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지음, 류한수 옮김 / 지식의풍경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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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목 Russia's War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본 저서는 소련의 시각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결정지은 독소 공방전의 전모를 살펴보고 있다. 스탈린은 자신의 조국이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여전히 각지에 암약하고 있는 반反혁명 세력들과 서구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 전복 위협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판단하고,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항상적 동원 상태를 유지하는 '군사적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매진했다.

그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군수 산업화'와 '농촌 집단화'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밀고 나아갔다. 그에게 자신의 신념을 오염시키고, 음모를 꾸미는 모든 집단은 박멸하고 말살해야 할 병균과 다를 바 없었다. 음모와 숙청, 테러와 기아, 추방과 강제 노동이라는 국가 테러에 짓눌린 인민들은 자신들이 일군 국가가 정교해질수록 더욱 그 그물에 걸려 미동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

그때 히틀러가 밀고 들어왔다. 저질 인종 유대인과 오염 국가 볼셰비키를 절멸시키기 위한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실체와 가상을 넘나드는, 결코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으며, 오직 '절멸시키려는 자'와 '살아남으려는 자'가 각자의 인민들을 국가 체제 안에 갈아넣어 만든 대규모 살육전이었다. 양자 모두 굴복을 생각하지 않았고, 꿈에서도 패배를 떠올리지 않았다. 자욱한 포연은 가시지 않았고, 생명은 다시 피어나지 않았다.

소련은 압도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독일의 침략을 이겨냈다. 그것은 지속적인 병력의 충원, 자본주의 국가의 원조, 군사 전략의 현대화, 군수 산업의 본격 가동 등이 맞물린 결과였다. 소련은 공식 집계로만 2700만 명을 희생시키고 살아남았다. 인민들은 '소비에트 연방'과 '공산주의'가 아니라 '러시아'와 '조국'을 위해 싸웠지만, 전후에 국가 '사회주의'에서 '국가' 사회주의로 이행해 나아가는 길에는 파멸을 이겨낸 인민의 자리가 없었다.



경제가 탈바꿈하지 않았더라면, 1941년에 붉은 군대는 광대한 농민 인력에 의존하는 허약한 군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에 공업에서 일어난 변화로 1941년 독일의 침입 후에 이루어진 총동원이라는 요구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계획 입안자, 과학자, 공학 기술자, 숙련 노동자들이 배출되었다. 현대화 강행으로 인해 드러난 약점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 정책이 없었더라면 소련이 독일의 공격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53)

소련과 벌이는 전쟁을 히틀러는 페어니히퉁스크리크(Vernichtungskrieg), 즉 말살전으로 규정했다. 그가 볼 때, 소련은 독일 문명과 유럽 문명의 주적인 유대인, 볼셰비키, 슬라브 족의 순수 집약체였다. 123)

1942년과 1943년 소련의 군사적 소생은 난타당한 공업 경제의 회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련의 전쟁 수행 노력은 오직 1941년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지역에서 기계, 설비, 인력이 극히 경이로운 대탈출을 했기에 구원을 받았다. 235)

(서방의 원조 중에) 아마도 틀림없이 가장 결정적인 이바지는 무리한 하중이 가해지던 소련 철도망에 대한 공급일 것이다.
...
그 같은 규모로 외국의 원조를 받았기에 소련은 자체 생산을 기계류, 물자, 또는 소비품보다 전선용 장비 공급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서구의 원조가 없었다면, 침공을 받은 뒤 더 궁색해진 경제로 더 부유한 독일 경제가 전쟁 내내 이룩한 그 어떤 것도 능가하는 엄청난 양의 탱크, 대포, 비행기를 생산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270)

스탈린에게 1945년의 승리는 하나의 역설이었다. 소련의 정치 선전이 여러 해 동안 틀림없는 암흑의 세력이라고 주장한 적에게 거둔 완전한 승리와 스탈린이 동일시됨으로써 소련 국민 수백만 명에게 그를 신성에 접근하는 그 어떤 것으로 바꾸는 개인 숭배가 일어났다. 387)

전쟁 수행 노력은 단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체제에 반항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만 지탱되지 않았지만, 소비에트 국가, 그 지도자, 당의 산물도 아니었다. 두 요소가 상대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독일의 공세가 부과한 상호 필연성으로 말미암아 한데 결합되어 불안정하게 공생하면서 작동했다. 대가를 더 적게 치르고, 더 인간적으로 덜 억압하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지 않고도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데 의심을 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소련이 치른 전쟁의 비극이었다. 고통받은 한 민족의 희생이 승리는 가져왔지만 해방은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다. 상실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승전의 순간에.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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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케빈 패스모어 지음, 강유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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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파시즘의 기원은 하나 혹은 여럿의 사회에 침투하는 사유가 하나의 필연적 과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사적 우연과 시대적 제약을 관통하고 살아남은 질긴 생명력의 구조물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대 갈등이 기대만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소멸되지 않고 반복, 변주되는 현실의 한 측면을 설명해주며, 집단 전체가 겪는 직접 체험이 무의식에 남기는 상처란 쉽사리 아물지 않고 계속 자라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개인과 집단 차원 모두에서 정신과의 대면을 둔감하게 만들며, 둔감해진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생생한 유사 체험을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18세기가 가동한 산업화의 자장 안에 머무르고 있다. 소수 엘리트와 다수 대중, 현상 유지와 질서 전복의 어디에도 해답은 기거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무미건조한 제도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불러오는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라 다수의 의지가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군말없이 뒤따르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앎은 삶을 재단하는 일에 대체로 무력하며, 바이러스를 색출하는 신중함이 곧장 과감한 투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의지와 이성을 대립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의지와 이성을 혼융하려는 충동을 넘어서지 못한다. 문제는 방법론이 아니다. 전간기를 휩쓸고 지나가는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열정의 무게에서 파시스트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헌신'과 과학기술의 결합은, 중세 천년을 지배한 강박적 믿음의 무게를 불과 수십년만에 초월할만큼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파시즘은 진리를 상정하고 도덕의 회복을 내세우는 각종 정치적 활동이야말로 자신이 내세우는 가치와 가장 멀리 서 있다는 명백한 역사적 반증이다. 언어는 솟구치는 의지의 열정에 쉽게 타오르고, 냉혹한 합리성의 제단 위에 모든 가치를 올려놓는다. 그 무대에 등장한 선동가는 오셀로의 불안을 충동질하는 이아고이다. 외부에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내부를 지향하는 그의 언어는 사회적으로 제도화될 때 파멸적인 위력을 동반한다. 재에서 태어난 불사조의 숙명은 오직 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파시즘은 전간기 유럽과 그 시대의 사회적 갈등이라는 특정한 맥락—제1차 세계대전과 지식인들의 논의라는 유산(특히 인간사회와 국가들 간의 관계를 자연법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의 흔적을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파시즘은 일단 생겨나면 전혀 다른 환경에서도 잠재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파시즘이 거의 수정되지 않은 형태로 다시 나타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60)

대다수의 엘리트들이 세기의 변환기에 민주주의가 발전하며 `대중의 시대`가 열린 것에 대한 두려움을 우생학과 인종주의의 틀을 가지고 대면했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에게 인종주의와 우생학 이론들은 위험한 대중을 통치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새롭고 더욱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였다. 72)

모든 참전병사들이 폭력을 숭배했던 것은 아니며 많은 이들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전간기 유럽 전역에서 준군사주의 운동이 등장한 것은 명확히 전쟁의 산물이었다.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고려하지 않고 파시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시즘이 전간기 유럽이라는 시간적, 지리적 맥락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88)

1968년 학생시위는 무의식중에 반파시즘을 더 약하게 만들었다. 급진적인 학생들은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파시즘을 냉소적으로 조작한 것이라며 비웃었다. 학생들은 무차별적으로 당시의 정부를 파시즘이라 비난했고 그 말에서 쓸모 있는 내용들을 비워버렸다. 154)

파시스트들은 여성이 가정에 있길 원하면서도 이전에는 단순히 `가정적`이라고 여겨진 기능을 정치화했다. 출산, 교육, 소비 이 모든 것이 민족적 의무가 되었다. 게다가 가정적 의무를 여성에게 가르치기 위해 파시스트들은 여성을 당과 연결된 조직으로 동원해야 했다.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파시즘은 그들을 가정 밖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208-9)

타인의 동의 없이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가졌던 확신, 다시 말해 `과학적인` 방법이 자신들에게 공적인 선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부여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확신이었다. 정확하게 말해 의사들이 홀로코스트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의학이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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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국민화 - 독일 대중은 어떻게 히틀러의 국민이 되었는가?
소나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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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이고 한정적인 정체성을 지닌 집단을 대중이라고 한다면, 영속적이고 동질화된 정체성으로 '만들어진' 집단이 바로 국민이다. 군소 도시들간의 끊임없는 분쟁에 시달리면서도 로마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야망을 간직해 온 독일에서는 18세기에 이르러 사회를 통합하는 공통 심상과 초시간적 절대성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사유가 체계화되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질서잡힌 세계를 지향하는 고전주의와 고양된 열정을 직접 체화하는 낭만주의를 동시에 세계관으로 받아들였으며, 대중들은 체조동호회와 남성합창단, 사격동호회 같은 지역단체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적 전례와 게르만족의 신화가 버무려진 민족적 표현 양식을 꾸준히 습득했다. 하나의 국민을 지향하는 세속 종교가 사람들을 포획해 나아갔다.

새로운 정치양식인 세속 종교의 본질은 신화와 상징을 단순히 물질성의 반대항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고, 그것을 한층 추상화된 관념으로 재조직하여 현실에서 이룩할 수 있다는 '약속된 체제'의 기반으로 삼는다. 이것은 소음으로 가득한 다원성을 억누르고 일체화된 집단의식을 바탕으로 진정한 공동체를 향하여 도전하는,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나치즘은 독일인들의 내면에 녹아있는 정서를 정교한 기계적 절차 속에서 국가 숭배로 전환해냈다. 대중은 그저 눈을 가린 채 민족주의의 용광로에 떠밀려간 희생자가 아니라, 민족 정기가 서린 공간에서 잘 구성된 제의와 축제를 체험하면서 자발적이고 민주적으로 고양된 애국심으로 뭉친 민족의 일원이었다. 나치는 '신학'의 집행자이자 완성자였던 셈이다.


(오직 대의 정부만이 민주적이라는 전제가 오류인 것은) 파시즘이 작동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파시즘이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초기 대중운동의 신화와 제의였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솔리니가 말한 전통 안에서 의회 민주주의라는 "부르주아" 개념보다 더 생생하고 의미 있는 정치적 참여의 표현을 보았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전의 오랜 전통 덕분이며 그 전통은 내셔널리즘 지지자의 대중운동뿐 아니라 노동자의 대중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30)

파시즘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정치사상을 하나의 체계라기보다 "태도"라고 묘사했다. 그것은 사실 민족 제의에 틀을 제공한 일종의 신학이었다. 그래서 의례와 전례가 그 중심이 되었고 글에 호소할 필요 없는 정치론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나치와 다른 파시즘 지도자들은 말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연설은 이데올로기를 교훈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전례의 기능을 수행했다. 말은 그 자체로서 숭배 의례에 통합되었고 실제 이야기된 내용은 결국 이런 연설을 둘러싼 무대 장치나 의례보다 중요치 않았다. 36)

남성합창단, 사격동호회와 체조동호회가 기념식에서 제 역할을 했다. 프로테스탄트 사제들이 애국적인 설교를 했고 프로테스탄트 성가대가 노래를 불렀다. 게르만적인 것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이런 혼합은 19세기가 시작된 이래 변함이 없었다. 1815년 나폴레옹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며 사람들은 그 제단 위의 신성한 불꽃에 예배를 드렸다. 104)

민족 해방 투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유는 뮈토스의 주요 주제였다.
...
이런 형식의 민주주의는 민족의식의 발전에 기본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민족으로 여기고 기념하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민중이었다. 내셔널리즘은 민족을 해방한 것은 물론이고 각 개인의 영혼을 해방시켜 그들이 민족과 결합해 진정으로 창조적인 존재가 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157)

하나의 거대한 애국 조직으로서 사격동호회는 대중적 조직을 위한 하나의 모범을 제공했다. 체조동호회원들, 합창단원들과 함께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애국 단체를 형성했고 나치가 집권하기 전 한 세기 이상 민족 의례를 지탱하고 거기 참여했다. 그들의 축제는 통상적인 정치 회합이 아니었다. 피셔의 말처럼 민족 제의를 형성하고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활동이었다.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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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일본 근현대사 5
가토 요코 지음, 김영숙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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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아우르는 일련의 분쟁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시각은 '중일간의 국교 회복과 평화 정착을 저해하는 잔존 세력의 토벌전'이었고, 군부의 시각은 '조약에 명시된 일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보상 행위의 연장'이었다. 여기서 국교 회복은 만주가 일본에 귀속된 지역임을 상호 확정하는 것이고, 조약의 이행은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중국과 맺어온 각종 이권의 보장을 뜻한다.

군부는 소련과 미국이라는 현실적이고도 잠재적인 적대 세력과의 일전에 대비하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열도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도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바로 만주(몽골까지 포함한)의 영구 점령이라고 판단했다. 가난한 농민과 도시 빈민으로 구성된 군대의 여론전은 국민들의 열광적인 정서를 적절히 자극했고, 정치권은 군부의 폭주에 때로는 당황하면서도 곧 적절한 수용과 전략적 이용을 모색했다.

본 저서는 만주를 둘러싼 일본의 군사적 도발과 외교적 수사, 경제의 총동원, 이념적 정당화까지 일체화된 군국주의가 어떠한 인간 행위자와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서 점차 강고화되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한다. 거기에는 정념의 선동과 대결하는 이성의 숙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 진군을 뒷받침하는 '계산적' 이성의 모습이 가감없이 들어있으며, 달리기 시작한 열차는 스스로 브레이크를 거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만주사변은 1) 상대국 지도자의 부재를 틈타 일으켰다는 점, 2) 본래는 정치 간섭이 금지된 군인에 의해 주도된 점, 3) 국제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피하도록 계획된 점, 4) 지역 개념으로서의 만몽의 의미를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었다는 점, 이 4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17)

(만몽개념의 확대 과정에서) 일본이 취한 방법은 우선 지역을 말로 표현하고 다음으로는 말에 표현되는 실태를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팽창시키는 방법이었다. 44)

이시하라라는 존재가 당시 사회에서 가졌던 의의는 세계 공황을 맞아 (만몽지역 확보를 통한 일본 국방경제의 자급자족정책 확립이라는) 군사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지구전은 두렵지 않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선동성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방비 부담 경감에서 오는 경제효과 때문에 군축에 찬성해 온 사람들은 `일본 내지에서 돈을 한 푼도 지출하지 않고`도 전쟁이 가능하다는 선동을 통해 조용히 이시하라에게 빠져들게 되지 않았을까? 124)

1920년 신 4국 차관단 교섭에서 일본 측이 만몽권익에 관한 열거적 제외를 영미 열강에게 요구할 때의 설명은 `우리 국방 및 국민적 생존`상의 필요라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국민적 생존이라는 말은 만몽을 제외하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에서 시작된 세계 공황이 일본에 파급되자 현실은 이러한 수사를 밀어냈다. 138)

조르게는 중일전쟁을 통해 일본의 전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을 하는 사이에 23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육군에서 독일이나 적군 규모의 큰 육군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중일전쟁까지는 기술상으로도 훨씬 뒤떨어져 보였으나 지금은 모든 근대 병기를 갖추어 기술상으로도 뛰어난 역전의 육군으로 변화했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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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폐허에서 - 저항과 재건의 아시아 근대사
판카지 미슈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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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를 횡단한 서구 제국주의에 아시아가 대응한 방식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자신들의 우월한 종교나 전통에 충실하면 섭리 혹은 순리에 따라 강성함이 돌아온다는 생각, 둘째, 전통 문화와 사회 질서를 보존하면서 그 위에 서구의 기술을 도입한다는 생각, 셋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국제 세계에서는 옛 것을 철저히 내버리고 서구 근대화를 압축 달성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들은 전통과 기술을 다루는 방식이 제각각이었지만, '국민국가'라는 서구의 제도를 사고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단결만이 압도적인 서구에 맞설 수 있다는 논리는 국가별 입장과 발전 수준의 차이 앞에서 와해되어 갔다. 범이슬람주의는 사회주의가 세계대전의 파도 속에서 국가에 포섭된 것처럼 권력의 자장 안에 머물렀고, 범아시아주의는 제국 일본의 야심이 선의를 집어삼키면서 사라졌다.

서구를 완전히 배척하거나 서구에 종속되어도 좋다는 몰아(沒我)는 서로를 침식했고, 유교나 불교, 이슬람을 내세운 도덕적 전통은 새로운 사회 체제의 중심 이념으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아시아는 민주적 제도를 국가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였는가, 아니면 국가의 권위체로서의 성격만을 받아들였는가로 지형이 나뉘었다. 개인은 내면을 규율하는 체제를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국가는 부단히도 다원성을 희생시키고자 했다.

주어진 것과 쟁취한 것은 같은 것이라 해도 결국에는 같지 않다. 주어진 것은 쟁취하는 과정을 겪지 않으면 다시 빼앗기거나 변질되기 마련이다. 아시아는 제국의 습격에 맞서 오래된 제국을 재건하거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에 몰두했다. 그러나 제국이 무너져내린 폐허에는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들과, 유령처럼 그 위를 배회하는 '종교'만이 남았다. 이 인공의 들판에 자라나는 쇠사슬을 처리하는 일은 오롯이 남은 자들의 몫이다.

아시아 세계 어디에서든 근대화는 두 가지 가장 영속적인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군 장교나 정부 관료, 새로운 전문직처럼 세속적이고 서구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집단들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납세을 요구받은 일반 시민들, 서구인 때문에 영향력이 위태로워진 종교와 사회 엘리트, 당국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자신들 고유의 인종적 혹은 종교적 정체성을 깨달은 소수 집단들의 반발이었다. 103)

량치차오가 갑작스레 변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머문 메이지 시대 일본의 성공은, 권위주의 국가가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서 자유민주주의제보다 효과적일 수 있음을 입증했다. 유럽 국가들이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포용하고 더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쪽으로 움직이자,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초기에 도쿠토미 소호는 자유주의적 개혁론자였지만, 18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서구 국가들마저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대의제와 정당 내각"의 가치를 의심했다. 량치차오가 비스마르크의 독일에 구현된 국가주의를 갈수록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지적 추세에 영향을 받은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다. 249-50)

도쿠토미는 많은 일본인들이 진심으로 믿었던 개전의 더 큰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앵글로색슨족이 동아시아를 잠식하고 강탈한 악랄한 선례를 근절하는 방법으로만 동아시아의 질서와 안녕, 평화, 자족을 성취할 수 있음을 동아시아의 인종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348)

서구화된 세속적인 탈식민 엘리트들은, 이슬람이 세속적 발전과 경제적 통합이라는 국가의 과업에 걸림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대개 이슬람 단체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그런 근대화 노력이 실패했을 때, 또는 대중의 고통을 초래했을 때, 이슬람의 위세는 더 강해졌다. 374)

초기에 알레 아마드(1923~1969)는 이란 학생들을 서구 대신 일본과 인도로 보내서 서구 중독증에 대항할 수 있다고 여겼다. 동양에 중독된 이란인들이 서구에 중독된 이란인들과 균형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계획에는 이슬람의 역할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1962년에 당시 신생 국민국가이던 이스라엘을 방문했다가 국민들이 공유하는 종교에 기반을 둔 정치적 결속의 힘을 보고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
터키와 달리 이스라엘은 종교적•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근대적인 독립국가가 되었다. 385)

공산주의적 반제국주의자뿐 아니라 무슬림조차 배척하기 어려운 서구의 관념이 하나 있었다. 아시아 거의 어디에서나 탈식민 사회의 엘리트들은 유럽의 성공으로 보증된 그 관념을 받아들였다. 너그럽게 해방을 약속한, 자강과 긍지를 위한 그 혁명적 비책은 바로 국민국가의 제도와 관행이었다.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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