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그타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5
E. L. 닥터로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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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United States of the America를 만들어낸,

여전히 현재형인 United Immigrants from the World의

기록되거나 잊혀진 어떤 삶들, 흔적들, 상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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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 2000년 사유의 티핑포인트를 읽어야 현대 중국이 보인다
미조구치 유조 외 지음, 조영렬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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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말기에 고대제국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구체제를 "주술과 종교 면에서 지탱하고 있던 천天 사상도 크게 동요"되었다. 공자는 주대의 천명天命을 혁신하여, 천天이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인간사회의 사상事象과, 인간의 힘 저편에 있는 명료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이법理法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20-2) 묵가는 천지론天志論에서, 천자가 상벌을 통해 겸애를 실천하게 만드는 주재신(天)을 제시하였고, 도가는 "공자에서 비롯된 천의 세속화·이법화를 더욱 밀고나가", 공자 이래의 유가가 하늘에 부여했던 "도덕적·정치적인 의미, 즉 선善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의미를 제거"하였다. 이것이 "천인분리론天人分離論(하늘과 사람의 상관관계 부정)이다"(25-6)


전국시대 말 유가는 <역易>을 경전화하는 과정에서 도가의 '도-만물'의 두 세계론을 도입했다. 이것은 "존재론적 사색에 능하지 못했던 유가가 <역>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유가 내부에 도가의 '도의 존재론'을 도입하여, 사상체계의 기초를 제공"하고 "종교성을 비판하던 종래의 전통적인 태도를 고쳐, 유가의 도덕적·정치적 덕德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 단계로서 그것을 내부로 포섭하여 자기 사상세계를 풍부"하게 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27) 여기서 하늘과 사람이 단순히 대립 개념이 아니라 "사람 안에도 하늘이 있다"는 상관 관계를 인정하는 성性 개념이 등장한다.(29)


도가의 자연사상은 본래 도道와 만물, 성인과 백성의 관계에서, 근원자인 도·성인의 '무위無爲'가 원인이 되어 존재자인 만물·백성의 '자연'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순자를 계승한 동중서는 도가의 이러한 견해를 반대하여, "사업의 성패는 바로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한서漢書>, 동중서전)는 천인상관설을 주장한다.(32) 여기에 순환운동을 되풀이하는 음·양 두 기氣의 기계적 자연으로서의 천天 개념이 결합하면서, "음양설은 천인상관설을 보조하고, 천인상관설은 음양설을 포섭"하게 된다.(36) 노자 역시 "도·성인은 둘 다 무위無爲(함이 없다)이기 때문에, 만물·백성에 대한 지배는 없"다고 말하면서, "만물·백성의 스스로 그러함"이 독자적 가치를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43)


이제 "이치理나 실상情은 도가 만물 안에 내재한 것이고 그 경우는 성性이라 부른다"는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다. 동중서 학파는 "성을 상·중·하 세 종류로 나누고 각자의 선악과 역할을 논한 성삼품설을 처음으로 사상의 무대"에 올린다.(65) 한참 뒤 송학 시대에 이르면 "정이(정이천)와 주희는 오히려 불교와 도교가 제기한 만인평등관과 성性이 변경 가능하다는 논리를 계승하고, 한유에 이르러 완성된 정통적인 성삼품설을 분명하게 방기했다. (...) 이리하여 전한시대 중기부터 당대唐代의 긴 시기에 걸쳐 사람들의 마음을 속박했던 성삼품설은 마침내 종언終焉의 가을을 맞이하고, 송대의 성설性說로 승화"되기에 이른다.(71-2)


한편, 국가체제를 둘러싼 논의는 주대의 봉건제와 진대의 군현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교 국교화가 진전된 전한前漢 시대에는 봉건제를 찬미하는 언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봉건론은 "봉건제를 유교에 끌어다 붙여 지나치게 찬미하고, 유교 국교화가 거의 완성된 뒤에 처음으로 나타난 이상화된 봉건론"이라 할 수 있다.(89-90) 후한後漢 말기에는 오히려 지방분권이 진행되는 현실을 기반으로 "중앙권력의 약화를 막기 위해 동성同姓의 제후를 번병藩屛으로 봉건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이는 "이성異姓의 실력자가 중앙의 지배권을 분단"하는 폐단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봉건된 제왕은 "거꾸로 자기 세력을 확대하여 분권화를 지향"하고 만다.(94-5)


후한 말기에 사회가 혼란에 빠졌지만, 국가의 정통사상이던 유교는 거기에 무력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뢰를 잃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마음을 지탱해 줄 버팀목을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 찾아 나섰고, "불사의 신선 황제·노자를 신앙하고 스스로도 선인仙人이 되기를 바라는 황로도黃老道"가 유행한다.(124) "불교의 교의를 한역漢譯불전에 의거하면서 노장사상이나 <주역>과 결합"시킨, 격의불교格義佛敎도 불교와 노장사상의 융화를 보여준다. 이 외에 "도가를 중심으로 유가를 포섭"하려는 현학玄學이 남북조 내내 성행하였는데, 이처럼 유불도 삼교가 "각각 다른 현상을 갖고 있지만 근본에서는 일치한다"는 학문 태도는 후대에까지 유효한 힘을 계속 발휘한다.(130-2)


송대에 나타난 '천관天觀의 전환'은 "이론 면에서는 천견론의 변화에서, 의례 면에서는 교사郊祀제도의 개혁"에서 확인할 수 있다.(171) 송대 사상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재이災異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아니라, "위정자가 제대로 반성하는가"의 여부이다. 이들은 천견론의 틀을 유지하면서, "사태의 요점을 외재적인 정책 차원이 아니라, 왕의 내면적 개심을 요구"하였고, 이는 점차 "리理를 둘러싼 논의와 연동"된다. 교사제도의 측면에서도 인격신을 숭배하던 방식을 버리고, 음양이기陰陽二氣를 대표하는 "자연계를 통어하는 신으로서의 호천상제에게 제사하는 방식"을 도입한다.(172-3)


이정의 리理 사상은 "동시대의 다른 유파와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다. 남송에서 그들의 문류門流를 비판하여 ‘도학道學’이라 부른 것은 "반대파(당파적으로는 왕안석에 가깝다)도 ‘리’사상은 긍정"하기 때문이다.(187) 이들이 "주제로 삼은 것은 ‘마음心’이고, ‘리’는 마음의 존재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되는 보조 개념"이었다.(187) 성설性說이야말로 송대 신흥유교의 중심적 테마였다. 주자는 <대학> "팔조목의 계제성階梯性(순서를 밟아가는 성질)을 중시"했는데, 이는 '천리天理'를 실현할 수 있는 심성이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으며, 최종 목표, 즉 평천하의 실현은 후천적 노력에 따라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정이천의 말처럼 "성인은 배워서 이를 수 있는" 것이었다.(191-2)


주자학은 "성인으로 가는 길을 만인에게 열어놓음과 동시에, 정치질서의 담당자를 군주와 고급관료의 과점상태에서, 모든 학습자로 확대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도학이 중앙정부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줄곧 열세에 처해있으면서 지방에서 서서히 지지자를 넓히고, 남송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취에 성공하게 된 것"은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다.(191) 주자학의 새로움은 "‘리’의 총화가 도道라고 본 그 구조를 이용하면서 ‘리’ 한 글자를 가지고 총화總和와 개물個物을 관통하고, 개물의 다양성을 ‘리가 기질에 가렸기 때문’이라는 형태로 설명한 데에 있다." 수양修養은 치우침을 양성하는 "이 ‘기질의 성’을 ‘본연의 성’ 상태로 되돌려 본래의 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193-4) 


양명학은 주자학처럼 "개개 개념의 이동異同을 정리하여 장대한 철학체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수양방법의 문제로서 성·심·리 같은 여러 개념을 파악하려 한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 그 자체가 ‘리’의 발현이라고 보는 ‘심즉리’ 설을 주장"한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이원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자기가 ‘리’라고 판단한 것이 타당한지 여부를 보다 고차원에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자기의 존재 여지는 없다."(195-6)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양자가 고심한 사상적 과제가 "순수하게 학술적인 관심에서 인심人心의 작용을 분석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사회질서를 실현하기 위한 방책으로써 ‘심心’의 문제를 고찰"했다는 점이다.(197)


주자학과 양명학이 "향리공간에 대해 주목한 것은, 이들 사조의 담당자들이 재지사회에서 생활하는 지식인이고 그들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을 깔끔하게 정비하려는 의도에서였다."(200) 향리공간은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덕자有德者의 수창首唱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창화唱和함으로써 형성된다."(203) 특정 인물이 향리공간의 지도자에 걸맞는지를 가리는 시금석이 '제가齊家'인데, 이 때의 '가家'는 단혼單婚 소가족이 아니라, '종족宗族’을 가리킨다. 종족은 의장·족보·사당으로 이루어지며, 종족의 힘을 배경으로 한 향리공간의 지도자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될 경우 그를 (이신里紳이나 현신縣紳이 아니라) 향신鄕紳이라 칭하였다."(205) 


"고대 이래로 '민본民本'이라 한 것은 ‘백성이 근본’이라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백성을 근본으로 간주’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명말에 나온 민본적 언론은, 시비是非는 민간 혹은 지방의 공론 속에 있다, 황제나 관료는 민중의 시비에 따라야 한다고 ‘공론’의 존중을 주장한 것이다."(218) 황종희는 그동안 "천하의 공公이라 생각되고 있는 것이 실은 황제 개인의 대사大私(거대한 전유專有)에 불과하고, 그 대사로 인해 백성의 자사자리自私自利(백성의 사적인 수익활동)가 억압당하고 있다고 비판했다."(221) 이러한 권리의식의 성장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왕토王土 관념에 대한 민토民土 관념의 출현이다."(223)


왕토 개념에는 "조정의 소유지 외에 또 하나 이념적인 ‘천하의 공公’인 토지의 의미가 있는데, 이 ‘천하의 공’인 토지는 당시 중국의 통념에서는 ‘왕이 백성에게 준’ 정전제井田制의 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민토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개별 백성이 사유한 토지"라는 개념과 "천하만민이 균등하게 소유한 토지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즉, "명말의 '민토와 왕토의 대항'은 단순히 백성의 ‘사私’와 조정의 ‘사私’의 대항, 혹은 백성의 ‘사’와 조정의 ‘공’의 대항이 아니라, ‘만민의 사(즉 사의 종합으로서의 공)’ 대 ‘천하의 공을 표방하는 조정의 대사’의 대항"이며, 여기서, "만민의 사를 ‘합한 천하공공의 왕토라는 관념"이 창출된다.(225-7)


이처럼 명대는 "도덕의 담당자가 위정자층에서 서민층으로 넓어지고(바꾸어 말해, 백성이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감화시켜야 할 대상에서 스스로 도덕성을 발휘하는 도덕주체로 바뀐 것), 질서유지의 담당자가 위정자층에서 서민층"으로 확장되는 시기였다.(250) 송대 이후의 유교 역사는 이런 의미에서 "정치질서의 담당자가 확산된 역사로 파악"할 수 있으며, 이 관점에서 보면 "명대 후기에 일종의 정신운동으로서 서민층에 퍼지기 시작한 도덕질서가, 청대에는 종교나 향약 같은 사회시스템을 통해서 제도화되고 서민은 제도화된 도덕질서 체제 안에서 주동적 혹은 피동적으로 참여"하는 예교禮敎주의로 나아갔던 것이다.(251)


"본래 인욕人欲이라는 말은 ‘천’(자연의 조리)에 대한 ‘인’(인간의 작위, 타산)이라는 구도 속에서 쓰이는 말로, 조리에 반하거나 벗어난 작위나 의도를 가리키는 것이지, 이른바 인간 욕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명대 말기에 대두된 '욕망 긍정의 풍조'는 서구 개인주의처럼 소유욕, 물질욕에 대한 제약 없는 긍정이 아니라 "균均과 공公, 각자라는 틀 안에서 긍정"되었으며, 이는 "욕欲의 문제가 사회관계 속에서 파악되게 되었음을 가리킨다."(253-4) 대진은 "자기의 생존욕이나 소유욕이 천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달성되는 것이 인"이라 칭하였는데, 이 사고방식은 후세에 쑨원의 삼민주의 호소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260)


청대에 격화된 유동적인 사회관계는 신분의 불안정과 계층 간의 부침을 심화하였다. 여기서 생존경쟁을 완화하고 상호공존을 꾀하는 선서善書나 선회善會활동이 발생했는데, 이들은 "자기 운명을 밝게 만들기를 바라는 동시에 자손의 번영도 바랬다." 이 공동 협력의 에너지가 "향리공간에서 향치鄕治 활동을 활성화시킨 동력의 하나였다."(292) 명청 시기의 향리공간은 "관官, 리吏, 향신, 백성의 유력층, 일반 민중들이 종족, 길드, 선회, 단련團練 등의 조직이나 네트워크로 교차하면서, 사회적·경제적 공동관계를 구성한 지역활동 공간 또는 지역질서 공간"으로서 민간의 자립 역량을 지속적으로 키우는 구심점이었으며, 신해혁명을 실현시킨 '성省의 힘'으로 이어진다.(289)


"여기에서 '성省'이라 함은, 향鄕·진鎭·현縣·부府를 가로지르며 동일 평면상을 동심원적 혹은 방사선상 형태로 종횡으로 흐르는 네트워크류流이고, 그것이 한 성의 향리공간의 정치사회 공간이다. 그 공간에는 길드 네트워크, 선회·선당 네트워크 혹은 청나라 말에 많이 생긴 학회 네트워크 등 성내省內를 종횡으로 달리는 네트워크 연합이 있다. 그 네트워크가 단련을 조직하고 군대화시키는 기반을 이루는 역량이었다."(311) 향인으로 구성된 상군湘軍은 "처음에는 청 왕조의 위기를 구하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나중에는 바로 똑같은 성격에 의해 청 왕조를 와해시키는 지방의 자립과 독립으로 향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309)


서구 사상이 활발히 침투하는 민국 시기가 되면서, 봉건封建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일변한다. 옌푸는 "종법사회를 불평등한 사회로 보고, 주공·공자는 종법사회의 성인이며, 삼대三代의 봉건은 봉건제도이지 자치는 아니라고 평가"(323)했다. 진천화는 “우리는 총체總體의 자유를 구하는 것이지, 개인의 자유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공화共和라 함은 다수의 인간을 위해서 꾀하는 것으로 소수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공公은 다수자, 국민 또는 인민 전체이고, 사私는 소수자, 전제자로 보는 분명한 구도"가 있는데, 이는 일방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공'개념을 계승한 것이다.(333-4)


중국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천하생민天下生民 사상에 따르면, "백성은 국가(근대 이전에는 조정이 곧 국가였다)에는 관여하지 않는 하늘에 의해 태어난(그런 의미에서는 생민·천민天民이라 한다) 천하의 생민이고, 따라서 어느 왕조의 존망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처럼 "오직 자신들의 ‘향리공간’에 있어서 생활의 확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무정부적인 생민관은 근대까지 계승되어 살아남았다. 이때 국가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산사散沙의 자유'는 "사적 이익을 좇는 방종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향리공간에서 볼 수 있는 네트워크 사회의 공동 윤리규범이 엄존"하는 공동체 내에서 허용된 자유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3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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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권력 - 리더십의 정치학, 루스벨트에서 레이건까지
리처드 E. 뉴스타트 지음, 이병석 옮김 / 다빈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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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강력한 권력 의지가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대통령은 안목과 식견을 길러야 한다. 대통령은 시류에 맞서는 용기를 갖춰야 한다. 대통령은, 대통령은, 대통령은..." 



대통령이 지녀야 하는 혹은 지녔으면 하는 미덕은 그야말로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하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더더욱 불완전하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제도를 정비하고, 견제 수단을 마련하며, 권한을 분담하는 것은 모두가 불완전한 인간을 보완하려는 오래된 실패와 뼈저린 교훈 덕분이다. 지혜와 경험은 서로의 약점을 채우면서 역사라는 무대를 만들어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만, 하늘 아래 반복되는 일도 없다. 오랜 변주 끝에 우리가 오선지에 그린 곡은 민주주의라는 네 글자이다. 


민주주의는 내가 그토록 싫어해 마지 않는 누군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나약하게 흔들리는 깃발이고,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이며, 불의와 맹목에 금방이라도 휩쓸릴 듯한 위태로운 돛단배(piccioletta)다. 우리의 상식은 엄밀하지 않고, 우리의 편견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우리는 광장에서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우리는 광장에서 대중의 외침이 아니라 공민의 감시를 실천해야 한다. 공공선을 협의하는 광장으로 권력을 끌어다놓아야 한다. 대통령의 권력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권력은 곧 설득력이다. (...) 대통령의 권력을 분석하려면 우선 대통령의 권력에 한계선부터 그어야 한다. pp.62-63

기관의 분립과 권한의 분담은 대통령의 설득 조건을 규정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권한을 분담하고 있지만 자신의 지위가 다른 사람의 변덕에 따라 좌우되지 않을 경우, 다른 사람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기꺼이 행동할 것인가의 여부는 그 행동이 자신에게 적합한가 아닌가의 판단에 달려 있다. 대통령이 누군가를 설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백악관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그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다. p.93

설득에 어떤 보장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대통령은 설득에 실패할 위험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대통령은 힘을 잃어버릴 기회를 최소화함으로써 최대의 효과를 거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마셜 플랜은 여기서 한 가지 해답을 제시한다. 즉, 대통령은 (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힘의 가능성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p.124

권력을 중시하는 대통령은 날마다 자신이 하는 일에 포함되어 있는 온갖 결점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지만 워싱턴 사람들 전체의 마음속에 축적되는 그의 집착과 수완에 대한 인상에는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가 원하는 것을 추구할 때 흥정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그의 이점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그들의 생각은 그들이 보는 것에 의해 형성된다. 더구나 그들은 혼자 보지 않고 함께 본다. p.135

무시하고 묵인하고 망각하는 대중의 능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특히 어떤 일이 자신의 사생활과 동떨어져 있거나 예상하기 어려워 보일 때 대중은 이런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 대통령은 워싱턴 바깥의 사람들이 그가 줄 수 없는 즐거움을 그에게 기대하지 않도록 또는 그가 막아줄 수 없는 고통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의 신망을 위협하는 것은 대중의 좌절감이다. pp.181-183

대통령을 돕는 것은 어떤 요약문도 아니고, 조사 결과도 아니며, 이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합친 것도 아니다. ... 대통령은 스스로 깨우치기 위해 대통령으로서의 이해와 관계들에 관련되는 모든 종류의 사실, 의견, 소문 등을 되도록 널리 접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자기 자신의 중앙정보국 국장이 되어야 한다. pp.258-259

대통령이 직책상 가지고 있는 목표들을 그들이 직무를 시작할 때 가지고 있던 의도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런 목표들은 오히려 사건들에 대한 대응의 문제다. 또한 이런 목표들을 ‘열정’과 같은 기질의 징후들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관여`로 이끄는 말과 행동이다. pp.324-325

(대통령이 자신의 경험에 의지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명백하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경험에 올라타려고 애쓰면 된다. 관찰을 통해 직접적으로 올라타거나 연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올라탈 수도 있다. 요컨대 그들은 질문을 하면 된다. 그리고 대답 대신(확실한 대답이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더 많은 통찰을 낳을 수 있도록 더 적합한 질문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참모들에게 인식시키면 된다. p.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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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교주의 - 17-18세기 중국 지식인의 윤리, 학문, 종족의 담론 역사 모노그래프 2
카이윙 초우 지음, 양휘웅 옮김 / 모노그래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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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 말기의 극심한 사회적 혼란은 농민들을 "세금과 임대료, 다수의 과도한 ‘잡판’(雜辦, 추가세금), 서리·아전·지주·신사층의 끝없는 압박이라는 삼중고"로 옭아매었다.(55) 유가 덕행의 전범이어야 할 신사층이 앞장서서 유가의 사회적 윤리를 벗어나자, 일반 백성들도 "더 이상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겠다는 욕망을 보이지 않았다."(58) 부패한 관료들은 어디에나 존재했지만, 과거에 "부패는 관료로서 있을 수 없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던 반면, 명말의 "가정연간 이후에는 부패행위가 비난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관료로서의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56) 사회 혼란은 언어의 의미를 바꾸는 지경에 이르렀고, 유가 사회의 전통 덕목들이 폐기되었다.


16세기에 나타난 가장 독특한 현상은 '대중적 유교'의 등장이다. 삼일교三一敎를 창시한 임조은은 도교와 불교의 정신수양을 받아들였고, 태주학파를 창시한 왕간은 "인간의 도덕적 의지의 실현이 ‘자연’ 그 자체에 의한 자발적인 이행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퍼뜨렸다." 왕간은 대중영합적인 공개강연을 통해 "도덕적 의지를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행동거지에 대한 엄격한 조절도, 강력한 정신적 수양도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71) 이지李贄도 "교의敎義, 구속, 규칙은 전혀 가치가 없"다고 말하면서, 일체의 외부 제약을 부정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가장 혐오한 위선僞善은 관료들이 방종과 탐욕을 버리지 않고도 성인 행세를 취하는 편리한 구실로 활용되었다.


동림서원은 태주학파의 대중영합주의에 반대하고, 엘리트가 주도하는 방식으로 유가 질서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관료들 사이에 벌어진 도덕적 공황상태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단적인 학설과 혼합주의적·대중영합적인 운동의 유행에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79)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주관적인 도덕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항하기 위해, 도덕적인 수양 과정에서 예禮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동림당파 학자들은 "인仁은 인간을 동물과 더욱 다르게 만들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문화의 산물"이라고 말하면서, "인仁은 사람의 자발적 행위가 아니라, 유가적 규범과의 조화 속에서 이뤄지는 행위라고 규정"하였다.(83)


이처럼 청조에 등장한 교훈주의와 의고擬古주의, 순수주의와 경전經典 지상주의의 출발점은 모두 '예禮'였다. 청초의 유학자들은 예가 "일상생활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조절하고, 감정을 적절하게 이끌며, 예의 바른 행동 양식을 분별하고, 정치질서를 유지하게 한다"는 순자의 가르침을 숭배했다. 순자는 "예의 근본적인 기능은 사회 구성원의 ‘분’(分, 신분)을 구별하는 것이다. 인仁이란 분화된 사회적 신분체계 안으로 자신을 편제編制시키는 인간의 능력과 관심을 통해서 규정된다"는 말로 신분 격차를 인정하였다. 청초의 예교주의자들에게 "공자가 말한 정명正名에서 ‘명’(名, 이름)이란 순자가 ‘분’(分, 신분)이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43)


예교주의는 정반대의 입장을 옹호하는 유효한 수단이기도 했다. 예의 실천은 청조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한족 지식인들이 "문화 정체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방법"이자, 관료로 진출한 한족 지식인들이 "자신을 명조의 체제보다는 중국의 문화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들이 이민족 통치 아래에서 (중국 문화의 보편성을) 수호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되었다.(97-8) 18세기의 유학자들은 경학經學에 대한 문헌학적 비평을 통해 예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얻고자 했다. 이는 "송대 신유학자들의 우주론적·본체론적 체계를 상당히 훼손"했으며, 송·원대에 행해진 "경전의 주석에 보이는 이단적 요소를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111-2)


강희제가 강남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자 "명조에 대한 유학자들의 충성은 시들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폭넓은 작업을 맡은 관료 밑에서 개인 막료의 길"을 걸었고, 학문의 전문직업화에 동참했다.(281-2) 송·명대 의례가 정치·문화적 상징성을 상실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만주족 정권이 정주학파와 한족의 의례를 후원한 점이었다. 정주학파에 대한 강희제의 관심 증가는 만주족에 대한 상징적 저항의 수단이었던, 송·명대의 의례를 향한 일종의 향수적 탐닉마저 의미 없게 만들었다."(283) 한학파 학자들은 "고대의 성인이 전해준 ‘의리’(義理, 도덕적 진리), 즉 도道를 경전에서 찾을 수 있다"는 순수주의 해석학을 경학의 기본 원리로 받아들였다.(290)


한학파 학자들이 보기에 "소학과 문헌학은 유가경전으로부터 이단적 생각을 삭제하는 강력한 무기이자, 윤리적 이론을 위한 확실한 근거"였다.(318) 한대 주석은 "주대周代와 시간상으로 가까운 것 외에도, 불교의 영향력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313) 능정감은 리理가 "추상적이고 애매하며 입증할 수 없는 개념"으로서 "도덕 수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인간의 욕망으로 더럽혀지거나 잃어버린 무언가를 회복한다는 신유학자들의 인식에서 나온 ‘복성’(復性, 본성의 회복)이라는 용어"를 삭제했다. 그는 "감정과 욕망이 예절과 조화를 이루어 표현되고 만족될 때, 인간의 본성은 조화로운 상태를 회복"한다고 주장했다.(328-9)


"명조가 붕괴한 이후, 학자들은 지방 권력의 주요한 중심으로서 혈연조직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150) "명·청 교체기에 종족宗族은 점차 신사층이 여러 문제점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한 가장 중요한 제도적 용법으로 떠올랐다." 종족은 "경전을 통해 인정받은 조직 형태"였으며, "유가의 사회윤리는 경전에 담긴 예의 실천을 통해서 친족들에게 전승"될 수 있기 때문에 순수주의자들의 구미에 맞는 제도였다.(144) 고염무를 비롯한 많은 청초 학자들은 "일반 백성에게 가치를 전달한다는 교훈주의적 접근"을 거부하고, 국가 기능을 보조하는 강력한 지역 집단으로 "종족이 안정된 사회와 군주제의 질서에 필수적인 사회 제도라고 생각했다."(160)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종족의 이론적 기초를 수립하려는 논쟁은 유학자들을 제사와 관련된 경전 연구로 이끌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세대를 고정한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정 확대된 일가의 집단을 선호"하는 방식이었다.(182) 일찍이 정이는 "모든 사람이 ‘사친’(四親, 4대의 직계조상), 즉 부·조부·증조부·고조부까지 제사를 지낼 권리를 가졌다는 점을 정당화"하는 소종小宗작업을 통해, "종자宗子에게만 직계 조상에게 제사를 올릴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는 "종자가 주관하는 공동의 의식에 친족들이 참여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여, "종자宗子에게 예禮의 권위를 집중"시켰다.(185-6)


만사대는 종법제도가 고대의 세습귀족 체제와 관련이 없으며, 대종법大宗法에서 종자의 지위는 자신의 관직 여부가 아니라 시조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시조가 명조나 그 이전의 왕조에서 관직을 가졌다면, 만주족 정권 치하에서 관계에 몸담지 않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한족 지식층도 종법 체제를 준수할 수 있었다." 종법 원칙은 "한족에게 황금시대였던 주대의 이상적 제도 중 하나"였기 때문에, 명조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족 지식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현실에 대한 적극적 거부는 "시대착오적인 제도를 중국 문화의 상징"이자, "중국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고수되어야 하는 것"으로 고착화시켰다.(208)


"18세기 중반에 유학은 한학과 송학으로 양분되었지만, 이것이 각 학파의 노선에 따라 여성의 정절 숭배에 대한 태도까지 양분시키지는 않았다."(353) "종족의 활동과 관련된 학자들의 관심은 자기 가문의 여성들이 적절한 행동을 위한 모든 규칙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것에 있었다."(357) "당연히 정주학파의 많은 지지자는 과부와 정혼녀의 정절을 지지"했으며, "도덕적 기준을 예교주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영향 속에서, 송대 신유학자의 윤리를 비판한 것으로 저명했던 대진 같은 주요 학자도 여성이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여성이 정절을 지키는 행위에 십분 동의했다."(354-5)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한학파 학자의 윤리도 송대 신유학자의 윤리 못지않게 획일적으로 제정된 행위준칙에 개인이 종속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선호했다. 명말의 급진적 사상가들이 도덕성 발달에서 개성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한학파 학자들은 가부장적 권위이든 제도적 권위이든 간에 개인이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찬양했다."(343) 신유학이 사색과 자기반성에 몰두한다고 비난하면서 언어의 순수 해석학을 지향하던 예교주의는 "신유학 윤리의 형이상학적 상층구조"를 무너뜨렸지만, 오히려 "유가의 사회윤리를 강화"하여 결과적으로, 수절 과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패루牌樓나 시조를 모시는 건물인 조묘 같은 부정하고 싶은 유산을 남겼다.(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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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벤저민 엘먼 지음, 양휘웅 옮김 / 예문서원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명대 유학자들은 "도학에 대한 자신들의 책무를 자각하고 있"었으며, "명 왕조가 몰락하기 전까지 위대한 중국의 학자들이 심취했던 가장 지배적인 사상은 내성지학內聖之學이었다."(57) 흔히 17세기에 도학道學이 결정적인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되지만, 명대 중반부터 이미 "과거 시험관들은 ‘입증할 수 있는 것에 근거한 학문’을 의미하는 ‘고거학考據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16세기에 왕수인은 "사서四書에서 ‘격물格物’(사물의 연구)이라는 용어에 나타난 주희의 ‘현상론자’적 입장을 통렬히 논박하였다."(161) 왕수인의 비판 정신을 이어받은 태주학파泰州學派는 "경전이 절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보고寶庫"가 아니라는 말로, 비평의 자율성을 강조하였다.(162)


여기에 "만주족의 승리가 가져온 폭발적인 영향은 청대 고증학의 내부적인 성립과 방향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많은 이들이 "명의 멸망을 도덕적 쇠약과 사상적 혼돈의 결과로서 해석했고, 이러한 결과는 공허하고 피상적인 도학道學의 공리공론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173-4) 강남 지역의 학자들은 "자기수양만으로 효과적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역동적인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면서, "실증할 수 있는 주제로만 학술 담론을 제한"하였다.(178-9) "도학적 해석의 장막 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경전과 역사 서적에 보이는 ‘명칭과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名物)을 설명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166)


청조淸朝는 비정치적 학술 활동을 장려하면서 대규모 편찬 사업을 벌여 학자들의 생활 양식을 규정하였다. "지식인들은 서원, 고위 관료들의 막부幕府, 지방과 국가의 편찬 사업 등의 학술 작업에 고용"되었으니, "많은 청대의 학자들에게 학술은 생계의 수단이었다."(241) 그 정점에 달한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 작업을 통해, "편찬자들은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작품에 대한 비평적인 해제를 작성하였고, 전서全書 내에 포함될 가치가 있는 책을 선정하였으며, 선정된 작품 중에서 당시 남아 있는 가장 훌륭한 판본을 기준으로 정교한 교감 작업을 진행하였다."(257) "18세기의 고증학자들은 언제 어느 곳이든지, 학술 후원과 관료의 막우직幕友職을 받아들였다."(266)


고증학의 혁신은 방법론상의 개혁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실증을 중시하는 고증학자들의 목적은 "‘과학적 또는 객관적인 것에 있지 않았고, 고대 성현들의 생각과 의도를 다시 찾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대 경전의 언어를 사용하려는 유학자들의 책무와 관련이 있었다."(15) 이들은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처럼 사회 혁명가나 정치혁명가라기보다는 도덕적인 개혁가로서 활동"했고, 정확한 연구와 재구성을 통해 "고대 경전 본래의 순수한 언어"에 기반한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56) "청대 고증학의 학문적인 '의도'와 (급진적인 인습 타파 운동 같은) 그것의 문화적인 '결과'는 '별개'였다."(15)


고증학자들이 보기에 시급한 것은 "문헌 자체에 대한 학습과 실증적인 학술에 대한 복귀였다." 이들은 "고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학 전통은 정확한 고증과 분석을 통해서만 부활할 수 있"으며, 고대와의 단절된 대화를 소통시키는 것이, 당대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이에 따라 경전 고증 방법론인 소학小學이 명 말기부터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연구 영역으로 발전하였다. 매작梅鷟(약 1513년 경 활동)은 고문 <상서>를 검토하여, "위작자가 무의식적으로 집어넣은 문체, 지리, 연대상의 착오를 밝혀내었다."(131) 이에 대응하여 도학의 가르침을 수호하려는 진제의 방어 전략도 "철학 자체가 아닌 소학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138) 


소학은 과거로 통하는 길이었으며, "고대를 재구성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에 존재해 왔던 광범위한 지적, 실용적 지식의 영역을 재창조하는 작업이었다."(194) 고증학자들은 "당시 ‘서학西學’으로 전수되었던 것이 원래 고대 중국의 성왕들이 가르친 것이며 이것이 서양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이른바 “서양학문의 기원은 중국”이라고 알려진 학설을 주장"하였다.(220) 그러나, 2차 방정식을 푸는 "송원 시대의 방법이 예수회파 선교사들이 소개했던 대수학(algebra)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던 고증학자들은 "서구의 수학이 예수회가 소개한 대수학의 수준을 넘어 얼마나 발전했는지 깨닫지 못했다."(195)


19세기 초, 제국이 서구의 압력과 내부의 분열로 흔들리자 장사長沙와 광주의 서원들을 중심으로 경세학파가 등장한다. 방동수方東樹는 "고증학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수양의 결핍과 사회적 관심의 하락"이 중국을 도덕적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하였고, 학자 겸 관료였던 증국번曾國藩은 "동아시아에 서양의 군사력이 침입함으로써 발생하게 된 ‘자강운동自强運動’의 주요한 제창자로서, 지역과 국가의 서원에서 송학을 후원하였다."(451) 결국 "강남의 고증학 학술공동체 기구는 19세기 초반에 나타난 고증학에 대한 반발의 결과로서 사상적으로 분해되었고, 양자강 하류 유역에서 진행된 태평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대파괴 속에서 소멸되었다."(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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