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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ㅣ 이산의 책 8
조너선 스펜스 지음, 정영무 옮김 / 이산 / 1999년 2월
평점 :
품절
자금성의 남문인 천안문은 19세기까지 황제가 천하를 오시傲視하던 영화로운 관문이었지만, 20세기 초입에는 중화 질서의 몰락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숨돌릴 틈 없이 몰아치는 격변의 파도는 과거의 영화를 흔적도 없이 씻어냈고, 광장에 홀로 남은 메아리는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요청했다. 제각기 다른 사유와 도구를 지니고 대륙의 아침을 두드려 깨우려는 종지기들이 역사의 요청에 호응하여 천안문 광장에 모여들었다. 각양각색의 인물들은 전통과 서구의 갈림길 위에서, 대륙을 얽어맨 전족을 풀고 역사의 물길을 장악하기 위해,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맞서면서 천안문 광장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다.
캉유웨이(康有爲)는 새로운 세대의 유학자와 유생들의 대표자였다. 1895년 4월 15일 중국이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자, 캉유웨이는 "가까운 친구들과 불평등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청원서를 만들어 돌렸으며, 며칠 뒤에는 상주문 형식으로 약 1만 8천 자에 달하는 <공거상서>(公車上書)를 작성했다."(27) 반면 중국 고전을 약간 익힌, 세례받은 기독교인이었던 쑨원(孫文)은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국제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서양의 힘은 단순히 군함과 총포가 아니라 자유무역과 자원이용 등 인간의 능력과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라 믿었으며, 그런 뜻을 담은 장문의 의견서를 써서 1894년 영향력 있는 관료에게 제출했다."(34)
만주 왕조를 보전해야 한다는 의견과 강성한 중국을 위해서는 만주 왕조를 전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하는 가운데, 각자 도모하여 여러 차례 일으킨 급진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량치차오(梁啓超)를 비롯한 일군의 사람들은 "이제는 반청을 해야 할 때며 여의치 않으면 남중국에 독립혁명정부나 광둥 성에 독립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0) 점진주의에 대한 신념을 고수하던 캉유웨이는 량치차오와 화교들에게 "역사는 비약이 없으며 반드시 일정한 발전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고, 쑨원은 "빈부격차가 미국이나 유럽처럼 커지기 전에 혁명적 변혁을 수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59)
루쉰(魯迅)은 일본 유학시절 뉴스에 비친 동포들의 얼굴에서 무관심과 타성에 짓눌린 무기력함을 꿰뚫어보았다. 의학을 공부하던 루쉰은 "나약하고 낙후된 나라의 인민은 아무리 몸이 튼튼하고 건강해도 기껏 무의미한 처형 재료나 그 구경꾼이 될 뿐"이라면서, "제일 먼저 손을 대야 할 일은 그들의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84) 루쉰은 "산업화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캉유웨이의 개혁에도, 대중을 정치에 참여시키고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체제를 이루고자 하는 쑨원과 동맹회의 혁명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중국인의 잠재적인 의지를 결집시키고 동포들에게 운명을 변화시킬 영웅적이고 천재적인 영감을 불어넣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87)
딩링(丁玲)은 일찌감치 남녀평등에 눈 뜬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후난 지역 여성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목격하며 성장했다." <신청년>이나 이와 비슷한 잡지들이 "중국 여성들의 예속상태를 고발하고 구태의연한 결혼제도를 비판하고 동거나 자유연애 사례를 소개"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 자유 의식이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여성들은 전족을 고수하고, 부모가 정한 혼인을 말없이 따르고, 과부가 되면 풍습에 따라 순순히 '수절'을 하며 살아갔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서양의 과학과 수학공식까지도 유교의 위계질서와 남존여비사상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144-5)
1920년대에 이르면 세계 역사를 "서구적인 것, 중국적인 것 그리고 인도적인 것 세 가지의 두드러진 양식으로 보려는 양상"이 대두된다. 궈모러(郭沫若)는 "세 문명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발견하기를 희망했고, 따라서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범신론'(汎神論)이 그러한 만남과 결합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이상을 노래했다."(186) 이와 반대로 량수밍(梁漱溟)은 "서구적 해답은 집을 헐어 버리고 새집을 짓는 것이고, 중국적 해답은 낡은 집을 조심스레 수리하는 것일 터이고, 인도적 해답은 집에 대한 욕망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성격이 다른 문화를 창조적으로 '융합'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188)
지식인들 사이에서 혁명에 대한 낭만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시각이 유행병처럼 번져나갔다.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가 1926년 베이징의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면서 학살을 벌이자, 원이둬(聞一多)는 "죽은 학생들의 피가 천안문 광장을 적시고 있을 때 신문 문학란에 시가 처음 등장한 것"을 두고 "예술과 애국심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운명적인 결합"이라고 평했다.(212) 루쉰은 학생들이 '희생양'으로 죽임을 당하는 현실을 한탄하면서, 학생들의 희생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산화하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은 목숨을 장례식 때 태우는 상여나 종이로 만든 상징물처럼 헛되이 내버린 꼴이 될 수도 있다"면서 괴로워했다.(213)
루쉰은 "창조사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신월의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을 해괴한 짓거리라 여겼다." 그는 "상하이 국제조계지에 눌러앉아 '영화 포스터나 간장 광고' 정도의 선전효과밖에 없는 이른바 '혁명시'를 쓰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나아가 그것은 단순히 멍청한 자들의 미친 짓거리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232-3) 장제스가 제국주의의 위협을 뒤로 하고 국내 공산주의 세력부터 근절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앞세워 가차없는 탄압을 가하는 와중에도, 루쉰은 "작가의 길이 험하고 이상주의적인 정치이념의 유혹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펜의 위력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1930년 봄 좌익작가연맹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실 사회의 갈등에 접하지 않고 단지 서재 안에 자신을 가두어 둔다면 극단적인 급진주의자나 좌익이 되기 쉽다. 하지만 현실사회와 부딪치는 순간 모든 이념은 산산이 부서진다. 닫힌 문 안에서 급진적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익'으로 돌아서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 혁명은 철저히 세속적인 일로서 수많은 자질구레하고 피곤한 일들을 포함한 것이며, 시인들이 생각하듯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혁명에는 파괴도 있지만 그보다는 건설이 본질적이다. 파괴는 단순하지만 건설은 복잡한 일이다. 그래서 혁명이 실제로 진행되면 낭만적인 꿈을 꾸던 사람들은 그동안 친숙한 일로 생각해 온 혁명에 환멸을 느끼기 쉽다."(257)
혁명에 대한 낙관주의로 열렬한 환호를 받던 딩링은 1940년 이후 저항적 소설 집필을 그만두었다. 딩링은 "4편의 새로운 형식의 소설에서 옌안 공산주의의 밝은 얼굴에 가려져 있는 잔인성과 위선과 환멸을 깊이 추적해 들어가기 시작"(304)했으며, "1942년 3월에 발표한 <3·8절 유감>이라는 제목의 수필"에서는 "남자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는 옌안 여성들의 삶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309) 그러나 마오쩌둥이 "문학과 예술은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기본 노선을 제시하자, 딩링은 곧바로 "자신의 태도는 계급투쟁을 눈앞에 두고 성 차별보다는 단합을 강조해야 할 옌안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페미니즘"이라고 말하면서 현실에 순응했다.(315)
마오쩌둥이 자신의 연이은 정책 실패를 단숨에 만회하고자 일으킨 문화대혁명은 연약한 지식인들을 가차없이 공격했다. 사회주의 문학에 투신하고 마오쩌둥에게 헌신하던 라오서(老舍)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6년 8월 23일 중학생들의 홍위병 투쟁회에 불려나간 라오서는 "자신이 반동분자이며 범죄자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치켜들고 서 있어야 했다. 또 머리에 어릿광대 모자를 쓰고 극장에서 무대를 만드는 데 쓰이는 각목으로 얻어맞기도 했다. 홍위병들은 그가 학습회에 나가 있는 동안 집을 약탈하고 책과 소지품을 훼손했다." 다음날도 아침부터 끌려나간 라오서는 "그날 밤 만주 왕조 시절의 옛 왕궁 남서쪽에 있는 타이핑호(太平湖)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367)
문화혁명의 격랑이 잦아들고,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차례로 서거하자, 다시금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천안문에 울려퍼졌다. "1978년 11월 말 옛 자금성 근처 시단(西單) '민주의 벽'에서는 진솔하고 열기 높은 토론이 시작되었다."(376) 베이징동물원의 전기공이자 홍위병 출신인 웨이징성(魏京生)은 <제5현대화>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덩샤오핑이 추진하고 있는 4개 현대화가 제대로 되려면 제5현대화(민주주의를 의미한다)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377) 1979년 5월 29일 체포된 웨이징성은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검사의 논고에 맞서 변호인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직접 변론했다.
"헌법은 인민에게 지도자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지도자도 신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민의 비판과 감시를 통해서만이 지도자는 과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 비판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며, 귀에 솔깃할 수 없을 것이며 항상 옳을 수도 없습니다. 비판이 전적으로 옳아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벌을 가하는 것은 비판과 개혁을 가로막고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처사입니다. 우리는 진정 사인방이라는 현대판 미신의 전철을 다시 밟아야 합니까?" 그러나 혁명의 상징인 천안문은 굳게 닫힌 채로 침묵했다. "웨이징성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며 고등법원 상고는 1979년 11월 6일에 기각되었다."(3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