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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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을 뜨겁게 달군 베트남전쟁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으며, 미국의 제1목표는 "남베트남 정부를 지키는 것"이었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베트남의 운명을 떠안은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 대륙을 잃었을 때 불었던 매카시 선풍"(58)이 국내 정치를 유린했던 사실을 떠올리면서, 베트남에서 철수하면 공산주의가 "중동과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51)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제한전 전략을 채택하여 베트콩을 지원하는 "북베트남을 폭격"했지만, 전면전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59) 


미국이 "제한전을 고려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38선 이북으로 전선을 확대했던 미국은 중국의 참전에 밀려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61) 전선의 확대를 막는다는 명분은 타당했지만, "진격할 목표가 없다는 사실"은 목숨 걸고 싸우는 최전선의 병사들이 전투의 승패보다 살아남는 것에 집착하게 만들었다.(60) 베트남전쟁은 이데올로기 수호라는 지상목표 외에도 "경제를 위한 전쟁"(53)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확대는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던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로 떠오르고 있던 동남아시아 시장의 축소를 의미했다.(54)


"한국 정부는 1964년 봄이 가기 전에 파병을 결정했다."(23) 박정희 정부가 파병의 근거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주한미군 감축 저지와 한미 동맹 고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였지만, 한일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고, 군축에 따른 군부의 지지기반 붕괴를 막겠다는 속내가 들어 있었다. 여기에 존슨 대통령이 '더 많은 깃발more flag' 정책을 표방하면서, "더 많은 한국군을 시급하게 요청"(40)하자 박정희 정부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체제를 적극 동원했다.


북한은 이에 맞서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 안보 위기를 조장했다. 1968년 1월 21일에 청와대 습격 사건, 23일에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벌어졌다. 1965년과 1966년에 30~40건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의 남북간 교전이 "1968년에는 500건으로 급증했다."(30)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공세에 대응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선제공격을 펼치면서, 한국군 추가 파병이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군사 장비가 [한반도에] 얼마나 제공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44)는 말로 미국을 압박했다. 


베트남에 가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금전적인 요소"는 군대와 기업 모두에게 가장 큰 유혹이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사병의 전투 수당(이병의 경우 51.11달러)"은 당시 국내 이병 월급 1달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많은 돈이었다.(154)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파병 군인들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전체 수당의 83퍼센트"에 달했고, 정부는 높은 송금 및 환전 수수료를 통해 일부를 거둬들였다. 1975년 10대 재벌에 새롭게 진입한 "현대, 한진, 효성, 쌍용, 대우, 동양맥주, 동아건설, 신동아 등"은 "베트남전쟁 당시 용역과 건설, 무역 등으로 성장한 기업이었다.(224)


한국 정부는 전투부대 파병으로 인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1968년 예비군을 창설하여, "병역의무를 마친 예비역들을 지속적으로 통제,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주민등록제도도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겠다는 제2경제론은, 광화문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217-8) 전쟁 특수는 한국의 산업구조도 바꾸어놓았다.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공업과 종합 기계 산업 건설이라는 애초의 계획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독자적으로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쟁 특수"이다.(227-8)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국력을 쏟아부어도 정글의 늪은 깊어만 갔다. 1968년 베트콩의 구정공세는 비록 실패한 전투였지만, 성공을 자신하던 워싱턴을 충격에 빠뜨렸고, 반전 여론의 기폭제가 되었다. 파병국들이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할수록, 미국은 과다한 국방비 지출로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주도하던 미국은 "1968년 3월 금의 이중가격제"를 시행했고, "달러의 가치 하락은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마침내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달러의 금태환이 정지됐음을 선언했다."(186-7) 


미국은 반전 여론과 악화된 재정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베트남에서 철군을 결정했다. 언론과 의회는 "남베트남 정부가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키면서 철군을 지지했다.(318) 닉슨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베트남 주둔 미군의 철수를 결정하자, 전쟁특수가 실종된 아시아의 파병국들은 쿠데타와 계엄령의 포연에 잠겼다. 자유체제 수호라는 임무를 스스로 저버린 미국이 그들의 반란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관망'뿐이었다. "1971년 11월 18일 타이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10개월이 지난 1972년 9월 22일 필리핀에서 계엄령이 선포됐다. 그리고 "한달이 채 되지 않아 한국에서 유신이 선포됐다."(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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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새마을운동 - 한 마을과 한 농촌운동가를 통해 본 민중들의 새마을운동 이야기
김영미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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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1932년 7월부터 1940년 12월까지 조선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여 '모범 부락'으로 선정된 마을을 집중 육성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승만 정부 하에서도 자발적으로 마을환경을 개선하는 마을을 '모범 부락'이라 칭하며 표창하는 제도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자립마을' 정책은 이전 시기 정부 정책을 계승한 것으로서, "마을은 전년도의 성과에 따라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구분되었으며 우수한 성과를 낸 자립마을로 선정되면 대통령의 특별하사금과 함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다."(51-2)


전통적인 농촌 마을을 도농 복합 마을로 변모시키고 "국가가 농촌 사회에 지배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마을] 신들이 가진 신성을 전유해야 했다."(38) 국가는 마을의 공존 영역을 해체하여 마을회관이나 정미소, 구판장 등이 들어선 공유재산 영역으로 재배치하고, 동리 이장을 통해 하부 행정을 보조하도록 했다. 이장의 급여는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세를 모아 충당하도록 함으로써, "행정비용을 주민들에게 전가하는 효과"(45)도 거두었다. 


해방 후 농촌 지역의 변모를 이끈 주요 원동력은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다. 농지개혁은 일정한 경제력이 있는 자소작층에게 소작지를 분배하여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해체시키고, 소작권을 매개로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태롭게 했던 마름의 존재를 무력화시켰다."(108) 1950년 12월에 공포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은 "씨족과 지역, 신분 등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군사조직의 편재로 전국민을 통합"하여, 국민은 "국가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할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116)


그러나 전후 약자가 월북하거나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촌 지역은 이념적으로 단일화되고, 보수성이 짙은 씨족 공동체로 되돌아갔다. "전통적 신분 관념"과 "부계 중심의 위계질서"에 균열을 낸 것은 1960년 이후에 대거 등장한 청년 이장들이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유학하는 것과 도시에서 근대적인 직업을 갖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한 이들로서, 자신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자신과 마을의 생활환경을 도회지와 같은 수준으로 변화시키는 사업"(160-2)에 쏟아부었다.


부녀회 활동도 씨족 공동체에 균열을 가하고 국가와 주민들을 밀착시켜주었다. "당시 여성들은 이름 석 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출가 후 한 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호명된 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녀회를 매개로 국가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자, 여성들은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이 마을과 국가의 열렬한 투사가 되었다."(210) 부녀회 사업을 통해 마련된 기금으로 진행된 "부녀회 관광은 여성들만의 해방구였다."(214)


국가가 깊숙히 개입한 새마을운동은 필연적으로 정치운동과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당읍면지도장이나 부지도장의 권력은 대단하여, 읍면 사업은 그들과 함께 사전 회의를 통해 결정되었으며, 그들이 마을에 어떤 불편사항이 있다고 말하면 즉각 반영되었다."(215) "도시에서 유신반대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진던 때에 농촌에서 박정희 정부의 지지표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지배전략 때문이다."(218)

 

국가주도의 계몽운동은 농민들의 경제적 빈곤을 지배체제와 정책의 한계가 아니라, "농민들 자신의 게으름과 낭비적 생활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책임을 돌린다." 이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사화私事化' 전략"(62)으로서, 새마을운동의 주요 전략이기도 하다. 새마을운동은 "근대화운동의 주체를 마을로 설정"(352)하여 국가가 개인의 결함을 치유해주는 적극적인 시혜자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새마을운동 지도자나 마을 이장 역임자들은 그들과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박정희 정부의 지지자로 남아 있다."(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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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특설대 -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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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대한 저항, 조선인 자치 추구, 사회주의혁명 노선의 수용 여부를 놓고 다양한 흐름이 존재"하던 만주의 조선인 사회는 1931년 9월 18일에 벌어진 만주사변을 계기로 "친일과 반일 어느 한쪽을 분명하게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몰렸다."(158) 조선인 항일 운동가들은 코민테른의 1국 1당제에 따른 중국공산당 입당 지시와 친일파 모임인 '간도협조회'의 회유와 모략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공산당 내부의 친일 첩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반민생단 투쟁은 "어처구니없게도 일본의 특무조직이나 밀정이 아니라 조선인 항일 혁명가를 주요 투쟁 대상으로 삼았다."(117) 분파 숙청이 외부 투쟁을 압도한 상황에서 "민생단 혐의를 뒤집어쓴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 변절, 은신 같은 몇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118)


"동만주 지역에서 작전을 펴다가 1943년 말 러허 성으로 이동해 팔로군을 비롯한 중국인 항일 부대 토벌에 투입됐고, 나중에는 철석부대 산하로 편입돼 독립보병대로 활동"(18)한 간도특설대는 이러한 배경 위에서 탄생했다. 조선인들이 본격적으로 간도특설대에 배치된 시기는 '빗질 작전'이나 '말파리 작전'으로 불린 노조에 부대의 대토벌로 간도 지역의 무장 항일운동이 사실상 막을 내린 뒤였다. 그러나 현장지휘관의 즉결처분권을 뜻하는 임진격살(臨陣格殺) 제도를 패망까지 유지한 만주국은 설립부터 해체까지 줄곧 전시 상태였다. "만주국의 역사는 바로 항일 무장 세력에 대한 '토벌'의 기록임과 동시에, 그것에 맞서 투쟁한 '반토벌'의 기록"(183)인 것이다.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신현준에게는 "일본군 부대에 통역으로 들어갈 때나, 펑텐 군관학교에 들어갈 때나, 간도특설대 창설에 몸담을 때나 심적인 부담을 느낀 흔적"(38)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펑톈 군관학교 5기 출신인 정일권은 "만주국에서 옌지 헌병대장 등을 지냈고 일제 패망 때 소련군에 체포돼 시베리아로 이송되던 중 탈주해 남한으로 왔다.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다."(162)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부임한 것은 1943년 2월이었으며, 그는 "항일연군이란 표현을 거의 쓰지 않고 게릴라라는 용어를 고집했다.'(228) 그의 창씨명인 시리키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우연인지 모르지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폭탄투척 의거 때 중상을 입고 26일 뒤 숨진 상하이파견군 사령관의 이름"(363)이었다.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조선인들은 "일본군이나 만군 장교로 가는 길에 위화감을 갖지 않았다." "일제 군국주의 체제 아래서 군 장교의 위상과 권한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으며(38) 장교 임관은 입신양명의 보증수표였다. 간도특설대 대원 중에 만주의 치안 숙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은 이들은 175명에 달하며, "그중 조선인이 167명, 일본인이 8명이었다."(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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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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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승전의 영광과 축복을 몸소 체험하면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생존은 '제국의 영유(領有)'에 달려 있으며, 일본은 자위(自衛)를 위해서 영토를 확대해온 것"(46)이라는 호전적 애국주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치가들이 국내의 농촌 과잉인구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만주를 일본 국민의 발전을 위한 "독점적 지역"으로 재인식하면서, 만주는 "생명선"이자 일본의 "특수권익"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나갔다.


기획원을 본거지로 삼아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건설을 추진했던 일본의 혁신관료들은 일찍이 기타 잇키가 <일본개조법안>에서 주장했듯이 폭력을 수반한 국가개조를 옹호하였고, "독자적인 법칙 아래 운동을 완성하는 사회의 구조 또는 그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그 공학적인 지도를 실행"(31)해야 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사회과학도 수용했다. 기시를 비롯한 이들은 국가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테크노크라트적 지도자"(33)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


떠오르는 제국 일본에게 만주는 조선을 지배하고, 중국을 제압하며, 소련을 감시하는 교두보이자, 미국과 벌이게 될 최후의 한판을 준비하는 병참기지였다. '세계제패'라는 막중한 운명을 짊어진 만주국은 계획경제, 군부독재, 사상통제가 한 몸을 이룬 거대한 병영국가로서 야심찬 '정치가'와 '군인'들의 등용문이었다.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모두 만주제국이라는 대일본제국의 '분신'이었던 것"이다.(12)


박정희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이념으로 하는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제도나 사상 면에서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황민화정책이 본격화"(107)되던 193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박정희와 같은 청년들이 나중에 '피지배민족'에서 '제국적 주체'로 변모하고 만주에서 활약할 꿈을 꾸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제국 일본의 동심원적인 확대가 가져온 '음덕' 덕분"(47)이었으며, "박정희가 택한 길은 '동아신질서'에서 제국의 정당한 주체로서의 지위를 살려 황국 군인이 되어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122)


그러나 1944년 12월 소위 임관과 1945년 7월 중위 진급이라는 그의 짧은 성공은 종전(終戰)으로 중단되었다. "만주에서 종전을 맞이한 박정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도하는 광복군에 합류한 뒤 이듬해 5월에 귀환선 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123) 1948년 여순사건에 따른 숙군작업에서 남로당 가입이 적발된 박정희는 1949년 2월의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으로 파면이 언도되었지만, 그마저 10년 감형과 형집행정지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를 부활시킨 것은 백선엽을 비롯한 만주군 선배들의 배려와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이었다. 


한편, 미국의 일본점령을 "일본 국민 길들이기, 모럴의 파괴"(200)라고 규정한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을 향한 "잃어버린 뿌리에 대한 열렬한 향수"와 "심오한 꿈이 깃든 강력한 정치"(160)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연료 삼아 전후 정치권에서 부활을 도모했다. 그는 점령에 대한 반동으로 확산되는 "내셔널리즘 풍조"를 적극 이용하여 세력을 얻었고, 만주국에 적용하던 통제경제 실험을 "일본적 경제시스템의 원형"(178)으로 단단히 이식시켰다. 기시에게 "일본헌법은 일본의 빛나는 전통과 역사를 깎아내리는 전전부터의 오점"에 불과했으며, "자주적인 헌법을 새로이 제정하는 것"(206)만이 점령정치의 굴욕을 씻는 유일한 길이었다.


박정희 역시 "막강한 군을 배경으로 하는 리더십, 소수의 경제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의사결정과 자원배분 권한 독점, 수출시장 확보와 기술력 및 외자 도입을 목적으로 하는 대외관계 구축, 중화학공업화를 향한 적극적인 재정지출, 그리고 만주국협화회를 방불케 하는 국민동원을 위한 새마을운동 등"(218) 만주국과 유사한 형태로 국가를 조직했다. "박정희 정권 치하의 한국은 만주국에서 거행된 국민대회, 추도식, 전몰자기념비, 학생웅변대회, 표어 짓기, 반공대회, 체조, '건설'이나 '재건'이 붙은 슬로건, '총력안보', '총동원' 등을 모조리 모방"(271)한 병영국가였다. 기시가 청출어람의 옛 식민지 지도자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월 혁명 이후 "한 번 더 혁명해야 한다. 혁명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외친 함석헌은 물론이요, <사상계>의 지식인들도 "정부의 무능과 분열, 인플레이션과 실업자의 증가, '혁명과업'의 후퇴 등을 엄하게 추궁하면서 경제번영의 건설과 국민성의 '개조'라는 두 측면에서 국가발전의 이정표를 제시"(220)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시 강력한 국가주의는 모두의 염원이었다. "빈곤에서의 해방이라는 경제적 욕망과 '조국 근대화'라는 민족주의적 욕구"(224)가 전국민을 감싸고 있었기에,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프로젝트는 자율과 동원이라는 양대 엔진을 달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혼돈에 빠진 조국을 구해낸 "중흥의 아버지"는 1968년 제2경제론을 표방하여 동원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것은 "일본의 교육칙어를 상기시키는 '국민교육헌장'의 제정과 민족교육의 강화"(243)를 통해 추진되는 정신의 동원이었다. '화랑도'에서 민족정신의 기원을 찾는 이선근의 '신라중심사관'은 "북한과 대치하며 민족사관을 정립해서 이데올로기 면에서 국내체제를 다잡으려는 박정희 정권에게 유용"(266)한 수단이었다. 


마침내 "1972년 11월 21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퍼센트의 투표율과 91.5퍼센트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 대통령이 "국회해산권과 긴급조치권을 장악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함으로써 의회와 사법에도 견제"(252)당하지 않는 초법적인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 마지막은 다시금 혼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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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중국까지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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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중국 사유에 천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회'와 '회귀'라는 방식을 통해 "틀 바깥의 사유 가능성"(12)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회'는 "사유의 낯설음이 무엇"인지를 체험하는 과정이며, '회귀'는 "유럽적 이성을 중국이라는 바깥을 통해 간접적으로 조명"(15)하는 방식이다. 즉, 중국 사유는 유럽적 이성의 대립항이나 우열을 가늠하는 경쟁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바깥에서 '자아'의 한계를 검증하고 최종적으로 '자아'로 되돌아가는 노정을 확장해주는 '다른' 사유의 지평인 것이다.


그리스 모델은 '효율성'에 기반한다. "효율적이려면 모델의 [관념적인] 형태를 구성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설정"한 뒤, "그 목적을 근거로 행동에 착수한다." 이처럼 "유럽의 고전 사유는 지성과 의지 두 능력이 결합한 작용을 구상"(17)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이론과 실천의 불균형"이라는 난제(aporia)가 도출된다. "실천은 이론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 사유에는 언제나 "매개자", "중간자"가 '요청'되며, 이것이 "모델화와 적용을 나누는 구렁을 메우는"(19) 역할을 한다.


그러나 모델과 적용을 "매개"로 연결하는 방식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전쟁이 대표적인 예인데,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실제 전쟁은 "결코 모델로서의 전쟁처럼 진행"되지 않으며, "이것이 바로 전쟁의 '본질' 또는 '개념'이다." 그는 모델화가 "전술에서 전략으로 올라갈수록 덜 작동한다는 점"(27)을 간파했다. 제식동작은 훈련이 가능하지만, 전투상황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결국 전략의 완성은 '천재적 능력'으로 무장한 위대한 장군을 필요로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진행과정에서 모델화가 빗나가는 것을 '마찰'(fric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마찰은 계획한 행동을 세계에 던졌을 때 주변상황들로부터 닥쳐오는 저항이다."(29) 


중국 사유는 '모델화'와 '적용'이라는 구분을 파괴한다. <손자병법>은 전략가가 '지세', '지형'[形]으로 규정되는 상황에서 출발할 것을 권고한다. 이 상황은 "모델화한 상황이 아니라, 내가 이미 개입되어 있는 상황이다."(32) "전략의 원리는 상황 속에서 유리한 요인들을 탐지해내고 그것들을 활용"(34)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처럼 중국 사유는 "목적성에 대한 사유을 제거"하고, "목적을 고갈시키는 대신 성향[勢]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40)


한마디로 중국 사유는 "수단-목적보다는 조건-귀결의 관계"를 중시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상이 도가이다. 도가 사상은 "성향에 순응하고 성향과 함께 가는 것, 앞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보조하는 것, 즉 영광도 없고 심지어 주의를 끌지도 않으면서 겸손하게 둘째가 되는 것"을 말한다. 노자는 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만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도와줄 뿐이다. (輔萬物之自然)"(51) 


또한 중국 사유는 "자아-주체보다는 상황에서 출발"(54)한다. 유럽 사유는 "관념적 형상을 실재 속에 집어넣는" 과정에서 "항상 어느 정도의 인위성을 전제한다."(55) 그러나 "중국 사유의 중심 용어는 '변화'(變化)이다." 중국 사유는 "행동하기보다 변화시킨다."(60) 유럽이 존재와 인식을 '잠재태'와 '현실태'라는 대립 양상으로 파악할 때, 중국 사유는 사태를 하나의 흐름 안에 편입시킨다. "이런 운행은 그 자체로서 온전한 실재(운행의 도道)이다."(70) 길에 대한 유럽적 상상은 항상 "목적(telos) 관념과 결부"되지만, 중국의 도(道)는 "어딘가로 이끄는 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일이 가능한 길"이다. 여기에는 "운행이 있을 뿐 진보는 없다."(75-6)


우리에게 은폐되고 잠재되어 있는 전제는 저자가 반사유의 역할을 맡기고 탐색한 중국 사유이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 안에 '형세'와 '변화'를 응축하여, 인위적 조작 가능성을 제거한다. 모든 사유의 궁극이자 원천인 '하늘'(天)은 "절대 고갈되지 않고 끊임없이 쇄신되도록 하는"(76) 원리이다. 하늘은 '조화'의 가치만을 추구하기에, 중국의 문사들은 "군주에 저항하기 위한 이상(ideal)으로 조화만을 강조하였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그 이외의 다른 이상은 생각"(139)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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