12월 8일 마지못해서 공격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 동안 방어선을 구축하고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모스크바 근방에 포진한 부대 지휘관들의 조언을 계속 묵살했다. 독일군이 이듬해 봄에 다시 모스크바 장악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전력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러나 히틀러도 스탈린처럼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인명을 걱정하는 것은 나약함을 드러낸다고 보는 사람이었다. 스탈린이 희생시킬 수 있는 병사들이 히틀러보다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육군 총사령관 폰 브라우히치 원수는 구데리안에게 제한적인 후퇴를 허락했고, 구데리안을 재빨리 이행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러한 퇴각이 예외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12월 16일 밤에 구데리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은 다소 불안정했지만 히틀러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구데리안은 현재의 위치를 유지해야 하며 더 이상의 후퇴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306-8)


"1942년 3월 6일의 일기에서 괴벨스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이래 모스크바 근교 전투를 포함한 동부전선 전체에서 발생한 병력 손실을 계산해보았다. 전사자들은 약 20만 명에 달했고, 사상자들과 실종자들까지 포함한 숫자는 거의 1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는 겨울 날씨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특별히 지적했다. 〈2월 20일까지 11만 2,627명의 동사자와 동상 환자가 보고되었다. 그중 1만 4,357명이 3도 동상이었고, 6만 2,000명이 2도 동상이었다. ······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혹한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 그는 그러한 사태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것을 다시 한번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그래도 최종 집계한 피해자 수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늘 그렇듯이 괴벨스의 결론이 의미하는 것은, 나치 지도부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만큼의 위엄과 금욕적 인내를 발휘하지 못한 병사들 때문에 그런 희생자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315-6)


11장 최악의 시나리오─전후의 세계 질서 구상


"1941년 7월, 처칠 정부의 재촉에 따라서 주영 소련 대사 마이스키는 런던에 망명 중이던 폴란드 정부의 지도자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 장군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비록 영국이 폴란드의 동맹국으로 참전하긴 했지만, 이제는 소련과 새로운 동맹을 맺는 일이 처칠의 주요 관심사였다." "7월 30일에 체결된 소련과 폴란드의 조약은 소련 영토 내에서의 폴란드 군부대 결성과 소련에 감금된 폴란드인들의 사면 조항을 포함했고, 소련과 폴란드 사이의 외교관계를 복원시켰다. 그러나 1939년의 독소 조약을 무효로 선언한다고 하더라도 영토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영국 하원에서 외무장관 이든은 1939년의 영토 변경은 승인하지 않는다는 영국 정부의 입장을 되풀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영제국이 국경 문제와 관련해서 어떠한 보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치에하노프스키가 표현한 대로, 그로써 폴란드인들은 〈영국의 새로운 회유정책의 개막과 함께 첫 먹잇감〉이 되었다."(330-2)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첫 회담에서 스탈린은 즉시 이든에게 두 가지 조약 초안을 내놓았다. 하나는 영국과 소련 사이의 전시 군사 동맹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래 유럽의 국경선 획정(劃定) 같은 영토 문제를 포함한 전후 체제 구상에 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곧장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달복달 화를 냈다. 그는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얻어낼 수 있는 데까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언제 물러나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고, 특히 자신의 공격적인 전략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느끼면 바로 한 발짝 양보했다." "이든은 가까스로 스탈린이 요구한 약속을 모두 회피할 수 있었지만, 그 첫 번째 방문이 앞으로 계속될 사건들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이든은 알고 있었다. 이든은 처칠에게 보낸 전부에 스탈린은 영토 야욕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우리는 이 문제에 계속 시달릴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라고 썼다."(333-9)


"처칠의 냉정한 계산에 따른 접근이 전쟁 후반 스탈린의 야욕을 꺾는 데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면, 루스벨트의 해결 방식은 순진하고 일관성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진심으로, 비밀 협약을 맺거나 나중에 처리하고 싶어했던 영토 문제에 대해서 서면으로 약속하는 것을 피하기를 원했다. 특히 그는 영토 문제에 대한 입장 덕분에 전후의 폴란드 고위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폴란드계 미국인 유권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다른 신호를 보냈으며, 스탈린의 의도를 호의적으로 해석했다. 그 모든 것들이 소련 문제와 관련한 영국과 미국 사이의 긴장을 조성했다." "결국 1945년 얄타 회담에서 동유럽은 소련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되었고, 스탈린이 바랐던 대로 국경선이 재획정되었다." "비록 서로 다른 전략을 구사했지만, 처칠과 루스벨트 모두 결국 스탈린에게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확신만 심어준 셈이 되고 말았다."(342-5)


12장 참혹한 승리─상처뿐인 영광


"1942년 1월 11일, 스탈린은 칼리닌 전선의 지휘관에게 부근의 르제프를 재탈환하라는 명령을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하달했다. 르제프는 인구 5만 4,000명의 도시로, 1941년 10월 14일 이래로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북서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르제프는 소련과 독일 군대 모두에게 모스크바로 향하는 핵심 발판기지로 간주되었다." "모스크바 전투의 연장전이나 다름없었던 르제프 전투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독일군을 몰아내라는 스탈린의 반복된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일련의 작전은 거듭 실패했다. 당시 통계가 과장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소련 측의 사상자 수는 충격적일 정도로 많았다. 현재 생존해 있는 소련군 참전용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르제프 전투를 〈르제프 고기 분쇄기〉라고 표현한다. 독일군이 결전을 벌이지 않고 후퇴하기로 결정해서 마침내 1943년 3월에 소련군이 르제프에 입성하기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359)


"훗날 주코프와 그의 옹호론자들은 소련군의 그 희생 덕분에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사면초가에 빠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육군 원수의 제6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묶어두었다고 주장했다. 우라누스 작전을 수행하던 붉은 군대는 11월에 파울루스 부대를 포위하는 데에 성공해서 독일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주코프가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르제프에서의 실패를 우라누스 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의 하나로 정당화하는 것은 〈잘 봐줘야 솔직하지 못한 변명 아니면 뻔한 거짓말〉이라고 군역사학자 데이비드 M. 글랜츠는 지적했다. 글랜츠는 그의 저서 『주코프의 대패』에서, 마르스 작전이라는 이름의 북부 공격은 스탈린의 최고 군사사령관으로서 그가 초래한 최악의 패배라고 주장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이 1943년 1월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그토록 집착했던 르제프는 그해 3월까지 독일군의 점령하에 있었던 것이다."(363-4)


"소련은 전쟁 기간 중 계속된 스탈린의 숙청정책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반역, 대열 이탈, 그외의 다른 범죄에 대한 혐의를 받은 소련 병사들은 임의로 처형되었다." "그 결과 전대미문의 수많은 탈주자와 망명자가 생겼다. 훗날 러시아 해방운동을 조직한 블라소프 장군만이 독일군 편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었다. 전쟁 시작과 함께 〈히비스들〉이 있었다. 히비스(Hiwis)란 독일어 힐프스빌리게(Hilfswillige)의 약칭으로, 자발적으로 독일군에 협력한 러시아인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대부분의 히비스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절박하게 구하던 소련군 전쟁포로들이었고, 그들은 독일군에 협력함으로써 생존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를 기대했다. 많은 변절자들은 자신이 정말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스스로 초래한 정책의 실패를 히틀러의 공포 정치에 의해서 만회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점령정책으로 현지 주민들에게 불러일으킨 공포심이 스탈린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된 셈이었다."(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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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전쟁사 1941~1945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지음, 윤시원.남창우.권도승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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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918~1941


"적백 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립된 군사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투하쳅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가 발전시킨 연속적인 작전에 관한 전략적 이론일 것이다. 이 이론의 토대는 1920년 폴란드를 상대했던 소련의 군사적 실패와 1918년 프랑스를 상대했던 독일군의 공격 실패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들은 현대식 군대는 한 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방대하고 피해로부터의 회복도 빠르다고 믿었다. 따라서 공격자는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를 펴야 하며, 각 공세는 직후에 적 후방에서의 신속한 전과확대로 연계되거나, 방어자가 전력을 재정비할 때는 새로운 전투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6년까지 기술적 진보가 가속화되자, 보다 큰 규모인 종심 작전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종심 작전의 핵심은 최신식 무기를 사용하고, 적의 방어선을 최대한 종심에서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적이 적시에 새로운 방어선을 재구축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28-9)


"1930년 중반의 소련은 기계화 부대의 장비 생산, 계획, 야전 배치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고 있었다.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은 붉은 군대가 독일에 비해 기계화 전쟁의 이론적 개념과 실질적 경험 모두에서 상당히 앞섰다는 사실일 것이다." "1939년에 이르자, 그동안 소련군이 누려 왔던 장점들은 사라졌고, 붉은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변화를 유발한 여러 가지 원인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스탈린이 소련군 지도부에 가한 대숙청이었다." "군 숙청에서 특이했던 것은 과거 스탈린의 공포 정치 시대에 언제나 행해졌던 공개 인민재판도 없이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37년 6월 12일, 보로실로프는 국방인민위원이자 2개 군관구 지휘관인 투하쳅스키와 그의 동료 장교들에 대해 거두절미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4년간, 독일의 침공이 임박할 때까지 소련 장교들은 걸핏하면 사라져 버렸다. 대략 75,000~80,000명에 이르는 장교들 가운데 적어도 30,000명이 투옥되거나 체포되었다."(32-4)


"제1차 핀란드 전쟁(1939~1940)으로 인해 소련은 국제 연맹에서 축출되었고,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더욱 고립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관계에 핀란드 전쟁이 끼친 영향은 양측 모두에서 심대했다. 실수투성이의 과감하지 못한 소련군의 모습을 보고 히틀러와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이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침공을 통해서 핀란드를 도와주려던 영국과 프랑스의 때늦은 행동은 히틀러가 1940년 4월에 노르웨이를 침공하는 데 일조한 셈이 되었다. 이것은 소련의 입장에서 불편할 정도로 지척인 곳에 독일군이 배치되었음을 의미했다." "1940년 7월 하순에 소련이 루마니아로부터 오늘날 몰도바인 베사라비아와 북(北)부코비나 지방을 강점하면서 (독일 정부의 불편한 감정 역시) 더욱 심해졌다. 소련이 취한 이 마지막 행동은 루마니아의 독일에 대한 석유 공급에 위협적으로 비치게 되었다. 독일과 소련의 불안한 평화는 급속히 파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49-50)


"1941년 4월까지 소련과 독일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고, 소련 정보 부서에서는 독일의 공격 준비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몇 달 사이에 독일의 공격 징후를 보여주는 증거가 증가하였음에도, 스탈린과 소련 외교관들은 최고의 평화 시기를 구가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평화적인 정치 행보에도 불구하고, 1941년 4월에 스탈린은 〈특별한 전쟁 위협에 대한〉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이 특별한 대비 태세는 전쟁이 임박해서야 발동할 계획이었다. 1941년 봄이 분위기에서 이 대비 태세는 외교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두면서도, 부분적인 동원령이 내려졌음을 의미한다. 스탈린의 심중에 동시에 존재했던, 즉 1941년까지 유지되었던 평화에 대한 갈망과 전쟁 발발 시에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신중한 방어 조치를 취하고 싶은 욕구 사이의 괴리가 혼란을 초래했고, 1941년 붉은 군대가 겪을 파멸적인 패배의 길을 마련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53-4)


"1941년에 스탈린이 걱정하던 상황 중 하나는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격보다 독일 측 영토로 밀려 들어간 돌출부에 대한 점령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적백 내전 당시 매우 효과를 보았던 유동적인 방어를 포기하고, 국경 전면을 따라 경직되고 연속적인 방어를 계획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1939년에 점령한 지역에 20개의 요새 구역을 설치하기 위해 구(舊) 폴란드-소련 국경의 전쟁 전 방어 계획 중 일부를 포기했고, 일부 지역에서 지뢰, 가시철조망 및 야포를 제거했다. 이곳들은 특별 군관구로 명명되었다. 1941년 봄의 때늦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새로운 방어선은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도 완성되지 못했다. 전방의 소총병 전력은 전선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주둔했다. 독일 측을 자극하는 어떠한 행위도 피하기 위해 일선 국경은 내무 인민 위원회 보안 병력이 매우 낮은 밀도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군 일선 방어선은 6월 22일에 병력을 증강하기도 전에 휩쓸려 버렸다."(62)


"어떻게 1941년 독일군의 공격이 그처럼 놀라운 정치적·군사적 기습의 효과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복잡한 의문이 남는다. 돌이켜 보면,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조짐은 충분히 많았다. 많은 정보원들이 동쪽에서 독일군이 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일견 파멸적 상황이 스탈린의 완고하면서도 맹목적 사고 때문이었다는 보편적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가 종종 적의 공격 의도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무시했던 지도자의 전형으로 언급되어 왔다." "어쨌든 스탈린이 히틀러를 오판한 최초의 유럽 지도자는 아니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서부에서 영국을 패배시키기 전에는 동부에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나치게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국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릴 의도에서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히틀러 자신만의 논리는 어쩌면 믿기 힘들 만큼 복잡한 것이었다."(72-3)


독소 전쟁 제1기 1941.6~1942.11


"1941년 6월 22일, 독일 공군은 해뜨기 전에 폭격기 500대, 급강하 폭격기 270대, 전투기 480대를 동원해 전방 지역의 소련 비행장 66곳을 공격했다. 붉은 군대 공군은 개전 첫날 오전에만 1,20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그 후 수일간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했으며, 소련군의 병력 및 철도 이동은 끊임없이 독일 공군의 공격에 시달렸다." "붉은 군대의 조직과 지휘 체계 모두 순식간에 붕괴돼 버렸다. 전쟁 첫날, 서부 전선군 부사령관인 볼딘 중장이 수많은 독일 전투기들을 뚫고 바아위스토크 외곽에 위치한 제10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사령관 골루베프 중장은 두절된 유선 전화와 전파 방해로 마비된 무전망으로 반격 명령을 내리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6월 23일, 골루베프 중장이 전쟁 이전에 수립된 작전 계획을 따라 얼마 남지 않은 예하 부대들을 동원해 반격을 시도했으나, 제10군은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헛된 시도 끝에 완전히 전멸했다."(79-81)


"공황 상태에 빠진 서부 전선군 사령관 파블로프 대장은 6월 26일에 모스크바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독일 제3기갑집단의) 1,000대 가량의 전차가 민스크를 북서쪽에서부터 포위하고 있다······. 적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 제20기계화군단과 제4공수군단이 슬루츠크에서 시도한 최후의 반격도 실패로 돌아갔다. 6월 30일, 제2기갑집단과 제3기갑집단은 민스크 서부에서 소련 제10군, 제3군, 제13군 주력을 가두는 포위망을 완성했다. 이로써 서부 전선군은 사실상 전멸하고 말았으며, 이어 이루어진 사령관 파블로프 대장의 처형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 민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417,000명의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독일군은 대부분의 경우 포위망을 빈틈없이 구축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소련군이 중장비를 포기하고 독일군 포위망의 허술한 부분을 통해 탈출할 수 있었다."(83-4)


"전쟁 초기에 소련에는 강력한 중앙 통제 조직이 없었다. 스탈린은 충격에 빠져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일 전황 보고 자리에도 불참했다. 침공 당일인 6월 22일 오후 늦게야 수상 겸 외무 인민 위원 몰로토프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독일의 침공을 발표했으나, 그 또한 전면전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7월 3일이 돼서야 스탈린은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고, 국민들에게 게릴라 저항과 침략자들에게 유용한 모든 것을 파괴하거나 철수시키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그의 연설에서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닌 러시아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이것은 전쟁 기간 내내 계속됐다." "게다가 전쟁 초반의 패배로 사단, 군단, 야전군의 평균 전력이 크게 감소해 더 이상 복잡한 지휘 체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지휘·통제 능력의 부족과 전차와 대전차포 같은 특수한 장비의 부족은 붉은 군대의 조직 체계를 극히 단순화하도록 만들었다."(95-7)


"전쟁이 시작되자 전쟁 인민 위원회는 수개월 만에 집단, 혹은 〈제파(梯波)〉 단위로 새로운 군을 편성하는 데 돌입했다." "1941년 12월 1일에 소련의 동원 체제는 동부에서 서부로 배치한 97개 사단들 외에도 194개 사단과 84개 독립 여단을 신규 편성할 수 있었다. 신규 편성된 사단 중 10개 사단은 〈인민 지원 사단〉 또는 도시 노동자로 편성한 사단으로, 대개의 경우 군인으로서 필요한 체력과 군사 훈련이 부족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독일은 전쟁 발발 전 소련군의 전력을 약 300개 사단으로 추산했으나, 12월에 이르러 소련군의 현역 사단은 그 두 배에 달했다. 초기 전투에서 소련은 100개 이상의 사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41년 가을과 겨울까지도 소련군이 형편없는 전투 능력을 보인 것은 그들이 너무 황급히 편성됐고, 지휘관과 부대 모두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원 사단들이 이렇게 싸운 결과 독일측은 적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101-4)


"1941년 7월 말, 독일군은 그들이 감행한 작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독일군은 전쟁 초반에 거둔 눈부신 승리 덕분에 빈약한 보급 지원 능력을 초과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7월 30일에 독일 육군 총사령부는 중부 집단군에게 휴식과 보충을 위해 사실상 진격을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옐냐에 있는 데스나 강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고전하고 있던 제2기갑집단은 가장 가까운 철도역으로부터 72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빈약한 도로망은 차량의 기동에 장애를 초래했으며, 결국 도보로 행군해 온 후속 보병들만으로 병력이 크게 줄어든 전차 부대의 진격을 지원하는 실정이었다. 보병들은 군화가 부족했고, 참모장교들은 겨울 피복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8월 2일, 독일 3개 집단군은 6주 간의 전투에서 179,500명의 인명 손실을 냈으나, 보충된 인원은 47,000명에 불과했다. 독일 국방군에게 남아돌았던 것은 다음 작전의 목표뿐이었다."(108-9)


"1942년 1월 1일, 소련군은 북쪽으로는 칼리닌, 남쪽으로는 칼루가를 탈환하고, 일부는 이미 포위된 일련의 독일군 방어 거점들을 공격했다." "이때 히틀러는 그 유명한 현 위치 사수 명령을 내렸다. 1942년 겨울에 이것이 성공하자, 히틀러는 전쟁 기간 내내 무조건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남발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몰랐던 것은 스탈린이 지나치게 무리한 목표를 세우지 않고 1941~1942년 중부 집단군에만 전력을 집중했다면 중부 집단군을 격파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1942년 1월, 스탈린은 지나치게 야심적이었으며 낙관적이었다. 11월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12월의 공세로 분위기가 반전되자 스탈린은 크게 고무되어, 반격 목표를 중부 집단군과 북부 집단군의 상당수를 포위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소련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주코프의 생각이 옳았다. 소련군은 독일 중부 집단군에 대한 야심찬 포위 작전을 감당할 병력과 능력이 없었다."(129-31)


"800킬로미터에 걸친 전선 전체에서 전투가 격화되면서, 전투는 개별 부대의 영웅적 활약과 혼란스러운 기동 전투, 그리고 양측에 단순한 소모전을 강요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소련군은 보통 농촌 지역을 장악했고, 독일군은 주요 거점 도시들과 마을, 교통선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1942년 4월 모스크바 반격 작전이 끝날 때까지도 전쟁 결과를 낙관하면서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잘못된 결론을 얻었으며, 히틀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군은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련군이 능력 밖의 목표를 노렸기 때문에 붕괴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홀름, 데먄스크, 뱌지마 남쪽에 포위된 독일군에 대한 독일 공군의 공중 보급 능력은 히틀러가 공군의 보급 능력을 과신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잘못된 생각은 1년 뒤 스탈린그라드에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133-6)


"독일군은 (소련의 겨울과 모스크바의 반격에 희생양이 되기 전에) 병력과 장비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었다. 바로 군대의 사기였다. 전쟁 첫해에 살아남은 고참병들은 자신들이 낯선 환경에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처절한 사투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인간적인 적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탈영이나 항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전선의 병사들은 그들이 싸우는 동기가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라는 확신을 얻으려 했다.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이런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인종적, 이데올로기적 전쟁을 강조하는 나치의 선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 초급 장교와 사병들은 이데올로기적 담론에 익숙해지면서 더욱더 슬라브계 〈열등 인종Untermenschen〉들에게 잔학 행위를 일삼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독소 전쟁을 통해 소련이 이데올로기보다 애국심을 강조하게 된 반면, 독일군은 소련식의 정치 및 사상 교육을 강화하는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145)


"1942년 4월 5일자 총통 지령 41호에서 히틀러는 육군의 작전 계획, 즉 〈청색 작전Operation Blau〉에 자신의 계획을 일부 첨가했다. 1942년 공세의 주목표는 캅카스 지역이고, 두 번째 목표는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독일군의 목표를 나누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스탈린을 돕는 꼴이 되었다." "독일 야전 지휘관들은 철도망이 복구될 때까지 연료와 수송 수단의 부족에 시달렸다. 8월에 A집단군이 마이코프의 소규모 유전 지대를 점령했을 때, 이미 이곳은 소련군이 체계적으로 모든 유정과 정유 시설을 파괴하고 철수한 뒤였다. 독일군이 철도 종점으로부터 더 멀리 진격할수록 독일군의 전력은 점점 더 소모되어 갔고, 동시에 광대한 영역에 넓게 퍼지게 되었다. 1941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전술적 성공은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고, 진격을 거듭할수록 목표는 불확실해졌다. 돈 강 동쪽에는 특정한 전략적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자연히 스탈린그라드에 주목하게 되었다."(151, 162-3)


"스탈린그라드의 소련 방어군은 놀라운 인내력을 보이며, 막대한 사상자와 손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싸웠다. 전투 초기에 추이코프는 독일군의 공군과 화력의 우세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다. 추이코프는 최대한 독일군에 근접해서, 독일 지휘관들이 아군의 인명 손실을 우려해 항공 지원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몇 주에 걸쳐 붉은 군대의 소규모 보병과 전투 공병들이 독일군에 근접해 싸웠는데, 보통 도로 하나, 심지어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독일군과 대치했다. 수색과 매복을 거듭하는 동안 전투는 미터 단위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런 전술에도 불구하고 방어군은 점차 뒤로 밀려났다." "히틀러는 11월 2일 완강히 저항하는 방어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시가전에 투입되지 않은 사단의 전투 공병 대대들을 스탈린그라드로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양측은 몇 블록 안 되는 폐허 더미를 둘러싸고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있었으나, 이때 소련군은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165-6)


"수많은 재앙에도 불구하고 소련 체제가 붕괴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소련은 국민과 그 군대의 희생에 힘입어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도 희생이 뒤를 이었다. 1942년 말이 되자 인명손실은 무려 11,000,000명에 달했다. 의도된 것이건 우연이건 간에 이런 희생은 성과가 있었다. 1942년 말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싸우는 법을 체득했고 종종 훌륭하게 싸웠다. 이들의 희생은 스탈린이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자들이 사용할 무기를 풍부하게 생산할 수 있도록 산업 동원 체제를 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독일 육군의 예리한 검인 〈전격전〉은 이미 1941년 모스크바의 문턱에서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1942년 스탈린그라드에서 다시 한 번 그 명성에 상처를 입었고, 1943년 쿠르스크에서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다. 살아남은 각급 제대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종종 그들의 〈독일 스승들〉만큼 뛰어난 살인 기술을 터득했다. 이렇게 독일은 점차 소련이 결정하는 조건에서 싸워야 했다."(167-8)


독소 전쟁 제2기 1942.11~1943.12


"스탈린그라드 방어전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 내내 바실렙스키는 N. I. 보코프가 이끄는 소규모의 참모장교단을 유지하면서, 동부 전선 중앙부와 상단에서 동시에 시행되는 야심찬 동계 반격을 구상했다. 9월 13일에 보코프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 최돌출부 양 측면에 있는 약체 루마니아군 전선을 공격해 궁극적으로 독일군을 차단한다는 요지의 브리핑을 스탈린에게 올렸다." "주요 공세 2개의 첫 번째는 작전명 〈우란Uran(천왕성)〉으로, 스탈린그라드 일대의 추축군 격멸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후 토성 작전으로 연결하여, 소련 남부 전선 전체의 독일 A 집단군과 B 집단군을 포함한 추축군 모두를 사정권에 두었다. 동시에 서부 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이 주코프의 지도하에 공세에 나서, 르제프 돌출부에 있는 독일 중부 집단군을 섬멸하고 남부 집단군으로부터 병력을 끌어와 독일군의 중부 전선과 남부 전선에 공히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는 계획이었다."(172)


"북쪽에서도 스타브카는 여전히 모스크바에 위협적인 르제프 돌출부 일대의 독일 중부 집단군에 대한 또 다른 대규모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주코프가 입안·감독하고 작전명 〈마르스Mars(화성)〉라고 명명된 이 공세는 M. A. 푸르카예프 대장의 칼리닌 전선군과 코네프 상장의 서부 전선군이 르제프 돌출부의 양 측면을 강타하기로 되어 있었다. 목표는 독일 제9군을 돌출부에서 섬멸하고 뒤이어 스몰렌스크로 쇄도하는 것이었다." "훗날 이 공세는 남부 전선의 작전에 도움을 줄 목적의 양동 공격이었다는 왜곡된 설명이 붙여졌지만, 규모나 작전 범위, 전투의 치열함으로 볼 때 이 공세는 독일 중부 집단군을 패퇴시키기 위한 중요한 시도였고, 작전 초기에는 천왕성 작전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화성 공세에 나선 소련군을 완벽하게 물리쳤으며, 중부 집단군에 대한 소련군의 야심찬 대규모 공세를 꺾어 놓았고, 주코프의 계획을 무산시켰다."(180-2)


# 스타브카Stavka : 소련 국방 인민 위원회(GKO) 산하에 조직된, 독소 전쟁 당시 최고 사령부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무적이라는 명성 이상을 상실했다. 히틀러가 현지 사수를 명령한 데다 악천후 속에서 두터운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독일군은 극소수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 수천 명의 부상병만이 돌아오는 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6군의 전멸 양상은 이전에 있었던 소련군의 포위 소멸 때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소련군의 경우는 충분한 기간 요원과 지휘관을 탈출시켜 새롭게 부대를 재건하고 다시 전투에 참가했다. 독일 제6군은 완전히 파멸되었으며, 147,000명의 전사자와 91,000명의 포로가 발생했고, 소련군의 인명 손실은 500,000명에 달했다. 상당수의 병력이 스탈린그라드에 2개월 이상 매달려 있으면서, 소련군의 차후 동계 공세는 산술적인 영향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의 1942년 겨울도 1941년과 같은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즉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여 아슬아슬한 외줄에 매달려 전략적인 대규모 공세를 펼침으로써 전선이 과도하게 확장된 것이다."(186-7)


"아마도 1942~1943년에 서방 연합군이 소련에 가장 큰 도움을 준 분야는 항공전이었을 것이다. 북아프리카에 가해지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1942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400대의 독일 공군기가 러시아 전선에서 지중해로 이동했다. 실제로 지중해 전역에서 1942년 11월부터 1943년 5월까지의 공군기 손실은 2,422대에 달했고, 이것은 독일 공군 전체 전력의 40.5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때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헛된 보급 임무 외에도 수송기 조종사들은 2회에 걸쳐 북아프리카로 병력과 장비를 보급하고 증강하는 과중한 임무에 시달렸다." "6개월간에 걸쳐 진행된 3회의 주요 항공 보급 작전에서 독일 공군의 수송 능력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즉 항공기의 손실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이 귀중한 조종사 양성 교관들까지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항공 수송력이 없어지면서 훗날 공수 작전과 항공 보급 작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197)


"1942~1943년의 기간은 상당한 양의 〈무기 대여법〉에 따라 원조 물자가 소련에 도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소련의 공식적인 기록을 보면 랜드리스 물자의 총량이 소련 생산의 4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폄하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다. 랜드리스 덕분에 소련의 생산 능력은 급속히 재건되었다. 서방 연합군은 천연자원 외에도 34,000,000벌의 군복과 14,500,000켤레의 군화, 4,200,000톤의 식품을 제공했으며, 11,800량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도 제공했다." "특히 원조된 트럭들은 소련군의 가장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해 주었다. 즉 독일군의 최초 방어선을 돌파하고 나서 후방으로 깊이 진격하는 데 있어 재보급과 기동 집단의 전력 유지에 필수적인 문제점을 해결했다. 트럭이 없었다면 1943~1945년에 이루어진 소련군의 공세는 얕은 돌파만 달성하고 곧 공세의 탄력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독일군이 곧 방어선을 재건해서, 소련군은 또 다른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198)


"1943년 봄, 돈바스와 하리코프 일대에서 거둔 만슈타인의 빛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심한 소모전을 거친 독일군은 암울한 미래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유연 방어 전략을 거부하고, 1916년 당시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이 시행했던 완강하면서도 인명 피해가 많은 고착 방어를 고집했다. 하지만 이 방어 개념은 충분한 보병 전력과 함께 대량의 가시철조망, 대전차 지뢰와 방어 구역을 요새화하는 다량의 물자가 충족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안고 있었다. 두 번째로, 히틀러는 방어에 임하는 부대에 소련군의 주 진격 축선 양측으로 이동하여 방어 전력을 증강할 것을 요구했다. 이 개념은 독일 방어 병력이 소련군의 집결을 정확히 파악하고 향후의 주 공격로를 예측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히틀러의 간섭은 독일군의 전술적 성공에 큰 획을 그었던─즉 지휘관이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달성할메 있어 방법적 선택의 독립성 보장─상징에 크나큰 오점이 되었다."(200-1)


"(쿠르스크 돌출부를 향한) 독일군의 공격 시간은 최종적으로 1943년 7월 5일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독일군 탈주병들과 정찰 보고서를 통해 독일군이 몇 시 몇 분에 공격을 할지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프로호롭카 점령을 놓고 격전이 벌어지던 7월 12일 무렵, 히틀러는 폰 만슈타인에게 제2 SS 기갑 군단을 전선에서 이탈시켜 시칠리아에 상륙한 서방 연합군을 맞으러 보낼 것을 명령했다. 폰 만슈타인은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승복했다. 그로써 비록 현실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독일군이 재개하려고 했던 모든 공세의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다." "이로써 소련군의 공병과 짜임새 있는 대전차 방어 준비, 우수한 정보력, 새 전차군의 기동성 있는 운용으로, 전격전의 주역인 독일군은 최악의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 결과는 그때까지 독일군이 시도했던 전략적 공세 가운데 적의 방어선을 뚫고 전략적 종심 돌파를 달성하기도 전에 실패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217-9)


"독일군은 지금껏 그래 왔던 대로 소련군의 공세를 꺾을 계획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더 이상 과거의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소련군이 아닌 독일군이 지쳐 있었고, 전선이 지나치게 늘어나 있었다." "처음에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저지하고 제1 전차군 소속 3개 여단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지만, 다음 날 제5 근위 전차군이 증원 병력을 파견했고, 8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독일군은 후퇴 작전을 위해 전투를 감행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소련의 2개 전차군은 8월 28일 코네프의 보병들이 하리코프 시가지를 점령할 때까지 엄호를 위해 그 일대를 장악했다. 보고두호프 일대의 전차전을 포함한 루먄체프 공세를 소련군은 〈벨고로드-하리코프 작전〉이라 부르고, 독일군은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이라 부른다. 이 작전은 쿠르스크 전투의 종말, 즉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주도한 마지막 전투였음을 뜻한다. 동시에 소련군의 하계-추계 전역의 시작이기도 했다."(222-3)


독소 전쟁 제3기 1944.1~1945.5


"1943년 12월 초 스타브카는 세 번째 겨울의 작전 계획을 발표했는데, 북에서는 레닌그라드로의 접근로, 중앙에서는 벨로루시, 남쪽에서는 크림 반도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남쪽에서는 제1, 제2, 제3,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관여하였다. 공세는 1943년 12월 말에서 1944년 4월까지 번갈아 가며 이어졌는데, 초기에는 차례로, 나중에는 여러 곳에서 동시에 수행되었다. 스타브카는 계획된 공세의 목표를 한동안 은폐한 채 중요한 포병과 기계화 부대들을 한 전선군에서 다른 전선군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사이 파르티잔들은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는 쪽이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원하는 쪽이건 독일군의 후방 지역을 점점 더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5회의 초기 공세로 2월 말에 드네프르 강의 독일 방어진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강을 이용한 방어진이 없어지자 만슈타인은 이제 광활한 우크라이나 평지에서 완패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241-6)


"남부에서는 크림 반도의 탈환을 위한 또 다른 공세가 벌어지고 있었다." "히틀러는 크림 반도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는데, 그 이유는 크림 반도가 루마니아 유전을 겨냥한 폭격기의 기지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의 저항은 거칠었지만, 2년 전 소련군의 저항만큼은 아니었다. 5월 6일에서 10일 사이 여전히 소련군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히틀러로서는 못마땅한 일이었지만, 해상 철수 작전이 시작되었다. 원래 150,000명에 달하던 제17군 병력 가운데 40,000명 이하가 크림 반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44년 5월에 소련군은 남부의 거의 모든 영토를 수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독일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는 온통 남부 지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련의 6개 전차군이 모두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다음 하계 공세가 남부에서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런 탓에 다음 여름 소련군이 중부 집단군을 노린 웅대한 공세를 펼쳤을 때 독일은 경악하게 되었다."(248-9)


"스탈린이 1812년의 영웅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이라고 명명한 공세는, 1944년 여름에 계획된 5개의 공세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의 개시 시각에 대해서는 독일과 소련의 기록이 다소 상이한데, 이것은 소련군의 공격이 시차를 두고 일어난 탓도 있다. 1944년 6월 19~20일 밤, 잔존한 파르티잔들이 중부 집단군 후방의 철도 교차점, 교량, 기타 중요한 수송 거점에 공격을 가했다. 독일군은 많은 경우 소련 파르티잔의 공격을 꺾어 놓기는 했지만 수천 개소에 달하는 수송 거점들이 망가졌고, 그 결과 추후 퇴각과 보급뿐 아니라 부대 간 이동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6월 21~22일 밤이 되자 독일군 후방 지역에 폭격이 가해졌고, 소련군 수색 대대들은 드문드문 있는 독일군 전방 거점들 사이로 이동하며 방어진을 1겹씩 벗겨 내고 있었다. 주공은 사실 23일에 실시되었는데, 수색 부대들의 성공으로 많은 경우 긴 시간의 준비 포격 없이 공세가 개시되었다."(264)


"바그라티온 작전, 그리고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과 루블린-브레스트 작전의 결과로 소련군은 네만 강을 건너 동프로이센 경계까지 진격했고, 중부와 북부 폴란드에서는 비스와 강과 나레프 강을 건넜다. 바르샤바와 리투아니아에서의 독일군의 반격을 예외로 하자면, 소련군의 진격을 멈춘 것은 독일군 때문이 아니라 병참선의 지나친 신장(伸張) 때문이었다. 이 2개월간 독일이 겪은 인적 손실은 어마어마했다. 중부 집단군은 거의 450,000명을 잃었고, 양 측면에서의 보충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888,000명에서 445,000명으로 줄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도 100,000명 정도가 사라졌다. 30개 이상의 독일군 사단이 사라지고, 남아 있는 사단들의 인적 손실도 컸던 데다가 소련 기계화 부대의 진격이 300킬로미터를 넘어서면서 독일 집단군 가운데 한때 가장 강했던 중부 집단군이 와해되었다. 북(北)우크라이나 집단군도 심한 손실을 입었고, 이제 붉은 군대는 독일 본국의 국경에까지 이르렀다."(275)


"전반적으로 1944년 여름과 가을은 독일군에게는 영락없는 재앙의 연속이었다. 하계 공세만으로도 추축군은 465,000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6월 1일에서 11월 30일 사이, 모든 전선에서의 독일군 손실은 1,457,000명이었는데, 이 중 동부 전선에서의 손실이 903,000명이었다. 기갑 부대는 제쳐 놓고라도 차량도 그리 많지 않은 독일군은 이 기간 동안 254,000필의 말과 다른 견인용 동물을 잃었다. 1944년 말에는 헝가리군만이 독일군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북쪽의 동프로이센에서 폴란드의 비스와 강, 헝가리의 도나우 강까지 소련군이 발을 들여놓았고, 서방 연합군이 독일의 서부 국경에 가까이 오면서 독일군은 포위되고 고립되어 갔다." "이제 어느 군대가 1945년에 어디까지 진주하느냐가 전후 유럽에서의 정치적 판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명백한 사실이 베를린을 향한 차기 공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동시에 소련은 서방 연합국들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296-7)


"2개월도 지나지 않아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의 독일군 방어진이 붕괴되었고, 소련군은 서쪽으로 700킬로미터나 진격하여 베를린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밀고 갔다. 이 과정에서 독일 A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이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2월과 3월, 독일군이 베를린 방위를 위해 오데르 전선을 강화하자 소련군은 다시 측면에 신경을 써서 바익셀 집단군을 연신 두들겼고, 남부 집단군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를 제거했다(이 전략 예비대는 사실 독일 전체의 마지막 전략 예비대였다). 4월 중순, 소련군은 슈테틴에서 체코 국경의 괴를리츠에 이르는 오데르-나이세 선에 도달하였고, 빈 북쪽의 체코 국경에서 그라츠 외곽까지 뻗어갔다. 1944년에 그랬듯이, 소련군이 지나간 곳에는 앞으로 수십 년간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정치적 우위를 보장해 줄 공산 정권의 핵심들이 들어왔다." "이제 소련군 6,461,000명이 가장 중요한 축에 집중될 수 있었다. 전체 병력 중 3분의 1 이상의 다음 목표는 베를린이 될 것이었다."(324)


"베를린 작전 기간 동안 소련군은 한때 무적이었던 독일 국방군의 잔존 병력을 박살냈으며, 48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대가도 컸다. 소련군과 폴란드군에서 361,367명의 전 사상자가 발생했다. 베를린 작전이 준비 기간은 짧았지만, 베를린에 있는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고 베를린을 점령한다는 목표는 17일 만에 완수했다. 소련은 그 이후로 이 작전을 거의 공식적으로,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여러 개의 전선군이 공세를 취한 전형적인 사례로 여겨 왔다. 300킬로미터 구간에서 3개의 전선군이 6개의 돌파구에서 거의 동시에 공세를 취하여 독일 예비대를 묶고, 독일군의 지휘와 통제를 혼란시키고, 경우에 따라 작전적, 전술적 기습까지 이루었다. 베를린 작전은 다른 측면에서도 교훈적이었다." "다소 도시화된 베를린과 그 주위의 숲이 많은 지형에서의 전투는 소련 입안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공격 측의 손실이 매우 컸다. 이 경험과 교훈은 전후 소련군의 개혁에 기초가 되었다."(343-4)


"1945년 봄에 실시된 작전들의 군사적 결과는 명확했다. 한때 자부심 강하고, 일견 불패일 것 같던 독일 육군의 잔존 부대는 동쪽과 서쪽에서 연합군이 공격을 하자 격파되었다. 나치 독일은 전례 없는 폭력과 파괴를 동원한 전쟁의 토대 위에서 권력을 추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완벽히 무너졌다. 베를린 작전의 어마어마한 범위와 크기는 이전의 전쟁에서는 없었던 것으로, 이 작전은 섬뜩할 정도의 소련군 인명 손실을 가져왔고, 마찬가지로 독일의 수도도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여러 독일 참전자들이 느꼈듯이 동부 전선의 전쟁이 완전히 전율로 가득한 것이었다면, 서부 전선의 전쟁은 품위 있는 여흥이었다." "그렇지만 서방은 전쟁의 승리에 뒤따른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소련의 권리 행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몇 년 안 가서 전쟁의 참혹함은 냉전의 험악함으로 바뀌었고, 서방이 갖는 소련에 대한 의심이 소련 인민의 유례없는 고통과 승리를 가려 버렸다."(347-8)


"소련의 대단히 숙련된 교전 기술에 대한 공로는 스탈린뿐만 아니라 그의 정부 전체에게 되돌아갔다. 공산 정권은 독일의 침공에 대항하며 승리를 일궈 낸 정권으로서 유례없는 정통성을 부여받았다. 정권에 냉담했던 국민들은 침략자에 대한 투쟁에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연관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순수성보다는 애국심을 강조하여, 자신들과 전체 국가의 생존을 동일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병들이 공산당이나 콤소몰에 가입하는 것이 매우 쉬워졌고,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군과 전체 국가에 널리 퍼졌다. 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 거의 모든 소련 국민이 독일군을 몰아낸 일과 1941~1942년의 참혹함을 다시 겪지 말자는 결의로 하나가 되었다. 전후 소련 경제는 이미 전쟁을 겪으면서 충격을 받았었는데, 다시금 가장 소중한 자원들을 국가 방위를 위해 할당해야 했다."(363-4)


"보다 일반적으로, 독일 침공은 침략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러시아의 전통적이고 정당화되어 온 걱정을 강화시킨 셈이 되었다. 대조국 전쟁은 그 결과 주어진 황폐, 고통과 함께 역대 소련 지도자들의 전략적 사고에 덧칠을 했다. 전후 소련 정부는 침공으로부터 소련을 보호하기 위해, 충격 완화의 역할을 하는 위성 국가들을 다루는 정교한 체계를 구축했다. 바르샤바 조약 가입국이 소련의 방위와 경제에 도움을 주었을런지는 몰라도, 반항적인 인민들은 계속해서 소련 정권의 치안에 대한 관념을 위협하였다. 쿠바나 베트남 같은 전초 국가가 서방과의 냉전에 쓸 만한 희생물이었는지는 몰라도, 결국은 소련 경제에 부담만 가중시켰다." "돌이켜 보자면, 승리의 과실을 지키고 미래에 침공받지 않으려는 결심은 소련 정부에 위험한 짐이 되었다. 이 결단은 막대한 군사 지출과 잘못된 방향의 대외 정책과 함께 소련 경제를 파멸로 내몬 장본인이었고, 소련이라는 국가도 결국 그렇게 되었다."(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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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저 지음, 진중근 옮김 / 일조각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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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1940년의 기적


"1940년 5월, '너무나 어이없는, 현대 전쟁사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4년 동안이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 4일 만에 스당 돌파에 성공하면서, 총 6주 만에 전역이 종결된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독일의 승리는 결코 예견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우연히 맞물리면서 발생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치 선전가들은 독일의 승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정립된 개념에 따라 실행·달성된 것이라는 일종의 전설을 창조해냈고, 여기에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전격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와 동시에 이 새로운 전략의 창시자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라고 선전했고, 그는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합국 측은 너무나 처절하게 패배한 지휘관들의 그럴싸한 구실 찾기를 위해 이 전설을 자진해서 받아들였다."(30-2)


제1장 '전격전'의 기원과 개념


"제1차 세계대전은 무기체계의 발전에 따라 화력 요인이 기동 요인을 압도했고 대부대급 작전들은 종종 시작하기도 전에 우박처럼 퍼붓는 포탄과 기관총탄의 세례 속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 급기야 전쟁 양상은 소모적인 장기간의 진지전으로 치달았고, 장군들은 작전술 차원의 지휘기법이 퇴색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제국의 군사지도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통해 엄청난 교훈을 얻었다. 전투력이 월등히 우세한 적을 상대로 해서는 결코 '속전속결'을 단행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40년 스당에서의 승리 이후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비로소 '전격전'에 있는 '승리의 열쇠', 즉 신속한 결전을 통해 경제적으로─그리고 전략적으로도─ 훨씬 우위에 있는 적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작전술 차원의 '기적의 무기'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산업화 사회에서 이러한 망상은 훗날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고, 독일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43-5)


제2장 '전격전' 개념이 없는 '전격전'과 서부전역의 배경


"독일 군부는 독일제국의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다시 한번 양면전쟁을 치를 가능성을 고심한 결과, '신속한 전쟁'을 통한 '즉각적인 결전'을 시도하고자 했다. 폴란드 전역은 개전 4일 만에 사실상 승패가 결정되었고 18일 후에는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역은 복잡한 기동으로 적을 포위해야 하는 몰트케와 슐리펜의 작전계획과는 달리, 오히려 지형 조건을 이용한 자연적인 포위작전으로 전개되었다." "기갑부대, 즉 전차의 운용 면에서도 폴란드 전역은 서부전역과 근본적으로 판이했다. 서부전역이 '지헬슈니트Sichelschnitt(낫질) 계획'(1940년 5월)에 의거해 기갑부대를 주축으로 실시한 대규모 작전이었던 반면, 폴란드 전역의 경우 기갑부대는 작전술 수준의 독립 제대조차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기갑부대는 통상 사단급 수준(전술적 수준)으로 편성·운용되었다. 폴란드 전역은 새로운 방식의 전쟁 개념을 적용한 일종의 시험장이었을 뿐이다."(58-9)


"1940년이 서부전역이 애초부터 전격전으로 계획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적 자원의 동원을 살펴보면 더 명확해진다. 그 단적인 예가 Uk 계층(노동자 계층)의 존재와 이들의 징집면제였다. 서부전역이 발발하기 전에 육군은 이 민간인들을 무기한으로 방위산업체에 동원했으나 동부전역 전에는 기한을 정확히 3개월, 1941년 9월까지로 한정해서 동원했다. 3개월 이내에 전격전으로 덩치만 크고 내실이 없는 소련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서부전역을 계획할 때 독일군 지도부는 제1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장기전 쪽으로 방향을 잡아나갔다. 당시 산업화된 전쟁 시대에 군사적 대결도 결국에는 후방에서의 방위산업 능력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을 경험했기에 이러한 정책을 입안한 것이다." "히틀러와 그의 군사 고문들은 기갑부대에 의한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작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서방국가들과의 장기간의 투쟁을 위해 경제적·군사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72-3)


"적의 규모를 부풀리고 아군 전투력을 축소하는 것은 전쟁을 선전할 때의 기본원칙이다. 특히 아군이 승리했을 때, 이 원칙은 승리를 더 찬란한 영광으로 빛나게 하지만, 패배했을 때는 패배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서부전역에 관한 많은 문헌들은 독일의 전력이 연합국의 그것보다 월등히 우세했다는 비상식적인 내용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담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괴벨스에 의해 완벽히 조율되던 독일의 선전기관들은 서방국가들의 언론에 나타나는 공포스런 독일군의 이미지를 한층 더 강조할뿐더러, 더 나아가 극단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써야만 했을까?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독일 측 선전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영국의 계속되는 전쟁 수행에 제동을 걸고 미국을 위협해 참전을 막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국방군이 '천하무적'이라는 선전을 통해, 강철로 된 파도처럼 쇄도해 어떤 적이라도 무너뜨린다는 독일 '전격전 부대'라는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83)


제3장 지헬슈니트 계획을 둘러싼 갈등


"A집단군 참모장 만슈타인 중장은 10월 21일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최초 공격명령을 수령했다. 수령 직후 그는 훗날 '지헬슈니트 계획'이라고 불린, 획기적인 사상이 내재된 대안을 발전시켰다." "만슈타인이 기획한 방책이 기발했던 이유는, 단 하나의 조치로 두 가지 문제─우익을 주공으로 삼으면 적 방어부대의 주력과 부딪히기 때문에 기껏해야 국지적인 승리만 얻을 수 있고, 차후에 적에게 작전술 규모의 치명적인 역습을 당할 우려가 있다─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북부에 위치한 B집단군이 아닌 중부의 A집단군을 주공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적이 예상치 못한 공격, 즉 통과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아르덴 산림지대로 강력한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슈타인은 A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의 승인하에 총 일곱 차례 건의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육군 총사령부는 만슈타인의 주장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무시해버렸다."(125-7)


"만슈타인과 별개로 히틀러도 스당에서 결정적인 돌파를 감행하려는 계획을 구상했다. 육군 총사령부는 히틀러의 구상을 '어설픈 생각'이라 치부하며 말렸지만 그는 자신의 방책을 고집했다." "히틀러의 비서실장 슈문트 대령은 베를린의 수상관저에서 신임 제7기갑사단장 롬멜을 포함한 6명의 신임 장관급 지휘관들과의 조찬식 날짜를 2월 17일로 정했다. 간담회가 끝난 후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이 자리에는 요들과 슈문트만이 동석했다. 다른 장군들이 발언했다면 불안함이 섞인 독백을 내뱉은 후 이내 말을 끊어버리고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 히틀러였지만 이번만은 태도가 달랐다. 그는 만슈타인의 설명에 완전히 사로잡힌 듯 조용히 경청했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매혹적인 논리에 감동받은 나머지, 그에게 느꼈던 혐오감도 잊어버렸다. 히틀러는 감격해 하며 만슈타인의 최종 결론인 '강력한 전차[부대]'의 투입에 강한 공감을 표시했다."(128-9)


"지헬슈니트 계획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거론되는 인물은 3명(할더, 히틀러 그리고 만슈타인)이다. 그러나 기갑부대 전문가로서 이 구상을 현실화하는 방법을 만슈타인에게 조언한 사람이 구데리안 장군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게다가 구데리안이 작전 지역의 지형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적이라 할 만했다. 구데리안은 1914년 아르덴 지역 공격작전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1918년 당시 독일 영토였던 스당에서 4주간의 장군참모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따라서 이 계획은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이라는 쌍두마차가 창안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슈타인이 A집단군 참모장 지위를 잃은 후에도 구데리안은 그와 공동으로 창안한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열을 쏟았다.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구데리안은 상부의 지시와 명령을 여러 번 무시했으며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그러므로 만슈타인이 지향한 작전이 현실화된 것은 구데리안의 덕택이었다."(126-30)


"히틀러는 전술적이고 단순히 귀납적으로 생각해 스당을 떠올렸지만, 만슈타인은 연역적으로, 한 차원 높은 전략적 심사숙고를 거쳐 스당을 선택했다. 여기에 또 다른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스 강 극복 이후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는가였다. 스당 돌파 이후 기갑사단들이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이 의도했던 대로 급속도로 대서양 해안으로 돌진하자 이 독재자는 공황에 빠져, 성공을 눈앞에 둔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다." "스당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군사 분야에 문외한인 히틀러가 전술적·작전술적 그리고 전략적 개념의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마치 아마추어 체스 선수가 우연히 천재적인 행마에 한 번 성공한 후 자신을 챔피언이라고 굳게 믿는 것처럼, 히틀러는 자신을 챔피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한판승을 거둔 자신의 총참모부에 어줍잖게 참견해 됭케르크 바로 앞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키고 영국군을 살려줌으로써 외통수를 놓치고 말았다."(142-3)


제4장 1940년의 아르덴 공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장군들은 군사 사상 면에서 날이 갈수록 독단에 빠져들었다. 프랑스 총사령관 가믈랭 장군조차도 마스 강을 '유럽에서 가장 탁월한 대전차 장애물'이라 평가했고, 지리학적으로 이중이 장애물인 아르덴-마스 강은 우회는 가능해도 돌파는 불가능한 천연적인 전략적 방어체계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군은 적이 스당으로 침략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2등급 부대들만으로 방어를 준비하는 등 상대적으로 이곳의 벙커나 방어시설에 소홀했다. 또한 프랑스군 지도부는 만일 독일이 아르덴을 통해 대공세를 취할 경우 이곳으로 병력을 이동 및 증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과오는, 제1차 세계대전 식의 시간 개념으로 독일군의 '전격전 공세' 템포에 대응할 수 있다는 프랑스 장군들의 경험적 사고방식이었다. 그들은 독일군이 마스 강을 도하하기까지 약 2주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확신했다."(229-30)


"지헬슈니트 계획의 혁명적 사상은 혁명적 방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그 중 핵심은 역사상 최초로 기갑부대를 작전술적으로 독립 운용하는 것이다." "당시 국방군에서 작전술은 야전군(예외적으로 군단급) 단위부터 적용되었다. 구데리안은 작전술 차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부대 편성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서부전역에 대비해 마침내 클라이스트Kleist 기갑군이 창설되었다. 그 예하에는 5개의 기갑사단과 이를 지원하는 3개의 차량화보병사단이 편성되었다. 이른바 '고속기동부대', 즉 기갑사단과 차량화보병사단이 도보로 행군하는 보병부대들을 훨씬 앞서 완전히 독립적인 공격작전을 수행한다는 편성은 세계 전쟁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로써 A집단군은 크게 2개 제대로 구분되었는데, 하나는 작전술 차원의 돌파를 실시하는 고속 기동부대였고, 다른 하나는 그를 후속에서 잔적殘敵을 소탕하거나 점령지역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은 보병 중심의 야전군들이었다."(173-5)


"공세 이튿날인 5월 12일,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우측에서 일시적인 교통대란이 발생했다. 원래 우측방에서 전진하기로 한 인접 보병사단들의 차량들이 기갑사단에 할당된 비교적 널찍한 도로에 계속해서 끼어들어 예상치 못한 혼란이 일어났다. 경쟁심을 느낀 보병부대가 기갑사단에 '승리의 영광'을 뺏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A집단군의 작전 착오로 말미암아 전 유럽에서 전무후무한 대규모 정체현상이 야기되었다. 북부 기동로에서는 5월 13일 마스 강에서부터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고 독일 국경을 통과하여 라인 강변까지 총 250km에 이르는 교통마비 현상이 발생했다." "(끝없는 혼란이 이어지자) 기갑병과 장군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주적이 벨기에, 프랑스군이 아니라 기갑부대를 적대시하는 보병 야전군과 A집단군의 지휘부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들의 오판은 아르덴을 거의 '독일 기갑부대의 무덤'으로 만들 뻔했다. 이 사건으로 A집단군 지휘부는 예하부대의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193-5)


"제1기갑사단이 단 3일 만에 아르덴을 통과해서 마스 강까지 진격한다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작전이 성공한 비밀은 바로 '중단 없는 연속적인 공격' 방식에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독일군의 진격이 정형화된 고정불변의 교리나 방법, 시스템 등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킬만스에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를 '즉흥곡 연주'에 비유했다. 다시 말해 일단 목표를 설정한 후 그것을 어떻게 달성해야 할지에 대한 개념도, 문서상의 특별한 방책도 없었다. 아직 발전되지 못한 '전격전 전략'이 작전술-전술로 표출된 것이 아니라, 난해한 과제를 기발하고 비범하게 스스로 해결하는 행동이 독일군의 몸에 배어 있었다는 점이 성공의 열쇠였다. 난해한 과제란 바로 '3일 안에 마스 강변까지'였다. 이 전역에서 전개된 모든 비범한 전투방식은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려는 행위의 결과물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사건들을 고차원적으로 해석했고 나아가 일종의 시스템으로 개념화했다. 이것이 바로 '전격전'이다."(224)


제5장 결전 :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스당 돌파


"5월 13일 스당에서 시행된 독일 공군의 집중적인 폭격작전은 서부전역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인 동시에 이 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술적 기습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때에 제1차 세계대전 중 최초로 전차가 출현하고 독가스를 사용하던 때에 버금가는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 "클라이스트 장군이 마스 강 도하작전 명령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독일 공군의 가용한 모든 전력이 이곳에 투입되었다. 비록 전 전력이 투입되지는 못했으나 당시 스당 지역만큼 공중전력이 집중된 경우도 없었다." "특히 16시 직전까지 시행된 집중 폭격은 프랑스군에게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프랑스군 방어체계상의 종심지역은 그 후 물론 폭격 강도가 줄어들었지만, 1시간 반 동안이나 독일 공군의 공격에 시달렸다. 그 결과 프랑스 제55보병사단의 포병을 장시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고, 구데리안이 예상한 대로 계속되는 '롤러식 폭격'은 심리적 효과 면에서 적의 전투의지를 상실시켰다."(260-3)


# 롤러식 폭격작전 : 임무수행을 완료한 일정 규모의 전력을 복귀시키고 후속부대가 폭격 임무를 수행하며 복귀한 부대는 재무장시켜 다시 전선에 투입하는 방식


"라퐁텐 장군의 사단 지휘소 벙커는 스당에서 8km 남쪽에 위치한 퐁다고의 삼림지대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5월 13일, 이곳에서 서부전역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발생한 집단공황이 프랑스군을 급격한 파멸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 시각, 이 지역 어디에도 전차는 물론 단 한 명의 독일군 병사도 없었다. 이 혼란의 진원지는 라 르나르디에르 고지였다. 이곳에서 최초로 '유령전차'가 출현했다는 보고가 들어와 이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었다." "인파를 저지하려던 후방지역의 장교들마저도 탈영 대열에 동참했고 일부 병사들은 이곳에서 100km 떨어진 랭스까지 떠밀려 내려왔다. 헌병들도 집단 탈영병들에 대해 손쓸 방도가 없었다. 단 몇 시간 내에 제55보병사단은 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극히 몇몇 제대를 제외하고는 최하급 부대들까지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들은 독일군 전차의 제물이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쇠약해진 정신력 때문에 이러한 파멸을 겪은 것이다."(284-6)


"5월 14일 전투기와 대공포 부대들은 연합국 공군의 집중폭격으로부터 마스 강의 교량들을 보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중화기와 전차를 마스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킬 유일한 통로는 제1기갑사단이 설치한 골리에의 교량이었다." "구데리안은 처음부터 스당 일대의 취약한 교량을 전체 작전의 성패가 걸린 아킬레스건으로 보았다. 그는 〈집중하라! 분산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부르짖었으며 스당 지역, 특히 골리에 교량 일대에 방공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전례 없이 조밀한 화망을 구성했다." "결론적으로 5월 14일 스당 일대에서 벌어진 공중전은 독일 국방군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첫째, (골리에 교량을 폭파하기 위해 출격한) 연합군 폭격기 부대의 '중추부'가 와해되어 이때부터 연합군은 집중적인 공군력 투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구데리안 장군은 이날 그의 군단 주력을 마스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작전술 차원의 돌파작전이 성공한 것이다."(288-93)


"5월 14일,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장면이 셰메리에서 펼쳐졌다. 구데리안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기갑부대를 서쪽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이것은 그가 상급자의 명령과 히틀러의 지시를 어긴 행동일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모든 전쟁술의 원칙'에 위배된 행동이었다. 그의 결정으로, 그를 따르는 다른 기갑사단들도 공세에 동참하게 되는 일종의 눈사태 효과가 일어났다. 기갑사단들은 완전히 고립된 채 대서양 해안을 향해 작전술적 쐐기를 박는 공격을 실시했다. 보병사단의 측방 방호는 전혀 없었다. 이 공세는, 훗날 윈스턴 처칠의 표현처럼, 가느다란 낫 형태를 띠었다." "역사상 최초로 기갑부대가 주축이 된 작전술 차원의 독립 작전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이 전투는 새로운 군사사적 전환점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별안간 현대적인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이 등장함에 따라 1918년 이래 주축을 이뤄온 '진지전' 양상은 자취를 감추었고, 이러한 기동전 개념은 '전격전'이라는 암시적인 슬로건 뒤에 숨게 되었다."(314-5)


제6장 마스 강 전선의 붕괴


"독일군 기갑부대를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5월 14일 오후였다. 바야흐로 이 시점이 서부전역의 가장 결정적인 국면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같은 절호의 기회가 프랑스군이 계속해서 역습 시기를 미루는 바람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독일군은 제1,2기갑사단을 교두보 일대 확보에 투입할 수 없었고, 제10기갑사단의 주력은 후방에 위치한 터라 그 지역에 전력을 투입하지 못해 두 사단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만일 프랑스군이 이곳으로 적시에 돌진했다면 결과는 뻔했다." "그러나 공격명령은 하달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역습의 전권을 위임받은 제21군단장 플라비니 장군이 전선으로 가는 내내 두려움에 휩싸여 전장을 이탈하는 수많은 병사들을 목격했는데, 이들은 수백, 수천 대의 독일군 전차들이 공격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끊임없는 악재와 기갑부대의 공격대기지점 점령이 지연되는 데 초조해하던 플라비니는 결국 역습을 취소하고 말았다."(323-4)


"문제의 근원은 더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훗날 많은 프랑스인들은 1940년 패배의 원인을 '저지'라는 단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개념 이면에 내재된 잘못된 사상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제2군사령관 욍치제르 장군의 명령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지휘방식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는 독일군의 돌파 시도에 다음과 같이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①돌파를 정면에서 저지한다. ②포병화력으로 적을 격멸한다. ③작전지역 내의 적을 섬멸하고 그 지역을 탈환한다. 이 방책은 일자형 전선을 다시 회복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에 대응하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독일군은 이와 유사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면 정면을 차단하기보다는 기갑부대로 적의 측방을 역습했다. 뒤집어서 만일 플라비니가 강력한 역습을 시행했다면, 월등히 우세한 전력을 보유한 프랑스군의 기갑부대가 북쪽으로 수 km 정도만 기동했다면 구데리안 기갑군단의 측방을 기습적으로 찌르는 대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325)


"이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프랑스가 구데리안이 스톤 일대에서 실시한 '공세적 방어'를 작전술 차원의 주공으로 오판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역습을 실시하는 대신, 실제로 돌파가 일어난 교두보의 서쪽 지역을 간과하고 예상되는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작전술 수준의 예비대로 편성된 정예사단을 방어작전에 투입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손쉽게 서쪽 방면을 돌파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또다시 독일군의 기만작전에 속았다. 지헬슈니트 작전이 시작될 때 독일군은 주공을 우익에 둔 것처럼 적을 속이고 중앙에서 돌파를 감행했다. 반면 스당에서 구데리안은 주공을 중앙에 둔 것처럼 가장하고 우측(서쪽)으로 돌진했다. 스당에서 돌파를 성공시킨 뒤 부대를 서쪽으로 진격시키되 동시에 그 역량 중 일부를 남쪽으로 투입할 것을 주장한 만슈타인의 구상이 또 한번 적중했다. 프랑스 지휘부는 물론, 대부분의 독일군 장군들도 만슈타인의 기가 막힌 행마行馬를 이해하지 못하긴 매한가지였다."(340)


"전투가 개시되자, 프랑스군 전차부대는 줄곧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경직된 교리에 따라 행동했다. 프랑스군 기갑부대들의 작전은 너무나 정적이고 선형적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전차들은 기동력을 발휘해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면서 전투를 수행했다. 또한 독일군의 통합된 무전통신 체계의 우수성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순식간에 주공의 위치를 변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전차들은 극소수만이 무전기를 장착하고 있어서, 장교들이 자기 전차에서 내려 다른 전차로 찾아가 명령을 전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바로 이때 프랑스군 전차들은 독일군의 기습을 받았다. 또 하나 구별되는 무기체계의 특징은 전차포탑의 형태였다. 프랑스군 전차의 포탑에는 단 한 사람만 탑승할 수 있어서 모든 전차장은 전술적인 판단과 결심, 전투지휘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탄약수와 포수의 임무도 병행해야 했다. 반면 포탑에 2~3명이 탑승한 독일군 전차의 지휘자들은 전투지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380)


제7장 대서양 해안을 향한 진격과 측방 노출 문제


"구데리안은 자신의 기갑부대들이 마스 강을 넘자마자 즉각 주도권을 쥐고 적 종심 깊이 돌진했다. 이것은 선형 전투지휘에서 비선형 전투지휘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그러나 대서양 해안으로 진격하는 동안 동시에 2개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전장에서 일어났고 다른 하나는 독일군 장군단 내부에서 발생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선형 전술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격 발생과 노출된 측방에 대한 공포는 전차라는 무기체계가 없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철저히 고립된 기갑사단이 적 후방으로 진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계획이었다. 특히 지나치게 빠른 공격 템포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측방 방호를 위해 보병사단들이 기갑부대를 따라잡을 수 있도록 전차의 진격 속도를 늦출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 진보주의자, 특히 그 선봉에 선 구데리안 같은 이들은 그런 속도로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397-8)


"5월 17일 아침, 클라이스트 장군은 상급부대의 지시에 따라 마지못해 구데리안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이 지휘권 분쟁은 독일군 최고지휘부에까지 큰 소동을 일으켰다. 이날 오후에 5월 15일자로 클라이스트 기갑군을 배속받은 제12군사령관 리스트 상급대장이 구데리안을 찾아왔다. 그는 상황을 진정시키고 룬트슈테트를 대신해서 구데리안에게 원래의 지휘권을 돌려주었다. 동시에 그는 A집단군의 동의하에 회유적인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는 구데리안에게 '전투 전위부대' 규모의 전진은 허락했지만, 군단 지휘소가 전방으로 진출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구데리안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즉각 전차부대로 공격을 재개했지만, 무전기로 직접 명령을 내리지 않고 후방의 지휘소에서 야전 전화로 예하부대들과 연락을 취했다. 지휘소는 전방에 있는 제대와 수 km 길의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어서 구데리안은 무전기를 쓸 필요가 없었고 상급 지휘관들의 감청을 피할 수 있었다."(401-2)


"5월 17일과 18일 '친히' 명령을 내려 기갑부대를 정지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총통 히틀러였다." "독일 군사사軍事史상 군사적 문외한이 군사작전에 개입한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1940년 5월 17일의 사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당시 독일군 총참모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엘리트 집단이었고 이들은 냉철한 전문가적 판단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 조직이 지금 비이성적인 외부인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전쟁과 군사적인 면에서 문외한이라는 것보다, 그의 심리 상태가 종종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항상 총통은 어떤 가능성에 대한 극단적인 과대평가와 과장된 위기 사이를 오갔다. 지헬슈니트 작전 중에는 시간이 갈수록 성공 가능성이 커져갔는데도 그의 신경과민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작전의 성공을 확신한 유일한 인물인 히틀러는 스당 돌파의 성공을 보고받은 순간에도 사실을 믿지 못하고 '기적'이라며 말을 더듬었다."(404-5)


"히틀러는 '마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1914년 슐리펜 계획의 실패가 재연되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노심초사했다. 반대로 할더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연합군이 솜 강과 엔 강을 따라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조치를 저지하려면 A집단군의 정예부대들 중 일부를 대서양 해안 방면이 아닌 콩피엔느를 거쳐 남서방향으로 선회시켜야 했다. 할더는 대서양 해안에서 혼란에 빠져 있는 적들을 포위·섬멸하는 데 몇몇 기갑사단과 제4군으로 증강된 B집단군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할더는 경쟁자 만슈타인보다 더 만슈타인다워졌다. 만슈타인은 2개의 개별적인 대규모 작전('황색계획'과 '적색계획')으로 연합군을 격멸하려고 했으나, 할더는 과거의 슐리펜처럼 단숨에 모든 것을 얻고자 했다. 히틀러는 이 아슬아슬한 계획에 기겁을 하고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로써 '남측방 방호의 문제는 공세적으로 해결한다'는 만슈타인의 구상은 공중으로 날아가버렸다."(406-7)


"몽코르네에서의 정지명령이 발령된 후 클라이스트 기갑군뿐만 아니라 제4군 예하의 호트 기갑군단도 멈춰서야 했다. 이 명령은 돌파구의 북측방에 연한 구데리안을 정지시킬 수는 있었으나 롬멜을 정지시키지는 못했다." "롬멜은 5월 16일 18:00시경 클레르파이에서 프랑스 국경을 넘어섰다. 곧 롬멜은 전방에 펼쳐진 연장된 마지노선과 함께 구축된 철조망과 지뢰지대 그리고 장갑화된 반구형의 포진지, 콘크리트 벙커 등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장군들 같았으면 망설이다가 더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 다음날 공격을 개시했을 것이다. 게다가 중포병과 추가 보병부대, 공군 슈투카의 지원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기습의 효과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롬멜은 상급 지휘관들의 지시를 거역하고 주저 없이 기습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아군이 공격할 준비가 완벽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야간에 전차부대를 집중 투입해서 강력하게 구축된 적 방어진지를 돌파한 것이다."(417-9)


"할더는 수차례 건의한 끝에 5월 19일, 히틀러에게서 모든 부대들이 대서양 해안까지 자유롭게 기동해도 좋다는 승인을 얻어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에서 수년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치열한 진지전을 치렀던 격전지들을 가로지르며 재개된 지헬슈니트 작전의 결정적인 공세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독일군 기갑부대는 연합군 전선에 쐐기를 형성함으로써 정예사단들이 집중되어 있던 연합군 북익 전체를 대서양 해안을 따라 완전히 포위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 포위망은 종심이 약 200km, 정면이 약 140km에 이르는 경이적인 규모였고 이곳에 포위된 부대는 벨기에군뿐만 아니라 프랑스 제1집단군 예하 제1영국원정군, 프랑스 제1,7군, 제9군의 패잔병 일부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수였다. 연합군 사단들은 동쪽과 북쪽에 아직도 국지적인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이들도 독일군 B집단군에게 집중공격을 당하고 있었으며, 남쪽에서 독일군 제4군이 그들이 후방으로 돌진하고 있었다."(429-31)


"롤멜이 사실상 '아라스의 승리자'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롬멜은 연합군의 장군들과 달리 관행을 거부하고 적의 포탄이 떨어지는 최전선 한가운데서 자신의 사단을 지휘했다. 극도의 위험 속에서도 부하들과 함께한 그의 용기와 냉철함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는 갑자기 닥친 위험에 번개처럼 신속하고 과감하게 대응해 위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공명심에 휩싸인 그는 자신의 업적을 한층 더 높게 평가받기 위해 위협의 정도를 과장되게 표현해, '수백 대의 적 전차'가 자신의 부대를 공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 보고 때문에 상급자들은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서부전역 이후에 롬멜이 히틀러에게 제출한 이른바 롬멜 보고서는 영국군의 역습 상황을 가리키는 적색 화살표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이렇게 하여 역설적이지만, 5월 21일 실패한 영국군의 역습은 '아라스에서의 정지 명령'을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됭케르크의 전투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451-2)


제8장 됭케르크의 기적


"5월 24일, 독일군은 유일하게 연합군의 지배하에 있던 항구도시 됭케르크의 15km 전방까지 도달해 있었다. 선두부대는 이미 마지막 자연장애물인 아 운하를 넘어섰다. 독일군 기갑부대와 됭케르크 사이에는 이들을 저지할 만한 연합군 부대가 없는 진공 상태였다. 마지막 피난처가 봉쇄되어 약 백만에 가까운 영국군,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포위망에 갇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됭케르크에서 100km나 떨어진 동쪽에서 B집단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후방에서 다가오는 치명적인 위협에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이때 20세기 군사사에서 가장 기이한 사건 중 하나인 '됭케르크의 기적'이 일어났다. 연합군 병사들도 독일군 전차들이 마법의 손에 붙들린 것처럼 갑자기 정지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지명령은 히틀러에게서 비롯하지 않았다. 그는 장군단 내부의 위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에야 개입했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간의 대립 양상이 바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455)


"됭케르크 직전에서의 정지명령은 독일 육군 내부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단 한 차례의 명령으로 이처럼 격렬한 집단 항명이 일어난 경우는 없었다." "훗날 구데리안은 〈최상급 지도부의 간섭이 전체적인 전쟁 결과에 최악의 영향을 미쳤다〉라고 비판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부 부대들의 입장에서 이 명령은 정지명령이 아니라 철수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아 운하의 동쪽에 확보한 교두보를 포기하고 이 선에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연합군 부대는 아무런 제약 없이 그곳에 진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친위대 부대장이었던 제프 디트리히는 히틀러가 친히 내린 지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역했는데, 이 일만 보더라도 이 지시가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구데리안조차도 히틀러의 가장 충직한 부대가 반동행위를 취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이 독단적인 행위는 관대하게 처리되었다."(463-6)


"5월 26일 18:57분, 드디어 다이나모Dynamo 작전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철수작전은 당초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디게 진행되었고 5월 28일까지 겨우 9,965명만이 승선해 영국으로 수송되었다." "5월 29일에는 47,310명이, 5월 31일에는 그보다 많은 68,014명이 구조되었다. 마침내 '됭케르크의 기적'이 하나둘씩 실현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기상조건도 연합군의 철수작전에 톡톡히 한몫을 했다. 파도가 높고 거칠기로 유명한 도버 해협의 바다가 며칠 동안이나 잠잠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이나모 작전이 시행되던 9일 동안 해수면은 마치 연못처럼 잔잔했다." "연합군의 철수작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그 기간 동안 하늘에 낮고 짙게 드리워져 있던 시커먼 구름이었다. 이 덕분에 독일 공군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연합군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실시된 다이나모 작전에서 영국으로 구조된 연합군 병력은 총 338,682명이었다."(472-3)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됭케르크의 수수께끼'를 언제나 객관적인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했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독재자의 순수한 주관적인 동인을 배제했기 때문에 진정한 동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그에게는 어떠한 전술적, 작전술적, 전략적, 그리고 정치 이데올로기 논리보다도 군사적 최고지도자로서의 개인적인 권위가 훨씬 더 중요했다. 히틀러는 됭케르크에서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다기보다는 육군 총사령부 장군들의 지휘권 행사를 중단시켰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에게는 분명 자신의 이념, 즉 '총통의 이념'이 가장 중요했다." "서방국가들에 대한 공세는 명백히 '그의 전쟁'이었다. 군사 보좌관들은 하나 같이 서부전역에 승리할 수 없다고 예견했는데 뜻밖에 그가 옳았다는 것이 현실로 드러났다. 그렇게 세계 전쟁사상 가장 스펙터클한 승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던 순간에 히틀러는 이 전쟁의 위대한 승리자가 자신이 아니라 휘하의 장군들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것이다."(490)


"5월 24일, 샤를르빌에 위치한 A집단군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히틀러는 자신이 신임하는 룬트슈테트가 권한을 박탈당해 무기력해진 모습을 보았다. 육군 총사령부는 자신의 의지에 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독단적으로 그 같은 조치를 결정하고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자신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예하 장군들 중 감히 자신을 무시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에게 도전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육군 총사령부의 일부 고위급 장교들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감정이 폭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지휘권을 바로 세우고, 누가 절대적인 군사 지도자인가를 과시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당한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이미 정지한 기갑부대를 얼마나 오랫동안 대기시킬 것인지에 관한 결정권을 (차하급 지휘관인) 룬트슈테트에게 위임함으로써 브라우히치와 할더를 엑스트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491)


제9장 서부전역의 종결


"남서쪽을 향한 새로운 공세가 시작된 시점에 A집단군 예하부대가 재편성되었다. 5월 31일부로 구데리안 군단은 기갑군으로 승격되었고 구데리안은 대서양 해안에서 스당의 남쪽으로 공세를 전환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A집단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구데리안은 스당과 스위스 사이에 배치된 프랑스 제2집단을 포위하기 위해 측방으로 기동한 후 남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스위스 국경을 목표로 공격했다. 이로써 그는 1939년 가을, 만슈타인이 착안한 작전술 차원의 포위망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당시(1939년) 만슈타인은 A집단군 참모장으로서 제2단계에서는 프랑스군의 후방, 즉 〈마지노선 후방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슐리펜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격렬한 프랑스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6월 9일 A집단군의 전면적인 공세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할더는 그 다음날 자신의 일기에 매우 유쾌한 어조로 이렇게 기록했다. 〈칸나이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군〉."(497)


"그 사이에 C집단군 예하 제7군도 브라이자흐에서 라인 강을 도하해 마지노선 돌파에 성공했다. 이들은 남부 알자스 방면으로 진출하여, 6월 19일에는 구데리안의 기갑군 중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일부와 벨포르에서 연결작전을 성사시켰다. 그리하여 낭시와 벨포르 사이에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해 이곳에 있는 3개의 프랑스 야전군을 에워쌌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슐리펜 계획의 결정판이었다. 됭케르크에서 실패했던 '칸나이'를 이번에는 완벽하게 성공시킨 것이다. 이 '로트링엔'의 포위망에서 독일군은 50만 명의 프랑스군을 포로로 획득했다. 사실 서부전역은 6월 17일에 종결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날 새로 임명된 프랑스 수상 페탱 원수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자 휴전을 제의했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 시 독일이 항복문서에 조인했던 콩피에뉴의 숲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히틀러는 1918년 11월 11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곳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498)


제10장 승리와 패배의 원인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도움으로 승리한 프랑스에게 파로스의 승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전국 국민 중 프랑스인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실종자와 사망자가 도합 약 15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18~27세 남성 인구 중 27%가 전장에서 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베르됭 콤플렉스'라는 정신적 상흔이 프랑스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육체적·심리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런 상태였다. 이즈음 전쟁피로증과 평화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히틀러는 노련하게 평화 선전공세를 펼치며 그 위장막 뒤에서 군사력을 증강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은폐하기 위해 수차례 프랑스와 영국 출신의 영향력 있는 평화주의자들을 몇 명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했다." "서유럽 사람들은 독일의 군사력 재건에 대해서도, 주데텐 위기 때에도 그리고 폴란드 침공 시에도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505-6)


"전쟁이 종식된 후 프랑스에서는 패전의 책임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시행되었다. 그들은 소위 좌익이라 불린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몇몇 장군들이 포함된 우익집단들은 평화주의라는 독극물로 사회를 분열시킨 이들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그들로 인해 군의 전력이 약화되었다는 논리였다. 장군들은 특정 시민계층의 타락을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실책을 무마할 수 있는 증거를 만들어냈다. 조국 패망의 결정적 원인은 군사적 실책이 아닌 오로지 '사회적 문제' 때문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비시 괴뢰정권 하에서 리옹에서 재판이 열렸을 때, 피고로 지목되어 제1열에 기립한 사람들은 장군들(가믈랭을 제외하고)이 아니라 붕괴한 제3공화국의 정치가와 지식인이었다. 더 기막힌 사실은 조국 패망의 가장 큰 책임자 중 하나인 욍치제르 장군이 국방장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를 비판했지만,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만은 패전의 결정적인 책임이 프랑스군 장군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508)


"마지노선에 대해 모든 역사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그 효과가 극히 미미했던 비경제적 투자였다는 것이다." "마지노선이 원래 순수 방어전략의 일환으로 계획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이를 이용해 국경지대를 강력하게 방비함으로써 수많은 부대를 다른 지역으로 전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확보했고, 이로써 마지노선의 존재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행하게도 이른바 '마지노 사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에서는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의 르네상스가 태동한 반면,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개활지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마지노선 뒤에 안주하려 했다. '선형 방어' 교리에 집착했던 프랑스군 장군들은 제1차 세계대전 시의 참호전투를 재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지노 사상'은 수동적인 태도, 수세적인 자기 구속, 주도권의 단념을 의미하는 엄청난 재앙이었다."(509-10)


"연합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의 전투력 및 경제력의 양적 우위를 확신했고, 이 때문에 전쟁을 막대한 물량전으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했다. 반면 독일군은 진지전의 선형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공격전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연합군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계회에 의거해 포병과의 협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병진대형으로 전 부대가 동시에, 정확히 규정된 시간과 정확히 지시된 선까지 공세를 실시해야 했다. 이와 정반대로, 독일군 돌파부대 지휘관들은 철저히 독단적으로, 인접 부대와의 연결과 측방 노출을 고려하지 않고 쇄도해 들어갔다." "연합군은 적의 저항이 가장 강력한 지점(강점)에 예비대를 집중한 반면, 독일군은 적의 저항이 가장 취약한 지점에서 예비대를 집중 운용했다. 공격 작전 시 최초 제1제대는 적의 강점을 회피하고, 후속부대가 이곳을 무력화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중단 없는 '제파식 공격'의 목표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적의 종심 지역으로 돌진하는 것이었다."(529)


"리들 하트에 따르면, 독일군 돌파부대의 성공의 열쇠는 바로 '간접접근'에 있다. 이들에게는 적 부대의 격멸과 적 부대와의 직접적인 교전보다는 가급적 교전을 회피하고 종심 깊이 진격해서 적의 병참선과 지휘통제의 중추부 그리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더욱이 이와 같이 전역이 진행되면 적에게 '혼란'이라는 치명적인 심리적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실제로 돌파부대가 일단 적의 최전방 부대의 후방으로 돌진하는 데 성공하면, 방어선상의 진지들에 투입되어 있던 연합군 병사들은 매번 혼란에 휩싸였다. 즉 전선의 아주 미세한 지점, 단 한 곳이 돌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체계 전체가 붕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술적인 돌파가 실패한 이유는 기갑부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1940년의 성공에는 이러한 역사적 근원이 있었다. 구데리안은 과거의 '돌파부대 전술'의 기본원칙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현대적인 기갑부대와 결합시켰다. 전격전의 핵심요소는 이렇게 창안되었다."(530)


마무리 총평과 에필로그


"결론적으로 1940년의 '전격전'은 히틀러가 탄생시킨 그리고 그가 주창한 '전격전 전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인간은 〈절망의 정점에 이르면 엄청난 위기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없으며, 다른 탈출구가 보이지 않으면 대담한 돌출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마스 강을 건너 대서양 해안을 목표로 기동한다는 만슈타인의 지헬슈니트 계획은 대담한 돌출행동이었다. 연합군 장군들은 이 같은 대담한 행동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작전의 숨가쁜 진행에 연합군 장군들은 적잖이 당황했는데, 우유부단했던 히틀러도 예하 지휘관들이 점차 작전을 독단적으로 진행함에 따라 자신의 손에서 지휘권이 빠져나가는 것을 깨닫고는 당황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됭케르크를 눈앞에 둔 기갑부대를 정지시켰는데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그러므로 '전격전 사상'은 서부전역의 승리의 근원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549-50)


"독일 국방군에게 서부전역은 찬란한 대승리이자 비극이었다. 특히 스당의 신화가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1870년과 1940년, 두 번씩이나 독일군은 큰 승리를 달성했으나, 매번 그 승리에서 잘못된 결론을 도출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혹독한 파멸을 맞게 되었다. 프랑스 육군은 베르됭에서의 승리로 진지전을 과대평가하게 된 반면, 독일군은 스당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작전술 차원의 기동전'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서부전역이 종결된 후 독일군 장군들은, 특히 이전까지 개혁적 사상에 회의를 품던 이들까지도, '전격전'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과는 정반대로 신속한 작전술적인 결전을 시행하여 경제적·전략적으로 우위에 있는 적과도 대적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격전'은 칸나이 사상에서 비롯된 '기계화된' 기동전의 르네상스였다. 하지만 슐리펜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장군들은 누가 결국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자였는지를 간과했던 것 같다."(551)


"독일은 서방국가들과의 전쟁을 사전에 장기전으로 계획했으며 전쟁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고 시작한 반면, 소련과의 전쟁은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더구나 이러한 확정적인 종료 시점에 의거해 인적·물적 자원을 제한적으로 동원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모스크바에 입성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41년 12월 영하 36도까지 떨어지는 뜻밖의 강추위 속에서 동복을 준비하지 못한 대부분의 독일군 병사들은 하복을 입고 적과 맞서 싸워야 했다. 더욱이 당시 국방군의 지상군, 공군 그리고 해군이 서로 다른 지역에 분산되어 한창 해당 전역의 전투를 치르고 있던 중에도 히틀러와 휘하의 장군들은 소련의 적군赤軍을 마치 '진흙으로 빚어진 거인' 같은 존재로 보고, 최초 돌파 단계에서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독일군이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는, 전략적 차원에서 전격전을 수행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선제타격능력이 열세에 있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552-3)


"결론적으로 1940년의 서부전역은 계획되지는 않았지만 성공한 '전격전'이었으며, 1941년의 동부전역은 반대로 기계획되었지만 실패한 '전격전'이었다. 1942년, 독일군은 새로운 전법으로 다시금 공세에 돌입하여 볼가 강변과 나아가 코카서스 일대까지 진격하여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작전술 측면에서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찰나적 승리였으며, 독일은 전략적 차원에서 조만간 파멸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과 그 동맹국들의 경제적 우위가 효과를 발휘했다. 이것은 전차의 생산능력에서 잘 드러난다. 독일제국은 다른 무기체계를 제쳐두고 오로지 전차 생산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재의 부족으로 인해 겨우 2만 5천 대를 생산할 수 있었다. 반면 연합국 중 주요 3개국인 미국, 영국, 소련은 도합 20만 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제2차 세계대전도 결국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장에서의 전투력보다 후방의 병참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던 것이다."(554)


"여기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일어난다. '전격전'이라는 현상도 또다른 관점에서 시대착오적이지 않았는가? 산업화 시대에 두 번의 세계대전은 순수 전략적으로, 무엇보다도 방위산업의 생산 능력이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었건만, 히틀러와 그의 장군들은 너무나 편협하게 군사적인, 특히 작전술적 측면에만 집착했다. 따라서 '전격전'은 혁명과 보수의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순수하게 작전술 차원만을 고려한다면 독일군 장군들은 현대적인 방책을 이용했지만 전략적 관점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전쟁 양상에 몰두했다. 이미 19세기에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군사적으로 더 우세한 남군이 경제적으로 월등한 북군에게 패망함으로써 군사력이 경제력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말이다. 돈키호테는 시대착오적인 전쟁 양상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요컨대 독일군 기갑부대 작전의 '전격전'은 우월한 산업 잠재력이라는 풍차에 맞선 장창 공격이었을 뿐이다."(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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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 총참모부 작전적 사고의 역사 - 헬무트 폰 몰트케부터 아돌프 호이징어까지
게하르트 P. 그로스 지음, 진중근 옮김 / 길찾기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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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


2 전술-작전-전략의 정의


"전술은 일반적으로 계획적, 계산적 또는 목표지향적, 단기 및 중기의 행동으로 이해되었던 반면, 전략은 장기적으로 구상된 목표달성 또는 유리한 상황조성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최초에는 오로지 전술만 존재했다. 고대부터 전술은 명확하게 정의된 군사적인 전문용어였다. 전술에는 행군과 진지구축, 군을 집결시키고 병력을 회전장에 배치하는 능력이 포함되었다. 유럽군대의 복잡한 발전과정에서 대대나 연대의 기동과 같은 단순한 전술과 대부대의 전술을 구분하고자 하는 관념들이 근대 초기에 최초로 등장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과정에서 발전한 대규모 육군으로 인해 18세기 말경 유럽의 군사사상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게오르크 하인리히 베렌호르스트, 헨리 로이드, 하인리히 폰 뷜로브, 앙투안 드 조미니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와 같은 당대의 군사학자들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전쟁수행에 관해 연구하면서 군사학 전체를 포괄하는 전쟁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37)


"클라우제비츠와 조미니의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군사적 사고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전략적 측면에서 처음부터 치명적인 오류를 초래했다. 독일에서는 일종의 순수 군사적 관점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개념이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정치 우위에 바탕을 둔 전략개념만은 배제되었다. 대몰트케가 바로 그 시초였다. 대몰트케는 정치가 전쟁 개시와 종결만 통제하고 그 외의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대몰트케와 그의 후임자들은 전쟁수행을 순수 군사적인, 비정치적인 행위로 이해했다."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야 비로소 독일에서도 '참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개념은 정치 우위의 대전제 아래 정치와 전쟁수행의 밀접한 관계를 부각시켰고 동시에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관점을 결합시켰다. 그 모두를 포괄하지만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고 있는 개념이 바로 정치적 개념이다."(39)


"독일에서는 대규모 육군의 출현과 함께 이미 18세기 말경부터 작전을 부대의 기동과 동일시했다. 따라서 1789년 프리드리히 마인네르트는 '전쟁에서의 작전은 적을 격파할 목적으로 폭력을 사용 또는 사용하지 않는 전쟁에서의 모든 행위이며 (···) 그 핵심은 바로 기동술'이라고 기술했으며, 게오르크 벤투리니는 작전이 기동술에 속하며 육군이 어떻게 기동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본 연구에서 정의한 가설로서 작전을 정의하면 작전이란 독립적인, 지리적으로 주어진 상황과 적의 움직임을 지향한, 세계대전 시대에서는 통상 육·해·공군의 합동 하에 전략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최초에는 전략적 행동으로 개시되어 종국에는 전술적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작전적 사고는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해 단일 전역에서의 대부대의 지휘와 전개에 관련된 시간, 공간과 전투력과 같은 특정한 요인 또는 상수에 대한 고찰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41-4)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첫 번째 주제는 '시간'을 지배하는 '공간'이다. 모든 지리적 공간은 시간뿐만 아니라 형체를 통해 구체화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군사지리적 조건을 작전계획과 실행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장군참모장교들은 공간을 단순히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던 반면, 오늘날에는 인류지리학적 관념에서 종교적, 사상적인 환경을 포함한 인간생활의 총체적인 세계로 인식하고 있다. 결국 작전적 수준의 공간과 전술적 수준의 지형 분석은 모든 군사적 상황평가의 출발점이다. 여러 자연환경과 사회기반시설, 기상학적인 요인들은 전쟁수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군사적 결심수립과정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상황평가 시 한 국가의 경제력, 인적자원의 능력에 따라 일시적으로 조정이 가능한 변수인 군비 문제와 달리 물리적-물질적인 전투공간의 형체는 진지구축이나 요새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는 상수(常數)이다."(48-9)


"이제는 한 국가의 지리전략 상황이 자연과학적인 공간으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경제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공간은 영원불변한 요인이 아니다. 인간이 건축을 통해, 이익을 위해 변화시킬 수 있고 그 이익은 정치적 평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유럽의 정중앙이라는 공간은 교통의 요지 또는 문화교류 차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군사적인 차원에서는 위협적이며 부정적일 수 있다. 총참모부는 오래 전부터 군사적 관점에서 공간을 평가한 결과, 양면 또는 다면전쟁의 가능성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 지리적 패권을 추구했는데, 이는 독일이 유럽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현실을 기회라기보다는 잠재적인 위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결국 장군참모장교들은 독일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조성된 전략적 전쟁수행의 기초이자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의 중요한 요인이 되는 내선의 강점을 만들어냈고 이를 정확히 실행에 옮겼다."(49-50)


"그러나 (두 적국이 서로 떨어져 있는) 내선에서의 전쟁수행은 시간적 요인에서 매우 큰 위험부담을 내포하고 있다. 두 적국 중 어느 하나가 전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까지 반드시 다른 하나를 속전속결로 격멸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만일 조건을 충족하는데 실패한다면 곧바로 상황은 재앙으로 돌변할 수도 있기 대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공간과 시간의 밀접한 연관성과 이 둘을 별개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모든 군사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공간과 시간이야말로 전술적, 작전적 또는 전략적 본질을 결정짓는 핵심요소다. 또한 군사적으로 시간 개념은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시간적인 개념상 전쟁이 촉발되기 이전의 과정은 동원기간과 최후 통첩의 순이었으며, 냉전 시대에는 이 과정들이 정치적 반응시간으로 축소되었다. 시간은 그밖에도 심리적, 물리적 전투력과 화기, 차량, 물자들의 사용 가능성을 제한한다."(53)


"전투, 회전 그리고 전쟁에서 수적인 우세는 승리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대규모 육군의 지휘와 보급의 문제들이 무시되고 있다. 모든 군지휘관들은 결정적인 지점에 국지적인 전투력의 우세를 달성하고자 노력한다. 수적으로 열세한 쪽이 적의 우세를 상쇄시키기 위한 두 가지 방책이 있다. 양호한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의 이점을 활용하거나 국지적인 아군의 수적 우세를 달성하여 적의 일부를 격멸하는 것이다. 이 두 방안은 중장기적으로 전투력의 균형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전투방식 측면에서 수동적인 방어는 주도적인 공격에 비해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방책은 바로 월등히 우수한 교육 훈련과 지휘능력을 통해 상대보다 질적 우위를 달성하는 방법이다. 즉 복잡한 작전들을 신속히 공세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질적 증강도 현실(수의 법칙)적인 표준화된 힘을 상쇄시킬 수는 없다."(57-8)


"공간과 시간 요인은 세계대전 시대에 독일 군부의 작전적-전략적 계획수립과 인적, 물적 전쟁준비의 중심에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 독일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전투력이라는 요인과 함께 이들은 1950년대 말까지 독일의 작전적 사고의 영역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원칙을 형성했다. 독일이 유럽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에 독일의 장군참모장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까지 상호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된 변수들을 상수로, 더욱이 특별한 경우에는 결정적 요소로 인식했다. 장군참모장교들은 지리적 조건과 정치로 인해 초래된 이러한 요인들을 변경시킬 수도 없었고 영토 확장으로 현실을 바꾸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대안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록 적국에 비해 열세에 있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인적, 물적으로 고도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로 예견된 양면전쟁에서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가둘 수 있는 군사적인 방책을 발전시키는 일뿐이었다."(58)


4 시초 : 계획수립, 기동 그리고 임기응변의 시스템


"몰트케는 체계적인 군사이론서를 남기지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실용주의자이자 이론의 실천가일 뿐이었다." "몰트케는 작전의 개념을 대부분 전장에서 부대의 기동과 연관해 사용했다. 그의 글에서는 작전이 육군의 기동으로 정확히 대체될 수 있었다. 또한 작전계획, 작전선과 작전목표 등의 관련 용어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몰트케는 작전목표를 때때로 전투목표와 동일하게 적 부대, 즉 싸워야 할 대상의 격멸로 인식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략을 정치의 일부로 보았던 반면, 몰트케는 전략을 전쟁 개시단계로부터 종결단계까지 최초부터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행동'으로 인식했다." "몰트케는 전쟁을 정치적인 전쟁개시와 종식단계 그리고 그사이에 존재하는 순수 군사적인 전쟁단계로 구분했고 작전은 후자에 포함시켰다. 즉 작전이란 통합된 전쟁행위, 전역으로서 총참모장이 계획하고 군사령관들에게 지참으로 하달되는 것을 의미했다. 작전의 성공 여부는 전투의 수단인 전술이 결정했다."(60-2)


"몰트케는 전략을 임기응변의 시스템으로 이해하여 군 지도부에게 최악의 조건하에서도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반응할 것을 요구했다. 즉 작전적 사고 차원에서 일반화된 교리들과 그로부터 도출된 규칙들은 실제 전쟁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군지휘관들은 이론적인 지식과 더불어 전쟁사를 배워서 얻은, 자신의 인생을 통한 군사적 소양과 경험을 갖추어야 하고 이를 '실제에서 자유롭게 응용하고 술(術)적으로 승화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몰트케에게 작전적 지휘는 결국 부분적으로만 습득될 수 있는 일종의 술(術)이었다. 또한 몰트케에게 있어 작전적 수준의 지휘관의 필수조건은 정신적인 유연성, 신속한 상황파악능력 그리고 강인한 성격이었다. 몰트케는 분명히 작전의 범주를 상정하고 있었지만 어떠한 이론적인 작전적 사고모델을 도입하거나 명확한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았다."(62-3)


"1857년 총참모장에 취임한 몰트케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병력의 문제에 직면했다. 프로이센군은 개혁 이후에도 수적으로 적국들 가운데 하나를 겨우 상대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지속적으로 거대화되어가는 육군을 어떻게 기동시키고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몰트케가 찾아낸 해법, 즉 독일군 장교들의 전유물로 이어져 온 '분진합격, 즉 분산해서 기동하고 집중해서 적을 쳐라'라는 슬로건으로 대변할 수 있는 이 전법은 몰트케가 창조해 낸 혁신적인 산물이 아니었다. 그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당시에 주어진 상황에 부합하는 그러한 전투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 전법을 실행에 옮긴 곳이 바로 쾨니히그래츠와 스당이었다. 몰트케는 육군을 다수의 거대한 야전군으로 분할, 편성하고, 가능한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통로로 이들을 분산, 기동시켜 회전이 벌어질 장소에서 적시에 결전을 위해 집중시키고자 했다."(66-8)


"육군을 다수의 야전군으로 분할, 편성하면서 새로운 부대 지휘 방식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시공간적으로 흩어진 채로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야전군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19세기의 통신 환경에서는 단 한 사람의 총사령관이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전진중인 야전군들을 현지에서 직접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트케는 대부대급 지휘관들에게 그들의 임무 달성을 위한 폭넓은 독단 활용을 보장해 주기로 결심했다." "책임은 상급지휘부에서 감수하는 동시에, 하급부대는 상급부대의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지휘개념, 즉 지휘의 분권화를 채택했다. 몰트케는 개별적인 책임의식, 즉 책임의 분권화를 증대시켜서 수직적인 지휘구조와 지휘수준을 수평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작전적 사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이제는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투에 관한 공동의 사고로 이어진 통찰에 의해 부대지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71-2)


# 몰트케식 사고의 원칙

1. 대규모 육군을 독립된 야전군 단위로 편성한 후에 철도를 통해 신속하게 기동한다.

2. 상급부대의 지침에 따라 분산된 대부대를 현지 지휘관들이 자율적으로 지휘한다.


"독일제국의 적국들이 대동맹을 결성하는 등 지속적으로 독일제국에게 불리한 정세가 유지되자 몰트케와 후임자들은 1914년 전쟁 발발까지 수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정부에 예방전쟁을 요구했다. 총참모장들은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사례를 프리드리히 대왕에서 찾아냈다. 그는 1756년 작센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7년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는 적대국들이었던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비스마르크는 예방전쟁에 관해 '정말로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정부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확한 시점을 결정해야 한다'며 정치의 의무를 강조했다. 몰트케와 발더제는 1875년, 1887년과 1890년 사이에 수차례에 걸쳐 위협적인 양면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예방전쟁을 요구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존망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트케와 발더제의 군사적인 논리를 철저히 거부했다."(86-7)


"1871년의 국민전쟁은 속전속결을 지향하는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투철한 애국심으로 동원된 국민이 전쟁의 행위자였던 국민전쟁이 작전적 조치로 이행되었던 결정적 회전의 효과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던 비대칭적인 소규모 분쟁의 증대를 초래했다. 따라서 국민전쟁은 아무리 탁월한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도 속전속결을 보장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총참모부는 이러한 진실을 시종일관 의도적으로 무시하려고 했다." "총참모부는 독일-프랑스 전쟁 경험과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양면전쟁은 피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작전적 기동전으로 승리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장차 벌어질 수도 있는 잠재적인 위협, 즉 국민전쟁의 양상을 끝내 무시하고 말았다. 그들이 배제하지 않은 한 가지 가능성은 바로 소모전쟁이었지만 총참모부에서는 그러한 소모전쟁은 위정자들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93-4)


5 양면전쟁, 다모클레스의 칼


"슐리펜은 1891년 총참모장 취임 직후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전임자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양면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한 자신만의 작전적-전략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슐리펜이 생각한 양면전쟁에 대한 전략적 전제조건은 지리한 소모전으로는 독일에게 승산이 없다는 점이었다. 슐리펜은 베른하르디, 골츠와 마찬가지로 장기간의 소모적인 진지전 양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인식했고 이를 대단히 우려했다. 소모전 상황에서 적국이 해상 및 육상을 봉쇄한다면 경제적인 혼란이 불가피해지는 것은 물론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국내정치적인 위험을 동반한 국가적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슐리펜은 이러한 위험 때문에 지리한 소모전쟁을 방지하고 장차전을 가능한 한 신속히 종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적국의 봉쇄가 효과를 발휘하기 전에 적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슐리펜의 작전적 사고의 핵심은 바로 속전속결이었다."(111)


"슐리펜은 전임자들처럼 양면전쟁과 같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수세적으로 풀기보다는 오히려 공세적으로 단칼에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승리할 수 없는 지리한 소모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찾아낸 유일한 해법이 바로 공격이었다. 그 이듬해부터 슐리펜은 공세적인 작전수행을 더 강하게 주장했고 이렇게 공격에만 편중된 현상은 빌헬름 2세 시대에 독일을 지배했던 시대정신, 즉 정치적인 문제를 공세적으로 해결한다는 정치적 방침에도 철저히 부합되었다. 수많은 정치, 군사, 경제 지도자들은 정열적인 젊은 빌헬름 2세 황제와 결탁하여 종래의 현상유지, 현실안주의 분위기를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관망하고 방어하는 것보다 오히려 공세적으로 해결하고 나아가 세계 패권을 지향하는 방책을 택했다. 제국의 정치와 군사 엘리트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양면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했다."(111-2)


"대몰트케와 마찬가지로 슐리펜은, 화력 면에서 방자의 우세와 특히나 독일군의 수적 열세를 고려할 때 성공적인 섬멸회전을 위한 방책은 단 하나, 지속적인 포위작전을 감행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섬멸회전을 달성하기 위해 포위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출했고, 그러한 포위가 슐리펜만의 작전적 사고의 두 번째 핵심이었다. 시간적 압박 속에서 섬멸적 회전으로 이어지는 성공적인 포위를 위한 전제조건은 바로 작전적 수준의 기동전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동이라는 기반이 있어야 섬멸회전과 포위라는 두 개의 축이 존재할 수 있었고, 중점형성과 기습도 달성할 수 있었다. 기동이라는 요소를 빼고서는 슐리펜의 작전적 사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대몰트케처럼 슐리펜도 대규모 육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기동에만 답이 있다고 주장했다." "작전적 포위는 기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적의 전방과 측방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확신했다."(117)


"1906년 2월 슐리펜은 자신의 후임자 소몰트케에게 '대프랑스 전쟁'이라는 제목의 비망록을 넘겨주었다. 이 비망록은 슐리펜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상 양면전쟁을 위한 슐리펜의 계획이 아니라 오로지 프랑스와의 전쟁만을 위한 전역계획이었다." "동시에 사실상 주관적인 관점에서 후임자 소몰트케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따르기를 권유하는 유언장이었다. 왜냐하면 소몰트케는 원칙적으로 슐리펜의 기본적인 구상─서부에 중점을 형성하고 프랑스군의 요새지대를 우회한 후 신속히 섬멸한다─에는 동의했지만 포위에 대한 교조적인 집착은 거부했으며 포위가 효과를 발휘하기에 앞서 정면에서 적을 강력하게 고착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슐리펜은 자신의 일생일대의 역작이 소몰트케 때문에 물거품이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 앞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후임자에게 자신의 작전적 기본구상을 다시 한 번 문서로 상기시켜 호소하기로 결심했다."(131)


# 슐리펜 독트린

1. 수세적이고 피동적인 전쟁을 거부하고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세적인 전쟁을 수행한다.

2. 양면전쟁을 '내선'을 이용한 순차적인 두 개의 단일 정면전쟁으로 분리하여 시행한다.

3. 우선 서부에서 중점을 형성하여 공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동부에서는 지연전을 실시한다.

4. 강력한 우익으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를 신속히 돌파하여 프랑스군의 요새 지대를 크게 우회, 프랑스군을 포위한 후 신속한 섬멸회전을 실시한다.

5. 서부에서 승리한 후 철도를 이용하여 전투력을 동부로 전환, 동부에서 지연전을 실시하는 부대와 합세하여 적을 격멸한다.


"영국의 역사가 휴 스트라챈이 지적한 대로 총참모부는 작전적 기동전을 시행하기 위한 군수지원의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그로부터 초래되는 결과들을 무시했다. 또한 비망록과 전쟁연습들에서 알 수 있듯이 슐리펜뿐만 아니라 다른 군사 전문가들도 성공적인 회전 이후 전쟁을 어떻게 종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결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위험천만한 국민전쟁과 소모전쟁 양상이 벌어지면 독일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데 모든 군사 전문가들은 동의했다. 따라서 회전에서 승리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개념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지만 수많은 독일 군사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심리적, 정신적 요인에서만 찾으려 했다. 용감무쌍한 공격정신, 즉 투철한 '옛 게르만인의 용맹한 돌격정신'으로 무장하고 전장에서 종횡무진 돌진할 수 있는 확고한 필승의 신념과 총검만으로 지리전략적인 상황과 수적인 열세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39)


"1914년 독일군은 슐리펜 계획이 아닌 소몰트케 계획에 따라 전쟁을 일으켰다. 소몰트케가 중점을 변화시킨 이유는 원칙적으로 작전적 차원에서 슐리펜과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전쟁 이전에 오로지 단 하나의 작전계획, 즉 벨기에를 통한 거대한 포위작전에 모든 것을 걸 수 없다고 판단했고 다양한 작전적 대안들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소몰트케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포위 이외에 다른 방책들도 충분히 실행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총체적으로 소몰트케는 기동전 수행 개념 측면에서 전임자 슐리펜보다는 숙부의 작전적 사고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쟁 발발 직전의 철도 운용계획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철도를 활용하여 전개 속도를 가속시키려 노력했다. 정치적으로 전쟁 발발이 확실해질 때까지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을 주둔지역에 그대로 대기시켰다. 전쟁이 발발하면 철도를 통해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조치였다."(144-5)


6 혹독한 징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서부에서 기습 효과를 상실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기관총과 현대적인 화포 때문에 전술적으로 방어가 공격보다 훨씬 우세했으며 독일군의 기동속도가 적을 포위하기에는 충분히 빠르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적군을 포위,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독일군의 기동속도는 매우 빨랐다. 실례로 치열한 전투 속에서 제1군의 장병들은 3주 남짓 되는 기간 동일 1일 평군 23km 이상 전진했다. 슐리펜의 계획대로라면 동원령 발령 31일째에는 아미앵-라 페르-르텔 선까지 진출했어야 했지만 독일군은 그 선을 넘어서 이미 파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를 고려하면 이러한 진출속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러한 고속 행군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의 파괴된 철도망을 복구하는 문제들과 더불어 군수분야에도 많은 취약점들이 노출되었다. 식량 문제로 인해 벨기에 주민들과의 마찰이 야기되었고, 이로 인해 일부 독일군은 벨기에 주민들에게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158-9)


"또한 여기서 작전적 사고의 결정적인 취약점이 노출되었다. 전쟁 이전 지도 위의 군사작전에서는 마찰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총참모부는 백만 육군을 실제 전장에서 지휘하기 위한 핵심적인 개념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위치한 총사령관이 전신과 전화로 계획대로 작전을 지휘할 수 있다는 슐리펜의 신념과 장군참모장교들의 탁월한 지휘능력에 대한 믿음은 현실의 전쟁에서는 망상일 뿐이었다." "전시 독일제국의 지휘구조적인 문제의 핵심은 바로 황제이자 총사령관이었던 빌헬름 2세에게 있었다. 황제는 헌법에 의거한 해군과 육군의 최고통수권자였다. 하지만 그는 군사 분야의 지식이 박약했기 때문에 그러한 통수권을 행사하고 총체적인 전략지침을 하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황제는 군대의 분위기가 만연한 궁정에서 자기만의 생활을 영위했고 참호 속 병사들의 고통과 그들의 고향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들의 비애를 전혀 알지 못했다."(160-1)


"서부에서 독일의 공세가 실패하면서 속전속결을 지향한 전략적 개념은 붕괴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부에서 제8군을 지휘하던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군부 핵심세력권 밖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는 모든 예비와 주력을 집중해서 1914년 8월 26일부터 30일까지 러시아 나레브군의 측방을 공격, 완전히 포위망에 가두고 섬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탄넨베르크의 영웅'과 탄넨베르크 회전의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 신화를 믿는 사람들은 이 회전을 칸나이와 견주어 그 의미를 부각시키며 아직까지도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를 진정한 슐리펜의 후예라고 칭송하고 있다." "이로써 군사적으로 러시아군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러시아의 증기기관'은 멈춰섰다." "탄넨베르크의 승리는 오랫동안 정신사(精神史)적인, 그리고 전략적인 차원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잠재되어 있던 독일 장병들과 지휘부의 이러한 우월감이 급기야 제2차 세계대전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57)


"독일에서 돌파사상은 오랫동안 경시되었다. 돌파의 성공을 위한 전제조건은 바로 성공적인 기습과 더불어 명확한 인적, 물적 우위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그러한 선결조건을 달성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콘라트 크라프트 폰 델멘징엔 중장은 수적 우위에서 시행하는 공격형태가 바로 돌파이며 이것으로는 결정적인 작전적 승리를 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돌파는 오로지 차후의 포위작전을 위한 여건조성 차원의 전투라는 의미만 부여되었다. 따라서 총참모부는 돌파를 항상 최후의 수단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하지만 육군 총사령부는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몇 주 지나지 않아, 다시금 기동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돌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독일과 동맹국들은 1916년 말이나 1917년 초반까지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월등히 우세한 자원력을 보유한 연합국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고 확신했다."(178-9)


"1918년 1월까지도 서부전선에서의 돌파 시도가 모두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에 루덴도르프에게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전술적 돌파 없이는 차후의 작전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돌파지점의 선정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특히 심각할 정도로 기동성이 저하된 독일군에게는 차후 작전의 방향을 결정짓는 문제였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접합점, 즉 두 군대의 전투지경선인 생캉탱 방면으로의 공격에 대해 엄청난 비판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 둘을 분리시키고 영국군의 남측방을 공격해서 섬멸할 수 있다는 논리는 타당했다." "마침내 1918년 3월 21일, 독일군은 '미하엘'Michael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서 독일군은 당시까지 서부전선에서 단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던, 전술적 수준에서의 큰 승리를 이뤄냈다. 하지만 전술적 돌파를 작전적 수준으로 확장하지는 못했다. 결국 연합군은 전선을 지켜냈고 예상대로 종심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던 독일군보다 더 신속히 예비대를 투입하여 그들의 공세를 저지했다."(185-6)


"특히 루덴도르프는 작전적 측면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작전이 한창 진행되던 중 작전적 중점을 솜 강 북부에서 남쪽으로 옮긴 것이다. 공격 진출 속도가 더 양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써 영국군을 격멸하기도 전에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규모 회전에 돌입해야 했다. 중점형성의 대원칙에 완전히 위배된 것이었다. 격렬한 회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작전적 수준을 경시하고 전술에만 집착했던 루덴도르프를 향해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1918년의 공세에서 육군 총사령부는 1917년의 방어회전 때보다 더 많은 피의 대가를 치르고 전술적 수준의 지역 획득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연합군이 7월 중순경 반격을 개시하자 이를 저지할 방도가 없었다. 1918년 독일 육군은 이른바 '블랙데이'Schwarz Tag 이후 8월 8일에 철수를 시작했고 11월 11일 휴전이 조인됐다. 독일은 마지막 해에 승리를 통한 강화라는 카드에 모든 것을 걸고 프랑스 지역에서 대규모 회전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187-8)


7 새로운 술통 속의 오래된 와인, 제국군과 국방군의 작전적 사고의 현실과 이상


"전략적인 전력 비교를 통해 군사적, 경제적인 능력을 실질적으로 평가했더라면 독일은 패권 욕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는 결국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패권정책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군부 엘리트들은 이러한 인식을 거부했고 근본적으로 태도를 달리했다.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했고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정치와 동떨어져 오로지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에만 매달렸다. 나아가 정치 우위의 원칙에 따른 전략개념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공세적인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통해 월등히 우세한 적국의 잠재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군부 엘리트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 보유에 여러 가지 제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허용된 10만 명의 육군만으로도 단지 일부 전술적-작전적 요소들만 새롭게 개선하면 독일의 패권적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199-200)


"카프의 쿠데타Kapp-Putsch가 벌어지자 1920년 3월, 라인하르트는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임으로 한스 폰 젝트 대장이 1920년부터 1926년까지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젝트의 지휘 아래에서 군은 위정자들의 영향력이 전혀 미칠 수 없는, 이른바 '국가 내부의 국가'Staat im Staate, 즉 핵심 권력기관으로 발돋움했다. 또한 젝트는 제국 육군을 '현대 육군의 표본'으로서 지휘자의 군대, 엘리트 군대로 만들고자 했다. 참모조직에 장교의 보직 비율을 높이고 병사들이 차상급 지휘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로 교육하여 베르사유 조약의 구제가 폐지될 미래를 미리 준비했다." "한편 젝트는 재임기간 중 비밀리에 공군을 창설했으며 소련 영토 내에서 항공기 조종사 훈련 및 화학무기와 전차부대를 운용하는 훈련을 시행했다. 외형적으로 제국군은 연합국들에 의해 국경수비대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다시금 전쟁수행 능력을 가진 현대적인 강력한 군대로 서서히 탈바꿈하고 있었다."(202-3)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들이 결정되기 이전이었던 1919년 2월에 이미 젝트는 훗날 자신의 핵심적인 구상, 즉 최정예 '작전군'Operationsheer의 개념을 담은 초고를 완성했다.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작전적 사고를 철저히 고수했고 또한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격전술을 개발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전문적이고도 목표 지향적인 전술적 수준의 전쟁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기동을 통해 열세를 만회할 수 있다는 자신의 작전적, 전술적 관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젝트는 진지전을 배제하지도 않았고 전쟁 이전의 교범들과는 달리 방어와 '매복' 전투에 더 큰 비중을 두기도 했지만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바로 기동전이었다. 다시는 진지전 양상이 벌어져서는 안 되며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약자는 견고한 방어보다 오히려 기동성을 극대화한 공세를 취해야 승산이 있다'라는 문장으로 그의 확고한 소신을 피력했다."(204-5)


"이러한 군 지도부의 노선을 거부하는 세력의 대표자로는 요아힘 폰 슈튈프나겔이 꼽힌다. 그는 장기간의 지연전투를 통해 천천히 적군의 전투력과 물량을 '소진'시키면서 적군의 정신력을 약화시킨다는 구상을 했다." "슈튈프나겔은 이를 위해 극도로 증폭된 적국에 대한 국가적 증오심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이야말로 테러나 사보타지보다 더 중요한 국민전쟁의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바이마르공화국이 다시 전체주의 국가로 회귀할 것을 요구했다. 모든 반(反)독일주의자들과 평화주의자들을 제거하고 청소년들에게는 외세에 대한 적개심을 교육시켜야 하며 국민들에게 해방전쟁에 동참해야 할 의무를 자각시켜서 온 국민들이 조직적으로,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간인들을 전투 행위와 결합시키는 것은 새로운 전쟁관념이자 그에게는 당연한 논리였고 성공적인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의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처에서 현실로 나타났다."(213-4)


"1930년대 중반, 기동전을 지향하는 최종적인 결정으로 중점형성과 포위, 그리고 이와 결부된 돌파와 기습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되었다." "군부에서는 장차전을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는데 모두 동의했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비교해서 방어작전에 비중을 더 둔 것은 사실이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적 영토에서의 공세, 즉 신속한 섬멸전으로 쟁취하는 것이었다." "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대령은 적국의 방위산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이전에 재빨리 선제공격을 실시하는 것만이 최상의 방책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적군의 측후방으로 공격을 실시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그러한 우회공격에 앞서 돌파가 먼저 시행되어야 하고 이것을 작전적 포위로 확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장차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소수 정예군이 아닌 현대적인 대규모 육군이 더 적합하며 미래의 전쟁은 틀림없이 기동전의 양상을 띠게 되리라고 언급했다."(234-6)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 몇 년 동안 베른하르디는 향후 기동전을 위한 전차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제국군은 전차 보유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군사 저널리즘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이론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시 프랑스는 전차를 보병의 지원수단으로 인식하고 기동성이 둔하지만 장갑이 두꺼운 중(重)전차를, 영국은 독립작전을 수행할 수 잇는 경량화된 중(中)전차를 선호했다. 1927년, 구데리안은 전차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기술했다. 그는 영국의 관점에 동의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보여주었듯 현대적인 방어무기체계의 화력효과가 상승함에 따라 신속한 결전을 도모하기 위한 보병과 기병의 돌파력은 충분치 못하게 되었고 이제 전차와 항공기가 그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데리안은 공군과의 협력 하에 독립적인 작전능력을 보유한,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전투차량이 집중 편성된 부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말했다."(237)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1939년 전쟁 발발 당시 육군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부대마다 기동성과 무장, 교육훈련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독일 육군의 157개 사단 중 16개 사단만이 완전히 차량화되어 있었다. 단지 이러한 극소수의 '엘리트' 부대들만 첨단 장비를 갖추고 교육훈련 수준도 높았으며 따라서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90% 정도의 부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처럼 도보나 말을 이용해야 했으며 일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보다 더 낙후된 무장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오늘날까지 독일 국방군은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완전히 기계화된 전격전 군대'로 각인되어 있지만 이는 완전히 날조된 나치 선전의 결과물이었다." "이에 육군 총사령부는 강도 높은 교육훈련 혁신을 주문했다. 지휘관에 대한 교육과 야전부대의 훈련 중점을 제병협동전투능력 강화와 공격령 증강에 두었다." "교육훈련에서는 목표치를 달성했지만 전쟁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특정 장비, 물자의 부족은 해결하기 어려웠다."(270-1)


"1940년 5월, 훗날 '지헬슈니트'로 알려진 계획의 중심에는, 슐리펜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른, 신속하고도 기습적인 전쟁종결을 지향하는 섬멸회전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예상대로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마치 1914년의 소몰트케 계획을 재현하듯 연합군의 눈을 속여야 했다. 그러면 독일군의 주노력이 벨기에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신한 연합군은 주력을 벨기에로 투입할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바로 네덜란드, 벨기에를 공략하는 목적이었다. 동시에 최정예 기계화부대들은,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아르덴 삼림지대를 거쳐 스당으로 진격해 들어가야 했다. 지난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이 지역에서의 기동을 고려하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못한 일이었다." "만슈타인은 그 일대에서 돌파에 성공한다면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 솜 강 하구 방면으로 진격하여 벨기에 지역에 위치한 연합군 주력을 포위하는 거대한 섬멸회전으로 전쟁을 종결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74-5)


"1914년의 소몰트케처럼, 당시의 총참모부는 결정적인 국면에서 전방 지휘관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스당 돌파에 성공한 이후 결정적인 상황에서 할더는 더 신중해졌고 반대급부로 히틀러는 점점 더 깊이 작전지휘에 개입했다. 당시의 분위기는 임무형 지휘와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이었다. '격분'한 기갑사단장들과 '고집불통'의 집단군 사령관의 반동적인 행동도 문제였지만 총참모부가 자신들의 고유영역인 작전적 지휘를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가장 심각한,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롬멜과 구데리안 같은 장군들은 출중한 작전적 능력을 갖추었던 인물들인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육군 지휘부와 장군들 간의 내부 권력투쟁 때문에, 그리고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어떻게 상이한 공격속도를 조절해야 할 것인가'라는 작전적 차원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업이 간과되었다. 이러한 태만의 결과 육군 지휘부는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278-9)


"1940년 7월 22일, 히틀러는 영국과의 '평화 협상'이 무산되자 '러시아와의 문제' 해결을 지시했다. 이에 이미 작성된, 영토방위의 수준을 뛰어넘은 구상안들이 제시되었고 며칠 후에 이 계획들은 히틀러가 지향한 '생활권 전쟁'이자 '히틀러의 궁극적인 목표'와 완전히 결합되었다. 히틀러에게 '생활권'은 전략적 차원에서 영국에 대한 투쟁과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소련을 제압한다면 대륙에서의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미국의 전쟁개입을 억제하고, 미국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던 일본의 부담도 덜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장기간 세계대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식민지를 획득하고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대 소련 전쟁은 이제 더 이상 소련군을 격멸하는 예방적 차원의 전쟁이 아니었다." "소련 침공은 오늘날까지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방전쟁이 아니라 패권확장을 위한 침략전쟁이자 동부에서 생활권을 획득하기 위한 인종, 이데올로기적 섬멸전쟁이었다."(280-1)


"작전을 우선시함으로써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대단히 심각했다 .독일군은 종래까지 수행한 작전의 범위를 능가하는 공간에서 신속한 공격을 감행하고자 했다. 이 공격의 성공여부는 광활한 공간에서 300만 명 이상의 병사들과 약 50만 대의 차량, 30만 필 이상의 말에 대한 원활한 보급에 달려 있었다. 환경적 조건도 동쪽으로 갈수록 넓게 펼쳐지는 지형, 불비한 도로망, 빈약한 사회간접시설과 혹한의 기후 등 중부 및 서부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다. 특히 전체적인 군수 부대들은 다모클레스의 칼이 머리 위에 매달려있는 것처럼 과중한 시간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총참모부는 전역 기간 중 예상되는 보급의 문제점들을 인식했지만 단기간의 '전격전'으로 계획, 예측했던 터라 그런 문제들은 무시해도 좋다고 결론지었다. 작전가들은 군수분야의 문제들로 인해 작전에 차질이 발생하거나 위협적인 사태가 일어나리라고는 결코 예측하지 못했다."(291-2)


"총참모부는 '러시아 영토,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히틀러와 총참모부는 소련을 속전속결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소련의 잠재력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고전적인 독일의 작전적 사고로부터 비롯되었다." "결국 나치의 선전으로 탄생한 '전격전 군대'라는 독일군의 이미지는 러시아 전역에서 산산 조각나버렸다. 당시의 육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의 행군능력이 공격 속도를 결정한, 이른바 보병과 우마차의 군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동성이 부족했던 포병을 부분적으로 대체했던 슈투카와 전차는 긴 창의 날카로운 끝을 형성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하나였지만 두 부류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가 러시아 전역에 투입되었고, 작전의 마지막 몇 개월간 입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은 당시 독일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으며, 마침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302-5)


9 핵 시대의 작전적 사고


"오랫동안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에게 전쟁 종식은 단지 패망일 뿐이었다. 그러나 1985년 5월 8일 독일 연방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독일도 나치로부터 해방된 날'이며 나치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적인 반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동독과 서독이 과거 문제를 청산하는 방식도 각기 달랐다. 동독은 소위 '파시즘적인 국방군'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군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구분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애초부터 인종 말살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상적인 이유, 특히 파시즘을 극도로 적대시했던 사회주의 성향 때문이었다. 반면 서독에서는 오랫동안 국방군과 나치체제를 별개로 규정했다. 전쟁에 대한 책임,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친위대와 아돌프 히틀러에게 있다는 논리였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패전의 책임은 고스란히 히틀러에게 떠넘겨졌고 국방군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346-7)


"주요 작전 전문가들이 암트 블랑크와 새로이 창설된 연방군의 요직을 장악할 수 있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단기간 내에 강력하고도 작전적 수준의 방어에 적합한 독일군의 창설을 기대했던 서방 연합국의 요구 때문이었다. 독일 정부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충분한 자질을 겸비한 군지휘관이 필요했고 따라서 과거 국방군 출신이면서 작전적 측면에서 숙달된, 유능한 장교들을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육군의 인적, 지휘구조상 그러한 조건을 갖춘 인물들은 바로 장군참모장교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시 고위 계층에 있던 장군참모장교들은 제각기 직책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동부 전역에서의 범죄적인 전쟁행위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비정치적인 군사 전문가들로서 나치체제에 동조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초 '결백한 국방군'과 '범죄적인 나치체제'를 확실히 구분하려는 인식이 확산되자 이러한 장교들은 더 쉽게 연방군에 편입되었다."(353-4)


# 암트 블랑크Amt Blank : 연방군 국방부의 전신


"과거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협이 존재했던 유럽의 중심부였지만, 분단된 동, 서독은 서로 대치하게 된 양 진영의 첨단이자 외곽지역으로 변해 버렸다. 게다가 1950년대 말까지 독일은 독일인들의 것이 아니었다. 연합국의 지배하에서, 연합국이 전시에 사용할 공간일 뿐이었다. 이제 독일은 북대서양을 전략적 중심으로 인식했던 미국인들의 전초기지였고 이러한 위협적인 상황 때문에 서독의 작전가들은 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 이로써 슐리펜 시대로부터 발전되어온 작전적 사고의 핵심이었던 지리전략적 전제조건이 의미를 상실했다. 서독의 작전가들에게 양면전쟁의 위협은 사라졌고 시간적 압박 속에서 월등히 우세한 적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추구했던 속전속결과 신속한 공격 방법은 더 이상 연구할 가치가 없어졌다. 이제는 새로운 전략 상황에 부합하는 작전, 즉 서방 동맹국들의 월등한 잠재력을 동원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획득하고 독일 영토를 방위하기 위한 방어작전 구상에 몰두해야만 했다."(355-6)


"유럽방위공동체 창설이 좌초되면서 서독은 호기를 맞이했다. 독립적인 주권 행사도 가능했고 NATO 내부에서 다른 국가와 동등한 지위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연합국 장교들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던 독일군 장교들은 전혀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1948년부터 미국은 재정 부족을 이유로 독일의 작전적 구상과는 완전히 상이한 전쟁계획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라인강선에서 지연전을 개시하여 소련군의 공세를 피레네 산맥에서 저지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대규모 반격을 실시하여 상실된 지역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핵무기로 러시아군을 무력화시킨다는 복안이었다. 독일은 그 계획을 수립한 미 공군과 미국 정부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독일은 미국의 핵전쟁 계획에 대한 전말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핵무기 투입에 관한 어떠한 정보를 받을 수도, 접근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독일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362)


"동독의 사정은 달랐다. 과거 국방군에서 복무했던 고급장교들은 새로이 창설될 동독군의 전술적-작전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일체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원칙에 따라 군대를 건설하고 군사(軍事)와 프롤레타리아 사상이 결합된 이상적인 징병제도는 실현 불가능했다.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유능한 간부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동독 공산당은 창군 단계에서 우선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국방군 출신의 장교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인민군'을 창설하고 인민과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동독 공산당은 국방군의 하급장교 계층에서 지도자를 선발했다. 과거 나치당이 장교단의 귀족화를 철폐하고자 의도적으로 장교단의 문호를 개방했을 때 임관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장교들 중 대다수가 병사 출신으로 이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작전적 제대를 지휘해본 자들은 매우 드물었다."(362-3)


"시종일관 소련군 지도부는 재래식 전쟁으로 유럽의 정치적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즉 공군의 지원 아래 기갑 및 기계화부대들이 적의 전술적 방어지대를 돌파하고 이어서 신속히 종심으로 진출하여 적군을 섬멸한다는 것이 바로 소련군 작전적 사고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교리를 이행하기 위해 소련군은 1946년부터 차량화에 박차를 가했고 원활한 제병협동을 강조하여 종래까지의 기계화군단을 기계화사단급으로 재편했다. 또한 기동성과 화력을 증강하여 타격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는 많은 부분에서 서방의 사단편제와 유사했다. 소련군 지도부는 증강된 기동성 덕분에 더욱더 단기간의 속전속결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볼 때 인민경찰과 훗날 동독 인민군은 과거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를 의도적으로 거부했지만, 소련군과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가 유사했기 때문에 창군 초기의 동독군 장교들은 큰 혼란 없이 이러한 과정을 수용할 수 있었다."(364-5)


10 끝맺음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는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전적 사고는 원거리에 위치한 대규모 육군을 전술적-작전적 수준에서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기 위해 탄생했다. 슐리펜 시대에 와서는 작전적-전략적 수준에서 열세에서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소위 궁여지책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작전은 전술로부터 생겨났으며, 기동, 공격, 속도, 주도권, 행동의 자유, 중점형성, 포위, 기습, 섬멸과 같은 제원칙들이 결합된 일종의 대부대급 전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전이 전술과 전략의 매개체로서 한편에서는 작전적-전략적, 다른 한편에서는 전술적-작전적 차원을 모두 공유하고 있지만 독일군은 이러한 작전을 작전적-전략적 수준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즉 독일군 총참모부는 작전적 지휘만을 중시하고 결국 전략적 상황을 간과했다. 제1,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대부분의 장군참모장교들은 독일의 잠재력에 부합하는 현실 정치적인 해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398-9)


"이러한 결과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장교들에게는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읽고 정치 그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는 능력도 없었고 그러한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략적 사고의 본질은 바로 정치적 사고이다. 그러나 장군참모장교들은 군사우위의 원칙에 따라 정치를 군사의 하위개념으로 인식했다. 평시에 장군참모장교들은 민간 정부의 결정에 종종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고 때로는 이를 수용하기도 했지만 '문민정부의 정치'에 대해 매우 무관심했다. 전시에는 클라우제비츠의 논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과업에 간섭하려는 정치권을 무시했다. 제정시대 군부의 국내외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념은 군주와 정부의 구상과 일치했다. 그들의 목표는 유사시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막강한 패권국가의 지위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과 패전 이후)까지도 독일과 유럽에서 군사력 사용은 합법적인 외교정치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399)


"독일의 작전적 사고에 구조적인 결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원인은 바로, 총체적인 전략이 자신들의 잠재력에 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군수분야의 문제로 인해 전쟁범죄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군사 독트린의 본질은 범죄적인,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독일의 작전적 독트린은 충분한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정치적 기반 없이 대륙국가로서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전략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적 시도였다. 이렇듯 군사적 충돌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결국 불충분한 잠재력을 인정하고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거부했던 세계대전 시대의 독일의 군부와 정부 엘리트들의 무능함에 기인한다. 독일의 작전적 사고는 역사적으로 시종일관 제국의 존망을 좌우하는 고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결코 승리를 위한 해법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한 '고육지책'이자 '궁여지책'일 뿐이었다."(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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