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중세사
미야쟈키 이치사다 / 신서원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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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시대에 이르면 본래 천자와 신하들 사이에만 존재하던 군신관계가, 효렴孝廉이라는 관료 추천을 통해 관계에 입문한 유학생과 지방관 사이에도 성립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성립된 군신 관계는 "가정도덕인 효행보다도 중요하다고 간주"되었는데, 이것은 "개인이 입신출세하는 것이 일족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설령 불행하게 자신 또는 그 일가가 멸망하는 비운을 당해도, 그의 충성이 조정에 인정되면 나머지 일족이 영예를 받고 특전을 향유했기 때문이다."(24-5) 이는 통일왕조가 무너지면서 보편 원리의 사적 전용轉用이 시대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징후였다.


도의가 무너진 자리를 이윤 추구가 파고들었다. 난세에 이르러 부자들이 동전을 수중에 넣고 시장에 내놓지 않자, "전납錢納으로 부賦를 부담"해야 했던 농민들은 본적지에서 도망하여,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객客으로 떠돌았다. 이들은 "큰 도시로 들어가 날품팔이 인부가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장원에 들어가 예농隷農"(34) 신세로 전락했다. 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을 이룬 위魏는 구품관인법을 도입하여 재능있는 인물을 등용하고자 했지만, 태평성대를 마음껏 누리려는 귀족층은 이를 문벌 자제들의 출세 수단으로 악용했다.


통일을 이룬 조씨 일가의 위 왕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진晋왕에 봉해진 사마씨 일가는 조씨 일가가 예정된 각본대로 한 왕조를 선양禪讓받은 것을 모방하여 무력으로 왕조교체를 이루었다. 진무제는 위왕조가 일족을 권력의 중심부에서 배척하여 자신들에게 왕조를 탈취당한 것을 거울삼아, "그 반대되는 정책을 취해 대대적으로 봉건을 행해서 일족의 자제에게 영토를 분배했다." 그러나, 사병을 거느린 봉건 제후들은 왕조의 기대와 달리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무력에 호소"했으며, 곧 팔왕의 난이라는 일족간의 살인극을 벌인다.(97-8)


팔왕은 장래의 일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당시 진의 영토 안에서 머무르던 이민족들은 "문명화한 숙번(熟蕃, 정부당국에 잘 순응하는 야만인)"이었고, 중국적 교양을 어느정도 체득한 집단이었다. 이들이 자립하자, "부패한 중국정권보다 소박한 이민족 정권"(104)을 선호한 서민은 물론 지식계층이 자진하여 그들의 휘하로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나 북방민족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엇이든지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125) 


"이른바 오호五胡시대에는 화북 중원지방에 이민족이 집단적으로 이동하여 우왕좌왕하는 한편, 동시에 새로운 민족이 만리장성 저편으로부터 중국으로 적지 않게 흘러들어 왔다."(207) 격렬한 이민족간의 투쟁을 진압하고 동화 정책을 편 북위의 효문제는 왕조의 안정을 위해 도도한 기세로 한화韓化정책을 추진하였다. 통합을 모색한 한화정책이 의도와 달리 "중국사회의 산물이던 귀족제도를 되살려 관리 선임에 가문의 등급을 중시"(224)하는 풍토를 되살리자, 왕조 방위에 중심축을 담당하는 선비족 군인집단이 소외되어갔다.


"차가운 북풍을 맞으며, 언제 발생할 지 모르는 북방기병의 습격에 대비"하는 무천진의 장군과 사병들은 각별한 동료애를 품은 결속력 강한 집단이었다.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뒤, 북변의 육진은 관계가 끊어져 방치되고 그 지위가 점점 저하"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군벌 투쟁을 종식시키고 대륙을 석권한 것은 수 문제隋 文帝였다. "그는 종래의 구품관인법이 귀족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제도로 타락했다는 점을 간파하고, "중앙 정부에서 시험을 행하고, 급제자에게 고위관직에 오를 자격을 내리는" 과거제를 시행하여 왕조의 안정을 기했다.(258)


수 왕조는 남방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진 나라를 손쉽게 멸망시키고, 대륙 통일을 이루었지만, 무리한 토목 공사와 고구려 원정 실패로 막대한 고통에 시달린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수 왕조를 대체한 당唐은 한제국의 재건으로 간주되었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한대에는 "귀족과 서민을 하늘로부터 부여된 본질적 차이가 있는 존재"라고 여기는 '유품'流品 사상이 아직 발달하지 않아, "서민에서 개인의 실력으로 조정 대신으로까지 출세하여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당대에 재차 성행한 귀족주의는 서민이 관료로 출세하는 길을 원천봉쇄했다.(286)


"보통의 왕조라면, 안사의 난과 같은 대란을 겪고 난 뒤 곧 멸망해 버리고" 대륙은 다시금 혼돈으로 빠져드는 것이 수순이다. 그런데 당왕조는 거듭된 내란으로 "반신불수와 같은 상태에 빠져들었으면서도 150여 년 정도를 여전히 존속했다." 그것은 당 왕조가 재정국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종래의 왕조가 거의 예외없이 무력으로 지탱되었던 무력국가인 것에 반하여, 재정국가는 소금 전매 같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우선 재원을 확보하고 재정을 충족시켜"(313)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국제 교역에 힘입은 근세적인 상공업 도시의 발달도 한몫을 담당했다.


재정 정책은 왕조의 생명을 이어가는 극단적인 처방으로서, 당왕조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큰 희생을 초래했다. "일상 생활에 필요불가결한 소금에 몇 십배의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억지정책이었다."(328) 국가 전매제가 영속화되자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밀수를 감행하는 집단이 대거 생겨났고, 이들은 곧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비밀결사로 이어졌다. 마침내 주전충이 환관과 관료들을 대량 살육한 후에, 천자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후량後梁을 세운다. "이때부터 중국은 (또다시) 단명왕조가 잇따라 일어나는 오대五代의 분열시대로 접어든다."(336)


저자는 후한 말부터 송 왕조 이전까지를 중국 중세로 정의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운명과 이유 없는 재앙"(348)이 끝없이 이어지는 '대분열'과 '혼돈'이다. "힘이 만사를 결정하고, 권력관계만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잣대였기 때문에, "강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포악하고, 일단 권력을 잃으면 이제까지의 응보를 일시에 받는" 비극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이 때마다 몇 십배 몇 천배의 사람이 죄없이 희생자가 되는 구조가 짜여져 있었다."(349) 송 왕조가 문치文治를 내세운 것이 우연이 아닌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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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
세오 다쓰히코 지음, 최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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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관점에서 보면 8~9세기는 하나의 종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통일 왕조가 유라시아 대륙의 세 거점을 장악한 시기이다. 크리스트교의 프랑크왕국과 동로마제국, 이슬람교의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 불교의 토번과 당 왕조는 "육로와 해로를 잇는 교통과 정보망의 개혁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일종의 세계 경제 체제를 형성"하였다.(60-1) 당 왕조는 유목 민족을 두려운 적수이자 격퇴해야 할 야만으로 규정하고 장성을 쌓아 분리하는 데 주력한 진한秦漢 왕조의 두려움을 반복하지 않고, 농목접경선에 사슬처럼 발달한 오아시스 도시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다.


농목 접경 지대는 옛부터 농업과 유목이라는 다른 생업이 연결되는 통로 공간이자, "각 지대에서 생산된 산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여 정보와 부가 집적되는 장소"였다.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축적된 정보와 부를 보증하고 조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접경선을 따라 "많은 도시와 정치권력이 발생"했다.(40) 수 왕조의 수도로 출발한 장안은 대륙의 서북 지역에 위치한 농목접경지대에서 세계 경제 체제의 거점으로 기능했으며, "농목 복합에 기반을 둔 중국 고전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43) 


중국 역사에서 "내중국(중국 본토)과 외중국(만주, 내/외몽골, 신강, 티벳)을 모두 포괄하는 왕조는 몽골족의 원과 만주족이 세운 청"이 있으며, "몽골, 신강 전역과 만주 남반부를 통치권에 넣은 당"(74)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서 장안과 북경이 가장 오랜 기간 왕도王都로 지속한 근본적인 이유는 두 도시가 농목접경선에 있어 왕도의 기능을 하는 데 꼭 필요한, 내중국의 농경 지역에 대한 통치 기능과 외중국의 유목 지역에 대한 외교적 정치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85) 


처음부터 이상理想 도시로 설계된 장안은 "'도시는 대지를 상징하는 네모꼴을 취함으로써 대지를 덮고 있는 둥근 하늘의 중심과 우주축을 통해 연결된다'는 중국의 전통적 도시계획에 기반"(67)하여 네모 형태를 취하였다. 여기에는 "왕도를 하늘이나 신이 정통성을 부여한 도시로 연출함으로써 왕도의 위상을 명확히 나타냄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군사력 집중도가 낮은 상황을 상징의 힘으로 극복"(107)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왕도가 군사력에 바탕을 둔 무력 지배의 한계를 보완하고, 국가 통합에 이바지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구현체로 기능한 것이다.


그러한 역할을 담당한 전통 사상에는 "지상에 있는 우주의 거울로 왕도를 건설한다는 천문사상, 왕조 의례의 무대로 왕도를 짓는다는 예사상禮思想, 중국 고래로 <주례>가 제시한 이상 도시의 모델, 그리고 음양오행 사상, 왕자王者에게 적합한 토지인지를 감정하는 역경易經 사상" 등이 속한다.(153) 여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세계 종교인 불교가 비한족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기제로 활용되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었다. 전근대에는 극소수의 지배계급을 대상으로 "같은 왕조에 속한다는 공유의식을 형성하면 왕조의 정통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108)


왕조 후기로 가면, 당 왕조의 존재는 기성 사실이 되고 "황제, 관료, 서민 모두 충실한 주거환경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세계의 수도를 수놓은 활발한 상업 활동은 도시 기능을 분화시켜, "성 안팎을 무대로 (백성들의 삶에 밀착된) 민간설화가 널리 유행하였다."(216) 공고한 제국 체제가 이완되면서 장안은 "모든 백성에게 무의미하고 무표정하던 건축 당시의 격자형 도시 공간"에서 "주민이 공유하는 생활 공간"으로 거듭났다. 여기에 "상업 교통로가 안정되고 확대됨에 따라 불교사원을 비롯한 종교 시설로 전국 각지에서 순례자의 발길이 이어졌고, 이후 장안은 성지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우주론에 기반을 둔 성스러운 도시가 밟아간 변화의 과정이다."(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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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 세계사의 맥락에서 중국을 공부하는 법 새로운 옥스퍼드 세계사
폴 로프 지음, 강창훈 옮김 / 유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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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중국인 공동체의 주요한 특징은 그들이 "세계와 인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였으며, 초자연적 설명이나 신성한 창조주는 필요하지 않다고 이해"(33)한 점이다. 여기에는 서구 사상에서 두드러지는 형이상학적 탐구가 배제되어 있다. 중국 사상가들은 "대체로 우주를 매우 친숙한 공간으로 여겼고, 인간을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꾸준한 노력을 통해 도덕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22) '존재의 대연쇄'라는 서구의 관념이 위계질서의 사다리를 놓았다면, 중국 사유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전체"속의 개별적 존재들에 주목한다.


'차이'보다는 '관계'에 관심을 두는 경향에는 대륙을 하나로 이어준 문자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갑골문에 남겨진 문자들은 상징성이 무척 강했기 때문에 "언어가 다를 경우에도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상 왕조에 뿌리를 둔 한자는 중국의 장구한 역사에 걸쳐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를 하나의 정치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45) 그러나 '조화'를 중시하는 사상이 처음부터 각 지역에 할거하는 집단들 간의 현실적인 '차이'를 압도할 수는 없다. '조화'는 '차이'를 메우는 격렬한 투쟁을 통해 달성되기 마련이다.


"기원전 1045년경 상나라 서쪽의 주족周族이라는 봉신이 상나라의 수도를 정복했다." 주족은 하늘을 "인간 세상에서 정의가 승리하도록 도와주는 자비로운 힘으로서 우주 전체를 뜻"한다고 보았으며, 하늘이 자신들의 정복 전쟁을 축복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천명天命의 기원이다."(50) 주족의 기운이 쇠하고 격렬한 분쟁의 시기가 재개되자, 전국 시대의 각국 군주들은 "출신 성분보다는 기술과 조직력을 기준으로 군사와 관료를 선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쟁의 성패가 "조상의 영혼을 숭배하는 것보다 군사를 무장시키고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58)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전국 시대 초기(기원전 600년경 ~ 400년경)는 전 세계가 "전례없는 변화와 불확실성"을 겪은 시기였다. 혼란을 수습한 "진나라의 법가적인 군주들은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교역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전시에 경제력을 총동원할 수 있도록 국가 구조를 재편했다."(60) 체제 안정성을 갉아먹은 지나친 가혹함을 제외하면, 진나라는 이후의 "모든 왕조가 제도적 전범으로 삼은 중앙 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창조한 기념비적인 업적"(90)을 남겼다.


한나라는 흉노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이룩한 제국과 문명이 국경 너머에 있는 '야만적인' 유목 민족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우월 의식을 갖게 되었지만, 유목 민족의 문화 가운데 수많은 요소를 흡수"(95)하기도 했다. 동중서는 "황제를 천자이자 하늘과 땅 사이의 중재자"로 규정하고, "온 세상의 조화와 안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반신적半神的 법제정자"(103)라는 생각을 유가적 통치 이념에 포함시켰다. "유가 사상으로 합리화한 법가의 제도들로 제국의 원형"을 만든 한 왕조는 "로마 제국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붕괴된 것과 대조적으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었다."(115-6)


한왕조가 붕괴하고 유목 민족들이 장성 이남에서 정치적 세력을 확대하면서, '중국인'이라는 말의 정의가 크게 확장되어, "수많은 비한족 계열 민족은 물론이고 그들의 물질문화와 사회 규범마저도 통합"되었다. "남중국과 북중국은 독자적으로 진화했지만, 양측 모두 스스로를 '문명화된 중국인'이라고 주장했으며, 모든 영토를 아우르는 하나의 중앙 집권적 제국이라는 옛 한나라의 이상을 회복하기를 갈망했다."(122) 이 시대의 군주들이 잔혹하고 저열한 인간성을 유감없이 표출하여, 유가의 원칙을 무너뜨리자,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고 조정에 나아가는 길을 포기"하는 도가의 가르침이 재조명되었고, 이는 "불교가 성장하는 데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129)


장성 이북과 이남의 문화가 혼융되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시기가 당 왕조이다.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서유럽의 샤를마뉴 대제가 로마 제국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실패한 것과 달리, 당나라는 "영토, 중앙의 통제력, 번영, 문화적 화려함 등의 측면에서 대제국 한나라를 가볍게 뛰어넘었다."(178) "당나라의 평화와 번영, 당나라 조정의 이국적 뿌리 그리고 당나라 군대가 중앙아시아에서 이룩한 안정 덕분에 당나라는 전례 없는 국제 교역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 지구적인 교차로였다."(158) 


당나라는 강력한 귀족층과 관료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했지만, 송나라는 "지식인층이 과거 시험을 통해 조정 관료로 진출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유학자 관료들은 "예술, 문학, 철학에서 중국 문화사상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문명화되지 못한' 유목 민족에 대한 반감"(208)과 여성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좋은 여성'으로 성장하도록 키워내는 것이 훌륭한 가문"(210)이라는 편협한 사고를 사회 전반에 퍼뜨리기도 했다. 빈약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송 왕조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남부 지방을 본격적으로 개간한 농업 혁명과, 금속 화폐와 더불어 종이 현금 증명서를 사용한 상업의 번영 덕택이었다.


원 조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송을 몰락과 피정복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송나라의 신유가 사상을 후원했다." 몽골은 "거란인, 탕구트인, 위구르인, 티베트인과 전략적 동맹을 맺고 이들에게서 선발한 인재들을 정부 관료로 통합해냄으로써 한족이 이전에 결코 해내지 못한 방식으로 각 민족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융합시켰다."(232) 영토와 종족, 그리고 문화까지 사회의 전반적인 경계를 제국 규모로 확장한 그들 덕분에 "14세기 원 왕조가 몰락한 뒤 송나라 황제가 꿈꾼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한족 왕조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233)


명을 건국한 홍무제의 소농小農 중시 정책도 "두 번째 상업 혁명이 중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명나라 때는 서남부 지방에서 더 많은 토지가 개간"되었고, 구릉이나 모래흙에서도 잘 자라는 아메리카산 작물의 유입은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전 시기에 걸쳐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 기여했다." 국제 교역이 꾸준히 성장했으며, "상인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함에 따라 아직 이론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 유가의 상인에 대한 전통적 선입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248-9)


청나라는 사방으로 원정을 전개하여, 현재의 중국 국경을 획정하였다. 강희제는 정복 전쟁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간언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황제였다. 그는 "우수하고 헌신적인 한족 인재를 관료로 선발"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번영을 누린 위대한 시기"를 열었다. 청 왕조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보수성이 뚜렷하였으며, 한족 관료들도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수용하여 "명나라 말기에 유행한 개인주의와 철학과 예술 분야에서의 창조성을 부정했다."(273) 청 조정은 국제 교역을 "문명이 덜 발달한 '야만인'이 천자와 그 조정에 존경을 표시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쯤으로 여겼고, 18세기 말 "세계의 권력 지형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지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280-1)


1차 세계 대전 후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독일의 이권을 일본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한 것은 중국인에게 위선의 극치라는 인상"(317)을 심어 주었다. 이에 실망한 쑨원은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뒤 제정 러시아가 청 조정에게 강요했던 불평등 조약을 즉각 포기하는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그 결과 "1923년 쑨원과 그의 추종자들은 국민당을 레닌의 노선에 따라 공식적으로 개조했다."(325) 그러나, "급진적인 공산당 조직가와 좀 더 보수적인 국민당 당원 사이에는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다."(326) 장제스는 국민당에 파시즘의 기운을 불어넣었고, "국민당 열성분자들은 독일의 나치 돌격대Brown Shirts를 벤치마킹하여 남의사藍衣社를 결성했다."(335)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도시에서 노동 운동을 벌이던 공산당 조직이 장제스에게 마구잡이로 숙청 당하면서 농촌을 기반으로 삼은 마오쩌둥이 세력을 넓혀갔다. "홍군은 농촌 마을들을 안전하게 보호했고, 그래서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토지 몰수와 지주 처형을 수행할 수 있었다."(340) 일본과의 전쟁보다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한 장제스는 국민들 사이에서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라의 일부마저도 팔아넘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344)되었으며, "농민들은 일본에 저항하는 홍군에 자식들을 기꺼이 입대시켰다."(351)


전후 권력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마오쩌둥의 통치 방식은 "대중 운동을 통해 전체 인민이 당의 정책을 이행하도록 조직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모든 인민을 '단위'單位 조직에 편입시켜 "강력한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도 결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민의 삶을 통제"(371)했다. 숙청과 정치적 파행, 박해로 점철된 마오쩌둥의 시대가 지나간 뒤,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국가 사회주의의 낭비와 비능률로부터 중국 경제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의 경제 개방이 "정치권력에 대한 당의 독점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젊은 동료들이 "다당제 국가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논의를 시작"(396)하자 다시금 숙청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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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 (양장) -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
로버트 D. 퍼트넘 지음, 정태식 옮김 / 페이퍼로드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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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1950년대와 2000년대의 '포트클린턴'은 특정 지명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이지만, 당대의 생활상이 집약된 추상적 공동체를 가리키는 보편 명사이기도 하다. 포트클린턴의 과거가 현재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은 "인구학적, 경제적, 교육적, 사회적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측면"(12)에서도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의 포트클린턴 주민들은 "가족이든 아니든간에 모든 졸업생들을 '우리 아이들'로 생각했"(13)으며, "높은 절대적 이동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같은 보조步調로 상승 이동했다." 이들의 물질적 상황은 대개 가난했지만, "공동체에 대한 (상호) 지원의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는 부유했다."(21-2) 


2000년대에 들어서자 공동체를 떠받치던 "부모와 선생님, 공동체 내의 비공식적인 멘토"는 "경제적 장벽과 이웃의 편견"으로 대체되었다. 현재의 포트클린턴은 "백만 달러에 육박하는 맨션과 노후화된 이동식 주택"이 명확히 구분된 지역에 들어서 있는 단절된 공간으로 바뀌었으며, 주민들은 더 이상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우리 아이들'로 여기는 정서적 유대감을 공유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아이들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는 이조차 매우 드물다."(51)


현재의 불평등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밀접하게 관련된 척도인 교육을 통해" 확대되고 있으며, 이는 '계급태생'(class origins)이라는 말로 집약된다.(35-6) 경제적 격차를 따라 그어진 계급 경계선은 자신의 일상생활을 "사회경제적 영역 외부의 사람들에게 노출"(61)하는 비율을 급격히 떨어뜨린다. 이는 "중상위 계급 구성원들이 가난한 아이들의 삶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 않기에, 기회격차가 벌어지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뜻한다."(66)


'이웃 간의 분리', '교육에서의 차별'과 더불어 '계급을 가로지르는 결혼의 감소' 역시 "사회 계층 이동을 위한 디딤돌이 제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65) 동일한 계급 배경을 지닌 상대방과의 혼인은, 광범위한 수준에서 인간 관계의 단절을 만들고, 이는 다시 길고 좁은 터널을 지나야만 도달할 수 있는 강고한 결속을 낳는다. "덜 교육받은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경제적 전망의 급격한 하락"은 이들을 "신뢰가 떨어지는 배우자나 부모가 되도록 만든다."(110) 이들에게 경제적 행복은 "손에 닿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질 뿐이다.


이러한 기회격차(opportunity gap)는 "부분적으로는 지금의 풍요로운 아이들이 과거의 풍요로운 아이들보다 더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만, 대부분은 현재의 가난한 아이들이 과거의 가난한 아이들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서 살기 때문이다."(50)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일차적으로 부모와의 '상호인지적 자극'(congnitive stimulation)이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주 이야기하는 부모와 함께 자란 아이들"은 훨씬 향상된 언어 능력을 갖게 되며, 유아기에 방치된 아이들은 "뇌 발달 측면에서 바로잡기 힘들 정도로 심한 결핍"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164,7)


가정 외의 환경에서 주어지는 멘토링의 격차는 아이들의 분별력 격차(savvy gap)를 더욱 악화시킨다. 부자 아이들과 가난한 아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 중 하나는 "기회의 길에 자리잡고 있는 제도를 이해하고, 그러한 제도를 자신을 위해 작동하게끔 만드는 능력에서 뚜렷하게 대비되는 차이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311) 가난한 아이들은 "대부분의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아무리 조심을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다"(316)는 말을 듣고 자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실망시키는 이웃과 제도에 마주친다.


학교는 "조직"의 측면에서는 경쟁의 평준화를 위해 존재하고 다양한 학습이 벌어지는 공간이지만, "장소"의 측면에서는 계급격차를 확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학교는 "일종의 반향실反響窒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안에서는 아이들이 학교로 가지고 오는 강점과 약점들"이 서로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중산층 아이들은 학교에서 대부분 고무적이며 혜택이 많은 메아리를 듣게 되는 반면, 저소득층 아이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낙심하게 만드는 해로운 메아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263)


한마디로, "뇌는 고립된 컴퓨터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유기체로서 발달"(165)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주된 사회화 과정을 '길거리'에서 겪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회를 잔혹하게 억압하는 일"(127)인지를 역설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들이 이러한 연구들을 직간접적으로 더 많이 학습하고, 자녀 양육에 적용"하기 때문에, 계급 차이를 확대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모든 사회경제적 계급의 부모들이 양육과 교육에 대한 지출을 늘려왔지만", 그 규모는 불균등하며, "지난 수십 년 동안 더 꾸준하게 불평등해졌다."(184)


기회격차는 단순히 개개인의 삶의 질을 주관하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적 가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은 고등학교 이후의 교육을 받지 못한 동년배들에 비해 두세 배 정도 더 투표에 참여"하지만,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다른 사회적 참여의 장에서는 급속히 빠져나가고 있다. 이는 "정치적 목소리에서 나타나는 계급적 차이"를 증폭시켜, 가난한 자들의 "정치적 소외를 더욱 악화"시키고, 경제적 압력에 노출된 "'생기 없는' 대중이 갑자기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이데올로기적 극단주의를 표방하는 반민주적 선동 조작에 노출"될 위험성을 높인다.(343-4)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1) 근로소득 보전세제나 자녀세액 공제제도 같은 재정 지원으로 저소득층 가족 구조의 안정성 향상, 2) 부모의 육아 시간을 더 많이 보장하는 양육 휴가제 확대와 돌봄 서비스망 구축, 3) 가난한 지역의 학교에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하고, 해당 교사들의 고용 조건을 개선하며, 사회복지와 건강 서비스를 결합한 공동체 학교 연합 구성, 4) 방과 후 학교나 과외활동을 통해 가정 밖에서 멘토링을 해주는 롤모델 제공 등이다.


교육은 아이들의 가능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기르고, 제도는 어른들이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규율한다. 저자의 대안들은 '우리 아이들'로 표상되는 "공감과 선의의 동료애" 정신을 부활시켜야 하며, 구조 개선의 선행 조건인 "이타적 인간의 확산"을 위해 공동체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가난한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얼굴을 내밀어주는' 의지할 만한 어른의 존재"(371)라고 말할 때, 저자는 그들의 인내와 헌신을 개발하는 것은 물질적 지원과 보상 같은 '객관적 정신'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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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의 이해 - 한마당강좌 1
폴 풀키에 / 한마당 / 198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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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의 출발점은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부정적 긍정(不定的 肯定) 명제이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부동(不動)과 동일(同一)의 철학"의 대척점에서 "변화와 모순의 철학"을 주장하여, 존재가 품고 있는 "우연성, 변화, 다수성(多數性)"에 주목한다.(14-5) 제논은 스승 파르메니데스를 옹호하는 바, 그의 "부정(不定) 변증법"[아킬레우스와 거북이 논증]은 "하나의 명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이 인정하거나 증명한 전제를 파괴하는 방식을 취한다.


소피스트의 궤변술도 이와 유사한데, 이것은 "진리와 무관하게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이익에 맞추어 반대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자기 편에 유리한 주장을 증명하려는 하나의 변증법이다."(18)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말재주를 타파하기 위해, 용어가 나타내는 사물의 성질을 규정하는 데 주목하여, 엄밀한 "정의(定義)를 요구하며 그것을 탐구, 논의한다."(19) 소크라테스에게 "사고(思考)란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抽象的)인 것"의 부단한 전환이다.(22)


플라톤의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에 '정신의 역동성'과 최초로 주어진 것을 초월하는 '도약'을 추가한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진리, 곧 실재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삼는 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은 "그럴 듯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상대방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의견"을 가리킨다. 그는 결론의 참이 아니라, 추론 과정의 정합성에 주목하여, 과정의 올바름이 결론의 올바름을 이끌어낸다는 입장을 취했으며, 여기서 '변증법'이라는 말에 경멸적인 뉘앙스가 스며든다.(27)


스토아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삼단논법과 제논의 논박 방법"을 받아들여, 변증법을 진리의 발견을 돕는 수단으로 이해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고유의 변증법"을 계승하는 한편, 이데아를 신의 말씀으로 대체하여, 존재론과 변증법을 결합한 중세 신학의 밑돌을 놓았다.(29) 데카르트는 변증법이 수사학 같은 기술에 불과하며, 연역적 도구의 가치에 대한 집착이 그 바탕이 되는 "사실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게을리하게" 만든다고 비판하였다.(34) 칸트도 "가상(假象)에 바탕을 둔 헛된 추론을 변증법(론)"이라 칭하였다. 


헤겔에 이르러서야 "모순되는 것들이 명백하게 양립하는" 변증법이 재발견된다.(38) 전통적 변증법은 모순률을 "사물의 절대적 법칙"으로 인정하고, 양립하지 않는 결과를 배척하지만, 헤겔의 새로운 변증법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 속에서 모순을 보고, 그러한 모순으로부터 존재의 활동에 기본이 되는 원동력을 이끌어낸다."(48) 그의 사유는 인간 정신(精神)과 신성(神性)사이에 대립되는 '동일성'과 '상이성'을 결합하고자 했던 독일 신비주의자들의 영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헤겔의 절대 정신은 "자연 속에 스스로를 외화(外化)함으로써만 결정된다." 즉, "세계가 절대 정신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의해 절대 정신이 생성된 것"(58)이며, 주관적, 개별적 정신이 객관적, 절대적 정신의 형태로 나아가면서 스스로를 자각한다. 사유의 질서 안에서 반대되는 명제는 동시에 참일 수 없을지라도 동시에 거짓일 수는 있다. 여기서 각각의 반대 명제들이 포함하고 있는 "진리의 부분을 종합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64) "합(合)은 모순을 극복하지만 상반되는 두 명제를 보존한다."(61) 


마르크스의 사적(史的) 유물론은 "역사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 이념은 "경제적, 물질적 조건에 의존하는 이념"이며, 상부구조에 불과하다. 그가 보기에 물질은 본질적으로 "활력(dynamisme) 이며 운동"으로서, 모든 정신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헤겔에게 "사물 자체는 사유의 반영에 지나지 않"지만, 마르크스에게 물질은 그 자체 안에서 "정(正)과 반(反)을 종합"하며, "그 종합은 우주 진행의 각 단계를 형성한다. 사유의 변증법은 사물의 변증법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70) 따라서 개체는 자신을 둘러싼 "작용 전체와 환경에 대한 개체의 반작용의 교차로에 위치"시켰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다.(71)


마르크스주의는 "사물과 사유의 모순, 그리고 그것에 따른 불안정성"에서 진리의 잠정성(暫定性)을 이끌어낸다. "해결불가능한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 없고 결정적인 진리도 없다."(77) 문제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자신들의 이론을 결정적,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여 "변증법의 본질적 원리를 위배하고 말았다."(79)


과학은 절대성에 갇힌 이념의 사슬에서 변증법을 건져내어, 승리 자체라는 목표가 아니라 승리를 위한 투쟁의 과정에 작용하는 원리로 재규정한다. 그것은 "자신의 작업을 파괴하려는 부조리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반대되는 이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의 요소"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풍요롭게 하고, "최초의 지식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분투이다. 과학적 변증법은 "기존의 지식과 모순되지만, 거기에 통합되어야 하는 새로운 경험"(127)을 통해 인식의 진보를 이어나가는 반작용을 부단히 요청하고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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