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6
토마스 만 저자, 홍성광 역자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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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무렵, 가문에서 개인으로, 귀족에서 시민으로 이행하는 전환기 삶의 여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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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이산의 책 8
조너선 스펜스 지음, 정영무 옮김 / 이산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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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의 남문인 천안문은 19세기까지 황제가 천하를 오시傲視하던 영화로운 관문이었지만, 20세기 초입에는 중화 질서의 몰락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숨돌릴 틈 없이 몰아치는 격변의 파도는 과거의 영화를 흔적도 없이 씻어냈고, 광장에 홀로 남은 메아리는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요청했다. 제각기 다른 사유와 도구를 지니고 대륙의 아침을 두드려 깨우려는 종지기들이 역사의 요청에 호응하여 천안문 광장에 모여들었다. 각양각색의 인물들은 전통과 서구의 갈림길 위에서, 대륙을 얽어맨 전족을 풀고 역사의 물길을 장악하기 위해,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맞서면서 천안문 광장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캉유웨이(康有爲)는 새로운 세대의 유학자와 유생들의 대표자였다. 1895년 4월 15일 중국이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자, 캉유웨이는 "가까운 친구들과 불평등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청원서를 만들어 돌렸으며, 며칠 뒤에는 상주문 형식으로 약 1만 8천 자에 달하는 <공거상서>(公車上書)를 작성했다."(27) 반면 중국 고전을 약간 익힌, 세례받은 기독교인이었던 쑨원(孫文)은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국제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서양의 힘은 단순히 군함과 총포가 아니라 자유무역과 자원이용 등 인간의 능력과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 믿었으며, 그런 뜻을 담은 장문의 의견서를 써서 1894년 영향력 있는 관료에게 제출했다."(34)


만주 왕조를 보전해야 한다는 의견과 강성한 중국을 위해서는 만주 왕조를 전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하는 가운데, 각자 도모하여 여러 차례 일으킨 급진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량치차오(梁啓超)를 비롯한 일군의 사람들은 "이제는 반청을 해야 할 때며 여의치 않으면 남중국에 독립혁명정부나 광둥 성에 독립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0) 점진주의에 대한 신념을 고수하던 캉유웨이는 량치차오와 화교들에게 "역사는 비약이 없으며 반드시 일정한 발전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고, 쑨원은 "빈부격차가 미국이나 유럽처럼 커지기 전에 혁명적 변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59)


루쉰(魯迅)은 일본 유학시절 뉴스에 비친 동포들의 얼굴에서 무관심과 타성에 짓눌린 무기력함을 꿰뚫어보았다. 의학을 공부하던 루쉰은 "나약하고 낙후된 나라의 인민은 아무리 몸이 튼튼하고 건강해도 기껏 무의미한 처형 재료나 그 구경꾼이 될 뿐"이라면서, "제일 먼저 손을 대야 할 일은 그들의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84) 루쉰은 "산업화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캉유웨이의 개혁에도, 대중을 정치에 참여시키고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체제를 이루고자 하는 쑨원과 동맹회의 혁명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중국인의 잠재적인 의지를 결집시키고 동포들에게 운명을 변화시킬 영웅적이고 천재적인 영감을 불어넣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87)


딩링(丁玲)은 일찌감치 남녀평등에 눈 뜬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후난 지역 여성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목격하며 성장했다." <신청년>이나 이와 비슷한 잡지들이 "중국 여성들의 예속상태를 고발하고 구태의연한 결혼제도를 비판하고 동거나 자유연애 사례를 소개"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 자유 의식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여성들은 전족을 고수하고, 부모가 정한 혼인을 말없이 따르고, 과부가 되면 풍습에 따라 순순히 '수절'을 하며 살아갔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서양의 과학과 수학공식까지도 유교의 위계질서와 남존여비사상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144-5) 


1920년대에 이르면 세계 역사를 "서구적인 것, 중국적인 것 그리고 인도적인 것 세 가지의 두드러진 양식으로 보려는 양상"이 대두된다. 궈모러(郭沫若)는 "세 문명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발견하기를 희망했고, 따라서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범신론'(汎神論)이 그러한 만남과 결합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이상을 노래했다."(186) 이와 반대로 량수밍(梁漱溟)은 "서구적 해답은 집을 헐어 버리고 새집을 짓는 것이고, 중국적 해답은 낡은 집을 조심스레 수리하는 것일 터이고, 인도적 해답은 집에 대한 욕망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성격이 다른 문화를 창조적으로 '융합'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188)


지식인들 사이에서 혁명에 대한 낭만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시각이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다.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가 1926년 베이징의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면서 학살을 벌이자, 원이둬(聞一多)는 "죽은 학생들의 피가 천안문 광장을 적시고 있을 때 신문 문학란에 시가 처음 등장한 것"을 두고 "예술과 애국심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운명적인 결합"이라고 평했다.(212) 루쉰은 학생들이 '희생양'으로 죽임을 당하는 현실을 한탄하면서, 학생들의 희생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산화하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은 목숨을 장례식 때 태우는 상여나 종이로 만든 상징물처럼 헛되이 내버린 꼴이 될 수도 있다"면서 괴로워했다.(213)


루쉰은 "창조사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신월의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을 해괴한 짓거리라 여겼다." 그는 "상하이 국제조계지에 눌러앉아 '영화 포스터나 간장 광고' 정도의 선전효과밖에 없는 이른바 '혁명시'를 쓰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나아가 그것은 단순히 멍청한 자들의 미친 짓거리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232-3) 장제스가 제국주의의 위협을 뒤로 하고 국내 공산주의 세력부터 근절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앞세워 가차없는 탄압을 가하는 와중에도, 루쉰은 "작가의 길이 험하고 이상주의적인 정치이념의 유혹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펜의 위력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1930년 봄 좌익작가연맹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실 사회의 갈등에 접하지 않고 단지 서재 안에 자신을 가두어 둔다면 극단적인 급진주의자나 좌익이 되기 쉽다. 하지만 현실사회와 부딪치는 순간 모든 이념은 산산이 부서진다. 닫힌 문 안에서 급진적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익'으로 돌아서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 혁명은 철저히 세속적인 일로서 수많은 자질구레하고 피곤한 일들을 포함한 것이며, 시인들이 생각하듯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혁명에는 파괴도 있지만 그보다는 건설이 본질적이다. 파괴는 단순하지만 건설은 복잡한 일이다. 그래서 혁명이 실제로 진행되면 낭만적인 꿈을 꾸던 사람들은 그동안 친숙한 일로 생각해 온 혁명에 환멸을 느끼기 쉽다."(257)


혁명에 대한 낙관주의로 열렬한 환호를 받던 딩링은 1940년 이후 저항적 소설 집필을 그만두었다. 딩링은 "4편의 새로운 형식의 소설에서 옌안 공산주의의 밝은 얼굴에 가려져 있는 잔인성과 위선과 환멸을 깊이 추적해 들어가기 시작"(304)했으며, "1942년 3월에 발표한 <3·8절 유감>이라는 제목의 수필"에서는 "남자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는 옌안 여성들의 삶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309) 그러나 마오쩌둥이 "문학과 예술은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기본 노선을 제시하자, 딩링은 곧바로 "자신의 태도는 계급투쟁을 눈앞에 두고 성 차별보다는 단합을 강조해야 할 옌안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페미니즘"이라고 말하면서 현실에 순응했다.(315)


마오쩌둥이 자신의 연이은 정책 실패를 단숨에 만회하고자 일으킨 문화대혁명은 연약한 지식인들을 가차없이 공격했다. 사회주의 문학에 투신하고 마오쩌둥에게 헌신하던 라오서(老舍)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6년 8월 23일 중학생들의 홍위병 투쟁회에 불려나간 라오서는 "자신이 반동분자이며 범죄자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치켜들고 서 있어야 했다. 또 머리에 어릿광대 모자를 쓰고 극장에서 무대를 만드는 데 쓰이는 각목으로 얻어맞기도 했다. 홍위병들은 그가 학습회에 나가 있는 동안 집을 약탈하고 책과 소지품을 훼손했다." 다음날도 아침부터 끌려나간 라오서는 "그날 밤 만주 왕조 시절의 옛 왕궁 남서쪽에 있는 타이핑호(太平湖)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367)


문화혁명의 격랑이 잦아들고,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차례로 서거하자, 다시금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천안문에 울려퍼졌다. "1978년 11월 말 옛 자금성 근처 시단(西單) '민주의 벽'에서는 진솔하고 열기 높은 토론이 시작되었다."(376) 베이징동물원의 전기공이자 홍위병 출신인 웨이징성(魏京生)은 <제5현대화>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덩샤오핑이 추진하고 있는 4개 현대화가 제대로 되려면 제5현대화(민주주의를 의미한다)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377) 1979년 5월 29일 체포된 웨이징성은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검사의 논고에 맞서 변호인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직접 변론했다.


"헌법은 인민에게 지도자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지도자도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민의 비판과 감시를 통해서만이 지도자는 과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 비판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며, 귀에 솔깃할 수 없을 것이며 항상 옳을 수도 없습니다. 비판이 전적으로 옳아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벌을 가하는 것은 비판과 개혁을 가로막고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처사입니다. 우리는 진정 사인방이라는 현대판 미신의 전철을 다시 밟아야 합니까?" 그러나 혁명의 상징인 천안문은 굳게 닫힌 채로 침묵했다. "웨이징성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며 고등법원 상고는 1979년 11월 6일에 기각되었다."(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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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 이산의 책 33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 이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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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민주주의'를 표방한 혁명의 도도한 물결은 '위대한 조타수' 마오쩌둥의 사상과 개인에게 종속된 거대한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부르주아 복귀'의 위험을 막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한다는 목표 아래 일어났던 이 동란은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앙의 위기'를 낳"았고, 인민의 단결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된 투쟁은 "폭력과 보복의 끝없는 악순환만 가져왔다."(431) 마오는 "문화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딛고 승리의 개가를 올리는 사람들은 항상 문화수준이 낮은 사람들이었다"(437)고 지적하면서, 후진성이 사회주의 혁명에 거대한 이점으로 작용한다는 오랜 마오주의적 신념을 문화대혁명에 투사했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사회가 새로운 착취계급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들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막는 "오늘의 관료들이었다."(448) 그러나 마오가 그토록 환멸하는 관료들은 "그의 혁명동지였으며 간부들"이었기에, 이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그가 이끌었던 혁명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마오는 "개인의 정치적 행동을 기준으로 하는 계급개념에 도달"하여, "누가 어떤 계급에 속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계급적 입장'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자의적으로 규정된 계급 이론은 "여러 이론적·정치적 이유로 인해 너무나 쉽게 '계급의 적'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집단이나 개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박해를 당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450-1)


문화대혁명이 선포한 사상과 목표에 고무된 학생집단과 공식 당기구가 조직한 '조반파'(造反派)가 공세에 나서자, 류사오치는 당 관료의 자녀들을 동원하여 새로운 '조반' 학생조직을 결성하고 운동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공작조는 문화대혁명의 공격방향을 지식인·교수·교사·작가 등을 의미하는 "'부르주아적인 권위'와 계급출신이 '안 좋은' 사람들"로 바꾸었는데, "이들은 사실상 정치적 공세 앞에서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459) 1966년 8월 초, "반란을 일으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라는 슬로건 아래 "'홍위병'이라는 글자를 새긴 완장을 찬 어린 학생들이 베이징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461)


"혼란으로 점철된 1966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수백만의 홍위병은 마오의 초상화를 들고 주석의 '붉은 소책자'를 흔들며 도시의 거리를 행진하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홍위병의 맹공이 마침내 '실권파'를 향하자, "당 관료와 행정간부들은 '체포'되어 고깔모자를 쓰고 거리를 행진해야 했으며 또 대중대회장에서 자신의 '범죄행위'를 고백하고 각종 비판투쟁대회에 끌려가 심리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종종 학대를 받았다." 과거 농촌으로 하방되어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도시의 젊은이들이 문화대혁명에 참가하기 위해 도시로 돌아오면서 홍위병의 수가 점점 불어났고 이 운동의 폭력성과 파벌투쟁이 격화되었다."(466-7)


1967년 노동자와 병사들이 정치무대의 중심에 등장하면서 문화대혁명은 "지방·성·지구의 당 권력기관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奪權) 단계로 이동했다."(468) 마침내 1967년 2월 5일 상하이 인민공사가 공식 선포되고 당 지도부를 전복시킨 '혁명위원회'가 각지에 수립되자, 마오쩌둥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타도하라"는 슬로건은 반동적인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한 해 전에 그가 방출시킨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다시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민들이 결성한 각종 조직은 '반혁명적' 조직으로 선포되었고, "대다수 당 간부는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혁명가이거나 최소한 개조 가능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485)


"질서가 시대적 요구라는 메시지는 폭력을 부추겼다고 지목된 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492) 1967년의 '뜨거운 여름'은 "소수의 지도자들이 꾸민 음모"로 전락했고, 수많은 조반파 학생들은 "빈농과 하下중농으로부터 재교육을 받기" 위해 다시 농촌으로 보내졌다. "문화대혁명은 공산당에 대한 전면 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정통 레닌주의 정당의 부활로 끝이 났다. 단,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한 정적들은 제거되었다." 1969년 많은 피를 흘리고 분쇄된 대중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던 대다수 중국인들의 마음속에는 "무슨 변화가 있었는가?"라는 의문만이 남게 되었다.(504)


이제 중국정치는 배신감과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진 대중의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된 채, "관료기구의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벌어지는 파벌투쟁"(535)으로 새시대의 막을 열고 있었다. 마오는 "재건된 당의 지도 아래 국가적 단결과 화해를 실현하는 데 중점을 놓았고, 이전의 당 지도자 대부분의 복귀와 문화대혁명 동안 그토록 호되게 비난받았던 당 간부들의 명예회복을 공식적으로 찬성했다."(540) 급진주의자들이 숙청되면서, "문화대혁명의 급진화와는 반대로 탈脫급진화가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되었다."(549) 린뱌오를 반동분자로 낙인 찍은 "'비림비공(批林批孔, 린뱌오를 비판하라, 공자를 비판하라)운동은 1년이 넘도록 관영언론과 대중생활을 지배했다."(558)


마오쩌둥이 1976년 9월 9일 82세로 세상을 뜨자, "문화대혁명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난 중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은, 아직 남아 있던 급진적인 마오주의 전통과의 희박한 연결고리를 잘라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575) 마오 이후의 시대를 장악한 덩샤오핑의 정치적 동맹에 역동성을 부여한 것은 "정의와 보복을 갈구하는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불타는 욕망이었다. 덩샤오핑 자신이 그 동란의 희생자였다는 사실로 인해 과거 10년 동안 고통을 겪었던 수백만 명이 덩샤오핑에게 동정과 지지를 보냈다."(605) 민주활동가들은 1976년의 천안문 시위를 '혁명사건'으로 다시 선포한, "덩샤오핑과 그의 동지들이 보인 지지에 의해 더욱더 고무되었다."(609)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이 1978년에 덩샤오핑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지지했고 1979년 초 몇 달 간 여전히 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해 덩샤오핑에게 의존하고 있었지만, 마오 이후 정권의 완고한 레닌주의 지도자들은 공산당의 조직적 통제를 넘어서는 운동을 좀처럼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덩샤오핑마저도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확실히 자리를 굳히자마자, 민주활동가들을 "무정부주의와 범죄자로 비난"하면서, '4대'(四大), 즉 "크게 견해를 말하고(大鳴), 대담하게 의견을 발표하며(大放), 대변론(大辯論)을 하고, 대자보를 쓸(大字報)" 권리를 폐지했다."(611-2)


덩샤오핑이 생각하는 정치개혁은 "문화대혁명으로 무너져 내린 중국공산당의 레닌주의적 조직규범을 다시 회복하는 것"과 "공산당 관료들을 평균적으로 더 젊게, 더 잘 교육받게, 전문적으로 더 능력 있게 만들어 관료통치의 합리화를 이룩한다는 의미였다."(628)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민주' 개념에는 "계획경제에 대한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진지하게 고려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자신이 1956년 9월 제8차 당대회에서 천명한 "중국사회의 주요 모순은 적대적 사회집단 사이에서가 아니라 '선진적인 사회주의 체제와 낙후된 생산력 사이'에 존재"(632)한다는 명제를 되살려, 신속한 경제발전이라는 목표에 모든 사회(주의)적 이해관계를 종속시켰다.


자본축적을 위한 농촌 착취를 달성하기 위해 "1955~1956년의 집단화운동 때 그랬던 것처럼 탈집단화 역시 '칼로 자르듯이 일률적'으로 성취되었다."(645) 대부분의 당 간부들은 처음에는 사상적 확신에 따른 저항과 자신의 권력과 소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탈집단화에 반대했지만, 점차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와 영향력이 사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자산임을 깨닫기 시작했다."(647) 도시의 개혁가들은 정규 국가노동자의 평생직장 보장제도를 폐지하는 '철밥통 타파'가 "활력없는 노동력을 단련시키고,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656)


부르주아지가 완전히 제거된 중국에서 그 자리에 진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후보는 거대한 공산당 관료기구의 간부들이었다."(663) 이들은 시장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기회를 사적으로 전용할 때, 정치적으로 유리한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고, 경제적 기능을 계속해서 공산주의 체제에 의존했으며, 노동계급과 자유노조의 반발로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즉, 새롭게 탄생한 중국의 부르주아지는 "민주주의적 잠재력을 갖는 계급이 아니었다."(668)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은 '부강한 국가'라는 "내셔널리즘적인 목적에 종속되었으며, 근대적 경제발전과 강력한 국가기구는 이를 위한 기본적인 요소"(678)에 불과했다.


공산당 관료기구는 중국의 병을 '봉건적' 문화의 악영향 탓으로 돌리면서, 5·4 시대에 대두한 문화적 반전통주의를 "공산당 정권의 보수적인 방어수단으로 부활시켰다."(688) 여기에 "덩샤오핑 정권의 지지자나 이론가로 남아 있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민주'의 목표를 버리고 자본주의 독재를 옹호하는 신권위주의를 선택했다. 이런 지적인 변화는 사회경제적 전환만큼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685) 인플레이션과 긴축정책으로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점점 하락하는 가운데 "부정축재를 일삼는 관료들과 수상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을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커져가는 분노가 결합하여 1989년 겨울과 봄 광범위한 사회적 동요를 낳았다."(682) 


1989년 4월 15일, 지식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후야오방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정치적으로 기민한 학생들은 민주적 성향의 후야오방에 대한 자신들의 진심어린 존경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 마침내 정치적 기회가 왔음을 인식했다." 대중소요가 퍼져나가자, 덩샤오핑은 "1989년의 학생활동가들을 문화대혁명 시기의 반란자들과 비교하면서 둘 다 '천하동란'(天下動亂)을 일으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692) 자발적인 학생운동에서 문화대혁명의 메아리를 감지한 덩샤오핑은 "마오 이후의 질서가 가져온 신성한 '안정'을 정복하려는 젊은 신세대를 처벌하기로 마음먹었다."(697)


"베이징 대학살이 끝나고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중국의 정치생활과 지적인 생활은 1980년대보다 훨씬 더 억압적으로 변했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박해는 한층 심해졌으며 비밀경찰의 활동은 더욱 확대되었다. 투옥은 훨씬 빈번히 일어났으며, 신문·잡지·책·영화에 대한 당의 검열은 더욱 엄격해졌다."(707) 그러나 한층 강력하게 전개된 '대외개방' 정책으로 눈부신 경제적 업적이 이룩되자, 사회는 너무나 빨리 '정상'으로 돌아갔다. "민주화운동을 낳은 강력한 정치적·도덕적 열정이 이토록 빨리 사그라지고 사라져버렸다는 것, 그리고 정부가 조장하는 소비주의와 내셔널리즘의 물결에 파묻혀 버렸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인 동시에 좌절감을 안겨주는 일이었다."(708)


덩샤오핑의 대를 이은 장쩌민 총서기는 1997년 봄 연설에서 "'극좌주의'의 '화석화된' 사고를 비난하면서 국유기업의 개혁에 대한 계획을 제시했다." 그는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라"(抓大放小)라는 슬로건 아래 국가가 곡물거래와 더불어 첨단방위산업 및 첨단기술산업을 계속 소유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민영화되거나 최소한 부분적으로 비국유화"할 것이라고 천명했다.(720) 사회주의의 마지막 보루마저 제거한 공산당 정권은 이데올로기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내셔널리즘과 애국주의를 마음껏 조장했다. 마침내 1990년대 이후로 "갈수록 거세지는 쇼비니즘적인 내셔널리즘이 사실상 중국 공산주의 국가의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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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5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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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타락을 낳고, 타락은 광기를 낳고, 광기는 인간을 죽인다. 타락한 세계에는 죄를 짓는 인간과 죄를 사하는 인간은 있어도, 그러한 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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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이산의 책 32
모리스 마이스너 지음, 김수영 옮김 / 이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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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은 제국을 지탱하던 신사-지주층이 낡은 질서에 기생하여 착취에 몰두하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발전이 미약한 상태에 머무르면서, "메이지 시대 일본이 추구했던 방식과 유사한 '근대화로의 보수적인 길'을 걷지 못했다."(28) 전통적 제도에 광범위한 불만을 갖고 있던 새로운 지식인층은 "단지 제국주의 외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양의 도구와 사상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화와 역사 일체를 거부하는 반反전통주의 아래 혁명을 이끌었으며, "세계질서 속에 자리잡은 국민국가로서의 중국에 대한 내셔널리즘적인 헌신"(36)을 강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1919년 5·4운동으로 "도시에 가득 퍼져 나간 정치적 행동주의"는 지식인이 대중을 조직하고 이끌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산둥의 독일 조차지를 일본에게 넘긴다는 "베르사유의 운명적인 결정이 야기한 격렬한 내셔널리즘적 분노"는 서양의 '선진' 국가들이 "중국에 민주와 과학의 원칙을 가르칠 수 있다는 믿음"을 산산조각냈으며, 지식인들은 "서구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대신 유럽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는 사회주의 이론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44)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의 옛 전통과 오늘날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의 지배를 모두 거부할 수 있는 길이었다."(45)


1924~1927년에 걸쳐 도시와 농촌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대중혁명운동은 "어느 때보다도 더 급진적인 사회혁명을 지향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공합작의 잠복기를 이용하여 "혁명의 강력한 원동력에 더욱 광범위하게 접근"(51)하면서, "도시 부르주아지와 토지혁명을 두려워하는 신사-지주층의 자녀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장제스 군대"와의 긴장은 파열점에 다다랐다.(55) 1927년 장제스 군대가 선제공격에 나서 상하이의 노동조합과 학생조직을 궤멸시키자, 마오쩌둥은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되새기면서 "혁명은 반드시 폭력투쟁의 형태를 띨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58)


대장정은 장시의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이 "국민당 군대로부터 끔찍한 보복을 당하도록 내버려둔 엄청난 정치적 패배"(65)였지만, 생존자들에게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극한의 절망적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는 "혁명적 사명감에 신성함을 부여했으며, 거의 종교에 가까운 헌신을 낳았다."(68) 반면, 난징의 국민정부는 "도시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고, 이를 위한 추동력도 전혀 발휘하지 않았다." 장제스에게 "국가의 독립은 사실상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하고 외국의 경제적 영향력에 계속 의존하는 것을 의미했다."(60-1) 혁명을 완수하는 과업은 공산주의자의 몫으로 남았다.


중국공산당은 내셔널리즘의 우산 아래 "외부의 적과 대치하는 모든 사회계급의 중국인"을 집결시켰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국민의 일원이나 최소한 '인민'의 일원으로서 자격을 박탈당하고 제국주의 외세의 대변자라는 이름으로 축출되었다."(80) 게릴라들은 "경제·정치·군사상의 각종 임무를 수행할 수 있고 또 사상적으로도 순수한 다기능의 팔방미인"(89)이 되어야 했다. 마오주의자들은 엄격한 교의와 정통이론을 만들어놓고 여기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사회경제적 자유와 정치적·지적 억압 사이의 불일치는 1949년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마오주의의 가장 큰 특징"(90)이었다.


1949년 "농촌을 이끄는 도시"의 시대를 선포할 때 마오쩌둥은 "혁명가들의 정신과 이데올로기가 도시화로 인해 부패할 위험성을 경고했다."(139) 그가 보기에 국가 개조를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은 오염된 정신이며, 이후로 마오쩌둥은 권력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정신을 새롭게 창조할 것을 선포한다. 1951년 일어난 대규모 사상개조운동은 마오쩌둥이 "우리나라가 민주사회로 철저히 바뀌고 공업화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지식인의 개조가 필수적이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되는데, 이 운동은 "대중집회, 비판과 자기비판으로 이루어진 소집단의 '투쟁회', 공개적인 모욕, 사상범들로부터 서면 혹은 구두로 '자백'을 받아내는 낯익은 마오주의식 방법들을 그대로 보여준다."(135)


1953년 시작된 제1차 5개년계획은 철저히 소련의 산업화 방식을 모방했다. "도시 공업화 비용은 대부분 농촌에서 착취하여 충당"했는데, 이는 "국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농업세를 부과하고, 농민이 국가가 정한 낮은 가격으로 정부에 팔아야 하는 곡물의 할당량을 크게 늘려서 책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172) 소련의 공업화 모델은 중앙집권적 경제계획과 방대한 관료제를 전제로 삼는다. 결국 행정의 간소화를 선호하는 마오주의는 "전문화된 행정기구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으며, 혁명정당의 간부들은 행정가와 기능 관료로 변신했다."(173)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에서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국가정책의 도구"로 전락했다.(177)


사회주의로 향하는 중간 기착지에 불과한 "근대적 공업발전 자체가 가장 중요한 목표"인 것처럼 인식되자, 마오쩌둥은 "죽어가는 사회주의 목표와 혁명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농촌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189) 당시 중국의 농업정책은 급진적 집단화로 재앙을 초래한 소련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신중하게 추진되고 있었는데, 이와 반대로 마오는 농촌의 합작사업이 "너무 더디게 진행된다고 선언했다."(202) 마오는 농민대중에 대한 인민주의적 신념을 고취하여 "혁명적인 농민과 충분히 혁명적이지 못한 당을 대립"(204)시키면서, 1949년 이후 공산주의 정책을 이끌었던 소련 모델을 폐기하고 자력 갱생을 도모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와 마오주의자들에게 "근대적 경제를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근대적 경제발전이 가져올 국가와 사회의 관료화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225)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당 지도자들이 공업화에 필요한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이라는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지식인을 이용하고 싶어했다면, 마오는 지식인을 "기존 관료기구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대중운동의 한 부분으로 이용하고 싶어했다."(233) 1956년 마오가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라는 슬로건을 부활시킨 것은 "지식인들을 사상적·정치적 속박에서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의 활력을 회복시키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238)


사회주의적 비판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기존 당 관료들에 의해 점차 "'사회주의의 적'으로 낙인찍혔고 '반혁명분자'로 비난받게 된다." 마오 역시 비난의 대열에 합류하는데, 이는 마오가 지식인들의 "평등주의적이고 반관료주의적인 목표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만,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는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56) 당 관료들에게 소외당한 백화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마오주의자들은 뒤이어 일어난 반우파투쟁을 도구삼아 "당 내부에 존재하는 '우경 기회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는 데 성공했다. 1957년 초부터 시행된 하방下放운동은 각급 기관의 사무실을 텅 비게 만들었고, "마오주의자들은 당 조직을 다시 장악했다."(269-70)


1차 5개년계획이 가져다준 사회적 불평등, 도농 격차, 이데올로기 쇠퇴에 따른 폐단을 치료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택한 방식은 "농촌을 공업화하는 것이었다."(271) 대약진운동이 설정한 유토피아적인 사회·경제적 목표들은 마오가 말했던 "인민의 '무한한 창조력'과 '사회주의를 향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에 의지하고 있었다."(279) 이 낙관적인 관념은 자본주의적 관계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 중국의 후진성이 "혁명에 유리한 조건"이라는 마오 특유의 인식을 반영한다. '전문가'는 없고 오직 "사상적으로도 건전하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한 만능인"이라는 새로운 세대로 이루어진 "교양 있는 노동자 국가의 창조"가 대약진운동의 희망찬 목적지였다.(298)


1955년 합작화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인민공사화 운동은 밑에서는 농촌간부와 빈농의 자발적인 급진주의가, 위에서는 마오와 마오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유토피아주의가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하면서 광란의 속도로 진행되었다.(304) 엄청난 노동의 낭비를 가져온 재래식 용광로 사업은 곧바로 철회되었지만, 덜 요란했던 다른 농촌공업은 실용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우리의 혁명은 전쟁과 같다"는 마오의 공언 속에, 농민들은 '군사화' '전투화' '규율화'에 발맞추어 농장으로 나갔다. 그 결과는 "육체적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요구"와 "비현실적으로 늘어나는 노동시간을 받아들여야 했던 농민들의 체력소모였다."(316)


1959년 연이어 발생한 홍수와 가뭄이 농업생산과 국가경제 전반을 강타하자, 펑더화이는 단호한 태도로 "인민공사화와 국가경제의 붕괴, 대중으로부터 당의 이탈, 억압적인 정치·경제적 환경을 비난하고, 이 모두가 마오주의자들의 '프티부르주아적 광신'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322) 마오쩌둥은 "농촌으로 달려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하겠다는 거대한 정치적 위협을 앞세워 대약진운동을 강행했지만, 가중되는 식량부족 앞에 그의 이데올로기적 호소는 공염불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대약진운동은 마오의 정치기반을 붕괴시키고 농민과 공산당 사이의 상호 불신과 반감이라는 유산을 남긴 채 1960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약진운동 이후 "대중의 분위기는 가라앉고 비정치적이 되었다."(343) 질서로 회귀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 앞에 관료제가 다시 번창했다. "되살아난 레닌주의 정당의 조직적 효율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베이징의 지도자들은, 생산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다시 회복하고 생산자를 위한 물질적 인센티브를 재차 강조하는 두 가지 방법을 결합하여 단시일 내에 국가경제를 부흥시키는데 성공했다."(347) 마오가 보기에 관료계급은 '수정주의'를 가능케 하는 부르주아지와 같은 의미였다. 와신상담에 들어간 마오는 "지금까지 이룩한 혁명의 성과를 파괴하고 새로운 혁명에 다시 착수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심사숙고하기 시작했다."(349)


마오쩌둥은 '소자본주의'에 대한 양보를 허용한 당시의 경제적 성공이 인민의 평등을 훼손하고, 엘리트주의와 불평등을 초래하는 악습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1965년 "마오는 관료주의자 계급을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억압자로 비난"하면서, 당 고위 지도자들을 "정치적·사상적 불결의 주된 근원으로 간주했다."(379) 관료들의 저항을 극복하고 대중지도자의 능력을 중시하는 정치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새로이 고안된 작품은 '마오 숭배'였다. 마오는 '올바른' 개인숭배와 '잘못된' 개인숭배를 분리하면서, "개인숭배는 필수적인 정치적 자산"(384)이라고 주장했다. 당 내부의 실권파를 향한 문화대혁명의 전선이 가차 없이 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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