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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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가 국민을 동원하는 가장 전형적인 무대가 바로 전쟁터이다. 전쟁은 국민이 국가의 실체를 자각하고,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며, 국가를 위해 피를 흘리도록 요구한다. 여기에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와 '국가적 지도자(천황)'라는 "국가의 현현(顯現)"을 덧붙이면, 강력한 현실성을 부여받은 상징 조작이 구체적인 행위를 지휘하는 통제실이 된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국가는 살아남았다. '천황'은 전범의 혐의를 벗었고, 전쟁을 수행한 국가기구와 집행자들은 최소한의 손실만 안고 상층부로 귀환했다. '열렬한' 군국주의자가 '열렬한'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은 정념이 인간 본성의 근본 기제임을 감안하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부정적인 비판보다 긍정적인 위안이 매력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과거에서 열광을 소진하고 남은 잿더미를 안쓰러운 자신들의 처지와 동일시했다. 전쟁 자체가 가장 큰 '희생의 강요자'이며, 일본이야말로 현대 전쟁의 가장 전형적인 희생자라는 관점은 자신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가한 희생의 무게를 외면하도록 허용했다. 이 '적극적인 소극성'이야말로 전쟁 중에도 전후에도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강력한 이상주의로 무장한 미군정의 열의 역시 역설적으로 상황의 역전에 기여했다. 일본에 주어진 '자율'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의 선택을 고심하다가 길을 잃어버렸고, 일본에 부과된 '강제'는 자신이 놓는 길이 더디게 진척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파괴를 일삼았다. 미래는 불확실했고, 현재는 불투명했다. 폐허가 백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오래지 않아 명확해졌다.

이러한 역사의 부정적인 순환은 회의주의를 불러오며, '적극적인 소극성'을 정당화하는 주요 요인이다. 그러나 역사가 그저 반복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얼룩진 것이라도 현재의 평화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도화된 이념이 가장 단단한 위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아베 정권이 헌법9조를 폐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방송에서 천황은 절대로 `항복`이라든가 `패배`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
"견디기 힘듦을 견디고 참을 수 없음을 참아라." 이것이야말로 이후 몇 달 동안 수도 없이 인용될 말이었다.
이 칙어에서 천황은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 애썼다. 그것은 바로 굴욕적인 패전 선언을 일본의 전쟁 수행과 시공을 초월하는 천황의 도덕성에 대한 다른 식의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33)

전시의 미사여구들은 전후 목표와 관계가 있을 경우 쉽게 변형 가능했다. 그 표현들은 대체로 전후 재건에 알맞게 건설적이고 이상적이었기 따문이다. 일본인들도 `군국주의와 침략 만세!`를 외치며 전쟁을 향해 행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평화와 안보, 공존과 공영, 일본과 아시아 전체의 밝은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선언한 것이다. 217)

교조주의적 좌파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 인민 전체가 뛰어난 영도자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는 데 한몫했다.
...
맥아더의 GHQ, GHQ의 개혁 과제를 따라야 했던 구 지배층, 일본의 `진보적 문화인`, 일본 공산당 모두가 실제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천황제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었다. 305)

미국인들은 그를 설득하여 그의 이름으로, 또한 그의 허락으로 이루어진 억압과 폭력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인정하지 않게 했다. 황실 측근 일부에서 그를 퇴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SCAP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실 점령군은 천황을 성전으로부터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한가운데 자리에 앉혀 버린 것이다. 356)


사토 다쓰오는 헌법 번역 마라톤이 끝나자마자 이 작업을 기초하기 시작하여, 민정국에 대해 일견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요구, 즉 법적 보호의 제공은 헌법의 다른 부분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므로 중복이고, 따라서 그 삭제를 요청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일본인들이 말을 조금 바꿔 외국인을 법적 보호로부터 제외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미국인들은 이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고쿠민`을 `모든 일본 국적자(all nationals)`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정부는 대만, 특히 조선 식민지 출신의 수십만 신민들에 대해 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부정하는 데 성공했다. 508-510)

난바라의 전향은 그가 기리며 추모한 진리를 추구했던 학생들처럼 자신도 일본 지도자들에게 속았다는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다. 항복 후에 가장 많이 사용된 수동 표현은 `다마사레타(속았다)`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난바라의 감정은 이 점에서 일반 국민들의 감정과 완전히 일치했다. 심지어는 전시에 그토록 열성적으로 선전 선동을 일삼던 자들까지도 자기들의 전쟁 책임을 세탁하는 세제로 이런 유의 기만적 표현을 동원했다. 638-9)

하급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도 `기세이(희생)`를 자주 언급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국가를 위한 고귀한 희생자`이거나 `피로써`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거나 혹은 `패배`나 `일본의 재건`, `일본 민족`,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희생시킨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로 생각이 통일되지 않았다. 677)

(전쟁 포기라는) 이상을 헌법이나 법률로 명기한 예는 일본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재무장을 둘러싼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법률과 헌법에 의한 보증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 하는 기본 문제, 평화와 전쟁이라고 하는 기본선이라는 원점으로 논의가 되돌아와 있었다. 이것은 다른 국가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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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4
후지이 다케시 지음 / 역사비평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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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국민적 민족공동체'라는 개념 안으로 노동계급의 정념을 집약하여 그들을 행동하는 정치적 주체로 재탄생시키며, 타자에 대한 배제와 무력 행사를 기반으로 삼는다. 민족자결주의에 고취된 제3세계는 파시즘을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수단이자 민족의 역량을 강조하고 일체화를 달성하는 기술로 수용하였으며, 민족정신의 함양을 어떠한 이념이나 체제보다 우선시했다.

한반도의 민족주의 일부에서도 파시즘을 자주적 민족주의의 방편으로 적극 받아들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결성한 이범석과 거기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안호상이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국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대변되는 '경제적 제국주의'와 '영토적 제국주의'를 지양하고 민족 고유의 정신 아래에서 민족의 역량을 결집한 공동체였다.

이들은 민족을 피로 맺어진 자연적 산물이자 역사적 고난을 공유한 공동체로 규정하면서, 좌우를 모두 포섭하고자 노력했고, '지행합일' 사상을 강조하여 실천의 근간이 되는 육체를 통제하고 생활 전반에 대한 군사적 규율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제3의 길로 포장된 파시즘이 냉전을 주도하는 현실 권력의 견제와 감시 아래에서 피어나리라는 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이들이 "민족의 통일과, 국민 균등의 복리, 세계 평화에 기여"라는 원대한 구상으로 제시한 '일민주의'는 민족의 허약한 역량과 냉전 체제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결여한, 머리만 웃자란 갓난아기의 꿈이었다.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순진한 자기 중심주의를 삼킨 것은 미군정의 위력을 적극 수용하고 이용하면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해가던 거대한 산, '이승만'이었다.


1960년대에 제3세계 국가들에서 나타난 이데올로기적인 경향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nationalist socialism)"라고 표현되기도 했는데, 30년대부터 형성된 흐름이 냉전이 시작된 뒤에도 제3세계에서 지속된 것이다. 흔히 제3세계주의(third worldism)라 불리는 흐름은 대체로 좌익적 경향이 강한 것이었지만, 민족의 일체성이나 지도자를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파시즘과도 공통적인 지점들이 존재했다. 29)

정신 훈련 중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 승강기식인데, 입소한 날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매일 아침저녁 국기와 단기의 승강기식을 거행했으며 음악에 맞추어 애국가, 단가를 합창했다.
...
(이범석은) 국기 승강식이 무질서하고 산만한 것은 "국기에 대한 숭경심, 따라서 국가 관념과 민족의식이 박약하다는 것, 즉 민족적 결속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들어내는 것"이라며 국기에 대한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37)

양우정은 스스로의 전향 경험을 떠올리면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데, 1930년대에 전향을 선언했을 때와 다른 것은,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족을 국가와 일치시킬 수 있는 상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전향했을 때 찾지 못한 `지도자`가 드디어 주어진 것이다. 양우정의 전향은 `지도자` 이승만을 매개로 완성되었으며, 1930년대에 천황제를 매개로 고바야시 모리토가 전향자운동을 추진했듯이, 양우정 역시 이승만을 앞세우면서 전향 공작에 앞장서게 된다. 237)

양우정은 일민주의의 핵심인 동질성을 자본주의 비판, 즉 자본주의의 산물로서의 계급 분열에 대한 비판과 그 변혁에서 찾으려고 한 데 반해, 안호상은 그 동질성을 변혁을 통해서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핏줄`이라는 이미 주어진 것에서 찾는 것이다. 일민주의가 내포할 수 있었던 변혁적 요소는 안호상에 의해 거의 제거되고 말았다. 265)

반공주의 논리의 변화 역시 족청계의 부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족청계의 반공주의는 민족주의를 통해 내부적 계급모순을 `(적색)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로 치환시키는 파시즘적 논리에 의한 것이었는데, 족청계 제거 직후부터 반공주의 논리로서 오히려 `제3세력`과 결부될 수 있는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진영 논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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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대륙 - 20세기 유럽 현대사 커리큘럼 현대사 1
마크 마조워 지음, 김준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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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톨릭의 완고한 지배가 풀려난 땅에서, 신의 영역에 진입한 과학기술을 찬미하고, 이성을 단련하여 사회의 계몽을 추구하며,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권장하고, 각자의 능력에 걸맞는 사유재산을 축적하는, 자유의 모든 정의(定義)를 누리는 '개인'이 바로 19세기 자유주의가 바라본 유럽의 자화상이었다.

모든 개인들의 이기적인 행위를 '보이지 않는 손'이 아름답게 조화시켜 줄 것이라는 이 유토피아적 환상은 20세기 목전까지 유럽 대륙을 견인하였지만, 신의 손길마저 지워버린, 온전히 인간적인 세계의 최종 기착지는 전진하는 욕망이 충돌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거기서 흘러내린 죽음의 강이었다.

환희에서 절망으로 몰락한 개인들은 국가의 구원을 열망했다. 대중의 열광을 먹고 돌진하는 국가는 파시즘과 볼셰비즘으로 내달렸고, 대중의 냉소를 피하고자 주저하는 국가는 자유주의의 뒷자락을 붙잡거나 사회민주주의라는 타협을 시도했다. 그 와중에 양 진영의 품 속에서 자라난 것은 민족주의였다.

평화가 감도는 현재의 눈으로 되돌아보면 돌진하는 국가의 얼굴은 호전성과 강압성으로 얼룩져 있다. 민족주의는 피의 상징이며, 분쟁의 씨앗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확실성 속에서 삶을 지켜야 했던 당대인들에게 무너지는 하늘을 붙잡고 군림하는 국가야말로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었다.

유럽 대륙은 이처럼 프랑스 혁명 이래로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가치를 구현한 낙원이 아니라, 어둠 속의 절망을 간신히 이겨내고 일어선 상처 가득한 역사적 대지이다. 이 잊혀진 실패는 60년이 넘도록 이념도 물질도 압축적으로 겪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저 관망해도 좋은 타인의 역사가 아니다.


파시즘이 자유주의와 확실히 구별되는 지점은 권위주의 국가를 드러내 놓고 옹호한다는 점이다.
...
파시즘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공격하면서 혁명적인 사회적 기획을 제안했다. 그것은 삶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구분하는 부르주아적 방식을, 완전한 경험이라는 `전체주의적` 정치관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36-7)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는 소수였다. 동유럽의 역사는 민주주의가 인민 동원의 결과가 아니라 베르사유 체제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막판에 안겨 준 선물임을 말해 준다. 투쟁하지 않고서 획득한 것을 상실하게 될 때 사람들이 이를 순순히 따랐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럽의 정치적 전통에서 민주주의의 뿌리가 깊지 않다는 사실은 반자유주의 체제들이 왜 그렇게 별다른 저항 없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50-1)

"정치의 신성화"는 기념 건축물이나 대규모 집회 장소, 선전을 위한 전시와 출판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다.
...
이런 과정을 단순히 사람들이 강력한 정권의 검열과 조작에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도부와 국민이 공유하고 또한 함께 주장했던 가치와 관련된 것이다. 각 국가마다 일국 사회주의 건설, 독일 민족 공동체, 또는 이탈리아 제국의 건설 등과 같은 유토피아적 기획들에는 새롭고 통일된 국가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었고 실제로 인기가 많았다. 63-4)

파시스트 복지국가는 대중 정치 시대에 인민들의 충성을 확보하려면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교훈을 민주주의자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121)

전 유럽 대륙에 걸쳐 1920년대에 나타났던 모더니즘적 예술 사조들–국제주의나 기계화 같은–은 유기체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민족주의적 사조에 자리를 내주었다. 합리주의는 본능에 대한 강조로, 개인주의는 공동체적 삶으로, 머리는 몸으로 대체되었다.
...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기계•미래주의•과거의 파괴를 숭배하면서 시작되었으나, 1930년대에 가서는 고전주의•역사•토지를 끌어안게 되었다. 140)

1930년대의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몰락과 대조되는 성공적 대안이자, 현대사회의 경제적 난관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보여 준 본보기였다. 공산주의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차르제국을 몇 년 만에 주요 산업국가로 변모시켰다. 그것은 실제로 작동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167)

1943년 무렵, `유럽인`이라는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추축국에 동조했던 사람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레지스탕스는 다른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사회경제 정책과 애국심이라는 동기를 가졌을 뿐, 그들의 지평은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전쟁은 연방주의를 자극한 만큼이나 동시에 민족주의 정서를 강화했다. 결국, 애국주의가 `유럽주의`보다 훨씬 중요한 저항의 동기였던 것이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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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과정 2 한길그레이트북스 34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 한길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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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봉건제와 절대주의의 성립에 대하여 서술한다.

- 봉건제
중세의 세력구도는 중앙권력(왕)과 지역의 독립적인 영주들(공작, 백작, 남작 또는 왕이 파견한 관리들과 그의 후손들)이 봉토를 둘러싸고 벌이는 긴장 관계의 연속이었다. 낙후된 운송 수단과 경제 조직의 미비는 중앙권력의 권한 행사를 막고, 원거리 지역의 통치자들에게 보상으로 지급된 토지의 생산물을 조세로 회수하지 못하게 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이는 왕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켰으며, 지역 통치자들의 영지 세습은 이를 더욱 부추겼다.

왕권의 원천은 오직 무력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들은 자신의 소유는 물론 봉신들에게 나눠줄 토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전쟁을 계속 일으켰다. 전쟁에 따른 소小영주의 겸병은 소농 계층을 분화시켜 막 생겨나고 있던 상업 도시에 인적 자원을 공급하는 단초로 작용하였으며, 제3의 신분인 자유민을 점차 형성시켰다. 상업의 발달은 유동적이고 통일된 교환 수단인 화폐 수요를 늘리고, 육로를 이용한 운송수단의 확대와 내륙도시의 발전을 가져왔다. 중앙과 지역 할 것 없이 상류층은 점차 시민계급의 부에 의존하게 된다.

- 절대주의
점진적인 상업화는 소수의 대영주에게 집중되는 권력의 규모와 밀도를 보장해주는 원천이었다. 도시를 장악한 대영주들은 안정적으로 세금을 수취하고, 장원의 잉여생산물을 도시에 판매하는 순환 과정을 통해 화폐 경제에 자연스럽게 편입되면서 부를 축적한다. 축적된 재산은 상비군의 편제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조세권과 군사력의 독점이라는 권력의 핵심 기제를 의미하며, 통치 기구의 정비와 법률 제정으로 행정의 일원화를 촉진한다.

그렇지만 절대주의는 근대 국민국가 수준으로 폭력을 독점하는 통치 기구와 이데올로기 주입 수단을 완비한 체제가 아니었으며 중앙권력과 귀족, 제3신분간의 권력 분화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오히려 이 시기는 권력이 엇비슷하게 분화된 집단들의 이해가 상충되어 결정적인 타협이나 한쪽의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왕이 위태로운 균형의 조정자 기능을 수행한 시기였다. 즉, 절대주의는 사회의 여러 집단들간의 긴장 관계에 구속된 존재였으며, 보편적 영역으로서의 '국가'가 수립되는 과도기의 정치 체제였다.


기사와 관료들에게 땅을 제공해야만 할 필요성, 새로운 정복전쟁이 없는 한 줄어들게 마련인 왕의 소유지, 평화시기에 중앙권력의 약화 경향 등 모든 요소들은 `봉건화`란 커다란 과정 자체의 부분과정들이다. 72)

11세기 초에는 원래 두 계급의 자유인, 즉 기사들이나 귀족들 그리고 성직자들만이 있었고 그 밑으로는 농노, 소작농이 존재했다. `기도하는 자들, 싸우는 자들, 일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2세기가 지난 후, 정확히 말하자면 1세기 반이 지난 1200년경—개간이나 식민지 확장전쟁처럼 이 운동도 1050년부터 가속화되었기 때문에—일련의 수공업자 거주지인 도시공동체 코뮌은 고유의 권리와 법, 특권과 자율성을 획득한다. 제3의 자유인 신분이 등장한다. 99)

대다수의 도시 자유인들이 노동에서 소외되었던 고대의 노예사회와는 정반대로 서구사회에서는 자유인의 노동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종속성은 결국 비노동계층인 상류층을 분업의 순환과정에 끌어들인다. 111)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독점 메커니즘의 게임에 의해 종속적 처지에 떨어지면 질수록 종속된 사람들 전체의 사회적 힘은—그들 개개인의 사회적 힘은 아니라 하더라도—소수의 또는 단 한 사람의 독점자와 반비례하여 더 커진다.
...
달리 표현하면 독점적 지위가 포괄적이면 포괄적일수록 그리고 그것의 분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 독점적 소유는 독점자의 기능분화적인 기구의 중앙관리인이 되어 다른 관리인들보다 아마 좀더 강력할지는 모르지만 결코 그들보다 더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게 되는 지점을 향해 나아갈 개연성이 그만큼 더 확실하고 커진다. 175-6)

사회의 각 부분들 간의 대립이 의식적 투쟁의 형식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
한 가지 사례를 들자면 중세 말기에 대부분의 봉건 기사영주들을 사회적으로 추락시킨 것은 시민계급의 의식적 공격이라기보다 그 당시 확산중에 있던 금전화와 상업화의 메커니즘이었다. 251)

한 군주가 다른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영토의 지배권을 장악한다. 토지소유권은 상업화되고 금전화된다. 이 변화는 한편으로 왕이 전국의 세금을 징수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독점하게 되고 따라서 그가 가장 많은 수입을 통제하게 되는 사실에서 표현된다. 땅을 소유하고 분배해주는 왕으로부터 돈을 통제하고 돈으로 급여를 주는 왕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물물경제사회에서 군주를 속박하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게 해주었던 것이다.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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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과정 1 한길그레이트북스 9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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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태로 타인들과 함께 살아갈 것을 강요받은 사람들은 타인들의 행동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행동규율이 점차적으로 엄격해지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더욱 강하게 요구된다.
...
지금 사회의 개혁과 함께, 인간관계의 새로운 토대 위에서 천천히 변화가 시작된다. 즉 자기통제의 압박이 증가하는 것이다. 214-5)


서구의 중세와 근대의 경계선에 놓인 '문명화'의 한 가지 측면은, 타인의 존재를 인식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제 개인은 사회적 태도를 스스로 규율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되었으며, 타인과 대면하는 자신을 재규정–본성을 억누르고 예절의 가면을 쓴–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사교 공간뿐만 아니라 사적 공간에서의 자기 통제는 당연시되던 삶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적극적인 절제의 의미로 사용된다. 인간 고유의 성취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자신도 '미개'와 결별한 '문명화'를 요구받게 된 것이다. '문명화'는 호의의 교제만이 아니라 공격성의 표출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어 사회의 안정성에 기여한다.

이것은 단순히 습속의 개선만이 아니라 중앙 집권 국가와 과학 기술의 발전이 조성한 개인들의 이념적 일체감이라는 사회 체제의 변화를 동반한다. 즉, 개인의 발견은 개성을 존중하는 체제의 출현이 아니라 분업화된 상업의 발달을 뒷받침하는, 그렇지만 집단 규율을 스스로 내면화한 순응하는 개인을 요구한 시대의 반영이었다.


프랑스의 궁정적 개혁지식인들은 오랫동안 궁정의 전통 속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좀더 나아지기를, 변화를, 개혁을 원했다. 루소와 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그들이 내세운 이상과 모델은 지배적 이상, 모델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들을 개량한 것이었다. `잘못된 문명`이란 표현 속에 이미 독일운동과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
독일의 시민계급 지식인이 주창하는 `교양인`과 `인격`의 이념과는 달리, 그들은 `문명인`에 전적으로 다른 인간형을 대립시키지 않고, 궁정적 모델을 받아들여 그것을 변형시키려고 한다. 155-6)

프랑스에서 시민계층은 이 당시 벌써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독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독일 지식인층이 정신과 이념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모든 인간적 문제들과 더불어 사회적•경제적•행정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들도 궁정귀족 지식인층의 사상적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독일의 사고체계는 프랑스와 달리 순수한 연구였으며, 그들의 사회적인 활동장소는 대학이었다. 159)

에라스무스의 견해는 그 시대의 몇몇 소수의 저자들과 함께 예법서 전통 가운데서도 예외에 속한다. 왜냐하면 일부 매우 오래된 규정과 규칙들의 설명 속에 개인적인 열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시대의 징표`이며, 사회적 변동의 표현인 동시에 비록 맞지 않는 개념이긴 하지만 우리가 보통 `개인화`라고 부르는 것의 징후이다. 203)

이제 이 자연스러움에 인간관찰이 덧붙여지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타인에 대한 고려가 첨가된다. 218)

이 시대(중세)의 문헌들을 펼쳐보기만 하면 언제나 비슷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즉 우리와는 다른 감정구조를 가진 삶, 안정도 없고 미래를 위한 장기적 예측도 불가능한 존재들이 눈에 띈다. 이 사회에서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못했던 사람, 열정의 유희에서 사나이답게 행동하지 못한 사람은 수도원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세속적인 삶에서 그는 패배자였다. 이와는 반대로 후대의 사회에서는, 특히 궁정에서는 자신의 열정을 억제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여 `문명화`될 수 없었던 사람이 패배자였다.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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