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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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과 달리 '히틀러의 철학자들'보다 '히틀러에 반대하거나 탄압받은 철학자들'을 더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2. 앞표지에 실린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라는 물음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3. 뒷표지에 실린 "근대 독일철학은 인류 최악의 독재자를 키워냈다!"는 말은 사상의 위력을 과장한 수사법이다.

저자가 수집한 철학자 혹은 유사 철학자들의 삶의 여정은 인간 존재의 본래적 고귀함이란 신화에 불과하며, "이론이란 모두 회색빛"이라는 파우스트의 적시성을 확인해줄 따름이다. 사상 혹은 종교적 신념이 삶을 재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고귀함을 일상과 멀리 떨어진 세계에 올려놓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며, 내 위에 선 존재를 '초월적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에게 '삶의 기준'을 의탁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욕망의 태양이 달궈놓은 현실의 대지에 황혼이 드리울 때, 맹목적인 숭배는 어김없이 희생의 번제로 돌변한다. 사상의 세계에 동참하는 일은 타인의 삶을 재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내면에 두 발을 디디고 매일 돌아보는 사람만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니체가 죽은 뒤에 대중은 그와 그의 저서에 소름끼치도록 매혹됐고 그는 악명 높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초인`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가장 악명 높은 책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15만 부를 찍어 전선의 독일군들에게 배포됐다. 88)

몰러는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법칙이 똑같고" 전쟁은 자연선택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회진화론자들의 신념을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전쟁은 우월한 사람들을 가려내 고귀한 자격을 부여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100)

아도르노가 두려워한 것은 단순히 미국 해안에 파시즘이 상륙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나치 휘하의 독일 영사관은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했다.
...
나치 집회는 망명자들의 피신처 한복판에서 열렸다. 1939년 4월 30일 2,000명의 독미 국제연맹 회원들이 서부해안 연합의 리더인 헤르만 막스 슈빈과 `미국의 총통`으로 불린 프린츠 쿤의 연설을 듣기 위해 집결했다. 무대 위에는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무늬가 새겨진 깃발들이 나부꼈다. 아도르노와 그의 유대인 친구들은 그물이 옥죄어오고 있으며 조만간 숨을 곳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감에 휩싸였다. 247-8)

1934년 당시 영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틀러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망명자를 환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독일에서 온 유대인들은 외국인 규제법에 의거해 엄격한 망명정책에 따라 영국 해안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단, 영국에 후원자가 있거나 경제적인 생계수단을 증명할 수 있는 유대인은 영국 입국이 허락됐다. 269)

슈미트는 항상 자신이 시대상황의 희생자라고 불평하면서 자신의 집을 `산카시아노San Caciano`라고 불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의 총애를 잃고 유배생활을 했던 산카시아노 지방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슈미트는 자신이 나치주의에 관여한 사실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하여 반유대주의적인 글을 발표한 사실에 대해 사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350)

하이데거와의 재회 이후 아렌트의 어조는 180도 달라졌다.
...
그녀는 하이데거가 세계무대에서 명성을 되찾는 일에 힘을 보탰다. 무엇보다도 아렌트는 유대인 출판업자들과의 인맥을 이용해 하이데거의 책이 전 세계에서 출판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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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전폭적인 지지는 하이데거가 전쟁 후의 무대에 복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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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자신이 끼친 피해에 대해 사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히틀러의 희생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연민을 표명한 적도 없었다. 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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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사람들 - 101예비경찰대대와 유대인 학살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지음, 이진모 옮김 / 책과함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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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홀로코스트를 해석하는 두 개의 관점이 있다. 하나는 "의도주의" 입장으로 유대인 학살이 히틀러의 적극적인 의도에서 출발하여 전체주의적 독재에 의해 실현된 참극이라는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구조주의" 입장으로 나치 정권의 무정부적 성격과 혼란한 의사 결정 과정이 히틀러에 대한 충성 경쟁의 과격화를 초래했고, 그 정점이 홀로코스트라는 시각이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하고 동부전선이 수렁에 빠져들면서 폴란드 유대인 학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점은 전자의 광기를 지지하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101예비경찰대대가 유대인 집결과 이송 담당에서 집단 학살 부대로 전환되는 과정은 후자의 체계를 지지한다. 물론 한 쪽이 다른 쪽을 배척하지는 않으며 양자는 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학살 행위는 관습과 문화라는 장기 요인과 훈육과 규율이라는 단기 요인의 복합적인 결과물이다. 극단에만 머무를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으며, 우리들 대다수는 주어진 상황을 "평범한 일상"으로 합리화하는 데 능숙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순응과 무관심은 그저 근대 국가의 권력 "기구"(apparatus)가 가진 무제한적인 위력을 잘 보여줄 따름이다.




(유대인 이송을 담당한) 이들은 희생자들을 직접 대면했다. 이들의 동료들은 이미 이송이 불가능한 모든 유대인들을 사살했으며 뒤이어 그들 자신도 여러 시간에 걸쳐 잔인한 방법을 동원해 희생자들이 베우제츠의 가스실에 도착하기 전 열차에서 탈출하는 것을 저지했다. 위에 서술된 작전에 참가했던 대원들은 누구나 자신이 참가하고 있는 작전, 즉 갈리치아 유대인 몰살을 위한 집단 학살 프로그램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아무런 사소한 의심도 없이 명확하게 잘 알 수 있었다. 69)

(탈친에서) 욥스트 병장 습격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깡패" 3명, 폴란드인 "공범" 78명 그리고 유대인 180명을 처형했다고 루블린에 보고했다. 경찰은 할당량인 200명보다 더 많은 261명이나 살해한 것이다. 분명히 유제푸프에서 학살이 자행되는 내내 눈물을 쏟았으며, 폴란드인들에 대한 무분별한 학살 앞에서 뒷걸음쳤던 대원들이 이젠 주어진 보복 살인 임무의 할당량을 초과하는 학살을 집행하면서도 더 이상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161)

가장 흔했던 "유대인 사냥" 형태는 밀고자들이 신고한 여러 "지하 땅굴"을 찾아내 유대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소규모 숲 순찰이었다. 대대는 유대인들의 은신처를 찾아내는 밀고자와 "숲을 달리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
이런 식의 수색은 "아주 빈번"하여 훗날 경찰들은 그들이 참가했던 순찰 횟수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경찰은 "우리에게 그것은 대체로 매일 먹는 빵과 같았다"고 말했다. 192)

옛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경우 반유대주의에 대해 상세히 증언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히 법적인 고려 때문만은 아니다.
...
도덕적으로 완전히 거꾸로 선 나치즘의 세계가 당시 그들에게 전적으로 옳게 보였다고 인정한다면, 그들은 어떤 체제에나 그저 적응하는 정치적•도덕적 기회주의자로 비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 가운데 누구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었던 또는 마주하기를 원치 않았던 진실이었다. 224-5)

대원들이 "유대인 사냥"에 관해 증언할 때는 그 누구도 은신처와 땅굴이 대부분 폴란드 "정보원들"과 "밀고자들", "숲을 달리는 사람들"과 굶주린 유대인들의 곡식 도둑질 때문에 성난 농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빠뜨리지 않았다.
...
그들의 증언에서는 (폴란드인이 유대인에게 행한) "배반"이라는 개념이 반복해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는 의심할 나위 없이 강한 도덕적 평가가 담겨 있다. 233)

101예비경찰대대는 장교와 평대원을 불문하고 유대인 학살이라는 특수 임무를 위해 특별 선발되었거나 그들이 이 임무에 특히 적합한 인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루블린 유대인 학살에 투입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대대는 전쟁 당시의 시점에 동원 가능한 병력의 `여분`이었을 뿐이다. 246)

당시 평범한 독일인 절대 다수는 소수 반유대주의 활동가들과 달리 결코 요란하게 반유대주의를 외치거나 반유대주의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울 프리들랜더가 "활동가들"과 대비하여 "방관자"라고 불렀던 "평범한 독일인" 대다수는 나치 정권이 유대인을 탄압하기 위해 시행한 법적 조치들, 즉 "유대인 해방"의 철회, 1933년의 모든 공공 영역 일자리에서의 유대인 퇴출, 1935년의 사회적인 배척 그리고 1938~39년의 모든 재산 몰수 같은 조치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297)

(바이마르) 공화국을 멸시하고 공격했던 사람들은 공화국의 민주적이고 비권위적인 성격 때문에 공화국에 합법성이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적지 않은 수의 독일인들이 나치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열광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바로 나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복원했으며, 개인의 권리보다 위에 존재하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강화했기 때문이었다. 3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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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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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사회적 관계에서 지배받는 이들을 "작은 사람들"이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의 일상에서 체제와 연관되는 지점의 다양한 면모를 통해 나치 시대를 살펴보고 있다. 가령, 전사자의 죽음을 "국가에 바치는 숭고한 희생"으로 치환할 때 일상은 체제와 연관되며 "정치적" 의미가 부여된다. 사회적 관계속에 놓인 개인의 입장, 발언, 행위 혹은 부작위는 체제를 수호하거나 균열시킬 수 있는 잠재적 요소들인 셈이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무기력에 지친 "작은 사람들"은 "정상성(Nomalität)"의 회복을 갈망했으며, 폭력과 테러를 수단으로 삼아 그 길을 놓는 나치의 저돌성에 매혹되었다. 19세기 말 서구 부르주아 사회의 구조적 변동에서 유래한 사회의 극심한 혼란상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수단이 가열찬 폭력이라는 사실에 모두 동의한 셈이다. 역설적인 것은 파괴를 원천으로 삼는 체제는 "정상성"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치가 구현한 "정상성"은 자신을 위협하는 '불멸'의 적에게 맞서기 위해 가혹한 규율과 촘촘한 억압의 그물이 작동하는 체제였다. 이 '숨막히는 평화'는 전근대적 광신(狂信)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이면에 잠재한 통제 성향에 기인한다. 우리 시대가 근대의 자장 안에 속한다는 말은 과학의 한정적인 진리값과 자의적인 사회 규율의 만남을 절대화하는 태도가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는 점을 환기시켜준다.




우리가 문제 삼으려는 일상은 가능한 최대 의미의 일상이 아니라 제3제국에서의 일상이다. 따라서 우리가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나치즘의 일상에서 무엇이 정치적이었는가, 혹은 비정치적인 일상에 끈질기게 매달리던 당대인들의 태도는 그들의 나치즘 경험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28)

그들(나치당원) 중에 소위 "좌절한 중간세대"에 속하는 사람에 많았던 사정으로 인해 더욱 첨예화되었다.
...
실업자나 실패한 자영업자 혹은 보다 나은 교육과 사회적 상승의 기대를 접어야 했던 청년들이 위기의 일상에서 잃어버린 전망과 나치 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객관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참여는 삶을 보다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45)

나치 체제에 대한 합의는 종종 언급되는 대로 나치의 테러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테러가 "공동체의 적들"을 겨냥하는 한 그리고 그로써 소위 "질서"의 재건에 기여하는 한 테러에 정서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었다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09)

전쟁은 "정상"이고, 폭력도 "정당"하다. 성공하면 특히 그렇다. 1936년부터 1939년에 이르는 시기에 히틀러가 거둔 외교적 성공으로 말미암아 독일인들은 "베르사유의 치욕"을 씻는다는 "정당한 관점"을 폭력적으로 주장하면서 한 판에 모든 것을 거는 모험적 행위야말로 성공에 이르는 확실한 비법이라고 생각하는 데 이미 익숙해져 갔다. 219)

나치는 그들이 목표로 하던 민족공동체를 문화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정치의 미학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공적인 연출의 결과, 공적인 삶은 동공화(洞空化)되었고 비정치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의 도피는 심화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체제에 대한 수동적인 합의, 즉 그렇게 도달된 소위 "정상 상태"에 대한 사람들의 동의를 확보하고 공고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300)

제3제국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노인들의 기억 속에 두 가지 업적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문 앞에 세워 둘 수 있었다는 것과, 당시에는 장발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그러한 생각이 당시 유행하던 사형 혹은 가스실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특수한 형태의 테러, 즉 일탈적인 입장 혹은 일탈적인 존재를 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곳에 격리시키고 훈련시키는 테러 방식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303-4)

나치가 내세우던 유전학 기준이 모호했기 때문에 인종적 특징을 규정하던 핵심적 요소는 오히려 인간의 사회적 태도였다.
...
요컨대 나치 인종주의의 양대 요소는 생물학적인 심증을 일탈적 사회적 태도의 징후를 통해 확인하는 것과, 특정 소집단의 행동 방식을 규범으로 확대시켜 거의 모든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경향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소는 집시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나치가 인종 개념의 "긍정적" "건설적" 측면으로 선전한 영역, 예컨대 "여성"을 "독일적 어머니"로 규정할 때에도 발견된다. 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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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티모시 메이슨 지음, 김학이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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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게 노동계급은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적 정치 세력(러시아 11월 혁명)이자 반전운동과 태업으로 민족의 등에 칼을 꼽은 배신자(제1차 세계대전)였다. 노동계급에 대한 적대감으로 단호하게 무장한 나치는 혼란한 사회상에 지친 중하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선동과 테러를 자행하여 노동계급을 타격했으며, 집권 후에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을 소거하고 생산기계로서의 역할만을 남기고자 조직개편과 정신교육에 주력했다.

그러나 나치는 곧 자신들의 궁극목표인 "민족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총력전 준비가 불가피하며, 일방적인 탄압과 강제로는 노동계급의 지지와 헌신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당혹스런 모순에 직면했다. 당과 정부에 혼재된 기관들이 현실 조건을 고려한 군수정책을 패배주의로 몰아세우면서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의지를 강조했지만, 비체계적이고 즉흥적인 정치 세력들간의 분열과 요구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공간을 넓혀주었다.

노동계급의 자율성은 군수 산업에서 완전 고용을 이루어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된 1936년 이후에 한층 강화되었다. 물론 이때의 자율성은 어디까지나 정치성을 제거한 자유이며, "기쁨에 의한 힘"이 주도하는 휴가 및 복지 정책, 임금 인상의 형태에 머물렀다. 그러나 애초부터 나치의 인종주의에는 자신들의 세계관에 동조하기보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전쟁 잠재력을 부단히 훼손하는 노동계급을 길들일만한 처방이 없었다.




역사가 가르치는 대로 하자면, 한 번 더 등에 칼을 맞지 않게 위해서는 우선 노동운동을 파괴하여야 하였다. 즉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당직자들을 제거하고 그 조직들을 과격하게 억압하여야 하였던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애국적"이지만, 다른 한 편 더 할 수 없이 "맹신적인" 독일 노동자들을 "11월의 범죄자들"의 해체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미구의 전쟁 수행을 위하여 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이다. 17-8)

히틀러는 1920년대 말에 단기적으로는 "통일적인 세계관"이 전쟁 준비의 현실적인 토대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 그 세계관 속에서 물질적인 개선의 전망이 확실할 경우에만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26)

나치스 당이 지역적 차원에서 급성장 하였던 것은 나치스가 부르주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키리라는 전망 덕분이었다.
...
바이마르 헌법은 1920년대의 노동운동에게 국가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 행사를 보장하였는데, 이제 확증되어야 할 것은 미래에는 노동운동에게 그러한 제도적 공간을 절대로 또 다시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69)

나치스 고용창출정책이 눈에 보이는 성과를 우선시하였다는 것은 나치스 정부가 새로운 조치의 통계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기계의 사용을 가능한 한 억제하였다는 사실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1933/34년의 건설과 관개 사업은 원칙적으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은 채 이루어져야 했다. 이때 생산성 문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119)

나치스 집권 이후 호황 산업의 임금 인상이 상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판단에서는 헤센 지역 노동신탁위원이 집권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의 노동자들의 분위기에 대해서 내린 평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겉으로 조용한 것은 "진정으로 만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체념하고 포기해서"라는 것이다. 143-4)

요컨대 노동력 부족은 군수 4개년계획을 실천하는 데에 결정적인 장애 요인이었다. 다시 말해 1940년 중반까지의 군수 정책의 특징은 생산 애로가 빈발하고, 다수의 과제가 미해결된 채 방치하고, 전쟁 준비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전쟁에 대비한 물자의 비축에 빈약한 상태에 머무르던 것에 있었는데, 그 직접적인 원인은 독일 공업의 노동력 부족이었던 것이다. 191)

나치스 지도부는 어렵기만 하고 인기는 없는 과제를 맡을 의도도 없었고, 희소 자원에 대한 군대와 경제계의 상충되는 요구들을 중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방기적 태도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듯 요구가 상충될 때에는 그 결정을 관련 기관들의 자연적인 투쟁 과정에 맡겨버리는 것이 편리하기도 하였다. 225)

1941년 6월 현재 독일의 공업과 농업에서 극악한 임금을 받거나, 혹은 아무 보상도 없이 노동을 하고 있던 15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 및 130만 명의 전쟁포로가 없었더라면, 독일에는 두 개의 길, 즉 독일군이 패배하거나 아니면 독일인들이 과격한 강제조치를 감내하는 것 이외에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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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국가 - 나치 정치혁명의 이념과 현실 현대의 지성 137
마르틴 브로샤트 지음, 김학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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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브로샤트가 해부한 나치즘은 모순 개념의 향연이다. "히틀러 국가"라는 명명부터가 그렇다. 나치 독일은 지도자의 카리스마 위에 건설된 국가였으며, 그는 선동의 언어를 진리의 왕국으로 곧장 연결시키려는 맹목적 의지와 광적인 신념의 결정체였다. 지도자는 국가 권력의 정점이자 국가 체제로부터 분리(absolvere)되어 있는 진공의 지배자이며, 혁명의 선두에 선 돌격대와 혁명을 쓰러뜨린 친위대를 낳은 원초적 대지였다. 지도자의 말에 기댄 모방자들은 제각기 유사 지도자의 외양을 걸치고 국가 내부에 세운 자신의 봉토 위에서 분열하고 증식하면서 국가를 '지속과 붕괴'의 진자 위에 올려놓았다.

결과적으로 "히틀러 국가"는 내부의 일체화와 외부의 파멸이라는 예견된 결과를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의 투쟁"이 '포그롬의 폭주를 홀로코스트의 번제'로 변태시킨 유일하고 근본적인 요인은 아니다. 미래의 의도는 현실의 처방을 압도하지 못하며, 선동의 언어에는 뿌리가 없다. 이론의 정합성은 실천의 부정합성이라는 시련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히틀러 국가"는 즉흥 조치를 남발하는 특별 행정 기구들이 서로 질시하고 경쟁하는 중첩된 구조물이었다. 그들은 근대의 물질성을 무기 삼아 근대의 정신을 파훼했으며, 모든 가치를 파괴했다. 폐허에 남은 것은 자궁으로의 회귀뿐이었다.






부분적으로는 위로부터, 부분적으로는 아래로부터 추동된 예외법적 상황하에서 나치 지구당과 다양한 나치 지역 기구들은 기존의 행정적•헌정적 관계들을 파괴하고 경제•직업•문화 기구들을 일체화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기관이 `창궐`하는 형태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정당권력, 국가권력, 사회권력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결합된 다양한 중간형태들과 인물들이 나타났다. 195)

사회적 상승이란 측면에서 나치당이 수행한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던 그 조직들은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과 사무직 근로자들에게 정치적 경력의 통로였다. 그들은 바로 그 길을 통하여 (히틀러청소년단, 친위대 장교, 노동전선 대표위원, 나치당 지역 지도자가 됨으로써) 사회적 상승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고단한 단계들을 우회할 수 있었다.
...
나치즘은 과거의 계급장벽에 구멍을 내고 사회적 이동성을 높였던 것이다. 232)

일체화는 국가와 당에 대한 이익집단들의 예속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또한 겉으로는 이해 갈등의 완화로 보였고, 나치 또한 그렇다고 선전했던 현상들이 실제로는 이익단체들을 정치의 종속된 일부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이해 갈등을 정치에 묶어버린 것에 불과했다. 사회경제적 이익 갈등은 일체화에 의해 해소된 것이 아니라 변속 장치를 통하여 정치체제 내부로 이전되었던 것이다. 269-70)

무장 친위대는 나치당과 국가에 기반하면서도 양자로부터 벗어나 있는 특수 권력의 특징적인 예다. 무장 친위대는 당의 행정 및 재정 감독권(재무국장)에 종속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관이 국가 경찰의 일부였던 것도 아니고, 중앙과 주의 내무부에 종속되었던 것도 아니다. 무장 친위대는 오직 친위대장에 종속되었다. 따라서 무장 친위대는 직접적인 지도자권력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381)

나치의 지도자-추종자 구조는 자체적으로 세포분열을 하는 경향을 지녔다. 다시 말해서 지도자 직속 기구의 한 내부 요소가 독립하여 그 스스로 히틀러에게 직속된 기관으로 독립하려는 경향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할권이 갈수록 늘어난 친위대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친위대는 "국가 안의 국가"로서 국가행정의 통일성을 파괴하였으나, 그들에게는 고정된 법인체적•관료제적 완결성과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388)

제국내무부가 1935년 11월에 작성한 문건은, 법인으로서의 국가의 자리에 "여러 개의 의지"가 아닌 "오직 하나의 의지", 즉 "지도자"가 들어섰다고 해설했다. 396)

일반 행정과 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특정 목표를 강력하게 추진하려 할 때, 나치 지도부는 그 국가 업무를 독특한 지도자구조에 따라 작동하는 나치당 특수 조직이나 나치당 특무전권위원들에게 맡겼다. 그런 인물들은 단기적인 생산 효율성을 위하여 민간경제의 경영기구를 거리낌없이 투입했고, 그 와중에 통일적인 관료제적 국가행정이 손상되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420-1)

우리는 나치 체제를 배후에서 추동하는 힘이 히틀러 개인에게 구현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였고, 그것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은 채 동일하게 머물러 있었으며, 변한 것은 전술과 겉모습뿐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국가 현실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 전술과 겉모습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국가 현실은 우선 당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와 정부와 입법의 그때그때의 구체적인 대상에 의해 규정된다. 장기 목표들과 비밀스런 미래의 의도는 국가 현실을 규정하지 못하거나, 규정하더라도 이차적으로만 규정한다. 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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