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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 세계사의 맥락에서 중국을 공부하는 법 ㅣ 새로운 옥스퍼드 세계사
폴 로프 지음, 강창훈 옮김 / 유유 / 2016년 4월
평점 :
초기 중국인 공동체의 주요한 특징은 그들이 "세계와 인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였으며, 초자연적 설명이나 신성한 창조주는 필요하지 않다고 이해"(33)한 점이다. 여기에는 서구 사상에서 두드러지는 형이상학적 탐구가 배제되어 있다. 중국 사상가들은 "대체로 우주를 매우 친숙한 공간으로 여겼고, 인간을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꾸준한 노력을 통해 도덕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22) '존재의 대연쇄'라는 서구의 관념이 위계질서의 사다리를 놓았다면, 중국 사유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전체"속의 개별적 존재들에 주목한다.
'차이'보다는 '관계'에 관심을 두는 경향에는 대륙을 하나로 이어준 문자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갑골문에 남겨진 문자들은 상징성이 무척 강했기 때문에 "언어가 다를 경우에도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상 왕조에 뿌리를 둔 한자는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 걸쳐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를 하나의 정치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45) 그러나 '조화'를 중시하는 사상이 처음부터 각 지역에 할거하는 집단들 간의 현실적인 '차이'를 압도할 수는 없다. '조화'는 '차이'를 메우는 격렬한 투쟁을 통해 달성되기 마련이다.
"기원전 1045년경 상나라 서쪽의 주족周族이라는 봉신이 상나라의 수도를 정복했다." 주족은 하늘을 "인간 세상에서 정의가 승리하도록 도와주는 자비로운 힘으로서 우주 전체를 뜻"한다고 보았으며, 하늘이 자신들의 정복 전쟁을 축복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천명天命의 기원이다."(50) 주족의 기운이 쇠하고 격렬한 분쟁의 시기가 재개되자, 전국 시대의 각국 군주들은 "출신 성분보다는 기술과 조직력을 기준으로 군사와 관료를 선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쟁의 성패가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는 것보다 군사를 무장시키고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58)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전국 시대 초기(기원전 600년경 ~ 400년경)는 전 세계가 "전례없는 변화와 불확실성"을 겪은 시기였다. 혼란을 수습한 "진나라의 법가적인 군주들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교역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전시에 경제력을 총동원할 수 있도록 국가 구조를 재편했다."(60) 체제 안정성을 갉아먹은 지나친 가혹함을 제외하면, 진나라는 이후의 "모든 왕조가 제도적 전범으로 삼은 중앙 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창조한 기념비적인 업적"(90)을 남겼다.
한나라는 흉노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이룩한 제국과 문명이 국경 너머에 있는 '야만적인' 유목 민족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우월 의식을 갖게 되었지만, 유목 민족의 문화 가운데 수많은 요소를 흡수"(95)하기도 했다. 동중서는 "황제를 천자이자 하늘과 땅 사이의 중재자"로 규정하고, "온 세상의 조화와 안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반신적半神的 법제정자"(103)라는 생각을 유가적 통치 이념에 포함시켰다. "유가 사상으로 합리화한 법가의 제도들로 제국의 원형"을 만든 한 왕조는 "로마 제국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붕괴된 것과 대조적으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었다."(115-6)
한왕조가 붕괴하고 유목 민족들이 장성 이남에서 정치적 세력을 확대하면서, '중국인'이라는 말의 정의가 크게 확장되어, "수많은 비한족 계열 민족은 물론이고 그들의 물질문화와 사회 규범마저도 통합"되었다. "남중국과 북중국은 독자적으로 진화했지만, 양측 모두 스스로를 '문명화된 중국인'이라고 주장했으며, 모든 영토를 아우르는 하나의 중앙 집권적 제국이라는 옛 한나라의 이상을 회복하기를 갈망했다."(122) 이 시대의 군주들이 잔혹하고 저열한 인간성을 유감없이 표출하여, 유가의 원칙을 무너뜨리자,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고 조정에 나아가는 길을 포기"하는 도가의 가르침이 재조명되었고, 이는 "불교가 성장하는 데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129)
장성 이북과 이남의 문화가 혼융되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시기가 당 왕조이다.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서유럽의 샤를마뉴 대제가 로마 제국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실패한 것과 달리, 당나라는 "영토, 중앙의 통제력, 번영, 문화적 화려함 등의 측면에서 대제국 한나라를 가볍게 뛰어넘었다."(178) "당나라의 평화와 번영, 당나라 조정의 이국적 뿌리 그리고 당나라 군대가 중앙아시아에서 이룩한 안정 덕분에 당나라는 전례 없는 국제 교역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 지구적인 교차로였다."(158)
당나라는 강력한 귀족층과 관료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했지만, 송나라는 "지식인층이 과거 시험을 통해 조정 관료로 진출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유학자 관료들은 "예술, 문학, 철학에서 중국 문화사상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문명화되지 못한' 유목 민족에 대한 반감"(208)과 여성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좋은 여성'으로 성장하도록 키워내는 것이 훌륭한 가문"(210)이라는 편협한 사고를 사회 전반에 퍼뜨리기도 했다. 빈약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송 왕조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남부 지방을 본격적으로 개간한 농업 혁명과, 금속 화폐와 더불어 종이 현금 증명서를 사용한 상업의 번영 덕택이었다.
원 조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송을 몰락과 피정복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송나라의 신유가 사상을 후원했다." 몽골은 "거란인, 탕구트인, 위구르인, 티베트인과 전략적 동맹을 맺고 이들에게서 선발한 인재들을 정부 관료로 통합해냄으로써 한족이 이전에 결코 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각 민족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융합시켰다."(232) 영토와 종족, 그리고 문화까지 사회의 전반적인 경계를 제국 규모로 확장한 그들 덕분에 "14세기 원 왕조가 몰락한 뒤 송나라 황제가 꿈꾼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한족 왕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233)
명을 건국한 홍무제의 소농小農 중시 정책도 "두 번째 상업 혁명이 중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명나라 때는 서남부 지방에서 더 많은 토지가 개간"되었고, 구릉이나 모래흙에서도 잘 자라는 아메리카산 작물의 유입은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전 시기에 걸쳐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 기여했다." 국제 교역이 꾸준히 성장했으며, "상인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함에 따라 아직 이론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 유가의 상인에 대한 전통적 선입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248-9)
청나라는 사방으로 원정을 전개하여, 현재의 중국 국경을 획정하였다. 강희제는 정복 전쟁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간언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황제였다. 그는 "우수하고 헌신적인 한족 인재를 관료로 선발"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번영을 누린 위대한 시기"를 열었다. 청 왕조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보수성이 뚜렷하였으며, 한족 관료들도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수용하여 "명나라 말기에 유행한 개인주의와 철학과 예술 분야에서의 창조성을 부정했다."(273) 청 조정은 국제 교역을 "문명이 덜 발달한 '야만인'이 천자와 그 조정에 존경을 표시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쯤으로 여겼고, 18세기 말 "세계의 권력 지형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지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280-1)
1차 세계 대전 후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독일의 이권을 일본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한 것은 중국인에게 위선의 극치라는 인상"(317)을 심어 주었다. 이에 실망한 쑨원은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뒤 제정 러시아가 청 조정에게 강요했던 불평등 조약을 즉각 포기하는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그 결과 "1923년 쑨원과 그의 추종자들은 국민당을 레닌의 노선에 따라 공식적으로 개조했다."(325) 그러나, "급진적인 공산당 조직가와 좀 더 보수적인 국민당 당원 사이에는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다."(326) 장제스는 국민당에 파시즘의 기운을 불어넣었고, "국민당 열성분자들은 독일의 나치 돌격대Brown Shirts를 벤치마킹하여 남의사藍衣社를 결성했다."(335)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도시에서 노동 운동을 벌이던 공산당 조직이 장제스에게 마구잡이로 숙청 당하면서 농촌을 기반으로 삼은 마오쩌둥이 세력을 넓혀갔다. "홍군은 농촌 마을들을 안전하게 보호했고, 그래서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토지 몰수와 지주 처형을 수행할 수 있었다."(340) 일본과의 전쟁보다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한 장제스는 국민들 사이에서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라의 일부마저도 팔아넘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344)되었으며, "농민들은 일본에 저항하는 홍군에 자식들을 기꺼이 입대시켰다."(351)
전후 권력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마오쩌둥의 통치 방식은 "대중 운동을 통해 전체 인민이 당의 정책을 이행하도록 조직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모든 인민을 '단위'單位 조직에 편입시켜 "강력한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도 결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민의 삶을 통제"(371)했다. 숙청과 정치적 파행, 박해로 점철된 마오쩌둥의 시대가 지나간 뒤,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국가 사회주의의 낭비와 비능률로부터 중국 경제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의 경제 개방이 "정치권력에 대한 당의 독점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젊은 동료들이 "다당제 국가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논의를 시작"(396)하자 다시금 숙청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