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중의 국민화 - 독일 대중은 어떻게 히틀러의 국민이 되었는가?
소나무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정체성을 지닌 집단을 대중이라고 한다면, 영속적이고 동질화된 정체성으로 '만들어진' 집단이 바로 국민이다. 군소 도시들간의 끊임없는 분쟁에 시달리면서도 로마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야망을 간직해 온 독일에서는 18세기에 이르러 사회를 통합하는 공통 심상과 초시간적 절대성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사유가 체계화되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질서잡힌 세계를 지향하는 고전주의와 고양된 열정을 직접 체화하는 낭만주의를 동시에 세계관으로 받아들였으며, 대중들은 체조동호회와 남성합창단, 사격동호회 같은 지역단체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적 전례와 게르만족의 신화가 버무려진 민족적 표현 양식을 꾸준히 습득했다. 하나의 국민을 지향하는 세속 종교가 사람들을 포획해 나아갔다.
새로운 정치양식인 세속 종교의 본질은 신화와 상징을 단순히 물질성의 반대항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고, 그것을 한층 추상화된 관념으로 재조직하여 현실에서 이룩할 수 있다는 '약속된 체제'의 기반으로 삼는다. 이것은 소음으로 가득한 다원성을 억누르고 일체화된 집단의식을 바탕으로 진정한 공동체를 향하여 도전하는,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나치즘은 독일인들의 내면에 녹아있는 정서를 정교한 기계적 절차 속에서 국가 숭배로 전환해냈다. 대중은 그저 눈을 가린 채 민족주의의 용광로에 떠밀려간 희생자가 아니라, 민족 정기가 서린 공간에서 잘 구성된 제의와 축제를 체험하면서 자발적이고 민주적으로 고양된 애국심으로 뭉친 민족의 일원이었다. 나치는 '신학'의 집행자이자 완성자였던 셈이다.
(오직 대의 정부만이 민주적이라는 전제가 오류인 것은) 파시즘이 작동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파시즘이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초기 대중운동의 신화와 제의였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솔리니가 말한 전통 안에서 의회 민주주의라는 "부르주아" 개념보다 더 생생하고 의미 있는 정치적 참여의 표현을 보았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전의 오랜 전통 덕분이며 그 전통은 내셔널리즘 지지자의 대중운동뿐 아니라 노동자의 대중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30)
파시즘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정치사상을 하나의 체계라기보다 "태도"라고 묘사했다. 그것은 사실 민족 제의에 틀을 제공한 일종의 신학이었다. 그래서 의례와 전례가 그 중심이 되었고 글에 호소할 필요 없는 정치론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나치와 다른 파시즘 지도자들은 말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연설은 이데올로기를 교훈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전례의 기능을 수행했다. 말은 그 자체로서 숭배 의례에 통합되었고 실제 이야기된 내용은 결국 이런 연설을 둘러싼 무대 장치나 의례보다 중요치 않았다. 36)
남성합창단, 사격동호회와 체조동호회가 기념식에서 제 역할을 했다. 프로테스탄트 사제들이 애국적인 설교를 했고 프로테스탄트 성가대가 노래를 불렀다. 게르만적인 것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이런 혼합은 19세기가 시작된 이래 변함이 없었다. 1815년 나폴레옹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며 사람들은 그 제단 위의 신성한 불꽃에 예배를 드렸다. 104)
민족 해방 투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유는 뮈토스의 주요 주제였다. ... 이런 형식의 민주주의는 민족의식의 발전에 기본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민족으로 여기고 기념하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민중이었다. 내셔널리즘은 민족을 해방한 것은 물론이고 각 개인의 영혼을 해방시켜 그들이 민족과 결합해 진정으로 창조적인 존재가 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157)
하나의 거대한 애국 조직으로서 사격동호회는 대중적 조직을 위한 하나의 모범을 제공했다. 체조동호회원들, 합창단원들과 함께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애국 단체를 형성했고 나치가 집권하기 전 한 세기 이상 민족 의례를 지탱하고 거기 참여했다. 그들의 축제는 통상적인 정치 회합이 아니었다. 피셔의 말처럼 민족 제의를 형성하고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활동이었다. 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