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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1. 제목과 달리 '히틀러의 철학자들'보다 '히틀러에 반대하거나 탄압받은 철학자들'을 더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2. 앞표지에 실린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라는 물음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3. 뒷표지에 실린 "근대 독일철학은 인류 최악의 독재자를 키워냈다!"는 말은 사상의 위력을 과장한 수사법이다.
저자가 수집한 철학자 혹은 유사 철학자들의 삶의 여정은 인간 존재의 본래적 고귀함이란 신화에 불과하며, "이론이란 모두 회색빛"이라는 파우스트의 적시성을 확인해줄 따름이다. 사상 혹은 종교적 신념이 삶을 재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고귀함을 일상과 멀리 떨어진 세계에 올려놓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며, 내 위에 선 존재를 '초월적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에게 '삶의 기준'을 의탁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욕망의 태양이 달궈놓은 현실의 대지에 황혼이 드리울 때, 맹목적인 숭배는 어김없이 희생의 번제로 돌변한다. 사상의 세계에 동참하는 일은 타인의 삶을 재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내면에 두 발을 디디고 매일 돌아보는 사람만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니체가 죽은 뒤에 대중은 그와 그의 저서에 소름끼치도록 매혹됐고 그는 악명 높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초인`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가장 악명 높은 책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15만 부를 찍어 전선의 독일군들에게 배포됐다. 88)
몰러는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법칙이 똑같고" 전쟁은 자연선택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사회진화론자들의 신념을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전쟁은 우월한 사람들을 가려내 고귀한 자격을 부여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100)
아도르노가 두려워한 것은 단순히 미국 해안에 파시즘이 상륙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나치 휘하의 독일 영사관은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했다. ... 나치 집회는 망명자들의 피신처 한복판에서 열렸다. 1939년 4월 30일 2,000명의 독미 국제연맹 회원들이 서부해안 연합의 리더인 헤르만 막스 슈빈과 `미국의 총통`으로 불린 프린츠 쿤의 연설을 듣기 위해 집결했다. 무대 위에는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무늬가 새겨진 깃발들이 나부꼈다. 아도르노와 그의 유대인 친구들은 그물이 옥죄어오고 있으며 조만간 숨을 곳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감에 휩싸였다. 247-8)
1934년 당시 영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히틀러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망명자를 환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독일에서 온 유대인들은 외국인 규제법에 의거해 엄격한 망명정책에 따라 영국 해안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단, 영국에 후원자가 있거나 경제적인 생계수단을 증명할 수 있는 유대인은 영국 입국이 허락됐다. 269)
슈미트는 항상 자신이 시대상황의 희생자라고 불평하면서 자신의 집을 `산카시아노San Caciano`라고 불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의 총애를 잃고 유배생활을 했던 산카시아노 지방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슈미트는 자신이 나치주의에 관여한 사실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하여 반유대주의적인 글을 발표한 사실에 대해 사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350)
하이데거와의 재회 이후 아렌트의 어조는 180도 달라졌다. ... 그녀는 하이데거가 세계무대에서 명성을 되찾는 일에 힘을 보탰다. 무엇보다도 아렌트는 유대인 출판업자들과의 인맥을 이용해 하이데거의 책이 전 세계에서 출판될 수 있도록 했다. ... 사르트르의 전폭적인 지지는 하이데거가 전쟁 후의 무대에 복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 하이데거는 자신이 끼친 피해에 대해 사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히틀러의 희생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연민을 표명한 적도 없었다. 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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