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해석 까치글방 148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문옥표 옮김 / 까치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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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장 중층 기술: 해석적 문화이론을 향하여


"인류학, 최소한 사회인류학의 경우, 사람들이 하는 작업은 민족지(民族誌)이다. 교과서적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지 작업은 친화감 조성, 제보자 선정, 기록 복사, 족보 작성, 지도 작성, 일기 쓰기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기술적 문제들이 민족지 작업의 전부는 아니다. 민족지란 하나의 지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길버트 라일의 개념을 빌리면 그것은 〈중층 기술(thick description)〉의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현상 기술(thin description)과 중층 기술 사이에는 위계적으로 여러 층위의 의미구조가 존재한다. 가령, (눈꺼풀에) 경련을 일으키는 자, 윙크하는 자, 거짓 윙크하는 자, 흉내내는 자, 흉내를 연습하는 자 모두가 이 의미구조에 따라서 일정한 행위를 하고 의미를 부여받으며 해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눈꺼풀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게 해주는 의미구조 없이는 그들의 행위가 하나의 문화적 범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14-6)


"문화는 행위로 기록된 문서이며, 따라서 흉내낸 윙크와 마찬가지로 공적인 것이다. 그것은 비록 관념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누군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비록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가사의한 것도 아니다." "일단 우리가 인간의 행위(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진정한 눈의 경련이다)를 상징적 행동, 즉 말의 경우 발음 내지 발성, 회화의 경우 색채, 글쓰기의 경우 획(劃), 음악의 경우 음(音) 등이 가지는 의미를 지니는 행동으로 본다면 앞의 문제, 다시 말해서, 문화라는 것이 패턴화된 행동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틀인가 또는 그 두 가지가 혼합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흉내낸 윙크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은 그것의 존재론적 양태에 관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바위나 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은 그것의 중요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20-1)


"인류학적 저서들은 그 자체가 이미 해석이며, 그것은 두번째 해석일 수도, 세번째 해석일 수도 있다(실상 첫번째 해석은 〈원주민〉만이 내릴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인류학적 저서들이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그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니라거나 틀린 것들이라거나 혹은 〈만일 그렇다면〉 류의 실험적 사고라는 뜻이 아니라, 〈무엇인가 만들어진〉 혹은 〈무엇인가 형태지어진〉이라는 의미에서 허구라는 것이다." "만일 민족지가 중층적 기술이며 인류학자가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라면, 중요한 것은 그 기록이 윙크와 눈의 경련을 제대로 구별했는가 또는 진짜 윙크와 윙크 흉내를 구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현상적 기술인 해석이 되지 않은 상태의 자료에 대해서 그 설명의 설득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이방인들의 생활에 얼마나 근접시킬 수 있는가 하는 학문적 상상력의 정도에 의해서 그것을 평가해야만 한다."(27-9)


"우리가 기록하는 것(또는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대화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사회적 대화에서 우리 자신들은 지극히 주변적이거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된 행위자가 아닌 까닭에 우리는 그 사회적 대화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길이 없으며, 다만 제보자들이 우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 부분만큼만 이해할 뿐이다." "모든 현실세계의 복잡성으로부터 정제된 균형 잡힌 의미의 결정체를 상정하고 그 자체가 자생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는 듯이, 보편적 인간 정신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인 듯이, 또는 보다 광범하게 그들의 선험적 세계관의 표현인 듯이 간주하는 것은 곧 존재하지도 않는 학문 혹은 발견될 수도 없는 실체를 상상하는 것과 다름없다. 문화 분석은 의미의 대륙을 발견하여 거기에 형상도 없는 풍경화를 그려나가는 작업이 아니라, 의미를 추측하고 그 추측이 어느 정도 정확한가를 따져보고 보다 더 나은 추측으로부터 설명을 위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또는 그래야만 한다)."(34)


제2장 문화 개념이 인간 개념에 미친 영향


"계몽주의적 인간관은 간략히 말해서 뉴턴의 우주와 같이 규칙적으로 조직되어 있고, 전적으로 불변하며, 놀랍도록 단순한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법칙 중 일부는 부분적으로 다를지 몰라도 중요한 점은 법칙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의 문제점은 시간과 장소 및 환경이나 학문과 직업, 일시적 유행이나 순간적 의견과는 독립된, 일관성 있는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는 이미지는 환상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근대 인류학이 그밖의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확고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특정 지역의 관습에 의해서 달라지지 않는 인간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한 적도 없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상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이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것과 관습적이고 국지적이며 변화하는 것 사이에 경계를 긋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사실 그런 경계를 긋는 일은 인간 상황을 오도하거나 적어도 심각하게 잘못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52-4)


"여기서 위험한 것은, 만일 누가 (영어의) 대문자 〈M〉을 가진 인간(Man)이 그의 관습의 〈배경에서〉, 〈그 아래에서〉 또는 〈그 위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문자가 아닌 인간(man)이 관습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꾸게 되면 그는 인간의 모습을 모두 잃어버릴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시대와 장소의 영향 속으로 남김없이 용해되어버리거나 자신의 시대에 완전히 사로잡힌 어린아이가 되어, 헤겔 이후 계속 우리를 괴롭혀온 가공스러운 역사적 결정론 내지는 그것과 유사한 것에 휘말리게 된다. 우리는 사회과학에서 이와 같은 두 가지 궤도이탈을 모두 겪어왔는데, 하나는 문화적 상대주의의 기치 하에서, 다른 하나는 문화진화론의 기치 하에서 행진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보다 일반적으로 문화 패턴 그 자체 안에서 비록 표현은 동일하지 않더라도 독특한 성격의 인간 존재를 결정하는 요소를 탐구함으로써 그 궤도 이탈을 피하려고 노력해왔다."(55)


"우리는 문화가 인간성에서 본질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심지어 지고의 구성요소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문화가 인간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다. 문화적 사실은 그것을 비문화적 사실의 배경으로 용해시키거나 혹은 거꾸로 그러한 배경을 문화적 사실로 용해시키는 일 없이, 비문화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은 일종의 진화적으로 누적된 산물로서 위계적으로 층화된 동물이었다. 그점에서 유기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인 각각의 층은 정해전 명확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정말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생물학 등 다양한 인접 학문으로부터의 발견들을 마치 물결이 여러 겹으로 파장을 그리며 퍼져나가듯이 서로에게 부가시켜야 했다. 그렇게 된 연후에야 문화적 층위의 기본적 중요성, 즉 인간에게만 특징적인 성질이 자연스레 나타나서 인간이란 정말 무엇인가를 그 자체의 고유 권한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게 될 것이다."(56-7)


"인간 개념을 정의하는 문제가 발생할 때, 인류학자들이 문화의 특수성을 피하여 그 대신 피가 통하지 않는 보편성으로 도망치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인간 행동의 그 어마어마한 다양성에 직면하여 역사주의, 또는 어떤 확고한 기반도 완전히 제거시킬 만큼 강력한 문화 상대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에서 결정적인 것은 현상들이 경험적으로 공통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밑에 숨겨져 있는 지속적인 자연의 과정을 밝힐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유사한 현상들 사이의 실질적인 동일성이 아닌, 다양한 현상들 사이의 체계적인 관계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다양한 측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층위론적〉 개념을 종합적 개념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즉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문화적 요소들이 단일한 분석체계 속에서 변수들로 처리될 수 있게 하려는 구상이다."(63-4)


제3장 문화의 성장과 정신의 진화


"비행기의 발명은 인간의 신체 변화를 유발하지 않았고 (내면적인) 정신적 능력에도 어떠한 변이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자갈돌 석기와 거칠게 깎은 돌도끼의 경우에는 꼭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결과 더욱 곧은 직립 자세와 치열(齒列)의 축소 그리고 엄지손가락이 보다 중요해진 손이 생겼을 뿐 아니라 뇌가 현대인과 같은 크기로 확대된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도구의 제작은 손놀림과 시야의 발달을 촉진시켰기 때문에, 그것의 시작은 사회조직과 의사소통 및 도덕적 규제의 발전에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따라서 전두엽의 급속한 성장에 유리하도록 도태과정의 방향을 바꾸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정신의 진화적 성장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지점은 문화의 축적은 유기체적 발전이 종료되기 이전에 이미 충분히 진행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축적은 유기체 발전이 최종 단계에 이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90)


"지시적 사고라는 특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지능은 유기체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건 필요로 하는 환경적 자극을 생산(발견, 선택)하는 것과 같은 방법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문화적 자원을 조작하는 데에 달려 있다. 이것은 정보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고 이 탐구는 더욱 절박한 것인데, 그것은 그 정보가 유전적 자질에 의해서 유기체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고도의 일반성을 지니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하등동물일수록 행동을 수행하기에 앞서 환경으로부터 상세히 배울 필요가 적다. 새들은 나는 것을 배우기 전에 풍동을 만들어 항공 역학의 원리를 실험할 필요가 없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특이성〉은 흔히 인간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많은 종류의 것들을 배울 수 있는가로 나타내어졌다." "전반적으로 약체인 인간은 문화 없이는 신체적으로 생존 불가능한 동물이라고 흔히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인간이 정신적으로도 생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다."(103)


"이 모든 것은 인간 사고의 지적인 측면뿐 아니라 정서적 측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인간이 가지는 엄청난 본질적 감수성을 고려할 때 그러한 압력은 지나치게 강도가 높거나, 너무 다양하거나, 너무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감정의 파괴와 사고과정의 완전한 붕괴가 따르기 때문이다. 권태도 히스테리도 모두 이성(理性)의 적이다. 이처럼 〈인간은 가장 이성적이며 또한 가장 감정적 동물인〉 까닭에, 감정의 극단적 동요가 따르는 지속적 정서불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금기(禁忌), 행동의 균일화, 익숙한 개념에 의한 낯선 자극의 빠른 〈합리화〉 등의 방법을 통하여 공포, 격분, 암시적 자극 등에 대하여 매우 신중하게 문화적으로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상당히 고도의, 비교적 지속적인 정서 활동 없이는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까닭에, 그러한 활동을 유지시킬 수 있는 다양한 감각적 체험을 항상 확보해주는 문화적 장치 또한 필수적이다."(104)


제4장 문화체계로서의 종교


# 종교의 정의

(1) 작용하는 상징의 체계로, 

(2) 인간에게 강력하고, 널리 미치며, 오래 지속되는 분위기와 동기를 성립시키고,

(3) 일반적인 존재의 질서 개념을 형성하며,

(4) 그러한 개념에 사실성의 층을 씌워,

(5) 분위기와 동기가 특이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상징체계이건 상징의 복합이건 간에, 문화 패턴에 관한 한, (1)의 정의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반적 특성은 그것이 정보의 외재적 원천이라는 점이다. 〈외재적〉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나는 오직─예컨대, 유전자와는 달리─개별 유기체의 경계 밖에, 즉 공통적 이해의 간주관적 세계에 그것들이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려고 했다. 모든 인간은 그 세계 속으로 태어나고, 그 속에서 각자의 개별적 경력을 쌓고, 그들이 죽고 난 뒤에도 존속한다. 〈정보의 원천〉이라는 말을 통해서, 나는 오직─유전자와 마찬가지로─그것들이 그것들 외부의 과정과 관련하여 제한된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청사진 또는 형판(型板)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하려고 했다." "즉 문화패턴은 그 자신을 사회적, 심리적 실재에 맞게 만드는 동시에 사회적, 심리적 실재를 자신들에게 맞게 만드는 과정을 통하여 사회적, 심리적 실재에 의미, 즉 객관적 개념 형식을 부여한다."(117-8)


"혼돈─해석만이 아니라 해석 가능성이 결여된 사건의 혼란─은 적어도 세 가지 문제에서 인간에게 끼여들려고 위협한다. 그것은 인간의 분석능력의 한계에서, 인내력의 한계에서 그리고 그의 도덕적 통찰력의 한계에서이다. 당황, 고통 그리고 손댈 수 없는 윤리적인 역설의 느낌은 만일 그것들이 지나치게 심해지거나, 길게 지속되거나 하면, 모든 인생은 이해 가능하며 우리는 사고를 통해서 그 안에서 효율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치짓게 할 수 있다는 명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 된다. 존속하기를 바라는 모든 종교는 그것이 아무리 〈원시적이라도〉 그것과 같은 도전에 어떻게 해서든 대처하도록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어떤 사람들─필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의 세계를 그려내고 설명하기를 호소하는 사물을 설명하기 위한 인간의 설명장치, 즉 수용된 문화 패턴(상식, 과학, 철학적 사색, 신화)의 복합이 되풀이하여 작용하지 않게 되면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126-7)


"역설적으로, 종교적 문제로서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고통을 회피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고통을 당하느냐, 어떻게 육체적 고통, 개인적 상실, 세속적 패배, 또는 타인의 고뇌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을 참을 만하고, 견딜 만한 것─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통 당할 만한 것─으로 만드느냐이다." "베버가 말한 '의미의 문제(Problem of Meaning)'에서 보다 더 지적인 측면은 경험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 가능성을 긍정하는가의 문제이며, 보다 더 감정적인 측면은 궁극적인 인내 가능성을 긍정하는가의 문제이다. 종교의 한 측면이 현실의 전반적 형태에 대한 권위 있는 개념을 분석적으로 형성하는 우리의 상징적 자원의 힘에 닻을 내리고 있다면, 또다른 측면은 그것의 퍼져나가는 성향과 내재된 느낌 및 성질에 대한 유사한 개념을 감정─분위기, 감성, 정열, 애정,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역시 상징적인 우리의 자원의 힘에 닻을 내리고 있다."(131)


"종교적 개념이 진실이며, 종교적 지시가 옳은 것이라는 확신이 어떤 식으로든 발생하는 것은 의례─즉 신성화된 행위─에서이다. 신성한 상징이 인간에게 일으키는 분위기와 동기,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서 형성하는 존재의 질서에 대한 일반 개념이 서로 만나 강화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의식(儀式)의 형식─비록 그것이 신화의 낭송, 신탁(神託)에 묻는 것, 또는 무덤의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에서이다." "신의 개입이 신앙의 창조에서 어떤 역할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그것이 어느 쪽이라고 말하는 것은 학자의 일이 아니다─인간의 차원에 종교적 확신이 나타나는 것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종교적 관행의 구체적 행위의 맥락으로부터이다." "그러한 의례들 안에는, 한편에서는 광범한 분위기와 동기가, 다른 한편에서는 광범한 형이상학적 개념이 결합된다. 싱어의 용어를 빌리면, 우리는 이들 성숙한 의식들을 〈문화적 연기(cultural performance)〉라고 부를 수 있다."(141-2)


제5장 에토스, 세계관 그리고 성스러운 상징의 분석


"최근의 인류학적 논의에서, 어떤 문화의 도덕적 (그리고 미적) 측면이나 평가적 요소는 보통 〈에토스(ethos)〉라는 용어로 요약되어왔다. 반면에 인지적, 존재론적 측면은 〈세계관(world view)〉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어왔다. 한 민족의 에토스는 그들 생활의 색조, 성격, 성질이고, 그것의 도덕적, 미적 양식이며 분위기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에 대한 그리고 생활이 반영하는 그들의 세계에 대한 근본적 태도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그들의 그림이며, 자연, 자신, 사회에 관한 그들의 개념이다. 그것은 질서에 대한 그들의 가장 포괄적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종교적 신앙과 의례는 대립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강화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그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는 존재의 일반적 질서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를 제시하는 것은 그러한 가치나 질서가 어떻게 생각되든 간에 모든 종교에서 본질적인 요소이다."(157-8)


"그러나 의미라는 것은 십자가, 초승달 또는 깃털을 가진 뱀(땅 위의 뱀과 하늘의 새가 결합된, 고대 멕시코의 중요한 신인 케트살코아틀)과 같은 상징으로만 〈축적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상징은 의례에서 극적으로 표현되거나, 신화에서 이야기되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관해서 알려진 것, 그것이 지지하는 감정적 생활의 질, 그 안에 있을 때 행동해야만 하는 방식들을 집약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따라서 성스러운 상징은 존재론과 우주론을 미학과 도덕에 연결시킨다. 그것들의 독특한 힘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사실을 가치에 결합시킨다고 생각되는 능력, 즉 단지 실제의 것에 불과한 포괄적인 규범적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서 유래하고 있다." "어떤 수준에서 세계관과 에토스를 통합하려는 경향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경험적으로는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실제로는 보편적이다."(158)


"성스러운 상징은 긍정적인 가치뿐 아니라 부정적인 가치까지도 극화한다. 그것들은 선이 되는 것뿐 아니라 악이 되는 것의 존재를 향해서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갈등을 향해서도 가리킨다. 소위 악의 문제란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있는 파괴적인 힘의 현실적 본질을 세계관의 용어로 도식화하는 문제이며, 살인, 농사의 실패, 질병, 지진, 빈곤, 억압을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들에 대처하는 것이 가능해지도록 해석하는 문제이다. 악을 근본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인도 종교와 일부 기독교 교파처럼 악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예외적 해결방식일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악에 대한 태도는 포기, 능동적 대항, 쾌락적 도피, 자기 비탄과 참회, 자비를 원하는 겸허한 기원 등 악의 본질을 인정하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것이어야 할 것이 요구된다." "에토스는 단지 그들이 찬양하는 고상함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비난하는 비천함에서도 현저히 드러난다. 즉 악덕은 미덕과 더불어 양식화되는 것이다."(162-3)


"따라서 사회적 가치를 지지하는 종교의 힘은 그러한 가치가 그것의 실현에 대립하는 힘들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구성요소가 되어 있는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 종교적 상징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것은, 막스 베버를 인용하면, 〈사건들이 그저 존재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의미를 지니며 그 의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상상력을 나타내고 있다." "어떤 문화에서도 단순한 인습주의는 사람들을 거의 만족시키지 못한다. 종교의 역할이 시대, 개인, 문화에 따라서 다르다고 하더라도, 종교는 에토스와 세계관을 융합시킴으로써 일련의 사회적 가치에 대하여 그것들이 강제력을 지니기 위하여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즉 객관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측면을 제공한다. 성스러운 의례와 신화에서, 가치는 주관적인 기호로서가 아니라 특유의 구조를 지니는 세상에 내재되어 있는 생존을 위하여 강요된 조건으로 묘사된다."(163)


제6장 의례와 사회변화: 자바의 예


"이 장의 논제는 기능주의적 이론이 ('사회변동'이라는) 변화를 다루지 못한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사회학적 과정과 문화적 과정을 동등하게 다루지 못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 거의 필연적으로 둘 중에 하나는 무시되거나 희생되어 다른 것의 단순한 반영, 즉 〈거울에 비친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버린다. 문화는 전적으로 사회조직의 형태에서 파생된 것─많은 미국의 사회학자뿐 아니라 영국의 구조주의자에게 특징적인 접근법─으로 간주되거나, 또는 사회조직의 형태가 문화 패턴의 행태적 구현─말리노프스키와 많은 미국의 인류학자들의 접근법─으로 간주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어느 경우이든 종속적 항목은 역동적 요소에서 제외되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문화의 총괄적 개념(〈······의 복합적 총체〉)이거나 아니면 사회구조라고 하는 아주 포괄적 개념(〈사회구조는 문화의 한 측면이 아니라 특별한 이론틀 속에서 조정되는 주어진 인간 문화의 전체〉)이다."(176-7)


"그러나 문화와 사회체계를 구분하는 보다 유용한 방식 중 하나─그러나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니다─는 전자가 의미와 상징의 규칙화된 체계이며 그 체계를 준거로 사회적 상호 작용이 발생한다고 보고, 후자를 사회적 상호 작용의 유형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한편에는 사람들이 세계를 정의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판단을 내리기 위한 신앙과, 표현적 상징 및 가치의 준거틀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는 연속되는 상호 작용적 행위의 과정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것의 지속적 형태를 사회구조라고 부른다. 문화는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기 위한 의미의 틀이다. 사회구조는 행위의 형태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관계의 네트워크이다. 따라서 문화와 사회구조는 동일한 현상에서 얻어진 상이한 추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전자는 사회적 행동을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의미의 관점에서 고려하며, 후자는 어떤 사회체계의 작동에 대한 기여라는 점에서 고려한다."(177-8)


"문화와 사회체계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소로킨이 〈논리-의미적 통합〉이라고 부른 것과 〈인과-기능적 통합〉이라고 부른 것 사이의 대조이다. 문화의 특징인 논리-의미적 통합은 바흐의 푸가, 천주교의 교리 혹은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통합을 뜻한다. 즉 양식의 통일, 논리적 함의의 통일, 의미와 가치의 통일이다. 사회체계에 특징적인 인과-기능적 통합은 모든 부분들이 단일한 원인 및 결과의 그물에 결합되어 있는 유기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통합을 뜻한다. 각 부분은 〈체계의 유지〉에 작용하는 상호 인과관계의 수레바퀴를 이루는 한 요소가 된다. 두 통합의 유형은 동일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 중 하나가 취하는 특별한 형태가 다른 것이 취할 형태를 직접적으로 내포하지는 않기 때문에, 둘 사이 그리고 그것들과 세번째 요소 사이, 즉 우리가 흔히 인성구조라고 부르는 각 개인 안의 동기 부여적 통합의 유형 사이에는 내재적 불일치와 긴장이 존재한다."(178)


"사회학적 종류이든 사회심리학적 종류이든 간에, 정태론적 기능주의는 이런 종류의 부조화를 추출할 수 없다. 논리-의미적 통합과 인과-기능적 통합을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의 구조와 사회구조가 단순한 서로의 반영물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이지만 독립변수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변화의 동인(動因)은 자신이 무엇인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세상, 그 본질적 의의를 파악할 수 있다고 느끼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하는 인간의 욕구와 기능하는 사회유기체를 유지시키려는 욕구가 일치하지 않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이 고려되는, 보다 역동적인 형태의 기능주의 이론에 의해서만 분명하게 도식화될 수 있다. 〈학습된 행위〉라는 산만한 문화 개념은 균형잡힌 상호 작용의 패턴으로 사회구조를 보는 정태론적 견해이며, 또한 문화의 구조와 사회구조가 (〈해체〉상태를 제외하고) 결국 서로의 단순한 투사상에 불과하다는 공언된, 혹은 무언의 가정은 너무도 유치한 개념장치이다."(205)


제7장 현대 발리에서의 "내적 개종"


"막스 베버는 종교학에 관한 유명한 저서에서 세계종교를 〈전통적인〉 종교와 〈합리적인〉 종교라는 두 이념형으로 구분했다." "이 두 이념형은 종교와 사회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결정된다. 전통적 종교(베버는 〈주술적〉이라는 용어도 사용했다)는 기존의 사회적 관행들을 엄격하게 전형화시킨다. 전통적 종교는 거의 하나하나가 연결되는 방식으로 세속적 관습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모든 인간 활동을······상징적 주술의 범주로〉 끌어들이고, 그렇게 해서 일상적 삶이 끊임없이 고정되고 확고하게 계획된 과정을 거치도록 해준다. 그러나 합리적 종교는 일상생활의 구체적 실상과 그렇게 전적으로 얽혀 있지 않다. 합리적 종교는 일상생활과 〈떨어져서〉, 〈그 위에〉 또는 〈그 외부에〉 존재한다. 그리고 의례와 신앙의 체계와 세속적 사회와의 관계는 밀접하거나 확실하지 않고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합리적 종교가 세속적 삶을 등한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207-8)


"종교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 사이의 관계가 이와 같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영역 그 자체의 구조 또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 종교는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되고 단지 느슨하게 규칙지어진 다수의 성스러운 실체, 거의 모든 종류의 현실적 사건에 대해서 독립적이고 분절적이며 즉각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포함시킬 수 있는 상세한 의례적 활동과 생생한 애니미즘적인 이미지의 정돈되지 않은 덩어리로 존재한다." "반면, 합리적인 종교는 보다 추상적이고 보다 논리적으로 일관되며 보다 일반적으로 표현된다. 전통적 체계에서 내재적이고 분절적으로 표현되던 의미의 문제가, 여기에서는 포괄적으로 도식화되어 종합적인 태도로 접근된다. 의미의 문제는 특정의 사건과 분리될 수 없는 면보다는 보편적인 것으로, 인간 존재의 내재적 본질로 개념화된다." "베버는 바로 이런 포괄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소위 세계종교(world religions)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논했다."(208-9)


"전통적 종교와 합리적(이것의 반대는 불합리가 아니라 합리화되지 않은 것이다) 종교의 대비는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적으로는 그 차이가 명백하지 못하다. 특히, 문자를 가지지 않은 민족들의 종교는 전적으로 합리적인 요소를 결여하고 있고 문자를 가지고 있는 민족들의 종교는 완벽하게 합리화되었다고 가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원시종교라고 불리는 많은 종교들도 자의식이 강한 비판을 보여주고 있으며, 종교적 사고가 고도의 철학적 정교함에 도달한 사회에서도 전통적인 종류의 민간신앙이 끈질기게 지속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말한다면, 세계종교가 씨족, 부족, 촌락의 종교나 민간신앙에 비해서 보다 뛰어난 개념적 일반화, 보다 단단한 형식적 통합, 보다 명쾌한 교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종교적 합리화는 전체 아니면 무(無)의 과정이 아니며, 역행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과정도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나타나는 현실의 과정이다."(211)


제8장 문화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에는 현재 두 가지 주요한 접근법이 있다. 그것은 이익이론(interest theory)과 긴장이론(strain theory)인데, 전자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가면이자 무기이고, 후자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징후이자 치료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의해서 완성된) 이익이론에서 이데올로기적 견해는 이익을 얻기 위한 보편적인 투쟁을 배경으로 하고, 긴장이론에서는 사회심리적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만성적인 노력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전자에서는 권력을 추구하며, 후자에서는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물론 인간은 동시에 양쪽 측면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혹은 한쪽을 이용해서 다른 쪽을 취할 수도 있고─두 이론이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익이론이 가지는 경험적 난점에 대응하여 등장한) 긴장이론이 덜 단순하고, 더 날카로우며, 덜 구체적이며, 더 포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240)


"예나 지금이나 이익이론의 최대 강점은 문화적 관념체계의 뿌리를 공고한 사회구조의 토대 속에 두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그러한 체계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동기를 강조하고 그러한 동기가 사회적 지위, 특히 사회계급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서 관념은 무기이고, 어떤 집단, 계급, 정당의 현실에 대한 특정한 시각을 제도화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그것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지적함으로써, 이익이론은 정치이론을 정치투쟁과 결합시켰다. 이러한 공헌은 영속적인 것이었고, 만일 이익이론이 기존의 주도권을 지금에 와서 상실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익이론의 잘못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발견한 사회적, 심리적, 문화적 요인간의 복잡한 상호 작용에 대처하기에 이론적 장치가 너무나 원초적이었기 때문이다. 뉴턴 역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추후에 발전된 연구에 의해서 대체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흡수되었다."(241)


"한편 사회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권력에의 투쟁이라는 관점은 이데올로기를 고도의 기만으로 간주하는 과도한 마키아벨리즘에 이르게 함으로써 결국 이데올로기의 보다 포괄적이면서 덜 극적인 사회적 기능을 무시하게 한다. 주의(主義)간의 충돌로 엷게 가장한 이해관계의 충돌이라는 사회에 대한 전쟁터의 이미지는 사회적 범주의 규정(또는 모호화), 사회적 기대의 안정화(또는 불안정화), 사회규범의 유지(또는 파괴), 사회적 합의의 강화(또는 약화), 사회적 긴장의 해소(또는 고조)라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주의하지 않게 한다. 이데올로기를 필전(筆戰)에 놓여 있는 무기로 축소시키는 것은 이데올로기 분석에 호전성을 고양시키는 것이 되겠지만, 그러한 분석은 전략과 전술의 협소한 현실주의로 지적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익이론의 강도는─화이트헤드의 표현을 빌면─그 자체의 편협성에 대한 보답일 뿐인 것이다."(242)


"긴장이론이 출발하는 분명하고 독특한 개념은 사회의 만성적인 불통합(不統合) 상태이다. 어떠한 사회적 질서도 그것이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기능적 문제를 처리할 때 완전히 성공하지는 않으며 또한 그럴 수도 없다. 자유와 정치질서, 안정과 변화, 효율과 인도주의적인 것, 엄격함과 융통성 등 모두가 해결되지 않는 이율배반으로 되어 있다. 경제, 정치, 가족 등 사회 각 부문의 규범들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나아가 이런 알력 또는 사회적 긴장은 개인 인성의 차원─그 자체가 갈등하는 욕구, 과거에 기인하는 감정 그리고 즉흥적 방어의 필연적인 불통합 체제이다─에서는 심리적 긴장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 사상은 이러한 절망에 대한 (일종의) 반응으로 간주된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사회적 역할이 초래하는 패턴화된 긴장에 대한 패턴화된 반응이다.〉 그것은 사회적 불균형으로 야기된 감정적 혼란을 해소하기 위한 〈상징적 배출구〉가 된다."(243)


"사회학자들이 이데올로기를 단지 고통에 대한 정교한 울부짖음 정도로 국한시킨 것은 그러한 이론의 부재, 특히 비유적 언어를 다루기 위한 분석틀의 부재에 기인한다." "퍼시가 지적하고 있듯이, 철학자(그는 과학자를 포함시켰을 수도 있다)를 매우 성가시게 했던 은유의 특징은 그것이 〈틀렸다〉는 데에 있었다. 즉 〈은유는 어떤 것을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라고 단언한다.〉 더구나 가장 잘 〈틀렸을 때〉 가장 효과적인 경향이 있다. 은유의 힘은 그것이 단일한 개념틀 안에 상징적으로 밀어넣은 서로 조화되지 않는 여러 의미들의 상호 작용과 그것의 강요가 심리적 저항, 즉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생기는 의미론적 긴장을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극복하느냐의 정도에서 나온다. 제대로 작용되면 은유는 잘못된 동일화(예를 들면 공화당의 노동정책과 볼셰비키의 노동정책)를 적절한 유추로 변형시킬 수 있게 되며, 불발이 되면 단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된다."(249-51)


"여타의 차이점이 무엇이든 간에 소위 인식적 상징과 표현적 상징 또는 상징체계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둘 모두 생활을 패턴화시키는 정보의 외재적 자원이다. 즉 세계를 지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조작하는 초개인적 장치인 것이다. 문화 패턴─종교적, 심리적, 미학적, 과학적, 이데올로기적 패턴─은 〈프로그램들〉이다. 유전학적 체계가 유기적 과정을 조직해가면서 형판 같은 것을 제공하듯이,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사회적, 심리적 과정을 조직해가면서 형판 또는 청사진을 제공한다. … 유전적 형판은 문화적인 형판에 의해서 정확한 일련의 행동들을 조직하고 전면적인 정신물리학적인 상황을 만든다." "자기 실현의 실행자인 인간은 상징 모델을 구축하는 그의 일반적인 능력으로부터 자기를 규정하는 특정한 능력을 창출한다. 또는 사회질서에 대한 도식적 이미지, 즉 이데올로기의 구축을 통해서 인간은 좋든 나쁘든 스스로를 정치적 동물로 만들어간다."(258-9)


제9장 혁명 이후: 신생국에서의 민족주의의 운명


# 민족주의의 네 단계

1. 민족주의 운동이 형성되고 구체화되는 단계

2. 승리를 거두는 단계

3. 국가로 조직화되는 단계

4. 국가로 재편된 민족주의 운동이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및 자신의 모체였던 무질서 사회와의 관계를 규정하고 그것을 안정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


"하나의 지역국가가 이제 꿈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게 되면서, 민족주의적 이념화 작업은 전면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제 경험상의 〈우리〉를 창조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토착적 생활양식〉(The Indigenous Way of Life)이나 〈시대정신〉(The Spirit of the Age)이라는 두 개의 추상적 구호의 내용과 상대적 중요성 그리고 이들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질문이 계속적으로 제기된다. 토착적 생활양식을 강조한다는 것은 새로운 정체성의 기초로서 지역적 관습이나 기존의 제도 그리고 공동의 경험─전통, 문화, 국민성, 심지어 인종─을 중요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서 시대정신을 강조하게 되면 우리 시대 역사의 일반적 개요와 특히 그 시대의 전반적인 방향과 의미로 간주되는 것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두 개의 사조(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본질주의〉와 〈시대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나타나지 않는 신생국은 없으며, 그 두 개가 서로 완전히 얽혀 있지 않은 곳은 별로 없다."(284)


"그러므로 본질주의와 시대주의의 상호 작용은 일종의 문화적 변증법인 추상적 사고의 병참술이 아니라, 산업화처럼 구체적이고 전쟁처럼 명백한 역사적 과정이다. 문제들이 단순한 주의나 주장의 수준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이런 측면이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모든 신생국의 사회구조가 겪고 있는 실질적인 전환의 수준에서 더욱 중요하게 논의된다. 이데올로기적 변화는 사회의 진행과정과 병행하여 그것을 반영하거나 결정짓는 독자적인 사상의 흐름이 아니며, 그것은 사회의 진행과정의 한 단면이다." "따라서, 비록 신생국에서는 보편적 현상이긴 하지만, 이러한 명백한 역설적 상황 하에서 국가 통일을 향한 움직임은 그들의 특수한 맥락에 의거하는 문화 유형을 그 맥락으로부터 떼어내어 그것을 일반적인 충성 대상으로까지 확대시켜서 정치화시킴으로써 사회 안의 집단들간의 긴장을 심화시켰다. 민족주의 운동이 발전할수록 그것은 여러 갈래로 분해되었다."(287-9)


제10장 통합을 위한 혁명: 신생국에서의 원초적 정서와 시민정치


"하나의 사회로서 신생국은 원초적 유대에 기반한 심각한 이탈에 비정상적으로 영향을 받기 쉽다. 원초적 유대란 사회적인 존재에게 〈주어진〉 것에서 유래하는 것─더 정확하게는 문화가 불가피하게 그런 문제에 연루됨으로써 〈주어진〉 것─을 뜻한다. 주로 일차적인 접촉과 혈연적 연관이지만, 이것들을 넘어 특정한 언어, 혹은 심지어 방언을 말하고, 특정한 사회적 관습을 따르며, 특정한 종교 공동체에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주어짐인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 있는 사회는 시민정치의 전통이 약하고 효율적인 복지행정을 위한 전문기관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다. 이러한 사회에서 원초적 유대는 반복적으로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지속적으로 자율적 정치단위의 구획짓기를 위한 아주 좋은 기반으로 널리 찬양된다. 진정으로 합법적인 권위란 그런 원초적 애착이 내포하고 있다고 인식되는 생태적인 구속력에서만 나온다는 이론은 솔직담백하게, 열정적으로 그리고 소박하게 옹호된다."(304-5)


"원초적 요소에 기반한 정치적 결속체들은 대부분 신생국들의 심층에서 끈질긴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왕성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뚜렷하게 표출되지는 않는다. 우선, 단일한 시민국가의 범위 안에서 어느 정도 전체적으로 작용하는 헌신(충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작동해야 할 충성 사이를 분류하는 문제를 위하여 유용한 분석적 구별이 이루어질 수 있다. 또는 달리 표현하여, 인종적, 부족적, 언어적 준거집단이 기존의 시민국가에 비해서 더 작은 경우와, 반대로 그것들이 국가보다 더 크거나 최소한 어떤 형태든 시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우들을 대조적으로 놓고 볼 수 있다. 원초적 불만은 먼저 정치적 질식감에서 또 두번째는 정치적 분할에서 생기게 된다. 버마의 카렌족의 분리주의, 가나의 아샨티족이나 우간다의 간다족의 문제는 전자에 관한 예들이고, 범아랍주의, 대(大)소말리주의, 범아프리카주의는 후자의 예가 된다. 신생국의 대부분은 이 두 종류의 문제로 동시에 고통을 받고 있다."(310)


"원초적 정서와 시민정치 사이의 이 긴장은 비록 조정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자신이 누구이고, 어느 집단에 확실히 귀속되는가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형성하는 출생지, 언어, 혈통, 외모, 생활양식이라고 하는 〈여건(與件)〉의 힘은 인성의 기반 중에서도 이성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무반성적(無反省的)인 집단의 자기 상(像)은 한번 확립되면 착실히 진행되는 국가의 정치과정 속에 어느 정도 개입되는 것은 확실하며, 그것은 정치과정이라는 것이 그토록 넓은 범위에까지 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생국─또는 그 지도자들─이 원초적 유대에 관한 한 노력해야 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현실에서 행해져왔듯이,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거나 그것의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바랄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유대감을 길들이는 것이다."(325-6)


제11장 의미의 정치


"정당성이라는 고전적 문제─어떻게 해서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리를 인정받게 되는가─는 오랜 기간 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음으로써 규모는 전국적이지만 실체는 그렇지 못한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는 특히 심각하다. 국가가 대권을 장악하고 국민으로부터 그것을 지키는 것 이상을 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가 그 국가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겨지게 하고 싶은 사람들, 즉 국민들에게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단순한 합의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자신이 그것을 직접 수행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의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그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정부의 행위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직접성의 문제이며, 국가가 〈행하는〉 것을 친숙하고 이해 가능한, 〈우리〉로부터 자연스럽게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문제이다."(372)


"독립을 성취했을 당시 그처럼 엄청나게 생각되었던 정치적 과업들─외세(外勢) 지배의 종결, 지도체제의 창출, 경제발전의 도모, 국민적 통일감의 유지─은 분명히 엄청난 과업들이었음이 밝혀졌으며, 독립을 성취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러한 과업들 외에 또 하나의 다른 과업이 추가되었다. 그것은 당시에 덜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확실히 인식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바로 근대 정부의 여러 제도들로부터 외국 냄새를 제거하는 것이다." "낙후된 것이라고 비난받는 신앙, 관습, 이상, 제도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한 가지가, 그러나 대개 같은 것이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현대성의 정수로 찬양되며, 다른 한편으로 외국의 것이라고 공격받던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한 가지, 역시 같은 한 가지가, 민족혼의 성스러운 표현으로 환호된다. 이러한 문제에서 〈전통적〉으로부터 〈근대적〉으로의 단순한 진보는 없다."(373-5)


"보통은 부정되지만 실은 부정할 수 없는 이 사실은 근대화가 토착적이고 쇠퇴하고 있는 것을 수입된 최신의 것으로 대체하는 일로 이루어진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어떠한 분석도 불가능하게 한다." "문화적 보수주의와 정치적 혁신주의의 긴장된 결합이 신생국의 민족주의의 중추에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 인도네시아보다 더 극명한 곳은 없다." "즉 한 수준에서는 지극히 일반화된 합의─인도네시아는 하나가 되어 근대화의 정상으로 돌진해나가야 하며, 동시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전통 문화의 정수를 지켜야만 한다는 것─가 다른 수준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부터 그 근대화의 정상으로 돌진해나갈 것인가 그리고 전통문화의 정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점증하는 의견의 불일치로 저항받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가 달려간 그 부조화의 종착역은 1965년의 실패한 쿠데타와 그후의 무자비한 여파─3, 4개월 동안 25만 명의 사상자를 낸─그리고 수하르토의 집권이었다."(376-9)


제12장 과거의 정치, 현재의 정치: 신생국 연구와 인류학


"인류학이 농민사회의 일반 비교정치학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면, 첫번째로, 전통적 국가들의 문화적 야심과 보통 아주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문화적 야심을 실현시킨 사회제도를 구분함으로써 우리들은 사회학적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향하여 다가갈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서턴 교수가 말하는 〈기점〉이란 일종의 회고적 이념형이나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 특정 공간과 시간 속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역사적 현실이다." "나는 단지, 전통적 정치의 실제적 모습에 대한 면밀한 민족지적 연구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듯이, 지배자들의 열망, 즉 그들을 어떤 지고(至高)의 목적으로 인도하는 이상과 관념들을 그 목적 수행의 수단인 사회제도와 구별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대 국가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통 국가에서도 정치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와 그것이 힘을 미치고 있는 범위는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는 데에 인류학이 기여하는 것이다."(397-8)


"두번째로, 우리는 사회학적 사실주의에 가까이 다가섬으로써 이 분야의 중심적 의문들─즉 신생국의 정치가 걸어가는 길과 전통적 정치가 걸어갔던 길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풀어볼 수 있다." "어떤 정치 형태 속의 행위자들을 통제하는 질서의 관념과 그 행위의 무대가 되는 제도적 맥락을 개념적으로 구분한다면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와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더 생산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재란 온전히 과거의 유산일 따름이다〉, 〈과거라는 것은 단지 한 바구니의 잿더미일 뿐이다〉 따위의 상투적 주장들을 불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러한 구분을 통해서 문화적 전통이 그것을 이어받은 현재의 국가에 대해서 미치고 있는 이념적 기여와 그러한 국가에 대해서 그것에 선행했던 정부체계들이 미치는 조직적 기여를 구별하기가 쉽게 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398-9)


"전통적 국가를 지탱시켜주던 문화적 기구─상세한 신화들, 정교한 의례들, 고도로 발달한 예의─가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에서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그 나머지 국가들에서조차도 해체되어감에 따라서, 그 자리에는 정치의 성격과 목적에 관한 보다 추상적이고, 보다 의도적이며, 용어의 공식적인 의미에 있어서 보다 합리적인 관념 형태들이 들어설 것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이전 시대의 덜 세련되고 전(前)이데올로기적인 관념들을 대체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과 유사한 역할을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정치적 행위에 대한 지침과, 그 정치적 행위를 이해하기 위한 이미지와, 그 정치적 행위를 설명해주는 이론과, 그 정치적 행위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기준을 제공한다. 이렇게 과거에 만들어지고 전래된 태도와 관습이었던 것을 자각하고 보다 더 명시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우리가 걱정 반 희망 반으로 〈국가 건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400)


제13장 지적인 야만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저서에 관하여


"인류학자는 두 가지 운명 중 하나는 자신의 문화가 이미 그들의 문화를 더럽혀, 〈오물, 인류의 얼굴에 던져진 우리의 오물〉로 뒤덮어버렸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이해가 가능해진 사람들 사이를 여행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다지 오염되지 않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들 사이를 여행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둘 중 하나이다. 엄청난 낯설음이 자신의 삶과 그들의 삶을 갈라놓는 진짜 야만인들(어떤 경우에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이를 떠도는 사람이거나, 혹은 〈사라져버린 실재를 찾아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회상적 여행가이다. 〈회상적 여행가란 공간의 고고학자, 즉 여기저기의 파편 조각의 도움으로 이국적 문화를 재구성하려고 헛된 노력을 하는 고고학자이다.〉 거울 속의 사람들과 마주한 그는 그들을 만질 수는 있으나 파악할 수는 없다. 〈나는 이중적인 병약함의 희생양이다. 내가 보는 것은 나에게 상처를 주며 내가 보지 못한 것이 나를 자책하게 했다.〉"(410-1)


"그렇다고 인류학자는 절망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결코 야만인들을 알 수 없는가?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로 접근하는 데에는 개인적으로 뛰어드는 것과는 다른 길이 있기 때문이다─즉 아직도 채집 가능한(아니면 이미 채집된) 파편들로부터 사회에 대한 이론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비록 실제 관찰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조응하지 않을지라도 인간 존재의 기본 토대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원시인과 그들의 사회가 표면적으로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수준, 심리적 수준에서 그들은 결코 이방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따라서 특정의 야만인의 부족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시도하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한걸음 물러서서 사고(思考)에 대한 일반적, 폐쇄적, 추상적, 형식적 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지성의 보편적 문법을 발전시킴으로써 성취할 수 있게 된다."(411)


"야만인들은 실제에 대한 모델, 자연세계, 자아, 신화에 대한 모델을 만든다. 이런 비정통의 과학(〈우리가 '원시적[primitive]'이라기보다 '원초적[primary]'이라고 부르고 싶은〉)은 유한성의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개념 세계의 요소들은 미리 만들어져 주어진다. 그리고 사고한다는 것은 그 요소들을 다루는 것이다. 야생적 사고의 논리는 양(量), 양식, 색깔은 변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패턴들로 분화될 수 있는 만화경과 같이 작용한다. 이런 식으로 만들 수 있는 패턴들의 수는 만약 그 만화경의 장면들이 충분히 많고 다양할수록 클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 패턴들은 서로 마주 보는 장면들의 배열에 따라서 구성된다(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독립된 개별적 특성의 반영이라기보다는 그 장면들 사이의 관계함수이다). 그리고 변형 가능한 범위는 만화경의 구조, 즉 그 작용을 지배하는 내적 법칙에 의해서 엄격하게 결정된다. 이것은 또한 야생적 사고에서도 그러하다."(413)


"레비-스트로스가 스스로를 위해 만든 것은 문화의 부비트랩 같은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감성을 지성의 그림자로 강등시키며, 특정 밀림에서 사는 특정 미개인이 가진 특별한 정신을 우리 모두에게 내재하는 '야생의 사고'로 바꾸어버린다. 그것은 그에게 브라질 여행에서 직면했던 난관─물리적 근접성과 지적 거리감─을 아마도 그가 항상 진정으로 원했던 것─지적 근접성과 물리적 거리─으로 해결하게 해주었다." "「야생의 사고」에서의 고급 과학과 「슬픈 열대」에서의 영웅적 탐험은 근본적으로 서로의 〈가장 단순한 변형〉일 뿐이다. 그 둘은 동일한 심층구조, 즉 프랑스 계몽주의의 보편적 합리주의의 다양한 표현들인 것이다. 구조언어학, 정보이론, 분류논리, 인공두뇌학, 게임 이론, 그외 다른 고급 이론들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레비-스트로스의 진짜 스승은 소쉬르도, 섀넌도, 불도, 바이너도, 폰 노이만도 아니고(극적 효과를 위해서 불러낸 마르크스도, 붓다도 아니고) 루소였다."(417-8)


제14장 발리에서의 사람, 시간 그리고 행동


"관념, 개념, 가치관 등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 적응하고, 사회적 맥락에 의해서 자극되며, 사회적 맥락에 대하여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가의 직업」이라는 소책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거상들, 즉 의류와 향신료를 파는 사람, 구리, 수은 혹은 명반(明礬)의 독점상인, 왕과 황제의 은행가들을 그들이 가진 상품만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가? 홀바인이 그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그들이 에라스무스나 루터를 읽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세 봉신(封臣)들의 영주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도 이해해야만 한다.〉 사회활동의 조직, 그것의 제도적 형태, 그것을 움직이는 관념들의 체계가 함께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그것들간의 관계의 성격도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구조와 문화의 두 개념을 확실히 하려는 시도는 바로 이 이해를 목표로 하고 있다."(423-4)


"공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행위로서의 사고의 개념, 곧 사고는 경험을 통해서 의미를 각인한 상징의 과정(의례와 도구 ; 조각된 우상과 물웅덩이 ; 제스처, 얼룩무늬, 이미지, 소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은 문화의 연구를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실증적인 과학으로 만든다. 사고의 물질적인 전달수단인 상징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흔히 어렵고, 모호하고, 변동이 심하며, 선회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그런 의미도─특별히 그런 의미를 지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만 협조한다면─수소 원자의 무게나 부신의 기능처럼 체계적인 실증적 조사를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문화 패턴, 질서 있는 일군의 중요한 상징들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패턴의 전체 집합체로서의 문화 연구는 바로 개인과 개인의 집단이 원래는 애매모호한 세계 가운데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아가는 장치를 연구하는 것이다."(424-5)


"이렇게 광범한 위치설정을 행할 때 필요한 사항 중 하나는, 물론 인간 개개인에 대한 특성짓기이다. 인간은 아무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범주의 개인을 특정한 범주의 대표자로서 인식하도록 도처에서 상징적인 구조를 발전시켜왔다. 어떤 경우에서도, 필연적으로 그런 구조들은 다수 존재한다." "사회학이나 사회인류학에서 소위 구조분석이라고 불리는 방법은 인간 범주의 특별한 체계를 갖춘 사회에 대해서 기능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고 때로는 이 체계가 특정한 사회과정의 영향을 받을 때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예측할 수 있다. 단, 이것은 이 체계─범주들, 그들의 의미, 그들의 논리적 관계─를 이미 알고 있을 때에만 해당된다." "우리가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사회를 대표하는 성원에 의해서 파악되는 경험(여기서는 개개인의 경험)의 의미 있는 구조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진보된 방법으로, 그것은 한마디로 하면 문화의 과학적 현상학이다."(425-6)


제15장 심층 놀이: 발리의 닭싸움에 관한 기록들


"발리인들은 일순간의 활동 속에서 산다. 어떤 표현양식도 그 표현양식 자체가 창조해낸 현재 속에서만 존재한다. 발리인들이 영위하고 인식하는 그들의 삶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하나의 방향성 있는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의미와 공허함 사이의 진동이며, 〈어떤 일〉(즉 무엇인가 중요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 짧은 기간과 〈아무것〉(즉 전혀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 짧은 기간들이 율동적으로 교차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들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찬〉 시간과 〈빈〉 시간들, 혹은 〈접속〉과 〈구멍〉 사이가 교차하는 것이다. 닭싸움은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개체들이 우연히 만나는 것에서부터 사원에 축하를 드리기 위해서 신들을 만나는 날까지의 모든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발리적인 것이다. 닭싸움은 발리인의 사회생활에서 보이는 단절성을 모방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것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의 깊게 만들어진 사회생활의 한 표본이다."(523)


"닭싸움이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지위관계로, 닭싸움이 지위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위신이라는 것이 심각하게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은 발리에서 보게 되는 모든 것─마을, 가정, 경제, 국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폴리네시아의 칭호의 위계와 힌두의 카스트가 기묘하게 융합된 자긍심의 위계서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사회의 도덕적인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계층서열에 존재하는 감정이 그 자연스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로지 닭싸움에서만이다. 닭싸움 이외의 장소에서는 예의의 베일 중에, 완곡함과 의례의 두터운 구름 속에, 제스처와 암시 속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은 동물의 가면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숨기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지극히 얇은 가장(假裝)으로만 나타난다. 질투도 평정만큼이나, 시기심도 우아함만큼이나, 폭력성도 매력만큼이나 발리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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