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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 2000년 사유의 티핑포인트를 읽어야 현대 중국이 보인다
미조구치 유조 외 지음, 조영렬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춘추 말기에 고대제국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구체제를 "주술과 종교 면에서 지탱하고 있던 천天 사상도 크게 동요"되었다. 공자는 주대의 천명天命을 혁신하여, 천天이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인간사회의 사상事象과, 인간의 힘 저편에 있는 명료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이법理法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20-2) 묵가는 천지론天志論에서, 천자가 상벌을 통해 겸애를 실천하게 만드는 주재신(天)을 제시하였고, 도가는 "공자에서 비롯된 천의 세속화·이법화를 더욱 밀고나가", 공자 이래의 유가가 하늘에 부여했던 "도덕적·정치적인 의미, 즉 선善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의미를 제거"하였다. 이것이 "천인분리론天人分離論(하늘과 사람의 상관관계 부정)이다"(25-6)
전국시대 말 유가는 <역易>을 경전화하는 과정에서 도가의 '도-만물'의 두 세계론을 도입했다. 이것은 "존재론적 사색에 능하지 못했던 유가가 <역>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유가 내부에 도가의 '도의 존재론'을 도입하여, 사상체계의 기초를 제공"하고 "종교성을 비판하던 종래의 전통적인 태도를 고쳐, 유가의 도덕적·정치적 덕德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 단계로서 그것을 내부로 포섭하여 자기 사상세계를 풍부"하게 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27) 여기서 하늘과 사람이 단순히 대립 개념이 아니라 "사람 안에도 하늘이 있다"는 상관 관계를 인정하는 성性 개념이 등장한다.(29)
도가의 자연사상은 본래 도道와 만물, 성인과 백성의 관계에서, 근원자인 도·성인의 '무위無爲'가 원인이 되어 존재자인 만물·백성의 '자연'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순자를 계승한 동중서는 도가의 이러한 견해를 반대하여, "사업의 성패는 바로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한서漢書>, 동중서전)는 천인상관설을 주장한다.(32) 여기에 순환운동을 되풀이하는 음·양 두 기氣의 기계적 자연으로서의 천天 개념이 결합하면서, "음양설은 천인상관설을 보조하고, 천인상관설은 음양설을 포섭"하게 된다.(36) 노자 역시 "도·성인은 둘 다 무위無爲(함이 없다)이기 때문에, 만물·백성에 대한 지배는 없"다고 말하면서, "만물·백성의 스스로 그러함"이 독자적 가치를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43)
이제 "이치理나 실상情은 도가 만물 안에 내재한 것이고 그 경우는 성性이라 부른다"는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다. 동중서 학파는 "성을 상·중·하 세 종류로 나누고 각자의 선악과 역할을 논한 성삼품설을 처음으로 사상의 무대"에 올린다.(65) 한참 뒤 송학 시대에 이르면 "정이(정이천)와 주희는 오히려 불교와 도교가 제기한 만인평등관과 성性이 변경 가능하다는 논리를 계승하고, 한유에 이르러 완성된 정통적인 성삼품설을 분명하게 방기했다. (...) 이리하여 전한시대 중기부터 당대唐代의 긴 시기에 걸쳐 사람들의 마음을 속박했던 성삼품설은 마침내 종언終焉의 가을을 맞이하고, 송대의 성설性說로 승화"되기에 이른다.(71-2)
한편, 국가체제를 둘러싼 논의는 주대의 봉건제와 진대의 군현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교 국교화가 진전된 전한前漢 시대에는 봉건제를 찬미하는 언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봉건론은 "봉건제를 유교에 끌어다 붙여 지나치게 찬미하고, 유교 국교화가 거의 완성된 뒤에 처음으로 나타난 이상화된 봉건론"이라 할 수 있다.(89-90) 후한後漢 말기에는 오히려 지방분권이 진행되는 현실을 기반으로 "중앙권력의 약화를 막기 위해 동성同姓의 제후를 번병藩屛으로 봉건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이는 "이성異姓의 실력자가 중앙의 지배권을 분단"하는 폐단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봉건된 제왕은 "거꾸로 자기 세력을 확대하여 분권화를 지향"하고 만다.(94-5)
후한 말기에 사회가 혼란에 빠졌지만, 국가의 정통사상이던 유교는 거기에 무력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뢰를 잃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마음을 지탱해 줄 버팀목을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 찾아 나섰고, "불사의 신선 황제·노자를 신앙하고 스스로도 선인仙人이 되기를 바라는 황로도黃老道"가 유행한다.(124) "불교의 교의를 한역漢譯불전에 의거하면서 노장사상이나 <주역>과 결합"시킨, 격의불교格義佛敎도 불교와 노장사상의 융화를 보여준다. 이 외에 "도가를 중심으로 유가를 포섭"하려는 현학玄學이 남북조 내내 성행하였는데, 이처럼 유불도 삼교가 "각각 다른 현상을 갖고 있지만 근본에서는 일치한다"는 학문 태도는 후대에까지 유효한 힘을 계속 발휘한다.(130-2)
송대에 나타난 '천관天觀의 전환'은 "이론 면에서는 천견론의 변화에서, 의례 면에서는 교사郊祀제도의 개혁"에서 확인할 수 있다.(171) 송대 사상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재이災異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아니라, "위정자가 제대로 반성하는가"의 여부이다. 이들은 천견론의 틀을 유지하면서, "사태의 요점을 외재적인 정책 차원이 아니라, 왕의 내면적 개심을 요구"하였고, 이는 점차 "리理를 둘러싼 논의와 연동"된다. 교사제도의 측면에서도 인격신을 숭배하던 방식을 버리고, 음양이기陰陽二氣를 대표하는 "자연계를 통어하는 신으로서의 호천상제에게 제사하는 방식"을 도입한다.(172-3)
이정의 리理 사상은 "동시대의 다른 유파와 확연히 구별"되지 않는다. 남송에서 그들의 문류門流를 비판하여 ‘도학道學’이라 부른 것은 "반대파(당파적으로는 왕안석에 가깝다)도 ‘리’사상은 긍정"하기 때문이다.(187) 이들이 "주제로 삼은 것은 ‘마음心’이고, ‘리’는 마음의 존재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되는 보조 개념"이었다.(187) 성설性說이야말로 송대 신흥유교의 중심적 테마였다. 주자는 <대학> "팔조목의 계제성階梯性(순서를 밟아가는 성질)을 중시"했는데, 이는 '천리天理'를 실현할 수 있는 심성이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으며, 최종 목표, 즉 평천하의 실현은 후천적 노력에 따라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정이천의 말처럼 "성인은 배워서 이를 수 있는" 것이었다.(191-2)
주자학은 "성인으로 가는 길을 만인에게 열어놓음과 동시에, 정치질서의 담당자를 군주와 고급관료의 과점상태에서, 모든 학습자로 확대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도학이 중앙정부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줄곧 열세에 처해있으면서 지방에서 서서히 지지자를 넓히고, 남송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취에 성공하게 된 것"은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다.(191) 주자학의 새로움은 "‘리’의 총화가 도道라고 본 그 구조를 이용하면서 ‘리’ 한 글자를 가지고 총화總和와 개물個物을 관통하고, 개물의 다양성을 ‘리가 기질에 가렸기 때문’이라는 형태로 설명한 데에 있다." 수양修養은 치우침을 양성하는 "이 ‘기질의 성’을 ‘본연의 성’ 상태로 되돌려 본래의 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193-4)
양명학은 주자학처럼 "개개 개념의 이동異同을 정리하여 장대한 철학체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수양방법의 문제로서 성·심·리 같은 여러 개념을 파악하려 한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 그 자체가 ‘리’의 발현이라고 보는 ‘심즉리’ 설을 주장"한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이원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자기가 ‘리’라고 판단한 것이 타당한지 여부를 보다 고차원에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자기의 존재 여지는 없다."(195-6)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양자가 고심한 사상적 과제가 "순수하게 학술적인 관심에서 인심人心의 작용을 분석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사회질서를 실현하기 위한 방책으로써 ‘심心’의 문제를 고찰"했다는 점이다.(197)
주자학과 양명학이 "향리공간에 대해 주목한 것은, 이들 사조의 담당자들이 재지사회에서 생활하는 지식인이고 그들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을 깔끔하게 정비하려는 의도에서였다."(200) 향리공간은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덕자有德者의 수창首唱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창화唱和함으로써 형성된다."(203) 특정 인물이 향리공간의 지도자에 걸맞는지를 가리는 시금석이 '제가齊家'인데, 이 때의 '가家'는 단혼單婚 소가족이 아니라, '종족宗族’을 가리킨다. 종족은 의장·족보·사당으로 이루어지며, 종족의 힘을 배경으로 한 향리공간의 지도자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될 경우 그를 (이신里紳이나 현신縣紳이 아니라) 향신鄕紳이라 칭하였다."(205)
"고대 이래로 '민본民本'이라 한 것은 ‘백성이 근본’이라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백성을 근본으로 간주’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명말에 나온 민본적 언론은, 시비是非는 민간 혹은 지방의 공론 속에 있다, 황제나 관료는 민중의 시비에 따라야 한다고 ‘공론’의 존중을 주장한 것이다."(218) 황종희는 그동안 "천하의 공公이라 생각되고 있는 것이 실은 황제 개인의 대사大私(거대한 전유專有)에 불과하고, 그 대사로 인해 백성의 자사자리自私自利(백성의 사적인 수익활동)가 억압당하고 있다고 비판했다."(221) 이러한 권리의식의 성장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왕토王土 관념에 대한 민토民土 관념의 출현이다."(223)
왕토 개념에는 "조정의 소유지 외에 또 하나 이념적인 ‘천하의 공公’인 토지의 의미가 있는데, 이 ‘천하의 공’인 토지는 당시 중국의 통념에서는 ‘왕이 백성에게 준’ 정전제井田制의 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은 민토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개별 백성이 사유한 토지"라는 개념과 "천하만민이 균등하게 소유한 토지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즉, "명말의 '민토와 왕토의 대항'은 단순히 백성의 ‘사私’와 조정의 ‘사私’의 대항, 혹은 백성의 ‘사’와 조정의 ‘공’의 대항이 아니라, ‘만민의 사(즉 사의 종합으로서의 공)’ 대 ‘천하의 공을 표방하는 조정의 대사’의 대항"이며, 여기서, "만민의 사를 ‘합한 천하공공의 왕토라는 관념"이 창출된다.(225-7)
이처럼 명대는 "도덕의 담당자가 위정자층에서 서민층으로 넓어지고(바꾸어 말해, 백성이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감화시켜야 할 대상에서 스스로 도덕성을 발휘하는 도덕주체로 바뀐 것), 질서유지의 담당자가 위정자층에서 서민층"으로 확장되는 시기였다.(250) 송대 이후의 유교 역사는 이런 의미에서 "정치질서의 담당자가 확산된 역사로 파악"할 수 있으며, 이 관점에서 보면 "명대 후기에 일종의 정신운동으로서 서민층에 퍼지기 시작한 도덕질서가, 청대에는 종교나 향약 같은 사회시스템을 통해서 제도화되고 서민은 제도화된 도덕질서 체제 안에서 주동적 혹은 피동적으로 참여"하는 예교禮敎주의로 나아갔던 것이다.(251)
"본래 인욕人欲이라는 말은 ‘천’(자연의 조리)에 대한 ‘인’(인간의 작위, 타산)이라는 구도 속에서 쓰이는 말로, 조리에 반하거나 벗어난 작위나 의도를 가리키는 것이지, 이른바 인간 욕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명대 말기에 대두된 '욕망 긍정의 풍조'는 서구 개인주의처럼 소유욕, 물질욕에 대한 제약 없는 긍정이 아니라 "균均과 공公, 각자라는 틀 안에서 긍정"되었으며, 이는 "욕欲의 문제가 사회관계 속에서 파악되게 되었음을 가리킨다."(253-4) 대진은 "자기의 생존욕이나 소유욕이 천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달성되는 것이 인"이라 칭하였는데, 이 사고방식은 후세에 쑨원의 삼민주의 호소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260)
청대에 격화된 유동적인 사회관계는 신분의 불안정과 계층 간의 부침을 심화하였다. 여기서 생존경쟁을 완화하고 상호공존을 꾀하는 선서善書나 선회善會활동이 발생했는데, 이들은 "자기 운명을 밝게 만들기를 바라는 동시에 자손의 번영도 바랬다." 이 공동 협력의 에너지가 "향리공간에서 향치鄕治 활동을 활성화시킨 동력의 하나였다."(292) 명청 시기의 향리공간은 "관官, 리吏, 향신, 백성의 유력층, 일반 민중들이 종족, 길드, 선회, 단련團練 등의 조직이나 네트워크로 교차하면서, 사회적·경제적 공동관계를 구성한 지역활동 공간 또는 지역질서 공간"으로서 민간의 자립 역량을 지속적으로 키우는 구심점이었으며, 신해혁명을 실현시킨 '성省의 힘'으로 이어진다.(289)
"여기에서 '성省'이라 함은, 향鄕·진鎭·현縣·부府를 가로지르며 동일 평면상을 동심원적 혹은 방사선상 형태로 종횡으로 흐르는 네트워크류流이고, 그것이 한 성의 향리공간의 정치사회 공간이다. 그 공간에는 길드 네트워크, 선회·선당 네트워크 혹은 청나라 말에 많이 생긴 학회 네트워크 등 성내省內를 종횡으로 달리는 네트워크 연합이 있다. 그 네트워크가 단련을 조직하고 군대화시키는 기반을 이루는 역량이었다."(311) 향인으로 구성된 상군湘軍은 "처음에는 청 왕조의 위기를 구하는 역할을 담당했지만, 나중에는 바로 똑같은 성격에 의해 청 왕조를 와해시키는 지방의 자립과 독립으로 향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309)
서구 사상이 활발히 침투하는 민국 시기가 되면서, 봉건封建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일변한다. 옌푸는 "종법사회를 불평등한 사회로 보고, 주공·공자는 종법사회의 성인이며, 삼대三代의 봉건은 봉건제도이지 자치는 아니라고 평가"(323)했다. 진천화는 “우리는 총체總體의 자유를 구하는 것이지, 개인의 자유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공화共和라 함은 다수의 인간을 위해서 꾀하는 것으로 소수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공公은 다수자, 국민 또는 인민 전체이고, 사私는 소수자, 전제자로 보는 분명한 구도"가 있는데, 이는 일방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회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공'개념을 계승한 것이다.(333-4)
중국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천하생민天下生民 사상에 따르면, "백성은 국가(근대 이전에는 조정이 곧 국가였다)에는 관여하지 않는 하늘에 의해 태어난(그런 의미에서는 생민·천민天民이라 한다) 천하의 생민이고, 따라서 어느 왕조의 존망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처럼 "오직 자신들의 ‘향리공간’에 있어서 생활의 확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무정부적인 생민관은 근대까지 계승되어 살아남았다. 이때 국가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산사散沙의 자유'는 "사적 이익을 좇는 방종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향리공간에서 볼 수 있는 네트워크 사회의 공동 윤리규범이 엄존"하는 공동체 내에서 허용된 자유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3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