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일본을 찾아서 2 이산의 책 41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김우영.강인황.허형주.이정 옮김 / 이산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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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공포된 지조개정은 토지를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 고정자산으로 전환하여, 화폐경제를 촉진했다. "통화량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도시노동자와, 공채에 의존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던 사무라이의 실질소득을 감소"시켰고, "1879년부터 3년 동안 정부가 발행한 화폐량이 3분의 1이나 증가하고 엔으로 환산된 농산물 가격이 상승하자 3%의 토지세를 현금으로 내는 농민들은 이익을 남기게 되었다."(600) 그러자 1881년부터 대장경大藏卿으로 재직한 마쓰카타 마사요시(1835-1924)는 '마쓰카타 디플레이션' 정책을 시행하여,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야스다 같은 기업에게 독보적 입지를 마련해줌으로써 시장을 지배하는 독과점체제"를 형성했다.(604)


무력을 동원한 정권 타도의 기운이 거센 가운데, 이타가키 다이스케(1837-1919)는 “사이고는 무기를 들고 정부와 싸웠지만, 우리는 민권(民權, 민켄)을 가지고 싸울 것"(605)이라고 말하면서, 자유민권운동을 주창했다. 입헌정치에 대한 확신이 일본사회 전체로 급속히 퍼져나갔지만, "자유민권운동이 관성을 잃고 거의 멈춘 것은 메이지 헌법의 제정 때문이었다." 헌법 제정은 "권력집단에게는 천황을 정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었고, 도사나 사가 출신의 불만세력에게는 자신들이 상실한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는 방책이었으며, 농촌주민에게는 독단적인 관리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장치였고, 소작농에게는 농민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이었다."(621-2)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에 돌아와서 취한 모든 조치는 대중적 급진주의로부터 천황제 (그리고 권력구조에서 자신과 동료들이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 위치)를 보호하려는 확고한 의지의 표출이었다."(624) 이토는 화족제도를 신설하여, 인민이 공화제 정신을 습득할 계기를 차단하고자 했으며, "천황을 헤이안 시대의 산물인 태정관으로부터 분리"시켜, 천황이 통치와 관련된 공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626) 메이지 헌법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손자 진무(神武)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기원절인 1889년 2월 11일에 반포되어, "황실의 창설과 연속성을 엄숙하게 천명"하였다.(629)


국민의식을 함양하고 국가 일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1872년 징병제 도입을 주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의 몫이었다. 사무라이와 평민의 위계 의식을 무너뜨린 "징병 군대의 막사와 해군학교에서 끊임없이 상기된 주제는 천황에 대한 충성이었다. 제국의 육군과 해군은 천황의 군대였다."(633) 야마가타는 "일상생활에서 경찰의 통제력을 확대"하여 내부의 혼란이나 외부의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는 일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1887년 보안조례를 제정하여, 비밀 결사는 물론 "어떤 종류의 집회든 중지시킬 수 있었고, 내란음모나 치안방해가 의심되는 사람은 황거에서 반경 12km 밖으로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637)


초대 내각의 문부대신을 지낸 모리 아리노리(1847-1889)는 교육제도를 정비하였다. 그의 신념 아래 "초등교육은 중앙정부의 엄격한 통제 아래 천황의 위상을 강조했고, 고등교육은 좀 더 자유롭고 자율적인 분위기로 학생들의 학구열을 북돋우는 데 주력했다."(639) 유교적 가치관 교육에 반대하던 모리가 암살당하자, "모토다 나가자네와 그 일파는 메이지 이데올로기의 초석이 된 <교육칙어> 선포와 함께 자신들의 뜻을 이루었다." 이로써 <5개조어서문>의 열렬한 서구화로 시작된 메이지 유신은 "고대 일본에서 구현된 바 있는 국체의 정화가 앞으로의 행동과 신념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육칙어>의 일본 제일주의로 마감되었다.(650-1)


청일전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얻어낸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이 과거 서양열강에게 부여했던 특권을 고스란히 양도받는 계기가 되었고, "7년에 걸쳐 지급받게 된 2억 냥(약 3억 엔)의 배상금은 일본이 소모한 전쟁비용의 상당부분을 벌충했다."(680-1) "대중은 청일전쟁을 폭넓게 지지했으며, 지식인들은 일본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승리감에 도취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일전쟁을 “문명을 발전시키려는 국가와 문명의 발전을 저해하려는 국가 간의 전쟁”으로 보았고, 그리스도 교단의 지도자 우치무라 간조는 청일전쟁을 '의거'라고 규정했다."(681-2)


1904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은 엄청난 인명을 앗아갔지만, 전쟁의 참상을 각인시키기보다 "메이지 세대가 치른 희생을 상기하자는 결의"를 드높이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일본을 영도한 메이지 천황을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로 숭상"하는 존재로 재확인했다.(690) 그러나 "자신들의 피땀 흘린 노력이 당연히 보상을 받게 되리라 생각"하던 대중들은 포츠머스 조약에 전쟁배상금 조항이 없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렸다.(701) 메이지 지도자들은 서양열강에 비해 일본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사실을 절감했지만, 후임자들은 "과거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설교에 넌더리를 냈으며, 선배들의 지도편달에 얽매이지 않고 최전선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려고 분투했다."(703)


"1898년에 군부는 오쿠마-이타가키 내각의 육군대신 및 해군대신에게 천황의 특별조서를 내려, 자신들의 민간 정치인들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천명했다." 이와 더불어 군부는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공식화한 천황의 칙령을 받아냄으로써 내각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갖게 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린 사령관들은 새로 귀족작위를 받았고, 언론과 국민교육은 군인들의 용맹성과 헌신을 강조했다. 언론은 문민정치에 대한 불만을 부채질했다.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추문과 비리에 연루되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고, 국민의 눈에는 정치인의 부패가 직업군인들의 사심 없는 태도와 아주 대조적으로 보였다."(706-7)


"후임 총리를 추천하던 겐로들은 헌정이 만들어낸 다원적 제도를 수용함과 동시에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유권자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결코 마련하지 못했다."(772) 전간기의 일본 내각은 수시로 교체되었으며, 역대 총리의 사망률이 높았다. "하라는 워싱턴 회의에서 조인된 해군력 감축안을 밀어붙이다가 이에 반대하는 우파에게 희생되었고, 하마구치도 런던 해군군축회의에서 결정된 감축안에 대한 해군의 반발을 제어하려다 암살당했으며, 이누카이는 일본군의 상하이 사변을 저지했다가 중국에서 막 돌아온 청년 해군장교들에게 살해되었다. 군부의 특권에 민간 정치인이 개입하려 할 때마다 어김없이 폭력이 행사되었던 것이다."(773-4)


러일전쟁이 촉진하고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절정에 달한 급속한 산업화의 에너지는 일본 사회의 구석구석에 혼란을 불러왔다. "여성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현모양처’의 역할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은 공업구락부 회원들의 확고한 지배에 도전하기 시작했고, 소작쟁의는 농촌생활의 혼란을 알리는 신호였다. 교육의 확산은 외래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근대적 교통수단은 전근대적인 지역을 새로운 산업중심지 및 도시와 연결시켰다. 도시화는 새로운 대중문화를 만들어냈다."(867) 일본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변화되고, "더욱 국제주의적이고 코즈모폴리턴한 곳"으로 변해갔지만, 대공황은 일본 사회를 재차 불안정의 그늘로 몰아넣었다.


한편, "1911년에 청조가 무너지자, 만몽지역은 정치적 진공상태에 빠진 것으로 간주될 정도로 불안정했고 인구도 희박했으며 소련의 남침에 대한 방어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대륙진출을 노리던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만주에 대한 조차권을 넘겨받았고, 10년 뒤 21개조 요구안을 통해 조차권의 기한을 연장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871) "소련이 대륙에서 되살아나는 위험한 사태, 일본은 자원이 부족한 국가라는 사실, ‘가진 것’ 많은 강대국들과 경쟁해야 하는 일본의 불리한 처지, 페리의 흑선으로 시작된 서양의 침략사 등"을 강조한 군국주의 캠페인의 1차 기착지는 1932년 3월1일 ‘독립국’ 만주국 수립이었다.(883)


"일본이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은 국체명징운동에서 표출되고 육군의 파벌주의에서 내파된 강렬한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인식 아래 "좌파 급진주의자를 사회로 돌려보내는 전향(轉向, 덴코) 운동"이 벌어졌고, 이에 호응한 사회주의자들은 기꺼이 마르크스 이론과 내셔널리즘을 결합했다.(912) 그들은 "일본을 국제자본주의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땅’이라고 보"았고, 일본의 아시아 지배를 서양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과도기 사태로 간주했다. "팽창은 사실상 역사적 진보일 뿐 아니라 일본의 사명을 위해 불가결한 것"이라는 논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열도를 집어삼켰다.(914-5)


대륙침략을 절정으로 이끈 중일전쟁이 우세하게 전개되자 고노에 내각은 중국에 강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1937년 12월 난징의 함락으로 대표되는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장제스가 일본이 제시한 강화"에 응하지 않자, 그는 더 이상 난징 정부와 강화 협상에 임하지 않겠다는 아이테니세즈(중국을 상대하지 않겠다) 성명을 내놓는다.(929) 곧이어 고노에는 "1938년 11월 '동아신질서' 건설을 선언하고, 난징에 협력정부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 유명한 아이테니세즈 선언은 "자칭 평화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평화를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만나지 않겠다는 일본의 이중성을 잘 보여주면서, 실패한 정권의 기이한 전설로 남게 되었다."(930-1)


처절한 실패로 마감한 태평양 전쟁은 아시아에서 식민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서양 제국주의와 거기에 비해 전혀 나을 것이 없는 일본 제국주의를 차례로 경험한 민족들은 "모든 외부세력을 제거하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며, "한국과 타이완에서 일본이 추방된 것과 더불어, 이는 세계사의 전환점이 되었다."(984) 전후 일본은 이 사실을 위안거리로 삼으면서, 자신들의 전쟁을 궁색하게 변호했다. 천황 역시 종전 조서에서 "사상자들에 대한 애도의 뜻을 전하고, 동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협력해준 여러 아시아의 맹방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한편 "국체를 호지護持하게 되었다"는 말로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드러냈다.(977)


전후 일본 정계를 대표하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는 1946년부터 1953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근대 일본에서 가장 많은 내각을 이끈 정치지도자가 되었다."(997) 요시다는 미 군정이 가하는 제약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정한 독립을 유지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일본인이 호전적이거나 공격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평화적인 사람들이며, 군국주의 시대는 정상궤도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일본이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은 메이지 시대에 대영제국과 동맹을 맺은 것처럼 확실하게 미국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016)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일본 경제의 부흥에 방점을 둔 요시다는 "헌법 제9조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정치적 입장을 공공연히 표명"했고, 정식 군대를 창설하라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다. 대신에 그는 "경찰예비대를 창설하여 한국전쟁에 참전 중인 미군이 수행하던 안보상의 역할을 분담"했는데, 이 조직은 얼마 후 자위대로 전환한다. 요시다는 1951년 9월에 열린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인정했고, 태평양 제도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집단안보체제에 편입되었고, "미군은 일본이 “자위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일본에 남게 되었다."(1029-31) 마침내 일본은 "전쟁에 졌지만 평화를 얻고" 고도성장의 길에 오른다.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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