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와 헬레니즘 3 -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연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42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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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형상 없이 영적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이성적인 활동으로 받아들인 그리스인들은 "유대인을 특수한 비非그리스인 (barbarisch) '철학자들'로 간주"했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여타 지역에서 그리스적 교육을 받은 자들이 이해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화시킨 사상"으로서, 이들은 "유대인의 하나님을 하늘이나 우주와 동일시하여 한편으로는―가령 헤카타이오스와 포세이도니오스, 바로(Varro)와 같이―철학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반면 유대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진리를 배타적으로 주장하고 종교제의적 율법 규정을 통해서 유대교 밖의 주변세계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유대교가 "진지한 고대 역사가들에게 심하게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대교는 "미신적이고 관용을 베풀지 않는, 참으로 '불경'한 종교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163)


기원전 3세기 "유대의 가장 강력한 평신도 가문인 토비아스 가문은 이미 기원전 3세기 중반에 그리스인들과 매우 밀접하게 접촉"하면서, "유대교의 하나님 신앙과 시온 산의 종교제의를 헬레니즘 환경에 혼합주의적으로 동화시켰다." 그러나 강력한 보수파인 대제사장 '의인 시몬'을 중심으로 하는 "오니아스 가문과 토비아스 가문 사이의 권력투쟁은, 기원전 175년 안티오코스 4세가 왕권을 승계한 이후 실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개혁시도의 역사적 배경이 된다." 토비아스 가문의 히르카노스는 암마니티스를 예루살렘과 경합하는 "반半독립적 통치 지구로 분리"시키고, "혼합주의적 색채를 갖는 유대인 성전을 건립한다." 안티오코스 4세가 자신의 지원을 대가로 성전 금고에 손을 대는 불경을 저지르자, 수세에 몰린 급진파들은 "유대교의 법을 완전히 폐지하라고 조언"하기에 이른다.(164-5)


급진파들은 "그리스적 '계몽'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하나님을 경배함에서 '미신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원초적이고 '이성적인' 형태를 회복하려 했을 것이다." 기원전 167년과 164년 사이에 절정에 달했던 대결은 율법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유대교의 배교자들은 바빌로니아로의 유배 이후 유대인들이 살아왔던 관습을 강압적으로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제국이 약화되고 마카베오 봉기가 성공을 거두자 "유대교는 예루살렘의 개혁이라는 절대절명의 위협을 물리치고, 기원전 142년 데메트리오스 2세의 칙령을 통해 국가의 독립을 얻는 데 성공했다." 유대 묵시사상의 창시자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한 역사란 '계약'에 근거"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고, 그 계약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율법'이었다. 그 결과 "유대교의 정신적 변화는 현저하게 토라에 집중되었다."(166-7)


"율법과 성전을 지배하려던 통치권력의 명백하고도 부당한 간섭에 대해 팔레스타인의 유대교가 가졌던 저 극도의 민감함이란 새롭게 각성된 '열성주의(Eifer)'의 열매였다."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휘감은 "이 '무정부적인 급진성'은 로마시대에 디아스포라로 확대되어 강력한 민족적, 종말론적인 미래 대망으로 표현되었고,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유대의 반란들과 기원후 66-70년, 116-117년, 132-135년에 일어난 유대인들의 처참한 재난의 주요 원인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168)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희망이 정치적으로 강하게 채색될수록, "기원전 63년에 다시 유대민족이 자유를 상실한 사건은 더욱 가혹하게 느껴졌다. 자유를 되찾으려는 그들의 계속된 노력은 이방인의 통치란 자신들이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게 하는 위협이라고 느끼게 했고 '마카베오의 기적'이 다시 찾아오게 될 것이라 믿게 했다."(172-3)


'토라를 고수'하려는 강력한 결의는 유대교 내에서 신학적 근거를 갖고 제의나 율법을 비평하려는 시도를 차단했다. 그것은 "율법을 수여 받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비평적인 성찰에 대해서도 관용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런 비평적 성찰은 "헬레니즘적 개혁 시도와 비슷하게, 이스라엘 최고의 신앙적 유산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아니 더 나아가서는 변절하여 이방세계로 돌아서는 것"으로까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유대교의 한가운데에서 형성된 초기 기독교 운동에 반응했던 유대교의 뿌리 깊은 비극이 여기에 존재한다. 나사렛 예수와 스테파노스, 바울은 자신들의 민족에 대해 좌절했다. 유대인들이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띤 그들의 율법에 대한 경건을 창조적이고 자기 비판적으로 변형하려는 운동들을 더 이상 수용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76-7)


"지혜신학에 이미 내포된 '자연에 대한 계시', 즉 자연질서 특히 천체의 목적성과 완전성에서 신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은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헬레니즘 환경의 '종교적 공통유산(Koine)'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 "사후의 삶에 주어지는 보응사상, 다가올 평화의 나라를 대망하는 사상, 그리고 하늘의 실체들과 구원자들, 천사들, 악령들과 죽은 자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상, 더 나아가 점성학과 예지, 마술의 중요성, 꿈, 환상, 하늘과 지하세계로의 여행, 황홀한 영감의 언어, 혹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통하여 그에 대한 지식을 초자연적으로 얻는 방법 등"의 사상적 측면들을 고찰해봐도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헬레니즘적 동방세계의 혼합주의라는 바다에서 완전히 봉쇄된 섬"이 아니었다.(182)


비록 팔레스타인 내·외부의 유대교가 혼란스러울 정도의 다양성을 보였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중심은 토라"였다. 토라는 "헬레니즘과의 대결을 통하여 유대교의 중심점"이 되었고, 투쟁이 격렬할수록 "더욱더 계시의 유일한 독점적 매개체가 되었다." 디아스포라에서 그리스 교육을 받은 집단들에게조차도 "율법은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결속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자신의 윤리적인 유일신론을 통하여 헬레니즘적 제의들에 대한 우월감을 표현하기 때문이다."(183) 민족적 자기 보존을 위한 이 기본 욕구는 "보편적 선교 사명에 대한 의식"을 제약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예언적이고 종말론적인 소식과, 그것에 기초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선포의 혁명성"은 누구보다도 유대교의 자가당착성을 잘 알고 있던 '그리스어 사용 유대인들'을 파고들었다.(185)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 '토라 존재론'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역사 속에서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표현한 기독론이었는데, 이것은 더 이상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자체 내에서 일어난 종말론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이었으며, 종말이 임박했다는 신념에 근거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사적' 사명은 온 세상 민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민족적 자기 과업 설정으로 실현되었다."(186)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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