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게르트 타이센 지음, 손성현 옮김 / 다산글방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 되돌아 보기 : 짤막하게 요약한 예수의 삶 (pp.805-810)


예수는 헤롯 1세의 통치(주전 37-4년) 말기에, 목재 및 석재 기술자인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의 아들로 나사렛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많은 형제 자매가 있었다. 예수는 유대교의 기초 교육 과정을 거쳤으며, 자기 민족의 종교적 전통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회당에서 가르치기도 했고 공생애 기간에는 "랍비"라고 불리기도 했다. 주후 1세기의 20년대에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가입했다. 요한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으며,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여 구원을 받으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세례는―성전 제의의 속죄 기능과 무관한―죄의 용서를 제공했다. 이것은 유대교의 핵심적 종교 기관에 대한 불신의 표시였다.


얼마 후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떨어져나와 독자적인 길을 갔다. 예수의 메시지는 요한의 메시지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시간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 강조했다. 어쩌면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심판이 곧바로 닥치지 않았던 상황을 그렇게 이용했을 수도 있다. 이 세상은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의 표징이었다. 예수의 근본 확신은 선을 향한 결정적인 전환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사탄은 패배했고 악의 세력은 근본적으로 극복되었다.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예수는 팔레스타인을 두루 돌아다녔다.


예수는 어부나 농부 같이 소박한 민중 가운데서 열두 제자를 모았다. 베드로는 그들의 대표격이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했으며, 예수는 머지않아 새롭게 건설될 이스라엘을 이들과 함께 "다스리려" 했다. 그가 구상했던 것은 일종의 "민중 대표 정치"(reprasentative Volksherrschaft)였다. 제자들 외에도 예수를 추종하는 이들이 또 있었다. 그 가운데는 여성들도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유대교 교사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예수의 가족은 한동안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훗날 예수가 죽은 뒤에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되었다.


예수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지체하지 않는 엄청난 윤리적 에너지(ethische Energie)였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구원은 심판의 "지옥불"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는 있다. 종교적 잣대에 의해 실패자로 낙인찍힌 이들에게도 기회가 부여되었다. 예수는 바로 그런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과의 친교를 추구했다. 예수는 경건한 이들보다 창녀들이 자신의 메시지에 대해 마음이 더 열려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회개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다. 세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한 의식이 없이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확실하다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었다.


예수의 말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비유, 즉 짧고 시적인 이야기다. 단순한 사람들도 이 비유를 잘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는 "귀족적인" 자의식을 강화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내던질 수 있어야 한다. 구원과 저주가 가까이 왔다. 이와 동시에 예수는 카리스마적 치유자로 활동했다. 사람들은 그의 치유 능력을 통해 이득을 보려고 그에게 몰려들었다. 예수는 이러한 치유를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인간의 믿음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의 표현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이 일으키는 이 세상의 엄청난 변화는 인간의 의지 또한 변화시킨다. 예수의 윤리적 교훈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을 위한 삶의 패턴이었다. 그는 유대 토라의 보편적인 측면들을 강화했으나,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 놓는 제의적인 측면들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윤리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더 급진화하여 적들과 이방 사람들과 종교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까지 사랑하라는 교훈으로 발전시켰다. 안식일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그는 예외 조항의 확대를 주장했다. 그것을 생명 구조를 위한 경우에 국한하지 말고 생명을 북돋워 주는 경우에까지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관심과 저항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예수는 바리새파와 가까웠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들과 토론을 벌였다. 바리새파와 예수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삶 전체를 관통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같았으나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치명적인 적대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수를 비극적 운명으로 몰고간 것은 성전에 대한 비판이었다. 예수는 상징적인 행위(이른바 성전정화 사건)을 통해 성전 제의를 혼란시키고, 성전과 관계되어 있는 귀족 세력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했다. 예수는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공동 식사의 자리에서 새로운 의식(성전의 제사 의식에 대한 대체물)을 제정했다.


귀족세력은 성전에 대한 비판 때문에 예수를 체포했으나 빌라도에게 고소할 때는 정치적인 죄목, 즉 예수가 왕을 사칭하여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이유를 달았다. 사실상 예수의 추종자들과 많은 백성들은 예수가 왕적인 메시아가 되어 이스라엘을 새로운 강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는 자신을 이러한 기대와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이 세상을 위한 대전환을 자신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정치적 반란 주모자로 판결을 받고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이 일은 주후 30년 4월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죽은 뒤 예수는 제일 먼저 베드로, 혹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 뒤로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타났다. 제자들은 예수가 살아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결정적으로 개입하실 것이라는 희망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새롭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메시아, 즉 고난받는 메시아였다. 예수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인간"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에 메시아적 존엄성을 부여했고, 자신이 가까운 미래에 이 "인간"의 역할을 맡아서 완수하게 될 것을 소망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가 다니엘 7장의 기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넘겨받은 "그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유대교의 한 형태, 즉 메시아적 유대교의 형태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주후 1세기, 그리스도교는 차츰 차츰 어머니 종교인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예수는 유대교에 속해 있다. 또한 예수는 그를 믿었던 유대인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터전이 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예수는 자신의 사후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 두 종교에 속하게 된다. 유일한 한 분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살아가는 삶, 이 세상과 공동체를 위한 윤리적 책임―이것은 이 두 종교의 공통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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