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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국가 느가라 - 19세기 발리의 정치체제를 통해서 본 권력의 본질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용진 옮김 / 눌민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서론 발리와 역사적 방법
"느가라(나가라nagara, 나가리nagari, 느그리negeri)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차용된 말로 원래는 〈작은 도시town〉를 의미했으며, 인도네시아어에서는 〈궁전〉, 〈수도〉, 〈국가〉, 〈왕국〉 그리고 〈작은 도시〉라는 의미로 동시에, 그리고 호환 가능하게 사용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느가라는 (고전적) 문명, 전통적 도시 세계, 그 도시가 지탱했던 고급 문화, 그리고 그곳에 터를 잡은 상위의 정치적 권위 체계를 가리키는 단어다. 느가라의 반대말인 데사desa 역시 산스크리트어에서 차용된 말로, 느가라와 비슷한 정도로 유연하게 사용되며, 〈시골〉, 〈지역〉, 〈마을〉, 〈장소〉, 때로는 〈종속〉이나 〈통치 지역〉까지도 의미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데사는 인도네시아 군도 각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는 시골 지역의 정착지, 즉 농민의 세계, 소작인의 세계, 정치적 신민의 세계, 〈인민〉의 세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상호 대비적으로 정의되는 느가라와 데사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인도네시아의 고전적 정치체들이 발전해왔다."(14-5)
"19세기 후반의 발리가 군도의 여타 지역들과 달리 이슬람화 및 강력한 네덜란드 지배를 겪지 않았다 해도, 발리 국가 역시 한때 아주 널리 퍼져 있었던 통치 체계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따라서 느가라 모델은 그 자체로는 추상물이다. 비록 경험적 자료로부터 구성되었다 할지라도 이 모델은 다른 경험적 자료를 해석하는 데 있어 연역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으로 적용된다. 따라서 느가라 모델은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개념적 실체다. 한편 이 모델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사회문화적 제도인 19세기 발리 국가를 단순화하고 필연적으로 부정확하게, 이론적으로 편향되게 재현한 재현물이다. 다른 한편 이 모델은 5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고전시대 동남아시아의 인도식 국가라는, 발리보다 덜 알려져 있고 그 구조에 있어 반드시 혹은 아마도 발리와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유사하다고 추정해볼 수 있는, 일련의 제도들을 재현하기 위한 지침이자 일종의 사회학적 청사진이다."(25)
제1장 정치적 정의定義: 질서의 원천들
"발리 국가가 지향했던 바는 전제정도 아니고 심지어 질서정연한 통치체제도 아니었다." "발리 국가가 언제나 지향했던 것은 스펙터클과 의식, 그리고 발리 문화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집착인 사회적 불평등과 지위 자긍심을 공적으로 극화劇化하는 일이었다. 발리는 왕과 군주들이 흥행주, 사제들이 감독, 농민들이 조연 배우이자 무대 담당이자 관객이었던 극장국가였다. 거대한 화장의례, 삭치削齒의례, 사원에 드리는 봉헌, 순례, 그리고 피의 희생의례에는 수백 심지어 수천 명에 이르는 인력과 막대한 부가 동원되었는데, 이것들은 어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목적이었으며, 국가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위해 존재했다. 궁정의 의례주의는 궁정정치의 원동력이었다. 대규모 군중이 동원되는 의례는 단순히 국가에 버팀목을 대는 장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가 군중의례를 실행하기 위한 장치였으며, 이는 심지어 국가가 그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그랬다."(30-1)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발리 국가에는 지배의 실질적 측면과 장식적 측면이 기묘하게 전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배후에는 주권의 본성과 기초에 대한 발리인들의 일반적인 관념이 놓여 있는데, 이 관념을 간단히 모범적인 중심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이론에 따르면 왕의 궁정과 왕국의 수도는 초자연적인 질서에 대한 소우주, 즉 〈우주를 축소해놓은 이미지〉이며, 동시에 정치적 질서를 실체적으로 구현한다. 이 이론 안에서 궁정과 수도는 국가의 핵심이자 엔진이자 회전축에 그치지 않는다. 궁정과 수도는 바로 '국가 그 자체'다. 느가라 관념은 지배자가 위치한 곳과 지배 영역을 동일시하는데, 이는 단순하게 우연적인 은유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지배적인 정치 이념을 천명하는 행위이다." "사제들이 선언하듯이 궁정의례가 반영하는 것은 초자연적 질서이자 〈시간을 초월한 인도식 신들의 세계〉였으며, 인간들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엄밀하게 각자의 삶을 이 질서에 맞게 유형화해야 했다."(31-2)
"발리에서의 정치발전은 본래적인 통일성이 점차 다양성으로 분해되는 그림으로 제시된다. 좋은 사회를 향해 가차 없이 진보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완벽함에 대한 고전적 모델로부터 점차 쇠락해간다는 관념이 발리인들이 가진 정치적 발전 개념에 더 가깝다." "대부분의 발리인들에게 쇠퇴는 역사가 일어났어야 했던 방식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그렇게 일어난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노력들, 특히 영적 지도자와 정치적 지도자들의 노력은 역사를 뒤집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사건들이 교정될 수 없듯이 그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를 기념하는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없었다(이상적 상태로부터 연속적으로 후퇴하는 것을 기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발리인들은 오히려 역사를 무효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발리인들이 추구했던 것은 현재가 응당 모델로 삼아야 할 불변하는 유형이었다. 그렇지만 우연한 사고, 무지, 무절제, 태만 때문에 그 모델을 따르는 데 너무나도 자주 실패하기도 했다."(35-40)
"지역적 군주국들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게 정의된 선이라기보다는 상호 이해를 위한 구역〉이었으며, 〈근대 정치지리학에서 이야기하듯이 한 '나라'를 다른 나라로부터 고립시키는 맥마흔 식의 명확한 선〉은 아니었다. 그 경계는 오히려 일종의 전이지대였으며, 이웃하고 있는 정치 체계들이 그것을 통해 〈역동적인 방식으로 상호 침투하는〉 정치적 추이대推移帶였다. 이 다양하고 유동적인 장의 각 지점에서 일어나는 투쟁은 토지를 얻기 위해서보다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 즉 사람들의 존경, 지지, 그리고 개인적 충성을 얻기 위해서 일어났다. 정치권력은 재산보다는 사람에 내재되어 있었고, 영토를 모으는 문제보다 위세를 모으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군주국 사이의 분쟁은 실질적으로 결코 국경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군주국 사이의 분쟁은 상호 간의 지위, 적절한 예의, 그리고 특정 집단의 사람 혹은 특정한 사람들을 국가의례 및 사실상 국가의례와 동일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권리를 둘러싸고 일어났다."(51-2)
제2장 정치적 해부: 지배계급의 내부 조직
"전통시대의 발리 남부에서 나타났던 세력 균형 형태는 매우 복잡했는데, 그런 세력 균형의 기반이 되는 제도도 마찬가지로 복잡했다. 이 제도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귀족과 농민 사이를 근본적이고 귀속적으로 구분하는 제도였다. 한쪽에는 자신이 보유하는 칭호에 근거하여 마을 범위를 넘어서는 권위에 대해 태생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인구의 약 90퍼센트에 속하는 다른 쪽에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칭호가 그런 권리 주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자는 집합적으로 뜨리왕사triwangsa, 〈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불렸으며, 〈카스트〉(즉, 바르나varna)의 상위 세 집단인 브라흐마나, 사뜨리아Satria, 웨시아Wesia로 구성되었다. 후자는 네번째 집단인 수드라 〈카스트〉로 구성되었다. 웡 저로wong jero 혹은 대략 〈내부자〉라고 지칭되는 전자의 집단에서 발리의 지도자들이 나왔고, 웡 자바wong jaba 혹은 〈외부자〉라고 지칭되는 후자의 집단에서 추종자들이 나왔다."(53-4)
"국가조직이 의존하고 있던 두번째 제도이자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중요했던 제도는 바로 이례적이고 심지어는 독특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다양한 친족 체계였다. 모든 상위 카스트 구성원들은 그 힘과 크기가 다양한 남계男系 출계집단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이 출계집단은 현대 인류학 문헌들에서 흔히 묘사되어 온 종족宗族(lineage)과는 구조적으로 상당히 달랐지만 그런 구조적 차이를 차치한다면 여전히 종족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만한 집단이었다." "출계집단의 지위는 시간과 함께 변화했고 새롭게 이질화된 출계집단의 생성과 더불어 변화했다. 오래된 하위 집단들은 새로운 집단이 출현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지위가 하락했다. 이 결과 위계적이고 매우 유동적이지만 상당히 체계적인 출계집단 구조가 나타났는데, 정치적 권위를 실제로 분배하는 일은 바로 이 구조에 의존했다. 신분에 따른 칭호 체계가 정당성을 부여했다면 친족 체계는 그것에 구체적인 사회적 형태를 부여한 셈이었다."(56-7)
"이 체계의 기본 단위는 발리인들이 보통 다디아dadia라고 부르는 집단으로, 종족 혹은 문중과 유사한 집단이다. 다디아는 공통의 조상을 둔 남계 친족원 모두로 이루어져 있다." "다디아는 결코 출계, 지역 연고, 〈카스트〉에 기반을 둔 더 큰 단위의 집단으로 합쳐지지 않는다. 또한 비록 다디아가 내적으로 고도로 분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의미에서 다디아는 분열이 불가능하다." "다디아는 성장함에 따라 그 내부에 자신과 동일한 종류의 일반적 질서를 가진 하위 집단들을 발전시켰다 다시 말하면, 내혼을 선호하는 남계 친족의 뚜렷한 집합이자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야심을 품은 조합체를 다디아 내부에 형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조합체이자 상호 독립적인 단위임에도 불구하고, 이 하위 집단들은 자신들의 어버이에 해당하는 다디아에 대해서는 독립적이지 않다고 간주되었다. 어버이 다디아는 명시적으로 법적,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우월성을 지녔다."(57-8)
"마을 범위를 넘어서서 권위를 행사할 자격이 있는 뜨라왕사 귀족과 그런 자격이 없는 수드라 농민으로 인구를 양분하는 신분제, 하락하는 지위라는 원칙을 통해 귀족 자체를 분화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는 다디아 체계, 이 두 가지에 더하여, 〈국내〉 정치에 특정한 형태와 특성을 부여하는 제3의 사회제도가 하나 더 있다. 이는 바로 후견인 제도이다. 후견인 제도가 비록 〈카스트〉 및 친족제도가 정립해 놓은 일반적인 맥락 안에서 작동하기는 했지만, 후견인 제도는 양자와는 분명히 달랐다. 왜냐하면 후견인과 추종자 사이의 관계는 생득적이기보다는 계약적이었고, 확산적이기보다는 한정적이었으며, 법적이기보다는 비공식적이었고, 체계적이기보다는 불규칙했기 때문이다. 후견인 제도를 통해서 지위와 혈연이라는 고정된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그 경계 내에서 관계를 재조정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 후견인 제도는 신분제도의 엄격성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탈출구였다."(67-8)
# 후견 관계인의 주요 성격
1. 정치적 관계 : 높은 지배적 다디아와 낮은 지배적 다디아 사이의 관계
2. 종교적 관계 : 지배적 다디아와 성직자 다디아 사이의 관계
3. 경제적 관계 : 지배적 다디아와 소수민 공동체 사이의 관계
"마지막으로, 국가 조직과 관련된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 이것은 가장 덜 실재적이고 가장 불안정하며 몇몇 일시적인 순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사소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명백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지적하는 이 마지막 차원은 후견 및 추종 관계라기보다는 동맹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따라서 해당 관계의 성격이 비대칭적이라기보다는 대체로 대칭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형으로, 해당 지역에서 지배적인 여러 다디아들이 지역 간 횡적 연계를 맺는 유형이다. 이런 동맹 관계는 곡예사들이 몸으로 만든 피라미드의 정점과 같았으며, 카드를 쌓아 올려 만든 집의 휘청거리고 불안정한 꼭대기와 같았다." "19세기 발리에서 꼭대기 자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모든 동맹은 조만간(대체로 일찌감치) 깨지고 말았다. 섬 전체를 아우르고자 하는 모든 야심은 방해받기 일쑤였으며 〈영적인 단일성〉이나 〈죽을 때까지 굳건한 형제애〉를 두고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일은 공허할 뿐이었다."(77-8)
제3장 정치적 해부: 마을과 국가
"발리에서는 국가가 마을을 만들어냈듯이 마을도 국가를 만들어냈다. 마을과 국가가 지속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상대방에 대해 반응을 했고, 그런 과정을 통해 같이 나란히 성장해왔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강력하게 입증해주는 지표가 있다. 20세기 이전 발리에 엄밀한 의미의 도시 주거구역이 실질적으로 부재했다는 점이 바로 그 지표이다. 하나의 강력한 다디아 안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귀족 가문들은 자신들의 형이상학적 청사진에 부합하게 거주지를 정했다. 그들에게 있어 모범적 중심이었던 핵심 직계 왕의 궁전 주변에 전략적으로 모여 사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왕족 신분에서 더 많이 하락했다고 간주되는 2차적, 3차적 귀족 가문들은 대체로 중심부와는 떨어져 있는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그곳에 있던 〈가문들〉과 〈궁전들〉은 수도에 위치한 가문이나 궁전보다 단계가 낮은 모방품이었지만, 지역민의 삶 속에 정착해서 그들에게 모델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91)
"국지적 규모의 기반을 가진 정치 형태들은 세 가지 영역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그 세 가지 영역이란 (1) 공동체 생활의 공적 측면에 대한 질서화(반자르banjar, 작은 촌락), (2) 관개시설의 관리(수박subak, 수리관개 조직), (3) 민간 의례의 조직화(뻐막산pemaksan, 사원을 중심으로 한 신도집단 혹은 회중)였다. 이 세 개의 제도 주위에는 그 자체로 비정치적이면서 특수한 초점을 가지고 있는 집단들, 예컨대 친족집단이나 자발적 결사체 등이 존재했는데, 그 결과, 중첩되고 맞물려 있으면서도 구별되어 있는 조합체들이 작은 쇠사슬을 엮어서 만든 갑옷처럼 연쇄를 이루어 복합적인 정치적 질서를 만들어냈다." "결국 느가라와 마찬가지로 발리의 데사는 경계가 분명한 하나의 실체라기보다는 다양하게 조직되어 있고 다양한 초점을 가진, 그리고 다양하게 상호 연계된 사회집단들의 확장된 장이었다. 이는 내가 다른 곳에서 〈다원적 집합주의〉라고 불렀던 유형에 해당한다."(94-5)
"마을 정치체를 구성하는 이 세 개의 주요 요소들, 즉 반자르banjar, 수박subak, 뻐막산pemaksan이 동위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각각의 성원권은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호 교차하고 중첩된다. 실제로 거의 모든 경우 하나의 수박에는 여러 반자르, 여러 뻐막산의 구성원들이 섞여 있다." "이 세 개의 조합적 형태들은 늘 데사 체계의 정치적 핵심을 형성해왔다. 이 핵심적인 세 개의 조합적 형태 주변에 〈다원적 집합주의〉의 다른 비동위적 구성물들(친족집단, 자발적 결사체 등)도 운집해 있다. 우리는 특권, 의례, 과시가 작렬하는 것을 국가라고 불러왔는데, 발리에서 이 국가가 관계를 맺어야 했던 것은 소위 통합적인 〈마을 공화국〉이 아니라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은 종류의 정치 체계였다. 이 정치 체계는 발리 사람들이 스까seka라고 부르는 것으로,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서로 구분되어 있는 집단들이 부분적으로만 정연하게 모여 있는 것이며, 통합적인 상태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104-5)
"이득이 많이 나는 원거리 교역은 인도네시아에서 〈역사적인 상수〉였다. 16세기와 17세기 항료 교역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식민지배를 초래하기는 했지만, 이 폭발적 성장은 그 〈상수〉가 가장 가시적이고 극적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었다. 기번이 〈화려하면서도 하찮다〉고 특징지었던 종류의 모험 상업 계층은 언어, 문화, 정치, 인종, 종교적 측면에서 통일성이 부족했던 인도네시아 군도에 상업적 측면에서의 통일성을 부여했다. 발리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발리가 이 교역으로부터 대체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발리는 남쪽으로 인도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인도양은 항구가 빈약하고 물길이 험해서 교통량이 거의 없었다. 반면 아시아의 지중해라고 할 수 있는 발리 북쪽 자바 해를 따라서는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 자바인, 부기스인, 말레이인, 그리고 유럽 상인들이 마치 수많은 거리 순행 행상인들처럼 빈번하게 왕래했다. 격리와 고립이라는 발리의 명성 중 많은 부분이 이 사실에 기인한다."(161)
제4장 정치적 언명: 스펙터클과 의식儀式
"고전적인 느가라에서 의례생활은 신앙의 형식인 만큼이나 수사학의 형식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의식이나 의례는 영적인 힘을 화려한 방식으로 뽐내면서 주장하는 행위였다. (헬름스가 목격한, 죽은 왕을 화장하는 화장터에서 후궁 세 명이) 산 채로 불길에 뛰어드는 행위는 왕가 구성원들이 삭치의례, 사원 봉헌식, 서임식, 뿌뿌딴에서의 자살 등을 통해 단정적으로 내세우려던 주장과 동일한 종류의 주장을 내세우는 행위였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더 장엄한 방식으로 주장했을 뿐이었다. 이들이 주장한 명제의 내용은 사회적 지위와 종교적 조건 사이에 깨뜨릴 수 없는 내적 연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국가의례는 국가에 대한 의례가 아니었다. 국가의례는 종교적 어휘들을 통해 집요하게 반복되는 하나의 주장이었다. 그 주장의 내용은, 속세에서의 지위에는 우주론적 기초가 있고,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는 바로 위계 서열이며, 인간생활의 질서는 신성한 존재들의 질서에 대한 대략적인 근사치일 뿐이라는 것이었다."(186)
"궁정의례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발리인들은 사물의 궁극적 존재 방식 및 그에 따라 인간이 행동해야 하는 방식에 대해서 자신들이 가진 가장 포괄적인 관념을 제시할 때, 그것을 담론적으로 파악되는 명시적 〈믿음들〉의 질서정연한 집합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즉각적으로 파악되는 감각적인 상징들, 즉 조각, 꽃, 춤, 멜로디, 몸짓, 노래, 장식, 사원, 몸동작, 가면 등을 통해 주조해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포괄적 관념을 요약하려는 시도는 모두 의심스럽게 보일 뿐이다. 관련된 문제가 광의의 포이에시스poiesis(〈만들기〉)라는 의미에서, 여기에서의 메시지는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체에 너무나 깊게 침전되어 있고, 따라서 만약 이것을 명제들의 연망으로 전환한다면 주석註釋 달기라는 행위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첫째는 실제로 그곳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잘못이고, 둘째는 풍요로운 의미적 특수성을 칙칙한 일련의 일반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잘못이다."(187-8)
"부와나 아궁(존재 영역)과 부와나 알릿(감각 영역)이 상징적으로 융합되는 지점은 모든 왕가의 의례가 환원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광범위한 메타 정치적 주장에 따르면, 느가라가 의례 속에서 기념하는 문화적 형태와 느가라가 사회 속에서 취하는 제도적 형태는 동일하다. 링가와 왕, 왕과 영주, 영주와 평민, 빠드마와 궁전, 궁전과 왕국, 왕국과 마을, 슥띠와 지위, 지위와 권위, 권위와 존경, 이 모든 것들은 국가의례를 통해서 저로(귀족)와 자바(평민)라는 대립항 속 상응물이 된다. 그 모든 것들이 엄청나게 화려한 이유는 연극과 장식을 통해서 정치적 비유의 권위 유형을 확립하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시바가 여러 신들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는 신이 왕에게, 왕이 귀족에게, 귀족이 뻐르버끌(평민 관리인)에게, 뻐르버끌이 민중에 대해 맺고 있었다. 〈내부〉와 〈외부〉, 〈작은 세계〉와 〈큰 세계〉, 혹은 무르띠에서 슥띠로의 이동 등으로 표현되는 이 모든 것들은 동일한 실재의 다양한 판본들이었다."(197-8)
"(국가의례에서) 영주는 〈신성한 형태〉의 〈활성화된 상태〉 중 하나가 되는 동시에, 그 자신으로부터 차후의 활성화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신성한 형태 중 하나였다. 상징적 세부사항이 얼마나 변이를 보였든 간에, 의례의 의미 구조는 일정했다. 경험된 것의 〈작은 세계〉와 경험 가능한 것의 〈큰 세계〉는 두 방향으로, 즉 안으로는 연꽃 속 링가 쪽을 향해서, 바깥으로는 사회 속 국가를 향해서 놓였다. 이렇게 〈작은 세계〉와 〈큰 세계〉는 영주를 권력에 대한 이미지(즉, 무르띠)로,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구체적인 예(즉, 슥띠)로 재현했다. 기본 어법은 역시 모방적이다. 민중들은 시바를 모범적인 형상으로 보고 왕을 그 활성화된 형태로 바라보았으며, 왕을 모범적인 형상으로 보고 국가를 그 활성화된 형태로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민중들은 국가를 모범적인 형상으로 보고 사회를 그 활성화된 형태로 바라보았으며, 사회를 모범적인 형상으로 보고 자신을 그 활성화된 형태로 바라보았다."(198-9)
"왕의 사망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실제로 시신을 태우는 일을 거쳐 일련의 기이한 사후의례에 이르기까지 화장의례 전체를 다 치르려면 여러 달이 걸렸다. 화장의례의 핵심은 중대하고 신성한 세 개의 날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각은 정화의 날Pabersihan, 경의의 날Pabaktian, 그리고 소멸의 날Pabasmian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리 의례들과 마찬가지로, 이 핵심적인 행사를 전후로 한쪽으로는 지속적으로 점증하는 준비 과정이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지속적으로 내려오는 마무리 과정이 있었다. 일의 중요성은 본류가 되는 중심 행사뿐 아니라 서막(의례용 장치 건설하기, 공물 모으기, 축하연 조직하기)과 후렴구(추상, 재, 무늬, 혹은 꽃을 사용하여 타들어가는 시신을 강박적으로 다시 재현해내기)에도 놓여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화장의례는 발리인들이 까르야 라뚜karya ratu, 즉 〈왕의 일, 왕의 작업, 왕사王事〉라고 부르는 일종의 강제노역이었으며, 이 안에서 봉사노동과 숭배행위는 동일한 것이 되어버렸다."(212)
"화장의례의 중심 행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세 가지 상징적 에너지가 거대하게 분출한다는 점이었다. 상징적 에너지가 사회적으로 분출된 것은 의례 행렬, 미학적으로 분출된 것은 화장탑, 자연적으로 분출된 것은 바로 불이었다. 흥분한 군중과 호화로운 상여, 그리고 자유분방하게 막 쌓인 장작더미는 행사의 기본적인 분위기를 설정해놓았는데, 이 기본적인 분위기는 애도라기보다는 야유회에 가까웠다." "그래서 화장의례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죽은 자에 대한 의례가 수상쩍을 정도로 과대해진 것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산 자들이 위세 전쟁을 하면서 저돌적인 공격을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호리스는 발리의 화장의례가 힌두교 도래 이전에 존재하던 포틀래치 관습이 잔존하여 인도화된 형태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는데, 이는 민족학적 견지에서 볼 때 수용하기 곤란한 견해이다. 그러나 호리스의 지적은 화장의례의 정신, 즉 발리식의 과시적 소비를 충분히 잘 포착해내고 있다."(211-4)
"왕의 의례들은 구경거리 행렬이라는 형태 속에서 발리 정치 사상의 중심적 주제를 상연해냈다(이런 점에서는 삭치의례, 서품식, 왕국 영내 정화의례, 사원 봉헌식 등도 화장의례와 다르지 않다). 그 주제란 곧 중심은 모범적이고 지위는 권력의 근본이며 국가 통치술은 연극 상연술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이보다 더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그 구경거리 행렬은 단순히 미적인 장식도 아니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배를 예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행렬들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것이었다. 중심 중의 중심, 세계의 축이 되기 위한 경쟁은 바로 그 자체로 경쟁을 위한 경쟁이었다." "즉 사회 전체가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위세에 대한 정교하고 끝없는 경쟁에 갇혀 있었으며, 이 경쟁이야말로 발리적 삶의 추진력이었던 것이다." "왕의 화장의례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화장의례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가 격화된 것이었다."(217-8)
결론 발리와 정치 이론
"느가라를 국가로 번역한다면 통문화적 번역을 할 때 빈번하게 저지르는 실수를 반복하는 꼴이 된다. 서구인의 입장에서는 궁전, 소도시, 수도, 왕국, 문명 등이 구분되지만 느가라 안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다. 느가라가 지시하는 종류의 정치체에서는 지위, 웅장함, 통치 사이의 상호작용이 가시적일 뿐 아니라 사실상 공공연하게 드러난다." "국가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하여 16세기 이래 서구에서 발전되어 온 개념들이 있다. 영토 내에서 폭력을 독점하는 존재,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 인민 의지를 대표하는 대리인,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 등이 바로 그런 개념들이다." "그런데 국가를 이해하기 위한 서구의 개념들 중 그 어떤 것도 국가권력이 가진 상징적 측면의 특징을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했다. 정치적 삶에서 명령과 복종이라는 개념으로 쉽게 환원될 수 없는 권위의 차원들은 고작해야 비정상적인 생성물, 신비, 허구, 장식물 등으로 이루어진 막연한 세계로 표류해 가도록 방치되었을 뿐이었다."(220-1)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부터 드 주브넬의 미노타우로스에 이르기까지, 국가권력을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있다. 이렇게 국가를 〈거대한 짐승〉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그런 위협에 직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야말로 공공 영역에서 행진이나 의식이 맡은 기능이라고 본다. 호주 원주민의 종교의식용 악기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기계와 마찬가지로, 그런 행진과 의식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그들로부터 전율할 정도의 경외감을 유발해내는 일종의 어두운 소음이라는 것이다. 그다음, 좌파로는 마르크스에서부터 우파로는 파레토에 이르기까지, 하층민들로부터 잉여를 짜내서 엘리트가 가져가 버리는 능력을 강조하는 관점이 있다. 이렇게 국가를 〈거대한 사기〉로 보는 관점에서는 국가의례를 신비화라는 견지에서 이해하는데, 이때 국가의례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영성을 부여하고 물질적 갈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222-3)
"또 한편 국가는 공동체로부터 나오며 국가는 공동체 정신의 연장이라고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 국가에 대한 이런 인민주의적 개념을 채택하면 자연스레 국가를 더 찬양하는 방식으로 공식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국민의 의지를 실행하는 도구라면, 국가의례는 국민의 의지가 숭고함을 공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다원주의적 이론들, 고전적 자유주의 이론 및 그 계승자인 압력단체론이 말하는 이해관계의 균형이라는 관점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국가의 과시적 장식물을 도덕적 정당성 안에서 부여된 절차에 옷을 입히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이라고 본다. 정치란 확립된(〈합헌적인〉) 게임의 규칙 안에서 한계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교묘하게 조종을 하는 일이며, 언제나 정치를 따라다니는 가발이나 법복이 하는 역할은 그 게임의 규칙이 잘 확립된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 규칙이 규제하기로 되어 있는 당파적 투쟁을 규칙 위로 올려놓거나 규칙 아래로 끼워 넣는 일이라는 것이다."(223)
"고전시대 발리 문화의 성격 및 그것이 지탱했던 종류의 정치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이 많다. 그렇지만 지위가 지배적인 강박관념이었으며 화려함이 지위 유지를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이었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문자 그대로 〈자리〉를 의미하고 일반적으로는 서열, 신분, 위치, 장소, 칭호, 〈카스트〉를 의미하는 링기linggih는 발리 사회에서 공적 생활이 돌아가는 축이었다(지위 확인을 요구하는 표준적인 방법은 〈어디에 앉으십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지위는 신성함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정의되고,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타고나는 것들 중 하나이며, 삶이 전개되면서 일어나는 우연적 사건들과는 거리가 멀다. 발리에서의 지위 및 지위를 둘러싼 강박적 충동이 활성화하는 감정과 행동 대부분에 해당하는 등가물을 우리 사회에서 찾는다면 바로 우리가 정치적이라고 부르는 영역이 될 것이다. 느가라를 이해하는 것은 그러한 감정들을 위치시키고 그러한 행위들을 파악하는 것이다."(224-5)
"다른 무엇보다도, 발리 국가는 현실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에 대한 재현이었다. 그 거대한 형상 안에서 끄리스 같은 사물, 궁전 같은 구조물, 화장의례 같은 관행, 〈안쪽〉과 같은 관념, 왕가의 집단 자살 같은 행위 등이 잠재력을 유지하며 존재했다. 정치란 본래적인 열정을 변함없이 유지하며 유희하는 것이라는 개념, 그리고 특정한 지배제도는 단지 착취를 위한 수많은 장치에 불과하다는 개념은 그 어디에서나 오류일 뿐이다. 그런 개념들이 부조리하다는 점은 발리 사례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권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왕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동일했다. 개별 왕들은 등장했다가 사라졌고, 〈가련하게도 단지 지나갈 뿐인 사실들〉은 칭호 안에서 익명화되었으며 의례 안에서 고정되었고 모닥불 안에서 소멸되었다. 그러나 왕들이 재현했던 것, 즉 질서에 대한 모델과 복사라는 관념은 적어도 우리가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시기 동안에는 발리에서 변하지 않았다."(225-6)
"중동과 아시아에 있는 전통적 위계제 국가들에서는 세 가지 주요한 왕권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이집트, 중국, 혹은 수메르와 같은 고대 관료제의 경우 왕 스스로가 최고위 사제였다. 왕국 내의 안녕은 의례를 집전하는 왕의 주술적 힘에 달려 있었고, 다른 사제들은 단지 왕을 보조하는 성직자에 불과했다. 둘째, 하나의 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서 왕은 뒤몽의 표현을 따르자면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관례적인〉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인도의 왕은 〈고유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지배자였다. 인도의 왕을 내세와 의례적으로 연결해준 것은 사제들이었으며, 그를 현세와 행정적으로 연결해준 것은 관료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여타 동남아시아 대부분 지역과 마찬가지로 발리에서는 왕이 단순히 성구 보관인이 아니라 세계의 신비로운 중심이었다. 그리고 사제는 왕의 신성성에 대한 표장이자 구성요소였으며, 〈왕의 공적 인격체가 연장된 존재〉였다."(229-30)
"발리에서 왕은 마치 인간 형태를 한 일종의 표의문자로 존재하기 위해서 개인 정체성과 의지를 포기한 존재처럼 보인다. 사제를 왕의 보석으로 묘사하고 왕국을 왕의 공원으로 묘사했던 의례는 왕을 왕의 도상으로 묘사한다. 그러니까 왕을 왕권에 대한 성스러운 유사성이라고 묘사한 셈이다." "왕은 궁정의례 속에서 분투적으로 자신을 기호나 이미지로 전환하려고 노력했다. 기호 체계 안에 있는 하나의 기호이자 이미지의 장 안에 있는 하나의 이미지로서 왕은 그 위계가 비물질화되는 지점에 〈앉아서〉 순수한 관념계로 넘어가는 문턱을 표시했고, 바로 그 점에 있어서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었다. 그러나 능동적인 수동성이라는 역설, 〈회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점〉(T. S. Eliot)이라는 말처럼 움직이지 않고 단호하게 앉아 있는 행위라는 역설은 더 멀리 확장되었다. 왜냐하면 기호로서의 왕은 고요한 영혼이 지닌 차분하고 온화한 특징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영혼이 지닌 순진하고 엄격한 특징 역시 전달했기 때문이다."(237-9)
"그러나 왕은 정치적 행위자이기도 했으며, 기호 중의 기호였던 만큼 권력 중의 권력이기도 했다. 물론 왕을 만들어내고 그를 영주에서 도상으로 성장시킨 것은 바로 왕의 의례였다. 왜냐하면 평온한 신성성이라는 이미지는 극장국가의 드라마 없이는 심지어 형태를 취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드라마의 상연 빈도, 화려함의 정도, 규모, 그리고 그에 따라 그 드라마가 세계에 각인시키는 인상의 범위는 그 드라마를 상연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충성의 범위가 얼마나 포괄적이냐에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해, 인력, 기술, 물자, 지식을 동원하는 일이 국가통치술의 가장 기초적인 업무이자 가장 중요한 기예에 해당했으며, 물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패권은 바로 그런 능력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요하게 앉아 있는 행위, 심지어 열정적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행위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권력에 대한 최고의 재현이 되기 위해서는 권력 내부에서 교통하는 것도 필수적이었다."(240-1)
"빛나는 정상을 향해, 만물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려는 야심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즉,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실질적 어려움을 제외하고, 이 상황은 느가라 정치에 한 가지 역설을 초래했다. 이 역설은 국가통치술도 국정 수행자도 완전히 해소할 수 없는 역설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역설은 느가라 정치에서 핵심적인 정치동학이 되어버렸다. 그 역설이란 누군가가 권력의 이미지화로 가까이 갈수록 그 사람은 권력을 통제하는 장치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생긴다는 역설이었다." "기저부로 갈수록 느가라는 기능적이 되었고, 혹은 발리인들이 말하듯 〈조야〉해졌고, 정점으로 올라갈수록 느가라는 미학적이고 〈세련〉되어졌다. 특히, 정상 가까이, 즉 〈멀리까지 비추는 장엄한 광휘〉가 그렇게도 많은 연료를 소비했던 정상 가까이에서는 양자의 충돌이 가장 강력하고 불가피했다. 느가라는 위계의 본성에 대한 모델 자체였던 것이다."(241-3)
"때로는 유혈적이고 때로는 의례적인 행위 구조였던 느가라는 그 자체로 동시에 생각의 구조이기도 했다. 따라서 느가라를 묘사하는 작업은 소중히 안치된 일군의 관념들을 묘사하는 작업과 같다." "관념은 이제 더는, 사실 상당 기간 이전부터, 관찰할 수 없는 정신적 존재가 아니다. 관념은 매개물에 올라타서 움직이는 의미이며, 이때 매개물은 바로 상징이다(다른 용법에서는 상징이라는 단어 대신 기호라는 단어를 쓴다). 상징이란 외연을 표시하고 기술하고 재현하고 예증하고 명명하고 지시하고 환기하고 묘사하고 표현하는 그 무엇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곧 상징에 해당한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간間주관적이고, 따라서 공적이며, 따라서 공공연하고 쉽게 수정 가능한 외광파 화풍plein air 식의 설명에 의해 접근이 가능하다. 논쟁, 선율, 공식, 지도, 그림 등은 응시해야 하는 관념적 대상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텍스트다. 의례, 궁전, 기술, 사회형성체도 마찬가지다."(247-8)
# 외광파外光派 : 자연 광선에 의한 회화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그리는 화파를 통틀어 이르는 말
"발리의 정치가 상징적 행위였다고 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정신 속에 존재했다든가 모든 것이 춤과 향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발리 정치의 양상들, 예컨대 모범적 의례, 모델과 모방의 위계, 표현적 경쟁, 도상적 왕권, 구조적 다원주의, 개별화된 충성, 분산적 권위, 연맹을 통한 지배는 발리 섬 자체만큼이나 농밀하고 즉각적인 실재를 구성했다. 궁전을 건설하고 조약문의 초고를 쓰고 지대를 징수하고 교역권을 임대해주고 혼인을 주선하고 경쟁자를 해치우고 사원에 기부하고 화장에 쓰일 땔감을 쌓고 연회를 주최하고 신을 이미지화하면서 이 실재를 관통하여 지나온 남자들(그리고 배우자이자 책사이자 지위 표시물이었던 여자들)은 그들이 보유했던 수단을 가지고 그들이 개념화할 수 있었던 목표를 추구했다. 자신 스스로를 모방하는 극장국가의 드라마는 결국 환상이나 거짓이 아니었으며 손재주나 속임수도 아니었다. 극장국가의 드라마는 실제로 그곳에 존재했던 실체였다."(24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