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평범한 사람들 - 101예비경찰대대와 유대인 학살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지음, 이진모 옮김 / 책과함께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홀로코스트를 해석하는 두 개의 관점이 있다. 하나는 "의도주의" 입장으로 유대인 학살이 히틀러의 적극적인 의도에서 출발하여 전체주의적 독재에 의해 실현된 참극이라는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구조주의" 입장으로 나치 정권의 무정부적 성격과 혼란한 의사 결정 과정이 히틀러에 대한 충성 경쟁의 과격화를 초래했고, 그 정점이 홀로코스트라는 시각이다.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하고 동부전선이 수렁에 빠져들면서 폴란드 유대인 학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점은 전자의 광기를 지지하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101예비경찰대대가 유대인 집결과 이송 담당에서 집단 학살 부대로 전환되는 과정은 후자의 체계를 지지한다. 물론 한 쪽이 다른 쪽을 배척하지는 않으며 양자는 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학살 행위는 관습과 문화라는 장기 요인과 훈육과 규율이라는 단기 요인의 복합적인 결과물이다. 극단에만 머무를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으며, 우리들 대다수는 주어진 상황을 "평범한 일상"으로 합리화하는 데 능숙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순응과 무관심은 그저 근대 국가의 권력 "기구"(apparatus)가 가진 무제한적인 위력을 잘 보여줄 따름이다.




(유대인 이송을 담당한) 이들은 희생자들을 직접 대면했다. 이들의 동료들은 이미 이송이 불가능한 모든 유대인들을 사살했으며 뒤이어 그들 자신도 여러 시간에 걸쳐 잔인한 방법을 동원해 희생자들이 베우제츠의 가스실에 도착하기 전 열차에서 탈출하는 것을 저지했다. 위에 서술된 작전에 참가했던 대원들은 누구나 자신이 참가하고 있는 작전, 즉 갈리치아 유대인 몰살을 위한 집단 학살 프로그램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아무런 사소한 의심도 없이 명확하게 잘 알 수 있었다. 69)

(탈친에서) 욥스트 병장 습격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깡패" 3명, 폴란드인 "공범" 78명 그리고 유대인 180명을 처형했다고 루블린에 보고했다. 경찰은 할당량인 200명보다 더 많은 261명이나 살해한 것이다. 분명히 유제푸프에서 학살이 자행되는 내내 눈물을 쏟았으며, 폴란드인들에 대한 무분별한 학살 앞에서 뒷걸음쳤던 대원들이 이젠 주어진 보복 살인 임무의 할당량을 초과하는 학살을 집행하면서도 더 이상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161)

가장 흔했던 "유대인 사냥" 형태는 밀고자들이 신고한 여러 "지하 땅굴"을 찾아내 유대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소규모 숲 순찰이었다. 대대는 유대인들의 은신처를 찾아내는 밀고자와 "숲을 달리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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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수색은 "아주 빈번"하여 훗날 경찰들은 그들이 참가했던 순찰 횟수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경찰은 "우리에게 그것은 대체로 매일 먹는 빵과 같았다"고 말했다. 192)

옛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경우 반유대주의에 대해 상세히 증언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히 법적인 고려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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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으로 완전히 거꾸로 선 나치즘의 세계가 당시 그들에게 전적으로 옳게 보였다고 인정한다면, 그들은 어떤 체제에나 그저 적응하는 정치적•도덕적 기회주의자로 비칠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 가운데 누구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었던 또는 마주하기를 원치 않았던 진실이었다. 224-5)

대원들이 "유대인 사냥"에 관해 증언할 때는 그 누구도 은신처와 땅굴이 대부분 폴란드 "정보원들"과 "밀고자들", "숲을 달리는 사람들"과 굶주린 유대인들의 곡식 도둑질 때문에 성난 농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빠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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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증언에서는 (폴란드인이 유대인에게 행한) "배반"이라는 개념이 반복해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는 의심할 나위 없이 강한 도덕적 평가가 담겨 있다. 233)

101예비경찰대대는 장교와 평대원을 불문하고 유대인 학살이라는 특수 임무를 위해 특별 선발되었거나 그들이 이 임무에 특히 적합한 인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루블린 유대인 학살에 투입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대대는 전쟁 당시의 시점에 동원 가능한 병력의 `여분`이었을 뿐이다. 246)

당시 평범한 독일인 절대 다수는 소수 반유대주의 활동가들과 달리 결코 요란하게 반유대주의를 외치거나 반유대주의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울 프리들랜더가 "활동가들"과 대비하여 "방관자"라고 불렀던 "평범한 독일인" 대다수는 나치 정권이 유대인을 탄압하기 위해 시행한 법적 조치들, 즉 "유대인 해방"의 철회, 1933년의 모든 공공 영역 일자리에서의 유대인 퇴출, 1935년의 사회적인 배척 그리고 1938~39년의 모든 재산 몰수 같은 조치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297)

(바이마르) 공화국을 멸시하고 공격했던 사람들은 공화국의 민주적이고 비권위적인 성격 때문에 공화국에 합법성이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적지 않은 수의 독일인들이 나치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열광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바로 나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복원했으며, 개인의 권리보다 위에 존재하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강화했기 때문이었다. 3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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