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선진시대 중국의 역사
가이즈카 시게키 외 지음, 배진영 외 옮김 / 혜안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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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설의 성왕聖王
중국의 고대 역사는 인간 이전의 세계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을 유가적 전통 아래에서 학문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덕의 체현자로 묘사된 황제로부터 시작된다.

2 원原중국인과 그 문화

3 농경사회의 성립

4 신석기 시대의 생활

5 고대 왕조의 탄생

6 왕과 제사
1) 갑골문을 이용한 복점에서 조상은 초기에는 벌을 내리는 영귀靈鬼였다가 후손을 돕는 친밀한 존재로 바뀌고, 다시 신적인 존재로 변모하면서 '제'帝로 불리게 된다.
2) 제帝는 형체가 없는 신으로 기복을 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통제불가능한 두려운 존재였으며, 은殷이 복속한 종족들의 신들은 자연신으로 제帝의 하위에 놓인다.
3) 은殷왕조는 많은 혈족들의 느슨한 집합체로서 왕조 교체기마다 변동하는 왕권의 위세와 종족들의 세력 분포 때문에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계승제도를 바꾼다.

7 주周왕조의 흥기
1) 주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라는 명칭에서 보듯이(稷:수수) 토지와 곡물의 지배(사직,社稷)를 중시한 농경민족으로 문왕文王대에 은의 주紂를 토벌하고 왕조를 세웠다.
2) 주는 동성同姓 제후들에게 토지와 백성을 나눠주고 토지조사를 통해 조세를 거두는 봉건제를 실시하였으며 이성異姓 제후들과는 혼인 관계를 맺어 결속을 꾀하였다.

8 주왕조의 몰락
1) 봉건제는 왕조 설립기부터 시행된 것이 아니라 동진東進 과정에서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하면서 틀을 갖추었으며 거리가 멀어질수록 중앙의 영향력은 감소하였다.
2) 이민족의 반격으로 영토확장이 한계에 달하자 유력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를 공고히 하면서 소귀족들을 사신私臣으로 편입시켜 왕실의 권위를 탈피한 영주가 되었다.
3) 주왕실은 전쟁을 통해 왕권강화를 꾀하였지만 이민족에게 대패하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하면서 민심 이반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왕조가 쇠퇴한다.

9 패자覇者의 시대
1) 춘추 13국 중에서 가장 먼저 두각을 보인 정鄭은 장공莊公대에 이르면 태산 제사를 주관하여 왕실에 봉사하는 토지를 노魯와 교환하고 조근의 의무도 그만두었다.
2) 제齊의 환공桓公은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 북방 이민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위와 형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 노의 내란을 수습하는 등 주왕실의 질서유지에 힘썼다.
3)진晉의 문공文公은 남방 이민족인 초楚의 북상 위협에 맞서 중원을 보호하고 천토에서 제후들을 모아 존왕尊王을 천명하였지만 이는 명분을 쌓는 수단일 뿐이었다.
4) 초楚는 장왕莊王대에 이르러 진을 꺾고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였지만 존왕의 명분에 얽매이지 않아 중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중원 밖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5) 오吳의 부차와 월越의 구천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들로 차례대로 패자의 자리에 올랐으나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면서 춘추시대의 종말로 이어진다.

10 귀족사회의 붕괴
1) 제후 권력의 빈자리를 채운 대부들 역시 귀족의 일환으로 실무를 등한시하여 점차 늘어나는 영지와 신민들의 직접 통치를 사 계층에게 맡기면서 전국시대를 예비한다.
2) 정의 자산子產과 제의 안영晏嬰 같은 현인재상의 등장은 성문법에 의거한 통치와 위정자와 국가의 이익을 분리해서 보려는 사고방식으로 전국시대를 예비한다.
3) 철제농기구의 보급은 토지 개간의 확대와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으며 개별 세대간의 격차를 유발하여 국가의 조세방식을 노동지대에서 현물지대로 이행시켰다.

11 전국시대의 의의
1) 혈연과 종교(조상신에게 제사 지내는 종묘)가 국가의 이데올로기였던 춘추시대와 달리 전국시대는 군신관계에서 비롯한 충성과 보호가 조직의 최우선 과제가 된다.
2) 수리•관개 사업의 발전은 농업생산력의 증대뿐만 아니라 물자수송로의 역할을 겸하였으며 이에 따라 국가간 상공업 교류가 활성화되고 화폐가 정착단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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