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의 로마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로버트 냅 지음, 김민수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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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지배 계층은 세 단계의 서열로 나뉘었다. 첫째는 사회, 경제적으로 가장 신분이 높은 원로원 계급이고, 둘째는 서열과 권력에서 원로원 계급에 뒤지는 대신 재산 축적에 몰두한 기사 계급이며, 셋째는 십인대十人隊 계급으로, 제국 전역에 걸쳐 마을과 도시의 관리를 책임졌다. 이들 아래에는 로마인의 99%를 차지하는 평민, 빈민, 노예 등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엄청난 부자를 호네스티오레스honestiores [더 고귀한 자]라 부르고, 나머지 자유민을 휴밀리오레스humiliores [덜 고귀한 자]"라고 불렀는데, 이는 로마인들 스스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사회경제적 단절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5)


중간계층에 속한 평민들은 "같은 계급의 사람은 대등하게 대하고,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용하며, 자신보다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에게는 복종"하는 것을 생존 전략으로 체득했다.(16-7) 로마인들은 사람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으며, 초자연적인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비결"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의 은혜를 입기 위해 지켜야 할 교리나 도덕률"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33) 로마의 법체계는 지배계층에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평민층은 법률 시스템에 적대적이었다."(56)


"폭력은 당시의 평민 남자들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이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언제라도 자신들의 분노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67) 평민 남자들은 "자신 (혹은 다른 누군가)의 노예를 때리고 강간했으며 정신적으로 학대했다. 또 자식 위에 철저하게 군림하여 마음대로 체벌을 가했다. 아내도 남편의 폭력 앞에서 달리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집 밖에서 개인 간에 분쟁이 벌어졌을 때는 대개 결투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모욕을 당했을 때는 결투와 같은 강력한 형태의 자기주장이 허용되었다."(63) 따라서 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종교 의식, 대중 오락, 사형 집행 등이 행해졌다.


평민 여자가 갖추어야 할 핵심 덕목은 "정절과 순결, 근면"이다. 여자는 "남자가 재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자식을 낳아 주는 존재"에 불과했고, 법적 지위가 없었다. "여자는 투표를 할 수 없었고, 모든 고등교육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89-90) 예외적으로 "세 명의 자녀(해방노예의 경우 네 명)를 둔 여자"는 법적으로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죽는 일이 흔했고 여자들은 법률적 권리에 무지했으며 남자들은 청원서를 엄격하게 처리했다."(94-5) 지배층의 여자들은 "동반자가 아닌 장신구"로 취급되었고, 평민층의 여자들은 "집안 살림을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혹은 가족들 끼니를 굶기지 않기 위해 일손을 보탰다."(147)


로마인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남녀 자유민"인 빈민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0) 노예와 자유민을 합친 빈민의 숫자는 약 65퍼센트에 달했다. 러시아의 농업경제학자 알렉산더 차야노프의 '고된 노동 이론theory of drudgery'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은 일을 더 해 본들 그에 따른 수고를 상쇄할 만한 이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다." 이처럼 "빈민층의 '게으름'은 자신의 가능성 없는 미래를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태도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170-1) 빈민층은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예속적 위치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간혹 "권력을 가진 자들의 불공정한 처사"에 불만을 표시하곤 했다.(181)


노예의 수는 비교적 적었고, 그마저도 도시의 부유한 거주 지역에 집중되었다. 노예의 주 공급원은 전쟁 포로, 노예의 자식, 버려진 아이들, 강도나 해적의 인신매매 등이었으며, "노예들은 대부분 신체적 조건과 문화적 배경이 비슷했고 주인과 같은 언어를 쓰는 경우가 흔했다." 피부색이나 외형으로 노예를 구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다른 시대와 달리 "고대 로마의 노예들에겐 이런저런 가능성들이 더 많이 열려 있었다."(198-9) 노예 반란은 로마 제정 이전에 막을 내렸는데, 전통적인 의미의 반란이 일어날 조건을 애초에 차단하고 노예들의 결속을 약화시킨 주요인은, "노예들 사이에서 질서 유지 책임을 맡은 또 다른 노예들"인 사일렌티아리silentiarii였다.(218)


해방노예는 "노예와 마찬가지로 '유한계급'인 귀족의 삶에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들은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 지배계층이 거느린 노예 가운데 가장 성공한 노예의 본보기였다. 해방노예는 도시의 가정과 시골의 농장에서 집안일과 공적인 업무를 책임졌고, 장사나 사업에서는 주인을 대신해 재정적인 일을 처리했다."(257) 해방노예의 의무로는 "후원자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관습적 불문율인 옵세퀴아obsequia와 오피시아officia, 그리고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이후 주인의 사업이나 다른 사무를 관리하는 방식을 구체적인 계약으로 정한 오페라에operae가 있었다.(267-8)


고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로마 병사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군대가 의식주를 해결해주었고, 일 년 내내 봉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군대에 지원하려는 사람은 늘 넘쳐났다."(295) 로마 공화정 초·중기에는 농부를 군인으로 활용하였다. "농부는 쟁기를 내려놓고 집과 가족을 떠나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거나 때로는 오랫동안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하고 돌아와 다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이후에는 장기간의 원정을 마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기 위해 장군 곁에 남는 농부들이 많아졌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의 내전들"을 거치면서 군대는 "공동체를 떠받치는 근간이 아니라 분열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 갔다."(320)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군대는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정기적인 대규모 징병으로 시민 가정이 해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 복무 기간을 20~25년으로 늘리면서 매년 로마 시민 가운데 뽑아야 할 신병이 7천 500명으로 줄었다. 신병의 충성심은 오로지 황제만을 향했다. 예상 가능한 진급의 유형을 정해 놓은 다음 그에 따른 보상 체계와 고정적인 봉급, 제대 보너스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특별 보상을 기대하는 병사들의 심리를 원천봉쇄했다." 군대는 지역사회와 격리되었고, "군인들은 종종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되어 수년간 복무했는가 하면,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322)


로마 시대 매춘은 "합법적인 행위였으며, 매춘부는 자신의 직업 때문에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352) 자유인 신분인 검투사의 삶은 위험천만했으나, "그런 위험은 검투사라는 직업의 매력과 명성, 부를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노예 신분의 검투사는 타의에 의해 검투사가 된 경우지만, 검투사 경력을 발판 삼아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었다."(423) 갈레노스는 "검투사들의 부상을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체해부학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기도 했다.(416) 준법 시민과 무법자의 경계에 걸쳐 있던 산적과 해적은 재산을 추구하는 '일종의 사업가'였으며, 자신들의 "은신처에서 평등주의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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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가난과 리더십
피터 브라운 지음, 서원모.이은혜 옮김 / 태학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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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도시 국가부터 후기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연안의 고전 문명은 "부유하고 권세 있는 시민들의 무제한적인 기부"를 공공 덕목으로 칭송하는 삶의 태도가 널리 퍼져있었다. "공적 희사를 통해 '선행을 하려는' 마음(euergesia), '선행을 베푼 자'(euergetes)가 되려는, 즉 공적 희사가가 되려는 열망, '명예를 사랑하는 자'(philotimos)가 되려는 열망, 즉 공적인 자선에 있어서 동료 중에서 탁월하고자 하는 열망"은 상류층과 도시 하층민 모두가 특별히 소중하게 여기는 행동이었다.(19-20) 이때 "일차적으로 시혜를 받는 자는 항상 도시이거나, 도시가 아니라면 시민 공동체, 즉 도시의 주민/민중(demos 또는 populous)이었으며, 가난한 자는 결코 아니었다."(22)


따라서 고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자선 행위는 "종종 고전적이고 이교적인 형태의 '시민' 공동체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의 시야를 활짝 열었기 때문이다."(24) 로마제국은 동방 지역의 꾸준한 인구 증가로 야기된 가난한 자들을 흡수할 수 없었는데, 이는 "도시와 시골 모두에게 부담을 주었다." 기존의 도시 및 시민 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을 '시민'으로 취급할 수도, 그렇다고 오래되어 융통성이 없는 '시민적 형태'의 공동체에서처럼 그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도교적 형태의 "가난한 자의 돌봄이 두드러지게 성장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상황과 정확히 일치되었다."(27-8)


바울은 '즐겨 내는 자'(고린도후서 9:7)라는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개념을 창안한다. "바울의 이념은 '균등하게 하는 것'(isotes) 즉 형제들 사이에 자원의 '균등화'였는데, 이는 가난한 교회의 필요를 덜어주기 위해 보다 풍족한 교회가 모은 헌금으로 얻어졌다."(45-6) 이 가난한 자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곤경에 처한 동료 신자가 아니라, "새롭고, 개념상으로(notional) '가난한 자'였다. 그들은 종교에 대한 전적인 헌신 때문에 자신의 생계를 위한 시간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자 중에서 덜 전문적인 평신도 계층(중간 계층)에 의해 제공된 부라는 평범한 나무와 울타리 작업에 의해 지탱되어야 했다."(53)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난해진 동료 신자, 즉 고아, 과부, 병자, 감옥에 갇힌 자, 난민과 극빈자"를 향한 그리스도교의 구제는 "철저하게 공동체 내부를 바라보는 활동이었다." 신자의 예물을 받은 주교(bishop)와 성직자들은 "생활비에서 남은 것을 다시 과부, 고아, 궁핍한 자에게 재분배해야 했다. 주교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재화에 대한 '청지기'(oikonomos)로 제시되었다."(56-7) 콘스탄티누스 이후로는 교회 소유물이 상당 부분 면세 혜택을 받게 되지만, 황제는 부유한 시민의 성직자 이동을 금지했다. 따라서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 "일정한 정도의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때로는 쓰라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106)


4세기 들어 주교가 빈곤에 처한 교인의 보호자로서 '가난한 자의 돌봄'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바로 주교 법정이었다(episcopalis audientia). 콘스탄티누스는 통치의 초창기에 신자가 주교 앞에 가져온 민사 소송의 최고의 중재자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승인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주장한 것은 소송 사건이 주교 앞에 회부되었다면, 주교에 의해서만 종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측의 어느 누구도 또 다른 중재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139) 이제 "빈곤한 자는 권력자에게 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처럼, 주교 법정을 활용하는 신자들은 정의와 보호가 필요한 때에 그에게 호소하고 의지하였다."(145)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은 주교가 공적인 특권에 대한 보답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공공 덕목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가난한 자'의 대변인, 황제와 지역 당국자를 향해 자신의 도시에서 다양한 취약 계층의 필요에 대한 넓은 의미의 대변인이었던 4-5세기의 주교는 이러한 '주인(지도자) 이미지'를 공적인 담론에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교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마치 사회가 원래 성서상의 근동 형태에 따라 부자와 가난한 자, 약자와 권력자로 나눠진 것처럼 말하는 단순한 과정을 통해서 비고전적인 모습의 사회를 장려했다."(161-2) 그러나 실상 후기 로마제국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넓은 중간 지대가 존재하는 훨씬 분화된 사회였다.


도시와 제국간에 형성됐던 '고전적' 형태의 지배 관계는 "각 도시의 지배 계급이 동료 시민의 유일한 '본래적인' 보호자라는 것을 전제했다." 그들은 "충분히 관료화되지 못한 중앙 정부를 백성들의 탄원 압력"으로부터 방어했고, 도시와 주변 지역의 후견을 독점하였다. 지방 유력자의 "철저한 지배, 즉 시민(demos)에 대한 공적 희사 행위로 표현되고 강화된 지배 방식은 제국 정부가 도시를 순찰하는 비용을 상당히 절약해주었다. 그것은 이상적으로는 '공생하는' 형태의 권력 제도였다. 지방의 지도층은 제국 정부와 이른바 '화기애애한'(cozy) 관계를 수립했다."(168-9) 이러한 공생 관계는 4-5세기 들어 쇠퇴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기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집단에서 장려된 "보다 솔직한 '수직적인' 형태의 사회" 체제였다. "의존과 자비에 대한 소망 사이의 극적인 긴장을 기록하는 그리스도교적 주인(master) 이미지"가 제국 체제를 '수직적' 경사가 높은 사회로 묘사할수록, 기울어진 비탈에 서 있다는 현실 인식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집단에서 "가난한 자와의 관계는 늘 압도적인 불균형에 대한 인식으로 가득 찼다. 그것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수직적' 관계를 표현했다. 모든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거지와 자선을 베푸는 자와의 관계와 같았다. 전자는 모두 후자의 자비에 완전히 의존한 존재였다."(170-1)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4세기와 6세기 사이에는 부자에 대한 가난한 자의 성경적인 주장이라는 관점에서 보호와 구호를 찾는 탄원의 언어가 발전되었다."(175)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을 입은 성육신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직접 응답한 "겸비(sunkatabasis)의 놀라운 행동"으로 묘사되었다. 그분이야말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신 극빈자였던 것이다.(185-6)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신의 결합은 우주의 궁극적인 결속에 대한 핵심적 진술"이자, "사회의 이상적인 결속에 대한 상징"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유대를 존중하도록 배워야 하며, 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몸을 '낮춰야' 했다."(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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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게르트 타이센 지음, 손성현 옮김 / 다산글방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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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돌아 보기 : 짤막하게 요약한 예수의 삶 (pp.805-810)


예수는 헤롯 1세의 통치(주전 37-4년) 말기에, 목재 및 석재 기술자인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의 아들로 나사렛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많은 형제 자매가 있었다. 예수는 유대교의 기초 교육 과정을 거쳤으며, 자기 민족의 종교적 전통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회당에서 가르치기도 했고 공생애 기간에는 "랍비"라고 불리기도 했다. 주후 1세기의 20년대에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가입했다. 요한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으며,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여 구원을 받으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세례는―성전 제의의 속죄 기능과 무관한―죄의 용서를 제공했다. 이것은 유대교의 핵심적 종교 기관에 대한 불신의 표시였다.


얼마 후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떨어져나와 독자적인 길을 갔다. 예수의 메시지는 요한의 메시지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시간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 강조했다. 어쩌면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심판이 곧바로 닥치지 않았던 상황을 그렇게 이용했을 수도 있다. 이 세상은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이었다. 예수의 근본 확신은 선을 향한 결정적인 전환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사탄은 패배했고 악의 세력은 근본적으로 극복되었다.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예수는 팔레스타인을 두루 돌아다녔다.


예수는 어부나 농부 같이 소박한 민중 가운데서 열두 제자를 모았다. 베드로는 그들의 대표격이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했으며, 예수는 머지않아 새롭게 건설될 이스라엘을 이들과 함께 "다스리려" 했다. 그가 구상했던 것은 일종의 "민중 대표 정치"(reprasentative Volksherrschaft)였다. 제자들 외에도 예수를 추종하는 이들이 또 있었다. 그 가운데는 여성들도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유대교 교사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예수의 가족은 한동안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훗날 예수가 죽은 뒤에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되었다.


예수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지체하지 않는 엄청난 윤리적 에너지(ethische Energie)였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구원은 심판의 "지옥불"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는 있다. 종교적 잣대에 의해 실패자로 낙인찍힌 이들에게도 기회가 부여되었다. 예수는 바로 그런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과의 친교를 추구했다. 예수는 경건한 이들보다 창녀들이 자신의 메시지에 대해 마음이 더 열려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회개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다. 세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한 의식이 없이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확실하다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었다.


예수의 말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비유, 즉 짧고 시적인 이야기다. 단순한 사람들도 이 비유를 잘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는 "귀족적인" 자의식을 강화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내던질 수 있어야 한다. 구원과 저주가 가까이 왔다. 이와 동시에 예수는 카리스마적 치유자로 활동했다. 사람들은 그의 치유 능력을 통해 이득을 보려고 그에게 몰려들었다. 예수는 이러한 치유를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인간의 믿음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의 표현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이 일으키는 이 세상의 엄청난 변화는 인간의 의지 또한 변화시킨다. 예수의 윤리적 교훈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을 위한 삶의 패턴이었다. 그는 유대 토라의 보편적인 측면들을 강화했으나,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 놓는 제의적인 측면들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윤리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더 급진화하여 적들과 이방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까지 사랑하라는 교훈으로 발전시켰다. 안식일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그는 예외 조항의 확대를 주장했다. 그것을 생명 구조를 위한 경우에 국한하지 말고 생명을 북돋워 주는 경우에까지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관심과 저항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예수는 바리새파와 가까웠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들과 토론을 벌였다. 바리새파와 예수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삶 전체를 관통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같았으나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치명적인 적대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수를 비극적 운명으로 몰고간 것은 성전에 대한 비판이었다. 예수는 상징적인 행위(이른바 성전정화 사건)을 통해 성전 제의를 혼란시키고, 성전과 관계되어 있는 귀족 세력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했다. 예수는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공동 식사의 자리에서 새로운 의식(성전의 제사 의식에 대한 대체물)을 제정했다.


귀족세력은 성전에 대한 비판 때문에 예수를 체포했으나 빌라도에게 고소할 때는 정치적인 죄목, 즉 예수가 왕을 사칭하여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이유를 달았다. 사실상 예수의 추종자들과 많은 백성들은 예수가 왕적인 메시아가 되어 이스라엘을 새로운 강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는 자신을 이러한 기대와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이 세상을 위한 대전환을 자신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정치적 반란 주모자로 판결을 받고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이 일은 주후 30년 4월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죽은 뒤 예수는 제일 먼저 베드로, 혹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 뒤로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타났다.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결정적으로 개입하실 것이라는 희망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새롭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메시아, 즉 고난받는 메시아였다. 예수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인간"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에 메시아적 존엄성을 부여했고, 자신이 가까운 미래에 이 "인간"의 역할을 맡아서 완수하게 될 것을 소망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가 다니엘 7장의 기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넘겨받은 "그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유대교의 한 형태, 즉 메시아적 유대교의 형태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주후 1세기, 그리스도교는 차츰 차츰 어머니 종교인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예수는 유대교에 속해 있다. 또한 예수는 그를 믿었던 유대인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터전이 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예수는 자신의 사후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두 종교에 속하게 된다. 유일한 한 분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살아가는 삶, 이 세상과 공동체를 위한 윤리적 책임―이것은 이 두 종교의 공통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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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발흥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탐색한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이현수 감수 / 좋은씨앗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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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개종의 역사에서, 흔히 통용되는 인상은 "기독교의 성장이 3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급격히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수 곡선이 보여주는 다소 이례적인 특성 때문에 '기적적으로 보이는' 성장기에 불과하다.(24) 우리가 기독교 개종 흐름을 통상적인 신흥종교의 성장 속도에 맞추어, "매 10년당 40퍼센트의 속도로 성장했다고 가정하면 100년도에는 7,530명의 기독교인이 존재했을 것이며 200년도에는 21만 7,795명의 기독교인이, 300년도에는 629만 9,832명의 기독교인이 있었을 것이다."(22-3) 따라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대대적이고 폭발적인 도약의 물결을 일으킨 원인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응으로 보는 게 바람직하다."(28) 기독교 성장률이 4세기부터 급격히 둔화된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제국에 더 이상 전도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아서"라는 추정이 가능하다.(32) 


아울러 "기독교로의 집단 개종이 군중이 자발적으로 전도자에게 반응하면서 일어났다는 주장은 개종 프로세스의 구심점이 교리의 흡입력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과학은 교리의 흡인력은 매우 부차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대다수의 사람이 새로운 신앙이 전하는 교리에 큰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은 개종한 이후라는 것이다."(34) 이는 기존 관계에 애착 정도가 낮은 사람들의 일탈 행위로 설명할 수 있다. 통일교 개종자의 사례를 살펴보면, "문선명 교인들이 전도하기 위해 접촉했던 사람들 가운데 입교한 사람은 '구성원에 대한 대인적 애착'이 '비구성원에 대한 애착'보다 컸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개종의 본질은 이데올로기의 추구나 포용이 아니었다. 개종의 본질은 한 사람의 종교적 행동을 친구나 가족 구성원의 종교적 행동과 일치하도록 조정하는 것이었다."(37) 


"새로운 신앙의 성공적인 창시자들은 전형적으로 그들과 이미 강력한 애착관계가 형성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통념과 어긋나는 개종의 또다른 측면은, 종교성이 낮은 집단에서 개종이 더 큰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이다. "현대 미국의 신종교(cult) 집단으로 개종한 사람의 다수는 그들의 부모가 종교적 소속이 없었다고 보고한다." 이것을 이론적 명제로 기술하면, "신흥종교 운동은 주로 종교적으로 소극적이며 불만이 있는 사람들과, 가장 순응화된(세속화된) 종교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로부터 주로 개종자를 모집한다."이다.(40-1) 개종 운동의 폭발적인 성장은 "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비례적으로 그 운동의 사회적 표면적이 늘어나기 때문"이며, "대부분의 신흥종교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는 이유는 재빨리 폐쇄적이거나 반半 폐쇄적인 네트워크로 변하기 때문이다."(43)


"초기 교회가 훌륭한 데이터가 존재하는 다른 모든 신종교 운동과 같았다면, 초기 교회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아니라 좀 더 기득권층에 기반을 둔 운동이었다."(60) 근대 과학의 성장과 더불어 기독교의 가르침에 문제 의식을 가진 이들이 교육 수준이 높은 자들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헬라와 로마의 과학과 철학이 부상하자 이교도의 가르침에 문제가 생겼고 이것 역시 교육받은 자들이 먼저 간파했다." 즉, "종교적 회의론은 기득권층에서 가장 만연한다." 이들은 "기성 브랜드의 신앙에 확신이 없음을 '무교'로 표현"하지만, "반反기성적 신비주의, 주술, 종교 교리를 믿는 것에 관심을 표할 가능성이 '가장 큰' 집단이기도 하다." 문화 혁신을 초기에 수용하는 이들은 "수입이나 학력 면에서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며, "신흥종교는 항상 ‘새로운 사상’을 의미"한다.(66-7)


기존 통설에 따르면, "유대인에 대한 선교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발흥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1세기부터 2세기 초반까지 교회 성장의 출발 기반을 제공한 것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으며, 이뿐 아니라 최소한 4세기까지 유대인이 계속 기독교 개종자의 중요한 원천이었으며, 유대계 기독교는 5세기까지도 여전히 비중 있는 존재였다."(81-2) 2차대전 이후 해방된 유대인 공동체가 주변부에 머물렀듯이, "사람들이 두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 모순이나 상호 압박이 생기고 타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각 집단에서의 지위가 낮아"지는 주변화 현상이 나타난다. 이때, "사람들은 주변적 위치를 탈피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시도"(86-7)하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명제는, 사람들이 "이미 익숙한 기성 종교(들)과 문화적 연속성을 보유한 새로운 종교를 더 수월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90)


"잠재적 개종자가 자신의 문화적 유산을 상당 부분 보전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일부 첨가하기만 해도 된다면 전환 비용은 최소화"된다.(90) "디아스포라 유대인 네트워크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을 수적으로 크게 압도"했으며, "도시에 주로 거주했고, 빈곤한 비주류 집단이 아니었다."(93-4) 또한, "헬라파 유대인 가운데 다수는 이미 민족적 의미에서는 유대인이 아니고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유대인인 상태였다." 헬라파 유대인은 헬라 문화를 포용했지만 "영적인 게토에 갇혀 '야만인'의 한 부류로 인식"되는 것에 모멸감을 느꼈으며, 따라서 "유대인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헬라 사회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어떤 절충과 통합이 시급히 요구"되었을 것이다.(94-5) 이들은 "비교적 현세적이고 절충적이며 세속적"(97)이었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가장 잘 된 집단이었다."(100)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기에 가공할 역병이 로마 제국 전역을 강타했다."(115) "고전 사회가 이런 재난에 의해 지축이 뒤흔들리고 희망을 잃는 일이 없었더라면 기독교가 지배적인 신앙으로 부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역병 초기부터 "기독교의 사랑과 선행의 가치관은 사회 봉사와 공동체 결속으로 현실화되었다. 재앙이 닥쳤을 때 기독교인은 더 훌륭하게 대처했고, 그 결과는 '월등히 높은 생존률'이었다." 기독교인의 월등한 생존율은 "기독교인이나 이교도 모두에게 “기적”으로 비쳐졌을 것이고, 이는 개종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보여준 우월한 생존률로 말미암아 이교도가 유실된 애착관계를 기독교인과의 새로운 애착관계로 대체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졌다."(117-9)


기독교 교리의 독특한 점은 "고도로 '사회적인' 윤리 강령을 종교와 결부"시켰다는 것이다. 이교도들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발상"을 낯설어했다. "실제로 하나님이 희생을 통해 그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했다. 아울러 이런 책임은 가족과 부족의 유대를 넘어 실상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 모든 자들"(고전 1:2)에게로 확장되어야 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생각이었다."(134-5) 결국, "기독교인은 죽음을 불사하는 역량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사망할 확률도 훨씬 적다는 걸 누구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는 대규모 개종으로 이어졌다.(141)


"그레코-로만 사회에서는 원치 않는 여아와 기형 남아를 유기하는 것은 합법적이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용인되었으며 사회 전 계층에 걸쳐 빈번하게 행해지던 일이었다."(151) 기독교는 "모든 형태의 영아 살해와 낙태를 금지함으로써 이교도 가운데 존재했던 성비 불균형의 주 원인을 제거"했으며, 이는 여성 사망률 감소와 더불어 기독교 공동체의 '여초女超 현상'을 초래했다.(154) "여성에 대한 보다 호의적인 시각은 기독교인이 이혼과 근친상간, 외도, 일부다처제를 죄악시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160) 아울러, "기독교인 여성은 비교적 상당히 늦은 나이에 초혼을 했으며 배우자 선택권도 훨씬 넓었다. 이교도 여성이 종종 사춘기 이전에 혼인과 동시에 성관계를 강요당했음을 볼 때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162)


"여성이 공급 부족인 세계에서 혼령기의 기독교 여성이 기독교 남성 수를 크게 초과했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딸을 불신자와 결혼시킬 때 신앙을 저버릴 염려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통혼은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개종 매커니즘에 관해 아는 바로는 이런 통혼은 2차 개종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높은 비율의 족외혼은 기독교가 폐쇄적인 신자 공동체로 전락하지 않고, '개방형 네트워크'로 활력을 유지한 비결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당대의 출산력이 대체수준(replacement levels, 총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출생률)을 하회하는 가운데, "기독교의 출산력은 이교도의 출산력을 크게 상회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 역시 그레코-로만 사회의 기독교화에 일조했다."(176-7)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서의 명령을 지켰던 기독교인들의 "출산율은 이교도보다 훨씬 높았으며 사망률은 훨씬 낮았다."(179)


'도시 규모'도 기독교화에 영향을 주었을까? 피셔에 따르면, "절대치의 인구가 많을수록 일탈적 하위문화 형성에 필요한 '임계치'를 모집하기가 더 쉽다."(203) 당대의 도시들은 좁은 면적과 높은 인구밀도를 보였으며, "무질서, 사회 해체, 불결함, 질병, 비참함, 공포, 문화적 혼돈"이 어우러진 장소였다.(224) 잦은 신착자 유입은 "사회 통합을 가로막고, 일탈과 무질서"를 초래했으며, 내부의 인종 분열이 사회통합을 저해했다.(237) 안정된 애착관계의 네트워크가 부실한 가운데, 도시인들은 위험과 절망, 증오가 만연한 일상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그들은 틀림없이 안식과 희망과 구원을 갈망"했을 것이다. "노숙자와 빈민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기독교는 구제뿐 아니라 희망도 제공했다." 기독교가 제공한 확장된 가족 공동체는 "도시의 삶을 더 잘 견뎌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문화였다."(241-2)


"(기독교를 탄압한) 유세비우스가 보기에도 순교자의 용맹과 절개는 기독교가 가진 미덕의 방증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교도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246) "간증은 사람들이 간증자의 주장을 믿는다고 해도 간증자에게 돌아갈 상대적 실익이 별로 없거나 손해 볼 일이 많을 때 그 설득력이 배가된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종교적 섬김에 대한 대가로 낮은 수준의 물질적 보상을 받을 때 그들의 신뢰도는 더 높아진다." 동일한 논리를 순교에 적용할 수 있다. "순교자는 가장 큰 신뢰를 받는 종교적 가치의 표방자다. 그리고 이 점은 순교에 자발적 측면이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배교를 선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고문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사람은 그 종교에 상상을 초월하는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며 또한 그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한다."(260)


에드몬슨은 "베드로가 (로마로) 되돌아가 기꺼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사람마다 아무리 요동하는 자라도 마음과 양심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찰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60년대의 순교자들은 대속의 증거인 예수의 고난에 자신들의 고난을 더함으로써, 재림 예언의 실패와 소수의 개종자라는 위기를 해소했다."(280-1)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을 보면, "순교에 직면할 정도의 역량은 집단적으로 생성된 헌신 가운데 특출난 경우에 해당되며, 지명도 있는 구성원들이 순교에 엄청난 지분 가치를 거는 결과를 초래했다. 순교는 공개적으로 행해졌을 뿐 아니라 종종 대규모 구경꾼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준비 기간 중에 순교의 문턱에 선 사람들은 열렬하고 직접적인 예찬의 대상이 되었다."(268-9) 순교는 대중들에게 기독교에 가입하는 행동을 '훌륭한 거래'로 인식시켜 주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교의 무기력과 이교 자체의 취약점으로 인해 기독교에 상당한 확장 기회가 열렸다."(303) 1세기 제국의 다원성은 '과잉' 수준이었다. "다양한 새로운 신들이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대거 유입되었으며 그 결과 E. R. 도즈의 말처럼,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대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295) 그러나 이교도의 신들은 기독교의 신과 여러모로 달랐다. 폼페이의 신성모독적인 그라피티가 시사하듯이 "고전 신화에는 신들이 종종 심심풀이로 인간에게 못된 짓을 하는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아더 다비 녹크는 이런 신들을 숭배하며 진실한 믿음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고찰했다."(298-9) 반면, 기독교의 신은 그리스 판테온의 신들처럼 변덕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선과 악의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된 초자연적인 상태를 관장하는 '합리적인 신성'이었다.


"고전시대 철학자들은 자비와 동정심을 병리학적인 감정으로, 그러니까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해야 할 성격상의 결함으로 간주했다. 자비란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 도움이나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므로 정의와 상반되었다. 그러므로 '자비는 실상 전혀 이성의 통치를 받지 않으며' 인간은 '자비라는 충동을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기독교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비가 주요한 미덕이며 자비로운 신이 인간에게도 자비로울 것을 요구한다고 가르쳤다."(317) 기독교는 '민족성(ethnicity)을 완전히 탈피한' 통일성 있는 문화를 제시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기독교인 가운데에는 민족성이 점차 희석되고, 새롭고 보다 보편적이며 실로 세계시민적인 규범과 관습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319) "기독교가 개종자에게 선사한 것"은 바로 그들의 '인간성'이었다.(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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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헬레니즘 3 -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연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42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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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형상 없이 영적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이성적인 활동으로 받아들인 그리스인들은 "유대인을 특수한 비非그리스인 (barbarisch) '철학자들'로 간주"했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여타 지역에서 그리스적 교육을 받은 자들이 이해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화시킨 사상"으로서, 이들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하늘이나 우주와 동일시하여 한편으로는―가령 헤카타이오스와 포세이도니오스, 바로(Varro)와 같이―철학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반면 유대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진리를 배타적으로 주장하고 종교제의적 율법 규정을 통해서 유대교 밖의 주변세계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유대교가 "진지한 고대 역사가들에게 심하게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대교는 "미신적이고 관용을 베풀지 않는, 참으로 '불경'한 종교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163)


기원전 3세기 "유대의 가장 강력한 평신도 가문인 토비아스 가문은 이미 기원전 3세기 중반에 그리스인들과 매우 밀접하게 접촉"하면서, "유대교의 하나님 신앙과 시온 산의 종교제의를 헬레니즘 환경에 혼합주의적으로 동화시켰다." 그러나 강력한 보수파인 대제사장 '의인 시몬'을 중심으로 하는 "오니아스 가문과 토비아스 가문 사이의 권력투쟁은, 기원전 175년 안티오코스 4세가 왕권을 승계한 이후 실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개혁시도의 역사적 배경이 된다." 토비아스 가문의 히르카노스는 암마니티스를 예루살렘과 경합하는 "반半독립적 통치 지구로 분리"시키고, "혼합주의적 색채를 갖는 유대인 성전을 건립한다." 안티오코스 4세가 자신의 지원을 대가로 성전 금고에 손을 대는 불경을 저지르자, 수세에 몰린 급진파들은 "유대교의 법을 완전히 폐지하라고 조언"하기에 이른다.(164-5)


급진파들은 "그리스적 '계몽'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하나님을 경배함에서 '미신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원초적이고 '이성적인' 형태를 회복하려 했을 것이다." 기원전 167년과 164년 사이에 절정에 달했던 대결은 율법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유대교의 배교자들은 바빌로니아로의 유배 이후 유대인들이 살아왔던 관습을 강압적으로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이 약화되고 마카베오 봉기가 성공을 거두자 "유대교는 예루살렘의 개혁이라는 절대절명의 위협을 물리치고, 기원전 142년 데메트리오스 2세의 칙령을 통해 국가의 독립을 얻는 데 성공했다." 유대 묵시사상의 창시자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한 역사란 '계약'에 근거"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고, 그 계약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율법'이었다. 그 결과 "유대교의 정신적 변화는 현저하게 토라에 집중되었다."(166-7)


"율법과 성전을 지배하려던 통치권력의 명백하고도 부당한 간섭에 대해 팔레스타인의 유대교가 가졌던 저 극도의 민감함이란 새롭게 각성된 '열성주의(Eifer)'의 열매였다."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휘감은 "이 '무정부적인 급진성'은 로마시대에 디아스포라로 확대되어 강력한 민족적, 종말론적인 미래 대망으로 표현되었고,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유대의 반란들과 기원후 66-70년, 116-117년, 132-135년에 일어난 유대인들의 처참한 재난의 주요 원인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168)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희망이 정치적으로 강하게 채색될수록, "기원전 63년에 다시 유대민족이 자유를 상실한 사건은 더욱 가혹하게 느껴졌다. 자유를 되찾으려는 그들의 계속된 노력은 이방인의 통치란 자신들이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게 하는 위협이라고 느끼게 했고 '마카베오의 기적'이 다시 찾아오게 될 것이라 믿게 했다."(172-3)


'토라를 고수'하려는 강력한 결의는 유대교 내에서 신학적 근거를 갖고 제의나 율법을 비평하려는 시도를 차단했다. 그것은 "율법을 수여 받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비평적인 성찰에 대해서도 관용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런 비평적 성찰은 "헬레니즘적 개혁 시도와 비슷하게, 이스라엘 최고의 신앙적 유산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아니 더 나아가서는 변절하여 이방세계로 돌아서는 것"으로까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유대교의 한가운데에서 형성된 초기 기독교 운동에 반응했던 유대교의 뿌리 깊은 비극이 여기에 존재한다. 나사렛 예수와 스테파노스, 바울은 자신들의 민족에 대해 좌절했다. 유대인들이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띤 그들의 율법에 대한 경건을 창조적이고 자기 비판적으로 변형하려는 운동들을 더 이상 수용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76-7)


"지혜신학에 이미 내포된 '자연에 대한 계시', 즉 자연질서 특히 천체의 목적성과 완전성에서 신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은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헬레니즘 환경의 '종교적 공통유산(Koine)'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 "사후의 삶에 주어지는 보응사상, 다가올 평화의 나라를 대망하는 사상, 그리고 하늘의 실체들과 구원자들, 천사들, 악령들과 죽은 자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상, 더 나아가 점성학과 예지, 마술의 중요성, 꿈, 환상, 하늘과 지하세계로의 여행, 황홀한 영감의 언어,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통하여 그에 대한 지식을 초자연적으로 얻는 방법 등"의 사상적 측면들을 고찰해봐도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헬레니즘적 동방세계의 혼합주의라는 바다에서 완전히 봉쇄된 섬"이 아니었다.(182)


비록 팔레스타인 내·외부의 유대교가 혼란스러울 정도의 다양성을 보였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중심은 토라"였다. 토라는 "헬레니즘과의 대결을 통하여 유대교의 중심점"이 되었고, 투쟁이 격렬할수록 "더욱더 계시의 유일한 독점적 매개체가 되었다." 디아스포라에서 그리스 교육을 받은 집단들에게조차도 "율법은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결속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자신의 윤리적인 유일신론을 통하여 헬레니즘적 제의들에 대한 우월감을 표현하기 때문이다."(183) 민족적 자기 보존을 위한 이 기본 욕구는 "보편적 선교 사명에 대한 의식"을 제약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예언적이고 종말론적인 소식과, 그것에 기초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선포의 혁명성"은 누구보다도 유대교의 자가당착성을 잘 알고 있던 '그리스어 사용 유대인들'을 파고들었다.(185)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 '토라 존재론'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역사 속에서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표현한 기독론이었는데, 이것은 더 이상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자체 내에서 일어난 종말론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이었으며, 종말이 임박했다는 신념에 근거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사적' 사명은 온 세상 민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민족적 자기 과업 설정으로 실현되었다."(186)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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