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군벌 전쟁 - 현대 중국을 연 군웅의 천하 쟁탈전 1895~1930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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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나라가 아무리 약해도 주권이 있는 것과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은 차이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군벌들이 폭정을 일삼았으리라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북왕 장쭤린張作霖이다. 그는 제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하는 토비 출신이었지만 중국을 병들게 한 아편 밀매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교육의 보급과 인재 양성, 근대산업 육성에 힘써 동북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광둥 군벌 천중밍은 민중 계몽가였다. 옌시산閻錫山은 낙후한 산시성을 발전시켜 전국에서 손꼽히는 '모범 성'으로 만들었다. 윈난 군벌 룽윈龍雲은 민주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우페이푸는 대표적인 반일 민족주의자였다. 많은 군벌 지도자들이 젊은 시절 쑨원의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들은 도덕군자도 아니었지만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정치 모리배였던 것도 아니었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얘기할 수 없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현실 정치인들이었다."(20-1)


"군벌 내전이 그다지 파괴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로 이념이나 민족 갈등 같은 증오심에서 비롯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를 완전히 말살할 요량으로 죽기 살기로 싸울 이유가 없었다. 또한 열강은 1차대전이 끝난 뒤 중국에 무기를 팔아먹는 대신 군축 분위기와 세력균형을 위해 무기 금수 조치를 내렸다. 유럽 전선에서 악명을 떨친 독가스와 잠수함, 대구경 중포, 전차 같은 최신 무기는 중국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중국이 전통적으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이면서 지방 권력 또한 강력했기 때문이다. 〈산은 높고 황제는 멀다山高黃帝遠〉는 오랜 격언은 중국의 광대한 영토와 막강한 지방 권력을 상징한다. 향촌 정부들은 명목상 중앙에서 파견되는 수령이 절대 권력자이지만 실권은 지역의 존경받는 엘리트들이 쥐고 있었다. 중앙 정권의 교체는 단지 지배자가 A에서 B로 바뀌는 것에 불과했다. 국가는 일반 민중의 생활 방식에 쓸데없이 관여하거나 자유를 제약하는 일이 없었다."(22)


1부 자금성의 황혼


"20세기 중국사에서 위안스카이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신해혁명 이후 장제스가 통일할 때까지 치열하게 벌어진 군벌 내전은 위안스카이가 남겨놓은 유산이었기 때문이다." "위안스카이가 출세의 기회를 잡은 것은 조선에서 일어난 임오군란 덕분이었다. 임오군란은 엄연히 조선 내부의 문제였다. 그런데 양무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종주국이라는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한 청조는 오랫동안 번국으로 취급했던 조선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땅에 떨어진 위신을 되찾을 기회로 여겼다." "위안스카이는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군인으로서의 역량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총명한 두뇌와 사교적인 성격,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재빨리 진압하고 조선을 청나라에 종속시킨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었다. 고종과 조선의 대신들은 기민하고 능수능란한 위안스카이 앞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73-4)


"1895년 12월 16일 청나라 최초의 신식 군대인 '신건육군新建陸軍'이 창설되었다. 신건육군 창설에는 위안스카이 말고도 회군 출신 간부들과 1885년 북양대신 리홍장이 설립한 중국 최초의 서구식 군사학교인 톈진의 북양무비학당 교관과 생도들이 대거 참여했기에 '북양신군北洋新軍'이라고도 일컬었다." "신해혁명으로 청이 무너진 뒤 중국의 권력은 이들에게 넘어갔다. 위안스카이를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군벌 집단을 '북양군벌'이라고 한다. 이들은 베이징 정부와 각 성의 독군督軍(군사장관)이 되어 군 통수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위안스카이의 참모장이던 쉬스창과 차오쿤은 각각 2대 대총통과 3대 대총통을 지냈으며, 돤치루이는 국무총리를 네 번, 임시 집정(대총통)을 한 번 역임했다. 1915년 당시 군권을 쥔 22명의 독군 중에서 12명이 위안스카이가 직접 키워낸 북양군벌 출신이었다. 나머지 7명 역시 위안스키아의 옛 부하이거나 그의 추천으로 출세했다. 위안스카이와 상관없는 사람은 겨우 3명에 불과했다."(81-3)


"신해혁명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쪽은 쑨원의 혁명파가 아니라 량치차오의 입헌파였다. 혁명파 세력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고, 그나마 대부분은 봉기가 일어나기도 전에 죽거나 도망쳐버렸기 때문이다. 우창봉기에서 우두머리가 없는 혁명군 병사들을 수습하고 리위안훙을 설득하여 혁명군의 수장으로 추대한 것도 입헌파인 탕화룽이었다. 만약 입헌파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우창봉기는 한낱 병변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입헌파도 혁명파가 앞장서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이 먼저 조정을 향해 총을 겨누지는 못했을 것이다. 혁명파와 입헌파 어느 한쪽의 역량만으로 청조를 무너뜨리기는 불가능했다. 쑨원과 량치차오 두 지도자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버리지 못한 채 손잡기를 거부했지만, 청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실현한 것은 혁명파와 입헌파의 연합이었다." "그러나 혁명에 아무런 이해도 없었던 위안스카이가 신해혁명을 기회 삼아 권력을 찬탈했다. 그의 정권은 청조의 연장선에 불과했다."(180-1)


"어째서 쑨원은 (충분한 준비도 없이) 그토록 혁명에 매달렸는가. 임시 대총통 자리를 순순히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했다는 점에서 '제2의 홍슈취안'이 되겠다는 야심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만약 장제스나 마오쩌둥이라면 남에게 내주느니 마지막까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려 했을 것이다. 쑨원은 훨씬 담백했다. 문제는 권력을 향한 욕심이 아니라 만주족을 향한 증오심이었다. 야만스러운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한족 백성을 자신이 해방하겠다는 영웅 심리에 가까웠다. 그가 말하는 공화제란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명분이지 목적은 아니었다. 공화제를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반만흥한'을 외치던 쑨원은 신해혁명 뒤에는 '오족공화'로 말을 바꾸었다. 그 속내는 청제국 시절의 판도를 유지하고 만주족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을 억압하기 위함이었다. 소수민족들의 자결권이나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182)


2부 짧았던 공화정의 꿈


"1912년 12월부터 1913년 2월까지 제헌국회의 수립을 위해 전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선거이자 의회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쑹자오런은 선거를 앞두고 중국동맹회와 여러 정치 단체를 규합해 국민당을 창설했다. 국민당 외에 리위안훙을 수장으로 하는 공화당, 량치차오를 비롯한 입헌파가 중심이 된 민주당 등 여러 정당이 경쟁을 벌였다. 결과는 국민당의 압승이었다. 중의원 596석 중 269석을, 참의원 274석 중 132석을 국민당이 차지하면서 제1당의 자리에 올랐다." "전국 각지를 돌면서 위안스카이 정권의 독선적인 태도를 비판하던 쑹자오런은 3월 20일 밤 베이징행 열차를 타기 위해 상하이역 플랫폼에서 기다리다가 저격을 받아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장쑤성 정부는 암살의 배후에 위안스카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철도 건설을 위한 차관을 얻으려고 일본을 방문 중이던 쑨원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제야 자신이 위안스카이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25-7)


# 쑹자오런의 국민당은 위안스카이에게 해산당하고 몇 년 뒤 쑨원이 국민당을 새로 창설했기 때문에, 이름만 같을 뿐 같은 정당은 아니다.


# 쑹자오런의 암살 배후에 위안스카이가 있다는 정황 증거만 있을 뿐, 분명한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쑹자오런 암살로 촉발된) 2차 혁명은 고작 한 달 보름여 만에 참담하게 끝났다. 군사력에서도 열세했지만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향신 계층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향신 계층은 2차 혁명을 이데올로기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권력 다툼으로 여겼다." "신해혁명이 쑨원과 위안스카이가 손잡고 청조를 몰락시킨 사건이라면, 2차 혁명은 두 사람이 신해혁명의 연장선에서 '천하'라는 전리품을 놓고 벌인 투쟁이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흩어진 동지들을 모아서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쑨원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와신상담하는 대신 한층 독선적으로 변했다. 그는 2차 혁명의 실패가 황싱의 우유부단함과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동지들 탓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쑨원의 이런 태도는 사람들을 더욱 실망시켰을 뿐 아니라, 오랜 맹우였던 황싱마저 곁을 떠나게 했다."(242-7)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이 되자 본색을 드러냈다. 1914년 1월 10일에는 참의원과 중의원을 해산하고, 2월 28일에는 지방의 성 의회마저 해산했다." "5월 1일, 중화민국 신약법新約法이 공포되었다. 절차대로라면 국회에서 쑹자오런이 기초했던 약법을 대신하여 정식으로 헌법을 제정해야 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국회를 해산한 다음 어용 세력을 끌어모아서 약법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뒤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 신약법은 의원내각제를 실시하고 대총통의 권한을 제한했던 구약법과 달리 위안스카이에게 선전포고와 강화조약 체결 등 외교대권과 입법권, 모든 문무 관료와 외교관 임명권, 긴급명령권 등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위안스카이는 중국의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위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방의 군사령관들은 중앙의 혼란을 이용해 명목으로만 중앙에 복종할 뿐이었다. 이들은 자체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현지 향신과 상인·지주 계층과 결탁하여 독자 세력을 구축했다."(250-1)


"1913년 9월 27일, 쑨원은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했다. 중국동맹회의 뒤를 잇는 새로운 혁명 정당이었다." "그러나 중화혁명당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혁명을 향한 의지가 분명하면서 자기 목숨을 걸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쑨원 옆에 붙어 있으면 운 좋게 출세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건달들이었다. 무위도식하고 끼리끼리 모여 온종일 잡담이나 하는 일이 전부였다. 또한 파벌을 만들어 중상모략을 일삼았고, 심지어 쑨원이 무능하다면서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한심스러운 행태는 쑨원이 자초한 결과였다. 역량이나 자질, 혁명 의식은 따지지 않은 채 맹목적인 충성심만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해혁명 이전부터 참여한 자와 신해혁명 이후에 참여한 자를 구분하고 신분을 나누듯 차별 대우하여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 이런 모습은 중화혁명당이 국민당으로 바뀐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으며,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에야 어느 정도 체계를 잡게 된다."(280-6)


"그 위세가 황제와 다르지 않았던 위안스카이가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인 원인은 황제가 되어 옥좌에 앉으려 했기 때문이다. 차이어가 윈난성에서 거병했을 때 명분은 '호국護國'이었다. '호국'이란 국체, 즉 공화제를 지키겠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의 반란이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자 위안스카이는 민심의 이반을 깨닫고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군주제냐 때문이 아니라 위안스카이 정권이 청조만큼이나 무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재정 위기가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물려받은 중국은 파산 직전의 나라였다." "위안스카이는 피를 흘리지 않고 권력을 넘겨받았지만, 그 대가로 9억 냥이나 되는 청조의 채무까지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텅 빈 국고를 물려받은 그는 맨 먼저 재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지방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면서 실패로 끝났다. 위안스카이의 힘으로도 태평천국의 난 이래 몇십 년 동안 고착화한 지방의 독립성을 누르기는 어려웠다."(336-7)


"위안스카이는 부도 직전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에서 더 많은 차관을 빌리고 국채를 남발했다. 그러나 대부분 청조가 남긴 외채를 상환하는 데 쓰였고, 재정의 건실화나 근대화에 쓸 수 있는 돈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위안스카이는 최선을 다했지만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치부해야 할까. 어떤 이유로건 그는 청조의 행태를 답습하여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한 꼴이었다. 청조가 파멸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으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셈이다. 위기를 자력으로 극복할 능력이 없는 그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대신 보수 반동화의 길을 걸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기보다 권모술수로 쑹자오런을 비롯한 반대파를 암살하거나 탄압했다. 군주제의 부활은 추락하는 자신의 권위를 만회하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이권을 일본에 넘기고 국고를 흥청망청 낭비한 모습은 정치적 자살행위였다. 위안스카이가 보여주는 말기적인 행텡 민심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338-9)


"위안스카이의 죽음으로 중국에는 잠시나마 평화가 왔다. 윈난성을 비롯해 독립을 선언했던 여러 성이 독립을 취소하고 내전 중지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호국군 또한 군비 부족과 병참난으로 더는 싸울 여력이 없었다. 남북 합의가 성사되면서 부총통 리위안훙이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 새로운 대총통이 되었다." "('북양 3걸'이라 일컬어지던) 펑궈장은 부총통에, 돤치루이는 국무총리에 올랐다. 왕스전은 육군총장 겸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북양군의 총수가 됐지만 정치적인 야욕이 없기에 권력의 중심과는 멀었다. 이들이 사리사욕을 버리고 리위안훙을 보필하는 데 힘을 모았다면 중국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리라. 그러나 펑궈장과 돤치루이는 운 좋게 벼락출세한 리위안훙을 대총통감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야말로 그 자리에 어울리는 그릇이라고 생각했다. 돤치루이와 펑궈장은 서로 견제하면서 기회를 보아 상대를 제거하고 자신이 대총통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342-7)


3부 군웅, 사슴을 좇다


"자금성 하늘에서 비행기가 푸이의 코앞에 폭탄을 떨어뜨린 다음 날인 1917년 7월 6일, 무력으로 북양군벌을 정벌하기로 결심한 쑨원은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에서 1,900킬로미터나 떨어진 중국 최남단의 광저우로 향했다. 광저우는 쑨원이 태어난 고향이자 혁명의 오랜 근거지이기도 했다." "7월 17일 광저우에 도착한 쑨원 일행은 비상 국회를 소집했다. 10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참석했다. 그는 국회를 해산한 베이징 정부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이야말로 중화민국의 정통이라고 선언했다. 9월 10일, 중화민국 호법 정부가 수립되고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다." "쑨원의 호소에 남방 5성의 비非북양계 군벌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중국 역사에서는 '호법전쟁護法戰爭' 또는 '호법운동護法運動'이라고 한다. 쑨원에게는 앞으로 10년에 걸쳐 이어질 첫 번째 북벌전쟁이기도 했다." "베이징의 북양군벌과 광저우의 서남군벌이 맞서는 남북 대치가 다시 시작되었다."(372-3)


"전세는 갈수록 북벌군에게 불리해졌다. 게다가 루룽팅의 배신으로 쑨원은 궁지에 몰렸다. 탕지야오도 북벌 중지와 쑨원 하야를 요구하고 나섰다. 몇 달 전만 해도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던 이들이 이제는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진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면서 끌어내리려 했다." "루룽팅과 탕지야오는 일부 국회의원들을 매수해 광저우 군정부를 개조하라고 지시했다. 1918년 5월 20일, 비상 국회는 호법전쟁 취소를 결정했다. 충격을 받은 쑨원은 실망감을 드러내면서 대원수 자리를 내던졌다." "쑨원이 쫓겨나자 돤치루이도 남벌을 중지하고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국회를 다시 소집하고 대총통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돤치루이는 펑궈장을 쫓아내고 쉬스창을 그 자리에 앉힐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1차대전 참전이었다. 유럽 전쟁은 이미 막바지였다. 그러나 돤치루이는 참전을 빌미로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 다른 군벌들을 제압할 생각이었다."(385-9)


"호법 전쟁이 끝나고 남북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페이푸를 비롯해 후난성으로 출동한 북양군은 계속 현지에 남아 있었다. 돤치루이는 즈리파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보내 세력을 약화할 속셈이었다. 즈리파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우페이푸는 결단력과 정치적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즈리파 독군들을 규합하여 펑궈장이 죽은 뒤 자신의 상관인 차오쿤을 새로운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우페이푸의 공작은 장쭤린에게도 향했다. 장쭤린은 돤치루이가 자신의 영토인 동북에까지 손을 뻗치자 우페이푸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1920년 4월 9일, 즈리파와 펑톈파가 비밀리에 손잡고 거대한 반反돤치루이 동맹을 맺었다. 즈리성, 장쑤성, 후베이성, 장시성, 허난성, 펑톈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이른바 '8성 동맹'이었다. 5월 25일, 우페이푸는 드디어 칼을 뽑아들었다. 그는 불복종을 선언하고 군대를 되돌려 북상에 나섰다. 돤치루이와의 일전을 각오한 것이다."(411-3)


"7월 18일, 대총통 쉬스창에게 정전을 요청한 돤치루이는 다음날 국무총리를 사직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우페이푸는 이번 기회에 안후이파를 철저하게 몰락시킬 생각이었지만 뜻밖에도 장쭤린의 반대에 부딪혔다. 장쭤린은 돤치루이를 끌어내리기 위해 즈리파와 손을 잡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즈리파 편은 아니었다. 즈리파를 견제하려면 안후이파를 살려둘 필요가 있었다." "안즈전쟁은 북양군이 둘로 나뉜 채 10만 명 이상이 투입된 전례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전투는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나흘 만에 싱겁게 끝났다. 전장은 베이징 주변으로 국한되었다." "10만명 가운데 실제로 전장에 투입된 병력은 일부였고 대부분 대치만 하다가 승패가 결정 나자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충성심이 없는 병사들은 죽기로 싸우는 대신 조금만 불리해도 흩어지거나 투항하기 일쑤였다." "이때만 해도 중국군은 여전히 서툴고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안즈전쟁은 앞으로 시작될 진짜 싸움의 서곡일 뿐이었다."(430-1)


"안후이 정권이 무너지고 즈리와 펑톈의 연합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돤치루이를 타도하기 위한 잠깐의 합종연횡일 뿐, 목적을 달성한 이상 오래갈 리 없었다. 중국의 판도가 바뀌면서 요직을 놓고 두 세력은 서로 자파 사람을 심으려고 으르렁거렸다." "장쭤린은 즈리파 와해를 위한 포석을 하나씩 마련해나갔다. 첫 번째는 안후이파와의 동맹이었다. 장쭤린은 돤치루이에게 은밀히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했다. 돤치루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반反즈리 비밀 동맹을 맺었다." "두 번째 포석은 광저우 군정부의 대원수 쑨원과의 동맹이었다." "북양군벌이 공화정을 파괴했다 하여 광정우에서 혁명정부를 세우고 호법전쟁을 일으켰던 쑨원이 이제 와서 북양군벌과 손을 잡는 것은 엄연한 모순이었다. 그러나 삼각동맹은 완성되었다."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고도 새로운 방법을 찾는 대신 구태의연하게 군벌들과의 야합에 매달리는 것이 쑨원의 한계였다."(435-40)


"안즈전쟁이 끝난 지 2년 만에 즈리파와 펑톈파의 연합은 끝장났다. 병력과 무기에서는 일본의 후원을 받는 펑톈군이 훨씬 우세했다. 그러나 제27사단을 비롯해 대부분 마적을 개편한 부대였다. 규율이 형편없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장쭤샹, 장징후이 등 주요 지휘관들도 하나같이 장쭤린이 마적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자들로 매우 무능한 자들이었다." "즈리군은 수적으로 약간 열세하고 장비도 매우 열악했지만 규율과 실전 경험에서는 펑톈군을 압도했다. 안즈전쟁에서 안후이군을 격파하고 승리햇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우페이푸가 보기에 장징후이의 서로군이 펑톈군의 주력부대였다. 장징후이만 격파한다면 나머지 펑톈군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었다." "5월 3일 벌어진 격전에서 서로군이 붕괴했다. 장쭤샹의 동로군도 즈리군의 총공격으로 무너졌다. 장쭤린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4일, 그는 전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개전 9일 만이었다."(497-503)


"20세기 초반 제정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전비와 국내 근대화를 명목으로 해외에서 막대한 빚을 끌어다 썼다." "채무액은 1차대전을 거치면서 눈덩이처럼 불었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4년 동안의 채무는 33억 8,500만 파운드에 달하여 이자만도 연간 세입을 넘어설 정도였다. 천문학적인 빚이 결국 차르 정권을 붕괴시킨 셈이지만,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린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는 한 푼도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제정러시아의 채무는 대부분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일본에서 빌렸다. 이들이 당장 간섭전쟁에 나선 것도 당연했다. 남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 권리만 찾겠다는 것이 소련식 논리였다. 소련은 열강의 보복에 대항할 무력이 있지만 중국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떠드는 '민족자결의 원칙'이란 볼셰비키 혁명을 다른 나라에 전파하여 전 세계를 공산화하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 또한 전형적인 제국주의 열강이었으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짓밟기 일쑤였다."(529)


"1920년 5월, 시베리아 구위원회 산하 코민테른 극동국 서기였던 보이틴스키 부부가 베이징으로 왔다. 그의 임무는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중국공산당을 창설하는 일이었다. 보이틴스키는 리다자오·천두슈와 만나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중국 최초의 공산당 소조직을 설립했다. 천두슈가 중국 최초의 공산당 서기가 되었다." "1년 뒤인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망지로 106호에서 전국 6개 도시의 대표 12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이 앞으로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나갈 지도자들이었다. 첫 모임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지만 자신들의 앞날이 얼마나 파란만장할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4명이 처형당했고, 7명이 국민당이나 친일 매국노로 전향했다. 바오후이썽까지 포함해 13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훗날 개국공신이 되고 승리의 열매를 맛본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한 사람이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을 지낸 둥비우, 또 한 사람은 마오쩌둥이었다."(530-1)


"1923년 1월 26일, 상하이에서 '쑨원-요페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소련 특사) 요페는 결단코 중국에서 공산주의혁명을 하지 않을 것이며 쑨원의 삼민주의에 복종하여 중국 혁명을 후원할 것을 약속했다. 소련은 순수하게 쑨원의 혁명전쟁을 도울 뿐, 어떤 내정간섭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제정러시아 시절 중국에서 강탈한 모든 이권의 포기를 약속했다. 요페가 요구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자 쑨원은 '연소용공聯蘇容共', 소련과 손잡고 중국공산당을 포용하여 중국 혁명을 완수한다는 데 합의했다." "스탈린은 대중 노선을 놓고 국공합작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트로츠키는 국민당은 유산계급의 정당이므로 공산당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서 합작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코민테른이 손을 들어준 쪽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중국의 적화를 자신의 정치적 업적으로 삼아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속셈으로 쑨원을 아낌없이 후원했다."(537-9)


"1924년 6월 16일, 국민당 육군군관학교(황푸군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를 수립하면서 소련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아들여 소련군의 제도와 교리를 그대로 수용했다. 최고 사령부와 각 군 사령부에는 국민당 대표를 임명하고 사단 단위로 정치부를 두었다. 또한 연대부터 대대에 이르기까지 정치공작지도원을 배치했다. 정치장교들은 지휘권을 견제하고 삼민주의 사상 교육을 맡았다. 원칙적으로 지휘관이 내리는 모든 명령은 정치장교의 서명이 없을 경우 효력이 없었다. 또한 많은 장교들이 국민당에 자발적으로 입당하고 충성과 복종을 맹세했다. 정치장교 제도는 국민당 정권이 군벌 연합군을 혁명군을 개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북벌군은 군벌 군대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며 혁명군이라는 이름은 허울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점이 쑨원의 호법전쟁 때와 달리 장제스가 북양군벌들을 격파하고 북벌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552)


"제2차 펑즈전쟁(1924년 9월 15일~11월 8일)에서 즈리군과 펑톈군은 산하이관을 무대로 악전고투를 벌였으나, 사전에 모의한 펑위샹의 베이징정변이 성공하면서 승부의 추는 급속히 펑톈군 쪽으로 기울었다. 안즈전쟁 이후 4년 3개월 만에 장쭤린의 대군은 베이징을 향해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우페이푸의 몰락은 위안스키이가 남겨놓은 북양군벌이 시대가 종지부를 찍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장쭤린과 펑위샹은 명목상 북양파로 간주되었지만 엄밀히 말해서 위안스카이가 직접 키워낸 직계는 아니었다. 북양무비학당 출신도 아니었다. 이들은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자기 힘으로 일어선 자들이었다." "펑위샹의 다음 칼끝이 향한 곳은 자금성이었다. 자금성에는 청나라 12대 황제인 선통제 푸이와 만주족 귀족들이 살고 있었다." "펑위샹은 공화제를 실시한 지 10년도 더 지났는데 구시대의 유물인 푸이가 아직도 자금성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엄포를 놓았다." "푸이는 분개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614-6)


"1925년 11월 22일, 펑톈군 제일의 명장이자 최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즈리평원에 주둔한 궈쑹링이 장쭤린 타도의 기치를 올렸다. '반펑톈전쟁反奉戰爭'이었다. 11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한 달 동안 중국 대륙을 뒤흔든 궈쑹링의 '반펑전쟁'은 허무하게 끝났다.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한때 장쭤린의 심장부인 펑톈을 눈앞에 두었을 만큼 궈쑹링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우페이푸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펑톈군은 연전연패하여 달아났으며, 펑톈 서쪽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장쭤린조차 당황하여 다롄으로 달아나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려 했을 정도였다. 관동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동북의 주인이 장쭤린에서 궈쑹린으로 바뀌고, 그 뒤의 중국 역사 또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뒤 중공 정권은 궈쑹링에게 민족주의 이미지를 덧씌워 〈장쭤린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패한 것〉이라면서 성대한 추모식을 치러주고 그의 묘를 펑톈 교외에 안장했다."(664-5)


"궈쑹링의 반란이 난세에 흔히 반복되던 하극상과 다르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이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첫째,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중국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그동안 일본은 21개조 조약이라든가 니시하라 차관, 산둥 출병 등 막후에서 조종했을 뿐 무력으로 개입한 적은 없었다. 열강의 간섭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펑전쟁에서 관동군의 개입은 나쁜 선례를 남겼다. 또한 그전까지 장쭤린 정권은 일본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아도 일본과 비교적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발등의 불을 끄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장쭤린은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를 받아들였고, '일본-펑톈 밀약'을 맺으면서 예속적인 위치로 전락했다. 이런 배경은 그 뒤 황구툰사건과 만주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즉 장쭤린이 일본과 결탁했기 때문에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의 반란이 장쭤린을 궁지로 내몰아 일본과의 밀착을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가속화한 셈이다."(666)


"둘째, 장제스의 북벌전쟁을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장쭤린과 궈쑹링 두 사람의 싸움은 펑위샹과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옌시산·우페이푸까지 개입하면서 북방 전체로 확산되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 〈북방의 대소 군벌들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 구시대 붕괴의 조짐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북방 군벌들의 분열상을 보면서 북벌 성공에 확신을 품었다. 또한 관동군의 개입은 중국 민중의 격렬한 반감을 샀고, 장쭤린을 '일본의 주구'로 여기게 했다. 이때부터 중국 내전은 더 이상 위안스카이의 유산인 북양군벌들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혁명'과 '반혁명'의 전쟁이 되었다." "중원에서 장제스와 다른 군벌들이 전쟁을 벌이자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아버지의 꿈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산하이관을 넘었다. 한때 황허 이북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지만 곧 다른 군벌들의 반격을 받으면서 연전연패했다. 그 와중에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하루아침에 모든 기반을 잃고 몰락했다."(666-7)


4부 북벌전쟁


"한편 쑨원이 죽은 뒤 국민정부는 크게 세 개의 파벌, 즉 처음부터 국공합작을 반대한 후한민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 우파, 국공합작에 찬성한 랴오중카이의 용공 좌파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회색분자 왕징웨이파로 나뉘었다. 그러나 국공합작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각자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따라 첨예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보로딘은 왕징웨이를 좌우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우파 간부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이들의 빈자리는 공산당원들이 차지했다. 1923년 1월 23일, '쑨원-요페 선언'에 따라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 겨우 1년 반, 쑨원이 죽은 지 7개월 만에 국민정부의 중추는 사실상 소련 손으로 넘어갔다. 국공합작은 양당이 대등한 지위에서 합당한 것이 아니라 국민당이 공산당을 하부 조직으로 포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산당원들은 마땅히 국민당의 강령에 절대 복종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형국이 되면서 오히려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잡아먹힐 판이었다."(707-9)


"과연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가. 열쇠를 쥔 사람은 장제스였다. 소련과 공산당은 마음만 먹으면 장제스를 끌어내릴 수 있었다. 과격한 혁명가 트로츠키는 장제스를 쫓아내거나 아예 국공합작을 끝장내고 공산당을 지원해 광저우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반대했다. 국공합작의 총괄을 맡은 스탈린은 그동안 많은 자금과 물자를 쏟아부었는데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합작이 깨진다면 자기 체면이 깎이는 것은 물론 실패의 책임을 추궁받을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국공합작을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다소 양보할 필요도 있다고 강조했다. 당내의 주도권은 이미 스탈린에게 넘어갔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트로츠키는 권력투쟁에서 거의 밀려나 있었다. 지도부는 실세인 스탈린의 손을 들어주었다.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에게 국민당에 잔류하되 우파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일단 국민당 지도부에서 물러나 후일을 기약하라고 지시했다. 공산당은 내심 불만을 품었지만 거역할 수 없었다."(720)


"1926년 7월 9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추대받아 북벌군의 지휘봉을 들었다. 프랑스로 달아난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여러 원로에 의한 집단지도체제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세는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였다. 장제스는 쑨원의 후계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공산당 세력은 크게 약해졌고 국민당에 절대 복종하기로 맹세했다. 벼랑 끝에 몰렸던 장제스에게는 실로 회심의 역전이었다." "장제스가 공산당과 정면 승부를 벌이지 않은 이유는 아직은 그만한 힘이 없는 데다, 그럴 경우 소련의 원조 또한 그날로 끝나기 때문이었다. 만약 천중밍처럼 광저우를 자기 지반으로 삼아서 당장의 호의호식을 누리는 데 만족하려 했다면 소련과 손을 끊는 데 아무런 미련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북벌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을 통일해서 군벌 할거를 끝내고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 혁명을 완성하는 일은 쑨원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한 원대한 꿈이었다."(722)


"북방에서 3개월의 혈전 끝에 국민군을 격파한 우페이푸는 승리에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비로소 북벌군이 만만치 않으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페이푸는 주력부대를 이끌고 우한으로 향했다." "그러나 〈패배를 모른다〉던 상승장군 우페이푸의 명성도 북벌군의 기세 앞에서 무색해졌다. 10월 10일, 북벌군은 우한 3진의 점령과 함께 후베이성 서부 지역 공격에도 나서 샤시·이창·징저우 등을 점령했다. 우페이푸의 주력부대는 거의 소멸했다." "한편, 9월 17일 소련에서 돌아온 펑위샹은 국민혁명군의 가입과 혁명전쟁을 선언했다. 〈우리는 쑨원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국민혁명과 삼민주의를 실천한다.〉 〈간쑤성을 지키고 샨시성을 원조하며 허난성을 도모한다.〉 이것이 '우위안 선언'이다. 광저우와 함께 우위안에도 혁명의 상징인 청천백일의 깃발이 올랐다. 국민군은 '국민혁명군 연군(국민연군國民聯軍)'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며, 펑위샹이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746-56)


"북벌전쟁은 단순한 통일전쟁이 아니라 혁명전쟁이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고 민중과 손잡는 일은 북벌전쟁에 이데올로기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 "농민운동은 국공합작의 최대 성과였다. 공산당이 농민들을 조직하고 이들의 협조를 끌어내지 못했다면 북벌군은 소련이 제공하는 약간의 원조에만 의존하여 10만 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훨씬 어려운 싸움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쑨원을 비롯하여 봉건적인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국민당의 엘리트 간부들은 여전히 민중의 역량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공산당 지도부 중에서도 농민의 잠재성에 주목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이 마오쩌둥이었다. 국공합작이 깨진 뒤 지하로 숨어든 다른 간부들은 예전에 혁명파가 그러했던 것처럼 무장 반란과 비밀 활동에 하릴없이 매달려 큰 희생만 치렀다. 반면 마오쩌둥은 농촌을 근거지로 농민혁명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토벌군을 몇 번이나 격파함으로써 그의 신화를 시작했다."(804-8)


"그러나 중국의 지주계층은 유럽의 귀족 같은 특권계층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 농촌의 진짜 문제는 토지 집중이 아니라 인구는 넘쳐나는 데 비해 잉여 토지가 거의 없고 생산성이 너무 낮다는 데 있었다. 경작지 대비 인구 밀집도는 유럽의 3~4배나 되었다. 얼마 안되는 대지주한테서 땅을 빼앗아 많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 한들 고양이 이마만 한 땅이 조금 더 늘어나는 정도였다. 게다가 중국에는 땅이 전혀 없는 농민과 실업자, 다른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유랑민들이 넘쳐났다. 토지를 재분배한다면 이들에게도 똑같이 토지를 나눠주어야 하는가. 그럴 경우 농촌 개혁은커녕 전통적인 농촌공동체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전체 농민들의 삶이 하향 평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 간부들은 농촌의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 다양한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자신들의 편향된 선입관과 의욕만 앞세워 〈계급투쟁으로 농촌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달려들었다. 그 방법은 설득과 타협이 아닌 강압과 폭력이었다."(810-3)


"프랑스군의 대게릴라전 전문가이자 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알제리전쟁에 참전했던 다비드 갈륄라 중령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주민들의 지지를 얻을 때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다수의 어정쩡한 지지보다 오히려 수는 적어도 가장 적극적이면서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소수의 강력한 지지가 낫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인 사람이 마오쩌둥이었다. 공산당은 농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소 지주와 자영농이 아니라 전체의 10퍼센트에 불과한 고농(당시 약 3,000만 명)을 지지 세력으로 삼았다. 내전에 승리한 뒤 이들을 무장 전위대로 앞세워 중국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토지개혁을 강행했다. 그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처형당했다. 현장 간부들은 자신의 실적을 높이는 데 급급하여 경쟁적으로 토지몰수에 나섰다. 중농과 빈농까지 지주라고 몰아붙여서 재산을 함부로 빼앗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토지개혁은 중국 전체를 전례 없는 대혼란과 보복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817-8)


# 고농雇農 : 자기 땅이 전혀 없어서 지주나 부농에게 고용살이하는 농민


"북벌군이 예상 밖의 선전을 펼치면서 상하이와 난징으로 육박하자 공산당 지도자 천두슈는 급히 상하이봉기를 지시했다. 상하이가 장제스의 수중에 넘어간다면 가뜩이나 국민정부가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우한과 (장제스의) 난창으로 양분된 상황에서 그의 위세가 한층 높아지고 우한 측이 불리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3월 21일 새벽, 드디어 행동에 나섰다. 자베이와 훙커우, 푸둥 등 상하이 주요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봉기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30만 명에 달했다. 노동자들은 시가지의 주요 거점을 신속히 장악했다. 다음날 상하이 소비에트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난징에서도 북벌군이 세 방향으로 포위해오자, 이제는 잔여 병력을 최대한 창장 이북으로 철수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창장을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아 북벌군의 북상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언젠가 난징을 되찾을 기회가 오리라. 쑨촨팡은 후일을 기약하며 난징을 떠났다. 3월 23일, 난징은 함락되었다."(840-1)


"북벌군이 난징과 상하이로 육박하고 있던 3월 10일부터 17일까지 우한에서 국민당 제2차 3중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일주일에 걸친 회의는 장제스에 대한 성토장이었다." "(공산당은) 군을 당에 복속시켜 장제스의 지위와 권한을 낮추고 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기를 요구했다. 한마디로 장제스에게 백기를 들거나 아니면 군권을 내놓고 물러나라는 소리였다." "4월 1일, 우한 정부는 장제스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한다고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벼랑 끝에 몰린 장제스는 무력으로 공산당을 끝장내기로 결심했다. 4월 9일, 상하이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는 이미 총사령관에서 파면되어 아무 직위도 없었기에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엄연한 반란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느 한쪽이 굴복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앞으로 20년에 걸쳐 이어질, 국공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서막이었다."(844-51)


"상하이정변이 알려지자 우한 정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우한 정부의 새로운 수장이 된 왕징웨이는 닷새나 지난 4월 17일에야 장제스를 국민당에서 영구 제명할 것을 선언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때늦은 엄포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장제스는 코웃음 치면서 상하이의 우파와 협의하여 우한에 대항하는 신정부 수립에 착수했다. 새로운 수도는 신해혁명 당시 한때 혁명의 수도였던 난징이었다. 많은 국민당 간부들이 장제스에 호응하여 난징으로 모여들었다. 4월 18일 오전, 난징의 옛 장쑤성 의사당에서 국민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군무를 총괄했다. 난징 정부는 '전 장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면서 쑨원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재개할 것과 그 역할을 장제스에게 맡긴다고 선언했다. 또한 우한 정부를 〈공산당에 장악당한 가짜 정부〉로 규정하고 타도를 선언했다. 국민정부는 우한과 난징으로 갈라졌다. 이른바 '영한 분열寧漢分裂'이다."(857-8)


"내분 때문에 두 쪽으로 갈라졌어도 북벌군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북방 최강의 실력자 장쭤린조차 북벌군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대로라면 천하의 주인이 바뀌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동안 장쭤린 정권의 후원자로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일본은 묵과할 수 없었다. 일본은 장쭤린을 자신들의 주구로 삼아 중국 대륙을 야금야금 먹어나갈 속셈이었다. 그가 몰락한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일본에서는 1927년 4월 17일 중국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고수한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무너지고 강경파인 다나카 기이치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제일 먼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육군대신에 기용했다. 그는 전 관동군 사령관으로, 2년 전 동북에서 궈쑹링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쭤린을 도와서 관동군을 출동시켰던 인물이다. 또한 나중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상하이를 침공하여 제1차 상하이사변을 일으키는 등 중국 침략을 주도했다."(867-8)


"온갖 감언이설과 파격적인 조건으로 펑위샹을 한편으로 끌어들인 장제스는 산시성의 실력자 옌시산까지 회유했다." "그는 북벌군과 장쭤린 사이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어느 편에 서야 살아남을지 신중하게 관망했다. 장제스는 북벌군 총참의 허청쥔을 타이위안으로 보냈다. 그리고 현재의 영토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즈리성까지 얹어주기로 약속했다.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한 옌시산은 북벌군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장제스·펑위샹·옌시산의 3자 동맹이 체결되었다.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총사령관이 된 옌시산은 장쭤린과 손을 끊고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산시의 병력을 세 갈래로 출동시켰다. 산시군은 징쑤이철도와 정타이철도를 따라 즈리성을 침공했으며, 6월 15일 스좌장을 점령하여 펑톈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옌시산에게 즈리성을 약속한 것은 훗날 펑위샹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전리품을 놓고 벌어진 갈등은 북벌전쟁이 끝나자마자 중원대전으로 치닫게 만들었다."(877-8)


5부 천하통일


"공산당 지도부는 군벌들이 싸우는 틈을 이용해 꾸준히 봉기와 소요를 일으키다보면 러시아 10월혁명처럼 언젠가 중국 전역의 노동자·농민들이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뒤엎으리라 믿었다. 난창봉기를 시작으로 1928년 여름까지 1년 동안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충분한 준비와 동조 세력 없이 일부 군인들을 선동하여 산발적인 반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는 간단하게 진압당하기 일쑤였다. 많은 공산당원들이 무익하게 희생당했다. 쑨원의 혁명당도 이런 방식을 고수하다가 쓴맛을 보았음에도 공산당이 새삼스레 재현하는 꼴이었다." "그 와중에 장시성 일대의 농촌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아 투쟁의 횃불을 드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흩어진 패잔병들을 모으고 주변 농민들을 규합해 유격전을 벌이고 토벌군을 격파했다." "또한 그의 곁에는 주더·펑더화이·린뱌오·허룽·뤄룽환 등 훗날 중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쟁쟁한 장군들이 있었다. '마오쩌둥 신화'의 시작이었다."(957-8)


"1928년 1월 4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다시) 취임했다. 하야를 선언한 지 넉 달 반 만이었다." "장제스는 보기 드문 카리스마와 결단력·정치 감각을 두루 갖추었지만 단점도 분명했다. 반대 세력을 쫓아내거나 합종연횡을 할 수는 있어도 링컨처럼 포용해서 자기편으로 만들 만큼 관대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마오쩌둥이나 스탈린처럼 아예 싹을 뿌리째 뽑아버릴 만큼 철두철미하거나 악독하지도 않았다. 충동적이면서 참을성이 부족한 그는 사소한 일에 쉽게 욱해서 주변 사람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한 입으로 두말하는 반역자나 쓸모없는 부하들을 적당히 눈감아주어 자신의 권위를 실추했다.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하고 무자비해야 할 때 무자비하지 못했다. 장제스의 정적들은 겉으로는 두려운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그의 이런 성격을 약점으로 여겼다." "그런 어중간함이 그가 천하를 완성하지 못한 채 몇 배 더 냉혹하고 무자비한 마오쩌둥에게 패배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958-60)


"북벌전쟁 재개가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다나카 내각은 제2함대를 산둥성으로 출동시켰다. 일본 함대는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인 4월 1일 칭다오항에 입항했다. 장쭝창·쑨촨팡의 군대가 북벌군에게 패주하여 흩어지던 4월 16일, 칭다오 총영사 후지타 에이스케가 본국에 급전을 보내 육군의 출동을 요구했다. 즉시 각료회의가 소집되어 출병을 결의했다." "일본군의 출동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사전 각본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나카 내각은 한 해 전인 1927년 12월 20일에 열린 각료회의에서 북벌군이 산둥성에 진입할 경우 재차 출병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명목은 현지의 일본인 보호와 치안유지였지만, 그 속내는 중국의 통일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북벌군이 제 발로 물러나지 않으면 무력도 불사할 참이었다." "일본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은 장제스에게도 전해졌다. 장제스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북벌의 향방은 물론이고 중국의 명운이 걸려 있었다."(985-7)


"장제스는 한편으로는 일본과 교섭을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을 우회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황허를 건너라고 지시했다. 북벌군이 황허를 건넌다면 일본군은 닭 쫓던 개가 되는 셈이었다. 5일 밤부터 6일 새벽까지 북벌군의 주력은 별다른 방해 없이 황허를 무사히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장제스를 놓친 분풀이 삼아) 지난성을 손에 넣었지만 본래 목적이었던 북벌 저지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중국 전역에서 반일 감정이 들끓게 만들었다." "1929년 3월 28일 양국 정부는 '중일제안협정中日濟案協定'을 체결했다. 그에 따라 일본군은 4월 말까지 산둥성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했고, 쌍방이 주장하는 피해에 대해서는 공동 조사를 거친 후 보상하기로 했다. 1929년 6월에는 일본이 국민정부를 중국의 정통 정부로 정식 승인했으며, 중국의 국명 또한 일본이 임의로 만든 '지나'가 아니라 '중화민국'으로 부르기로 했다. 다나카의 야심찬 출병은 성과는 없고 잃은 것만 있었다."(991-5)


"대세는 결정났다. 지난에서 북벌군과 일본군이 충돌한 1928년 5월 9일, 장쭤린은 전군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6월 2일 오후 7시, 순승왕부를 나선 장쭤린은 심복들과 함께 전용열차에 올랐다." "(펑톈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역인) 황구툰역에서 펑톈 쪽으로 몇백 미터 가다보면 산둥차오라는 육교가 있었다. 징펑철도와 남만주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1905년 12월 22일 만주선후조약滿州善後條約이 체결된 이래 관동군이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장쭤린의 열차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땀을 흘리며 부지런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펑톈 독립수비대 제4중대와 조선주차군 소속 가메야먀 공병대의 공병들이었다. 병사들은 기리하라 사다토시 중위의 지휘 아래 철로에 폭탄을 설치했다." "6월 4일 새벽 5시, 폭탄은 장쭤린이 탄 차량과 식당 차량 중간에서 터졌다. 난세에 태어나 천하를 호령하던 풍운아의 마지막이었다."(995-1000)


"편제상 일개 변방군에 불과했던 관동군의 임무가 적과의 전투보다는 철도 경비라는 지엽적인 임무였다면, 조선군이야말로 유사시 대륙으로 즉시 출동하기 위한 실전 부대이자 신속 대응군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힘은 조선군보다 관동군이 더 컸다. 관동군은 군부 핵심층에서 거대한 파벌을 형성하여 발언권이 막강했다. 관동군 뒤에는 남만주의 철도사업을 담당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른바 만철滿鐵이 있었다. 만철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 대륙 침략을 위한 첨병이자 식민지 정부로 일본판 '동인도회사'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경영권은 본국 정부가 아니라 관동군이 쥐고 있었다. 만철 운영은 거대한 이권을 좌우했기 때문에 관동군 장교들은 본연의 업무보다 만철과 결탁해서 이런저런 이권에 끼어들어 한몫 잡는 데 혈안이 되었다. 만철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은 일본 정계와 군부로 흘러들어갔다. 만주는 관동군의 '왕국'이었다. 일본군 중에서 관동군이 유독 타락하는 모습을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1004)


"장제스는 동북으로 중앙군을 보낼 수 없었고, 행정권을 행사하거나 세금을 징수할 수도 없었다. 국민당의 활동 또한 금지되었다. 동북은 여전히 장쉐량의 독립 왕국이었다. 장제스는 체면을 지켰고 장쉐량은 실리를 얻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또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북벌군의 4대 수장들이 승리 후의 논공행상으로 으르렁대기 시작한 것이다. 난징의 장제스, 우한의 리쭝런, 타이위안의 옌시산, 시안의 펑위샹. 여기에 동북의 장쉐량까지. 누구에게도 고개 숙일 생각이 없었던 이들은 천하의 주인 자리를 놓고 한판 겨룰 수밖에 없었다. 1929년 2월, 제4집단군의 총수 리쭝런이 제일 먼저 반장제스의 기치를 올렸다. 뒤이어 펑위샹과 장파쿠이가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다. 장제스에게 패하여 일본으로 달아났던 탕성즈도 돌아와서 반란에 가세했다. 광시성에서 시작된 반란의 불길은 마른 장작 타오르듯 순식간에 중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2년에 걸쳐 진행되는 군벌 내전 최대최후의 절정인 '신군벌 내전'이 시작되었다."(1047-8)


"편견이란 '엮고編 내보낸다遣'는 뜻으로 비대한 군대를 줄이고 정예부대 중심으로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북벌 과정에서 비대해진 군대를 크게 줄여서 재정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어렵사리 이룩한 통일정부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또한 군벌들에게서 병권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소란이 거듭될 것이 뻔했다." "장제스는 북벌 중에도 전쟁이 끝난 뒤를 대비하여 군대 축소를 꾸준히 제안했다. '재병화공裁兵化工', 즉 병사를 노동자로 전환하자는 얘기였다. 이를 위해 장쑤성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군축 작업이 결코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국가를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대승적인 결단을 내린 일본의 유신 지도자들과 달리 중국의 군벌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말로만 외세의 침략에 분개하고 중국의 허약한 운명을 한탄했다. 국난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뭘 어떻게 하겠다는 국가 대계는 없었다. 사고방식이 중국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1120-2)


"펑위샹의 하야, 리쭝런과 바이충시·황사오훙 등 광시파의 도주로 약 반년에 걸친 군벌들의 반란은 일단락되었다. 장제스는 반란에 가담한 지휘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대신 사면해주었다. 그는 군벌들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히틀러였다면 패배자들에게 최대한의 굴욕을 준 뒤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했을 것이다. 장제스가 그러지 않은 까닭은 내우외환에 직면한 중국의 현실에서 내전이 끝없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승자는 과거의 일을 잊고 패배자에게 너그러이 관용을 베푸는 것이 중국 사회의 오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협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장제스는 이들의 기반과 병권을 빼앗는 대신 중앙의 요직을 나눠주어 국민정부에 참여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왕국을 계속 통치하기를 원했던 군벌들은 병권의 반환이 곧 장제스의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결국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수밖에 없었다."(1144)


"한때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던 반장연합군 세력은 장제스의 발빠른 대응과 회유 공작으로 차츰 꺼져갔다. 군벌들은 서로 보조가 제대로 맞지 않아 차례로 각개격파당하거나 장제스의 회유에 넘어갔다." "중립을 지키던 옌시산도 장제스가 장제스가 사실상 승리를 굳히자 그제야 난징으로 전보를 보내 자신도 반란군 진압에 가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때 사면초가에 몰렸던 장제스는 무엇보다도 뇌물 공세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는 우세한 자금력을 앞세워 막대한 돈을 사방에 뿌려대며 군벌들을 회유했다. 군벌들이 하나같이 군비 부족에 허덕인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이들을 매수하기 위해 거액의 공채를 발행하고 자기 재산까지 털었다. 덕분에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형세를 뒤엎을 수는 있었지만 군벌들의 진정한 충섬심을 살 수는 없었다. 오히려 군벌들이 돈맛에 익숙해지면서 중국의 오랜 병폐인 도덕적 타락을 부추겼고, 이는 국민정부의 부패와 무능함으로 이어졌다."(1155-6)


"한동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혼란스러운 상황은 8월 말이 되자 승패가 장제스 쪽으로 기울면서 가닥을 잡았다. 산둥성에서 산시군은 괴멸하여 투항하거나 퇴각했다." "장제스가 강력한 반격을 시작한 가운데, 동북군의 출병은 펑위샹·옌시산에게는 허를 찔린 것이자 대세에 쐐기를 박는 결정타였다. 그들은 장쉐량이 기회주의적이기는 하지만 장제스와 손잡는 일은 없으리라 마음을 놓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전력을 장제스와의 전투에 투입하고 장쉐량에 대해서는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북군이 진격해오자) 옌시산과 왕징웨이 등 베이징 정부 수장들은 남쪽의 스좌장으로 피신하고 정부기관은 타이위안으로 이전했지만 이미 붕괴된 것과 다름없었다." "장제스는 시안은 물론이고 간쑤성과 칭하이성까지 진격하여 이번 기회에 서북군을 완전히 결딴내겠다고 별렀지만, 장쉐량이 중재하자 정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월 4일, 옌시산과 펑위샹은 하야를 선언했다. 이로써 중원대전은 막을 내렸다."(1184-8)


"(중원대전 이후) 동북군 내부의 파벌 싸움이 격화되자 관동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장쉐량과 반목하던 동북의 원로들은 친일파로 전향하여 관동군의 동북 지배에 협조했다. 장쉐량은 군대를 돌려 반격하는 대신 관동군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부저항 정책'을 지시하여 부하들로 하여금 무기를 내려놓게 하고 일본과의 협상에 나섰다. 중국인들의 오랜 관념마냥 장제스가 장쉐량을 파멸시킬 요량으로 압박해서가 아니라 장쉐량 스스로 관동군의 야심을 오판했고, 동북군 내부가 분열했으며, 어렵사리 확보한 영토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장쉐량의 개인적인 아집 때문이었다." "이듬해 1월에는 일본군이 러허사변을 일으켜 만리장성으로 밀고 내려왔다. 동북군은 싸우지도 않고 무너져버렸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머나먼 샨시성으로 쫓아버렸다. 장쉐량은 공산군 토벌 작전에 투입됐지만 여기서도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궁지에 몰린 그는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건을 일으켰다."(1189-90)


"장제스는 중원대전의 승리로 명실상부한 중국의 주인이 되었다. 펑위샹과 탕성즈는 몰락했고 옌시산은 겁에 질렸다. 리쭝런은 여전히 광시성을 지배했지만 큰 타격을 입었다. 북벌전쟁에서 장제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군벌들은 더 이상 천하 패권을 놓고 다툴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렇지만 장제스의 패업은 절반만 완성됐을 뿐이었다. 펑위샹·옌시산의 하야에도 불구하고 산시파와 서북파는 아직 건재하여 무시 못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장쉐량은 새로운 화북의 지배자가 되어 중국의 반쪽을 장악했다. 천지탕을 비롯한 광둥 군벌들 또한 장제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쓰촨성과 윈난성 등 광대한 서부 지방은 반半독립적인 군벌들이 차지한 채 할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장제스의 대등한 동맹자이지 주종 관계가 아니었다. 싸움의 단초가 된 편견(군축) 문제도 흐지부지되었다." "중원대전이 끝난 지 1년 뒤인 1931년 9월 18일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했다."(1194-5)


"중원을 평정한 장제스의 눈은 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오쩌둥-주더가 지휘하는 홍군이 있었다. 한동안 실패를 거듭하던 중국공산당은 농촌을 새로운 투쟁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건의를 받아들여 후베이성과 후난성·장시성 변경의 농촌 지역을 빠르게 잠식해나갔다. 중원대전이 한창이던 1930년 여름에는 장제스의 눈의 중원에 쏠린 것을 이용해 홍군 부대가 난창과 장사, 우한을 공격했다. 홍군의 성급한 공격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세를 불려가는 속도와 조직력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장제스는 이번 기회에 이 오합지졸 농민 군대를 토벌하고 쓰촨성·구이저우성·윈난성 등 아직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서부 변경의 군벌들까지 한꺼번에 손보기로 결심했다. 1930년 12월 19일, 장시성 주석 겸 제9로군 사령관 루디핑의 지휘 아래 5개 사단 4만 4,000명이 홍군 토벌 작전을 시작했다.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앞으로 20년 동안 이어질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첫 번째 싸움이었다."(1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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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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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불타는 도시


"외부 세계는 중국이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항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혹독한 대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약 1500만 명이 죽었다. 대규모의 피란민이 발생했으며, 이 나라의 초보적 근대화가 파괴된 것은 전쟁에서 치른 대가였다." "지난 수십 년 간 우리는 거대한 투쟁에서 중국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했다. 미국, 소련, 영국이 전쟁의 주역을 차지한 것에 비해 중국은 고작 이류 선수나 단역 배우로 여겨졌다. 그러나 중국은 1937년 추축국의 맹공격에 직면한 첫 번째 국가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2년 뒤, 미국은 4년이 지난 뒤에야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다.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의 목표 중 하나는 〈중국으로 하여금 그 전쟁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수많은 일본군을 중국 본토에 묶어놓음으로써 중국은 전반적인 동맹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나 중국은 다른 동맹국들에 비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거의 없었다."(12-3)


"또한 이 전쟁은 중국의 미래에 이상을 품고 있던 세 사람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 동안 모든 존경과 비판의 시선은 중국국민당 지도자인 장제스에게 쏠렸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심지어 적인 중국공산당까지도 전 중국을 대표해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장제스라고 생각했다. 장제스는 이 전쟁이 정화의 불이기를 꿈꿨다. 중국이 이 전화戰火에서 일어나 번영하는 주권국가가 되고, 전후 아시아와 그 밖의 세계 질서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리라는 희망이었다. 결과적으로 장제스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마오쩌둥에게 국가를 잃었다." "한편 전쟁은 한 남자의 명성을 날려버렸다. 그의 이름은 왕징웨이汪精衛다. 왕징웨이는 20세기 중국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다. 그는 청년 시절 장제스나 마오쩌둥보다 더 유명한 민족주의 혁명가였고, 위대한 혁명가 쑨원孫文 다음의 지위였다. 그러나 항일전쟁 중 중국인들에게 '천고의 배신자'라고 비난받을 만한 결정을 했다."(14-5)


"중국의 전시 역사를 다루면서 각국은 모두 자신의 냉전 상황에 맞게 편의적으로 해석했다. 일본과 중국은 1945년과 1950년 사이에 미국과 영국의 보호 아래 서로 자리를 맞바꾸었다. 일본은 전시의 적에서 냉전의 자산이 되었고, 중국은 항일의 동맹국에서 수시로 분노를 터뜨리는 예측 불가능한 거인이 되었다. 전시 중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은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라는 정치적인 질문과 함께 미국 정부를 꼼짝 못하게 했다. 그 시절 몹시 험악했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중국의 다양한 기여와 결점을 신중하게 평가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한편, 1949년 이후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관변 역사가들은 항일전의 승리에서 주인공은 중국공산당이었다고 재빨리 수정했다. 국민당의 역할은 부정당했다." "중국에서 항일전쟁은 비극 대신 평면적인 악인과 영웅이 나오는 멜로드라마로 각색되었다. 모든 사람이 중일전쟁은 수치스러우며, 마오쩌둥이 만들어낸 신중국의 영광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다."(19-20)


"그동안 중국의 항전 노력, 특히 국민당 정권의 역할에 대한 서구의 비판적인 시각은 장제스 정권의 부패와 대중적 지지를 상실했다는 질책에 근거한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전시 유머 중 하나는 중국 지도자의 이름Chiang Kai-Shek이 〈내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줘Cash My-Check〉였다는 것이다. 진실은 훨씬 복잡했다. 연합군의 유럽 우선 전략은 장제스가 최소한의 비용으로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장제스는 연합국의 전략적 이익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정작 자신들의 이익에는 위배되는 방식으로 군대를 배치하도록 거듭 강요당했다. 1945년 평화가 찾아왔을 때 국민당 정권이 절뚝거리며 동정받지 못하는 불구가 된 이유는 맹목적인 반공과 항일의 포기(진주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4년 반 동안 홀로 일본에 맞섰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억지다) 또는 멍청하거나 원시적인 군사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국내 혼란, 신뢰할 수 없는 동맹국들 때문이었다."(22)


제1부 전쟁으로의 길


"1856년과 1864년 사이에 태평천국은 중국 내에 실질적인 독립국가를 세웠다." "청 조정은 신뢰할 만한 지방관 증국번에게 맡겨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결정했다. 그는 태평천국군을 진압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상군湘軍)'를 양성했다. 새로운 군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다. 1864년 난징의 마지막 전투에서 약 1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 이 사건은 청의 통치에 또다른 취약성을 가져왔다. 태평천국이라는 당장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중앙에서 지방으로 군 지휘권의 이양은 중앙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흔히 '군벌'로 알려진 군국주의자들이 자치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었다. 분열되고 군벌화된 중국은 점점 취약해졌다. 1860년 이후의 권력 분산이 없었다면, 1930년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확률은 훨씬 낮았을 것이다. 군벌화와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은 청의 마지막 50년 통치 동안 중국을 뒤흔든 광범위한 폭력 문화를 초래했다."(31-2)


"1905년 러일전쟁은 아시아 국가가 유럽 강대국에 승리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이 성공으로 일본은 세계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롄大連 항을 포함한 만주 동부 연해의 랴오둥遼東반도에 대한 권리를 일본에 넘겨주어야 했다. 이어서 일본은 남만주철도를 건설해 이익을 극대화했다. 남만주철도는 수송망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부분적으로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상업적, 준정부적 조직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강력한 발판을 제공했다. 또한 러일전쟁은 일본 대중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일본에는 '센유戰友' 같은 군가가 유행했다. 여기에는 〈이곳은 고향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 멀리 만주의 석양이 들판 가장자리의 돌을 비춘다. 그곳에 잠든 나의 전우〉라는 가사가 담겨 있었다. 이러한 노래는 일본이 중국에서 큰 대가를 치르며 영토를 손에 넣었으며 그런 희생을 통해 자신들의 이웃 땅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았다는 정서를 부추겼다."(36)


"1911년 가을 중국 중부에 위치한 도시 우한武漢이 독립을 선포하자 많은 도시가 연달아 독립을 선포했다. 정치적으로 권력화된 신흥 상인 계층으로 새롭게 세워진 각 성의 의회는 신생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미국에 체류 중이던) 쑨원을 대총통으로 추대했다. 소식은 순식간에 청조의 전복을 준비하던 젊은 애국자들에게 전파되었다. 장제스는 서둘러 일본에서 돌아온 뒤 고향인 저장성에서 급조된 혁명군을 이끌고 첫 번째 전투를 경험했다. 청조의 통치가 매우 불안정했음이 드러났다. 지방 봉기는 갑작스레 불이 붙었지만 체제 전체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1911년 말 청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중국 북부에서 가장 거대한 군대인 베이양 군을 통솔했던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조정에 들어가 한 가지를 제안했다. 그는 여섯 살 난 황제 푸이溥儀가 물러나는 대가로 황실에 안정된 거처와 연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1912년 2월 12일 청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했다."(41-2)


"1926년 3월 20일, 장제스는 광저우에 계엄을 선포했고, 강한 영향력을 지닌 소련인 고문단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비록 그가 (저우언라이를 포함해) 체포된 고위 중국 공산주의자와 소련 고문단들을 즉시 풀어주었지만, 권력이 장제스에게 넘어왔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6월 5일, 장제스는 국민당 군대인 국민혁명군을 공식적으로 장악했다. 역설적이게도 1912년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군사력이 쑨원의 권력과 명성을 무력하게 만들었듯 이제는 군대를 장악한 장제스가 쑨원의 실질적인 후계자(왕징웨이)로부터 승리했다. 국민혁명군은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군사력은 중요했다. 그 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민혁명군은 북벌전쟁을 전개하여 전투나 압박을 통해 중국 중부와 동부 지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실상 1911년의 혁명 후 잃었던 국가 통일이 완수되었다." "마오쩌둥은 북벌의 열기 속에서 중국 전체를 지배하기 위한 정책을 시도하는 정치 실습생 중 한 명이었다."(51-2)


"1928년, 장제스는 수도를 중국 중부의 도시 난징南京으로 정하고 그곳에 자신의 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석탄이 풍부한 산시山西성은 옌시산閻錫山이 통치하는 실질적인 자치 지역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군벌로 예전에는 전족纏足 반대운동을 강력하게 펼치기도 했다. 만주의 둥베이東北 3성은 '젊은 원수' 장쉐량張學良의 세력권이었다. 화베이華北 지방에서는 지역 군벌 쑹저위안宋哲元이 지반을 다졌다. 일본 역시 만주에서 산화이관山海關 이남 지역까지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했다. 중국 서부 변경의 칭하이靑海성은 사이가 좋지 않은 숙질 관계인 마린馬麟과 마부팡馬步芳이 통제했다. 칭하이성 북쪽의 신장新彊성은 1933년부터 성스차이盛世才의 지배지였다." "군벌 류샹劉湘이 청두成都에서 통치했고, 서쪽의 비옥한 쓰촨四川성은 국민당의 완벽한 통제 아래 있지 않았다.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장제스의 불확실한 통치력은 진정한 통일을 이루는 데 큰 장애가 됐다."(54-5)


"1928년 6월 만주 군벌이자 '노원수' 장쭤린은 관동군이 설치한 폭탄 때문에 전용 열차가 폭발하면서 죽었다. 일반적으로 일본 군부는 외무성 관리들에 비해 한층 과격한 방법에 익숙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중국 본토는 침략자들, 특히 소련과의 완충지대였다. 만약 일본에 적대적인 세력이 중국을 차지한다면 일본에게 한층 불리해질 것이라고 여겼다. 1905년 러시아에게 이겼다는 기억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생명선'이라는 용어는 만주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데 흔히 인용되었다." "일본 지배층은 반제국주의적 구호를 외치는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적대 세력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국민당이 대중적 정당성을 가졌으며 중국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이념적 과제를 가진 운동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장제스를 뇌물을 좋아하고 유약한 또 하나의 중국 군벌로 취급했다." "장제스가 권력을 잡았을 때, 동아시아에서 두 국가의 서로 다른 이상은 존립을 건 대결을 예고했다."(58-60)


"1932년 2월 만주는 일본에 완전히 점령당하고 만주국의 '독립 선언'이 이어졌다." "장제스 정부는 일본과의 타협을 모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1933년 5월 1일 양국은 '탕구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 내용은 쌍방의 체면을 세워주는 데 있었지만 사실상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왕징웨이는 여전히 열렬한 민족주의자로서 활기차고 독립된 중국을 보고 싶었지만, 항전을 시작하기에는 중국의 군사력이 너무 약하다는 장제스의 신념을 공유했다. 또한 중국이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는 중국 영토에 식민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이나 미국과의 동맹이 일본과 손을 잡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 최소한 일본은 중국과 문화적인 유대감은 있었다. 왕징웨이는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지해야 하는(어쨌든 정부 방침이었다) 불행한 위치에 있었고 대중이 보기에 그는 비할 바 없는 친일파였다. 이로 인해 미움 받는 대상이 되었다."(73-4)


제2부 재난이 닥치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중일 군대가 충돌했다." "장제스는 중대한 질문과 맞닥뜨렸다. 이틀 동안의 전투가 이전의 여러 사례처럼 정말로 단순한 충돌이었나, 아니면 1931년의 만주 위기처럼 중국 영토를 본격적으로 침략하려는 일본의 또 다른 시작의 전조인가? 그는 전쟁이냐, 아니냐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1935년부터 중국 북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일본이 중국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여긴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장제스는 일본이 중국을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만약 지금 맞서지 않는다면, 그런 순간이 곧 닥치리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확실히 곧 도래할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에 도전하는 것은 국가적 자살이나 다를 바 없는 매우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장제스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장제스가 일본과 싸우겠다면 자력으로 해내야 했다."(87-91)


"전쟁이 벌어진다면 국지적 분쟁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되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장제스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군대를 더욱 전문화하고, 군벌 수장들의 독립 성향을 약화시키며 국가 경제와 재정적 기초를 다지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1937년까지 일본의 전쟁 준비 태세는 중국인들의 노력을 시시하게 만들었다. 1936년 2월의 쿠데타 미수에서 일본 대장성 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살해되었다. 그가 죽은 뒤 군비는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와 국민 양쪽 모두 〈중국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라는 열망에 점점 고무되었고, 나날이 강화되는 중국의 결속과 민족주의 정서를 경계했다.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달리, 일본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처럼 개인적인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외교 정책을 좌지우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치인과 군대, 일반 국민들이 '전쟁 열풍'에 중독되어 있었다."(92)


"장제스가 일본과의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선택한 장소는 바로 상하이였다. 장제스가 상하이를 전쟁터로 만든 목적은 두 개의 전역이 하나의 전쟁에 속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상하이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팔켄하우젠은 상하이의 복잡한 거리가 중국 북부의 광활한 평원보다 일본군에게 한층 불리하며 중국이 승리할 기회가 있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독일식 부대는 우수하긴 하나 숫자가 부족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싸우는 것은 것은 국내와 국제 어느 쪽이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폭격기 조종사들의 형편없는 활약과는 별개로 중앙군은 상하이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상하이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이제는 전쟁이 국가 전체의 싸움이 되었다. 그 전까지 만주의 문제는 중국의 주권과는 별개로 여겨졌고 구호만 요란할 뿐 행동은 거의 없었다." "이제 장제스는 중국 북부가 공격받는다면 남쪽이 앙갚음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116-7)


"전쟁은 중국인들이 갑작스럽게 국가를 인식하게 만들었고 국민의 정체성을 한층 다급하고 중요한 일로 여기게 해주었다. 동시에 항일이냐, 협력이냐를 놓고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도덕적인 옳고 그름의 문제였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초반에 이미 볼 수 있었던 강한 위기감을 한층 고조시켰다. 이 시기 정치는 여러 주요한 측면에서 현대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초기 국민당은 1910년대와 1920년대 5·4운동을 전후하여 일어난 정치적·사상적 자유의 분위기를 정착시키는 데 실패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중국이 직면했던 수많은 위기의 결과였다. 정치는 양극화되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어느 쪽이건 의견 충돌이 때로는 생산적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겉으로는 자신들의 통치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군소 정당을 허용하는 척하면서도 진정한 다원적인 정당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143-4)


"일본 수뇌부는 처음부터 난징을 점령할 생각이 아니었다. 중국 북부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일본은 국민당 통치 구역을 장악하기보다는 화베이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창장강 하류에서 새로운 전선을 열고 전쟁을 확대하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재검토했다. 11월 7일에는 중지나 방면군中支那方面軍이라는 새로운 지휘 편제를 급조했다. 중지나 방면군에는 일본군 제10군과 상하이 원정군이 배속되었다. 이것은 중국 중부에서 일본군의 전략이 크게 바뀌었음을 의미했다. 7월에 처음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일본은 강력한 일격으로 중국의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릴 참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확대와 중국군 수비대의 분투는 그들을 놀라게 했다. 11월 5일 일본군 제10군의 항저우만 상륙은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중국의 수도를 점령하여 자신들의 대동아공영권을 위협하는 중국 민족주의에 최종적인 패배를 안길 생각이었다."(149-50)


"장제스는 〈혁명정신〉을 강조했다. 12월 11일 그는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정신〉을 차지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중국은 제2의 스페인이 될 것이다〉라고 썼다. 많은 서구 진보주의자는 스페인과 중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유사하다고 썼다. 그들이 보기에 두 전쟁 모두 진보 세력이 반동 세력과 파시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장제스의 사고방식은 여러 측면에서 프랑코에 가까웠다. 장제스에게 스페인 내전은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국가적 분열을 이용하여 권력에 침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동시에 그의 눈에 스페인 내전은 우울하기 짝이 없는 또 다른 평행세계였다.(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파시스트들의 침략을 받는 스페인 공화정부의 위기를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옮긴이) 장제스는 난징을 떠나면서 열강들의 신속한 개입에 조금의 희망도 품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3년 동안은 중국 혼자서 '힘겨운 투쟁'을 해야 할 것이라고 선견지명이 있는 전망을 내렸다."(153-4)


"쉬저우의 함락은 전략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큰 의미가 있었다. 중국 중부를 장악하고 이 지역으로의 군대 수송을 통제하려는 장제스의 노력은 또 한 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타이얼좡의 승리로 갑자기 고조된 사기는 비록 당장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크게 얻어맞았다. 또한 누군가 항전을 지지할수록 전쟁은 길어질 것이며 일본과의 싸움에서 신속한 승리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징후이기도 했다." "1938년 5월, 마오쩌둥은 그 유명한 「지구전을 논함論持久戰」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과도한 낙관주의를 비판했다." "마오는 궁극적으로 중국이 이길 것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았지만(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신속한 승리는 불가능하다. 항전은 지구전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쉬저우의 상실이 반드시 장기전을 예고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일본군의 진격에 따라] 무시무시할 만큼 짧게 끝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할 수도 있었다."(187-8)


"1938년 6월 8일, 장제스 정권은 국민에게 최악의 폭력 중 하나라고 할 만한 일을 저질렀다.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정저우 일대의 황허강 제방을 폭파한 것이다. 황허강 범람으로 인해 50만 명이 사망하고 300~5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오늘날 우리는 국민당의 행위를 되짚어보면서 그들이 우한에 매달리지 말아야 했다거나 제방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행위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논쟁을 벌일 수는 있다. 그러나 1938년의 무더운 여름, 장제스에게 유일한 희망은 가능한 한 일본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중국 내륙에서 장기 항전을 위한 최상의 여건을 만들어내고 일본의 만행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유지하는 얼이었다. 홍수를 통한 잠깐의 지연 또한 전략의 일부였다. 국민당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갈등에서 적어도 한동안은 냉혹한 계산이 승리를 거두었다. 제방 파괴로 인한 재앙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국민당 스스로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에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198)


"1938년 10월 25일, 마침내 우한이 사방이 포위된 채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전 세계의 이목은 새로운 항전의 중심이 된 임시 수도 충칭으로 향했다. 장제스의 〈자유중국〉은 쓰촨성과 후난성, 허난성을 가리켰지만 장쑤성이나 저장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국 동부 지역은 완전히 빼앗겼다. 중국의 주요 관세 수입,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 가장 근대화된 기반 시설 또한 모두 잃었다. 정치적 중심지는 머나먼 서부로 옮겨졌다." "관찰자들(중국의 사업가, 영국 외교관, 일본 장군들)은 매번 새로운 재앙이 나타날 때마다 틀림없이 중국이 항전을 끝내고 신속하게 항복하거나, 적어도 중국 정부가 도쿄가 제시한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일이 해결되리라 예견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난징에서, 우한에서 저항을 분쇄하는 일본군의 가공할 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침략자의 동원력과 기술력, 경제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은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 싸우고 있었다."(203-4)


제3부 고군분투


"중일전쟁사에서 1938년 말 우한이 함락된 뒤 1941년 말 진주만 공격까지 3년의 시간은 얼핏 보기에는 지리한 교착 상태로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3개 세력이 서로 대치하면서 지구전에 돌입한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3년 동안 중국의 정세가 평온하거나 안정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 남부와 중부를 차지한 국민당, 북부의 공산당 그리고 동부의 일본군은 중국의 분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규모 군사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전쟁의 성격은 공격에서 방어로 바뀌었다. 전쟁 첫해와 같은 격렬한 전투는 줄어들었다. 그 대신, 중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변덕스러운 동맹관계, 비밀 외교, 앞으로 자신들의 진로를 영원히 바꾸게 되는 사회적인 변화였다. 변화의 중심에는 사회복지라는 새로운 발상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국가가 인민의 일상적인 복지에 직접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제 전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체제들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처지였다."(206)


"많은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장제스의 새로운 전시 수도 충칭에 주목했다." "충칭의 위치는 중국의 지리적 감각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중국의 서부 지역, 그중에서도 쓰촨성은 변경에 있었고 국민당의 통치를 거의 받지 않았다. 이제 동부의 심장부가 점령당한 동안 쓰촨성이 국민정부의 중심부였다. 1931년에도 또 다른 변경인 만주가 침략당한 사실은 민족주의가 결집하도록 한층 더 강하게 자극했다. 서부 지역으로 쫓겨난 국민정부는 티베트와 신장성처럼 이전에는 공화정의 허약함 때문에 중국의 영향력 바깥에 있었던 지역의 통합을 강화하는 데 나섰다. 국민당 통치 구역 내 여러 대학의 인류학자들은 서부 변경 민족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광범위한 중화 민족주의에 흡수하려고 했다. 정부 전체가 창장강 1400킬로미터 안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광대한 중국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했다."(206-8)


"일본은 완고한 반공주의 국가이면서도 정작 주된 목표는 장제스였다. 전 중국이 일본의 지배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쪽은 (옌안에 은거한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의 항전이었다. 끝없는 폭격에 시달리는 국민당 정권은 중국 언론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옌안은 고립된 곳이라 충칭에 비해 피란민의 수가 훨씬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공산주의자들은 외부의 관찰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마음껏 추진할 수 있었다. 옌안은 미지의 장소로 남았다. 외국 대사관도 없었고 장기 체류하는 언론인도 없었다. 그곳으로 초대된 외국인들은 대부분 에드거 스노, 아그네스 스메들리처럼 무명은 아니지만 급진적이면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은 옌안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국제적인 주목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 마오쩌둥에게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조하기 위한 훨씬 더 많은 기회를 안겨주었다."(231-2)


"193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저우포하이는 국민정부 선전부의 부부장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후 몇 주, 몇 달 동안 저우포하이는 (승리에 대한) 회의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소위 〈저조구락부低調俱樂部〉라고 일컫는 정치인, 지식인들과 어울렸다. 이들은 일본과의 평화 협상 가능성을 조심스레 열어두기를 원하는 집단이었다. 저우포하이가 왕징웨이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저조구락부〉를 통해서였다." "1938년 11월 3일, 고노에는 라디오 연설에서 일본과 중국이 (아마도) 동등한 지위 아래 진정한 위협인 공산주의에 맞서 함께 싸우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위 아시아의 〈신질서〉라는 그의 목적을 공식 선언한 것이었다. 비록 이 성명은 일본이 국민정부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1월의 선언을 완전히 뒤엎지는 않았지만 국민당 내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도쿄와 한층 우호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고노에의 메시지는 왕징웨이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244-8)


"저우포하이와 그의 보스였던 왕징웨이는 생애 마지막까지 자신들을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공격으로 중국이 파괴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소련에 의해 공산 중국이 세워질 것인가 두 가지 미래에 직면한 왕징웨이 일행은 평화 협상만이 전란에서 중국을 구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기보다는 소위 대아시아주의의 미래를 건설한다는 순수한 이념적 열정에 스스로 도취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제국주의를 강요하는 열강들의 행태는 그들에게 일본을 보다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일본의 생활 방식을 동경한 열렬한 부역자라는 의미의 '친일'은 결코 아니었다. 젊은 시절부터 민족주의 혁명의 대의에 그토록 헌신했던 한 사람에게는 기묘한 입장이었다." "(왕징웨이가 보기에) 1870년에 프로이센에게 당한 패배를 1918년에 와서야 설욕한 프랑스의 경우처럼 중국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동안은 자신들의 승리 가능성에 대해서 현실적일 필요가 있었다."(250)


"1939년 늦여름, 두 개의 사건이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던 독일과 영국, 프랑스 사이의 전쟁 발발, 그리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독일과 이념적인 숙적인 소련의 해빙 무드였다. 후자는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불가침 조약이 발표되면서 명확해졌다." "장제스는 항일에 소련을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소련은 사실상 나치의 동맹국이 되었고 나치는 도쿄와 동맹 관계였다." "가장 큰 타격은 유럽 북부의 동토에서 일어난 사건의 여파였다. 1939~1940년의 겨울 전쟁에서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당장 영국과 프랑스는 국제연맹에서 소련을 제명하는 결의안을 지지했다. 국제연맹 회원국이었던 중국은 결의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거절했다. 소련은 자신들의 제명을 막지 않은 장제스에게 분노했고 남은 전쟁 기간 장제스와 스탈린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중국은 더 이상 소련의 원조를 받지 못한 채 일본과 싸워야 했다."(256-9)


"1940년 봄 중국의 처지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신세였다. 3월에는 일본 고위 협상가들이 장제스와 타협하려고 시도하는 동안 왕징웨이는 난징에서 자신의 신정권을 인정받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중국에서는 〈통공작桐工作〉, 일본에서는 〈기리공작〉으로 알려진 이 전략에 따라 1940년 3월 7일부터 10일까지 홍콩에서 (비공식적인 중일 양국) 회담이 열렸다. 국민당은 군사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미국은 여전히 중립을 고수했고 유럽은 혼란스러웠다. 실제로 그해 봄, 프랑스의 몰락이 초읽기가 되자 영국 역시 독일과 평화 협상의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유사한 방법으로 상대의 의중을 신중하게 떠보는 중이었다. 중국이 서구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일본인들에게는 장제스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일본군은 중국 북부에 병력을 주둔할 것과 만주국의 승인을 원했지만 장제스는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은 장제스를 한층 압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266-7)


"장제스는 결연한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특유의 책략을 적절하게 발휘했다. 1940년 8월 일본과의 협상에 찬성했던 그는 일본이 국민정부와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했던 〈상대하지 않는다〉를 철회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내세워 돌연 회담을 취소했다. 국민당은 일본과 왕징웨이 정권의 결탁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자신들의 중요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공식 회담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일본과 대화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장제스의 전략은 두 개의 중요한 이점을 제공했다. 하나는 결국 왕징웨이가 난징에서 신정권을 수립하는 1940년까지 일본의 입장을 보류시켰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서방 열강들을 향해 충칭에 더 이상 원조를 제공하지 않으면 그들의 적과 어떤 식으로든 타협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11월 30일, 왕징웨이 정부는 도쿄의 공식 승인을 얻었다. 이날 미국 정부는 자유중국에 1억 달러의 차관과 더불어, 50대의 군용기를 제공키로 했다고 발표했다."(268-9)


"1939년 초부터 국민당은 공산당의 확대를 막기 위한 조치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해에 충칭 폭격이 시작되면서 국민정부의 지위가 큰 타격을 입었다. 폭탄이 떨어지는 동안 장제스와 그의 측근들은 동북쪽에서 경쟁자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제스는 마오의 심장부를 겨냥해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조치를 지시했다. 특히 공산당이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여기는 허베이성과 산시성, 허난성, 산둥성에 대한 통제를 되찾을 생각이었다. 국민당은 4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산·간·닝 변구의 서남부를 봉쇄했다." "갈등은 기묘하고도 은밀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어느 쪽도 대중이건, 국제사회에서건 국공합작이 실제로 끝났다고 여기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처지였다. 산·간·닝 변구의 경계에서 국민정부군과 공산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지만 공산당은 국지적인 충돌일 뿐, 국공합작의 총체적인 파국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장제스 역시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았다."(269-70)


"1941년 1월, 공산당 신4군의 행보를 두고 벌어진 완난 사변에서 국민당이 거둔 군사적 승리는 여론의 후폭풍에 직면했다. 대다수 외부 관찰자의 반응은 공산군 부대가 지시에 불응했기 때문이 아니라 장제스가 일본군 대신 국내의 적을 제거할 속셈으로 동맹자들을 배반했다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일본군과 공산당 양쪽 모두를 동시에 상대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산군을 억지로 창장강 이북으로 쫓아내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다시는 그러한 시도가 없었다. 반면, 홍군은 더 이상 장제스를 신경쓸 필요 없이 세력 확장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 싸움의 승자는 공산당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마오였다. 마오의 경쟁자였던 샹잉의 패배와 죽음으로 중국공산당의 미래는 옌안의 마오에게 더욱 속박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재앙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의 행운을 상승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274-5)


제4부 독이 된 동맹


"시작부터 새로운 동맹자들이 서로를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물론 겉보기에는 화기애애했다. 12월 10일, 장제스는 새로운 현실에 관해 국민들에게 연설했다. 〈이제 전 세계 90퍼센트가 전쟁에 끼어들었다.〉 그는 연합국이 자신들의 〈자유, 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다 함께 싸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쑨원의 삼민주의를 인용하여 중국은 〈스스로를 구함으로써 세계를 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수 년 동안 절망적인 저항에 매달려야 했던 중국의 희망은 다른 강대국이 자신들의 편에 서서 전쟁에 끼어드는 것이었다. 이제 두 개의 강대국이 중국의 편에 섰다. 미국과 대영제국이었다. 장제스는 일본만이 아니라 지금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 두 나라가 과거에 중국에서 저질렀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단순히 항전의 완전한 승리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영토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기도 했다."(292)


"문제는 중국과 서구가 서로 전혀 다른 관점에서 중국의 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구 연합국들이 보기에 중국은 일본군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미국과 영국이 나타나 자신들을 만행으로부터 구해주기만을 무릎 꿇고 간절히 기다리는 애처로운 나라였다. 반면, 장제스와 대다수 중국인의 생각은 자신들이야말로 추축국의 침략에 맞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싸워온 맞수였다. 전쟁을 그만둘 기회가 수없이 있었지만 중국은 외부의 개입 가능성이 제로인 절망적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는 그들과 동등한 열강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중국의 연합국위원회Allied Commission 참여나 충칭에 ABCD(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합동참모본부를 설치하게 해달라는 요청은 거부당했다. 영국인이나 미국인 어느 쪽이건 장제스를 진정한 동맹자로 대우하거나 중국을 주전장主戰場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294-5)


"마셜은 모든 전력을 유럽에 집중키로 결정하면서도, 미국인이 아시아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또한 여전히 중요하다고 인정했다. 어쨌거나 미국에게 싸움을 건 쪽은 독일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 육군 병력을 중국에 배치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가 생각해낸 해결책은 중국군이 미군 참모장 한 사람을 받아들이도록 장제스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다면 미국인이 중국인들과 나란히 하는 것처럼 생색은 내되, 실질적인 병력을 보내라고 요구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스틸웰은 그 역할을 맡기 위해 마셜이 고른 사람이었다." "[옮긴이] (나약하고 무능한 중국인들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스틸웰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어 양국 사이에 근본적인 신뢰를 쌓기보다는 중국의 난처한 처지와 미국의 대중 원조를 무기삼아 일방적인 복종만을 요구하면서 중국인들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이 때문에 양국 관계를 왜곡시킨 것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경력마저 망치게 되었다."(303-4)


"1942년 이후부터 정부는 매년 약 6000만 석(300만 톤)의 곡물을 징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부담은 현재 국민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 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성들, 특히 쓰촨성에 가중하게 짊어지워졌다. 또한 이 정책으로 인해 부패와 투기를 위한 새로운 기회가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제도에서는 전쟁 수행의 훨씬 많은 책임이 농촌으로 전가되었다. 전쟁 초반부터 농촌은 징병 대상으로 큰 부담을 안아야 했지만 농민들은 심각한 식량난을 겪지 않았다. 수확이 괜찮고 현물세가 없다는 것은 농민들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어느 순간 군대 부양의 책임은 농민들이 직접 떠맡아야 할 몫이 되었다. 국민당과 일본군 사이에 있는 최전선이자 전통적으로 풍요로운 허난성은 1942년 여름에 심각한 고초를 겪게 될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그해 흉작이 들었고, 굶주림이 허난성을 휩쓸기 시작했을 때 부패한 관료들은 자연 재해를 인공 재해로 바꾸어놓았다."(326-8)


"허난성의 기근은 국민당의 재정 압박에 따른 결과가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제아무리 개별적으로는 서로 다른 행동을 취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비극적)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랬다. 부패와 무관심, 냉담함은 하나같이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할 수 있는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영은 투기와 사재기가 〈현지 주민들이 국민정부를 적대시하게 만들었으며, 농촌 민심이 공산당 쪽으로 돌아서는 데 일조했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재정적 조치로 곡물을 징발한 것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정부의 자금 확보를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라고 주장했다. 국민정부가 항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곡물세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른 이들은 시어도어 화이트가 목격했듯이 허난성의 들판에서 죽어가던 농민들이었다."(336)


"도시의 삶 역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만연한 부정부패에 시달리면서 국민당 정부를 향한 환멸에 잠식되고 있었다. 장제스의 서방 연합국들이 가장 즐겨했던 비난은 국민당이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을 모으는 데 소극적이었으며, 서방의 도움을 받아 이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그레이엄 펙이 장제스를 비판했던 핵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당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 동일한 관찰자들은 (이미 경제가 한계에 직면한 상황에서) 경제적 생산성이 전혀 없는 수십만 명의 군인을 한데 모아두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부담인지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국민당 중국은 옌안과 다른 의미에서 봉쇄당한 신세였다. 마오는 상대적으로 군비 부담이 낮아 국민당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재정 수입을 배분할 수 있었다. 국민당 통치 구역에서의 삶이 갈수록 가혹하고 불평등해지는 동안, 공산당은 점점 희망의 상징이 됨과 동시에 국민당과 명확히 비교되었다."(343)


"한편으로, 일부 미국인들 마음속에서는 자신들이 장제스를 과연 어디까지 지원할지에 대한 의구심이 점점 굳어갔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고 대원수가 복귀하자 가우스 대사는 코델 헐에게 중국의 항전 역량이 앞으로 얼마나 이어질지에 대해 우려를 드러내는 편지를 썼다. 그는 명망 있는 국민정부 경제부장인 윙원하오가 자신과의 대화에서 현물세의 징수로 인해 농민들의 깊은 원한을 샀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고 보고했다. 〈중국인들이 절망적인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가우스는 이렇게 주장하면서 중국 정부가 이제는 전략적으로 〈완전히 수세적〉이며 〈모든 면에서 수동적이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중국군의 영양 상태가 매우 심각하고 부패로 가득하며 군사적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행동만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1943년 말이 되면 국민정부는 더 이상 애정과 존경을 받기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388-9)


"1943년 가을 일본 대본영은 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위치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평양에서 미군이 공세에 나서면서 일본군이 1942년 초에 쌓아올린 것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점차 분명해졌다. 1944년 봄이 되자 연합군의 공격은 도쿄가 태평양 중부에 있는 점령지의 일부라도 지킬 요량으로 병력을 재편성하도록 압박했다. 1944년 2월 마셜 제도를 상실한 후, 이제 일본군은 1941년에 그러했듯, 판돈을 두 배로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과감하면서 예측불허의 행동이 다시 한 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리라 기대하면서 아시아 대륙에서 최후의 대규모 일격을 가할 속셈이었다. 〈우고 작전五號作戰〉은 8만 5000여 명의 병력으로 버마 북부에서 인도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주요 전역은 이 전쟁에서 중국을 영원히 끝장내기 위한 〈이치고 작전一號作戰〉이었다. 도쿄의 대본영은 중국 중부를 확실하게 관통할 군사 작전을 승인했다."(397)


"4월 중순, 일본군의 강력한 공세가 허난성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갔다. 이제 군대는 지난 몇 년 동안 일본군과의 싸움에 따른 소모와 국민정부의 부패, 무능의 결과를 절감해야 했다. 병력의 충원은 1941년 이후 줄어들고 있었고 신병의 강제 모집이 훨씬 보편화되었다. 징집은 흔히 범죄 집단과 결부되어 밧줄에 묶인 채 고향에서 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졌다. 만약 자기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다면 그들은 손쉽게 달아나버렸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군대 봉급을 갉아먹은 덕분에 군 복무는 한층 인기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윈난성의 Y군을 비롯한 그나마 남아 있는 중국군 최정예 부대의 일부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버마에서 스틸웰의 지휘를 받으면서 미치나의 포위를 풀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중국 중부에서 중국군의 서류상 전력과 만신창이가 된 현실 사이의 어마어마한 격차는 1944년 5월 악몽 같은 시간 속에서 그대로 드러났다."(398-9)


"일본군이 중국 중부를 박살내면서 국민당에 대한 미국의 신뢰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이 향한 쪽은 (쑨원의 아들) 쑨커가 아니었다." "1944년 1월 미국 외교관 존 데이비스 주니어는 미국이 옌안의 공산당 본부와 정식으로 접촉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했다. 〈오직 한 명의 미국인 공식 관찰자만이 공산당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건 이미 6년 전의 일이었다.〉 공산당은 일본의 군사적, 산업적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요 근거지를 구축했으며 일본에 대한 쓸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소련이 전쟁에 개입한다면 공산당 지역을 통해서 공격에 나설 것이었다. 그는 공산당이야말로 〈중국에서 장제스 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단일 도전자〉라고 못 박았다. 또한 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을 내놓았다. (공산당이 국민당보다 더 적극적으로 싸우고 있다는 암시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단결되어 있으며 규율을 갖추었고 정력적으로 항일에 나서고 있는 정권〉이라는 것이었다."(408-9)


"장제스와 스틸웰의 악감정은 전시 동맹 동안 미중 불화를 가장 선명하고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러나 이는 정보 영역에서의 다툼부터 재정적 원조와 부대 임무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갈등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스틸웰과 장제스의 개인적인 충돌은 중요하지만, 마셜과 다른 연합국 수뇌부가 전쟁 초기에 내린 보다 광범위한 전략적 결정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즉, 중국은 연합국의 전쟁 수행에서 주요 전역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중국인들이 스스로 소모품이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합국은 장제스가 동맹국들에게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허구를 강요함으로써 미중 관계를 갉아먹었다. 가치가 의심스러운 버마를 되찾으려고 계속 시도하기보다는, 장제스가 제한된 자원을 중국을 방어하는 데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었을 것이다."(434)


"단기적으로 스틸웰의 소환과 루스벨트의 재선은 미중 동반자 관계에서 곪아 있던 종기를 제거한 것처럼 보였다. 분위기를 바꾸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비록 공식적으로는 1945년 2월까지도 끝나지 않았지만) 12월 이치고 작전이 갑자기 멈추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치고 작전에서 일본군은 중국 영토 안에 가장 깊숙이 들어오면서 1938년 여름에 점령한 영토보다 더 많은 지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장기적인 목표의 대부분은 달성하지 못했다. 비록 구이린 주변의 미 공군 비행장들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었지만 비행장들은 간단히 훨씬 깊숙한 내륙으로 옮겨졌다. 더 중요한 사실은 태평양에서 사이판의 함락으로 미국은 1944~1945년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 중국 외 다른 곳에서 일본 본토를 폭격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치고 작전으로 국민정부군은 거의 75만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허난성과 후난성의 거대한 곡창지대와 병력 충원 지대를 상실했다."(437-8)


"장제스는 1945년의 지상 공세를 위해 스틸웰이 중국으로 복귀한다는 어떤 제안도 거절했지만 웨드마이어는 중국 동부를 탈환하기 위해 새로운 중국군 39개 사단을 훈련시킨다는 스틸웰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옮긴이] 장제스는 중국 전구에서의 반격을 위해 1945년 2월 9일 쿤밍에서 중국 전구 육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군정부장 허잉친을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스틸웰 소환 이후 미국의 원조물자가 쿤밍으로 수송되면서 4개 방면군 19개 군 64개 사단에 달하는 부대들은 우선적으로 미국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했으며 미군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받았다. 1945년 3월부터 5월까지 후베이성 라오허카우와 후난성 즈장에 대한 일본군의 공세는 1년 전과 달리 새로운 중국군에 의해 완전히 저지되었으며 〈중국판 과달카날〉이라고 불릴 만큼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중국군은 그 여세를 몰아서 1945년 6월 광시성을 탈환함으로써 비로소 전세를 완전히 뒤엎었다."(456)


"끝은 갑작스러우면서, 또한 뜻밖에 닥쳐왔다. 1937년 7월 거의 우연히 시작된 전쟁은 베이징 교외의 소규모 충돌이 몇 주 안에 확대되면서 중국 동부로 옮겨가 8년 동안 계속되었다. 중국은 엄청나게 변했다. 1945년 8월, 중국은 어느 때보다 강력한 국제적 지위─유일한 비유럽국가로서 유엔 강대국의 일원─를 차지함과 동시에 지난 1세기 동안 한층 약화되었다." "중국은 이제 민국 시기 내내 손에 넣을 수 없었떤 자주적인 역할을 갖게 되었다. 일본과의 전쟁은 1911년 혁명의 유산이었던 국가의 지위와 자주권을 위한 싸움이었고, 중국은 그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끔찍한 대가 또한 치러야 했다. 일본과의 전쟁은 중국을 도려냈다." "심지어 승리의 순간에도, 나라는 분열되었다. 중국은 두 개로 쪼개어졌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타협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전이 시작될 것처럼 보였다." "가장 아이러니한 사실은 마오쩌둥이 대승리를 거두어 장제스가 거둔 승리의 열매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459-60)


결론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조지 마셜 장군의 임무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어느 진영도 진정으로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민당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공산당의 군사적, 정치적 조직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불확실한 국민당의 지휘 구조에 넘기는 것을 주저했다. 1946년 1월 10일 양측은 정전에 동의했다. 하지만 마셜은 그들을 다음 단계로 안착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46년 전반기 6개월 동안 진정한 돌파구를 찾으려는 마셜의 시도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투가 확대되면서 한층 악화되었다. 1946년 여름이 되자 공산당은 둥베이(만주)에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장제스는 공산당에게 (아마도 그들이 너무 약해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계속 요구한 반면, 공산당은 국민당이 1946년 동안 차지한 영토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년 1월 7일 마셜은 두 당의 중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464)


"일단 내전이 시작되자, 국민당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대부분 장제스의 판단 착오 때문이었다. 항일전쟁 동안, 장제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는 역할을 했다. 내전 중에는 판단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특히 이웃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업고 마오쩌둥을 지탱하는 공산당의 심장부였던 둥베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전선을 확대하기로 결정한 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소련은 미국이 일본에서 자신들에게 연합 지휘권을 허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국민당과 맺은 협정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1946년 봄이 되자 둥베이 지역 탈환 가능성은 한층 비관적이 되었다. 1947년이 가까워졌을 때, 공산당 장군이 린뱌오의 눈부신 전역은 국민정부군을 중국 북부에서 점점 반대쪽으로 몰아붙였다." "1949년 상반기, 장제스는 해군과 공군 사령부를 타이완으로 옮겼다. 많은 민간인도 뒤따랐다. 5월 장제스는 타이완을 향해 떠났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본토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468-9)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일본군을 상대로 중국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이 거의 없다는 설명만이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1949년에 (공산군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였다. 〈항일전쟁〉에서 중국 인민을 이끈 모든 공은 공산당, 좀더 구체적으로는 마오쩌둥 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옌안에서 마오쩌둥의 혁명을 둘러싼 신화는 이 나라 정체성의 중심이 되었다. 영국과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이 전쟁으로 그들의 사회에 초래한 엄청난 변화들에 기뻐하거나 고통스러워할 때 중국에서는 8년 항전의 경험이 대중의 기억에서 사실상 제거되었다. 난징 대학살, 충칭 대폭격, 왕징웨이의 배신, 마오쩌둥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았던 공산당 지역들은 모두 열외로 취급되거나 심지어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논의의 대부분은 진정으로 반성한 사람들과의 〈화해〉를 실현하려는 쪽으로 기울었다. 진정한 증오심이 향할 곳은 미국 해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바다 건너 타이완을 위해 따로 남겨두었다."(471-2)


"중국은 망각당한 연합국으로 남아 있다. 그마저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들의 경험이 희미해져감에 따라 더욱 존재감이 없어지고 있다. 중국의 싸움은 인종과 세력 다툼에서 필사적으로 싸운 소련만큼 참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이 견뎌야 했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이 컸다. 전쟁은 1500만 명에서 2000만 명의 사망자, 8000만 명에서 1억 명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1928년에 국민당이 착수했던, 비록 결함은 있었지만 실질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었던 근대화 노력은 모조리 붕괴되었다. 난징의 칼에 의해서건, 충칭에서의 폭격이건, 심지어 궁지에 몰린 그들의 정부에 의해 제방이 파괴되면서였건, 8년 동안 중국 민중에게 그러한 잔혹한 죽음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나약한 불구의 국가는 적에게 항복할 수도 있었지만 8년 동안 계속 싸웠다." "중국이 싸움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중국의 수렁'이 없었다면, 일본 제국의 야심은 훨씬 쉽게 실현되었을 것이다."(4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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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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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2월 말까지도 카탈로니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건물마다 빨간색 깃발이나,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무정부주의자들의 깃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군중의 모습이었다. 겉으로 볼 때 그 도시는 부유한 계급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곳이었다. 소수의 여자와 외국인들을 제외하면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거의 모두가 노동 계급의 거칠거칠한 옷을 입었다." "이 모든 것이 신기했고, 또 감동적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면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 도시의 모습을 보자마자 내가 싸워서 지킬 만한 어떤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나는 눈에 보이는 모습이 전부라고 믿었다. 그것이 정말로 노동자들의 〈국가〉이며, 모든 부르주아는 달아났거나, 죽음을 당했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노동자들의 편으로 넘어왔다고 믿었다. 많은 수의 부유한 부르주아가 기회를 엿보며 당분간 프롤레타리아 행세를 하고 있을 뿐임을 깨닫지 못했다."(11-3)


"나는 레닌 병영에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전선에 가기 위한 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의용군에 입대했을 때는 다음날 전선으로 파견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새로운 센투리아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노동조합들이 급조한 노동자 의용군은 아직 일반적인 군대처럼 조직되지 않았다. 서른 명 가량으로 이루어진 지휘 단위는 그냥 〈과〉라고 불렀다. 센투리아는 백 명 가량으로 이루어졌다. 사람만 많으면 무조건 〈대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영 전체는 더럽고 혼란스러웠다. 의용군은 건물을 점령하기만 하면 모두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그것도 혁명의 부산물인가 보다. 구석마다 부서진 가구, 망가진 안장, 놋쇠로 만든 기병대 군모, 기병대가 쓰던 빈 칼집, 썩어가는 음식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음식, 특히 빵은 엄청나게 낭비되었다. 내가 있던 내무반에서도 식사 때마다 빵을 들통으로 하나씩 버렸다. 민간인이 빵이 모자라 난리인 것을 생각하면 면목 없는 일이었다."(14-5)


"병영에서 지낸 지 이틀째 되는 날 〈교육〉이라는 우스운 일이 시작되었다. 신병들은 대부분 바르셀로나 뒷골목 출신의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짜리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혁명적 열정은 가득했지만 전쟁의 의미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 줄을 제대로 세우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규율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열에서 빠져나와 장교와 심하게 말싸움을 벌였다. 우리를 교육한 중위는 몸집은 건장하지만 얼굴은 해맑은 유쾌한 젊은이였다. 정규 육군장교 출신이었다. 절도 있는 몸가짐과 말쑥한 옷차림 때문에 여전히 정규 육군장교로 보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신실하고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모든 군인들 사이에 완전한 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부하들보다도 더 열심히 고집을 부렸다. 무지한 신병이 그를 〈세뇨르〉라고 부르자 그는 무척 당황했다. 〈누가 나를 세뇨르라고 부릅니까? 우리는 모두 동지가 아닙니까?〉 그런 평등 정신 덕분에 그의 일이 더 쉬워졌던 것 같지는 않다."(17)


"이른바 교육이라는 것은 연병장 훈련이었는데, 그나마 가장 어리석고 낡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향우, 좌향좌, 뒤로돌아, 차려 자세로 3열 종대 행진 등, 내가 열다섯 살 때 배웠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이었다. 게릴라군이 받는 훈련치고는 의외였다고 할 수 있다. 병사를 훈련시킬 기간이 며칠밖에 없다면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숨는 방법, 열린 공간에서 전진하는 방법, 보초를 서고 흉벽을 쌓는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기를 다루는 방법. 그러나 마음만 뜨거운 이 어린 무리는 며칠 후면 전선으로 내던져질 것임에도, 소총을 쏘거나 수류탄의 핀을 뽑는 방법조차 아직 배우지 못했다. 무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의 소총 부족은 심각했다. 전선에 도착하는 부대는 물러나는 부대의 소총을 인계받아야 했다. 레닌 병영 전체를 통틀어 소총이라고는 보초들이 사용하는 것 외에 한 자루도 없었던 것 같다."(18)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하사가 되었다. 나는 보초 열 두 명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처음에는 그랬다. 센투리아는 대부분 흔련받지 못한 십대 소년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의용군에서는 열 한 살, 열두 살짜리 아이들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파시스트 지역에서 피난 온 아이들로, 먹고 사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의용군에 입대한 것이다. 그들은 보통 후방에서 쉬운 일을 맡았다. 그러나 때때로 살금살금 전선까지 오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모두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떤 조그만 녀석 하나가 〈장난으로〉 개인호의 모닥불에 수류탄을 던진 일도 있었다." "밤이 되면 내 소대에 소속된 가엾은 아이들은 발을 붙잡고 참호에서 질질 끌어내야만 잠을 깼다. 그것도 잠시, 등만 돌리면 그 즉시 자기 위치를 이탈하여 잠잘 곳을 찾아 들어갔다. 그 아이들은 몹시 추울 때도 참호 벽에 기대어 그대로 잠들곤 했다. 적군들이 모험심이 강하지 않기 망정이었다."(39-40)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특히 카탈로니아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막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또 유지하지도 않았다. 암만 내키지 않아도, 모두가 조만간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했다." "훗날 나는 바르셀로나 폭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기관총 사격을 피해 다녔고, 마침내 경찰이 뒤쫓아오는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스페인을 빠져나왔다.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이런 식으로 일어난 것은 내가 P.S.U.C.(통일사회당)이 아니라 P.O.U.M.(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서 복무했기 때문이다. 그 두 종류의 머리글자 사이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66-8)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 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일은 후방의 기자들이 담당했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팸플릿을 쓰고 신문에서 우리를 헐뜯는 사람들은 모두 안전한 집에, 혹은 기껏해야 발렌시아의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다. 당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된 비방은 물론이고 모든 일반적인 전쟁 선전 활동, 즉 탁자를 치며 열변을 토하거나, 과장된 영웅담을 늘어놓거나, 적을 헐뜯는 일들 역시 보통 모두 싸우지 않는 사람들, 많은 경우 싸우느니 차라리 백 킬로미터 가량 먼저 달아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전쟁의 우울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좌익 언론도 우익 언론만큼이나 똑같이 거짓되고 부정직하다는 것을 내개 가르쳐주었다는 점이다."(88-9)


"전쟁 중에 몇 달 간격으로 바르셀로나에 가본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서 일어난 특별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이상하게도 8월에 갔다가 1월에 다시 가본 사람이 하는 이야기와 나처럼 12월에 갔다가 4월에 다시 가본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똑같았다. 혁명적 분위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거리의 피가 아직 다 마르지 않고, 의용군이 고급 호텔에서 주둔하고 있던 8월에 그곳에 가본 사람들에게는 12월의 바르셀로나가 부르주아적인 분위기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갓 건너온 나에게는 그때의 바르셀로나도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노동자들의 도시를 닮았다. 그러나 이제 물결은 뒤로 밀려났다. 그 곳은 다시 평범한 도시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약간 뜯기고 부서졌지만, 노동 계급의 지배를 보여주는 외적인 표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 즉 민간인들은 전쟁에 관심을 잃었다. 또한 빈부 상하의 계급 구분이라는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145-7)


"도시의 표면적인 모습 속에, 사치와 점증하는 가난 속에, 꽃가게가 늘어서고 색색깔의 깃발이 나부끼며 선전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다니는 활달할 거리의 분위기 속에 정치적 경쟁과 증오라는 무시무시한 감정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었다.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뭔가를 예감한 듯 입을 모아 말했다. 「머지않아 일이 터질 거야」 그 위험은 아주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혁명이 진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혁명이 더 진전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의 반목이었다." "한편 개인이 소지한 모든 무기는 반납하라는 포고가 발표되었다. 당연히 이 명령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 기간 내내 카탈로니아 전역에서 소규모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신문 검열 때문에 그런 사건은 늘 모호하고 모순된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곳곳에서 무장한 경찰대가 무정부주의자들의 요새를 공격했다."(155-6)


"발렌시아 정부는 바르셀로나 전투를 통해 오랫동안 찾던 구실을 얻었다. 카탈로니아를 좀더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구실이었다. 정부는 노동자 의용군들을 해산시켜 인민군에 재배치할 계획이었다." "전국노동자연맹의 요새에서 대규모의 무기가 몰수되었다. 물론 몰수되지 않은 무기들도 많았을 것이다. 《라 바탈랴》는 계속 발간되었다. 그러나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1면이 거의 백지로 나오곤 했다. 통일사회당 신문들은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노동자당의 활동 금지를 요구하는 선동적 기사를 내보냈다. 그들은 통일노동자당을 위장한 파시스트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통일사회당 선동 분자들은 통일노동자당이 망치와 낫이 그려진 가면을 벗자 나치의 하켄크로이츠가 찍힌 무시무시하고 광적인 얼굴이 나타나는 만화를 시내 전역에 배포했다. 바르셀로나 전투에 대한 공식적 해석이 내려진 게 분명했다. 통일노동자당의 공작을 통해 파시스트 〈제5열〉이 봉기한 것이라고 이야기될 것이 뻔했다."(187-8)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비난은 결국 이런 뜻이 된다.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수만 명의 사람들, 외국에서 그들에게 공감하여 그들을 도우러 온 많은 사람들─그 대부분은 파시스트 국가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그리고 수천 명의 의용군이 모두 파시스트에게 매수된 엄청난 규모의 첩자 집단이다. 이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또한 전쟁 동안에도 친파시스트적인 활동의 기미는 없었다. 통일노동자당이 정말로 파시스트 단체라면 그 의용군이 왜 충성을 유지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1936-37년의 겨울 동안 견디기 힘든 조건에서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 속하는 8천 내지 만 명의 병사들은 전선의 주요 부분을 담당했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한번에 너댓 달씩 참호에 있었다. 그들이 왜 그냥 전선에서 빠져나오거나 적에게 넘어가지 않았는지 알기 힘든 일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그런 행동은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싸웠다."(221-3)


"내 역할에 무력함을 느꼈던 이 전쟁은 나에게 대체로 나쁜 기억만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이 없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런 참사─어떻게 끝이 나건 스페인 전쟁은 살육과 신체적 고통은 별도로 하고라도 경악할 만한 참사였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를 잠깐 보았다고 해서 꼭 환멸과 냉소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내가 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오도하지 않기 바란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진실하지도 않고 또 진실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힘들며, 모두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당파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된다. 나의 당파적 태도, 사실에 대한 오류, 사건들의 한 귀퉁이만 보았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왜곡을 조심하라. 또한 스페인 전쟁의 이 시기를 다룬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똑같이 조심하라."(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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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말


"지금까지 스페인 내전은 자주 좌파와 우파의 충돌로 묘사돼 왔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좌우의 충돌 말고도 이 전쟁에서는 두 개의 갈등 축이 더 나타나는데, 하나는 국가의 중앙집권과 지역적 독립 간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와 개인의 자유 간의 갈등이다. 우파 국민 진영은 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결속력이 강한 세 가지 극단적 경향이 한데 결합했기 때문에 공화 진영에 비해 훨씬 통일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우익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으며, 권위주의적이었다. 반면에 공화 정부는 공존이 불가능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중앙집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자들이 지역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어지럽게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 시기의 열정과 증오는 건강하고 안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비군사적 환경과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시민권과도 거리가 먼 그야말로 '다른 세계'였다."(12-3)


# 국민 진영(nationalists) : 공화 정부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내전의 계기를 제공한 우파 연합 세력


제1부 제2공화정의 탄생


"세 가지 서로 다른 이 갈등─좌우 대립, 중앙과 지방의 대립, 권위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의 기원은 과거 무어인들에게서 빼앗긴 스페인 땅을 되찾으려는 재정복 운동이 만들어낸 스페인의 사회 구조와, 그 운동이 카스티야 정복자들의 태도를 형성해낸 방식까지 거슬러올라간다. 8세기에 서고트족 군벌들이 무어인들과 간헐적으로 벌이기 시작한 전쟁은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두 공동왕이 위풍당당하게 그라나다에 입성하면서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스페인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수백 년 동안 끌어온 십자군 운동의 정점이자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었다. 그런 생각은 1936년 (쿠데타를 주도한) 국민 진영 연합 세력에게도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가톨릭 공동왕 시대의 영광을 찬미하고, 자신들의 싸움이 제2의 재정복 운동이라고 말했으며, 자유주의자들, '적색분자들', 분리주의자들에게는 현대판 이교도(이슬람교도 무어인)의 역할을 부여했다."(26-7)


"1873년 2월, 국민투표를 거쳐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여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카를로스파 주력 부대는 바스크 지역의 완고한 가톨릭 신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무엇보다도 마드리드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분리주의적 야심에 자극받고 있었다." "장군들은 군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스페인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그런 생각은 아메리카 제국의 마지막 거점을 상실하고 나서 더욱 강해졌다. 장군들은 카스티야 중심의 중앙집권주의자들이었는데, 피레네 산맥 국경 지역에 자리 잡은 바스크와 카탈루냐가 독립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들은 연방제에도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자치적 주정부를 선언하자 주저하지 않고, 카를로스파와 바스크인들 못지않게 중앙집권적 통치에 반대하는 이 움직임을 박살내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제1공화국은 불과 몇 달 만에 붕괴되었다."(35-6)


# 아메리카 제국의 마지막 거점 : 미국과의 전쟁(1898)에서 패배하면서 상실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지방에서는 때로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서로 악의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수도에서 활동하는 그들의 지도자들은 사실상 신사협정을 맺고 있었다. 국민들에게 지지는 받지 못하지만 강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이 생길 때마다 보수주의자들이 그것을 실행하고 나서 물러나면 이제 그들과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된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해 집권했다. 부패를 고발하는 신망 높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가 설령 귀족이더라도 반역자로 몰리고 기피 인물로 낙인 찍혔다. 군대·왕정·교회의 삼위일체는 과거에는 제국을 만들어낸 주역이었지만 이제는 제국을 무너뜨리는 주역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항해서 부상(浮上)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지만 그것은 19세기 초의 자유주의와는 달리 지배 구조에 흡수되지 못했다. 결코 양립할 수 없었던 '영원한 스페인'과 새로이 떠오른 정치 운동은 충돌로 발전했고, 그것이 후에 국가를 갈가리 찢어놓는다."(37)


"일찍이 1830년대에 스페인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첫 시도가 있었고, 19세기 중엽이면 비정치적인 소규모 조합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후 새로운 정치 이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에 뿌리를 내렸다. 아나키즘적 혹은 절대자유주의적 사회주의가 먼저 들어왔는데, 이 이념과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불화는 훗날 스페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초기에 아나키즘이 스페인 노동계급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나키즘은 자유롭게 연합하는 공동체들의 협력 구조를 주장했는데, 이것이 스페인 노동자들의 뿌리 깊은 상호부조 전통과 맞아떨어졌다. 또한 아나키즘이 내세우는 연방주의적 조직은 중앙집권적 경향에 적대적이었던 노동자들에게 호소력이 컸다. 많은 관찰자들은 아나키즘이 안달루시아 지방의 무토지 농민들에게 불어넣은 순진한 낙관주의를 지적하기도 했다."(41-2)


"19세기 마지막 4반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자들, 즉 '권위주의자들'은 더디게 성장했다. 1871년 말에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파리코뮌이 붕괴된 후 스페인에 입국했고, 그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마드리드에 스페인 사회주의의 토대가 구축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그들이 중앙집권적 국가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농촌 특성이 강했던 스페인 사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세력 확장이 더뎠던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마르크스가 농민들은 물론, 그 자신이 '농민적 삶의 어리석음'이라고 한 것에 경멸적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 자체의 산물인 산업 프롤레타리아만이 타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산업의 주요 부문은 이미 아나키즘의 아성이 되어버린 카탈루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국 카스티야 사회주의자들은 산업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빌바오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43-4)


# 빌바오 : 바스크 지역의 대표적 산업 도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수출 붐이 수그러들자 노동자들은 점점 호전적으로 변해 갔다. 또한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은 좌파 세력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유럽의 양쪽 끝(러시아와 스페인)이 혁명이 불길에 휩싸일 것이라는 얘기들이 오갔다.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안달루시아에서는 폭동이, 바르셀로나에서는 대규모 노동쟁의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 시기는 '볼셰비즘의 3년'으로 알려졌다." "전국노동연합이 과격해지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이끌던 노동자총동맹의 온건 노선과 자주 충돌했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노동계급에 대한 반역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개량주의자 정도로 여겼다." "한편 농촌에서는 안달루시아 지역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결국은 실패로 끝날 불운한 농민 폭동을 이어 갔다." "마드리드의 정치가들조차 모종의 토지 개혁 프로그램이 시급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문제와 진지하게 씨름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한 정부가 거의 없었다."(49-50)


"1931년 4월 14일 아침 6시에 에이바르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이 소식은 즉각 스페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로마노네스 백작은 공화주의자들을 이끌던 알칼라 사모라와 회동했는데, 사모라는 왕과 그의 가족이 그날 오후에 스페인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왕은 군대가 지켜줄 것이라는 한 장관의 조언을 거부하고, 배를 타기 위해 마드리드를 출발해 카르타헤나 항으로 갔다. 왕의 출발은 아무런 소동도 일으키지 않았다. 미겔 마우라는 〈왕정은 그것이 붕괴되기 오래 전에 이미 스페인 사람들의 마음에서 증발해버리고 없었다〉라고 썼다. 같은 날, 코르도바 출신의 가톨릭 신자이자 지주였던 알칼라 사모라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위원회가 공화국 임시정부로 전환되었다. 이어 알칼라 사모라가 국가 수반이자 총리로 취임했다. 공화국 지도자들은 농업 개혁, 비타협적인 군부 문제,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자치, 그리고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 스페인 사회의 뿌리 깊은 난제들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58-9)


"1934년 10월에 발생한 아스투리아스 혁명은 좌파의 지각 있는 사람들마저도 엄청난 재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급진 투사들, 특히 라르고 카바예로 같은 사람에게 반란은 마치 마약에 취한 것과 같은 혁명의 열정을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반면에 우파에게 반란은 칼보 소텔로가 주장한 것처럼 오직 국가의 중추인 군대만이 혁명적 상황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보루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반란은 국가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스페인 민주주의에 치명타였다. 보수 세력에게 이 반란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창출하려는 또 다른 시도를 막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신념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라르고 카바예로는 〈나는 계급 투쟁 없는 공화국을 원한다. 그러나 그러려면 한 계급이 사라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아스투리아스로 인해 보수 세력은 이제 러시아 혁명 이후의 대공포와 부르주아를 절멸하겠다는 레닌의 결심을 굳이 상기할 필요가 없었다."(77-8)


# 아스투리아스 혁명 : 1934년 10월,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무장 노동자들이 코뮌을 설립했지만 불과 2주 만에 치안유지군에게 진압되어 1천 명 가량이 희생되고 수천 명이 해고 및 구속된 사건


"1936년 1월 7일에 선거 일정이 공표되었고, 선거 운동은 곧바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전에 치렀던 선거 결과를 보면 정치적으로 연합한 쪽이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이렇게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연합체를 구성하도록 자극하는 분위기는 중간 지대를 공동화하고 사람들을 좌우로 양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좌파의 혁명적 폭동과 군대와 치안대의 잔인한 진압은 타협의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했다. 감정의 골이 너무나 깊어서 민주주의가 숨쉴 만한 여지가 없었다. 양쪽 모두 종말론적 언어로 상대편을 공격했고, 지지자들의 기대를 정치적 결과가 아니라 폭력적 결과 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만일 이번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하면 우리는 곧장 내전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뒤질새라 우파도 비슷한 태도로 맞섰다. 우파는 선거에서 좌파가 승리하면 폭력 혁명과,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미 약속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81-2)


"각 주 선거위원회에서 2월 20일 선거 결과를 발표했는데, 인민전선이 15만 표 차이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민전선은 총 투표의 2퍼센트도 안 되는 근소한 차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에서는 절대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좌파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들이 혁명적 변화를 이끌 압도적인 통치 위임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우파는 군중들이 사면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갇혀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러 감옥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휩싸였는데,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총참모부 부장 프랑코 장군은 치안대 사령관 포사스 장군에게 밀사를 보내 스페인의 질서와 복지 수호를 위해 단행하려는 결정에 동참해 달라고 권유했다. 프랑코는 또한 포르텔라 바야다레스에게도 사람을 보내 인민전선에 권력을 넘겨주지 말라고 설득하면서 군대의 지지를 약속했다. 그는 치안대와 돌격대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87-8)


"우파 중에서 격렬한 분란을 일으킴으로써 쿠데타가 일어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단체는 팔랑헤당이었다. 팔랑헤당은 1936년 봄, 국민행동 청년당원 1만 5천 명이 합류하면서 당원 수가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팔랑헤주의는 매우 보수적인 성격이었다는 점에서 나치즘이나 파시즘과 달랐다. 무솔리니는 단지 선전 효과를 노리고 연설할 때 로마의 상징과 제국의 형상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팔랑헤당은 근대적이고 혁명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근본은 반동적이었다. 그들에게 교회는 스페인다움(Hispanidad)의 핵심이었다. 새로운 국가는 '전통적 가톨릭의 정신에서 영감을 끌어낼' 것이라고 했다. 팔랑헤당의 상징은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상징물인 권위주의 국가의 멍에와, 이단을 쓸어버리기 위한 절멸의 화살이었다. 그들은 상징물만 차용한 것이 아니라 카스티야식 정신도 부활시키려고 했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팔랑헤 전사는 '반은 수도승, 반은 병사'인 사람이었다."(91-2)


제2부 두 스페인의 전쟁


"마드리드의 공화 정부는 7월 17일 저녁에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발생한) 반란 사실을 알았다. 다음날 아침 정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이번 사태가 보호령의 일부 지역에 국한한 것임을 밝혀 둔다. 그외 본토에서는 어떤 지역도, 결단코 어떤 지역도, 이 터무니없는 모험에 가담하지 않았다.〉 7월 18일 오후 3시 카사레스 키로가는 정부를 지원하겠다는 전국노동연합과 노동자총동맹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모두에게 평소와 다름 없이 행동하고 '국가의 군사력을 신뢰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이 공화 정부 편에 서서 안달루시아 중부 지역을 안전하게 확보하고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케이포 데 야노는 이미 그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카사레스 키로가는 〈정부의 신속한 예방 조치로 반란은 이미 소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누구라도 내 승인 없이 무기를 내주는 자는 총살에 처할 것이다〉라며 다시 한 번 노동자들의 무장을 거부했다."(119-20)


# 7월 19일, 노동자 조직에게 무기 배포 시작


"해군은 군사 반란 계획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해군 소속 선박들은 아프리카 주둔 육군을 이베리아 반도 본토로 이송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다. 병력 수송은 카나리아 제도 인근에서 함대 기동 훈련을 수행할 때 이미 프랑코 장군과 해군 고위 장교들이 합의한 일이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곧바로 전함들이 전속력으로 스페인령 모로코로 달려오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파죽지세 같은 점령 계획은 성급한 판단으로 드러났다. 육군 장교들보다 더 귀족적이었던 해군 장교들은 압도적 다수가 반란을 지지했지만, 해군 병사들은 7월 13일 엘페롤에서 비밀 회합을 열고 만일 장교들이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이미 태도를 정리해 두었다." "마드리드의 전신 기사 벤하민 발보아는 해군부의 명령을 받고 즉각 승선 중인 모든 무전병들과 연락하여 사태의 추이를 잘 지켜보고 '파시스트 깡패 집단인 장교들의 행동'을 잘 감시하라고 지시했다."(143-4)


"영국 해군 장교들은 지브롤터에서 사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하급 수병들이 한 행동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영국 해군 장교들이 마음속으로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그 점은 여러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당장은 대부분의 전함들에서 반란 세력이 제압되자 반란 가담자 다수는 아프리카 군대가 본토로 건너올 수 없으므로 자신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몰라 장군도 계획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달리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위기가 국민 진영의 재난으로 끝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병력을 공중 수송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병력의 공수(空輸)는 얼마 되지 않은 스페인 공군의 브레게트기, 니에우포르트기, 이탈리아의 사보이아기들이 반란 시작과 함께 거의 즉각적으로 시작했지만 히틀러가 보낸 융커52기들이 도착하고 나서부터 본격화됐다."(146-7)


"8월 초에 이르자 각각의 진영이 분명해지고 전선이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했다. 반란 세력은 서쪽 갈리시아와 레온에서부터 동쪽 나바라와 북부 아라곤까지 좌우로 넓게 퍼져 있는 띠 모양의 땅을 차지했다. 이 띠 모양의 지역이 반란 세력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던 아스투리아스, 산탄데르, 바스크 등의 북부 해안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남쪽과 서쪽에서는 반란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 안달루시아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이때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페인이 폭력적 형태로 권력을 다투는 쿠데타가 아니라 진짜 내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공화 정부 측이 초기에 즉각적으로 쿠데타를 제압하는 데 실패한 것은 이제 그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싸움, 즉 이기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자질이 필요한 그런 싸움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무렵 국민 진영은 병영 국가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공화 진영에서는 혁명 과정이 시작되었다."(156-7)


"지역적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공화 진영을 통틀어 최악의 폭력이 자행된 것은 개전 초기 처음 며칠 동안이었다." "공화 진영이 지배한 지역에서 발생한 폭력의 주요 특징은 반란 초기 며칠 동안 폭력 행위에 거의 아무런 통제가 없었다는 점, 살인 행위가 집중적이고 신속했다는 점, 좌파나 공화 정부 지도부가 폭력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9월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자·공화주의자·공산주의자로 구성된 라르고 카바예로의 '통합 정부'가 법과 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인민 법정을 설치했는데, 그것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개선책이었다. 그리고 시위원회를 구성하여 순찰대를 대체하고 순찰대원들은 전선으로 보냈다. 이런 조치로 약탈과 살인 건수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내전 기간 동안 공화 정부 지역에서 적색 테러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3만 8천여 명에 달했고, 그 가운데 약 절반이 마드리드(8815명)와 카탈루냐(8352명)에서 1936년 여름과 가을에 발생했다."(168-70)


"'백색' 스페인에서 나타난 살인 양상은 '적색' 스페인에서 나타난 것과 상당히 달랐다. 반란 세력의 전략 핵심은 '정화(limpieza)' 개념이었는데, 그 과정은 어떤 한 지역이 그들의 지배에 들어가자마자 시작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의 장소는 바다호스였다. 국민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야구에 중령의 군대가 저지른 대학살과 뒤이은 탄압은 전쟁 초기에 양측이 앞다투어 선전전에 이용했다. 국민 진영은 전투에서 입은 인명 손실과 그에 앞서 좌파가 살해한 우파 인사의 수를 크게 부풀려 발표했다. 그러나 사실 야구에 측의 인명 피해는 사망자 44명, 부상자 141명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국민군 측이 좌파에게 살해되었다고 주장한 인원은 243명을 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바다호스 주에서 국민군이 살해한 사람은 적게는 6천 명, 많게는 1만 2천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군 부대들은 마드리드로 진격하면서 같은 방식으로 마을들을 장악하고 초토화했다."(171-7)


"장군들의 반란은 공화국 붕괴의 주요 원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위기에 직면한 중앙 정부의 지리멸렬한 대응을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중도 좌파 정부는 한편으로는 우파의 반란에 맞서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의 혁명에 대처해야 했으므로 그러한 마비 상태는 아마도 불가피했을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각자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의 사회적 공존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각각의 정치 철학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것은 다른 정치 집단들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협력하자는 의미였다.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극히 단순한 견해였다. 노동자 관리 혹은 자율 경영의 개념은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저주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두 집단은 후에 아나키스트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처음에는 아나키스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원칙 가운데 많은 것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나중에는 권력의 자리에서 그들을 쫓아냄으로써 거둔 승리였다."(195-202)


"제대로 편제를 갖춘 정규 군대가 거의 없었던 공화 진영에서 장군들의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노동자 의용군이었다. 그런데도 아나키스트, 통합노동자당, 라르고 카바예로를 포함한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의용군을 필수 요소로 보기보다는 단지 부가적 장점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마드리드 공화 정부, 정규군 장교들, 중앙집권적 정치가들, 공산주의자들은 국민 진영의 공세를 막아낼 유일한 방법으로 전통적 군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는 자신들이 중앙집권적 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규율, 위계, 조직화'를 주장했다.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군대화' 계획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주장은 '반(反)혁명적'일 뿐더러 정부가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해 통제권을 회복하려고 내놓은 술책으로 보았다. 아나키스트들은 더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에게 정규 군대는 국가의 최악의 측면이었다."(231-2)


제3부 내전의 국제화


"반란 세력의 쿠데타가 실패하고 정부와 노동조합들이 반란을 신속히 제압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스페인은 피비린내 나는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오랜 싸움에서 무기의 필요성은 양측 모두를 외국에서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였다. 이것이 스페인 내전이 국제전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첫 번째 중요한 행보였다. 중립을 선언한 가장 중요한 세 나라 가운데 영국의 역할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고립주의를 견지해 왔던 미국은 국제 문제에 개입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스페인의 분쟁이 더 넓은 범위로 확산될까 우려한 영국 외무부는 프랑스 정부에게는 프랑스가 스페인 공화 정부를 돕는 것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국민군을 돕도록 자극할 뿐이라고 경고했다."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외국군의 간섭이 없다면 프랑코 측과 공화 진영, 양쪽의 군사력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므로 어느 쪽도 쉽게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했다."(243-6)


"유화 정책이 네빌 체임벌린의 발명품은 아니었다. 유화 정책의 뿌리는 볼셰비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926년의 총파업과 경기 침체는 영국 보수 정치가들에게 혁명의 가능성을 매우 현실적인 걱정거리로 만들어놓았다. 그 결과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분쇄한 독일과 이탈리아 체제에 호오(好惡)가 뒤섞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많은 유권자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로 전쟁을 혐오했으며,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 강요한 굴욕에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공화 정부에 무기 판매를 거부한 것은 사실 공산주의자들의 힘을 강화하고 비공산주의 중도파나 좌파의 힘을 약화했을 뿐이다. 1936년 여름에 에스파냐 공산당이 공화주의 연합 세력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도록 해준 것은 무엇보다도 소련의 군사적 도움이라는 효과적인 수단과 권위였다."(247-50)


"무솔리니는 지중해에 파시스트 국가가 하나 더 들어서기를 기대했고, 더구나 자신에게 빚을 진 국가가 들어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의 야심은 영국에 맞먹는 해군력을 보유하고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를 능가하는 힘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동맹국' 스페인은 지브롤터를 장악하여 해협을 통제하고, 발레아레스 제도에 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전략적으로 프랑코를 지원했다. 스페인에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 프랑스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고, 또한 수에즈 운하로 가는 영국의 해상 루트에도 중대한 위협이 될 터였다. 또한 대서양 해안에 U보트 기지를 건설할 수도 있다는 즐거운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스페인 내전은 히틀러의 대 중유럽 전략이 유럽 각국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해주고, 반면에 독일의 인적 자원을 훈련하고 장비와 전술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251-5)


"1920년대 이래로 스페인에서 소련은 대개는 문화적 선전의 형태로 꾸준히 세를 넓히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스페인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서 했던 일과 마찬가지로 침투해서 때를 기다리는 것, 그 이상은 하지 않고 있었다. 1936년 7월 18일 쿠데타 소식을 듣고 나서 코민테른은 주요 대리인들, 그중에서도 1932년 이후 에스파냐 공산당의 감독관으로 활동해 오던 아르헨티나인 비토리오 코도비야로부터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한편 소련 당국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할지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9월에 이르러서야 소비에트 체제는 스페인 내전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을 뿐더러 국내와 국제적 지지 모두를 얻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모스크바의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스페인 공화 정부를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한편으로 코민테른은 국제적 캠페인을 시작했다. 소련 시민들은 공화 진영 스페인에서 펼칠 인도주의 활동을 위해 2억 7400만 루블(약 225억 원)을 모금했다."(276-7)


제4부 대리인들의 세계 대전


"역사는 결코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1936년 12월에 일련의 전투가,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유형의 전투들이 마드리드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과 같은 방식의 구식 전투에서 공화 진영 의용군이 패한 것은 1937년 2월 단기전으로 치렀던 말라가 전투가 마지막이었다. 총통 프랑코는 상상력이 빈곤한 전략에 발목이 잡혔다. 독일 외교관들이 냉소적으로 '투우 경기'라고 부른 것이 10월에 불러일으킨 엄청난 기대와, 11월 마드리드 점령 실패로 프랑코는 집착과도 같은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공화군 지원군이 도착하자 전선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양측 모두 힘이 고갈된 상태였고, 1월 중순 양측 군대 모두 방어 진지에 꼼짝없이 들어앉은 상태가 되면서 전투가 중단되었다. 국민군은 엘에스코리알도로(라코루냐 가는 길)를 따라 마드리드 코앞(아라바카)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그러나 공화군은 서부 전선에서 국민군의 마드리드 포위를 이겨내는 데 성공했다."(339-44)


"만약 공화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예정되었던 전투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말라가 전투였다. 공화군 점령지의 지형적 특성과 길게 늘어진 형태 때문에 국민군은 언제 어디서든 원하기만 하면 적진(敵陣)을 차단할 수 있었다. 당시 말라가는 전쟁이라는 현실과 단절된 채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방어 태세가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공화군 병력은 의용군 1만 2천 명에 불과했고, 3분의 1이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총을 가진 병사들도 대부분 실탄이 몇 발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무엇보다도 공화 정부의 고의적인 태만 때문이었는데, 공화 정부는 이 지역의 변함없는 독립 의지를 극도로 싫어했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말라가에는 탄약 한 발도 주지 마라〉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공화군 사령관 비얄바 대령이 의도적으로 도시 방어를 방해했다고 믿을 만한 강력한 근거가 있는데, 공화군이 전쟁에서 패한 뒤에 비얄바는 국민군에게 예외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357-8)


"의용군 부대를 인민군으로 전환하는 일은 '군대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나키스트, 통합노동자당, 좌파 사회주의자 등은 원칙의 토대 위에서 의용군 체제를 고수하려 했고, 의용군 체제로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또한 상황이 전혀 다른데도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 스페인의 경우를 억지로 비교하려고 했다. '전쟁 기계'는 오직 더 나은 전쟁 기계나 비정규전의 사보타주 전술로만 격퇴할 수 있는데 의용군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즉흥적 속성은 혁명 상황이라면 모를까 군사적 덕목은 아니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잘 조직된 적에 대항하는 군대로서도 그들은 시대에 많이 뒤떨어졌다." "아나키스트들과 통합노동자당은 비록 전통적 전쟁에서 '통일된 지휘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지만 공산주의자들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367-8)


"이탈리아인들은 북부 지역에서 바스크의 가톨릭 교도들을 공격하는 것이 교황을 자극하지나 않을까 걱정했고 바스크의 주도인 빌바오를 폭격하는 데 머뭇거렸다. 추정컨대 아마도 이에 따른 리히트호펜의 좌절감이 콘도르 군단의 작전을 통틀어 가장 악명 높았던 게르니카 폭격을 실행하는 데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4월 25일 하루 동안 많은 피난민들이 지친 모습으로 마르키나를 떠나 게르니카로 들어왔다. 당시 게르니카는 전선에서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4월 26일, 부르고스에서 출발한 3개 비행대대가 두 시간 반에 걸쳐서 20분 간격으로 게르니카 시에 매우 체계적으로 융단 폭격을 가했다." "콘도르 군단의 4월 27일 치 전투 일지는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리히트호펜이 말했듯이 도로 봉쇄가 공습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외 나머지 모든 요소는 공습의 주요 목적이 공중 폭격의 효과를 실험해보려는 것이었음을 말해준다."(411-5)


"바스크에서 국민군이 비교적 신속하게 승리를 거둔 데는 무엇보다도 콘도르 군단의 기여가 컸다. 나치 정부는 지체 없이 국민 진영에 그 대가를 청구했다. 독일 기술자들은 (독일 공군이 치른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이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공장과 제강소로 달려가 시설물을 접수했다. 그에 비해 프랑코는 비록 북쪽 바스크 지역을 함락시킴으로써 결국에는 북쪽에 주둔 중인 군대가 중부와 남부로 이동할 수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익을 보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했다. 만일 유럽 내부의 갈등이 먼저 폭발하지만 않는다면, 바스크 점령은 공군과 포병 지원에서 점증하는 우위와 함께 프랑코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안겨줄 중요한 승리였다. 이제 프랑코에게 전쟁은 계속적인 공격에 다름 아닌 것이 되었고, 적군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는 일만 남았다. 프랑코는 바스크 지역 전투를 통해 자신의 동맹군들이 적의 동맹군들보다 훨씬 우수한 타격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했다."(423)


"국민 진영은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정서에 호소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최대한 이용했다." "국민 진영은 자신들이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맞서 기독교, 질서, 서구 문명의 대의를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공화 정부를 열정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은 좌파가 부르주아를 절멸하려고 했던 위협과 1936년 봄에 전개된 혁명 직전의 상황이 우파로 하여금 자위적 차원에서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러시아 내전이 불러일으킨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이어 출현한 억압적인 소련 체제는 우파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되었다." "양측 모두 역사관이 매우 선택적이고 조직적이었다. 후에 공화 진영 지지자들은 스페인 내전이 제2차 세계대전의 출발점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프랑코주의자들은 스페인 내전이 서구 문명과 공산주의가 벌이는 세 번째 세계 전쟁의 서막이었으며 자신들이 나치와 파시스트들로부터 받은 도움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425-7)


제5부 내전 속 내전


"국민군 내에서 가장 중요한 부대인 아프리카 군대 사령관이었던 프랑코는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권력의 정점을 향해 오를 수 있었다. 그에게 도전할 만한 경쟁자는 없었으며 국민 운동의 성격 자체가 단일하고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요구했다. 그 결과 프랑코는 시의적절한 두 번의 단계(1936년 9월과 1937년 4월)를 통해 최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는 첫 번째 단계에서는 법률상의 지도자가 되었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모든 잠재적 반대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사실상 독재자가 되었다. 팔랑헤당, 카를로스파, 전임 알폰소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인 '에스파냐혁신', 자치우익연합의 '국민행동' 같은 우파 집단들이 프랑코의 명령으로 하나의 당으로 통합되고, 그 당은 프랑코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강제 합병에서 카를로스파는 가장 큰 패배자였다. 이제 프랑코는 장기간의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향후 스페인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구축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454-6)


"권력 투쟁은 1936년 겨울과 1937년 봄 기간 동안 공화 정부 진영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투쟁의 승자인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프랑코에게 맞먹는 권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매우 제한된 기반에서 출발한 데다가 권력을 집중화하려는 그들의 정책은 공화 진영 내 주요 동맹 세력이었던 아나키스트들의 완강한 저항에 맞닥뜨렸다. 동시에 발렌시아 정부는 독립적 성격을 띤 지역, 특히 카탈루냐와 아라곤 지역에서 확실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탈린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외교 정책에 장애가 되는 것을 회피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특히 스탈린에게는 한편으로는 나치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영국, 프랑스와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스탈린은 〈스페인의 적들이 스페인 공화 정부를 '공산주의 공화국'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회 공화국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56-7)


"공화 정부의 통치 시스템은 차츰 네그린과 공산주의자들이 후에 '통제된 민주주의'라고 부른 것으로 변해갔다." "모스크바의 여론 조작용 공개 재판과, 1937년 스페인의 분위기로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통합노동자당에게 뒤집어씌운 파시스트 집단이라는 혐의를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었는지, 또한 통합노동자당 지도자 안드레스 닌과 그의 추종자들이 납치되어 고문을 받고 나서 '실종되었는데' 정부는 왜 스탈린주의자들이 수행한 '더러운 전쟁'을 중단하기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훈련된 기계'는 민중의 지지를 인수하기는 했으나 민중의 에너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지켜야 할 이상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나키스트 이론가 아바드 데 산티얀은 〈네그린이 공산주의자 무리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프랑코가 이탈리아인들과 독일인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우리에게 그 결과는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482-5)


"7월 6일, 공화 정부는 마드리드 서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인 브루네테를 공격했다. 이 작전은 국민군 전선의 취약 지점을 돌파하여 마드리드 외곽까지 뻗쳐 있는 돌출부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루네테 공세는 북부 지역에서 국민군의 압박을 줄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패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민군의 월등한 공군력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브루네테 공세가 전체적으로 볼 때 자신들의 승리라고 세계에 선언했다." "자주 자기편 병사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대한 집착은 국제여단 내부에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제13국제여단 소속 미국인, 영국인, 폴란드인 병사들이 일으킨 소규모 소요들은 모스크바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기록되었다." "병사들은 엄청난 희생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특히 그 죽음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개죽음이 아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분노가 더욱 컸다."(505-7)


"1937년 가을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군이 개선되었다며 대대적인 선전 공세를 펼쳤다. 부대 수준에서 보면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휘관이나 참모 중에 군사적 능력이나 전술적 감각을 입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병참 조직은 여전히 부패하고 비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도 후방에서 벌어지는 사건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의 제 식구 챙기기와 전선에서 퍼붓는 전향 공세는 도가 지나쳐 정규군 장교 중에서 과거에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사람들까지도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프리에토는 공산당원이 아닌 부상병들이 자주 치료를 거부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공산당 입당을 거부한 대대장들에게는 무기나 전투용 식량이 제공되지 않는가 하면 심지어는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의 급료가 거부되기도 했다. 반면 입당 요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진급도 빨리 되고, 공문서나 신문기사 등에서도 그들의 평판이 과장되어 소개되었다."(541)


제6부 파국으로 가는 길


"1937년 말이면 국민군의 군사적 우위가 명백해졌다. 그 무렵 그들이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면 북부 지역 점령은 승리로 가는 과정에서 핵심 중간 단계였다. 북부 지역 점령을 계기로 국민군은 개전 이후 처음으로 병력 수에서 공화군과 균형을 이루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 균형은 국민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뀌었다. 칸타브리아 해안 지역 정복은 그곳에 묶여 있던 병력을 중부 지역으로 내려보낼 수 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국민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업상의 포상도 얻게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스크 지역의 무기 공장, 빌바오 지역의 중공업 지대, 북부 광산 지대의 석탄과 철광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공화군 참모들과 소련 군사 고문들은 정규군의 방어를 계속 유지하면서 적 후방에 비전통적인 게릴라 공격을 시도하여 양동작전을 펼치는 것과, 전선에서는 적의 취약 지점 몇 곳을 동시다발로 급습하는 것만이 공화군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549-50)


"1937년 12월 중순, 공화군의 공세로 시작된 테루엘 전투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참혹한 시가전이 벌어진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국민군 사상자는 4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 4분의 1은 동상이 원인이었다. 공화군 측 손실은 더 심해 약 6만 명의 사상자가 났다. 공중전에서 국민군 전투기들은 자신들이 공화군 전투기들에게 격추당한 것보다 훨씬 많은 공화군 전투기들을 격추했다." "공화군 보병은 테루엘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바로 그 점이 테루엘 작전 전체의 비극성과 무가치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화군은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고 점령할 필요도 없는 이 도시를 점령하려고 했던 것이다. 엄청난 인명과 장비를 희생하면서 말이다. 다시 한 번 선전 목적 때문에 성급한 승리에 발목이 잡혀 있던 공화군 지도자들의 고집이 최정예 부대 대부분을 헛되이 희생시키고 만 것이었다. 생존자들의 참담한 상태, 사기 저하와 체력 고갈은 수 주 안에 또 한 번의 더 큰 재난으로 이어지게 된다."(563)


"테루엘 전투 이후 공화군 병사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으며 장비도 형편없었다. 전선에 새로 투입된 부대들은 경험 없는 신병이 다수를 차지했다. 후퇴는 일시적 철수라기보다는 패주(敗走)라 할 수 있었다." "공화군의 후퇴는 쫓아오는 적이 쉬느라 멈출 때에만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측면 부대의 철수는 공황 상태를 불러일으켰다. 혼란의 와중에서 누구도 인접 부대에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던 것 같다. 휴대 식량과 탄약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 적 전투기들은 시종일관 사냥개처럼 후퇴하는 공화군을 쫓아가면 괴롭혔다. 전투기들은 곡예를 하듯이 급강하하여 공화군에게 수류탄을 떨어뜨리고 기총 소사를 퍼부었다. 전쟁 초기에 의용군들을 파괴했던 고립의 공포가 이제 인민군의 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마침내 4월 15일 국민군이 해안 도시 비나로스를 점령했다. 이로써 카날루냐와 공화 정부가 지배하는 스페인 나머지 지역을 둘로 가르는 회랑 지대가 만들어졌다."(568-71)


"전쟁 피로감이 공화 정부 진영에 퍼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일반인들이 정부 지도자들의 행동에 냉소적 태도를 보이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직접적으로든 국제 사회의 중재를 통해서든 양 진영이 협상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공화 정부가 선전하더라도 궁극적 승리를 보장해주지는 못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종전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절망과 패퇴의 공황 상태를 떠올렸다. 반면에 중간계급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전쟁을 더 계속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르티네스 바리오 같은 사람은 프랑코가 승리하면 자신들이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참혹한 처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38년경에는 특히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또한 오랜 무역 파트너인 프랑스와, 특히 영국이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는 데 분노했다. 그들은 패배주의에 빠져들었으며, 민족주의자들도 혁명적 좌파도 싫어하는 카탈루냐 중도파에 가담했다."(581-2)


"프랑코가 군대 전체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장악하고, 그 자신이 (하느님과 역사에만 책임을 지는) '국민 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 나서, 그는 초기 시대의 기술위원회를 정식 정부로 대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1938년 1월 30일 프랑코는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하여 발표하고 국가 중앙 행정법을 제정했다." "3월 동안 프랑코 장군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 폐지를 포함하여 세라노 수녜르가 들고 온 모든 법령을 승인했다. 법무부와 교육부 장관은 공화 정부에서 제정된 교회와 교육 관련 법령을 모두 파기하는 일에 착수했다. 각급 학교 지배권은 다시 교회 지도부로 넘어갔고, 교실에는 십자가를 내걸게 했다." "4월 5일에는 카탈루냐 법령이 폐지되었다. 4월 22일에는 모든 간행물이 프랑코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규정한 출판법이 제정되었다." "5월 21일에는 카스티야어가 스페인의 유일한 공식 언어로 선언되어 공식석상에서 바스크어와 카탈루냐어를 더는 쓸 수 없게 되었다."(593-6)


"네그린은 평화 협상 제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차례 위대하고 영웅적인 행동을 통해 국제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성공한다면 공화 정부는 더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에 임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군사적 명분은 바다로 통하는 국민군 회랑 지역을 재탈환함으로써 분리된 두 공화군 지역을 다시 연결하겠다는 공허한 구상이었다." "7월 25일에 시작된 에브로 강 전투 작전은 처음부터 중대한 결점을 안고 시작되었으며, 일단 초기 기습의 이점이 소진되고 나자 공산당 야전 지휘관들은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그들은 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무 목적도 없이 병사들의 목숨만 희생시키는 예의 관행으로 돌아갔다. 처음 한 주 동안에만 공화군에서 엄청난 인명 손실이 났는데, 폭격과 기총 소사에 당한 데다가 이질과 발진티푸스까지 덮쳤다."(608-14)


"다시 한 번 공화군의 대공세는 주요 목표물을 향해 달려가는 대신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적의 진지들을 제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그에 이은 마무리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그 같은 상황에서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아무런 정당성도 없었으며, 특히 공화군이 당시 매우 허약한 상태에다 원래 공세 목적을 달성할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공화 정부 지도부는 훗날을 기약하며 최정예 부대를 질서정연하게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는 쪽을 택했다. 모든 것은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 네그린의 판단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정치적인, 그리고 선전상의 고려가 재난을 자초했던 것이다." "11월 16일, 전투가 시작된 지 113일 만에 종결된 에브로 강 전투에서 공화군은 참혹한 인명 손실은 물론 카탈루냐 방어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무기를 잃고 말았다."(616-22)


"1938년 4월에 체결된 영국-이탈리아 조약은 이탈리아의 전쟁 개입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어떻게든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노력하던 공화 정부의 희망에는 치명타였다. 9월에 체결된 뮌헨 협정은 더 심각한 타격이었다. 유화 정책의 정점이랄 수 있는 이 조치는 스페인에 대한 영국의 기존 정책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의미했을 뿐 아니라, 스탈린이 소련의 이익은 히틀러와 화해하는 것이라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의 공화 정부 지원은 이제 난처한 일이 되기 시작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를 지켜본 스탈린은 마침내 히틀러에 대항하는 동맹 세력으로서 영국과 프랑스를 믿을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자신의 약점을 독일과 동맹을 맺어 보완해야 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화 정부의 운명을 온전히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과 연계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공화 정부의 생존 가능성은 적어도 뮌헨 협정을 체결하기 한 달 전인 에브로 강 전투에서 이미 파괴되기 시작했다."(628-32)


# 뮌헨 협정 : 1938년 9월 30일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체결한 협정. 이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서쪽의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합병되었다.


"바티칸에서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만이라도 휴전하라고 호소했지만 국민군은 12월 23일에 카탈루냐 공격을 시작했다." "1939년 1월 3일, 발라게르 지역에서 출발한 국민군은 그 지역 거점도시인 아르테사를 점령했다." "보르하스블랑카스는 1월 5일에 함락되었다." "솔차가 장군의 군대가 1월 6일 비나이샤를 점령했다." "1월 12일, 국민군은 몬트블랑크를 점령했고, 14일에는 발스를 점령했다." "국민군은 2만 3천 명을 포로로 잡고 전사자 5천 명과 부상자 4만 명이라는 손실을 적군에게 안겨주었다. 카탈루냐 전투는 영토의 3분의 1이 점령된 상태에서 이미 승패가 결정났다고 할 수 있다." "1월 22일, 국민군은 페랄레다델사우세호를 되찾았고, 사흘 후에는 푸엔테오베후나를 수복했다." "1월 26일에 선발대, 특히 야구에가 이끄는 모로코인 레굴라르들은 소유자가 우파인지 좌파인지에 상관없이 며칠 동안 도시에 있는 가게나 아파트를 약탈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것이 그들이 거두는 '전쟁세'였다."(647-54)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부르고스에 있는 국민 진영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프랑코를 '서유럽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검'이라고 부른 필리프 페탱 원수가 스페인 주재 프랑스 대사로 부임했다. 파리에서는 호세 펠릭스 데 레케리카가 프랑스 대통령 르브룅에게 신임장을 제출했다. 전쟁부 장관 달라디에는 프랑스에 남아 있는 공화군의 무기와 전쟁물자 전부, 몽드마르상에 보관 중이던 공화 정부가 맡긴 금을 프랑코 정부에게 넘겨주었다. 달라디에는 또한 프랑스 땅에서 공화 진영 사람들이 국민 진영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런던에서 알바 공작은 세인트제임스 궁정에서 스페인 대사로 취임했다. 체임벌린은 정치책임법이 공포된 지 불과 2주 만에 프랑코가 모든 정치적 보복을 포기했다고 말함으로써 영국 하원 의원들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미국 역시 프랑코 정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전에 공화 정부에 파견했던 클로드 바우어스 대사를 소환했다."(669)


# 정치책임법 : 2월 12일에 프랑코가 발표한 법으로서,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공화 진영 사람들에게 내전 기간 동안 벌어진 모든 종류의 파괴와 전복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한 법률


"국민군은 3월 28일 아침 카사데캄포 전선에 머물던 부대를 시작으로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마드리드는 1936년 7월 19일보다 더 극적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인민전선의 슬로건은 국민군 슬로건으로 바뀌었다. 언어 자체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좌익에서 쓰던 '여성 동무' 대신 '아내'를, '건강하세요' 대신 '안녕하세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돌아갔다. 3월 31일 프랑코 군대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프랑코에게 보낸 축하 메시지에서 〈우리의 온 마음을 하느님께 올리면서, 가톨릭 스페인의 승리를 위해 애쓰신 각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치아노는 일기에서 〈마드리드는 함락되었고, 수도와 함께 적색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도 모두 함락되었다. 이는 파시즘의 새롭고 위대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지금껏 거둔 가장 큰 승리일 것이다〉라고 썼다. 런던에서는 프랑코가 승리의 입성을 하고 나서 정확히 3주 후에 불간섭위원회가 해체를 선언했다."(685-6)


제7부 끝나지 않은 전쟁


"새 정부가 추진한 첫 번째 우선 사업은 토지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1936년의 혁명 기간 동안에 몰수된 토지뿐만 아니라 공화 정부에서 추진했던 토지 개혁의 영향을 받은 토지도 포함되었다. 임금이 동결되어 농촌에서는 공화 정부 때 농촌 노동자들이 받은 것보다 약 절반으로 줄었는데, 1956년에 가서야 1931년의 임금 수준을 회복했다. 국가는 농산물 판매를 통제했고, 가격도 동결했다." "일종의 자급 경제 체제를 만들어내려는 목적에서 국가가 산업을 통제했는데, 유럽 수준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경제의 우선순위를 군수품 생산에 둔다는 내용이었다. 산업 소유주들과 경영자들은 자신들이 일종의 병영식 통제 경제에 들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파업이 불법화되어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노동 현장의 활동가들은 사라졌고, 임금은 고정되고 노동 시간은 늘어났다. 그러나 공장주들도 원료 구매나 완제품 판매에서 발언권을 박탈당했다."(693)


"프랑스 국경을 넘어 다시 국민 진영 스페인으로 돌아온 15만 명의 공화 진영 사람들은 비록 참호 속에 사람들은 없었지만 사회가 아직도 전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1940년 4월 26일에 제정된 것과 같은 탄압법들은 '1936년 7월 18일 쿠데타 발생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적색 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사항에 보복을 요구했다. 조사는 대인(對人) 범죄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예술, 국가 재산 등에 대한 '도덕적' 범죄까지 망라했다. '책임의 귀속'은 '인민전선 내 여러 당, 노조, 프리메이슨 단체 간부들의 물리적 파괴'와 '공화 정부를 후원하고 지지한 정치 세력의 절멸'을 목표로 삼았다. 프랑코 정부가 저지른 테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아직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진 3만 5천 명에, 비공식적이고 무작위적 살인과 전쟁 중에 이루어진 처형, 자살, 굶주림, 감옥에서 병으로 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사망자 수는 20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696-7)


"프랑코 체제와 스탈린 치하 러시아가 공통적으로 지녔던 역설적 유사성은 외래 이데올로기의 오염에 대한 비정상적인 두려움이었다." "볼셰비즘의 오염이라는 개념은 좌익 쪽의 한 설명에서 보듯이 엉터리 과학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마드리드 대학 정신의학 교수였던 안토니오 바예호 나헤라 소령은 1938년 여름 '마르크스주의 탐닉 정신병'을 연구하기 위해 국민 진영에 14개의 클리닉을 둔 심리학 연구센터를 설립했다. 그의 결론은 스페인의 종족적 소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떼어내 적당한 기관에 맡겨 국민 진영이 추구하는 가치를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43년에 1만 2043명의 아이들을 엄마 품에서 억지로 떼어내 팔랑헤 사회구호소, 고아원, 종교시설에 인계했다. 일부 아이들은 선택된 가정에 양자로 넘겨졌는데, 이 방식은 30년 후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체제에서 그대로 되풀이된다."(695-700)


"1944년 11월 4일 연합통신과 기자회견을 하면서 프랑코는 국민 진영 스페인은 한 번도 파시즘이나 국가사회주의였던 적이 없으며, 추축국들과 동맹을 맺은 적도 없다고 선언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히틀러는 '프랑코 선생의 뻔뻔스러움'은 끝이 없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코는 1945년 7월 17일, 스페인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내전 이후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에게 일반 사면을 베푸는 내용이었다. 7월 18일에는 새 내각을 구성했는데, 중요한 자리를 가톨릭 정치가들에게 할당함으로써 국정의 중심을 국민 운동에서 국가 가톨릭주의로 옮겼다. 1946년 12월 13일 국제연합은 각국 정부에 스페인에서 대사들을 철수시킬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 후 40년 동안 지속되는 냉전이 프랑코 체제를 구해주는 구세주 역할을 했다. 1948년 4월 17일 프랑코 장군은 스페인 내에서 전쟁 상태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내전이 시작되고 거의 12년이 지나고 나서였다."(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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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덴 대공세 1944 - 히틀러의 마지막 도박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막
앤터니 비버 지음, 이광준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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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 독일군의 전선은 붕괴 직전이었지만, 연합군은 심각한 보급 문제로 진격을 늦춰야 했다. 프랑스의 철로망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기에 매일 1만 톤의 연료, 식량, 탄약을 미 육군의 "레드 불 익스프레스" 특별 보급대의 트럭으로 노르망디에서 실어 날라야 했다. 9월 초에 확보한 전선까지의 거리는 셰르부르에서 500킬로미터에 달했고 왕복 3일이나 걸렸다. 파리 하나만 탈환하는 데도 하루 1500톤의 물자가 필요했다." "엄청난 규모의 물자 수송 과정에서 9000대의 트럭이 폐차되었다. 특별 보급대는 프랑스를 가로질러 최일선까지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제9병력수송사령부는 수송기만이 아니라 폭격기까지 동원해 제리캔(기름통)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항공기들은 3갤런의 연료를 사용해야 일선에 겨우 2갤런을 갖다줄 수 있었다. 급박한 물자 수송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안트베르펜 항구를 확보해야 함에도, 몽고메리는 라인강을 건너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31-2)


"1944년 9월 16일, 히틀러는 볼프샨체에서 오전 상황 회의가 끝난 후 별도의 회의를 소집해 측근들을 놀라게 했다. 크라이페 항공대장의 일기에 따르면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이 서부 전선에 중화기와 탄약 그리고 전차가 부족하다고 말하려고 하자 〈총통이 가로막았다. 총통은 '안트베르펜 항구를 최종 목표로 하는 반격을 아르덴에서 실시한다. (···) 새로운 국민척탄병사단과 새로 창설한 기갑사단, 동부 전선에서 온 기갑사단을 합쳐서 총 30개 사단으로 공격군을 편성한다. 영국군과 미군의 틈새를 돌파하여 또 한번의 됭케르크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러시아와의 동부 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 구데리안은 동부 전선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반대 의견을 냈다. 요들은 제공권을 연합군이 갖고 있기에, 네덜란드와 덴마크 그리고 북부 독일에 낙하산부대가 침투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11월 1일까지 1500대의 항공기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42)


"히틀러는 결코 협상은 없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괴링은 총통을 설득하여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크라이페 항공대장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이미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히틀러는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의 동맹은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곧 와해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동부와 서부, 양 전선에서 소모적인 방어전을 펼치느니, 차라리 마지막 대공세를 취하는 것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요들은 〈방어전을 펼치면 패배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차라리 모든 것을 걸고 절망적인 도박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동부 전선에서는 32개 사단을 동원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소련군의 막강한 힘에 눌렸다. 히틀러는 두 개의 기갑군으로 안트베르펜까지 밀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서부의 연합군을 분리시켜서 캐나다를 전쟁에서 발을 빼게 하고, 영국군까지도 〈제2의 됭케르크〉로 밀어 넣어 루르 지방의 군수 산업을 위협하려는 연합군의 게획이 좌절되리라 믿었다."(104-5)


"히틀러가 예상했던 연합군 내부의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기대했던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 육군 참모총장 앨런 브룩 원수와 몽고메리는 연합군의 진격 속도가 더딘 것에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브룩은 몽고메리가 이 문제에 불평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그는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정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영국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군대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사이에, 서북 유럽에서의 전쟁은 완전히 미국의 독무대였다. 그래서 지상군에 단일 지휘관이 있어야 한다면, 몽고메리가 아닌 브래들리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몽고메리가 〈아르덴 북쪽에서는 자신이 지휘권을 맡아야 하고, 남쪽의 지휘권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계속 우길 때에도 브래들리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았다." "브래들리는 나중에 아이젠하워에게 만약 제12집단군이 몽고메리의 지휘를 받게 된다면, 자신은 지휘관으로서의 실패를 인정하고 사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125-8)


"아르덴 대공세를 둘러싼 논란은 연합군이 이 공세를 눈치 챌 것인가 아니면 눈치 채지 못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여러 첩보를 종합해보면, 독일군의 의도를 눈치 챌 만한 정보가 흩어져 있었는데도, 대개의 정보전 실패가 그렇듯이, 고급 장교들이 자신의 편견에 부합하지 않는 첩보들을 흘려들은 것이 문제였다." "연합군은 붉은 군대의 동계 공세에 대비해서 전력을 아껴야 할 필요가 있는 시점에 독일이 감히 전략적인 대공세를 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부 전선 최고 사령관 룬트슈테트는 절대로 이런 도박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룬트슈테트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연합군은 히틀러가 군권을 얼마나 강하게 장악하고 있는지 과소평가했다. 고급 장교들은 항상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훈련받았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게도 만들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독일이 연료와 탄약, 그리고 병력 부족으로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129-31)


"12월 16일 오전 5시 20분, '공격 개시' 10분 전에 제프 디트리히의 제6기갑군이 포문을 열었다. 대부분의 미군은 축축한 눈의 냉기를 피해 16시간이나 되는 밤 동안 농가, 나뭇꾼들의 오두막, 헛간, 외양간 등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지평선 위로, 여름날 번쩍이는 번개 같은 섬광을 본 보초는 동료들을 깨우기 위해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포탄이 날아와 터지기 시작했을 때에야 침낭에서 나온 병사들은 장비와 철모, 무기를 든 채 상태에 빠졌다." "히틀러는 예전처럼 보병사단이 앞장서서 전선을 돌파하게 하고 그다음에 값비싼 기갑사단이 뫼즈강의 다리를 향해 진격하게 했다. 아들러호르스트에 도착한 첫 번째 보고는 가히 용기백배할 만했다. 요들은 히틀러에게 〈기습 공격은 완벽히 성공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실제로 기습 공격은 성공했다. 하지만 독일군에게 필요한 것은 이 기습 공격이 적군을 거의 마비시킬 정도의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였다."(149-50)


"바스토뉴에 있는 미들턴 장군의 제8군단 사령부는 독일군의 공세 규모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슈파에 있던 미 제1군의 호지스 장군은 독일군이 루르 댐으로 향하는 제5군단의 진격을 방해하기 위해서 〈국지적인 양동 작전을 벌이고 있을 뿐〉이라고 추측했다. 호지스 장군은 미군이 '폭명탄buzz-bombs'이라 부르는 V-1비행폭탄이 머리 위로 계속 날아가 리에주를 폭격하는데도, 여전히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다(그날 저녁 V-1비행폭탄이 안트베르펜 극장에 명중하는 바람에 300명의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죽고, 200명이 다쳤으며,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게로 장군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호지스 장군은 제2보병사단의 북상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전 9시 15분, 룩셈부르크의 제12집단군 사령부 브리핑에서는 G-3 작전 참모조차, 아르덴에서는 아무 특이 사항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 시간 브래들리 장군은 아이젠하워와 병력 보충을 의논하기 위해 베르사유로 향하는 중이었다."(160)


"독일군이 내린 명령을 감청한 뒤에야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히 깨달았다. 아이젠하워는 모든 예비 병력을 출동시키는 한편, 베델 스미스, 스트롱, 영국군 작전 참모본부의 존 화이틀리 소장에게 세부 작전 계획의 준비를 명령했다. 세 사람은 참모장실 바닥에 대형 지도를 펼쳐놓고 둘러섰다. 스트롱 장군이 독일군의 의장용 검으로 바스토뉴를 가리켰다. 이 마을이 아르덴의 중심부였다. 뫼즈 강으로 가는 주요 도로가 모두 이곳을 관통하기에 독일군의 뫼즈 강 진격을 막을 요충지라는 점에 모두 의견이 일치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네덜란드 작전(마켓가든 작전을 가리킴)을 끝내고 랭스에서 휴식 중인 미 제82공수사단과 제101공수사단을 즉시 예비전력으로 편성했다. 이 병력이 동쪽에서 오는 만토이펠의 기갑군 선봉대보다 바스토뉴에 먼저 도착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스트롱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자 출동 명령이 부대에 즉각 떨어졌다."(179-80)


"제101공수사단은 아직 병력이 모자랐고, 장비도 보충되지 않았다. 35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네덜란드 전투에서 잃었지만 무르멜롱르그랑에 있는 동안 충원된 보충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동 명령이 떨어지자, 규율 위반, 주로 싸움이나 부사관을 때려서 영창에 있던 병사들까지 중대로 돌려보내야 했다. 장교들은 군대 병원에 가서 거의 치료가 끝난 병사들에게 스스로 퇴원할 것을 요청했다. 반면 정신적으로 심하게 불안정한 병사들은 그대로 놔두라는 지휘관들도 있었다. 지난 열흘간 전투피로증으로 자살한 병사가 여러 명 있었다. 심지어, 사단 참모장도 45구경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제82공수사단은 네덜란드 전투에서 손실을 본 후, 보충병이나 장비를 보충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제101공수사단은 모든 것이 부족했다. 특히 겨울철 방한복이 그러했다. 밤이 되면 병사들이 모자란 것을 얻거나 훔치러 다니자 병참 장교들이 그동안 모아놓았던 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195-6)


"한편 독일의 기갑교도사단 그리고 제26국민척탄병사단이 북쪽 방어선을 뚫고 바스토뉴로 향하고 있는 가운데, 제47기갑군단은 교통 체증 때문에 바스토뉴로의 진격을 서두를 수 없게 되자 단단히 화가 났다. 그러나 독일군의 공세 일정표를 완전히 어긋나게 만들어버린 쪽은 미 제28보병사단의 용감한 중대들이었다. '스카이라인 드라이브'라고 불리는 남북으로 뻗은 능선에 낸 도로를 따라 하이너샤이트, 마르나흐, 호싱겐 같은 마을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이 도로의 교차로를 방어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인츠 코코트 소장은 나중에 〈호싱겐에서의 방어는 제26국민척탄병사단 전체의 진격을 지체시켰다. 결과적으로 기갑교도사단은 하루 반나절이나 늦어졌다〉고 인정했다. 기갑교도사단장도 호싱겐에서 12월 18일 아침까지 버텨준 K중대의 방어 때문에 결국 〈바스토뉴 지역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고백했다. 이 점이 촌각을 다투었던 바스토뉴 전투에서 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210)


"12월 23일 아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다. 미군 지휘관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러시아 고기압대가 동쪽에서 밀려와 하늘은 수정처럼 맑아졌지만 기온은 더 떨어졌다. 〈시계, 무한대!〉 항공 관제관도 들떠 있었다." "룩셈부르크 시민들처럼 브래들리의 참모들도 거리로 나와 실눈을 뜨고 눈부신 하늘 위에 떠 있는 연합군 중폭격기들의 비행운을 바라보았다. 폭격기들은 트리어와 그곳의 보급품 야적장을 폭격하러 가는 중이었다. 폭격기를 올려다보는 참호 속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전투폭격기 편대가 세찬 강물에 비친 생선비늘마냥 반짝이며 머리 위를 날아갔다. 연합군의 항공 지원은 뜻밖의 이점까지 가져다주었다. 전투폭격기가 주변에 있으면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될까 겁을 먹은 독일군 포병들이 포격을 할 수 없었다. 〈적기가 나타나자마자 아군 포격이 50~60퍼센트 줄었습니다.〉 모델 원수의 포병 사령관이 보고했다."(303-4)


"12월 24일 일요일, 푸른 하늘에 밝은 태양이 떠올랐다. 제101공수사단 대원들이 〈서부 개척 시대의 마차 대열처럼 자기 위치를 굳건히 지켰기에〉 브래들리의 전술 사령부에서는 바스토뉴 방어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참호 속의 병사들을 덜덜 떨게 만든 혹한에도 불구하고 바스토뉴 방어선의 병사들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낙하산병들이나 제10기갑사단 병사들은 패튼 장군의 병력에 의해서 곧 포위망이 풀릴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자신들이 구출되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쾌청해진 날씨와 함께, 병사들은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온갖 종류의 연합군 항공기들을 올려다보았다. 전투기들이 독일군 차량 대열에 폭격하는 소리, 기총소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합군의 전투폭격기는 이 기간 독일군의 집결지를 폭격하여 적의 공세를 분쇄하는 데 굉장히 효과적인 존재임을 입증했다. 바스토뉴에 있는 관제사들이 폭격기들을 표적으로 유도했다."(323-5)


"독일 공군이 마그네슘 신호탄을 바스토뉴 상공에 떨어뜨리면서 짧았던 크리스마스 밤의 평화는 끝났다. 몇 시간 후 재개된 공격은 독일군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제15기갑척탄병사단은 전투를 계속할 만한 전차가 더 이상 한 대도 남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어두워진 후, 정찰대대 소속 잔여 구축전자의 지원 아래 절망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 제502낙하산보병연대의 바주카포 팀이 독일 지휘관 차량을 포함한 절반 이상을 근거리에서 기동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동남쪽에서는 기갑교도사단의 제901기갑척탄병연대 돌격대가 공격에 나섰다가 고립되어 〈문자 그대로 전멸〉당했다. 이 연대는 남은 예비 병력이 없어서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 가용 병력이 남김없이 전장에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코코트는 더 이상의 공격을 중단했다." "코코트는 〈대공세는 엄청난 희생만 초래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마을 몇 개를 점령한 것으로 끝났다〉라고 기록했다."(343-7)


"만헤이와 그랑메닐 근처의 전투에서 아직도 미 제1군의 근심덩어리로 남아 있는 독일 제2친위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를 제외한 다른 기갑사단들은 독일 전선 돌출부인 벌지의 서북쪽 측면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독일 제116기갑사단은 마르슈 동쪽을 뚫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발덴부르크 소장이 기록한 대로 〈이 전투에 투입된 사단의 예하부대들은 거의 전멸했고〉 제60기갑척탄병연대의 바이어 전투단은 고립되었다. 소수의 병력과 차량만이 겨우 탈출했다. 그날 밤,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히틀러에게 대공세가 실패했다고 보고했다. B집단군도 포위당하기 전에 빨리 후퇴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히틀러는 이 건의를 묵살하면서 바스토뉴를 다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다시 맑은 날씨가 시작되자 미 전투폭격기들이 생비트를 초토화했다. 일명 '도시 전체를 길거리에 나앉히기' 전략은 도로를 온통 파편투성이로 만들어서 독일군 수송대가 도로를 아예 이용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생각이었다."(351-3)


"히틀러의 아르덴 대공세가 남긴 망령인, 괴링의 마지막 도박은 '보덴플라테 작전'이라고 불렸다. 날 수 있는 모든 항공기를 총동원해 연합군의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활주로에서 모두 파괴한다는 작전이었다. 비록 몇 주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새해 전날 오후 작전 회의에서 브리핑을 받은 장교들은 대경실색했다. 그날 조종사들은 일절 음주를 금하고 새해를 맞이한다고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도 자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군의 지상 공격인 반자이 돌격을 연상케 하는 이튿날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 모두 회의적이었다." "작전은 하다못해 부분적인 승리도 거두지 못했다. 독일 공군은 전투기 271대가 파괴되었고 65대가 손상을 입었다. 조종사들의 피해는 정말 처참했다. 모두 143명의 조종사가 죽거나 실종되었고 7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21명이 부상당했다. 이 수치에는 3명의 비행단장, 5명의 비행전대장, 14명의 비행대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을 보충할 인력을 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389-93)


"1월 12일 금요일, 보덴플라테 작전의 실패를 용서받은 괴링이 쉰 두 번째 생일을 축하받기 위해 히틀러에게 불려갔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이날은 다른 이유로 무척이나 중요한 날이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새벽 5시, 이반 코네프 원수가 지휘하고 있는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이 엄청난 선제 포격에 뒤이어 비스와 강 서쪽의 산도미에서 독일군 교두보를 공격했다. 소련군의 포격은 기갑척탄병 장교가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경악했을 정도였다. 소련의 전차부대는 〈가자! 파시스트의 소굴로!〉 〈복수! 그리고 독일 놈들에게 죽음을!〉이라는 슬로건을 전차 포탑에 써놓았다. 이튿날에는 게오르기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이 바르샤바 남쪽에서 공격했다. 또 다른 두 전선군은 동프로이센을 공격했다. 구데리안은 결코 상황을 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산드라처럼 그의 경고는 무시당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동부 전선 전역에 걸쳐 670만 명을 동원했다."(430-1)


"1월 15일, 히틀러는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주코프와 코네프의 전차군이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의 방어선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슐레지엔 산업 지역은 풍전등화였다. 이후, 총통이 베를린 밖으로 나간 것은 오데르 전투 때가 마지막이었다. 이날 해 질 무렵 야간 전투를 대비해 강화된 미 제2기갑사단의 2개 전투부대가 우팔리즈 전방 1킬로미터 남짓한 곳까지 진격했다. 그 후 적정을 살피려고 정찰대를 내보냈지만 새벽 1시쯤 시내로 들어간 정찰대는 독일군의 낌새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정찰대는 우르트 강 동쪽으로도 갔지만 적은 그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르덴 대공세는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영국의 한 연대가 독일군은 이미 훈장마저 바닥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훈장 대신 룬트슈테트 원수의 서명이 된 사진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사단에서는 이런 식의 포상이 병사들의 전의를 끌어올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군단 사령부로 보고하는 내용이 감청되었다."(438)


"아르덴 전투는 미군에게는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영국에게는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몽고메리의 기자회견이나 런던 언론들의 몽고메리 띄우기는 미국 내에서 특히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장서들 사이에서 영국에 대한 경계심만 한층 부채질했다. 그러한 야단법석은 알렉산더 원수가 테더 공군 사령관의 후임이 되어 연합군 부사령관이 되기를 바랐던 처칠의 희망을 좌절시켰다. 그렇게 되면 영국이 〈지상 작전의 통제권을 갖게 되는 것〉이었기에 마셜은 단호히 반대했다. 처칠도 깨달았겠지만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라인 강을 건너 독일로 진격하는 동안 몽고메리는 곁다리로 밀려났다. 영국의 의견은 대부분 묵살되었다. 연합군 위원회에서의 영향력 또한 거의 사라졌다. 11년 뒤에 있을 수에즈 위기에서 영국의 배신에 대한 아이젠하워의 분노는 상당 부분 1945년 1월 그가 겪었던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그 원한은 아이젠하워가 죽을 때까지도 잊지 않았다.)"(451)


"볼프샨체에서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지 정확히 1년 뒤인 1945년 7월 20일, 카이텔 원수와 요들 상급대장이 아르덴 대공세와 관련해서 조사를 받았다." "두 사람은 합동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예비 병력을 서부 전선이 아닌 동부 전선에 투입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은 후세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 〈아르덴 대공세로 전쟁을 연장하는 결과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전쟁범죄인지는 연합군 법정이 판단하라. 어떻게 판단하든 우리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제5, 제6기갑군을 아르덴 대공세에 투입한 결정이, 결국 1월 12일 비스와 강 교두보에서 소련군의 동계 대공세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비스와 강에서 오데르 강을 향한 소련군의 진격이 성공적이었던 비결은 히틀러가 아르덴 대공세를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점은 분명했다."(449)


"히틀러는 끝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독일 장군들은 아르덴 대공세 개시 1주일 만이 이미 실패했다고 깨달았다. 기습은 일단 성공했지만, 정작 중요한 미군의 전의 상실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독일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아르덴 대공세는 동부 전선의 잔인한 전투 행테를 서부 전선으로 전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나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침략을 보더라도 전면전의 충격이 처음 예상처럼 국가 전체의 공포나 붕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포위된 상태에서 굴복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덤비는 처절한 저항을 초래하기 일쑤였다. 독일군이 제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호각을 불면서 공격을 해도, 고립된 중대가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 속에서도 끝까지 중요한 마을들을 지켜냈다. 이러한 희생이 증원군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를 벌어주었다. 나아가서는 히틀러의 야욕을 무너뜨리는 디딤돌이 되었다."(4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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