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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타밈 안사리 지음, 류한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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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오래된 미래가 로마 제국이라면, 이슬람의 오래된 미래는 초기 칼리프 공동체이다. 우리가 무함마드의 초기 칼리프 공동체를 이슬람 원리주의의 모태로 섣불리 재단하지 않는다면, 아테나이의 "정치적" 시민들이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고자 애썼던 것처럼, 종교적 열정을 세공하여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를 세우고자 했던 또다른 현실태를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었으며, 자신이 "새로운 교리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미 말한 것을 다시 이야기한다고 믿었다."(63) 그는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했듯이, 수많은 이교도의 신들을 모시는 사원들로 오염된 메카를 알라의 유일한 성지로 되돌리고자 했다. 그 첫 단계는 메디나로의 이주, 곧 히즈라[단절]였으며, 그곳에서 "'움마'라고 부르는 무슬림 공동체가 탄생"(67)한다.
'움마'는 부족을 초월한 연맹으로서, 이슬람은 "고립된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정의로운 공동체 건설이라는 프로젝트"(68)를 제시한 정치적 운동이었다. 이는 끝없이 이어지는 부족간의 분쟁과 약탈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당대인들에게 '평화의 영역'을 실증해 준 인식의 전환이었다. 이제 "움마에 합류하는 사람들은 동료 무슬림들과 있을 때라면 더 이상 뒤를 조심하지 않아도 되었다."(77) '분열'에서 '통합'으로 전환된 무슬림들의 역사는 "히즈라 이전(BH)과 히즈라 이후(AH)"로 나뉜다.
무함마드를 계승한 4명의 라시둔[올바르게 인도받은 사자들]도 '움마'를 공고히 하는 작업을 착실히 수행했다. 1대 칼리프 아부 바르크는 예언자 사후에 부족 이탈이라는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자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을 사로잡고 있는 원칙을 세웠으니, 배교는 반역"이라는 원칙이었다. 그는 "하나의 무슬림 공동체는 얼마든지 많이 존재할 수 있는 무슬림 공동체 중의 한 종류가 아니라, 오직 하나만 존재할 수 있는 특별한 공동체"(90)라고 단언했다.
2대 칼리프 우마르는 쿠란과 무함마드의 지령을 "이슬람 교리의 주춧돌"로 삼아, "무슬림들로 하여금 계시가 명한 것이라면 크든 작든 모든 경우에 지키도록 결의"하게 만들었다. 우마르는 학자들이 "계시의 내용과 무함마드의 일생, 그밖의 관련 자료들에 몰두 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는 "장차 이슬람의 주요 사회 제도 중 하나이며 '학자들'을 뜻하는 울라마가 자라난 씨앗이 되었다."(106-7)
3대 칼리프 우스만은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지켜나갔지만 자신의 관료들에게 금욕을 요구하지는 않았다."(116) 그가 물려받은 무슬림 공동체는 정복 사업의 연이은 성공으로 제국의 반열에 들어섰고, 권력을 장악한 신흥 상류층은 칼리프가 강조하는 청렴과 개혁에 대한 저항의 단초가 되었다. 4대 칼리프 알리는 다른 칼리프들이 "무함마드가 제시한 공동체의 미래상을 지키는 수호자"로 자리매김할 때, 자신을 "내면의 불꽃을 지키는 자"로 정립하여 내면에 근거한 신비주의의 밑돌을 놓았다.
"알리가 죽으면서 이슬람 역사의 첫 번째 시대가 끝났다."(130) 우마이야를 위시한 지배 계급은 청빈과 금욕,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라는 '움마'의 이상을 벗어던지고 여느 제국과 다를 바 없는 세속 권력을 수립했다. 이슬람 공동체는 쿠란과 하디스[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것], 키야스[쿠란과 하디스에서 유추한 지침], 이즈마[학자들이 합의한 지침]로 이어지는 율법 체계를 정교하게 다듬고, 샤리아[삶 전체를 규율하는 만고불변의 법칙]를 완성했지만, 초기 칼리프 공동체의 이상과 실천은 종교 분파들 사이의 분쟁을 정당화하는 구호로 격하되었다.
번창하는 제국에서 안주하던 무슬림들의 실존을 뒤흔든 것은 몽골의 침략이었다. "책의 백성"도 아닌 몽골족에게 짓밟혔다는 현실의 참담함 때문에 "이슬람 신학자들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괴로워했으며 일반 무슬림들은 신앙에서 시험을 겪으면서" 내면의 동요에 시달렸다. "이슬람 공동체의 보편화가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믿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하고 묻는 것이 당연했다."(264) 1452년 "오스만 왕조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 이슬람은 무슬림 세계전체가 재기하리라 확신"(289)했지만 그 승리는 어둠을 예비하는 찬란한 석양빛에 불과했다.
1500년~1850년의 식민화 기간 동안 "유럽 문명은 이슬람 문명과 한 번도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351) 서유럽은 식민지에서 강탈한 자금으로 원자재를 싹쓸이하고, 제조업 기반을 무너뜨려, 경제를 혼돈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제국을 손아귀에 넣었다. 오스만 왕조가 무너진 것은 사회의 기능 장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잘 운영되어서 다른 상황을 상정할 이유가 없는 "높은 수준의 평형 상태라는 덫"(429)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병사들이 아니라 무역상이었다."(359)
무슬림들은 다시금 "무슬림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확장해나가는 과정이 계시의 진실성을 증명한다면, 이 새로운 외국인들 앞에 무슬림이 무력하게 복종하는 현실은 이슬람의 어떤 면을 드러내는가"(398)라는 물음에 집착했다. 현재의 실패와 일상화된 모욕을 벗어나기 위해 제국을 재건하고 이슬람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은 "이슬람 권력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었다."(399) 19세기 이후의 이슬람 세계는 세속적 근대주의자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대립하면서 수시로 이를 조장하고 이용하는 서구를 향한 반감으로 점철되었다. '움마'는 지하드를 이슬람의 "여섯 번째 기둥'으로 격상시킨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다양한 변종들"(516)의 세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페르시아는 민주주의의 성지를 침략하려다 마라톤 평원(기원전 490)과 살라미스 해안(기원전 480)에서 몰살당한 야만의 왕국이 아니다. 페르시아는 정복자에 대한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정복한 지역의 주민 전부를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43) 가혹한 수법을 구사했던 아시리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등장했다. 그들은 앞선 정복자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하나의 큰 텐트 아래에 여러 민족을 두는 다문화 전략"(45)을 펼쳤으며, 이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오스만 제국까지 이어지는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서구 문명은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최초로 정복했다고 말하지만, "그때는 이미 '페르시아'가 세계를 정복한 뒤였다."(50) 그 제국은 태초부터 타락한 광신의 본산지가 아니라,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국가의 본질을 습득하던 또 다른 세계였다.
The essence of a modern state is centralized authority, bureaucratic management, the efficient delivery of the public services that only a state can provide; Persia provided fewer services than a modern state and "outsourced" much of the work to official in semiautonomous political dependencies, but the principle was there.
"근대 국가의 본질은 중앙집권화, 관료 행정, 국가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공공 서비스의 효율적 수행에 있다. 페르시아는 근대 국가에 비해 소수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했고, 반자치 상태의 속령들이 공식 업무의 상당부분을 "위탁경영"하긴 했지만, 근대국가의 원리가 존재한 곳이었다." -Alan Ryan, <On Politics>, Introduction p.2
서기전 386년에 페르시아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테에 평화조약을 맺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면 자신들이 직접 개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페르시아가 에게해와 소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상위 권위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유원, <역사 고전 강의>,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