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의 힘 - 지리는 어떻게 개인의 운명을, 세계사를,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가 지리의 힘 1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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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 년 만에 해양 강국을 꿈꾸는 중국의 지정학적 공포는 ‘중국의 급수탑‘인 티베트에 있다. 중국이 티베트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인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중국의 주요 강인 황허, 양쯔, 그리고 메콩 강의 수원지˝를 위협받는다. ˝미국에 버금가는 물을 사용하지만 인구는 다섯 배나 많은 중국으로서는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33-4) 고대 실크로드 지역인 신장은 8개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중국 심장부와 주변국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더구나 이 지역은 ˝다량의 원유가 매장돼 있을 뿐 아니라 중국 핵무기 실험장˝이 위치하고 있어서 독립운동의 불길을 방관하기에는 전략적 중요성이 높다.(37-8)

해양은 원활한 대외 무역을 유지하고 혹여 국제 분쟁이라도 벌어졌을 때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핵심 지역이다. 중국은 일본 규슈에서 시작해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남중국해를 잇는 ‘제1열도선‘을 군사 전략상 목표선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에 더해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해안선으로부터 근접한 지역에 9개의 가상 기준선을 그은 ‘9단선nine-dash line‘(2013년 대만이 추가되어 10단선)을 근거로 남중국해의 90퍼센트를 자국 해역이라고 주장해 왔다. 일본과 중국의 영토 분쟁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도 바로 ‘댜오위다오 열도(센카쿠 열도)‘이다. 해양 분쟁의 핵심 내용은 ˝공동 수역의 개념과 평화 시 자유로운 항해˝이지만, 어느 강대국도 먼저 물러날 리 없다.(51)

1803년, 신생 미합중국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지역을 사들이면서 미시시피강 유역을 손에 넣었다. 미시시피 강처럼 ˝수원이 산악지대에 있지도 않으며, 그토록 광대한 거리를 가로질러 대양으로 가는 길 내내 그만큼 차분하게 흐르는 강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 강들은 항구로 이어지는데, 수상 운반은 ˝예나 지금이나 육로 운송보다 훨씬 싸게 들어 당시 한창 상승일로이던 교역을 위한 천연 수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시시피 유역은 ˝동부 해안을 새 영토와 연결해 주는 동서 루트를 확보했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수계는 인구 밀도가 희박한 지역들을 서로 묶어주면서 단일 통합체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63-4)

미국은 1819년 스페인과 대륙횡단조약을 맺어, 태평양에 도달했고, 1830-40년대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텍사스를 손에 넣었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위협은 중남미와 카리브해를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이었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여,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은 물론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까지 손에 넣었다. 이 모든 지역이 유용했지만 특히 괌이야말로 필수적인 전략적 자산이었다. 쿠바 또한 강대국이 지배한다면 전략적 위협이 될 소지가 있었다.˝ 1903년에는 ˝파나마 운하의 배타적인 권한을 보장받는 조약을 체결˝하여 무역 붐을 조성했다.(69-70) 미국의 초기 정복 전략은 외국의 원유와 가스에 대한 갈증을 줄여주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유럽, 특히 동유럽에 유독 민족 국가들이 많이 분포하는 현상은 ˝눈에 띄게 많은 산맥과 강, 계곡들을 보면 이내 납득이 간다.˝(91) ˝베오그라드에서 다뉴브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바 강을 제외하면 유럽의 주요 강들은 서로 만나지 않기 때문에˝ 이 하천들이 천연 국경 역할을 했고, 이런 양상은 ˝각 하천 유역마다 적어도 하나의 주요 도시를 발전시켰다.˝(92-3) 북유럽평원을 장악한 프랑스는 광대하고 비옥한 대지는 물론 상당수의 강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유럽의 북쪽과 남쪽을 전부 아우르는 유일한 국가이다. 이 지리적 특징은 ˝상대적으로 평탄한 지형과 어우러져 특히 나폴레옹 시대부터 지역 통합을 이루고 권력을 중앙으로 모으는 데 적합했다.˝(95)

반면, 스페인은 늘 지리적 조건으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연안 평야는 토질도 형편없는데다 규모도 작았고 하천들의 길이도 짧은 탓에 국내 시장 곳곳으로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산악지대로 에워싸인 고원 분지인 메세타 센트럴은 아예 내륙 일부 시장과의 연결을 막아 버렸다. 서유럽 지역과의 교역은 피레네 산맥이 버티고 있는 바람에 더욱 험난했다.˝ 스페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코 총통의 독재 아래서 뒤쳐졌고 정치 현실 또한 현대 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직된 편이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고 난 뒤 새로이 민주 국가로 거듭난 이 나라는 1986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한다.˝(96)

˝프랑스는 러시아에서도 꽤 멀고, 몽골 유목민들과도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으며, 영국과는 해협이 가로막고 있다.˝ 프랑스의 유일한 지리적 우려는 통일 독일이다. 독일은 독일대로 프랑스보다 훨씬 심각한 지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 ˝서쪽에는 통일 강국 프랑스가 오랫동안 버티고 있으며, 동쪽에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곰이 웅크리고 있었다. 독일에게 최악의 상황은 이 둘이 통로인 북유럽평원을 건너 한꺼번에 침공해 오는 것이다.˝(104-5) 유럽연합과 나토를 통해 ˝독일은 서유럽에 닻을 내릴 수 있었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이) 폭풍우 심한 날에는 (에너지 강국인 러시아에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면서)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109-110)

영국의 지리적 조건은 훌륭한 편이다. ˝질 좋은 농지, 훌륭한 하천들, 최적의 해양 접근성, 유럽 대륙과 교역하기에 부족함 없는 어획량이 있다. 게다가 섬나라 민족이라는 덕도 본다. 유럽의 이웃들이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동안 영국은 그 지리적 조건에 고마워했던 때가 수차례 있었다.˝(110) 그린란드Greenland-아이슬란드Iceland-영국UK을 잇는 해상 항로의 요충지인 GIUK 갭 덕분에 영국은 북대서양에서도 전략적 이점을 누렸다. ˝2014년에 실시된 스코틀랜드 독립을 묻는 투표에서 결과가 독립 찬성으로 나올 가능성을 두고 영국 정부가 공포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하나도 이 GIUK 갭이었다.˝(112)

13세기 즈음의 초기 러시아는 ˝방어력이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산지는 물론 사막도 없고 변변한 하천도 드물었다. 사방이 허허벌판인데다 남쪽과 동쪽의 스텝 지대를 넘어서면 몽골인들의 땅이었다. 침입자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진격해 올 수 있었다.˝ 지나칠만큼 강인함을 경외하는 러시아의 특징은 여기서 비롯한다. ˝최초의 차르인 이반 4세는 <방어로서의 공격> 개념을 실전에 도입한 인물이었다.˝ 1553년 이반 대제 시기에는 ˝동쪽의 우랄 산맥지대와 남쪽의 카스피 해, 그리고 북으로는 북극권 한계선까지 잠식해 갔다.˝ 18세기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왕 시기에는 서쪽으로 눈을 돌려,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카르파티아 산맥에까지 이르렀다.˝(127-9)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국가들은 세 가지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중립 성향의 국가들인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은 ˝에너지를 자급자족하고 있으며 안보나 무역을 위해 굳이 어느 편의 신세를 질 일이 없기 때문˝에 러시아나 서방과 손을 잡을 명분이 별로 없다. 친러시아 진영인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벨로루시, 그리고 아르메니아는 경제가 러시아와 상당 부분 맺어져 있다. 친서방 성향의 국가로는 폴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체코공화국, 불가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루마니아가 해당되는데, 이들은 ˝바르샤바조약 체제의 일원이었다가 현재는 나토나 유럽연합에 가입한 나라들˝이다.(135-6)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정부가 ˝수도 키예프를 계속 지배하는 한 러시아는 자국의 완충지대가 손상되거나 북유럽평원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이나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며 부동항인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항의 임대차 계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신중한 중립국의 행보만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를 용인할 수 있다.˝(137) 2014년 벌어진 ˝푸틴의 크림 반도 합병은 서구가 우크라이나를 근대 유럽과 서구 영향권으로 끌어넣은 행위의 대가로 봐야 한다.˝(141) 현 단계에서 러시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가스와 석유>다. 러시아와 중국의 이해관계가 일정부분 일치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다.

강대국들의 경유지인 한반도의 북한은 ˝여전히 광적인데다 곧잘 효과가 있는 <강력한 약자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북한은 ˝자신들과 맞서는 통일 전선을 가로막기 위해 모든 외부 세력들이 반목하게 하는 데 노력을 경주한다. 여기에는 중국도 예외일 수 없다.˝(163) 일본 영토는 한반도나 프랑스, 독일보다 넓은 면적이지만, ˝국토의 4분의 3은 사람이 거주하기가 어렵다.˝ 이런 환경 때문에 ˝일본인들은 연안 평야와, 산등성이에 약간의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제한된 내륙 지역에 밀집해 살았다. 일본에 산악 지역이 많다는 것은 물이 풍부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평지가 부족해 배가 다닐 만한 하천이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양 진출은 일본인들의 운명이었다.(177)

중앙아메리카는 ˝깊은 계곡들이 산재한 구릉지대인데, 가장 너비가 좁은 곳은 193킬로미터에 불과하다. 또한 태평양과 마주하면서 7천 킬로미터를 내달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산맥이 이곳에서 시작한다. 바로 안데스 산맥이다. 안데스는 거의 전 구간에 만년설을 이고 있고 대부분 건너기 힘든 지역이다 보니 동쪽과 서쪽의 많은 지역들이 단절돼 있는 형편이다.˝(191) 라틴 아메리카는 내륙이 텅 빈 지리적 감옥에 갇혀 있다. 브라질은 국토의 3분의 1이 정글 지대이며, ˝주요 해안 도시들을 연결하려면 급경사를 건너는 도로를 따로 건설해야 한다.˝(210) 기후와 토양이 악조건인 이곳은 ˝라플라타 강 유역의 농업 지역 지배권을 확보˝한 아르헨티나 정도가 예외일 뿐이다.(214)

아프리카의 ˝3분의 1을 점하는 상부는 북아프리카 아랍어 사용 국가들이 차지하는 지중해 연안부터 시작된다. 해안 평야 지역은 미국에 버금가는 크기인데 이내 세계 최대의 건조 사막인 사하라 사막으로 바뀐다. 사하라 사막 바로 아래로 사헬Sahel 지역이 펼쳐진다.˝ 지중해에서 사헬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다수가 무슬림이지만 그 남쪽에는 다앙한 종교들이 (그리고 다양한 기후와 토양이) 존재한다. ˝니제르 강, 콩고 강, 잠베지 강, 나일 강을 비롯한 대규모 하천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아, 지역 간 교류를 저해한다. 아프리카에 ˝족히 수천 개가 넘는 언어들이 있으며 비슷한 규모의 지역을 지배할 만한 공통 문화˝가 없다는 점도 단절 요인으로 작용한다.(226)

이집트는 ˝8천 4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 대다수가 나일 강에서 불과 반경 십여 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다.˝ 국토의 3면이 ˝사막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지중해의 강대국이 될 법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나무가 귀하다는 점이다.˝(236) 아프리카는 유럽인이 만들어 놓은 지정학의 피해자다. ˝나이지리아는 사하라 이남에서 가장 큰 원유 생산국인데 이 고품질의 원유는 주로 남부에 매장되어 있다. 북부의 나이지리아 주민들은 석유를 팔아서 얻은 이득이 나라 전체에 골고루 분배되지 않고 있는 데에 불만이 많다.˝(238) 나이지리아의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보코 하람Boko Haram은 ˝나이지리아 북부에 거점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불평등 정서를 이용한다.˝(239)

아프리카에서 원유의 3분의 1을 수입하는 중국의 접근은 ˝많은 아프리카 정부들에게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인권이라는 미묘한 문제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 개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부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국부를 착복하는 행위를 멈추라는 요구도 하지 않는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석유, 광물, 귀금속, 그리고 시장이다.˝(246)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최대 교역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남아공은 ˝대륙의 맨 끝단에 위치한데다 연안 평지가 가파르게 높아지는 바람에 모기가 번식하기 힘든 지역이다.˝ 이 조건 덕분에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빠르게 내륙 깊숙한 곳에 정착해 남아공 경제의 주요 부문들을 성장시켰다.˝(247-8)

1916년, ˝영국 외교관인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 대령은 펜을 들고 중동의 지도 위에 쓱쓱 선들을 그었다.˝ 1차 세계대전 때 체결된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중동 지역의 북쪽은 프랑스 통치하에, 남쪽은 영국의 지배하에 편입된다. ˝아프리카의 경우에서 봤듯이, 한 지역에 어울려 사는 것이 익숙지 않은 사람들을 한데 모아 임의적으로 민족 국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정의와 평등, 안정을 위한 방안은 결코 되지 못한다. 사이크스-피코 협정 이전에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시리아 국가나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는 물론 팔레스타인도 따로 없었다.˝ 현대에 탄생한 이들 국가들은 역사도 짧은데다 기반도 취약하다.(258-9)

※ 사이크스-피코 협정 : 영국은 이라크와 요르단을,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세력 범위로 하고 러시아에게는 터키 동부를 주고, 팔레스타인은 공동 관리하기로 맺은 비밀 협정. 그러나 영국은 아랍민족 지도자 후세인에게 독립 약속을 한 뒤였으므로 이중 외교, 비밀 외교라 하여 1917년 벨푸어 선언과 함께 훗날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유럽 식민주의는 ˝아랍인들을 민족 국가의 형태로 묶어서 통치자들이 자신의 출신 부족과 자신이 속한 이슬람 종파에게만 호의를 베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한 독재자들은 유럽인들이 그어둔 인위적인 선들 위에서 자신의 통치권을 보장받기 위해 국가라는 구조를 이용했다.(261) 오스만 제국의 투르크인들은 ˝이라크 지역을 모술(쿠르드족), 바그다드(수니파), 바스라(시아파)라는 세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보다 오래 전인 고대에도 이 지역들은 이 구분과 대체로 부합했는데 당시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수메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영국인들은 ˝같은 지역을 보면서 원래 분할돼 있던 세 곳을 자기들 멋대로 하나로 합쳐 버렸다.˝(261-2)

프랑스는 ˝레바논 산맥 지역의 아랍 기독교도들과 오랫동안 동맹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1920년대에 이곳에 등장한 프랑스인들은 그들을 그 지역의 주 지배 계층으로 만들어 주었다.˝ 지역 종파들 간의 갈등은 필연적이었고, ˝일부 역사가들이 제1차 레바논 전쟁이라 부르는 분쟁은 1958년 마론파 기독교도들과 당시 이들보다 약간 수가 많았던 무슬림들 간에 발생했다.˝ 기반이 취약한 지배층이 국가를 온전히 장악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수도 베이루트 일부와 남부 대부분은 ˝시아파 무슬림들의 전용 공간이다. 이곳에서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Hezbollah) 그룹이 득세하고 있다.˝(267-8)

시리아는 또 다른 ˝다신앙, 다종파, 다종족 국가다.˝ 프랑스인들은 영국이 실행한 분할과 통치의 선례를 따라, 시리아 계층 구조의 맨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던 알라위파를 경찰과 군대에 중용하여 지배 계층으로 만들었다. 다수의 수니파는 이들을 무슬림으로 여기지 않았고, ˝알라위파를 향한 적개심은 외려 알라위파로 하여금 <알라의 추종자>를 자처하게 하면서 자신들만의 신조를 더욱 굳히게 했다.˝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사드 일족의 출신, 즉 이 나라 인구의 12퍼센트에 불과한 알라위파다. 이 가문은 현 대통령 바샤르의 아버지인 하페즈가 1970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이 나라를 줄곧 다스려 오고 있다.˝(269-70)

급진 수니파 무장 단체인 이슬람 국가, 일명 IS는 ˝2000년대 후반에 이라크의 알카에다에서 떨어져 나온 일종의 <프랜차이즈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초기 이름은 ˝ISIL(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이었다. 그러다가 레반트(그리스, 시리아, 이집트를 포함하는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의 아랍어가 알 샴al-Sham인 까닭에 차츰 ISIS가 되었다. 2014년 여름, 이들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넓은 지역에 독립을 선언하면서 <IS>로 자처하기 시작했다.˝(272-3) 전 세계에서 모인 수니파 전사들은 수니파의 땅을 되찾고, ˝그 누구보다 진실한 신자들(수니파 무슬림)이 동일한 지배자 밑에서 사는 칼리파 국가를 다시 세우겠다고 큰소리친다.˝(276)

1948년 유대인과 아랍인의 분쟁 와중에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을 점령했다. 이집트는 자국의 영토 확장의 일환으로 가자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양측 누구도 원주민들에게 시민권은 물론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의 지위를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팔레스타인인들도 피난처로 삼은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이 자신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967년의 <6일 전쟁>(제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 그리고 가자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2005년에 이스라엘은 가자에서 철수했지만 수십만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여전히 요르단 강 서안 지역에 남아 있다.˝(281-2)

이란은 지리적 특성의 보호를 받는 나라다. ˝3면은 산맥이, 나머지 한 면은 습지대와 물이 지켜준다. 1219년부터 1221년까지 몽골 군대를 마지막으로 이 나라 영토에 발을 들여본 외부 세력은 없었다.˝ 이란의 산악 지형은 많은 소수 집단들이 고유성을 선명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다양성의 결과로 이란은 전통적으로 중앙 집중화한 권력을 추구했으며 내부 안정을 위해 무력과 권위적인 정보기관을 동원해 왔다.˝(288-9) 주변국과의 분쟁에서 이란이 보유한 비장의 카드는 바로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판매량에 따라 날마다 전 세계 석유 수요의 약 20퍼센트가 통과하는 길목을 봉쇄한다는 뜻이다.˝(290)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그리고 부탄이 속한 ˝인도 아대륙 지역은 상대적으로 평평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구심점을 갖기에는 지나치게 넓고 다양하다. 그래서인지 영국 식민지 관료들도 그 명성 자자한 행정과 철도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지방 자치를 허용하면서 지방 권력자들이 서로를 견제하도록 하는 방식을 취했다.˝ 히말라야의 북쪽 결빙지대와 남쪽 정글지대의 기후 차이는 물론, 여러 종교들도 강한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하는 주요인이다. ˝다양한 문명들이 갠지스, 브라마푸트라, 인더스와 같은 강을 따라 발전했으며, 오늘날에도 인구 집중 지역은 이들 강 유역을 따라 점점이 분포되어 있다.˝(309)

인도는 ˝넓은 면적과 문화적 다양성, 각종 분리주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정체성>이라는 통합된 개념으로 탄탄한 세속적 민주주의 체제를 건설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독재로 점철된 역사를 지닌 이슬람 국가인데다 국민들도 국가보다는 자기가 문화적으로 속한 지역에 더 높은 충성도를 지닌다.˝(312)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격렬한 충돌을 벌이고 있다. ˝카슈미르 전체를 온전히 지배할 수 있다면 인도로서는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지대로 향하는 문을 확보하는 거나 다름없다.˝ 반면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면 이슬라마바드 정부의 대외정책 옵션들은 한결 풍부해지며 반대로 인도의 기회들은 박탈된다.˝(319)

파키스탄과 아프간 탈레반과의 ˝협력 관계는 어느 면에선 자연스러운 것이다. 탈레반 구성원 대다수가 파키스탄 북서 국경의 다수 민족인 파슈툰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탈레반과 파슈툰족은 결코 서로를 다른 민족으로 생각한 적이 없으며 둘 사이에 그어진 경계 또한 서구인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여긴다.˝(322)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나토가 벌인 합동 작전 그리고 국경을 넘는 파키스탄의 군사적 조치들로 해외 전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알카에다 수뇌부가 무너졌지만, 탈레반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시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파키스탄 내의 동조 세력에게 도움을 받는다.(325)

얼음이 녹고 툰드라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북극은 21세기 경제 및 외교의 각축장이 되었다. 빙원이 녹다 보니 ˝2014년에는 쇄빙선의 호위를 받지 않은 화물선이 처음으로 단독 운항에 성공했다. 북극 루트는 40퍼센트나 단축되었으며 파나마 운하보다 더 깊은 수심을 이용할 수 있었다. 화물선들은 더 많은 화물을 적재할 수 있으며 수만 달러의 연료비를 절약하고 1천 3백미터톤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348-9) 북극이사회Arctic Council의 8개 회원국(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캐나다, 미국, 러시아)들이 영유권 주장에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지정학geopolitics 토론이 북극을 둘러싼 지극학geopolarctics으로 변모하는 양상이다.(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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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을 찾아서 2 이산의 책 41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김우영.강인황.허형주.이정 옮김 / 이산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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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공포된 지조개정은 토지를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 고정자산으로 전환하여, 화폐경제를 촉진했다. "통화량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도시노동자와, 공채에 의존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던 사무라이의 실질소득을 감소"시켰고, "1879년부터 3년 동안 정부가 발행한 화폐량이 3분의 1이나 증가하고 엔으로 환산된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자 3%의 토지세를 현금으로 내는 농민들은 이익을 남기게 되었다."(600) 그러자 1881년부터 대장경大藏卿으로 재직한 마쓰카타 마사요시(1835-1924)는 '마쓰카타 디플레이션' 정책을 시행하여,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스다 같은 기업에게 독보적 입지를 마련해줌으로써 시장을 지배하는 독과점체제"를 형성했다.(604)


무력을 동원한 정권 타도의 기운이 거센 가운데, 이타가키 다이스케(1837-1919)는 “사이고는 무기를 들고 정부와 싸웠지만, 우리는 민권(民權, 민켄)을 가지고 싸울 것"(605)이라고 말하면서, 자유민권운동을 주창했다. 입헌정치에 대한 확신이 일본사회 전체로 급속히 퍼져나갔지만, "자유민권운동이 관성을 잃고 거의 멈춘 것은 메이지 헌법의 제정 때문이었다." 헌법 제정은 "권력집단에게는 천황을 정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었고, 도사나 사가 출신의 불만세력에게는 자신들이 상실한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는 방책이었으며, 농촌주민에게는 독단적인 관리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장치였고, 소작농에게는 농민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이었다."(621-2)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에 돌아와서 취한 모든 조치는 대중적 급진주의로부터 천황제 (그리고 권력구조에서 자신과 동료들이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 위치)를 보호하려는 확고한 의지의 표출이었다."(624) 이토는 화족제도를 신설하여, 인민이 공화제 정신을 습득할 계기를 차단하고자 했으며, "천황을 헤이안 시대의 산물인 태정관으로부터 분리"시켜, 천황이 통치와 관련된 공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626) 메이지 헌법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손자 진무(神武)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기원절인 1889년 2월 11일에 반포되어, "황실의 창설과 연속성을 엄숙하게 천명"하였다.(629)


국민의식을 함양하고 국가 일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1872년 징병제 도입을 주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의 몫이었다. 사무라이와 평민의 위계 의식을 무너뜨린 "징병 군대의 막사와 해군학교에서 끊임없이 상기된 주제는 천황에 대한 충성이었다. 제국의 육군과 해군은 천황의 군대였다."(633) 야마가타는 "일상생활에서 경찰의 통제력을 확대"하여 내부의 혼란이나 외부의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는 일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1887년 보안조례를 제정하여, 비밀 결사는 물론 "어떤 종류의 집회든 중지시킬 수 있었고, 내란음모나 치안방해가 의심되는 사람은 황거에서 반경 12km 밖으로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637)


초대 내각의 문부대신을 지낸 모리 아리노리(1847-1889)는 교육제도를 정비하였다. 그의 신념 아래 "초등교육은 중앙정부의 엄격한 통제 아래 천황의 위상을 강조했고, 고등교육은 좀 더 자유롭고 자율적인 분위기로 학생들의 학구열을 북돋우는 데 주력했다."(639) 유교적 가치관 교육에 반대하던 모리가 암살당하자, "모토다 나가자네와 그 일파는 메이지 이데올로기의 초석이 된 <교육칙어> 선포와 함께 자신들의 뜻을 이루었다." 이로써 <5개조어서문>의 열렬한 서구화로 시작된 메이지 유신은 "고대 일본에서 구현된 바 있는 국체의 정화가 앞으로의 행동과 신념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육칙어>의 일본 제일주의로 마감되었다.(650-1)


청일전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얻어낸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이 과거 서양열강에게 부여했던 특권을 고스란히 양도받는 계기가 되었고, "7년에 걸쳐 지급받게 된 2억 냥(약 3억 엔)의 배상금은 일본이 소모한 전쟁비용의 상당부분을 벌충했다."(680-1) "대중은 청일전쟁을 폭넓게 지지했으며, 지식인들은 일본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승리감에 도취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일전쟁을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국가와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려는 국가 간의 전쟁”으로 보았고, 그리스도 교단의 지도자 우치무라 간조는 청일전쟁을 '의거'라고 규정했다."(681-2)


1904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은 엄청난 인명을 앗아갔지만, 전쟁의 참상을 각인시키기보다 "메이지 세대가 치른 희생을 상기하자는 결의"를 드높이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일본을 영도한 메이지 천황을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로 숭상"하는 존재로 재확인했다.(690) 그러나 "자신들의 피땀 흘린 노력이 당연히 보상을 받게 되리라 생각"하던 대중들은 포츠머스 조약에 전쟁배상금 조항이 없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다.(701) 메이지 지도자들은 서양열강에 비해 일본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사실을 절감했지만, 후임자들은 "과거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설교에 넌더리를 냈으며, 선배들의 지도편달에 얽매이지 않고 최전선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려고 분투했다."(703)


"1898년에 군부는 오쿠마-이타가키 내각의 육군대신 및 해군대신에게 천황의 특별조서를 내려, 자신들의 민간 정치인들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천명했다." 이와 더불어 군부는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공식화한 천황의 칙령을 받아냄으로써 내각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갖게 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린 사령관들은 새로 귀족작위를 받았고, 언론과 국민교육은 군인들의 용맹성과 헌신을 강조했다. 언론은 문민정치에 대한 불만을 부채질했다.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추문과 비리에 연루되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고, 국민의 눈에는 정치인의 부패가 직업군인들의 사심 없는 태도와 아주 대조적으로 보였다."(706-7)


"후임 총리를 추천하던 겐로들은 헌정이 만들어낸 다원적 제도를 수용함과 동시에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유권자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결코 마련하지 못했다."(772) 전간기의 일본 내각은 수시로 교체되었으며, 역대 총리의 사망률이 높았다. "하라는 워싱턴 회의에서 조인된 해군력 감축안을 밀어붙이다가 이에 반대하는 우파에게 희생되었고, 하마구치도 런던 해군군축회의에서 결정된 감축안에 대한 해군의 반발을 제어하려다 암살당했으며, 이누카이는 일본군의 상하이 사변을 저지했다가 중국에서 막 돌아온 청년 해군장교들에게 살해되었다. 군부의 특권에 민간 정치인이 개입하려 할 때마다 어김없이 폭력이 행사되었던 것이다."(773-4)


러일전쟁이 촉진하고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절정에 달한 급속한 산업화의 에너지는 일본 사회의 구석구석에 혼란을 불러왔다. "여성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현모양처’의 역할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은 공업구락부 회원들의 확고한 지배에 도전하기 시작했고, 소작쟁의는 농촌생활의 혼란을 알리는 신호였다. 교육의 확산은 외래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근대적 교통수단은 전근대적인 지역을 새로운 산업중심지 및 도시와 연결시켰다. 도시화는 새로운 대중문화를 만들어냈다."(867) 일본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변화되고, "더욱 국제주의적이고 코즈모폴리턴한 곳"으로 변해갔지만, 대공황은 일본 사회를 재차 불안정의 그늘로 몰아넣었다.


한편, "1911년에 청조가 무너지자, 만몽지역은 정치적 진공상태에 빠진 것으로 간주될 정도로 불안정했고 인구도 희박했으며 소련의 남침에 대한 방어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대륙진출을 노리던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만주에 대한 조차권을 넘겨받았고, 10년 뒤 21개조 요구안을 통해 조차권의 기한을 연장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871) "소련이 대륙에서 되살아나는 위험한 사태, 일본은 자원이 부족한 국가라는 사실, ‘가진 것’ 많은 강대국들과 경쟁해야 하는 일본의 불리한 처지, 페리의 흑선으로 시작된 서양의 침략사 등"을 강조한 군국주의 캠페인의 1차 기착지는 1932년 3월1일 ‘독립국’ 만주국 수립이었다.(883)


"일본이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은 국체명징운동에서 표출되고 육군의 파벌주의에서 내파된 강렬한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인식 아래 "좌파 급진주의자를 사회로 돌려보내는 전향(轉向, 덴코) 운동"이 벌어졌고, 이에 호응한 사회주의자들은 기꺼이 마르크스 이론과 내셔널리즘을 결합했다.(912) 그들은 "일본을 국제자본주의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땅’이라고 보"았고, 일본의 아시아 지배를 서양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과도기 사태로 간주했다. "팽창은 사실상 역사적 진보일 뿐 아니라 일본의 사명을 위해 불가결한 것"이라는 논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열도를 집어삼켰다.(914-5)


대륙침략을 절정으로 이끈 중일전쟁이 우세하게 전개되자 고노에 내각은 중국에 강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1937년 12월 난징의 함락으로 대표되는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장제스가 일본이 제시한 강화"에 응하지 않자, 그는 더 이상 난징 정부와 강화 협상에 임하지 않겠다는 아이테니세즈(중국을 상대하지 않겠다) 성명을 내놓는다.(929) 곧이어 고노에는 "1938년 11월 '동아신질서' 건설을 선언하고, 난징에 협력정부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 유명한 아이테니세즈 선언은 "자칭 평화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평화를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만나지 않겠다는 일본의 이중성을 잘 보여주면서, 실패한 정권의 기이한 전설로 남게 되었다."(930-1)


처절한 실패로 마감한 태평양 전쟁은 아시아에서 식민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서양 제국주의와 거기에 비해 전혀 나을 것이 없는 일본 제국주의를 차례로 경험한 민족들은 "모든 외부세력을 제거하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며, "한국과 타이완에서 일본이 추방된 것과 더불어, 이는 세계사의 전환점이 되었다."(984) 전후 일본은 이 사실을 위안거리로 삼으면서, 자신들의 전쟁을 궁색하게 변호했다. 천황 역시 종전 조서에서 "사상자들에 대한 애도의 뜻을 전하고, 동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협력해준 여러 아시아의 맹방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한편 "국체를 호지護持하게 되었다"는 말로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드러냈다.(977)


전후 일본 정계를 대표하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는 1946년부터 1953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근대 일본에서 가장 많은 내각을 이끈 정치지도자가 되었다."(997) 요시다는 미 군정이 가하는 제약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정한 독립을 유지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일본인이 호전적이거나 공격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평화적인 사람들이며, 군국주의 시대는 정상궤도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일본이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은 메이지 시대에 대영제국과 동맹을 맺은 것처럼 확실하게 미국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016)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일본 경제의 부흥에 방점을 둔 요시다는 "헌법 제9조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정치적 입장을 공공연히 표명"했고, 정식 군대를 창설하라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다. 대신에 그는 "경찰예비대를 창설하여 한국전쟁에 참전 중인 미군이 수행하던 안보상의 역할을 분담"했는데, 이 조직은 얼마 후 자위대로 전환한다. 요시다는 1951년 9월에 열린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인정했고, 태평양 제도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집단안보체제에 편입되었고, "미군은 일본이 “자위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일본에 남게 되었다."(1029-31) 마침내 일본은 "전쟁에 졌지만 평화를 얻고" 고도성장의 길에 오른다.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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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40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김우영.강인황.허형주.이정 옮김 / 이산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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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에서 히데요시를 거쳐 이에야스에 이르는 통일 과업은 제1의 권력을 향한 무가武家의 노정이었지만, 근대 국가 체제와 유사한 중앙집권화를 수립하지는 못했다. "문제는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이 평화가 정착되고 관료화되긴 했으나, 결코 실질적으로 통일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다이묘들은 에도(江戶)에 위치한 쇼군의 호의에 의존하면서도, 자신들의 영지에서 "자치의 주요 요소인 행정·군사·재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도쿠가와 체제를 "중앙의 쇼군(막부)과 지방의 다이묘(번)라는 이중 구조를 가진 ‘막번幕藩 국가’라고 분석"하면서, 서구의 봉건체제와는 다른 '중앙집권적 봉건제’(centralized feudalism)로 규정하였다.(66)


번은 막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일조해야 하지만, "막부에 직접 세금을 내지는 않"았고, 번의 군사력을 실질적으로 통제받지도 않았다. "요컨대 수십 개의 번은 자신의 군사·행정·법령·세제를 구비한 거의 독립적인 국가"였으며, 주민들은 "자기 번을 하나의 나라로 인식"했다. 따라서 "막번 국가의 ‘번’이라는 부분은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국민국가로의 발전에 있어서 심각한 걸림돌"이었다.(93-4) 막부와 번은 대립하기보다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쌍무' 관계로서, "막부건 다이묘건 모든 봉건 당국은 농촌지역을 계속해서 통제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같이했다."(101) 이러한 협조 관계가 1860년대에 이르러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막부는 점차 지방세력으로 전락했다."(102)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과 '무인 통치'로, 메이지 유신은 이러한 구습을 타파한 결정적인 전환으로 이해되지만, 그 면모가 단절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 시대는 무역과 국제관계를 장려하는 활발한 시도들"(115)이 꾸준히 있었고, 이에야스는 서양과의 무역에도 열의를 보였다. 막부는 "17세기 유럽에서 가톨릭 진영과 경쟁을 벌이고 반목하던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이 일본에 들어온 덕분"에 대외관계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121) 막부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상급 영주에 대한 충성심 이상의 종교적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검증했고, 서남지역-특히 규슈-의 유력 다이묘들이 직접 외국인과 접촉하는 기회를 차단했다.(126)


1640년대 만주족이 대륙을 석권하면서 아시아 정치 지형이 급변하자 막부는 "일본 상인을 동남아시아에 있는 사상적 오염의 근원지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다.(142) 그러나 일련의 금수 조치가 외부세계에서 들어오는 상품·지식·기술을 입수하는 경로까지 막은 것은 아니다. 일본과 교역하는 네덜란드 상인들은 "지난 번 선박이 들어온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의무를 지켜야 했다.(139) 일본의 엘리트층은 "쇄국체제를 통해 서양의 사상과 종교의 차단을 시도하는 동시에 중국의 문화 전통을 터득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네덜란드와의 무역은 사실상 "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 상품을 거래하는 무역이었다."(143,146) 


막부는 조정이 부여하는 명예를 중시했기 때문에, 조정을 공경하고 우대했다. "17세기 말에는 예전에 소멸되었던 의식들이 막부의 관대함과 호의로 재정지원을 받아 다시 등장하였다. 천황의 즉위례卽位禮 가운데 하나인 대상제大嘗祭는 예전에 누렸던 영예로운 위치를 회복했고, 중세 이후 거행되지 않았던 의식들이 조정의 일정표에 다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정치적으로는 무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일본사회에서 정통성과 명예의 산실로 남아 있었고 그 중요성이 증대"되었다.(159-160) 18세기에는 "천황을 ‘일본적인 것’의 중심으로 여기게 하는 데 공헌한 또 하나의 조류인 고물주의古物主義"가 나타나면서, 정치적 내셔널리즘의 구심점을 이룬다.(161-2)


일종의 도덕률로서 무사도가 정립된 것도 도쿠가와 시대이다. 야마가 소코는 "사무라이는 농민·직인·상인의 일을 하지 않으며, 오직 무사도를 실천하는 데 매진할 뿐이다. 세 서민 계층의 사람들 중에 도덕적 원칙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사무라이는 그 자를 즉석에서 처벌하여 이 땅의 올바른 도덕적 원칙을 유지한다”고 말했다.(166) 그러나 전쟁이 멈춘 지 2세기가 지난 17세기에 이르면 "영웅적인 과거를 말해주는 가련한 유품들은 평범한 현재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에도의 관리들은 "사무라이의 과도한 지출을 억제하고 신분에 맞게 체면치레를 하도록 하"고자 검약령을 공포했지만, 상급 사무라이의 삶마저 '지배계급'과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였다.(175)


일본 전역을 하나로 이어준 핵심 계기는 다이묘가 에도와 영지를 1년마다 왕복하는 참근교대(參勤交代, 산킨코타이)제이다. 참근교대제는 "일본 전역의 지방경제를 연결, 순환시켰으며, 일본 통일에 있어 이에야스의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보다 더 많은 공헌을 한 전국적인 교통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온갖 종류의 상품이 중앙으로 흘러들었고, 지방경제는 번의 정치적 경계를 넘나들 정도로 성장했다."(201) 각 성의 행정중심지로 설계되었다가 도시로 발전한 조카마치를 중심으로 "일본은 자급자족보다는 교환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지역과 도시의 상호교류는 "일종의 국민문화"를 탄생시켰고, 각 구니(國)를 둘러본 상황 인식은 "비교와 평가의 근거를 제공했다."(241-2)


중세 일본은 개인이 담당한 ‘직분’과 그 직분에 따른 '책임'이 역(役, 야쿠)으로 고정된 사회였다. 따라서 과거제를 통한 인재등용 같은 "유교적 이상을 따르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며, 실제로도 그랬다."(290) 하야시 라잔은 유학과 신도 사상의 일치를 시도하여 "중국의 성인들이 주장했던 단계가 과거 일본에서 실현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오규 소라이는 고대의 성인 못지않은 이에야스가 창안한 사회 질서에 '대일본大日本'이라는 호칭을 선사했다.(304) 야마가 소코도 '중국'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 유교의 정명正名이 가리키는 정치적 정통성이 천황을 향하게 되면서, 유학은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되었다."(306)


"국학(國學, 고쿠가쿠)은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한학(漢學, 간가쿠)에 대한 의식적인 저항을 배경으로 발전했으며, 일본과 일본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했다."(307) 가모노 마부치는 신앙이 이성보다 강하다는 논리 아래, 중국의 이성주의에 대한 일본의 헌신과 신앙의 우위를 피력했으며, 히라타 아쓰타네는 고대의 제정일치를 되살려 "신의 후손이라는 후광에 힘입어 인민을 다스리는 존재는 바로 천황"이라고 강조했다.(312) 국학은 "태고의 일본이 간직했던 진실함이 외국, 특히 중국사상에 의해 오염된 것을 개탄하는 한편 유용해 보이는 외국사상은 무엇이든 원래 일본 것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하면서 농촌지역에 광범위하게 뿌리 내렸다.(315)


불교도 "개인의 신앙을 자신이 등록된 특정 사찰인 단나데라(檀那寺)가 증명해주는 데라우케(寺請) 제도"를 통해 호구등록 업무를 맡으면서 점차 지배구조 안으로 흡수되었고, 난학(蘭學, 란가쿠) 역시 도쿠가와 봉건체제에 균열을 내기보다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것"에 대한 학문적 열정을 기반으로 일본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323-4) 이처럼 외래 사상과 민간 신앙의 전체주의적 융합은 "봉건적 신분제와 법령이 가하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사회 내의 모든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일치하도록 만들었고, "각 집단은 더 큰 전체에 기여하는 일의 중요성을 이미 납득하고 있었다."(333)


"도시의 풍요로움과 농촌의 고난, 성공한 상인들의 안락과 궁핍한 사무라이들의 불안 사이의 극명한 대비를 지켜보며 무언가 균형이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356) 위기를 극복하고자 8대 쇼군 요시무네가 주도한 교호(享保) 개혁부터 간세이(寬政) 개혁, 덴포(天保) 개혁이 줄을 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각각의 개혁기는 문제 처리가 더 힘들어지고 선택의 여지가 더 줄어들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383) 18세기 말엽에 이르면, "막부는 자강自强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번을 보호해주기에는 너무 나약했고, 번이 스스로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허락해주기에는 너무 강한" 어정쩡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384)


훗카이도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과 조우하고, 격동하는 서구의 상황-프랑스 혁명의 불길-을 알게 된 막부는 정부 차원에서 "서양의 지식을 연구하던 전문가들을 기용했다."(397)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외국의 해안은 임의적인 입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1825년에 막부는 "서양인을 망설이지 말고 내쫓으라는 ‘외국선박 격퇴령’을 공포했다."(398-9) 그러나 곧 아편전쟁의 결과를 접한, 미즈노 다다쿠니는 "준비상태가 형편없는 시점에서 전쟁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선박 격퇴령을 철회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409) 마침내 1853년 흑선을 이끌고 온 페리가 "엄포를 놓는 개인 서신과 함께 백기白旗를 일본측 협상자들에게 보냈다."(414)


"서양 침입자들로부터 기인한 위기감은 곧 교토의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이는 영주와 번에 대한 개별적인 충성심을 능가하게 되었다." 최초의 막부 사절단이 조약 비준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 간 1860년, 미토 번의 사무라이들이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하고 "폭력으로 점철된 10년의 서막을 열었다."(443) 반反외세세력은 막부가 외세와 손을 잡으려 한다는 인식 아래, "토막(討幕, 도바쿠), 즉 “막부를 토벌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460) 여기에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1866년 조슈와 사쓰마가 동맹을 맺었고, 도사 번 사절단이 "쇼군에게 그 직위와 칭호를 단념할 것을 제안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 다이세이호칸) 건백서를 제출"한다.(464)


반외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가 "일본의 국체를 위태롭게 하고, 일본에 외국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국의 신성한 땅을 더럽히고 천황에 대한 무언의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외국인의 입국으로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나 요시다 쇼인같은 국수주의자들마저 서양을 무찌르기 위해서 "서양에서 배우고 그 힘의 비결을 알아내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했다.(474-5) 후쿠자와 유키치와 니시 아마네 같은 서양 체험자들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면서, '문명개화'를 향한 열의 앞에 "자신들이 거의 선지자적인 위치에 있음을 발견했다."(480-1)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일본의 열의가 결실을 맺은 또 하나의 이유는 "도쿠가와 시대의 독특한 토지소유 개념" 덕분이다. 도쿠가와 시대에 각 번을 관장하던 영주들은 "자신의 번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쇼군은 조정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임기가 끝날 때까지 행사하는, 영주들 중의 일인자에 불과했다. 정통성의 근원은 고립된 천황이었다."(503) 이처럼 천황을 전면에 내세운 메이지 유신은 "어린 지배자-고메이 천황의 후계자인 무쓰히토-를 위해 마련된 <5개조어서문>으로 막을 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천황은 1868년 4월 5일 공가公家와 다이묘들이 모인 앞에서 이 서문을 발포했다."(501)


<5개조어서문>은 "불명료한 용어를 사용해 상황변화에 따라 그 의미를 확장할 수 있게 작성"된 성공적인 국가문서의 한 예이다. "'상하'가 합심할 것이라는 말은 신분상의 구분이 계속될 것임을 뜻했다." 또한 "유교적 의미를 내포한 '천하의 공도'"가 '누습'이 폐지된 자리를 차지했다. 더욱이 "지식의 추구는 황국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는 목적에 부합하게 선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나마 "전세계에서 널리 지식을 구할 것이라는 약속에서만 변화를 지향하는 구체적인 표현이 발견된다." 도쿠가와 말기의 행동가들은 이 조항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치면서 서양식 근대화를 추진"하는 일본 정부의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개탄했다.(507)


1871년에 단행된 폐번치현廢蕃置縣으로 쓰시마의 다이묘들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천민은 평민(平民,헤이민)으로 신분이 승격되었고, 농민들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와 거주 이전의 자유가 부여되었다. 새로 공포된 "호적법戶籍法에 따라 가家가 새로운 행정구역의 기본단위가 되었고, 호주는 가족의 행위와 의무를 책임지게 되었다." 1873년 1월에 공포된 "징병령徵兵令은 현역 3년과 예비역 4년의 의무적인 복무를 요구했다." 지조개정(地租改正, 지소카이세이) 역시 사회의 격변을 가져왔는데, 이제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단일한 소유권을 인정받았고, 이전에 마을 단위로 부과되던 각종 세금은 토지소유자의 책임이 되었다."(545-6)


이처럼 "중앙에서 입안한 정책이 지방을 탈바꿈시키면서 사분오열의 위기에 빠진 것 같던 일본이 순식간에 중앙집권적 국가로 면모를 일신했다. "(522) 메이지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국가 대 국가로서 '근대적인 관계'를 맺자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막부에 이어) 다시 한번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를 시도"하였다. 이 제안이 거절당하자 신정부의 지도자들은 "응징 차원의 군사원정을 단행할 수 있는 빌미를 잡았다"고 말했다. 이와쿠라 사절단 멤버인 기도 다카요시 같은 이들은 "전쟁이 일본의 통합을 앞당기고 근대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540)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한 사무라이들은 정부의 대외 강경책을 자신들의 건재함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메이지 정부 지도자들의 명성은 유신 주체들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공헌을 보호하는 다수의 공인된 전기에 의해 유지되어왔다. 집단적으로 이런 기록은 교토를 중심으로 해서 국가의 통일과 구원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천황의 통치권 회복을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거의 악습을 철저히 일소했다는 이러한 ‘메이지 편향’ (Meiji Bias)은 메이지 유신을 "오랫동안 미루어졌던 도덕적 확실성으로의 회귀이자, 모든 진정한 일본인의 피할 수 없는 의무로 제시되어온 가치들을 고수하는 일과 동일시"하였으며, "막부의 노력을 경시하고, 역사가들로 하여금 1860년대에 일본을 분열시켰던 심각한 의견 차이와 당시의 폭력을 간과하도록 부추겼다."(4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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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과 개혁 일본 근현대사 7
아메미야 쇼이치 지음, 유지아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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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총동원체제를 이끈 4가지 정치 조류

(1) 국방국가파 : 도조 히데키 등 육군통제파, 기시 노부스케, 가야 오키노리 등의 상공관료를 중심으로 한 혁신관료, 신흥 재벌을 중심으로 위로부터 군수공업화를 강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군수공업화는 전근대적 관습과 계층별 격차를 어느 정도 평준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사회복지나 노동복지 문제도 일정부분 공업화에 맞춘 형태로 개선되었다.

(2) 사회국민주의파 : 1920년대에 노동조합법이나 소작권법을 만든 관료들로 제1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1937년 6월) 때 참여한 인사들과 쇼와연구회 계열 사람들이다. 사회운동을 중시하여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 경영자, 여성 등의 평등화와 현실 정치 및 경제 과정에의 참가를 요청했다.

(3) 자유주의파 : 1920년대의 재계 주류와 그것에 기반을 둔 기성정당 세력이나 관료들로, 20년대에는 다나카 키이치, 와카쓰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등, 40년대에는 하토야마 이치로, 요시다 시게루 등이 있다. 철저한 산업 합리화, 군축, 재정 정리 등 과격하다고 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집행하여, 군부와 대중 쌍방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40년대에는 반(또는 비) 총력전체제를 주장했다.

(4) 반동파 : 마사키 진자부로 등 육군 황도파, 스에쓰구 노부마사 등 해군 함대파, 미쓰이 코시 등 관념우익, 대다수의 지주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시작된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또는 군축운동에 의해 기득권을 빼앗겼고, 총력전체제에 의해서도 대거 기득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총력전체제에 대해 매우 반동적으로 반응했다.

▷ 국방국가파와 사회국민주의파의 연합 세력 득세(아시아태평양 전쟁 초·중기), 반동파와 자유주의파 연합 대두(전쟁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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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전쟁 일본 근현대사 6
요시다 유타카 지음, 최혜주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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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 시작된 미일교섭의 최대 쟁점은 중국 문제였다. 미국의 철병 요구에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 응하려 하자, 육군은 강경하게 반대 입장을 편다. 도조 히데키(1884-1948) 육군대신은 "철병 문제는 심장이다. (중략) 육군으로서는 이것을 중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주장대로 했다간 지나사변(중일전쟁)의 성과를 궤멸하는 것이다. 만주국도 위험하다. 더욱이 조선 통치도 위험하다"고 주장하였다. "일종의 도미노이론이지만, 이에 따라 교섭 타결의 전망을 잃어버린 고노에 내각은 어쩔 수 없이 총사직을 하여, 10월 18일에는 도조 히데키 육군대장을 수반으로 하는 도조 내각이 성립한다."(29-30)


강경 입장으로 돌아선 일본은 1941년 11월 5일 어전회의의 <제국국책 수행요령>에서 '영미란전쟁을 결의'하면서 "무력 발동의 시기를 12월 초두로 정하여 육해군은 작전 준비를 완성한다"고 결정한다. 차후 "외교 교섭을 계속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그 성격은 개전 결의를 위장하기 위한 '기만 외교'로서의 측면을 강화해 간 것이다."(31) 그러나 해군은 육군과 달리 "대영미 개전이라는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 관료적 이해(대미 전비 확충)를 추구하는 얼핏 모순되는 방침"을 취하였다. 즉 "군비 확충에 필요한 예산과 물자를 획득하기 위해 무력남진정책을 추진하되, 충분한 승산이 없는 대미영전은 회피하고 싶다는 것이 해군의 속마음이었다."(60)


육군은 "북방에서의 대규모 작전 행동이 불가능한 동계 중에 영미에 대한 남방 작전을 종료시킨 다음 1942년의 독일군의 춘계 공세에 호응하는 형태로 대소전을 개시"할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미일교섭이 지연되고 대미영 개전 시기가 늦춰지면, 이 작전 구상은 붕괴되어 버리기에, 육군은 "외교 교섭에 기한을 두는 것에 구애"받을 수밖에 없었다. 즉, "군사 논리에 따라 외교가 규정"되는 전도현상이 발생한 것이다.(63) 문제는 "전쟁에 대한 벼랑 끝 외교 정책의 정치적 귀결이다." 국내의 강경론이 정책 결정 과정을 역규정하면서, 대미 타협 주장이 국론을 분열시켜 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나 내란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신중론을 잠식했던 것이다.(68)


진주만 기습으로 대표되는 초기작전은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위기의 징후는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해군의 잠수함부대는 상선과 유조선 등에 공격을 집중하여 일본의 해상 교통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에 비해 일본 해군의 잠수함부대는 주목표를 미해군 함정에 두었기 때문에 충분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반대로 강력한 대잠 능력을 가진 미해군에게 궤멸당했다." 더구나 말레이해전 후 1년도 되지 않아 "연합군 함선의 방공 능력이 한층 향상됨에 따라 육공기에 의한 백주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1942년 8월부터 시작된 "과다카날 섬을 둘러싼 공방전에서 솔로몬 해역은 문자 그대로 육공기의 '무덤'이 되었다."(74-5)


1941년 12월에 있던 중부태평양의 "웨이크 섬 공략 작전은 이도(離島,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제공권 장악이 갖는 결정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아울러 육상 전투에서도 "일본군의 주력 전차인 97식 중전차와 95식 경전차는 미군의 M3 경전차"에 고전하는 형편이었다. "장갑 면에서도 탑재포의 관통력 면에서도, 미군 전차의 대전차전 능력이 일본군의 것을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중기가 되면 "한층 강력한 M4 중전차를 전선에 투입하는데, 이미 이 단계에서는 일본의 전차병에게 97식 중전차나 95식 경전차는 '철로 만든 관(棺)'에 지나지 않았다."(75-6)


"1942년 5월 7일부터 8일에 걸쳐 싸운 산호해 해전은 사상 최초의 공모끼리의 전투였다. 미국 측에서는 공모 '렉싱턴'이 침몰했고, '요크타운'이 손상을 입었으며, 일본 측에서는 소형 공모 '쇼호'가 침몰하고, '쇼가쿠'가 대파되었다. 전술적으로는 일본군이 조금 우세한 전투였지만 일본군은 해상으로부터의 포트모르즈비 공략작전을 어쩔 수 없이 연기할 수밖에 없게 되어 전략적으로는 패배했다. 또 대파된 '쇼가쿠'와 다수의 함재기를 잃은 '즈이가쿠'의 2공모는 모두 1개월 후인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미해군은 '요크타운'의 수리를 단기간에 마치고 전열에 복귀시켰다. 이것은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을 가르는 것이 되었다."(105-6)


미드웨이 공략작전의 주목적은 "미 주력 함대의 격멸이었지만, 둘리틀 중좌가 폭격대를 이끌고 일본 본토에 첫 공습을 가한 것도 작전의 실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체면을 구긴 일본 해군은 본토의 초계 라인을 동쪽으로 연장할 필요가 있었고, 전초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미드웨이 섬 공략이 필요했다. "6월 5일 미드웨이 섬 공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미해군의 급강하 폭격대에 공격을 받아 눈 깜짝할 사이에 '아카기' '가가' '소류'의 3공모를 잃어버렸다. 남은 '히류'의 반격으로 미공모 '요크타운'을 대파시켰지만(나중에 일본군의 잠수함 공격으로 침몰), '히류'도 미군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결국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의 대패로 끝났다."(106-7)


1942년 8월 7일 시작된 과다카날 전투에서의 손실은 "전쟁 경제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해 전력을 급속하게 증강시키고 있던 미국보다, 일본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다. 특히 초기작전의 성공을 지탱해온 숙련된 항공기 탑승원을 다수 잃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나아가 전사자들 가운데 "직접 전투에 의한 전사자는 5,000~6,000명에 지나지 않고, 남은 것은 기초 체력의 자연 소모에 따른 '영양실조증, 열대성 말라리아, 설사 및 각기 등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전사자 중의 약 70%는 선박에 의한 식량 및 의약품의 보급이 끊어진 상황 아래서 생긴 광의의 아사자였다. 그리고 과다카날 섬의 이 비극은 그 후 각 지역의 전장에서 반복된다."(109)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조선 내에서 황민화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1942년 10월에는 조선청년특별연성령이 공포되고, 취학하지 않은 17세 이상 21세 미만의 청년 남자를 각지의 청년특별연성소에 입소시켜, 군대나 군수 산업으로의 동원을 위한 예비 훈련을 의무적으로 행하도록 하였다. 또 같은 해 5월에는 <국어보급운동요항>이 제정되어 일본어 보급 운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민중에게 우선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은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실시한 인적 자원의 강제 동원, 이른바 '강제연행'이다.(130) 일본 전시 체제는 생활 수준 유지를 중시한 독일과 달리 본토에서도 "전시 체제의 강화와 국민 생활의 궁핍화가 병행"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143)


1943년 4월 18일에는 "솔로몬 제도의 전선 기지를 시찰 중인 야마모토 이소로쿠(1884-1943)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비행기 안에서 전사했다.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야마모토의 전선 시찰을 사전에 탐지한 미군은, 16기의 전투기에 의한 잠복 공세로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격추한 것이다." 5월 12일에는 "알류샨 열도의 애투 섬에 미군의 1개 사단이 상륙"하자, 일본군 수비대는 최후의 돌격을 행하고 전멸한다. 대본영은 여기서 "통신이 완전히 두절, 전원 옥쇄(玉碎)한 것을 인정한다"라는 형태로 처음 '옥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고도(孤島)의 수비대가 전멸할 때마다 처참한 전장의 현실을 은폐하는 옥쇄 캠페인이 전개되었다."(156-7)


※ 일본군이 무력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우려가 대두되어 1944년 2월 25일 퀘제린섬, 루오트섬 전멸 발표부터 '옥쇄' 표현 삭제


"오키나와전에 패배한 뒤에도 일본군의 항전이 계속되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사자 대부분이 마리아나 함락 전후의 절망적 항전기에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1944년 1월 1일 이후의 전사자(패전 후의 전사자 포함)가 전체의 87.6%에 달하는데, 이는 종전 결단이 늦춰지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잃어버렸는가"를 잘 보여준다.(203) 1945년 3월 9일의 도쿄대공습을 시작으로 이어진 도시 폭격으로 패전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지만, 천황은 "다시 한 번 전과를 올리고 나서가 아니면 (전쟁 종결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서, 전쟁 책임자 처벌 문제를 회피하는 조건에서 강화를 성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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