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의 이해 - 한마당강좌 1
폴 풀키에 / 한마당 / 198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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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의 출발점은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부정적 긍정(不定的 肯定) 명제이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부동(不動)과 동일(同一)의 철학"의 대척점에서 "변화와 모순의 철학"을 주장하여, 존재가 품고 있는 "우연성, 변화, 다수성(多數性)"에 주목한다.(14-5) 제논은 스승 파르메니데스를 옹호하는 바, 그의 "부정(不定) 변증법"[아킬레우스와 거북이 논증]은 "하나의 명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이 인정하거나 증명한 전제를 파괴하는 방식을 취한다.


소피스트의 궤변술도 이와 유사한데, 이것은 "진리와 무관하게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이익에 맞추어 반대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자기 편에 유리한 주장을 증명하려는 하나의 변증법이다."(18)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말재주를 타파하기 위해, 용어가 나타내는 사물의 성질을 규정하는 데 주목하여, 엄밀한 "정의(定義)를 요구하며 그것을 탐구, 논의한다."(19) 소크라테스에게 "사고(思考)란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抽象的)인 것"의 부단한 전환이다.(22)


플라톤의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에 '정신의 역동성'과 최초로 주어진 것을 초월하는 '도약'을 추가한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진리, 곧 실재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삼는 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은 "그럴 듯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상대방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의견"을 가리킨다. 그는 결론의 참이 아니라, 추론 과정의 정합성에 주목하여, 과정의 올바름이 결론의 올바름을 이끌어낸다는 입장을 취했으며, 여기서 '변증법'이라는 말에 경멸적인 뉘앙스가 스며든다.(27)


스토아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삼단논법과 제논의 논박 방법"을 받아들여, 변증법을 진리의 발견을 돕는 수단으로 이해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 고유의 변증법"을 계승하는 한편, 이데아를 신의 말씀으로 대체하여, 존재론과 변증법을 결합한 중세 신학의 밑돌을 놓았다.(29) 데카르트는 변증법이 수사학 같은 기술에 불과하며, 연역적 도구의 가치에 대한 집착이 그 바탕이 되는 "사실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게을리하게" 만든다고 비판하였다.(34) 칸트도 "가상(假象)에 바탕을 둔 헛된 추론을 변증법(론)"이라 칭하였다. 


헤겔에 이르러서야 "모순되는 것들이 명백하게 양립하는" 변증법이 재발견된다.(38) 전통적 변증법은 모순률을 "사물의 절대적 법칙"으로 인정하고, 양립하지 않는 결과를 배척하지만, 헤겔의 새로운 변증법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 속에서 모순을 보고, 그러한 모순으로부터 존재의 활동에 기본이 되는 원동력을 이끌어낸다."(48) 그의 사유는 인간 정신(精神)과 신성(神性)사이에 대립되는 '동일성'과 '상이성'을 결합하고자 했던 독일 신비주의자들의 영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헤겔의 절대 정신은 "자연 속에 스스로를 외화(外化)함으로써만 결정된다." 즉, "세계가 절대 정신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세계에 의해 절대 정신이 생성된 것"(58)이며, 주관적, 개별적 정신이 객관적, 절대적 정신의 형태로 나아가면서 스스로를 자각한다. 사유의 질서 안에서 반대되는 명제는 동시에 참일 수 없을지라도 동시에 거짓일 수는 있다. 여기서 각각의 반대 명제들이 포함하고 있는 "진리의 부분을 종합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64) "합(合)은 모순을 극복하지만 상반되는 두 명제를 보존한다."(61) 


마르크스의 사적(史的) 유물론은 "역사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 이념은 "경제적, 물질적 조건에 의존하는 이념"이며, 상부구조에 불과하다. 그가 보기에 물질은 본질적으로 "활력(dynamisme) 이며 운동"으로서, 모든 정신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헤겔에게 "사물 자체는 사유의 반영에 지나지 않"지만, 마르크스에게 물질은 그 자체 안에서 "정(正)과 반(反)을 종합"하며, "그 종합은 우주 진행의 각 단계를 형성한다. 사유의 변증법은 사물의 변증법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70) 따라서 개체는 자신을 둘러싼 "작용 전체와 환경에 대한 개체의 반작용의 교차로에 위치"시켰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다.(71)


마르크스주의는 "사물과 사유의 모순, 그리고 그것에 따른 불안정성"에서 진리의 잠정성(暫定性)을 이끌어낸다. "해결불가능한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 없고 결정적인 진리도 없다."(77) 문제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자신들의 이론을 결정적,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여 "변증법의 본질적 원리를 위배하고 말았다."(79)


과학은 절대성에 갇힌 이념의 사슬에서 변증법을 건져내어, 승리 자체라는 목표가 아니라 승리를 위한 투쟁의 과정에 작용하는 원리로 재규정한다. 그것은 "자신의 작업을 파괴하려는 부조리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반대되는 이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의 요소"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풍요롭게 하고, "최초의 지식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분투이다. 과학적 변증법은 "기존의 지식과 모순되지만, 거기에 통합되어야 하는 새로운 경험"(127)을 통해 인식의 진보를 이어나가는 반작용을 부단히 요청하고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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