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진한사 중국의 역사
니시지마 사다오 지음, 최덕경 외 옮김 / 혜안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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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제국의 형성
1) 진나라는 씨족제의 해체, 군주권의 강화, 관료제, 농지 개척, 새로운 군대의 편성이라는 군현제의 성립 요건을 가장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통일제국으로 발돋움하였다.
2) 진시황은 군현제의 전국적 시행, 민간 병기 몰수, 도량형•화폐•문자의 통일, 만리장성•아방궁•여산릉 축조, 분서갱유를 하고 불사 선약을 갈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2 진제국의 붕괴와 한제국의 성립
1) 시황제의 급사로 의문스런 과정을 거쳐 왕위를 계승한 막내아들 호해는 대토목공사에 박차를 가하면서 농민수탈을 극도로 실행하여 전국적 농민반란을 유발하였다.
2) 항우를 꺾고 한의 황제가 된 유방은 공신들은 열후로, 형제들은 제후로 봉하여 영지를 내리는 군국제를 실행하였는데, 이 독립왕국들이 오초7국 난의 단초가 되었다.

3 한초의 유씨정권
1) 한대에는 민民에게도 작위를 하사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혈연 관계에 포속된 서민들을 작위라는 국가적 질서 속에 편입시켜서 일괄적인 통제와 규율을 꾀한 것이다.
2) 문제는 가의와 조조 두 관료의 민생안정책을 채택하여 납속수작(納粟授爵, 곡물을 납입한 자에게 작위를 수여하여 농민 부담을 경감)과 제후왕 억제책을 시행하였다.
3) 오초7국의 난이 평정된 뒤에 제후왕은 관리선임권을 상실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통제를 받았으며 봉지도 축소되어, 한제국의 군국제는 군현제로 회귀하였다.
4) 한제국은 흉노와는 적국항례敵國抗禮의 대등한 입장을, 남월과 한반도는 각각 군신과 외번으로 종속시켜 동아시아 각국과 책봉체제를 통한 정치•문화적 관계를 맺었다.

4 무제시대의 외정과 내정
1) 무제는 선대에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흉노와 기나긴 전쟁을 벌이고 서역과의 교통로를 개척하였으며, 염철전매제와 균수•평균법을 실시하여 재정을 보강하였다.
2) 무제는 예치를 강조한 공손홍과 동중서 같은 유학자를 등용하였지만 실제 국정은 조세를 엄격히 거두고 재정정책을 일관되게 집행한 법가적 혹리酷吏들의 몫이었다.

5 곽씨정권의 성립과 붕괴
중신들의 배후정치와 태자의 난, 휼민적 내조와 법술적 외조간의 대립과 공존을 거쳐 선제대에 이르면 흉노족의 투항과 순리의 등용을 통한 선정으로 안정기에 접어든다.

6 유교의 국교화와 왕망정권의 출현
1) 원제 이후에 유가관료의 진출이 두드러지면서 중본억말 정책이 다시 대두되었고 예법에 어긋나는 군국묘의 폐지와 상제와 후토에 제사지내는 교사제를 개혁하였다.
2) 유가사상은 참위설을 수용하여 천자와 황제 이념의 통합을 꾀하였고 오행사상에 따라 왕조의 성격을 논하였으며, 고래로 난립해 온 고전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3) 왕망의 내정개혁은 주周의 제도를 당대에 과격하게 이식하려는 시도로 토지, 화폐, 상공업 개혁 모두 혼란을 유발하고 위반자를 가혹하게 처벌하여 민심을 잃었다.
4) 왕망의 대외정책은 외번의 군장들을 모두 왕王에서 후候로 격하하여 주변국의 반란을 자초하였으니, 이는 화이사상만을 내세우고 왕화사상은 도외시한 단견이었다.

7 후한왕조의 성립
1) 적미의 농민반란과 남양유씨의 호족반란은 왕망정권을 타도하였고, 이후 세력간의 이합집산이 이어지다가 한왕조의 부흥이라는 기치 아래 광무제가 후한을 세웠다.
2) 광무제는 천하통일 후에 노비해방령을 실시하고 조세를 감경하였으며, 군역부담을 줄임과 함께 경지와 호구를 재조사하고 화폐경제를 되살리는 개혁을 시행하였다.

8 후한왕조의 추이와 대외관계
1) 후한대는 표면적으로 예교주의를 숭상하였지만 불교와 도가사상이 습합된 형태였으며, 반고의 <한서>와 허신의 <설문해자> 저술 등 문화적으로 융성한 시기였다.
2) 후한의 대외관계는 흉노의 약화와 선비와 강족 등 여타 주변민족의 정치적 성장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들과의 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였지만 국제관계는 활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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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 선진시대 중국의 역사
가이즈카 시게키 외 지음, 배진영 외 옮김 / 혜안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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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설의 성왕聖王
중국의 고대 역사는 인간 이전의 세계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을 유가적 전통 아래에서 학문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덕의 체현자로 묘사된 황제로부터 시작된다.

2 원原중국인과 그 문화

3 농경사회의 성립

4 신석기 시대의 생활

5 고대 왕조의 탄생

6 왕과 제사
1) 갑골문을 이용한 복점에서 조상은 초기에는 벌을 내리는 영귀靈鬼였다가 후손을 돕는 친밀한 존재로 바뀌고, 다시 신적인 존재로 변모하면서 '제'帝로 불리게 된다.
2) 제帝는 형체가 없는 신으로 기복을 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통제불가능한 두려운 존재였으며, 은殷이 복속한 종족들의 신들은 자연신으로 제帝의 하위에 놓인다.
3) 은殷왕조는 많은 혈족들의 느슨한 집합체로서 왕조 교체기마다 변동하는 왕권의 위세와 종족들의 세력 분포 때문에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계승제도를 바꾼다.

7 주周왕조의 흥기
1) 주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라는 명칭에서 보듯이(稷:수수) 토지와 곡물의 지배(사직,社稷)를 중시한 농경민족으로 문왕文王대에 은의 주紂를 토벌하고 왕조를 세웠다.
2) 주는 동성同姓 제후들에게 토지와 백성을 나눠주고 토지조사를 통해 조세를 거두는 봉건제를 실시하였으며 이성異姓 제후들과는 혼인 관계를 맺어 결속을 꾀하였다.

8 주왕조의 몰락
1) 봉건제는 왕조 설립기부터 시행된 것이 아니라 동진東進 과정에서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하면서 틀을 갖추었으며 거리가 멀어질수록 중앙의 영향력은 감소하였다.
2) 이민족의 반격으로 영토확장이 한계에 달하자 유력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를 공고히 하면서 소귀족들을 사신私臣으로 편입시켜 왕실의 권위를 탈피한 영주가 되었다.
3) 주왕실은 전쟁을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였지만 이민족에게 대패하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하면서 민심 이반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왕조가 쇠퇴한다.

9 패자覇者의 시대
1) 춘추 13국 중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보인 정鄭은 장공莊公대에 이르면 태산 제사를 주관하여 왕실에 봉사하는 토지를 노魯와 교환하고 조근의 의무도 그만두었다.
2) 제齊의 환공桓公은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 북방 이민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위와 형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 노의 내란을 수습하는 등 주왕실의 질서유지에 힘썼다.
3)진晉의 문공文公은 남방 이민족인 초楚의 북상 위협에 맞서 중원을 보호하고 천토에서 제후들을 모아 존왕尊王을 천명하였지만 이는 명분을 쌓는 수단일 뿐이었다.
4) 초楚는 장왕莊王대에 이르러 진을 꺾고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였지만 존왕의 명분에 얽매이지 않아 중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중원 밖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5) 오吳의 부차와 월越의 구천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들로 차례대로 패자의 자리에 올랐으나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면서 춘추시대의 종말로 이어진다.

10 귀족사회의 붕괴
1) 제후 권력의 빈자리를 채운 대부들 역시 귀족의 일환으로 실무를 등한시하여 점차 늘어나는 영지와 신민들의 직접 통치를 사 계층에게 맡기면서 전국시대를 예비한다.
2) 정의 자산子產과 제의 안영晏嬰 같은 현인재상의 등장은 성문법에 의거한 통치와 위정자와 국가의 이익을 분리해서 보려는 사고방식으로 전국시대를 예비한다.
3) 철제농기구의 보급은 토지 개간의 확대와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으며 개별 세대간의 격차를 유발하여 국가의 조세방식을 노동지대에서 현물지대로 이행시켰다.

11 전국시대의 의의
1) 혈연과 종교(조상신에게 제사 지내는 종묘)가 국가의 이데올로기였던 춘추시대와 달리 전국시대는 군신관계에서 비롯한 충성과 보호가 조직의 최우선 과제가 된다.
2) 수리•관개 사업의 발전은 농업생산력의 증대뿐만 아니라 물자수송로의 역할을 겸하였으며 이에 따라 국가간 상공업 교류가 활성화되고 화폐가 정착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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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중국고대사회의 형성 - 대학고전총서 4, 수정판
이성규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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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해제)
1 머리말

2 저술의 동기와 목적
1) 사마천은 문명의 보호와 전승이라는 표면적인 관점과 사실史實을 통한 정치•도덕 규범 및 왕도의 제시라는 배후 의식을 결합하여 <춘추>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2) 사마천은 천문 지리의 법칙을 연구하는 태사령의 사명감으로서 천도를 지상의 도를 구현하는 당위로서 제시하고 과거와 현재의 정합 관계를 서술하고자 하였다.
3) '이릉의 화'를 겪은 사마천은 울분을 즉자적으로 토로하지 않고 생의 나락에서 길어올린 자아성찰과 선조들의 삶을 거울로써 반추하여 생동하는 역사를 써내려갔다.

3 사료의 비판과 취사
1) 사료로는 옛 선현의 글을 무조건 추종하지 않고 선진시대까지 소급되는 고문 일반을 우선하고, 몸소 전국을 주유하면서 보고 들은 현장성을 가미하여 취사선택하였다.
2) 황실의 비사처럼 실증적 사료가 부재하는 경우에는 사후에 추론된 정황의 재구성이 허구에 가깝지만, 이 또한 당대인들의 이해와 평가를 담고 있으므로 취하였다.
3) 사실史實은 '상근략원'(詳近略遠) 원칙을 준수하고 천하의 존망과 무관한 지엽적 사실들을 배제하며 시대의 맥과 선인의 삶의 성패와 관련된 일화는 채록하여 취하였다.

4 구성과 서술의 특색
사기 서술은 사안의 생동감을 극대화하는 어휘를 배치하여 분위기에서 의미를 이끌어내고, 직설적인 비판보다는 현상 묘사와 주변인의 평가라는 우회로를 이용하였다.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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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 1 - 중국철학의원류
김충렬 지음 / 예문서원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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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철학'의 중국적 정의
중국 사상에서 정의하는 '철학'哲學의 의미는 앎을 통하여 궁극적인 진리에 이르려는 마음가짐과 이를 바탕으로 '덕'德 또는 '도'道를 실천하는 행위까지를 포함한다.
1-2 중국 철학의 특성
1) 중국 철학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주요 과제로 삼아, 만물의 생성•소멸을 주관하는 자연 안에서 인간이 자연의 이치를 닮아가야 한다는 제한적인 과제에 머물렀다.
2) 인간의 궁극적인 역할은 생성하는 자연과 생성된 자연 사이에서 양자의 특성을 함께 지닌 중간자로서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도리를 역사와 문화속에 펴는 일이다.
1-3 중국 철학의 발생과 철학사의 기원 문제
고대 철학은 존재에 대한 이해에 앞서 역사적 경험과 체득을 배경에 깔고 있으며, 이러한 경험과 관찰을 통한 지식의 축적이 고도화되면서 철학적 사유로 승화되었다.
1-4 중국 철학사의 기원과 원류 문제
중국 철학사의 기원과 서술이 모두 유가에 치우쳐 있으므로 그 이면에 가려진 여상의 '권모'權謀와 관중의 패도霸道주의, 그리고 황로사상을 균형있게 조명해야 한다.

2-1 중국 문화의 원경遠景
하대는 '소박한 자연주의의 형성', 은대는 '추상적 신귀 관념의 대두', 그리고 주대는 '도덕적 인문 정신의 계발'이라는 표제로 각 시대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2-2 하대 사상
요는 천문 현상을 파악하여 농경 문화의 기반을 닦았고, 순은 오륜을 제정하여 사회 질서를 정비하였으며, 우는 치수에 성공하여 인간 의지의 가능성을 확장하였다.
2-3 은대 사상
은은 하의 문화를 흡수하여 중국 문화의 원형을 형성하였으니, 자신들의 조상신 숭배 사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천'과 '제'개념의 결합을 통한 천명 사상이 그것이다.
2-4 하•은 사상의 집성
주의 무왕은 홍범 구주를 기반으로 나라를 정비하였으니, 곧 자연물질과 인간 정신, 사회 기관, 역법, 황극皇極의 왕도 원리, 삼덕三德 윤리, 복서, 천문, 운명론이다.

3-1 서주西周 인문 사상으로의 전환
1) 덕을 잃은 정치는 보편적이고 공평무사한 하늘의 명령으로 뒤바꿀 수 있다는 천명사상과 이의 판단 근거로 민심의 향방을 제시한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대두되었다.
2) 하늘의 뜻과 이를 대변한 민심을 살피는 방법으로는 '경'敬과 '덕'德이 있는데, '경'은 반성적 자아의 주체성을 강조한 말이고 '덕'은 '경'의 외적 발현을 이른다.
3-2 주공의 '예악 제정'과 봉건 제도
주공은 혈통의 친소를 등급화한 종법宗法제를 근간으로 천하를 분할하는 봉건封建제를 정착시키고 예로써 친족 상호의 관계를 다듬는 '한 몸같은 나라'를 만들었다.
3-3 서주 말•동주 초의 사회 동요와 반인문 사상
후대로 내려오면서 형제가 분란을 일으키고 친족의 유대관계가 흐려지자 하늘로 대표되는 덕목들의 실효성이 점차 상실되어 민본정치는 허울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4-1 동주의 존왕양이 사상
주 왕실의 권위 약화로 12제후국이 성립되었으며, 이 혼란기에 강대한 이적夷狄 세력들이 중원 진출을 꾀하자 제후국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사상 아래 단결하였다.
4-2 관중과 <관자>
관중은 제나라의 패도를 실현시킨 현실 정치가로서 주공의 도덕 명분론에 우선하여 경제적 욕구의 충족을 내세웠지만 양자의 통합 아래 천하질서를 세우려 하였다.
4-3 관중의 철학 사상
관중은 도덕과 실용을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천'과 '지'의 병렬적 관계처럼 경세위민이 뒷받침되어야 도덕과 예법이 널리 실행될 수 있다고 보았다.
4-4 관중의 사회 사상
관중은 하늘을 신귀가 아니라 만물의 순행 원리로 간주하여 천시•지리•인작의 조화를 설파하였으며, 그의 부국강병책은 약자를 돕고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방책이었다.
4-5 중국 철학사에서 관중의 위상
제자 백가가 정치에 뜻을 두기는 했으나 순수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 반면 관중의 실용철학은 철저히 현실에 기반하였기 때문에 후대에 법가로 편입되는 불운을 겪었다.

5-1 서주 말에서 춘추 중기까지 사상의 흐름
천자정치가 대부大夫정치로, 다시 배신陪臣정치로 분화하면서 '일'에서 '다'로, 다시 '개별'로의 독립처럼 하늘과 신귀의 절대성이 퇴색하고 인간의 주체성이 부각되었다.
5-2 반전통 사상의 태동과 그 특징
(고전에 나온 5-1의 각종 예시)
5-3 정자산의 정치 개혁과 철학 사상
1) 자산의 개혁은 정치 비판을 장려한 '입방정'立謗政, 국가의 법을 반포한 '주형서'鑄刑書, 토지 사유화를 확대한 '작봉혁'作封洫, 조세를 정비한 '작구부'作丘賦이다.
2) 예는 종교 의식에서 비롯하여 도덕 행위의 준칙이 되었고, 정치 제도와 결합된 사회 규범의 총합을 의미하였는데, 자산은 이를 자연과 조화된 총체적 길로 승화시켰다.
5-4 자산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반응
유가는 자산에 대해 위민爲民을 실천한 이상적 정치가로 보았고, 도가는 그의 인위적인 조치가 세상을 더욱 어지럽히리라 보았으며, 법가는 그의 엄격함만을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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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평전 - 권위와 신화의 옷을 벗은 인간 공자를 찾아서
안핑 친 지음, 김기협 옮김, 이광호 감수 / 돌베개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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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500년의 세월
1) 공자 시대의 현인들이 賢•尙•德 등의 가치 우위적인 개념어들의 정의를 새롭게 내린 이유는 혈통 중심의 사회질서를 깨뜨리기 위해서였다.
2) 공자는 제후들과는 정치 원리를, 대신들과는 인간 본성을 토론하였고, 서민들을 성심으로 대하였고, 은자들을 자기 비판의 거울로 삼았다.

2. 우울한 출발
(앞의 2권과 반복되는 내용)

3. 공자 시대의 정치
1) 공자에게 주공은 이상화된 정치가였고, 주나라는 이상화된 국가였다. 즉 도덕을 체현한 군주(와 그를 보필하는 바른 신하)와 그가 다스리는 나라인 것이다.

4. 젊은 길동무들
1) 자공은 주어진 상황에 체념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기민함을 가졌으므로 공자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주제의 다른 측면을 이끌어내곤 하였다.
2) 안회는 영민함만으로 도를 얻으려 하지 않고 높이 바라보고 깊이 파고드는 자세와 사라질 듯 멀어지는 진리를 향한 포기하지 않는 의지로 깨달음을 구했다.
3) 자로는 信•直•勇•剛을 갖춘 우직한 사람이지만, 공자는 그의 이러한 덕목들이 배움의 자세를 겸비하지 않으면 그른 길로 접어들 수 있음을 경계하였다.

5. 고달픈 유랑
1)위나라는 노나라와 兄弟之國의 관계였기 때문에 공자는 그곳에서 정치적 부름을 기대하였지만 영공은 예법과 덕치보다 부국강병에 관심이 많았다.
2) 세상의 외면에 대해 자로는 스승의 모자람을 탓하고, 자공은 세상의 그릇에 스승이 맞추기를 바랐으나 안회는 스승의 도가 세상보다 넓음을 자부하였다.
3) 자신의 도를 널리 펼 수 없는 세상임을 알면서도 공자가 관직을 구하는 일에 부단히 노력한 것은 흙탕물에 뒹구는 일의 의로움을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6. 돌아오는 길
1) 염구는 전쟁에 임하여 승리하고 전부田賦를 시행하여 주군의 곳간을 넉넉히 채웠지만 이를 시행하면서 백성을 헤아리지 않아 의로움을 희생하였다.
2) 후진後進 제자였던 자장은 도덕적 명제들을 탐구하면서도 출세지향적인 반면, 자하는 사소한 가르침을 두텁께 쌓아올려 배움을 이루고자 하였다.

7. 가르친다는 일
1) 만년의 공자는 스승의 직분에 충실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敎)이나 말로 하는 것(訓)이 아니라 빛을 비추는 일(誨)이었다.
2) 예란 형식의 엄격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격식을 지키려는 마음의 바탕에 있는 것이므로 매사에 양 극단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는 성찰 그 자체이다.

8. 삶과 죽음의 예법
(본문 인용)

9. 두 사람의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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