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 2016 경암학술상 인문사회부문 선정도서
권헌익 지음, 홍석준 외 옮김 / 산지니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동유럽과 중유럽 지식인들이 개인적 경험을 소설적 서사로 표현하는 데 힘을 실어줌으로써 진리를 주장하는 공식역사에 저항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개인의 기억은 공식역사에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논쟁적인 진술을 통해 이러한 정향을 구체화했다. 하지만 유령이라는 요소는 익숙한 테마가 아니다. 오늘날 다양한 학자들이 당대의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도출하려는 시도에서 과거의 유령에 호소하는 경우가 흔하긴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유령', '마르크스의 유령', '공산주의의 유령', '스탈린의 망령', '냉전의 유령' 등은 주로 역사적인 은유이다." "이들 역사의 유령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전쟁의 유령(ma chien tranh)과 같지 않다. 최근 이스트반 레브는 탈공산주의의 〈선사(先史)〉에 관한 논의에서 유령이라는 관념을 도입한다. 비록 나는 전쟁의 유령을 레브와 유사한 시각에서 역사적 불의의 산 증거로 접근하지만, 이들 유령은 단순한 역사적 관념과는 완전히 다르다."(14-5)


"베트남의 유령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정체성을 가진 실체로서, 비록 과거에 속하지만 비유적인 방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방식으로 현재에도 지속된다고 믿어지는 존재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 과정에서 베트남의 유령 이야기는 탈사회주의적 서사와 양극적 질서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 기술에서 독특한 장르의 관념과 가치를 구성한다. 베트남 유령의 생명력은 단순히 문학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장들에서 볼 수 있듯이 절박한 사회적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 현상은 베트남 사회 전역에 걸쳐 발견되는 유령 관련 이야기의 명백한 대중성과 베트남인들의 일상에서 점증하고 있는 비극적 전몰자에 대한 기억의 의례적 표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유령은 베트남에서 현저하게 대중적인 문화적 형태이자 역사적 성찰과 자기표현을 위한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령은 관례적인 사회학의 전통을 초월하는 사회적 연구의 정당한 영역을 구성한다."(16)


"이 책의 과제는 『학살, 그 이후』에서 다룬 친족의 의례적 기억에 관한 연구를 전몰자라는 중요한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대학살로 인해 가족에 기반한 전통적인 기념 관행이 위기에 직면했는데, 부분적으로 이것은 친족적 연고가 없는 시신들이 마구 뒤섞여버렸기 때문이다. 최근의 베트남 전쟁은 전통적인 마을을 뒤엎어 공동체적 삶의 안정적 공간을 흉폭하고 혼란스러운 전장으로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전쟁은 또한 민간인과 군인들이 여러 지역을 가로질러 대규모로 이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일반화된 인간의 이탈(human displacement)이라는 배경하에서, 남부 및 중부 베트남의 공동체들은 수많은 전쟁사망자의 개별 무덤과 마을 주민들의 집단 묘지를 유지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이나 많은 수의 무명 외지인(응오아이, ngoai) 유해의 무덤도 지켜왔다. 이탈된 죽음의 이러한 물질적 조건은 베트남인들이 인지하는 비통한 전쟁 유령의 생명력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22)


1 전쟁의 유령


"냉전사에서 베트남 전쟁(1965~1975)이 그 전에 일어난 한국 전쟁(1950~1953)과 비교되는 것과 유사하게, 베트남인들은 베트남과 미국 간의 갈등을 이전의 '프랑스 전쟁'과 구분하기 위해 미국 전쟁(1960~1975)이라 부른다."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베트남에서 발생한 죽음은 주로 군인의 죽음이다. 이는 이 집단기억의 핵심적인 물질적 상징인 버지니아의 알링턴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관을 통해 입증된다. 베트남의 공식적인 기념방식에 따르면 미국 전쟁에서의 죽음 또한 주로 군인의 죽음이다. 이는 베트남 전역의 여느 농촌 마을이나 읍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수많은 묘지와 기념비를 통해 물질화된다. 하지만 실제로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미국 전쟁에서의 죽음은 남녀노소, 군인, 민간인, 당원, 비당원, 공산주의자 혹은 반공산주의자를 가리지 않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의 죽음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장의 전선이 지독하게 불분명했던 베트남 남부와 중부 지역에서 특히 심했다."(38-41)


"베트남에서 유령의 존재는 문화적인 상징이라기보다 '자연적인' 현상으로 인식된다. 유령은 전형적으로 '길 잃은 영혼' 혹은 '떠도는 영혼'으로 번역되는 다양한 이름(마ma, 혼hon, 혼마hon ma, 봉마bong ma, 린혼linh hon, 오안혼oan hon, 박린bach linh)으로 불리지만, 민간의 의례용어에서는 꼬박(co bac)으로 불린다. 꼬박은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뜻하는 용어인데, 이는 의례적 맥락에서 개별 가정이나 마을 사원 내에서 숭배되는 조상과 신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옹 바(ong ba,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대조적이다. 이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죽었지만, 망자의 세계, 즉 엄(am)에 정착한다는 의미에서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살아 있진 않지만 여전히 산 자의 세계를 떠나지 않은 존재이다." "유령은 일종의 존재론적 난민으로서 에르네스트 블로흐가 말하는 다스 운하임리히(das unheimlich), 즉 집으로부터 뿌리 뽑힌 자의 지위에 가까운데, 이들에게 집은 자신의 기억이 머무는 장소일 수 있다."(44-5)


"베트남에서 유령은 아주 공적이기도 하다. 그들과의 사적인 조우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기념활동으로 발전한다. 유령이 출현한 장소에 막대 모양의 향을 피우는 행위는 즉시 그 장소를 애도의 장으로 변환시키기 때문에 이미 명백히 공적인 행위이다. 유령 출현 이야기와 그 역사적 배경 또한 지역 사회에 신속하게 확산되어 공적인 형태의 지식으로 전환된다. 사전 지식이 없는 외부인이 아니라면 누구도 부주의하게 그 장소를 걸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주민들은 그 장소를 지날 때마다 향과 재를 보고 매번 그 특별한 유령 출현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이야기가 잊히고 관련 장소가 평범한 도랑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 지속된다. 이와 같이 유령의 존재를 인정하는 활동은 분향에서 음식과 돈의 봉헌, 혹은 때로 의례전문가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지는 본격적인 진혼 의식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46)


"혼과 유령에 관한 베트남인들의 담론에는 비판적인 역사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겨 있고, 이 담론이 널리 확산되는 이유는 정확히 그것을 통해 당대의 삶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도덕적·정치적 쟁점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쟁유령 현상은 역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인간의 조건을 반영하고, 때로 헤겔의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 즉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으로 묘사되는 것과 긴밀한 친화성을 가진다. 가령, (남베트남군 군인으로 작전 중 사망한) 공산당 간부의 형이 유령으로 출현한 것은 친족영역 내에서 그의 기억의 부재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외세라는 공동의 적에 저항해서 싸운 통일된 '인민의 전쟁'이라는 공식적 패러다임 내에서 은닉되고 설명되지 않는 내전-냉전의 유산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주로 가족의 문제이지만 또한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비무장 민간인의 엄청난 희생과 그들의 기억에 대한 권력구조의 무관심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와도 연결된다."(48-9)


"베트남인들의 개념체계에 따르면, 유령은 망자의 세계에서 이방인 혹은 외부자를 뜻하는 응으어이 응오아이(nguoi ngoai)이다. 그것은 '나쁜 죽음', 즉 베트남인들이 〈객사〉(쩻 드엉, chet duong)라고 부르는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죽음에서 비롯된다. 이승의 이방인이 정착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옮겨 다니는 것처럼, 유령은 강제된 이동으로 인해 기억을 정박할 장소 없이 이승과 저승의 변두리에서 고통스럽게 떠돌아야만 하는 존재로 상상된다. 이승에서 이방인이 동질적인 배경의 결여라는 특징을 통해 정주민과 구별되는 것처럼, 유령들 또한 다양한 역사적 삶의 배경을 가진 개인들로 이루어진 혼성의 집단을 구성한다. 유령의 삶은 이러한 이동성과 다양성이라는 특질로 인해 조상의 삶과 구별된다. 조상의 '좋은 죽음', 즉 비폭력적이고 의례적으로 승인되는 〈집에서의 죽음〉(쩻 냐, chet nha)에 대한 기억은 계보적·공간적 질서에 따라 사회적 체계에 항구적으로 정착된다."(52-3)


2 대규모 발굴


"베트남에서 1990년대는 모든 면에서 가공할 변화의 시대였다. 외부 세계의 시각에서 볼 때 베트남은 이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연이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가난하고 고립된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나라로 변모했다. 베트남은 1980년대에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저생산성이라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져 있었다. 일부 관찰자들은 그 이유를 여러 요인들 중에서도 특히 관료사회주의의 중앙집중식 계획경제에 대한 인민들의 일상적 저항에서 찾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베트남의 정치지도자들은 1980년대 후반 규제적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전반적인 경제개혁 프로그램(도이 머이, doi moi)을 도입했다. 경제 이데올로기의 변화는 종교적 숭배를 포함하는 다양한 공동체활동과 결사활동에 대한 정치적 관용의 확대를 수반했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베트남 사회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전국적 차원의 종교와 의례의 부활〉이었다."(72-3)


"마크 브래들리는 베트남 혁명을 냉전기에 완전히 독립적인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탈식민지적 비전의 일반적인 추구로 정의한다. 따라서 최근 베트남의 사회적 전환은, 과거의 역사적 투쟁이 단순히 어떤 특수한 정치경제적 질서의 실현에 관한 것이 아니었듯, 단순히 하나의 경제 형태에서 다른 경제 형태로의 변화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경제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경제적 도덕성에 관한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최근의 탈사회주의 논쟁은 러시아, 동유럽, 중부유럽의 맥락에서는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의를 진지한 재고 없이 20세기 후반의 정치사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희생시킨 사회세력의 폭력적인 양극화를 뜻하는, (유럽의 일부를 포함하는)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단순히 확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 주장은 정치적 양극성의 파괴적인 측면과 그것이 당대의 삶에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마찬가지로 유럽중심적인 탈사회주의 정의에도 적용된다."(77-8)


"일군의 학자들은 산 자와 망자 간의 호혜적 관계라는 관념이 베트남의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베트남에서 의례활동이 부활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종교적 부흥을 한편으로 시장에 토대를 둔 경제적 실천의 강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종교활동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완화를 연관시키는 상이한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테일러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최근의 주술 열기는 고대적인 것의 부활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경제대안의 포기가 수반하는 예측 불가능하고 부정적인 사회관계를 드러내는 탈사회주의적 현재의 징후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방향의 연구는 경제 내에서 상품관계의 부상을 종교에서 주술적 관념의 퇴화와 동일시하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주술적 관념을 사회진화의 낮은 단계에 있는 고대적 혹은 전통적 사회형태와 동일시하는 과거의 인류학적 전통에 대한 자기비판이기도 하다."(96)


3 작전 중 실종


"무명용사 무덤은 현대 현대 민족주의 물질문화의 중요한 초점 중 하나이다. 이 무덤은 흔히 아무도 매장되어 있지 않은 빈 무덤인데, 제이 윈터에 따르면 누구의 무덤도 아닌 빈 무덤이 모든 전쟁 사망자들을 위한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이 그 이면의 사고방식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추상적인 군인의 매장이 전쟁의 종식을 표식하기 위해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희생의 성스러운 목적을 기억하고 대규모 죽음의 비극적 현실을 망각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그 후에는 무명용사의 순수한 정신을 통해 국가를 축복했다. 냉전시대에는 군사적 갈등의 종식이 정치적 대치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았고, 추가적인 지정학적 목적을 위해 죽은 군인들이 동원되었다. 이 새로운 시대에 가치 있는 무명용사는 더 이상 무덤에 묻힌 환유적(換喩的) 신체가 아니라, 본국으로 송환되어 매장되지 않은 수많은 실제적인 신체들이었는데 이 시신들은 연장된 이데올로기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했다."(105-7)


"베트남에서도 사망한 영웅의 실종된 신체(nhung nguio mat tich)를 되찾는 일이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군 당국과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전후 베트남의 국가체계는 기념활동의 통제를 크게 강조했고, 미국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의 죽음을 프랑스 전쟁의 영웅들, 그리고 고대적 전승의 전설적 영웅들과 하나로 연결하는 영웅적 저항전쟁의 계보를 선전했다. 베트남의 모든 지방 행정단위에는 공동체의 공적 공간 중앙에 전몰자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 장소의 중심에 위치한 고딕풍의 기념비에는 〈우리 조상들의 땅이 당신들의 훈공을 기억합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패트리샤 펠리에 따르면, 이러한 국가적 기억의 구성은 기념의 초점을 전통적인 사회단위인 가족과 촌락에서 국가로 바꾸었다." "따라서 전쟁영웅과 혁명지도자에 대한 기억이 가내 공간의 조상위패를 대체하고, 공동체 사원은 해체되어 인민회관에 자리를 내주었다."(110-2)


"〈작전 중 실종자(MIA)〉 탐색활동은 보통 가족들을 현지답사에 참여시켰는데, 그 이유는 실종된 유해가 친족의 시체가 접근하는 데 반응해서 어떤 결정적인 표식이나 신호(저우 히에우, dau hieu)를 보낼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다. 찌엔 쌤 마는 MIA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에서 다른 대부분의 비공식적 베트남 영매들과 마찬가지로 실종자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정서적으로 힘들고 육체적으로 소모도가 높은 탐색과 재매장의 긴 과정을 밟았다." "대부분의 베트남 영매들은 이러한 힘겨운 송환과 재화합의 과정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긴장과 트라우마를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이 탐색 후 재매장 작업에서 수행하는 사제 역할은 탐색-발견 활동에 주술적으로 참여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가족들이 울부짖을 때 영매는 개인적인 통한(痛恨) 대신 커뮤니케이션을 장려했다. 요령 있는 영매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121-2)


"한편 꽝남 성 당국은 관례에서 다소 벗어난 유해탐색 활동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대민관계에서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공식적인 탐색활동을 자신들의 실종된 친지들에게까지 확대해달라는 시민들의 탄원이 빗발쳤다. 대중들의 요구는 강력했고 이는 결국 당국으로 하여금 유해탐색 프로그램을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베트남 국가 관료기구는 합리적 정신과 무신론적 도덕성을 공무원들에게 엄격하게 강조했기 때문에 관료들 사이에서 다소 혼탁한 논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이 전쟁 영웅의 유해를 되찾는 영예로운 동기와 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약 공산당 당국이 그 탄원을 무시하면 다소 자기모순적인 상황이 초래될 판국이었다. 결국 땀끼 시 당국은 과감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당국은 시민들이 실종된 친지 문제를 찾기 위해 종교적 영매에게 의뢰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정부에 공식적으로 청원할 수 있는 신청서를 발행했다."(125)


"1990년대 베트남과 미국의 화해 과정에서 미 행정부는 부분적으로 이전 적성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MIA 문제에 가시적인 진척이 있기를 조급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정부대로 경제제재를 종식시키는 데 명운을 걸고 있었고, 발견된 미국인 유해의 수가 가시적으로 증가하기를 미국 정부만큼이나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유해탐색의 효율성을 높이는 일은 한편으로 국제관계를 촉진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개혁이 수반하는 불확실성에 직면해서 당의 도덕적 기반을 강화한다는 국내적 목적을 위해 필요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찌엔은 1995년 인도차이나에 파견된 미국 MIA 탐색대와 접촉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라오스 국경 지역에서 세 명의 실종 미군 비엣 끽(biet kich), 즉 베트남어로 특수부대 요원을 찾기 위한 탐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찌엔은 베트남-미국 합작 MIA 탐색활동의 성공을 위해 수호신에게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127)


4 유령 다리


"남베트남군과 미군의 통제하에 있던 남부와 중부 베트남의 도시 지역에는 또(to) 혹은 또 바 응으어이(to ba nguoi, 삼인조)라 불렸던 전시 베트콩 혁명소조가 있었다. 이 소조는 전형적으로 혁명과업에 충성하는 비밀 시민활동가를 지칭하는 꺼 소 깍망(co so cach mang), 즉 〈혁명의 토대(infrastructure of revolution)〉 남녀 3~5명으로 조직되었다. 각 소조는 보통 전체 서클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오늘날의 전문용어로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보다 광범위한 서클에 연결되어 있었다." "간부와 공작원 사이의 관계는 위계적이기도 했고 수평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공작원과 상급자 모두 서로를 같은 목적을 공유한 파트너, 즉 동찌(dong chi)라 부르고 또 그렇게 인식하면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소조 조직은 개별 조직의 실질적인 자율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149-50)


"호랑이 사원 공동체는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도시 근교 공동체의 전형이다. 이 지역은 반식민주의 베트민 레지스탕스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대규모 전쟁 묘지로 이어지는 길 끝자락에 은닉해 있는 사원은 서쪽으로 하위 중산층 주택들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 주택은 북쪽으로는 오래된 교도소와, 서쪽으로는 군부대와 맞닿아 있다." "이제 더 이상 죄수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웃들의 구술사에서 여러 번 드러나듯이 일부 주민들은 아직도 사형수들의 유령이 자기 집 뒤뜰이나 부엌으로 기어들어 올까 두려워한다. 그 지역의 토착적 지식체계에 따르면 살아가면서 죄수의 유령과 조우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그 유령은 긴 머리카락에 가슴을 풀어헤치고는 사람들을 유혹해서 죽음으로 이끄는 여자 물귀신으로 악명 높은 마우 마(Mau Ma)처럼 훼손된 몸과 늘어진 혀를 가지고 있다. 이웃의 젊은 여자 세 명이 이 공포스러운 환영을 경험했고, 그들 중 한 명은 끝내 그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153-4)


"이 마을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부역자〉와 〈애국자〉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사람들의 회상에 따르면, 이웃이나 친구가 누군가를 배신했다는 소문은 읍내 전체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이는 다시 은밀함과 상호불신을 강화했다. 역설적이게도 전쟁 지도부의 이와 같은 분열 통치전략은 민간인들 사이에 비밀 혁명지원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데 기여했다. 민간 활동가들의 정치적·도덕적 동기 이면에는, 전쟁 상황에서 깍 망(cach mang, 혁명적) 네트워크가 유일하게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조직이라는 강력한 인식이 존재했다. 물질적·정신적으로 심각하게 고립되어 있었던 수많은 절망적 베트남인들, 특히 여성들은 인간적 연대의식을 회복하려는 혁명조직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꺼 소 활동가였던 한 여성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남편은 없어도 살 수 있었다. 친척이 없어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웃이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이웃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156)


"호랑이 사원의 존재는 그 공동체의 회복력에 기여했다. 부역자 가족에 속하든 애국자 가족에 속하든, 거의 모든 주민들은 그들이 전쟁 동안 그렇게 했던 것처럼 사원의 유지와 의례일정에 참여했다. 사원의 활동, 특히 매년 음력 1월에 열리는 개원식에 대한 주민들의 공헌은 지연이나 혈연이 거의 없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만들어내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사지절단 랍 같은 사람들도 공동체의 결속력에 기여했다. 그는 혁명 네트워크에 속해서 전쟁을 치렀다. 그는 또한 국가의 편에서 그 정반대의 전쟁을 치렀다. 그의 양극화된 정체성은 하나의 상실된 전체로 융합한다. 그는 애국자 가족의 명시적인 자부심에 공감하면서 부역자 가족의 보이지 않는 낙인에 대해서도 배려해준다. 랍과 같은 사람은 흔히 그 자부심이나 낙인 이면에 말해지지 않은 불확실성의 역사가 숨겨져 있고, 전쟁 중 생애사가 매우 분명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보통 사람은 아주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164-5)


"사지가 절단된 자는 두 개의 모순적인 현실, 즉 살아 있는 사지의 역사적 현실과 그 부재의 주어진 현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이 두 종류의 〈사지〉는 절단된 몸의 생생한 현실 속에서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한다. 따라서 부재하는 사지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의 살아 있는 체화된 기억이 됨으로써 유사현존(quasi-present)한다. 이 인간 신체의 현상학을 확장하면, 사회적 신체의 절단된 부분이 두 개의 모순적인 현실, 즉 살아 있는 전체의 역사적 현실과 상실된 부분의 주어진 현실을 동시에 유지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호랑이 사원 공동체에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고 온전하게 살아남은 가족이 단 하나도 없다." "만약 (다양한 수준의 사지절단 상처를 입은) 가족이라는 관념을 확대 친족 혹은 친구와 이웃을 포함하는 수준으로 확대한다면, 그 상실과 상처는 점점 더 정치적으로 분류하기 어렵게 된다. 정치적 정체성은 그 정체성을 보유한 자의 범위를 어떻게 정하는가에 따라 변화한다."(166-7)


5 객사


"베트남 전쟁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농촌 인구를 생계의 토대와 도덕적 애착의 장소로부터 이탈시켰다. 미국 전쟁의 기획자들은 농촌 주민들에게 도시 슬럼이나 전략촌으로의 강제이주에 저항하도록 부추겼고, 〈조상들의 땅에서 한 자, 한 치도 떠나지 말라〉고 선전했다. 이러한 전면전의 현실에서 객지에서의 죽음은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수많은 무명 사망자들의 얕은 무덤을 발견하는 것 또한 흔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탈된 사후의 삶이라는 상황, 즉 한 장소에서는 실종되고 다른 장소에서는 신원불명 혹은 무명으로 남아 있는 상태는 베트남인들이 〈객사(chet duong, 길거리에서의 죽음)〉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는 상황이다. 이 개념은 〈집에서의 죽음〉 혹은 〈가정에서의 죽음(chet nha)〉이라는 정반대의 개념과 공존하고, 이들 두 개념이 함께 베트남의 가내 기념의례를 통해 표현되는 집 중심적인 도덕적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다."(179-80)


"아서 울프가 종교적 믿음에 관해 질문을 했을 때 대만의 한 촌락인들은 조상과 유령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그는 〈(의례적 의무의) 연속체 한쪽 끝에 있는 죽음은 진정한 조상이고, 다른쪽 끝에 있는 죽음의 거의 유령이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울프는 또한 마을 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죽음에 관한 이 두 가지 개념적으로 상반되는 범주가 상호변환이 가능한 상태임에 주목했다. 그는 후자의 예로 유령 조우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마을 들판에서 유령을 본 한 남자가 그 유령이 들 건너편 마을에 사는 가족의 한 조상 혼령이라고 믿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유령을 본 다음 날이 이 조상의 기일이었고, 그래서 그 유령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사례 및 여타 관련 사건에 근거해서, 울프는 유령의 변화하는 정체성에 관해 〈한 사람의 조상은 다른 사람의 유령이다〉라는 널리 인용되는 주장을 한다. 즉, 망자의 사회적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186)


"울프의 발견을 원용해보면, 유령들은 (의례적으로 조상의 혼령과 통합되어 있는) 사회적 삶의 질서에 대해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추방 상태에 있는 현실적 존재의 거울이 된다. 이탈 상태의 삶은 정주 상태의 삶과 다른 방식으로 유령과 관계 맺고, 유령과 인간 사이의 거리 또한 이탈의 역사가 깊어짐에 따라 좁아질 수 있다. 이러한 논지로부터 최근 베트남에서 관찰되는 유령과의 사회적 친밀성에 고유한 역사적 배경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 도출된다. 베트남인들이 망자의 이탈된 혼령과 맺는 친밀한 관계는 그들이 대규모 이탈의 역사와 맺고 있는 친숙한 관계의 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담론 현상으로서의 유령이 조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인들의 자아정체성을 구성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유령의 생생한 존재가 단지 〈조상들의 사회〉와 상징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사회적 자아의 반정립이라기보다 역사적 자아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면, 그들과의 의례적 상호작용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188)


"베트남의 대중적인 노래와 시는 고향에 대한 사랑을 찬미하고 집을 떠난 삶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넘쳐난다. 이들 노래 중 일부는 향수를 시적으로 표현하는 데 바 매 꾸에(ba me que), 즉 〈고향의 어머니〉를 핵심 상징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대중 동원이 지속되는 장에서, 바 매 꾸에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또 다른 모성이 전쟁의 심리학을 구성했다. 대리모성(surrogate motherhood)은 이 시기 하나의 광범위한 현상이었다. 미국전쟁 당시 하노이의 전쟁계획은 대중적인 지지에 광범위하게 의존했는데, 이는 다시 〈인민의 자식〉 혹은 〈전투원의 어머니〉라는 전략의 성공에 달려 있었다." "군인들이 전투에 나갈 때면 어머니 활동가들은 입양한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다. 이러한 그들의 기도는 흔히 미국 편인 〈저쪽 편〉에 복무하는 자식들뿐만 아니라 혁명의 편인 〈이쪽 편〉을 위해 싸우는 자식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어머니들 중에는 싸움의 양측 모두에 친자식이 있는 이들이 많았다."(188-97)


"과거에는 적이었던 이들 사이의 의사친족적 유대는 전쟁 전 기간에 걸쳐 실제 혈연관계만큼이나 강하게 유지되었다. (비밀 혁명 네트워크에서 활동한) 꺼 소 어머니들에게, 젊은 병사들의 성공적인 탈주는 먼 타지에 있는 친자식들이 살아서 고향에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머니 활동가들이 노심초사하며 수행한 여러 정치활동 중에서도 특히 입양과 탈영 조직을 가장 헌신적이고 정성스럽게 운영했던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이 여성들에게 이러한 활동의 의미는 단지 적의 사기와 도덕성을 약화시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입양 군인들에 대한 사랑이 미지의 전장에서 싸우는 친자식들이 미지의 어머니들에 의해 어떻게든 사랑받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믿음도 강화했다. 원격적 호혜행위에 관한 이러한 믿음이 헛된 희망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매우 흔했지만, 어떠한 정치적 폭력과 감시도 이러한 희망을 전적으로 파괴시킬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199)


"유령은 사람들이 친숙하고 이상화된 집을 조상들을 위한 기억의 장소와 동일시할 때는 그에 대해 외부자가 된다. 이 맥락에서 조상들을 위한 기억은 그 장소를 계보적 통일성을 위한 배타적인 집으로 전용한다. 반면 사람들이 거주 장소(dwelling place)의 지평에서 단지 일부에 불과한 '계보적으로 제도화된 집'에서 벗어나 보다 광범위한 지평으로 나아갈 때 유령은 내부자가 된다. 유령은 전자에서는 기이한 것(das unheimlich)를 구성하고, 후자에서는 집(Heim)의 혼령을 구성한다. 돈 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약 (양방향의 의례적 실천으로 표현되는) 베트남의 혼령숭배 의례가 하나의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체계를 구성한다면, 나는 한편으로 폐쇄적이고 계보적으로 조성된 토착적 장소와 다른 한편으로 속박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비계보적인 대안적 장소 및 보다 광범위하고 생성적인 의미의 고향-장소의 평행적 공존이 이러한 민주적인 종교성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주장하고 싶다."(210)


# 베트남의 혼령숭배 의례 : 가내 영역에서는 친족들이 함께 조상의 제단을 향해 절을 한 후, 개별적으로 외부의 제단으로 걸어나가 유령들을 위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한다.


6 유령의 변환


"유령 소금은 베트남인들의 역사적 상상력 속에 이미 구축되어 있는 관념이다. 그들의 가장 오래된 역사적 속담 중 하나가 바로 소금 섭취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은 하나의 사건을 익숙한 역사적 플롯 속에서 조급하게 설명하려고 할 때, 〈조상이 소금을 너무 많이 먹어서 자손들이 목마르다〉고 말한다. 이 플롯에서 진정한 인간의 욕망은 고립된 개인의 욕망이 아니다. 욕망을 느끼는 것은 개인이지만, 욕망의 근원은 영혼의 유령 소금과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에게 있을 수 있다. 바로 이 다른 누군가의 존재가 물을 짜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억하려는 욕망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발생하고, 기억하는 자아와 기억되는 타자 사이에 공유되는 무엇일 수 있다." "자아의 불완전한 자율성과 타자의 불완전한 수동성은 모든 형태의 기념의식과 사회적 교환에 내재할 것이다. 유령 소금의 경험은 기억하기의 간주관적(間主觀的, intersubjective)인 속성을 신체적으로 명확하게 만든다."(218-9)


"베트남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혼(hon)이라는 영적인 영혼과 비어(via)라는 물질적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은 자들의 갈증은 물질적 영혼이 느끼는 물질적인 현상이다." "내가 이해한 베트남인들의 대중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사후에 영적인 영혼은 반드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체성의 특성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망자의 물질적 영혼은 개별적으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의례기간 동안 생리 중인 여성의 참여로 인해 초래된 불경에 화를 내는 것으로 알려진 껌레의 고래사원 수호정령은 자신의 분노를 불경을 저지른 외부 방문자가 아니라 무고한 어촌 가족을 익사시키는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고래의 영적 영혼은 살아 있는 우리가 물질적 영혼을 통해 느끼듯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적이고 물질적으로 생각한다. 한 어촌 공동체의 고래신위에게 물질적 토대는 바로 그 공동체이다."(219-21)


"〈객사〉라는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은 영혼들을 내세의 감옥에 가두어버리고, 산 자들 측에서 그들의 비참한 존재에 대해 기억하지 않으면 이들 역사의 수감자 측에서는 불만의 강도와 양이 증가한다. 이러한 개념적인 도식에서, 산 자들은 행동하지 않음을 통해 망자들이 불만 증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살아 있는 세대가 비극적 죽음의 발생에 반드시 책임이 없을 수도 있지만(〈우연한 사고〉일 수 있다), 그들이 그 죽음을 점점 더 불만스러운 죽음으로 만들기는 쉽다. 이러한 기억 이론에서 트라우마는 망자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인 상처인 것이다. 산 자들이 타자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 이러한 윤리적 책임감을 의식하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실질적인 행동에 착수할 때 불만족이라는 축적의 경제는 기억이라는 분배의 도덕성에 굴복하게 된다. 망자들의 불만스러운 기억은 오직 산 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공유될 때에만 그 트라우마적 효과를 상실하게 된다."(261)


"베트남인들은 유령의 변환을 자이 오안(giai oan), 즉 〈불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는 〈감옥을 열다〉 혹은 〈감옥을 파괴하다〉라는 뜻의 자이 응욱(giai nguc)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이 관념은 비극적인 죽음의 역사가 망자의 영혼을 죽음의 치명적 드라마에 옭아매고 그것을 죽은 장소에 가두어서 저승에서의 삶에 부정적인 조건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죽음으로의 비극적 혹은 폭력적 이행은 사후에 감금의 상황으로 변화하며, 그 장소에 더 많은 새로운 운명적 수감자를 초래한다." "따라서 불만스러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쌍방향의 과정이다. 그것은 감옥 개방을 위한 주문 낭송, 그리고 여타 관련된 의례적 행위같이 공감하는 외부자의 개입을 반드시 수반할 뿐만 아니라, 운명의 수감자 스스로가 해방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또한 필요로 한다. 유령 출현은 이러한 자유를 향한 의지가 존재함을 증거하고, 통상 이를 토대로 외부자의 의례적 개입이 이루어진다."(260-2)


7 유령을 위한 돈


"죽음과 부는 다른 많은 문화적 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전통에서도 익숙한 조합이다. 베트남 전통 사회에서 부유함을 과시하는 주된 방법 중 하나가 죽음(혹은 결혼)과 관련된 의례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죽음과 관련해서 부를 과시하는 수단은 세 가지, 즉 조상 사당, 가족묘지, 장례식이다. 고인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부의 상징만이 아니었다. 고인의 호사스러움은 가족의 부 그 자체이기도 했다. 클리퍼드 기어츠에 따르면, 의례의 화려함은 〈사회질서의 단순한 반영일 뿐만 아니라 전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유하고 성공했다면 반드시 일반대중이 눈에 그렇게 보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부유함은 대중적으로 인정되는 형태로 과시되어 이웃과 친구들이 그의 부를 보고 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제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호사스러운 매장의례와 매장시설은 조상을 부유하게 만들고, 이것이 부유한 자의 위신에 중요한 조건으로 간주된다."(277-9)


"호우 칭-랑에 따르면, 호화로운 죽음이라는 개념은 삶을 은행 대출의 한 유형으로 간주하는 고대적인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 오래된 중국의 믿음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출생은 〈저세상의 금고(the Treasury of the Other World)〉 혹은 〈지옥은행(The Bank of Hell)〉의 대출 승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은 은행의 대출기록에 상징적으로 대응해서 전개된다. 이론적으로 한 개인은 삶의 조건이 소박할수록, 그리고 세속적 쾌락에 탐닉하지 않을수록 자신의 대출을 더 오랫동안 누릴 수 있다. 만약 그 사람이 대출금을 다 써버리고 사망하면 반드시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데, 이 부담은 통상 현재 도산 상태인 대출자의 자손에게 돌아간다. 그는 실질적이든 상징적이든 재화의 형태로 바치는 사후의 제물과 망자에게 돈을 바치는 연관된 관습이 고대 중국에서 거의 법적으로 의무적인 채무상환(호우에 따르면 〈사법적인 돈)〉 행위였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279)


"경제개혁 이후 베트남의 경제학은 대중적인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정치경제학의 혼합이다. 축적과 투자의 이론은 산 자의 세계에 적용된다. 절약은 내가 만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에게 1차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기술이자 국가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요소였고, 베트남의 국가체제 또한 자본의 축적에 몰두했다." "다른 한편, 망자와 관련된 경제적 영역에서는 자제의 미덕을 보기 힘들었다. 큰 돈은 죽음의 순간부터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진짜 재화를 망자와 함께 묻는 봉건 왕실의 매장 관습과 달리, 오늘날의 장례 산업은 그것이 재현하는 부의 아주 일부만 지불해도 되는 장례 제물 창고를 운영한다. 이 산업은 옛 공예인 길드의 한 병형으로 시장개혁 이후 번창해왔다. 이러한 망자를 위한 가상 경제에서는 현실 경제에서 어려운 일이지만 가난한 자가 부자 행세를 할 수 있고,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간의 차이도 현실의 삶에서보다 훨씬 덜 분명해진다."(281-2)


"1990년대에는 의례용 달러(베트남 발음으로 〈돌라Do La〉) 지전이 가내생활에서 익숙한 물건으로 자리잡았다. 이 특별한 봉헌 화폐의 기원에 관한 토착적 설명방식은 다양했다. 필자의 정보제공자 중 한 명은 일반적 교환 이론과 흡사한 설명을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부유해지면서, 말하자면 덜 가난해지면서, 빈곤과 폭력 외에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망자들과 자신의 부를 나누어 갖기를 소망한다. 미국 돈인가 베트남 돈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망자들이 우리 돈을 받을 수 있든 없든,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 있는 것, 즉 우리의 동기와 좋은 기분,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전쟁기간 동안 당 간부였던 이 남성에게 돈의 이면에 숨겨진 것은 나눔과 분배의 욕구이다. 혁명의 역사를 이렇게 우아하게 묘사하는 사람에게 이 공유의 욕구는 코코넛 나무가 코코넛을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인간성의 본질이다."(286-7)


"돌라 지전은 1990년대 말까지 베트남인들의 기념의례 경관에서 완전히 익숙한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돌라 지전의 번성을 신, 조상, 유령이라는 위계적 관념에 불확실성이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의례적 화려함을 (전시에 관한 정치학이 아니라) 전시(展示)의 정치학으로 해석하는 것, 그리고 상징적 권력이라는 연관된 개념을 돌이켜 보도록 하자. 나는 전통적인 질서 내에서 베트남의 의례용 화폐가 옹 바(신과 조상) 대 꼬박(유령)의 도덕적인 상징적 위계를 확정하는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돈이 위계적이고 동심원적인 질서를 지배했던 것처럼, 이제는 돈이 이 질서를 교란하는 수단으로 보인다. 돌라 의례용 화폐는 위계적으로 제도화된 가치의 영역들을 포괄하고,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던 이들 영역을 하나의 단일한 개념적 통일체로 통합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의례용 지전의 달러화가 함축하는 의미 하나가 명백해진다. 즉 달러화는 의례용 지전을 화폐화한다."(304-5)


"전통적인 의례용 화폐의 운동을 한정했던 눈에 띄지 않는 (전환불가능하고 내생적인) 가치의 영역들이 이제는 돌라의 초(超)영역적 순환에 취약한 상태에 처해 있다. 돌라는 내세의 재정경제를 단순화하고 다중심적 체계를 확장된 단일 영역으로 통합시켜왔다. 한편으로 기성의 신, 혹은 계보적으로 연결된 조상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연고 없이 길거리에서 떠도는 주변적인 유령 사이의 차이는 불타는 돌라 화폐의 힘과 인기에 비례해서 점점 더 주변화되어가고 있다. 달러화는 이러한 범주들 사이의 전통적인 위계를 붕괴시키고 엄(am, 저승) 세계 내 그들의 정치적 관계를 민주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 화폐는 주변적인 유령들과 의례조직의 중앙에 위치하는 의례적으로 수용된 조상 및 기성 신위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들 주변적인 유령은 거리에서 많은 돈을 벌고, 그들이 번 돈은 초자연적인 세계에서 다른 보다 지위가 높은 사회 계급과 권력경쟁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전환 가능한 통화이다."(305-6)


결론


"죽음의 재현에 존재하는 이중의 종교적 상징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논문에서, 로버트 허츠는 어떻게 사회가 오른손과 왼손 그리고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같이 명백하게 동일한 상징에 기초해서 개념적인 도덕적 위서체계를 구성하는지를 탐구했다. 그는 왜 유럽의 언어를 위시한 여러 언어들에서 오른편이 힘, 능란함, 신뢰, 법과 순수성─여기에는 허츠가 인용하는 민족지 자료에서 의례적·은유적으로 오른손과 연결되는 〈좋은 죽음〉이 포함된다─등 긍정적인 가치들을 재현하는 반면, 왼쪽은 이에 반대되는 모든 가치와 불길한 의미들─이는 그 〈불안하고 악의적인 영혼〉에 대해 사회가 배제의 태도를 견지한다고 여겨지는 〈나쁜 죽음〉을 포함한다─을 상징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허츠는 왼손과 오른손의 상징적 대조를 생정치적(bio-political) 현상, 즉 사회가 〈도덕적 세계의 가치 대립과 폭력적인 대조〉를 각인하는 인간 신체의 조건으로 개념화하였다."(316-7)


"허츠는 좌와 우의 반정립이 보완적인 양극성임과 동시에 비대칭적인 관계라고 보았는데, 전자는 이중적 인간(homo duplex)의 자연적인 조건이고 후자는 집합적이고 위계적인 규범을 개인의 몸에 부과함으로써 비롯된다. 더욱이 그는 상징적 양극성이 원시 사회 혹은 평등주의 사회에서는 〈역전될 수 있는 이원성〉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들 사회가 산 자의 삶과 관련해서 고정된 도덕적 위계를 가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망자의 삶에 관해서도 그러한 개념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적 역전성(reversibility)의 이러한 측면은 왜 평등주의 사회에서의 죽음의례(혹은 그것의 부재)가 위계적인 사회의 관찰에 입각해 있는 도덕적 위계와 상징적 정복의 이론에 충격적일 정도로 부합하지 않아 보이는가를 설명한다." "허츠는 사회적 진보에서 양능적 인간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양능적 인간 신체는 우파와 좌파라는 도덕적인 상징적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신체를 표상한다."(317-8)


"(냉전을 단순한 전쟁 억제가 아니라 폭력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으로서 경험한) 베트남의 수많은 개인과 가족들은 친족 관계가 있는 전몰자를 기억해야 하는 가족의 의무와 혁명국가에 대항해서 싸웠던 사람들을 기억하지 말아야 하는 정치적 의무 사이에서 고뇌해왔다. 오늘날 이들 가족은 지금까지 〈저편(ben kia, 미국 편)〉으로 오명화된 조상의 기억을 위해 적절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고심하고 있고, 따라서 이 기억을 가족과 공동체의 의례공간 내에 있는 〈이편(bent ta, 혁명의 편)〉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함께 명시적으로 공존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혁명전쟁의 반대편에서 죽은 형제의 혼령을 가내 의례로 초대하는 행위는 도덕적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실천이다. 그것은 그 행위가 국가의 기억의 정치학에 내재하는 죽음의 거대한 도덕적 위계에 반작용하는 한에서, 그리고 아렌트가 〈정치적 고향을 가질 권리〉로 묘사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이다."(321)


"보다 넓은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대규모 죽음의 역사에 대한 고려 없이 좌우의 역사를 생각할 수 없다. 좌와 우는 민족해방과 민족자결이라는 이상을 향해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양자 모두 반식민적 민족주의의 일부였다. 이어진 양극 시대에 이와 같은 민족주의는 민족적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상대편을 정치적 통일체로부터 절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된 내적 분쟁과 전쟁의 이데올로기로 변환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좌와 우의 정치적 역사는 인간적 삶의 역사 및 그것에 의해 분열된 사회제도로부터 분리해서 고려할 수 없으며, 냉전 이후의 〈새로운 친족〉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사 속에서 사망한 유해의 기억으로부터 분리해서 고려할 수 없다." "1990년대 초 이래 베트남에서 발생한 일들은 이러한 화해의 희망적인 궤적을 따라 이루어졌고, 망자를 기억하고 달랠 수 있는 권리의 강화는 좌우를 초월한 이와 같은 중요한 사회적 진보에 중심적인 요소였다."(32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극장국가 느가라 - 19세기 발리의 정치체제를 통해서 본 권력의 본질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용진 옮김 / 눌민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서론 발리와 역사적 방법


"느가라(나가라nagara, 나가리nagari, 느그리negeri)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차용된 말로 원래는 〈작은 도시town〉를 의미했으며, 인도네시아어에서는 〈궁전〉, 〈수도〉, 〈국가〉, 〈왕국〉 그리고 〈작은 도시〉라는 의미로 동시에, 그리고 호환 가능하게 사용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느가라는 (고전적) 문명, 전통적 도시 세계, 그 도시가 지탱했던 고급 문화, 그리고 그곳에 터를 잡은 상위의 정치적 권위 체계를 가리키는 단어다. 느가라의 반대말인 데사desa 역시 산스크리트어에서 차용된 말로, 느가라와 비슷한 정도로 유연하게 사용되며, 〈시골〉, 〈지역〉, 〈마을〉, 〈장소〉, 때로는 〈종속〉이나 〈통치 지역〉까지도 의미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데사는 인도네시아 군도 각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는 시골 지역의 정착지, 즉 농민의 세계, 소작인의 세계, 정치적 신민의 세계, 〈인민〉의 세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상호 대비적으로 정의되는 느가라와 데사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인도네시아의 고전적 정치체들이 발전해왔다."(14-5)


"19세기 후반의 발리가 군도의 여타 지역들과 달리 이슬람화 및 강력한 네덜란드 지배를 겪지 않았다 해도, 발리 국가 역시 한때 아주 널리 퍼져 있었던 통치 체계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따라서 느가라 모델은 그 자체로는 추상물이다. 비록 경험적 자료로부터 구성되었다 할지라도 이 모델은 다른 경험적 자료를 해석하는 데 있어 연역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으로 적용된다. 따라서 느가라 모델은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개념적 실체다. 한편 이 모델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사회문화적 제도인 19세기 발리 국가를 단순화하고 필연적으로 부정확하게, 이론적으로 편향되게 재현한 재현물이다. 다른 한편 이 모델은 5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고전시대 동남아시아의 인도식 국가라는, 발리보다 덜 알려져 있고 그 구조에 있어 반드시 혹은 아마도 발리와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유사하다고 추정해볼 수 있는, 일련의 제도들을 재현하기 위한 지침이자 일종의 사회학적 청사진이다."(25)


제1장 정치적 정의定義: 질서의 원천들


"발리 국가가 지향했던 바는 전제정도 아니고 심지어 질서정연한 통치체제도 아니었다." "발리 국가가 언제나 지향했던 것은 스펙터클과 의식, 그리고 발리 문화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집착인 사회적 불평등과 지위 자긍심을 공적으로 극화劇化하는 일이었다. 발리는 왕과 군주들이 흥행주, 사제들이 감독, 농민들이 조연 배우이자 무대 담당이자 관객이었던 극장국가였다. 거대한 화장의례, 삭치削齒의례, 사원에 드리는 봉헌, 순례, 그리고 피의 희생의례에는 수백 심지어 수천 명에 이르는 인력과 막대한 부가 동원되었는데, 이것들은 어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목적이었으며, 국가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위해 존재했다. 궁정의 의례주의는 궁정정치의 원동력이었다. 대규모 군중이 동원되는 의례는 단순히 국가에 버팀목을 대는 장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가 군중의례를 실행하기 위한 장치였으며, 이는 심지어 국가가 그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그랬다."(30-1)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발리 국가에는 지배의 실질적 측면과 장식적 측면이 기묘하게 전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배후에는 주권의 본성과 기초에 대한 발리인들의 일반적인 관념이 놓여 있는데, 이 관념을 간단히 모범적인 중심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이론에 따르면 왕의 궁정과 왕국의 수도는 초자연적인 질서에 대한 소우주, 즉 〈우주를 축소해놓은 이미지〉이며, 동시에 정치적 질서를 실체적으로 구현한다. 이 이론 안에서 궁정과 수도는 국가의 핵심이자 엔진이자 회전축에 그치지 않는다. 궁정과 수도는 바로 '국가 그 자체'다. 느가라 관념은 지배자가 위치한 곳과 지배 영역을 동일시하는데, 이는 단순하게 우연적인 은유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지배적인 정치 이념을 천명하는 행위이다." "사제들이 선언하듯이 궁정의례가 반영하는 것은 초자연적 질서이자 〈시간을 초월한 인도식 신들의 세계〉였으며, 인간들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엄밀하게 각자의 삶을 이 질서에 맞게 유형화해야 했다."(31-2)


"발리에서의 정치발전은 본래적인 통일성이 점차 다양성으로 분해되는 그림으로 제시된다. 좋은 사회를 향해 가차 없이 진보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완벽함에 대한 고전적 모델로부터 점차 쇠락해간다는 관념이 발리인들이 가진 정치적 발전 개념에 더 가깝다." "대부분의 발리인들에게 쇠퇴는 역사가 일어났어야 했던 방식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그렇게 일어난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노력들, 특히 영적 지도자와 정치적 지도자들의 노력은 역사를 뒤집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사건들이 교정될 수 없듯이 그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를 기념하는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없었다(이상적 상태로부터 연속적으로 후퇴하는 것을 기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발리인들은 오히려 역사를 무효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발리인들이 추구했던 것은 현재가 응당 모델로 삼아야 할 불변하는 유형이었다. 그렇지만 우연한 사고, 무지, 무절제, 태만 때문에 그 모델을 따르는 데 너무나도 자주 실패하기도 했다."(35-40)


"지역적 군주국들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게 정의된 선이라기보다는 상호 이해를 위한 구역〉이었으며, 〈근대 정치지리학에서 이야기하듯이 한 '나라'를 다른 나라로부터 고립시키는 맥마흔 식의 명확한 선〉은 아니었다. 그 경계는 오히려 일종의 전이지대였으며, 이웃하고 있는 정치 체계들이 그것을 통해 〈역동적인 방식으로 상호 침투하는〉 정치적 추이대推移帶였다. 이 다양하고 유동적인 장의 각 지점에서 일어나는 투쟁은 토지를 얻기 위해서보다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즉 사람들의 존경, 지지, 그리고 개인적 충성을 얻기 위해서 일어났다. 정치권력은 재산보다는 사람에 내재되어 있었고, 영토를 모으는 문제보다 위세를 모으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군주국 사이의 분쟁은 실질적으로 결코 국경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군주국 사이의 분쟁은 상호 간의 지위, 적절한 예의, 그리고 특정 집단의 사람 혹은 특정한 사람들을 국가의례 및 사실상 국가의례와 동일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권리를 둘러싸고 일어났다."(51-2)


제2장 정치적 해부: 지배계급의 내부 조직


"전통시대의 발리 남부에서 나타났던 세력 균형 형태는 매우 복잡했는데, 그런 세력 균형의 기반이 되는 제도도 마찬가지로 복잡했다. 이 제도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귀족과 농민 사이를 근본적이고 귀속적으로 구분하는 제도였다. 한쪽에는 자신이 보유하는 칭호에 근거하여 마을 범위를 넘어서는 권위에 대해 태생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인구의 약 90퍼센트에 속하는 다른 쪽에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칭호가 그런 권리 주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자는 집합적으로 뜨리왕사triwangsa, 〈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불렸으며, 〈카스트〉(즉, 바르나varna)의 상위 세 집단인 브라흐마나, 사뜨리아Satria, 웨시아Wesia로 구성되었다. 후자는 네번째 집단인 수드라 〈카스트〉로 구성되었다. 웡 저로wong jero 혹은 대략 〈내부자〉라고 지칭되는 전자의 집단에서 발리의 지도자들이 나왔고, 웡 자바wong jaba 혹은 〈외부자〉라고 지칭되는 후자의 집단에서 추종자들이 나왔다."(53-4)


"국가조직이 의존하고 있던 두번째 제도이자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중요했던 제도는 바로 이례적이고 심지어는 독특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다양한 친족 체계였다. 모든 상위 카스트 구성원들은 그 힘과 크기가 다양한 남계男系 출계집단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이 출계집단은 현대 인류학 문헌들에서 흔히 묘사되어 온 종족宗族(lineage)과는 구조적으로 상당히 달랐지만 그런 구조적 차이를 차치한다면 여전히 종족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만한 집단이었다." "출계집단의 지위는 시간과 함께 변화했고 새롭게 이질화된 출계집단의 생성과 더불어 변화했다. 오래된 하위 집단들은 새로운 집단이 출현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지위가 하락했다. 이 결과 위계적이고 매우 유동적이지만 상당히 체계적인 출계집단 구조가 나타났는데, 정치적 권위를 실제로 분배하는 일은 바로 이 구조에 의존했다. 신분에 따른 칭호 체계가 정당성을 부여했다면 친족 체계는 그것에 구체적인 사회적 형태를 부여한 셈이었다."(56-7)


"이 체계의 기본 단위는 발리인들이 보통 다디아dadia라고 부르는 집단으로, 종족 혹은 문중과 유사한 집단이다. 다디아는 공통의 조상을 둔 남계 친족원 모두로 이루어져 있다." "다디아는 결코 출계, 지역 연고, 〈카스트〉에 기반을 둔 더 큰 단위의 집단으로 합쳐지지 않는다. 또한 비록 다디아가 내적으로 고도로 분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의미에서 다디아는 분열이 불가능하다." "다디아는 성장함에 따라 그 내부에 자신과 동일한 종류의 일반적 질서를 가진 하위 집단들을 발전시켰다 다시 말하면, 내혼을 선호하는 남계 친족의 뚜렷한 집합이자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야심을 품은 조합체를 다디아 내부에 형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조합체이자 상호 독립적인 단위임에도 불구하고, 이 하위 집단들은 자신들의 어버이에 해당하는 다디아에 대해서는 독립적이지 않다고 간주되었다. 어버이 다디아는 명시적으로 법적,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우월성을 지녔다."(57-8)


"마을 범위를 넘어서서 권위를 행사할 자격이 있는 뜨라왕사 귀족과 그런 자격이 없는 수드라 농민으로 인구를 양분하는 신분제, 하락하는 지위라는 원칙을 통해 귀족 자체를 분화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는 다디아 체계, 이 두 가지에 더하여, 〈국내〉 정치에 특정한 형태와 특성을 부여하는 제3의 사회제도가 하나 더 있다. 이는 바로 후견인 제도이다. 후견인 제도가 비록 〈카스트〉 및 친족제도가 정립해 놓은 일반적인 맥락 안에서 작동하기는 했지만, 후견인 제도는 양자와는 분명히 달랐다. 왜냐하면 후견인과 추종자 사이의 관계는 생득적이기보다는 계약적이었고, 확산적이기보다는 한정적이었으며, 법적이기보다는 비공식적이었고, 체계적이기보다는 불규칙했기 때문이다. 후견인 제도를 통해서 지위와 혈연이라는 고정된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그 경계 내에서 관계를 재조정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 후견인 제도는 신분제도의 엄격성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탈출구였다."(67-8)


# 후견 관계인의 주요 성격

1. 정치적 관계 : 높은 지배적 다디아와 낮은 지배적 다디아 사이의 관계

2. 종교적 관계 : 지배적 다디아와 성직자 다디아 사이의 관계

3. 경제적 관계 : 지배적 다디아와 소수민 공동체 사이의 관계


"마지막으로, 국가 조직과 관련된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 이것은 가장 덜 실재적이고 가장 불안정하며 몇몇 일시적인 순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사소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명백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지적하는 이 마지막 차원은 후견 및 추종 관계라기보다는 동맹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따라서 해당 관계의 성격이 비대칭적이라기보다는 대체로 대칭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형으로, 해당 지역에서 지배적인 여러 다디아들이 지역 간 횡적 연계를 맺는 유형이다. 이런 동맹 관계는 곡예사들이 몸으로 만든 피라미드의 정점과 같았으며, 카드를 쌓아 올려 만든 집의 휘청거리고 불안정한 꼭대기와 같았다." "19세기 발리에서 꼭대기 자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모든 동맹은 조만간(대체로 일찌감치) 깨지고 말았다. 섬 전체를 아우르고자 하는 모든 야심은 방해받기 일쑤였으며 〈영적인 단일성〉이나 〈죽을 때까지 굳건한 형제애〉를 두고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일은 공허할 뿐이었다."(77-8)


제3장 정치적 해부: 마을과 국가


"발리에서는 국가가 마을을 만들어냈듯이 마을도 국가를 만들어냈다. 마을과 국가가 지속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상대방에 대해 반응을 했고, 그런 과정을 통해 같이 나란히 성장해왔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강력하게 입증해주는 지표가 있다. 20세기 이전 발리에 엄밀한 의미의 도시 주거구역이 실질적으로 부재했다는 점이 바로 그 지표이다. 하나의 강력한 다디아 안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귀족 가문들은 자신들의 형이상학적 청사진에 부합하게 거주지를 정했다. 그들에게 있어 모범적 중심이었던 핵심 직계 왕의 궁전 주변에 전략적으로 모여 사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왕족 신분에서 더 많이 하락했다고 간주되는 2차적, 3차적 귀족 가문들은 대체로 중심부와는 떨어져 있는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그곳에 있던 〈가문들〉과 〈궁전들〉은 수도에 위치한 가문이나 궁전보다 단계가 낮은 모방품이었지만, 지역민의 삶 속에 정착해서 그들에게 모델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91)


"국지적 규모의 기반을 가진 정치 형태들은 세 가지 영역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그 세 가지 영역이란 (1) 공동체 생활의 공적 측면에 대한 질서화(반자르banjar, 작은 촌락), (2) 관개시설의 관리(수박subak, 수리관개 조직), (3) 민간 의례의 조직화(뻐막산pemaksan, 사원을 중심으로 한 신도집단 혹은 회중)였다. 이 세 개의 제도 주위에는 그 자체로 비정치적이면서 특수한 초점을 가지고 있는 집단들, 예컨대 친족집단이나 자발적 결사체 등이 존재했는데, 그 결과, 중첩되고 맞물려 있으면서도 구별되어 있는 조합체들이 작은 쇠사슬을 엮어서 만든 갑옷처럼 연쇄를 이루어 복합적인 정치적 질서를 만들어냈다." "결국 느가라와 마찬가지로 발리의 데사는 경계가 분명한 하나의 실체라기보다는 다양하게 조직되어 있고 다양한 초점을 가진, 그리고 다양하게 상호 연계된 사회집단들의 확장된 장이었다. 이는 내가 다른 곳에서 〈다원적 집합주의〉라고 불렀던 유형에 해당한다."(94-5)


"마을 정치체를 구성하는 이 세 개의 주요 요소들, 즉 반자르banjar, 수박subak, 뻐막산pemaksan이 동위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각각의 성원권은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교차하고 중첩된다. 실제로 거의 모든 경우 하나의 수박에는 여러 반자르, 여러 뻐막산의 구성원들이 섞여 있다." "이 세 개의 조합적 형태들은 늘 데사 체계의 정치적 핵심을 형성해왔다. 이 핵심적인 세 개의 조합적 형태 주변에 〈다원적 집합주의〉의 다른 비동위적 구성물들(친족집단, 자발적 결사체 등)도 운집해 있다. 우리는 특권, 의례, 과시가 작렬하는 것을 국가라고 불러왔는데, 발리에서 이 국가가 관계를 맺어야 했던 것은 소위 통합적인 〈마을 공화국〉이 아니라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은 종류의 정치 체계였다. 이 정치 체계는 발리 사람들이 스까seka라고 부르는 것으로,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서로 구분되어 있는 집단들이 부분적으로만 정연하게 모여 있는 것이며, 통합적인 상태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104-5)


"이득이 많이 나는 원거리 교역은 인도네시아에서 〈역사적인 상수〉였다. 16세기와 17세기 항료 교역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식민지배를 초래하기는 했지만, 이 폭발적 성장은 그 〈상수〉가 가장 가시적이고 극적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었다. 기번이 〈화려하면서도 하찮다〉고 특징지었던 종류의 모험 상업 계층은 언어, 문화, 정치, 인종, 종교적 측면에서 통일성이 부족했던 인도네시아 군도에 상업적 측면에서의 통일성을 부여했다. 발리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발리가 이 교역으로부터 대체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발리는 남쪽으로 인도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인도양은 항구가 빈약하고 물길이 험해서 교통량이 거의 없었다. 반면 아시아의 지중해라고 할 수 있는 발리 북쪽 자바 해를 따라서는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 자바인, 부기스인, 말레이인, 그리고 유럽 상인들이 마치 수많은 거리 순행 행상인들처럼 빈번하게 왕래했다. 격리와 고립이라는 발리의 명성 중 많은 부분이 이 사실에 기인한다."(161)


제4장 정치적 언명: 스펙터클과 의식儀式


"고전적인 느가라에서 의례생활은 신앙의 형식인 만큼이나 수사학의 형식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의식이나 의례는 영적인 힘을 화려한 방식으로 뽐내면서 주장하는 행위였다. (헬름스가 목격한, 죽은 왕을 화장하는 화장터에서 후궁 세 명이) 산 채로 불길에 뛰어드는 행위는 왕가 구성원들이 삭치의례, 사원 봉헌식, 서임식, 뿌뿌딴에서의 자살 등을 통해 단정적으로 내세우려던 주장과 동일한 종류의 주장을 내세우는 행위였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더 장엄한 방식으로 주장했을 뿐이었다. 이들이 주장한 명제의 내용은 사회적 지위와 종교적 조건 사이에 깨뜨릴 수 없는 내적 연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국가의례는 국가에 대한 의례가 아니었다. 국가의례는 종교적 어휘들을 통해 집요하게 반복되는 하나의 주장이었다. 그 주장의 내용은, 속세에서의 지위에는 우주론적 기초가 있고,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는 바로 위계 서열이며, 인간생활의 질서는 신성한 존재들의 질서에 대한 대략적인 근사치일 뿐이라는 것이었다."(186)


"궁정의례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발리인들은 사물의 궁극적 존재 방식 및 그에 따라 인간이 행동해야 하는 방식에 대해서 자신들이 가진 가장 포괄적인 관념을 제시할 때, 그것을 담론적으로 파악되는 명시적 〈믿음들〉의 질서정연한 집합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즉각적으로 파악되는 감각적인 상징들, 즉 조각, 꽃, 춤, 멜로디, 몸짓, 노래, 장식, 사원, 몸동작, 가면 등을 통해 주조해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포괄적 관념을 요약하려는 시도는 모두 의심스럽게 보일 뿐이다. 관련된 문제가 광의의 포이에시스poiesis(〈만들기〉)라는 의미에서, 여기에서의 메시지는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체에 너무나 깊게 침전되어 있고, 따라서 만약 이것을 명제들의 연망으로 전환한다면 주석註釋 달기라는 행위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첫째는 실제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잘못이고, 둘째는 풍요로운 의미적 특수성을 칙칙한 일련의 일반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잘못이다."(187-8)


"부와나 아궁(존재 영역)과 부와나 알릿(감각 영역)이 상징적으로 융합되는 지점은 모든 왕가의 의례가 환원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광범위한 메타 정치적 주장에 따르면, 느가라가 의례 속에서 기념하는 문화적 형태와 느가라가 사회 속에서 취하는 제도적 형태는 동일하다. 링가와 왕, 왕과 영주, 영주와 평민, 빠드마와 궁전, 궁전과 왕국, 왕국과 마을, 슥띠와 지위, 지위와 권위, 권위와 존경, 이 모든 것들은 국가의례를 통해서 저로(귀족)와 자바(평민)라는 대립항 속 상응물이 된다. 그 모든 것들이 엄청나게 화려한 이유는 연극과 장식을 통해서 정치적 비유의 권위 유형을 확립하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시바가 여러 신들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는 신이 왕에게, 왕이 귀족에게, 귀족이 뻐르버끌(평민 관리인)에게, 뻐르버끌이 민중에 대해 맺고 있었다. 〈내부〉와 〈외부〉, 〈작은 세계〉와 〈큰 세계〉, 혹은 무르띠에서 슥띠로의 이동 등으로 표현되는 이 모든 것들은 동일한 실재의 다양한 판본들이었다."(197-8)


"(국가의례에서) 영주는 〈신성한 형태〉의 〈활성화된 상태〉 중 하나가 되는 동시에, 그 자신으로부터 차후의 활성화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신성한 형태 중 하나였다. 상징적 세부사항이 얼마나 변이를 보였든 간에, 의례의 의미 구조는 일정했다. 경험된 것의 〈작은 세계〉와 경험 가능한 것의 〈큰 세계〉는 두 방향으로, 즉 안으로는 연꽃 속 링가 쪽을 향해서, 바깥으로는 사회 속 국가를 향해서 놓였다. 이렇게 〈작은 세계〉와 〈큰 세계〉는 영주를 권력에 대한 이미지(즉, 무르띠)로,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구체적인 예(즉, 슥띠)로 재현했다. 기본 어법은 역시 모방적이다. 민중들은 시바를 모범적인 형상으로 보고 왕을 그 활성화된 형태로 바라보았으며, 왕을 모범적인 형상으로 보고 국가를 그 활성화된 형태로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민중들은 국가를 모범적인 형상으로 보고 사회를 그 활성화된 형태로 바라보았으며, 사회를 모범적인 형상으로 보고 자신을 그 활성화된 형태로 바라보았다."(198-9)


"왕의 사망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실제로 시신을 태우는 일을 거쳐 일련의 기이한 사후의례에 이르기까지 화장의례 전체를 다 치르려면 여러 달이 걸렸다. 화장의례의 핵심은 중대하고 신성한 세 개의 날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각은 정화의 날Pabersihan, 경의의 날Pabaktian, 그리고 소멸의 날Pabasmian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리 의례들과 마찬가지로, 이 핵심적인 행사를 전후로 한쪽으로는 지속적으로 점증하는 준비 과정이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지속적으로 내려오는 마무리 과정이 있었다. 일의 중요성은 본류가 되는 중심 행사뿐 아니라 서막(의례용 장치 건설하기, 공물 모으기, 축하연 조직하기)과 후렴구(추상, 재, 무늬, 혹은 꽃을 사용하여 타들어가는 시신을 강박적으로 다시 재현해내기)에도 놓여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화장의례는 발리인들이 까르야 라뚜karya ratu, 즉 〈왕의 일, 왕의 작업, 왕사王事〉라고 부르는 일종의 강제노역이었으며, 이 안에서 봉사노동과 숭배행위는 동일한 것이 되어버렸다."(212)


"화장의례의 중심 행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세 가지 상징적 에너지가 거대하게 분출한다는 점이었다. 상징적 에너지가 사회적으로 분출된 것은 의례 행렬, 미학적으로 분출된 것은 화장탑, 자연적으로 분출된 것은 바로 불이었다. 흥분한 군중과 호화로운 상여, 그리고 자유분방하게 막 쌓인 장작더미는 행사의 기본적인 분위기를 설정해놓았는데, 이 기본적인 분위기는 애도라기보다는 야유회에 가까웠다." "그래서 화장의례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죽은 자에 대한 의례가 수상쩍을 정도로 과대해진 것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산 자들이 위세 전쟁을 하면서 저돌적인 공격을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호리스는 발리의 화장의례가 힌두교 도래 이전에 존재하던 포틀래치 관습이 잔존하여 인도화된 형태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는데, 이는 민족학적 견지에서 볼 때 수용하기 곤란한 견해이다. 그러나 호리스의 지적은 화장의례의 정신, 즉 발리식의 과시적 소비를 충분히 잘 포착해내고 있다."(211-4)


"왕의 의례들은 구경거리 행렬이라는 형태 속에서 발리 정치 사상의 중심적 주제를 상연해냈다(이런 점에서는 삭치의례, 서품식, 왕국 영내 정화의례, 사원 봉헌식 등도 화장의례와 다르지 않다). 그 주제란 곧 중심은 모범적이고 지위는 권력의 근본이며 국가 통치술은 연극 상연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이보다 더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그 구경거리 행렬은 단순히 미적인 장식도 아니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배를 예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행렬들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것이었다. 중심 중의 중심, 세계의 축이 되기 위한 경쟁은 바로 그 자체로 경쟁을 위한 경쟁이었다." "즉 사회 전체가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위세에 대한 정교하고 끝없는 경쟁에 갇혀 있었으며, 이 경쟁이야말로 발리적 삶의 추진력이었던 것이다." "왕의 화장의례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화장의례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가 격화된 것이었다."(217-8)


결론 발리와 정치 이론


"느가라를 국가로 번역한다면 통문화적 번역을 할 때 빈번하게 저지르는 실수를 반복하는 꼴이 된다. 서구인의 입장에서는 궁전, 소도시, 수도, 왕국, 문명 등이 구분되지만 느가라 안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다. 느가라가 지시하는 종류의 정치체에서는 지위, 웅장함, 통치 사이의 상호작용이 가시적일 뿐 아니라 사실상 공공연하게 드러난다." "국가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16세기 이래 서구에서 발전되어 온 개념들이 있다. 영토 내에서 폭력을 독점하는 존재,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 인민 의지를 대표하는 대리인,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 등이 바로 그런 개념들이다." "그런데 국가를 이해하기 위한 서구의 개념들 중 그 어떤 것도 국가권력이 가진 상징적 측면의 특징을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했다. 정치적 삶에서 명령과 복종이라는 개념으로 쉽게 환원될 수 없는 권위의 차원들은 고작해야 비정상적인 생성물, 신비, 허구, 장식물 등으로 이루어진 막연한 세계로 표류해 가도록 방치되었을 뿐이었다."(220-1)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부터 드 주브넬의 미노타우로스에 이르기까지, 국가권력을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있다. 이렇게 국가를 〈거대한 짐승〉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그런 위협에 직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공공 영역에서 행진이나 의식이 맡은 기능이라고 본다. 호주 원주민의 종교의식용 악기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기계와 마찬가지로, 그런 행진과 의식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그들로부터 전율할 정도의 경외감을 유발해내는 일종의 어두운 소음이라는 것이다. 그다음, 좌파로는 마르크스에서부터 우파로는 파레토에 이르기까지, 하층민들로부터 잉여를 짜내서 엘리트가 가져가 버리는 능력을 강조하는 관점이 있다. 이렇게 국가를 〈거대한 사기〉로 보는 관점에서는 국가의례를 신비화라는 견지에서 이해하는데, 이때 국가의례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영성을 부여하고 물질적 갈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222-3)


"또 한편 국가는 공동체로부터 나오며 국가는 공동체 정신의 연장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 국가에 대한 이런 인민주의적 개념을 채택하면 자연스레 국가를 더 찬양하는 방식으로 공식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국민의 의지를 실행하는 도구라면, 국가의례는 국민의 의지가 숭고함을 공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다원주의적 이론들, 고전적 자유주의 이론 및 그 계승자인 압력단체론이 말하는 이해관계의 균형이라는 관점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국가의 과시적 장식물을 도덕적 정당성 안에서 부여된 절차에 옷을 입히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이라고 본다. 정치란 확립된(〈합헌적인〉) 게임의 규칙 안에서 한계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교묘하게 조종을 하는 일이며, 언제나 정치를 따라다니는 가발이나 법복이 하는 역할은 그 게임의 규칙이 잘 확립된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 규칙이 규제하기로 되어 있는 당파적 투쟁을 규칙 위로 올려놓거나 규칙 아래로 끼워 넣는 일이라는 것이다."(223)


"고전시대 발리 문화의 성격 및 그것이 지탱했던 종류의 정치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이 많다. 그렇지만 지위가 지배적인 강박관념이었으며 화려함이 지위 유지를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이었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문자 그대로 〈자리〉를 의미하고 일반적으로는 서열, 신분, 위치, 장소, 칭호, 〈카스트〉를 의미하는 링기linggih는 발리 사회에서 공적 생활이 돌아가는 축이었다(지위 확인을 요구하는 표준적인 방법은 〈어디에 앉으십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지위는 신성함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정의되고,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타고나는 것들 중 하나이며, 삶이 전개되면서 일어나는 우연적 사건들과는 거리가 멀다. 발리에서의 지위 및 지위를 둘러싼 강박적 충동이 활성화하는 감정과 행동 대부분에 해당하는 등가물을 우리 사회에서 찾는다면 바로 우리가 정치적이라고 부르는 영역이 될 것이다. 느가라를 이해하는 것은 그러한 감정들을 위치시키고 그러한 행위들을 파악하는 것이다."(224-5)


"다른 무엇보다도, 발리 국가는 현실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에 대한 재현이었다. 그 거대한 형상 안에서 끄리스 같은 사물, 궁전 같은 구조물, 화장의례 같은 관행, 〈안쪽〉과 같은 관념, 왕가의 집단 자살 같은 행위 등이 잠재력을 유지하며 존재했다. 정치란 본래적인 열정을 변함없이 유지하며 유희하는 것이라는 개념, 그리고 특정한 지배제도는 단지 착취를 위한 수많은 장치에 불과하다는 개념은 그 어디에서나 오류일 뿐이다. 그런 개념들이 부조리하다는 점은 발리 사례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권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왕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동일했다. 개별 왕들은 등장했다가 사라졌고, 〈가련하게도 단지 지나갈 뿐인 사실들〉은 칭호 안에서 익명화되었으며 의례 안에서 고정되었고 모닥불 안에서 소멸되었다. 그러나 왕들이 재현했던 것, 즉 질서에 대한 모델과 복사라는 관념은 적어도 우리가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시기 동안에는 발리에서 변하지 않았다."(225-6)


"중동과 아시아에 있는 전통적 위계제 국가들에서는 세 가지 주요한 왕권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이집트, 중국, 혹은 수메르와 같은 고대 관료제의 경우 왕 스스로가 최고위 사제였다. 왕국 내의 안녕은 의례를 집전하는 왕의 주술적 힘에 달려 있었고, 다른 사제들은 단지 왕을 보조하는 성직자에 불과했다. 둘째, 하나의 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서 왕은 뒤몽의 표현을 따르자면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관례적인〉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인도의 왕은 〈고유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지배자였다. 인도의 왕을 내세와 의례적으로 연결해준 것은 사제들이었으며, 그를 현세와 행정적으로 연결해준 것은 관료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여타 동남아시아 대부분 지역과 마찬가지로 발리에서는 왕이 단순히 성구 보관인이 아니라 세계의 신비로운 중심이었다. 그리고 사제는 왕의 신성성에 대한 표장이자 구성요소였으며, 〈왕의 공적 인격체가 연장된 존재〉였다."(229-30)


"발리에서 왕은 마치 인간 형태를 한 일종의 표의문자로 존재하기 위해서 개인 정체성과 의지를 포기한 존재처럼 보인다. 사제를 왕의 보석으로 묘사하고 왕국을 왕의 공원으로 묘사했던 의례는 왕을 왕의 도상으로 묘사한다. 그러니까 왕을 왕권에 대한 성스러운 유사성이라고 묘사한 셈이다." "왕은 궁정의례 속에서 분투적으로 자신을 기호나 이미지로 전환하려고 노력했다. 기호 체계 안에 있는 하나의 기호이자 이미지의 장 안에 있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왕은 그 위계가 비물질화되는 지점에 〈앉아서〉 순수한 관념계로 넘어가는 문턱을 표시했고, 바로 그 점에 있어서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었다. 그러나 능동적인 수동성이라는 역설, 〈회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점〉(T. S. Eliot)이라는 말처럼 움직이지 않고 단호하게 앉아 있는 행위라는 역설은 더 멀리 확장되었다. 왜냐하면 기호로서의 왕은 고요한 영혼이 지닌 차분하고 온화한 특징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영혼이 지닌 순진하고 엄격한 특징 역시 전달했기 때문이다."(237-9)


"그러나 왕은 정치적 행위자이기도 했으며, 기호 중의 기호였던 만큼 권력 중의 권력이기도 했다. 물론 왕을 만들어내고 그를 영주에서 도상으로 성장시킨 것은 바로 왕의 의례였다. 왜냐하면 평온한 신성성이라는 이미지는 극장국가의 드라마 없이는 심지어 형태를 취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드라마의 상연 빈도, 화려함의 정도, 규모, 그리고 그에 따라 그 드라마가 세계에 각인시키는 인상의 범위는 그 드라마를 상연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충성의 범위가 얼마나 포괄적이냐에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해, 인력, 기술, 물자, 지식을 동원하는 일이 국가통치술의 가장 기초적인 업무이자 가장 중요한 기예에 해당했으며, 물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패권은 바로 그런 능력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요하게 앉아 있는 행위, 심지어 열정적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행위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권력에 대한 최고의 재현이 되기 위해서는 권력 내부에서 교통하는 것도 필수적이었다."(240-1)


"빛나는 정상을 향해, 만물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려는 야심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즉,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실질적 어려움을 제외하고, 이 상황은 느가라 정치에 한 가지 역설을 초래했다. 이 역설은 국가통치술도 국정 수행자도 완전히 해소할 수 없는 역설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역설은 느가라 정치에서 핵심적인 정치동학이 되어버렸다. 그 역설이란 누군가가 권력의 이미지화로 가까이 갈수록 그 사람은 권력을 통제하는 장치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생긴다는 역설이었다." "기저부로 갈수록 느가라는 기능적이 되었고, 혹은 발리인들이 말하듯 〈조야〉해졌고, 정점으로 올라갈수록 느가라는 미학적이고 〈세련〉되어졌다. 특히, 정상 가까이, 즉 〈멀리까지 비추는 장엄한 광휘〉가 그렇게도 많은 연료를 소비했던 정상 가까이에서는 양자의 충돌이 가장 강력하고 불가피했다. 느가라는 위계의 본성에 대한 모델 자체였던 것이다."(241-3)


"때로는 유혈적이고 때로는 의례적인 행위 구조였던 느가라는 그 자체로 동시에 생각의 구조이기도 했다. 따라서 느가라를 묘사하는 작업은 소중히 안치된 일군의 관념들을 묘사하는 작업과 같다." "관념은 이제 더는, 사실 상당 기간 이전부터, 관찰할 수 없는 정신적 존재가 아니다. 관념은 매개물에 올라타서 움직이는 의미이며, 이때 매개물은 바로 상징이다(다른 용법에서는 상징이라는 단어 대신 기호라는 단어를 쓴다). 상징이란 외연을 표시하고 기술하고 재현하고 예증하고 명명하고 지시하고 환기하고 묘사하고 표현하는 그 무엇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곧 상징에 해당한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간間주관적이고, 따라서 공적이며, 따라서 공공연하고 쉽게 수정 가능한 외광파 화풍plein air 식의 설명에 의해 접근이 가능하다. 논쟁, 선율, 공식, 지도, 그림 등은 응시해야 하는 관념적 대상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텍스트다. 의례, 궁전, 기술, 사회형성체도 마찬가지다."(247-8)


# 외광파外光派 : 자연 광선에 의한 회화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그리는 화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리의 정치가 상징적 행위였다고 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신 속에 존재했다든가 모든 것이 춤과 향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발리 정치의 양상들, 예컨대 모범적 의례, 모델과 모방의 위계, 표현적 경쟁, 도상적 왕권, 구조적 다원주의, 개별화된 충성, 분산적 권위, 연맹을 통한 지배는 발리 섬 자체만큼이나 농밀하고 즉각적인 실재를 구성했다. 궁전을 건설하고 조약문의 초고를 쓰고 지대를 징수하고 교역권을 임대해주고 혼인을 주선하고 경쟁자를 해치우고 사원에 기부하고 화장에 쓰일 땔감을 쌓고 연회를 주최하고 신을 이미지화하면서 이 실재를 관통하여 지나온 남자들(그리고 배우자이자 책사이자 지위 표시물이었던 여자들)은 그들이 보유했던 수단을 가지고 그들이 개념화할 수 있었던 목표를 추구했다. 자신 스스로를 모방하는 극장국가의 드라마는 결국 환상이나 거짓이 아니었으며 손재주나 속임수도 아니었다. 극장국가의 드라마는 실제로 그곳에 존재했던 실체였다."(249-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밀정, 우리 안의 적
이재석 외 지음 / 지식너머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장 축제의 시간에 돌아본 '우리의 그늘'


"〈이범윤의 부하 김익준이라는 자가 얼마 전 간도로 와서 잠복하고 있다는 설이 있어서 밀정을 시켜 탐색하게 했습니다. 우리 밀정은 이 사람을 교묘한 방법으로 대안對岸 온성穩城으로 유인했고 헌병대가 그를 체포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1년3월 간도총영사가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중 일부다. 이런 식의 서술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이렇게 밀정의 밀고를 토대로 작성된 내부 기밀 보고서는 일본 자료실과 공공기간 곳곳에 남아 있다. 너무 많다. 너무 많아 다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취재 기간 동지들에게 치명적인 정보를 일제에 속속 전달하는 또 다른 동지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씁쓸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의 세세한 밀고 덕분에(?)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내역이 소상히 드러나는 역설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밀정의 밀고가 없었다면 항일운동의 역사도 쓰일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우스갯소리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가 싶었다."(12-4)


2장 임시정부의 얼굴, 누가 빼돌렸나?


"1919년 7월 9일, 조선군참모장 오노 도요시는 육군차관 야마나시 한조에게 사진이 송부된 보고서를 올린다. 〈이 사진은 상하이에 있는 배일 조선인 간부 및 결사자 200여 명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 나오는 사람에게 한 명당 한 장 외에는 절대로 더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분실할 때에는 제재를 받는다는 서약 아래 엄밀하게 보관된 것입니다.〉 1919년 4월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이 보고서가 7월에 작성됐으로, '상하이에 있는 배일 조선인 간부 및 결사자 200여 명'은 임시정부 사람들을 말한다." "사진을 입수하기 위해 일제가 동원한 수단이 있었다. 드디어 밀정이 등장한다. 〈프랑스 조계 장안리에 있는 배일 조선인 상인 곽윤수─인삼을 팔아 모은 돈을 임시정부에 지원하고 자신의 집을 임시정부 사무실과 숙소로 제공했다. 2010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됐다─의 집에 걸려 있던 것입니다. 곽윤수의 처남을 시켜 은밀히 짧은 시간 동안 밀정에게 가져오게 해서 복사한 것입니다. 이를 송부합니다.〉"(24-33)


3장 항일운동의 또 다른 서술자, 밀정


"밀정 엄인섭은 연해주 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명이다. 1907년부터 반일 의병운동에 적극 가담한 그는 최재형, 홍범도, 이범윤과 긴밀했고, 안중근 의사와도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뤼순 감옥에서 심문받을 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활할 당시 엄인섭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1908년 안중근이 항일을 다짐하며 손가락을 끊었던 그 유명한 '단지동맹'을 할 당시, 엄인섭도 여기에 동참한 사람 중 하나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간도 15만 원 탈취 사건의 거사 주인공들 중 일부가 엄인섭에게 사건 전말을 털어놓는 것을 잠시 불안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연해주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장 출신인 그를 밀정으로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그들은 러시아 쪽에 발이 넓은 엄인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은신처를 포함한 모든 정보가 엄인섭의 입을 통해 일제에 고스란히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54-5)


# 간도 15만 원 탈취 사건 : 비밀결사 철혈광복단의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최봉설 등이 조선은행의 현금 수송 행렬을 습격해 돈을 탈취한 사건. 15만 원은 현재 가치로 1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4장 안중근의 동지, 그가 걸어간 '다른 길'


"1909년, 안중근에게는 동지가 있었다. 마지막 격발의 순간에는 혼자서 결단하고 감행했지만, 세 명의 동지가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가 그들이다. 역할 분담이 있었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을 맡고,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자거우역을 맡았다 .유동하는 중간 연락책과 통역을 맡았다." "조선인회(또는 조선인민회)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보조기관이자, 독립운동가와 일반 조선인들을 떼어놓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일본 경찰이 배치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별 조선인민회가 만들어졌고 지역별 민회에는 회장, 부회장, 주사와 서기, 대의원을 두었다.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교육 사업이나 위생 관리 같은 통상적 업무를 수행하고 일본 행정기관의 명령을 하달하기도 했지만, 독립운동 탄압을 지원하고 만주 지역 조선인 사회의 동향을 감시했다. 이를 위해 상시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다. 1925년의 우덕순은 그런 대표적 친일단체의 하얼빈지회 회장이 되어 있었다."(68-72)


5장 김좌진 최측근이 밀고한 '배신의 기록'


"그는 김좌진 장군의 막빈幕賓, 그러니까 비서이자 참모였다. 그 자신도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을 상대로 빛나는 승전을 거뒀다. 대한민국도 마땅히 그를 인정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그는 전장에서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1920년 청산리 전투가 있기 직전, 자신이 몸담고 있던 독립군 부대 북로군정서의 내부 상황을 적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1924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극비 문서에도 등장한다. 1924년이면 청산리 전투가 있고 4년 뒤다. 안타깝게도 그사이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독립군 참모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탈바꿈했다. 그의 이름은 이정李楨이다." "그가 밀고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외무성 기밀문서의 분량은 무려 57쪽에 달한다. 독립군 간부의 인상착의와 특징, 군자금 모금 책임자와 활동 내용, 김좌진과 김원봉의 공동 의거 계획 등 대한독립군단의 온갖 치명적 정보가 담겼다. 학계 전문가들은 이 문건을 〈일본 입장에선 최고 수준의 정보〉라고 평가했다."(86-94)


6장 얼굴 없는 밀정이 기록한 '만주벌 호랑이'


"밀정은 홍범도 개인을 검거할 수 있을 만한 단서를 일제에 세세히 밀고한다. 〈홍범도의 소재지는 혜산진 대안 일리日里에서 약 30리 떨어진 신약수동新藥水洞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지역 동북쪽 사헌 부락에 가옥을 짓고, 이곳에 거주하면서 대문에 조사실이라 적은 종이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부하들과 동거하면서 망을 보게 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홍범도 부하들의 특징은 어떨까. 밀고자에게는 한솥밥 먹던 동료들일 것이다. 〈부하들은 복장도 일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가명을 써서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타인이 있는 장소에서 부하들끼리 대화를 하고자 할 때, 또는 본명을 알고자 할 때에는 서로 오른손을 머리 높이 올려 알아보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밀고자를 이렇게 평가한다. 〈홍범도의 부하 예승준(22세)은 소양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고 성격이 활발합니다. 조금도 감추는 것 없이 진술했으며 대체로 사실로 보이는 점이 많습니다.〉"(123-5)


7장 김원봉을 밀고한 부하, 그에게 수여된 건국훈장


"1926년 일본 외무성 내부 보고 문건이다.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다이쇼 14년(1925) 11월 28일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함께 한커우漢口로 왔고 김원봉은 체류 1일째에 베이징을 경유하여 광둥으로 향하였습니다.〉 누군가의 밀고다." "밀정은 누구였을까. 문서 추적을 이어갔다. 밀정의 정체와 관련한 핵심 정보가 나온다. 〈의열단 간부 중 김호라는 자가 얼마 전 출두했습니다. 그 사람 말에 따르면 자신은 상하이 주재 조선총독부 통역관 오다 미쓰루의 밀정으로 여비를 지급받아 의열단원들의 동정을 조사하려고 한커우로 왔다고 합니다. 의심할 만한 말이 없고 여비 지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김호는 의열단원이자, 조선총독부 통역관 오다 미쓰루의 밀정이자, 도박을 조항하는 방탕한 사람이었다. 본적은 경상남도 하동, 본명은 김재영이다. 그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에서 공적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독립유공자였다. 의열단 활동과 청년동맹회에 참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143-9)


8장 임시정부의 비밀 자금줄, 경주 최부잣집


"김구 선생은 해방 뒤 이런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자금의 6할은 백산에게서 나왔다.〉 백산白山은 안희제安熙濟 선생의 호다. 그가 설립한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1922년 작성된 계약서를 보면 백산은 조선식산은행에서 35만 원을 대출받았다. 35만 원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0억 원에 가까운 거금이다. 계약 조항 8조에 〈최준이 백산무역회사와 연대해 채무 이행의 책임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최부잣집 종손 최준은 당시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표이사였다. 문서 뒷부분에는 대출을 위해 저당 잡힌 최부잣집 부동산 목록이 수십 쪽에 걸쳐 빼곡히 적혀 있었다. 경주와 울산 지역의 논밭 785필지다. 22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데, 여의도의 75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임시정부에 자금을 대느라 경영 위기에 빠진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살리기 위해 최부잣집이 거의 전 재산을 걸어 은행 대출 보증을 서준 것이다."(162-7)


9장 식민지 권력자가 내린 지령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우쓰노미야 다로 조선군사령관은 1918년부터 2년 동안 조선에 머물렀다. 그는 사이토 총독에 이어 한반도 내 권력 서열 2위였다. 그의 목표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초기에 무너뜨리는 것,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절붕絶崩'시키는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작성된 그의 일기에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하려는 정황이 상세히 담겨 있다. 〈9월 6일 토요일, 맑음. 무역상 시부카와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내 옛 지인으로 상하이에 망명 중인 조선인 김상설(초명 김봉석)이 배일排日 거두巨頭 김복金復을 데려와 내 옛 성의에 보답하고 이로써 과거의 죄를 속죄하고 싶다고 했다 한다. 시부카와와 함께 규슈까지 와서 숨어 있다고 했다.〉" "배일 거두라고 표현된 김복, 아니 김규흥은 독립운동가로 우리 역사에 기록돼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활동한 공로 등을 인정해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현재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177-84)


10장 〈김구를 잡아라〉 특종공작에 동원된 밀정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남목청 사건의 배후로 박창세를 지목했다. 그전부터 박창세가 일본과 손을 잡았다는 정황이 다수 포착돼 의심스러웠는데, 그가 반反 김구파로 불만을 품은 이운한을 부추겨 총을 쏘게 했다는 것이다.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한국독립당 특무대장을 맡기도 했던 박창세가 어쩌다 일제 협력자로 변절한 것일까. 단서는 일본 문건에 등장한다. 〈박창세를 회유하고 그가 김구를 처치하도록 획책하고 있습니다. [···] 김구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런 공작에는 실로 적당한 인물입니다. [···] 그의 차남 박제건이 권투선수가 되어 형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으니 총영사관과 협력해 귀국하는 데 편의를 봐주고 이를 박창세를 회유할 방법으로 삼고자 합니다.〉 가족을 볼모 삼아 밀정으로 포섭한다는 전략이다. 박창세의 둘째 아들 박제건은 전도유망한 권투선수였다. 실제로 그는 1936년 4월에 상하이를 출발해 도쿄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다. 문건에 나오는 대로다."(217)


# 남목청 사건 : 1938년 5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조선혁명당 당사 남목청에 이운한이라는 자가 난입해 들어와 권총을 난사한 사건. 김구는 가슴에 총탄을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11장 3·1운동 계보도, '휘발된 사람들'을 찾아서


"일제가 수사자료로 작성한 3·1운동 계보도에 나오는 140명을 세 개의 범주로 분류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들이다. 이들은 국가가 이미 공인한 사람들이다." "둘째, 계보도에는 주도자급 인물로 등장하지만 훗날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들이다. 최린과 최남선이 대표적이다. 이런 사람들도 역사적 평가가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이들이 중요하다. 일본 경찰이 보기에 3·1운동 주도자급 인물이지만 우리 역사가 공인하지 않은 사람들, 말하자면 '역사에서 휘발된 사람들'이다. 140명 가운데 34명이 세 번째 범주로 추려졌다. 국가보훈처에 확인해본 결과 이 가운데 9명은 독립유공자 심사가 진행 중이고, 10명은 친일이나 월북 등 이상 행적이 확인된 사람들이라는 답변이 왔다. 그래도 나머지 15명이 의문으로 남았다. 이들을 3·1운동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10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이들을 찾아 공훈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230-1)


12장 해방과 동시에 사라진 이름, 밀정


"해방 70년이 넘은 지금 친일파에 대한 학문적·공식적 평가와 서술은 어느 정도 누적돼온 게 사실이다. 오늘날 누구도 이광수와 최남선을 좋게 기억하진 않는다. 그러나 밀정은 어쩌면 '해방과 동시에 사라진 이름'이다. 공개적 행보를 보인 친일파와 달리 사람들은 밀정의 정체를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의심의 눈초리야 보낼 수 있었겠지만 국가가 공인한 반민특위마저 와해되는 판국에 명확한 증거가 없는 밀정을 찾아내 단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야금야금 스며들었다. 대한민국 군과 경찰에, 정치권과 관공서에 알게 모르게 흡수되었다. 남몰래 스며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주특기이자 전공 분야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속에 밀정의 이름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군 100명보다 밀정 한 명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끼친 해악은 치명적이었지만 청산은커녕 역사적 평가 측면에서도 그들은 무풍지대에서 보전될 수 있었다."(24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 레비스트로스, 에번스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베네딕트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7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병화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그곳에 있기: 인류학과 글쓰기의 현장


"서명signature의 물음, 즉 텍스트 내부에서 저자의 존재감을 확립하는 문제는 애초부터 민족지학을 따라다녔다." "저자가 강하게 드러나는 텍스트의 표현 관습과 민족지 기획의 특수한 성질에서 비롯된, 저자가 부재하는 텍스트의 표현 관습 간의 충돌은 사물을 소유하려는 입장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입장 간의 충돌로 여겨졌다." "인류학자들은 민족지 서술과 관련된 중요한 방법론적 사안들이 지식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공감', '통찰력' 등이 인지 형태로서 적절한지,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내재주의적 설명이 입증 가능한지, 문화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지 하는 것들이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민족지 서술을 구성하는 데서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 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현지조사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있다고 보았다. 관찰하는 자와 관찰 대상의 관계(친밀한 관계)를 통제할 수 있다면 저자와 텍스트 간의 관계(서명)는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도 생각했다."(20)


"민족지학자가 그것을 대면하든 아니면 그것이 민족지학자를 대면하든 간에, 서명에 관한 문제는 저자이기를 주장하지 않는 물리학자의 다신주의와 저자라는 의식이 넘치도록 충만한 소설가의 주권 의식을 모두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둘 중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첫번째 태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루고, 가사는 듣지만 음악은 듣지 못한다며 둔감하다는 취급을 받는다. 물론 민족중심주의라는 비난도받는다. 두번째 태도는 사람을 꼭두각시로 취급하며 실재하지도 않는 음악을 듣는, 인상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이때도 역시 민족중심주의라는 비난을 받는다. 민족지학자 대부분이 자신들의 저서에서 입장을 통일하지 못하거나, 혹은 한 권의 책 속에서도 갈팡질팡하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친밀한 관점과 냉정한 평가를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 텍스트에서 연구자가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애당초 그런 관점을 취해 평가를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과제인 것이다."(21)


"(저자는 무엇을 저술하는가에 대한, 혹은 내가 담론discourse 문제라 칭했던) 또다른 예비적 질문은 롤랑 바르트의 「저자와 작가」에서 한층 종합적인 형태로 제기된 바 있다. 바르트는 '저자'와 '작가'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또다른 저서에서는 저자가 만들어내는 '작품work'과 작가가 만들어내는 '텍스트'를 구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저자는 기능을 수행하고 작가는 활동을 한다. 저자는 사제 역할을 하고(그는 저자를 마르셀 모스가 연구한 주술사에 견준다) 작가는 서기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자동사이다. 〈그는 세계의 '왜'를 '어떻게 쓰는가' 안에 철저히 흡수하는 사람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타동사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쓴다. 〈그가 어떤 목표를 설정할 때(증거를 제시하고, 설명하고, 전달할 때) 언어는 그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에게 언어는 '실천'을 떠받칠 뿐 실천을 하지는 않는다. ······ [그것은] 의사소통 수단의 본질, '사유' 수단의 본질로 복원된다.〉"(29-30)


"이러한 '저자'와 '작가'의 구분, 혹은 담론성의 창시자와 특정 텍스트의 제작자라는 푸코식의 구분이 본질적 가치에 따른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술했던' 전통적인 '글쓰기' 대부분이 그것의 모델을 압도적으로 능가한다." "이 '저자-작가'는 마법 같은 언어적 구조물을 창조하고 싶은 욕구, '언어의 극장'에 입장하고 싶은 욕구, 사실과 이념을 소통하게 하고 정보를 상품화하고 싶은 욕구, 이 욕망 또는 저 욕망에 대한 발작적인 탐닉 사이에 끼여 있는 전문 지식인이다. 실천으로서의 언어나 수단으로서의 언어 중 어느 한쪽을 분명하게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철저한 문학이나 과학적 담론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인류학적 담론은 마치 노새처럼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서명의 기준에서 볼 때 한 텍스트를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침범하는가 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그 불확실성은, 담론의 기준에서는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창의적으로 구성하는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31-2)


2 텍스트 속의 세계: 『슬픈 열대』를 읽는 방법


"(믿어지지 않았던 것의 갑작스러운 현전現前과도 같은) 구조주의의 '도래advent'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수사학적 업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수사학적이라는 말을 트집잡을 의도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레비스트로스가 소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을 (해당 분야의 권위자인 수전 손택이 쓴 호칭에 따르자면) 지적 영웅으로 만든 것은 이상야릇한 사실, 또는 그보다 더 이상한 설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설명틀을 잡기 위해 그가 발명해낸 담론 양식이었다." "인류학에 소소한 관심 정도밖에 없었을 이들을 대상으로 레비스트로스가 진행한 기획의 본질적인 특징은 과학과 예술의 어휘에서 빌려와서 개조한 전문어(기호, 코드, 변형, 대립, 교환, 소통, 은유, 환유, 신화, 구조 등)를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상상의 공간을 정리해준 덕에, 흥밋거리를 찾아헤매던 세대가 그곳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39-40)


"『슬픈 열대』에 대해 제일 먼저 말해야 하는 것, 또 어떤 의미에서는 최종적인 발언일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이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이라는 사실이다. 즉 서로 다른 종류의 텍스트가 하나하나 덧씌워져 무아레(물결무늬) 같은 패턴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덧씌워진'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가 『슬픈 열대』에서 발견하는 것은 위계적으로 배치되어 있거나 표면에서 심층을 향해 배치되어 있는 텍스트가 아니며, 한 층 한 층 벗겨나가면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 속에 숨겨진 또다른 텍스트 따위가 아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동시에 발생해서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같은 층위에 존재하면서 상호간섭하는 텍스트이다." "즉 로만 야콥슨이 '유사성의 평면'이라 부른 것을 따라 연속적 요소들이 계열적 체계를 이루며 수직적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 요소들이 '근접성의 평면'을 따라 통시적으로 결합되어 수평적으로 펼쳐져 있다."(47-8)


"여행서, 어쩌면 열대지방의 철 지난 관광 안내서, 또하나의 새로운 과학의 기초를 세우는 민족지 보고서, 루소의 복권, 사회계약론과 초조해하지 않는 삶이 지닌 장점의 복권을 꾀하는 철학적 담론, 심미적 근거를 들어 유럽식 팽창주의를 공격하는 개혁주의자의 글. 그리고 문학적 근거를 예시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문학작품······ 이 모든 것이 전시회에 나란히 걸린 그림들처럼 병존하면서, 정밀하게 상호작용하여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거기서 어떤 무아레가 출현하는가? 전혀 놀랄 일도 아니지만,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신화이다. 텍스트 유형들 간의 모든 통사론적이고 환유적인 밀고 당기기가 만들어내는 이 책을 아우르는 형식은 다름아닌 성배 추적 이야기다." "그곳에는 절정을 이루는 신비인 절대적 타자, 고립되어 있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 그러고는 어느 정도 아쉬워하며 지친 채로 집에 돌아가, 소심하게 뒤로 물러나 있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준다."(60-1)


"물론 추적자로서의 인류학자라는 신화 역시 또하나의 환유적 텍스트로 간주될 수 있다." "즉 그가 의도한 것은 역시 다중적인 텍스트 유형을 그 구조 자체가 주제의 한 가지 사례인 하나의 단일한 구조, 즉 '신화논리학mytho-logic'으로 묶어내는 것으로서,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생활의 기초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이른바 인간 존재의 토대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레비스트로스가 체계적으로 구축한 작업의 요체는 『슬픈 열대』의 텍스트를 저마다 굉장히 다양한 통사론적 관계 속에서 서로서로 연결하고 다시 연결하며 또다시 연결하는 긴 발언으로 보인다. 『슬픈 열대』라 불리는 어떤 집적물에서 어떤 의미에서든 신화-텍스트가 출현하여, 그것으로부터 전개된 전체 작품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요약된 완결판을 넘어 전체를 지배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신화, 음악, 수학이 실재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그것들을 연구하는 것이 유일한 참된 소명이라고 여긴 이유이다."(61-2)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미개인들'을 가장 잘 알기 위한 길은 그들의 삶을 공유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그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적 표현들을 누비고 꿰매어 관계의 추상적 견본을 만드는 일이라는 확신이, 계시적인 (혹은 반反계시적이라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절정의 경험을 통해 생겨났고 그것이 『슬픈 열대』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쓸쓸한 일이지만 그의 탐색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외부인의 손이 닿은 적이 없는' 투피카와이브인을 드디어 만났을 때, 그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낯설게 보이는 생활의 기초를 꿰뚫어보는 것,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곳에 있기'는 그들 속에 개인적으로 투입되는 방식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그것을 달성하려면 오로지 그들의 문화적 생산물, 즉 낯설게 보이는 독특한 삶의 면모를 보편적으로 해석해 직접성을 해체시킴으로써, 그 낯섦을 사라지게 하는 수밖에 없다."(62-4)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저작 고유의 특징─추상화된 자기 완결성이라는─을 마침내 충분히 전해준다. '냉담한', '폐쇄적인', '차가운', '진공 상태인', '지적인' 등 문학적 절대주의 주변을 맴도는 온갖 형용사가 작품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의 책은 삶으 그려내는 것도, 삶을 환기하는 것도 아니며, 번역하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삶이 어떤 식으로든 남겨놓은 재료들을 배치하고 재배치하여 그에 상응하는 공식적 체계로 정비한다. 말하자면 그의 책은 재규어, 정액, 썩어가는 고기를 반대, 도치, 동형구조로 변형시키는, 유리로 둘러싸인 자기봉합적 담론인 듯하다. 신화와 기억과 마찬가지로, 세계는 인류학 텍스트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지만 인류학 텍스트는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슬픈 열대』가 남긴 최후의 메시지이자, 그것이 밝혀낸 그의 전체 작품이 남긴 최후의 메시지이다."(64)


3 슬라이드 쇼: 에번스프리처드의 아프리카 슬라이드


"E-P(에번스프리처드)의 민족지 저술에는 토착민의 방언을 제외하면 외국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는 매우 폭넓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문학적 암시를 거의 구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표현 영역의 전문가 중 최고의 전문가지만, 인류학 용어나 다른 분야의 전문용어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뽐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빈도수를 막론하고 언어 행위라고는 무난한 평서문밖에 없다. 미심쩍은 의문사, 연계된 조건문, 명상적인 돈호법 같은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언어를 놓고 씨름한 표시는 완벽하게 감춰진다. 말하는 것마다 모두 명료하고 자신감 있으며 호들갑 떨지 않는다. 어쨌든 언어적으로는 채워야 할 빈 곳도, 연결해야 할 점도 없다. 보이는 것 그대로 이해하면 되고, 심층적인 독해는 권장되지 않는다." "낯섦도 방해물이나 위협이라기보다는 더 흥미롭고 재미있는 요소로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의 범주를 굴절시키지만 깨뜨리지는 않는다."(80-2)


"민족지 기록에 대한 이런 태도는 줄줄이 이어지는 깔끔하고 명석한 판단의 연쇄로, 무조건적 발언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무척이나 명료하게 소개되어 있기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선제공격적인 자기주장은 E-P의 저작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베두인족은 확실히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고 신이 자신들에게 안배해둔 운명을 믿는다.〉 (『키레나이카의 사누시 교도』) 〈엄밀한 의미에서 누에르족에게는 법이 없다.〉 (『누에르족』). … 그는 어떻게 작업하는가. E-P가 민족지 기록에 접근하는 그의 뛰어난 면모와 설득력의 주요 연원은 문화현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상, 인류학적 슬라이드로 구축하는 그의 굉장한 능력에 있다. 그는 무엇을 하는가. 마법의 등잔인 민족지학의 주된 효과, 그 주된 의도는 인류학적 슬라이드가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괴상하든 간에, 우리 자신이 본능적으로 의존하는 사회적 지각의 확립된 틀로 그것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데 있다."(83-4)


"삽화, 사진, 스케치, 도표, 이런 것들은 E-P의 민족지를 조직하는 힘이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영상화된 관념에 의해 움직이며, 신화(혹은 일기)보다는 풍경화와 비슷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또 그것은 무엇보다도 수수께끼 같은 일을 명백하게 풀어내는 데 헌신한다. 그의 세계는 정오의 세계로, 햇빛 속에서 형체의 윤곽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형체 대부분은 더없이 고유한 존재이며, 지각 가능한 배경 위에서 묘사 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나와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취하는 어떤 책에서 메리 더글러스는 E-P를 〈인류학계의 스탕달〉이라고 주장한다. 〈욕망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과 균형〉을 다루는 그의 〈예리한〉 감각 때문에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나는 그가 그런 감각을 갖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산세베리나 공작부인과 마찬가지로 그가 연구한 아누아크족, 아잔데족, 누에르족, 딩카족, 실루크족, 베두인족 등이 (텍스트 속에서는 그 자신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88)


# 산세베리나 공작부인 : 스탕달의 장편소설 『파르마의 수도원』의 여주인공


"E-P는 준비된 청중 앞에서 '그들은 우리와 똑같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하려는 말은, 그보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아무리 극적으로 보일지라도 결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이시스 강에서든 아코보 강에서든, 남자들과 여자들은 용감하기도 하고 비겁하기도 했고, 친절한가 하면 잔인한 사람도 있었고, 합리적인 사람도 바보 같은 사람도 있었다." "〈영국에서는 가장 하찮은 남자도 남자로서 최고의 삶을 누린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었다.(이제는 여기에 여성도 추가되어야겠지만.) 그런 감정을 영국을 넘어 아프리카에까지, 그보다 더 멀리 (어렵기는 하겠지만 이탈리아까지도) 확대 적용하는 것이 E-P가 슬라이드 쇼를 보여준 목적이었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오만하고 낭만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영국 이데올로기가 다시 등장한다' 따위의 몹시 부적절하기만 한 것일 수도 있지만─그것은 음흉하지도, 인색하지도, 무자비하지도 않다. 또 그 문제에 관한 한, 거짓도 아니다."(91-2)


# 아이시스 강the Isis : 옥스퍼드 부근을 지나는 템즈 강 상류의 별칭


4 목격하는 나: 말리노프스키의 후예들


"정확하든 그렇지 않든, 말리노프스키는 사실에 관한 그 자신의 고집 때문에, 또는 비상한 환기 능력을 갖춘 자신의 작업 덕분에, 그 자신이 사용한 반어법을 가져와서 말해보자면, '야수 만나기join-the-brutes' 민족지라 불릴 만한 것의 수석 사도로서 우리에게 왔다. 그는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방법론을 다룬 저 유명한 서문에서 〈민족지학자는 카메라와 공책, 연필을 치워두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직접 가담하는 편이 좋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쉬운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성공의 정도는 저마다 다르더다로 시도 자체는 누구나 해볼 수 있을 터이다〉라고 말했다. 이국적인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한 것처럼 만남의 즉각성에서 물러나 사고의 균형을 찾음으로써, 혹은 E-P가 한 것처럼 그들을 아프리카 항아리에 그려진 형상으로 변형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런 즉각성 속에서 자신을 잃고, 어쩌면 영혼까지 잃어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99)


"『엄격한 의미에서의 일기』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문제, 거의 전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문제는, 민족지학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토착생활 외에도 우리가 풍덩 뛰어들어야 할 것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다. 풍경, 고립, 그 지역에 사는 유럽인들, 집과 남겨두고 떠나온 것들에 대한 기억, 소명감과 각자의 지향점, 가장 불안한 것, 자기 열정의 변덕스러움, 약한 체질, 정처 없이 떠도는 생각, 말하자면 어두운 자아. 그것은 토착민 방식으로 사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중적인 삶을 사는, 여러 곳의 바다를 동시에 항해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핵심은 '그곳'에서 겪은 것을 '이곳'에서 말하는 것으로 옮겨오는 경로의 문제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인 문제다." "즉 문제는 당신 개인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설명에 신뢰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목격하는 나'를 이해하게 하려면, '나'를 먼저 이해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100-1)


"일기를 쓰는 사람─즉 (롤랑 바르트보다 더 광범위하기도 하고 동시에 협소하기도 한) 내 용어인 '목격하는 나' 접근법을 강경한 태도로 취하는 민족지 텍스트 구축자라면 누구든─의 과제는, 리비도적인 그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또한 〈작가에서 개인으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회전고리를 통해 매혹하고······ '나는 내가 쓰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불필요하고 불확실하고 어딘지 진정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이러한 종류의 글에, 또 요즘은 이러한 종류의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달라붙어 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자발적'인 글쓰기 형태를 선택함으로써 나 자신이 삼류 배우 중에서도 제일 어설픈 배우임을 알게 되었으니.〉" "당장 인류학 분야의 글을 살펴보더라도, 일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텍스트 구축 양식과 그것을 괴롭히는 문학적 불안의 신호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기병'은 이제 고질적인 것이다."(113-4)


5 우리/우리 아닌 자: 베네딕트의 여행


"베네딕트가 주로 의존하는 수사학적 전략은 너무나 익숙한 것과 굉장히 이국적인 것의 자리를 뒤바꾸는 병치 전략이다. 베네딕트의 저작에서 문화적으로 가까운 것은 괴상하고 인위적인 것으로, 문화적으로 거리가 있는 것은 논리적이고 솔직한 것으로 그려진다. 우리 자신의 생활 형태가 낯선 민족의 낯선 습관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제로 있는 곳이든 상상으로 만들어낸 곳이든 멀리 떨어진 곳의 관습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예측 가능한 행동이 된다. 그곳이 이곳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 아닌 자(또는 미국인이 아닌 자)가 (미국인인)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하지만 베네딕트의 저작을 지배하는 어조는 진지하기 짝이 없으며 그 어조에 조롱하는 기색은 전혀 배어 있지 않다. 그의 방식은 인간 권위의 전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그 태도가 세속적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더없이 진지한 방식으로 구축해나간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희극적이다. 베네딕트의 아이러니는 전부 진심 어린 것이다."(134-5)


"신념과 관습들을 숨기는 데 성공한 저작에서 베네딕트는 그 업적을 근간으로 하여 저자-작가로서 '담론성의 창시자'라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베네딕트를 유명하게 만들어 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타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방식으로 일관하는 『국화와 칼』, 『문화의 패턴』이 그 저작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작업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를 고안해본다면 '자기-원주민화self-nativising'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놀라운 업적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현지조사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베네딕트는 현지조사를 거의 하지 않았고, 조사에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으며, 체계적인 이론화 작업을 거치지도 않았고, 그런 이론화 작업에 관심도 거의 없었다.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강력한 해석적 스타일을 간결하고 자신있고 정교하게, 무엇보다도 단호하게 발전시킨 결과다. 즉 명확한 견해를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다."(136-7)


"전문 인류학자로서 베네딕트의 문체는 애초부터 성숙해 있었다. 그것은 초기의 전문화된 연구들에서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했고, 그런 연구를 토대로 그는 입문하자마자 그 분야에서 매우 일찍 인정받았다." "어떤 종류의 글이든 마찬가지다. 운동 법칙처럼 명백한 것으로 보일 때까지, 또는 법률가의 발표문처럼 날조한 것으로 여겨질 때까지, 같은 것이 계속해서 이야기되고 또 이야기된다. 예로 드는 보기만 바뀔 뿐이다. 그의 글에는 스스로 단 하나의 진리를 말하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고자 하는 고슴도치 같은 태도가 배어 있다. 하지만 그 본질적인 진리(대평원의 아메리칸인디언들은 황홀경에 빠지기 일쑤이고 주니족은 지나치게 형식을 중시하며 일본인들은 위계적이라는,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렇지 않다는 진리) 때문에 베네딕트의 전문 독자들은 그의 글을 권위 있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편집증 같다고 보기도 한다. 폭넓은 독자층이 생긴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137-9)


#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가 남긴 시구인 〈여우는 아는 게 많지만, 고슴도치는 딱 한 가지 큰일에만 집중한다〉에서 비롯된 표현


"베네딕트가 쓴 (그가 전쟁 동안 맡았던 정보 업무와 선전 작업에서 시작된) 『국화와 칼』의 탁월한 독창성과 그것이 가진 힘의 토대, 준열한 비판자들조차도 느낀 그 힘의 토대는 그가 일본과 일본인들이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을 괴상하게 무장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괴상하게 생긴 세계라는 느낌을 완화하는 방향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그런 느낌을 오히려 더 강화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와 '상상 속의' 그들을 대비시키는 습관은 이 책에서 절정에 이른다." "『국화와 칼』이 예쁘게 단장된 '피도 눈물도 없는 과학정책'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래는 의사였다가 다음에는 배 여러 척의 선장이 된 레뮤얼 걸리버가 세계 방방곡곡 오지로 떠난, 4부로 구성된 여행기』가 동화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여행을 거의 하지 않았던 베네딕트는, 자신은 '세계를 바꾸기보다는 성가시게 하려고' 글을 쓴다고 한 스위프트처럼 글을 썼다. 세상이 그 점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꽤 애석할 것이다."(146-59)


6 이곳에 있기: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삶인가?


"거의 모든 민족지학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다보니 그렇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양분된 존재 양식에 내재되어 있던 균열은 최근 들어 더 첨예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두어 해씩 목축민들이나 얌을 재배하는 농부들과 드잡이하다가,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동료들과 논쟁하는 생활방식 사이에 생긴 균열 말이다. 그들이 사는 곳에서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과 그들이 없는 곳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것 사이의, 항상 엄청났지만 잘 인지되지 않았던 간극이 갑자기 극도로 눈에 잘 띄게 된 것이다. 단지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으로만 보였던, '그들이' 삶을 '우리의' 연구로 옮겨오는 일이 이제는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심지어 인식론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자족성, 에번스프리처드의 자신감, 말리노프스키의 무모함, 베네딕트의 태연함은 이제 무척 먼 일이 되었다."(164-5)


"법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또는 실제로 일어난 변화, 즉 인류학자 대부분이 글로 다루었던 종족들이 식민주의의 대상에서 주권국가의 시민으로 변한 상황은 민족지 연구가 이루어지는 도덕적 맥락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식민지는 아니었더라도 외딴 오지나 '바다 한복판에' 고립된 황제의 영토라는 전형적인 다른 어떤 곳(레비스트로스의 아마존이나 베네딕트의 일본)들은 그 처지가 매우 달라졌다. 팔레스타인 분할, 루뭄바, 수에즈, 베트남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이 세계의 정치 문법을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인류학적 글쓰기가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의거해온 주된 가정, 대상과 독자는 분리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무관하며, 대상은 서술되기만 할 뿐 발언할 수 없고, 독자는 통지를 받을 뿐 책임은 없다는 가정은 철저히 와해되었다. 여전히 세계는 구역화되어 있지만 그 구역들을 잇는 연결통로가 훨씬 더 많이 생겨났고, 격리되는 정도도 훨씬 더 약해졌다."(166)


"현지조사 보고서나 주제별 조사를 제외하고, 이건 매, 저건 해오라기라는 식으로 식별하는 글쓰기는 실제로는 인류학에서 매우 드물다. 이 분야가 끌었던 일반적인 관심은 앞서 다룬 저자들 같은 인류학자들이 구축한 빛나는 탑 위에 쌓인 것이다. 마치 한쪽에서만 보이는 스크린을 통해 보듯이 세계를 곧바로 바라본다는 미명, 오직 신이 바라볼 때처럼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미명은 정말이지 굉장히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런 미명 자체가 하나의 수사학적 전략이고 설득의 양식이다. 완전히 내다버리기 힘들어 여전히 읽히기도 하고,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지만 여전히 믿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실화소설faction이, 즉 실제 장소에 실제 시간대에 살았던 실존 인물들에 대한 어떤 상상적인 글쓰기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교묘한 조작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인류학이 현대 문화에서 지적인 영향력을 이어가려면 그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175-6)


"인류학적 소명의 중요한 측면이 문학적인 것이라고 보는 관점에는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그런 위험은 감수해볼 가치가 있다. 그 까닭은, 그러다보면 타인의 생활 형태(의 무엇인가)를 대하는 한 집단의 의식이 열리며 또 그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생활 형태(의 무엇인가)도 개방적으로 보게 되어, 우리의 이해력을 철저히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완전한 실패를 면한 정도 이상으로 해낸 사람이 없었던 과제인) 그것은 현재를 새겨넣는 일, 세계의 젖줄이 흐르는 어느 특정한 장소에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언어로 전달하는 일이다. 파스칼의 유명한 말처럼 '그곳'보다는 '이곳'을, '그때'보다는 '지금'을 말이다. 민족지가 그 외에 달리 무엇이든─말리노프스키식의 경험 추구일 수도 있고 레비스트로스식의 질서를 향한 열광, 베네딕트식의 문화적 아이러니, 에번스프리처드시의 문화적 자신감일 수도 있다─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의 번역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된 생명력이다."(17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의 해석 까치글방 148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문옥표 옮김 / 까치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문


제1장 중층 기술: 해석적 문화이론을 향하여


"인류학, 최소한 사회인류학의 경우, 사람들이 하는 작업은 민족지(民族誌)이다. 교과서적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지 작업은 친화감 조성, 제보자 선정, 기록 복사, 족보 작성, 지도 작성, 일기 쓰기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기술적 문제들이 민족지 작업의 전부는 아니다. 민족지란 하나의 지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길버트 라일의 개념을 빌리면 그것은 〈중층 기술(thick description)〉의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현상 기술(thin description)과 중층 기술 사이에는 위계적으로 여러 층위의 의미구조가 존재한다. 가령, (눈꺼풀에) 경련을 일으키는 자, 윙크하는 자, 거짓 윙크하는 자, 흉내내는 자, 흉내를 연습하는 자 모두가 이 의미구조에 따라서 일정한 행위를 하고 의미를 부여받으며 해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눈꺼풀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게 해주는 의미구조 없이는 그들의 행위가 하나의 문화적 범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14-6)


"문화는 행위로 기록된 문서이며, 따라서 흉내낸 윙크와 마찬가지로 공적인 것이다. 그것은 비록 관념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누군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비록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가사의한 것도 아니다." "일단 우리가 인간의 행위(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진정한 눈의 경련이다)를 상징적 행동, 즉 말의 경우 발음 내지 발성, 회화의 경우 색채, 글쓰기의 경우 획(劃), 음악의 경우 음(音) 등이 가지는 의미를 지니는 행동으로 본다면 앞의 문제, 다시 말해서, 문화라는 것이 패턴화된 행동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틀인가 또는 그 두 가지가 혼합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흉내낸 윙크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은 그것의 존재론적 양태에 관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바위나 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은 그것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20-1)


"인류학적 저서들은 그 자체가 이미 해석이며, 그것은 두번째 해석일 수도, 세번째 해석일 수도 있다(실상 첫번째 해석은 〈원주민〉만이 내릴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인류학적 저서들이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그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거나 틀린 것들이라거나 혹은 〈만일 그렇다면〉 류의 실험적 사고라는 뜻이 아니라, 〈무엇인가 만들어진〉 혹은 〈무엇인가 형태지어진〉이라는 의미에서 허구라는 것이다." "만일 민족지가 중층적 기술이며 인류학자가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라면, 중요한 것은 그 기록이 윙크와 눈의 경련을 제대로 구별했는가 또는 진짜 윙크와 윙크 흉내를 구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현상적 기술인 해석이 되지 않은 상태의 자료에 대해서 그 설명의 설득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이방인들의 생활에 얼마나 근접시킬 수 있는가 하는 학문적 상상력의 정도에 의해서 그것을 평가해야만 한다."(27-9)


"우리가 기록하는 것(또는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대화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사회적 대화에서 우리 자신들은 지극히 주변적이거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된 행위자가 아닌 까닭에 우리는 그 사회적 대화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길이 없으며, 다만 제보자들이 우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 부분만큼만 이해할 뿐이다." "모든 현실세계의 복잡성으로부터 정제된 균형 잡힌 의미의 결정체를 상정하고 그 자체가 자생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는 듯이, 보편적 인간 정신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인 듯이, 또는 보다 광범하게 그들의 선험적 세계관의 표현인 듯이 간주하는 것은 곧 존재하지도 않는 학문 혹은 발견될 수도 없는 실체를 상상하는 것과 다름없다. 문화 분석은 의미의 대륙을 발견하여 거기에 형상도 없는 풍경화를 그려나가는 작업이 아니라, 의미를 추측하고 그 추측이 어느 정도 정확한가를 따져보고 보다 더 나은 추측으로부터 설명을 위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또는 그래야만 한다)."(34)


제2장 문화 개념이 인간 개념에 미친 영향


"계몽주의적 인간관은 간략히 말해서 뉴턴의 우주와 같이 규칙적으로 조직되어 있고, 전적으로 불변하며, 놀랍도록 단순한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법칙 중 일부는 부분적으로 다를지 몰라도 중요한 점은 법칙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의 문제점은 시간과 장소 및 환경이나 학문과 직업, 일시적 유행이나 순간적 의견과는 독립된, 일관성 있는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는 이미지는 환상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근대 인류학이 그밖의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확고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특정 지역의 관습에 의해서 달라지지 않는 인간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한 적도 없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상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것과 관습적이고 국지적이며 변화하는 것 사이에 경계를 긋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사실 그런 경계를 긋는 일은 인간 상황을 오도하거나 적어도 심각하게 잘못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52-4)


"여기서 위험한 것은, 만일 누가 (영어의) 대문자 〈M〉을 가진 인간(Man)이 그의 관습의 〈배경에서〉, 〈그 아래에서〉 또는 〈그 위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문자가 아닌 인간(man)이 관습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꾸게 되면 그는 인간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릴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시대와 장소의 영향 속으로 남김없이 용해되어버리거나 자신의 시대에 완전히 사로잡힌 어린아이가 되어, 헤겔 이후 계속 우리를 괴롭혀온 가공스러운 역사적 결정론 내지는 그것과 유사한 것에 휘말리게 된다. 우리는 사회과학에서 이와 같은 두 가지 궤도이탈을 모두 겪어왔는데, 하나는 문화적 상대주의의 기치 하에서, 다른 하나는 문화진화론의 기치 하에서 행진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보다 일반적으로 문화 패턴 그 자체 안에서 비록 표현은 동일하지 않더라도 독특한 성격의 인간 존재를 결정하는 요소를 탐구함으로써 그 궤도 이탈을 피하려고 노력해왔다."(55)


"우리는 문화가 인간성에서 본질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심지어 지고의 구성요소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문화가 인간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다. 문화적 사실은 그것을 비문화적 사실의 배경으로 용해시키거나 혹은 거꾸로 그러한 배경을 문화적 사실로 용해시키는 일 없이, 비문화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은 일종의 진화적으로 누적된 산물로서 위계적으로 층화된 동물이었다. 그점에서 유기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인 각각의 층은 정해전 명확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정말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생물학 등 다양한 인접 학문으로부터의 발견들을 마치 물결이 여러 겹으로 파장을 그리며 퍼져나가듯이 서로에게 부가시켜야 했다. 그렇게 된 연후에야 문화적 층위의 기본적 중요성, 즉 인간에게만 특징적인 성질이 자연스레 나타나서 인간이란 정말 무엇인가를 그 자체의 고유 권한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게 될 것이다."(56-7)


"인간 개념을 정의하는 문제가 발생할 때, 인류학자들이 문화의 특수성을 피하여 그 대신 피가 통하지 않는 보편성으로 도망치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인간 행동의 그 어마어마한 다양성에 직면하여 역사주의, 또는 어떤 확고한 기반도 완전히 제거시킬 만큼 강력한 문화 상대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에서 결정적인 것은 현상들이 경험적으로 공통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밑에 숨겨져 있는 지속적인 자연의 과정을 밝힐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유사한 현상들 사이의 실질적인 동일성이 아닌, 다양한 현상들 사이의 체계적인 관계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다양한 측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층위론적〉 개념을 종합적 개념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즉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문화적 요소들이 단일한 분석체계 속에서 변수들로 처리될 수 있게 하려는 구상이다."(63-4)


제3장 문화의 성장과 정신의 진화


"비행기의 발명은 인간의 신체 변화를 유발하지 않았고 (내면적인) 정신적 능력에도 어떠한 변이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자갈돌 석기와 거칠게 깎은 돌도끼의 경우에는 꼭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결과 더욱 곧은 직립 자세와 치열(齒列)의 축소 그리고 엄지손가락이 보다 중요해진 손이 생겼을 뿐 아니라 뇌가 현대인과 같은 크기로 확대된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도구의 제작은 손놀림과 시야의 발달을 촉진시켰기 때문에, 그것의 시작은 사회조직과 의사소통 및 도덕적 규제의 발전에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따라서 전두엽의 급속한 성장에 유리하도록 도태과정의 방향을 바꾸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정신의 진화적 성장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지점은 문화의 축적은 유기체적 발전이 종료되기 이전에 이미 충분히 진행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축적은 유기체 발전이 최종 단계에 이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90)


"지시적 사고라는 특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지능은 유기체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건 필요로 하는 환경적 자극을 생산(발견, 선택)하는 것과 같은 방법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문화적 자원을 조작하는 데에 달려 있다. 이것은 정보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고 이 탐구는 더욱 절박한 것인데, 그것은 그 정보가 유전적 자질에 의해서 유기체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고도의 일반성을 지니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하등동물일수록 행동을 수행하기에 앞서 환경으로부터 상세히 배울 필요가 적다. 새들은 나는 것을 배우기 전에 풍동을 만들어 항공 역학의 원리를 실험할 필요가 없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특이성〉은 흔히 인간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많은 종류의 것들을 배울 수 있는가로 나타내어졌다." "전반적으로 약체인 인간은 문화 없이는 신체적으로 생존 불가능한 동물이라고 흔히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인간이 정신적으로도 생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다."(103)


"이 모든 것은 인간 사고의 지적인 측면뿐 아니라 정서적 측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인간이 가지는 엄청난 본질적 감수성을 고려할 때 그러한 압력은 지나치게 강도가 높거나, 너무 다양하거나, 너무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감정의 파괴와 사고과정의 완전한 붕괴가 따르기 때문이다. 권태도 히스테리도 모두 이성(理性)의 적이다. 이처럼 〈인간은 가장 이성적이며 또한 가장 감정적 동물인〉 까닭에, 감정의 극단적 동요가 따르는 지속적 정서불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금기(禁忌), 행동의 균일화, 익숙한 개념에 의한 낯선 자극의 빠른 〈합리화〉 등의 방법을 통하여 공포, 격분, 암시적 자극 등에 대하여 매우 신중하게 문화적으로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상당히 고도의, 비교적 지속적인 정서 활동 없이는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까닭에, 그러한 활동을 유지시킬 수 있는 다양한 감각적 체험을 항상 확보해주는 문화적 장치 또한 필수적이다."(104)


제4장 문화체계로서의 종교


# 종교의 정의

(1) 작용하는 상징의 체계로, 

(2) 인간에게 강력하고, 널리 미치며, 오래 지속되는 분위기와 동기를 성립시키고,

(3) 일반적인 존재의 질서 개념을 형성하며,

(4) 그러한 개념에 사실성의 층을 씌워,

(5) 분위기와 동기가 특이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상징체계이건 상징의 복합이건 간에, 문화 패턴에 관한 한, (1)의 정의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반적 특성은 그것이 정보의 외재적 원천이라는 점이다. 〈외재적〉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나는 오직─예컨대, 유전자와는 달리─개별 유기체의 경계 밖에, 즉 공통적 이해의 간주관적 세계에 그것들이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려고 했다. 모든 인간은 그 세계 속으로 태어나고, 그 속에서 각자의 개별적 경력을 쌓고, 그들이 죽고 난 뒤에도 존속한다. 〈정보의 원천〉이라는 말을 통해서, 나는 오직─유전자와 마찬가지로─그것들이 그것들 외부의 과정과 관련하여 제한된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청사진 또는 형판(型板)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하려고 했다." "즉 문화패턴은 그 자신을 사회적, 심리적 실재에 맞게 만드는 동시에 사회적, 심리적 실재를 자신들에게 맞게 만드는 과정을 통하여 사회적, 심리적 실재에 의미, 즉 객관적 개념 형식을 부여한다."(117-8)


"혼돈─해석만이 아니라 해석 가능성이 결여된 사건의 혼란─은 적어도 세 가지 문제에서 인간에게 끼여들려고 위협한다. 그것은 인간의 분석능력의 한계에서, 인내력의 한계에서 그리고 그의 도덕적 통찰력의 한계에서이다. 당황, 고통 그리고 손댈 수 없는 윤리적인 역설의 느낌은 만일 그것들이 지나치게 심해지거나, 길게 지속되거나 하면, 모든 인생은 이해 가능하며 우리는 사고를 통해서 그 안에서 효율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치짓게 할 수 있다는 명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 된다. 존속하기를 바라는 모든 종교는 그것이 아무리 〈원시적이라도〉 그것과 같은 도전에 어떻게 해서든 대처하도록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어떤 사람들─필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의 세계를 그려내고 설명하기를 호소하는 사물을 설명하기 위한 인간의 설명장치, 즉 수용된 문화 패턴(상식, 과학, 철학적 사색, 신화)의 복합이 되풀이하여 작용하지 않게 되면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126-7)


"역설적으로, 종교적 문제로서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고통을 회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고통을 당하느냐, 어떻게 육체적 고통, 개인적 상실, 세속적 패배, 또는 타인의 고뇌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을 참을 만하고, 견딜 만한 것─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통 당할 만한 것─으로 만드느냐이다." "베버가 말한 '의미의 문제(Problem of Meaning)'에서 보다 더 지적인 측면은 경험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 가능성을 긍정하는가의 문제이며, 보다 더 감정적인 측면은 궁극적인 인내 가능성을 긍정하는가의 문제이다. 종교의 한 측면이 현실의 전반적 형태에 대한 권위 있는 개념을 분석적으로 형성하는 우리의 상징적 자원의 힘에 닻을 내리고 있다면, 또다른 측면은 그것의 퍼져나가는 성향과 내재된 느낌 및 성질에 대한 유사한 개념을 감정─분위기, 감성, 정열, 애정,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역시 상징적인 우리의 자원의 힘에 닻을 내리고 있다."(131)


"종교적 개념이 진실이며, 종교적 지시가 옳은 것이라는 확신이 어떤 식으로든 발생하는 것은 의례─즉 신성화된 행위─에서이다. 신성한 상징이 인간에게 일으키는 분위기와 동기,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서 형성하는 존재의 질서에 대한 일반 개념이 서로 만나 강화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의식(儀式)의 형식─비록 그것이 신화의 낭송, 신탁(神託)에 묻는 것, 또는 무덤의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에서이다." "신의 개입이 신앙의 창조에서 어떤 역할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그것이 어느 쪽이라고 말하는 것은 학자의 일이 아니다─인간의 차원에 종교적 확신이 나타나는 것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종교적 관행의 구체적 행위의 맥락으로부터이다." "그러한 의례들 안에는, 한편에서는 광범한 분위기와 동기가, 다른 한편에서는 광범한 형이상학적 개념이 결합된다. 싱어의 용어를 빌리면, 우리는 이들 성숙한 의식들을 〈문화적 연기(cultural performance)〉라고 부를 수 있다."(141-2)


제5장 에토스, 세계관 그리고 성스러운 상징의 분석


"최근의 인류학적 논의에서, 어떤 문화의 도덕적 (그리고 미적) 측면이나 평가적 요소는 보통 〈에토스(ethos)〉라는 용어로 요약되어왔다. 반면에 인지적, 존재론적 측면은 〈세계관(world view)〉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어왔다. 한 민족의 에토스는 그들 생활의 색조, 성격, 성질이고, 그것의 도덕적, 미적 양식이며 분위기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에 대한 그리고 생활이 반영하는 그들의 세계에 대한 근본적 태도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그들의 그림이며, 자연, 자신, 사회에 관한 그들의 개념이다. 그것은 질서에 대한 그들의 가장 포괄적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종교적 신앙과 의례는 대립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강화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그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존재의 일반적 질서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를 제시하는 것은 그러한 가치나 질서가 어떻게 생각되든 간에 모든 종교에서 본질적인 요소이다."(157-8)


"그러나 의미라는 것은 십자가, 초승달 또는 깃털을 가진 뱀(땅 위의 뱀과 하늘의 새가 결합된, 고대 멕시코의 중요한 신인 케트살코아틀)과 같은 상징으로만 〈축적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상징은 의례에서 극적으로 표현되거나, 신화에서 이야기되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관해서 알려진 것, 그것이 지지하는 감정적 생활의 질, 그 안에 있을 때 행동해야만 하는 방식들을 집약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따라서 성스러운 상징은 존재론과 우주론을 미학과 도덕에 연결시킨다. 그것들의 독특한 힘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사실을 가치에 결합시킨다고 생각되는 능력, 즉 단지 실제의 것에 불과한 포괄적인 규범적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서 유래하고 있다." "어떤 수준에서 세계관과 에토스를 통합하려는 경향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경험적으로는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실제로는 보편적이다."(158)


"성스러운 상징은 긍정적인 가치뿐 아니라 부정적인 가치까지도 극화한다. 그것들은 선이 되는 것뿐 아니라 악이 되는 것의 존재를 향해서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갈등을 향해서도 가리킨다. 소위 악의 문제란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있는 파괴적인 힘의 현실적 본질을 세계관의 용어로 도식화하는 문제이며, 살인, 농사의 실패, 질병, 지진, 빈곤, 억압을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들에 대처하는 것이 가능해지도록 해석하는 문제이다. 악을 근본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인도 종교와 일부 기독교 교파처럼 악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예외적 해결방식일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악에 대한 태도는 포기, 능동적 대항, 쾌락적 도피, 자기 비탄과 참회, 자비를 원하는 겸허한 기원 등 악의 본질을 인정하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것이어야 할 것이 요구된다." "에토스는 단지 그들이 찬양하는 고상함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비난하는 비천함에서도 현저히 드러난다. 즉 악덕은 미덕과 더불어 양식화되는 것이다."(162-3)


"따라서 사회적 가치를 지지하는 종교의 힘은 그러한 가치가 그것의 실현에 대립하는 힘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구성요소가 되어 있는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 종교적 상징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것은, 막스 베버를 인용하면, 〈사건들이 그저 존재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의미를 지니며 그 의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상상력을 나타내고 있다." "어떤 문화에서도 단순한 인습주의는 사람들을 거의 만족시키지 못한다. 종교의 역할이 시대, 개인, 문화에 따라서 다르다고 하더라도, 종교는 에토스와 세계관을 융합시킴으로써 일련의 사회적 가치에 대하여 그것들이 강제력을 지니기 위하여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즉 객관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측면을 제공한다. 성스러운 의례와 신화에서, 가치는 주관적인 기호로서가 아니라 특유의 구조를 지니는 세상에 내재되어 있는 생존을 위하여 강요된 조건으로 묘사된다."(163)


제6장 의례와 사회변화: 자바의 예


"이 장의 논제는 기능주의적 이론이 ('사회변동'이라는) 변화를 다루지 못한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사회학적 과정과 문화적 과정을 동등하게 다루지 못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 거의 필연적으로 둘 중에 하나는 무시되거나 희생되어 다른 것의 단순한 반영, 즉 〈거울에 비친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버린다. 문화는 전적으로 사회조직의 형태에서 파생된 것─많은 미국의 사회학자뿐 아니라 영국의 구조주의자에게 특징적인 접근법─으로 간주되거나, 또는 사회조직의 형태가 문화 패턴의 행태적 구현─말리노프스키와 많은 미국의 인류학자들의 접근법─으로 간주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어느 경우이든 종속적 항목은 역동적 요소에서 제외되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문화의 총괄적 개념(〈······의 복합적 총체〉)이거나 아니면 사회구조라고 하는 아주 포괄적 개념(〈사회구조는 문화의 한 측면이 아니라 특별한 이론틀 속에서 조정되는 주어진 인간 문화의 전체〉)이다."(176-7)


"그러나 문화와 사회체계를 구분하는 보다 유용한 방식 중 하나─그러나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니다─는 전자가 의미와 상징의 규칙화된 체계이며 그 체계를 준거로 사회적 상호 작용이 발생한다고 보고, 후자를 사회적 상호 작용의 유형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한편에는 사람들이 세계를 정의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판단을 내리기 위한 신앙과, 표현적 상징 및 가치의 준거틀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는 연속되는 상호 작용적 행위의 과정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것의 지속적 형태를 사회구조라고 부른다. 문화는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기 위한 의미의 틀이다. 사회구조는 행위의 형태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관계의 네트워크이다. 따라서 문화와 사회구조는 동일한 현상에서 얻어진 상이한 추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전자는 사회적 행동을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의미의 관점에서 고려하며, 후자는 어떤 사회체계의 작동에 대한 기여라는 점에서 고려한다."(177-8)


"문화와 사회체계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소로킨이 〈논리-의미적 통합〉이라고 부른 것과 〈인과-기능적 통합〉이라고 부른 것 사이의 대조이다. 문화의 특징인 논리-의미적 통합은 바흐의 푸가, 천주교의 교리 혹은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통합을 뜻한다. 즉 양식의 통일, 논리적 함의의 통일, 의미와 가치의 통일이다. 사회체계에 특징적인 인과-기능적 통합은 모든 부분들이 단일한 원인 및 결과의 그물에 결합되어 있는 유기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통합을 뜻한다. 각 부분은 〈체계의 유지〉에 작용하는 상호 인과관계의 수레바퀴를 이루는 한 요소가 된다. 두 통합의 유형은 동일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 중 하나가 취하는 특별한 형태가 다른 것이 취할 형태를 직접적으로 내포하지는 않기 때문에, 둘 사이 그리고 그것들과 세번째 요소 사이, 즉 우리가 흔히 인성구조라고 부르는 각 개인 안의 동기 부여적 통합의 유형 사이에는 내재적 불일치와 긴장이 존재한다."(178)


"사회학적 종류이든 사회심리학적 종류이든 간에, 정태론적 기능주의는 이런 종류의 부조화를 추출할 수 없다. 논리-의미적 통합과 인과-기능적 통합을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구조와 사회구조가 단순한 서로의 반영물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이지만 독립변수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변화의 동인(動因)은 자신이 무엇인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세상, 그 본질적 의의를 파악할 수 있다고 느끼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하는 인간의 욕구와 기능하는 사회유기체를 유지시키려는 욕구가 일치하지 않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이 고려되는, 보다 역동적인 형태의 기능주의 이론에 의해서만 분명하게 도식화될 수 있다. 〈학습된 행위〉라는 산만한 문화 개념은 균형잡힌 상호 작용의 패턴으로 사회구조를 보는 정태론적 견해이며, 또한 문화의 구조와 사회구조가 (〈해체〉상태를 제외하고) 결국 서로의 단순한 투사상에 불과하다는 공언된, 혹은 무언의 가정은 너무도 유치한 개념장치이다."(205)


제7장 현대 발리에서의 "내적 개종"


"막스 베버는 종교학에 관한 유명한 저서에서 세계종교를 〈전통적인〉 종교와 〈합리적인〉 종교라는 두 이념형으로 구분했다." "이 두 이념형은 종교와 사회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결정된다. 전통적 종교(베버는 〈주술적〉이라는 용어도 사용했다)는 기존의 사회적 관행들을 엄격하게 전형화시킨다. 전통적 종교는 거의 하나하나가 연결되는 방식으로 세속적 관습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모든 인간 활동을······상징적 주술의 범주로〉 끌어들이고, 그렇게 해서 일상적 삶이 끊임없이 고정되고 확고하게 계획된 과정을 거치도록 해준다. 그러나 합리적 종교는 일상생활의 구체적 실상과 그렇게 전적으로 얽혀 있지 않다. 합리적 종교는 일상생활과 〈떨어져서〉, 〈그 위에〉 또는 〈그 외부에〉 존재한다. 그리고 의례와 신앙의 체계와 세속적 사회와의 관계는 밀접하거나 확실하지 않고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합리적 종교가 세속적 삶을 등한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207-8)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 사이의 관계가 이와 같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영역 그 자체의 구조 또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 종교는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되고 단지 느슨하게 규칙지어진 다수의 성스러운 실체, 거의 모든 종류의 현실적 사건에 대해서 독립적이고 분절적이며 즉각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포함시킬 수 있는 상세한 의례적 활동과 생생한 애니미즘적인 이미지의 정돈되지 않은 덩어리로 존재한다." "반면, 합리적인 종교는 보다 추상적이고 보다 논리적으로 일관되며 보다 일반적으로 표현된다. 전통적 체계에서 내재적이고 분절적으로 표현되던 의미의 문제가, 여기에서는 포괄적으로 도식화되어 종합적인 태도로 접근된다. 의미의 문제는 특정의 사건과 분리될 수 없는 면보다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간 존재의 내재적 본질로 개념화된다." "베버는 바로 이런 포괄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소위 세계종교(world religions)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논했다."(208-9)


"전통적 종교와 합리적(이것의 반대는 불합리가 아니라 합리화되지 않은 것이다) 종교의 대비는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적으로는 그 차이가 명백하지 못하다. 특히, 문자를 가지지 않은 민족들의 종교는 전적으로 합리적인 요소를 결여하고 있고 문자를 가지고 있는 민족들의 종교는 완벽하게 합리화되었다고 가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원시종교라고 불리는 많은 종교들도 자의식이 강한 비판을 보여주고 있으며, 종교적 사고가 고도의 철학적 정교함에 도달한 사회에서도 전통적인 종류의 민간신앙이 끈질기게 지속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말한다면, 세계종교가 씨족, 부족, 촌락의 종교나 민간신앙에 비해서 보다 뛰어난 개념적 일반화, 보다 단단한 형식적 통합, 보다 명쾌한 교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종교적 합리화는 전체 아니면 무(無)의 과정이 아니며, 역행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과정도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나타나는 현실의 과정이다."(211)


제8장 문화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에는 현재 두 가지 주요한 접근법이 있다. 그것은 이익이론(interest theory)과 긴장이론(strain theory)인데, 전자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가면이자 무기이고, 후자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징후이자 치료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의해서 완성된) 이익이론에서 이데올로기적 견해는 이익을 얻기 위한 보편적인 투쟁을 배경으로 하고, 긴장이론에서는 사회심리적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만성적인 노력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전자에서는 권력을 추구하며, 후자에서는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물론 인간은 동시에 양쪽 측면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혹은 한쪽을 이용해서 다른 쪽을 취할 수도 있고─두 이론이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익이론이 가지는 경험적 난점에 대응하여 등장한) 긴장이론이 덜 단순하고, 더 날카로우며, 덜 구체적이며, 더 포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240)


"예나 지금이나 이익이론의 최대 강점은 문화적 관념체계의 뿌리를 공고한 사회구조의 토대 속에 두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그러한 체계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동기를 강조하고 그러한 동기가 사회적 지위, 특히 사회계급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서 관념은 무기이고, 어떤 집단, 계급, 정당의 현실에 대한 특정한 시각을 제도화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그것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이익이론은 정치이론을 정치투쟁과 결합시켰다. 이러한 공헌은 영속적인 것이었고, 만일 이익이론이 기존의 주도권을 지금에 와서 상실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익이론의 잘못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발견한 사회적, 심리적, 문화적 요인간의 복잡한 상호 작용에 대처하기에 이론적 장치가 너무나 원초적이었기 때문이다. 뉴턴 역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추후에 발전된 연구에 의해서 대체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흡수되었다."(241)


"한편 사회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권력에의 투쟁이라는 관점은 이데올로기를 고도의 기만으로 간주하는 과도한 마키아벨리즘에 이르게 함으로써 결국 이데올로기의 보다 포괄적이면서 덜 극적인 사회적 기능을 무시하게 한다. 주의(主義)간의 충돌로 엷게 가장한 이해관계의 충돌이라는 사회에 대한 전쟁터의 이미지는 사회적 범주의 규정(또는 모호화), 사회적 기대의 안정화(또는 불안정화), 사회규범의 유지(또는 파괴), 사회적 합의의 강화(또는 약화), 사회적 긴장의 해소(또는 고조)라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주의하지 않게 한다. 이데올로기를 필전(筆戰)에 놓여 있는 무기로 축소시키는 것은 이데올로기 분석에 호전성을 고양시키는 것이 되겠지만, 그러한 분석은 전략과 전술의 협소한 현실주의로 지적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익이론의 강도는─화이트헤드의 표현을 빌면─그 자체의 편협성에 대한 보답일 뿐인 것이다."(242)


"긴장이론이 출발하는 분명하고 독특한 개념은 사회의 만성적인 불통합(不統合) 상태이다. 어떠한 사회적 질서도 그것이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기능적 문제를 처리할 때 완전히 성공하지는 않으며 또한 그럴 수도 없다. 자유와 정치질서, 안정과 변화, 효율과 인도주의적인 것, 엄격함과 융통성 등 모두가 해결되지 않는 이율배반으로 되어 있다. 경제, 정치, 가족 등 사회 각 부문의 규범들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나아가 이런 알력 또는 사회적 긴장은 개인 인성의 차원─그 자체가 갈등하는 욕구, 과거에 기인하는 감정 그리고 즉흥적 방어의 필연적인 불통합 체제이다─에서는 심리적 긴장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 사상은 이러한 절망에 대한 (일종의) 반응으로 간주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사회적 역할이 초래하는 패턴화된 긴장에 대한 패턴화된 반응이다.〉 그것은 사회적 불균형으로 야기된 감정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한 〈상징적 배출구〉가 된다."(243)


"사회학자들이 이데올로기를 단지 고통에 대한 정교한 울부짖음 정도로 국한시킨 것은 그러한 이론의 부재, 특히 비유적 언어를 다루기 위한 분석틀의 부재에 기인한다." "퍼시가 지적하고 있듯이, 철학자(그는 과학자를 포함시켰을 수도 있다)를 매우 성가시게 했던 은유의 특징은 그것이 〈틀렸다〉는 데에 있었다. 즉 〈은유는 어떤 것을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라고 단언한다.〉 더구나 가장 잘 〈틀렸을 때〉 가장 효과적인 경향이 있다. 은유의 힘은 그것이 단일한 개념틀 안에 상징적으로 밀어넣은 서로 조화되지 않는 여러 의미들의 상호 작용과 그것의 강요가 심리적 저항, 즉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생기는 의미론적 긴장을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극복하느냐의 정도에서 나온다. 제대로 작용되면 은유는 잘못된 동일화(예를 들면 공화당의 노동정책과 볼셰비키의 노동정책)를 적절한 유추로 변형시킬 수 있게 되며, 불발이 되면 단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된다."(249-51)


"여타의 차이점이 무엇이든 간에 소위 인식적 상징과 표현적 상징 또는 상징체계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둘 모두 생활을 패턴화시키는 정보의 외재적 자원이다. 즉 세계를 지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조작하는 초개인적 장치인 것이다. 문화 패턴─종교적, 심리적, 미학적, 과학적, 이데올로기적 패턴─은 〈프로그램들〉이다. 유전학적 체계가 유기적 과정을 조직해가면서 형판 같은 것을 제공하듯이,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사회적, 심리적 과정을 조직해가면서 형판 또는 청사진을 제공한다. … 유전적 형판은 문화적인 형판에 의해서 정확한 일련의 행동들을 조직하고 전면적인 정신물리학적인 상황을 만든다." "자기 실현의 실행자인 인간은 상징 모델을 구축하는 그의 일반적인 능력으로부터 자기를 규정하는 특정한 능력을 창출한다. 또는 사회질서에 대한 도식적 이미지, 즉 이데올로기의 구축을 통해서 인간은 좋든 나쁘든 스스로를 정치적 동물로 만들어간다."(258-9)


제9장 혁명 이후: 신생국에서의 민족주의의 운명


# 민족주의의 네 단계

1. 민족주의 운동이 형성되고 구체화되는 단계

2. 승리를 거두는 단계

3. 국가로 조직화되는 단계

4. 국가로 재편된 민족주의 운동이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및 자신의 모체였던 무질서 사회와의 관계를 규정하고 그것을 안정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


"하나의 지역국가가 이제 꿈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게 되면서, 민족주의적 이념화 작업은 전면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제 경험상의 〈우리〉를 창조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토착적 생활양식〉(The Indigenous Way of Life)이나 〈시대정신〉(The Spirit of the Age)이라는 두 개의 추상적 구호의 내용과 상대적 중요성 그리고 이들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질문이 계속적으로 제기된다. 토착적 생활양식을 강조한다는 것은 새로운 정체성의 기초로서 지역적 관습이나 기존의 제도 그리고 공동의 경험─전통, 문화, 국민성, 심지어 인종─을 중요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서 시대정신을 강조하게 되면 우리 시대 역사의 일반적 개요와 특히 그 시대의 전반적인 방향과 의미로 간주되는 것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두 개의 사조(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본질주의〉와 〈시대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나타나지 않는 신생국은 없으며, 그 두 개가 서로 완전히 얽혀 있지 않은 곳은 별로 없다."(284)


"그러므로 본질주의와 시대주의의 상호 작용은 일종의 문화적 변증법인 추상적 사고의 병참술이 아니라, 산업화처럼 구체적이고 전쟁처럼 명백한 역사적 과정이다. 문제들이 단순한 주의나 주장의 수준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이런 측면이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모든 신생국의 사회구조가 겪고 있는 실질적인 전환의 수준에서 더욱 중요하게 논의된다. 이데올로기적 변화는 사회의 진행과정과 병행하여 그것을 반영하거나 결정짓는 독자적인 사상의 흐름이 아니며, 그것은 사회의 진행과정의 한 단면이다." "따라서, 비록 신생국에서는 보편적 현상이긴 하지만, 이러한 명백한 역설적 상황 하에서 국가 통일을 향한 움직임은 그들의 특수한 맥락에 의거하는 문화 유형을 그 맥락으로부터 떼어내어 그것을 일반적인 충성 대상으로까지 확대시켜서 정치화시킴으로써 사회 안의 집단들간의 긴장을 심화시켰다. 민족주의 운동이 발전할수록 그것은 여러 갈래로 분해되었다."(287-9)


제10장 통합을 위한 혁명: 신생국에서의 원초적 정서와 시민정치


"하나의 사회로서 신생국은 원초적 유대에 기반한 심각한 이탈에 비정상적으로 영향을 받기 쉽다. 원초적 유대란 사회적인 존재에게 〈주어진〉 것에서 유래하는 것─더 정확하게는 문화가 불가피하게 그런 문제에 연루됨으로써 〈주어진〉 것─을 뜻한다. 주로 일차적인 접촉과 혈연적 연관이지만, 이것들을 넘어 특정한 언어, 혹은 심지어 방언을 말하고, 특정한 사회적 관습을 따르며, 특정한 종교 공동체에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주어짐인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 있는 사회는 시민정치의 전통이 약하고 효율적인 복지행정을 위한 전문기관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다. 이러한 사회에서 원초적 유대는 반복적으로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지속적으로 자율적 정치단위의 구획짓기를 위한 아주 좋은 기반으로 널리 찬양된다. 진정으로 합법적인 권위란 그런 원초적 애착이 내포하고 있다고 인식되는 생태적인 구속력에서만 나온다는 이론은 솔직담백하게, 열정적으로 그리고 소박하게 옹호된다."(304-5)


"원초적 요소에 기반한 정치적 결속체들은 대부분 신생국들의 심층에서 끈질긴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왕성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뚜렷하게 표출되지는 않는다. 우선, 단일한 시민국가의 범위 안에서 어느 정도 전체적으로 작용하는 헌신(충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작동해야 할 충성 사이를 분류하는 문제를 위하여 유용한 분석적 구별이 이루어질 수 있다. 또는 달리 표현하여, 인종적, 부족적, 언어적 준거집단이 기존의 시민국가에 비해서 더 작은 경우와, 반대로 그것들이 국가보다 더 크거나 최소한 어떤 형태든 시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우들을 대조적으로 놓고 볼 수 있다. 원초적 불만은 먼저 정치적 질식감에서 또 두번째는 정치적 분할에서 생기게 된다. 버마의 카렌족의 분리주의, 가나의 아샨티족이나 우간다의 간다족의 문제는 전자에 관한 예들이고, 범아랍주의, 대(大)소말리주의, 범아프리카주의는 후자의 예가 된다. 신생국의 대부분은 이 두 종류의 문제로 동시에 고통을 받고 있다."(310)


"원초적 정서와 시민정치 사이의 이 긴장은 비록 조정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자신이 누구이고, 어느 집단에 확실히 귀속되는가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형성하는 출생지, 언어, 혈통, 외모, 생활양식이라고 하는 〈여건(與件)〉의 힘은 인성의 기반 중에서도 이성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무반성적(無反省的)인 집단의 자기 상(像)은 한번 확립되면 착실히 진행되는 국가의 정치과정 속에 어느 정도 개입되는 것은 확실하며, 그것은 정치과정이라는 것이 그토록 넓은 범위에까지 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생국─또는 그 지도자들─이 원초적 유대에 관한 한 노력해야 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현실에서 행해져왔듯이,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거나 그것의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바랄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유대감을 길들이는 것이다."(325-6)


제11장 의미의 정치


"정당성이라는 고전적 문제─어떻게 해서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리를 인정받게 되는가─는 오랜 기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음으로써 규모는 전국적이지만 실체는 그렇지 못한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는 특히 심각하다. 국가가 대권을 장악하고 국민으로부터 그것을 지키는 것 이상을 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그 국가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겨지게 하고 싶은 사람들, 즉 국민들에게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단순한 합의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자신이 그것을 직접 수행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의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그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정부의 행위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직접성의 문제이며, 국가가 〈행하는〉 것을 친숙하고 이해 가능한, 〈우리〉로부터 자연스럽게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문제이다."(372)


"독립을 성취했을 당시 그처럼 엄청나게 생각되었던 정치적 과업들─외세(外勢) 지배의 종결, 지도체제의 창출, 경제발전의 도모, 국민적 통일감의 유지─은 분명히 엄청난 과업들이었음이 밝혀졌으며, 독립을 성취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러한 과업들 외에 또 하나의 다른 과업이 추가되었다. 그것은 당시에 덜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확실히 인식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바로 근대 정부의 여러 제도들로부터 외국 냄새를 제거하는 것이다." "낙후된 것이라고 비난받는 신앙, 관습, 이상, 제도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한 가지가, 그러나 대개 같은 것이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현대성의 정수로 찬양되며, 다른 한편으로 외국의 것이라고 공격받던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한 가지, 역시 같은 한 가지가, 민족혼의 성스러운 표현으로 환호된다. 이러한 문제에서 〈전통적〉으로부터 〈근대적〉으로의 단순한 진보는 없다."(373-5)


"보통은 부정되지만 실은 부정할 수 없는 이 사실은 근대화가 토착적이고 쇠퇴하고 있는 것을 수입된 최신의 것으로 대체하는 일로 이루어진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어떠한 분석도 불가능하게 한다." "문화적 보수주의와 정치적 혁신주의의 긴장된 결합이 신생국의 민족주의의 중추에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 인도네시아보다 더 극명한 곳은 없다." "즉 한 수준에서는 지극히 일반화된 합의─인도네시아는 하나가 되어 근대화의 정상으로 돌진해나가야 하며, 동시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전통 문화의 정수를 지켜야만 한다는 것─가 다른 수준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부터 그 근대화의 정상으로 돌진해나갈 것인가 그리고 전통문화의 정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점증하는 의견의 불일치로 저항받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가 달려간 그 부조화의 종착역은 1965년의 실패한 쿠데타와 그후의 무자비한 여파─3, 4개월 동안 25만 명의 사상자를 낸─그리고 수하르토의 집권이었다."(376-9)


제12장 과거의 정치, 현재의 정치: 신생국 연구와 인류학


"인류학이 농민사회의 일반 비교정치학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면, 첫번째로, 전통적 국가들의 문화적 야심과 보통 아주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문화적 야심을 실현시킨 사회제도를 구분함으로써 우리들은 사회학적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향하여 다가갈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서턴 교수가 말하는 〈기점〉이란 일종의 회고적 이념형이나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 특정 공간과 시간 속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역사적 현실이다." "나는 단지, 전통적 정치의 실제적 모습에 대한 면밀한 민족지적 연구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듯이, 지배자들의 열망, 즉 그들을 어떤 지고(至高)의 목적으로 인도하는 이상과 관념들을 그 목적 수행의 수단인 사회제도와 구별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대 국가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통 국가에서도 정치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와 그것이 힘을 미치고 있는 범위는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는 데에 인류학이 기여하는 것이다."(397-8)


"두번째로, 우리는 사회학적 사실주의에 가까이 다가섬으로써 이 분야의 중심적 의문들─즉 신생국의 정치가 걸어가는 길과 전통적 정치가 걸어갔던 길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풀어볼 수 있다." "어떤 정치 형태 속의 행위자들을 통제하는 질서의 관념과 그 행위의 무대가 되는 제도적 맥락을 개념적으로 구분한다면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와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더 생산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재란 온전히 과거의 유산일 따름이다〉, 〈과거라는 것은 단지 한 바구니의 잿더미일 뿐이다〉 따위의 상투적 주장들을 불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러한 구분을 통해서 문화적 전통이 그것을 이어받은 현재의 국가에 대해서 미치고 있는 이념적 기여와 그러한 국가에 대해서 그것에 선행했던 정부체계들이 미치는 조직적 기여를 구별하기가 쉽게 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398-9)


"전통적 국가를 지탱시켜주던 문화적 기구─상세한 신화들, 정교한 의례들, 고도로 발달한 예의─가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에서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그 나머지 국가들에서조차도 해체되어감에 따라서, 그 자리에는 정치의 성격과 목적에 관한 보다 추상적이고, 보다 의도적이며, 용어의 공식적인 의미에 있어서 보다 합리적인 관념 형태들이 들어설 것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이전 시대의 덜 세련되고 전(前)이데올로기적인 관념들을 대체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과 유사한 역할을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정치적 행위에 대한 지침과, 그 정치적 행위를 이해하기 위한 이미지와, 그 정치적 행위를 설명해주는 이론과, 그 정치적 행위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을 제공한다. 이렇게 과거에 만들어지고 전래된 태도와 관습이었던 것을 자각하고 보다 더 명시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우리가 걱정 반 희망 반으로 〈국가 건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400)


제13장 지적인 야만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저서에 관하여


"인류학자는 두 가지 운명 중 하나는 자신의 문화가 이미 그들의 문화를 더럽혀, 〈오물, 인류의 얼굴에 던져진 우리의 오물〉로 뒤덮어버렸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이해가 가능해진 사람들 사이를 여행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다지 오염되지 않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들 사이를 여행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둘 중 하나이다. 엄청난 낯설음이 자신의 삶과 그들의 삶을 갈라놓는 진짜 야만인들(어떤 경우에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이를 떠도는 사람이거나, 혹은 〈사라져버린 실재를 찾아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회상적 여행가이다. 〈회상적 여행가란 공간의 고고학자, 즉 여기저기의 파편 조각의 도움으로 이국적 문화를 재구성하려고 헛된 노력을 하는 고고학자이다.〉 거울 속의 사람들과 마주한 그는 그들을 만질 수는 있으나 파악할 수는 없다. 〈나는 이중적인 병약함의 희생양이다. 내가 보는 것은 나에게 상처를 주며 내가 보지 못한 것이 나를 자책하게 했다.〉"(410-1)


"그렇다고 인류학자는 절망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결코 야만인들을 알 수 없는가?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로 접근하는 데에는 개인적으로 뛰어드는 것과는 다른 길이 있기 때문이다─즉 아직도 채집 가능한(아니면 이미 채집된) 파편들로부터 사회에 대한 이론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비록 실제 관찰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조응하지 않을지라도 인간 존재의 기본 토대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원시인과 그들의 사회가 표면적으로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수준, 심리적 수준에서 그들은 결코 이방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따라서 특정의 야만인의 부족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시도하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한걸음 물러서서 사고(思考)에 대한 일반적, 폐쇄적, 추상적, 형식적 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지성의 보편적 문법을 발전시킴으로써 성취할 수 있게 된다."(411)


"야만인들은 실제에 대한 모델, 자연세계, 자아, 신화에 대한 모델을 만든다. 이런 비정통의 과학(〈우리가 '원시적[primitive]'이라기보다 '원초적[primary]'이라고 부르고 싶은〉)은 유한성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개념 세계의 요소들은 미리 만들어져 주어진다. 그리고 사고한다는 것은 그 요소들을 다루는 것이다. 야생적 사고의 논리는 양(量), 양식, 색깔은 변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패턴들로 분화될 수 있는 만화경과 같이 작용한다. 이런 식으로 만들 수 있는 패턴들의 수는 만약 그 만화경의 장면들이 충분히 많고 다양할수록 클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 패턴들은 서로 마주 보는 장면들의 배열에 따라서 구성된다(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독립된 개별적 특성의 반영이라기보다는 그 장면들 사이의 관계함수이다). 그리고 변형 가능한 범위는 만화경의 구조, 즉 그 작용을 지배하는 내적 법칙에 의해서 엄격하게 결정된다. 이것은 또한 야생적 사고에서도 그러하다."(413)


"레비-스트로스가 스스로를 위해 만든 것은 문화의 부비트랩 같은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감성을 지성의 그림자로 강등시키며, 특정 밀림에서 사는 특정 미개인이 가진 특별한 정신을 우리 모두에게 내재하는 '야생의 사고'로 바꾸어버린다. 그것은 그에게 브라질 여행에서 직면했던 난관─물리적 근접성과 지적 거리감─을 아마도 그가 항상 진정으로 원했던 것─지적 근접성과 물리적 거리─으로 해결하게 해주었다." "「야생의 사고」에서의 고급 과학과 「슬픈 열대」에서의 영웅적 탐험은 근본적으로 서로의 〈가장 단순한 변형〉일 뿐이다. 그 둘은 동일한 심층구조, 즉 프랑스 계몽주의의 보편적 합리주의의 다양한 표현들인 것이다. 구조언어학, 정보이론, 분류논리, 인공두뇌학, 게임 이론, 그외 다른 고급 이론들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레비-스트로스의 진짜 스승은 소쉬르도, 섀넌도, 불도, 바이너도, 폰 노이만도 아니고(극적 효과를 위해서 불러낸 마르크스도, 붓다도 아니고) 루소였다."(417-8)


제14장 발리에서의 사람, 시간 그리고 행동


"관념, 개념, 가치관 등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 적응하고, 사회적 맥락에 의해서 자극되며, 사회적 맥락에 대하여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가의 직업」이라는 소책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거상들, 즉 의류와 향신료를 파는 사람, 구리, 수은 혹은 명반(明礬)의 독점상인, 왕과 황제의 은행가들을 그들이 가진 상품만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가? 홀바인이 그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들이 에라스무스나 루터를 읽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세 봉신(封臣)들의 영주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도 이해해야만 한다.〉 사회활동의 조직, 그것의 제도적 형태, 그것을 움직이는 관념들의 체계가 함께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그것들간의 관계의 성격도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구조와 문화의 두 개념을 확실히 하려는 시도는 바로 이 이해를 목표로 하고 있다."(423-4)


"공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행위로서의 사고의 개념, 곧 사고는 경험을 통해서 의미를 각인한 상징의 과정(의례와 도구 ; 조각된 우상과 물웅덩이 ; 제스처, 얼룩무늬, 이미지, 소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은 문화의 연구를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실증적인 과학으로 만든다. 사고의 물질적인 전달수단인 상징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흔히 어렵고, 모호하고, 변동이 심하며, 선회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그런 의미도─특별히 그런 의미를 지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협조한다면─수소 원자의 무게나 부신의 기능처럼 체계적인 실증적 조사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문화 패턴, 질서 있는 일군의 중요한 상징들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패턴의 전체 집합체로서의 문화 연구는 바로 개인과 개인의 집단이 원래는 애매모호한 세계 가운데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아가는 장치를 연구하는 것이다."(424-5)


"이렇게 광범한 위치설정을 행할 때 필요한 사항 중 하나는, 물론 인간 개개인에 대한 특성짓기이다. 인간은 아무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범주의 개인을 특정한 범주의 대표자로서 인식하도록 도처에서 상징적인 구조를 발전시켜왔다. 어떤 경우에서도, 필연적으로 그런 구조들은 다수 존재한다." "사회학이나 사회인류학에서 소위 구조분석이라고 불리는 방법은 인간 범주의 특별한 체계를 갖춘 사회에 대해서 기능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고 때로는 이 체계가 특정한 사회과정의 영향을 받을 때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예측할 수 있다. 단, 이것은 이 체계─범주들, 그들의 의미, 그들의 논리적 관계─를 이미 알고 있을 때에만 해당된다." "우리가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사회를 대표하는 성원에 의해서 파악되는 경험(여기서는 개개인의 경험)의 의미 있는 구조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진보된 방법으로, 그것은 한마디로 하면 문화의 과학적 현상학이다."(425-6)


제15장 심층 놀이: 발리의 닭싸움에 관한 기록들


"발리인들은 일순간의 활동 속에서 산다. 어떤 표현양식도 그 표현양식 자체가 창조해낸 현재 속에서만 존재한다. 발리인들이 영위하고 인식하는 그들의 삶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하나의 방향성 있는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의미와 공허함 사이의 진동이며, 〈어떤 일〉(즉 무엇인가 중요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 짧은 기간과 〈아무것〉(즉 전혀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 짧은 기간들이 율동적으로 교차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들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찬〉 시간과 〈빈〉 시간들, 혹은 〈접속〉과 〈구멍〉 사이가 교차하는 것이다. 닭싸움은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개체들이 우연히 만나는 것에서부터 사원에 축하를 드리기 위해서 신들을 만나는 날까지의 모든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발리적인 것이다. 닭싸움은 발리인의 사회생활에서 보이는 단절성을 모방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것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의 깊게 만들어진 사회생활의 한 표본이다."(523)


"닭싸움이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지위관계로, 닭싸움이 지위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위신이라는 것이 심각하게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은 발리에서 보게 되는 모든 것─마을, 가정, 경제, 국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폴리네시아의 칭호의 위계와 힌두의 카스트가 기묘하게 융합된 자긍심의 위계서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사회의 도덕적인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계층서열에 존재하는 감정이 그 자연스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로지 닭싸움에서만이다. 닭싸움 이외의 장소에서는 예의의 베일 중에, 완곡함과 의례의 두터운 구름 속에, 제스처와 암시 속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은 동물의 가면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숨기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지극히 얇은 가장(假裝)으로만 나타난다. 질투도 평정만큼이나, 시기심도 우아함만큼이나, 폭력성도 매력만큼이나 발리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5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