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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을 찾아서 1 ㅣ 이산의 책 40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김우영.강인황.허형주.이정 옮김 / 이산 / 2006년 1월
평점 :
노부나가에서 히데요시를 거쳐 이에야스에 이르는 통일 과업은 제1의 권력을 향한 무가武家의 노정이었지만, 근대 국가 체제와 유사한 중앙집권화를 수립하지는 못했다. "문제는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이 평화가 정착되고 관료화되긴 했으나, 결코 실질적으로 통일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다이묘들은 에도(江戶)에 위치한 쇼군의 호의에 의존하면서도, 자신들의 영지에서 "자치의 주요 요소인 행정·군사·재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도쿠가와 체제를 "중앙의 쇼군(막부)과 지방의 다이묘(번)라는 이중 구조를 가진 ‘막번幕藩 국가’라고 분석"하면서, 서구의 봉건체제와는 다른 '중앙집권적 봉건제’(centralized feudalism)로 규정하였다.(66)
번은 막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일조해야 하지만, "막부에 직접 세금을 내지는 않"았고, 번의 군사력을 실질적으로 통제받지도 않았다. "요컨대 수십 개의 번은 자신의 군사·행정·법령·세제를 구비한 거의 독립적인 국가"였으며, 주민들은 "자기 번을 하나의 나라로 인식"했다. 따라서 "막번 국가의 ‘번’이라는 부분은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국민국가로의 발전에 있어서 심각한 걸림돌"이었다.(93-4) 막부와 번은 대립하기보다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쌍무' 관계로서, "막부건 다이묘건 모든 봉건 당국은 농촌지역을 계속해서 통제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같이했다."(101) 이러한 협조 관계가 1860년대에 이르러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막부는 점차 지방세력으로 전락했다."(102)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과 '무인 통치'로, 메이지 유신은 이러한 구습을 타파한 결정적인 전환으로 이해되지만, 그 면모가 단절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 시대는 무역과 국제관계를 장려하는 활발한 시도들"(115)이 꾸준히 있었고, 이에야스는 서양과의 무역에도 열의를 보였다. 막부는 "17세기 유럽에서 가톨릭 진영과 경쟁을 벌이고 반목하던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이 일본에 들어온 덕분"에 대외관계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121) 막부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상급 영주에 대한 충성심 이상의 종교적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검증했고, 서남지역-특히 규슈-의 유력 다이묘들이 직접 외국인과 접촉하는 기회를 차단했다.(126)
1640년대 만주족이 대륙을 석권하면서 아시아 정치 지형이 급변하자 막부는 "일본 상인을 동남아시아에 있는 사상적 오염의 근원지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다.(142) 그러나 일련의 금수 조치가 외부세계에서 들어오는 상품·지식·기술을 입수하는 경로까지 막은 것은 아니다. 일본과 교역하는 네덜란드 상인들은 "지난 번 선박이 들어온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의무를 지켜야 했다.(139) 일본의 엘리트층은 "쇄국체제를 통해 서양의 사상과 종교의 차단을 시도하는 동시에 중국의 문화 전통을 터득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네덜란드와의 무역은 사실상 "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 상품을 거래하는 무역이었다."(143,146)
막부는 조정이 부여하는 명예를 중시했기 때문에, 조정을 공경하고 우대했다. "17세기 말에는 예전에 소멸되었던 의식들이 막부의 관대함과 호의로 재정지원을 받아 다시 등장하였다. 천황의 즉위례卽位禮 가운데 하나인 대상제大嘗祭는 예전에 누렸던 영예로운 위치를 회복했고, 중세 이후 거행되지 않았던 의식들이 조정의 일정표에 다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정치적으로는 무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일본사회에서 정통성과 명예의 산실로 남아 있었고 그 중요성이 증대"되었다.(159-160) 18세기에는 "천황을 ‘일본적인 것’의 중심으로 여기게 하는 데 공헌한 또 하나의 조류인 고물주의古物主義"가 나타나면서, 정치적 내셔널리즘의 구심점을 이룬다.(161-2)
일종의 도덕률로서 무사도가 정립된 것도 도쿠가와 시대이다. 야마가 소코는 "사무라이는 농민·직인·상인의 일을 하지 않으며, 오직 무사도를 실천하는 데 매진할 뿐이다. 세 서민 계층의 사람들 중에 도덕적 원칙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사무라이는 그 자를 즉석에서 처벌하여 이 땅의 올바른 도덕적 원칙을 유지한다”고 말했다.(166) 그러나 전쟁이 멈춘 지 2세기가 지난 17세기에 이르면 "영웅적인 과거를 말해주는 가련한 유품들은 평범한 현재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에도의 관리들은 "사무라이의 과도한 지출을 억제하고 신분에 맞게 체면치레를 하도록 하"고자 검약령을 공포했지만, 상급 사무라이의 삶마저 '지배계급'과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였다.(175)
일본 전역을 하나로 이어준 핵심 계기는 다이묘가 에도와 영지를 1년마다 왕복하는 참근교대(參勤交代, 산킨코타이)제이다. 참근교대제는 "일본 전역의 지방경제를 연결, 순환시켰으며, 일본 통일에 있어 이에야스의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보다 더 많은 공헌을 한 전국적인 교통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온갖 종류의 상품이 중앙으로 흘러들었고, 지방경제는 번의 정치적 경계를 넘나들 정도로 성장했다."(201) 각 성의 행정중심지로 설계되었다가 도시로 발전한 조카마치를 중심으로 "일본은 자급자족보다는 교환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지역과 도시의 상호교류는 "일종의 국민문화"를 탄생시켰고, 각 구니(國)를 둘러본 상황 인식은 "비교와 평가의 근거를 제공했다."(241-2)
중세 일본은 개인이 담당한 ‘직분’과 그 직분에 따른 '책임'이 역(役, 야쿠)으로 고정된 사회였다. 따라서 과거제를 통한 인재등용 같은 "유교적 이상을 따르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며, 실제로도 그랬다."(290) 하야시 라잔은 유학과 신도 사상의 일치를 시도하여 "중국의 성인들이 주장했던 단계가 과거 일본에서 실현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오규 소라이는 고대의 성인 못지않은 이에야스가 창안한 사회 질서에 '대일본大日本'이라는 호칭을 선사했다.(304) 야마가 소코도 '중국'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 유교의 정명正名이 가리키는 정치적 정통성이 천황을 향하게 되면서, 유학은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되었다."(306)
"국학(國學, 고쿠가쿠)은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한학(漢學, 간가쿠)에 대한 의식적인 저항을 배경으로 발전했으며, 일본과 일본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했다."(307) 가모노 마부치는 신앙이 이성보다 강하다는 논리 아래, 중국의 이성주의에 대한 일본의 헌신과 신앙의 우위를 피력했으며, 히라타 아쓰타네는 고대의 제정일치를 되살려 "신의 후손이라는 후광에 힘입어 인민을 다스리는 존재는 바로 천황"이라고 강조했다.(312) 국학은 "태고의 일본이 간직했던 진실함이 외국, 특히 중국사상에 의해 오염된 것을 개탄하는 한편 유용해 보이는 외국사상은 무엇이든 원래 일본 것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하면서 농촌지역에 광범위하게 뿌리 내렸다.(315)
불교도 "개인의 신앙을 자신이 등록된 특정 사찰인 단나데라(檀那寺)가 증명해주는 데라우케(寺請) 제도"를 통해 호구등록 업무를 맡으면서 점차 지배구조 안으로 흡수되었고, 난학(蘭學, 란가쿠) 역시 도쿠가와 봉건체제에 균열을 내기보다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것"에 대한 학문적 열정을 기반으로 일본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323-4) 이처럼 외래 사상과 민간 신앙의 전체주의적 융합은 "봉건적 신분제와 법령이 가하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사회 내의 모든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일치하도록 만들었고, "각 집단은 더 큰 전체에 기여하는 일의 중요성을 이미 납득하고 있었다."(333)
"도시의 풍요로움과 농촌의 고난, 성공한 상인들의 안락과 궁핍한 사무라이들의 불안 사이의 극명한 대비를 지켜보며 무언가 균형이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356) 위기를 극복하고자 8대 쇼군 요시무네가 주도한 교호(享保) 개혁부터 간세이(寬政) 개혁, 덴포(天保) 개혁이 줄을 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각각의 개혁기는 문제 처리가 더 힘들어지고 선택의 여지가 더 줄어들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383) 18세기 말엽에 이르면, "막부는 자강自强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번을 보호해주기에는 너무 나약했고, 번이 스스로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허락해주기에는 너무 강한" 어정쩡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384)
훗카이도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과 조우하고, 격동하는 서구의 상황-프랑스 혁명의 불길-을 알게 된 막부는 정부 차원에서 "서양의 지식을 연구하던 전문가들을 기용했다."(397)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외국의 해안은 임의적인 입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1825년에 막부는 "서양인을 망설이지 말고 내쫓으라는 ‘외국선박 격퇴령’을 공포했다."(398-9) 그러나 곧 아편전쟁의 결과를 접한, 미즈노 다다쿠니는 "준비상태가 형편없는 시점에서 전쟁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선박 격퇴령을 철회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409) 마침내 1853년 흑선을 이끌고 온 페리가 "엄포를 놓는 개인 서신과 함께 백기白旗를 일본측 협상자들에게 보냈다."(414)
"서양 침입자들로부터 기인한 위기감은 곧 교토의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이는 영주와 번에 대한 개별적인 충성심을 능가하게 되었다." 최초의 막부 사절단이 조약 비준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 간 1860년, 미토 번의 사무라이들이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하고 "폭력으로 점철된 10년의 서막을 열었다."(443) 반反외세세력은 막부가 외세와 손을 잡으려 한다는 인식 아래, "토막(討幕, 도바쿠), 즉 “막부를 토벌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460) 여기에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1866년 조슈와 사쓰마가 동맹을 맺었고, 도사 번 사절단이 "쇼군에게 그 직위와 칭호를 단념할 것을 제안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 다이세이호칸) 건백서를 제출"한다.(464)
반외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가 "일본의 국체를 위태롭게 하고, 일본에 외국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국의 신성한 땅을 더럽히고 천황에 대한 무언의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외국인의 입국으로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나 요시다 쇼인같은 국수주의자들마저 서양을 무찌르기 위해서 "서양에서 배우고 그 힘의 비결을 알아내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했다.(474-5) 후쿠자와 유키치와 니시 아마네 같은 서양 체험자들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면서, '문명개화'를 향한 열의 앞에 "자신들이 거의 선지자적인 위치에 있음을 발견했다."(480-1)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일본의 열의가 결실을 맺은 또 하나의 이유는 "도쿠가와 시대의 독특한 토지소유 개념" 덕분이다. 도쿠가와 시대에 각 번을 관장하던 영주들은 "자신의 번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쇼군은 조정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임기가 끝날 때까지 행사하는, 영주들 중의 일인자에 불과했다. 정통성의 근원은 고립된 천황이었다."(503) 이처럼 천황을 전면에 내세운 메이지 유신은 "어린 지배자-고메이 천황의 후계자인 무쓰히토-를 위해 마련된 <5개조어서문>으로 막을 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천황은 1868년 4월 5일 공가公家와 다이묘들이 모인 앞에서 이 서문을 발포했다."(501)
<5개조어서문>은 "불명료한 용어를 사용해 상황변화에 따라 그 의미를 확장할 수 있게 작성"된 성공적인 국가문서의 한 예이다. "'상하'가 합심할 것이라는 말은 신분상의 구분이 계속될 것임을 뜻했다." 또한 "유교적 의미를 내포한 '천하의 공도'"가 '누습'이 폐지된 자리를 차지했다. 더욱이 "지식의 추구는 황국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는 목적에 부합하게 선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나마 "전세계에서 널리 지식을 구할 것이라는 약속에서만 변화를 지향하는 구체적인 표현이 발견된다." 도쿠가와 말기의 행동가들은 이 조항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치면서 서양식 근대화를 추진"하는 일본 정부의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개탄했다.(507)
1871년에 단행된 폐번치현廢蕃置縣으로 쓰시마의 다이묘들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천민은 평민(平民,헤이민)으로 신분이 승격되었고, 농민들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와 거주 이전의 자유가 부여되었다. 새로 공포된 "호적법戶籍法에 따라 가家가 새로운 행정구역의 기본단위가 되었고, 호주는 가족의 행위와 의무를 책임지게 되었다." 1873년 1월에 공포된 "징병령徵兵令은 현역 3년과 예비역 4년의 의무적인 복무를 요구했다." 지조개정(地租改正, 지소카이세이) 역시 사회의 격변을 가져왔는데, 이제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단일한 소유권을 인정받았고, 이전에 마을 단위로 부과되던 각종 세금은 토지소유자의 책임이 되었다."(545-6)
이처럼 "중앙에서 입안한 정책이 지방을 탈바꿈시키면서 사분오열의 위기에 빠진 것 같던 일본이 순식간에 중앙집권적 국가로 면모를 일신했다. "(522) 메이지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국가 대 국가로서 '근대적인 관계'를 맺자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막부에 이어) 다시 한번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를 시도"하였다. 이 제안이 거절당하자 신정부의 지도자들은 "응징 차원의 군사원정을 단행할 수 있는 빌미를 잡았다"고 말했다. 이와쿠라 사절단 멤버인 기도 다카요시 같은 이들은 "전쟁이 일본의 통합을 앞당기고 근대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540)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한 사무라이들은 정부의 대외 강경책을 자신들의 건재함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메이지 정부 지도자들의 명성은 유신 주체들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공헌을 보호하는 다수의 공인된 전기에 의해 유지되어왔다. 집단적으로 이런 기록은 교토를 중심으로 해서 국가의 통일과 구원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천황의 통치권 회복을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거의 악습을 철저히 일소했다는 이러한 ‘메이지 편향’ (Meiji Bias)은 메이지 유신을 "오랫동안 미루어졌던 도덕적 확실성으로의 회귀이자, 모든 진정한 일본인의 피할 수 없는 의무로 제시되어온 가치들을 고수하는 일과 동일시"하였으며, "막부의 노력을 경시하고, 역사가들로 하여금 1860년대에 일본을 분열시켰던 심각한 의견 차이와 당시의 폭력을 간과하도록 부추겼다."(4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