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우리 안의 적
이재석 외 지음 / 지식너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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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축제의 시간에 돌아본 '우리의 그늘'


"〈이범윤의 부하 김익준이라는 자가 얼마 전 간도로 와서 잠복하고 있다는 설이 있어서 밀정을 시켜 탐색하게 했습니다. 우리 밀정은 이 사람을 교묘한 방법으로 대안對岸 온성穩城으로 유인했고 헌병대가 그를 체포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1년3월 간도총영사가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에게 올린 보고서 중 일부다. 이런 식의 서술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이렇게 밀정의 밀고를 토대로 작성된 내부 기밀 보고서는 일본 자료실과 공공기간 곳곳에 남아 있다. 너무 많다. 너무 많아 다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취재 기간 동지들에게 치명적인 정보를 일제에 속속 전달하는 또 다른 동지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씁쓸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의 세세한 밀고 덕분에(?)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내역이 소상히 드러나는 역설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밀정의 밀고가 없었다면 항일운동의 역사도 쓰일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우스갯소리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가 싶었다."(12-4)


2장 임시정부의 얼굴, 누가 빼돌렸나?


"1919년 7월 9일, 조선군참모장 오노 도요시는 육군차관 야마나시 한조에게 사진이 송부된 보고서를 올린다. 〈이 사진은 상하이에 있는 배일 조선인 간부 및 결사자 200여 명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 나오는 사람에게 한 명당 한 장 외에는 절대로 더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사진을 분실할 때에는 제재를 받는다는 서약 아래 엄밀하게 보관된 것입니다.〉 1919년 4월에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이 보고서가 7월에 작성됐으로, '상하이에 있는 배일 조선인 간부 및 결사자 200여 명'은 임시정부 사람들을 말한다." "사진을 입수하기 위해 일제가 동원한 수단이 있었다. 드디어 밀정이 등장한다. 〈프랑스 조계 장안리에 있는 배일 조선인 상인 곽윤수─인삼을 팔아 모은 돈을 임시정부에 지원하고 자신의 집을 임시정부 사무실과 숙소로 제공했다. 2010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됐다─의 집에 걸려 있던 것입니다. 곽윤수의 처남을 시켜 은밀히 짧은 시간 동안 밀정에게 가져오게 해서 복사한 것입니다. 이를 송부합니다.〉"(24-33)


3장 항일운동의 또 다른 서술자, 밀정


"밀정 엄인섭은 연해주 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명이다. 1907년부터 반일 의병운동에 적극 가담한 그는 최재형, 홍범도, 이범윤과 긴밀했고, 안중근 의사와도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뤼순 감옥에서 심문받을 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활할 당시 엄인섭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1908년 안중근이 항일을 다짐하며 손가락을 끊었던 그 유명한 '단지동맹'을 할 당시, 엄인섭도 여기에 동참한 사람 중 하나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간도 15만 원 탈취 사건의 거사 주인공들 중 일부가 엄인섭에게 사건 전말을 털어놓는 것을 잠시 불안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연해주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장 출신인 그를 밀정으로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그들은 러시아 쪽에 발이 넓은 엄인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은신처를 포함한 모든 정보가 엄인섭의 입을 통해 일제에 고스란히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54-5)


# 간도 15만 원 탈취 사건 : 비밀결사 철혈광복단의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최봉설 등이 조선은행의 현금 수송 행렬을 습격해 돈을 탈취한 사건. 15만 원은 현재 가치로 1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4장 안중근의 동지, 그가 걸어간 '다른 길'


"1909년, 안중근에게는 동지가 있었다. 마지막 격발의 순간에는 혼자서 결단하고 감행했지만, 세 명의 동지가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가 그들이다. 역할 분담이 있었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을 맡고,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자거우역을 맡았다 .유동하는 중간 연락책과 통역을 맡았다." "조선인회(또는 조선인민회)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보조기관이자, 독립운동가와 일반 조선인들을 떼어놓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일본 경찰이 배치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별 조선인민회가 만들어졌고 지역별 민회에는 회장, 부회장, 주사와 서기, 대의원을 두었다.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교육 사업이나 위생 관리 같은 통상적 업무를 수행하고 일본 행정기관의 명령을 하달하기도 했지만, 독립운동 탄압을 지원하고 만주 지역 조선인 사회의 동향을 감시했다. 이를 위해 상시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다. 1925년의 우덕순은 그런 대표적 친일단체의 하얼빈지회 회장이 되어 있었다."(68-72)


5장 김좌진 최측근이 밀고한 '배신의 기록'


"그는 김좌진 장군의 막빈幕賓, 그러니까 비서이자 참모였다. 그 자신도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을 상대로 빛나는 승전을 거뒀다. 대한민국도 마땅히 그를 인정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그는 전장에서 일기를 남기기도 했다. 1920년 청산리 전투가 있기 직전, 자신이 몸담고 있던 독립군 부대 북로군정서의 내부 상황을 적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1924년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극비 문서에도 등장한다. 1924년이면 청산리 전투가 있고 4년 뒤다. 안타깝게도 그사이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독립군 참모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탈바꿈했다. 그의 이름은 이정李楨이다." "그가 밀고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외무성 기밀문서의 분량은 무려 57쪽에 달한다. 독립군 간부의 인상착의와 특징, 군자금 모금 책임자와 활동 내용, 김좌진과 김원봉의 공동 의거 계획 등 대한독립군단의 온갖 치명적 정보가 담겼다. 학계 전문가들은 이 문건을 〈일본 입장에선 최고 수준의 정보〉라고 평가했다."(86-94)


6장 얼굴 없는 밀정이 기록한 '만주벌 호랑이'


"밀정은 홍범도 개인을 검거할 수 있을 만한 단서를 일제에 세세히 밀고한다. 〈홍범도의 소재지는 혜산진 대안 일리日里에서 약 30리 떨어진 신약수동新藥水洞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지역 동북쪽 사헌 부락에 가옥을 짓고, 이곳에 거주하면서 대문에 조사실이라 적은 종이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부하들과 동거하면서 망을 보게 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홍범도 부하들의 특징은 어떨까. 밀고자에게는 한솥밥 먹던 동료들일 것이다. 〈부하들은 복장도 일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가명을 써서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타인이 있는 장소에서 부하들끼리 대화를 하고자 할 때, 또는 본명을 알고자 할 때에는 서로 오른손을 머리 높이 올려 알아보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밀고자를 이렇게 평가한다. 〈홍범도의 부하 예승준(22세)은 소양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고 성격이 활발합니다. 조금도 감추는 것 없이 진술했으며 대체로 사실로 보이는 점이 많습니다.〉"(123-5)


7장 김원봉을 밀고한 부하, 그에게 수여된 건국훈장


"1926년 일본 외무성 내부 보고 문건이다.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다이쇼 14년(1925) 11월 28일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함께 한커우漢口로 왔고 김원봉은 체류 1일째에 베이징을 경유하여 광둥으로 향하였습니다.〉 누군가의 밀고다." "밀정은 누구였을까. 문서 추적을 이어갔다. 밀정의 정체와 관련한 핵심 정보가 나온다. 〈의열단 간부 중 김호라는 자가 얼마 전 출두했습니다. 그 사람 말에 따르면 자신은 상하이 주재 조선총독부 통역관 오다 미쓰루의 밀정으로 여비를 지급받아 의열단원들의 동정을 조사하려고 한커우로 왔다고 합니다. 의심할 만한 말이 없고 여비 지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김호는 의열단원이자, 조선총독부 통역관 오다 미쓰루의 밀정이자, 도박을 조항하는 방탕한 사람이었다. 본적은 경상남도 하동, 본명은 김재영이다. 그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에서 공적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독립유공자였다. 의열단 활동과 청년동맹회에 참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143-9)


8장 임시정부의 비밀 자금줄, 경주 최부잣집


"김구 선생은 해방 뒤 이런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자금의 6할은 백산에게서 나왔다.〉 백산白山은 안희제安熙濟 선생의 호다. 그가 설립한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1922년 작성된 계약서를 보면 백산은 조선식산은행에서 35만 원을 대출받았다. 35만 원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0억 원에 가까운 거금이다. 계약 조항 8조에 〈최준이 백산무역회사와 연대해 채무 이행의 책임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최부잣집 종손 최준은 당시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대표이사였다. 문서 뒷부분에는 대출을 위해 저당 잡힌 최부잣집 부동산 목록이 수십 쪽에 걸쳐 빼곡히 적혀 있었다. 경주와 울산 지역의 논밭 785필지다. 22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데, 여의도의 75퍼센트 정도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임시정부에 자금을 대느라 경영 위기에 빠진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살리기 위해 최부잣집이 거의 전 재산을 걸어 은행 대출 보증을 서준 것이다."(162-7)


9장 식민지 권력자가 내린 지령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파괴하라〉


"우쓰노미야 다로 조선군사령관은 1918년부터 2년 동안 조선에 머물렀다. 그는 사이토 총독에 이어 한반도 내 권력 서열 2위였다. 그의 목표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초기에 무너뜨리는 것,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절붕絶崩'시키는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작성된 그의 일기에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하려는 정황이 상세히 담겨 있다. 〈9월 6일 토요일, 맑음. 무역상 시부카와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내 옛 지인으로 상하이에 망명 중인 조선인 김상설(초명 김봉석)이 배일排日 거두巨頭 김복金復을 데려와 내 옛 성의에 보답하고 이로써 과거의 죄를 속죄하고 싶다고 했다 한다. 시부카와와 함께 규슈까지 와서 숨어 있다고 했다.〉" "배일 거두라고 표현된 김복, 아니 김규흥은 독립운동가로 우리 역사에 기록돼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활동한 공로 등을 인정해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현재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177-84)


10장 〈김구를 잡아라〉 특종공작에 동원된 밀정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남목청 사건의 배후로 박창세를 지목했다. 그전부터 박창세가 일본과 손을 잡았다는 정황이 다수 포착돼 의심스러웠는데, 그가 반反 김구파로 불만을 품은 이운한을 부추겨 총을 쏘게 했다는 것이다.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한국독립당 특무대장을 맡기도 했던 박창세가 어쩌다 일제 협력자로 변절한 것일까. 단서는 일본 문건에 등장한다. 〈박창세를 회유하고 그가 김구를 처치하도록 획책하고 있습니다. [···] 김구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런 공작에는 실로 적당한 인물입니다. [···] 그의 차남 박제건이 권투선수가 되어 형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으니 총영사관과 협력해 귀국하는 데 편의를 봐주고 이를 박창세를 회유할 방법으로 삼고자 합니다.〉 가족을 볼모 삼아 밀정으로 포섭한다는 전략이다. 박창세의 둘째 아들 박제건은 전도유망한 권투선수였다. 실제로 그는 1936년 4월에 상하이를 출발해 도쿄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다. 문건에 나오는 대로다."(217)


# 남목청 사건 : 1938년 5월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조선혁명당 당사 남목청에 이운한이라는 자가 난입해 들어와 권총을 난사한 사건. 김구는 가슴에 총탄을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11장 3·1운동 계보도, '휘발된 사람들'을 찾아서


"일제가 수사자료로 작성한 3·1운동 계보도에 나오는 140명을 세 개의 범주로 분류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들이다. 이들은 국가가 이미 공인한 사람들이다." "둘째, 계보도에는 주도자급 인물로 등장하지만 훗날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들이다. 최린과 최남선이 대표적이다. 이런 사람들도 역사적 평가가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이들이 중요하다. 일본 경찰이 보기에 3·1운동 주도자급 인물이지만 우리 역사가 공인하지 않은 사람들, 말하자면 '역사에서 휘발된 사람들'이다. 140명 가운데 34명이 세 번째 범주로 추려졌다. 국가보훈처에 확인해본 결과 이 가운데 9명은 독립유공자 심사가 진행 중이고, 10명은 친일이나 월북 등 이상 행적이 확인된 사람들이라는 답변이 왔다. 그래도 나머지 15명이 의문으로 남았다. 이들을 3·1운동의 숨은 주역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10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이들을 찾아 공훈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230-1)


12장 해방과 동시에 사라진 이름, 밀정


"해방 70년이 넘은 지금 친일파에 대한 학문적·공식적 평가와 서술은 어느 정도 누적돼온 게 사실이다. 오늘날 누구도 이광수와 최남선을 좋게 기억하진 않는다. 그러나 밀정은 어쩌면 '해방과 동시에 사라진 이름'이다. 공개적 행보를 보인 친일파와 달리 사람들은 밀정의 정체를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의심의 눈초리야 보낼 수 있었겠지만 국가가 공인한 반민특위마저 와해되는 판국에 명확한 증거가 없는 밀정을 찾아내 단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야금야금 스며들었다. 대한민국 군과 경찰에, 정치권과 관공서에 알게 모르게 흡수되었다. 남몰래 스며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주특기이자 전공 분야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속에 밀정의 이름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군 100명보다 밀정 한 명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끼친 해악은 치명적이었지만 청산은커녕 역사적 평가 측면에서도 그들은 무풍지대에서 보전될 수 있었다."(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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